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차피 잃을 것들에 대하여-1화 (13/43)

어차피 잃을 것들에 대하여

1.

퇴근 후 귀가한 차도헌의 반응은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완벽하게 적중했다고 해야 할까?

“뭐야, 이 꼬마는?”

가게에서 물건 고르듯 손가락으로 지해를 딱 집어 가리킨 차도헌은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는 듯 인상을 팍 구긴 채였다.

“아, 안녕하세요….”

“도해영, 얘 뭐냐고.”

차도헌은 우물쭈물하며 인사를 건네는 지해를 그대로 무시했다. 저 싹바가지 없는 새끼.

보들보들한 파자마를 입은 지해의 어깨를 보란 듯이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내 품 안에 자그마한 지해의 몸이 쏙 들어오는 걸 응시하는 차도헌의 눈동자엔 살기 비슷한 게 끼쳤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독점욕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차도헌의 눈앞에서, 나는 얼어붙은 채 서 있는 지해의 말간 뺨에 볼을 가볍게 부비며 답했다.

“내 동생.”

남들에게는 이러저러하여 숨겨놓은 사연이 있는 다정한 형제처럼 보였을 것이라 장담한다. 물론 한 손에 들고 있던 코트를 바닥에 내팽개친 차도헌에게 만큼은 개수작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동생 있다는 얘기 안 했잖아. 그리고 너, 가족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솥뚜껑만 한 손에 고대로 팔뚝이 붙잡혔다.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억세게 그러잡은 차도헌이 내 몸을 자기 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지해에게서 떼놓아 내 몸뚱어리를 오롯이 독점하겠다는 차도헌의 목적과는 다르게, 차도헌의 품 안에 나와 지해, 두 명이 동시에 안겼다. 보통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두 오메가의 깡마른 체구를 고려하지 못한 차도헌의 불찰이었다.

“당장 그거 안 놔?”

“내 동생한테 ‘그거’라고 했어? 너 그게 사람이 할 말이야?”

언성이 높아질수록 차도헌과 나 사이에 끼어 있는 지해의 몸은 더더욱 얼어붙기 시작했다. 긴장하지 말라고 지해의 어깨를 살살 만져주면서 막상 성을 낸 나조차도 차도헌의 눈치를 봤다. 짜증 나지만 나도 부탁하는 입장에 불과했다.

“우선 놔, 놓고 얘기해.”

팔뚝을 쥐어 잡은 차도헌의 손을 떼어내며 한 발짝 물러섰다. 차도헌은 여전히 내 품에 포옥 안겨 있는 지해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지해를 이끌며 거실 소파를 향해 걸었다. 가장 푹신한 자리에 애를 앉히고 차도헌과 마주 앉은 나는 책임감 비슷한 걸 느끼고 있었다.

“말해봐.”

턱을 치켜들곤 다리를 꼰 채로, 차도헌은 대화의 우위를 선점한 극우성 알파의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나도 그에 지지 않는 극우성 형질 오메가였다.

“얘, 여기서 좀 같이 지내야겠는데.”

***

결국 차도헌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갔다. 사람을 벌레 보듯 하는 차도헌의 눈깔에 압도당한 지해가 죄송하다며 당장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하기 전에 내 쪽에서 설득을 끝내고 싶었다.

“모란에서 같이 일했던 동생이야. 가족도 없고 지낼 곳도 없는 애야, 그러니까 조금만 봐줘.”

“친동생도 아니고, 생판 남을 돕겠다고.”

“대신 네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내가 네 방에서 같이 지내는 거든, 나를 가정부로 쓰는 거든―”

“너, 내가 저걸 받아줄 거라 생각해?”

이런 반응을 분명 예상하곤 있었지만,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거부하는 태도를 마주하고 있자니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꾸역꾸역 치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도해영. 저게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안 보여?”

“지해는 그런 거 없어. 그냥 업소에서 쫓겨난 애야. 밖에서 떨고 있는 애를 죽게 놔둘 수는 없잖아.”

“억지 부리지 마. 사람 쉽게 안 죽어.”

냉랭한 목소리가 파고든 건 두 귀가 아닌 심장이었다. 심장 깊숙이, 아물지 못한 상처를 끔찍하게 헤집는 목소리는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쉽게 죽어.”

아팠다. 심장이고 머리고 팔다리고, 죄다 너무 아팠다.

“너는 모르겠지, 우리가 왜 죽는지… 너는 절대 모르겠지.”

“도해영―”

“너도 알파니까, 그 새끼들이랑 똑같은, 지긋지긋한 알파 새끼니까….”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내 앞의 잘난 알파를 노려보았다. 평생을 알파로 살아온 차도헌은 모르겠지, 사랑에 목마른 업소 출신 오메가들은 결국 다 죽을 운명이라고.

“오메가는, 쉽게 죽어.”

은수가 그렇게 죽은 것처럼, 지해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죽음에 가까워지게 될 거고, 결국 나도 그렇게 죽어버릴 거라는 것을….

“너는 몰라.”

