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악연 (4/6)

3. 악연

유은립으로 말하자면 ‘당대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검객이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검을 잡은 지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검 선생을 이겼다는 것은 그저 소문이 아닌 진실이다.

가문도 좋아서 그의 양친은 아들이 문관이 되길 원했지만 무인으로서의 재능이 괴물처럼 대단하여 어찌할 도리도 없이 아들이 무관의 길을 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단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양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아들이 무과에 급제하고 나라 안에서 이름을 날리는 무사가 되는 것까지 보고 병환으로 숨을 거두었으니 아주 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은립은 열일곱 살에 무과에 급제해서 일찌감치 벼슬길에 접어들어 전쟁에서 공도 세웠고, 전쟁이 없을 때에는 무관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맡았으며 지금은 왕의 신변을 지척에서 호위하는 일과 무관 훈련의 일을 병행하고 있다.

몸이 열 개라도 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면서도 무관이 천직이라 그는 다른 욕심은 없었다. 굳이 욕심이 있다면 그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무인들을 만나서 교류를 하고 싶다는 그런 욕심 정도가 가진 것의 전부다.

양친은 일찍 돌아가셨고 가족으로는 아내와 누이동생이 있다.

자식은 아직 얻지 못했고 누이동생은 이제 막 혼기가 찼다.

양친이 돌아가셨지만 가문은 몇 대를 내려오는 명문가로, 가문에 걸 맞는 집안의 사내를 찾아 누이동생의 혼례만 올려주면 어깨의 짐을 한시름 덜 수 있다.

「오늘은 빨리 집으로 돌아오세요.」

훈련관에서 일을 보고 있자니 집에서 기별이 와 그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두르는 중이다.

보통은 그런 기별을 보내는 적이 없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

‘누가 다치기라도 한 건가?’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누이와 아내뿐이다.

만약 누가 다쳤다면 누이일까 아내일까.

‘몇 달 말미를 얻을까…….’

며칠 전에 집을 나설 때 아내가 ‘계속 이렇게 바쁘셔요?’라고 넌지시 물어왔었다.

외롭기도 할 것이다.

지아비라고 매일 일이 바빠 밖으로만 도니 아내도 내색은 못 하지만 내심 서운했을 것이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도 자신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명색이 지아비라는 자가 밖으로만 도니 아내의 허전한 마음에 아이가 깃들 틈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전부 자기 책임이다.

‘몇 달이라도 일을 쉬면서 집안도 좀 돌보고…… 그 사람과 멀리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고…….’

그래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막 도성 대로를 벗어나 외곽쯤에 이르렀을 때 유은립이 걸음을 멈췄다.

뒤에 뭔가 두고 와서 멈춰 선 것도 아니고, 하지 못한 일이 생각나서 멈춘 것도 아니다.

다만, 제 앞에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볼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유은립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들을 쳐다봤다.

사내들의 손에는 저마다 칼과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사나운 눈빛을 하고 대낮의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무기를 든 자들.

누가 봐도 호의적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다.

“내가 지금 급히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게 뭣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얌전히 비켜달라면 비켜주지 않을 것이고…….”

유은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지금 하필이면 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항시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이런 백주 대낮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검을 차고 다니지는 않는다.

백주 대낮에 허리에 검을 차고 보란 듯이 활보하는 것은 건달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누누이 말해왔던 유은립이다.

그래서 지금은 검이 없다.

“하…….”

은립이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무예의 기본은 주먹이라고 스승은 늘 말해줬지만 검술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은립이 유일하게 약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먹이다.

검술의 반의반도 따라오지 못하는 어설픈 주먹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너는 검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다’라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은 조금 곤란한 상황이다.

검과 도끼를 쥔 사내들을 맨주먹으로 상대한다? 곤란하다, 곤란해.

“이런!”

눈앞을 휘익 가르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검 때문에 은립은 뒤로 몸을 숙이다 말고 넘어졌다.

재빠르게 일어나 주먹을 쥐었다.

어지간한 잡배들 같으면 검이 없어도 충분히 제압했겠지만 이 사내들은 이런 짓이 익숙한 자들처럼 보였다.

실력이 제법이다.

재수가 없으면 당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당해줄 생각은 물론 없다.

“흐억?!”

은립의 발이 비틀거렸다.

얼굴로 날아드는 도끼를 피하려다 옆구리로 곧장 칼날이 들어왔다. 당황해서 피하려다 몸이 균형을 잃은 것이다.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은립의 가슴으로 도끼가 날아들었다.

도끼가 날아드는 순간에도 은립은 ‘집에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혼이 날 텐데.’라고 생각했다.

“으악!”

비명을 지른 것은 은립이 아니다.

비명은 은립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던 사내가 지른 것이다.

도끼를 쥔 채로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은립의 얼굴로 더운 피가 푹 튀었다.

은립의 눈앞에서 피가 푹푹 튀었다.

갑자기 끼어든 모르는 낯선 사내가 은립을 공격하던 사내들을 가랑잎을 베듯 쓰러뜨리고 있었다.

