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4/43)

2.

인구가 채 오십 명도 안 되는 자그마한 시골은 예상과는 다르게 도시로부터 온 침입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몇 개월 지내다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복덕방 할머니는 얼굴에 귀찮음을 가득 띄우고선 빈집 중에서 아무 데나 골라잡아 살라며 이르곤 뒷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대충 지은 것마냥 어두운 색 지붕이 비스듬히 얹어진 방 두 칸짜리 시골집엔 수도가 있는 자그마한 마당이 딸려 있었다. 비뚜름한 돌담 안쪽으로 숨기듯 차를 주차한 강태산은 돈을 많이 벌어 더 큰 집을 사주겠다며 농담을 던졌다.

시골의 노인들은 우리가 누군지, 어떤 이유로 도시에서 이곳 까마득한 시골까지 흘러들어온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세월이 스쳐 간 깊은 눈으로 나와 강태산의 사연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누구도 우리를 꿰뚫어 보지 않았으면 했다.

순서가 한참 잘못되었지만 덮고 잘 이불과 간단한 식기, 식재료를 구매하고 나서야 나는 강태산의 치료를 강행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지낼 준비를 마칠 때까지 병원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댄 덕분이었다.

눈에 뵈는 것 없이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꾸역꾸역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난 후에야 강태산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항복했다. 그제야 내 품에 촌스러운 꽃무늬가 잔뜩 새겨진 이불이 들려 있음을 깨달았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엔 간판이 다 떨어진 의원이 있었다. 쫓겨 다니는 신세에 무슨 병원이냐며, 여전히 침 바르면 낫는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강태산을 위해 나는 왕진을 요청했다.

“느, 조폭이여?”

돋보기를 걸친 의사 할아버지는 너덜너덜해진 강태산의 팔뚝을 말없이 척척 꿰매나갔다.

“이제 손 뗐습니다.”

“도망 온겨?”

역시, 주름진 눈가엔 진실을 꿰뚫는 초능력이라도 있나 보다. 강태산은 너털너털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 비밀로 해주십쇼.”

“그랴, 처자가 이쁘긴 허네.”

할아버지가 툭 뱉은 말에 강태산은 웃으며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 모습에 쯧, 혀를 찬 할아버지는 바닥에 소독약과 연고, 꼬깃꼬깃한 약 봉투를 내려놓았다.

“느 서방 잘 챙겨, 안 죽게.”

나를 향한 할아버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강태산은 넉살을 피우며 웃어댔다. 해진 가죽 가방에 가져온 의료 기구를 정리해 넣던 할아버지는 강태산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을 건넸다.

“여긴 시골 촌구석이라 약 읎어.”

“…네?”

약이라니, 무슨 약?

내 되물음을 듣지 못했는지 할아버지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턱 걸치고는 등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나를 껴안은 팔이 느슨해진 틈에 후다닥 달려 나갔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저 마당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참이었다.

“할아버지! 치료비 받으셔야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강태산의 치료비를 챙기고 급한 마음에 맨발로 마당으로 내달렸다. 이미 논밭가로 훌쩍 걸어간 할아버지는 내 외침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시골은 치료비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 없다. 그대로 시골길을 뛰어나가려다가, 다음번에 뵙게 되면 드리고자 마음먹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밥 뽑으러 오실 때 받는다고 하셨어.”

치료비가 든 돈 봉투를 서랍에 넣는데 등 뒤에서 강태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내 팔뚝 꿰매는 것만 지켜보느라 못 들었나 보다.

“이리 와, 해영아.”

강태산은 낡은 매트리스에 반쯤 몸을 누인 채로 나를 불렀다. 서서히 마취가 풀리는 듯 강태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아파?”

나도 참 당연한 걸 묻는다. 엉망으로 찢어진 팔뚝을 꿰맸는데 안 아플 리가 있을까, 나도 모르게 다시금 바보처럼 굴었다.

강태산이 누워있는 매트리스 옆에 쪼그려 앉아 미지근한 물에 적셔온 수건으로 이마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강태산은 그런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하나도 안 아파.”

다시금, 강태산은 웃어 보였다.

여전히 우리가 겪은 것들은 죄다 시궁창일 뿐인데, 나를 바라보는 강태산은 전부를 가진 사람처럼 작게 웃었다.

“…그럼 됐어.”

숨결은 가까워질수록 달게 섞였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은 곳에는 반짝이는 강물이 있었다. 여전히, 노을을 녹여낸 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던 강물은 그렇게 우리에게로 넘실대며 밀려들었다.

그렇게 호흡이 섞였다.

***

다친 몸으로 자꾸만 발발 돌아다니는 강태산을 꼼짝도 못 하게 묶어서 며칠간 침대에 드러눕힌 덕에, 다행히도 처참하게 찢어졌던 상처는 꿰맨 자국을 따라 차츰 붙어가기 시작했다.

“을매나 말을 쳐 안 들어쌌으면 손발을 묶었어?”

처방받은 약을 다 먹일 즈음에 귀신같이 찾아온 의원 할아버지는 문도 두드리지 않고 벌컥 방 안으로 들어와 수술 도구를 장판 바닥 위로 하나둘 늘어놓았다.

“얼씨구, 두 손 두 발 다 묶었네.”

할아버지는 걸걸한 목소리로 강태산을 향해 호탕하게 웃었다. 침대 모서리에 묶어둔 밧줄을 끌러내며 나는 쪽팔림을 숨길 겸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씨이… 미리 좀 풀어둘걸.

강태산의 두 발목에 묶어둔 밧줄을 열심히 풀어내는 동안 할아버지는 어느새 돋보기를 낀 채로 강태산의 팔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순간 왜인지 숙제 검사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타부타 따져불지 않구 허러는 대로 혔나벼?”

첫날에 비하면 잘 아문 팔뚝의 상처에 할아버지는 만족한 듯 나를 슥 돌아보고선 이런저런 연장을 챙겨 들었다. 그제야 나도 마음을 내려놓곤 손에 들고 있던 밧줄을 대충 둘둘 말아 방구석에 던지곤 강태산의 옆을 지켰다.

거침없는 손길로 상처를 꿰맸던 그 날처럼 오늘도 역시 할아버지는 실밥을 풀어내는 것에도 막힘이 없었다. 덕분에 강태산의 미간은 치료가 진행될수록 좁아져 갔다.

