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8/43)

2.

잠에서 깬 건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다.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하는 감각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며 고요한 새벽 공기를 조용히 들이쉬었다. 침대 머리맡부터 거실까지 길게 이어지는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보였고, 난방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공기에 하늘하늘한 커튼 자락이 부드럽게 살랑댔다.

굳이 고개를 돌려 침대 옆자리를 확인하지 않아도 차도헌이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차도헌은 잠자리가 끝나면 늘 내가 잠든 사이에 조용히 오피스텔을 나가곤 했었으니까.

오히려 나로선 그게 마음이 편했다. 기대감은 괜한 상처만 남기니까, 차라리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게 신사적인 태도일지도 몰랐다.

몸 곳곳에는 정사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지만 섹스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이건 업소에서 일을 하면서 생긴 습관 중 하나였다. 몸을 부대끼면서 일어난 일들을 굳이 기억해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나를 바라보던 눈이나 내게 했던 말들, 그런 건 부러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그건 차도헌과의 섹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차도헌이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내게 어떤 말을 속삭였는지, 내게 어떻게 입을 맞추고 내 몸을 어떻게 안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속속들이 기억해봤자 상처를 받는 건 나뿐이라고. 그저 뜨겁게 몸이 맞닿고 정신없이 이어지는 쾌락만을 기억하라고, 내가 오직 기억할 것이라곤 오직 본능을 좇는 두 짐승의 정사일 뿐이라고.

결국 내게 남은 기억은 이런 것들뿐이다. 헐떡이던 숨과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의 온도, 혼미할 정도로 짙었던 페로몬. 집요하게 이어지는 입맞춤과 거칠기에 그지없는 본능에 충실한 행위들.

늘 그랬듯 커다란 손아귀에 고개가 단단히 붙잡히고, 이내 시선은 맞닿았다. 피할 수조차 없게 허리를 감싸 안으며 차도헌은 가쁜 숨을 내쉬는 내 입술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곤 호흡이 닿는 거리에는 차도헌의 얼굴이, 내뱉는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힐 정도로, 차도헌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오롯이 비출 만큼.

‘…도해영, 내 눈 봐.’

그 이후의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깨끗하게 칼로 도려낸 것처럼, 그 말을 내뱉는 차도헌의 얼굴도, 목소리도, 내 기억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다. 알 필요도 없었다. 떠올릴 수조차 없게 휘발된 기억은 아마도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만약 중요하더라도 나는 가뿐히 흘려보내는 것을 선택할 거였다.

그럼에도, 생각은 답지 않게 이리저리 휘몰아쳤다. 그건 전부 떠나간 자리에 남은 차도헌의 옅은 페로몬 때문이다. 기억은 잊을 수 있어도 깊게 밴 체취는 지워내기 힘든 법이니까.

한번 깬 잠은 돌이키기 어려웠다. 게다가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 덕에 잠기운은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싱크대 위에 엎어둔 컵이 미끄러졌나 하는 생각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게 누구인지 가늠해보기도 전에 나는 놀란 심장을 붙잡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분명 차도헌이었다.

만약 내가 페로몬을 맡을 수 없었다면 분명 도둑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차도헌이 아직 오피스텔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내겐 이상하리만치 낯선 일이었다. 페로몬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컹거렸다. 이유를 당장 헤집어보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이제는 가까워진 페로몬에 내 몸이 푹 절여질 지경이었다. 머지않아 시트를 정돈하는 듯 바스락, 소리가 났고 매트리스 한쪽이 기우뚱하며 눌렸다가 다시금 중심을 되찾았다. 이내 단단한 가슴팍이 등 뒤에 닿았고 뜨거운 체온이 조심스레 나를 안았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에 놀란 건 나뿐이었다. 익숙한 듯 내 허리를 끌어안은 차도헌의 팔뚝이나 등 뒤에 닿아오는 느긋한 심장 박동은 이런 걸 자주 해본 사람처럼 능숙하고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내 심장은 이런 걸 처음 당해보는 사람처럼 정도를 모르고 팔딱댔다.

아직 차도헌은 내가 잠에서 깼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답지 않게 내숭을 떨며 잠든 척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도 않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차도헌이 벌이는 행각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숨죽여 호흡을 골랐다.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몇 번, 겨우 박동이 진정되나 했는데 허리를 안았던 차도헌의 손이 미끄러지듯 몸 위를 유영했다. 다시금 나는 딱딱하게 굳어 그대로 얼음이 됐다.

