불확실성의 경계
“씨발….”
내가 결국 ‘그 오메가’에게 발정하게 될 거라는 차서준의 예언은 지랄 맞을 정도로 들어맞았다. 당장 차서준이 죽는 날까지 두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그 오메가’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나는 끔찍하게 짜 맞춰진 절망을 맛보는 듯했다.
“그쪽, 극우성인가?”
비쩍 마른 손목을 움켜잡아 잡아당기며 나는 으르렁댔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순간은 코를 찌르는 달큰한 향내와 이름 모를 꽃내음으로 가득한 페로몬에 섞인 채 내 두 발목을 현실 앞으로 붙들어두었다.
“대답해, 당신 극우성 오메가야?”
나는 재차 물으며 앞에 선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엔 당황한 낯빛이 깃들어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습관인 듯 잘근 깨물고 있는 붉은 입술만이 그 온기를 죄다 독차지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내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팔을 비틀어댈 뿐이었다. 수차례의 시도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내게 남자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아니라고 했잖아요.”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두어 번 눈을 깜박였고, 그 사이로 내비치는 동그란 눈동자가 나를 경계하듯 주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옅은 숨결 사이로 다시금 페로몬이 훅 끼쳤다. 이성을 잃을 만큼 유혹적인 체취에 나는 그의 손목을 확 놓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내가 빈틈을 보인 사이에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한 오메가를 부축하며 도망쳤다.
비틀거리며 택시 안으로 몸을 숨기는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는 코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손바닥에 코를 묻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손안에 진하게 남은 페로몬은 향기롭다 못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얕은 쌍꺼풀이 져 눈꼬리가 살포시 올라간 눈매, 수려하게 뻗은 콧대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고운 선의 온기를 담은 입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쏟아지는 달큰한 체리 향과 석류가 섞인 진한 꽃내음의 페로몬, 그리고 파도치듯 넘실대는 고혹적인 분위기.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도 나는 이미 저 오메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모란의 잘나가는 오메가, 차서준이 수천 번 내게 ‘운명의 짝’을 운운하며 언급했던 극우성 오메가.
그 ‘도해영’을 두 눈으로 발견한 순간이었다.
***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오늘이었을까.
거칠게 리무진 문짝을 닫으며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여전히 숨을 내쉴 때마다 남자의 체취가 코끝에 맡아지는 것 같았다. 어질하게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으며 차가운 생수를 들이켰다.
처음에는 바람에 따라 살랑이는 짙은 꽃내음에 원초적인 감각이 끌렸다. 그간 미미하게 느껴졌던 오메가들의 향기와는 다르게 몇 블록 너머에서도 존재감을 우월하게 드러내는 페로몬은 흥미가 돋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 발길을 돌린 건 다른 문제였다. 역겨운 체취를 흩날리는 알파 무리는 당장이라도 길거리에서 그 오메가를 겁탈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은 질주하는 두 다리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발밑에는 고꾸라진 조악한 열성 알파 새끼들이 있었고 내 눈앞에는 ‘그 오메가’가 서 있었다.
손목을 붙잡은 건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차서준이 말했던 ‘그’ 극우성 오메가일 확률은 희박할 테니까.
하지만 본능은 나를 부추겨댔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오메가가 도해영이 맞다고, 달큰하고 쌉싸름한 석류 내음을 내뿜는 이 페로몬은 분명 극우성 오메가의 것이라고.
그저 아까의 상황을 상기했을 뿐인데 묵직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뜨겁게 달아오른 모든 신경의 말단 부위가 심장이 뛰듯 박동하는 것만 같았다.
고작 손에 남은 희미한 체취에도 발정을 하는 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빳빳해진 앞섶이 불편해질 정도로 발기한 것을 노려보며 나는 빈 생수통을 가뿐히 두 쪽으로 찢어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이사님.”
윤 비서는 룸미러를 통해 내 기색을 살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운전석과 뒷좌석을 가르는 파티션을 올렸다. 내겐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다.
오윤주가 미팅을 빌미로 불러내지 않았더라면 살면서 절대 갈 일조차 없는 지역이었다. 하필이면 미팅이 있던 그 지역에서 도해영을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열등한 알파 무리 사이에서 곤욕을 겪는 도해영을 말이다. 운명치고도 잔인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첫 만남이었다.
‘내가 요즘 가는 업소에 말이야. 그 희귀하다는 극우성 오메가 한 마리가 숨어 있는 것 같더라?’
머릿속에 차서준의 목소리가 웅웅대며 울렸다. 한시도 즐겁지 않은 차서준과의 기억을 굳이 회상할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도 내 의지와는 다르게 머릿속에는 차서준과의 기억들이 하나둘 펼쳐지기 시작했다.
기억 속 차서준은 늘 새벽을 훌쩍 넘겨서야 온전치 못한 행색으로 귀가했다. 열어놓은 테라스 창틀을 넘어 흘러들어오는 새벽의 가라앉은 공기에 차츰 술과 담배 냄새, 그리고 분 냄새가 스며들기 시작하면 그건 차서준이 귀가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동생아, 자냐?”
그러곤 차서준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내 방문부터 두들겨댔었다. 얌전히 제 방에 들어가는 날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차서준은 매번 나를 찾아와 쓸데없는 말을 줄줄 늘어놓는 식이었다.
막무가내로 문을 벌컥 열고 방에 들어온 차서준은 숙취가 올라오는지 문가에 머리를 기댄 채로 낄낄대며 웃었다.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내게 차서준은 입맛을 다시며 운을 띄웠다.
“오늘도 있더라, 그 오메가?”
“…….”
“들리는 소문으로는 혼이 나갈 정도로 잘 빨아 준다던데, 오늘도 예약이 꽉 찼는지 옷도 안 걸치고 정액 범벅인 알몸으로 활보를 하더라. 그 덕에 좋은 구경―”
“입 닥쳐, 제발.”
나는 거칠게 쏘아붙이며 차서준의 말을 끊었다. 차서준은 늘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지독히도 즐겼다. 매일 밤 모란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내게 떠벌리는 것도 차서준이 즐기는 행위 중 하나였다.
차서준은 아예 내 방에 자리를 잡을 생각인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곤 구전설화를 들려주는 사람처럼 목소리의 높낮이를 드라마틱하게 조절하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무리 봐도 열성도 아니고 우성도 아냐. 너보단 못하지만 나도 특출난 우성 알파라고. 내 본능이 그 예쁘장한 새끼가 극우성이라고 외치고 있다니까?”
“입 닥치고 내 방에서 나가.”
“그 대단하다는 극우성 알파 차도헌이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아?”
그 순간 차서준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발견한 사람처럼 두 눈을 빛냈다. 그 지긋지긋한 얼굴을 바라보자니 턱밑까지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당장 몸을 일으켜 차서준의 멱살을 틀어쥐고 허공 위로 들어 올렸다. 숨이 막힐 텐데도 차서준은 버둥대지 않고 낄낄대며 웃어댔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너는 절대 날 죽이지 못한다는 듯.
나와 닮은 얼굴을 악마처럼 일그러뜨리며 차서준은 잔뜩 흥에 겨운 목소리를 냈다.
“웃긴 얘기 하나 해 줄까?”
“필요 없어.”
“발정 난 극우성들끼리는 체취를 맡는 것만으로도 각인을 한다더라? 자연이 만든 시스템치고는 참 훌륭해. 워낙 희귀해서 개체 수도 적은데, 아무리 짝짓는 게 급해도 길에서 만나자마자 다리를 벌릴 수도 없고.”
나는 차서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제발 저 입을 닥쳐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차서준은 멱살을 틀어쥔 내 손목을 강하게 쥐어 잡고는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재미없나? 그럼 다음 얘기. 차 그룹은 네가 이어받게 될 거다.”
그때만 해도 나는 차서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힘센 새끼를 좋아하거든. 베타보다는 열성, 열성보다는 우성, 우성보다는 극우성. 당연한 소리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상속까지 얼마 안 걸리니까 잘 준비해 둬, 미래의 대표이사님.”
“…….”
“우리 아버지도 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말이야…. 괜한 데 힘 빼지 마시고 진작 너를 윗자리에 올리면 좀 좋아?”
나는 차서준이 허튼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도 아주 단단히 취했다고, 요즈음 상속 절차를 준비하는 큰형의 모습이 거슬려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주 뒤, 임명식을 하루 앞두고 차서준은 큰형 차정우를 죽였다. 자신이 차정우를 죽인 것을 우연히 목격한 오윤주의 아버지까지 죽인 후, 차서준은 내 방에서 자살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결국 모든 게 차서준이 말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상속 순위에서 아예 벗어났던 내가 결국 아버지의 총애 아래 대표이사직을 맡게 된 것도, 몇 달 뒤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가 의식 불명인 채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도, 차서준의 입으로 지겹도록 들었던 그 오메가를 맞닥뜨린 것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변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까 마주친 오메가가 도해영이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곧바로 파티션을 내려 윤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예전에 차서준이 다녔던 그 업소, 조사 좀 해주시죠.”