“와…….”

은립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검으로 따지면 나라 안에서 은립이 제일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은립을 도와준 사내는 검 쓰는 실력이 자기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멋지군!”

저런 실력을 가진 이가 어디에 있다가 눈앞에 나타난 것일까.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싸움이 끝나고 도끼를 쥔 이들이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나라 제일의 검객이라는 평을 듣는 주제에 저런 건달들 몇 명을 이기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법도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은립이 사내에게 다가섰다.

“어? 다치셨습니다?”

사내는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싸우다가 다친 것이 틀림없었다.

“급한 대로 이것으로…….”

은립이 제 소매를 찢어 그것으로 사내의 팔의 상처를 싸매줬다.

“의원에게 보여야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묵직했다.

말이 없어 보이는 외모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괜찮다면 내 집이 이 근처인데 내 집으로 가서 상처를 돌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됐…….”

“갑시다!”

사내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은립이 사내의 손을 잡아끌었다.

“됐다는데도…….”

사내가 내키지 않는 듯 말했지만 은립은 사내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었다.

“저기, 돌아서면 곧장 입니다. 멀지도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이니 저녁밥도 드시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보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여서, 은립의 손에 끌려가는 사내가 곤란한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지나는 길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줬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끌려가게 될 줄은 몰랐다.

‘뭐, 상처만 치료하고…….’

저녁밥까지는 부담스럽고 상처만 치료하고 떠나면 된다. 어차피 상처는 어디에서든 치료해야 하긴 하니까 말이다.

*** 

은립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사내 서윤이 발을 멈췄다.

그건 대문을 열어주고 오라비와 손님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은서가 깜짝 놀라 당황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머물렀다.

알고 있는 얼굴이지만 서로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이분은 내 은인이다, 은서야.”

눈치 없는 은립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허허 웃으며 서윤을 소개할 때까지도 은서는 아무런 말을 못 했다.

이 사내가 왜 오라비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는지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서윤의 가슴도 그녀의 가슴처럼 뛰기 시작했다.

꼭 처음 만났던 그 산중에서처럼,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 

“저녁만이라도 드시고 가시오.”

상처를 대충 싸매고 돌아가려던 서윤은 은립이 권하는 말에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 그러시면 저녁만…….”

말은 그리하지만 서윤의 생각은 온통 우연히 다시 만난 은서에게 향해 있었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그날 산사를 떠난 후에도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바로 그녀였다.

산중에서 잠시 만났고, 산사에서 아주 짧게 재회했던 처녀의 얼굴이 며칠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밤잠을 설쳐야만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여인을 마음에 품을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저 포기하자는 생각만 했었다.

지금 자신이 누군가와 연애를 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한밤중에 자려고 누우면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우연히 그녀를 다시 보는 순간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뻐근하게 뛰고 있었다.

“먼저 식사를 하고 계시오. 나는 안 사람도 좀 보고, 다른 일이 조금 있어서 나가봐야겠소.”

같이 저녁상을 받았지만 수저를 들기 직전에 찾아온 사람과 함께 나가며 유은립이 신신당부했다.

그냥은 돌아가지 말고 꼭 저녁밥을 다 먹고 술상까지 받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이다.

“그 다음 날, 산사에 머무시는가 찾아봤더니 떠나시고 아니 계시더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오는 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윤은 애꿎은 벽만 쳐다봤다.

저녁상을 들여온 은서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인연이었는데 존함도 말씀해주시지 않으셔서, 서운했습니다.”

그 말에도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전에는 저를 도와주시고, 오늘은 제 오라버니를 도와주셔서…… 저희가 아주 인연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서윤도 인정한다.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다.

그 산중에서, 그 산사에서, 그리고 지금.

이런 것이 인연이 아니면 뭐가 인연이란 말인가.

“원래 이렇게 말씀이 없으십니까?”

은서의 목소리는 다부졌다.

처녀의 수줍음보다는 외간 사내를 향한 호기심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외간 사내에게 말을 잘 건네시나 봅니다.”

서윤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

서윤의 말에 은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딴에는 반가워서 한 말인데 그게 사내의 눈에 얌전하지 못한 것처럼 비쳤을까 봐 그녀가 입술을 꼭 다물고 새침하게 눈을 내렸다.

그리고 살짝 후회했다.

이 사내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조신하게 기다릴 것을, 하고.

“딴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귀한 댁 아가씨께서 모르는 사내에게 함부로 말을 거시는 것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 흉이 되지 않을까 하여 그런 것이오. 다른 뜻은 없었소.”

새침하게 고개를 숙인 은서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사내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로 은서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오라버니께서 말벗을 해드리라 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미안하오. 그런 말을 해서.”

사실 사과할 일도 아닌데 당황해서 미안하다 말하는 사내를 은서가 살며시 바라봤다.

사내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듬직하게만 느껴졌던 사내가 저런 식으로 얼굴을 붉힐 줄도 아는구나 싶어 은서의 입술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 미안하다 생각하시면, 존함을 말씀해주시어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은서가 얼른 사내의 이름을 물었다.

