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낯선 밤
“하아, 하아…….”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보다 더 붉게 상기된 뺨은 지금 이 처녀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고 있는지 대신 말해줬다.
오라비를 따라서 산 너머에 있는 외가에 가던 길이었다.
평소에는 먼 거리를 다니든 짧은 거리를 다니든 항상 몸종을 데리고 다녔지만 이번에는 오라비와 함께 가는 길이라 몸종은 남겨두고 온 것이 화근일까.
외가에 가려면 이 산을 넘어야 하는데 산세가 험해 말도 가마도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는 기분으로 오라비와 함께 산길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하얗게 쌓인 눈 속에서 샛노란 이파리를 드러낸 복수초에 잠시 눈길을 빼앗긴 사이에 오라비를 놓쳐버렸다.
오라비는 아마 누이가 뒤에서 잘 따라오겠거니 하고 산길을 올랐을 것이다.
누이가 노란 꽃잎에 눈길을 빼앗겨 뒤에 머물러 있느라 저를 놓친 것은 꿈에도 모르고 산길을 먼저 혼자 올라갔을 것이다.
처녀는 혼자서 이 산을 넘어본 적이 없다.
이 산길로 외가에 가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작년 가을 늦홍수가 터져 외가로 가는 길에 놓인 다리가 떠내려가 그쪽으로는 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겨울이 다 끝났다는 이유로 쉬엄쉬엄 산을 넘어가자 한 것이다.
처녀의 오라비로 치자면 나라 안에서 이름이 난 무사라 이런 산길쯤은 예사로 뛰어다니겠지만 이 처녀는 산길이 그저 서툴고 무서웠다.
오라비와 함께 가면 하나도 무서울 것 없는 길이겠지만 오라비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고 날은 어둑해지니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어둑한 숲 그늘에서 금방이라도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처녀의 가슴이 덜컥거렸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계곡의 물소리는 지척에서 들려오고 먼 곳에서는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오라비는 어디까지 갔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기에 누이가 뒤에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까.
괜히 오라비를 원망하며 처녀가 구부러진 소나무 둥치를 안고 돌 때였다.
“아앗!”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밟은 처녀의 발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처녀가 그 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아직 다 녹지 않은 미끄러운 땅에 데굴데굴 굴러버린 처녀는 얕은 비명을 지르며 엉거주춤 일어나 앉았다.
이미 치맛단은 엉망이 되었고 데굴데굴 구른 탓에 손바닥에도 생채기가 났다.
날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손바닥이 쓰리고 축축한 것을 보니 피가 나는 것이 분명했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려고 할 때였다.
“거기, 괜찮으시오?”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처녀의 귀를 건드렸다.
어둠보다 더 무서운 낯선 사내의 목소리였다.
이런 산중에서 혼자 있다가 낯선 사내를 만난다는 것은 범을 만나는 것보다 더 무섭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처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가 있었다.
잔뜩 겁먹은 처녀의 마음과는 다르게 사내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못된 놈은 아니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그렇게 얼굴에 대놓고 무서워하면 제가 더 당황스러우니까.”
처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주머니에서 무명천을 꺼낸 사내가 그 천을 가늘게 찢어 처녀의 손을 슬그머니 쥐었다.
“아……!”
난데없이 손이 잡힌 처녀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사내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찢은 천을 그녀의 손바닥에 칭칭 동여맸다.
“아녀자 해코지하는 놈은 아니니 너무 염려 마시오.”
사내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이든 거짓이든 자신이 사내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처녀도 잘 알고 있다.
이 사내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라도 제게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처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소?”
사내의 말에 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앗!”
그러나 그 말대로 일어서지는 못했다.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은 것이다.
데굴데굴 구르며 발목을 삔 것이 틀림없다.
발목을 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는 처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가 돌아앉았다. 그리고 처녀에게 등을 내민다.
사내의 의중을 몰라 처녀가 사내의 뒤통수와 등을 번갈아 쳐다봤다.
“업히시오.”