“네, 이사님. 바로 정리해서 서류 올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는 단 하나였다. 곧 넘겨받을 자료 속 도해영의 얼굴과 내가 마주했던 그 오메가의 얼굴이 판이하게 다를 것. 형질도, 체형도, 페로몬도, 그 무엇 하나 비슷하지 않을 것.
“…이거, 정말 확실합니까?”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윤 비서가 건넨 자료를 펼치자마자 나는 허탈감을 맛봐야 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와 얕은 쌍꺼풀이 져 눈꼬리가 살포시 올라간 눈매, 수려하게 뻗은 콧대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고운 선의 온기를 담은 입술까지.
도해영이라는 이름 옆에 인쇄된 사진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내가 만났던 그 오메가였다. 자료에 적힌 도해영의 형질이 ‘열성’이라고 체크된 것, 그것만이 유일한 오차였다.
‘발정 난 극우성들끼리는 체취를 맡는 것만으로도 각인을 한다더라?’
기억 속 차서준의 악마 같은 속삭임은 내 분노를 더 부추길 뿐이었다. 한낱 사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믿을 만큼 나는 순진하지도 않았고 정보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자꾸 생각날 만큼 도해영과의 만남 이후 내 몸은 급격히 변화의 노선을 타기 시작했다.
묵직한 열기가 휘몰아쳐대느라 평상시보다 체온이 높아진 것과 불에 타듯 뜨겁게 달아오른 모든 신경의 말단 부위가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는 것.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짐승처럼 부푼 앞섶이 사그라들 틈도 보이지 않는 것.
내게는 도해영의 소재와 그에 관한 모든 정보가 있었다. 도해영이 높은 확률로 열성의 탈을 쓴 극우성 오메가일 가능성까지 짚어낼 정도로 나는 도해영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아는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내가 정말 도해영에게 ‘각인’을 했는가에 대한 진실의 여부였다.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번 더 도해영과 마주하는 방법뿐이었다.
사내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고도 남을 늦은 시간에 나는 차를 몰아 모란으로 향했다. 사회의 기준과는 반대로 돌아가는 사창가에서는 아마 지금에야 막 오픈을 준비하는 시간일 듯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좁은 골목을 뒤적이며 향한 끝에 겨우 사창가의 초입에 들어설 수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는 전구 간판과 적나라한 홍보 문구를 적어놓은 현수막을 지나치며 다다른 목적지에는 검은 간판에 붉은 글씨로 한자가 새겨진, 아마도 이 골목에서 가장 단정한 건물일 모란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코 밑으로 타인의 끈적한 체취가 밀려들었다. 코를 찌르는 분 냄새와 우글대는 열성 오메가들의 체취로 가득 찬 사창가 골목 한가운데에서 나는 인상을 잔뜩 쓴 채 모란을 노려보았다.
새벽의 가라앉은 공기에 섞인 술과 담배 냄새, 그리고 분 냄새는 차서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날에도 언제나처럼 풍겨댔던 끔찍한 악취였다. 오래 있고 싶지 않은 만큼 빨리 일을 처리하고 떠나고 싶었다. 걸음을 내딛는 발에 힘을 주어 목적지인 모란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채 대문을 열어젖히기도 전에, 역겨운 사창가의 악취 사이로 도해영의 페로몬이 살랑대며 날숨 사이로 섞여들었다.
온갖 곳에서 퍼져 나오는 노골적인 페로몬과 역겨운 향락의 기운이 축축하게 녹아든 불쾌한 공기 속에서도 도해영의 페로몬은 넘실대며 자신의 특별한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좇았다. 그리곤 저 멀리 걸어가는 도해영을 발견했다.
이성보다도 먼저 행동이 앞서나갔다. 당장 도해영의 뒤를 쫓아 그 얄팍한 손목을 억세게 붙잡았다. 그 바람에 도해영은 마치 종잇장처럼 팔랑이며 내 쪽으로 질질 끌려왔다.
뒤를 돈 도해영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누구는 며칠 동안 돌아버릴 지경이었는데, 태연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저 새침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출처를 알 수 없는 억울함이 울컥 끓었다.
“너, 여기서 일해?”
이미 알고 있지만 정보는 정확할수록 좋은 법이다. 나는 커다랗게 한자가 적힌 간판을 흘긋 노려보곤 도해영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 예쁘장한 얼굴이 다신 없을 정도로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도해영은 내 손에 붙잡힌 팔을 내치며 화가 뻗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 뒤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마저 배어 있었다. 나조차도 내가 하는 짓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너라고 내가 이해가 될까, 나도 도해영의 헛웃음만큼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도해영은 화가 났는데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방금까지도 도해영의 손목을 붙잡았던 손은 접촉이 끊어지자마자 또 다른 갈망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이듯 풍기는 꽃내음이 살랑대며 다가와 숨결을 적신다. 그렇게 살며시 다가온 페로몬은 호흡을 들이쉬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내 몸속을 가득 채울 만큼 물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폐부에 꽉 들어차는 향기롭고 중독적인 페로몬에 갈수록 갈증이 일었다. 똬리를 틀고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던 축축하고 거대한 소유욕은 서서히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내 상태가 어떤지 알 리가 없는 도해영은 얼음처럼 굳어버린 내 앞에서 업소에서 통용되는 매뉴얼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탑급은 예약해야 되고 나머지는 현장 초이스도 돼요.”
아까까지도 나를 괴롭혔던 악취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도해영의 체취는 내게 유일하게 숨 쉴 틈을 내어주었고, 내 세계에는 오직 도해영의 페로몬만이 존재했다.
이제는 인지의 영역이 아닌 본능의 단계에서, 나는 도해영의 페로몬을 음미해대고 있었다.
“근데 나도 탑급이라 예약해야 되는데. 그래도 당장 하고 싶으면 돈 더 내요. 그럼 마담이 받아줄걸?”
“…….”
푹 익은 체리가 내는 달큰하고 새콤한 향내에 정신은 갈수록 혼미해졌다. 입 안 가득 오메가를 각인시킬 수 있는 알파의 독액이 울컥 고였고, 물밀듯이 내 안을 가득 채우는 페로몬에 본능은 끝도 모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성보다 본능이 한참 앞서는 와중에 눈앞 가득 선명히 환상이 그려졌다. 도해영의 깡마른 허리를 바투 끌어안고 깊게 입을 맞추다 이내 목덜미에 이를 움푹 박아 넣는, 지독하리만치 본능에 잠식당한 알파. 그 환상 속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차도헌이었다.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충동이 당장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나는 다급히 말을 뱉어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지?”
“뭐라고요?”
도해영은 성질을 내며 반문했고, 나는 그런 도해영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며칠간 줄곧 이어진 원치 않는 발정과 단 한순간도 제어되지 않았던 페로몬 반응. 미친 것처럼 날뛰던 온몸의 감각과 결코 통제되지 못하는 비이성적인 갈망과 갈증.
그 이유는 전부 내 눈앞에 서 있는 도해영에게 있었다.
“내가 일하는 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도해영은 그간 내 앞에서 보여줬던 표정은 정말 가식이었다는 것마냥 아주 제대로 인상을 구긴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도해영의 반응은 내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튕겨져 나갔다. 당장 나는 그런 멸시의 눈길보다도 더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만큼 중대한 길목 앞에 서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상황은 죄다 한곳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어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절망적인 사실은 명백하고도 확실한 현상 앞에서 결국 백기를 내걸었고, 나는 맹렬히 나를 노려보는 도해영의 눈을 마주 보며 짤막한 한마디를 뱉었다.
“상관있어.”
내가 도해영, 너에게 각인했으니까.
***
“이게 가능한 겁니까?”
믿기지 않을 만큼 찰나의 순간에, 오직 페로몬을 맡는 것만으로도 오메가에게 일방 각인해버린 바보 같은 알파가 여기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빼도 박도 못하게 도해영의 페로몬에만 갈증이 이는 눈먼 알파가 되어버린 것이다.
윤 비서는 내 팔뚝에 억제제 주사를 놓아주며 미처 웃음소리를 참지 못했다. 그 반응에 인상을 팍 구기자 윤 비서는 그제야 얼굴 매무새를 정돈하며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윤 비서의 입꼬리는 여전히 웃음기를 털어내지 못하고 쉴 새 없이 경련해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내 눈앞에서 끝없이 경련하는 입꼬리를 노려보자 윤 비서는 억제제를 가득 채워 넣은 주삿바늘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드디어 이사님께서 짝을 찾으셨나 봅니다.”