작게 입술을 달싹이곤 등을 돌렸다. 나를 붙잡으려는 차도헌의 손을 뿌리친 채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넘어져서 코가 깨져도 붙잡아주는 사람 하나 없었던 도해영이 이제 와서 차도헌의 손을 붙잡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

혹시나 차도헌과 위층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지해가 사라졌을까 싶어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가도, 여전히 겁에 질린 듯 덜덜 몸을 떨어대는 걸 보니 다시금 마음이 쓰였다.

“죄송해요, 형. 저…, 다른 곳 찾아볼게요.”

저택이 넓어서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가 지켜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윤 비서님에게 연락해 얻어온 보들보들한 겨울 파자마를 도로 벗어 얌전히 개어놓은 지해는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친 듯 아까의 옷차림으로 돌아온 채였다.

“아냐, 지해야. 내가 내일 아침에 한 번만 더 얘기해 볼게. 저 새끼, 아니, 집주인 성격이 좀 까다로워서 그래.”

“형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지해야, 밤에 추워. 너 홑몸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그냥 보내.”

내 말에 지해는 놀란 듯 아랫배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떨궜다. 아마 아까도 무의식중에 배를 감싸고 있었을 거였다. 아니, 아이가 생긴 이후로 지해에겐 아랫배를 소중히 어루만지는 습관이 생겼을 거였다. 은수가 그랬던 것처럼.

“가더라도 날 밝고 가, 지해야. 오늘은 나랑 같이 여기 소파에서 자자, 응?”

뼈마디가 툭 불거진 지해의 마른 손을 붙들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어느새 내가 부탁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지금,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있던 지해의 얼굴에 돌연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애 데리고 올라가.”

“…….”

“방 덥혀놨어. 욕조 물도 채웠고.”

…재수 없는 새끼.

등 뒤에서 들린 차도헌의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지해가 벗어둔 파자마를 움켜쥐었다. 한 손엔 지해의 손을, 한 손엔 보드라운 파자마를 쥔 채로 나는 전장에 나가는 병사마냥 당찬 걸음걸이로 차도헌을 지나쳐 걸었다.

“가…, 감사합니다.”

내게 손을 붙잡힌 채로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오던 지해가 허겁지겁 차도헌을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꽤나 놀랐는지 지해의 말 끝마디에는 딸꾹질이 섞여 들어가기까지 했다.

수많은 계단을 차곡차곡 밟아 올라가 2층에 다다르자, 눈앞에 펼쳐진 빈 방 중에서 어디에 지해를 재워야 할지 문득 고민이 생겼다.

차도헌의 침실은 2층 가장 안쪽, 널따란 서재와 바깥쪽으로는 테라스가 이어지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예 차도헌의 방과 정반대에 위치한 곳에 지해를 재워야 할지, 아니면 혹시 위험한 상황에 내가 달려갈 수 있게 적당히 중간 정도에 있는 방에 재워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계단 아래에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 번째 방. 거기가 햇빛이 잘 들어.”

순간 홱 고개를 돌려 차도헌을 노려보려다가, 지해의 손을 움켜쥔 오른손에 힘을 굳게 주고서는 바로 눈앞에 있는 세 번째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재수 없지만 집주인 말을 듣는 게 나은 선택일 거였다.

방문을 닫자마자 곧장 지해를 욕실에 밀어 넣었다. 새 속옷과 보드라운 파자마를 준비해 욕실 앞에 놓아두고 나서야 지해가 지낼 방이 눈에 들어왔다.

차도헌의 말대로 햇볕이 잘 드는 방인지 밤인데도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널찍한 침대에 조심스레 걸터앉아 기다리자니 물소리가 끊기고 곧 파자마를 걸친 지해가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형, 저….”

“이리 와, 빨리 누워. 엄청 푹신해.”

지해의 말을 끊으며 곱게 정리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명이서 자기에도 충분히 큰 침대의 한쪽 구석에 몸을 누이고 옆에 넓은 자리를 만들어 이불을 들추자, 고민하는 얼굴로 서 있던 지해는 옅게 웃으며 침대에 천천히 누웠다.

나만큼이나 마른 지해, 생긴 것만큼이나 아직 많이 앳된 지해, 아직 몸에 물든 멍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지해.

“푹 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네.”

조심스레 지해를 끌어안아 품에 안았다. 덜 말라 촉촉한 머리카락이 이따금씩 턱을 간질였다. 옅게 들리는 지해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모란의 비좁은 복도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복도의 시작도 끝도 아닌 애매한 중간,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는 어두운 색 나무판자 벽이 있고 그 맞은편엔 먼지 앉은 구식 소화기가 앉아있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

“…지해야.”

불에 그을린 벽에 등을 대고 눈을 감으면 쪽방 너머 잠든 사람들의 느릿한 숨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그에 맞춰 숨을 쉬다 보면 복도에 흐르는 작은 바람이 내 발끝 언저리에 닿아오는 소화기 위의 먼지마저 숨 쉬게 했다.

벽을 타고 내 등에 울리는 호흡들은 나로 하여금 내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곤 했다.

“잘 자.”

오롯이 들려오는 지해의 숨소리가, 그렇게 차츰 어둠에 녹아들었다.

눈을 뜬 건 해가 완전히 뜨고 난 후였다. 어젯밤,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그대로 지해의 방에서 밤을 보낸 듯싶었다.