“하지만…….”
외간 사내의 등에 업히라고? 못 할 짓이다.
“산중에 누가 보겠소.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사가 있으니 거기까지 업어다 주겠소. 거기까지 가면 산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그곳에서 댁으로 기별을 보내면 될 것이오.”
“하지만 등에 업히는 건…….”
“그러면 여기서 밤을 새울 작정이오? 정 그렇다면 여기 계시오. 내가 혼자 산사까지 가서 사람을 불러오리다.”
혼자 여기에 남는다고?
날이 이렇게 어두워졌는데?
그건 또 무서워서 처녀가 얼른 사내의 등에 업혔다.
낯선 사내의 등에 업히는 것이 창피했지만 무서운 것보다는 낫다.
“앗!”
처녀가 등에 업히는 순간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사내가 일어서며 제 몸이 위로 휙 들려 올라가자 처녀는 깜짝 놀라 사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 꽉 잡으면 내가 숨을 못 쉬오.”
“앗……!”
그 말에 또 당황해서 사내의 어깨로 손을 옮겼다.
사내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고 그 등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처녀를 등에 업은 사내는 어둑한 산길을 성큼성큼 잘도 올라갔다.
적막한 산길을 올라가는 두 사람을 달빛이 가만히 비췄다 가렸다 변덕을 부렸다.
사내의 등에 업혀 올라가자니 조금 전까지 그렇게 무서웠던 계곡의 물소리도, 산짐승의 소리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낮은 숨소리와 등과 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사내의 심장의 두근거림만 가까이에서 들릴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은서야! 은서야-!”
저를 애타게 찾아 부르는 오라비의 목소리에 처녀가 고개를 들자 사내도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비가 처녀를 찾아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아가씨를 찾는 소리인가 보오.”
그 말과 함께 사내가 천천히 허리를 내려 등에서 처녀를 내려놓았다.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리면 일행이 올 것 같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소이다.”
저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사내의 등을 빤히 쳐다보던 처녀가 황급히 그를 불렀다.
“저기…….”
신세를 졌다.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은인의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존함이…….”
처녀를 내려놓고 돌아서던 사내가 그녀를 쳐다봤다.
사내의 시선이 제게 닿자 처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천을 동여맨 제 손만 쳐다보며 붉어진 귓불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는 처녀의 머리 위에 사내의 손이 닿았다.
그 따뜻한 손길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정수리에 붙어있던 나뭇잎을 가만히 떼어주는 사내의 손길은 여간 다정한 것이 아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소.”
그렇게 말한 후 사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사내가 숲 그늘 속으로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스락거리는 기척도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진 수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처녀의 머리 위로 달빛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 쏟아지는 달빛 사이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달빛에, 그 바람에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달빛에 취한 것인지 바람에 취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낯선 사내의 다정한 손길에 취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현기증이 그녀를 눌렀다. 취한 것처럼.
“은서야-!”
그녀의 오라비가 사색이 되어 그녀를 찾아낸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그녀가 뒤처진 것도 모르고 혼자 가서 미안하다며 오라비가 그녀를 붙들고 사죄하고 또 사죄했지만 처녀의 귀에 오라비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거기, 괜찮으시오?”
낯선 사내의 목소리만이 귀를 맴돌았다.
이름도 모르고, 다시 만날 까닭도 없는 낯설디낯선 사내의 목소리만이.
***
산 중턱에 자리를 잡은 산사의 뒤편의 작은 별채에는 가끔 드나드는 이들이 있었다.
그 별채에 드나드는 이들이 산사에 시주를 꽤 크게 하는 탓에 산사의 승려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귀한 분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궁으로 모셔가겠습니다.”
별채라고는 하지만 거창하게 지어진 곳이 아니다.
소박하게 지어진 작은 방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젊은 사내는 상석에 앉았고 늙은 사내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젊은 사내가 윗전처럼 보였다.
