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그림자의 도주-0화 (9/43)

검은 그림자의 도주

0.

검은돈이 모이고 흩어지는 융통의 중심이자 지긋지긋하게 더럽고도 암울한 곳. 만약 여자가 달에 꼭 한 번씩 대면 보고를 올릴 필요가 없었다면 평생 얼씬도 하지 않을 곳이었다.

“언제쯤 도착하니? 더 늦었다간 노인네가 지랄하겠어.”

여자가 재촉하지 않아도 그녀가 타고 있는 세단은 이미 대여섯 개의 과속 단속카메라에 찍힌 채 미끄러지듯 도로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정지 신호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액셀을 꾹 밟은 부하 직원이 거듭 사과하며 도착 시간을 일렀다.

“죄송합니다, 마담. 큰 사거리 하나만 지나면 도착입니다.”

“어머, 얘. 그게 왜 현수 네 탓이니?”

손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붉은 립스틱을 덧바르던 여자는 운전대를 잡은 부하 직원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노인네 얼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업소 마감을 늦게 쳤지, 내가.”

도로교통법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질주를 뽐내던 세단은 정지 신호에 걸려 멈춘 앞차 꽁무니와 충돌하기 직전에야 멈춰 섰다.

난장판이 된 도로 가운데 우뚝 멈춘 세단을 향해 주변 차량들이 미친 듯이 클랙슨을 울려 대는 동안, 우아하게 립스틱 뚜껑을 닫은 여자는 혀를 차며 클러치 안에 차례로 소지품을 넣었다.

“쯧… 늦으면 다음에 오라고 할 줄 알았더니.”

“워낙 약속을 중시하는 분 아니십니까.”

“그렇지, 그 노인네는 그래서 탈이야.”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창 너머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호텔 전경이 보이자 여자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벗었다. 얇은 재질의 실크 드레스 위로 두툼한 모피 코트를 꿰입은 그녀는 느슨하게 풀어둔 힐을 바투 조였다.

세단이 미끄러지듯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염려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보스를 불러 세웠다.

“…마담.”

다급히 세단에서 내리려던 여자는 그 목소리에 도로 문을 닫았다.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선에 남자는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다 겨우 입술을 뗐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현수 너나 주차 잘해놓으렴.”

농담조로 대답을 툭 던진 여자는 다시금 문을 벌컥 열어 세단에서 몸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운전석을 향해 짤막한 한마디를 던지곤 문을 세게 닫았다.

“얘, 걱정 마.”

아찔한 높이의 스틸레토 힐을 신고도 여자는 넘어지지 않고 호텔 로비를 향해 뛰었다. 뒤따라온 차량에서 정장을 갖춰 입은 가드들이 채 내리기도 전에 먼저 호텔 안에 도착한 여자는 자신을 막아서는 프런트 직원을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방문 사유를 밝혔다.

“회장님께 보고 드리러 왔으니 얼른 비켜 서.”

“회장실 진입은 위쪽에서 승인이 나야….”

“모란에서 왔는데 승인은 무슨 승인! 매달 보는데 어쩜 얼굴 하나 기억 못 하니?”

그제야 여자를 알아본 직원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었고 금세 여자의 뒤로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가드들은 정해진 대형으로 여자의 뒤를 지키며 금으로 도금한 엘리베이터에 차례로 따라 탔다.

뒷세계의 큰 손이자 그 우두머리가 있는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그 안엔 엄숙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불러내는 황 회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왈가왈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마담. 이번에도 저희들은 밖에서 대기합니까?”

“노친네 성격 알잖니.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말고 문밖에서 기다려.”

“하지만 이번엔 변수가 있지 않습니까.”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부하와는 반대로 여자는 느긋한 태도로 목을 죄는 코트 단추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얘, 태산아. 내가 늘 하는 얘기 있잖니. 내 목숨줄은 황 회장이 붙들고 있다구.”

“…….”

“하지만 황 회장 돈줄은 내가 잡고 있어.”

여자의 말마따나 황 회장이 벌인 사업 중에서 모란은 큰돈을 물어다 주는 황새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업장이 법의 눈을 피해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운영하는 건 바로 그녀였다.

“그러니 황 회장도 날 죽이면 당신 돈줄도 끊어진다는 걸 알고 있겠지.”

분명 자신의 목숨에 대한 이야기였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덧붙이는 여자에 태산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대화가 끊기자 곧 엘리베이터 안은 정적으로 물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상층에 다다르자 작은 알림음과 함께 금칠된 엘리베이터 문짝이 부드럽게 열렸다.

