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포즈 잡아주시고요, 예, 좋습니다!”
팡- 팡-
셔터 소리와 함께 스튜디오 조명이 빛을 터트렸다. 미간이 자꾸 구겨졌지만 도헌은 애써 인상을 가다듬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 두 분 다 지금 아주 좋습니다!”
아까부터 ‘최고다, 좋다, 잘 어울린다’ 등 갖가지 감언이설을 늘어놓던 사진사는 이후로도 몇십 장을 찍어낸 후에야 촬영을 마쳤다.
차도헌과 오윤주, 두 거물의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결혼식 일주일 전부터 하나둘 대중에 공개될 예정인 언론 기사는 철저히 오윤주 측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오늘 드레스 샵에서의 사진 촬영도 그녀가 잡은 스케줄이었다.
라운지를 꽉 채운 기자들이 질서에 맞춰 자리를 빠져나가는 동안, 소파에 편히 앉은 윤주는 자신의 비서를 불러 와인을 가져오게 했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던 라운지에 온전히 최측근만 남을 때까지 기다리던 그녀는 도어가 닫히자 입술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 계약서 검토하실 때마다 꼭 와인을 드시곤 했거든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묵묵히 계약서를 읽던 도헌은 제게 와인을 권하는 윤주의 제안을 거절했다.
“전 됐습니다.”
“아, 맞다. 차 가져왔다고 했죠? 그러고 보니 윤 비서가 안 보이네.”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고 있는 윤주를 응시하는 도헌의 얼굴은 퍽 굳어 있었다. 거의 기자회견 급으로 길어진 인터뷰로 인해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황이었다.
오늘은 해영의 퇴원 예정일이었다. 혹시 몰라 인터뷰 도중에 윤 비서를 먼저 병원으로 보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도헌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분명 해영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알파의 촉이 자꾸만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각인 상대의 페로몬을 맡지 못한 만큼 도헌의 신경은 꽤 날카로워져 있었다. 거래의 중요 덕목은 포커페이스였지만 오늘만큼은 표정을 잘 숨길 수가 없었다.
오윤주와의 계약서 검토를 빨리 끝내고 곧장 해영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헌은 여유를 부리는 그녀의 앞에 계약서를 내려놓으며 본론을 꺼냈다.
“시간 없으니 잡담은 줄이죠, 우리.”
“차도헌 씨, 사람 참 딱딱해. 사람이 그래서야 어디 찌르면 피라도 나오겠어요?”
윤주는 여전히 느긋한 태도로 마주 앉은 도헌을 응시했다. 마지막 남은 와인 한 모금을 마저 음미한 그녀는 잔을 내려놓곤 꼬았던 다리를 풀며 제대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롯이 베타로 이루어진 오씨 일가는 가히 우성 알파와 견줄 정도로 기백이 뛰어난 집안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패를 손에 쥐고 있다는 듯 여유만만한 태도와 상대의 기에 눌리지 않는 강단이 있었다. 그건 일가의 피를 물려받은 오윤주,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차도헌과 오윤주는 지극히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오로지 권력, 성공, 명예, 이것들을 위해 두 사람은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서로를 택했다. 그들의 결혼은 분명 다른 이들의 결혼과는 달랐다.
“이번에 진행되는 합병, 우리 측이 더 손실 많은 거 알죠? 난 손해 못 보는 사람이니까 결혼하면 차 그룹 이사회 명단에 올려줘요.”
“오윤주 씨, 양아칩니까?”
“아, 정말 차도헌 씨랑은 농담이 안 통해. 원래 거래는 가장 말 안 되는 것부터 던지는 거예요.”
그들에게 결혼이란 각자의 이득을 보기 위한 거래에 불과했다. 작은 파이 하나라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집어먹어야 하는 치열한 싸움이었고, 머리가 터지게 뇌를 굴려야 하는 살벌한 체스 대결이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내부 논의를 거친 후 의견 전달하겠습니다.”
“오케이! 알았어요. 그럼 다음 조항―”
도헌이 해당 조항에 따로 표시를 하는 동안 윤주는 시원한 손길로 계약서를 넘겼다. 진지하게 다음 계약 내용을 확인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던 정적은, 이내 휴대폰 진동음으로 흐트러졌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윤 비서였다. 도헌은 윤주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제스처를 남기고는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며 전화를 받았다.
“어, 윤 비서. …픽업했어?”
순간 해영의 이름을 꺼내려던 도헌은 내뱉던 문장을 뚝 끊어냈다. 아직 윤주에게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였다.
도헌은 답답한 마음에 빠르게 라운지를 가로질러 걸어가며 윤 비서의 목소리에 바짝 집중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도착하자마자 병실을 찾았습니다만, 도해영 님께서는 이미 퇴원 수속을 밟으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병원 관계자가 말하기를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과 함께 오늘 오후 두 시경, 퇴원을 마쳤다고 합니다.
윤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운지의 묵직한 도어가 쾅- 닫혔다. 터져 나오는 분노에 괜히 문에다 화풀이를 한 도헌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이어지는 보고 내용을 들었다.
―현재 병원 내, 외부 CCTV 확인에 있으며, 도해영 님의 퇴원 수속을 도운 간호사로부터 얻은 남성의 인상착의와 몇 가지 신상 정보를 얻어냈습니다만… 아무래도 일이 좀 커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위험 경보를 울려대던 차도헌의 촉은 이번에야말로 정확히 비극을 짚어냈다.
“모란… 황 회장?”
―예. 차량 이동 경로 파악이 끝나면 곧바로 황 회장 거처에 인원 투입할 예정입니다.
자신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자 도헌은 이마를 짚었다.
그 남자는 분명 윤 비서 대신 왔다고 입을 털었을 테고, 순진한 도해영은 의심치 않고 따라갔을 게 분명했다. 도헌의 최측근인 윤 비서 또한 언론에 노출된 사람이기에, 조금만 기사를 검색해보면 알 수 있을 거였다.
도헌은 모든 일이 자신의 손을 거쳐야 직성이 풀리지만, 자신만큼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와 훌륭한 실력을 가진 윤 비서만은 신뢰했다. 오직 윤 비서에게 도해영의 신변 보호를 맡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윤 비서처럼 언론에 알려진 인물을 해영과 관련시키면 안 됐을지도 몰랐다.
아주 잠깐 손을 놓고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금방 얌체처럼 채가는 새끼들이 있다니. 최악의 시나리오 앞에서 도헌은 오히려 피가 끓었다.
“알았어. 최대한 인력 끌어모아서 오늘 안으로 찾아내. 나도 따로 움직일 테니까.”
―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전화를 끊은 도헌은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윤주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면서 도헌은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에 힘을 풀어내려 노력해야 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윤주는 디저트로 함께 나온 레드벨벳 케이크를 맛보고 있었다.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완연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얼굴을 굳힌 도헌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애인한테 무슨 문제 생겼나 봐요?”
“그쪽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봐요, 나도 같이 계약서 썼어요. 우리 결혼에 상호 감정교류 없는 거 누가 몰라요?”
이윽고 소파에서 일어나 도헌과 마주 선 윤주는 자신의 비서에게 손짓하며 도헌의 코트를 가져오라 이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냥 지금 차도헌 씨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장난 좀 쳐봤지.”
말을 마친 그녀가 싱긋 웃어 보였다. 도헌은 여전히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로 건네받은 코트를 입었다.
윤주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도헌 몫의 계약서를 집어 들곤 도헌에게 내밀었다.
“빨리 가요, 해영 씨 기다리겠다. 무슨 일 생긴 건진 아직 모르지만 나한테 피해 안 가게 제대로 처리해요.”
