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화(發火)
0.
“강태산이. 응? 뒤통수를 아주 제대로 맞았구나.”
황 회장은 끌끌대며 웃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호탕하게 박수를 쳐대기까지 했다. 두툼한 손바닥이 짝짝 맞부딪치는 소리에 황 회장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이름 모를 어린 오메가는 몸을 달달 떨었다. 그 앞에서 나는, 젖은 흙을 온통 뒤집어쓴 채 뼈마디가 부서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미안해, 태산아.’
도해영은 그렇게 떠났다.
붙잡을 수 없었다. 그 새끼가 아닌 자신을 선택하길 바랐지만 내겐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를 리 없었다, 평생을 베타로 살아온 나는 도해영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나의 전부를 건 사랑에도 그저 사랑은 고작 사랑일 뿐이었다. 베타는 오메가를 지킬 수 없다. 베타는, 오메가와 함께할 수 없다.
그래서 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기했다. 그 알파 새끼가 제게 잘난 척을 해댄 만큼 도해영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떠나보냈으면서도 미련할 만치 나는 도해영을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게서 멀어져 가는 도해영의 뒷모습을 채 끝까지 볼 수조차 없었다. 뒤통수에 뻐근하게 올라오는 고통, 이후로 이어지는 무차별적인 구타에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흙밭을 뒹굴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쇠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눈앞은 벌겋게 물들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장기가 터지는 것 같았다. 당한 쪽은 피범벅이 되었는데 정장 무리는 구둣발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깔끔히 일을 마쳤다.
정장을 입은 새끼들은 묵묵히 할 일을 수행하듯 내 손목을 뒤로 묶었다. 그렇게 이끌려간 곳은 언제고 서지해를 묻었던 야산이었다.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야트막한 야산, 내 몸뚱어리는 미리 파놓은 깊은 흙구덩이에 그대로 파묻혔다. 뒤이어 얼굴 위로 축축하고 냄새나는 흙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미친 새끼처럼 악을 써댔다.
죽이겠다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외쳐대는 동안에도 찝찔한 흙덩이가 마구 입 안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채 흙먼지를 뱉어낼 새도 없이 어느새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나는 온전히 묻혀버렸다. 웃기게도 그곳은 서지해를 묻은 곳 바로 옆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순 없었다. 나는 고작 조폭 새끼일 뿐인데 그게 거슬리면 얼마나 거슬린다고, 그 알파가 나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는 게 그렇게 웃길 수 없었다.
대기업의 대표이사라길래 고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조폭이나 다를 바 없다. 차도헌은 거슬리는 게 있으면 이런 식으로 치워버렸을 것이다, 도해영과의 관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나를 생매장했듯이.
하지만 차도헌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조폭질은 해본 놈이 더 잘한다는 것.
몸을 속박한 밧줄을 끊어내고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피범벅이 된 몸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지만 그건 오히려 아직 내 몸뚱어리가 생생히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뿐이었다.
절뚝이는 몸으로 나는 곧장 마을 어귀까지 뛰었다. 내겐 지쳐 쓰러질 시간조차 없었다. 도심으로 나가는 택시를 곧바로 잡아타곤 거칠게 주소를 뱉었다.
내가 갈 곳이라곤 그곳뿐이다. 내가 자라난 곳, 내게 조폭질을 가르쳐준 곳. 이 세상은 절대 우리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한다는 것과 언제고 우리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곳.
뒷세계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규모의 조직을 거머쥔 조폭들의 수장, 황 회장이었다.
***
온몸을 덮은 질퍽한 흙이 찐득하게 굳은 피딱지와 함께 대리석 타일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황 회장의 심복인 김 실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까딱여 청소부를 불렀다.
청소부라기엔 고작 앞치마 하나만 걸친 사내들이 후다닥 뛰어와 내 발밑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들이 발밑에서 젖은 흙덩이와 핏자국을 열심히 닦아내는 동안, 어린 오메가 하나를 옆구리에 낀 채 정신없이 손을 놀리던 황 회장은 그제야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강태산이. 꼴이 그게 무슨 일이냐, 응?”
“…….”
황 회장은 흥미롭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지만 난 가까이 다가오라는 지시에 복종할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우두커니 선 채로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이제야 네놈 눈에 독기가 가득 차는구나.”
엄연한 불복종에도 황 회장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 걸걸하게 웃어댔다. 짝짝대는 박수 소리와 함께 황 회장의 끽끽대는 웃음소리는 한참을 이어졌지만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우리 해영이 데리고 도망쳤던 새끼가 말이야, 응? 다시 기어들어 온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그런 내게 황 회장은 이유를 물었고, 나는 침묵했다. 악다문 어금니 사이에서 자글자글하게 흙모래가 씹혔다. 그것들을 뱉을 생각도 없이 나는 울컥 올라오는 핏덩이와 함께 삼켜내었다.
