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르르르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볼을 타고 울렸다. 빠르게 오피스텔 안을 후비고 다니며 나를 찾는 기자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부디 그들이 침실까지 들어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매만졌다. 하지만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침입자들이 내는 무시무시한 소음을 견뎌내는 내 앞으로, 긴박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도해영, 해영아!”
이상했다, 분명 기자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내 귀가 잘못됐는지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내가 있는 침실을 향해 발걸음이 가까워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머리를 더 구겨 넣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하늘은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침대 프레임에 걸린 뒤통수는 더 이상 나를 침대 아래에 숨지 못하게 했고, 어느새 내 얼굴 앞에는 번쩍거리는 구두가 있었다.
“대체 왜 여기에 들어가 있어!”
이상하다, 또다시 들린 목소리도 차도헌의 목소리였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고민할 새도 없이 단단히 붙잡은 손길에 밭에서 무 뽑히듯이 침대 아래에서 쑥 빠져나오자 펄럭 소리와 함께 커다란 천이 얼굴에 덮였다.
이내 가볍게 내 몸을 안아 올려 오피스텔 안을 가득 채운 인파를 헤치고 빠져나가는 이 남자는, 분명 차도헌이었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정체를 묻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차도헌의 페로몬만큼은 그 누구보다 속속들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 시작은 서늘한 바람이었다. 울창하게 펼쳐지는 숲 내음을 뒤로 건조하게 맡아지는 우드 향과 쌉쌀한 초콜릿의 향을 뒤로, 결국 펼쳐지는 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설원의, 싸늘하다 못해 슬픔마저 느껴지는 쓸쓸한 겨울의 체취.
그 추위를 견디고 기어이 뜨거운 태양을 안에 품은 강인한 알파의 페로몬, 그 안에서 나는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차도헌의 품 안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페로몬으로 푹 적셔진 채, 밀려오는 안정감에 몸을 맡기며 그 체취를 한껏 들이쉬었다.
그가 내뿜는 페로몬에 푹 적셔진 채 나는 그의 품 안으로 더욱더 파고들었다. 그가 흘려주는 페로몬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끔, 지금까지의 일이 전부 꿈이라는 것처럼 나를 부드럽게 감싸오고 있었다.
***
얼굴을 덮은 재킷이 사라진 건 주변이 한없이 조용해진 후였다. 내 이름을 외쳐대는 고함 소리도,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지는 카메라 셔터 소리도, 세상에 남은 건 오롯이 정적뿐이라는 듯 고요해진 곳.
거기엔 차도헌이 있었다.
차 조수석에 나를 태운 차도헌은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시동을 걸었다. 급발진을 하듯 곧장 속력을 낸 타이어가 찢어질 듯한 굉음을 내지르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차는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벨트 매, 도해영.”
핸들을 꺾을 때마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차도헌은 화를 내듯이 소리쳤다. 급회전에 급정거, 급발진까지 다채롭게 과격한 운전을 선보이는 덕에 조수석에서 하염없이 흔들리던 나는 다짜고짜 혼이 나기까지 했다.
“당신부터 벨트 매! 면허정지 당하는 게 꿈이야?”
다시금 쿵, 하며 창문에 이마가 부딪치는 와중에도 홱 쏘아붙이자 차도헌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돌연 내 쪽으로 팔을 뻗어 낚아채듯이 안전벨트를 움켜잡고는 순식간에 내 몸에 벨트를 채워버렸다.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 잠시나마 느꼈던 정적이 마치 단잠 속 꿈이라도 되는 양, 차도헌이 지나가는 도로마다 클랙슨 소리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차도헌의 차에만 타면 광란의 질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차 안에서 차도헌을 억제할 사람은 나뿐이라는 이 상황이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
“제발 속도 좀 줄여, 응?”
“…….”
“이러다 사고 나면 어떡해, 당신 죽으면 안 되잖아!”
언젠가 이 보조석에 앉아서 고속도로 위를 미친 듯이 내달렸을 때, 속력을 줄여달라는 내 발악에 차도헌은 순순히 액셀을 밟은 발을 떼어내 주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의 차도헌은 달랐다. 오히려 내 말에 반대로 행동하겠다는 듯 더더욱 액셀을 짓눌러 밟는 차도헌 덕분에 110km를 가리키던 계기판 바늘이 서서히 움직여 140km를 향하고 있었다.
“나보고는 목숨 간수 잘하라고 했으면서 대체 왜 이래! 도로 위에서 죽고 싶어?”
“너 바보야? 뒤에 따라오는 기자들 안 보여?”
“내 이름이고 출신이고 뭐고, 이미 죄다 들통 난 걸 도망가서 뭐 하는데!”
“널 지켜야 하니까!”
다 소용없는 짓이라며, 쓸모없는 도주 행위라고 덧붙이려던 내 입술이 돌연 딱 붙어버렸다.
이번에도 차도헌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말을 했다.
‘지켜줘야 한다’는 말은 나같이 하찮은 오메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그런 건 나 자신조차도 욕심이라는 걸 잘 아는 말인데.