보들보들한 샤워 가운은 차도헌의 손길에 허물없이 내 한쪽 어깨를 내보이고야 말았다. 설마 내가 잠든 사이에 강제로 목덜미를 씹어놓는 건 아니겠지, 무럭무럭 솟아나는 의심과 첩첩이 쌓아둔 경계는 이어지는 행위에 어이없게 허물어졌다.

드러난 피부 위로 촉, 촉 부드럽게 입을 맞추는 소리에 뺨에 열이 확 올랐다. 뼈가 톡 튀어나온 어깨선을 따라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던 입술은 목덜미를 지나 귓불까지 이어졌다. 느긋하게 숨을 들이쉬며 몇 차례고 입술을 내리찍는 행위에 절로 발끝이 곱아들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숨을 참았다. 자꾸만 가슴이 간지러워서 이러다가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칼에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입맞춤이 한없이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을 틈타 나를 온통 들쑤셔댔다.

차츰 어깨 위로 쏟아지던 입맞춤이 잦아들고, 이내 팔을 가볍게 쓸며 내려간 차도헌의 손이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매만지던 것도 잠시 차도헌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차갑게 얼어붙은 금속이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부드럽게 끼워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탄식에 가까웠던 한숨의 의미도, 끝없이 쏟아졌던 입맞춤도, 내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차도헌의 고백들도. 어처구니없게도 주인을 잘못 찾은 반지는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내 손에 맞지도 않은 헐렁한 반지 위로 차도헌의 입맞춤이 다시금 내려앉았고, 이유도 모르게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건 차도헌이 늘 끼고 다니던 오윤주와의 약혼반지였다.

애써 외면하던 것들은 몸집을 불려 내 숨통을 틀어막고, 굳게 부정해온 것들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며 깨진 둑을 타고 넘쳐흐르는 감정을 참아내려 안간힘을 쓰는데, 차도헌은 내 손가락에서 반지가 빠지지 않도록 손을 맞잡아댔다.

차도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차도헌이 나를 사랑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어울리지 않는 연인들의 앞에는 불운한 것들로만 가득 차 있을 테니까.

그 순간 거세게 뛰어대던 심장은 오작동이 난 것마냥 고요해졌다. 애초에 진실은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 되든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해댔으니까. 음습한 사창가 출신의 오메가는 하지 않은 일로도 욕을 먹었고 잘한 일에도 뺨을 맞았다.

여리고 나약했던 오메가들은 그래서 사랑을 찾았다. 사창가는 사랑을 팔지 않는데, 가볍게 오고 가는 감정에도 쉽게 사랑에 빠졌고 한결같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렇게 사랑에 목맸던 그 애들은 죄다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기대는 더 큰 상처를 남길 뿐이니까.

꼬여버린 내 인생을 죄다 감수하겠다며 달려들던 바보 같은 강태산이 나를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것도, 원치 않는 일방 각인이라 여겼던 관계가 쌍방 각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 차도헌이 내게 했던 고백을 부정했던 것도….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밀어내기에 급급한 사람이었으니까. 내게 사랑 같은 건 어울리지 않으니까, 함부로 사랑을 꿈꿀 만큼 내 삶은 평탄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상처받기 무서웠던 마음은 착실히 기억을 지웠는데,

‘…사랑해,’

분명히 도려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었는데….

‘사랑해, 해영아.’

그것들은 기어코 사라지지도 않고 선명히 내 안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외면한 만큼 더더욱 날을 세운 채 내게 달려들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형체를 띤 채 내 눈앞에 내가 지우려 했던 그 모든 순간을 들이밀고 있었다.

차츰 짙은 푸른색의 하늘이 걷히고 도시 위로 서서히 붉은 빛이 드리워졌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찬란한 황금빛이 건물 사이사이를 밝히고, 어둠에 잠겼던 도시는 점차 색을 찾았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얼굴 위로 뜨거운 태양 빛이 쏟아졌다. 이윽고 차도헌의 입술이 닿은 곳 전부가 불에 타는 듯 달아올랐다.

