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낙인
“으음…….”
서윤은 잠에서 깨며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갈증까지. 괴로워하며 그는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정이었다.
여기가 어딘가 싶다.
잠시 기억을 뒤지다가 이곳이 은서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관에서 은서가 사용하는 방.
천장이 낯선 이유는 이곳에서 은서의 몸을 탐하기만 했지 정작 자고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이부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던 적은 없다.
저 천장을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 깨어났다.
‘지난밤에…….’
지난밤에 은서를 찾아와서 술만 마셨던 것을 기억해냈다.
은립이 죽은 지 49일째라 어제는 술만 마셨다.
그러다가 잠이 든 것이리라.
가슴 위로 이불이 덮여 있다.
은서가 덮어준 것일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곁에 잠들어 있는 은서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옷도 입지 않고 이불을 가슴까지만 덮은 채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낙인…….’
그녀에게 찍힌 창녀의 낙인을 서윤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낙인이 있는 이상 그녀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등의 낙인을 만졌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등을 만져도 그녀는 깨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돌아누워 그녀의 낙인을 바라보며 손가락의 끝으로 그것을 어루만졌다.
수중에 남은 금은 이제 네 관 정도다.
나머지 금과 은은 전부 아우를 줘서 보냈다.
네 관의 금.
앞으로 은서를 네 번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처음부터 몸값으로 금 한 관을 받은 여주인은 절대로 은서의 몸값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네 번.
열두 번의 날.
그 날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내가 그녀를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복수를 하려면 빨리할 것이지…….’
서윤이 한숨을 삼켰다.
복수를 어찌 이리 더디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복수가 더딘 것이 한편으로는 좋다.
복수를 끝내면 그녀가 생의 의미를 잃고 자결이라도 할까 두렵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녀를 살릴 수 있을까.
복수를 끝내고도 그녀가 살아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창관에서 그녀를 자유롭게 내보내고, 그리고 그녀가 언제까지라도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몇 가지 방법을 서윤은 알고 있다.
‘보내기 싫지만…… 보내야겠지…….’
짐승이 되고자 했다.
탐욕스러운 짐승이 되어 그녀를 소유하고, 죽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과거 따위 다 묻어버리고 그녀의 증오를 먹이 삼아서 짐승이 되어 무자비하게 그녀를 탐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작심삼일에 불과했다.
짐승이 되고자 했지만, 자신은 짐승도 되지 못했고, 미친 사내가 되려고 했지만 결국은 미치지도 못했다.
이것이 자신의 한계다.
등의 낙인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던 서윤은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두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에 제 얼굴을 묻었다.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정자 위에서 혼인하기로 약속하고 서로를 끌어안던 그때로.
하지만 몸에 새겨진 낙인이 사라지지 않듯, 마음에 새겨진 낙인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안다.
도려내지 않는 이상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의 낙인은 살점을 도려내야 사라지고, 마음의 낙인은 마음을 도려내야 사라진다.
살점은 잘라낼 수 있지만 마음은 어찌 잘라낼까.
그리고 몸의 낙인은 사라져도 마음의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행복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사랑하오…….”
그녀를 끌어안고 서윤이 중얼거렸다.
“줄 것이 마음밖에 없어서 미안하오…….”
하지만 이 마음을 그녀는 받지 않겠지.
줄 것은 마음뿐이지만 그녀가 받지 않는 마음 따위는 갈 곳이 없어 버려질 뿐이다.
마음만이면 족하다던 그녀는 이제 없다.
자신이 죽였다, 그녀를.
마음이면 족하다고 행복하게 웃던 그녀를 제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복수심에 가득 차 시퍼런 독기를 품은 그녀만이 남았다.
모든 것은 자신의 죄다.
“그대를…… 사랑하오…….”
다시는 이 고백을 못 하겠지.
서윤은 눈을 감았다.
***
“서윤 님.”
서윤이 창관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은서가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돌아섰다.
그녀가 방을 나와 출입문까지 배웅을 나온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서윤 님. 행복하십니까?”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그녀를 향해 서윤이 조용히 웃었다.
“그렇소. 그대는, 행복하오?”
“네, 행복합니다.”