늘 내 앞에서 중도의 감정을 지키던 윤 비서가 이렇게 대놓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도 나로서는 낯선 일이었는데, 윤 비서의 목소리 안에 새겨진 안도감과 기쁨은 내겐 너무나도 낯선 것들이라 나는 다시금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아무래도 오윤주 부사장님과는 파혼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멀쩡히 잘 진행되고 있는 사업 계약을 파기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을 테니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받아치는 나만큼 윤 비서도 내게 득달같이 말을 이었다.
“도해영 님은 이제 대표이사님께 생명줄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이 인연을 놓치지 않는 편이 이사님께도 좋다고 생각 드는 바입니다만.”
“…….”
“그런데 이사님께서는 그 생명줄 같은 분에게 계약서부터 들이밀 작정이신가 봅니다.”
주사를 맞지 않는 다른 손으로 작성하고 있던 계약서를 어깨너머로 흘긋 응시한 윤 비서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이내 억제제를 다 투여한 주삿바늘을 팔뚝에서 빼내고 약품이 든 상자를 정리하는 윤 비서의 뒤통수를 향해 나는 조용히 말을 얹었다.
“내 옆에 데리고 있어도 좋은 꼴은 못 볼 겁니다.”
“…….”
“아시지 않습니까, 이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리고 새어머니께서도 분명히 반가이 여기시지 않을 겁니다.”
새어머니는 출신과 계급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히 따지는 사람이었다. 모순적이게도 당신은 재산 빼고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집안에서 아버지를 만나 출세한 케이스지만, 특히나 눈 밖에 난 자식인 내가 당신의 표현대로 ‘근본 없는 집안’의 오메가를 데려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영역이었다.
물론 내가 사창가 출신의 오메가를 옆에 끼고 산다는 소문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퍼트릴 사람 역시 새어머니였다. 이주미 여사는 나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걸 정도로 명예욕에 물든 끔찍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전혀 걱정할 일이 못 됐다. 도해영과 나의 관계는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할 거다. 도해영과 내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단연코 없었다.
“감히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억제제 투여로는 한계가 있을 날이 분명히 올 겁니다.”
윤 비서는 도해영과의 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으나,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은 철옹성과도 같았다.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아까 컨택한 제약사와 미팅 진행 좀 해주시죠.”
“이사님, 그 건은―”
“기한은 두 달입니다. 내 몸에 직접 투약해도 문제없을 만큼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도 전하는 거 잊지 마시고.”
내 인생에 잘못 연루된 도해영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의 감정을 품지 않는 것과 각인을 푸는 약물을 빠른 시일 내에 개발하는 것뿐이었다.
“각인은 정말 어쩌다 일어난 일인 것뿐입니다. 단순 사고와 다를 바 없는.”
“…….”
“그리고 나 좋자고 오메가 하나 붙들어두는 거,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알파의 각인은 맹목적이다. 앞도 보지 않고 맹렬히 달려들어 사랑에 빠진다. 잘 돌아가던 온 세상의 중심은 각인한 그 순간부터 돌연 그 오메가 하나가 된다. 지독하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운명의 순간처럼. 알파는 오메가를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내겐 그저 사치에 불과했다. 곁에 두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건 전부 내게 약점이 됐고, 소중한 것들은 나로 인해 상처를 받고 위협을 당했다. 그렇게 대표이사라는 자리는 나의 모든 것을 위태롭게 흔들어버릴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 그 자체가 되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었다. 두 달 뒤에는 오윤주와의 쇼윈도 결혼이자 두 그룹의 합병을 위한 중요한 계약이 있었다. 그 계약에 있어 도해영은 내게 약점이 될 거였고 나는 도해영에게 큰 위협일 거였다.
따라서 모든 것은 두 달 안으로 깨끗이 정리되어야 했다. 도해영과의 각인을 풀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 안에 절대로 도해영과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두 달, 60일. 나와 도해영의 얼토당토않은 인연은 그 안에서 끝나야만 한다. 인연보다도 어쩌면 악연에 가까운 나와 도해영의 관계는 반드시 그 안에 끝나야 했다.
“예, 지시대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어딘가 씁쓸하게 가라앉은 윤 비서의 반응을 살피며 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분명 도해영의 손을 잡고도 내 몸이 반응하지 않을 날은 올 터였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과 도해영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몸부림이었다.
“…모든 건 제 위치를 찾게 될 겁니다.”
알파의 본능을 거슬러 도해영을 사랑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억제제의 부작용에 평생 시달리며 만약 목숨이 위험해질지라도 그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라면 나는 그 방법을 택할 것이었다.
“그럼 갑시다, 윤 비서. 간밤에 도망가지는 않았나 확인하러 가야지.”
도해영은 그저 내 공간에 잠시간 존재할 뿐인 것이다. 평생의 시간이 아닌, 아주 잠시간.
***
어느새 도해영을 오피스텔에 데려다 놓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도해영은 내가 내민 계약서에 얌전히 지장을 찍었고 검사를 위한 채혈에도 응해주었으며 내가 찾아갈 때마다 순순히 페로몬을 맡게 해주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해영은 내가 제시한 계약서상의 ‘의무’를 나름대로 이행하려 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은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선 듯했다. 각인을 풀 약물도 어느새 본격적인 개발 단계에 돌입했고, 오윤주와의 계약 건도 나름 순항 중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발목 잡혀 있던 조직으로부터 도해영의 신변이 비밀리에 잘 보호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한 주간은 후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해영 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길었던 오후 회의가 끝나고, 이사실과 곧장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윤 비서가 대뜸 도해영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다짜고짜 도해영의 얘기를 꺼내는 윤 비서의 의도가 선명히 눈에 보이는 만큼 나는 부러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 반문에 윤 비서는 보고를 올릴 때와 같은 진중한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해영 님의 페로몬 덕분에 요즈음 이사님의 기분이 굉장히 안정적이신 것 같습니다. 방금 프레젠테이션 자료에서 수치 누락 사항을 발견하시고도 화 한번 안 내시고 그냥 수정 요청만 하고 넘어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예전의 이사님이셨다면 그 사원은 평생 이 건물에 발도 못 붙였을 겁니다.”
“제가 예전에는 그렇게 개차반이었다는 소립니까?”
“저는 늘 이사님의 충신이고 싶으니 거짓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윤 비서를 두고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다급하게 내 뒤를 따라오는 그의 발소리가 이사실을 울렸다. 윤 비서의 말대로 내가 정말 변한 것일까, 얼굴을 굳힌 채 자리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며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았다.
‘가계약 단계에서 오류를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 미팅에서는 신중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시 진행되는 건이 많아 놓치는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이해합니다. 보고 기한을 늘려 놓을 테니 다음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가져오세요.’
결국 윤 비서의 말에 동의하기까지는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당장 어제만 해도 나는 그야말로 대형 사고를 낸 사원들에게 너그럽게 굴고 있었다.
윤 비서의 말마따나 나는 ‘실수 앞에서는 가차 없이 대응하는 매정하고 차가운 상사’의 표본 그 자체였었다. 그랬던 내가 도해영을 만난 이후로 그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온화해졌다니, 나조차도 이런 내 모습이 낯선데 타인은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었다. 종종 사내 직원들이 내가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제 뒤에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예, 아까 회의 이후의 일정은 따로 없으십니다만, 오늘 저녁에 본가에서 식사 약속이 있으십니다.”
잘 풀리던 한 주의 마무리가 본가 방문이라니,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준비한 것들 트렁크에 실으셨습니까?”
“예, 빠짐없이 넣었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합시다. 빨리 해치우는 편이 건강상 이로울 테니까.”
오늘 있을 저녁 만찬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전장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를 대표이사직에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의 새어머니, 이주미 여사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빨리 해치워야 건강상 이롭다’는 내 예상은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적중하고야 말았다.
“어디서 글러 먹은 오메가 냄새를 잔뜩 묻히고 들어왔구나.”
대문을 열자마자 내게 날아온 건 따스한 환영이 아닌 날카롭게 내지르는 비하조의 목소리였다.
이주미 여사의 멸시와 적대는 이제 와 내게 친숙할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어머니라는 명목하에 양육을 도맡았던 때부터 그녀는 줄곧 나와 차서준을 분풀이 대상 정도로 여겨왔으니.
“새어머니께서는 여전히 건강하시군요.”
“내가 건강하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아예 저주를 퍼붓지 그러니?”
“제가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이런 대접을 받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열성 오메가인 새어머니가 도해영의 극우성 페로몬을 감지해냈다는 건 문제가 됐다.
