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1)

노을이다. 붉은 옷 갈아입은 하늘이 이번에는 검은색 계통으로 입어야지 히히덕 청색과 보라색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건만 성무의 눈앞은 깜깜했다. 좌 빈 병 우 빈 그릇 팔에 끼고 입가며 뺨에는 초장과 쌈장을 사이좋게 바른 채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중이시다. 거하게 술 취하고 배도 뽈록이 부르니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뭐? 당연히 졸음이다. 이따금 옆구리며 엉덩이도 북북 긁어대며 음냐음냐 참 달게도 자고 있다.

“내 돈!!”

잠꼬대도 한다.

“통닭! 반반무많이!”

그렇게 먹고도 또 먹고 싶은 모양이다. 기름 좔좔 흐르는 통닭, 바삭한 프라이드와 매콤달콤한 양념이 눈앞을 떠도는지 돌연 허우적대기 시작한다. 통닭의 향긋한 냄새를 맡기 위해 코까지 마구 벌름거린다. 참을 수 없는 그 냄새! 그 맛! 따뜻하게 갓 배달 된 치킨!

“배, 백 원이 모자라!”

성무는 눈 감은 채 눈물을 흘렸다. 통닭 값 백 원, 단 돈 백 원이 모자란다. 아아, 매정한 배달원은 차갑게 돌아서고… 이 나쁜 외국인 배달부! 성무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백 원 대신 키, 키스해도 돼!”

백 원에 팔겠다. 통닭을 다오. 하지만 치사한 외국인은 키스로는 부족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크흑, 안 된다, 이 놈아! 내 거시기는, 거시기는… 아악, 가지고 가지 마! 돌아서지 마!

“거, 거시기 만져도 돼!! 허억!”

파다다닥. 성무는 번쩍 눈을 뜨며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깊게 숨을 허억허억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어느새 이마 가에 식은땀이 맺혀있다. 그것을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만져도 된 댔는데 왜 가, 썩을 놈의 변태자식. 고작 백 원 가지고…….”

거시기 말고 더 뭘 바란단 말인가! 그것보다 더 소중한 부위는 없거늘. 욕심이 지나친 변태다. 성무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깝다. 꿈이지만 먹을 수 있었는데. 지난 며칠 간 맛있는 거 많이 먹긴 했지만 저렴한 입은 저렴한 식품을 원하고 있었다. 삼계탕도 좋지만 통닭이 더 좋아. 쌀밥에 고기도 좋지만 라면이 먹고 싶어. 싱싱하고 비싼 해산물에 비싸 보이는 양주도 좋지만 삼겹살 돼지껍데기에 소주가 더 땡겨.아, 삼겹살.

“한국에 가면 시계 팔아서 제일 먼저 삼겹살 사먹어야지.”

삼겹살 사먹을 가격은 하겠지. 불판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를 떠올리니 배가 고파온다. 성무는 남은 음식 통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다가 주위가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 언제 이렇게…….”

이러다가 해지겠다.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서는데 순간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어어어어…….”

눈앞이 아찔하다. 아직 취기가 다 가시지 않은 것이었다. 하긴, 도수 제법 높은 와인을 한두 잔도 아니고 한 병 통째로 다 들이부었으니.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는 숙취는 거의 없었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앉아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서니까 주위 나무들이 강강술래를 돈다. 성무는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외국인 캠프 찾아야하는데.

“우우… 괜히 다 마셨다…….”

반병만 마실 걸. 오랜만의 술이다 보니…. 성무는 비틀거리다가 땅에 뒹구는 나무작대기를 주워들었다. 그걸로 어찌어찌 몸을 지탱해 섰다.

“끄응… 해지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무성한 나뭇잎에 달빛도 제대로 들이비치지 않는 곳이다. 밤이 되면 코앞도 제대로 구분키가 힘들다. 성무는 배낭을 다시 메고 식량 또한 손에 들었다. 지팡이용 나뭇가지로 균형을 유지해가며 걸음을 옮겨간다.

“돌아가면 삼겹살이랑 라면이랑 꼭 먹어야지.”

힘내자. 성공만 하면 귀국이 코앞이다.

-끼루루룩!

푸드덕. 보랏빛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입어 볼까 말까 망설이는 하늘 아래 새 한 마리가 둥지를 찾아 날아올랐다. 이제는 제법 걸음걸이가 똑발라진 성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한 시간쯤 전에는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같은 곳에서 맴을 돌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는데 지금은 주위 풍경이 제법 바뀌어져 있었다. 우선 나무가 점차 듬성듬성 해져갔다. 돌이나 바위가 늘고 바닥이 울퉁불퉁해졌다. 외곽만 한 바퀴 돌고 내내 동쪽에서만 지냈던 성무는 몰랐지만 섬의 북서쪽 부근은 동쪽과 달리 험난한 지형이었다. 나무며 수풀은 적으면서 굴곡이 많고 작은 절벽도 있다. 비페르의 별장이 서쪽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황량한 곳이라 서식하는 생물도 얼마 없고 숲을 해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으윽… 길이 이래서야 깜깜해지면 넘어지기 십상이겠다…….”

때문에 더욱 더 마음이 급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주위는 점점 더 어둑어둑해져갔다. 어둠을 가득 담은 단지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천천히 새어나오고 있는 것처럼. 발치에서부터 허리춤까지 까맣게 차올라간다. 성무는 불안에 잠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무가 많이 줄어 시야는 전보다 더 넓어졌다. 내려앉은 어둠만 아니었더라면 제법 멀리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앗!”

불빛이다. 해가 거의 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반짝했다. 약 1분 여 쯤 지나자 다시금 반짝한다. 확실하다. 성무는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외국인이구나!”

저건 틀림없이 인공적인 불빛이다. 자연적인 불빛이 저렇게나 선명하게, 또 반복적으로 반짝거릴 리가 없다! 성무는 만세를 외쳤다. 해가 지기 전에 찾았다! 거리는 꽤 멀어보였지만 빛이 있으니까. 해가 완전히 진다하더라도 어찌어찌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으하하하! 이제 돌아 갈 수 있다! 이 생활도 끝이야!”

그리운 고국엘 돌아가자~. 기쁜 마음에 반쯤 뛰다시피, 허겁지겁 불빛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못해 주위는 더욱 더 깜깜해졌다. 허나 불빛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얼른 오라는 듯, 길을 가르쳐주며 반짝반짝 빛난다. 그래, 지금 가고 있어! 이따금 발끝이 돌부리에 걸려 비틀대긴 했지만 아랑곳 않고 빛만 보고 걸었다.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외국인의 거처를 발견하면 근처에 숨어 저녁을 맛있게 먹자. 그리고 아침에 외국인이 자신을 찾아 나서거든 음식이며 통신기며 배 열쇠를 훔쳐다 달아나는 거다. 그렇게 달아나면 외국인은 탈출 못하게 되니까…… 육지에 도착하거들랑 섬에 사람 갇혔다고 알려줘야지. 그럴 걸 상상해보니 솔직히 좀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한테 잘 대해줬는데.”

그간 얻어먹은 게 얼마냐. 그것도 물자 부족한 무인도에서 말이다. 성무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배는 훔치지 말까. 그냥 통신장비만 빌려서 구조신호를 보낼까.

