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독했던 열 감기는 결국 내 안의 그 어떤 것도 녹이지 못하고 사라졌다. 쪽팔린 기억이라도 조금 사라졌기를 바랐지만, 정신이 들자마자 내 안 가득 들어차는 감정은 여전히 쓰라린 후회와 허탈감뿐이었다.
“얘기 좀 하자.”
아직 눈도 뜨지 않았는데 귀신같이 내가 깨어난 걸 알아챈 차도헌은 단호한 목소리로 밀어붙였다.
“설명할 게 있어.”
차도헌은 내게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그에 반해 나는 차도헌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대화를 할수록 비참해지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침묵을 유지했고, 차도헌은 미간을 굳혔다. 정갈히 다문 입술에서 답지 않게 초조함이 흘렀지만 내가 잘못 보고 있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차도헌을 내내 잘못 보고 있었으니까, 타당한 방향이다.
“제발…, 해영아, 응?”
차도헌은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재차 물었다. 아까보다 가까워진 거리는 차도헌의 눈동자에 비친 내 표정이 읽힐 정도였다.
차도헌의 눈은 항상 새카맸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의 것이 아닌 그저 어둠으로 가득 찬 것처럼. 자칫 잘못했다간 그 안에서 내내 헤맬 뻔했다. 바보같이, 그 차디찬 어둠 속에서 영영 헤맬 뻔했다.
그 표면 위로 비친 내 얼굴을 응시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뻑뻑한 눈꺼풀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쓰라림을 자아냈다. 오로지 그 때문에, 두 눈에 눈물이 조금 고였다.
“너랑 같이 지내는 거 싫어.”
“해영아―”
“그냥 예전에 내가 지냈던 오피스텔에 가둬놔 줘. 처음에 약속했던 것처럼 원할 때마다 페로몬 맡고 가. 그게 부족하면 섹스하든가, 그건 그냥 네 마음대로 해.”
애초에 그러기로 했으니까, 나는 너한테 이런 것까지 바라지 않았으니까. 괜한 감정에 자꾸만 너한테 더 큰 걸 바라게 될까 봐, 나는 그게 너무 싫어.
“내가 허튼짓할까 봐 신경 쓰이면 CCTV 달아. 약속할게, 나 네 앞길 방해 안 해. 그러니까 오피스텔로 보내줘. 오메가 주제에 이러는 거 염치없는 거 알아. 미안하지만 부탁할게.”
“…….”
“…그리고, 약 완성되면 나 먹을게. 지금 있는 건 그쪽 목숨에 위험하다며. 그러니까 그거 말고…, 완성된 거 나오면.”
차도헌은 잠시간 나를 쳐다보았다. 오히려 시선을 피한 건 내 쪽이었다. 이윽고 짤막한 답이 들렸다.
“그래.”
차도헌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바보 같은 도해영이 비쳤다.
***
몇 없는 짐과 별 볼 일 없는 오메가가 이동할 뿐인데, 고급 세단과 함께 바쁘신 윤 비서님이 대동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건조한 목소리가 나갔다. 짤막한 인사에 윤 비서님은 옅게 웃곤 거울 너머로 나를 응시했다.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차 이사님께서요.”
“그랬겠죠. 나 때문에 어이없게 죽으면 안 되니까.”
내 말에 윤 비서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답이 뻔한 말에 굳이 위로를 한답시고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흐른 적막은 오피스텔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짐도 별로 없는데 굳이 안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윤 비서님에 결국 빈손으로 차에서 내렸다. 로비를 지나 맞닥뜨린 엘리베이터에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요즘 바빠서 통 운동할 시간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계단으로 함께 하실까요?”
공포를 숨기지 못한 내게 윤 비서님은 여유롭게 웃으며 계단을 향해 이끌었다. 얼결에 윤 비서님의 뒤를 따라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중, 그제야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을 차도헌이 미리 언질을 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다시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머리를 털어내며 계단을 밟았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네, 감사해요.”
윤 비서님은 현관 앞에 짐을 내려놓곤 곧장 오피스텔을 떠났다. 나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차도헌과도 거리를 두고 있는 틈에 윤 비서님과 친밀하게 지낼 수는 없으니까.
다시 찾은 오피스텔은 이상하리만치 정겨웠다. 그전에 지냈을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짐을 대충 풀고 소파에 털썩 몸을 누이자마자 정겨움은 더더욱 증폭되었다. 마치 내 몸에 꼭 맞게 만들어진 것처럼 온몸을 감싸오는 푹신한 쿠션이 내심 그리웠었나 보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금세 잠들었을 텐데 지금의 상황에선 정적이 흐를수록 머릿속만 시끄러워졌다. 결국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를 켰다. 단순히 정적을 깰 요량으로 아무 채널이나 틀어두곤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독이 될 줄이야.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나는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 그룹의 대표이사직을 맡고 계시죠. 차도헌 대표이사의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경제부 김윤희 기자 이야기 이어 들어봅니다.]
