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0/43)

4.

신은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볕 아래의 인간이든 동굴 속의 인간이든, 차별 없이 모든 인류에게 축복과 사랑을 선사한다고 했다.

‘임은수, 너 정말 그 사람 사랑해?’

단, 신의 사랑 안에 사창가 출신 오메가는 제외였다.

‘응, 죽어도 좋을 만큼.’

은수는 웃었다. 사랑은 우리들의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바보 같은 임은수는 사랑을 바랐다. 신조차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데, 임은수는 기어코 제 목숨을 앗아갈 알파를 사랑했다.

스물한 살, 은수가 담긴 자그마한 항아리를 품에 안으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에게 사랑은 사치일 뿐이라고. 죽을 걸 알면서도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과 다를 바 없다고, 결국 버려져 혼자 목을 맬 운명일 뿐이라고.

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대신 온갖 불운과 역경을 꽁꽁 뭉쳐서 날 만들었다. 질척하게 내리는 녹은 눈, 뿌옇고 새카만 담배 연기, 매일같이 몸을 팔아 빚을 갚는 사창가에서의 삶. 행복과는 거리가 먼, 저 어딘가 빛 한 줄기조차 없는 축축한 어둠. 이것들은 오롯이 도해영의 것이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줘.”

그런 도해영에게, 차도헌은 메이트를 맺자고 이야기했다.

“네 곁에서 너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 네가 잠들고 다시 눈을 뜰 때에도 너의 곁에서, 내 모든 평생을 다 바쳐 너를 사랑하고 싶어, 해영아.”

신의 사랑이자 찬란한 황금색 태양 빛을 넘칠 만큼 손에 쥐고 살아온 알파가, 신에게 버림받아 축축한 어둠에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온 오메가에게 사랑을 하자고 했다.

“…날, 정말 사랑해?”

다시금, 나는 차도헌에게 물었다. 조급한 사람처럼 달달 떨리는 목소리는 곧장 눈물에 먹혀들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오히려 죄다 지워버려 흐릿해진 고백의 순간들은 이제 와 선명해졌다.

감은 두 눈꺼풀 위로 내려앉는 부드러운 입맞춤, 허리를 당겨 안는 단단한 팔뚝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속삭임, 오롯이 나만을 향했던 페로몬, 그리고….

‘사랑해, 도해영.’

매일 밤 잠든 내게 고백하던 차도헌의 목소리.

축축하게 젖어버린 두 볼이 마를 새도 없이 눈물이 새어 나왔다. 손가락에 엉거주춤 끼워진 반지가 빠지지 않도록 주먹을 꾹 말아 쥐자, 맞지 않는 헐거운 반지는 우스꽝스럽게도 제자리를 찾은 듯 꼭 맞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 나를?”

차도헌의 두 눈이 내 얼굴을 지긋이 응시했다. 코끝에 맡아지는 진한 피 냄새 사이로 차도헌의 페로몬이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대답 대신 차도헌은 손을 뻗어 내 볼을 엄지로 쓸었다. 이윽고 축축하게 젖어버린 두 볼 위로 부드럽게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촉, 촉 이어지는 버드키스의 끝엔 울음이 맺힌 입술에 선사하는 달콤한 키스가 있었다.

입술이 맞붙다 떨어지는 사이로 새어 나가는 숨조차 아깝다는 것처럼 차도헌은 내 고개를 바짝 움켜잡고 혀를 섞었다. 진하게 풍기는 페로몬에 헐떡이는 나를 달래듯 숨을 불어넣으며 등을 쓸어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격해진 페로몬은 다시금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강하게 내 안을 파고들었다.

“사랑해.”

다시금 차도헌은 내 고개를 단단히 붙잡은 채 눈을 맞추며 낮게 읊조리듯 사랑을 뱉었다.

그의 페로몬 안에 깊게 밴 감정들은 나를 깊은 착각 속으로 자꾸만 끌어당겼다. 어쩌면 신이 내게 실수로 사랑을 줬다고 믿고 싶을 만큼, 그래서 결국 나조차도 차도헌을 사랑하지 않곤 못 배길 정도로….

차도헌의 두 눈이 내 얼굴을 지긋이 응시했다. 또다시 펼쳐진 무한한 설원에는 나와 차도헌이 함께 서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쏟아지는 눈보라에 숨이 멎을 만큼,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스물한 살, 은수가 담긴 자그마한 항아리를 품에 안으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에게 사랑은 사치일 뿐이라고. 죽을 걸 알면서도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과 다를 바 없다고, 결국 버려져 혼자 목을 맬 운명일 뿐이라고.

사랑을 했던 은수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심장이 묵직이 뛰어댔을까, 온몸이 재가 되어 바스러질 것처럼 뜨겁게 열이 오르고 눈물이 새도 없이 흘러나왔을까, 우리에겐 사랑이라는 게 없다는 걸 알아도 결국 파도에 휩쓸리듯 그렇게 그 알파를 사랑하고야 말았을까….

“나는 그런 거 못 믿어, 나는….”

따스하고 보드라운 햇살이 아닌 질척하게 내리는 늦겨울의 진눈깨비 아래에서 태어났으니까.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내게 사랑은 사창가에 찾아오는 알파들이 내 얼굴에 좆을 들이밀며 내뱉는 단순한 노닥거림에 불과했으니까, 땀과 정액이 섞여 흐르는 몸뚱어리가 부닥칠 때마다 허공에 의미 없이 흩날리는 한없이 가볍고 의미를 잃은 말이었으니까.

“오메가는 사랑을 하면 죽어. 다들 그렇게 죽었어, 은수도, 지해도….”