“나는 괜찮다. 거사는 잘 준비되고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곧 때에 이를 것 같사옵니다. 여름 장마가 지기 전에 이곳에서 내려가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여름 장마라…… 정말 멀지 않았군…….”
“네, 마마. 이제 곧이옵니다.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궁이라…….”
젊은 사내가 중얼거렸다.
떠나온 지 몇 해가 지나 이제는 궁이라는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속에서도 가물거리는 것이 우스워 젊은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밖에 함께 데려온 이는 누군가?”
별채 밖에 세워놓은 기골이 장대한 젊은 무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허씨 성을 쓰는 서윤이라는 자이온대, 양친과 누이를 작금의 왕에게 잃은 자이옵니다. 복수를 하기 위해 가슴에 칼을 품은 자라 이번 일에 중하게 쓰일 것이옵니다.”
“참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 피를 밟고 왕이 되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주고받는 대화를 미루어 역모를 준비하는 자들이 틀림없었다.
“모쪼록 옥체를 지키시옵소서. 지금 얼어붙은 계곡의 물이 녹고 있사옵니다. 봄이 지척이고 곧 여름 장마가 시작될 것이옵니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하늘이 마르는 가을이 오면 풍요로운 추수를 거두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디, 그렇게 되면 좋겠군.”
젊은 사내의 중얼거림이 조용한 방에 울렸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둥 앞에 서 있던 사내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늙은 사내가 별채의 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뒤로 한 젊은 사내가 걸어 나오는데 서윤은 처음 보는 젊은 사내였다.
젊은 사내는 삿갓을 깊숙하게 눌러쓰더니 늙은 사내에게 고갯짓을 해 보이고는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저분이십니까?”
이제는 보이지 않지만 젊은 사내가 사라진 쪽으로 바라보며 서윤이 물었다.
“그러하네.”
“많이 어려 보입니다.”
“나이가 무엇이 중요한가. 혈통이 중요한 것이지.”
“언제 시작하십니까?”
“준비가 다 되면. 일을 그르치면 모두 죽네. 그러니 서두르지 말아야지. 한 치의 실수도 없게 천천히 준비해서 한순간에 이를 드러내야지.”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채 승상의 목은 내게 준다던 그 약속, 반드시 지키십시오.”
이 사내는 조금 전에 산길에서 길을 잃은 처녀 은서를 업어주던 그 사내다.
이 사내 서윤 역시 이 산사에 볼일이 있어 산을 오르던 중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여인을 발견하고 조금 도와준 것이다.
“약속은 지킬 것이니 너무 염려 말게.”
“저는 채 승상의 목만 따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부귀영화를 누려야지.”
“부귀영화 따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채 승상, 그자의 목과 그 가문을 멸문지화 하는 것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그리 원한이 깊은가?”
“내 가슴에 서린 원한이야 누가 알겠습니까.”
서윤의 눈동자에 독기가 서렸다.
제 부친이 왕궁에서 죽어 나왔다.
왕궁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되돌아온 부친을 보고 모친이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리고 혼사 날짜가 정해져 있던 누이동생은 파혼 서신을 받고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다가 기어이 단검으로 제 손목을 자르고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서윤 혼자 남았다.
일가가 모두 죽었는데 왜 죽지 않고 홀로 살아남았는가 하면, 제 일가를 그리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
하나 남은 아우를 두고 차마 혼자 죽을 수 없어서 모진 목숨을 부지했다.
서윤에게는 열네 살이나 어린 아우가 있다.
이제 고작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우가 있어서 그 아우를 두고는 죽을 수가 없다.
서윤의 바람은 세 가지다.
하나는 부친이 주검이 되어 돌아온 왕궁, 부친을 처참하게 어육을 만들어 돌려보낸 그 왕궁의 왕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부친의 목을 친 채 승상, 그자의 목을 제 손으로 치는 것이다.
채 승상의 목을 치고, 사지를 뜯어 죽여야 이 원한은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바람은 혼자 남은 아우가 고생하지 않고 자라는 것인데 그것은 거사가 끝난 다음에 혹여 자신에게 변고가 생기더라도 이 늙은 사내가 뒤를 봐주기로 했으니 염려는 없다.