[네. 경제부 김윤희 기자입니다. 세간의 이슈를 몰고 온 차그룹 차도헌 대표이사의 결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TV 화면 가득 차도헌의 사진이 채워졌다. 수트를 입고 촬영한 독사진에 이어 차도헌과 어떤 여자가 함께 있는 사진이 연달아 화면을 채웠다.
이윽고 환하게 웃으며 차도헌과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의 사진 아래로 이름 세 글자가 떠올랐다.
…오윤주,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 여자다, 내가 종종 차도헌을 긁어대기 위해 들먹였던 그 ‘약혼자’. 차도헌과 함께 약혼반지를 나눠 낀 당사자이자, 극우성 알파와 결혼을 하게 될 베타.
비록 베타지만 그녀의 삶은 행복할 거였다. 차도헌에게는 페로몬 자판기인 내가 있으니 러트도 무사히 넘길 거였다. 그리고 부와 재력이 있으니 조만간엔 기술을 하나 개발해서 나 같은 오메가 없이도 알파와 베타의 온전한 사랑을 그려낼 미래가 있다.
강태산과 도해영에게는 불가능한 미래를 차도헌과 오윤주는, 꿈꿀 수 있다.
한순간에 입 안이 텁텁해졌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다가도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마다 속이 꼬이고 손발이 차갑게 굳어갔지만 쉽게 TV를 끌 수 없었다. 화면 속에는 웃는 차도헌이 보였으니까.
띵동―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를 찾아올 사람은 차도헌, 아니면 황 회장의 조폭들을 제외하곤 전혀 없는데….
불안감에 TV 소리를 줄이고 숨죽여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손바닥만 한 인터폰 화면 안에는 줄곧 뉴스에서 봐왔던 얼굴이 있었다.
“오… 윤주?”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말았다. 뒤늦게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그녀는 문 너머로 내 목소리를 들은 듯 화면 속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해영 씨, 문 좀 열어줘요.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곤 생각했다.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물론 업소에서의 경력으로 ‘내연남’ 포지션에는 익숙했기 때문에 딱히 무서울 건 없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녀는 내가 맞닥뜨렸던 무수히 많은 본처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쥔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가늠이 안 된다는 것. 그것 하나가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집 안에 있는 걸 들켰으니 하는 수 없이 잠금 걸쇠와 도어락을 푸르고 현관문을 조심스레 밀어 열었다.
보통은 문이 열리자마자 손찌검이 날아오거나 거친 욕설이 들려야 하는데, 내 귓가에 들린 건 믿기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목소리로 건네는 인사뿐이었다.
“잘 지냈어요, 해영 씨?”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최상위 계층들이란,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내 집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를 찾아온 사람을 문밖에 세워둘 수는 없고,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차도헌의 사람이니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손을 뻗으며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보내자 그녀는 작게 묵례를 하곤 현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몇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서조차도 우아함이 뚝뚝 흘러넘쳤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여전히 내게 별다른 공격성을 보이지 않은 채 소파에 앉으면 되냐고 물었다. 아무 데나 편한 곳에 앉으라고 대답하곤 부엌으로 걸어가 찬장을 뒤지며 커피와 이런저런 종류의 티백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손님이니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차 드릴까요?”
말해놓고도 순간 아차 싶었다. 만약 뜨거운 걸 얼굴에 끼얹으면 이제 업소 일도 못 할 텐데….
“해영 씨 주려고 와인 가져왔는데. 같이 한잔할래요?”
다행스럽게도 오윤주는 뜨거운 물벼락에 화상 입을 걱정을 하고 있던 내게 낮술을 제안했다. 와인 잔 두 개만 달랑 가져가기 좀 그래서, 아까 윤 비서님이 냉장고에 박스째로 넣어둔 새카맣게 반짝거리는 고급 품종의 이름 모를 포도를 몇 송이 씻어 접시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거실로 향했다.
와인과 함께 와인 오프너도 가져온 건지, 아니면 낮술을 즐기는 만큼 늘상 오프너를 들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거실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코르크가 따진 상태였다.
내가 건넨 와인 잔을 받아 든 그녀는 여전히 우아함이 가득 밴 몸짓으로 와인을 따라 내게 건넸고, 잔을 받아들면서 그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끝이 날카롭게 올라간 도도한 눈매에 수려하게 뻗은 코끝, 도톰한 입술엔 붉은 립스틱을 살짝 얹어 투명한 생기를 자아내고, 시원한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는 매력이 철철 넘칠 지경이었다. 고급스러운 펌이 들어간 붉은 머리칼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물결치듯 어깨 아래로 굽이치며 흘러내렸다.
방금까지 보던 뉴스의 패널들이 ‘세기의 미인’이라고 극찬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오윤주는 화면으로 본 것보다 더 매력적이고 자꾸만 시선이 가는 여성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냉정한 인상을 주었지만, 시원스레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는 이미 승리를 쟁취한 자가 짓는 듯한 자신감과 승리감이 깃들어 있었다.