순간 도헌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철저히 숨겨온 해영의 존재를 윤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비밀을 간파당했음을 깨달은 도헌의 입술이 비틀린 조소를 지어내자, 윤주는 그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내가 차도헌 씨랑 결혼 준비하면서 그쪽 뒷조사 안 해봤을 것 같아요?”
느긋이 뱉어내는 윤주의 말에, 이내 도헌은 완연히 페이스를 되찾았다. 냉철한 표정 아래 분노로 펄펄 끓는 피, 그가 전장이라 부르는 곳에서 예의 ‘전쟁’을 벌일 때마다 도헌은 불을 품은 얼음이 되어 상대의 목을 베어버리곤 했다.
“그것 말고도 숨겨놓은 게 많은데… 저를 도발하려면 더 분발하셔야 할 겁니다.”
윤주가 건네는 계약서를 받아들며 도헌이 맞받아쳤다. 그의 말에 윤주는 예상외의 답을 들은 듯 웃음을 터트렸고, 도헌은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아, 맞다. 나 피로연 드레스는 이걸로 할 건데, 차도헌 씨는 반대 의견 없죠?”
호탕히 웃던 그녀는 라운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도헌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걸었다.
“그쪽 마음대로 하시죠.”
“안 그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였어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하는 도헌에 윤주는 자신이 입고 있는 롱 슬리브 디자인의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의 끝자락을 손끝으로 팔랑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다시 걸음을 이어나가던 도헌은 라운지 도어를 붙잡은 채 그녀를 향해 한마디를 뱉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우리 해영이’가 뭘 입는지밖에 없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닫은 차도헌은, 명백히 오윤주에게 도발을 건 셈이었다.
***
모란이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은 뒷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몸집이 큰 조직이었다. 7년 전 마담이 내민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을 때 엄연히 나는 이중 계약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황 회장이 계약서를 들이밀며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자, 조직은 입도 벙긋 못 하고 나를 넘겨주었다.
그렇게 살 궁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마담은 업소의 오메가들에게 어머니와 마찬가지였다. 나를 비롯해 다른 곳에서 몸을 굴리다 온 애들도 다른 곳에 가느니 차라리 마담이 있는 모란에서 죽을 때까지 몸을 팔고 싶다고 했다.
“늬 놈이 해영이냐?”
감사라는 명목으로 주요 자리를 꿰찬 조직원들을 이끌고 업소에 찾아온 황 회장이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도, 나는 내가 잡은 동아줄이 썩지 않은 새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사내새끼답지 않게, 예쁘장하게 생겼구나.”
하필이면 그날, 황 회장은 수많은 오메가들 사이에서 나를 발견했다.
감사 이후 황 회장은 업소의 정산 대면 보고가 있을 때마다 마담에게 나를 포함한 두세 명의 오메가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마담의 보고가 끝나면, 황 회장은 곧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와 오메가들을 회장실 안으로 들여보내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았다.
금실로 수가 놓인 번쩍거리는 셔츠가 땀에 절을 정도로 오메가들을 끼고 놀면서도, 유독 황 회장은 집요할 정도로 나를 향해 집착을 보였다.
차도헌이 나를 이 늪에서 건져 올렸을 때, 다른 건 다 몰라도 황 회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나는 행복했다. 행복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더 이상 그런 짓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나는 행복이라 표현했다.
그런데 결국 또다시 황 회장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냄새나는 고간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며,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 네 몸이 얼마나 더 야해졌는지 보자꾸나.”
결국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멍청했고, 내 인생은 헤어나올 수 없는 시궁창 그 자체였다.
따뜻한 음식과 부드러운 소파, 좋은 향기가 나는 옷.
쭉 찢어진 황 회장의 두 눈엔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이 깃들기까지 했다.
“식기 전에 먹으렴.”
내 손에 수저를 쥐여주며 황 회장이 수프 그릇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릇 안에서 찰랑이는 수프의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도 황 회장은 멀쩡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바지 지퍼를 열어젖히던 황 회장은 늘 그랬듯이 악독했고 더러웠으며 추잡한 인간이었다.
회장실 안에 들어가서 내 몸을 보겠다는 황 회장의 말은 곧 ‘아주 수치스럽고 더러운 방식으로 너를 범하겠다’는 뜻이었다. 황 회장의 아래에서 지내온 세월로 나는 그게 어떤 행위를 뜻하는지 알았고, 반항할수록 저 할배에겐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횟감이 될 뿐이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단 몇 분 만에 황 회장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 돌변했다. 드넓은 회장실로 나를 끌고 들어간 황 회장은 사람을 시켜 내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어떠냐. 옷이 괜찮니?”
손가락으로 엉덩이 틈 사이를 노골적으로 훑는 손길만 없었더라면 황 회장이 치매에 걸렸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그만큼 황 회장은 내게 비정상적으로 굴고 있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나 보구나. 한술도 안 뜨게.”
황 회장은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저 할배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니, 놀라움 만큼 역함이 욱 치밀었다.
“몇 술이라도 뜨렴. 형편없는 병원 밥보다는 낫지 않니?”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나도 안 감사하다, 이 개새끼야.
뱃가죽 속으로 욕을 욱여넣으며 숟가락에 수프를 묻히다시피 적게 떠올렸다. 황 회장이 지켜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저 악마 새끼가 준 음식을 내가 먹을 일은 절대 없을 거였다.
황 회장 정도야 음식에 뭘 타도 그러려니 할 위인이기 때문에, 최소한 이 안에 청산가리나 염산이 들어있을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입술을 조그맣게 벌리고 손을 천천히 움직여 숟가락의 삼분에 일 정도만 입 안에 넣었다. 다행히도 숟가락에 닿은 혀와 입 안쪽 살이 쓰라리거나 욱신거리거나 마비되는 느낌은 없었다.
입 안에 넣은 숟가락을 빠르게 빼내고 수프 그릇에 숟가락 대가리를 퐁당 집어넣었다. 내가 하는 짓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관음하고 있던 황 회장은 갑자기 껄껄대며 웃더니 말했다.
“나는 먹는 걸로 장난 안 친다, 해영아.”
황 회장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듬뿍 묻어 있었지만 내게는 아무런 안심도 주지 못했다.
“죄송해요. 배가 안 고파서요.”
결국 나는 숟가락을 빠뜨린 수프 그릇을 몸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대체 저 악마 같은 할배가 뭘 하려는 진 모르겠지만 차라리 예전처럼 대놓고 더러운 짓을 당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거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못 먹어서 배곯던 우리 해영이가, 요즈음엔 참 살기 좋아졌나 보구나.”
“…….”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였다. 내 신경을 툭 긁은 황 회장의 얼굴엔 슬슬 오만함이 밀려들고 있었다.
황 회장은 손짓 한 번으로 이어지는 식사 코스를 물렀다. 동그란 은쟁반을 들고 오던 너덧 명의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며 회장실에서 빠져나갔다.
식사를 거절한 내게 황 회장은 와인을 권했다. 사람을 불러 와인을 가져오게 한 황 회장은 코르크를 열어 와인을 따랐다.
“이것도 거절할 텐가?”
내가 보는 앞에서 같은 와인을 두 개의 잔에 따라낸 황 회장은 나를 시험해 보겠다는 듯 내 앞으로 잔 하나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홀 중앙에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들의 옷자락이 부드럽게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와인을 홀짝이며 무용을 감상하던 황 회장은 나를 흘끔 쳐다보고는 역겨운 미소를 지어댔다.
여전히 내 앞에 놓인 수프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고, 방금 따른 와인에서는 쌉싸름한 포도와 오크 향이 났다.
지금으로선 황 회장이 어째서 나에게 괴팍하게 굴지 않는지 파악하기 힘들었으므로, 최소한 저 할배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마음먹었다. 와인 잔을 집어 들고 천천히 한 모금 삼켜내자 쌉싸름하면서도 새콤한 향이 입 안에 감돌았다. 금세 혀 밑으로 침이 고였다.