눈꺼풀을 번뜩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침대를 더듬었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 지해의 팔이 닿았다. 이불을 덮은 지해의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까지 확인을 마치고서야 부릅뜬 눈을 감았다.

다행이다, 아직 지해가 죽지 않았다.

멀쩡히 숨이 붙어 있는 지해,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지해. 단순한 사실 하나에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이 사그라들었다.

미끄러지듯 푹신한 침대에서 내려오자 뜨끈한 대리석 바닥이 맨발에 닿았다. 지해가 깨지 않도록 기척 없이 발을 옮겨 문가를 향할 때 즈음에야, 이 방에 과할 정도로 난방이 유지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후덥지근한 와중에도 이불을 꼭 덮고 있는 지해를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서둘러 벽에 달린 온도 조절기 화면을 꾹 눌렀다. 어이없게도 설정된 난방 온도는 35도였다.

그 순간 데자뷔처럼 눈앞에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내가 추위에 떨다 못해 감기에 걸리자 차도헌은 난방을 30도까지 올려 주었었다.

그땐 감기에 걸려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차도헌의 온도에 대한 감각이 걱정되기까지 했다. 35도라니, 이건 난방이 아니라 폭염이다.

서둘러 난방 온도를 낮췄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온풍의 세기가 잠잠해진 것으로 보아 가까스로 찜 쪄질 위기에선 벗어난 것 같았다. 훨씬 쾌적해진 공기에 잠든 지해의 얼굴도 아까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풀어져 있었다. 안심이 된 마음으로 방에서 나왔다.

복도에 나오자마자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공기가 한순간에 몸에 밴 식은땀을 날렸다. 이 집은 중간이 없나, 아까까지도 더워서 땀을 삐질 흘렸던 게 꿈처럼 느껴질 만큼 복도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연신 팔뚝을 문지르며 복도를 걷는 동안, 옅게 남은 차도헌의 페로몬을 맡으며 그제야 나는 어째서 그의 온도 감각이 고장 나버렸는지 이해하고야 말았다.

양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는 알파의 특성상 자연적으로 평균 체온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형질인 극우성을 가진 차도헌은 평소에도 몸에서 열이 펄펄 난다고 오해할 만큼 뜨거운 체온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에 난방을 켤 일이 없는 인간이니 적당한 난방 온도가 몇 도인지 알 리가 없지. 어쨌든 이 얼어붙은 대저택에서 자다가 얼어 죽지 말라고(대신 쪄 죽을 뻔했지만) 마음을 써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할 겸, 나는 차도헌의 방문을 두드렸다.

“…뭐야.”

하지만 그곳엔 텅 빈 방이 나를 맞이할 뿐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시트와 은은한 향수 냄새가 방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이미 출근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방에서 걸어 나오려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발을 멈춰 세웠다. 원래 차도헌의 방이 이렇게까지 휑했었나? 딱히 다른 점은 없어 보이는데 왜인지 가구 한두 개가 빠진 것처럼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그 순간 허벅지 안쪽에서 낯선 진동이 울렸다. 옷 위를 더듬으며 진동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잠시 딱딱하게 만져지는 물체가 다시금 지잉- 하며 진동을 뱉어냈다.

곧장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어제 지해가 찾아다 준, 차도헌이 막무가내로 안겨준 핸드폰이었다.

「이틀간 출장.」

잠잠했던 액정 위로 번쩍이며 텍스트가 떠올랐다. 발신자에 차도헌의 이름이 조그맣게 적힌 문자에는 간결하다 못해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듯한 짤막한 명령이 적혀 있었다.

「허튼짓 말고.」

이것도 차도헌의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한순간에 사람 기분 확 구겨버리는 거.

애초에 내가 이 집에 빌붙어 있는 입장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사실인데 자꾸만 이런 식으로 갑과 을의 관계를 명확시하는 차도헌이 재수가 없으리만치 짜증 났다.

아무도 보는 이는 없지만 괜히 쌩 하니 바람을 내며 등을 돌려 방에서 걸어 나왔다. 재수 없어, 짜증 나.

***

지해가 일어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주방에서 간단히 요깃거리를 준비하는데 문득 대리석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들고 있던 달걀을 내려놓고 후다닥 부엌에서 뛰쳐나온 나를 향해 지해는 계단 중간 즈음에 선 채로 맑게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잘 주무셨어요, 형?”

지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지해는 다시금 작게 웃어 보이더니 마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자잘한 높이로 깎인 대리석 위를 밟아 내리는 차분한 발걸음을 응시하다 빠르게 등을 돌려 부엌으로 몸을 숨겼다.

자꾸만 지해를 중환자 다루듯 하면 안 되는데. 오늘 아침에도 그렇고 지금도, 나는 지해가 당장 죽을 사람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지해는 다를지도 모르잖아.’

문득 귓가에 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생전 지해를 만난 적도 없는 은수의 목소리를 빌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했다.

‘내가 잘 챙겨주면,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손안에서 달걀이 파삭, 소리를 냈다. 뒤이어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흰자가 끈적하게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투둑, 툭 바닥 위로 떨어진 비릿한 점액이 기분 나쁠만치 거북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속닥이듯 흘러나온 여린 목소리가 뒤통수를 간질였다.