나에 관한 사소한 것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지 못하면 혀에 가시가 돋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떤 반향이든 간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경계를 세우는 내 앞에서 이번에는 정말 약점을 제대로 잡았다는 것마냥 새어머니는 대놓고 쯧, 혀를 차며 큰아버지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전히 제 어미 버릇은 어디 못 버리는구나. 대표이사씩이나 돼서 그렇게 천박하게 굴면 되겠니?”
이어지는 말 역시도 내 예상과 아주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나의 어머니와 나를 동시에 흉보는 새어머니의 패턴에는 더 이상 타격을 받지 못하게 된 나는 유연하게 받아치며 집 안으로 걸음을 들였다.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만, 어머니께서 예상하시는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내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대로 무시한 새어머니는 어깨에 걸친 우아한 디자인의 숄을 다시금 고쳐 잡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윤 비서가 들고 온 쇼핑백 무더기부터 집어 들었다.
그 탐욕적인 모습에 거실에서 신문을 훑어보던 큰아버지가 코끝에 걸쳐둔 안경을 벗으며 큼, 하는 소리를 냈다.
“식사도 하고 갈 거니?”
“예. 오랜만에 두 분 얼굴 뵙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가서 좀 앉아라.”
아까까지도 나를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던 새어머니는 내가 가져온 공물이 마음에 든 듯 꽤나 흡족한 얼굴을 한 채 다이닝 룸을 향해 손짓했다.
금방 식사가 준비되고, 기다란 테이블의 상석에 자리한 큰아버지를 중심으로 새어머니와 내가 마주 보고 앉았다. 내가 가져온 것들을 다 뜯어보았는지 어느새 그녀의 목에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 진주 목걸이가 걸쳐진 채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런 대화 없이 식사가 이어지던 중에, 큰아버지가 긴 침묵을 깨고 먼저 운을 텄다.
“…그래, 오 부사장과는 어떠니.”
갑작스럽게 들린 그의 목소리에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와인을 들이켰다. 지독히도 아버지를 닮은 큰아버지는 내가 전혀 바라지도 않았던 아버지 노릇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5년 전 형들이 줄줄이 목숨을 잃고 아버지마저 원인 불명의 건강 악화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회장직을 임시로 맡게 된 인물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아버지의 형제라는 사람이었다.
차건혁 임시 회장, 그는 우성 알파였던 아버지의 힘에 밀려 상속 순위에서 떨어진 열성 알파였다. 고작 호텔 몇 채의 경영권만을 받고 가문에서 제명되다시피 했던 그에게 갑자기 생긴 기회는 나의 아버지가 위독했을 때에 찾아왔다.
큰아버지는 악어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리한 안색으로 겨우 연명하는 동생 앞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목메어 울었던 그는, 가문의 모든 사람이 돌아간 후에야 본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떼, 저거 떼어내라고! 저딴 새끼한테 뭣 하러 산소를 주입해, 어? 형제의 도리고 뭐고 저 잘났다고 나한테서 다 빼앗아 간 새끼한테! 당장 호흡기 꺼! 저런 새끼는 아예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
난 아직도, 아버지에게 달린 호흡기를 떼라고 담당의를 협박하던 큰아버지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그 옆에서 담당의의 뺨을 때리며 부추기던 새어머니의 모습마저도. 나는 절대 잊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은 내 안에 분노로 남아 나를 독하게 만들었다. 순순히 셋째 형에게 대표이사직을 넘기려던 마음은 버린 지 오래였다. 미친개처럼 사업 영역을 확장시키고 족족 사업 성공을 이끌어냈다.
잘못했다간 저 둘에게 빼앗기기 십상일 테니. 한사코 아버지의 것들을 앗아가려 두 눈에 불을 켜는 자들로부터 나는 이 가문의 것들을 지켜야만 했다.
오윤주와의 계약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오 그룹과의 합병은 더더욱 몸집을 불릴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도 윤주 씨도 번잡스럽게 식을 올리는 것보다는 양측 가족을 모시고 간소하게 하는 것으로 결정 내렸습니다.”
내 ‘간소’하다는 말에 이주미 여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수프 그릇에 스푼을 탁 내려놓았다.
새어머니는 내가 대표이사직에 올라선 그 순간부터 줄곧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술수를 펼친 사람이었다. 이주미 여사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인 3남 차윤호를 빌미로 내 상속을 방해한 인물이었으니까.
확실한 보증수표 격이었던 큰아들이 죽고 나자 새어머니는 답지 않게 조급하게 굴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총알은 차윤호 한 발뿐이고, 내가 결혼을 하기 전에 어떻게든 내게서 그 자리를 빼앗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 너희 둘이 편한 대로 하는 게 좋지.”
“두 그룹이 결속하는 자리인데 그래야 쓰겠어요, 회장님?”
식은 작을수록 준비 시간이 줄어든다. 그 말은 이주미 여사에게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가족만 모시고 하는 작은 결혼식이라니, 그 규모가 다른 그룹들의 결혼식에 비하면 얼마나 형편없이 작을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이주미 여사만큼 치밀하게 머리를 굴리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성가시다는 듯 알아서 하게 놔두라는 식으로 말할 뿐이라, 그 반응에 새어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메이드를 불러 짜증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면 아이는 어떻게 할 거니?”
엄한 데에 화를 내던 그녀는 돌연 좋은 수가 떠올랐는지, 다시금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내 신경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베타는 알파의 씨를 못 받아낸다고 하던데, 오메가 대리모라도 써야 하는 것 아니니?”
“아직 그 얘기를 나누기에는 이른 것 같습니다, 어머니.”
“미리 준비를 해놔야 할 것 아니니. 예전에 네 죽은 형이 자주 갔던 그런 업소들 있잖니, 그런 데서 하나 골라잡아서 쓰는 게 네 수준에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혹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돈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니?”
나를 응시하는 이주미 여사의 얼굴엔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 앞에서 나는 조용히 얼굴을 굳혔다.
늘 느끼지만 새어머니의 방식은 저급하고 상스럽다. 대답할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례하고 몰상식하다.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일었다.
그 대상이 은연중에 누군가를 뜻했기 때문일까, 결국 나는 조용히 와인을 비우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버릇없이 식사 중에 자리를 뜨는 건 도대체 누구에게 배운 거니? 격 떨어지게 말이야.”
“전부 다 새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것 아닙니까.”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닦으며 답지 않게 우아한 척을 하시던 이주미 여사는 내가 한 말에 두 눈을 뒤집어 뜨곤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 쪽을 향해 접시를 마구 내던지는 새어머니를 말리기 위해 메이드들이 몰려들었고, 한순간에 난장판이 된 다이닝 룸에서 큰아버지는 집에서 대기하던 가드의 경호를 받으며 자리를 피했다.
발에 채는 깨진 접시와 나이프를 그대로 짓밟으며 나는 아수라장이 된 저택에서 걸어 나왔다.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 옆으로 윤 비서가 미리 파킹해둔 차가 보였다.
운전석에 올라타 핸들을 움켜쥐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막상 오피스텔에 도착하고 보니 망설여졌다. 찾아오기로 미리 약속한 날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내게 도해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기까지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참을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시간을 보냈다. 당장 엘리베이터를 잡아타 문을 열면 그곳에 도해영이 있는데, 나를 달래줄 도해영의 페로몬이 거기에 있는데….
“여기까지 와놓고 고민하다니.”
헛웃음을 뱉으며 차에서 내렸다. 내겐 도해영에게 가야만 하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핑곗거리가 있었다. 도해영의 페로몬을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모든 번뇌와 고민이 사라지고 평온만이 남게 되니까.
그 내막을 모르더라도 도해영은 순순히 내게 페로몬을 흘려줄 것이다. 우리는 모종의 계약을 했으니까.
오피스텔 앞에 도달하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었음을 깨달았다. 혹시 그가 잠들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처럼 집 안의 불은 다 꺼져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밤의 공기에는 도해영이 풍기는 은은한 페로몬이 감돌고 있었고, 그 향기로운 체취를 따라 발길을 옮긴 곳에는 깊은 잠이 든 도해영이 있었다.
도해영은 새하얀 이불에 푹 파묻힌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분명히 머리맡에 있어야 할 베개는 죄다 바닥에 떨어트리고 깨끗하게 정리해둔 시트도 잔뜩 구겨놓았으면서, 정작 도해영은 두 눈을 꾹 감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타인의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선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푹신한 이불에 파묻힌 채 깊은 잠에 빠진 도해영의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평온했으며, 한편으론 신비롭기까지 했다.
이마 위로 이리저리 흐트러진 머리칼은 창에 비치는 도시의 불빛 아래에서 반짝이며 옅은 갈빛을 띠었고, 푹 감긴 눈꺼풀 아래로 드리운 속눈썹은 작게 켜놓은 온풍기의 바람에 속삭거렸다.