“할부지. 마취 같은 거 안 해주십니까?”

“쯧… 젊은 것이 엄살을 피구 자빠졌네.”

욕지거리 비슷한 것을 내뱉는 걸걸한 목소리 뒤로는 자그마한 주삿바늘이 강태산의 팔뚝께를 푹 찔러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취 주사마저 터프하게 놓는 편이었다.

“잘못허면 썩는다. 된통 다 짤라내야 혀, 알간?”

강태산의 팔뚝을 꿰맨 실밥을 풀고, 힘을 주는 일을 하면 도로 터진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남긴 의원 할아버지는 거즈 한 보따리와 항생제 연고를 방바닥에 툭 던지고 다시금 사라졌다.

매일 꼼꼼히 소독을 해주고 연고를 발라주라는 지시 전에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팔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뱉은 덕에 나는 성격에 맞지 않게 겁부터 집어먹었다.

“팔 한쪽 없는 애인은 싫나 봐?”

“농담할 기분 아냐.”

다친 건 제 몸인데 강태산은 남의 일처럼 굴어댔다.

“또 묶이고 싶나 보지?”

“뭐든 네가 하면 다 좋아.”

결국 이런 식이다. 강태산은 무거운 분위기를 피하려는 사람처럼 뜬구름을 잡아댔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좇는 몸을 가볍게 밀어내며 나는 몸을 웅크렸다.

무서웠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지 몰랐으니까.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꿨다. 강태산이 죽는 꿈, 내가 자살하는 꿈, 황 회장이 나타나 우리 둘을 죽이는 꿈.

그 악몽은 너무나도 현실 같아서, 매번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옆에 누운 강태산이 살아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불안에 떠는 나를 품 안에 끌어안고 도닥이는 손길마저도 꿈인지 아닌지 분간해야만 했다.

그건 절대 꿈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기어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현실과도 같았다.

평생을 이렇게 도망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황 회장에게 붙잡혀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일방 각인을 당한 내가 언제고 자살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고, 어쩌면 차도헌이 찾아와 우리를 해칠 수도 있었다.

결국 우리 앞으로 닥칠 일은 죄다 더럽고 무섭고 두려운 것들뿐인데도, 강태산은….

“무작정 누워만 있어도 안 좋아.”

지금도 뜬구름을 잡고 있었다.

내 허리를 가볍게 붙잡아 제 허벅지 위에 앉힌 강태산은 이마 위로 입맞춤을 남겼다. 허리께를 문지르는 손길에도, 어느새 입술 위로 내려앉는 키스에도, 죄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차츰 깊어지는 스킨십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쫓아오는 입술을 피하며 강태산의 팔뚝을 살폈다. 다행히도 아직 터지지 않은 듯 꿰맨 자국이 잘 붙어 있었다.

나는 강태산의 어깨를 밀어내며 혼을 냈다. 달랑 목숨 하나 가졌으면서 두 개 가진 놈처럼 굴어대는 강태산이 너무너무 미웠다.

“상처 터지면 어떡할래.”

“다시 꿰매면 되지.”

방금까지도 엄살을 피워댄 놈이 이제 와서 능청스럽게 굴어댄다. 입꼬리에 잘게 퍼붓는 입맞춤을 피하지도 못하고 도로 품 안에 단단히 갇힌 찰나, 허리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금방 열이 올랐다.

볼 언저리에 자그마한 입맞춤을 남기던 강태산의 입술이 차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피부 한 점도 남길 수 없다는 듯 자잘하게 입술을 찍어대는 행위에 이토록 심장이 간질거릴 수 있다니, 고작 촉, 촉 소리가 나는 입맞춤인데도 손에 절로 힘이 실렸다.

처음 입 맞추는 것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몸이 떨렸다. 줄곧 사창가에서 몸을 판 오메가가 이토록 수줍게 얼굴을 붉혀대는 꼴을 누군가 봤더라면 아마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만, 그만 해….”

“응.”

대답은 긍정인데 행동은 정반대다. 듣는 체도 않곤 강태산은 다시금 움푹 파인 턱관절 근처에 입술을 찍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아래로 내려오다 종래에 목덜미 위로 뜨거운 숨결이 닿아올 때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강태산은 알파가 아니다.

목덜미를 드러내도 전혀 위험하지 않을 상대이자, 페로몬마저 맡지 못하는 베타였다.

분명 마음을 놓여야 하는 순간이었는데도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축축해졌고, 동시에 불안마저 불거졌다.

짙어지는 입맞춤에 온몸이 열에 들뜨면서도 본능은 강태산이 내 짝이 아니라고 단정을 지었다. 당장 나와 체온을 나누는 건 눈앞의 강태산인데, 내 몸은 자꾸만 부정을 뱉었다.

결국 앞선 감정 위로 형용하지 못할 다른 것들이 치덕치덕 들러붙었다.

“잠깐, 잠깐만….”

나도 모르게 강태산의 어깨를 밀었다. 고개를 푹 숙여 강태산의 눈을 피했다. 나는 바보라서 강태산과 눈을 마주하면 속에 있는 진심을 꺼내버릴지도 모르니까, 고개를 숙인 것도 모자라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돌연 매몰차게 내밀렸으면서도, 강태산은 내 등을 감싸 안은 손만은 떼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벌린 간격을 이해해주기라도 하는 듯 몸을 붙여오지 않은 채로 내 상태를 살필 뿐이었다.

“어디 아파? 왜, 몸이 안 좋아?”

와중에도 나를 걱정하는 강태산의 목소리가 오롯이, 그저 나를 향해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나를 향한 강태산의 눈빛이 그랬다. 내 이마 위로 조심스레 입을 맞추는 강태산의 포근한 입술이 그랬다. 나를 안아주는 강태산의 단단한 품이 그랬다. 강태산의 감정은 폭우가 쏟아지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전부를 적셨다.

분명 그 목소리도, 눈빛도, 행동도, 전부 내가 바라던 것들이라서.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정작 따뜻한 빗줄기 아래에 서 있자니 그건 차마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여전히 강태산에게선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았다. 그저 내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샴푸와 바디워시 냄새만 났다. 무색무취의, 그저 한없이 커다랗고 단단한 사람.