나는 차갑게 굳었던 표정을 펴내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이내 지해와 얼굴을 마주한 내 얼굴에는 완벽한 따스함만이 깃든 채였다.

“괜찮아, 앉아 있어. 금방 해서 줄게.”

“너무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요….”

가볍게 손을 씻는 척 세면대로 걸어가 달걀의 잔해를 흔적 없이 씻어버렸다. 키친타월로 바닥에 떨어진 끈적한 것들을 말끔하게 닦아내고 나서야 나는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걸어가 양쪽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너 입덧 하니? 달걀 괜찮아? 이 집 냉장고에는 어째 빵이랑 달걀밖에 없다.”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럼 우선 아침은 가볍게 먹고, 이따 상황 봐서 장 보러 나가자.”

물론 나도 이 집에 갇혀 있는 입장이지만… 차도헌은 이틀간 출장 나갔겠다, 밖에 나가서 딴짓 안 하고 장만 딱 봐오겠다는데 걸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저번 오피스텔에서 지낼 때도 그렇고 언제까지 내가 먹을 식재료를 윤 비서님께 부탁할 수도 없는 모양이니까. 만약 재수 없게 발각되더라도 그 대단하신 윤 비서님께 하찮은 장보기 따위의 업무를 짊어지게 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일침을 날릴 생각이었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은 냉장고에서 굳어버린 차가운 버터마저도 금방 녹여냈다. 지글거리며 윤기가 나는 팬 위에 미리 풀어둔 달걀 물을 붓고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휘적이며 익히자, 요리라고 할 것도 없이 금방 스크램블이 완성됐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네.”

바삭하게 구운 식빵과 냉장고에서 꺼내온 두어 가지 과일잼, 달걀 스크램블, 그리고 오렌지 주스. 차려둔 상은 부엌을 가득 채운 고소한 버터 냄새가 무색하리만치 빈약했다.

“아녜요, 정말… 감사해요, 형. 잘 먹겠습니다.”

다시금 감사 인사를 하는 지해의 앞에 포크를 놓아주며 마주 앉았다. 이윽고 부엌에는 식기가 달그락대는 소리만이 차올랐다. 물론 그 소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나나 지해나 입이 짧은 탓이었다.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는 지해의 앞에서 커피를 몇 모금 들이키자니 괜스레 입 안이 썼다. 지해도 스스로의 결말을 모를 리 없다, 그간 모란에서 봐 온 게 있으니까.

그럼에도 가냘픈 희망 한 자락 정도는 가지고 싶었다. 지해가 그곳에서부터 달음박질쳐 나를 찾아왔다는 건 앞으로의 불행에서 벗어나고픈 나름의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차도헌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지해가 정확히 이 집을 찾아오게 된 경위였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 그게…요.”

지해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잔을 내려놓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입술을 작게 열었다 닫았다 할 뿐 지해는 분명 시간을 끌고 있었다.

“혹시 업소 사람이 알려줬니?”

“…그건….”

끝까지 대답은 없었다. 재차 부드럽게 묻는 내 목소리에도 지해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그 짧은 순간에 지해는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다.

어제까지도 내 앞에서 몸을 덜덜 떨어대며 도와달라고 했던 애였다.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겠다면서 자기가 그냥 떠나겠다고 말했던 애였다. 잠들기 전까지도 지해는 분명 내가 알던 애였다.

업소에서 나온 이상 내게 말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텐데 지해는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꼈다. 마치 누가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눈치를 보는 지해가 낯설게 느껴졌다.

“대답해.”

그럼 그렇지, 바로 등 뒤에서 읊조려진 명령에는 소름 돋을 정도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출장 간다며!”

차도헌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건 나뿐이었다. 이제야 지해가 대답도 없이 자꾸만 눈치를 살피던 게 이해가 갔다.

“내 집에 기어들어 온 쥐새끼는 처리하고 가야지.”

태연한 기색으로 등 뒤에서 걸어 나온 차도헌은 어느새 지해의 앞으로 바짝 다가선 채였다. 고개를 들지도 숙이지도 못하고, 지해는 애매하게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차도헌의 추궁을 받아내야 했다.

“대답해. 우리 해영이가 묻잖아.”

“…저, 이사님….”

“내가 이사인 건 어떻게 알지?”

그 순간 지해의 몸이 허공으로 불쑥 들렸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지해가 앉아있던 의자는 큰 소음과 함께 뒤로 나동그라졌고 숨이 막혀 발버둥 치는 지해의 자그마한 발이 내 눈앞에서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대답해, 서지해. 누가 널 보냈지?”

지해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움켜쥔 차도헌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피가 몰려 붉어진 목덜미엔 멍 자국이 번졌고 허공에서 흔들리던 다리는 얼어붙은 채로 꼿꼿하게 굳었다. 핏줄이 선 지해의 눈동자는 내리감긴 눈꺼풀 속으로 사라지고 차갑게 내려앉은 공포 사이로 차도헌의 페로몬이 섞였다.

손 쓸 새도 없이 내 몸은 이미 서슬 퍼런 페로몬에 단단히 속박된 채였다. 정작 굳어버린 입술로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면서, 나는 허공에 붙들린 지해만 애처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

더 이상 지해는 바르작거리지 않았다. 감긴 두 눈꺼풀이 잘게 떨리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지해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목숨보다 맡은 임무가 더 중요한가 보군.”