아까 뉴스에서 줄기차게 내보냈던 차도헌과 오윤주의 사진들 중에서 유독 함께 있는 모습이 어울렸던 이유가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도헌의 미소에도 그런 것들이 담겨져 있으니까.
“그럼 건배할까요?”
그녀는 붉은빛 와인이 찰랑이는 잔을 내 쪽을 향해 들어 올리며 건배를 제안했다. 까놓고 말해서 나는 그녀에게 차도헌의 내연남에 불과한데,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태도에 미처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채 당황을 숨길 새도 없이 붙든 그 채로 굳어버린 내 잔에 경쾌한 소리가 울릴 정도로 잔을 부딪친 그녀는 그대로 와인을 쭉 들이켰다. 원래 부자들은 음미하듯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시지 않나?
“어머. 우리 아직 악수도 안 했나요?”
어느새 다 마신 빈 잔을 그대로 내려놓은 그녀는 돌연 우리가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나는 괜찮다는 대답을 반복했다.
“아, 아녜요. 괜찮아요.”
“미안해요. 정신이 없었어요. 인사는 꼭 해야죠, 내가 어떻게 해영 씨 보러 왔는데.”
그녀는 내 쪽을 향해 손을 뻗곤 악수를 청했다. 엉겁결에 손을 맞잡고 어색하게 흔들어대는 사이로, 그녀는 정갈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오윤주예요, 차도헌 약혼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화면으로 보는 거랑 실제로 보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그녀는 내가 틀어둔 TV 채널을 살짝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뉴스에서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 자신이 그야말로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TV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을 비추는 유명인사 ‘오윤주’를 내가 모를 리는 없다. 그만큼 오윤주는 차도헌과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사람일뿐더러, 그들이 공유하는 정상의 세계는 내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만큼 높디높은 곳이었다.
말없이 리모컨을 들어 올려 TV를 껐다. 오윤주는 내심 아쉬운 눈치였지만 와인 병을 집어 들어 빈 잔을 채워주자 다시금 얼굴에 완연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벌써 두 번째 잔을 비운 그녀와는 다르게 나는 입도 대지 않은 와인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분명 오윤주는 나를 찾아왔다. 차마 어떻게 찾아왔냐고 묻지 못했지만, 그녀는 차도헌이 꼭꼭 숨겨둔 나를 정확히 찾아낸 거다.
TV만 틀면 나오는 오윤주를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르다. 분명 그 반대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그건 저 사창가 밑바닥, 보통만도 못한 삶을 사는 도해영을, 그것도 차도헌의 내연남이라는 라벨을 단 도해영의 뒷조사를 했다는 말이었고, 결국 오윤주는 도해영과 담판을 짓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는 말이 된다.
언제고 이런 날이 찾아올 줄은 알았으나, 전혀 간파하지 못할 상대를 눈앞에 둔 나로선 억울한 심정이었다. 적어도 나는 단 한 번도 차도헌을 꼬신 적이 없는데, 우린 그저 길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빌어먹을 관계일 뿐인데….
할 말은 하고 뺨을 맞든가 해야 안 억울할 것 같았다. 그녀에게 우리 사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아마도 지금뿐일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차가운 와인뿐이니 화상 걱정은 할 필요 없었고, 대신 조심해야 할 건 와인 잔을 깨부순 후 던지면 적어도 피부를 꿰매야 할 테니 최대한 얼굴을 피할 수 있는 동선 정도는 떠올려야 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준비를 다 끝낸 나는 오윤주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오윤주 씨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나 차도헌이랑 그런 관계 아니에요. 굳이 관계를 정의하자면 계약서 상 갑을 관계밖엔 없거든요. 오윤주 씨가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고요, 나는 그냥 차도헌이 마음껏 페로몬 뽑아 쓰는 자판기, 그뿐이에요.”
역시나, 내 말에 서서히 미간을 찌푸린 오윤주는 나를 노려보며 들고 있던 잔을 쾅 내려놓았다.
“그 새끼가 해영 씨한테도 계약서 내밀었어요?”
“네?”
“계약서 줘 봐요. 나 이래 봬도 변호사 출신이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의 분노가 향한 곳은 내가 아닌, 차도헌 쪽이었다.
“…나한테 욕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내가 왜 해영 씨한테 해코지를 해요? 차도헌이랑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그녀는 자신의 입에 ‘차도헌’ 세 글자를 올리는 것조차도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차도헌과의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나를 찾아오는 것부터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여자가 내가 아닌 차도헌을 향해 불같이 화를 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거다.
어쩌면 뺨을 맞거나 얼굴에 물을 맞거나 약혼자 뺏어간 더러운 사창가 출신 오메가라며 욕지거리를 듣는 편이 더 나을지도….
냅다 잔을 집어 들곤 벌컥 와인을 들이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차근히 뱉어내는 건 그다음이었다.