“모란에서 오셨습니까?”

문이 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대기 신호를 보냈다.

“네. 안에 회장님 계시죠?”

“예. 조금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삼십 분 전부터 회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난처한 듯 어두운 낯빛을 띤 직원은 휘황찬란한 휘장으로 장식된 거대한 문을 향해 여자를 에스코트하며 재차 회장이 오래 기다렸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직원의 걱정과는 반대로 회장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여자를 반긴 것은 늙은 남자의 껄껄대는 웃음소리였다.

“드디어 우리 모란이가 왔구나.”

넓은 회장실을 울리는 통쾌한 목소리에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입고 있던 모피 코트를 벗었다. 옆에 서 있던 직원에게 코트를 건넨 여자는 몸 선이 드러나는 얇은 실크 재질의 이브닝드레스를 걸친 채였다.

중세시대의 연회장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샹들리에의 어스름한 불빛 아래 여자의 흰 피부가 상아처럼 창백히 빛났다. 부드러운 카펫 위를 사뿐히 가로질러 걸어가며 여자는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회장님. 오래 기다리셨다고 들었어요.”

“아무렴. 이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다니, 우리 모란이도 아비에게 반항을 하는 게야. 그렇지?”

뒷세계의 큰 조직, 그 우두머리 자리에 앉은 황 회장의 입술이 추잡하게 비틀어졌다. 듬성듬성 난 얇은 눈썹을 찌푸린 채 노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 회장을 향해 여자는 유연하게 핑계를 뱉어내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오는 길에 차가 막히지 뭐예요….”

황 회장에게 경의를 보이듯 머리를 푹 조아리는 동안 여자는 늘어뜨린 머리칼 너머로 노인이 좋아할 만한 미소를 골랐다.

“그래… 요즘은 다들 차를 몰고 다니지. 도로를 더 파든가 해야 해, 앞으로 우리 모란이가 안 늦으려면. 그렇지?”

추잡한 늙은이. 대놓고 자신을 비꼬는 회장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속마음과는 반대로 여자는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회장님. 그래도 저번 달 대비 15퍼센트가량 수익이 늘었는걸요.”

“장부 확인했다. 우리 모란이가 용을 쓴 것 같더구나.”

노기를 뺀 목소리로 황 회장은 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 주름진 손을 응시하던 여자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황 회장은 손이 더러운 사람이었다. 돈을 대할 때도 그랬고, 사람을 대할 때도 그랬다. 소파에 조심스레 앉자 곧 제 허리를 바투 끌어당겨 어루만지는 추잡스러운 손길에 여자는 능숙하게 노인의 손을 떼어내곤 대신 가볍게 맞잡으며 어루만졌다.

“원하는 게 있나 보구나.”

이번 대면 보고에서 변수는 도해영, 그 아이였다. 돈을 목숨만치 밝히는 황 회장에게 도해영의 거처가 밝혀진다면 일이 생각보다 커질 게 분명했다. 작은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여자는 꾀를 써야만 했다.

“어머, 제가 여기서 어떻게 더 회장님 덕을 바라요.”

“네 얼굴을 난 잘 알아.”

노인은 지긋이 여자의 눈을 응시하며 콧김을 냈다. 훅 끼치는 꿉꿉한 냄새에도 여자는 표정을 완벽에 가깝게 유지하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요. 업소 불시 점검도 잦고요.”

“그래서?”

“현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수급 퍼센티지, 5프로만 낮춰 주세요.”

지금 수입금에서 5퍼센트가 까진다고 해도, 돈다발을 깔고 자는 황 회장에겐 별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업소의 오메가들에겐 지극히도 큰돈이었다.

몇 년간 업소의 탑 자리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린 도해영이 벌어들인 돈은 그 애가 진 빚 액수를 훌쩍 뛰어넘었다. 애초에 상부에서 떼어가는 퍼센티지만 조금 낮추면 정상적으로 빚을 다 삭감할 수 있었다.

오메가들이 죽도록 업소에서 일을 해도 빚을 전부 갚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윗선에게 떼먹히는 돈이 90프로가 넘어가는 데다가 남은 10프로조차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사라진다.

이 바닥의 수익 구조상, 애초에 이 사업은 오메가들이 빚을 갚기 위해 만들어진 장이 아닌 오메가들의 목숨줄을 붙들고 돈을 갈퀴처럼 끌어모으는 것에 불과했다.

