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6/43)

1.

선팅이 짙게 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퍽 낯선 곳이었다. 살면서 가본 곳이라곤 사창가와 그 인근 번화가에 그쳐 있어 여기가 어디쯤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고층 빌딩이 빼곡히 들어찬 것을 보아하니 꽤 비싼 동네인 것 같았다.

“…….”

바깥을 흘긋 쳐다보던 눈동자를 도로록 굴려 차도헌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새끼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고 싶은데, 부단히 머리를 굴려도 딱히 짚이는 바가 없었다. 대신 차도헌의 손에 단단히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며 이따금씩 저려 오는 손끝을 옴짝거렸다.

차도헌은 차 안에서까지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달리는 도로에서 차 문을 열어젖히고 도망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차도헌이 나를 줄곧 옥죄는 덕분에 반발심이 샘솟는 중이었다.

왼손으로는 내 손목을 꽉 움켜쥐고, 다른 손으론 서류 같은 걸 붙잡고 눈으로 훑고 있는 놈의 잘난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간 재수가 없는 게 아니었다.

“불편해.”

차 안에 붙잡혀 실려 가는 내내 잠자코 있던 내가 갑자기 불퉁한 소리를 내자 차도헌은 보고 있던 것에서 눈을 떼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갑다 못해 냉담한 눈매로 나를 쳐다보는 차도헌의 얼굴엔 ‘너 같은 놈에겐 말을 꺼내는 것도 굉장한 사치다’라고 대놓고 적혀 있었다.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로 눈짓으로 뭐가 불편하다는 거냐고 묻는 것 같은 차도헌에게 나는 친절히 목소리를 냈다.

“안 도망갈 테니까 손 놔. 아프단 말이야.”

“안 돼.”

차도헌은 부정을 뜻하는 단 두 글자를 툭 내뱉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다물린 입술에 완강한 고집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한참을 노려보기도 잠시, 슬슬 따끔따끔하게 저리기 시작하는 손을 몇 번이고 비틀며 벗어나려 했다. 그럴 때마다 커플링인지 결혼반지인지 모를 저 새끼의 망할 반지가 살갗을 꾹 눌러대는 통에 오히려 더 역효과만 나는 듯싶었다.

옆에서 바르작대는 내가 심히 신경이 쓰였는지 차도헌은 쯧, 혀를 찼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불편함을 티 내면 좀 손을 놔주든가 하는 게 도리 아닌가?

하지만 이 새끼는 붙잡은 손목을 놓아주긴커녕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보다 더 억세게 조여오는 손목이 이제는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재수가 없으려니, 힘이 남아도는 또라이 새끼를 잘못 건드린 격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질색하며 소리치자 차도헌은 곧장 느슨하게 손에 힘을 뺐다.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만 돌리다 못해 아예 상체를 돌려 앉은 터라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뭘 쳐다봐.”

살의가 가득 담긴 채로 노려보는 저 익숙한 시선이 무섭다기보단 이젠 그냥 짜증이 났다. 가타부타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차도헌은 재미있는 것이 생각난 사람처럼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안 물어봐?”

“안 궁금해.”

혹여라도 관심을 보이면 옳다구나 달려들 게 뻔해서 대화를 뚝 끊어냈다. 폐공장의 지하 창고에 갇혀 고문 세례를 받든 저 새끼의 전용 남창이 되든 내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남들 못지않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을 보낸 덕택에 딱히 차도헌의 흑심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두려운 게 있다면, 온몸을 찢어발기듯 난폭하고 광적인 차도헌의 페로몬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게 별수는 없었다. 이미 빚을 다 갚아주는 대가로 나를 사버린 차도헌이 그 권위로 내게 못 할 짓은 없었으니까.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킨 채로 줄곧 밖만 내다봤다. 여전히 거리는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내 사지를 묶어둘 폐공장이라든가 광기 어린 어두컴컴한 지하실 따위는 없을 것 같은 부자들의 동네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 했다.

그 순간, 미끄러지듯 차가 멈췄다.

“금방 내려올 테니까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지령을 내린 차도헌은 그대로 문을 벌컥 열어 차에서 내렸다. 손목이 단단히 붙잡힌 덕에 엉겁결에 따라 내리게 된 나는 두어 번 널따란 뒷좌석에서 허우적대다 겨우 땅에 발을 디뎠다.

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닫는 그 짧은 순간마저도 차도헌은 붙잡은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수갑을 채우지…. 귀찮게 직접 붙잡아 질질 끌고 다니는 것보다는 아예 수갑을 채워 연행하듯 데리고 다니는 게 그림이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신상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고민인지라 그저 언제쯤 지하 감옥 같은 곳에 도착하려나 생각하며 차도헌의 발만 쫓아 걸었다.

그런데 차도헌의 걸음이 멈춘 곳은 외벽을 전부 유리로 감싼 초고층 오피스텔이었다. 설마 나를 이런 곳에 데려가는 건가? 이렇게 비싸 보이는 건물에?

“저기, 잘못 온 거 아냐?”

“…….”

내 물음에 차도헌은 미간을 확 구겼다. 감히 나 같은 게 ‘잘못’을 운운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건지, 차도헌은 꽤 심기가 거슬린다는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니까, 나는 지하 창고나 한 칸짜리 다락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비싼 데를 오니까….”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는 사이로, 차도헌은 내 말을 더 들을 의미도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휘황찬란한 로비, 그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내 눈은 더 댕그래졌다. 번쩍거리는 아이보리색 대리석이 쫙 깔린 로비 중앙에는 거대한 대리석 분수가 휘황찬란하게 물줄기를 뿜어대고 있었고, 그 뒤로는 인공으로 만든 푸릇푸릇한 실내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로비 한편에 자리한 분위기 있는 카페와 펍도 한 몫을 더했다. 그 안에서 여유롭게 앉아 시간을 보내는 상류층의 모습을 보자니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다행히 내겐 넋 놓고 그것들을 구경할 틈이 없었다. 차도헌은 나를 단단히 붙든 채 곧장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고, 어느새 내 앞엔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부 투명한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잠, 잠깐-!”