이런 식이 아니면 절대로 사내의 이름을 알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허…… 서윤이라 하오.”

사내가 머뭇거리며 제 이름을 말했다.

“좋은 이름이십니다. 제 이름은…….”

“알고 있소. 그대 오라비가 부르는 것을 들었소.”

“기억해주셨습니까?”

생긋 웃는 은서의 미소에 서윤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산중에서 한 번 들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것을 들켰다.

잊어버리지도 않고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탓에 사내의 얼굴이 사과처럼 익어갔다. 그를 보며 은서가 작게 ‘제 얼굴도, 제 이름도 잊지 않으신 것을 보니, 제가 그쪽 보기에 예쁘긴 예뻤나 봅니다.’ 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결국 사내는 수저를 들지도 못했다.

밥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기 때문이다.

*** 

“언니, 이것 좀 봐 주시겠어요?”

수낭에 수를 놓던 은서가 곁에서 사내의 상의를 바느질하는 여인을 쳐다봤다.

그 여인은 오라비인 은립의 처다.

귀한 댁에서 시집을 왔지만 손재주가 좋아 은립의 옷은 모두 이 여인이 만들어 입혔다.

집안에 하인들도 많고 침모도 있지만 제 낭군의 입거리는 제 손으로 만들겠다며 버선에서부터 의복까지 전부 이 여인이 손수 만들었다.

오늘도 여전히 의복을 만들고 있는 그녀 곁에서 같이 수낭을 만들고 있던 은서가 제가 수낭에 놓은 수를 보여줬다.

“곱게 잘 놓아졌는데요, 아가씨? 그런데 누구에게 줄 수낭이에요?”

은립의 처가 눈을 곱게 흘겼다.

은립의 처는 얼마 전에 회임을 했다.

은립과 혼인한 지 3년 만에 들어선 아이다.

3년 동안 태기가 없어 여인도 마음의 고민이 많았지만 이제 한시름 덜게 되었다.

“아가씨의 수낭은 아닌 것 같고…….”

수낭에 놓아준 수는 용과 호랑이였다.

여인네의 수낭에 용과 호랑이를 수놓는 경우는 없다.

이건 십중팔구 사내의 수낭이지만, 그렇다고 오라비에게 줄 수낭을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의 것일까요?”

은립의 처가 살며시 웃었다.

마냥 어릴 줄 알았던 은서에게도 이런 수낭을 만들어 건네줄 사내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 것이냐고 묻는 말에 대답을 못 하고 뺨을 붉히는 것을 보며 은립의 처는 확신을 가졌다.

이 아름다운 처녀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가끔 오라버니를 만나러 오시는…….”

작게 은서가 대답했다.

“서윤 님 말씀인가요?”

가끔 은립을 만나러 오는 사내는 최근에 은립이 사귀는 허서윤이라는 사내 외에는 없다.

은립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은립이 무슨 일만 생기면 집으로 불러들이는 오라버니의 새로운 벗이었다.

새로 사귄 벗을 은립이 워낙 좋아해서 자꾸 불러들였지만 정작 그 사내는 낯을 많이 가리는지 이 집에 올 때마다 어색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은립의 처가 기억했다.

무뚝뚝한 것을 빼면 체격이 크고 인물이 좋은 사내였다.

“아가씨.”

은립의 처가 은서를 살며시 불렀다.

“네?”

“응원할게요, 아가씨.”

“…….”

그녀의 말에 은서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고마워요, 언니.”

아직 수를 다 완성하지 못한 수낭을 손에 든 채로 은서가 살며시 웃었다.

아직 오라비인 은립에게도 들키지 않은 마음이다.

하지만 응원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허서윤.

그 사내가 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오라비를 구해준 것을 계기로 그 사내는 사흘에 한 번 정도 이 집 대문을 드나들었다.

물론 그가 혼자 찾아오는 것은 아니고 항상 오라비의 손에 이끌려 왔다.

오라비는 그 사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항상 그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마다 그 술상을 직접 들고 가는 것은 항상 은서였다.

두 사내가 술을 마시는 사이에 끼어 앉아서 잘 알지도 못하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가끔 사내의 얼굴을 훔쳐보는 것이 그녀의 낙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가슴이 설레고 간지러울 정도로, 좋았다.

*** 

6월로 접어드는 정자 위에는 두 사내가 앉아 있었다.

찻상을 가운데 놓고 앉은 두 사내는 은립과 서윤이었다.

3월에 만나 벗이 된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물론 이 관계에서 항상 주도적인 것은 은립이었고 서윤은 그런 은립이 싫지 않아 늘상 끌려다니는 것처럼 이렇게 여기에 앉고 마는 것이다.

석 달을 사귀었지만 30년을 사귄 벗처럼 대해주는 은립을 서윤도 좋아하고 있다.

유은립이라는 사내는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성격인지라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지금 복수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게 된다.