‘…해영아.’

까마득한 어둠이 내린 깊은 시골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강태산은 몇 번이고 내 이름을 속삭여주었다.

‘해영아, 도해영.’

몸을 들썩일 때마다 한쪽이 푹 꺼진 매트리스에서는 스프링 소리가 났다. 좁은 방을 울리는 더운 숨소리와 질척한 입맞춤이 끝나면 습관처럼 강태산의 품에 파고들었다. 열이 식어버린 후에 찾아오는 한기가 싫어서, 앞으로 찾아올 것들로부터 숨어버리고 싶어서.

오래 전부터 내게 전부를 내건 듯이 구는 강태산에게 알량한 마음은 결국 상처를 줄 뿐이다. 숨길 수 없는 감정들은 그렇게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무거워지고, 힘겨워질 터였다.

그래서 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차근히 내 피부 위를 눌러댈 때마다, 강태산을 끌어안은 채 죄책감과 후회를 느꼈다.

귀찮아서 덜 말려둔 머리칼을 항상 손수 말려주던 강태산. 뒤척이며 잠 못 드는 날이면 말없이 나를 챙겨 근방의 모텔로 데려가 재워주던 강태산. 질 나쁜 고객에게 손찌검을 당할 때마다 오히려 제가 더 길길이 화를 냈던 강태산.

‘오늘 언제 끝나?’

‘왜. 너도 나랑 하게?’

업소 쪽방에 둥그렇게 몸을 웅크린 채로 누워 다음 예약을 기다리던 내게 종종 저리 물었던 강태산에게 나는 퍽 삐뚠 대답을 뱉기만 했었다.

“…해영아.”

내 앞에, 지금 나를 두 팔로 감싸 안은 채 포근한 입맞춤을 남기는 사람은 분명 강태산이 맞는데, 나는 자꾸만 모란의 강태산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너와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자꾸만 모란을 떠올리나 보다. 자꾸만 과거의 감정을 꺼내와 네게 내보이나 보다.

나는 무서워졌다. 우리의 감정이 결국 과거를 향해 있을까 봐. 그래서 내가 꿈꾸는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도 과거와 닮아 있었나 봐, 우리의 지긋지긋한 운명이 너와 나를 결국 다시 그 굴속으로 기어들어 가게 만들고 있나 봐.

태산아, 나는 궁금해. 우리는 현재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지긋지긋한 과거를 내버리지 못한 우리의 해묵은 감정이 기어코 우리 둘 모두를 망가뜨리지는 않을까, 그래서 너도 나도 결국 불행해지고 말게 될까 봐. 나는 두려워.

어두운 과거가 지닌 무게만큼 몰려오는 두려움 속에서 가뿐히 답을 해낼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단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미안해.”

나는 그저 강태산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강태산도 나로 인해 불행해질 거다.

***

주인 없는 야산에, 녹이 슨 삽으로 둥그렇게 구덩이를 팠다. 자그마한 지해가 편히 누울 수 있을 만큼 흙을 퍼내고 나니 어느새 차츰 해가 지고 있었다.

담벼락 안쪽에 숨기듯이 주차해두었던 차 트렁크에는 눈을 감은 지해가 들어 있었다. 산 언덕배기 아래로 바짝 차를 갖다 댄 강태산은 묵묵히 힘없이 축 처진 자루를 들고 구덩이로 걸어왔다.

차마 포대를 벗길 용기는 없었다. 벌써 몇 주가 지난 자루 안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나기까지 했으니까. 변해버린 지해를 내려다볼 용기가 없어서 나는 지해를 포대째로 묻어주자고 제안했다. 내 말에 강태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덩이 아래로 자루를 떨궜다. 생전에 가벼웠던 만큼 지금도 지해의 몸은 가벼웠다. 깃털처럼, 어쩌면 정말 저 멀리 가버린 것처럼 지해는 구덩이 안으로 가볍게 몸을 누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삽으로 헤쳐둔 흙을 도로 구덩이 안으로 퍼다 덮었다. 강태산도 나도 한마디 꺼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삽질만 했다. 자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푹 꺼진 구덩이가 절반 정도 차오를 때까지, 나중엔 구덩이를 팠다는 흔적조차도 없을 때까지. 주인 없는 야산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땅속에 묻어주고 나서야 지해의 죽음은 내게 그제야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갈 거였으면 인사라도 해 주지. 절로 원망부터 뱉는 나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미안해.”

내가 어떻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지해야.

아직 나는 5년 전에 죽은 은수한테도 용서받지 못했는데.

“지해…야.”

지해의 이름이 내 입술 위로 맺힌다. 너무나도 가볍게,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지해를 묻고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다.

이 마을에 숨어든 첫날 사 온 촌스러운 꽃무늬 솜이불에 파묻혀 앓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색색 숨만 내쉬었다. 죽 한술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목구멍이 부었고 눈에선 자꾸 진물처럼 눈물이 줄줄 샜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이 축축하게 윗옷을 적시다가도 돌연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딱 죽기 직전, 그만큼만 나는 아팠다.

강태산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누가 가르쳐주기라도 한 듯이 시간마다 물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 열을 내렸다. 싫다고 버둥대는 몸을 단단히 붙잡아 억지로 죽을 먹였고 때에 맞춰 약도 먹였다.

어리광과는 거리가 퍽 멀었던 내가 어느새 강태산에게 칭얼댈 정도로, 딱 그만큼 아팠다.

“열 좀 내렸네.”

그간 서늘했던 강태산의 손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이 내렸다. 그렇게 한껏 보살핌을 받고 나니 줄줄 흐르던 식은땀도 멈추고 온몸을 뒤덮은 오한도 사라진 듯싶었다.

“…….”

나를 바라보는 강태산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자니 문득, 모란에서의 기억이 났다.

‘무거워. 떨어져.’

‘살가죽이랑 뼈밖에 없는데 뭐가 무거워.’

늘 축축하게 젖은 내 머리를 다정하게 말려주던 강태산. 눈썹을 팍 찌푸린 채 따뜻한 바람을 이리저리 꼼꼼하게 쏘아주던 강태산. 익숙하게 널찍한 가슴팍에 등을 대며 누울 자리를 찾는 내게 군말 없이 품을 벌려준 강태산.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 내가 정말 불쌍해 보였는지 매번 챙겨주던 강태산. 제 숟가락보다 늘 내 숟가락을 먼저 챙겨주던, 강태산.