늘 공명정대했던 부친, 그리고 인자하던 모친. 배꽃처럼 곱던 누이.
누구보다 행복했던 가족들을 그리 잃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벼른 세월이 5년이다.
그리고 이제 조금만 지나면 복수의 때가 찾아온다.
비명에 간 가족들의 원한을 갚아줄 것이다.
서윤의 눈가에 시퍼런 독기가 서늘하게 피어올랐다.
“사람, 눈빛하고는. 벌써부터 그리 독기를 품으면 쓰나.”
늙은 사내가 서윤의 눈가에 피어오르는 독기를 보며 혀를 찼다.
“가서 깨끗한 물에 얼굴이나 씻게. 지금 그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가겠어.”
늙은 사내가 서윤의 등을 떠밀었다.
“산사의 탑 뒤로 가면 산에서 내려오는 옹달샘이 있으니 거기 가서 목도 축이고 얼굴도 씻게나. 얼음물이라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니. 그러고 산에서 내려가게. 그 상태로 내려가면 가는 도중에 몇 사람 죽일 것 같아서 하는 소리네.”
늙은 사내의 손에 등을 떠밀린 서윤이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아직 차가운 산사의 밤바람이 서윤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
탑 위에는 늙은 사내의 말처럼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이 고이는 작은 샘이 있었다.
아직 살얼음이 끼어있기는 했지만 졸졸졸 내려오는 물이 맑게 고여 있는 것을 손으로 퍼 올려 목을 축이고 서윤은 탑 아래로 걸어갔다.
머리 위에는 달이 밝았다.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렇게 달이 밝은 밤이면 가족들이 달빛 아래에 앉아 달맞이를 하고는 했었다.
누이와 어린 아우가 달빛 아래에서 그림자 밟기를 하며 놀고 있자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양친이 웃음을 터트렸었다.
부친은 왕의 곁에서 왕의 수발을 드는 벼슬에 있었다. 왕을 지척에서 모시며 한결같이 왕을 보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던 우직한 성품이었다.
그래서 왕이 변고를 당할 때 그 곁에서 같이 변을 당했다. 왕의 아우가 제 형을 죽이고 그 왕위를 찬탈할 때 죽임당한 왕의 곁에서 부친도 함께 변을 당했다.
왕의 아우에게 왕좌를 찬탈하라 부추긴 것은 채 승상이었고, 왕을 죽이고 왕의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것도 채 승상이었다.
그리고 채 승상은 부친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었다.
결국 부친은 왕을 지키다 친구의 손에 죽었다.
“오랜 우정을 생각해서 역적의 가문이 되어 멸문지화 당하는 것은 면하게 힘을 써 봤소이다.”
친구를 죽인 주제에 가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찾아와 미망인이 된 모친에게 그렇게 말하던 채 승상의 얼굴은 세상에 다시없을 짐승의 얼굴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아우를 데리고 집을 떠날 때, 제 손으로 집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아우를 데리고 숨어 살았다.
언제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칼날이 찾아들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우를 데리고 숨어 산 지 4년이 지나갈 무렵 저 늙은 사내, 오 장군이 찾아왔었다.
선왕을 섬기던 오 장군은 현 왕의 반정이 일어났을 때 그를 따르던 병사들을 이끌고 피신했었다. 그리고 반정으로 왕좌에 오른 현 왕의 악정에 실망해서 암암리에 모여든 이들을 데리고 다시금 빼앗긴 왕좌를 되찾을 계획을 품고 있는 사내다.
조금 전 오 장군이 만났던 젊은 사내는 선왕의 아들이다.
숙부에게 부왕을 잃고 왕좌도 잃고, 그리고 겨우 몸만 피해서 목숨을 부지한 선왕의 열세 살 어렸던 아들이 지금은 열여덟의 청년이 되어 빼앗긴 왕좌를 다시 찾으려고 하고 있다.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오 장군은 그렇게 말했고, 항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서윤은 그의 손을 잡았다.