“음… 역시 배를 훔치는 건 너무 스케일이 커. 도둑놈이라고 무인도 탈출하자마자 감옥가게 되겠지. 배는 무지 비싸니까 한 10년 쯤 썩게 될지도 모르고…….”

역시 배는 안 되겠다. 근해 낚시 어선도 몇 천 하는데 여기까지 온 배라면 더 크고 비싸겠지. 성무는 깔끔하게 배를 포기했다. 미안하기도 미안하고 감당도 안 된다. 그냥 구조신호 보낸 뒤 외국인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잘 숨어있기로 결정했다.

“막상 헤어지면 좀 그립겠네. ……에이, 어쩔 수 없지. 난 한국인이니까. 육지로 가서도 외국인이랑 같이 지내면 불법체류 자가 되는 거라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 어차피 강제출국 당하겠지…….”

어차피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였어! 성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다시 재개 걸음을 옮겨갔다. 발치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지만 저 먼, 이제는 꽤 가까워진 불빛에만 의지한 채-

-투두둑

“!?”

돌연 발밑이 푹 꺼졌다. 악 소리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미끄러지던 몸이 앞으로 확 숙여지며 한 바퀴 데굴 구른다. 머리며 등이 단단한 바닥에 부딪치며 겨우 움직임을 멈추었다.

“으…….”

잠시간 고통으로 바싹 얼어 있은 후에야 겨우 미약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아이고… 아야야.”

끙끙거리며 뒤집어진 몸을 바로 세우려 애썼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뻥하니 뚫린 하늘이다. 그새 높이 떠오른 달빛에 의지해 주위를 살펴보았다.

“뭐, 뭐야… 여긴…….”

마치 크레바스처럼 사이가 갈라진 균열의 속이다. 깊이도 제법 깊어 키의 두 배는 넘음직하다. 저 위로 떨어질 때 놓친 도시락 통이 끄트머리에 비스듬히 걸쳐있는 것이 보였다. 암만 손을 뻗고 폴짝폴짝 뛰어 봐도 닿지 않는 높이다.

“…내 팔자 왜 이러냐.”

성무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탈출의 희망을 품었나 싶더니 얼마 못가 이 꼴이다. 뻑적지근한 팔다리를 돌려 풀고는 가파른 절벽에 매달렸다.

“끙… 끄응…….”

젖 먹던 힘까지 끄집어내어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려 애썼지만 채 30cm도 못 가 발이 미끄러졌다. 성무는 좁은 틈바구니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 너무 가파르잖아…….”

손은 어찌어찌 잡아보겠다만 발 디딜 틈은 도저히 없었다. 몇 번 더 아등바등 벗어나려 애써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성무는 멍하니 앉아 먼 탈출구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냐고…….”

눈물이 핑 돈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래도 못 올라가겠다. 돌 벽에 등을 대고 늘어앉아 길고 긴 한숨을 흘렸다. 어쩌지.

“…진짜 어쩌지…….”

막막하다. 무인도에 막 흘러내려왔을 때보다도 더 막막했다. 여긴 사람도 없는 곳인데. 딱 한 명 있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를 텐데. 그나마 남은 희망이라곤 저 위에 걸쳐진 도시락 통을 보고서 여기 사람 빠졌다는 걸 외국인이 눈치채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설사 자신을 찾아다닌다고 해도 여기를 발견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이곳에는 나무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가 적은 대신 바위나 돌은 더 많다. 때문에 그리 크지도 않은, 네 단이나 빼먹어 많이 줄어든 도시락 통을 쉽게 발견하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색깔도 어두운 편이라 더욱 그렇다. 어쩌면 며칠이 지나도록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엔 포기해버릴지도 모른다.

“……물 못 먹고는, 삼일이라던데….”

성무는 우울하게 두 다리를 모아 품에 감싸 안았다. 

“비가 제때 와 주면, 일주일 쯤 버티려나…….”

차라리 그냥 집에 있을걸. 어쩌면 벌 받는 거일지도 모른다. 좀 변태라서 그렇지 받은 게 얼만데. 빵에 피자에 각종 죽, 게장이며 갈비, 육회, 무지하게 큰 삼계탕에 각종 해산물이며 술까지 얻어먹었다. 그것만 해도 시가로 따지면 몇 십 하겠지. 손목에 찬 시계만 해도 일이만원 하는 것처럼은 안보이니까. 그렇게나 받아 놓고선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들었으니……. 

“……그래, 벌 받는 게 당연해. 처음에는 배를 훔치려고까지 했잖아.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진짜… 흑, 나빴어….”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세요! 그럼 앞으론 진짜 착하게, 나쁜 생각도 마음도 안 먹고 착하게 살 테니까! 성무는 몸을 작게 웅크린 채 눈물을 훌쩍거렸다. 눈물 섞인 외침에 밤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한 손에는 음식, 한 손에는 맘 맞은 성인들이 아름다운 밤을 지새우기 위한 도구. 사실 도구라고 해봤자 그렇게 엄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젤과 쓸 생각은 없지만 일단 챙겨둔 콘돔. 최대한 압축시켜 넣은 푹신하고 부드러운 담요. 너무 좁을 경우를 대비한, 조금씩 안을 늘려줄 소중대 딜도 세 개. 다쳤을 경우에 바를 새살이 솔솔 효과 좋은 연고. 분위기 살려주는 향초 두-한 가지는 평범한 아로마 향, 한 가지는 둔감해서 반응이 없을때를 대비한 미약성분이 든 초-종류. 처음이라 놀란 나머지 과하게 반항할 때를 대비한 부드러운 천연가죽 구속구. 마지막으로 사진 촬영도 동영상 촬영도 예약 촬영 등등도 가능한 카메라 되시겠다.

비페르는 여느 때처럼 자신을 배웅하는 젤먼에게 말했다.

“오늘은 외박할지도 모르겠다.”

노집사는 조금 슬퍼하면서도 공손히 대답했다.

“네. 알려지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결국 주인마님은 사내가 되게 생겼다.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비페르는 묵직한 가방 둘을 하나는 메고 하나는 손에 든 채 별장을 나섰다.

“Fesse.”

오늘도 바닷가 쪽으로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려나. 아니면 또 씻으러 갔으려나. 다정하게 불러보았지만 대답도 반응도 인기척도 없었다. 비페르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조용하다. 

“Primi?”

자리를 비운건가. 짐을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굴집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텅 비었다. 나간 모양이라고 바닷가 쪽으로 가볼까 다시 허리를 펴던 비페르가 불현듯 다시 집 안쪽으로 눈을 돌렸다.

“…….”

없다. 엉덩이야 물론 없지만 다른 물건도 없었다. 처음에는 쓰레기인가 싶었던 심하게 빈티지 풍의 가방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식칼도 없고 삼계탕 통은 있건만 어제 가져다주었던 음식 통은 없다. 기분 좋은 미소까지 드리우고 있던 비페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히 굳어버렸다.

“…어딜 간 거지.”

짐까지 다 챙겨갔다 하더라도 뗏목 하나 없는 곳이니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 비페르는 휴대폰을 꺼내어 젤먼에게 연락했다.

[예, 주인님.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원시인에게 준 파텍 필립에 위치추적 칩이 들어가 있나?”