“…왜 나 같은 거한테 그렇게 신경을 써?”
그제야 내 두 눈에 피범벅이 된 채로 핸들을 움켜쥔 차도헌의 손이 보였다.
“대체 왜, 내가 뭐라고?”
아마도 현장 취재 보도가 황급히 끝났던 건 차도헌이 카메라를 부수었기 때문이겠지.
차도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액셀이 아닌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 뒤로, 거대한 저택의 철문이 잠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니.”
차도헌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핏발이 선 눈동자로 뺨에는 핏방울을 두어 방울 묻히고는, 읊조리듯 묻는 어투에는 애써 분노를 꾹꾹 담아내는 듯 인내심이 깃들어 있었다.
“…나한테 묻지 마. 이제껏 죄다 당신 마음대로 했잖아.”
“도해영, 지금 진지하게 묻는 거야.”
고개를 옅게 가로저으며 차도헌은 다시금 내 두 눈을 응시했다. 숨소리조차 내기 벅찰 만큼 가라앉은 정적 사이로 차도헌의 손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뚝, 뚝 소리를 내며 가죽 시트 위를 적셨다.
나는 차도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차도헌의 눈동자 속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설원은 멍청한 나로 하여금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전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그리곤 그 시선이 닿는 곳을 향해 손을 뻗어 피가 줄줄 새는 차도헌의 손을 움켜잡았다.
“우선 들어가, 들어가서 이것부터 어떻게 좀 해.”
언제부터 내게 이런 말 돌리기 능력이 생겼을까. 차도헌은 내 말에 허탈한 듯 웃어 보이더니 짤막하게 한마디를 뱉었다.
“그래.”
팽팽하게 당겨졌던 갈등 속 찾아온 나름의 휴전이었다.
***
깨진 카메라 렌즈에 찢어진 상처 사이로 소독약이 들어가자 많이 따가운 듯 차도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전히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는 상처 아래로 소독솜을 갖다 대며 나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손등 위로 소독약을 부었다.
방금까지도 차 안에서 화를 억지로 내리누르는 것처럼 보였던 그는 지금만큼은 침착한 모습이었다. 덩달아 나도 입술을 꾹 다문 채 적막을 이어 나갔다.
잘게 찢어진 상처 위로 새살 연고를 듬뿍 바르고 큼지막한 드레싱 밴드를 붙이는 것으로 응급처치는 마무리되었다. 크게 찢어진 왼손에 비해 오른손은 생채기가 몇 개 생긴 것을 제외하곤 괜찮은 편이라 구급상자를 뒤지며 작은 크기의 반창고를 찾는데, 문득 머리 위에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만큼은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는데… 의도치 않게 일이 이렇게 됐어. 미안해.”
“…….”
“기사 덮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최대한 빨리 해볼게.”
차도헌의 말에도 나는 그저 구급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약을 뒤적였다. 저 담담한 목소리로 차도헌이 어떤 말을 뱉을지 가늠이 안 됐다.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도 나는 몰랐다. 그저 찰나의 감정이라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더 아래로 숙이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였다.
“…쌍방 각인이 된 상태지만 다행히도 아직 메이팅까지는 안 됐어. 약물로는 쌍방 각인을 충분히 풀 수 있고.”
약상자를 하나둘 훑어 내리던 손이 불현듯 얼어붙었다. 그건 언젠가 내가 몰래 훔쳐 들었던 이야기였다. 차도헌이 개발한 신약이 일방 각인을 풀 수 있다는 얘기. 알파에 대한 안전성은 확보했지만, 오메가의 안전성은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그 약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약물은 아닌 것 같다.”
담담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차도헌의 얼굴을 쳐다봤다. 약물은 아닌 것 같다니, 그것 말고도 쌍방 각인을 풀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일까?
“오윤주와 약혼을 깰 거야.”
하지만 내 귀에 들린 건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
“소송 때문에 당분간은 좀 복잡해지겠지만, 그것만큼 확실하게 일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야, 약혼을 깨다니, 대체 왜?”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너를 두고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아.”
이번에, 차도헌은 제대로 문장을 끝냈다. 얼버무리지도, 문장을 절단내지도 않고. 그는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꾹 깨물린 입술이 따끔거렸다. 찢어진 것처럼 쓰라린 아픔이 몰려오는 사이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차도헌의 눈을 피했다.
차도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 그건 분명 나의 시나리오에는 없던 이야기다. 내가 차도헌을 사랑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차도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건 언제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니까. 늘 내 주위에 있었던 일이라곤 돌아오지 않을 사랑에 목매어 죽어버린 애들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차도헌은 내게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다.
“언제고 너만을 사랑할게. 내 전부를 걸고 도해영, 너를 사랑할게.”
“…….”
“내 메이트가 되어줘.”
차도헌의 두 눈이 내 얼굴을 지긋이 응시했다. 또다시 펼쳐진 무한한 설원 안에,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이번엔 나와 차도헌이 함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