“그럼 왜 왔어요?”
“해영 씨가 필요해서요.”
“제가 왜요?”
“해영 씨가 차도헌 목숨줄이라면서요.”
“쌍방 각인 얘기하는 거예요?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해영 씨, 내가 해영 씨 뒷조사한 건 미안하지만 나 이래 봬도 힘 좀 쓰는 여자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 알아야 할 의무도 있고요.”
“…그래요, 뒷조사는 그렇다 쳐요. 내가 차도헌 목숨줄인 게 오윤주 씨랑은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쉼 없이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긴 건 그때였다. 마지막 질문에 오윤주는 집어 들었던 와인 병을 내려놓곤 나를 응시했다.
어느새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빠르게 굳어가기 시작한 얼굴에 더 이상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그녀의 예리한 눈매 속 새카만 눈동자에는 서서히 분노가 드리워졌다.
“내 아버지 죽인 그 새끼한테 복수해야 하니까요.”
“…뭐라고요?”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도 오윤주는 TV에서 막 튀어나온 주인공, 그러니까 차도헌과 영원의 사랑을 약속한 세기의 연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앞의 오윤주는 달랐다. 그녀는 차도헌을 향한 경멸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분노하고 있었다.
“다시 얘기해 줄까요? 해영 씨가 그동안 봐온 그 잘난 차 그룹 대표이사 차도헌이 내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라는 얘기예요.”
“차도헌이, 오윤주 씨 아버지를요?”
그럴 리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차도헌은, 그러니까 내가 곁에서 봐왔던 차도헌은 사람을 죽일 정도로 험한 인물은 아니다.
물론 무뚝뚝하고 싸가지 없고 자기밖에 모르고 무정하고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누군가를 죽일 만큼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왜요. 못 믿겠어요?”
“…….”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로선 보기 싫어도 늘 봐야만 했던 일이었다. 조폭들의 사업장과 바로 맞닿아있는 사창가 출신이었으니까.
매일같이 벌어지는 구역 싸움에 조폭들은 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게 뒷세계에서는 세력을 넓히고 힘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더 많이 죽인 놈이 가장 센 법이니까.
그만큼 누가 누굴 죽이고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리고 하는 것들은 그 바닥에선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있었던 밑바닥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여긴 아니다. 그냥 죽이고 돌아서면 끝이 아닌 세상이잖아.
누군가를 죽이고 그렇게 멀쩡히 살아갈 순 없다. 살인은 곧 인간이기를 저버리는 행위다. 무표정으로 칼을 휘두르며 내장 깊숙이까지 칼끝을 헤집어대던 강태산조차도 일이 끝나면 늘 괴로워했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상상하는 것보다 더, 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을 파먹는 일이다.
“윤주 씨, 난….”
“못 믿겠다고요?”
“…….”
“대답 안 해도 알고 있었어요. 해영 씨 얼굴에 다 적혀 있었거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인 오윤주는 두 눈을 내리감은 채 마저 남은 와인을 비웠다. 와인 잔이 바닥을 보일세라 곧바로 와인을 집어 든 그녀는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을 잔 안에 부어 넣고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잔에 맺힌 붉은 와인 방울이 매끄러운 유리 벽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도톰한 입술 틈으로 와인을 살며시 머금은 오윤주는 두 눈을 감은 채 향을 음미하듯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시 두 눈을 뜬 그녀는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은 듯 온 얼굴에 완벽한 미소가 꽃핀 채였다. 방금까지도 화를 내던 기색이라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윤주는 매력적인 웃음을 머금곤 입술을 뗐다.
“해영 씨는 궁금하지 않아요? 차도헌이 어떤 사람인지.”
“이간질하는 사람처럼 들리네요.”
“많이 티 났어요? 내가 돌려서 얘기하는 걸 잘 못 해요.”
오윤주는 싱긋 웃어 보였고,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차피 오윤주는 내가 듣지 않겠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었다. 누추한 이런 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바로 그거일 테니까.
“내가 하는 얘기, 믿으라고 강요는 안 할게요. 그냥 이솝우화 듣는 것처럼. 그런 건 괜찮잖아요?”
그녀의 매끄러운 입술이 진실을 토해내기 직전이었다.
***
“내 얘기 들어줄 수 있죠?”
매끄러운 입술이 악마처럼 속삭인다. 차도헌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생각이 바뀔 거라고. 오윤주는 내게 속삭였다. 기꺼이 차도헌의 모든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내겐 차도헌의 비밀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고 자신의 끔찍한 내면을 내보일 때 서로 진득하게 얽히기 마련이니까. 나와 강태산은 그랬다, 우리는 어두운 쪽방에서 갈기갈기 찢긴 서로의 내면을 내보이며 몸을 섞곤 했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차도헌의 과거사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쌍방 각인이 되어버려 얼토당토않게 서로의 목숨줄까지 쥐게 된 이 상황에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차도헌을 내가 사랑하게 되는 일만큼 비극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네.”