복수도 잠시 잊고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사내로 되돌아가 또래의 벗과 일상을 나누는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유은립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복수심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이제 7월이면 이루어질 거사를 잊은 것도 아니다.

다만 거사를 앞둔 마음의 무게를 유은립이라는 이 벗으로 인해 잠시 잊을 수 있을 뿐이다.

유은립이 어떤 사내인지는 서윤도 잘 알고 있다.

나라 제일의 검객에 왕궁의 훈련터에서 무사들을 가르치는 일과 겸해 왕의 호위를 맡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왕의 호위.

7월이 되면 자신은 왕을 치는 역모를 일으킬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은립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은립이 그 일에 휘말리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미 오 장군에게는 말을 해놓았다.

역모가 성공해서 현 왕의 목을 치고 새 왕을 옹립한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유은립과 그 일가가 다치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놓은 것이다. 오 장군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유은립은 지금의 왕 이전부터 왕궁의 호위무사였었다.

선왕도 섬긴 인물이다.

석 달을 겪어본 이 사내로 말할 것 같으면 성품이 우직하고 정치라는 것을 모른다.

왕궁에 적을 두고 있지만 왕궁 안에서 일어나는 더러운 정치에 발을 담글 줄 모르고 이 사내의 머릿속에는 오직 ‘검’만 있다.

그렇게 단순한 사내다.

이런 사내가 그와 상관없는 역모에 휘말려 다치게 되는 일은 막을 생각이다.

그리고 이 사내가 다치면 은서도 다치게 된다.

이미 서윤은 그것을 겪었다.

가장이 목숨을 잃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끔찍한 비극을 서윤은 겪어봤다.

그래서 이번 역모의 바람이 은립에게 미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생각이다.

다행히 자신은 이 역모의 중심에 있고, 역모가 성공하면 무엇이라도 원하는 것을 준다고 오 장군이 말한 바 있다.

바라는 것은 없다.

그러니 바라는 것 대신 유은립의 안전에 미리 동의를 구했다.

왕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유은립은 여전히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가 원한다면 새 왕의 호위무사도 맡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유은립은 고지식한 사내라 역모에 대해 알게 되면 분명 갈등할 것이고, 막으려 들 수도 있다.

그러니까 비밀로 해두고 있다가 역모가 있기 전 유은립을 왕궁에서 빼돌릴 것이다.

핑계를 대서 유은립을 집에 묶어두고, 역모가 끝난 다음 그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할 예정이었다.

“내 안 사람이 이제 제법 배가 나와서 말일세, 다음 달에 장마가 시작하기 전에 친정에 가 있으라고 할 생각이네.”

은립이 서윤의 잔에 찻물을 따라주며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러면 자네는 누가 챙겨주나?”

“이 집에 찬모가 몇이고 하인들이 몇인데 그걸 걱정하나. 내 걱정하기 전에 자네 걱정이나 하게.”

은립의 말에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은서, 언제까지 저렇게 내버려 둘 것인가?”

은립이 묘하게 웃었다.

은립이 아주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제집을 드나들 때마다 서윤과 은서가 어떤 식으로 시선을 교환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바보가 아니다.

둘 사이에서 은근히 풍기는 분위기를 모른다면 그건 눈뜬장님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서로 시선만 교환하지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 은립 보기에는 어지간히 답답한 일이다.

둘 다 속앓이를 하는 것이 분명한데 누구 하나 먼저 나서지 않으니 결국 은립이 나섰다.

은서는 은립에게 있어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누이동생이다.

양친이 세상을 떠나며 제게 맡긴 단 하나의 혈육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시집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 마음에 차는 사람이 아니면 시집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허서윤, 이 사내라면 합격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선한 사내라고 은립은 생각했다.

비록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비밀로 하고, 나중에 가르쳐주겠다고 하고 있지만 나쁜 사내는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 사내는 은서를 사모하고 있다.

은서와 이 사내. 누구보다 아름다운 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는 늦출 수 없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더 끌지 말고 내 동생 데려가게나.”

은립의 말에 서윤의 눈이 커졌다.

“내 누이를 더는 저리 두지 말고, 자네 식구 만들게.”

그 말을 한 은립이 서윤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올라 오거라.”

그 말에 서윤이 당황해서 뒤를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은서가 정자 아래에 서 있었다.

은립의 말에 정자 위로 올라온 은서는 두 사람 사이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나는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 두 사람이서 알아서 결론을 내시게나.”

그 말을 마치고 은립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정자를 성큼성큼 내려가 후원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서윤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은서의 눈과 마주쳤다.

이름다운 눈이었다.

봄꽃처럼 화사한 연분홍 미소를 가진 아름다운 그녀.

그 산중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처녀라고 생각했었다.

이 맑고 아름다운 눈과 마주쳤던 그 날, 그 달빛 밝은 밤 그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버석거렸었다.

심장이 버석 버석거리는 소리를 그날 서윤은 처음 들었었다.