낮은 천장의 벽지 한쪽 구석엔 자그맣게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다. 고물상에서 주워온 뒤가 툭 튀어나온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옛날 영화를 보다 내게 팝콘을 튀겨주겠다며 강태산이 난리를 친 덕분에.

돌돌 말려 들어간 장판 한쪽엔 복덕방 할머니에게 빌려온 새빨간 고무대야가 놓여 있다. 내게 족욕을 시켜주겠다며 강태산이 호들갑을 피운 덕분에.

이따금씩 시멘트 가루가 부서져 흘러내리는 벽 구석은 강태산이 이장 할아버지에게 빌려온 황토로 두텁게 칠해져 있다. 내가 종종 방 안에서 시멘트 가루 때문에 기침을 한다는 이유 하나로.

한때, 아주 잠깐 이런 걸 바란 적이 있었다. 남들한텐 다 있지만 나한테는 없던 것.

“…태산아.”

남들한텐 정말 다 있는데 꼭 나한테만 없는 그런 거. 결국 전부 오메가로 태어난 내 탓인 걸 아니까, 원망의 화살을 오롯이 나 자신에게 쏘아댈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도, 다 크고 난 지금까지도….

다분한 욕심이라는 걸 알아도, 결국 내가 바랐던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였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줄 사람. 맨몸으로 이 땅에 내려온 내가 얼어 죽지 않을 만큼 온기로 품어주고, 불안에 떠는 나를 다독이며 사랑을 속삭여줄 사람.

“고마워.”

저 멀리 미뤄둔 감정들이 파도처럼 넘실댄다. 나를 위해 강태산이 제 팔뚝을 찢어발겼던 그 날, 해 질 녘의 반짝이는 주황빛 강물이 내게로 쏟아진다. 나를 흠뻑 적시고도 남을 강태산의 눈물이, 내 얼굴 위로 따스하게 내렸다. 나는 그대로 강태산을 끌어안아 당겼다.

“…도해영.”

“응.”

“해영아, 도해영….”

강태산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아직 열 기운이 남아있는 피부 위로 입술을 짓뭉개며 내 이름을 불렀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맞춤이 몇 번이고 목덜미 위로 내려앉았다.

두려움은 없었다. 강태산이었으니까.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으며 내려간 손으로 강태산의 뒷목을 살짝 주물렀다. 그에 약속이라도 한 듯 강태산은 고개를 들어 내 입술을 좇았다.

금세 혀가 얽히고 가쁜 호흡을 나누면서 강태산은 내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열이 몰린 두 명분의 앞섶이 질척한 입맞춤만큼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얇은 면티 안으로 들어온 큼지막한 손이 날개뼈 아래로 움푹 파인 살결을 가볍게 꾸욱 눌렀다. 이윽고 척추 선을 따라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오는 손길에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뛰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몸 안쪽 피부가 간질거렸고 강태산의 손이 드로어즈 밴딩을 벌리고 틈 사이로 들어왔을 적엔 아랫배에 짜릿하게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후으, 음….”

뜨거워진 몸은 자꾸만 안달이 났다. 흥분에 조금씩 들썩이던 몸은 피부를 쓸어대는 가벼운 손길 하나에도 오만가지 감각을 느끼며 자지러졌다.

내가 이 정도로 잘 느끼는 편이었나? 강태산의 손길에 천천히 매트리스 위로 눕혀지면서 잘게 떨어대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불러온 의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긍정일 터였다. 나는 오메가, 그것도 극우성 오메가니까.

‘여긴 시골 촌구석이라 약 읎어.’

그 순간 까맣게 잊었던 억제제의 존재가 뇌리에 쾅 내리치듯 파고들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나는 억제제를 단 한 알도 먹지 않았다. 당장 강태산의 치료와 지해를 묻어주는 일에 급급해서, 내 몸이 오메가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간 차도헌이 구비해 준 고강도의 억제제를 먹었던 몸은 분명 복용 중단으로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거였다.

“태, 으응, 태산아, 흐, 으, 잠, 잠깐….”

그리고 그 부작용은 차츰 내 몸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극도의 고통과 강렬한 쾌감을 동반하는, 극우성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이었다.

어느새 아무런 자극이 없이도 신음이 줄줄 새는 입술로 겨우 강태산의 이름을 부르며 방금까지도 꼭 붙잡고 있던 어깨를 세게 뒤로 밀쳤다. 갑자기 밀쳐졌는데도 강태산은 오롯이 내 상태만을 살폈다.

“왜, 해영아. 왜. 속이 안 좋아?”

내 상태를 알아차리고 나니 열기는 속수무책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대답할 정신이 없어서 푹 숙인 고개를 몇 번이고 가로 젓는데 강태산은 되레 내 얼굴을 단단히 붙잡고 눈을 맞췄다.

서서히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히트 사이클을 겪고 있는 오메가의 몸을 베타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내 얼굴을 감싼 강태산의 손바닥 틈새로 뜨거운 눈물이 적셔 들었다. 신음을 참으려 꾹 깨문 얇은 입술 위로 강태산은 차근히 입술을 맞댔다가 떨어트렸다.

“약 구해올게, 문 잘 잠그고 있어. 응?”

“가지, 읏, 가지 마아, 강태산, 흐으, 가지 마―”

“금방 올게. 해영아, 나 금방 약 구해서 올게.”

자꾸만 품 안에 엉겨 붙는 나를 달래고 어르며 강태산은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알파의 냄새를 좇으려 아무 향도 나지 않는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는 내게 금방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정신은 그렇게 계속 흐려졌다. 붙잡을 것도 없이 자꾸만 까마득한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만 했다.

달뜬 몸을 자위하듯 뭉쳐둔 이불 위로 부벼대면서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매트리스에 묻곤 신음을 흘려댔다. 웅웅거리는 이유 모를 소음에 먹힌 두 귀 사이로 녹슨 매트리스 스프링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흣, 아- 아으….”