어쩌면 나는 생각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차도헌을 사랑하게 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른 채 차도헌을 사랑하게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결국 차도헌은 언제고 차도헌이었고, 구태여 과거와 현재를 갈라 나누어 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차도헌을 사랑하게 되는 건 그저 오메가의 본능이자, 뿌리칠 수 없는 욕망 때문일 테니까.
“…알아서 잘 걸러 들어볼게요.”
“해영 씨는 참 똑똑해.”
한낱 사창가 오메가일 뿐인 내게 입바른 말을 건넨 오윤주는 자세를 바로 고치며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코르크와 와인 오프너, 포크 두 짝을 집어 일렬로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그 네 개의 소도구들로 시작했다.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에요. 차 그룹의 피로 물든 ‘형제의 난’.”
“형제의 난이요?”
“지금 대표이사직에 있는 차도헌은, 애초에 상속 순위에 들지도 못했어요. 4형제 중 막내였으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물론 차도헌이 내게 구구절절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지극히도 개인적일 차도헌의 가정사를 듣자니 괜스레 양심이 콕콕 쑤셨다.
오윤주는 일렬로 세워둔 것들 중에서 가장 앞머리에 있던 코르크 마개를 집어 들었다.
“원래 차 그룹의 상속 1순위는 본처에게서 난 장남 차정우였어요. 하지만 임명식이 있기 바로 직전에 죽었죠.”
“죽었다고요?”
별안간 그녀의 손에 들린 코르크가 맥없이 테이블 위로 추락했다. 나동그라진 코르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윤주는 그 옆에 있던 포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2순위는 후처에게서 난 차남 차서준이었는데, 이 사람도 임명식 하루 전날 죽었고.”
이번엔 챙그랑, 소리와 함께 포크가 테이블 위로 낙하했다.
“이제 차 그룹에 남은 건 다음 상속자인 셋째 아들 차윤호와 막내 차도헌인데, 차윤호는 진즉에 상속을 포기하고 유학을 갔어요. 애초에 형제들 중에서 유일한 베타였으니, 그 피 튀기는 싸움에 괜히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차도헌이 상속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됐죠. 다들 우스개로 그러더라고요, 만약 차윤호가 상속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차도헌은 차 그룹의 외동아들이 되었을 거라고. 차윤호는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덕에 목숨을 면한 셈이죠.”
오윤주는 세 번째에 놓인 와인 오프너를 그대로 지나쳐, 가장 마지막에 놓인 또 다른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푹, 소리가 나게 과일을 찍곤 내게 건넸다.
“자, 여기 차도헌이에요.”
검붉은 과즙이 포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무엇을 연상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오윤주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일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죽은 장남과 차남, 그리고 상속을 포기한 셋째 아들로 인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차도헌.
오윤주가 말했다. 차윤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상속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그 말 속에는 이 모든 일을 꾸민 게 차도헌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연장선을 따라가 보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차도헌이라는 오윤주의 주장 역시 진실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차도헌이 사상 최연소로 대표이사직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건 그런 일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정말 차도헌이 그랬다고요?”
“해영 씨. 차도헌은 해영 씨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피를 나눈 형제들을 없애버리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라간 독한 인간이니까.”
“이해가 안 돼요, 나는―”
“말했잖아요. 이솝우화 듣는 것처럼 들으라고.”
쉬이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오윤주가 이야기하는 차도헌의 모습은 내가 아는 차도헌이 아닌 완전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오윤주는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준 것일까. 설마 차도헌의 복수를 위해 나랑 손을 잡으려고?
“오윤주 씨.”
나는 지독할 정도로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 하지만 슬픔이 담긴 눈은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에 오윤주의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비참함과 고통만이 있었다.
“아버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
길 것 같았던 이야기는 단 몇 줄 만에 끝났다. 아마 머릿속에서 수천 번이 넘도록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정리되었기 때문이리라. 오윤주는 눈물을 보이지도, 분노하지도 않은 채 덤덤히 이야기를 끝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차 그룹의 장남 차정우의 사건이 있고 며칠 후에 죽었다고 했다. 차정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를 본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 중 하나였지만, 조사를 받기도 전에 차도헌의 집무실에서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되었다.
살인의 장소, 그리고 흉기의 지문도 명백히 차도헌의 것이었지만 차 그룹은 검찰을 매수해 수사 방향을 돌려 다른 이를 체포했다. 그렇게 사건은 깨끗이 일단락되었다. 진실은 덮인 채로.
“5년이 걸렸어요. 미국에서 M&A를 성사시키고 오 그룹의 몸집과 재산을 더 불려 돌아왔어요. 그래야 내가 차도헌과 대적할 수 있었으니까.”
“두 사람, 결혼은요.”
“복수를 위한 거예요. 차도헌과는 그룹 인수 합병 건을 메인으로 거는 계약 결혼으로 진행되지만. 적어도 내 입장은 그쪽이랑 다르거든요.”