세심하게 조각한 도자기처럼 완벽한 형태를 띤 이목구비는 어둡게 음영이 진 실내에서도 뚜렷이 그 미모를 과시하고,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내쉬는 숨결에는 페로몬이 느릿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도해영에게서 헤매던 시선의 끝이 시트를 살짝 움켜쥔 발간 손끝에 닿고 난 후에야, 나는 꼬박 한 시간이 넘도록 우두커니 선 채로 줄곧 도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조차도 이런 내 모습이 당황스러운데 만약 도해영이 내가 잠든 자신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다행히도 도해영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이미 본가에서 있었던 일로 얼룩진 기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괜찮아졌는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도해영을 찾아 온 이유는 나름의 페로몬 테라피를 위해서였는데, 그렇게 하나를 고치니 이제는 다른 무언가가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침실에서 들고 나온 베개는 옆에 내려놓은 채였다.
잠든 도해영을 지켜볼 때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심장은 이제 와 불규칙적으로 뛰어대고 있었다.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가 가슴에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은 신경이 쓰이다 못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관자놀이를 꾹 짓누르며 머릿속을 꽉 채운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도해영을 만나고부터는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튀어 올랐다. 변수를 줄일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은 사전에 모든 것을 파악하고 원인을 차단해버리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도해영에게는 그 완벽한 방법조차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럼 사창가에는 왜 왔는데요?’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생각의 끝에는, 사창가 골목에서 도해영과 마주했던 날의 기억이 자리해 있었다.
그 기억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히 되짚어보고서야 나는 탄식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 사이로 후회 섞인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심장 한 켠에 묵직하게 가라앉은 감정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쪽도 다른 아저씨들처럼 돈 주고 나랑 하러 온 거 아니야?’
당연한 일이라는 듯 내뱉던 도해영의 목소리, 그날 도해영이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던 건 오직 내가 자신의 빚을 갚아주겠다고 말했던 순간.
‘나랑 그거 하려고 빚 갚아주고 한 거 아니었어? 그럼 대체 날 왜 데려왔는데?’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죄다 벗은 채 나를 기다리던 그날의 도해영도 마찬가지였다. 내 목적은 섹스가 아니라 단순히 페로몬뿐이라는 설명에도 도해영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게 정말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반응하는 도해영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내 가슴은 욱신거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예전에 네 죽은 형이 자주 갔던 그런 업소들 있잖니, 그런 데서 하나 골라잡아서 쓰는 게 네 수준에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혹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돈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니?’
더불어 저녁 만찬을 망친 새어머니의 수준 낮은 언행으로 그렇게 분노의 이유는 다시금 명확해졌다.
도해영은 결코 그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도해영 스스로 ‘당연한 일’이라 여기는 성적인 폭언과 폭행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이었다. 색안경을 낀 사람들의 날 선 시선과 폭언에 상처받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도해영이 잠든 침실로 향했다. 그리곤 새근거리는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진 도해영을 응시하며 나는 내 안에 들어찬 그 묵직한 감정을 꺼내 보았다.
만약 두 달 안에 도해영과 나의 모든 관계가 정리된다면….
도해영의 페로몬에 종속된 내 각인이 풀리고, 예정되어 있던 오윤주와의 쇼윈도 결혼이 성사되면, 그 이후의 도해영은….
하지만 길게 고민도 할 것 없이 내가 완벽히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제는 도해영이 아니라 내게 있었다.
과연 나는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도 도해영을 깨끗이 잊을 수 있을까? 이 관계는 오롯이 안정적으로 페로몬을 취하기 위한 내 본능의 이기심으로 엮어진 악연에 불과한데, 만약 두 달이 지난 후에도 내가 도해영을 놓아주지 못하겠다면?
이기심은 다시금 감정에 불을 지폈다. 정답과 오답의 길목에서 나는 다시금 한없이 도해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도해영을 마주했던 그 사창가 골목은 애초에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차서준에 대한 기억이 불러온 죽음의 악취 속에서 도해영은 내게 숨 쉴 틈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옅은 빛의 꽃내음이 살랑대며 다가와 숨결을 적신다. 살며시 다가온 도해영의 페로몬은 천천히 내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내 세계에는 오롯이 도해영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도해영이 내게 선사한 평온의 시간 앞에서, 나는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오랜 시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이어지는 며칠간 나는 도해영과 꽤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계약서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그런 공적인 관계, 서로에게 이득만을 주는 지극히도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기심과의 싸움에서 나는 어느 정도 승기를 거머쥐고 있다고 자신했다, 현관에서 도해영과 새 핸드폰을 두고 가볍게 실랑이를 벌일 때까지만 해도.
가까워진 거리에 숨이 섞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당장이라도 입술이 닿을 거리 앞에, 도해영이 있었다.
돌연 몸 안 가득 열기가 차올랐다. 방금까지도 은은하게 퍼졌던 도해영의 페로몬이 한순간에 끈적이며 피부 위를 간지럽혔다. 뇌쇄적일 정도로 달콤하고 자극적인 도해영의 향내에 뒤통수가 저릿해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입 안 가득 차오르는 독액은 도해영의 목덜미에 가득 이를 박아 넣으라며 재촉해댔다. 어서 이 오메가를 너의 것으로 만들라고, 당장 뒤통수를 끌어안아 질척하게 입술을 부비고 혀를 집어넣어 달큰한 타액을 맛보라고, 내 안의 악마가 끝없이 속삭였다.
턱이 으깨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코앞에 느껴지는 도해영의 달뜬 숨에 몇 번이나 이성을 놓을 뻔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만약 찰나의 실수로 입술이 닿는다면 본능이 어디까지 날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도해영이 반 발짝 몸을 움직였다. 내 모든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반신이 마주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섰다. 찰나의 순간에 도해영의 몸에 내 굳은 성기가 닿았고, 내 안의 악마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단번에 호흡을 멈추고 몸 밖으로 새어나간 페로몬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그대로 등을 돌려 현관문을 열어 오피스텔에서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이성은 다행스럽게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며칠간 도해영을 피했다. 도해영에게는 윤 비서를 통해 내가 해외에 나가 있다는 거짓말을 전한 채로.
감정이 동하면 안 될 시기에 벌어진 치명적인 순간 앞에서 나는 잘 참아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실수로 도해영마저 각인시키면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일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원치 않는 각인은 도해영을 힘들게 만들 게 분명했으니까.
며칠이 지나면 도해영도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은 모든 것들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도해영의 페로몬을 찾는 대신 억제제를 맞기 시작했다. 종종 도해영이 보고 싶을 때면 오피스텔 앞에 설치해둔 CCTV를 쳐다보며 버텼다. 두 눈을 감고도 오피스텔 복도를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참았다. 그게 나와 도해영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앞에서 내가 도대체 어떻게 참아낼 수 있을까.
―나와, 도해영. 당장!
―어떻게 알고 왔냐니까?
―설명할 시간 없어, 나와!
―잠깐, 강태산, 잠깐만, 좀 멈춰봐, 좀!
손목을 억세게 움켜잡은 채로 오피스텔 복도 바닥에 도해영을 질질 끌다시피 데려가는 이 강태산이라는 놈에게, 도대체 나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는 걸까.
“그만해, 제발! 하지 마, 차도헌 제발, 응?”
알파의 각인은 맹목적이다.
“이러다 강태산 죽어, 죽는다고! 제발 좀!”
앞도 보지 않고 맹렬히 달려들어 사랑에 빠진다.
“차도헌! 제발, 제발! 그만 해!”
잘 돌아가던 온 세상의 중심은 그 순간부터 돌연 그 오메가 하나가 된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사이로 도해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울음에 먹힌 채로 덜덜 떨며 나를 붙잡은 도해영의 얼굴에는 내가 튀긴 피 몇 방울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두 손엔 끈적한 피가 엉겨 있었고 내 아래에는 피범벅이 된 채로 쓰러진 강태산이 있었다.
도해영은 강태산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 피 칠갑한 얼굴을 어루만지려는 듯했다. 나는 곧장 도해영의 몸을 끌어안아 강태산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렸다.
“…건드리지 마.”
목구멍 뒤편에서 짐승이 으르렁대듯 목 울림이 새어 나왔다. 강태산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도해영을 안아 든 채로 오피스텔에서 빠져나왔다. 여전히 비릿한 피 냄새는 끔찍할 정도로 진동을 해댔다.
분노는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도해영은 내게 겁에 질린 듯했다. 분노를 삭이기 위해 미친 듯이 악셀을 밟으며 도로를 내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는 맨션이었다.
종종 머리가 복잡해질 때 찾는 용도로 소유하고 있던 맨션이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이곳은 도해영을 안전히 숨겨둘 공간에 불과했다.
어두운 방 안, 스치는 입술 사이로 욕망에 굶주린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두 명분의 페로몬은 금세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몰려드는 쾌감에 도해영은 가쁜 숨을 내쉬며 내 품에 안겨왔다.