“어렵게 구한 품종이란다. 어때, 맛이 좋으냐?”
내가 와인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던 황 회장은 다짜고짜 맛에 대해 물었다. 한낱 업소 출신 오메가에겐 비싼 와인의 맛을 품평해낼 수 있는 능력은 없었으므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울 리는 없었을 텐데 황 회장은 아까처럼 껄껄 웃어댔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쪽을 가리켜 말했다.
“저기 와인 셀러 보이느냐? 물 대신 와인만 마셔도 될 정도로 가져다 놓았으니 편히 꺼내 먹으렴.”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쉬어라, 해영아. 나는 오늘 새로 확장한 사업장에 걸음을 해야 해서 이만 가보련다.”
…그냥 간다고?
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데, 황 회장은 돌연 회장을 지키는 조폭과 비서를 포함해서 춤을 추던 무희들까지, 회장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리곤 웃음이 완연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해영이 네가 회장실을 좀 지키고 있거라.”
“네?”
“잘할 수 있겠지?”
황 회장은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이윽고 문이 닫혔고, 널따란 회장실엔 나 혼자만이 남았다.
말도 안 된다. ‘회장실을 지키라’니, 나를 감시하는 사람 한 명 남기지 않고 죄다 쫓아낸 황 회장도 이해가 안 됐고 나 혼자만 여기에 둔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대로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갔다. 황금이 칠해진 문짝에는 분명 열쇠 구멍 하나 보이지 않는데, 밖에서 따로 잠금장치를 해두었는지 아무리 힘으로 밀고 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역시나, 황 회장이 나를 그냥 둘 리가 없다. 단단히 잠긴 문 앞에서 나는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회장실을 지키기는 개뿔, 이렇게 문짝을 잠가두면 굳이 내가 지킬 필요도 없겠다.
툴툴거리며 다시 소파로 걸어와 털썩 앉았다. 층고가 높아 시야가 탁 트이는 천장에는 무슨 성당마냥 이런저런 성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분명 황 회장은 죽으면 곧바로 지옥행일 텐데, 천장에는 어울리지 않게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었다.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고 하릴없이 누워있자니 별 잡생각이 다 들었다. 차도헌은 내가 여기에 잡혀 온 걸 알까? 분명 병원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할 텐데.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지랄같이 화를 낼 것 같으면서도 머지않아 금방 이성을 되찾을 것 같았다. 내가 차도헌에게 각인된 거지, 차도헌이 내게 각인된 건 아니니까.
차도헌은 분명 금방 다른 극우성 오메가를 찾아서, 내게 했던 것처럼 계약서를 들이밀고 자기 좆대로 각인도 시키고 할 거다. 그렇다 한들 차도헌에게 문제될 건 하나도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알파 새끼의 돈과 권력이면 다 해결이 될 테니까.
그저, 차도헌에게 각인한 나만 재수 없게 죽게 될 뿐.
어차피 죽을 건 알고 있었지만 누구한테 목매다가 비참하게 자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차도헌은 내게 각인을 남긴 장본인이니 내가 죽으면 죄책감 정도는 느끼지 않을까?
“…뭐야, 이거……?”
얼굴이 갑자기 젖을 리가 없는데, 손으로 볼을 쓸어내자 물이 한 움큼 묻어나왔다. 천장에서 물이 새나 싶어서 고개를 치켜들고 누수 흔적을 살피는데 그림이 빼곡히 그려진 천장은 재수 없을만치 견고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물은 두 볼을 적시다 못해 턱 끝에 방울져 맺히기까지 했다. 종지엔 바지 위로 뚝 뚝 떨어져 짙은 자국을 남길 정도였다. 그게 눈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나조차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눈물을 닦아낼 적에 돌연 온몸에 한기가 서렸다. 겨울날 바깥에 한참을 서 있던 사람처럼 얼어붙었다가 다시금 후끈하게 열이 맺혔다. 오락가락하는 체온 변화에 피부는 창백하게 질렸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원래 각인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내 몸이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굴은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몸이 더웠다가 추웠다가 난리를 쳐댔다.
소파에 꼼짝없이 웅크려 누운 채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동그랗게 등을 말자 절로 숨이 벅차 헐떡거렸다. 아까까지도 오락가락했던 체온이 이제는 계속 올라가는 것 같았다. 무릎에 닿아오는 내 날숨은 비이상적으로 뜨거웠다.
“하, 하아…, 왜 이래….”
열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눈꺼풀을 깜박이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을 떨구면서 나는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근데 어디선가 자꾸만 단 내가 났다. 푹 익은 과일의 껍질을 막 벗긴 듯한 그런 냄새가, 꽤 가까이서 나고 있었다.
그 향내를 인지하는 순간 내 귓가에서 삐- 하는 이명이 울렸다. 온몸에 들끓던 열기가 전부 아랫배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단숨에 발기한 성기가 바지 안에서 꿈틀댔고 뒤를 푹 적신 애액은 허벅지를 타고 소파를 적셨다.
“하, 으윽-!”
허리가 절로 뒤틀렸다. 고통을 수반하는 욕구가 갈증처럼 끓어올랐다. 짐승처럼 쿠션을 붙잡고 앞섶을 부벼대자 짜릿한 자극과 함께 울컥이며 정액이 찔끔, 흘렀다.
내게는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눈앞은 번쩍거리며 점멸해댔고 땀에 젖은 손이 자꾸만 버클에서 미끄러졌다. 눈꺼풀을 깜빡이며 눈물을 떨궈내고 고개를 푹 숙여 바지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모든 물체가 두 겹으로 겹쳐 보이는 상태였다.
쾅, 쾅!
저 멀찍이서 쿵, 하는 진동음이 울렸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손으로는 불룩한 앞섶을 움켜쥐고 주물러댔고, 나머지 손은 푹 젖은 뒤를 바지 위로 꾹꾹 눌렀다.
쾌감에 달하려면 멀었지만 당장 뭐라도 해야 했다. 자그마한 불개미들이 온몸을 깨물어대는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렸고 내벽이 꾸물대며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도해영!”
쿠션에 얼굴을 박고 헐떡이는 중에 내 이름이 들렸다. 두 귀가 먹먹하게 젖어서 누구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누구든 간에 내 몸을 범해줬으면, 내 옷을 벗기고 그냥 박아줬으면,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너 왜 이래! 도해영, 정신 차려!”
억세게 붙잡힌 손목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일었다. 거친 손이 내 몸을 일으키려 허리를 감쌌을 때엔 울컥, 하며 사정을 했다.
“제발, 흐읏, 나 좀―”
“황 회장이 약 먹였어? 그런 거야?”
아, 강태산이다. 내 볼을 두 손으로 억세게 눌러 잡고 시선을 맞추며 강태산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자꾸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제발 좀 박아줘, 태산아, 나 죽을 것 같아….
“당장 나가, 강태산.”
그 순간 먹먹하게 막힌 두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달큰한 내 향 사이로 섞여든 묵직한 체향이 곧 내 몸을 제압하듯 빠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짙어지기 시작하는 페로몬을 정신없이 맡고 있는데 차도헌은 아예 내 머리통을 제 가슴팍에 껴안았다. 내 볼 위에서 차도헌의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아무 도움 안 되니까, 당장 나가!”
더 이상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차도헌, 차도헌 딱 하나면 됐다. 나는 차도헌의 어깨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내 입술 위에 차도헌의 입술이 포개듯 겹쳐졌다. 이내 저항도 없이 혀가 질척하게 얽혔다.