그 주고받는 말 안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오직 서로만이 알 뿐이다.
“저녁에 오겠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문을 나서는 서윤을 향해 은서가 곱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든 은서의 눈매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수낭이었다.
제가 직접 수를 놓아 만든 작은 주머니.
아마 저 사내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리라.
지금껏 몸에 지니고 다니다 떨어뜨린 것이 분명하다.
저 사내는 이것을 떨어뜨린 것을 알고 있을까?
“…….”
손에 쥔 수낭을 들고 은서가 망설였다.
이것을 어찌해야 좋을까.
버릴까? 태워버릴까?
가만히 수낭을 보고 있자니 이것을 만들 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그때는 가슴이 얼마나 설렜던가.
“나는 그가 좋다. 그가 내 매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는 어떠냐, 은서야?”
오라비는 저 사내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저 사내의 손에 죽어가며 오라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오라비라면, 아마…….
“바보…… 바보 같은 오라버니…….”
아마, 웃었을 것이다.
오라비라면 복수 따위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오라비는 그런 사내였으니 분명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이런 자신을 보면 오라비는 틀림없이 꾸짖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죽었으니 꾸짖지도 못한다.
“누가…… 죽으라나…….”
수낭을 꾹 쥐며 은서가 원망스레 말했다.
죽어버린 오라비에게 원망을 던지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
창관을 나선 서윤이 향한 곳은 왕궁이었다.
오랜만에 들어서는 왕궁이 서윤에게 낯설었다.
아니, 원래 왕궁은 낯선 곳이었다.
넓은 뜰을 지나 왕의 침전 앞에 이를 때 서윤은 발을 멈췄다.
이곳에서 은립이 죽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그때 그 날, 이곳에서 은립의 목을 자신이 베었다.
꼭 그 날 그 자리에 서 있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서윤은 잠시 후 그 상념을 떨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왕을 알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새 왕에게 있어서 서윤은 공신이었기 때문에 왕은 서윤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벼슬을 아직도 사양하고 있는 것이냐?”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서윤을 향해 왕이 자상하게 물었다.
이 새 왕은 성품이 어질어서 반정 이후에 보통은 따르기 마련인 숙청을 행하지 않았다.
오 장군이 숙청을 주장했지만 왕이 그것을 막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오 장군은 마치 전날의 채 승상처럼 굴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을 지혜롭게 막는 것은 왕이었다.
아마 선왕처럼 어리석었다면 채 승상에게 선왕이 놀아났듯 새 왕도 오 장군에게 놀아났을 것이다.
“청이 있사옵니다.”
서윤이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오 장군에게는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왕을 찾아왔다.
“청이 무엇이냐? 그대가 말하는 것이라면 내가 전부 들어주마.”
“전하의 어명으로 창관에 보내진 전 왕궁 무사 유은립의 누이동생 유은서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벼슬도 마다하더니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이렇게 간청하느냐는 비웃음을 살 수도 있다.
어림도 없다는 냉정한 대답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대답이 떨어져도 허락을 받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물러가지 않고 빌고 또 빌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제 목숨을 내어놓더라도 그녀의 신분을 복권시키고 싶다.
몸에 새겨진 창녀의 낙인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아침에 깨어 제 곁에 잠든 그녀를 보며 결심이 섰다.
짐승처럼 그녀를 취하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간절하고, 그녀를 세상 어디에도 보내고 싶지 않은 소유욕도 여전하지만, 그 산중에서 제게 업혀 가슴을 두근거리던 그녀를 떠올리면 이제는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창관에서 풀어준다고 해서 그녀가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복수를 마치기 전에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라지면 된다.
언젠가 나타날 것처럼 자신이 사라지면 그녀는 죽지도 못 하고 살아갈 것이다.
죽을 생각이 들다가도 자신을 죽이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죽지 않고 기어이 살아갈 것이다.
그녀가 품은 독기가 그러하니, 분명 그럴 것이다.
이게 최선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처음부터, 그녀를 놓치기 싫다는 욕심에 짐승처럼 그녀를 탐할 것이 아니라,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마지막 속죄가 될 수 있을까.