이윽고 맞닿은 가슴팍 너머로 두 개의 심장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심장의 쿵쿵대는 박동으로부터 시작된 전율은 온몸에 퍼져 모든 감각을 짜릿하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충격적일 만큼 황홀한 감정은 그렇게 내 안을 들쑤셔댔다.
이윽고 귓가에 콰드득-, 살갗을 뚫는 소리가 들렸다. 여린 피부가 사정없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입 안 가득 도해영의 뜨거운 피가 한가득 몰려들었다.
질척이며 불타기 시작한 지독한 알파의 소유욕이 제대로 발동한 순간이었다.
각인시키고야 말았다. 끔찍한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도해영을 각인시키고 말았다. 온몸이 불타듯 녹아 엉겨든 두 육체는 각인으로 결속되고, 이내 도해영의 심장은 내 품 안에서 생생히 뛰어대기 시작했다.
결국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도해영은 내 오메가가 되었다. 내 품 안에서 까무룩 잠들어버린 도해영을 응시하며 나는 가만히 그 말간 이마 위로 입을 맞췄다. 여전히 도해영과 연결된 육체는 그 작은 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품을 풀어내곤 그 위로 시트를 잡아당겨 덮어 주었다. 기척도 없이 깊게 잠든 얼굴을 뒤로 곧장 테라스로 향했다.
착잡한 숨을 내쉬었다. 내 선에서 끝내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일이 더 엉켜버린 셈이었다.
“…윤 비서, 난데.”
―예, 이사님.
“신약 개발 타깃 변경해.”
―예,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사님!
새벽에 갑작스럽게 울린 전화에도 차분히 통화에 응대하던 윤 비서가 그제야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윤 비서에게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쌍방 각인 해제용으로, 다시 개발하라고 전달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짙은 한숨에 전화 너머 윤 비서의 침착함은 배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
―우선 안정을 좀 취하십시오. 어떤 상황이고 잘 해결될 겁니다. 늘 이사님께서는 무엇이든 잘 해내셨으니까요.
윤 비서의 위로처럼 나도 부디 이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랐다. 약물 연구팀을 늘리고 지원을 대폭 늘리자 시약 제조에는 더욱이 속도가 붙었고, 예상 일자보다 앞당겨진 완성품 앞에서 나는 내가 저지른 사고가 제대로 해결되길 바랐다.
하지만 기어이, 운명은 나를 벌하듯 거대한 시련을 내리고야 말았다.
도해영이 사라졌다.
언제고 나의 세상에 있을 것처럼 굴었던 도해영이, 내게서 사라지고야 말았다.
***
“이사님께서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해당 고속도로에서 이어지는 지방 군(郡) 구역을 강태산 군과의 관련성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맨션 CCTV에 찍힌 강태산의 차량은 도시를 벗어난 이후로 도로변에서 자취를 감췄다. 도시 외곽을 따라 길게 이어지던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도해영의 페로몬이 끊긴 시점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고작 베타 새끼가 향 갈무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도해영의 페로몬을 제대로 숨길 정도라면, 이건 조직에서 계획하고 알선한 납치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1순위부터 순서대로 사람 보내.”
“예. 알겠습니다.”
“오늘부터 오후 스케줄은 윤 비서가 단독 진행하고.”
“…예?”
답지 않게 놀란 목소리를 내는 윤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목록 후순위부터 내가 훑으면서 올라가면 시간도 단축되고 좋지 않겠어? 그럼 내일 봅시다, 윤 비서.”
아니면 도해영을 향한 강태산의 사랑이 그만큼 치밀한 것일 수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름 모를 도시 외곽의 지방 군현 끝자락에 미끄러지듯이 차를 대고 샅샅이 냄새를 쫓았다. 무슨 사냥개라도 된 것마냥 이러고 있는 꼴이 웃겼지만 며칠 안에 찾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은 어쩌면 당연했다. 빠르게 목록을 지워나갈수록 도해영을 다시 내 손 안에 쥐어올 당연한 성취감 역시 끝도 없이 몸집을 불렸다.
알파는, 그것도 극우성 알파는 절대 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다. 게다가 상대는 고작 베타에 불과했다. 이건 이기지 못하는 게 더 어려운 게임이었다.
그렇게 이 주가 흘렀다.
“제대로 찾은 거 맞습니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짚으며 유리잔을 세게 쥐었다. 두꺼운 유리 소재의 컵이 마냥 종이컵처럼 볼품없이 구겨지기 직전까지 손에 힘을 주자 윤 비서는 말없이 내 손에서 잔을 뺏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전면적으로 수색 구역을 넓혀보겠습니다.”
윤 비서의 목록 안에 도해영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당연하게 내 맨션에 있어야 할 도해영이었다, 어쭙잖은 시골구석에서 발견되어 당장 내 손에 붙들려 나의 공간으로 다시 되돌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도해영의 머리칼 한 올도 찾지 못했다.
‘지해가…, 지해가 죽는 꿈을 꿨어, 천장에서…, 목매고 죽었는데, 근데…, 도저히 꿈이 끝나지를 않아, 나 좀 깨워줘, 나 깨고 싶어…’
고작 몇 분 차이였다. 서지해라는 오메가가 죽었던 그 날, 도해영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그곳은 이미 모든 것이 강태산의 손에 정리된 후였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도해영, 그에게 숨 쉴 구멍을 베푼다는 아량을 피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나큰 자만이었고 얼토당토않은 확신이었다.
수색팀 인원을 늘리고 훈련견을 풀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썼지만 도해영의 털끝 하나 발견된 것이 없었다. 며칠간 미친 듯이 감각을 끌어올려 도해영의 체취를 밤새 쫓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페로몬의 흔적은 모조리 끊겨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갖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인가, 불현듯 드는 생각에 몰려오는 감정은 온갖 종류의 불쾌감뿐이었다.
“…어떻게든, 이번 주 내로 찾아놔.”
“예, 알겠습니다.”
나는 너를 찾아내야 한다. 도해영, 너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내가 저지른 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라도… 나는 너를 찾아내야만 한다.
***
“도헌 씨, 방금 질문에 대해서 더 드릴 답변이 없을까요?”
오윤주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적당히 불쾌하지 않은 선에서 감정을 내비쳤다. 그녀는 무기마냥 날이 제대로 선 구두 굽이 내 쪽을 향하도록 다리 방향을 반대로 꼰 채였다.
“…미안합니다.”
구겼던 미간을 엄지로 눌러 피며 흐트러진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기어코 약속한 3시간을 전부 쓰겠다는 듯 인터뷰 일정은 중구난방 식으로 길어지고 있었다.
두 남녀의 막대한 재산이 서류를 통해 한데 묶인다는 지점에서 오윤주와 나의 결혼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결코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을 세간의 이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이 점을 영악하리만치 이미지 메이킹으로 이용하는 편은 오히려 오윤주 쪽이었다. 그간 대기업의 유일한 상속녀라는 라벨을 제외하곤 자신의 정체를 숨겨왔던 그녀는 결혼을 발표한 후로 줄줄이 브랜드 모델 자리를 꿰찰 정도로 가십의 중심에 서기까지 했다.
“도헌 씨가 요즘 일정이 많아 피곤한가 봐요. 잠시 쉬었다 가죠, 우리?”
그녀의 요청에 인터뷰는 단숨에 중단되었다. 오윤주 측 언론부 담당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매거진 팀을 둘러싸곤 기사에 올라갈 내용을 검열하기 시작했고, 오윤주는 편히 소파 위로 등을 기댄 채 가볍게 즐길만한 디저트를 주문했다.
“집중 좀 하세요, 차도헌 씨.”
금세 비건 시트로 구운 레드벨벳 케이크와 화이트 와인이 테이블 위에 차려지고, 케이크보다도 와인 잔에 먼저 손을 뻗은 오윤주는 성가시다는 투로 내게 말을 던졌다.
“그쪽만 계약 결혼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엄연히 계약이라고. 누가 보면 내가 매달려서 결혼하는 줄 알겠어.”
“미안하다고 했잖습니까.”
“뭐 씹은 얼굴 좀 펴고 제대로 해 봐요. 와인?”
“됐습니다.”
내겐 일정을 마치고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단박에 거절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오윤주는 작게 눈을 흘기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내게 술을 즐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빡빡한 스케줄에 틈이 날 때마다 차를 몰고 도해영을 찾아다녀야 했으니까. 당장 오늘도 인터뷰 일정을 마치자마자 도시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반지는 버렸어요?”
푹, 붉은 케이크 시트에 포크를 꽂아 놓으며 오윤주는 내 손을 응시했다. 포크를 든 오윤주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우아한 디자인의 반지는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빛을 이리저리 반사해내고 있었다.