그 말과 함께 차도헌은 지해의 몸뚱어리를 내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지해의 몸에서 작게 쿵, 소리가 울리고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운 기침 소리가 거듭 새어 나올 즈음에야 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대체….”

그제야 나는 바보처럼 이 세계의 좆같은 약육강식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자존심을 세워가며 발악했던 모든 것들은 결국 페로몬의 우열 앞에서 무너지고야 말았다.

차도헌은 단숨에 지해를 죽여버릴 수 있다.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오메가를 놀잇감처럼 쳐다볼 거였다. 차도헌은, 그런 알파였다.

단 한 번의 저항도 못 하고 곧장 차도헌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지해가, 이미 페로몬은 거둬졌음에도 손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 자신이… 증오감이 들 정도로 비참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울음에 콱 막힌 목구멍에서 결국 잔뜩 눌린 목소리가 비명처럼 새어 나왔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디디고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지해를 내려다보고 있던 차도헌이 등을 돌리고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좆같은 몸뚱어리는 옅게 남아있는 페로몬의 잔향을 맡자마자 반사적으로 바닥에 엎어진 채 몸을 둥글게 말아댔다.

“흐윽, 컥! 콜록!”

“헉… 허억….”

지해의 기침 소리 사이로 내 거친 숨이 섞였다. 다시금 덮쳐올 흉포한 페로몬을 두려워하듯 바닥을 짚고 바짝 엎드린 몸이 달달 떨렸다.

“일어나, 도해영.”

내 이름을 부르는 차도헌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내 쪽으로 손을 뻗은 차도헌이 보였다.

“…저리 가.”

“해영아.”

분명 저 무쇠 같은 손을 들어 올려 나를 때릴 테다. 화가 난 만큼 커다란 발로 온몸을 걷어차고 무참히 밟을 터였다.

“제발… 때리지 마…, 죽기 싫어, 죽이지 마….”

나는 온몸을 떨어대며 웅얼거렸다. 알파의 분노를 오롯이 생명의 위협으로 감지하는 오메가의 본능에 절여진 채,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곤 숨죽여 헐떡댔다. 여전히 귓가엔 지해의 기침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거세게 뛰어대는 박동이 손바닥을 쿵쿵 울려대고 있었다.

“…….”

정신을 잃기 직전의 공포, 몰려오는 두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 나는 차도헌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턱을 악문 채 꾹 다문 입술, 굳은 눈매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차도헌의 얼굴은 아이러니하게도 슬픔에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너 안 죽여.”

귀를 틀어막은 손바닥 사이로 차도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쥐죽은 듯 바닥에 얼굴을 맞댄 채 가만히 숨을 죽였다. 날 선 걸음걸이와 천둥처럼 쾅 닫힌 현관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팔꿈치를 디뎌 바닥에 늘어진 지해를 향해 기었다.

목이 졸린 지해는 미약하게나마 숨을 내쉬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기침을 토해내는 지해의 피부 곳곳에는 끔찍할 정도로 검붉은 멍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살리려고 했던 지해는 찰나의 순간에 죽음을 맛봤다. 그것도 극우성 알파에게 목을 졸리는 방식으로.

그대로 지해의 옆에 엎어져 누웠다. 지해는 마른기침을 했고 나는 몸을 덜덜 떨어댔다. 당장 목이 졸린 건 내가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온몸이 아팠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목격한 차도헌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스몄던 감정들은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통받고 있는 건 분명 우리인데 어째서 차도헌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눈을 감았다. 차츰 가라앉는 지해의 숨소리 사이로 이제는 이따금씩 기침이 섞여 들어갔고 내 몸은 여전히 달달 떨렸다. 그렇게 비참한 두 명의 오메가는 부엌 바닥에 엎어진 채 누워 있었다.

“…지해야.”

“…….”

“죽지 마….”

지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터지는 옅은 기침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

겉으로는 잘 티가 나지 않던 지해의 배가 눈에 띄게 부푼 건 채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넉넉한 파자마 위로 비치는 배의 둥그런 윤곽 위에는 지해의 손이 항상 붙어 있었다.

“밥은?”

“괜찮아요.”

오늘도 지해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뼈마디가 붉게 닳은 손이 천천히 배 위를 유영할 때마다 나는 숨죽인 채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 행위는 아직 지해가 죽지 않았음을 되뇌며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잘 챙겨 먹어야지, 자꾸 끼니를 거르면 어떡해.”

배만 볼록 나왔지 몸은 이전보다 훨씬 깡마른 지해의 몸을 볼 때마다 절로 마음이 좋지 못한 쪽으로 기울었다. 목덜미의 멍 자국도 이제 흩어져 잘 보이지 않는데 나는 그걸 볼 때마다 입 안쪽 살을 씹어댔다.

3일이 지났다. 차도헌이 지해의 정체를 밝히겠다며 목을 졸랐던 그 날로부터.

애초에 내게 지해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업소에서 일하는 애들 중에서 사연 없는 애들은 없고, 지해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만약 지해가 누군가로부터 명령을 받아 날 죽이러 온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래 살 생각도 아니었으니까.