몸을 들썩일 때마다 눈물이 줄줄 샜다. 어설픈 손짓에 울컥이며 아래가 젖어 들었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축축한 느낌에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뻗어 힘겹게 바지를 내렸다. 별안간 피부 위로 쏟아지는 서늘한 공기의 감촉만으로도 나는 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쾅―

“…도해영!”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막혔던 숨통을 비집고 페로몬이 쏟아졌다. 화난 목소리는 나중이었다.

처음엔 시원한 바람 냄새가 났다. 방 안을 휩쓸고 사라진 서늘한 공기에 이어 맡아진 건 차가운 비 냄새, 숲 냄새, 그리고 건조한 우드 향과 쌉쌀한 초콜릿.

가까이 와닿는 숨결에 나도 모르게 품 안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온몸을 감싸는 페로몬을 양껏 맡아대면서 나는 내 몸을 끌어안는 남자의 품에 안겼다. 이윽고 가볍게 내 몸을 안아 든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설 때까지도 나는 비에 젖은 서늘한 숲 냄새에 반쯤 녹아 있었다.

“도해영 내려놔, 당장!”

그 순간, 저 멀리서 강태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붙잡은 나는 차도헌의 어깨너머로 강태산을 바라보았다.

“비켜. 도해영한테는 당신처럼 쓸모없는 베타가 아니라 내가 필요해.”

강태산을 향한 날 서린 차도헌의 목소리에 상처를 받은 건 오히려 나였다. 주제도 모르고 강태산의 사랑을 바랐던 내가, 차도헌의 품에 안겨 강태산의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알파 페로몬 따위 필요 없어. 예전에도 해영이는 억제제로 잘 버텼으니까.”

“도해영 몸 망가뜨린 작자가 여기 있었군.”

거칠게 욕을 읊조리는 차도헌의 목소리에 나는 몸을 웅크렸다. 차도헌의 페로몬에 그득히 젖은 몸이 두려움과 흥분 사이에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평생 도해영을 억제제로 버티게 할 건가? 애 몸은 억제제로 죄다 망쳐놓고, 막상 지금처럼 히트 사이클이 터지면 책임도 못 지고. 그게 당신이 하는 사랑인가? 고통 속에서 도해영이 죽어가는 걸 보는 게?”

“…….”

“똑똑히 들어. 당신은 도해영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차도헌의 말이 너무 아팠다. 강태산이 내게 해준 모든 일을 전부 부정하는 차도헌의 그 목소리는 내게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당장 나도 강태산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차피 나와 강태산은 결국 서로에게 부족한 셈인데….

‘도해영 님도 아시겠지만, 극우성 형질을 띤 알파와 오메가는 일반 베타와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태산아, 우리는 정말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너를 불행하게 만들 뿐인데, 네 모든 걸 갉아먹는 나를, 너는 왜 사랑해?

듣지 않아도 강태산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예전부터, 어쩌면 은수가 죽은 날 내 앞에 나타났던 너를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나는 알고 있었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나는 그저 널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입 닥쳐! 너 같은 알파 새끼한테 도해영 못 넘겨. 내가 한둘 본 것 같아? 잘난 알파들이 가지고 놀던 오메가를 어떻게 처참하게 죽이는지, 그 꼴을 다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네까짓 새끼한테 해영이 목숨을 넘겨, 씨팔!”

강태산의 분노에 찬 절규만큼 서서히 내 두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 강태산은 내가 차도헌에게 일방 각인을 당한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도 그 애들처럼 죽을 운명인데, 그것도 모르고 강태산은 나를 살리겠다고 처절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잘못 알고 있네. 내가 도해영을 왜 죽여.”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뒤로 차도헌은 강태산을 지나쳐 빠르게 걸었다. 미처 붙잡을 틈도,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마주할 틈도, 차도헌은 그 어떤 것도 내게 남겨주지 않았다.

어느새 내 몸은 푹신한 차 시트 위로 눕혀지고 말았다. 오롯이 차도헌의 페로몬이 쏟아지는 리무진 안에서 나는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태산, 강태산, 나를 사랑하는 강태산, 세상을 내게 줄 것처럼 구는 강태산….

네게 상처를 남긴 만큼 나도 고통스럽게 죽어갈 거야. 고작 알파의 페로몬에 목매는 내가 할 수 있는 사죄도, 피할 수 없는 천한 오메가의 숙명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부디 나를 용서하지 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태산아, 제발 나를 용서하지 마.

넘실대며 공간을 가득 채우는 페로몬에 숨이 막혔다. 숨 가쁘게 호흡을 내쉬며 두 눈을 잘게 깜박이자 눈에 고인 눈물이 투둑, 볼을 따라 턱으로 흘러 방울져 내렸다.

차도헌은 내 허벅지를 붙잡아 그대로 잡아당겼다. 이어질 행동은 다분히 거친 몸짓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차도헌은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내 두 다리를 오므렸다.

강한 힘에 허벅지가 오므려진 것도 잠시 차도헌은 나를 그대로 제 품 안에 가두듯이 안았다. 가까이 와닿는 숨결에 온몸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갔고,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바로 앞에 차도헌이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위로 내 모습이 온전히 비칠 만큼, 시선은 고요했고 하염없이 가라앉은 적막이었다.

곧 달각이는 소리와 함께 차도헌이 약통을 하나 꺼내 들었다. 보호 캡이 열리고 작은 알약을 툭, 손바닥에 위에 얹은 차도헌은 짤막한 한마디를 뱉었다.

“삼켜.”

무슨 약인지 되묻기도 전에 살짝 벌린 입술 안으로 약을 비집어 넣은 차도헌은 이윽고 생수 뚜껑을 열어 입가에 갖다 댔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차도헌이 내게 막무가내로 먹인 작은 알약도 감쪽같이 입 안에서 모습을 감췄다.

천천히 두 눈을 깜박이며 나는 차도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굳힌 차도헌은 한숨 비슷한 목소리를 내며 낮게 읊조렸다.

“…도착까지 좀 걸려. 한숨 자.”

차도헌은 이내 제 가슴팍에 얼굴이 닿도록 나를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뺨 위로 닿은 그의 심장이 쿵쿵 커다란 박동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품속은 내가 갈망하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뜨거운 온기, 온몸을 푹 적시는 짙은 페로몬,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을 심장.