매일같이 찾아오는 지독한 외로움이, 끝없이 이어지는 새카만 어둠이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서, 자신의 몸을 찾아온 알파들과 사랑에 빠진 애들은 사창가에서는 팔지도 않는 사랑을 샀으니까. 그렇게 기어코 사랑에 빠진 애들은 하나같이 내 눈앞에서 죽어버렸으니까.

두려움에 달달 떨리는 입술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내 마른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품에 안아 넣은 채로, 차도헌은 언젠가 자신이 물어뜯었던 내 목덜미 위에 차근히 입술을 눌렀다.

“보채지 않을게, 그냥 이대로만… 이대로만 곁에 있게 해줘.”

“…….”

“너를 아프게 두지 않을게, 늘 네 곁에 있을게.”

귓가에 닿은 차도헌의 목소리는 고통에 겨운 신음 같았다가도, 내게 간절히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잠깐 사이에 사라질 수증기라도 되는 것마냥 두 팔에 힘을 주어 끌어안으면서도, 내게 확신을 주고 싶다는 듯이 드러난 피부 위로 수차례 입술을 찍어댔다.

“…나는 너를 계속 사랑할 테니까.”

맞닿은 심장이 같은 속도로 뛰어댄다. 은은하게 차오른 페로몬은 어지러이 섞여 기도를 벌리고 들어와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온몸이 진동할 만큼 거세진 심장 박동은 쿵쿵 뛰어대는 속도를 견디지 못할 만큼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차도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견디지 못할 만큼 가쁘게 달은 숨에 차도헌의 옷깃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꾸역꾸역 내 안을 채우는 감정이 무서워서, 나는 차도헌의 품에 숨어들 듯 몸을 구긴 채 그 품에 안겨 두 눈을 감았다.

“그래, 해볼게.”

차도헌의 가슴팍에 파묻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웅얼거렸다.

“해볼게, 그거… 해볼게.”

속닥이며 뱉어낸 말은 이윽고 뜨겁게 퍼붓는 키스에 온데간데없이 먹혀들었다. 다시금 후끈하게 치솟는 열기와 예민하게 달아오른 온몸이 차도헌의 품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며 달뜬 신음을 터트리는 그 순간은,

우습게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사창가 출신 오메가 도해영이 모든 걸 가진 극우성 알파 차도헌에게 사랑이라는 걸 해보겠다며 약속한 순간이었다.

***

한참을 잠에 헤매다 문득 달그락, 하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막 잠에서 깬 바람에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은은하게 켜진 드레스 룸 조명이 보였다. 이윽고 시커멓고 커다란 인영이 불쑥 걸어 나오더니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깼어?”

이미 나갈 준비를 다 마쳤는지 차도헌은 완벽한 수트 차림이었다. 잠깐 깼지만 더 잘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베개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푹신한 거위 털 베개를 품 안 가득 끌어안는 내가 웃겼는지 차도헌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다시 잠에 막 빠져드는 순간, 돌연 부스럭하며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물론 그 후로 이어지는 차도헌의 행동은 내 잠을 온전히 달아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뺨 위로 가볍게 차도헌의 입술이 닿았다. 두어 번 비슷한 자리를 맴돌며 촉, 촉 입맞춤을 남긴 차도헌은 이윽고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더니 드러난 이마 위에 다시금 입술을 내리눌렀다.

“더 자.”

말로는 더 자라면서 차도헌은 자꾸만 내 온 얼굴에 연신 뽀뽀를 해댔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자꾸 이렇게 건드리면 내가 아주 코오 잘도 자겠다!

결국 잠을 포기하며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떠올렸다. 탁 트인 통유리창 너머엔 해가 막 떠오르기 직전의 캄캄한 새벽하늘이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차도헌 덕에 내 생에 평생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침형 인간에 한층 가까워질 듯싶었다.

“지금 출근해?”

“응, 오 분 뒤에.”

말을 끝낸 차도헌은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곤 숙였던 상체를 다시 세워 앉았다. 내 시선도 자연스레 위쪽으로 향했다. 분명히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각도인데도 차도헌의 잘난 외모는 구김 하나 없이 완벽했다.

항상 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차도헌은 그에 맞게 푸른빛이 감도는 깔끔한 디자인의 셔츠에 네이비색 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 아래로 타이와 같은 색의 바지는 단단하게 차오른 허벅지 근육에 팽팽해진 채였다.

“예쁘게 입었네.”

손을 뻗어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나름 칭찬의 메시지를 보내자, 차도헌은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금 내 볼 위에 입술을 찍어댔다.

“오늘도 늦…게 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입맞춤 사이로 나도 모르게 툭 물음이 새어 나갔다. 하지만 뒤늦게 검열에 들어간 뇌 덕분에 문장은 정확히 뱉어지지 못하고 애매하게 얼버무려졌다.

차도헌의 어깨를 밀어내며 혀를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이 혀를 잘라내는 수밖엔 없겠다, 차도헌의 호화 맨션에는 숨어 들어갈 쥐구멍 하나 없을 테니까….

창피함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건 진작이었다. ‘오늘도 늦게 와?’라니, 차도헌의 평소 퇴근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을뿐더러 마치 이른 귀가를 기대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니냐고!

물론 차도헌과 함께 살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같이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차도헌의 출퇴근 시간을 속속들이 꿰게 된 것도 맞고,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차도헌의 스케줄 덕분에 이 넓은 집에서 혼자 덩그러니 시간을 때우는 게 좀 심심한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걸 혼자 느끼고 있는 것과 차도헌의 앞에서 입 밖으로 내뱉는 건 분명 다른 문제였다. 부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차도헌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길 바라면서 나는 뒤늦게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드라마 보면 대표이사는 땡땡이도 많이 치고 출근도 늦게 하고 그러던데, 왜 도헌 씨…는 안 그래?”