해가 닿지 않는 사창가, 음습하고 서늘한 새벽만이 길게 이어지던 곳에서는 차마 바랄 수도 없었던 빛. 그 황금색 빛이 내 몸 위를 붉게 비추고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했다. 여전히 차도헌의 팔은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천천히 등을 돌려 차도헌과 마주 누웠다. 여전히 내 손가락에는 맞지 않는 반지가 걸려 있었고 호흡이 닿는 거리에는 차도헌의 얼굴이 있었다.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 빛은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지독하리만치 잘 어울렸다. 서늘한 어둠에 창백하게 질린 나와는 다르게, 차도헌은 황금빛 태양과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날 정말 사랑해?”

작게 달싹인 입술 사이로 속삭임이 새어나갔다. 유리창을 통과한 황금색 태양 빛이 차도헌의 새카만 눈동자 위에서 일렁거렸다. 여전히 차도헌의 눈동자에는 오롯이 나만이 들어차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차도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다. 축축한 어둠에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온 오메가와 찬란한 황금색 태양 빛을 넘칠 만큼 손에 쥐고 살아온 알파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 끝은 결국 지독하리만치 쓰디쓴 결말만 자리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 사랑해, 도해영.”

가장 최악의 대답, 그 후로 이어지는 건 온몸이 녹을 정도로 달콤한 키스였다. 부드럽게 섞이는 숨결 사이로 차도헌은 몇 번이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 말들이 내 안의 모든 걸 무너뜨리는 줄도 모르고.

반지가 빠지지 않게 가볍게 내 손을 주먹 쥐게 한 차도헌은 허리를 감아 안으며 가볍게 당기고는 귓불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미동도 없이 나를 끌어안고 있던 차도헌은 한참 후에야 포옹을 풀었다.

작은 움직임에 시트가 부스럭대며 구겨지는 소리는 천둥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차도헌은 꾹 감은 내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내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내 입술 위에는 차도헌의 입맞춤이 남아 있었으며 내 온몸에는 차도헌의 체취가 깊게 배어 있었다.

분명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멍청한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고작 이 야해 빠진 몸뿐이었는데.

늘 순간에 그쳤던 차도헌의 모든 것들이 아직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왜?”

나는 그저 몸이 닿고 입술이 닿는 그 찰나의 순간만 가질 수 있는 거잖아, 당신이 내게 허락한 건 이런 것들뿐이잖아.

“왜…, 왜 나를 사랑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 간절히 바랐던 것들도, 진심을 쏟아부었던 것들도 전부 다 그렇게 나를 떠나버렸는데, 어째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거야?

“잊었어? 나 사창가 출신이야, 당신한테도 몸 팔려오듯 끌려왔잖아, 그런데 날 사랑한다고?”

물음은 터지듯이 새어 나갔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혀끝에 맺혔던 모든 말들마저도.

“…대체 왜?”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온 말들의 끝에는 결국 비참하게 자리 잡은 나 자신뿐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차도헌은 내게 그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차도헌이 내게서 등을 돌려 오피스텔에서 휙 나가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차도헌이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큰 영광을 누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잘그랑―

손에 힘이 풀린 찰나의 순간, 손가락에 헐겁게 걸쳐진 반지는 정적을 깨부수며 바닥 위로 떨어졌다.

“…안 돼!”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나는 그대로 굴러떨어지듯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건 분명 내 것도 아니고 그저 차도헌의 약혼반지일 뿐인데, 손가락에 느슨하게 끼워져 있던 반지가 빠지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침대 아래로 쑥 집어넣은 팔을 힘겹게 뻗으며 나는 세차게 손을 헤집어댔다. 좁은 틈새에 끼인 팔뚝이 아려왔지만 그 안으로 굴러떨어진 반지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말린 건 차도헌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단단히 그러잡더니 침대 틈 사이로 처박힌 내 몸을 뒤로 빼내며 달래듯 목소리를 냈다.

“안 찾아도 돼, 해영아. 그만둬.”

“아냐, 금방 찾을 수 있어. 분명히 여기로 들어갔으니까….”

아무리 깊게 굴러 들어갔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나를 저지하는 차도헌의 손길을 뒤로한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침대 아래에 머리를 박을 듯이 기어들어 갔다. 내 예상대로 조금 더 손을 뻗자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만져졌다.

손끝에 희미하게 만져지는 반지를 붙잡으려 한쪽 어깨를 더 비집어 넣는 내게 차도헌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버릴 거였어, 안 찾아도 되는 거니까 다치지 않게 그만 나와.”