결국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알파 차도헌과 베타 오윤주의 운명적 사랑은 한낱 소설에 불과했다. 실상 차도헌과 오윤주의 결혼은 애초에 계약일 뿐인 데다가 복수로 범벅된 전쟁이라는 소리였다.
“그럼 오윤주 씨 복수에 나는 왜 필요한 건데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오윤주는 내리감았던 눈을 차근히 떠올리며 내 얼굴을 응시했다.
“해영 씨는 차도헌의 역린이 될 수 있으니까요.”
“…….”
“아직 쌍방 각인을 끊어내는 약물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프로토타입은 나왔지만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았으니, 아무리 급하더라도 함부로 약물을 먹이지는 않을 거예요.”
이 여자는 대체 모르는 게 뭘까? 당장 어제 이야기가 나온 정보를 정확히 파악할 정도라니.
“약물이 완성되기 전까지 내 복수가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하자면 해영 씨가 내 보험이 되어주는 거예요.”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요?”
“최대한 차도헌을 사랑하도록 노력해줘요. 혹여 약물이 완성되더라도 먹지 않겠다고, 계속 쌍방 각인을 유지하고 싶다고 설득시켜줘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오윤주는 내게 차도헌을 사랑하라고 말했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가늠조차 안 됐다. 차도헌과 약혼반지를 나눠 낀 인물이 내연남에 불과한 내게 진실된 사랑을 요구하는 게.
“그럼 차도헌의 목숨은 해영 씨 손안에 제대로 쥐게 되는 거고, 나는 해영 씨 목숨을 빌미로 차도헌한테 협박하고.”
“…….”
“걱정하지 말아요. 난 절대 해영 씨 죽일 생각 없어요. 그냥, 차도헌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울면서 비는 꼴 보고 싶으니까.”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며 절대 내 목숨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 곁에 보디가드를 붙여주겠다며 열렬히 내 신변을 지켜주리라 약속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윤주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오메가는 사랑을 하면 죽는다.
“…그럼 나한텐 뭐가 돌아오는데요.”
“다 줄게요. 뭐든. 다 말해요. 내가 거지가 되고 빈털터리가 될 정도로 요구해도 돼요. 가진 걸 다 줄게요. 상관없어요. 내 아버지의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전부를 다 해영 씨에게 줄게요.”
다시금 내 앞에는 또 다른 오윤주가 앉아 있었다. 오 그룹의 상속자이자 세기의 갑부 오윤주가 아닌, 그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젖은 오윤주가.
“어머, 해영 씨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나 이제 가볼게요.”
재킷을 집어 들며 오윤주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짧은 거리지만 현관까지 배웅해주려 그녀의 뒤를 따라가자, 능숙하게 힐을 신은 오윤주는 뒤를 돌아 나와 마주했다.
“그냥 한 번만 생각해 봐요. 해영 씨가 안 도와줘도 나는 복수 잘 해낼 거니까.”
“…….”
“갈게요. 잘 있어요, 해영 씨. 다음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마지막까지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오윤주는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채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바깥에서 빠르게 도어락이 잠금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차도헌이죠?”
“그럴걸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오윤주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차도헌의 페로몬에도 분노와 불쾌감이 가득 섞인 채였다.
이미 벌어진 걸 어찌하겠는가. 곧 문을 열고 나타난 차도헌이 오윤주를 집에 들였다며 나를 향해 화를 쏟아낼 것을 예상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차도헌의 목소리가 향한 곳은 내가 아닌 오윤주였다.
“오윤주 씨. 아무래도 우리 파혼해야겠는데.”
다짜고짜 날아오는 파혼 통보에도 오윤주는 여전히 환한 기색이었다. 파혼이고 뭐고 아예 차도헌의 말을 통째로 무시했는지 오윤주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어머, 차도헌 씨를 여기서 다 만나네요?”
“당신이야말로 여긴 왜 찾아온 겁니까?”
“당연히 해영 씨 보고 싶어서 왔죠.”
두 사람의 날 선 대화에 별안간 내 이름이 끼어들었다. 거기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오윤주는 뒤에 멀찍이 서 있던 나를 붙잡아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 덕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던 내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오윤주 덕에 차도헌과 마주 서게 됐다. 어느샌가 내 팔에 팔짱을 낀 오윤주는 경쾌하게 웃으며 ‘잘 어울리냐’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졌고, 차도헌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
차도헌은 답지 않게 말을 하다 말았다.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선 차도헌을 보고 있자니 좀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아무리 내 출신 좀 그렇다지만 차도헌이 나를 하다 하다 제 약혼녀까지 꼬셔간 희대의 남창으로 보는 건 싫었다.
“저기, 네가 생각하는 게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도헌이 오윤주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쪽 팔을 붙들어 당겼다. 확 끌어당기는 틈에 오윤주와의 팔짱은 풀렸지만, 이번엔 차도헌의 품에 갇힌 신세가 됐다.