“죽 좀 끓였어. 몇 술이라도 먹자. 응?”

“…네.”

“베드 테이블 갖고 올라올게. 잠들지 말고 기다려.”

지해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문가에 서 있는 것은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느릿하게 위아래로 끄덕이는 지해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쏜살같이 계단을 밟아 내려가 부엌으로 향했다.

그날부터 차도헌은 맨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첫 며칠간은 혹시나 간밤에 들어와 나와 지해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밤을 새곤 했지만, 한편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당분간 차도헌은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집 안에 밴 차도헌의 페로몬이 사라지기엔 3일은 짧은 시간이었다. 부엌에 미약하게 남은 폭력적인 체취는 수차례 환기를 해도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시중에 나온 일반 알파 페로몬 향수를 부엌 바닥에 다섯 병째 들이붓는 순간에야 겨우 덮을 수 있었다.

부엌에 가득 찬 이름 모를 알파의 역한 체취에 옷소매로 코를 막아가며 죽을 그릇에 퍼 올렸다. 소담하게 담아낸 밑반찬과 수저를 마저 챙기고 계단을 다시금 밟아 올라가면서 나는 지해가 아직 잠들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늘 잠이 쏟아진다며 밥을 거르는 것을 말리지 못하고 재우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한술이라도 먹일 마음이었다.

지해가 머무는 방 앞에 다다르자 나는 미끄러지지 않게 손에 든 베드 테이블을 고쳐 잡으며 살짝 열린 문틈에 발을 집어넣었다. 익숙하게 툭, 차올린 문은 부드러운 경첩 덕에 소리 없이 열렸고, 나는 한 걸음 방 안으로 발을 디디며 지해에게로 걸었다.

“지해야, 죽―”

단단히 붙든 것이 무색하게 손에서 미끄러진 베드 테이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방 안엔 그날 차도헌에게 목을 졸린 것과 비슷하게, 허공에 매달린 지해가 있었다.

“…지해야.”

맥없이 축 처진 손은 더 이상 배를 붙들고 있지 않았다. 죽음을 받아들인 창백한 지해의 몸은 하염없이 가벼워 보였다.

“…지해야, 내가 죽 다시, 다시 가져올게. 응? 기다려야 돼?”

눈물이 눈을 비집고 꾸역꾸역 흘렀다. 죽 그릇이 엎어져 난장판이 된 바닥을 딛고 있는 맨발은 분명 뜨거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에서는 아프지 않으니까.

바닥에 나동그라진 베드 테이블을 움켜쥐곤 이미 깨져버린 접시 조각을 손으로 쓸어 담았다. 깊게 베어 벌건 속살이 드러난 손에서는 피가 질질 새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두 눈을 감은 지해는 분명 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요람에 들어간 것처럼 천천히 흔들리면서 더 깊은 잠이 들 터였다. 지해를 매단 줄만 없다면 좋을 텐데, 나는 그대로 바닥을 짚고 휘청이며 일어나 지해의 몸을 붙잡았다.

“지해야, 왜 이러고 있어 불편하게….”

지해는 피범벅이 된 손안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내 손이 닿을수록 지해의 아이보리색 파자마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스몄다. 차갑게 굳어버린 지해는 더 이상 기침도 하지 않았고 배를 어루만지지도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방바닥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 어둡게 깜박이는 화면을 꾹 누르며 나는 차도헌에게 전화를 했다. 차도헌이라면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나를 깨워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몇 차례 이어지던 신호음이 뚝 끊기고, 여전히 새까만 화면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며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지해가… 지해가 죽는 꿈을 꿨어, 천장에서…, 목매고 죽었는데, 근데…, 도저히 꿈이 끝나지를 않아, 나 좀 깨워줘, 나 깨고 싶어….”

아무리 발악해도 깨지지 않는 악몽은 언제나 있었다.

내겐 집이나 다름없었던 고아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던 그 밤의 악몽.

나 대신 배에 칼을 맞은 조폭 아저씨의 내장이 눈앞에서 터지던 그 날의 악몽.

그리고, 천장에 목을 매어 자살한 은수의 창백한 얼굴과 마주했던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악몽.

알고 있다. 지금 눈앞의 이것조차도 사실 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제발, 나 좀 깨워줘….”

지해는 꼭 살리고 싶었는데, 은수도 못 살린 내가 어떻게 지해를 살리겠다는 욕심을 품었을까. 대체 뭘 믿고 잘난 척을 해대며 지해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다는 양 굴었을까.

“제발….”

숨죽이며 흐느낀 끝에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았다. 쥐죽은 듯 새까만 화면은 우습게도 전화조차 걸려있지 않았으니까.

***

뒤통수 너머로 아득히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취의 인물은 빠른 걸음으로 방에 침입하곤 지해의 시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건, 강태산이었다.

“…….”

고요한 죽음이 자리한 곳에 돌연 칼같이 맞춘 일련의 동작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억겁의 순간처럼 느껴졌어야 할 모든 일은 찰나의 순간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강태산으로 인해 전부 정리되었다.

저항할 새도 없이 나는 강태산의 품에 안겼다. 줄곧 기다렸던 차도헌이 아닌, 강태산이 내 몸을 안아 들었다. 차도헌은 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전화조차도 걸리지 않았을지도 몰라. 허공에다 대고 살려달라고 빌어댄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전화가 걸렸더라도 차도헌은 오지 않았을 테니까.