부드럽게 열리는 유리문 사이로 성큼 발을 내딛는 차도헌의 뒤로, 나는 붙잡힌 팔을 길게 뻗은 채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차갑게 굳은 입술을 연신 짓씹으며 나는 애원하듯 차도헌을 쳐다보았다. 주체 없이 흘러나오는 공포감에 몸을 덜덜 떨어대는 나를 응시하던 차도헌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서야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다. 나를 내려다보는 차도헌의 얼굴엔 성가시다는 감정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도로 닫힌 엘리베이터가 다른 층으로 유유히 떠나가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숨을 골랐다. 여기가 그곳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습하는 공포는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왜. 뭐가 또 문제야.”

“…나 엘리베이터 못 타. 그쪽 혼자 타고 가.”

“억지 부리지 마.”

차도헌의 무섭게 굳은 얼굴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엘리베이터를 타느니, 차라리 이 오피스텔 옥상에서 떨어지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내게 엘리베이터가 갖는 의미는 딱 하나였다. 빌어먹을 황 회장의 높다란 호텔로 잡혀 들어가는 길목.

온통 금칠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곧장 더럽고 냄새나는 좆물이 얼굴에 끼얹어진다, 옷을 죄다 벗은 채 개처럼 황 회장의 뒤를 따라 네발로 기어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면 몸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쑤셔지면서 정액 범벅이 된다.

그렇게 더럽혀진 몸은 수백 번 물로 씻어내려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는 내가 깨끗함을 논하는 게 웃겨 보이겠지만, 이건 달랐다. 황 회장이 나를 범할 때마다 더러워지는 건 마음이었으니까.

황 회장은 나를 호출할 때마다 내게 부모 얘기를 했다.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진 내가 전혀 알 리 없는, 빚만 남기고 죽어버린 내 부모의 이야기를.

개처럼 범해지는 것보다도 더한 고통은 거기에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내 부모를 마구잡이로 힐난하며 황 회장은 내 구멍에 좆을 욱여넣었고, 그 분노를 감내하는 건 오롯이 나였다.

“억지 아니야. …무서워서 그래.”

후들거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차분히 말을 꺼내는 나를, 차도헌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행위는 오히려 내 쪽에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돌처럼 굳어 있는 나를 향해 한마디 툭 내뱉은 차도헌은 냅다 내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자기 높이 들린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 다리를 휘적이며 버둥대는 동안 차도헌은 쯧, 혀를 한 번 차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몸을 단단히 붙들었다.

“계단은. 무서워?”

“…아니.”

“그럼 됐네.”

짤막하게 이어진 대화가 끝나고, 차도헌은 엘리베이터 옆쪽으로 이어지는 비상구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얌전히 차도헌의 품에 안겨 있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냥 엘리베이터를 못 타는 것뿐이지 다리가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닌데, 차도헌은 왜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내려 줘도 되는데.”

“…….”

“내려 줘, 나 혼자 걸어서 올라가도 돼.”

또다. 차도헌은 또 내 말을 맛있게 씹어 먹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얼굴을 팍 구긴 채 묵묵히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차도헌의 잘난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돌연 속에서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왜 내 말 무시해, 내려달라니까?”

“…….”

“야!”

내 외침에 그제야 차도헌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이제야 내려주려나 싶었는데, 그건 얄팍한 기우에 불과했다.

“다리 하나 부러뜨리기 전에 가만히 있어.”

냉한 표정으로 내뱉는 싸가지 없는 말을 뱉은 차도헌은 나를 품에 단단히 고쳐 안곤 다시금 계단을 올랐다.

그야말로 무뚝뚝함의 정수 그 자체인 얼굴로 착실히 계단을 오르는 차도헌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유도 모르게 시비부터 털고 싶었다.

“왜 착한 척해? 그쪽 쓰레기잖아.”

툭 뱉은 말에 차도헌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겠다는 듯 형형한 눈을 뜬 차도헌은 계단에 내 머리통을 내리꽂는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웃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이 인간이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네가 엘리베이터만 잘 탔어도 이럴 일 없었어.”

“못 타는 걸 어떡해.”

“왜.”

스치듯 지나간 답변에 진득한 시선이 붙었다. 차도헌은 아예 층계참에 발을 디딘 채로 서서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를 잠깐 마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몰라. 그냥 싫어.”

이 고층 건물에 나를 가둬 놓는 입장에서는 내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퍽 이점이 될 듯싶었다. 내가 무슨 이유로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는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였고.

줄줄이 이유를 늘어놓는 대신 고개를 돌려버린 내 반응에 차도헌은 다시금 성큼 계단을 밟아 올랐다. 그렇게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한참을 차도헌의 품에 안겨 있어야만 했다.

차도헌은 그야말로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일정한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긴 복도 끝자락에 단 두 세대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층에 다다르자, 수트 안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곤 신경질적으로 문을 연 차도헌은 그 안으로 내 몸을 밀어 넣더니 문부터 잠갔다.

“기다려. 씻고 나올 테니까.”

짤막한 한마디를 뱉은 차도헌은 재킷을 벗어 소파 위로 던지곤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어젖히면서 욕실에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욕설이 불쑥 나왔다.

“성질도 급한 새끼….”

그리고 뭐? 내가 무슨 개새끼도 아니고 ‘기다려’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그동안 해온 일이라고는 몸 파는 일뿐이었으니 개처럼 박히는 건 일상이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상시의 대화에서 개 취급을 당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물론 차도헌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새끼의 충실한 개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 많은 빚을 전부 갚아주고 더러운 구렁텅이에서 구제해주기까지 했으니, 나로선 그 위대하신 몸이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도 해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그딴 걸 바라지도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저 위대하신 차도헌 님이 지금 당장 개처럼 섹스하길 원하시는 것 같으니 그에 맞춰드리는 게 내 본분임은 분명했다.

계절에 엇나간 얄팍한 옷을 툭툭 벗어내는 건 금방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온전한 나체상태가 된 나는 몰려오는 한기에 작게 몸을 웅크렸다.

“…아으, 추워라.”

오래 비워두었는지 오피스텔을 채운 공기는 꽤 쌀쌀하기까지 했다. 거실 역할을 하는 넓은 라운지를 중심으로 방의 구분이 따로 없이 침실과 부엌이 각각 펼쳐진 오픈형 구조인지라 더욱이 그런 듯싶었다.