1년 가까이 준비를 했고 이제 거사는 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시작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왕의 목과 채 승상의 목은 제 손으로 친다.
왕의 목을 치고, 채 승상은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채 승상의 고기를 뜯어 먹어도 이 원한은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
툭.
발아래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서윤이 고개를 숙였다.
허리에 매달아 놓았던 주머니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직접 수를 놓아 주신 주머니다.
남은 것은 겨우 이것 하나밖에 없다.
떨어진 주머니를 줍기 위해 서윤이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멈췄다.
주머니를 주우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달빛 아래 서 있는 처녀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위에서 부서지는 달빛이 아름다워서 그런 것일까, 처녀의 뽀얀 얼굴이 더 뽀얗게 비쳤다.
그 처녀다.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 처녀.
이곳 산사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었는데 목적지가 여기였던 것일까. 아니면 놀란 김에 여기에서 머물려던 것일까.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은서야-!”
일행이 저 처녀의 이름을 그렇게 소리쳐 부르는 것을 들었다.
은서. 고운 이름이다.
“저기, 존함이…….”
이름을 묻는 말에 대답해줄 이름이 없어서, 알려줄 만한 이름이 아니라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몰락한 가문의 자식, 복수를 꿈꾸는 아들, 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 저리도 고운 처녀에게 알려줄 만한 이름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은.
“아, 저, 또 뵙네요.”
소윤이 허리를 숙인 채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녀 역시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
“저는 이왕 해가 졌으니 산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내일 산에서 내려가자고 오라비가 결정하는 바람에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은인께서도 이 산사에 볼일이 있으셨습니까?”
‘은인’이라는 말이 낯설다.
“오라비께 은인의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오라비가 꼭 은혜를 갚고 싶다 하셨는데 괜찮으시면…….”
“은혜라고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서윤이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데 은서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끈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제 재주가 미천하지만 끈 정도는 다시 이을 수 있으니 주머니를 주시면 제가 끈을…….”
“되었습니다.”
돌아선 서윤이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불편하고 어색했다.
저리 고운 처녀와 말을 나누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자신의 처지로는 다른 사람과 연을 덜 맺는 것이 좋다.
괜히 연을 맺었다가 나중에 자신으로 말미암아 불똥이 튈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이미 많이 봐왔었다.
고작 산길에서 한 번 도와준 것으로 엮여서 피해를 입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나으리!”
뒤에서 처녀가 소리쳐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사내가 그렇게 자리를 떠나자 뒤에 남겨진 은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런 곳에서 또 만났으니 인연은 인연인데 참 야박도 하시구나…….”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는가.
누가 뭔가 해달라고 조르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저 은인이 고마워서 그 은혜를 좀 갚아보자고 하는데 저렇게 야박하게 돌아서서 가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산사에 계속 머무실 건가…….”
어쨌든 이 산사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일 아침에라도 오라비와 함께 찾아가 인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오늘 밤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야박하고, 퉁명스럽고…….”
이렇게 말은 하지만 은서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은서는 아직 제가 기댔던 사내의 등을, 그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따뜻하고 듬직하던 등이었다.
처음으로 업힌 외간 사내의 등이었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었다.
“흥.”
가슴이 설렌 것은 비밀이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산사를 떠나기 전, 은서가 오라비와 함께 산사에 머무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여기에 다른 손님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산사에 머무는 손님으로, 스무 살 중반 가량의 키가 엄청나게 큰 사내였다고 인상착의까지 설명했지만 전날부터 아침까지 산사에 다른 손님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은서의 오라비는 ‘사정이 있겠지’라고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잠시 머물렀다 금세 떠난 것이 아니겠냐고 오라비가 말했지만 은서의 마음은 꼭 가슴에 구멍이 뚫려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허전했었다.
그것이 아직 산중에 하얀 눈이 남아있고 계곡으로는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며 복수초가 노란 꽃잎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른 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