예상대로 차도헌은 나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어차피 반항을 해봤자 별다른 소득은 없을 테다. 대신 한껏 가자미눈을 뜨고 오윤주와 차도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이 알아서 대화를 끝낼 것이지, 왜 가만히 있던 나를 가지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거냐고!
“왜 웃습니까?”
종이 인형처럼 맥없이 차도헌에게 붙들려간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깔깔대는 오윤주의 웃음소리에 차도헌은 대놓고 불쾌한 티를 냈다. 오윤주는 차도헌의 표정은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허리를 젖혀가며 한참을 웃다가 겨우 숨을 골랐다.
“차도헌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난 질투쟁이였네요?”
“허튼소리 할 거면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해영 씨도 처음 보는 거 아녜요? 내 덕에 진귀한 구경을 한 것 같은데?”
“헛소리할 시간이 그렇게 남아돕니까?”
차도헌의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말에도 오윤주는 싱긋 웃어 보였다. 저 정도로 기가 강한 사람은 거의 처음 보는지라 나로선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이제 정말 갈 마음이 생겼는지 오윤주는 어깨에 걸친 백을 다시금 고쳐 매곤 한 발을 내디뎌 차도헌과 마주 섰다. 그리곤 붉은 립스틱이 발린 도톰한 입술로 완벽에 가까운 미소를 그려내더니 실크마냥 매끄러운 목소리를 냈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해영 씨 지키려면 계약 파기 안 하는 게 좋을걸?”
“…….”
오윤주의 말에 차도헌은 침묵했다. 그 말을 들어버린 나조차도 혀가 잘린 사람처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오윤주의 입에서 ‘차도헌이 도해영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건가, 차도헌조차도 모르는 감정을 오윤주는 대체 어떻게 알고 내 앞에서 쉽게 말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영 씨한테 잘하세요, 차도헌 씨.”
“그쪽이 상관할 일 아닙니다.”
“알았어요, 신경 안 써요. 난 그럼 갈게요. 나중에 봐요, 해영 씨―”
오윤주는 등장만큼 퇴장도 깔끔한 사람이었다. 짤막하게 인사를 남긴 그녀는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히곤 그대로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윽고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고, 오피스텔에는 나와 차도헌만이 남았다.
별안간 찾아온 정적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새삼 오윤주의 경쾌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이 오피스텔을 얼마나 가득 채워주었는지 깨달을 정도였다.
갑갑하리만치 나를 껴안고 있던 차도헌의 팔뚝은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진 채였다. 몸을 비틀어 품에서 빠져나오자 다시 붙잡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차도헌은 나를 놓아주었다.
애초에, 붙잡을 이유가 없다. 차도헌이 나를 잡을 이유라는 게 있을 리 없으니까.
비이성적인 기대감은 차도헌의 페로몬을 마주할 때마다 불어났다. 착각이라면 착각이고 오해라면 오해였다.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에는 상대를 갈망하는 감정이 녹아 있다, 그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차도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안 가?”
내 물음에도 차도헌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빨리 나가버릴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차도헌을 보고 있자니 내 혀는 뇌와 합의되지 않은 말을 뱉어냈다.
“안 갈 거면 들어오고.”
내 말에 차도헌은 그제야 조각상처럼 굳어 있던 몸을 움직여 구두를 벗고 성큼 걸어 들어왔다. 현관에는 초라한 내 신발과 차도헌의 명품 구두가 나란히 놓였다. 지극히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차도헌이 오피스텔에 왔지만 딱히 둘이서 할 건 없었다. 시시콜콜 얘기를 나눌 만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자면 이 오피스텔도 차도헌의 소유이니 내가 오윤주를 대했던 것처럼 대접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저 멀뚱히 서 있기로 마음먹었다.
차도헌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세차게 물소리가 쏟아지는 욕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피스텔에 발을 들이자마자 격리된 공간으로 들어간 걸 보니 어쩌면 차도헌도 내가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거실 한 가운데에 서 있다가 은은한 차도헌의 페로몬 사이로 새콤하게 풍기는 과일 단내에 정신을 차렸다. 아까 오윤주에게 대접하겠다고 내놓은 과일은 누구에게도 먹히지 못한 채 그대로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접시부터 집어 들고 다이닝 바로 향했다. 여기서 지내면서 뭘 제대로 먹고 정리해 본 적이 없어 남은 과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찬장을 뒤적이며 그릇을 찾는데 등 뒤에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윤주랑 무슨 얘기 했어.”
그게 궁금해서 안 갔구나. 그제야 차도헌이 그 귀한 시간을 내어 이 오피스텔에 남은 경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별 얘기 안 했는데.”
오윤주가 말한 내용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사자가 아닌 내가 무언가를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은 오지 않을 테지만, 지금 당장 들은 대로 입을 열어버리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찬장 구석에 놓인 그릇을 집어 남은 과일을 쏟아 넣었다. 뚜껑을 잘 닫은 용기를 냉장고에 넣고 돌아서니 어느새 내 뒤에 차도헌이 서 있었다.