게다가 모든 벽면이 유리로 확 트인 도시적인 인테리어는 다가오는 겨울에 얼어붙은 도시의 전경을 환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얼음성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을 주는지라, 나는 다급히 창가에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담요 한 장 없는 집에, 가볍게 몸에 두를 수 있는 건 차도헌의 재킷뿐이었다. 저거라도 덮어볼까, 그럼 차도헌의 심기를 더더욱 긁어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로 욕실 문이 달칵 열렸다.

“너, 옷차림이 그게 뭐야?”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재킷을 향했던 손을 거두며 뒤로 돌아서자 팔짱을 낀 채로 인상을 쓰고 있는 차도헌이 보였다.

대충 수건 한 장 걸치고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차도헌은 셔츠 단추 하나 풀어두지 않은 완벽한 차림새로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어차피 저쪽은 앞섶만 푸르고도 섹스를 할 수 있으니 옷을 입든 벗든 상관은 없겠다만, 도망도 안 가고 착실하게 옷 다 벗고 기다리고 있는 나한테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옷 입어.”

차도헌은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옷을 가리키며 명령조로 말했다. 거의 경멸과 비슷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불쑥 화가 났다. 옷을 주워 입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부터 냈다.

“왜? 나랑 하려고 씻은 거 아냐?”

“잠깐 세수 좀 한 거야. 그리고, 너랑은 그런 짓 할 생각 추호도 없어.”

“그럼 왜 데려왔는데?”

“캐묻지 말고 당장 옷 입어.”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와 함께 살벌하게 가라앉은 페로몬이 짧은 순간 숨통을 조였다. 차가운 불꽃이 혀를 내어 온몸을 훑고 사라지는 동안 흉포스러울 정도로 치닫는 페로몬의 위압감은 내 손발을 묶어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게, 작은 반항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분노가 서린 차도헌의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페로몬이 거둬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소파를 향해 걸어가는 차도헌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바닥에 떨군 옷을 집어 들었다. 긴장에 굳어버린 몸을 겨우 움직여 옷을 다 입고 나니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이는 차도헌이 보였다.

“…….”

재수 없는 새끼,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천천히 거실을 향해 걸었다.

과할 정도로 푹신한 소파에 털썩 앉자 차도헌은 지갑에서 오피스텔 카드키와 신용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는데 이윽고 차도헌은 목소리를 내어 설명을 시작했다.

“식사는 알아서 시켜 먹고, 웬만하면 나가지 마. 억제제 좋은 거 가져다줄 테니까 빠뜨리지 말고 매일 먹고.”

“…….”

“그리고 너 매일 뿌리고 다니는 그 싸구려 향수, 이제 절대 쓰지 마.”

마담은 아무도 내가 가짜 오메가 향수를 쓰는지 모를 거라고 그랬는데. 저 귀신같은 새끼.

“별일 없으면 매일 저녁 8시 즈음에 찾아올 거니까 씻고 기다리고 있어.”

“…….”

“섹스하러 오는 거 아니고, 네 페로몬만 맡으러 오는 거야. 내가 네 빚 다 갚아줬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감흥 없이 두어 번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가 어느 한 구절에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페로몬’만 맡기 위해 나를 이런 데에 가둬놓는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전용 욕구 풀이로 쓰겠다는 게 아니라 고작 페로몬 맡으려고 내 빚 갚아준 거야? 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인간성이 멸종되어 보이는 저 인간이 나를 데려온 이유는 그저 지하실에 가둬놓고 제 성질 꺾일 때마다 죽일 듯이 박아대고 때리면서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시껄렁한 이유로 나를 이런 데에서 지내라고 하니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너랑은 그런 짓 안 한다고 했잖아.”

“이해가 안 돼. 차라리 그쪽 전용 남창인 게 더 마음이 편해.”

“나한테 필요한 건 네 페로몬이고, 그래서 널 데려왔다. 이유는 그것밖엔 없어.”

차도헌의 목소리엔 슬슬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고, 내 머릿속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애초에 차도헌에게 내 페로몬이 왜 필요한 거지? 비록 내 형질이 극우성 오메가라는 특이 체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오메가들에 비해 더 좋은 향이 난다든가 뿅 가는 페로몬이 나온다든가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분명 이 세상에 극우성 오메가가 나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나를 데려온 건지도 이해가 안 됐다.

“내 페로몬이 왜 그쪽한테 필요한데?”

“…….”

“나도 알 건 알아야 할 거 아냐. 말해봐, 왜 다른 오메가도 아니고 꼭 나여야만 하는 건데?”

“넌 알 거 없어.”

집요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내 질문에 대한 차도헌의 대답은 불성실하기 그지없었다.

어째서 이 새끼가 하는 짓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이해가 안 될까? 길거리에서 처음 본 내 빚을 죄다 갚아주질 않나, 허름한 창고도 아니고 무슨 이런 고급 오피스텔에 끌고 들어와선 ‘페로몬만 맡겠다’라고 하질 않나….

차도헌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내게 인심을 쓰듯 설명을 덧붙였다.

“나 돈 많아.”

“그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모르는 것 같길래.”

턱을 치켜들고 다리를 꼬며 푹신한 소파 헤드에 등을 기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차도헌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재수 없는 새끼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굳이 ‘너’여야 할 이유는 없어. 마침 적절한 때에 널 발견한 것뿐이니까.”

“…….”

“그리고, 너 같은 애들이 진 빚, 몇천 명 갚아줘도 나한텐 타격 없어.”

이어지는 말에 어금니에서 절로 빠득, 소리가 났다.

저 새끼를 어떻게 하면 엿 먹일 수 있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좆되게 하고 싶은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닥치고 즐겨.”

어쩜 저렇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싸가지 없을 수가 있지? 혹시 지금 나를 화병 나게 해서 죽여버릴 작정인 건가?

하지만 딱 하나 다행인 점은, 나도 차도헌에 버금갈 만큼 싸가지 없는 새끼라는 거였다.

“그래, 아주 감사해 죽겠네. 절이라도 해줘?”

“오버하지 마.”

“왜? 엄청 감사하니까 두 번 해줄게. 향도 피워놓고. 응?”