죽은 은립에 대한, 그리고 산 은서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을까.
“창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네?”
서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왕 앞에서 고개를 드는 것이 얼마나 무엄한 일인지 알지만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어명으로 창관에 보냈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모르겠구나. 내가 그런 어명을 내렸다는 것이냐?”
“왕명으로 이번 반정에 걸림돌이 된 이들의 일가 중 사내는 죽이고 여인들은 창관으로 보내시라 하신 것이……?”
서윤의 머릿속이 어질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왜 왕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이러는 것일까?
왕명이 아니었다는 것일까?
그러면 누가 감히 왕명을 빙자해서…….
‘오 장군!’
서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찾아가서 그녀를 도와 달라 했지만 왕명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거절하던 오 장군.
오 장군이 왕명을 빙자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가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이상하군. 내 오 장군을 불러서 물어볼 것이니 그대는 돌아가서 어명을 기다리고 있거라.”
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의 내관에게 ‘오 장군을 불러오거라’고 이르는 소리를 들으며 서윤이 왕의 침전 밖으로 물러났다.
밖으로 나와서도 서윤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오 장군.
자신을 이 일에 끌어들인 자다.
반정이 성공하고 몇 번이나 벼슬을 권했었다.
그런 그가 사사로운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왜 은서를 굳이 창관으로 보냈던 것일까.
비틀거리며 서윤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이제라도 왕에게 청을 올려놓았으니 희망이 보인다.
왕이 허락만 하면 은서는 창관에서 풀려날 수 있다.
“은서…….”
그 이름을 부르며 서윤이 비틀비틀 걸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녀가 보고 싶었다.
발이 저절로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제멋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
창관에 거의 이르렀을 즈음 서윤은 공기가 술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창관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길했다.
“서윤 님, 행복하십니까?”
오늘 아침에 문을 나설 때 그녀가 묻던 목소리가, 그 표정이 떠올라서 더 불길해졌다.
“잠시 지나가겠소.”
서윤이 사람들을 헤치고 창관 안으로 들어섰다.
창관의 창녀들이 전부 복도에 나와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언제나 여유롭던 여주인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가득 번져 있었다.
“비키시오!”
서윤의 불안이 커졌다.
“비키란 말이오!”
겁먹고 떨고 있는 창녀들을 제치며 서윤이 복도를 미친 사람처럼 뛰어갔다.
그리고 위층의 은서의 방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짙은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설마…… 아니야…….”
아니어야 했다.
지금 자신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아니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윤이 문을 열었다.
문이 드르륵 열리자 피비린내는 더 짙게 코를 찔렀다.
방안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벽에도, 이부자리에도, 그리고 천장에도 핏물이 묻어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는지 방 안은 온통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진홍색 피바다 위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손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은서?”
방안으로 들어선 서윤이 그녀에게로 다가서려다 말고 멈췄다.
옆에 시체가 구르고 있었다.
방 안의 피는 그녀의 것이 아니라 그 시체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시체는 사내였고 서윤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 장군…….”
오 장군. 그 늙은 사내였다.
“왜 오 장군이…….”
왜 오 장군이 여기에서 죽어있는 걸까.
누가 오 장군의 목을 벤 것일까.
아니, 무슨 이유로 오 장군을 죽인 것일까.
“은서, 이게 대체…….”
“원수를 갚았을 따름입니다.”
핏물 위에 앉아 은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수라니…….”
“내 오라비를 죽게 만든 이가 누구인가 했더니 이 사내였습니다.”
“그게 무슨……?”
서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 장군이 은립을 죽게 만들었다고?
아니다. 은립은 제 손으로 죽였다.
오 장군이 아니다.
“원래 그 날, 오라버니는 왕궁에서 일찍 돌아오신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찾아 물어보니 그 날, 그 무서운 일이 있기 전 한 사내가 내 오라버니께 대신 숙직을 서 달라 부탁하였다 들었습니다. 제 아내가 해산이 임박하니 숙직 한 번 대신 서 달라는 말에 바보 같은 오라버니가 승낙을 했고, 원래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오라버니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게 오 장군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 사내를 꾀어 오라버니를 반드시 숙직 서게 만든 이가 오 장군, 이 사내였으니까요.”