[무브먼트에는 손대지 않았지만 시계 줄을 만들 때에 넣도록 주문했습니다.]

만일을 대비한 조치였다. 기본적으로 신발, 벨트, 그 외 시계나 반지 등의 액세서리에 칩을 넣어 두었다. 다른 이가 해킹할 것을 대비해 더미 칩도 세계 곳곳에 뿌려놓았다. 이 섬에도 별장 내의 고용인과 몇몇 동물에게 삽입했다. 비페르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치를 가르쳐주게.”

[곧 전송해드리겠습니다. P-1077입니다.]

잠시 뒤 전해져 온 휴대폰 어플을 실행시키자 반짝거리는 불빛들이 섬의 평면도 위로 떠올랐다. 불빛은 다 해서 서른 개가 넘었다. 비페르는 그 중 P-1077을 터치펜으로 눌렀다. 액정화면 위로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대략적인 거리가 나타난다.

“여기는…….”

자신의 별장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비페르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설마, Primi….”

자신의 뒤를 쫓아 온 것이었나! 가슴이 찡하게 아려왔다. 기특하고도 사랑스럽다. 함께 가고 싶었다면 말로 하지. 당장에 데려가 주었을 것인데. 

‘그런데….’

왜 여기서 멈춰있는 것일까. 비페르는 별장에서부터 엉덩이가 멈춰있는 곳의 거리를 확인해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해가 떠있다면 별장의 일부와 관찰실을 어렵잖게 볼 수 있는 거리다. 밤이라면 불빛이 보였겠지. 한데 오지 않고 이즈음에서 멈춘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잠시간 들여다보고 있어도 꼼짝을 하지 않는다. 잠시 밝아졌던 비페르의 얼굴에 다시금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휴대폰에 표시되는 방향을 따라 급히 걸음을 옮겼다.

꼬르르르륵. 배가 울린다. 성무는 지치다 못해 바싹 마른 표정으로 먼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벌써 아침이다. 아니, 아침을 지나 점심을 넘어가고 있다. 시계로 눈을 힐끔 내렸다. 오후 2시다. 외국인은 집에 찾아왔을까. 나 없는 거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돌아갈까, 기다릴까, 아니면…….

“찾아…올까…….”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 성무는 침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꿀꺽 삼켰다. 목젖이 아래위로 흔들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절반쯤 보이는 도시락 통을 당장이라도 끌어내리고 싶다. 주위에 널린 돌멩이를 던져 잘만 맞추면 떨어질 것도 같은데. 하지만 참았다.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줄 유일한 지표니까. 잠깐의 행복이냐 비참한 죽음이냐를 놓고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쯤 되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후우우우…….”

누가 나 좀 살려줘. 소리칠 힘도 없어 성무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면 진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또 뭐가 있을까. 어차피 가진 게 뭐가 있는가. 내 놔라 해도 줄 수 있는 게 이 목숨 밖에 없다.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밖에 없다. 이게 널 만족시킬 수 있을 진 모르지만 그래도 불러본다, 외국인님아 나 좀 살려주세요!

“엄마… 죽기 싫어…….”

외국인 씨, 제발 나 좀 구해줘. 

“이 근처인데.”

비페르는 황야에 섰다. 손에 든 휴대폰의 액정에는 불빛과 화살표가 더욱 크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방 3m 목표물 위치. 이 정도면 사람 크기의 물체라면 충분히 보일법하다. 한데 안 보인다. 비페르의 미간이 걱정과 불안으로 좁혀졌다. 설마 누군가 엉덩이를 발견하고 납치해간 것은 아닐까. 위치추적 칩의 존재를 눈치 채고 시계를 끌러 여기다 버려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10억이 넘어가는 시계를 버리고 그냥 팔면 막노동꾼A요, 장기 탈탈 털어봤자 시계의 반의 반값도 못되는 성무를 데리고 갔을 리가 없다. 성무를 버리고 시계를 모셔가야 정상인이지. 하지만 정상에서 살짝이 벗어난 비페르의 관점은 달랐다. 고작 10억 하는 시계 따위 보다야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엉덩이가 더 귀하다. 

“…….”

전방 1m 목표물 위치. 비페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1m면 바로 코앞이다. 그런데도 안 보인다. 정말로 납치를 당한 것일까. 이렇게 가까워서야 바닥에 납작 붙어있다 해도…

“음?”

수풀 사이로 무언가 힐끔 보인다. 인공적인… 낯익은 물체다. 다름 아닌 바로 어제 자신이 들고 왔던 음식 가방이었다. 그것이 갈라져 아래로 푹 꺼진 틈새에 걸쳐져있었다.

‘설마?’

비페르는 손을 뻗어 음식 통을 집어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래쪽에서 반쯤 쉰 목소리가 약하게 흘러나왔다.

“사, 살려- 살려줘요!”

“Fesse?”

그는 아래를 굽혀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반가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그를 마주 올려다봐온다. 성무가 있는 힘껏 두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외국인님! 살려주세요, 제발!”

어쩌다가 여기에 굴러 떨어진 것인지. 비페르는 약간 당황하면서도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단순히 손을 뻗어서 끌어올리기에는 너무 깊다. 그러니 줄을 대신 할 만 한 것을 찾아야했다. 하지만 이곳은 수목이 적은 황무지다. 아래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녀석을 영원히 잠재워버릴 바윗돌은 지천으로 널렸지만 구해 줄 덩굴 같은 건 눈 씻고 봐도 없었다. 하는 수없이 비페르는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날이 더운지라 그 아래는 맨몸이다. 셔츠의 오른쪽 소매 끝을 잡고 길게 내리자 반대편 끝이 성무의 손에 닿았다.

“고, 고마워요! 으흐흑!”

성무는 기쁨의 울음을 터뜨리며 셔츠에 매달렸다. 살았다! 배도 고프고 구르느라 멍든 팔다리는 욱신거렸지만 필사적으로 매달려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헉헉대며 간신히 올라선 지상에는 친절한 외국인이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기다리고 있었다. 성무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긴장이 일시에 풀려나간다. 진짜 이대로 굶어죽게 되는 줄만 알았다. 이렇게 빨리 찾아와 주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흑, 흐윽…….”

“괜찮아, 괜찮아.”

어색하게 다독여오는 손길이 그렇게나 고마울 수가 없었다. 훌쩍거리면서 성무는 생각했다. 그래, 변태면 어떠랴. 이렇게나 착하고 친절한 사람인데. 비록 남자라지만 이 더러운 세상, 이만한 사람 또 어떻게 만나려고. 특히나 나는 뒤로 넘어져도 앞뒤 다 깨지는 팔자라서 운 좋게 여자랑 사귀어봤자 사기결혼이나 당하고 말 거야. 알고 보면 양다리, 알고 보면 어장관리. 사귀는 여자가 빚보증 서 달라 애교떨면 거절도 못할 성격이잖아. 솔직히 성별만 바꿔 생각해보라, 이건 뭐 전생에 나라를 두 번 쯤 구해야만 만날 수 있는 상대다. 텔레비전에서나 볼법한 엄청난 미인에 친절하고 착하고 다정하고 돈도 많아 보이고. 성별만 아니면 무인도에 백번이라도 다이빙하겠습니다, 외칠 조건이지 않는가. 아, 불법적인 직업은 조금 걸리긴 한다. 어쨌거나 자신에겐 과분한 상대다. 