가벼워서 한 줌도 되지 않는 그녀를 업고 산길을 오르는 내내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는 걸 은서는 알까.

산사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그리고 우연하게 이 집에서 그녀와 다시 재회했을 때도 심장이 버석거렸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그녀가 말할 때마다 귀가 먹고, 그녀가 웃을 때마다 눈이 멀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유은서라는 여인이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정작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아름다운 여인.

그 고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고, 그 어여쁜 눈이 자신을 잠시라도 바라봐주는 것이 좋고, 그 미소가 제 눈에 잠시라도 담겨지는 것이 너무 좋아서 감히 욕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너무 어여쁘면 되지도 않을 욕심조차 품을 수 없다는 것을.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 은서다.

“서윤 님.”

은서가 손에 든 것을 서윤에게로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며 그녀가 내민 것은 수낭이었다.

수를 놓아 만든 주머니를 내밀며 은서가 뺨을 붉혔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버리셔도 됩니다.”

그녀의 말에는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으면 오라비의 말을 거절해도 좋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수낭을 선물하며 자신 역시 서윤의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서윤이 내키지 않으면 수낭을 버리듯이 자신을 거절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서윤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괜찮은 것일까?

이 아름다운 처녀를 아내로 맞이해도 되는 것일까.

아직 거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아직 자신의 앞날은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고 불안한데.

잘못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이 처녀를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거절하면…….’

만약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몰랐다면 모를까 한 번 알아버린 이 아름다운 이를 마음에서 지우고 살 수 있을까.

애당초 몰랐다면,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한 번 알아버린 이상 지우고는 못 살 것이다.

이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슴 뛰는 설렘을 지우고는 못 살 것이다.

행복해져도 되는 것일까.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누이야.

이 못난 아들이, 못난 오라비가 행복해져도 되는 것일까.

비명에 간 이들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가슴에 사무치는 원한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럴지라도 행복해져도 되는 것일까.

원한도 갚고, 복수도 하고, 그리고 행복도 가지고 싶은 이 마음을 먼저 간 이들이 이해해줄까.

원한은 갚을 것이니 이 아름다운 여인을 잡아도 되는 것이겠지.

복수는 할 터이니 이 아름다운 이와 짧은 행복을 누려도 되는 것이겠지.

먼저 간 이들도, 이 정도는 이해해주겠지.

“나는…… 정말 부족한 것뿐인 사내이지만…….”

서윤은 조심스럽게 은서가 내민 수낭을 받아 들었다.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마음 하나뿐이지만, 이 하잘것없는 마음 하나라도 좋다면, 괜찮다면 하늘이 허락하는 날까지 그대 곁에서 그대의 지아비가 되어…….”

“마음뿐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느새 은서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했다.

“하잘것없는 마음뿐이라고 하셨습니까?” 

은서가 손을 내밀어 수낭을 쥔 서윤의 손을 잡았다.

“그 마음으로 저를 놓지 말아 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평생 그 마음으로 저를 아껴주시면 됩니다.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못난 나 때문에 후회하는 날이 오게 될 수도 있소.”

“아니요. 아니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

“마음을 주신다는 지금의 그 말씀을 잊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마침내 서윤이 은서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 같은 가녀린 몸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약속하겠소. 내 삶에 피어나는 꽃은 오직 그대 외에는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삶에서 가지 치고 피어나는 단 한 송이의 꽃이라는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자신에게서 피어나는 꽃은, 일생 자신이 사랑할 꽃은 단 한 명 이 여인밖에 없을 거라는 것을.

일생에 오직 유은서라는 이 여인만이. 자신에게 피고 지는 단 한 송이의 꽃일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만약 행복이라는 것이 짧은 순간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라면.

짧은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누군가의 눈동자에 미소를 안겨줄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여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서윤은 다짐했다.

반드시 그렇게 해줄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 

6월의 말일로 들어서자 날이 부쩍 더워졌다.

날이 무덥고 습해질수록 장마가 가까워졌다고 다들 말했다.

은립은 평소와는 다른 걸음으로 왕궁의 뜰을 가로질렀다.

은립의 품 안에는 사직 상소가 들어 있었다.

이제 그만 왕궁 호위의 일과 훈련관의 일을 그만두고 낙향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사직 상소였다.

오랫동안 충직하게 왕과 왕실을 섬겨왔다.

이제는 가족들, 특히 아내를 위해 시간을 낼 때가 되었다.

아내의 배가 제법 불러 친정으로 내려갈 준비가 끝난 것이다.

아내 혼자 보내기가 나빠 같이 떠나기 위해서 결심을 굳혔다.

관직을 사직하고 아내와 함께 아내의 친정인 시골로 내려가 그곳에서 농사나 짓고 그곳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작은 무관을 열고 살기로 말이다.

한번 결심을 하니 마음이 편해져 이제 이 사직 상소만 올리고 궁을 떠날 생각이다.

당연히 붙잡겠지만 그 붙잡는 손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생각에 은립의 발이 가벼웠다.

올려다본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아마 밤중에 비를 흩뿌릴지도 몰랐다.

