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몸이 무거웠다. 옅게 내쉬는 숨결은 뜨거웠고, 머리는 욱신욱신 두통이 일었다.
“너 지금 시위하는 거야?”
어질어질한 열 기운 사이로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이마 위로 내려앉는 차가운 무언가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내게 화를 내던 목소리는 다시금 불같이 성을 내기 시작했다.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해, 이런 식으로 일 키우지 말고!”
흐릿했던 시야가 차츰 선명하게 돌아오자, 시선이 닿은 곳에는 차도헌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차도헌이 아닌 무서울 정도로 화를 내고 있는 차도헌이.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분명 큰 시련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절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를 참으려는 듯 경직한 아래턱이 잘게 떨리고 깊은 눈매는 차갑게 굳어 있는 식이었다.
“…언제 왔어?”
푹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갔다. 짤막한 말을 끝내자마자 잔기침을 토해내는 바싹 마른 입술 위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현관에서 쓰러진 이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는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해?”
“하루 지난 거야?”
이마 위에 얹힌 물수건이 금세 뜨뜻해졌다. 다 식은 물수건을 새것으로 갈아주는 손길에 다시금 몸을 웅크리자, 차도헌은 짙은 한숨을 뱉었다.
도대체 왜 현관에 쓰러져 있었냐고 묻는 듯한 그의 얼굴 앞에서 나는 대충 뭉뚱그린 답을 내놓았다.
“그냥 좀, 경황이 없었어.”
“이 집에는 침대도 있고 소파도 있어.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근데 왜 멀쩡히 침구 놔두고 현관 바닥에서 그러고 있어, 너는!”
다그치듯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조금씩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차도헌이 왜 내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비싼 침대를 사다 놨는데 쓰질 않아서? 현관 바닥을 더럽혀서?
“…근데, 왜 화내?”
내 물음에 차도헌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곤 그는 쓸데없는 질문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대답 아닌 대답에 나는 두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침묵을 지켰다. 내게도 더 이상 목소리를 낼 기운이 없었다.
“죽 사 왔으니까 먹고 약 먹어.”
“…….”
“저번처럼 버리지 말고, 제발 좀 먹어.”
마지막으로 내 이마에 새 물수건을 얹어준 그는 당부를 남기곤 떠났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당부에 따라 죽도 먹고 약도 먹어볼 생각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극에 달하는 어지러움에 벽을 짚어가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문득 이 집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분명 처음 이 오피스텔에 왔을 때부터 줄곧 이곳은 꽤 쌀쌀하다고 느껴질 만큼 평균 온도가 낮았었다. 맨발로 걸어 다니면 차갑게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이 발끝을 얼릴 정도로,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 이곳은 실상 겨울과도 같았다.
“…30도…….”
거실 벽에 달린 온도 조절기에 띄워진 숫자를 느릿하게 읽으며 나는 뜨끈뜨끈하게 데워진 대리석의 온기를 느꼈다. 바닥이 달궈진 만큼 천장에 달린 시스템에어컨도 공기를 훈훈하게 덥히고 있었다.
얼어붙은 얼음성과 같았던 오피스텔이 이렇게 단번에 따뜻해질 줄이야. 이제 바닥에서 자더라도 감기에 걸릴 일은 없겠다. 나는 멍하니 온도 조절기를 응시하다 부엌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이닝 테이블에는 차도헌이 말한 대로 죽과 약이 준비되어 있었다. 죽그릇 위로 살짝 덮인 뚜껑 틈에서는 뜨거운 온기가 솔솔 새어 나오고 있었고, 일회용 수저는 포장지가 벗겨진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테이블 앞으로 조심히 앉아 그릇 뚜껑을 열었다. 숟가락을 손에 쥐고 온기가 그득한 죽을 얕게 떠올렸지만 나는 그것을 먹을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르게 차오른 눈물이 테이블 위로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흐윽…, 흑, 흐으….”
여전히, 나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가 나를 좋은 침대에 재우고 영양이 풍부한 식사를 먹이고 하는 것들은 내 인생에 있을 리 없는 일들이었다.
그건 내게 남겨지는 부탁이나 당부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삶에서 누군가 부탁하는 것들이라곤 오직 다리를 더 벌리라든가, 펠라를 한 번 더 해달라는 요청뿐이었다. 식사와 약을 꼭 챙겨 먹으라는 게 아니라.