성무는 훌쩍거리며 자신을 다독이는 팔에 매달렸다.

“집에, 집에 가고 싶어요… 홈, 집에…….”

“그래, 그래.”

비페르는 울먹이는 엉덩이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집이라는 말도 가자는 말도 알아들었다. 자신의 집에 가자고 말하기 위해 배워두었던 덕이다. 하지만 자신의 별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작은 굴집, 초라하지만 오랜 시간 머물러온 원시인의 집으로 가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착하지. 데려다 주마.”

“흐윽, 나 진짜 죽는 줄 알고… 안 오면 어쩌나 하고….”

“쉬이, 내 Primi. 울지 마라.”

“내가 다 잘못했어요, 허엉! 암소 소리!”

“괜찮아, 괜찮아.”

굴집으로 돌아가는 두 시간 여 내내 외국인의 품안에 안겨있었다. 처음 한 시간 가량은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고 나자 쪽팔리면서도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달랑 들려 안겨 본 것이 얼마만의 일이던가.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당연히 한 번도 없었다. 그 전에도 초등학교 다닐 때? 정확히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하다가 골대의 쇠기둥에 박치기 하고 정신을 잃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단순히 부촉하는 것도 아니고, 마치 어린애처럼 달랑 들어 안기다니. 다 큰 성인남성 답지 못하게 쪽팔리다. 쪽팔린데… 은근히 기분 괜찮다. 

‘힘도 좋지.’

안 무겁나? 짧은 거리도 아니고 두 시간이 넘었다. 재어본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자신의 몸무게가 못해도 60은 넘어 갈 텐데. 쌀 한가마니까지는 아니지만 반가마니보단 더 나간다. 그걸 들고 두 시간, 평탄한 길도 아닌 울창한 숲길을 걸어오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조차 없다.

‘장난 아냐. 역시 밀렵꾼이라서 일까.’

사냥꾼이라면 모름지기 수십 킬로짜리 사슴이며 멧돼지를 잡아다 짊어지고 산을 내려오는 장정이니까. 성무는 자신이 안겨있는 널찍한 맨가슴을 바라보았다. 무게를 못이긴 셔츠가 일부 찢어져버린 탓에 상체는 여전히 헐벗은 채였다.

‘취향 이상한 것만 빼면 진짜 잘난 사람인데.’

틀림없이 여자가 줄줄 따르겠지. 그런데도 뭣하나 내세울 거 없는, 심지어 남자인 자신을 좋다고 한다. 게이라고 해도 이 정도 조건이면 비슷하게 잘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역시 취향하나는 변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참 특이하다.

‘내가 만약 여자였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게 웬 떡~ 이랬을라나. 아, 아깝다. 차라리 여자로 태어날 걸.’

이제는 그런 헛생각까지 들었다. 

“아, 집이다.”

어느새 익숙한 장소에 다다랐다. 자신이 말한 집은 여기가 아닌 한국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비페르는 성무를 집 앞에서 내려주었다. 두리번두리번하던 그가 바닥을 뒹구는 가방을 붙잡았다. 구출 된 감격에 깜박 잊고 있었지만, 어제 저녁부터 쫄쫄 굶었는데!

“이, 이거, 혹시 밥? 푸드?”

성무의 물음에 비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듣기 무섭게 굶주린 손길이 가방을 열었다. 아주 가득 차있다. 외박 할 수도 있다는 것에 젤먼이 점심, 저녁, 아침까지 두둑히 준비토록 한 덕이었다. 성무는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붙어있는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외국어일 줄 알았는데 한글이다.

“저녁 A그릇, 내일 아침 B그릇. 불에 데우기만 하면 됩니다?”

성무더러 데워서 주인님께 바치라는 소리다. 덧붙여 C는 바로 먹을 것, D는 차게 먹는 음식이라고도 적혀있다. E-1과 E-2, 3은 점심저녁아침의 후식. 성무는 쪽지에 적힌 설명대로 C라고 쓰여 진 3단 통을 꺼내었다. 특등급 사골을 진하게 우려 끓인 한우 사골미역국이 담긴 그릇과 흰 쌀밥이 있다.

“고생 좀 했더니 맛있는 밥이 기다리고 있구나!”

얼른 밥을 통째로 말아 반쯤 마시듯 후루루룩 퍼먹었다. 배까지 부르고 나니 진짜 살았다는 기분이 든다. 부른 배 툭툭 두드리며 맹물로 우물우물 입가심하는 성무를 비페르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에 가까워졌다. 이제 슬슬 이불을 깔까. 그는 가방에서 압축 된 담요를 꺼내었다. 진공압축 포장을 풀자 와인색 부드러운 천이 부풀어 오르며 쏟아져 나온다. 배부른 성무가 그 모습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와, 이불도 선물해주게요?”

이렇게나 친절한 사람이 또 있을까. 성무는 얼른 일어나서 외국인의 손으로부터 담요를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제가 깔게요!”

푹신한 이불~ 이불이다~. 비록 더운 곳이라지만 비 오거나 해가 지면 약간 싸늘하기도 했다. 게다가 감촉이 너무 좋다. 뺨만 살짝 대봤는데 절로 눈이 감길 정도로 보드랍고 푹신하다. 성무는 얼른 집으로 기어들어가 바닥에 담요를 펼쳐놓았다.

“아아, 좋다. 살만하네.”

바닥에 납죽 엎어져 뺨을 부비작거린다. 뒤쪽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이어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기 존재하는 또 다른 인간은 단 한 명뿐이니까. 성무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Fesse.”

아주 마음대로 잡아 잡수세요, 하는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승천한다.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대체 어디서 툭 튀어나와 정원에 떨어졌는지. 귀신이니 전생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들은 조금도 믿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살짝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일찍 가신 아버지가 어찌 힘이라도 좀 쓰신 건가. 그의 부친이 들었다면 헛소리 KIN이라고 대꾸해줬겠지만.

“착하기도 하지.”

“엉?”

성무는 엎드린 고대로 머리만 살짝 돌려 다가오는 비페르를 바라보았다. 뭐가 착해? 비페르는 어리둥절해하는 차려진 밥상을 그대로 놔둔 채 식탁 데커레이션을 시작했다. 가방을 열어 우선 향초부터 꺼내었다. 연록색의 아로마 향초 둘을 세워놓고 미약 성분이 든 향초를 만지작거렸다. 쓸까 말까. 약에 의존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싫어하는 편이지만 엉덩이는 처음이다. 게다가 여성기에 비해 항문은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고통과 부담감이 더욱 큰 편이라고 들었다. 어차피 분위기만 돋구어줄 미미한 것이니까. 하나만 꺼내어 세워놓았다. 그 모습을 성무가 눈을 깜박깜박하며 바라보았다.

“양초네?”

이왕이면 전구가 더 좋지만 양초도 나쁘지 않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세 개의 초에 모두 불을 켜는 외국인의 모습에 성무는 혀를 쯧쯧 찼다. 아무튼 돈 좀 있는 것들은 아낄 줄을 몰라요. 하나만 켜도 충분히 밝은데. 이따가 외국인 가고 나면 얼른 두 개는 꺼야겠다.