이윽고 강태산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관 바로 앞에 시동이 걸린 채 멈춰선 차 조수석에 나를 내려놓은 강태산은 트렁크에 길쭉한 포대를 넣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지해는? 강태산, 지해는?”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아대는 바람에 유리창에 머리를 쿵쿵 부딪쳤다. 강태산의 험한 운전에 내 몸뚱어리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보다 못한 강태산은 한쪽 팔을 내 쪽으로 뻗어 안전벨트를 주욱 잡아당겼다. 곧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은 조수석 의자 등받이에 답삭 붙여졌다.

“지해 트렁크에 넣었어?”

“…….”

“왜 애를 트렁크에 넣어, 왜! 아직 지해 안 죽었는데, 아직 안 죽었는데 왜!”

밧줄에 매달린 지해의 몸 앞에서, 강태산은 말없이 칼을 꺼내 들었었다. 두터운 밧줄을 끊어내고 바닥으로 툭 떨어진 몸을 안아 든 강태산이 커다란 포대 안에 넣었지만, 지해가 들어간 자루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홀쭉하기만 했다.

“차 세워, 강태산. 지해 당장 꺼내! 꺼내라고!”

“…….”

“내 말 무시해? 차 세우라고!”

발을 굴러대며 소리를 질렀다. 강태산은 액셀을 밟은 채로 핸들을 꺾었다. 돌연 고속도로 갓길에 우뚝 멈춰 선 우리를 향해 지나가는 차들의 클랙슨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차 안은 낯설만치 고요해졌다.

강태산은 어금니를 악물고 있었다. 핸들을 움켜쥔 손과 팔뚝엔 여전히 힘을 주고 있는지 푸른 힘줄이 돋아 있었고, 애써 화를 참는 듯 억눌린 숨소리가 들렸다.

“…강태산.”

내 부름에 강태산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꾹 다물린 입술로, 강태산은 나를 응시했다.

“…….”

지해는 죽었어, 강태산의 눈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강태산은 아무 말 없이 도로 위를 질주했고,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는 창밖을 응시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머릿속엔 자꾸만 익숙한 얼굴들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끝나지 않는 끔찍한 악몽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잠에서 깬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수석 시트는 어느새 뒤로 젖혀진 채였고 몸 위엔 강태산이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이 얹어져 있었다. 운전석에도 뒷좌석에도 강태산은 없었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일으켜 강태산이 덮어뒀을 재킷을 팔에 끼워 넣었다. 재킷에서는 옅은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가 났다. 손등 아래로 축 내려오는 소매를 접을 생각도 않곤 곧바로 차 문을 열었다.

그렇게 끝없이 도로 위를 내달리던 차가 멈춰선 곳은 한적한 강가 근처였다. 조수석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로 나는 강태산을 찾아 천천히 걸었다. 머지않아 차 뒤쪽에서 길게 삐죽 튀어나온 구둣발을 발견했다.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빠르게 내디뎠다.

“강태산―”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쫓아간 끝에는, 차에 몸을 기댄 채 제 오른쪽 어깨를 칼로 쑤시고 있는 강태산이 있었다.

선연한 유혈 사태에 눈이 돌아간 건 나뿐이었다. 곧장 강태산에게 달려들어 칼을 붙든 손을 붙잡았다. 가까이 맡아지는 진한 피비린내에 내 두 다리는 힘이 풀린 채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놔, 강태산, 제발 칼 내려놔!”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갔다. 분명 손에 힘을 주고 있는데 강태산의 손은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단단히 칼을 쥔 손에 반쯤 매달리자 강태산은 어금니를 악문 채로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그리곤 오히려 보란 듯이, 손에 힘을 주어 칼끝을 피부 안쪽으로 깊숙이 찔러 넣곤 아래로 주욱 긁어내렸다.

이윽고 챙, 소리와 함께 칼을 바닥에 내던진 강태산은 아직 제 손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툭 쳐서 떨궈내곤 상처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대체 왜―”

끈적하게 피가 엉기는 소리에 절로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힘으로는 강태산을 절대 이길 수 없는 현실이 이토록 증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멈추게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강태산이 미간을 찡그리며 천천히 팔뚝에 처박은 손을 빼내었다.

이윽고 피 칠갑이 된 손과 함께 딸려 나온 건 피가 찐득하게 들러붙은 센서와 얼기설기 얽힌 전선이었다.

도저히 나로선 감 잡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무자비한 자해 행각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행위가 몸 안에 박힌 걸 꺼내기 위해서였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냐고….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강태산이 하는 짓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바닥에 센서를 툭 떨군 강태산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곤 센서를 구둣발로 마구 밟아대기 시작했다. 단단한 구두 밑창에 짓눌릴 때마다 자그마한 것들이 으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부서져 버린 것을 강태산은 덤덤히 집어 들었다. 마구 꼬인 전선 가닥 아래로 부서진 센서 조각들이 딸려 올라갔다. 강가를 향해 몇 걸음 걸어간 강태산은 그걸 강물 위로 휙 던져버렸다.