차도헌은 감히 사랑을 꿈꾸던 내게 지독한 현실을 일깨워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알파와 오메가의 운명 같은 사랑 따위가 아닌 지독한 약육강식만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차도헌은 이 세상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 같은 건 절대 사랑하지 않을 알파였다.

그의 곁이라면 나는…, 헛된 꿈을 바라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한때 기꺼이 부정했던 것들은 이제 와 나의 신념이 되었다. 내겐 내 안의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도, 하물며 그 어떤 선택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나의 전부를 내걸곤 조용히 순응하며 사는 것. 그것이 비루한 운명을 지닌 오메가, 도해영에게 주어진 삶이었다.

이제 리무진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벗어나 매끄러운 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차도헌의 말처럼 도착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거다. 강태산과 도망쳐 나왔던 날도 그랬다, 우리는 기나긴 도로를 끝없이 내달리며 숨어들었으니까.

이제는 기나긴 도로를 거슬러 올라가 다시 도심 한복판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직 오메가의 페로몬으로서만 차도헌의 곁에서 이용될 곳, 사람 도해영이 아닌 그저 하나의 오메가가 될 뿐인 곳.

묵직하게 울리는 심장 박동을 뒤로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깊게 내리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내겐 보이는 것도, 맡아지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전부 차도헌이었다.

***

잠에서 깬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몽롱하게 풀어진 정신이 느릿하게 돌아오는 동안, 내 몸을 단단히 가둔 뜨거운 품 안에서 나는 눈물방울이 매달린 눈꺼풀을 꾹 내리감았다.

그 모든 고통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전신을 파고들었던 강렬한 히트 사이클도, 차도헌이 내뱉은 날 선 말들과 강태산의 상처 받은 얼굴도….

어느 것 하나 내 잘못이 아닌 것이 없었다. 전부 나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었다,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강태산은 입지 말아야 할 상처를 받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차도헌의 가슴팍을 적셨다.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차도헌은 등을 도닥이기까지 했다.

“왜 울고 있어.”

어울리지 않는 짓만큼 어울리지 않게 걱정 섞인 목소리가 차도헌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분명 그 어떤 위로도 바라지 않았는데, 차도헌은 근심 섞인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깊숙이 박아둔 감정이 원치 않게 울컥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차도헌의 얼굴은 다시금 나를 울게 하고 있었다. 이유도 모르게 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차도헌의 몸을 밀어내곤 침대에서 내려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맨발로 디디며 도망치듯 뛰어나간 내 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여긴 내가 잠시 지내던 오피스텔도, 마구잡이로 끌려간 대저택도 아닌,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이어지는 복도를 헤매며 나는 잠시간 차도헌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그렇게 발이 닿은 곳은 널찍한 욕실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뺨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대며 나는 숨죽여 울었다.

흐릿한 기억 너머로 강태산의 얼굴이 보였다. 베타라는 이유로 나를 그저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래서 내겐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물을 마지막 순간에야 보여줬던 강태산의 얼굴이, 뿌연 눈앞에 서서히 차오르고야 말았다.

눈물로 얼룩진 강태산의 얼굴 위로 숨을 거둔 지해의 파리한 얼굴이 스며들었다. 그 죽음은 기어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표정의 은수가 되었고, 그렇게 하나둘 천천히 옮겨 붙기 시작한 내 앞의 형상은 마지막으로 차도헌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니, 쟤?’

‘몰라요.’

다짜고짜 업장에 쳐들어와 내 빚의 정확한 액수를 묻곤 돈가방을 꺼내 들었다던 차도헌에 대한 마담의 첫 감상은, 저 인간이 몸집을 크게 불려 나를 한입에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얘, 독사야, 눈이. 응? 사람 눈이 아니야.’

마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차라리 그렇게라도 나를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몸뚱어리를 그대로 욱여 삼키고, 뼛조각 하나 없이 잘근대며 씹어 먹어주기를 바랐다. 그것만큼 덜 고통스러운 죽음은 내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차도헌에게 잡혀 왔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도주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목숨을 손수 끝내줄 사람이라면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 내게는 도망칠 이유가 없었으니까.

‘…왜 각인시켰어?

‘…….’

‘나를…, 나를 사랑하지도 않잖아.’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어떤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각인시켰는지, 왜 나를 좋은 곳에서 재우고 좋은 음식을 먹이는지.

그저 나는 기다릴 뿐이다. 언제고, 어떤 방식이고, 그저 나를 죽여주기를, 내 비루한 삶을 부디 끝내주기를.

제발 내가 사랑 따위를 꿈꾸지 않도록 모든 것을 짓밟아주기를, 나는 차도헌에게 간절히 바라기로 마음먹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몸은 얼음장처럼 얼어붙고 추위에 이가 딱딱 부딪혔다.

곧장 레버를 돌려 뜨거운 물을 틀었다. 온수가 자유자재로 나오는 샤워기 아래에서, 이제는 온전히 눈물이 멈춘 뺨을 뜨거운 물로 씻어 내리며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를 거품으로 문질러댔다.

그렇게 손끝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뜨거운 물에 몸을 한껏 녹이고 나서야 욕실에서 나왔다. 따끈따끈한 몸에 두툼한 샤워가운을 꿰어 입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익숙지 않은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해, 거기서?”

“오믈렛 좋아해?”

차도헌은 부엌 후드 앞에서 능숙하게 웍을 다루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차도헌은 다이닝 바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에 따라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커피?”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도헌이 말하는 커피와 내가 아는 커피는 분명 다른 종류겠지만 태운 콩의 씁쓸한 맛이 나는 건 비슷할 거였다.

곱게 갈린 원두를 덜어내는 손길은 퍽 다정했다. 필터 밖으로 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커피를 내리는 차도헌은 조금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난폭한 얼굴로 내 체향을 좇던 알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피인지 설탕물인지 모를 정도로 각설탕을 흠뻑 녹인 마담표 커피에 익숙한 나로서는 차도헌이 갓 내린 커피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부엌을 가득 채운 따스한 향기가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커피가 찰랑이는 머그를 쥐고만 있었다.

폴폴 김이 나는 머그의 온기를 느끼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차도헌의 얼굴을 쳐다봤다. 늘 고집스러워 보였던 꾹 다물린 입술도, 무언가를 바라볼 때 잔뜩 찌푸려졌던 미간과 냉철한 눈매도, 오늘은 어째선지 느슨하게 풀린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안 우네.”