차도헌의 두툼한 혀가 입 안 살점을 꼼꼼하게 훑어댈 때마다 다리 사이가 젖었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줄줄 신음이 샜고 골반은 절로 들썩이며 차도헌의 복근에 앞섶을 부벼댔다.
하지만 차도헌은 그런 나를 단호하게 밀어냈다. 입 안에 가득 차는 타액을 삼켜내며 더 조르듯 혀를 섞어대는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차도헌이, 이윽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왜 이래, 도해영! 너, 설마 히트야?”
내가 히트… 라고?
멍청하게 풀린 동공을 느릿하게 뜨며 나는 차도헌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너, 분명 예정일도 아니고 약도 계속 먹였어. 히트가 터질 리 없잖아.”
“…으응.”
뇌가 삐그덕대는 만큼 입술에선 멍청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내 대답에 차도헌의 미간은 구겨진 채였다.
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다리 사이는 마를 새도 없이 애액이 줄줄 흘러나오는 중이었으며, 뇌는 섹스 이외의 것을 생각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냥… 나랑 한 번만 자주면 안 돼?”
차도헌의 허리를 답삭 끌어안은 채로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다. 허벅지를 배배 꼬아대며 맞닿은 몸에 대고 자위하듯 고간을 부벼대며 나는 다시금 웅얼댔다.
“나 잘해… 진짜 잘하는데….”
“알아. 그래서 문제라고.”
목석같이 서 있는 차도헌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달려들어서 키스할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빼는 건데? 안 해줄 거면 페로몬이라도 거두든가!
넘쳐나는 성욕만큼 그에 수반하는 오기가 들끓었다. 안 해주곤 못 배기게 만들면 되는 거였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풀고 바지 버클을 쥐어뜯었다. 이어 지퍼를 내리고 착 달라붙은 바지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하늘하늘한 실크 소재의 바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소파에 무릎을 디뎠다. 황 회장이 옷맵시를 운운하며 멋대로 입혀놓은 끈 팬티는 엉덩이를 가리는 천 조각 하나 없었다.
그대로 두 손으로 엉덩이를 붙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허벅지를 타고 방울져 흐르는 애액이 간지러워 절로 콧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리를 뭉근하게 흔들어대며 걸리적거리는 끈을 살짝 밀어내곤 중지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익숙하게 손가락 끝을 구부려 스팟을 찾았다. 찌릿한 감각에 뭉근하게 내벽을 부벼대던 것을 종내엔 푹푹 쑤셔대기 시작했다.
“흐응, 응….”
손끝으로 감질나게 건드려진 전립선은 잔뜩 부풀어 더 큰 자극을 원했다. 당장이라도 차도헌의 크고 두꺼운 성기에 억세게 짓눌리며 박히고 싶었다. 쿵쿵 뛰어대는 심장만큼 마음이 너무 급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차도헌의 얼굴을 응시했다. 내 예상대로 박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보란 듯이 느릿하게 손가락을 쑤시자 구멍에서 잔뜩 젖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고만 있을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도헌은 벨트를 풀어내고 그대로 앞섶을 젖혔다. 퉁퉁하게 발기한 성기가 위용을 자랑하듯 드로어즈에서 퉁겨져 나왔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깊게 쑤시던 손가락을 빼내고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어 양쪽으로 벌렸다. 안달이 난 듯 구멍이 움찔거렸다.
“너는 진짜….”
차도헌이 짙은 한숨과 함께 헛웃음을 뱉었다.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좆을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다가오는 그 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아아-!”
바짝 치켜든 허리가 뭉개질 만큼 차도헌은 뜨거운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기대감에 모자라지 않게 내벽을 짓뭉개는 성기를 받아내는 동안 내 입술에선 줄곧 단 숨이 새어 나왔다.
“허리 더 들어.”
더운 숨이 귓가에 훅 끼쳤다. 고작 삽입 한 번에 발끝이 오싹오싹하게 굽어들고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들어가면 안 될 곳까지 침범당한 기분이었다.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조심조심 쓸어내자 마른 뱃가죽이 미약하게나마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놀라지 마, 다 안 넣었으니까.”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차도헌은 엉덩이골 사이에 끼인 끈 팬티를 잡아당기더니 한쪽으로 젖혀 놓았다. 아슬아슬하게 앞을 가리고 있던 천 조각 사이로 발기한 좆이 비죽 튀어나왔다.
커다란 손에 허리가 단단히 붙잡혔다. 이내 등 뒤로 차도헌의 가슴팍이 닿았다. 도망칠 틈 없이 앞뒤로 막힌 상태에서 차도헌이 단번에 뿌리 끝까지 좆을 밀어 넣었다.
“아…, 흐, 아으…!”
숨이 턱 막혔다. 내벽 안에서 꾸물대며 크기를 키운 성기가 스팟을 꾹 짓누르고 있었다. 퍽퍽 소리가 나게 치받기 시작하는 추삽질에 귀두 끝에서 묽은 정액이 쉴 새 없이 흘렀다.
“후, 숨 쉬어, 도해영.”
“아, 아흥, 응! 읏, 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교접된 부분에서 피어오르는 쾌감에 눈앞이 아찔하게 점멸했다. 질질 애액이 새는 구멍에선 질퍽이는 소리가 났고 스팟이 눌릴 때마다 교성이 튀어 나갔다.
허리를 붙잡은 차도헌의 손이 아랫배를 세게 누를 적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뇨감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미 줄줄 싸대는 귀두를 움켜쥐자 차도헌은 곧바로 내 손목을 붙잡아 등 뒤로 잡아당겼다.
차도헌의 성기가 배 속을 휘저어댈 때마다 질금질금 새던 것이 세찬 물줄기가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양 손목을 등 뒤로 붙잡힌 채 정신없이 박히는 동안 세차게 뿜어져 나간 맑은 물이 소파를 적시기 시작했다.
“아, 흐응, 응, 시러, 윽! 시, 시러―”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붙잡힌 팔을 비틀었다. 단단히 붙들린 탓에 덜렁이며 줄줄 싸대는 좆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도헌의 무지막지한 좆이 스팟을 짓누를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소파와 내 허벅지를 적시는 물줄기가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곧 사정할 듯, 배 속으로 꽉꽉 양물을 욱여넣는 차도헌의 거친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정신없이 뒤가 뚫리는 와중에도 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헐떡이며 경고를 뱉었다.
“흐, 또 물면, 으응, 죽어, 진짜….”
등 뒤에서 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무지막지하게 박아 넣던 차도헌의 좆이 차츰 부풀기 시작했다. 내벽이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확장되는 기분에 절로 달뜬 신음이 새어나갔다.
다시금 목덜미 위로 입술이 닿았다. 쪽, 쪽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던 입술이 살결 위로 진득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혓바닥으로 핥아내고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며 목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차도헌은 한 손으론 내 아랫배를 압박하듯 누르고 다른 손으론 발딱 선 좆을 움켜잡았다. 거친 손아귀 안에서 내 좆은 줄줄 물을 싸대고 있었다.
“응, 으응, 응! 흐으―”
“후, 도해영.”
빈틈없이 몸을 올려붙이며 차도헌은 내 이름을 몇 번이고 읊조렸다. 수차례 이어지던 거친 움직임이 멈추자 이윽고 배 속에 뜨거운 게 팍 터졌다.
“하아, 흡, 하아….”
“후, 후으―”
밭은 숨소리가 입술 새로 터져 나갔다. 쾌감에 푹 전 몸에는 차도헌과 내 페로몬이 어지러이 섞여 있었다.
아직까지 스팟을 꾹 누르고 있는 차도헌의 좆이 다시금 꾸물거리며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소파를 움켜잡았다.
“더, 더어….”