그렇게 덧붙인 말 속에도 복병은 숨어 있었다. 차도헌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약속한 새로운 호칭은 나로 하여금 무지막지한 수치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 ‘도헌 씨’라니, 평생 누구를 이런 호칭으로 불러 본 적이 없는데….

이미 입 밖으로 새어 나간 문장인데도 그 호칭만큼은 여전히 모래알처럼 내 혓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또다시 훅 몰아치는 창피함은 나를 아주 잘 익은 토마토처럼 만들었다.

“일찍 올게, 오늘은 저녁 같이 먹자.”

차도헌은 달아오른 내 뺨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 대답은 분명 내가 한 말의 속뜻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겨우 붙잡고 있던 체면을 내려놓곤 달뜬 볼을 차도헌의 손길에 맡겼다.

내 볼을 어루만지는 손에는 서늘한 페로몬이 옅게 풍겼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체취에 나는 차도헌의 시원한 손바닥에 얼굴을 부벼댔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낮게 가라앉은 차도헌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 큼지막한 손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열을 가늠하는 차도헌에게선 아까보다도 더 좋은 냄새가 났다.

“마지막 히트가 그 날 맞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묻는 차도헌에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차도헌이 말하는 ‘그 날’이라 함은 아마 강태산과 함께 숨어 있었던 시골에서 갑작스럽게 터졌던 히트 사이클일 터였다.

그날부터 다시 차도헌의 곁에서 지내면서 약을 꼬박꼬박 먹었으니까… 마지막 히트는 그날이 맞았다.

“아마도…?”

“그럼 아직 예정일이 아닌데.”

내 머리맡에 앉아있던 차도헌은 돌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그리곤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온 차도헌의 손에는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미 출근해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난 것 같은데 차도헌은 상자를 열어 체온계를 꺼내 들었다. 온도를 재는 뭉툭한 부분을 내 귀에 조심스레 밀어 넣곤 측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와중에도 차도헌은 다른 손으로 줄곧 내 이마를 짚으며 열감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윽고 자그맣게 들리는 비프음과 함께 체온 측정이 끝났다. 숫자가 적힌 작은 화면을 내려다본 차도헌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열이 좀 있는 듯싶었다.

온도계를 내려놓은 차도헌은 다급한 손길로 구급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침대 시트 위에 온갖 해열제와 감기약을 펼쳐놓은 차도헌은 패키지에 깨알같이 적힌 글씨를 노려보며 내게 먹일 약을 고르고 있었다.

차도헌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원래 사람은 늘 두통과 열을 달고 사는 것 아닌가? 게다가 열이 좀 나든, 누구한테 맞아서 몸이 아프든, 하루 푹 자고 일어나면 낫는 게 사람인데.

뼈가 부러지거나 어디가 찢어져서 피가 엄청 나지 않는 이상 그 이하의 것들은 내게 아픔의 범주에서 제외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열이 좀 나는 것도 나에겐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나 안 아파. 약 안 먹어도 돼.”

“해영아, 너 지금 38도야. 해열제로도 열이 안 내리면 병원 가야 돼.”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세우고 차도헌과 마주 앉으니, 몸이 이렇게 멀쩡히 움직여지는데 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해열제를 손에 쥔 차도헌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렸다.

“나 정말 안 아파. 봐봐, 멀쩡하잖아. 그리고 어떻게 아플 때마다 약을 챙겨 먹어? 조금만 참으면 익숙해지….”

조곤조곤 말을 내뱉던 내 입술은 이내 꾹 다물리고야 말았다. 잔뜩 굳어버린 차도헌의 얼굴은 화를 참아내는 것 같다가도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짙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결국 나는 차도헌의 손에 들린 약통을 뺏어 들었다. 그리곤 뚜껑을 벌컥 열어 해열제 두 알을 꺼냈다.

“알았어, 약 먹을게.”

새하얀 알약을 황급히 입에 털어 넣자 차도헌의 얼굴은 아까보다도 더 굳어졌다. 분명 차도헌의 화를 풀어주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더 역효과가 난 모양이었다.

미처 알약을 삼키기도 전에 내 양 볼을 눌러 입술을 벌리게 한 차도헌은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알약을 빼내고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다그치듯 내게 말했다.

“도해영! 너는 대체―”

“왜, 먹으라며!”

지지 않고 대들자 차도헌은 한숨을 참는 듯 깊은숨을 내쉬곤 차근히 말했다.

“빈속에 먹으면 안 돼, 아침 먹고 나서. 응?”

“그냥 먹어도 될 것 같―”

다시금 구겨지기 시작한 차도헌의 미간에 나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알았어, 아침 먹고 먹을게.”

분명히 정답일 내 대답에도 차도헌은 내가 못 미더운 건지 줄곧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았다. 이미 출근 시간을 훌쩍 넘긴 데다가, 차도헌의 성격상 이대로라면 나를 간병하겠다는 이유로 무단결근을 자처할지도 몰랐다.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꾀병을 부리는 사람이 되는 건 싫었다. 결국 나는 어색한 손짓으로 차도헌의 손에 깍지를 껴 잡으며 살살 달래듯 목소리를 냈다.

“시간마다 약 꼭 챙겨 먹을게. 그리고 아프면 바로바로 문자할게.”

“문자 말고 전화.”

“알았어, 그니까 빨리 출근해.”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내려와 깍지를 낀 손을 당겼다. 붙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문가로 이끄는 행동에 차도헌은 한숨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내 리드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건 처음이라 어색해하는 나와는 다르게 차도헌은 내 허리를 바투 끌어안고는 가볍게 입술 위로 입맞춤을 남겼다.