단정하게 세팅되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차도헌의 머리칼은 촉촉하게 젖은 채 대충 뒤로 쓸어 넘겨져 있었다. 보아하니 분노를 식히려 얼굴에 냉수라도 끼얹은 모양이다.
“둘이 술도 마셨어?”
냉수마찰에도 미처 씻어내지 못한 분노가 남아 있었는지, 차도헌은 불쾌감이 깃든 목소리로 빈 와인 병과 와인 잔 두 개를 한 손에 든 채 내게 추궁했다.
“오윤주 씨가 다 마신 건데.”
내 대답에 차도헌은 작게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하긴 차도헌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거다. 어쨌든 자신의 약혼녀와 내연남인 내가 초면에 마주 앉아서 오붓하게 와인을 즐긴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차도헌은 싱크대 안에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굴러다니는 코르크 마개를 빈 와인 병에 쑤셔 넣기도 했다. 양쪽으로 활짝 펴진 와인 오프너를 원래의 형태대로 잘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도 차도헌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왜 집에 들인 거야.”
“…….”
“위험하니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네 부인될 사람이니까.”
분명 내 대답은 만점인데 차도헌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다시금 말없이 내 얼굴을 응시했다. 웃기게도 차도헌의 왼손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반지가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걸 보자 마음 한편 깊숙이 뒤틀린 감정이 치솟았다. 오윤주와는 계약뿐인 결혼, 나와는 사랑 없는 육체적 쌍방 각인. 차도헌에게 진심이란 게 있기는 할까? 모든 걸 가진 최상위 포식자 극우성 알파의 삶에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걸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가 그런 걸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간절히 바랐던 것들도, 진심을 쏟아부었던 것들도 끝끝내 나를 떠나버리고 말았으니까.
결국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몸이 닿는 순간, 입술이 맞붙는 순간, 거친 호흡을 나누고 몸이 섞이는 순간, 차도헌의 페로몬이 오롯이 나를 향하는 순간.
“할래? 섹스.”
결국 가진 건 몸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엔 없었다. 멍청하게도.
***
쿵쿵 뛰어대는 심장이 아찔할 만큼 속도를 높였다. 그저 귓가에 들리는 건 신음에 젖은 호흡과 비부에서 새어 나오는 질척하고 거친 육체의 파열음뿐이었다.
불길이 치솟듯 달궈진 몸의 온도도, 혼미할 정도로 짙어진 페로몬도 그저 본능에 충실한 행위였다. 드러난 목덜미 위로 쏟아지는 입맞춤은 집요함이 가득 묻은 키스로 이어졌고, 허리를 움켜쥔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하염없이 흔들리며 신음을 줄줄 뱉었다.
“…내 눈 봐, 도해영.”
온몸을 옥죄듯 허리를 감싸 안으며 차도헌이 푹 숙였던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도헌은 커다란 손아귀로 단단히 붙잡으며 눈을 맞췄고, 나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려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호흡이 닿는 거리에 차도헌의 얼굴이 있었다. 내뱉는 가쁜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힐 정도로, 차도헌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오롯이 비출 정도로.
‘차도헌을 사랑하도록 노력해줘요.’
사랑을 하면 죽는 오메가에게, 오윤주는 감히 알파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이 감정의 끝이 어디를 향하게 되는지 상상도 못 할 오윤주는 내게 차도헌을 사랑하라고 했다.
오윤주가 했던 말이 사실일지언정, 나는 차도헌이 무섭지 않았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무자비한 차도헌의 페로몬은 내 앞에서만큼은 진실을 토해내기 바빴으니까. 오히려 두려운 건 나를 향한 차도헌의 감정뿐이었다.
여전히 차도헌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는 페로몬이 짙어질수록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 그 안에 새겨진 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더 있을까, 그러니 제발 차도헌,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사랑에 목마른 오메가는 쉽게 착각하기 마련이니까, 한 줌의 사랑에도 심장이 부풀어 터져버리니까.
내리감은 눈꺼풀 위로 다정할 만큼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나는 차도헌의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으며 몸을 당겨 안았다. 깡마른 허리에 툭 튀어나온 골반 뼈를 뭉근히 문지르는 차도헌의 손에 몸을 들썩이며 옅은 신음을 뱉었다.
여전히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몸이 닿는 순간, 입술이 맞붙는 순간, 거친 호흡을 나누고 몸이 섞이는 순간, 차도헌의 페로몬이 오롯이 나를 향하는 순간.
곧 호흡을 비집고 차도헌의 페로몬이 몸 안에 퍼져나갔고, 나는 헐떡이며 몸속에 차오르는 것들을 받아내었다. 귓가에 맺히는 거친 숨소리와 가파르게 뛰어대는 심장 박동, 그 사이로 뭉근하게 퍼지는 뜨거운 것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