능청스레 내뱉은 말에 차도헌의 미간이 콱 구겨지는 것을 구경하며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증스러운 미소와 함께 쭉 뻗은 다리를 엇갈려 꼬아대자 차도헌은 쯧, 혀를 차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널 데려온 걸 후회하게 하지 마.”

등을 돌린 채 섬뜩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나한테 너무 큰 걸 바라고 있는 거 아니야? 차도헌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사람 후회하게 만드는 건 내 전문이거든. 그쪽도 며칠 안 돼서 후회하게 될 거야. 나 같은 창놈 새끼를 별 이유도 없이 데려온 거 말이야.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삼키며 나는 오피스텔을 나서는 차도헌을 구경하며 그렇게 몇 분을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차도헌이 나를 찾아올 내일 밤이 매우 기대될 지경이었다.

***

오붓하게 말싸움이나 벌이려고 했던 내 계획과는 다르게, 다음 날 저녁 차도헌은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뭐야, 이 사람들은 누군데?”

“형질 검사.”

차도헌의 짤막한 설명에 이어 자신을 연구원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들고 온 가방에서 이런저런 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하더니 차근히 내 팔뚝에서 피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흰 가운을 입고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쉴 새 없이 피를 뽑혔다.

끝났겠거니 싶으면 또다시 굵은 주삿바늘이 내 팔뚝을 비집고 들어왔고, 이젠 정말 그만 했으면 싶어 팔을 뒤로 빼며 저항을 보이는데도 그들은 침착하게 내 다른 쪽 팔을 붙잡아 주삿바늘을 깊게 찔러 넣는 식이었다.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숨만 겨우 내쉬고 있는데 옆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채혈 한 번 남았습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주사를 내려놓곤 빠르게 피를 몰기 위해 내 팔뚝을 열심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내 몸에 맺힌 시퍼런 멍 자국을 흘깃 쳐다보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창백한 손바닥에 옅은 혈색이 도는 것을 확인하곤 손을 소파 위로 툭 떨구자 그녀는 내 팔뚝 안쪽을 가볍게 치며 피를 몰고 있었다.

의학 지식이 전무한 나조차도 짧은 시간에 피를 이렇게 많이 뽑으면 위험하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과다출혈로 죽나 복상사로 죽나 나한텐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그냥 차도헌이 시키는 대로 죽은 듯 늘어져선 이 사람들이 내 피를 죄다 뽑아가게 놔두는 수밖엔.

“검사 결과는 언제쯤 나옵니까?”

“두 분의 형질 결과지는 다음 주 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부엌 쪽에서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이 귓가에 들렸다. 시야가 뭉개질 정도로 어지럽고 간헐적으로 역한 구토감이 들었다.

“두 달 안에 가능합니까?”

“특이 케이스라 저희 쪽에서는 확답을 드릴 수가….”

아무래도 저쪽에서는 퍽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듯싶었다. 안 돌아가는 고개를 겨우 돌려 부엌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차도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골이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로 흰 가운을 입은 남자와 대화를 이어가는 차도헌은 재수 없을 만치 쌩쌩해 보였다. 분명 나만큼이나 피를 많이 뽑혔을 텐데 저렇게 멀쩡하다니, 아무래도 저 인간은 과다출혈로 죽기도 힘들 게 뻔했다.

“주사 삽입하겠습니다.”

팔뚝을 주무르던 손길이 멈추고, 달그락 소리와 함께 연구원은 알콜 솜으로 피부를 문지르면서 바늘구멍이 없는 피부를 찾아 팔 안쪽 살을 헤집기 시작했다. 곧 마땅한 곳을 찾았는지 날카로운 바늘 끝이 살 깊숙이 파고들었고, 유독 한 부분이 뜨겁게 타는 느낌과 함께 다시금 눈앞이 흐릿해졌다.

“채혈 끝나셨습니다.”

바늘이 뽑히는 생생한 느낌과 함께 다시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뒤이어 알콜 솜으로 세게 문질러주는 손길이 이어졌고, 나는 힘이 죄다 빠진 채 멍하니 소파에 몸을 늘어트렸다.

주삿바늘 구멍으로 너덜해진 팔 안쪽을 알콜 솜으로 닦아 마무리해준 그녀는 방금 뽑아낸 내 피를 철제 가방 안에 정리해 넣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욱신거리는 통증 사이로 지혈이 덜 되었는지 피가 질금질금 새기 시작했다. 알아서 멈추겠지 싶어 대충 놔두고 일단 소파에 편히 누웠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더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다 끝났어?”

언제 왔는지 머리통 바로 위에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 차도헌은 쯧, 혀를 차는 소리를 내더니 다짜고짜 구멍이 숭숭 난 내 팔뚝을 움켜잡았다.

“아, 아파!”

“피 계속 나잖아.”

“피 닦을 힘도 없어.”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억세게 쥐어 잡히니 고통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팔뚝을 잘라내는 게 이것보다 덜 아프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 돌연 몰아치는 두통에 이를 악물었다.

내 상태가 심히 안 좋아 보이긴 했는지 차도헌은 팔뚝을 쥔 손에 힘을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보통 사람들은 피 좀 뽑았다고 이러진 않는데. 빈혈 있어?”

“몰라, 씨발.”

“말 예쁘게 해.”

“아파 죽겠는데 말이 곱게 나가?”

그놈의 형질 검사 때문에 별로 있지도 않은 피 왕창 뽑혀서 어지럽고 괴로워 죽겠는데 내게 언어순화를 바라다니 참 큰 걸 바란다. 몇 마디 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그 대신 눈에 한껏 욕을 담아 차도헌을 노려봤다. 그러자 차도헌은 내 팔뚝을 놓곤 핸드폰을 들었다.

“어, 난데. 내일 오전 회의, 오후로 미뤄.”

그리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짤막이 할 말만 전하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마담이 즐겨 보던 드라마에서나 들어본 대사를 코앞에서 직접 듣자니 너무 웃겼다.

평소 같았더라면 마음껏 비웃었을 텐데 어지러운 틈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뜬 채로 차도헌을 올려다보자 귓가를 가득 채운 이명 너머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자둬.”