문득 언젠가 유명한 외국 로맨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것만 같아 괜히 어색해지려는 찰나에, 차도헌은 여전히 걱정을 떨치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프지 말고 잘 놀고 있어, 금방 올게.”

이윽고 뺨 위로 가볍게 맞닿는 차도헌의 입술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열이 나는 건 차도헌의 키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

차도헌의 지시대로 아침을 먹은 후에 해열제도 챙겨 먹고 나니, 서서히 해가 뜨는 듯 널따란 거실에 따스한 햇살이 비쳐들었다.

따뜻한 차가 담겨 찰랑이는 머그를 한 손에 쥐고 조심스레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은은한 햇빛이 일렁이며 소파 위를 덥히고 있었다.

넓게 트인 통유리창 앞에 놓인 소파, 창 너머로는 갈대가 우거진 한적한 연못이 보이고 언뜻 작게 새 우는 소리가 들리는 자리. 이곳은 차도헌의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적적함을 채우려 TV를 틀어둔 채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푹신하게 등에 닿아오는 쿠션의 포근함에 못 이겨 결국 들고 온 머그잔을 소파 테이블에 올려놓곤 둥글게 몸을 말아 누웠다.

어느새 차도헌과 메이팅을 약속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이건 차도헌과 내가 같이 살게 된 지도 일주일이 되었다는 소리다.

안전하게 메이팅을 받아내기 위해 나는 차도헌의 ‘진짜’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물론 그간 내가 지냈던 오피스텔과 대저택도 죄다 차도헌의 소유인 건 맞지만….

어쨌든 차도헌의 진짜 집이라 함은, 차도헌이 그간 실제로 생활하던 공간임과 동시에 우리의 관계가 쌍방 각인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곳임을 뜻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의 꿈을 내 집 마련으로 두고 사는데 차도헌은 무슨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처럼 집을 척척 사고 있으니, 원체 돈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옆에서 직접 겪게 되니 불현듯 위화감이 불쑥 생길 지경이었다.

대체 집이 몇 채냐는 내 질문을 자연스럽게 넘긴 차도헌은 집 구조를 알려주겠다며 나를 이끌고 집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지는 복도에 달린 여러 방들 중에 당연히 내 방이 있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아무리 봐도 이 집의 주인만이 누릴만한 고급스럽고 커다란 방을 소개받았다.

“이거 아무리 봐도 그쪽 방 아니야? 내가 여기서 자면―”

“당연히 같이 자야지. 나랑, 너랑.”

아무리 굴러다녀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지 않을 커다란 침대가 달랑 하나 놓인 방을 가리키며 그렇게 돈도 많고 집도 많은 차도헌은 굳이 나와 같이 자야 한다며 고집했고,

“절대 싫어, 차라리 정원에서 잘래.”

알파와의 동침이 두려웠던 나는 차도헌의 제안을 곧바로 거절했다. 만약 차도헌이 강제로 같은 침대에서 재운다면 곧바로 칼을 물어버리겠다는 식의 완강한 태도를 내보이면서 하루 종일 거의 반 협박식으로 차도헌의 의지를 꺾어내던 나에게, 하늘이 내린 벌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최대한 접촉을 늘리셔야 합니다. 페로몬 수치를 높이려면 그 방법뿐입니다.”

이미 쌍방 각인이 된 상황이기 때문에 분명 메이팅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아주 단단히 잘못 짚은 착각이었다. 채혈한 피를 분석해낸 페로몬 검사 결과지는 차도헌과 나의 불완전한 각인 관계를 냉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도해영 님의 페로몬 수치가 너무 저조합니다. 이대로라면 메이팅은 고사하고 자칫 각인 후유증에 시달릴 수도 있을 겁니다.”

차도헌은 건네받은 검사 결과 차트를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심각할 정도로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하필이면 먹고 있는 쿠키가 입 안에서 오독오독 부서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내가 저번처럼 채혈 후 쓰러질까 봐 차도헌이 준비해놓은 당 보충용 쿠키였다.

조용하다 못해 진지한 분위기 가운데 혼자 바삭바삭 소리를 내고 있으니 너무 민망할 지경이라, 나는 한입 베어 문 쿠키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많이 위험한 상태인 겁니까?”

기나긴 침묵을 깨고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내 입술 앞에는 아까 내려놓은 쿠키가 둥실 떠올랐다. 쿠키를 집어 든 손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는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 검사 결과지를 노려보는 차도헌이 있었다.

내 입 앞에 쿠키를 재차 들이밀며 마저 먹으라는 듯 권유하는 손짓에 나는 결국 오도독 소리를 내며 쿠키를 받아 물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쿠키의 부드러운 풍미가 이렇게까지 불편한 건 처음이었다.

“지금은 주의 단계지만, 빠르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진중한 목소리와 함께 내내 차트를 응시하던 주치의의 시선이 문득 나를 향했고, 갑작스럽게 날 향한 시선에 놀란 나머지 씹다 만 큼지막한 쿠키 조각을 꿀꺽 삼켰다.

부스러진 쿠키 조각이 목구멍에 꺼끌꺼끌 맺혔다. 달달한 홍차를 들이켰는데도 그 느낌은 오래간 가시질 않았다. 숨죽여 엄습하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치의는 문장을 끝내지 않았지만 나는 뒤에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결과 중 가장 높은 확률을 매긴 것이 바로 도해영의 죽음이라는 것을.

적어도 내가 아는 각인 후유증은 이랬다. 알파에게 일방 각인을 당한 오메가의 상태는 극도로 불안정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각인 상대의 지속적인 페로몬 공급이 끊기면 오메가는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식이었다.