움직여지지 않는 혀를 놀리며 서툴게 말을 뱉어냈다. 차츰 어두워지는 시야에 반복적으로 눈꺼풀을 깜박였지만, 소파를 붙잡은 손끝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힘이 빠진 몸은 붙잡을 새도 없이 소파 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에 회장실 천장을 수놓은 거대한 천지창조가 눈앞에 스쳤고, 빙빙 돌기 시작한 눈앞에 어렴풋이 붉은 불빛이 보였다.
소파 뒤쪽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 불빛은 분명 일정한 속도로 깜박이고 있었다. 그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나는 불빛이 깜박이는 박자에 따라 숨을 내쉬며 천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렇게, 내 정신은 거기서 뚝 끊겼다.
***
납덩이를 얹어놓은 듯 도통 눈이 떠지지를 않았다.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는 몸은 이윽고 불쾌할 정도로 통증을 자아냈다.
“아….”
잔뜩 쉬어버린 성대에선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성한 곳 하나 없이 잠에서 깨어난 몸 상태는 업소에서 일했을 때보다도 더 엉망이었다.
꺼졌던 감각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묵직한 통증이 이는 아랫배와 잔뜩 쑤셔져 얼얼하기까지 한 구멍, 등 뒤로 닿아오는 뜨거운 열기, 몸을 끌어안은 팔뚝, 그리고… 나를 단단히 에워싼 짙은 페로몬.
내가 느끼고 있는 게 꿈이 아니라면 나는 차도헌의 품에 안겨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페로몬 샤워를 당하는 것처럼 진한 체향에 단단히 갇힌 채, 살결을 맞대며 누워 있었다.
갑갑할 정도로 꽉 안긴 바람에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등 뒤에 닿아오는 차도헌의 뜨겁고 단단한 가슴팍 너머로 느릿하게 심장이 쿵쿵 뛰어대는 게 느껴졌다.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닌데 이런 포즈로 잠들어 있다니, 미묘한 기분에 품에서 벗어나려던 것도 잠시 귓가에 차도헌의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누워있기로 했다. 괜히 깨우기 싫다기보단, 잠든 차도헌을 깨웠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차도헌의 품에 안겨 가만히 누워있자니, 고개를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대체 왜, 내가 차도헌이랑 이러고 있지?
지금 상황을 보면 분명 섹스를 한 것 같긴 한데, 어쩌다가 섹스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회장실에서 황 회장이 준 와인을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필름이 잘려나간 듯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차도헌의 품에 안겨있다는 건 그곳에서 무사히 탈출했다는 걸 뜻했다. 차도헌은 바쁘니까 직접 구해주러 온 것 같지는 않고, 윤 비서님이 오지 않았을까?
뚝 끊긴 기억을 찾아내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문득 등 뒤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만 더 자자.”
푹 잠긴 저음의 목소리를 내며 차도헌은 끌어안은 내 몸을 토닥였다. 빨리 자라는 듯 가슴을 토닥이는 큰 손바닥에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가볍게 이어지던 토닥임은 차츰 느려지더니 이내 멈췄다. 다시 잠든 듯 차도헌은 아까처럼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귓가에 닿아오는 나른한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씩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한때 업소에서 일할 적에, 사랑을 꿈꾸는 애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내게 은수는 그랬었다. 사랑이란 곧, 함께 잠들고 함께 눈을 뜨는 거라고.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것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평범하게 사랑을 하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없다는 거.
차도헌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해 나를 곁에 두고 있다. 차도헌에게 각인이 된 이후로 나는 몇 번이고 그 사실을 되새겨야 했다. 오늘처럼 단순히 품에 안겨 잠들었다는 쓸데없는 이유만으로 내가 희망을 바라지 않게, 가당치 않은 사랑을 바라지 않게.
아무리 노력해도 도해영은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매일 밤 사랑을 속삭이고 함께 미래를 바라보는 운명의 연인은 사창가 출신 도해영의 시나리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알파에게 억지로 일방 각인을 당할 뿐이고, 언제고 버림받을 것이며, 고통에 몸부림치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을 것이다. 그것만이 내 삶의 결말이다.
상상해보니 웃기기까지 했다. 차도헌의 옆에 내가, 내 옆에 차도헌이 있는 그림을 떠올리자니 완전히 미스 매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애초에 차도헌에겐 사랑하는 상대가 있잖아. 매일 왼손에 끼고 다니는 그 반지의 상대가….
“…….”
익숙하게 차도헌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좇은 순간 내 심장은 돌연 내려앉고 말았다. 내 가슴 위에 얹어진 차도헌의 손에는 아무런 반지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차도헌의 손엔 반지만 없는 게 아니었다. 손마디 마디마다 피딱지가 잔뜩 앉아 있었다. 성한 곳 없이 시퍼런 멍투성이인 손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좀 심란해지기까지 했다.
생긴 게 험악한 것치곤 펜대만 굴리며 사는 차도헌이었다. 그런 그가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주먹을 썼다면, 혹시 나 때문에….
“…말도 안 돼.”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시나리오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차도헌의 인성을 떠올려 보면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어쨌든 차도헌의 손가락에 반지가 있든 없든, 손이 이렇게 됐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나를 거기서 꺼내준 건 윤 비서님일 테니까, 나중에 만나면 감사 인사나 한번….
“자꾸 움직여서 좋을 건 없을 텐데.”
갑자기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탁 꽂혔다. 나 때문에 깼다는 듯 짜증마저 담긴 말투에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됐다.
물론 내가 절대, 절대! 차도헌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괜히 저 새끼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다시 빨리 잠들어버리든가, 아니면 나 같은 것 옆에서 주무시지 마시고 어서 빨리 다른 곳으로 꺼져버리시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길 바라며 숨 쉬는 소리도 확 줄여 버린 채였다. 근데 이게 웬걸.
“풋…. 숨은 쉬어, 도해영.”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차도헌은 내 허리를 단단히 그러잡곤 그대로 빙글 돌려 버렸다. 갑작스럽게 마주 본 자세로 누워버리게 된 탓에 조금만 움직였다간 맨 가슴에 얼굴이 파묻힐 뻔했다.
“몸은.”
차도헌의 가슴 근육이 불끈이며 내게 말을 걸었다.
“…죽을 것처럼 아파.”
“엄살 부리지 마, 몇 번 안 했어.”
지금 내 하반신은 얼얼하다 못해 감각이 없는데, 이 새끼는 코웃음을 터트렸다. 울컥 치솟는 짜증에 가슴팍을 팍 밀쳤지만 차도헌의 거대한 몸집에 비하자니 작은 앙탈에 불과했다.
“또 도망가려고?”
“숨 좀 쉬자, 좀!”
“지금도 잘 쉬고 있잖아.”
그렇게 차도헌의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는 가뿐히 무산되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은 반항 덕에, 내 허리를 감싸 안은 팔뚝은 숨이 조이기 직전까지 몸통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마주 본 채로 품에 안겨 있자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안겨있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고, 그냥 이 상황이 낯설고 조금 불편한 것뿐이었다. 자그마한 뒤척임마저 차도헌에게 오롯이 전해질 걸 생각하니 자꾸만 몸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다.
입술마저 질끈 깨문 채 예의 ‘얼음’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차도헌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괜히 얼굴이 따끔따끔한 기분에 눈동자를 도로록 위로 굴렸을 뿐인데 곧바로 눈이 마주칠 건 뭐람.
“왜 쳐다봐?”