뺨을 푹 적시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뜨거운 죽을 듬뿍 퍼 올려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너무 뜨거워서 입천장이 까지고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수저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이 온기가 고팠나 보다. 그릇 바닥이 보일 만큼 죽을 싹싹 긁어 먹으며 나는 몸속에 퍼지는 뜨거운 기운을 간직하려 무릎을 바투 끌어안았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곳 차갑게 얼어붙은 곳 없이, 햇볕에 잘 널어놓은 빨랫감 같은 온기를 나는 원했나 보다.
자그마한 알약 두 개를 삼키며 나는 차도헌이 바란 대로 침대로 향했다. 온기를 가득 품고 돌아온 나를 반기듯 부드럽게 닿아오는 시트의 감촉에, 보송한 이불을 품 안으로 한껏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약 기운과 함께 찾아온 잠기운마저도 이번만큼은 젠틀하게 내 몸을 감싸 안았다.
***
“…도해영 님.”
얕은 잠결 사이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허우적대는 몸이 작게 뒤척이는 사이로 이번엔 조금 더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해영 님, 더 늦기 전에 식사하셔야 합니다.”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윤 비서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를 깨우길 반복하는 윤 비서님의 모습에, 그제야 나는 허겁지겁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윤, 윤 비서님!”
구김 없이 정돈된 침대 시트가 내 격한 움직임에 금세 주름이 팍 졌다. 손바닥으로 시트 위를 다리미질하듯 펴내길 반복하는 내 앞으로 윤 비서님은 다시금 전달 사항을 일러주었다.
“도해영 님의 저녁 식사를 꼭 챙기라는 이사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주무시는 동안 저녁을 준비해두었습니다만,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식사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녁이요?”
그제야 나는 창밖이 이미 어둠에 물든 지 꽤 오래된 늦은 저녁임을 깨닫고 말았다.
약 기운에 꽤 깊은 잠을 잔 모양이었다.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던 고열과 두통은 모두 사라진 채였는데, 그래서인지 아침에 앓았던 열감기가 마치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장하실 텐데 금방 식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준비 안 해주셔도 돼요. 배 안 고파요, 저.”
“죄송하지만, 식사를 거르시는 건 안 됩니다.”
“아침에 죽 다 먹었는데요.”
“죽은 금방 소화되는 음식입니다. 곧 시장하실 테니 저녁을 준비하겠습니다.”
저녁을 먹이려는 윤 비서님과 한사코 먹지 않겠다는 나의 말다툼은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싸움과 같았다.
“저 진짜 배 안 고파요, 안 먹어도 되는데.”
푹 잠긴 목을 겨우 써서 대답하곤 몸을 일으켰다. 매트리스 위를 짚은 손이 푹 하고 꺼지는 틈에, 중심을 잃고 기우뚱 몸이 기울어졌다. 아무래도 이 매트리스는 문제가 있다. 푹신해서 잠은 잘 오는데, 너무 푹신해서 도저히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아직 다 잠이 깨지 못해 느릿한 반사신경을 책망하며 그대로 얼굴이 새하얀 시트 위로 처박히려는 찰나,
“아주 고집불통이야, 도해영.”
불쑥 나타난 차도헌의 두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물론 나를 비웃는 그 잘난 목소리도 함께였다.
“몸은. 이제 괜찮아?”
느닷없이 나타난 커다란 손이 내 이마를 푹 덮었다. 꼼꼼히 열을 재어보듯 진득하게 손바닥을 붙여오는 낯선 손길에 당황할 틈도 없이, 차도헌은 빠르게 내게서 손을 떼어냈다.
“뭐 하는…!”
“윤 비서, 얘 먹일 저녁 좀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말을 싹둑 잘라먹은 차도헌은 내게서 등을 휙 돌려버리곤 거실로 향했다. 소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는, 그야말로 재수 없는 차도헌은 오늘 아침 내가 맞닥뜨렸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 저는 가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상냥히 말을 마친 윤 비서님이 등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그 프로페셔널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도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향했다.
아른아른한 수증기가 폴폴 올라오는 따뜻한 물에 몸을 집어넣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차츰 졸음이 밀려왔다. 커다란 욕조에 한가득 부드럽게 풀린 거품은 뺨을 간질이듯 찰랑거렸고, 온몸을 녹이는 물의 포근함은 도저히 잠을 자지 않곤 못 배길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둥그런 욕조 벽에 기댄 몸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도 모르고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들어버린 그 순간, 풍덩! 소리와 함께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커흡! …콜록, 콜록!”
거품 때문에 눈과 코가 맵고 따가웠다. 거품과 눈물로 뒤덮인 얼굴을 연신 손으로 훑으며 몇 번이고 기침을 뱉었다. 살다 살다 욕조 안에서 익사할 뻔한 경험을 해보다니. 곧장 샤워기를 틀어 코와 입에 들어간 거품을 헹궈냈다.