어느새 내 눈앞에는 이미 죽어버린 애들의 얼굴이 하나둘 비쳐가고 있었다. 그 애들 역시 각인 상대의 지속적인 페로몬 공급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창가 오메가의 일방적인 사랑은 그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은수도 그 애들처럼 매일 밤 헐떡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잇새로는 오지 않을 그 알파의 이름을 끝없이 불러댔고, 고통이 치밀어올 때마다 모란의 닳아버린 낡은 마룻바닥 위에서 온몸을 비틀거리며 괴로워했다.

그런 은수의 곁에서 나도 이뤄지지 못할 희망을 바랐다. 그 알파가 업소에 찾아와 은수의 고통을 씻어주기를 바랐고, 어쩌면 그 남자가 은수를 정말로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비를 기다리던 마른 땅, 푸석하게 야윈 얼굴로 그렇게 꺼져가는 불씨처럼. 결국 은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택했다.

“페로몬 불균형은 각인 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특히나 메이팅을 원하신다면, 안정적인 페로몬 수치를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니 더욱 유의해주셔야 하고요.”

어두운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던 정신은 차분한 담당의의 목소리에 서서히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눈앞에 그려졌던 모란의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복도는 사라지고, 어느새 내 앞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넓은 거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제부터 잡고 있었는지, 차도헌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옅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긴장했던 몸의 근육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담당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차도헌을 바라보았다. 검사 결과를 들은 후부터 줄곧 진지하게 가라앉은 차도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도해영, 죽을 생각 하지 마.’

차도헌에게 각인을 당한 이후 스스로 목을 조르며 자살 시도를 했던 날,

‘내가 몇백 번이고 살릴 테니까.’

결의에 찬 단호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던 차도헌의 목소리.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차도헌에게서 언뜻 그날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사창가의 수많은 오메가들이 피하지 못했던 죽음을 내가 피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위험해지면… 정말 차도헌은 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줄까?

그 순간 차도헌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정한 시선으로 눈을 맞춘 차도헌은 내 표정을 살피며 다시금 맞잡은 손을 어루만졌다. 괜찮냐고 물어오는 듯한 눈빛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더라도 내 양 볼이 상기되어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던졌던 물음에 대한 답은 차도헌에 의해 내려진 듯했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 별난 극우성 알파는 나를 죽게 놔두진 않을 것 같았다.

보잘것없는 극우성 오메가 하나 살려보겠다고 매번 정밀 검사를 돌리는 것도, 내 페로몬 수치가 낮다는 담당의의 말에 당장이라도 페로몬 클리닉 같은 것을 끊을 기세인 모습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확실한 답은 역시나 거기에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차도헌의 눈.

그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죽어서 멈춰버린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댈 만큼, 그 안에는 깊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향하는 차도헌의 시선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의 신경 말단이 간질대는 것 같았다. 다시금 온몸에 퍼지는 묘한 느낌을 견디기 위해 나는 차도헌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옆에 놓인 쿠션을 세게 움켜쥐었다.

“현시점에서는 약물 투여가 조금 늦은 감이 있어 보입니다. 두 분 다 특수 형질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요.”

“…….”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물리적으로 접촉을 늘리는 겁니다. 페로몬 교감의 빈도를 높여 자연스럽게 체내에 페로몬이 섞이게 하는 방법이라면 페로몬을 일정 수치 이상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차트를 열심히 읽는 척을 하던 나는 담당의의 말에 고개를 확 들어 올렸다.

그 ‘해결법’이라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도 때도 없이 차도헌과 섹스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밖엔 해석이 되지 않았다.

분명 같은 말을 들었는데도 도통 표정에 변화가 없는 차도헌의 얼굴을 봐서는 내가 잘못 이해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무엇보다도 메이팅을 위해 ‘같은 침대에서 잠자기’를 요구했던 차도헌이었기에 특히나 저 말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야 했다.

검사 내내 잠자코 앉아만 있다가 갑자기 이 타이밍에 질문을 하는 게 좀 부끄러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그럼 혹시, 매일… 해야 하나요?”

대충 얼버무린 질문에 담당의는 나를 나무라는 대신, 오히려 좋은 질문을 했다는 식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도해영 님의 상태는 금이 간 얄팍한 유리잔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관계를 통해 과다하게 페로몬을 주입하면 몸이 견디지 못할 거예요. 수치가 일정 이상으로 올라올 때까지 관계는 피해주시고, 최대한 가벼운 감도의 스킨십 위주로만 진행해주십시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오히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갑자기 날아온 섹스 금지령에 당황해있는 사이, 담당의는 내 몸 상태에 맞는 약한 강도의 억제제를 새로 처방해주고 차도를 위해 앞으로 지켜야 할 사항 몇 가지를 체크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페로몬 검사가 남기고 간 정적은 아마도 차도헌의 가라앉은 침묵으로 인한 것이었다. 당장 메이팅은 고사하더라도, 내 페로몬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낮다는 검사 결과를 들을 때부터 줄곧 굳었던 차도헌의 표정은 담당의가 떠나고 난 후에도 쉽게 풀리지 못했다. 그렇게 단둘뿐인 공간에는 미칠 듯한 적막만이 남아버렸다.

빈 찻잔 바닥에 둥그렇게 남은 홍차 자국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돌연 허공으로 몸이 들렸다. 깜짝 놀라서 버둥대는 내 몸을 단단히 안아 올린 차도헌은 널따란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차도헌이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는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영역이었다. 오늘 있었던 페로몬 검사는 하루 종일 합방을 주장한 차도헌의 손을 들어주었으니. 나는 일말의 반항도 없이 조용히 차도헌의 품에 몸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넓은 복도를 지나 널따란 침실에 다다르자 차도헌은 내 몸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서 방에서 나가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침실에 남겨졌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차도헌은 물 잔과 약통을 들고 돌아왔다.