내 물음에 차도헌은 뭔가 말을 꺼낼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무르고는 나를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됐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차도헌은 드로어즈만 걸친 채였다.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 몸에서 저렇게 열이 나다니, 새삼 알파의 몸은 신기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줄곧 뜨끈뜨끈한 몸에 안겨있던 덕분에 추위를 모르던 몸에 돌연 한기 비슷한 게 일었다. 차도헌도 일어났겠다, 침대 구석으로 밀려난 시트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지금 당장 바디 프로필을 찍어도 될 정도로 불끈거리는 차도헌의 몸을 구경하며 둥그렇게 몸을 만 채로 시트에 푹 파묻혀 있는데, 차도헌이 자그마한 쇼케이스에서 생수를 꺼내오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셔.”
까드득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뺨 위로 서늘한 생수병이 닿았다. 아까까지도 갈증을 못 느꼈는데 맑게 찰랑이는 생수를 보고 있자니 돌연 목이 탔다.
한쪽 팔꿈치를 침대에 딛고 몸을 반쯤 일으켜 차도헌이 건네는 생수통을 붙잡았다. 딱 기분 좋을 만큼 차가운 생수통을 붙잡고 갈증이 가실 때까지 연신 물을 들이켰다. 어느새 다 비워버린 생수를 아쉬워한 것도 잠시, 차도헌은 내 손에 새 물을 쥐여 주었다.
단숨에 오백 미리 생수를 두 병이나 비워내자 위에서 물이 찰랑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빈 생수통을 수거해간 차도헌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아예 방을 나가버렸다.
어느 정도 가신 갈증에 만족하며 다시금 침대에 스르륵 몸을 뉘었다. 여기가 어디고 당장 차도헌이 나한테 뭘 시키든 전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른한 기운에 슬슬 잠이 오는 것 같았다. 그래, 당장 뭘 할지 모르는데 쉴 때 좀 쉬어둬야지….
“…영. …해영아.”
나도 모르게 얼핏 잠들었는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뭐라도 좀 먹고 자.”
반나체였던 아까와는 다르게 옷을 걸친 차도헌이 베드 트레이를 양손에 쥔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차도헌의 얼굴과 베드 트레이 위를 번갈아 쳐다봤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주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상체를 대충 일으켜 앉았다.
어중간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데 차도헌이 턱을 까닥였다. 뭐야, 뭘 하라는 거야?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좁힌 채로 차도헌을 쳐다보자 한숨을 푹 내쉬며 툭 내뱉었다.
“등 기대앉으라고.”
아. 이런 대접을 받아봤어야 알지, 이런 게 처음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엉덩이를 움직여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아, 확실히 편하다.
내가 자세를 잡자 차도헌은 손에 들고 있던 베드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허벅지 위에 얹어놓은 트레이를 보자니 병원에 있을 때 밥 먹을 때마다 펼쳐주던 테이블이 문득 떠올랐다.
아까부터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분명 배고프지 않았는데 트레이 위를 가득 채운 음식을 보자마자 허기가 졌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수프와 노릇하게 잘 구워진 팬케이크, 보울에 가득 쌓인 샐러드와 새콤한 향이 코를 간질이는 냉파스타까지.
설마 차도헌이 이 모든 걸 직접 만들었을까 싶었지만, 배가 고프니 누가 만들었든 감사히 먹을 생각이었다.
“너무 많아.”
문제는, 양이 너무 많았다. 트레이에 얹어진 포크와 나이프, 스푼의 개수로 보아 차도헌은 이 양을 1인분으로 산정하고 가져온 게 분명했다.
“그럼 남겨.”
“음식 버리면 지옥 가.”
“생각보다 순진하네, 도해영?”
그 말엔 비웃음마저 담겨 있었다.
하긴, 뭐든 풍족하다 못해 넘치는 부잣집 도련님은 지옥행도 면죄부를 받겠지. 말할 수 없는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켜내며 스푼을 쥐었다.
자석처럼 이끌리듯 스푼은 곧장 수프 그릇으로 향했다. 한가득 떠올린 수프를 입 안에 넣자마자 고소한 풍미가 감돌았다. 잘게 썬 브로콜리가 아삭하게 씹히고, 부드럽게 뭉쳐진 체다치즈는 혀끝에서 사르르 녹았다.
말없이 몇 번이고 수프를 떠먹는 동안 머리맡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저 한 스푼을 입 안에 밀어 넣고 고개를 드니 차도헌은 나이프로 팬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내는 중이었다.
먹는 거 보니까 배가 고팠나? 어디 가서 복스럽게 먹는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었는데, 그런 나를 보면서 식욕이 돋을 만큼 허기가 졌나 싶었다.
상체 앞에 바짝 놓인 트레이를 몸 바깥쪽으로 옮겼다. 나름 편하게 먹으라는 뜻으로 그랬는데, 차도헌은 다시금 미간을 좁히며 나를 응시했다.
“왜 먹다 말아. 더 먹어.”
트레이를 밀어낸 게 그만 먹겠다는 뜻으로 읽혔나 보다. 하여간 차도헌이랑 나는 단순한 제스처조차도 통하질 않는 모양이었다.
트레이를 밀어낸 덕에 멀어진 수프 그릇을 가져와 다리 사이에 얹었다. 보란 듯이 한가득 수프를 떠올리곤 다짐하듯 대꾸했다.
“이건 다 먹을 거야.”
“그깟 수프 조금 먹고 배가 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차도헌을 무시하며 다시금 수프 그릇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사람마다 용량이 다르고 연비도 다르니까,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고객 다섯 명을 연달아 받아낼 수 있는 도해영은 하이브리드 차종인 거고, 차도헌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연비는 꽝인 롤스로이스 같은 거고.
스푼 위에서 자꾸만 빙그르르 빠져나가는 브로콜리 조각을 떠올리려 노력하는데 문득 달큰한 향기가 코앞에 맡아졌다. 순간 나한테서 나는 페로몬인가 싶어 당황하기도 잠시, 고개를 들자 눈앞에 큼지막한 팬케이크 조각이 둥실 떠 있었다.
“음식을 씹어서 삼키는 걸 ‘식사’라고 하는 거야. 주야장천 마시는 게 아니라.”
내 소중한 수프를 턱짓으로 가리키곤 쯧,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은 차도헌은 다시금 포크를 까딱였다. 달달한 메이플 시럽이 끼얹어진 팬케이크 여러 겹을 겹쳐 푹 찌른 포크가 허공 위에서 묵직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쪽 먹으려고 자른 거잖아.”
“너 먹으라고 잘랐어.”
“…….”
내가 먹을 때까지 버티겠다는 듯 차도헌은 포크를 단단히 붙든 채였다. 결국 입을 크게 벌려 팬케이크 조각을 다 받아먹고 나서야 차도헌은 만족한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팬케이크는 시작에 불과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상추 토마토 샐러드를 시작해서 냉파스타, 분명 트레이 위에는 없었는데 치즈를 듬뿍 바른 베이글에 크로아상 샌드위치, 초콜릿이 듬뿍 박힌 머핀까지….
차도헌이 주도하는 끝없는 식도락의 마지막은 사과와 비트, 당근을 곱게 즙을 낸 빨간 주스였다.
“…배불러.”
살면서 이렇게 음식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없었다. 빚도 많은 게 무슨 돈 지랄이냐는 말을 들을 만큼 음식을 시켜도 몇 술 먹다가 남겼었고, 단순히 위가 비어있는 느낌이 좋아서 밥을 굶기 일쑤였다. 그랬던 내가 배가 부르게 밥을 먹다니… 빵빵하게 차버린 위가 어색한 만큼 지금 내 모습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결국 몇 모금 마시던 주스를 내려놓았다. 차도헌은 아직 음식이 남은 베드 트레이를 침대 옆 보조 협탁으로 옮기고는 내 팔뚝을 붙잡아 천천히 침대에서 일으켰다.
“먹고 바로 누우면 건강에 안 좋아. 집 구경시켜줄 테니까 조금이라도 걸어.”