“만약 저희 업소가 발각되면 회장님 다른 사업 라인까지 줄줄이 붙잡히는 것 아시죠? 업장 내부적으로 정돈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저희 애들에게도 주의 바짝 줘야 하고요.”

사창 업소가 고위급 인사들의 탈세 혐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만큼, 정부는 매달 정책을 갈아치우며 점주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중이었다. 거래 내역이 남지 않도록 철저히 현금 거래를 밀어붙이고 업소 장부를 면밀히 조작해 정부의 감시를 피해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예년에 비해 유독 사창가들이 난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순히 연막에 불과한 투정이었지만 어쩌면 당분간 황 회장의 눈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차도헌, 그 남자가 선불한 도해영의 빚을 차용계좌에 넣어 놓고 매달 조금씩 나눠 낼 예정이었다.

회장이 도해영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연막을 치는 동시에, 목숨줄이 묶인 다른 오메가들의 빚도 조금씩 깎는다. 이것이 여자의 계획이었다.

여자의 당돌한 제안에 황 회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저 간사한 노인네의 뇌를 읽을 수만 있다면…. 여자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부러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한참이나 대답을 않는 회장의 거친 손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면서.

“딱 5프로요, 회장님. 지금 위기만 넘기면 앞으로 더 큰 돈 물어다 드릴 수 있어요.”

“그래. 우리 모란이 부탁인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황 회장의 주름진 눈가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찌그러졌다. 제게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벌리는 노인에 여자는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안겼다. 지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중에도 여자는 웃으며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이번 연막이 먹힌다면 도해영은 단순히 금전 문제뿐만 아니라 그 목숨까지 안전하게 조직에서 풀려날 수 있다. 만약 술수가 들킨다면 그녀의 목숨도 위태로울 게 분명했지만 황 회장의 보장된 돈줄이었던 도해영, 그 애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보호였다.

“대신.”

황 회장은 자신의 품에 안긴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며 걸걸한 목소리를 냈다.

“도해영 도로 갖다 놔.”

“…회장님.”

그 순간 여자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해영이가 제대로 돈줄을 잡았나 보구나. 적어도 우리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 새끼였는데 말이지.”

남자는 주름이 진 얼굴을 불쾌하게 찌그러뜨리며 웃었다. 황 회장은 표정을 굳힌 여자의 얼굴이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오냐오냐해줬더니. 우리 해영이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날 줄이야.”

“…회장님, 해영이는―”

“모란이 너도 몰랐으니 그렇게 뒤통수를 맞은 게야, 그치?”

황 회장은 여자의 생각보다 치밀한 사람이었다. 이미 몇 수를 앞서 보고 있는 노인 앞에서 여자는 최대한 침착한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해영이는 오래 일했어요. 계약서에 명시한 대로라면 이미 빚을 다 갚은 상태고요.”

여자의 변명에도 노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달. 한 달 안에 데려와.”

“…….”

“모란이 네게 시키는 건 신사적인 대우라는 걸 잊지 마라. 너 말고도 그 새끼 모가지 붙들고 내 눈앞에 대령할 놈들 많아.”

느릿하게 말을 끝낸 황 회장은 천천히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여자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회장에게 인사를 올리곤 등을 돌려 걸었다. 룸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발걸음이 곧 쫓기듯 다급해졌다.

굳건히 닫혀있던 회장실 문이 열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드들은 여자의 뒤를 따라 빠르게 대형을 맞췄다. 직원이 잡아 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는 동안 여자는 초조한 듯 입술을 씹어댔다.

한마디도 않던 여자가 입술을 달싹인 건 황 회장의 호텔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노망난 늙은이. 하여간에 눈치 하난 빨라가지고.”

“…들킨 겁니까?”

태산의 물음에 여자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여자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태산아. 네가 해영이 좀 숨겨줄 수 있겠니?”

그제야 모든 것들이 태산의 계획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 안 되겠으면 그 애 닮은 시체라도 하나 데리고 와.”

속닥이며 덧붙이는 마담에 태산은 짧게 목례하며 제게 내려진 임무를 받들었다.

강태산은 주먹을 쥐며 다짐했다. 깊은 늪 속에 파묻힌 도해영의 삶을 건져내리라, 그의 꼬인 운명을 제 손으로 풀어내리라.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이 어떻게 망쳐질지 예견하는 것은 강태산의 능력 밖이었다. 당장 몇 시간 후, 강태산은 도해영을 눈앞에서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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