“세면대에 놔두고 왔을 겁니다.”
이미 약혼반지는 벗어둔 지 오래다. 도해영을 안았던 그 날 새벽, 서랍 속에 던져 넣었으니까.
“거짓말도 잘하네요.”
“…….”
“비서 시켜서 사 오라고 할 테니까 이따 마무리 포토 찍을 땐 꼭 껴요. 쇼윈도 부부면 그 정돈 해야지.”
며칠 전 ‘성공한 여성 1위’로 유명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했던 그 미소로 오윤주는 나를 응시했다.
“아, 해영 씨는 잘 지내요?”
이번에도 오윤주는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뻔뻔한 낯짝 앞에서 그보다 더 뻔뻔하게 거짓말을 칠 여유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쪽과 계약 해지하고 대신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잘 지냅니다만.”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분명 오윤주가 납득하지 못할 발언이었다. 완벽한 포장지를 덮어쓴 그녀 자신을 건드리는 도발임에 분명한 문장을, 오윤주는 천천히 일련의 과정을 거치듯 꼭꼭 씹어 소화해내곤 말끔한 웃음을 터트려댔다.
“어머- 부럽다. 난 베타라 그쪽 사람들의 운명 같은 사랑, 그런 거 잘 모르거든요.”
다시금 오윤주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붉은 케이크 위를 유영하던 은식기는 이내 날카롭게 파고들어 부드러운 표면 위로 꽂혀 들었다.
“아무쪼록 잘 해줘요, 뭐든. 해영 씨 운명이 참 기구하잖아.”
극악의 포커페이스, 오윤주의 완벽한 미소 앞에서 나는 그쪽 비서로부터 건네받은 반지를 손아귀 안에 움켜쥐었다.
“행복할 겁니다. 내 곁에서, 도해영은.”
***
목격담이 흘러나온 것은 그로부터 3일 후였다. 도해영과 강태산, 두 인물과 비슷한 인상착의를 지닌 두 청년이 몇 주 전부터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손에 받아 든 주소는 허무하리만치 익숙한 곳이었다. 윤 비서가 정리한 목록 가장 상단에 있던 곳이자 강태산의 연고지, 그의 죽은 부모가 나고 자란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수색팀이 왜 이곳을 놓쳤는지에 대해 잘못을 묻는 것은 시간 낭비다. 내겐 당장 대표실을 나서는 것이 먼저였다. 미친 듯이 액셀을 밟으며 연달아 등장하는 신호등을 몇 차례나 무시했다.
‘그쪽, 극우성인가?’
‘…….’
‘대답해, 당신 극우성 오메가 맞냐고!’
처음엔 분명 사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감정은 분노에 가까웠다. 고작 길에서 스쳐 간 찰나의 순간에, 그런 오메가의 페로몬에 각인했다는 것 자체가 쪽팔릴 지경이었다.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는 향이었다. 다른 평범한 오메가들처럼 단내뿐이었다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해영의 페로몬은 달랐다. 코끝에 진동하는 짙은 꽃향기, 그 끄트머리에 매달린 감정은 분명 싸늘하게 식은 슬픔과 지독한 외로움 같은 것들이었다.
‘나 잘해요. 나랑 한 번 하면 절대 내 몸 못 잊을걸?’
새카만 사창가 간판 아래, 난잡하고 좁은 골목에서 깡마른 몸으로 그렇게 세상에 부딪히던 도해영은 신기하리만치 물 같은 사람이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차갑고, 마음이 쓰일 만큼 유약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을 지닌 도해영.
가까워진 체취에 과거를 헤집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온다.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 앞에 미끄러지듯이 차를 세우고 빠르게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갑작스럽게 터진 히트 사이클에 괴로워하는 네가 있었다.
“…도해영!”
불쑥이는 소유욕만큼이나 나의 모든 페로몬은 오롯이 너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앓는 신음을 내며 버둥대는 네 마른 몸을 끌어안으며 흐트러진 머리칼 위로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차츰 번지는 열꽃은 다급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도해영 내려놔, 당장!”
강태산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해영의 피부 위로 피어난 열꽃에 다급히 입을 맞추며 잠재우던 행위도 거칠게 팔뚝을 붙잡고 돌려세우는 강태산에 중단되고야 말았다.
“비켜. 도해영한테는 당신처럼 쓸모없는 베타가 아니라, 내가 필요해.”
히트 사이클과 동반해 전신에 퍼지는 열꽃은 알파와 쌍방 각인을 맺은 오메가에게 나타나는 페로몬 부족 현상이었다. 꼬박 보름이 넘는 기간 동안 쌍방 각인 상대의 페로몬을 맡지 못한 도해영에게 나타나고도 남을 신체적 이상 반응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강태산은 기어이 앞을 막아선 채 목에 핏대를 세워대고 있었다.
“알파 페로몬 따위 필요 없어. 예전에도 해영이는 억제제로 잘 버텼으니까.”
씨발, 도해영의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둔 새끼가 저 새끼였다고. 거칠게 욕을 읊조리는 목소리에 절로 살기가 뱄다.
“평생 도해영을 억제제로 버티게 할 건가? 애 몸은 억제제로 죄다 망쳐놓고, 막상 지금처럼 히트 사이클이 터지면 책임도 못 지고. 그게 당신이 하는 사랑인가? 고통 속에서 도해영이 죽어가는 걸 보는 게?”
“…….”
“똑똑히 들어. 당신은 도해영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격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품에 안긴 도해영의 마른 몸을 바투 끌어안은 채 나는 앞을 막아선 강태산의 몸을 밀치곤 리무진으로 향했다.
“너 같은 알파 새끼한테 도해영 못 넘겨. 내가 한둘 본 것 같아? 잘난 알파들이 가지고 놀던 오메가를 어떻게 처참하게 죽이는지, 그 꼴을 다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네까짓 새끼한테 해영이 목숨을 넘겨, 씨팔!”
강태산의 분노에 찬 절규에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작 도해영을 아프게 한 새끼가 나한테 하는 말이라곤, 도해영의 목숨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빗나간 일침이었다.
“잘못 알고 있네. 내가 도해영을 왜 죽여.”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거칠게 문을 연 리무진 뒷좌석에 도해영을 내려놓곤 나는 들끓는 분노에 턱을 악물었다.
***
과거를 뉘우치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잡지 못한 것들을 이제 와 끝내보겠다는 발버둥도 그랬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손 놓고 보내던 내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도 이와 같았다.
“오늘 여러분들은 세상을 떠난 고(故) 고현영 여사와 장남 차정우, 그리고 차남 차서준을 기억하고, 또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 안식을 찾아 우리들의 곁을 떠난 이들의 모습을 기리며 묵도의 시간 갖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고 두 눈을 감았다. 고요함이 홀 안을 가득 채우는 동안 나는 두 눈을 뜨고 회벽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응시했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검은 머리칼과 흑단같이 검은 눈, 새하얗게 빛나는 피부를 가진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은 머나먼 과거에 그쳐 있었다.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는 4년의 터울로 차서준과 나를 낳고 몇 년 후에 돌아가셨다. 원인 불명인 모종의 사고.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몇 없다. 내겐 어머니에 대한 생전의 모습들을 이야기해줄 어른들이 없었기 때문에. 새어머니라는 사람은 내 돌아가신 어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나의 아버지조차도 어머니의 죽음에 침묵했었다.
단 한 명, 어머니를 놓아주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건 나의 유일한 피붙이, 나의 형 차서준이었다.
“엄청 닮았네요, 쌍둥이라 해도 믿겠어요.”
“살아있을 적에는 마주칠 때마다 거울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차서준의 비석 앞, 오윤주는 허리를 숙이며 묘비 앞에 놓인 사진을 응시했다. 그 사진은 뉴스에서 차서준의 죽음을 비출 때마다 등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억울하지 않았어요? 차도헌 씨한테 죄가 다 뒤집어씌워졌는데.”
“…딱히.”
“그런 태도라면 용서하지 말 걸 그랬어요. 괘씸하네요.”
쯧, 혀를 찬 오윤주는 성가시다는 듯 얼굴을 가린 검은색 베일을 잡아당겨 벗었다. 이윽고 비슷한 분위기를 닮은 두 매서운 눈매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땐 굳이 해명할 필요도, 나서서 결백을 입증할 필요도 못 느꼈습니다.”
차정우와 차서준의 죽음도, 수없이 목숨을 잃은 사건의 관계자를 비롯해 오윤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것도. 나를 둘러싼 모든 누명은 쉽사리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이었다.
피해자가 넘쳐나는 만큼 누군가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 그 점을 영리하게 이용한 이주미 여사는 나를 대번에 가해자로 못 박아버렸으니까.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차도헌 씨를 살인자로 몰아가는 마당에, 넋 놓고 있을 만큼 그렇게 의지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든 새어머니는 나를 물고 늘어질 테고, 언론은 진실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것을 오윤주 씨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은요? 나까지 회유해가면서 이러는 건, 마음이 바뀌었나 보죠?”