그 순간 입술 사이로 얕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미 반지를 손에 쥔 나 자신이 비참할 정도로.

붙잡은 반지를 그대로 찾았던 바닥에 내려두고 빈손으로 침대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차도헌의 말마따나 이미 버릴 반지였으니까.

침대 아래에 낀 팔뚝 전체에 붉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 쓸린 피부 위로 콕콕 올라오는 따가움은 뒷전이었다. 내 손목을 그러쥐고 잡아당겨 붉게 오른 피부를 확인하는 차도헌의 손길을 뿌리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왜 항상 진심 같지도 않은 짓을 해? 그렇게 갖고 놀면 재밌어?”

“도해영, 왜 말을 그렇게 해!”

“그래서, 그쪽이 원하던 반응이 나왔어? 바보같이 버릴 건지도 모르고, 맞지도 않는 반지 손에 껴놓고 좋아하는 내 모습 보면서 재밌었어?”

부풀었던 감정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도저히 차도헌의 진심을 알 수가 없다. 방금까지도 나를 사랑한다는 양 굴었던 차도헌의 모습은 이젠 없었다, 내게 사랑을 속삭였던 차도헌은 물에 씻겨 내려간 거품처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당신은 나한테 대답 못 하잖아.”

“…해영아.”

“나 같은 거 왜 사랑하냐는 말에도, 나 갖고 노는 거 재밌냐는 말에도 전부 대답 못 하잖아.”

바보처럼 눈물이 새어 나왔다. 차도헌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나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울었다. 이건 전부 빌어먹을 각인 때문이다, 차도헌을 사랑하지 않는 내가 울 이유는 그것밖엔 없었다.

내가 원한 건 그저 대답뿐인데, 차도헌은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쓸어주었다. 내 말에 대답은 못 하면서 차도헌은 우는 나를 달래주고 있었다.

“그럼 이 질문엔 대답할 수 있어?”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떤 게 당신의 진짜 모습인지. 오윤주의 말처럼 차도헌 당신은 정말 가면뿐인 사람인지, 진실을 아는 것이 비록 목숨값이 되더라도 나는 알고 싶었다.

“정말, 당신이 형제들을 죽였어?”

내 물음에 차도헌은 입술을 다물었다.

“오윤주의 아버지도 당신이 죽인 거야?”

“…도해영,”

“그 여자가 당신한테 복수한대.”

차도헌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반응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 여자한테 무슨 얘기 들었을지 알아,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조작된 사건일 뿐이야.”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내 물음에 차도헌은 무어라 덧붙이려 달싹였던 입술을 다물곤 대신 툭 불거진 눈썹뼈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잘난 얼굴에 고심이 깃든 모습을 구경하면서 나는 이미 눈물이 마른 볼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황금색으로 물들었던 도시는 어느새 환하게 비추는 아침의 햇살 아래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길가와 도로에 서서히 사람들과 차들이 모여 활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차도헌도 시간이 꽤 지났음을 느꼈는지,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확인하곤 내게 다급히 말을 붙였다.

“오늘 집안 행사가 있어. …행사라고 하긴 뭣하지만.”

“그래서?”

“같이 가. 가서 얘기해.”

“…뭐?”

차도헌의 뇌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차도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 지금 오윤주 씨랑 약혼한 상태인데 나를 그런 공식 자리에 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미쳤어?”

“설명해줄 게 있어. 네가 그 여자한테 들은 것들도, 내가 대답하지 못한 것들도 다.”

“말로 설명하면 되잖아, 말로! 왜 일을 크게 벌이는데?”

내 말에 차도헌은 다시금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내 손목을 그러잡아 품 안에 당겨 안았다. 다짜고짜 품에 안긴 나는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이 묻힌 채로 버둥거렸다.

“이거 안 놔?”

“꼼짝 말고 있어. 다녀와서 다 얘기해 줄 테니까.”

이제 정말 시간이 급박했는지 차도헌은 빠르게 팔을 풀어내고 소파에 걸쳐둔 겉옷을 집어 들었다. 현관으로 향하는 차도헌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헝클어진 가운 자락을 꽉 조였다.

“그거 알아? 나는 고고한 알파 속내 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하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 자꾸 헤집어대는 너 같은 알파는 별개야.”

내 말에 차도헌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난 너한테 특별한 알파인 거네.”

엉뚱한 대답과 함께 완벽하게 지어낸 차도헌의 미소 앞에서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내 현관문이 닫히고, 차도헌은 그렇게 오피스텔을 나갔다.