멍하니 두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데 돌연 내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피하듯 고개를 숙인 곳에는 어느새 완성된 오믈렛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위장은 따뜻하게 맡아지는 음식 냄새에 착실하게 반응했다. 달큰하고 짭짤하게 간이 밴 듯, 예쁘게 둥그런 모양을 한 오믈렛은 포근한 김을 여기저기로 흩뿌리고 있었다.

스푼을 조심스럽게 쥐어 한쪽 귀퉁이에 푹, 찔러 넣었다. 스푼 위로 한껏 떠올린 것을 그대로 입 안에 밀어 넣자 보이는 것만큼이나 폭신한 달걀 사이로 큼직하게 썰린 야채들이 씹혔다. 그 후로 연달아 세 스푼을 베어 먹고 나서야 나는 느지막한 감상을 표했다.

“맛있어.”

자신만만해하는 저 얼굴이 재수 없었지만, 굶주린 위장이 환호하고 있었다.

커다란 오믈렛을 반 정도 해치웠을 즈음에야 식기가 달그락대는 소리는 나한테서만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곧 접시 위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자 차도헌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피할 것도 없지만 딱히 눈을 맞대고 있을 필요는 없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잠깐 쳐다본 차도헌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왜, 뭐 더 해줘?”

딱히 떠오르는 음식은 없었다. 지금 이 오믈렛으로도 충분했고, 차도헌을 부려먹을수록 난감해지는 건 내 입장이었다. 고민하는 척하면서 마저 오믈렛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달큰하게 간이 밴 달걀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아까까지 김이 나던 커피가 식어버린 것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리만치 허기가 졌다. 분명 이 큼직한 오믈렛을 혼자 해치운 게 분명한데도.

문득, 혀가 아릿하게 단 게 먹고 싶어졌다.

“각설탕 있어?”

마담이 타준 커피가, 너무 달아서 혀가 아리고 코가 맵고 눈시울이 시큰해질 정도로 다디단 싸구려 다방 커피가 먹고 싶었다.

“…각설탕?”

“응. 단 거 먹고 싶어.”

내 말에 차도헌은 그대로 등을 돌아 찬장을 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식재료 사이로 팔을 쑥 집어넣은 차도헌은 유기농 자일로스 설탕 봉투를 집어 들었지만, 다시금 봉투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기다려. 윤 비서한테 사 오라고 할게.”

“아냐, 됐어. 그냥 한 말이야.”

“자주 사 먹는 브랜드 있으면 얘기해. 그거로 사 오라고 할게.”

사창가 다방 커피에 들어가는 각설탕에 브랜드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윤 비서와 통화를 연결한 차도헌은 나를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금, 이유도 모르게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 브랜드별로 다 사와.”

간결하게 전화를 마친 차도헌은 기척도 없이 내 등 뒤로 바짝 걸어왔다. 도망가듯 부엌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대피한 내 손목을 붙잡아 확 잡아당긴 차도헌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또 울고 있어.”

“…몰라.”

“너 바보야? 네가 왜 우는지도 몰라?”

차도헌은 다짜고짜 내게 화를 냈다. 그만큼 억세게 붙잡힌 손목에도 힘이 실리기 시작했고, 나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몰랐어? 나 멍청해.”

“…도해영,”

“그리고 내가 울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단단히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차도헌의 얼굴은 심각한 문제를 쳐다보는 사람처럼 찌푸려진 상태였다.

짜증이 났다. 나조차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내게 왜 그러냐며 보채는 차도헌이 짜증 났고, 자꾸만 픽픽 울어대는 나 자신이 너무 짜증 났다.

마구잡이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줄줄 새어 나오는 눈물을 닦아냈다. 쪽팔리게 자꾸 우는 꼴을 남에게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고개를 숙인 만큼 눈물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고, 어느새 나는 차도헌의 품에 안겨있었다.

“상관있어.”

“…….”

“네가 왜 우는지, 어디가 아픈지, 뭐가 널 웃게 만들고 슬프게 만드는지…, 나한테는 전부 다 상관있어.”

또다시 차도헌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다. 어울리지 않게 등을 도닥이면서, 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곳에 가벼운 입맞춤까지 남기면서.

차도헌의 이런 행동은 나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 벗어날 수조차 없게 나를 단단히 가둔 품속에서, 내 혀끝엔 차도헌을 향한 날 선 감정이 턱턱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나 갖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그런 거 아냐. 내 말 들어, 도해영. 나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잖아, 내 삶이 아무것도 붙잡을 것 없이 황량하다는 것도 잘 알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왜… 내가 바랄 수 없는 걸 갈망하게 만드는 거야….

주먹을 쥔 손이 차도헌의 가슴팍을 힘없이 밀어냈다. 흐느낌에 떨리는 몸은 저항할 수조차 없게 품속으로 단단히 안겼다.

어쩌면 차도헌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내게 향했던 순간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온기도, 진하게 퍼부어지는 페로몬도, 내 이름이 차도헌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읊조려진 것도.

“…도해영.”

그리고, 차도헌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 말을 뱉어내던 것도.

“아무래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 순간에야 나는 드디어 내가 미쳤나보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새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꽉 막힌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건 내가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쳤다.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가 눈에 보이는 아무 방문이나 열어젖히곤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뒤따라온 차도헌이 문을 두드리며 불러대는 동안, 나는 한껏 웅크린 몸을 문에 기댄 채 손바닥으로 억세게 입을 틀어막았다.

“…해영아, 얘기 좀 하자. 응?”

문 너머로 나를 달래는 차도헌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밭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거대한 두려움에 질식할 것처럼 정신은 자꾸만 흐트러졌고, 바짝 끌어안은 무릎 위로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일찍부터 알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세상은 똑똑하게 굴수록 더 매를 맞았다. 그건 고아원에서도 그랬고, 조직에 끌려갔을 때도 그랬고, 업소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차도헌 앞에서도 내내 바보 같은 짓만 했다. 차도헌이 내게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굴었다. 표면에 드러나는 것들, 오직 직관적인 것들만이 내겐 정답이었다.