손톱만 한 억제제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꼴깍이며 마시는 내 모습에 그제야 차도헌은 표정을 풀었다. 침대 옆 협탁에 다 마신 잔을 내려놓자 잘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저 표정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잘 거야?”

나야 아까부터 줄곧 편한 차림이었지만 차도헌은 출근할 때와 같은 수트 차림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차도헌의 옷차림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차도헌은 목을 조이는 넥타이가 불편했는지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며 답했다.

“아직 일이 남아서. 너 재우고 갈게.”

그리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진 행동은 나를 목석 그 자체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뭐 하는…!”

누워있는 내 등 뒤로 몸을 누인 차도헌은 자연스럽게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더니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등 뒤로 닿아오는 단단한 근육이나 엉덩이에 닿아오는 존재감 넘치는 고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차도헌의 심장 박동이 쿵쿵대며 귓가에 울리는 기분은 내게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차도헌의 커다란 품은 어딘가 나를 압도하는 기분마저 들게 하는데, 맞닿은 몸에 진동이 일 정도로 묵직하게 뛰어대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몸이 차도헌에게 통째로 먹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기게도 이 상황에 목석이 된 건 나 하나뿐이었다. 내게 이런 종류의 스킨십은 다리를 벌리는 것보다 훨씬 낯뜨겁고 부끄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가 웃겼는지 차도헌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런 것쯤은 익숙하다는 듯이 구는 차도헌을 향한 짜증과 이런 것 하나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짜증이 배로 울컥 치밀어올랐다.

“우리 자주 이러고 잤는데, 몰랐어?”

차도헌은 큼지막한 손으로 부드럽게 내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어깨 위로 잘게 입을 맞췄다. 이런 스킨십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엔 두어 번에 불과한데 그걸 ‘자주’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하지만 그런 의문은 슬금슬금 아랫배에 몰리는 열기로 인해 옅어지기 시작했다.

손이 더 아래로 향했으면 하는 마음과 어서 썩 손을 떼버리라는 마음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 차도헌은 돌연 배를 문지르던 손을 딱 멈추더니 내 골반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내 차도헌은 무슨 솜인형 뒤집는 것마냥 내 몸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가뿐히 뒤집어버렸다.

갑자기 차도헌과 마주 보게 되자 나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더라도 차라리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백허그가 더 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는 차도헌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괜히 이리저리 구겨진 시트를 손바닥으로 슥슥 밀어 펴댔다. 그런 내게 차도헌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우리 자기는 자느라 몰랐으려나?”

정말 간만에 듣는 차도헌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나를 제대로 놀려대는 중이었다.

“내가 자는 동안 그쪽이 그러는 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런 이상한 걸로 부르지 마!”

얼굴에 열이 오른 건 한순간이었다. 차도헌이 불쑥 내뱉은 이상한 호칭만큼이나, 내가 잠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제 와 알게 된 나로선 당황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난 이런 건 연인들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동안 차도헌이 나를 이렇게 끌어안아 줬다는 거잖아….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잠이나 자고 있었던 거고!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더욱더 차도헌과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워있기 힘들어졌다. 창피할 정도로 발갛게 열이 오른 두 볼이 화끈거렸다. 도저히 밀리질 않는 가슴팍을 꾹꾹 밀어내며 발버둥을 쳐봐도 오히려 지긋한 시선을 받을 뿐이었다.

결국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법은 하나였다. 나는 곧장 차도헌의 셔츠 앞섶을 움켜잡곤 내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순간 훅 끼치는 진한 페로몬에 괜한 짓을 했나 후회가 들었지만, 당장 차도헌의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숨길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나는 그대로 드넓은 가슴팍 위로 얼굴을 푹 묻었다. 갑자기 내게 멱살이 잡혀버린 차도헌도 웃음을 터트리며 내 허리를 마주 안았다.

“좋다. 네가 안아주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

퉁명스럽게 내뱉는 목소리에도 차도헌은 나를 밀어내기는커녕 더 다정한 몸짓으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커다란 품속에 잡아먹히듯이 안겨 있자니 때를 모르고 심장은 무시무시하게 뛰어대고 있었다.

이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럽게 허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따라 차도헌의 페로몬은 짙어지기 시작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온몸을 푹 적실만큼 듬뿍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을 어색하게 들이쉬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페로몬 정도는 알아서 잘 흡수할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 허당이네.”

“그래, 나 허당이야. 됐어?”

“사람 걱정시키는 일엔 아주 재주가 넘치고.”

“…….”

낮게 읊조리며 마주하는 눈빛에 나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차도헌의 말대로, 난 페로몬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허당 오메가였다.