‘장마가 시작되면 길 떠나기가 나빠지는데…….’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원래 장맛비라는 것이 첫날부터 그리 거센 법이 아니다.

사나흘이 지나면 그때부터 비도 거세어지고 날도 짐작할 수 없게 되니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에 허 사형에게 은서를 부탁하면 될 것이고…….”

은립은 서윤을 ‘허 사형’이라고 부른다.

나이는 은립이 더 많지만 나이를 따져 호칭을 정하기보다는 서로를 존중해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서윤과 은서는 혼인하기로 정했다.

다만 서윤이 그 날짜를 잠시 뒤로 미뤄달라고 해서 혼례는 가을에 치르기로 했을 뿐이다.

시골에 내려가 있다가 은서의 혼인 날짜가 임박하면 다시 올라와서 혼인식을 치러주고 내려갈 생각이다.

‘다 잘되었다, 다 잘되었어.’

이제 먼저 가신 부모님을 뵐 낯이 있다고 은립은 혼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무사 평안,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

“자네.”

은립을 불러 세운 것은 채 승상이었다.

채 승상은 왕의 가장 최측근으로 정사를 제 손으로 좌지우지한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다.

은립은 채 승상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왕을 섬기고 왕궁을 지키고 있긴 하지만 채 승상이 하는 모든 일은 은립의 눈에도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왕은 분별력이 없어서 조정의 일을 무엇 하나 그 손으로 처리하는 법이 없고 모든 것을 채 승상에게 물어 처리한다고 들었다.

채 승상은 욕심이 많고 포악한 자라 그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양을 보내고,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워 목을 베는 것이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조정일지라도 은립은 그 와중에도 제가 할 일은 해야 한다며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

지금의 왕은 반정으로 옥좌에 오른 왕이다.

반정이 일어난 때 은립은 잠시 왕궁을 떠나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왕궁의 호위무사였고 왕을 지킬 책임이 있었으나 그때 은립은 빙부상을 당해 마침 왕궁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왕궁을 떠나 있는 보름 사이에 왕궁에 변고가 일어났고, 상을 끝내고 돌아오니 왕이 바뀌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선왕의 어린 아들은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으며 어리석은 새 왕이 옥좌에 오르고 채 승상이 정사를 쥐고 휘둘렀다.

그럴지라도 자신이 맡은 일까지 팽개치고 왕궁을 떠나면 가뜩이나 어지러운 왕궁과 군사들을 누가 통솔할까 염려하여 떠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떠날 때다.

할 만큼 했고, 후학도 이미 양성해 놓았다.

떠나더라도 후회는 없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

“승상을 뵙습니다.”

은립이 허리를 숙였다.

“사직을 한다고 들었네.”

채 승상이 그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사직하려는 이유가 있는가?”

“이제 가족들을 돌봐야 할 것 같아서, 낙향을 하려고 합니다.”

“가족이라…… 그래, 가족도 돌봐야겠지. 하지만 몇 년 더 나라를 섬긴 후에 가족을 돌봐도 되지 않겠나?”

“저는 소임을 다했습니다. 이만 사직하고 낙향하게 허락해주십시오.”

은립의 뜻은 단호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는 떠난다.

“허허. 인재가 떠나니 이것 참…….”

채 승상이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알겠네.”

“감사하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채 승상의 공치사를 들은 은립이 그 자리를 떠났다.

고생 많았다는 말을 딱히 채 승상에게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떠난다는 생각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직 상소를 올리고 왕궁을 떠나기 위해 성문을 향하던 은립의 발을 멈추게 만든 것은 그의 동료였다.

“딱 오늘만 부탁하네.”

동료는 난처한 얼굴로 부탁을 해왔다.

그의 아내가 오늘 해산을 해서 도저히 오늘은 숙직을 할 수 없다고, 딱 하룻밤만 숙직을 대신 서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좋네.”

은립이 흔쾌히 승낙했다.

자신의 아내도 회임을 했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오늘로 모든 일이 끝났으니, 내일 아침까지 반나절 더 왕궁에 있는다고 무엇이 크게 달라지겠는가.

그만두는 마당에 동료에게 야박할 이유도 없어서 은립은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에는 ‘내일 아침에 돌아갈 것이니, 돌아가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으시오’라는 전갈을 사람 편으로 보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빗방울이 떨어진 것은 해가 지나고 어둠이 짙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 

빗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어느새 거센 빗줄기로 변했다.

왕궁은 빗물과 어둠에 잠겼다.

거센 빗소리가 사방 모든 소리를 잡아먹어 다른 소리들은 들리지도 않았다.

쏴아아아-.

거세게 내리는 그 빗속으로 움직이는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왕궁 병사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한없이 살기 돋쳐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이 왕궁의 문을 열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왕궁 문밖에 서 있던 수백 명의 무장한 자들이 왕궁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가 봐도 역모였지만 거센 비는 그 모든 것을 덮었다.

“왕의 목을 벤다.”