명령조로 읊조리는 차도헌의 목소리가 어지러운 순간에도 신경을 박박 긁어댔다. 화를 낼 힘도 없어서 몸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누워있는 내 앞으로, 문득 차도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안긴 것마냥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과 함께 머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게 몰려오는 수마에 휩싸여,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희미하게 빗소리가 났다. 바람이 세게 부는지 꽉 닫힌 창문 틈으로 작은 진동이 울렸다. 언제 잠에서 깼는지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멍한 와중에 천천히 돌아오는 몸의 감각들이 퍽 낯설었다. 그놈의 형질 검사인지 뭔지 때문에 구멍이 숭숭 난 팔뚝에선 뒤늦게 욱신거리며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고, 퍽 깊게 자버렸는지 잠기운이 깃든 눈꺼풀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몸 안에 차오르는 날 선 감각들이 차츰 익숙해질 무렵, 내 등 뒤로 느껴지는 또 다른 낯선 무언가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피부 위로 바투 닿는 뜨거운 온기, 거기서 피어오르는 느긋한 페로몬은 분명, 차도헌의 것이었다.

“……!”

당황스러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지난밤을 차도헌과 같은 침대에서 보냈다니…. 심지어 다리 사이가 뽀송한 게, 내가 잠든 동안 차도헌이 나를 덮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차도헌과 내가 같은 침대에서 잠만 잤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온다.

황급히 내 몸을 바짝 끌어안은 차도헌의 팔뚝을 잡아 떼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맥없이 축 늘어뜨린 한쪽 팔을 힘들게 움직여 매트리스를 손으로 짚는데, 하필이면 과할만치 푹신한 매트리스 덕에 시트 사이로 손이 푹 들어가 겨우 일으킨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아!”

중심을 잃어 훅 앞으로 쏠린 몸이 그대로 차도헌의 가슴팍으로 고꾸라졌다.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차도헌의 열기가 내 뺨을 덥혔고, 그의 커다란 손은 밀어낼 틈도 없이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회복이 느린 편인가 봐, 아직도 삐그덕대는 걸 보니.”

하지만 언제 나를 품에 안았냐는 듯, 내 허리를 억세게 붙잡았던 차도헌의 손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이른 새벽부터 성질을 제대로 긁어대는 말을 뱉은 당사자는 멀쩡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화 끄는 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왜 시비야?”

“갓 태어난 기린 새끼처럼 몸을 못 가누는 게 웃겨서.”

높은 침대 때문에 반쯤 뛰어내리다시피 바닥에 내려오며 그 잘난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차갑게 식은 대리석 바닥을 턱턱 밟아 부엌으로 향하니 다이닝 바 위에 포장 용기에 담긴 죽 그릇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먹어.”

차도헌은 테이블 위로 수저를 탁, 내려놓으며 명령조의 목소리를 냈다. 그 딱딱하게 굳은 얼굴 앞에서 나는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그쪽이 왜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잔 거야? 페로몬만 맡겠다며, 몸은 왜 끌어안은 건데!”

“네가 하도 춥다 춥다기에 그런 것뿐이야.”

“내가 언제! 난 그쪽한테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본인이 잠꼬대가 심한 편인 걸 모르나 본데. 밤새 앓는 소리를 내길래 도와줬더니 대우가 영 별로네.”

비웃는 투로 짧게 대답한 차도헌은 쯧, 혀를 차며 수저를 도로 집어 들었다. 이윽고 포장지를 벗은 일회용 수저가 차도헌의 거친 손길로 인해 죽 그릇으로 처박혀버렸다. 용기 안에 꽂힌 수저가 낸 철퍽, 하는 소리가 묘하게 기분 나빴다.

“그냥 무시하고 가지 그랬어. 내가 추워서 얼어 죽든 말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

“먹어.”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차도헌은 아까 죽 그릇에 꽂아 넣은 수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먹어’, 단 두 음절을 내뱉었다.

그쯤 되자 내 안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어제는 ‘기다려’라고 하질 않나, 오늘은 ‘먹어’라고 하질 않나, 나를 개 다루듯 하는 차도헌이 너무 재수 없었다.

그대로 차도헌이 가리킨 죽 그릇을 집어 들어 싱크대 안에 내용물을 부었다. 철퍽, 철퍽 하는 불쾌한 소리가 부엌에 퍼지는 동안 차도헌은 팔짱을 낀 채로 미동도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빈 플라스틱 용기를 싱크대 안에 내던지면서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형형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차도헌에게, 이번엔 내가 한 방 먹일 차례였다.

“빨리 가야 하지 않아?”

차도헌의 왼손에 가지런히 자리한 반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외박한 주제에 늦기까지 하면 어떡해, 네 애인이 엄청 의심할걸? 난 그쪽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야.”

빈정거림을 가득 담아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내자 차도헌의 미간이 옅게 구겨졌다. 몸에 장신구 하나 두르지 않는 남자가 굳이 왼손 네 번째에 낀 반지라면 연인과 맞춘 반지거나 결혼반지밖에 없는데, 이제 와 모르는 척 내숭을 떠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차도헌이 개새끼인 데다가 또라이라고 해도 자기 애인한테까지 내 존재를 밝힐 리는 없었다. 설마 연고도 없는 창놈이 진 빚을 전부 갚아주고 이런 오피스텔에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을 제 연인에게 이실직고했겠어?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매일 밤마다 내 페로몬을 맡으러 올 거라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남들 눈엔 바람이라고밖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차도헌이 나를 사랑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저 뻔뻔스럽고 재수 없는 인간의 약점을 찾았다는 통쾌한 기분에 더더욱 예쁜 미소를 지으며 잘난 통제자를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오롯한 시선을 보내는 나를 응시하던 차도헌은 한숨 비슷한 걸 내뱉곤 낮게 읊조렸다.

“…그래.”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걸어 나가는 차도헌의 뒤통수를 구경하면서 다이닝 바에 올려져 있는 죽 그릇을 집어 들었다.

마저 싱크대에 내용물을 따라 버리자 철퍽, 철퍽 하는 소리가 다시금 부엌을 울렸다. 질퍽한 소리를 배경 삼아 차도헌이 꺼지는 꼴을 쳐다보던 나는 현관문이 닫히는 짧은 순간에 손을 흔들어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 재수 없는 차도헌 씨.”