쌍방 각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페로몬 수치가 낮은 기이한 현상은 결국 내 탓이라는 결론이 났다. 분명 쌍방 각인으로 육체는 긴밀히 연결되었는데, 일방 각인을 당한 오메가처럼 도통 차도헌의 페로몬을 흡수하질 못하는 내 상태를 심각하다고까지 말한 담당의는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 본능이 차도헌의 페로몬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 단계에서, 내 몸이 이미 쌍방 각인까지 된 차도헌의 알파 페로몬을 거부하는 상황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결국 메이팅은 단순히 차도헌을 사랑하는 감정을 품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알파를 향한 내 극심한 공포가 빚어낸 결과이자, 어찌 보면 나도 잘 모르는 내 무의식을 다스려야 하는 난제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 문제를 헤쳐야 할지 깊은 고민과 함께 몰려오는 때늦은 자아비판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만약 페로몬 결핍 현상으로 내 목숨까지 위험해지면 동시에 차도헌의 목숨도 위험해지니까. 굳이 나 때문만이 아니라 차도헌 때문에라도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불안한 감정을 굳이 내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어느새 내 상태를 파악한 차도헌은 찌푸린 미간을 엄지로 부드럽게 눌러 펴곤 이마 위로 입술을 맞댔다. 잘게 이어지는 입맞춤이 오히려 내 부끄러움을 부추기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내 몸을 붙들고 쪽쪽 소리를 내던 차도헌은,

“선택지를 줄게. 이 중에서 하나 골라 봐, ‘자기야’, ‘도헌이 형’, ‘마이 달링’.”

갑자기 이상한 단어를 하나둘 내뱉기 시작했다. 그가 읊조리는 그 낯선 호칭들을 듣고 있자니 절로 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왜 그런…, 이상한 걸 말해?”

차도헌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품에서 벗어난 나는 태연한 얼굴로 누워있는 그 얼굴을 응시하며 혼란스러워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시답잖게 이상한 소리를 퍼붓는… 그런 알파였나?

“호칭 좀 바꾸자.”

“왜? 지금도 잘 부르고 있는데.”

“‘그쪽’이랑 ‘당신’이?”

차도헌의 반박에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나름 친밀하게 부른다고 부른 거였는데, 객관적으로 보니 차도헌의 말마따나 절로 벽이 느껴지는 호칭이었다.

표정 위로 드러난 생각을 단박에 읽어낸 차도헌은 기다렸다는 듯 아까의 선택지를 다시 들려주는 수고까지 자처했다. 어쩐지 기대감 비슷한 것이 차오른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피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엔 없었다.

“더 얘기해줘? 종류는 많아. ‘허니’, ‘여보’, ‘달링’―”

“‘도헌 씨’로 할래.”

그의 말을 썩둑 자르며 뱉어낸 호칭에 차도헌의 반응은 그다지 좋진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좁히며, 그건 애칭이 아니라는 피드백을 주기까지 했다. 차도헌은 제대로 된 호칭을 선택하라며 다시금 선택지를 일러줬으나 난 죽어도 이 알파를 ‘허니’나 ‘달링’ 같은 걸로 부를 생각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닭살이 아니라 가시가 돋을 것만 같았다.

“다른 걸로 해. ‘도헌 씨’ 같은 건 안 돼.”

내가 제안한 호칭을 못 박듯 거절한 차도헌의 눈에는 얄궂은 장난기까지 서려 있었다. 대체 나와 무슨 실랑이를 벌이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차도헌의 주장을 아주 부드럽게 꺾어내기로.

사창가 오메가라는 수동적인 삶을 살면서 악을 쓰거나 싫은 소리 하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내겐 미인계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무기를 차도헌에게 아주 적절히 사용할 예정이었다.

“…나는 도헌 씨가 마음에 드는데.”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눈꺼풀을 자주 깜박이고, 작게 달싹이는 입술로는 예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 얼굴이 잘 통한다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었다. 업소에서도 내가 소위 ‘예쁜 얼굴’을 할 때마다 내 엉덩이에 꽂힌 지폐는 늘어갔으니까.

“도헌 씨는 별로야?”

나른하게 사근대는 목소리에 맞춰 다시금 시선을 내리깐 채 두어 번 눈꺼풀을 깜박였다. 손끝으로 가슴팍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서투른 척 유혹해대는 것도 나름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차도헌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그는 내 미인계에 홀딱 넘어가기는커녕, 얼굴을 찌푸린 채 굳은 입매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내 수법이 간파당한 건가?

“…왜, 왜 그래?”

“너, 이런 거 하지 마.”

짙은 한숨과 함께 차도헌은 내 몸을 끌어안았다. 난데없는 포옹에 당황한 나를 품 안에 파묻다시피 안은 차도헌은 굳은 손길로 내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하기 싫다는 거 억지로 안 시켜. 내키지 않으면 맘껏 때려치우고, 다른 의견이 생기면 대화로 풀어. 생각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응?”

내게 그런 말을 내뱉는 차도헌의 목소리는 어쩌면 괴로움을 견디는 사람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그런 차도헌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나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가식, 예쁜 척, 아파도 안 아픈 척, 안 아파도 아픈 척. 거짓말과 위선으로 가득 찼던 내 삶을 한 번에 부정하는 듯한 그의 말 앞에서 나는 몰려오는 창피함을 견뎌내야 했다.

적어도 내가 있던 곳에서는 그래야 했다. 차도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버둥이었고, 만약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우린 더 아프고 더 힘들었을 테니까.

“가식적인 오메가는 싫은가 봐?”

“그 말이 아니잖아.”

“근데 어쩌지, 난 살면서 배운 게 이런 것밖엔 없는데.”

비뚤어진 목소리가 마구 튀어 나갔다. 정작 싫은 소리 하나 못 하고 솔직하게 굴지 못한 건 나면서, 나는 차도헌을 더욱 몰아붙이고 있었다.

“난 싫다고 발버둥도 못 치고, 의견 피력도 못 하는 멍청한 오메가야. 이제 보니 질려? 너무 가식 같아? 그러게 왜 나한테 그랬어, 왜 나한테―”

악에 차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죄다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마구 날아들었다. 그 조각에 상처를 입는 건 결국 바보 같은 도해영과 그런 도해영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 바보 같은 차도헌이었다.

“사랑해, 도해영.”

“…….”

