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 낙인의 밤
“고통은 없을 거예요, 아가씨.”
고통이 없을 것이라 말하면서도 바들바들 떠는 손바닥. 그 위에 올려진 작은 환약을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죽음으로 인도할 그 환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서의 눈 안에 깊은 슬픔이 차올랐다.
“아주 잠시입니다. 고통도 없이 주무시듯 가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아가씨.”
“언제 이런 것을 준비했니.”
몸종이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올린 것을 은서가 천천히 집어 들었다.
“내가 네게도 이렇게나 걱정을 끼쳤구나.”
환약을 집어 올린 은서를 향해 그녀의 몸종이 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절을 했다.
“아가씨 먼저 가시면 저도 뒤를 따르겠습니다.”
“너는 왜.”
“아가씨 혼자 그 무서운 길을 어찌 보냅니까. 저는 그리는 못합니다.”
바닥에 이마를 조아린 몸종을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은서가 손을 내렸다.
그리고 환약을 주머니 안에 넣고 그 주머니를 다시 허리춤에 매달았다.
“이건 나중에 사용하마. 지금은 아니다.”
“아가씨!”
은서의 행동에 몸종이 얼굴을 들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지금 밖에는…….”
“나중에 사용하마.”
“아가씨, 그 치욕을 어찌 감당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지금 죽을 수가 없어서 그런다. 억울해서 지금은 못 죽는다.”
은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하고 원통해서 이렇게는 못 죽는다.”
“아가씨…….”
몸종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모시던 아가씨의 곁을 떠나지 않는 충실한 몸종이었다.
주인이 가는 길을 마지막으로 모시기 위해 제 심장에 꽂을 단검까지 준비해 놓았건만, 주인이 편안하게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약을 거부하는 것을 몸종은 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나는 기어이 살아야겠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 견디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지만, 견딜 수 있을 때까지는 견디고 싶다. 그래야 비명에 간 오라버니를 뵐 낯도 있지 않겠느냐.”
그 말을 끝으로 은서가 일어섰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바닥에 스륵 끌렸다.
“나가자꾸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던 몸종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흔들림 없이 조용한 모습으로 문을 나서는 은서의 등을 바라보며 몸종은 남아있는 눈물을 삼켰다.
***
“이걸 입에 물고 있거라. 그러면 한결 나을 것이다.”
차가운 바닥에 꿇어앉은 은서에게 주인 여자가 몇 겹으로 접은 천을 내밀었다.
“많이 아플 거다. 자칫 혀를 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니 이걸 입에 물고 있거라. 그래야 버틸 수가 있어.”
천을 내미는 손을 바라보던 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참겠습니다.”
“고집부릴 일이 아니야.”
“괜찮습니다.”
기어이 거절하는 은서를 바라보며 주인 여자가 혀를 찼다.
‘미련하기는.’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은서의 귀에도 들렸다.
“시작하시게.”
주인 여자가 뒤로 물러서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화로에 넣어두었던 인두를 꺼내 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가 지독한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인두는 ‘娼’, 창녀를 뜻하는 글자를 몸에 낙인으로 새기는 도구다.
이 낙인이 찍히면 창녀가 되어 일생을 그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혹 고관대작들의 눈에 들어 첩이 되더라도 한 번 몸에 새겨진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창녀였다는 시선의 낙인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창녀는 첩이 아니라 왕의 여자가 되어도 정식으로 첩지를 받지 못한다.
그렇게 멸시받는 가장 천하고 낮은 신분인 것이다.
차디찬 바닥에 꿇어앉은 은서의 한쪽 어깨에서 옷을 끌어 내렸다. 새하얀 어깨와 등이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꿇어앉은 은서는 치맛자락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잠시 후면 덮칠 고통을 상상하며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곧이어 인두가 은서의 등에 닿았다.
“흐으윽!”
치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와 함께 지글거리는 소리가 은서의 귀를 울렸지만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불에 달군 인두가 꾸욱 눌러오는 어깨의 통증이 그녀를 잔인하게 덮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흐으, 으으으……!”
꽉 깨문 은서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피로 물든 입술 사이로 고통 어린 신음소리가 잠시 울리더니, 그녀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종잇장처럼 힘없이 고꾸라지는 그녀를 주위에 둘러선 이들이 측은한 눈으로 쳐다봤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로라하는 대단한 집안의 딸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천하디천한 창녀가 된 것을 보며 다들 측은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당에는 살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인두가 다시 화로로 들어갔어도 쓰러진 은서의 등에서는 여전히 열기에 익은 살갗이 지글지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고통에 잠식되어 의식을 잃어가는 은서의 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발자국은 그날 산을 오르던 그녀 자신의 발걸음 소리였다.
산중에서 길을 잃고 겁에 질려 당황하던 그 발걸음 소리.
그날 그 산중의 소리.
그 사내를 만났던 그날의 바람이 정신을 잃은 은서의 새하얀 등을 스쳤다.
그녀의 의식은 점점 아래로 꺼져 ‘그날’로 되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