강태산의 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는 중이었다. 강태산이 옆으로 걸어와 쓰러지듯 바닥에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 앉았다. 나는 바닥에 놓인 칼을 집어 옷 밑단을 죽 찢어내었다.

학교도 제대로 안 나온 내가 응급처치 기술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어디서 본 것을 대충 흉내 내며 상처 아래 부근에 천을 꽉 묶자 아픈 듯 강태산이 헛웃음을 뱉었다.

“…쓸데없는 짓을 한다니까.”

“병원 가, 피 계속 나잖아.”

“됐어. 침 바르면 나아.”

턱도 없는 소리를 해댄다. 꿰맬 수조차 없게 살점이 마구 헤졌으면서, 아파서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면서… 쓸데없이 센 척을 해대는 강태산은 내 손에 들린 칼을 도로 가져가곤 곧 제가 입은 셔츠단을 찢어 내게 건넸다.

“닦아. 손에 피 묻었잖아.”

이 와중에도 너는.

불쑥 치미는 화를 누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받아 든 천을 가지런히 접어 피가 흐르는 상처 부위 위로 조심스럽게 갖다 대자 아픈지 강태산이 작게 움찔댔다. 강태산이 미운 만큼 꾹 누르려 했는데 피범벅이 된 몸을 볼 때마다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워졌다.

“제발 병원 가, 응?”

“안 가도 돼.”

강태산의 얼굴은 지극히도 완강했다. 여전히 고통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주제에, 강태산은 고집을 부렸다.

“이러다 죽고 싶어? 이거 꿰매야 될 거 아니야!”

“안 돼. 내가 어떻게 널 빼냈는데.”

“…뭐?”

그제야 바보처럼 까마득히 잊고 있던 상황을 되짚었다. 지해의 시체를 트렁크에 싣고 까마득한 시골 마을까지 나를 데려온 강태산이 팔뚝에 심은 장치를 부수고서야 내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을.

물어볼 것들은 많았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전혀 그럴 수 없는 것들 중에서 결국 후자의 것으로 지독하리만치 그득했으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강태산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윽고 차분히 내려앉은 강태산의 목소리가 진실을 토해냈다.

“위치 추적 센서, 맥파 센서, 도청 센서.”

“…….”

“저 애 몸에도 있었어.”

짧은 문장에 포함된 의미는 깊었다.

몸속에 이딴 조잡하고 조악한 기계를 심어 넣을 사람은 한 명뿐이다.

“…황 회장.”

진실은 마주할수록 내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지해는 나 때문에 죽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었던 지해는 나 때문에 황 회장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덜 자란 어른의 더럽고 고약한 수작질에 말려들어 그렇게 죽었다.

“너, 가.”

강태산도, 그렇게 죽을 거다.

“가, 강태산. 제발 좀 가!”

강태산의 가슴팍을 마구 밀었다. 제발 좀 가라고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면서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강태산의 가슴을 때렸다. 팔뚝의 통증이 전이되는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강태산은 여전히 바위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너도 나 때문에 죽게 할 수 없으니까, 제발 가라고!”

“나 안 죽어.”

“강태산!”

비명처럼 내지른 목소리는 강태산의 단단한 가슴팍에 먹혀들었다. 강태산은 나를 단단히 끌어안곤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알파가 제 오메가의 향을 좇는 것처럼, 베타인 강태산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등신 머저리 같은 강태산의 품에 안긴 채 나는 울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뜨거운 피가 흐르는 팔뚝을 움켜쥐곤 울었다.

나는 네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네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 제발 너만큼은, 살았으면 좋겠어. 강태산, 너만큼은….

“해영아.”

“…….”

“도망가자, 우리.”

너에게 품은 나의 바람은 단 하나뿐이었는데, 너는 왜 자꾸만 정반대의 답을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인데, 어째서 너는 내 바람을 처참하게 짓뭉개고만 있는지 모르겠다.

피가 말라붙은 투박한 손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긴다. 나는 알고 있다, 강태산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가진 것 하나 없는 나를 사랑하는 바보 같은 강태산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강태산의 눈은 진실만을 말한다.

“…….”

이 순간조차도 강태산은 진실을 말했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가볍게 날린 머리카락이 볼을 간질였다. 져 가는 노을에 젖은 주황빛 강물은 다이아몬드를 흩뿌린 것처럼 쉴 새 없이 반짝였다, 기어코 아무것도 삼켜내지 않는 것처럼 붉은 물결은 잔잔하기만 했다.

나는 강태산이 나를 왜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를 사랑하는 강태산을 이해할 수 없다. 평생이 가도록 나는 강태산을….

천천히 강태산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아직 흐르고 있는 축축하고 뜨거운 강태산의 피가 차츰 볼을 적셨다. 멈추지 않는 피에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이 섞여들었다. 강태산은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아이러니할 정도로 평온한 숨결이었다. 우리가 겪은 것들은 죄다 시궁창일 뿐인데, 나를 끌어안은 강태산은 전부를 가진 사람처럼 작게 웃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여전히 내겐 반짝이는 강물이 보였다. 노을을 녹여낸 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던 강물은 그렇게 내게로 넘실대며 다가왔다.

“…태산아.”

“어.”

“지해, 묻어주자.”

강태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츰 해가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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