그렇기에 줄곧 내가 이해하지 못할 순간들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품의 온기가 그랬고, 나를 푹 적시는 페로몬이 그랬고, 내 이름을 부르는 차도헌의 목소리가 그랬다.

‘…도해영.’

업소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은 오직 내 몸을 돈 주고 산 더러운 알파 새끼들이 온갖 수치스럽고 강압적인 명령을 쏟아낼 때뿐이었다. 그 뒤로 따라붙어 나를 복종하게 하는 것. 사람의 이름이 아닌, 시간당 값이 매겨진 사창가의 상품 도해영.

그래서 나는 차도헌의 목소리로 이름을 들었을 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발 당신도 그 새끼들처럼 수치스럽고 더러운 명령을 내려달라고, 내 이름 뒤엔 그런 게 붙어야 하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차도헌은 이번조차도 그 대부분의 순간에서 비껴갔다. 그래서 내 이름의 뒤에 붙은 차도헌의 문장은 보이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들리는 것도 표면 위로 느껴지는 감정도, 하나같이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건 분명 나 같은 애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미친 거야, 드디어 머리가 미쳐버린 거야….”

주먹으로 머리통을 연신 내리찍으며 웅얼거렸다.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하다, 머리가 단단히 미쳐버리지 않고서야 내가 그런 말을 들을 리 없다.

“문 열어, 도해영.”

“…….”

“내가 열고 들어가기 전에, 문 열어.”

한껏 웅크린 몸 위로 다시금 차도헌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딱딱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분명 화가 난 사람처럼 들렸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몰려오는 두려움에 달달 떨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일으켜 잠가둔 문고리를 열자, 벌컥 열린 문 앞엔 얼굴을 굳게 찌푸린 차도헌이 있었다.

그 순간 차도헌은 다짜고짜 내 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곤 성큼성큼 침대께로 걸어가 내 몸을 내려놓곤, 커다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체온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열나잖아.”

작게 혀를 찬 차도헌은 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살짝 벌린 내 입술 틈으로 알약을 물렸다. 입술 위로 갖다 댄 물잔을 조심스럽게 기울이며 물과 함께 알약을 삼키게 한 차도헌이 내 몸 위로 도톰한 이불을 덮어주며 한숨을 내뱉었다.

“제발, 몸 좀 챙겨. 몸 안 좋은 거 너도 알잖아.”

그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기어이 몸집을 불린 두려움에 온전히 잠식된 채 눈물이 고인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내가 당신에게 바란 건 오직 하나였어, 제발 내가 사랑 따위의 것을 꿈꾸지 않도록 내 모든 것을 짓밟아주기를, 내가 당신에게 간절히 바란 건 이것뿐이었는데….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내게 이러는 거야?

평생을 바닥에서 구른 나는 말뿐인 얕은 감정에도 쉽게 흔들리는데, 도대체 왜 내게 그런 말을 쏟아내는 거야? 당신이 나를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만 나를 힘들게 만드는 거야….

결국 멍청한 내가 차도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별것 없었다. 차라리 나를 남창 취급이라도 해달라고,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려 불안한 마음에 찬물을 뿌려달라고. 내 몸은 그러라고 만들어졌으니까, 내게 주어진 삶이란 그런 것뿐이니까.

“…나한테 안 이래도 돼.”

“…….”

“나 그렇게 안 비싸. 그냥 하고 싶으면 말해, 나 이런 거 어색하고 싫어. 그러니까 나한테 이러지 마. 그런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나 꿸 필요 없어. 그냥, 그쪽이라면 언제든지 다리 벌려줄 수 있으니까….”

웅얼대며 흐트러지는 목소리 끝에, 차도헌은 짙은 한숨을 뱉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리곤 화를 참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아까 말했잖아, 내가 너를….”

하지만 차도헌은 문장을 끝내지 않았다. 내게 했던 그 말을 기피하기라도 하는 듯, 마치 창피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도헌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결국 끝맺지 못한 문장을 마무리하는 건 나였다.

“…사랑한다고?”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튀어 나가자 감겼던 차도헌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아래로 감춰둔 차도헌의 감정은 이번에도 역시나 알 수 없는 것들로 죄다 엉켜있었다.

차도헌은 나를 응시했다. 여전히 깊은 색의 눈동자는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 시선을 오롯이 마주하는 만큼 헐떡이기 시작한 숨이 새된 신음과 같은 목소리를 내뱉게 했다.

“거짓말하지 마.”

날 향해 쏟아지는 차도헌의 감정은 나를 착각하게 만들 뿐이다. 더 비참해질 수도 없는 나를 결코 더 아래로, 아예 빠져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깊은 늪에 빠뜨리는 것밖엔 되지 않는다.

때를 모르고 눈물은 끝없이 눈꺼풀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나조차도 이유를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에 다시금 커다란 손으로 두 뺨을 감싼 차도헌이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믿을래.”

나는 뭣도 모르고 감정에 휩쓸리는 바보라서, 한평생 이런 걸 받아본 적 없는 천한 오메가니까. 내게 자꾸만 쏟아지는 네 감정들은 전부 내 것이 아닌데도 나를 착각하게 만드는 게 너무 싫고, 네가 지금 이러는 꼴이 짜증 날 정도로 벅차고 좋아서, 그래서 차도헌 당신이 너무 싫어.

“아니. 난 너 못 믿어.”

얼굴을 감싼 차도헌의 손을 붙잡아 뿌리쳤지만 빠져나갈 틈도 없이 다시금 턱이 붙잡혔다. 뒤로 바짝 젖혀진 고개에 온전히 쏟아지는 시선 너머에는 차도헌이 내내 감춰둔 소유욕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도해영.”

“……이거 놓, 흐, 으….”

파도처럼 몰려온 차도헌의 페로몬이 방 안을 가득 채운 것도, 그 아래에서 몸을 파득이며 숨을 헐떡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놓아달라고?”

짙은 색의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향하는 순간이었다. 날카롭게 내 안을 파고드는 차도헌의 페로몬도,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도, 죄다 내 숨을 옥죄고 있었다.

“널 놓치고 나서 지옥이 뭔지,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한지 알게 됐어. 도해영,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

“내가 너를 다신 놓치지 않겠다는 말이야.”

뒤이어 억세게 눌린 볼에 벌려진 입술 사이로 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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