집 안에서 하는 산책이라니, 이참에 차도헌이 데려온 이 집이 얼마나 큰지 구경이라도 해야겠다. 느슨하게 묶어둔 가운 매듭을 단단히 조이며 발을 내디뎠다.
느릿한 내 걸음에 맞춰주겠다는 듯 차도헌은 천천히 집 안을 안내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인테리어라고 생각했더니만, 저번에 차도헌에게 목덜미를 물어 뜯겼던 대저택이었다.
“마음에 드는 방 있으면 거기로 짐 옮겨줄게.”
황량할 정도로 최소한의 가구로만 채운 널찍한 방 서너 개를 지나치는 동안, 내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 차고 있었다.
“이제 나 여기서 살아?”
“방 고르라는 얘기 못 들었어?”
강태산이 오피스텔에 찾아온 이후로 거처가 새로이 옮겨질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그곳이 이 거대한 저택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쪽, 낭비가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낭비?”
“나 하나 숨겨놓겠다고 지금 대저택을 빌렸다는 얘기잖아.”
따지듯 묻는 내 말에도 차도헌은 느긋한 태도였다. 몸을 돌려 나와 마주 선 채, 차도헌은 내 말을 하나하나 교정하기 시작했다.
“아니지. 너 하나 숨겨놓겠다고 대저택을 빌린 게 아니라.”
“…….”
“내가 사는 대저택에 너 하나를 들여놓은 거지.”
천천히 읊조리는 목소리에 따라 굴러가던 뇌가 그대로 드드득, 멈춰버렸다.
“……뭐?”
미간을 좁힌 채 되묻는 내 앞에서 차도헌은 명쾌한 답을 들려주는 사람처럼 가뿐히 설명을 이어갔다.
“오늘부터 너는 이 집에서, ‘나랑 같이’ 살게 된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차도헌이랑 같이 살아야 한다고?
“싫어! 누구 맘대로!”
머릿속으로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입 밖으로 부정이 튀어 나갔다.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왜 이 알파 새끼랑 같은 집에서 살아야 되는 건데!
안 그래도 저 페로몬에 각인된 것 때문에 몸이 주인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굴어대는데,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있다간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좋은 곳에서 안전하게 지내라는데 왜 그런 반응인지 모르겠네.”
뻔뻔하다 못해 스스로를 자비롭다고 생각하는 듯, 차도헌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자신만만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속이 마구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나 괴롭히려는 거면 그만해. 안 그래도 충분히 괴로워 죽겠으니까.”
“나는 너 괴롭게 한 적 없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뻔뻔해?”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도헌이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단다, 내 인생에 등장한 후로 줄곧 괴롭혀댄 장본인인 주제에 어쩜 저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나는 그쪽 페로몬 자판기일 뿐이잖아. 굳이 옆에 내가 붙어 있을 필요가 있어? 내킬 때마다 찾아오겠다고 한 건 분명 너였어.”
내 말마따나 차도헌은 분명 ‘필요할 때마다 페로몬을 맡으러 찾아오겠다’고 했으니까,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이 집에서 같이 살자고 우기는 건 분명한 계약 위반이나 다름없었다.
조목조목 따져 묻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차도헌의 미간은 구겨져 있었다. 저렇게 차분하게 빡친 얼굴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라 긴장이 좀 됐지만, 그게 내 알 바야?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뭐를!”
“계약은 이미 끝났어. 너는 그냥 내 오메가야. 내 옆에 주야장천 붙어 있으라고 말하는 것도 네가 내 오메가이기 때문인 거고.”
단호하게 내뱉는 목소리에는 옅은 분노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받아치듯 매섭게 눈을 뜬 채 차도헌을 노려보았다.
저번부터 자꾸만 강압적으로 굴어대는 차도헌이 싫었다. 막무가내로 각인당한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자꾸 나를 소유하겠다는 식으로 ‘내 오메가가 돼라’며 명령하는 그 태도가 너무 싫었다.
이미 결혼할 사람도 있으면서 나한테까지 소유욕을 뻗어대는 차도헌이 천하의 개 쓰레기가 아니면 무얼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차도헌의 약혼 상대에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차도헌은 한 번도 내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 모를 거다. 천하의 차도헌이 누군가의 첩이 되어볼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더더욱 나는 차도헌이 명령하는 대로 같은 집에서 살 수도, 차도헌의 오메가가 될 수도 없었다. 명백히 나는 차도헌에게 첩에 불과했다. 그것도 자신에게 알맞은 극우성 페로몬을 뿜어대는 첩이자, 좆같은 각인으로 인해 목숨까지 내걸며 죽을 때까지 곁에 들러붙을 거머리.
각인 반응이 내 온몸을 지배하기 전에 차도헌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본능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애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절대 차도헌 때문에 자살하지 않을 거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더라도,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죽는 신파 같은 사랑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원치 않는 동거를 피하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차도헌의 유일한 약점 카드’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너, 결혼 얼마 안 남지 않았어? 내가 여기서 살면 그쪽 약혼자한테 들통 날 건 생각도 안 해?”
차도헌의 얼굴이 구겨진 건 한순간이었다. 이전의 당당하고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 가고, 그는 어느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으르렁댔다.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왜 상관할 일이 아니야? 너는 네 맘대로 나 각인시켰잖아. 만약 내가 임신했으면 어떻게 할 건데?”
아, 걸려들었다. 방금까지도 침착하게 빡쳐 있던 차도헌의 얼굴이 제대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차도헌의 잘난 관자놀이에 솟은 힘줄을 태평하게 쳐다보며 필터링 없이 혀를 놀렸다.
“다짜고짜 납치해서 섹스하자고 유도한 건 그쪽인데, 임자 있는 사람 꼬신 쓰레기 취급당하는 건 나잖아. 내가 얼마나 억울할지 그쪽은 죽어도 모를 거야. 고귀하신 도련님은 한 번도 그런 취급당할 일 없을 테니까.”
“입 다물어, 도해영.”
닥치라는 말을 제대로 무시한 나는 입술을 끝없이 달싹대며 차도헌의 신경을 박박 긁어댔다.
“나중에 내가 부른 배 붙들고 찾아오는 거 보기 싫으면, 당장 오피스텔이든 아파트든 뭐든 다른 데다가 가둬. 나 지금 엄청 깔끔하게 굴고 있는 거야.”
“깔끔?”
“그래, 깔끔! 어차피 내가 죽어도 너는 다른 오메가 찾으면 끝… 이잖아.”
가시라도 돋친 듯 앙칼지게 쏘아대던 목소리가 결국 갈라져 버렸다. 대화 아닌 대화의 끝엔 결국 보잘것없이 버려지는 도해영, 그것뿐이었다.
후두둑,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숨을 참았다. 쪽팔리게 왜 울어, 도해영, 쪽팔리게….
“꼭 그딴 식으로 지껄여야 마음이 편한가 봐.”
각인 때문이다. 평소라면 무던했을 일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거, 이전의 나라면 절대 이딴 상황에서 울기는커녕 코웃음만 쳤을 거였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다 차도헌 저 새끼 때문이라고.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부드럽게 등을 다독였다. 제대로 울어보라는 듯 푹 숙인 고개를 감싸며 품 안으로 당기기까지 했다. 내 모든 분노의 원인인 주제에, 차도헌은 나를 품속 깊이 끌어안은 채 울음을 달래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지옥에나 떨어져라.
“웬만하면 내 방이랑 가까운 방을 고르는 게 좋을 거야.”
“…못 들었어? 깔끔하게 사라져 준다잖아.”
“아예 내 방도 좋고.”