질문하는 사람조차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이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도 없을 만큼 확실한 대답이었음에도, 나는 소리 내어 답을 뱉었다.
“지켜야 할 게 생겼습니다.”
“…….”
“내 곁에서 평생, 아픔이 무엇인지 슬픔이 어떤 것인지 모를 만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손 놓고 보내던 나 자신을 증오하는 것도, 이제 와 그 모든 거짓들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전부 다 도해영을 지키기 위해서, 내 곁에서 도해영이 행복했으면 싶어서.
“사람 바뀌는 거 참 힘든 일인데… 해영 씨 엄청 대단하네요. 그 고집 센 차도헌 대표이사를 바꾸고 말이야.”
오윤주는 헛웃음 비슷한 것을 터트리며 벗어둔 베일을 도로 머리 위에 얹었다. 그리곤 한 발 뒤로 물러선 채 차서준의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곤 말을 얹었다.
“해명 자료 단단히 준비해요, 닮은 얼굴을 이용한 2인 범죄조직이라는 말이 돌 수도 있으니까―”
이내 내게서 등을 휙 돌린 오윤주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웅성이는 큰형의 묘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차서준의 곁에는 나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차서준이 죽던 날처럼, 뼛가루가 뉜 묘비에서조차 그의 곁을 자리한 건 나뿐이었다.
“…거기는 편해?”
나와 똑같이 생긴 사진 앞에 툭 말을 붙였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만큼 쓰게 마른 입술이 다시금 거친 말을 뱉었다.
“아니지, 형이 편하면 안 되지.”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살던 차서준은 성인이 된 후 완벽한 폭군이 되었다. 낮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미친 듯이 자료를 모았고 밤에는 하염없이 사창가를 쏘다니며 분노와 갈증을 풀었다. 해가 지날수록 공소시효 일자는 다가오는데 차서준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것 하나 제대로 갈피를 붙잡지 못했다.
차서준은 누구를 죽일 만큼 미친놈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에 관해 입을 잘못 놀리는 새끼들을 발견했을 경우엔 달랐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다 못해 숨통이 끊길 때까지 응징은 이어졌고, 갈수록 차서준은 가문의 수치로 자리매김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쳐버린 자식, 차 그룹의 상속 2순위이지만 상속은커녕 제대로 눈 밖에 난 자식. 그게 딱 차서준이 받는 대우였다.
그랬던 차서준이 제대로 눈깔이 돌아버린 건 상속 임명식이 있기 전날이었다. 큰 행사 직전에 고주망태로 뻗어버린 차서준의 모습을 보다 못해 큰형 차정우는 훈계를 늘어놓았고.
‘이미 죽은 어머니 그만 들쑤시고 정신 차려, 차서준. 그 일은 아무 배후도 없고, 단순 사고사로 이미 판명 났다. 네가 하는 짓거리들을 더 이상 기업에서 감싸줄 수도 없고,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기업 일 배워.’
그날 차서준은 제 손으로 차정우를 죽였다. 우연히 살인을 목격한 오윤주의 아버지도 죽였다.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쉽다며 차서준은 그간 죽이지 못했던 놈들을 찾아가 죄다 죽여댔다. 어머니의 사건을 단순 자살로 폄하한 기업 관계자부터 시작해서 뇌물을 먹고 사건을 대충 종결해버린 수사관까지, 미친 살인귀의 범행은 모든 복수를 끝내고 나서야 멈췄다.
차서준은 내게 그랬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어렸을 적, 고작 나보다 4살 많았던 차서준은 입이 닳도록 내게 우리의 어머니를 칭송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차서준의 눈으로 회상하는 어머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 혼자서 외롭잖아.’
차서준이 죽기 전에 했던 모든 짓을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용서했던 단 한 가지는,
‘내가 가서 같이 있어 주려고.’
차서준이 스스로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형처럼 악마 같은 새끼는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고 악담을 퍼붓던 나조차도,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읊조렸던 마지막 순간에는 부디 차서준이 하늘에서 어머니를 잘 보필하길 바랐다.
그렇게 모든 복수를 끝내고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차서준에게 나는 늘 묻고 싶었다. 그게 우리 형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만약 방법이 그뿐이더라도, 그러지는 말았어야지.”
싸늘하게 얼어붙은 묘석, 그 앞에 기대어진 자그마한 액자를 내려다보며 내뱉은 목소리는 분노보다도 절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추모식이 끝나자 바리케이드가 쳐진 성당 밖으로 차례로 참석 인사들이 빠져나갔다. 아까보다 배로 많아진 현장 취재 기자들과 쉴 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에 오윤주는 식 내내 머리 뒤로 넘겨둔 레이스 베일을 다시금 내려 얼굴을 가렸다.
가드 대여섯 명의 호위를 받으며 문을 나서자 쏟아지는 인파에 취재 마이크가 얼굴을 향해 불쑥 들어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늘 행사 퇴장 길에 기자들의 난입이 있었던지라 날아오는 질문들을 무시하며 호위에 맞추어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데 그 사이로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꽂혀왔다.
“차도헌 대표이사님, 현재 약혼하신 오윤주 부사장님을 두고 사창가 출신 오메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런 식의 불륜 의혹은 늘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의 재혼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그랬고, 다른 기업의 대표들도 늘 당하는 단골 찌라시 중 하나였다. 문제라면 내가 만나는 도해영이 정말 사창가 출신 오메가라는 것이지만, 그간 그래왔듯이 대처법은 완연한 무시였다.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오윤주를 태워 보내자 내 리무진을 향해 물밀듯이 인파가 몰려왔다. 차량에 바짝 붙은 취재진을 다치게 할 수 없어 리무진의 문을 작게 열어 그 사이로 몸을 구긴 채 들어가려는 찰나, 다시금 귓가에 파고드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 오메가의 이름이 도해영이라는 것도 사실입니까?”
한 기자의 느닷없는 실명 언급에 수많은 카메라가 나를 둘러싼 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성을 잃을 만큼의 분노가 터진 건 한순간이었다. 거칠게 날린 주먹이 코앞에 그림자를 드리운 카메라를 바닥으로 내리찍은 순간, 고요해진 장내를 시끄럽게 하는 건 유리 파편이 깨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대로 윤 비서를 차에서 내쫓곤 운전석에 올라타 미친 새끼처럼 액셀을 밟았다. 몰려드는 취재진들이 차에 치이건 말건 상관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 것을 건드렸다, 내게 너무도 소중한 도해영을 건드렸다.
미친 질주가 끝난 곳은 오피스텔이었다. 취재진이 진을 친 곳을 뚫고 들어간 곳에 네가 있었다. 숨을 곳도 없어 침대 틈 아래에 마른 몸을 비집고 들어간 네가 있었다, 나로 인해 다시금 고통을 안게 된 네가 있었다.
이제 와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차서준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분노했는지, 어째서 두 손에 피를 묻혀가며 끔찍한 복수를 이어가야만 했는지.
알파의 각인은 맹목적이다. 앞도 보지 않고 맹렬히 달려들어 사랑에 빠진다. 잘 돌아가던 세상의 중심은 각인한 그 순간부터 돌연 그 오메가 하나가 된다.
지독하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운명의 순간처럼. 알파는 오메가를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
“…도해영.”
수없이 사랑을 속삭이며 부드러운 목덜미 위로 입맞춤을 찍어댔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정답은 바로 앞에 있었다. 그간 정답이라고 굳게 믿었던 계약서나 약물, 그런 것들은 오답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위를 발갛게 물든 두 볼, 오롯이 나를 향하는 따스한 갈색 눈동자, 얇은 쌍꺼풀이 진 수려한 눈매에 두 눈을 깜박일 때마다 수줍게 드리우는 속눈썹, 오뚝하게 뻗은 콧대와 생기를 머금은 예쁜 입술. 가슴이 벅찰 만큼 밀려오는 달큰한 체리꽃 향기, 오롯이 내게 숨 쉴 틈을 주는 도해영의 페로몬.
죽지 못해 살았던 나를 숨 쉬게 하는, 도해영.
진작 인정했어야 했다. 언제고 너를 놓아줄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놓아줄 마음 따위는 없었다고, 어쩌면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숨이 멎는 순간까지 너만을 사랑할게. 내 전부를 걸고 도해영, 너를 사랑할게.”
운명처럼 내게 내려온 오메가, 내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할, 내 오메가.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도 너를 사랑할 테니,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오직 너만을 위해 살아갈 테니, 부디.
“내 메이트가 되어줘.”
지독하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운명의 순간처럼. 나는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