이유는 없었다. 내게 이유가 될 만한 것은 오직 도해영뿐이었으니까.
“…다시 조직에 받아주십쇼.”
“나는 너를 내치지 않았다. 강태산이 네놈 새끼가 네 발로 나간 거지.”
“…….”
“서지해 그 새끼 죽자마자 내 눈앞에 우리 해영이 데려오라고 했건만, 그새를 못 참고 빼돌리기나 하고 말이야, 응?”
“…죄송합니다, 회장님.”
나는 고개를 얕게 숙였다. 이전의 조직 생활이었다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아대며 조아렸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단순히 일개 조폭으로 돌아가려고 황 회장을 찾은 것이 아니다.
나는 조직의 2인자 자리가 필요했다. 도해영을 지키기 위해서, 알파도 뭣도 아닌 베타인 몸으로 오직 도해영을 지키기 위해서. 내겐 그 알파 새끼에 대적하는 권력이 필요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강태산이, 지금 생매장당하고 나와서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제가 조직에 있는 한, 해영이는 건드리지 말아주십쇼.”
“못 본 새에 순애보가 다 되었구나, 응? 사람 패 죽이는 조폭 강태산이가.”
“…….”
“태산아. 조폭은 영웅이 아니다. 누구를 지키고 싶었으면 조폭이 아니라 영웅이 되었어야지 않겠느냐.”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사랑했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나는 도해영을 사랑했다. 그래서 강해져야만 했다. 나는 오직 도해영을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오직 도해영을 위해 목숨마저 내바칠 수 있었다.
쿵, 소리를 내며 몸뚱어리가 바닥 위로 추락했다. 거칠게 꿇은 무릎이 내는 진동음은 회장실에 낮게 깔린 채, 내가 일으킨 흙먼지가 일순간 안개처럼 내 몸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허벅지에 찬 칼집을 풀어내었다. 뒤이어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끌끌대며 가래 끓는 웃음을 낸 황 회장은 상석에서 몸을 일으켜 내게 걸어왔다.
“그래. 네놈 새끼가 간절하긴 한가 보구나.”
황 회장의 구둣발은 녹슨 칼날을 짓이기다 이내 두 동강으로 부러뜨려버렸다. 사람을 시켜 새 칼을 가져오게 한 황 회장은 그것으로 내내 숙였던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턱 끝에 닿아오는 새 칼등의 냄새는 미치도록 공허한 것이었다.
나는 낚아채듯 칼자루를 말아 쥐었다. 손에 감기는 새것 냄새는 코를 찌푸릴 정도로 깨끗한 냄새가 났다.
“제게 남은 건 이것밖엔 없습니다.”
내게 칼을 뺏긴 황 회장의 얼굴이 마구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내, 회장은 허리를 젖혀가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강태산이. 마음에 들어, 아주. 응?”
“…….”
“잘 왔다. 아주 잘 왔어.”
이윽고 회장실 가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황 회장은 만족한 듯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칼자루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나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어지러운 문양이 그려진 검붉은 갓등 아래 나무 벽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실내, 붉은 진주알로 촘촘히 꿴 발을 헤치고 들어가면 지독한 향락의 음기가 꾸역꾸역 흘러넘치고 무거운 공기에 섞여 가라앉은 사향내가 코를 찌르는 곳.
그곳은 도해영과 내가 만난 모란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예약이신가요?”
카운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마담이 있던 자리에는 하늘하늘한 실크 셔츠를 죄다 풀어헤친 오메가가 있었다.
이전에는 마담이 했던 일인데, 방금까지 분주하게 라이터 바구니를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두터운 매뉴얼 책자를 꺼내 내게 건네는 것을 보니 이 오메가가 카운터를 전담하는 모양이다.
“탑급은 예약하셔야 하고 나머지는 현장 초이스도 가능하셔요. 매뉴얼 먼저 보고 계실래요?”
“…….”
“아직 안 정하셨으면 저로 하세요. 저 엄청 잘해요.”
카운터에서 이런 호객 행위도 가능했던가. 내 앞에 선 오메가는 책자를 뒤적이더니 끄트머리 페이지에 새겨진 자신의 프로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임자가 있는 몸이라.”
“아아, 그러세요. 누구 예약하고 오셨어요?”