은서의 말에 서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날 그곳에 은립이 있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를 반드시 죽이기 위해 일부러 그곳에 있게 만들었다는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 장군이.
“그 사내를 찾아서 물어봤습니다. 화대로 받은 돈을 전부 주고 물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그랬더니 전부 말해주더군요. 금이라는 것이 그렇게 위력이 강하더이다. 몇 년 전에 반정이 일어났을 때 내 오라버니는 빙부상을 당해 왕궁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비명에 죽을 때 그 자리에서 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라버니는 그것을 늘 한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 장군은 그가 섬기는 왕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없던 제 오라버니를 탓하였습니다. 제 오라버니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곳을 지켰더라면 왕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리 원망하며 내 오라버니를 기어이 죽을 자리로 밀어 넣었습니다. 내 원수가 거기 있었습니다. 왕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원수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 장군 이자를 이곳으로 불러 내가 그 목을 칼로 베었습니다.”
은서의 얼굴이 차갑게 미소지었다.
“오라버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다 알고 있다, 오지 않으면 왕에게 투서를 할 것이다 협박하여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자의 목을 찔렀습니다. 이제는 늙어 허리에 찬 칼을 드는 법도 모르는 늙은 사내의 목을 비녀로 찌르고…… 그 허리의 칼을 빼 들어 오라버니에게서 배운 칼질로 저 목을 베었습니다.”
은서의 미소가 서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이 한 번으로 당신에게 하는 복수도 이루었습니다.”
은서가 고개를 들어 서윤을 바라봤다.
“반정 공신을 죽였으니 이제 저도 죽을 겁니다. 창녀가 아니라, 왕명으로 제 목을 치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이런 저를 구해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라도 저를 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왕의 공신을 죽였으니, 저는 이제 죽습니다.”
그녀의 복수.
그녀가 웃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녀는 복수를 위한 그림을 진즉부터 그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가장 절망적이고 끔찍한 복수를 자신에게 할 수 있는지 그녀는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전부 이용한 복수다, 이것은.
제 눈으로 그녀의 죽음을 보게 만듦으로서, 더는 살 수 없게 만드는 복수다.
“제가 죽으면 제 시체는 태우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보내도 됩니다.”
그녀의 앞에 서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궜다.
서윤의 축 처진 얼굴이 은서의 피 묻은 손에 닿았다.
그 피 묻은 손에 얼굴을 묻은 서윤의 어깨가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은서가 웃었다.
바라던 것은 이것이다.
이 사내의 절망. 이 사내의 괴로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이것이 보고 싶었다.
이 괴로워하는 절망 어린 모습 하나로 이미 복수는 완성되었다.
오 장군에게도, 이 사내에게도.
“은서.”
절망에 몸을 떨던 서윤이 은서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낮게 속삭였다.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그 낮은 속삭임에 은서의 전신에 전율이 일어났다.
“달아납시다.”
서윤이 은서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나와 함께 달아납시다.”
“싫습니다.”
“달아나자니까!”
서윤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달아나서…….”
그 뒷말은 잇지 못했다.
말을 잇는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피투성이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
멀쩡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창관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를 피해 근처의 처마로 피한 사람들이 창관에서 뛰어나오는 남녀를 볼 수 있었다.
사내는 키가 크고 체격이 장대했고 여인은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여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달려 나온 사내는 창관 앞에 매어져 있던 말 위에 여인을 태웠다.
그 말은 오 장군이라는 사내가 타고 온 것이었다.
“죽게 내버려 두세요!”
말에 타지 않으려는 은서를 기어이 말 위에 태운 서윤은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죽게 내버려 둘 줄 알고!”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그녀가 죽는 것은 볼 수가 없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두 사람을 태운 말이 달렸다.
그들이 달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 장군이 살해됐다는 기별을 들은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리고 살인범들이 달아났다는 말에 곧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빗속을 달리는 말굽이 거센 진탕을 일으켰다.
장마도 지났건만 때아니게 쏟아지는 거센 폭우 속을 달리는 말의 갈기도, 고삐를 잡은 사내도, 사내의 앞에 탄 여인도 흠뻑 젖어 엉망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무작정 달아났다.