“초 고마워요.”

속마음이야 어떻든 성무는 최대한 살갑게, 배시시 웃어보였다. 앞으로 나 더 잘할게, 책임져주라. 최소한 한국에 갈 때까지 만이라도. 사실 외국인이 언제 떠날지 몰라 탈출하려 했던 거지 계속 곁에 있어만 준다면 무인도 생활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언젠가 섬을 떠날 사람이니까. 계속해서 이렇게 돌봐 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저 외국인에겐 그럴 이유도, 의무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내게 반한 거라면 말이야.’

취향 참 변태답게 독특하다 싶지만 암만해도 그런 듯하다. 음식을 가져다 준 것도 입막음용이 아니라 개울에서 날 처음 보고 반한 탓이었어! 어쩐지 단순 입막음용 치고는 너무도 부지런히, 또 비싼 음식을 가지고 온다 싶었다. 

성무는 고개를 작게 끄덕끄덕했다. 그래, 남자라도 괜찮아. 무인도에 갇혀서 평생 혼자 사느니 남자든 여자든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성이든 곁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버리지만 않으면 돼! 책임지고 버리지만 마! 그는 결심했다. 버릴 거면 위자료로 한국행 비행기 표와 차고 있는 시계마저 내놔라 그래야지. 즉, 이혼 할 거면 20억+비행기 표 값을 내놓으란 소리다. 버림받아도 평생 먹고사는데 지장 없겠다.

“으엑!”

그때 약간 차가운 손길이 엎드린 허리로 뻗어왔다. 그대로 길게 등골을 따라 목 아래부근까지 올라가더니 어깨에 걸친 원시인 룩 끈을 붙잡아 내린다. 성무는 이놈 또 이러네, 하는 눈으로 외국인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무튼 툭하면 변태 짓이야.”

왜, 또 거시기 만지게? 이젠 피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솜씨가 능숙하여 제법 기분 좋기도 했다. 여자였다면 아주 그냥 황홀경에 빠져들었을 텐데. 성무는 만질라면 만져라, 하는 식으로 그냥 보드라운 담요에다 뺨을 문질거리고 있었다.

“착하군.”

비페르는 흐뭇하게 부드러이 감촉 좋은 피부를 매만졌다. 햇빛에 주로 그슬린 것은 팔다리고 몸통은 노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 피부만은 타고나게 좋았던 데다가 같은 중량의 세종대왕님보다 더 비싼 로션을 덕지덕지 발라댄 덕에 손맛이 제법이다. 특히 엉덩이가 최고다. 비페르는 원시인 룩을 홱 벗겨 내렸다. 성무의 몸이 약간 꿈틀거렸지만 여전히 얌전하다. 처음에는 손목 좀 잡고 끌었다고 이를 드러내더니…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이것이 바로 연애의 보람. 그사이 제법 기가 살았지만 경험은 전무한 연애세포가 자, 이제 덮쳐! 하고 크게 소리친다.

“예쁜 엉덩이.”

“뭐? 쪼, 쪽팔리지도 않냐!”

성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외국인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시커먼 사내놈 엉덩이 주무르면서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역시 변태다. 아무리 착하고 상냥하고 다정해도 이놈은 변태다. 얼굴 발갛게 붉히며 왁왁대는 성무를 비페르가 한 손으로 내리눌렀다. 쉿, 조급해하지 마.

“귀엽기도 하지.”

“그, 그런 말 다 큰 남자한테 하는 거 아니라고!”

“아주 귀여워.”

“으아, 악!”

온몸에 닭살이 분수처럼 치솟는다. 어이구 이 변태자식. 그래도 자신이 좋으니까 저런 낯짝 두꺼운 말도 지껄이는 거겠지. 성무는 관대하게 참아주기로 했다. 사랑이 죄지, 사람이 죄냐. 사랑은 미워하되 죄는… 아니, 사람은 미워하되…… 뭐였더라. 헛생각하는 성무의 귓가로 비페르의 입술이 다가붙었다.

“흐익?!”

할짝. 혀가 길게 귓바퀴를 따라 돌며 귓불을 감싸더니 이를 세워 살짝 문다. 순간 등골이 찌릿해졌다. 성무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얼어붙었다. 키스도 난생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야한 짓도 처음 당해본다. 학창시절 친구 놈을 통해 본 야동에서나 간혹 나오던 것을 직접 당하게 되다니! 귀를 물고 빨던 입술이 뺨을 지나쳐 천천히 움직인다. 기어이 입술을 덮치고는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읍! 으….”

약간 바동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은 아니라고 금세 침착성을 되찾았다. 성무는 눈을 꼭 감고는 이 혀와 입술의 주인은 미인임,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미인은 미인이다. 비페르는 잡아먹을 듯 거칠게 입술을 빨고 깨물며 속을 헤집었다. 물론 위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손도 열심히 제 할일 중이었다. 한 손으로는 귀여운 원시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로 허리 아래쪽을 탐색해갔다. 특히 엉덩이 위주로. 손대면 손댈수록 감칠맛 나는 엉덩이다.

“하우, 윽!”

성무는 간신히 놓여난 입으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외국인의 농염한 입술은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목덜미에 찐한 키스마크 하나, 쇄골에는 특별히 두 개. 그리고 그 아래로는…

“우왁! 머, 멈춰!”

찌찌는 왜 빨아! 발갛고 조그만 돌기. 암만 빨아봐야 여자도, 수유할 애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오는 건 없는 허무한 젖꼭지다. 그걸 뭐든 뱉어내라는 듯 마구 쪽쪽 빨아대는 것이 아닌가. 

“나, 나 남자야! 빨아봤자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

안 나옵니다. 진짜로. 하늘에 걸고 맹세 할 수 있다. 그때 빨아대기만 하던 비페르가 이를 세웠다. 따끔함과 동시에 밀려드는 묘한 감각에 성무가 몸서리를 쳤다.

“아냐! 나올지도 몰라! 그러니 깨물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 피를 보려고 드냐, 이 잔인한 놈! 성무는 외국인의 금빛 머리통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그만 오물거려! 기분 이상해져!

“이, 이상하다고….”

밀쳐지는 바람에 고개를 들고 내려다봐온다. 차갑게 이글거리는 눈빛에 성무의 기세가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는 조금 울먹하면서 중얼거렸다.

“진짜로… 기분 이상하단 말이야…요….”

기분이 이상. 이상한 기분. 즉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비페르는 약간 부푼 유두를 손가락 끝으로 붙잡아 비비며 옅게 웃었다. 작은 몸이 파드득 떤다. 처음이라 낯설고 부끄러워하곤 있지만 감도는 꽤 좋은 듯하다.

“괜찮아, Fesse. 이상한 게 아니다.”

“지, 진짜 이상한데….”

진짠데…. 하지만 비페르는 성무의 칭얼거림을 가볍게 묵살했다. 처음이니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익숙해지면 가슴을 만져지는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살짝 선 채 가슴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붉은 돌기에 입 맞춰주고는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몸은 정직하다고 검은 수풀 사이의 남성기에 힘이 들어 가있다. 뒤늦게 그것을 눈치 챈 성무가 얼굴을 붉혔다.