내가 말한 건 예약이 아니라 도해영을 말한 거였는데, 이 오메가는 나를 예약 고객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책자를 탁 덮어 선반에 꽂아 넣곤 포스기를 두들겼다. 이 어린 오메가가 기운을 더 잃기 전에 나는 업소에 찾아온 용무를 밝혔다.
“마담을 좀 만나야 하는데.”
“아, 마담 보러 오신 거예요? 잠시만요―”
그제야 다시금 얼굴에 미소를 찾은 오메가는 수화기를 들어 호출 버튼을 꾹 눌렀다. 아직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신호음이 오가는 사이에 나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네, 마담. 어떤 분이 마담을 찾으시는데요. …네, 네- 그렇게 할게요.”
짧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오메가는 마담의 방으로 안내해주겠다며 몸을 쪼그려 카운터에서 빠져나왔다. 예상한 대로 그는 몸이 죄다 비치는 얄팍한 셔츠 말고는 더 걸친 게 없었다.
룸과 이어지는 복도에는 헐벗은 오메가들이 몸에 수건 한 장만 걸친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청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물기가 맺힌 나무 바닥에서는 축축하게 젖은 나무 냄새가 났고, 벽을 타고 새어 나오는 난잡한 신음 소리는 복도를 가득 채웠다.
문이 살짝 열린 쪽방도, 물에 먹혀 웅웅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욕탕도, 도해영이 늘 기대있었던 복도 중간의 불에 그을린 나무 벽도.
거의 두 달 만에 찾아온 모란은 무엇 하나 바뀐 것 없이 그대로에 가까웠다. 이 공간에 바뀐 게 하나 있다면, 그건 강태산이라는 이름을 제외하곤 모든 것을 갈아치운 나 자신이었다.
복도 끝자락에 다다르자 문틀을 화려하게 장식한 반짝이는 흑진주 발 사이로 마담이 걸어 나왔다. 검은 슬립에 얇은 레이스 숄, 익숙한 모습의 마담은 나를 보자마자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전무님.”
결국, 바뀐 건 나뿐이었다.
“민재야, 가서 커피 두 잔만 갖다 줘.”
안내해준 오메가에게 심부름을 보낸 마담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등을 돌렸다. 이윽고 검은 진주 발을 헤치고 룸 안으로 안내한 마담은 겹문을 닫아 잠그곤 다시금 내게 과하다시피 예의를 갖춘 인사를 올렸다.
“승진 소식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전무님.”
“마담,”
“차 한잔하고 계시면 장부는 금방 준비해서 드리겠습니다.”
“-마담!”
마담은 줄곧 내 말을 끊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녀를 마담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마담은 내 부름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내 고함을 끝으로 마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진주알이 부딪히며 찰랑이는 소리가 룸을 간간이 채웠고, 마담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마담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녀가 황 회장을 대했던 것과 비슷하다 못해 더할 지경이었다.
“마담, 제게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마담 밑에서 일할 때처럼 대해주십시오, 예?”
나는 마담의 손을 붙잡고 빌 듯이 애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붙잡힌 손을 빼내곤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변화에 익숙해지도록 하세요. 전무님께서 앞으로 마주할 것들은 이전의 삶과 비교할 수 없는 것들뿐이니까요.”
마담은 옅게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여전히 가면 안에 표정을 감춘 채로.
‘네놈에게 사업장 경영권을 몇 개 넘겨주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부탁드린 건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멍청한 새끼처럼 굴지 마라, 강태산이. 주먹질만 해서 윗대가리에 앉을 줄 알았나? 돈도 만져보고 업장 관리도 해보고, 응? 좆이 심심하면 모란에서 마음에 드는 애새끼 엉덩이도 좀 쑤셔보고 말이야.’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범벅이 된 채 무릎을 꿇었던 그 날, 황 회장은 파벌에서 굵직하게 자리를 잡은 사업장들의 관리권을 내게 넘겼다. 그 안에는 내가 5년간 가드로 일했던 모란도 포함되어 있었다.
‘3개월이야, 강태산이 네놈 손으로 딱 이만큼만 불려놔. 할 수 있겠나, 응?’
내게는 선택이라 할 것조차 없었다.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몸으로 도해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기에.
‘…알겠습니다, 회장님. 맡겨주십시오.’
그날부로 나는 황 회장의 밑에서 착실하게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황 회장이 소유한 호텔에는 즉각 나를 위한 최고급 룸 하나가 꾸며졌고, 고급 맞춤 정장 수십 벌과 품위 유지비 명목하에 지급되는 블랙카드가 손에 쥐어졌다.