***

차도헌이 떠난 후 홀로 남은 오피스텔에서 내가 할 일이란 별거 없었다. 냉장고에 가득 채워진 윤 비서님표 최고급 수제 도시락을 꺼내어 먹는다든가, 하릴없이 소파에 누워서 TV 채널을 돌린다든가 하는 거.

입맛이 없어서 몇 젓가락 뒤적이다가 만 도시락을 저리 쭉 밀어두고 나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차도헌이 아까 말한 집안 행사가 혹시라도 뉴스에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예상대로 채널을 몇 개 돌리자마자 어두운 색 정장을 갖춰 입은 차도헌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를 위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차도헌은 단연 돋보일 만한 위압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극우성 알파의 아우라라는 건 정말 어딜 가지 않나 보다.

대체 무슨 행사이길래 이렇게 뉴스에서 생중계로 보도도 해주고 그러는 걸까, 궁금해지는 찰나 화면은 밴에서 내리는 오윤주의 모습을 비췄다.

그녀 역시 검은 투피스 정장에 얼굴을 가리는 검은빛 레이스 베일을 쓴 채였다. 가드의 보호를 받으며 인파 사이를 헤치고 차도헌을 향한 오윤주는 이내 익숙한 듯 차도헌의 팔에 팔짱을 끼며 몸을 바투 붙였다.

[현 차 그룹의 차도헌 대표이사와 그의 약혼자 오 그룹의 오윤주 부사장이 모습을 비춥니다.]

이윽고 차도헌과 오윤주, 두 사람이 카메라에 온전히 잡혔다. 수없이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 속에서도 두 사람은 당황하지도 않고 가드의 경호를 받으며 커다란 성문 같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추모식에 예의를 갖춘 차림으로 참석한 모습입니다. 네, 지금 차도헌 대표이사와 오윤주 부사장이 나란히 추모식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네, 추모식 내부에는 취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장 연결은 추모식이 끝날 때에야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동안 정치부 현지수 기자가 오늘 있을 추모식에 대해서 설명을 이어갑니다.]

“추모식…?”

차도헌이 말했던 가족 행사가 추모식이었다는 것에 놀라기도 잠시, 오늘 있을 추모식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를 화면에 띄운 뉴스 화면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오늘 추모식은 비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차 그룹의 가족원들을 기리는 자리입니다. 故고현영 여사와 장남 차정우, 그리고―]

도드라진 눈썹뼈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우뚝 솟은 콧대, 강한 선이 돋보이는 얼굴에 패인 볼과 도톰한 입술, 그리고….

죽일 듯이 노려보는 듯한 저 짙은 눈매.

[차남 차서준의 추모 현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나란히 놓인 세 명의 인물, 그중 마지막 인물은 당장 차도헌이라고 말해도 믿을 만큼 소름 끼치도록 차도헌과 닮은 사람이었다.

차도헌에게 쌍둥이 형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믿게 만들 만큼 내 눈앞에 보이는 뉴스 화면 속의 남자는 너무나도 차도헌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내가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화면은 세 인물의 사진을 내리고 차 그룹의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자료를 커다랗게 띄웠다. 재벌가인 만큼 차도헌의 가족도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는지, 이내 사진 속 인물을 설명하는 기자의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차 그룹 차건희 회장은 두 번의 결혼으로 자녀 넷을 두었습니다. 이주미 여사와의 초혼에서는 장남 차정우와 3남 차윤호, 고현영 여사와의 재혼에서는 차남 차서준과 4남 차도헌, 현 대표이사를 낳았습니다. 차건희 회장은 이주미 여사와의 이혼 후 고현영 여사와 재혼을 했지만, 25년 전 고현영 여사가 사망하자 자녀 양육을 위해 전처 이주미 여사와의 재혼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주미 여사와의 이혼 과정 중에 임신한 3남 차윤호는 이혼 후에도 차건희 회장의 호적에 적히게 되었습니다. 추후에 4남 차도헌과의 상속 문제가 야기되는 상황이 예상되었으나 차윤호는 상속을 포기하고 해외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추모식에도 차윤호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언뜻 보면 같은 사람이라고 오해할 만큼 닮은 차도헌과 차서준, 두 사람에 대한 내 의문은 기자의 설명에 단번에 해소되었다. 같은 어머니를 둔 두 형제는 필연적으로 외모가 닮을 수밖에 없었을 거였다. 물론 그 정도가 좀 심하긴 했지만.