“왜 자꾸 부정을 해. 네가 가면을 쓰든 가식적이든 나한텐 다 사랑스러운 도해영일 뿐인데, 왜 자꾸 그 간단한 걸 까먹어.”

다시금 차도헌의 따스한 품이 나를 부둥켜안았다. 먹먹한 울음소리도, 그간의 상처도 모두 녹여버릴 만큼 차도헌의 품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온기를 잃어 차갑게 얼어붙은 몸 위로 잔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차도헌은 내 피부 위로 사랑을 속삭이며 쉼 없이 입술을 내리찍었다.

“…미안해.”

깜박이는 눈꺼풀 아래로 둥그런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내 비겁한 사과에도 차도헌은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 두 뺨을 부드럽게 문질러주었다.

“울어도 예쁘네.”

“거짓말하지 마….”

“또 까먹지, 아주.”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낸 차도헌은 울음에 잔뜩 먹힌 입술 위로 진한 입맞춤을 남겨주었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밀고 들어와 부드럽게 뒤섞이는 사이로, 어느새 그의 어깨를 세게 끌어안은 채 밭은 숨을 내쉬며 헐떡이던 나는 갑자기 콩, 부딪힌 이마에 파드득 놀라고 말았다.

“사랑해.”

간지러운 속삭임은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 문장이 채 읽히기도 전에 다시금, 차도헌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해영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댄다.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난리를 피워대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의 눈빛에 내 몸이 다 녹아서 투명한 물이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두 뺨이 발갛게 물든 창피한 꼴을 그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쥐구멍을 찾는 사람처럼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안겼다. 열이 오른 뺨을 그의 시원한 페로몬에 식히며 차근히 숨을 내쉬는 동안,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너 그렇게 안 해도 예쁜 거 알아.”

“―!”

“어디 하나 무기가 아닌 게 없어. 얼굴도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운 우리 도해영 씨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열이 오른 목덜미 위로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그의 입술이 자국을 남기는 동안에도 나는 빳빳하게 굳어버린 채 불에 덴 듯 후끈대는 얼굴을 달래야만 했다.

“좋은 향기 난다, 해영아.”

하지만 차도헌은 내가 숨을 돌리는 그 틈을 못 참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깊은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마치 오메가를 각인시키는 알파처럼 목덜미에 깊게 입 맞추며 얕게 자국을 남기기 시작하는 그의 행위에 나는 열기에 고인 눈물을 질끈 감으며 그의 품 안에서 파드득 떨어댔다.

장난치듯 송곳니로 피부 위를 살살 긁으며 자극을 주는 행위에 발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그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곤 앓는 소리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들을 내뱉는 내 앞에서, 차도헌은 돌연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질끈 감은 눈가를 쓸어주었다.

“왜 겁을 먹어.”

“무…, 물릴까 봐 그렇지!”

몸을 달달 떨어대며 내뱉은 말에 다시금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 물어.”

그런데, 별안간 단추가 툭툭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 눈앞에 차도헌의 맨 가슴이 내보여졌다. 탄탄하다 못해 윤이 나는 섹시한 구릿빛 피부를 훤히 드러낸 채 차도헌은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뭐, 뭘 하라고?”

“마음껏, 원하는 만큼 물어.”

그 여유로운 태도에 괜한 오기가 불쑥 들었다. 생각해보니 줄곧 이리저리 깨물리고 심지어는 피부가 뜯겨나갈 만큼 목덜미가 물린 건 내 쪽이었다. 차도헌도 피부를 죄 짓씹힘을 당하는 게 얼마나 아픈지 한 번 겪어봐야 한다는 복수심이 활활 타오르는 순간에, 나는 그의 어깨를 답삭 끌어안은 채 매끈한 목덜미 위로 입술을 묻었다.

촉, 촉 가벼운 입맞춤 사이로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단단한 피부 위를 살살 긁으며 자극을 주자 짙은 숨소리가 그에게서 새어 나왔다. 그 반응에 신이 난 나머지 나는 그의 피부를 짓씹기는커녕 가볍게 잘근잘근 씹어대며 애를 태웠다.

늘 차도헌에게 목덜미를 내보이기만 했는데 이렇게 복수하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물론 복수의 탈을 쓴 각인 행위이지만….

잠깐만. 각인?

“근데… 언제 나한테 각인한 거야?”

분명 차도헌은 언제 내게 각인이 되었는지 제대로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우리가 쌍방 각인이 되었다는 것도 몰래 훔쳐 듣다가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차도헌에게 목덜미를 제대로 물려버린 날 그에게 일방 각인을 당했다. 그 후로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차도헌과 쌍방 각인임을 알게 되었으니, 적어도 그사이에 차도헌이 내게 각인을 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분명 차도헌의 목덜미 같은 건 물어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길에서 내가 너를 붙잡고 극우성이냐고 물어봤던 날, 기억해?”

“응.”

그런데 차도헌은 뜬금없이 우리가 처음 본 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더러운 알파 새끼들에게 당장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그 끔찍한 날은, 차도헌이 나를 구해줬던 날이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그날이야. 내가 네 페로몬에 각인한 게.”

“그건, 그건 말이 안 돼. 다른 날에 각인한 거 아냐? 그냥, 당신이 착각한 건 아냐?”

차도헌의 말에 허둥지둥할 만큼 부정을 내뱉는 이유는 별달리 없었다. 각인은 그저 체취를 맡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목을 무는 직접적인 행위만큼, 강렬한 각인의 순간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페로몬을 맡는 것만으로는 절대….

“아니, 가능해.”

“…….”

당황한 나를 더욱 당황에 빠지게 만든 차도헌의 담담한 답변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귀엔 확신에 가득 찬 고백처럼 들렸다.

“난 너를 5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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