당장 두 달 전만 하더라도 땀내가 밴 작업복에 밑창이 닳은 신발을 신고 업소를 지키는 조폭 일을 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 빼입은 채로 업소의 달 정산을 확인하러 오는 황 회장의 심복이 되어 있었다.
변한 건 나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은 짙은 자멸감을 남기고 발밑으로 사라져갔다.
입 안이 씁쓸하다 못해 피비린내가 났다.
자그마한 노크 소리에 이어 마담이 부탁한 커피가 도착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오메가에게 마담은 고맙다며 카운터에 있는 지갑에서 용돈을 꺼내 가라 덧붙이기까지 했다.
심부름을 마친 오메가가 방을 나가자 마담은 테이블 한쪽 구석에 무더기로 쌓아 놓은 각설탕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해영이… 데려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엔 없었습니다, 마담.”
능숙한 손길로 각설탕 껍질을 벗겨낸 마담은 김이 오르는 커피 잔 안으로 설탕 덩어리를 떨어트렸다. 이윽고 퐁당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커피 몇 방울이 튀었다.
“마담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 쥐뿔도 없는 새끼라는 거.”
각설탕 대여섯 개를 잔에 집어넣고 나서야 마담은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이미 다 식은 커피잔 바닥에선 모래 긁히는 소리가 났다.
“해영이 데려간 그 알파 새끼, 황 회장 못지않게 위험한 놈이에요. 그 새끼한테 무슨 짓 당하기 전에 해영이 데려올 계획입니다.”
“…….”
“마담, 저는 해영이 그렇게 보낸 거 후회해요. 그때 도해영 그렇게 놓치면 안 됐어요.”
더 이상 녹지 않을 것 같았던 설탕은 마담의 수저질에 사정없이 으깨지다 곧 잠잠해졌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티스푼이 수면 위를 깨고 올라오면 언제 설탕을 삼켰냐는 듯 커피잔 안은 한없이 고요해졌다. 마담은 그대로 커피잔을 내게 건넸다.
“전무님, 제가 5년 전에 왜 해영이를 전무님께 부탁드렸는지 아세요?”
마담은 한쪽 구석에 널브러진 각설탕 껍질을 주먹에 쥐어 구겼다. 바스락 소리에 힘없이 쪼그라든 얄팍한 껍질 뭉치가 테이블 위에서 데구루루 굴렀다.
“해영이, 참 여린 애예요. 겉으로는 강하게 굴지만 속은 죄다 문드러지고 헤집어져서… 겨우 붙잡고 사는 애였는데 은수가 그렇게 간 후로는 더….”
“…….”
“옆에서 보고 있으면 참 속상하고, 자식 같고. 그래서 전무님한테 맡겼어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무님은 강한 사람이니까.”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이유 모를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몰려오는 갈증에 마담이 건넨 커피 잔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윽고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커피에 입 안이 침몰하듯 녹아내렸다.
“전무님, 저는 해영이만큼은 안 잃었으면 해요.”
“…….”
“내 자식 같거든.”
마담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웃었다, 서럽게 우는 것처럼 바싹 마른 어깨를 작게 들썩이면서.
업장의 상태를 확인하고 장부를 받으면 모란에서의 일은 끝난다. 다음 달에도, 그 다음 달에도 마담은 나를 이렇게 대할 거다. 그 사실은 씁쓸하게 녹아 입 안에 짙은 자멸감을 남겼다.
“업장엔 잘 다녀왔나, 강태산이?”
황 회장은 기름이 잔뜩 묻은 입술을 냅킨으로 문질러 닦으며 끌끌댔다. 방금 막 식사를 마쳤는지 메이드들이 부산스럽게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달 치 장부 받았습니다. 김 실장 통해서 정리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건 나중이고, 우리 모란이는 잘 있나?”
“예. 잘 계십니다.”
“새로 온 애들 중에 해영이만 한 놈은 있나?”
“장부만 찾고 바로 와서 잘 모르겠지만 회장님 취향에 맞는 아이가 몇 있을 겁니다.”
“…강태산이는 말이야. 대답을 참 잘해, 응?”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황 회장은 비꼬듯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내 앞으로 걸어온 황 회장은 검지를 치켜세워 내 이마를 꾹 짓눌렀다.
“주먹질만 하는 놈인 줄 알았더니만, 여우 같은 구석이 있어, 아주.”
황 회장의 그 제스처는 발밑에 고개를 조아리라는 뜻이었다. 검지가 이마를 짓누르는 강도에 맞춰 천천히 무릎을 꿇어앉자 마음에 든다는 듯 걸걸대는 황 회장의 웃음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네놈이 참 마음에 든다, 태산아. 내 기꺼이 우리 해영이, 네 놈한테 시집보낼 수 있겠어.”