이제 뉴스는 자료 화면을 내리고 방금 전 연결했던 추모식 현장을 다시 보여주며 마저 설명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TV 화면 가득 차도헌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한 차도헌은 25년 전 잃은 어머니와 자신의 두 형을 추모하기 위해 저 자리에 있었다.

‘오늘 집안 행사가 있어. …행사라고 하긴 뭣하지만.’

‘그래서?’

‘같이 가, 가서 설명해줄 게 있어. 네가 그 여자한테 들은 것들도, 내가 대답하지 못한 것들도 다.’

오늘 아침, 차도헌은 내게 추모식에 같이 가자고 했었다. 내게 설명할 것이 있다면서 어울리지 않게 간절한 목소리 비슷한 것도 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차도헌이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을지.

[네, 방금 추모식이 끝났다는 소식입니다. 지금 바로 현장에 나가 있는 김세나 기자 연결해서 상황 보여드립니다. 김세나 기자, 지금 어떻습니까?]

어느새 추모식이 끝났는지 뉴스 앵커가 현장 기자와 연결을 하고 있었다. 화면 가득히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재진이 몰린 현장이 보였다.

[네, 방금 추모식이 끝나고 닫혔던 성당의 정문이 열렸습니다. 차 그룹의 주요 인사부터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이주미 여사는 안전상 문제로 성당과 이어지는 별도의 지하 주차장으로 따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차도헌 대표이사와 오윤주 부사장의 이동 경로도 이와 동일할까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오윤주 부사장의 개인 리무진이 성당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차도헌 대표이사와 오윤주 부사장은 곧 모습을 비출 것으로 보입니다.]

북적거리는 취재진의 모습으로 가득 들어찬 화면 사이로 저 멀리 차도헌이 보이기 시작했다. 취재 기자와 카메라도 다급히 그쪽으로 움직이며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내 성문 밖으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차도헌과 오윤주, 두 사람은 가드의 호위 안에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배로 많아진 현장 취재 기자들과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화면으로 보기만 하는 나조차도 정신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뉴스 메인 화면에 차츰 차도헌의 모습이 제대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정장 차림으로 차도헌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카메라와 마이크가 차도헌의 얼굴 쪽으로 달려들 듯이 다가오자 차도헌은 얼굴을 굳히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까지 했다.

인파를 뚫고 도착한 리무진에 오윤주를 먼저 태워 보낸 차도헌은 이내 뒤이어 도착한 자신의 리무진의 차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여럿이 웅성이며 쏟아내는 질문들 사이로 날카로운 기자의 목소리가 TV 스피커를 타고 선명히 새어 나왔다.

[차도헌 대표이사님, 현재 약혼하신 오윤주 부사장님을 두고 사창가 출신 오메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저건 누가 들어도 내 얘기잖아!

돌연 나도 모르게 앉아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갑자기 너무 놀란 바람에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이 두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차도헌은 들은 척도 않곤 리무진에 몸을 싣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윽고 날아온 질문에 차도헌은 차 문을 붙잡고 그대로 멈춰 섰다.

[그 오메가의 이름이 도해영이라는 것도 사실입니까?]

뉴스 화면 속 차도헌의 모습이 석상처럼 멈췄다. 동시에 내 숨도 멈추는 것 같았다.

“어…, 어떡해…….”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등줄기가 오싹하게 한기가 타고 오르다가 이내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뉴스에 실시간으로 보도되었다, 그것도 빼도 박도 못하게 사창가 출신의 오메가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은 채 차도헌의 내연남으로 언급되었다.

저 뉴스가 황 회장의 귀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내내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았는데, 나는 이제 강태산과의 연결 고리도 전부 끊어버렸는데, 저 보도를 황 회장이 보면 어떡하지, 이제 나는 어쩌면 좋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내게 걱정은 정말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황 회장은 분명 저 뉴스를 볼 거고, 내가 아직도 차도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테고, 분명 나를 빌미로 삼아 차도헌에게 무슨 짓을 할 거다.