“이랴!”
산길로 접어드는 기슭을 내달리는 말 위에서 빗물에 젖은 나뭇가지들과 부딪치며 사내가 말의 허리를 걷어찼다.
뒤를 돌아보자 빗속에 쫓아오는 이들이 보였다.
벌써 따라붙은 것이다.
‘여기서 잡히면……!’
“이랴!”
말의 허리를 더 세게 차며 사내가 말을 몰았다.
빗줄기를 가르고 화살이 날아와 말에게 명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꺄아악!”
“꽉 잡으시오!”
고꾸라지는 말 위에서 서윤이 은서를 끌어안고 바닥에 뒹굴었다.
퍼억!
진흙탕 속으로 구른 서윤이 품에 안은 은서를 놓지 않았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나무에 부딪쳐 겨우 구르는 것은 멈췄으나 서윤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어깨가 부러진 것처럼 통증이 번졌다.
“흐윽…….”
고개를 든 서윤이 말에서 뛰어내리는 수십 명의 사내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품에 안고 있던 은서를 놓으며 떠밀었다.
“가시오.”
서윤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제발, 가시오.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고 제발 가시오. 가서 살아. 내 몫까지.”
“내가 언제 살려달라 하였습니까! 죽게 내버려 두시오!”
“그대가 죽으면 나는 어찌 살라고!”
서윤이 소리를 질렀다.
“복수 따위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죽으면 그대 오라비가 참 잘 죽었다, 참 잘했다 말해줄 것 같은가! 복수 따위가 뭐라고!”
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즉 알았어야 했다.
복수 따위가 뭐라고.
진즉에 복수 따위 내려놓고 살았어야 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의 길을, 산 자는 산 자의 길을.
복수는 잊고 죽은 이들 대신 더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이것은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다.
복수 따위에 마음을 빼앗겨 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했던 어리석음의 말로다.
“복수는 잊고…… 내 죽음으로 복수는 다 잊고 이제 그대는 사시오. 그대 오라비의 몫까지, 그대 새언니의 몫까지. 태어나지 못한 그대의 조카와 내 누이와 내 양친의 몫까지 그대는 사시오. 몇 배나 더 행복하게 사시오.”
서윤이 젖은 두 손으로 은서의 뺨을 쥐었다.
“제발…… 살아주오. 내 마지막 소원이요. 제발…… 제발 죽지 말고 살아만 주오…….”
그런 사내의 손에 뺨을 맡긴 은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 장군을 죽였다.
그리고 저도 죽으려고 했다.
그러면 이 사내에게도 복수가 될 것이라 했다.
이렇게 살아달라 애원하는 사내에게 자신의 죽음보다 더 큰 복수는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게 뭘까.
이 마음은 무엇일까.
“흑…….”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왜 여기서 마음이 무너지고 만 것일까.
“살아준다고, 약속하시오.”
“흐윽…….”
서윤의 말에도 은서는 그저 울었다.
빗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그녀의 뺨을 쥐고 서윤이 입술을 겹쳤다.
이것이 마지막인 듯 사내가 그녀의 입술을 정신없이 훔쳤다.
숨결을 탐하고 입술을 물었다.
그런 사내의 입맞춤을 은서가 거부하지 않았다.
맞물리는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온 서윤의 혀를 은서가 다정하게 받아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받아줬다.
“이제 가시오.”
입술을 떼어내며 은서를 떠민 서윤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쥐고 일어섰다.
한쪽 어깨가 부러졌지만 은서가 도망칠 시간은 벌어야 했다.
“같이……!”
은서의 손이 서윤의 팔을 잡은 것은 그때였다.
“같이 가시어요!”
“나는……!”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안 가요. 혼자서는 안 가요!”
은서가 서윤의 팔에 매달렸다.
“나 혼자는 안 살아요. 혼자면 차라리 죽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살기를 바라면 같이 가시어요. 같이 가셔서 제가 끝까지 사는 것을 지켜봐 주시어요.”
애원하는 은서를 바라보던 서윤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버렸다.