얼굴에 있는 거품을 다 헹구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또다시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 조심조심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곤 몸에 묻은 거품을 마저 씻어내는데 별안간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 있어?”
욕실을 가득 채운 뿌연 수증기 사이로, 문을 붙잡고 서 있는 차도헌이 보였다.
아까 낸 비명 소리를 들은 건가? 평소에는 내 팔다리가 분질러져도 눈 깜짝 안 할 것처럼 굴던 사람이, 왜 오늘따라 답지 않게 사사건건 나를 신경 쓰는 거야?
“남 씻는 게 그렇게 궁금해?”
하지만 툭 뱉은 말은 쾅 소리를 내며 닫힌 욕실 문에 꼬리가 뚝 잘리고 말았다.
차도헌에게는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매번 내 말을 뚝뚝 잘도 잘라먹을 수 있겠어?
“재수 없는 새끼. 얼굴에 물이라도 뿌릴걸.”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배경 삼아 차도헌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말 물이라도 뿌려버릴걸. 맨날 나를 노려보는 그 잘난 얼굴이 비에 젖은 생쥐처럼 물에 푹 젖으면 얼마나 재미….
“어?”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분명 차도헌의 시선은 과할만치 내 머리 위쪽을 향해 있었다. 평소라면 내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봤을 사람이, 아까는 당황한 표정을 한 채 영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깟 알몸 하나 본 것 같고 그렇게 숙맥처럼 굴다니. 섹스 안 하고 페로몬만 맡겠다고 한 것도 고자라서 그런 거 아냐? 입술 사이로 큭큭 웃음이 새어 나갔다.
큼지막한 타월로 몸에 묻은 물기를 툭툭 닦아내곤 욕실 벽에 걸려 있는 샤워가운을 몸에 걸쳤다. 윤 비서님만 없었으면 당장 맨몸으로 뛰쳐나가 차도헌의 기겁한 얼굴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그를 골탕 먹일 기회를 놓친 아쉬움은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샤워가운의 포근함으로 달랠 수 있었다.
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나는 곧장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있는 차도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기색이었다.
“제대로 훔쳐보지도 못할 거면서, 문은 왜 열었대?”
“…….”
차도헌은 내 말을 대놓고 무시하며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업무에 열중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재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
“도해영 님, 식사 준비됐습니다.”
친절하신 윤 비서님의 목소리에 등을 홱 돌아 부엌으로 걸어갔다.
다이닝 바를 가득 채운 온갖 음식들을 눈앞에 두자 아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도 돌연 허기가 졌다. 가지런히 놓인 수저를 쥐고 따끈한 밥을 한술 뜨는데 문득, 하루에 두 끼나 챙겨 먹은 건 오늘이 난생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면 더 말씀해 주십시오.”
윤 비서님이 빈 접시에 반찬을 마저 채우며 내 옆에 물 잔을 놓아주었다. 달큰하고 폭신한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나는 윤 비서님을 향해 웃어 보였다.
“다 엄청 맛있어요. 감사해요.”
저렇게 좋은 분이 어쩌다가 차도헌 같은 개차반과 함께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여기서 지낼 두 달간은 윤 비서님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식사가 끝난 부엌을 정리하고 다과까지 준비한 윤 비서님에게도 퇴근 시간이 찾아왔다. 거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차도헌과 부엌에서 사과를 오물거리고 있는 내게 꾸벅 인사를 남긴 윤 비서님이 떠나자, 이윽고 오피스텔에 짙은 정적이 깔렸다.
거실에 앉아있는 차도헌을 흘금 쳐다보며 나는 남은 사과 조각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괜히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찬장에 억제제 있어. 먹어.”
접시와 포크를 달그락거리며 싱크대로 향하는 등 뒤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녁을 먹는 동안 부엌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줄곧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길래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더니….
예전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큰 크기의 알약을 힘겹게 삼켜내곤 조용히 욕실로 건너가 칫솔을 물었다. 양치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땐 차도헌은 보고 있던 서류를 다 정리했는지 빈손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쏘아보는 듯한 매서운 눈매를 마주하고 있자니 머릿속에 불쑥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열감기에 시달리는 내게 간호 비슷한 걸 해주던 차도헌이 고맙기는 했지만 다짜고짜 화를 낸 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저기, 궁금한 거 있는데.”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그 얼굴 앞에서 나는 최대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냈다.
“아침엔 왜 화낸 거야?”
“…….”
“물론, 그쪽 덕분에 감기도 다 낫고 고마운 건 맞는데….”