와글와글 질문을 퍼부어대던 기자들의 목소리는 이제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함에 가까운 외침으로 변질되었다. 차도헌은 리무진의 차 문을 붙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내내 잘 나오던 현장 화면이 돌연 지지직거리며 끊겨버렸다. 앵커는 당황한 목소리를 감추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른 뉴스를 보도하기 시작했지만, 송출되던 영상이 끊이기 전에 들린 소리는 분명히 둔탁하게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였다.

[네, 다음 뉴스입니다. 어제저녁, 큰 산불이…….]

TV에서 나오는 앵커의 목소리가 소음의 전부인 고요한 오피스텔,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잡고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크게 심장이 놀랄만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담은 몸을 둥글게 말아 앉은 채로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며 진정을 하곤 했다. 마담처럼 나도 마른 무릎을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거친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골랐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마른 입술이 달싹대는 틈으로 누구를 향할지 모를 목소리가 위태롭게 새어 나왔다. 여전히 심장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쿵쿵대며 뛰어댔고 손발은 주체할 수 없이 달달 떨렸으며 식은땀이 흥건히 밴 온몸에 추울 정도로 한기가 돌고 있었다.

돌연 발생한 방송 사고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뉴스를 진행하는 저 앵커가 너무 부러울 지경이었다, 나도 저렇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고 싶었다.

그 순간 세차게 벨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핸드폰 화면 위로 발신 번호 표시제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곧장 전화를 받아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움켜쥔 핸드폰에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해영아. 네놈이, 방송을 제대로 탔구나.

“…회, 회장님….”

예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끌끌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 나는 새된 목소리를 냈다.

“어, 어떻게 전화 주신 거예요?”

―우리 해영이가 뉴스에 나오는데 내가 모를 리 있겠느냐. 그나저나 어쩌냐, 해영아. 네놈이 엉덩이 벌리는 창놈이라는 게 세상에 온통 까발려진 것 아니냐?

“…….”

―내 회장실에 찾아와서 늬 허리 붙잡고 떡친 그 새끼도 만만찮게 좆 흔드는 놈인 것 같던데…. 대표이사까지 매단 새끼인 줄은 몰랐지 말이다.

“아녜요, 회장님, 차도헌은 저랑 아무 관계 없―”

―행동 조심해라, 해영아. 떡 치는 영상 여기저기 까발려지기 전에.

“-회장님!”

하지만 전화는 곧바로 끊긴 채였다. 가래 끓는 듯한 더러운 소리와 함께, 황 회장은 비열한 웃음을 남기곤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영상, 영상이라니…?

설마―

“도해영 씨! 문 좀 열어 보세요, 취재 기자입니다!”

쾅, 쾅! 쾅쾅!

하지만 내겐 미처 황 회장이 언급한 영상이 무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돌연 오피스텔 문이 부스러질 듯이 두들겨지기 시작했고, 뒤이어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오려는 듯 현관문 손잡이가 철컥대기 시작했다.

카메라 셔터음과 고함을 지르는 기자들의 목소리에 미친 듯이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까지 죄다 한데 뭉쳐 나를 괴롭혀대기 시작했다.

“도해영 씨! 현재 차도헌 대표기사와의 염문설이 도는데, 어떤 입장을 내놓을 예정이신가요?”

“이 오피스텔도 차도헌 대표기사가 도해영 씨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말씀 좀 해주시죠!”

“안에 계시는 거 다 압니다! 도해영 씨, 모습 좀 보여주세요!”

쉴 새 없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기자들의 목소리가 오피스텔에 가득 들어찼다.

나는 두 귀를 틀어막은 채 곧장 무릎걸음으로 침대를 향해 기어갔다. 당장이라도 저 사람들이 문을 따고 들어올 것 같은데 이 오피스텔 안에는 내 몸 하나 숨길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침대와 바닥 틈 사이 공간으로 몸을 비집어 구겨 넣었다. 어이없게도 아침에 그대로 둔 차도헌의 반지가 손에 잡혔다.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더 이상 침대 아래에 몸을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면 나는 몸 반쪽만 침대 아래에 구겨 넣은 채 취재 기자들에게 발견되어 뉴스에 보도될지도 몰랐다.

각박한 한 인간의 운명이 어디까지 굴러가나 시험해 보면 거기에는 분명 도해영이 있지 않을까, 나는 맞지도 않은 헐렁한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빨리 와, 차도헌. 제발….”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임을 알면서도 나는 작게 입술을 달싹이며 차도헌의 이름을 쉼 없이 속삭였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을 뚫으며 쾅, 소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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