선두에 선 사내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채 승상의 목은 베지 말라 일렀느냐?”

“네.”

사내의 뒤를 따르던 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채 승상은 살려서 데려와라. 그 목 또한 내가 벨 것이다.”

사내의 음성에는 무참한 복수의 한이 서려 있었다.

“가자.”

사내 서윤이 앞장서자 그 뒤를 검을 든 사내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왕의 침전이 있는 방행이었다.

‘이제 곧…….’

서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 위로 쉴 새 없이 빗물이 쏟아졌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윤이 재빠르게 발을 옮겼다.

그의 눈은 복수로 이글거렸다.

드디어 벼르고 벼려왔던 복수의 때가 왔다.

흐려질 것 같으면 마음에 새겨놓고, 또 흐려질 것 같으면 마음에 새겨 넣은 원한을 이제 갚을 때가 온 것이다.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모친과 누이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놓고 잊지 않았다.

감추어왔던 이빨을 이제 드러낼 때가 왔다.

수없이 곱씹어 왔던 한을 이제 드러내고 원수들을 사냥할 때다.

제 마음에 핏자국을 뿌린 이들을 잡아서 찢어 죽이고 그 살점을 뜯어먹을 때가 왔다.

가슴에 아로새긴 이 한을, 피눈물을 삭이며 참아왔던 것들을 이제 터트릴 때가 왔으니,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철벅 철벅.

빗물을 걷는 서윤의 발이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수상한 기척을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은립이었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섞인 발걸음 소리를 구분한 것이다.

“누구냐!”

은립이 지키고 선 뒤로는 왕의 침전이 있다.

“들어가서 전하를 지켜라.”

주위에 있던 무사들의 절반을 왕의 침전 안으로 들여보낸 은립이 검을 빼 들었다.

은립의 눈에 빗줄기를 가르고 점점 다가오는 사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다.

“무엇 하는 놈들이냐!”

은립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들의 숫자는 이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눈으로 대충 세어도 50명이 넘었다.

“무엄한 놈들!”

아무리 비가 거세게 쏟아져도 그렇지, 저 정도의 무장한 자들이 왕궁 안으로 난입을 했는데 왕궁이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한 순간 왕궁의 서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젠장.”

그제야 이들이 패를 나누어 왕궁의 곳곳에서 동시에 행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은립은 깨달았다.

이자들이 전부가 아니라, 이자들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지금 왕궁에 역모가 일어났고, 역모의 승패를 가를 왕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을 지키지 못하면 역모가 성공하고, 왕을 지켜내면 저들은 실패한다.

부덕하고 어리석은 왕이지만 왕은 왕이다.

이미 선왕을 지키지 못한 전적이 은립에게는 존재한다.

비록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선왕을 지키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이 남아있는 은립에게 지금 이 순간은 절대로 달아날 수 없는 상황이다.

또다시 왕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당황한 것은 복면을 쓴 서윤이었다.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은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서윤은 검을 쥔 손을 떨었다.

“오라버니는 내일 떠나실 것이라 오늘은 일찍 돌아오신다 하였습니다. 오늘 사직서를 내고 일찌감치 돌아오셔서 내일 떠나실 준비를 하시기도 바쁘시거든요.”

은서는 그렇게 말했었다.

오늘, 왕궁에 은립은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서윤도 안심하고 오늘 거사에 동참했다.

은립은 오늘 사직서를 내고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내일이면 이 도성에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시작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은립이다.

그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은립과 칼을 맞댄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랬다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만.”

뒤따르는 자들에게 눈짓한 다음 서윤이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리고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비에 잔뜩 젖은 복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서윤이 복면을 벗고 은립의 앞에 섰다.

“나요, 유 사형.”

빗소리를 뚫고 서윤의 목소리가 은립에게 닿았다.

“나요, 허서윤. 유 사형, 나요.”

“허…… 사형?”

은립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도 서윤을 알아본 것이다.

“사형이 왜 여기에 있나? 그자들은 누군가?”

상황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싶은 것일까.

“비켜주시오, 유 사형.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소.”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묻고 있잖나! 그자들은 누구냐고!”

은립이 소리를 질렀다.

은립도 지금 이 상황이 놀랍고 황망해서 어찌할 바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했다.

누이동생과 혼인할 사내가 역모의 일당들을 이끌고 왕궁에 난입했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설마, 역모에 동참한 것인가?”

“역모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오.”

“왕궁에 난입했다. 그것이 역모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비켜주시오, 유 사형. 나는 저 안에 있는 원수의 목을 반드시 베어야 하오.”

서윤의 말에 은립이 허, 하고 웃었다.

쏟아지는 빗물에 잔뜩 젖은 그의 눈은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짧게 웃던 은립이 검을 고쳐 쥐고는 서윤을 똑바로 쳐다봤다.

“역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네.”

은립이 서윤을 향해 한 걸음 내밀었다.

“내가 허 사형을 벨 테니까.”

그 말을 하며 은립이 서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빗물이 튀며 검이 어둠을 갈랐다.