무릎을 꿇고 있는 내 앞에 상체를 기울이며 황 회장은 답지 않게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건 조롱의 전조였을 뿐이었다.
“도해영 못 잡아 와서 아주 안달이지, 응? 나도 그 맛 잘 알지, 얼마나 축축하고 뜨겁고, 응? 꼭꼭 물어오는데. 넣자마자 앙앙대며 물 싸지르고 질펀하게 엉덩이 흔들어대는 애가 얼마 없어. 아주 1등급이야, 1등급.”
순간 목구멍까지 분노가 치솟았다. 꾸역꾸역 몸집을 불리는 살인 욕구에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홀 내부를 지키는 가드는 5명, 문밖의 가드는 10명이다. 안에 있는 놈들은 칼을 가진 놈들뿐이니 금방 제압할 수 있다, 황 회장의 더러운 혀를 양손으로 찢어내고 목구멍에 주먹을 박아 넣어 죽여 버린 후에야 문밖의 총을 든 새끼들이 뒤늦게 내 몸에 총구를 들이댈 것이다.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참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도루묵이 되어버린다. 모두 해영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내가 힘을 얻어야 도해영을 지킬 수 있다. 잇몸이 찢어지도록 어금니를 악물고 손아귀가 터질 정도로 주먹을 쥐어가며 버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다.
이윽고 황 회장은 내 두 다리 사이로 구둣발을 옮기고는 고간을 짓눌러 밟았다. 황 회장의 더러운 숨에 귓불이 금방 축축하게 습기가 차올랐다.
“네놈 새끼도 이걸로 우리 해영이 자지러지게 했나? 응? 네놈 좆물로는 애도 못 배는데 말이야.”
“…….”
“그래서 오히려 좋은가? 개처럼 허리 흔들다가 안에 배불리 싸지를 수 있잖나. 좆물이 미어터지도록 박아 넣고 목구멍에다가도 씹질하고. 응?”
조금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참으면 이 조롱이 끝난 후 룸에 올라가서 뭐든 손에 집히는 대로 깨부수면 된다. 아직은 황 회장을 죽일 때가 아니다, 죽여서는 안 된다.
분노를 참아가며 숨을 고르는데 황 회장은 고간을 짓밟아 비비던 발을 떼어내곤 내 턱을 붙들어 들어 올렸다. 가로로 쭉 찢어진 비열한 눈알은 흥분에 젖어 징그러울 정도로 핏발이 서 있었다.
“네 놈이 마음에 들게 굴면 말이야. 응? 해영이 어미한테 잘 얘기해서 너희 둘을 혼인이라도 시켜볼까 한다.”
하다 하다 미쳤는지 황 회장은 일어날 리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분노를 삼켜 물며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를 내야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장님. 해영이는 분명 고아라고….”
“그 어미 말이냐? 애새끼 내다 버리고 멀쩡히 사는 년?”
내 질문에 황 회장은 귀가 찢어질 듯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분명 해영이는 자신이 고아원에서 나고 자란 혈혈단신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남은 부모의 존재는 오로지 제 부모가 진 빚뿐이라고, 이 더럽고 암울한 곳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저주받을 운명도 선택받은 불운도 아닌 자신의 부모라며 분노하던 해영이었다.
만약 살아있다면 그 죗값을 받아야 할 터였다, 이제는 황 회장이 아닌 살아있을지 모를 도해영의 부모에게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해영이 친모가 살아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살아 있지, 아주 자알.”
거세게 쥔 주먹에 기어이 찢어진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줄줄 샜다. 진하게 흐르는 피비린내에 황 회장은 끌끌 웃으며 메이드를 불렀고, 나는 피 묻은 주먹을 대리석 위로 내리꽂았다.
도해영의 삶을 송두리째 비참하게 만든 그 친모가, 살아 있다.
“어디 있습니까, 그 여자.”
“태산아. 우리 3개월을 약속했지 않느냐, 응?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황 회장은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댔다. 다시금 대리석에 주먹을 내리꽂는 나를 달려온 메이드가 팔뚝을 붙잡아 저지했다.
“강태산이.”
“…예, 회장님.”
“똑똑하게, 응? 조폭 티 내지 말고. 어서 가봐라, 찢어진 것 좀 꿰매게.”
여전히 웃는 낯으로 황 회장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핏발이 선 비열한 눈동자엔 처절할 정도로 분노하는 어리석은 강태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