“으, 그게…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그래, 그래. 귀여운 Primi.”

성무는 빨개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어제처럼 또 거시기 만지겠지. 그래도 기분은 좋았기에 수치와 불안 외에 희미한 기대감도 들었다. 잘 하긴 잘 하더라고. 하긴 저 얼굴이면 경험도 많았겠지. 자, 어서 만지세요- 하고 다리도 슬쩍 벌려주었다. 쪽팔리기는 진짜 쪽팔렸다. 

그 모습을 보고 비페르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귀엽게 사랑스러우며 기특하기까지 할까.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와가지고 가슴 설레게 만든다. 아래쪽은 이미 욕망으로 가득 차 얼른 저 작은 몸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고 싶다고 성화지만 성급히 침범했다가는 틀림없이 피를 본다. 그랬다간 심약한 엉덩이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려 들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천천히, 상냥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 번 좋아하게 되면 그 이후로야 항상 곁에 두고서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붙잡아둘 자신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떠나겠다는 것만 제외하고 뭐든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내 원시인. 유지비만 연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수 조 원짜리 항모라도 원한다면 사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비페르는 가방에서 미리 꺼내놓았던 튜브 형식의 젤을 집어 들었다. 성무의 몸을 도로 뒤집은 뒤 뚜껑을 열고 손바닥 가득 짜 엉덩이를 벌리고 항문 입구에다 들이붓다시피 발랐다. 그 차가움에, 엄한 곳엘 향하는 손길에 성무가 드러누운 채 펄쩍 뛰었다.

“자, 잠깐만! 거기가 아냐, 앞이라고!”

“괜찮다, 걱정마라.”

“안 괜찮아! 대체 왜 거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성무는 입을 합 다물었다. 그래, 기억이 난다. 학창시절 친구 놈들과 함께 보았던 야동. 당연히 노말 물이었고 당연히 여성의 음부로 거시기가 들락거렸지만… 드물게 항문으로 하는 것도 있었다. 거 뭐라더라… 애널 섹스? 아무튼 그쪽으로 했다. 한다고 그랬다. 더럽지 않냐고 투덜거리자 친구 놈 중 하나가 남자끼리는 만날 저기로 한다면서 그랬다. 남자끼리는……. 성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 안 돼! 싫어!”

갑자기 격렬히 거부하는 성무의 태도에 비페르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이제야 반응이 나오는군. 처음인데 너무 얌전해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었다. 성적인 용도로는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곳으로 타인의 남성기를 받아들이는 일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 상대라 하더라도 처음이라면 겁이 나는 게 당연하다. 비페르는 도망치려드는 성무의 몸을 꾹 눌러 잡으며 다정하게 달래주었다.

“괜찮다.”

다만 한국어가 좀 많이 짧아서 문제지만.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으악, 소, 손대지 마!”

성무는 후회했다. 왜 엎드렸을까. 뭐 하러 엎드렸을까. 어째서 얌전히 뒤집게 놓아두었단 말인가! 등을 콱 내리누르니까 어찌 반항 할 방도가 없다. 다리도 저놈 다리가 내리눌러 꼼짝을 못하겠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곳이 두 팔인데 뒤로 바동거려봤자 힘도 안 들어가고 헛손질만 자꾸 한다. 성무는 포근한 담요 위에 얼굴을 처박았다.

“으허엉! 개새끼야! 하지마, 하지 마! 으악! 너, 넣었…!”

젤로 범벅이 되어 미끌미끌한 손가락이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그러더니 거침없이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눈앞이 새빨개졌다가 새까매졌다가 하얗게 물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벼, 변태 새끼! 멈추- 읏?!”

그때 순간 꼬리뼈에서 숨골까지 전류 같은 것이 짜릿 흘렀다. 성무는 소리치는 것도, 발버둥치는 것도 멈춘 채 눈과 입을 동시에 크게 벌렸다. 헉, 이게 뭐냐. 성무의 반응에 비페르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찾았다. 밑에서 세 번째 위치다. 이 체형과 몸집의 동양인들에게서 약 21%확률로 보이는 위치였다. 제법 보편적인 전립선 위치를 지닌 한성무 씨였다.

“조금만 참아, Fesse. 길들이지 않으면 다치니.”

“길들- 앗! 하, 하지…윽!”

속을 살금살금 긁고 눌러대는 손가락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침입해온 손가락의 개수가 하나 둘 늘어났다. 어느새 치켜 들린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 세 개, 이어 네 개째가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으윽, 끅… 흣! 개새… 읏!”

으아앙, 엄마, 내 몸이 이상해요! 심지어 이런 상황에 아랫도리가 멋대로 서버린다.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었다. 왜, 그 의식 없는 남자의 전립선을 자극해 사정케 만들어 정자 무단 채취를 한 사건도 있지 않는가. 한 손으론 뒷구멍을 공략하고 다른 손으로는 앞을 능숙하게 매만져주자 얼마 못해 희뿌연 액이 와인색 담요 위로 튀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성무는 담요 걱정을 했다. 비싸 보이던데, 세제도 없는데 얼룩 안 지워지는 건 아니겠지!

“후우… 으…….”

돼, 됐겠지. 이걸로 끝이겠지. 제발! 성무는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하지만 비페르는 꿈틀대는 몸을 다시 재빠르게 내리눌렀다. 이제 겨우 준비를 마쳤을 뿐이다. 다행히 원시인의 구멍은 그리 좁지 않은 듯했다. 엉덩이만큼이나 내부도 탄력적이다. 입구도 제법 쭉쭉 잘 늘어난다. 천천히 살살 넣으면 그럭저럭 들어갈 법했다. 비페르는 자신의 바지춤을 끌러내며 볼록 솟은 엉덩이에 입 맞췄다.

“암소 소리, Fesse.”

엉덩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더는 못 참겠어.”

“뭐, 뭐…!”

뭘 더는 못 참겠다고?! 성무는 눈물을 머금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나 이대로 당하는 건가. 이대로 당하는 거야? 치켜 들린 엉덩이에 뜨거운 것이 닿아왔다. 성무는 애꿎은 담요를 물어뜯었다. 으악, 어머니! 아버지! 장남이 되어 제사 한 번 못 챙기고 이렇게 갑니다! 덧붙이자면 아버지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계신다.

“힘을 빼, Primi.”

한 손으론 성무의 등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론 엉덩이 사이를 잡아 벌리며 비페르는 천천히 자신의 것을 젤로 잔뜩 젖은 입구에 가져다 대었다. 마음이야 바로 치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 작은 몸이 너무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때문에 신사적으로 스스로의 욕구를 누른 채 느릿이 끝부터 조금씩 집어넣었다.

“헉!!”

드, 들어온다아악! 성무는 담요를 악물었다. 으허엉, 나쁜 새끼! 밥만 가지고는 부족해! 차고 있는 시계 마저 내놔! 긴장으로 인해 힘이 잔뜩 들어간 엉덩이를 커다란 손이 찰싹 내리친다. 아야하고 틈이 생긴 사이, 굵직한 것이 쑤욱 밀고 들어왔다. 숨이 컥 막혔다. 뱃속이 가득 차다 못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다. 엉덩이 안쪽이 따끔따끔한 것이 결국 찢어져 피를 본 모양이다. 성무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담요를 쥐어뜯었다.