잘난 차도헌에게는 울음에 푹 잠긴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밤 동안 차도헌에게 시달린 몸 상태에, 아침부터 소리를 질러대고 울어댄 덕에 제대로 기력이 빠졌다. 하우스 투어를 중단한 차도헌은 나를 그대로 안아 올리더니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병 주고 약 줘? 왜 이래.”
“가만히 있어.”
가뿐히 안아 든 차도헌의 얼굴을 한껏 노려보고 있기도 잠시, 내 몸은 푹신한 소파 위에 고대로 안착했다.
차도헌은 나를 소파 위에 내려두곤 다시금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갔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저 알파 새끼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것을 멈추고 얼얼하게 부은 눈가에 손등을 얹었다. 뜨끈했던 눈두덩이 차츰 원래의 온도를 되찾는 듯했다.
“집 잘 지키고 있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돌연 차도헌의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렸다. 눈을 가린 손을 치우자 완벽한 수트 차림에, 자그마한 얼음주머니와 두툼한 담요를 들고 있는 차도헌이 보였다.
“어디 가?”
“출근. 왜, 회사 째고 같이 놀아줄까?”
맞다. 저 새끼 대표이사랬지.
들고 온 담요를 팡 펴서 내 몸 위로 덮어준 차도헌은 얼음주머니를 이마 위에 대어주기까지 했다. 진이 빠져 거절할 기운도 없이 가만히 누워있는데, 차도헌의 손이 얼핏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참 간사하다. 보살핌 없이 태어난 외로운 삶에 완벽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차도헌의 앞에서는 자꾸만 마음에 세워둔 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책임지고 각인 풀겠다는 말, 그냥 한 말이지?”
생각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 나가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작게 웅얼대는 목소리를 차도헌이 듣기를 바라는 것도 그 때문일 거고.
“난 책임 못 질 말은 안 해.”
어쩌면 차도헌의 대답도 내가 만들어낸 한낱 환상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나는 지금 불안한 상태였으니까.
“푹 자고 있어. 내가 너무 보고 싶어도 좀 참고.”
느닷없이 입술 위로 쪽, 하는 소리가 났다. 말캉하게 맞닿은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에 화들짝 놀라기도 잠시, 사라진 인기척과 함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저 재수탱….”
제멋대로 구는 차도헌의 행동이 처음이 아닌데도, 내 뺨은 속절없이 붉어지고 있었다.
***
나조차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갑갑한 기분에 슬쩍 몸을 내려다보니, 자면서 추웠는지 애벌레처럼 담요를 둘둘 말고 있었다. 소파 쿠션 사이에 끼어 저릿저릿한 손을 느릿하게 빼내며 천천히 돌아누웠다.
자고 일어났지만, 아직 정오가 되기에도 한참이 남았다. 널따란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늘어져 누운 채로 가만히 있자니, 벌써 까마득해진 아침에 있었던 일이 절로 되새겨졌다.
“여기서 살라니, 말도 안 돼….”
오피스텔에서 살 때나 지금이나 차도헌에게 얹혀사는 입장은 바뀌지 않았건만, 어째서인지 날이 갈수록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선택지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지만 덜 비참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나 같은 오메가가 가져선 안 될 걸 자꾸만 맛봐서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이 세상에 내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 맞다. 내 핸드폰!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내 핸드폰, 그러니까, 차도헌이 나한테 줬던 그 핸드폰이랑 은수랑 같이 샀던 옛날 핸드폰, 그거 다 어디다 뒀지?
습관적으로 허벅지를 더듬었지만 우습게도 만져지는 건 얇은 가운 자락뿐이었다.
분명 병원에서 나올 적에 자그마한 짐가방에 핸드폰을 넣어둔 기억이 났다. 황 파의 조직원에게 붙잡혔을 때까지도 짐가방을 들고 있었고.
그럼 거기에 흘리고 온 건가….
회장실 구석에서 굴러다닐 내 짐가방을 떠올리자니 머리가 지끈 울렸다. 하필이면 왜 그날 정신을 놓아버렸던 건지, 나약한 내 몸이 미울 지경이었다.
띵동―
“앗, 깜짝이야!”
느닷없이 들린 청량한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란 몸이 중심을 잃고 소파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온몸을 휘감은 담요에서 힘겹게 벗어나 힘이 빠진 다리로 허겁지겁 현관을 향해 뛰었다.
“-잠시만요!”
당연히 윤 비서님일 거라고 생각하며 확인도 않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지해…?”
그곳엔 지해가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옷차림에 떨고 있는 마른 몸, 눈가에 피멍을 하나 달고 있는 얼굴은 분명 지해였다.
“지해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나는 얼음장 같은 지해의 몸을 잡아당겼다. 또 다른 사창가 출신 오메가를 집 안에 들인 걸 차도헌이 알면 기함을 하겠지만, 그렇다고 새파랗게 어린 애를 밖에서 얼어 죽게 할 수도 없었다.
“많이 춥지? 잠깐만 기다려, 아니다, 여기 앉아!”
아까 누웠던 소파로 데려가 지해를 앉히고는 보드라운 담요를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따듯한 집 안 공기에 더불어 얼어붙은 볼을 연신 손바닥으로 부벼 주니 파랗게 질렸던 지해의 입술에 차츰 혈색이 돋기 시작했다.
“…감사해요, 형.”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거리던 지해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아직도 추운지 몸이 잘게 떨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따뜻한 걸 먹여야 될 듯싶었다.
내 집은 아니지만 멋대로 굴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얼어붙은 몸을 녹일 따뜻한 차를 내오려는데, 지해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나를 붙잡고는 주섬주섬 옷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형, 이거….”
지해가 건넨 건 내가 잃어버렸던 핸드폰이었다. 은수랑 맞췄던 옛날 핸드폰과 차도헌이 준 최신 기종 핸드폰 두 개를 내 손에 쥐여준 지해는 옅게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황 회장님이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형.”
“아니야. 가져와 줘서 고마워, 지해야.”
이렇게 찾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찾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내 대답에 다시금 웃어 보인 지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여전히 몸을 덜덜 떨어대며, 지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저… 모란에서 쫓겨났어요. 그래서요… 죄송하지만 저… 며칠만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
조심스레 부탁을 내뱉는 여린 목소리, 잘게 떨리는 지해의 몸, 차갑게 얼어붙은 창백한 입술….
그리고 배를 움켜쥔 마른 손.
그래서는 안 됐다.
머릿속엔 오로지 부정, 부정만이 맴돌았다.
‘해영아, 나 임신했어.’
오늘따라 지해는 은수를 닮았다.
‘비밀로 해줘, 응? 마담한텐. 아직,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순하게 동그란 쌍꺼풀 진 눈이, 한쪽 볼에 폭 들어가는 보조개가, 삶의 끝을 마주한 침착한 목소리마저도.
묘한 기시감에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본 적도 없는 지해의 죽음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은수처럼, 피 한 방울 없이, 잠든 것처럼. 정말, 잠들었다고 믿고 싶을 만큼.
“…누가 그랬어?”
“…….”
“그 남자야? 너 매일 찾아오던….”
지해의 고개가 작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문득 새하얀 목덜미 위로 덕지덕지 붙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얹혀사는 입장이지만, 얘기해 볼게. 어떻게든 되게 할게.”
“저… 그래도 될까요?”
지해가 한 줌의 재로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건, 나 자신이 여기서 더 이상 무너지고 싶지 않은 욕심이기도 했다.
지해의 손을 그러잡았다. 붙잡다 못해 꽈악 힘주어 움켜잡았다.
“여기서 지내, 지해야.”
분명 생명을 진 건 지해인데 바보같이 눈물은 나한테서 흘렀다.
조금만 늦게 죽지 그랬어, 은수야.
왜 그렇게 쉽게 포기했어.
내가, 내가 뭐라도 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