“그럼 된 거 아닌가?”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딱딱하게 굳힌 눈매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차도헌의 앞에서, 나는 오늘 아침의 일이 전부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강하게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나도 됐어. 그러니까 빨리 페로몬이나 맡고 가버려.”
소파 위로 털썩 앉으며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저딴 놈에게 고맙다는 감정을 느꼈다니, 이렇게도 바보 같을 수가 없었다.
“페로몬 풀어.”
싸가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명령조의 목소리에 나는 보란 듯이 페로몬을 확 풀어내었다. 꼬았던 다리를 풀어 허벅지를 살풋 벌리자 금방 짙은 체향이 거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이 정도면 됐어?”
차도헌의 얼굴을 응시하며 나는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같은 것 따위하곤 섹스하지 않겠다며 도도하게 굴었던 차도헌도 결국 알파의 본능을 거스를 순 없을 테다. 제발 박게 해달라고, 내 안에서 가고 싶다고, 안달을 내며 애원하는 차도헌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절로 통쾌해졌다.
물론 난 단번에 거절할 테지만.
“턱도 없어.”
“뭐?”
돌연, 내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내 쪽으로 상체를 훅 기울인 차도헌은 내 목덜미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거리를 붙였다. 이윽고 느긋하게 숨을 내쉬는 그의 호흡이 귓가에 들렸다.
“……자, 잠깐만.”
몸이 돌덩이가 된 것 같았다. 차도헌의 몸 안에 갇힌 나는 그야말로 얼음이 되어버린 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숨결이 내려앉는 목덜미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사이로 묵직하게 뛰는 차도헌의 심장 소리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둥둥 울려댔고,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바짝 긴장한 말초신경이 콕콕 전류를 내고 있었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호흡을 골랐다. 절대 물러나선 안 됐다. 차도헌과의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간간이 뺨을 간질이는 차도헌의 머리칼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나를 단단히 가둔 차도헌의 드넓은 어깨너머로, 당장 으깨버리겠다는 것처럼 억세게 소파 끝자락을 움켜쥔 손이 보였다.
아무 반지도 끼워져 있지 않은, 차도헌의 텅 빈 왼손이.
“…오늘은 왜 반지 안 끼고 왔어?”
차도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화를 억누른 거친 숨이 내 쇄골 위로 내려앉았다.
“모르지? 그쪽이 이런 데에 나 숨겨둔 거.”
“…네가 상관할 문제 아니야.”
“남의 치정 싸움에 끼어들기 싫은데, 어쨌든 불똥은 나한테 튈 거잖아. 아무쪼록 그쪽도 행동 조심해 줬으면 해.”
치정 싸움, 삼자대면, 이혼 서류, 양육권 포기 각서…. 이것들은 업소에서 툭 하면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내가 이걸 어깨너머로 봐온 게 얼만데.
“만약 들키더라도 절대 여러 번 만났다든가 감정이 있다고 하면 안 돼. 무조건 단 한 번의 실수인 것처럼, 싹싹 빌면서 다음엔 안 그러겠다고 해. 다들 그렇게 하더라.”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뜨거운 숨을 들이쉬는 것 같은 차도헌의 호흡을 무시하려 정보 공유 차원의 내용을 조잘거리고 있는데, 돌연 차도헌의 상체가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차도헌의 얼굴엔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처음 보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대체 저게 어떤 감정인지 파악해내려 머리를 굴리는 사이로,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차도헌은 도통 나로선 공감이 가질 않는 말을 뱉어내더니 벗어둔 재킷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는 거야?”
내 물음에도 차도헌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재수 없는 뒤통수를 노려보며 차도헌이 나가자마자 현관문 안전 고리를 잠글 생각으로 따라나섰다.
차도헌은 벗어둔 구두를 신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손도 안 쓰고 저 큰 발을 어떻게 구두 안에 구겨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한 정장 차림이 된 차도헌은 돌연 뒤를 돌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저거. 이따 뜯어봐.”
그 손가락이 향한 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박스였다. 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한 마음보다 불안감이 먼저 엄습한 관계로, 나는 후다닥 거실을 가로질러 박스를 움켜잡곤 현관으로 돌아왔다.
“이거, 뭐야?”
“핸드폰. 아예 새 번호로 개통했으니까 그전에 쓰던 것도 계속 쓸 수 있을 거야.”
“필요 없는데.”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들고 온 박스를 차도헌의 가슴팍을 향해 쭉 들이밀었다. 차도헌은 박스를 돌려주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무거워. 팔 아파. 빨리 가져가.”