“허억, 억!”

그래도 적응 빠른 몸뚱이 덕에 이물질이 가득 찬 직장이 아주 조금 편해졌다. 숨을 토해낼 정도로. 성무는 있는 대로 꽥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아파!! 빌어먹을 변태 개새끼야아!!”

“…착하지.”

“안 착해! 착한 사람 안… 컥! 우, 움직…!”

움직이지 말란 말이 목구멍에 탁 걸렸다. 어휘력 부족으로 어찌 달래줄 말을 못 찾은 비페르가 말 대신 몸으로 달래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열기를 가득 품은 굵직한 막대가 스르륵 빠져나갔다가 거세게 치고 올라온다. 정확하게 일 지점, 약 21% 확률로 지닌 그 부분을 향하여. 눈앞이 번쩍했다.

“앗, 아읏!”

성무는 잠시 뱉었던 담요를 다시금 잘근잘근 씹었다. 이상한델 막 찌르고 있다. 전립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성무는 내 몸이 왜 이러나, 엉덩이가 미쳤나봐, 눈물을 흘리며 윽윽거렸다. 진짜 이상하다. 왜 같은 남자새끼 거시기가 들락거리는데 아프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냐. 딱 미치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등골이 찌릿찌릿하다.

“아우, 윽, 으읏!”

앞쪽까지 만져지니 그냥 돌아버리겠다. 변태새끼도 흥분했는지 등에 뜨거운 숨결이 와 닿는다. 굵은 막대가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동시에 단단한 허벅지가 엉덩이와 찰싹찰싹 맞붙는다. 성무는 그냥 넋을 놓기로 했다. 아- 나도 몰라. 빠져나갔던 성기가 뿌리 끝까지 다시 들이박힌다. 엉덩이를 넘어서 골반까지 자르르 울릴 정도로 힘찬 허리 짓이다.

“읏… 아, 아윽! 헉….”

이마를 따라 뺨과 턱 주위까지 땀방울이 번져 흐른다. 일점을 깊이 찌르고 긁힐 때마다 눈앞에서 별이 반짝반짝 맴을 돈다. 부드러운 손길이 아래쪽에서 흔들리는 것을 감싸 잡아당기고 손끝으로 누르며 간질인다. 앞뒤로 가해지는 익숙지 못한 자극에 정신줄을 제대로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 아아아아읏! 윽, 흐으…….”

흰 액을 토해내며 짐승처럼 길게 소리를 내질렀다. 욕정에 잠긴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아래턱도 함께 덜덜 떨렸다. 한바탕 쾌감이 휩쓸고 지나가 늘어진 몸을 잔뜩 끌어당기며, 비페르는 가장 안쪽에다 진득한 욕망을 토해놓았다. 

“으흑, 우…….”

흐으윽, 이게 대체 뭔 일이래…. 성무는 훌쩍거리며 좌우로 고갯짓했다. 이게 뭐야, 내가 미쳤지.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코끝을 킁킁대는 그를 비페르가 자신의 것을 삽입한 채로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앉는 꼴이 되자 속에 들어찬 것이 조금 더 깊숙이 박혀 꿈틀거린다.

“으왁! 하, 하지 마…!”

긴장과 공포로 파르르 경련하는 뺨에 입술이 와 닿는다. 흘러내린 눈물을 핥아주는 혀끝은 더할 나위 없이 상냥했다. 나쁜 자식. 성무는 중얼거렸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야.

“지, 진짜-읍!”

고개가 뒤로 돌려지고 입술이 막혔다. 이번에는 처음처럼 거칠지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성무의 반응을 이끌어내듯 천천히 입술 위를 덧 핥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움츠러든 혀를 톡 건드리더니 움직여보라는 듯 가만히 넣고만 있었다.

“응…으….”

숨이 답답해서라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성무는 혀를 조금 움직여보았다. 안쪽에 들어와 얌전히 도사리고 있는 것을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휘감아온다. 콱 붙잡힌 것에 어쩐지 약이 올라 나가라고 마구 밀쳐냈다. 하지만 침입혀는 그 주인만큼이나 만만치가 않았다. 슬쩍 도망치더니 다시금 감아온다. 파닥 도망쳤다가 이번에는 이쪽에서 먼저 휘감아보았다. 혀와 혀가 서로 얽히고 비벼댄다.

여기저기 놓인 향초들은 처음보다 훨씬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엉켜있던 두 몸이 더욱 바싹 붙이며 또다시 열기와 거친 숨을 토해내자 확 치솟는 이산화탄소 비율에 파르르르 가는 경련을 한다. 문이 뻥하니 뚫려는 있다지만 워낙 좁은 곳이라서 불타기가 아슬아슬하다. 촛불은 그 뒤로도 몇 차례 생명의 위험을 느껴야만 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다. 성무는 담요를 움켜쥔 채 쌔액쌔액 깊이도 잠들어있다. 이따금씩 약하게 낑낑대기도 했다. 아무래도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픈 모양이었다. 특히 허리와 엉덩이가.

어제 무려 7시간이나 걷고 그 중 두 시간 여는 60kg이상의 짐까지 짊어졌음에도 성무를 녹초로 만들어놓은 비페르는 그래도 지치지 않았던지 일찍 눈을 떴다. 7시간 동안 걷지 않았더라면 애 하나 잡았겠다. 몸을 일으켜 앉은 그는 잠시 옆에 잠들어있는 성무를 내려다보다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통화음은 채 두 번을 울리지 않았다. 집사 젤먼의 반가운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오전 중으로 돌아 갈 예정이다.”

[함께 오십니까?]

“그래.”

이번에는 기필코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제 발로 따라오려고까지 했으니 거부하진 않겠지. 젤먼이 물어왔다.

[그렇다면 마중을 나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그렇게 하게.”

숲 안쪽까지는 못 들어와도 황무지 부근까지는 차도 다닐 수 있다. 거기서부터 별장까지의 거리만 해도 한 시간 여니. 비페르는 통화를 끊고 다시 잠든 엉덩이로 시선을 돌렸다.

“Fesse….”

우느라고 퉁퉁 부운 얼굴이 못생기긴 참 못생겼건만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비페르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성무의 몸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머리가 우웅 울린다. 성무는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더듬더듬 만져보니 퉁퉁 부었다. 이러니 눈이 안 떠지지.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려 게슴츠레 눈을 떴다.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웬 탄탄한 남의 가슴이다. 그걸 멍하게 보고 있다가 헉, 급한 숨을 들이켰다.

‘으아아아악?!!’

맞다, 어제! 어젯밤…은 아니고 저녁…이라기에도 좀 이르고. 조금 늦은 오후쯤에 벌어진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좌라락 떠올랐다. 외침과 발버둥, 그리고 하악하악. 성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내리누르듯 감쌌다. 아놔 너무 느꼈어. 처음에나 좀 칵칵거렸지 나중에는 달라붙고 끌어안고 난리도 아니었다. 뇌를 끄집어내어 대면이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다. 너 정신이 있는 뇌냐 없는 뇌냐. 니놈 뇐데요.

‘어흐흐흑, 쪽팔려… 그냥 이대로 눈 감을래…….’