이윽고 쿵,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거세게 닫혔다.

***

퍽 깊은 잠을 잔 것 같았다. 분명 잠이 들 무렵엔 해가 환하게 뜬 낮이었는데, 피곤에 잠겨 뻑뻑한 눈꺼풀을 떠올렸을 땐 이미 해가 어스름히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뻐근한 몸을 쭉 펴며 나름 스트레칭을 하려던 와중에 그놈의 형질 검사인지 뭔지 때문에 구멍이 숭숭 난 팔뚝에서 뒤늦게 욱신거리며 통증이 밀려왔다.

“어흐… 죽겠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어제 피를 정말 많이 뽑아가긴 했는지, 기운도 없고 어지러워 오늘은 온종일 누워만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가볍게 낮잠을 자볼까 했던 오전만큼이나 해가 진 오후에도 내겐 여전히 할 일이 딱히 없었다. 결국 겨우 일으킨 몸을 도로 침대 위로 눕혔다. 새하얀 천장 위로 일렁이는 노을빛이 차츰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잠에서 깼는데도 한참을 가만히 누워있기를 고집하던 내 몸을 일으킨 건 느닷없이 들려온 초인종 소리였다.

다급히 달려가 확인한 인터폰엔 약간 낯이 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인터폰 화면 속의 그가 어제 차도헌의 세단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임을 기억해냈다.

현관문을 활짝 당겨 열자, 느닷없이 인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도해영 님. 차도헌 이사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윤 비서라고 불러주십시오.”

“아, 네. 안녕하세요.”

정갈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는 자신을 ‘윤 비서’라 소개하며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갑자기 이런 식의 대접을 받고 있자니 어색해서, 나도 허리를 반으로 접어가며 90도 인사를 했다.

“여기 부탁하신 물건입니다.”

“아, 맞다.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어제 오피스텔에 막 도착했을 땐 차도헌에게 붙들려 오느라 미처 차에서 짐을 꺼내지 못했었다. 딱히 중요한 건 없지만 그래도 내겐 몇 없는 추억거리를 넣어둔 가방이라, 감사히 건네받으며 다시금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런데 그는 아마도 방문 목적일 가방 전달을 완수하고도 도통 현관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차도헌이 달랑 내 짐 가방 하나 올려 보내려고 자기 사람을 보냈을 리가 없다. 분명 이 남자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사람일 거였다. 그제야 무슨 허락이라도 기다리는 사람마냥 현관에 우직하게 서 있는 남자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나는 현관에서 한 발 물러서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차도헌이 뭐 시킨 거죠, 비서님…한테?”

“…….”

“현관문 닫고 들어오세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가만히 차렷 자세로 서 있던 남자는 들어오라는 말에 현관문을 닫고 구두를 벗었다. 바닥에 둔 짐 가방을 대충 발로 밀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는 내게 남자는 다시금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며 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향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엌이었다. 이 오피스텔의 구조상 부엌에 서 있으면 침대가 있는 예의 ‘침실’과 소파가 놓인 ‘거실’이 한눈에 보이니, 아무래도 나를 제대로 감시하기 위해서는 부엌이 적합한 장소인 듯싶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코미디 그 자체였다.

“지금 뭐 하세요?”

“아, 예. 차도헌 이사님께서 부탁하신 일입니다.”

남자는 날 감시하기는커녕 부엌에 서서 새빨간 고무장갑을 양손에 낀 채로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날 감시하러 온 게 아니라 설거지를 하러 온 거야?

그제야 나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보란 듯 차도헌의 눈앞에서 싱크대에 죽을 죄다 버렸던 걸 미처 치울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심지어 차도헌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사람을 시켜 설거지를 처리한 꼴이었다.

완벽한 블랙 수트 차림에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윤 비서님을 보고 있자니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차도헌의 악독함이 더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이고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싱크대가 넓은 덕분에 둘이서도 충분히 비좁지 않게 설거지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거품이 가득한 그릇을 붙잡아 물을 틀어 씻어내는 내게 윤 비서님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가서 쉬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이거 제가 한 거거든요. 사고는 제가 쳤는데 윤 비서님 혼자 하심 안 될 것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과묵한 인상의 그가 몇 없는 말수를 늘려 나를 저지하고 있었다. 설거지 하나 하는 데 이렇게까지 기겁하면서 말리다니, 아무래도 차도헌의 세계는 다른 의미로 내 것과 많이 다른 듯싶었다.

차마 강하게 저지하진 못하고 눈썹을 움찔거리며 내가 설거지를 멈추기를 바라는 윤 비서님의 표정에 결국 그릇을 내려놓으며 틀어두었던 물을 잠갔다. 그제야 그의 표정에 안심이 떠올랐다.

다시 묵묵히 설거지를 시작한 그를 응시하며 나는 싱크대와 이어지는 맞은편 다이닝 바 테이블에 앉았다. 열심히 설거지를 이어가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저기, 윤 비서님. 저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예, 말씀하십시오.”

“차도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내 물음에 윤 비서님은 잠시간 입을 작게 벌리고 선 채로 나를 쳐다봤다. 그의 얼굴엔 ‘그 대단한 차도헌을 몰라?’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잠시간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윤 비서님은 누가 들을세라 상체를 내 쪽으로 살짝 숙이곤 중요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춘 채로 대답했다.

“차도헌 이사님은, 현 차(泚) 그룹의 대표이사십니다.”

그가 차도헌의 이름 뒤에 ‘이사’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인 덕에 차도헌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 충분히 알았지만, 모란에서 웬만한 기업의 이사급 고객들에게 몸을 판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딱히 차도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하다고는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요?”

별거 아니라는 듯 되묻는 내 반응에 윤 비서님은 퍽 놀란 눈치였다. 싱크대 안을 물로 한 번 쓸어 청소한 그는 물을 잠그면서 마저 대답을 이었다.