“너 쓰라고 산 거야.”
“안 필요하다니까?”
“내 연락 전용이라고 생각해.”
무슨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 같다. 차도헌이 내가 내미는 박스를 물끄러미 응시하고만 있어서 결국 현관 바닥에 묵직한 박스를 툭 내려놓았다.
“제발 괜한 걸로 고집 좀 피우지 마, 도해영.”
저 말은 분명 잠자코 자기가 하는 말에 다 따르라는 뜻이다. 재수 없어.
“또 시위한다고 현관에서 자기만 해.”
대리석 바닥을 구두 앞코로 쿡, 내리찍으며 차도헌은 당부하듯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지극히도 잘생긴 얼굴인데 어쩜 이렇게도 보기 싫을까. 반항심이 절로 몽글몽글 샘솟았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곤 차도헌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지는 낮이고 밤이고 내 말을 잘도 씹어대면서, 나라고 못 할 줄 알아?
“잘 들어. 난 너 간병할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야.”
“…….”
“윤 비서도 마찬가지야. 꼬박꼬박 너 밥 해주러 못 와. 카드 두고 갈 테니까 내일부터는 알아서 식사 챙겨.”
“…….”
“대답 안 해?”
“…….”
아, 재밌다. 차도헌의 얼굴이 구겨질수록 내 입꼬리는 신이 나 방실방실 미소를 지어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구름 위를 둥둥 떠돌던 기분도 잠시, 내 턱을 움켜쥐는 억센 손아귀에 고개가 위로 바짝 들어 올려졌다.
“대답.”
명령조로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 너머로 돌연 포악한 페로몬이 넘실거리며 기도를 콱 막아댔다. 헐떡이며 벅찬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당장이라도 닿을 것처럼 다가온 입술 앞에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뜨겁게 달궈진 차도헌의 페로몬이 불길처럼 내 전신을 휘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꿀을 푹 뒤집어쓴 것처럼 묵직한 체향이 몸 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차도헌의 눈동자 위로 내 얼굴이 온전히 비쳤다. 그 속에 담긴 얼굴은 겁에 질렸다기보단 이성을 잃은 것에 가까웠다.
“대답해, 도해영.”
으르렁대듯 읊조리는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속 깊숙이 파고드는 페로몬 때문에 열이 오른 아랫배가 살금살금 당기기 시작했고, 어느새 젖어버린 비부에서는 달큰한 향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금방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당장 차도헌의 페로몬은 온몸 구석구석을 핥아대는 것처럼 집요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고, 꾹 다물린 입술 위로는 차도헌의 거친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몸이 너무 달았다. 당장이라도 차도헌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 페로몬을 온전히 들이마시고 싶었다. 쾌감에 푹 젖은 채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몸 깊숙한 곳까지 내보이며 거칠게 흔들리고 싶었다.
지금 입고 있는 실크 가운 끝자락만 들어 올리곤 엉덩이를 한껏 벌려 뜨거운 살덩이를 밀어 넣으면, 곧 무자비하게 내벽을 쳐올리는 몸짓에 신음을 내지르며 쾌락에 허우적댈 터였다.
결국 이성보다 몸이 앞섰다.
반 발짝 움직여 다가서자 얼음처럼 굳어있던 차도헌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짧은 순간 내 몸에 닿은 차도헌의 성기는 이미 거대하게 부풀어버린 상태였다.
“아….”
몸에 닿은 것은 마치 불덩이와 같았다. 허리를 조금씩 바르작대며 뜨거운 열을 가득 품은 것을 배 위로 문질러대자 입술 새로 달뜬 숨이 새어나갔다.
불쑥 본능이 솟아올랐다. 나는 차도헌의 짙은 페로몬을 좇으며 깊은숨을 들이쉬곤, 그대로 까치발을 들어 올려 입술을 찾았다.
바투 선 거리에 맞닿은 호흡이 가삐 섞였다. 뜨거운 열을 가득 품은 입술이 맞닿으려는 그 순간,
“…….”
차도헌은 내 몸을 붙잡은 손을 거두어버리곤 그대로 등을 돌려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도헌의 페로몬은 흔적도 없이 거두어진 채였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끊어졌던 이성이 도로 붙어버렸다. 분명 무언가에 홀린 게 분명하다. 저 재수 없는 놈과 섹스를 바라다니, 어디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그대로 거실로 걸어가 들고 있던 박스를 소파에 내던지곤 곧장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발갛게 열이 오른 채였다.
“씨발….”
잔뜩 발기한 성기가 나를 놀려대듯 실크 가운 아래에서 꺼떡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