*** 

“비가 참 많이도 내리네…….”

덧창을 열었던 은서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염려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면 내일 길 떠나기가 나쁠 것인데…….”

홑몸도 아닌 새언니와 오라비가 내일 먼 시골로 떠나는데 하필이면 비가 이렇게 쏟아졌다.

“어쩌나…… 아침이 되어 비가 그쳐주면 좋으련만…….”

하루만 늦게 비가 올 것이지.

괜히 하늘이 원망스러워 비를 쏟아내는 하늘을 노려볼 때였다.

철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은서가 ‘누구냐?’ 하고 물었다.

집안 하녀들 중에 누가 왔나 싶었다.

“거기 누구냐?”

다시 재차 물었을 때 어둠 속에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윤 님.”

사내는 서윤이었다.

비에 잔뜩 젖어 머리도 옷도 엉망인 서윤이 그 어둠 속에서 있었다.

“어찌 그러고 계십니까?”

놀란 은서가 덧창을 닫고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우산을 손에 들고 뛰어나가 빗속에 하염없이 그 비를 맞고 서 있는 서윤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우고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이런 서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서러움, 슬픔, 고통, 그런 온갖 감정들이 서윤의 얼굴에 가득했다.

“서윤 님.”

은서가 되레 무서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럴 때 오라비라도 집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서윤이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서윤 님. 대체 왜…….”

“나는…….”

울먹이는 소리로 서윤이 입을 열었다.

사내는 울고 있었다.

빗물이 아닌 눈물이 그 뺨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은서가 그의 옷을 물들인 붉은 피를 봤다.

그의 옷 곳곳에 핏물이 가득했다.

그는 핏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치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서윤이 어디에서 잔뜩 다쳐서 돌아왔다 생각하고 놀라 소리쳤다.

그런 은서의 어깨에 서윤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나는…… 몰랐소. 정말…… 몰랐소…….”

그가 무엇을 몰랐다고 하는지 은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몰랐다는 걸까.

“그대의 오라비가 거기에 있을 줄은…… 나는 정말 몰랐소.”

“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왜 오라비가 나오는 걸까?

“은립이…… 유 사형이 거기에 있을 줄은…… 정말 모르고…… 모르고…….”

“무엇을 몰랐다는 겁니까?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느낌이 이상했다.

등골이 서늘하고 간담이 녹아내렸다.

‘아닐 거야…….’

은서는 애써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했다.

‘아닐 거야…… 아니야…….’

“나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소. 맹세코 정말로…….”

“아니야…….”

은서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서윤에게서 물러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죽었다니…… 그건 아니야…….”

믿을 수가 없다.

누가 그런 말을 믿겠는가.

오라비는 나라 제일의 검객이다.

그런 오라비를 누가 죽였겠는가.

서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저를 놀라게 하려고 짓궂은 농담을 하는 것이다.

“은서.”

서윤이 손을 내밀었다.

빗물에 젖은 그의 손이 꼭 핏물에 젖은 손처럼 보였다.

그 피가 꼭 오라비의 피처럼 보였다.

“오지 마!”

은서가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발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그녀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제 오라비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오늘 아침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웃는 얼굴이 오라비의 마지막이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가지 말라 붙잡는 것인데.

그럴 줄 알았더라면, 해가 지기 전에 빨리 돌아오라 서둘러 불렀을 것인데.

왜 잡지 못했을까, 왜 부르지 못했을까.

“아가씨! 무슨 일이어요!”

빗속에 소란을 들었는지 새언니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부른 배가 보였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저 아이는 그것도 모르고 있겠지.

아버지 없이 유복자로 태어날 저 아이를 어찌할까.

철벅.

서윤이 빗속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엎드려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진흙탕으로 변한 땅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사내가 짐승처럼 울었고, 그 사내 앞에 주저앉은 은서도 오열했다.

심장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은서가 울부짖었다.

아무리 울어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울음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하늘이 울었다.

세상이 온통 폭우에 삼켜지는 밤이었다.

*** 

“…….”

은서는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잠들었던 차에 꿈을 꿨다. 서러웠던 그 밤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 비는 왜 그리도 쏟아지고, 가슴은 왜 그리도 아팠는지.

잠에서 깬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제 그 모든 나날이 꿈결에 불과하다.

함께 웃던 오라비는 없고, 오라비를 잃은 새언니는 그다음 날 집으로 보내진 오라비의 참혹한 주검 앞에 실신하여 아이를 잃고, 아이를 잃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반정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여 죽은 오라비는 죄인이 되었고 집과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은서는 창관에 보내져 창녀가 되었다.

폭우가 지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용서 못 해…….’

전부 용서할 수 없다.

반정을 일으켜 옥좌에 오른 왕도, 그를 도와 오라비의 심장을 찌른 서윤도 다 용서할 수 없다.

가슴에 사무친 이 원한을 갚기 전에는 죽여도 죽을 수 없다.

기어이 살아남아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죽어간 이들을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