친절하게도 자세한 설명을 해준 윤 비서님의 말을 대충 정리하자면 차 그룹이 소유한 계열사만 수백 개에 달하고, 국내외를 통틀어 그들이 손을 대지 않은 산업이 없을 정도니 사업의 규모를 쉽게 가늠할 수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언젠가 차 그룹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모란에서 일하는 애들 사이에서 기피 대상 1호였던 이사급 고객 새끼가 한 명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안 보인다 싶더니 차 그룹에 잘못 보여 결국 파산 신청을 했고, 끝끝내 자살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워낙 죽일 듯 애를 패는 것으로 유명한 새끼였고 맞은 애들은 죄다 일주일씩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로 인간말종이었던지라 다들 고소해했었는데, 그게 차도헌 덕분이었다니.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귀신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느닷없이 등 뒤에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도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있던 윤 비서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장갑을 벗어두곤 마치 왕을 보좌하듯 차도헌의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쪽 뒷담 까면서.”

농담 삼아 툭 던진 말에 윤 비서님의 얼굴이 금방 사색이 됐다. 차도헌은 내 말에 코웃음을 치며 들고 온 커다란 종이봉투를 다이닝 바 위에 내려놓았다.

“윤 비서는 이것 좀 정리해 넣어주시고.”

“네, 이사님.”

차도헌의 지시대로 윤 비서님은 종이봉투 안에 있는 식료품을 꺼내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저 사람도 분명 어딜 가나 인정받는 인재일 텐데 나 때문에 여기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있으니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넌 나 좀 따라와.”

윤 비서님을 도와 냉장고 정리라도 할 참이었는데 차도헌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나를 불렀다. 또다시 재수 없는 제스처로 나를 개 부르듯 불렀겠다. 거실 소파로 걸어가는 차도헌의 뒤통수에 몰래 중지 손가락을 반듯이 들어 올렸다.

“빨리 앉아. 나 바빠.”

차도헌은 다리를 꼬아 앉은 채로 재촉했다. 그러곤 내가 소파에 채 앉기도 전에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그 옆에 펜 하나를 툭 던져놓았다.

“읽어 봐. 계약서니까.”

“계약서?”

“너나 나나 확실한 게 좋지 않겠어?”

차도헌의 말마따나 이런 일은 확실하게 정해두는 게 나았다. 아무리 내가 을의 입장이 되어 지장을 찍게 될지라도 ‘안 바쁘면 매일 밤 8시에 찾아오겠다’는 식의 애매한 조건을 이행해야 하는 경우에는 특히나 계약서가 필요할 터였다.

모란에서 첫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을 땐 그 내용을 읽어볼 생각도 않곤 엄지에 인주부터 발랐는데, 이번엔 왠지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큰 기업을 거느리는 차도헌이 작성한 계약서라면 분명 나 같은 오메가 한 명쯤은 평생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는 내용 혹은 자신이 갚아준 빚을 도로 물어내라든지 하는 숨겨진 독소 조항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어려운 문장으로 빼곡히 점철된 이 종이 쪼가리를 읽어봤자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을 테지만, 읽지도 않고 지장을 찍을 수 있는 건 내겐 오직 마담뿐이었다.

엄청나게 두툼할 줄 알았으나 차도헌이 내민 계약서는 생각보다 얄팍한 축에 속했다. 정갈하게 묶인 종이를 집어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렸다.

[계약서]

차도헌(이하 “갑”이라 한다)과 도해영(이하 “을”이라 한다)은 아래와 같이 계약(이하 “본 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한다.

제1조

① 본 계약의 기한은 계약이 체결되는 날로부터 60일에 한한다.

② ①항에서 명시한 기한 외, 갑과 을은 합의하여 계약 기간을 늘릴 수 있다.

제2조

① 본 계약 기간 동안 갑은 을의 생계를 책임질 의무를 진다.

② 사전 합의된 내용에 따라 을은 갑에게 서비스(본 계약에서 ‘페로몬 공유’를 의미한다)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

③ 갑과 을은 본 계약 기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내·외부에 유출하지 않는다.

“어렵게도 써 놨네.”

관자놀이를 꾹 짚으며 서류를 테이블 위로 도로 던졌다. 어쨌든 이 계약서가 말하는 내용은 차도헌이 어제 내게 설명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쪽은 나한테 두 달간 숙식 제공, 나는 그쪽이 원할 때마다 페로몬 공유, 그리고 모든 일은 비밀에 부쳐라. 맞지?”

“그런 셈이지.”

차도헌은 고개를 끄덕이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펜을 쥐었다. 계약서의 가장 마지막 장, 자신의 이름이 적힌 부근에 수려한 손놀림으로 서명을 마친 차도헌은 곧 내 쪽으로 펜을 건넸다.

받아 들 생각도 없이 물끄러미 펜을 쳐다보고만 있자 차도헌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날 노려보았다.

“난 지장 찍어.”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건 모란에서 일하기 전부터 내게 생긴 습관 비슷한 거였다. 그 시작은 어느 조직에 붙들려가 신체 포기 각서에 내 피로 지장을 찍었던 게 시초지만.

물론 대충 이름 석 자 적어도 되지만 차도헌을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인주 없어?”

손바닥을 턱 내밀며 인주를 달라고 요구하자 차도헌은 헛웃음을 뱉었다.

“까다롭네.”

“그쪽 말마따나 중요한 계약서니까. 빨리 인주 가져와.”

내 성화에 차도헌은 윤 비서님을 시켜 인주를 가져오게 했다. 재빠르게 인주를 대령한 윤 비서님 덕분에 새것과 같은 인주에 엄지를 꾹 눌러 묻히고 계약서 위에 예쁘게 지문을 내리찍었다.

정갈한 차도헌의 서명 아래로 꽉 눌려 찍힌 시뻘건 내 엄지가 기괴해 보일 정도였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계약을 마친 종이를 집어 든 차도헌은 소파에서 곧장 일어났다. 부엌에서 식료품 정리를 끝내고 대기 중인 윤 비서님에게 손짓해 차를 대기시킨 차도헌은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며 내게 명령조로 말했다.

“도망 같은 허튼 생각은 말고 조용히 여기 있는 게 좋을 거야.”

“왜? 차라리 묶어 두지.”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내가 심히 성질을 긁었는지 차도헌은 형형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았다. 분노가 스민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일말의 성취감이 들었다.