그리고 은서의 손을 잡고 빗속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추격자들이 따라붙고 있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 속을 뛰었다.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두 사람이 비탈길로 미끄러졌다.
미끄러운 진흙에 미끄러져 데굴데굴 구르는 순간에도 서윤이 은서를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이 어두운 비탈길로 굴러떨어졌다.
***
은서가 정신을 차린 것은 몸을 때리는 빗줄기가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몸이 축 늘어지고 너무 추웠다.
추운 탓에 의식이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누군가 흔들었다.
“일어나시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은서가 눈을 떴다.
눈앞에 사내가 있었다.
“으응…….”
신음을 흘리자 사내가 웃었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울고 또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업고 걷기 시작했다.
사내의 몸도 엉망이었다.
부러지고 찢어지고 엉망인 몸으로 그녀를 업고 사내가 위태로운 걸음을 옮겼다.
마치 처음 산중에서 만났을 때처럼 사내가 그녀를 업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빗물에 젖어 자꾸만 미끄러지는 산비탈을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발이 헛돌아 혼자 몸으로도 험한 길이었으나 상처 입은 그녀를 등에 업고 내려가는 사내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제법 잦아들긴 했지만 여전히 쏟아지는 빗방울과 울창하게 우거진 수풀이 시야를 가려 그 사이를 헤치고 내려가는 한 발 한 발이 무겁게 옮겨졌다.
사내의 얼굴 위로 흙물이 튀어 들어오고 있었다.
***
두 사람이 빈 오두막을 발견한 것은 산에서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고 또 내려가고 올라갔을 때였다.
그만큼 산을 오르락내리락하자 더는 쫓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오두막에서 두 사람이 젖은 몸을 말렸다.
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불도 없고 무엇 하나 없는 곳에서 젖은 옷을 널어놓고 웅크리고 있자니 추위가 엄습했다.
여름이지만 비에 젖고 살이 찢어졌으니 당연히 춥다.
“많이 추우시오?”
그녀의 뒤에서 서윤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살결이 덮어오자 그제야 온기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이러면 좀 괜찮아질 것이요.”
사내는 그녀를 끌어안고 숨결을 그녀의 귓가에 풍겼다.
사내의 말대로 그 품 안은 따뜻했다.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그녀의 흐느낌을 알아차린 사내가 ‘미안하오’를 반복했다.
뭐가 그리 미안한지 계속 미안하다고만 했다.
미움이, 원망이, 증오가 저 거센 빗줄기에 다 씻겨 내려간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원망할 기운도 남지 않은 것일까.
더는 복수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복수 대신, 함께 달아나자며 소리를 지르던 사내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았다.
제발 살아달라는 애원만 가슴에 새겨졌다.
같이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그래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사내와 이제 같이 살아도, 더는 이 사내를 미워하지 않아도 다들 용서해주는 것일까.
혹시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
아아, 만약 죽은 이들이 허락한다면 이 아름다운 사내와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 사내와 살고 싶다.
이 사내와 살아가고 싶다.
다 잊고.
모든 것을 다 잊고 이 사내와 함께 조용히.
“삽시다…….”
사내의 속삭임에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줄 수 있는 것은 마음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죽은 자들 대신 같이, 열심히 삽시다.”
이번에도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는 이미 다 했다.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충분한 복수가 되었다면 이제는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싶다.
“외가에…… 가요…….”
아직 돌아갈 곳이 한 곳 남았다.
외가.
산을 넘어가면 있는 곳.
처음 그곳에 가려다 이 사내를 만나 도움을 받았던 곳.
거기로 가자.
가서 이 사내와 함께 살아가자.
누구도 자신들을 간섭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다 잊고, 죽은 자들의 몫까지 살아가자.
닫는 글 : 이어져가는 것
“아야야!”
머리를 내리친 목검에 아이가 엄살 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아야야?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냐?”
아이의 머리를 목검으로 내리친 사내가 다시 한번 목검을 쳐들자 아이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앗?”
뒤로 물러나던 소년의 등 뒤로 누군가 부딪친다.
돌아본 소년의 눈에 눈가에 작게 주름이 잡힌 여인이 들어왔다.
“어머니!”