“잘 가, 이사님―”

손바닥을 팔랑이며 인사를 하자 차도헌의 얼굴이 다시금 파삭 구겨졌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반응이 올라오는 게, 너무 재밌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싱글싱글 웃는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던 차도헌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다 우뚝 멈춰 섰다.

“너, 핸드폰 줘 봐.”

내 얼굴 앞으로 차도헌의 손바닥이 쑥 내밀어졌다. 이번에 얼굴이 구겨진 건 내 쪽이었다.

“아무리 나한테서 뜯어갈 게 없어도 그렇지, 핸드폰을 뜯어가냐?”

“그딴 거 내가 뜯어가서 뭐 해? 잔말 말고 가져와.”

재수 옴 붙은 얼굴을 노려보다 등을 홱 돌려 바닥에 던져둔 짐 가방을 뒤졌다. 손에 걸리는 옷가지를 헤집어가며 겨우 짐 가방 구석에서 꺼낸 핸드폰을 차도헌의 얼굴 앞에 들이밀자 돌아오는 반응은 비웃음과 폭소 그 사이의 것이었다.

“고대 유물도 아니고….”

그 반응을 보고 있자니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업소에서 일을 시작하고 첫 월급을 받았던 날, 은수랑 같이 대리점에 가서 산 핸드폰이었다. 가장 저렴하면서도 튼튼한 핸드폰을 원한다는 말에 점원은 진열대 구석에 놓인 뭉툭한 디자인의 아날로그식 핸드폰 두 개를 꺼내 주었었다.

사은품으로 받은 액정닦이용 핸드폰 고리를 나란히 끼운 채로 달랑달랑 흔들어대며 업소로 돌아오면서 은수는 망할 빚을 다 갚으면 남들이 다 들고 다니는 인터넷도 되고 터치도 되는 최신식 핸드폰으로 바꿀 거라며 으름장을 놨었다.

“내일 새거 개통해서 윤 비서 통해서 보낼 거니까 받아.”

“필요 없어.”

“내가 불편해.”

“전화 문자 멀쩡히 잘 되거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핸드폰을 그대로 손바닥 안에 움켜쥐고 바지 주머니 안에 쑥 넣었다. 차도헌은 갑작스럽게 돌변한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

차도헌은 대답도 없이 노려만 보고 있는 내게서 그대로 등을 돌려 오피스텔을 떠났다. 뒤이어 굳게 닫힌 문의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현관을 울렸다.

“재수 없는 새끼, 돈이면 다 되는 개 같은 새끼….”

분명 화를 내야 하는데 내뱉는 목소리는 울음에 잠긴 채였다. 답답하고 분한 마음은 심장에 무거운 바위를 얹어놓은 것처럼 통증을 일게 했다. 현관 천장에 붙은 센서 등은 이미 꺼져버렸고, 주머니에 넣어둔 구식 핸드폰은 짤막한 비프음을 내고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현관에 손톱만 한 핸드폰 액정이 옅은 불빛을 냈다. 배터리 모양의 그림이 수차례 깜박이던 액정은 그렇게 몇 초간 점멸을 반복하다 이내 꺼져버렸다.

이미 꺼져버린 걸 살려보겠다는 내 알량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맥없이 가방 속을 헤집는 손끝에는 도저히 전깃줄 비슷한 것도 잡히지가 않았다.

“충전… 해야 되는데….”

죽어버린 은수처럼, 언젠가 죽을 나처럼. 깜깜하게 죽어버린 새까만 액정을 응시하고 있자니 서서히 차오르는 건 그저 뜨거운 눈물뿐이었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작동하지 않는 센서 등, 그 아래에서 나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 멍청하게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거야, 왜….”

뭐가 날 울게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저 먹먹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핸드폰 전원을 수차례 꾹꾹 눌러대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울었다.

아무래도 이런 건 내게 익숙하지 않다. 감정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도, 그런 감정을 달래는 것도 전부 하루살이에겐 사치와 같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진 것처럼 눈물도 금방 멈췄으면 좋겠다. 여전히 두 뺨 위를 푹 적시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으며 꺼진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주저앉은 다리를 천천히 일으켜 세운 곳에는 다시금 환하게 켜진 센서 등이 있었다.

어쨌든 이제 내 앞으로 두 달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그간 앞날을 생각해봤자 당장 내일 치 예약 고객과 쥐꼬리만큼 삭감될 빚을 걱정하던 삶이었는데, 이제는 60일이나 앞선 미래를 떠올릴 수 있게 됐으니 그건 퍽 긍정적인 일이었다.

윤 비서님의 말마따나 차도헌은 재산이 바닥날 일 전혀 없는 엄청난 부자니까 잘 꼬드겨서 용돈 삼아 몇천만 달라고 할까. 공기 맑고 땅 좋은 곳에 은수 묏자리 하나 마련해 주고 그 옆에 내 자리도 좀 해 놓으면 얼마 정도 남으려나.

마담한테 맛있는 밥도 사주고 싶은데. 맨날 고객한테 맞는 지해한테 실비 보험도 들어줄 수 있음 들어주고, 조폭 일로 몸이 성하지 않은 강태산한테는….

눈앞에 문득 강태산의 얼굴이 스쳤다.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강태산, 내가 뱉은 모진 말에 종종 상처를 받았을 강태산.

“…나는 네가 원하는 그런 거 못 해줘.”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낯선 속닥임이 새어 나갔다.

“너라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거야.”

진작 해줬어야 할 말이었는데, 이젠 해주지 못할 말이 됐다. 구구절절 붙는 변명조차도 결국 강태산에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차츰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아려왔다.

꺼진 센서 등 아래로 다시금 몸이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열에 들뜬 뺨을 서늘하게 식혀주는 동안, 내 의식은 느릿하게 저 아래로 침식하기 시작했다.

차도헌과 약속한 두 달이 지나면 나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바보같이 나를 감내하는 강태산처럼, 퍽 먼 앞날들을 꿈꾸며 살 수 있게 될까.

우리 인생에 있지도 않는 것을 자꾸만 움켜잡으려 하는 강태산을 바보 같다고 여겼던 나도 그때가 되면 강태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까.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채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잠기운이라기엔 뭉툭한 것들이 내 몸을 단단히 옭아맸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의식을 잃듯 깊은 잠 속으로 파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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