“이 녀석, 아버지께 제대로 배워야지 한눈을 팔면 되니?”
웃는 얼굴 어디에도 엄한 구석 하나 없는 이 여인은 아이의 어머니인 유은서다.
“되었소. 부인, 아무래도 우리 은립이는 당최 배울 생각이 없소.”
세상에서 아들 가르치는 것이 제일 힘들다며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며 사내가 목검을 내던졌다.
이 사내는 작은 무관을 차려놓고 동네의 어린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살고 있다.
이 사내 허서윤과 그의 아내 유은서가 이 동네로 온 것은 12년 전이었다.
12년 전, 나라에 큰 변고가 있었을 때 변고를 피해서 이런 시골 동네로 내려왔다는 이 내외는 금실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자식은 이제 열 살 된 어린 아들이 있는데 얼마나 엄살이 심한지 무관의 아이들은 잘도 가르치는 사내가 제 자식만큼은 가르치기 힘들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잘 가르쳐보세요. 제 외숙부가 나라 제일 검객이었는데 그 피가 어디 가겠어요?”
“할 마음이 없다니까요. 은립이는 정말 할 마음이 없어요. 자세도 안 되어있고.”
“그러지 말아야지. 아버지가 저리 가르쳐주시는데 너도 열심히 배워야지.”
“하지만 맞으면 아프고, 또 팔도 아프고…….”
그 말까지 한 아이가 헤헷, 웃으며 쪼르르 달아난다.
“어딜 가는 거니?”
“친구들과 놀다 오려구요!”
어머니가 온 김에 달아나자 싶어 꽁지가 빠지게 내빼는 아이를 바라보던 은서가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쟤가 누굴 닮아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당신 닮았나 봐요.”
“나는 안 그랬소.”
서윤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은서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함께 한 시간이 십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손을 잡을 때면 가슴이 설레는 이유를 서윤은 알 수가 없다.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고, 손을 잡으면 가슴이 설레고, 여전히 곱고, 여전히 사랑스러우니 이것도 병이다.
그 날, 십이 년 전 그 날.
산길을 넘고 넘어 은서의 외가에 닿았다.
그곳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한 다음 노잣돈을 얻어 다시 길을 떠났다.
목적한 곳을 정하지 않고 떠돌았다.
강의 물결이 아름다운 숲을 둘이서 걷고, 온화한 나뭇잎 사이의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길가에 무리 지어 핀 꽃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아름다운 보름의 밤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달맞이를 했었다.
먼저 죽은 이들이 하지 못한 것들을 하며 그들에게 잔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달이 아름다운 밤이면 옛이야기를 하듯 그리운 이들을 말하고, 그리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마음을 확인하고, 또 앞으로 살아갈 날을 꿈꾼다.
구름 하나 없고 빛나는 둥근 보름달과 작은 빛을 발하는 별들이 수놓은 듯 빛나는 밤이었다.
그 아름다운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누운 서윤의 곁에서 은서는 수낭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에게 줄 수낭을 만드는 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의 무릎 위에 냉큼 머리를 올렸다.
“왜요?”
“귀가 가려워서.”
귀가 가렵다는 핑계로 무릎에 머리를 뉘자 은서가 반짇고리함에서 귀이개를 꺼냈다.
그리고 무릎을 벤 사내의 귀를 살짝 긁자 사내가 어깨를 움츠린다.
“간지러워요?”
“조금.”
“엄살은. 은립이가 당신 닮았어요.”
“설마요.”
내려다보이는 서윤의 옆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떠올라 은서가 덩달아 웃었다.
이 나른한 행복은 지금도 여전히 꿈만 같다.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짓말처럼 이렇게 행복하다.
살금살금 귀를 긁어주니 점점 무릎이 무거워졌다.
어느새 서윤의 눈이 감겨 있고 조용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든 얼굴은 더없이 순수했다.
처음부터 그런 사내였다.
순수해서 쉽게 분노했고, 순수해서 또 쉽게 절망했다.
그리고 순수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달빛 아래서 행복을 밤바람에 실어 보낼 수가 있게 되었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달빛이 머리 위에서 우르르 부서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설레는 달빛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