얼굴을 두 손으로 주물주물하며 담요에 머리를 비벼대고 있는데 옆에 누워있던 놈이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가 부스럭부스럭 하더니 밖으로 걸어 나간다. 성무는 여전히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으면 먼저가신 부모님 얼굴도 못 뵙겠어! 한 번 더 덧붙이자면 아버지 아직 살아계신다. 멀쩡하십니다.

“으…응…?”

한참을 그러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무언가 좋은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왔다. 성무는 슬그머니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밤엔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남의 침 빼고.

“…쓰읍.”

와, 맛있는 냄새다. 저놈이 요리라도 하는 건가. 냄새를 맡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뱃속이 꼬르륵 울렸다. 배고프다. 삼분의 일 쯤 실눈을 뜨고 고개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나갈까 말까. 배는 고픈데. 냄새도 딥따 좋은데.

“에라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잖아.”

그래, 일단 먹고 보자. 밥이 무슨 죄냐. 먹어 줘야지. 성무는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움직이니까 더더욱 밥통이 요동을 친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더듬거려 옷을 찾다가 포기하고 그냥 나갔다. 어차피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뭐.

“밥!”

어기적어기적 기어나가자 불을 피워 그 위에다 어제 봤던 그릇 B 중 하나를 얹어놓은 것이 보였다. 양쪽에 돌을 괴어 그릇 아랫부분에만 불길이 날름날름 닿고 있다. 속을 보니 무언가 죽 같은 것이 끓고 있다. 수프다. 불가에도 은박 같은 걸로 감싸진 것이 구르고 있었다. 군고구마인가? 성무는 웃통은 여전히 벗은 채 아래만 입고 있는 외국인의 곁으로 슬금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

무어라 톡 쏘아주고 싶었지만 밥을 앞에 두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화냈다가 먹지 마, 이러면 어떡하냐고. 화를 내든 아부를 떨든 먹고 난 뒤의 일이다.

“Primi.”

“네?”

비페르는 미소 띤 채 자신의 옆에 쪼그려 앉은 성무를 바라보았다. 돌아 갈 때는 당연히 옷을 입혀야지. 조금 찢어지긴 했지만 자신의 셔츠를 입히고 담요로 감싸면 될 것이다. 그는 불가에 놓아두었던 음식을 나무막대로 성무 쪽으로 밀어다 주었다.

“먹어라.”

“앗, 고마워요!”

성무는 얼른 집어 들려다가 앗 뜨거! 하고 손을 호호 불었다. 잠시 놓아두자 그럭저럭 손댈 만큼 식었다. 불에 타지 않도록 감싸둔 것을 벗겨내자 하얀 자기 그릇에 담긴 폭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겁지겁 뜯어먹고 나자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이 내밀어졌다. 성무는 그것을 홀짝이며 외국인을 힐끔거렸다. 뭐, 좋은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냥 넘기기엔 당한 게 좀 큰데… 아팠다고. 지금도 온몸이 욱신거린다. 성무는 입술 끝을 삐죽거리다가 외국인의 손목에 찬 시계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 시계 나 주면 안돼요?”

버림받을 때를 대비해서 시계나 하나 더 얻어내자. 게다가 저 시계가 더 비싸 보인다. 비페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무는 눈짓하며 외국인이 차고 있는 시계를 가리켰다. 그거 나 달라고. 왜, 싫어?

“달라고?”

“어. 나 줘요.”

이 엉덩이는 시계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비폐르는 차고 있던 시계를 벗어 내밀었다. 얼른 받아 든 성무가 그것을 오른쪽 손목에 떡 찬다. 좌 파텍 필립, 우 바쉐론 콘스탄틴이다.

“헤에.”

쌍 시계다! 성무는 싱글벙글거리며 시계를 매만졌다. 이거 두 개면 위자료로 충분하겠지. 20억, 쫓겨나도 평생 먹고 살 돈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없다면 말이다. 자고 일어나니 사탕 하나 만 원, 자장면 한 그릇 오십만 원.

“Primi.”

“왜요?”

배도 채우고 시계도 받아서 기분 좋아진 성무가 냉큼 대답했다.

“내 집으로 가자.”

따라와라, 잘 키워주마. 성무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갈게요.”

여기 남아있느니 외국인 따라가는 게 훨씬 좋지 뭐. 적어도 삼시 세끼 맛있는 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비페르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는 일어나 굴집에서 담요와 찢어진 셔츠, 구석에서 뒹굴던 원시인 룩을 가지고 나왔다.

“입어라.”

“지금 바로 가게요? 알았어요, 알았어.”

급하기는. 성무는 원시인 룩을 먼저 입고 그 위에 셔츠를 걸쳤다. 키 차이가 나다보니 엉덩이를 덮고도 남는다. 어깨 부분이 좀 뜯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상체는 다 가렸다. 비페르는 거기에 담요까지 덮어주었다.

“가자.”

“자, 잠깐만요!”

성무는 허둥지둥 남은 음식들을 챙겼다. 가는 길에 어제 미처 챙기지 못한 배낭도 가지고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거기에 자신의 짐이 다 들어있다.

짐을 다 챙긴 성무는 앞서가는 비페르의 뒤를 쭐래쭐래 따라갔다.

도로가 없는 곳인지라 별장 바깥에서 쓰이는 차는 오프로드 형 지프였다. 모양새는 좀 투박해도 어지간한 스포츠카 뺨치게 돈을 덕지덕지 바른 성능 좋은 놈이다. 그 차 다섯 대가 덜컹거리며 별장을 출발했다. 차도 다 헬기로 들여와야 했을 뿐더러 쓸 일도 별로 없기에 숫자는 많지 않다. 그래도 주인님 모실 차 한 대 빼고 나머지 넉 대에 운전수 포함 호위인원이 각각 여덟 씩 올라탔다. 

오픈 된 차체 위로 젤먼이 몸을 일으키며 팔을 크게 흔들었다. 여기서 대기하자는 뜻이다. 너무 안쪽으로 들어가면 숲이라 자연보호주의자인 마스터께서 언짢아하실 거다.

“나는 또 왜 끌고 나와서는….”

반강제로 끌려나온 닥터가 젤먼의 옆자리에 앉아 투덜거렸다.

“한국어 통역 가능한 사람이 자네뿐이잖은가. 게다가 주인님 성격상 엄한 놈이 원시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틀림없이 기분 나빠하실 게야.”

“그놈더러 한국어 좀 빨리 배우라 그래! 귀찮게.”

“그것보다 어떤 분이실지 참으로 궁금하군.”

“…나도 그건 그래.”

대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귀엽기에 그 목석같은 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닥터와 젤먼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숲 쪽을 바라보았다.

“안아줄까.”

헥헥거리는 성무를 향해 비페르가 물었다. 성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봬도 사냥한답시고 숲을 뛰어다녔던 몸이다. 절대로 허약하지 않았다. 다만 어젯밤의 피로가 좀 컸을 뿐이었다. 다 큰 남자가 또 안겨 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쪽팔려 성무는 숨을 가다듬으며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면 드디어 황무지다. 거기서 빛이 보이는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읏차!”

힘내자. 가면 편히 쉴 수 있다. 어제 기억에 따르면 바로 이 즈음만 통과하면 숲이 끝난다. 성무는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내달렸다. 난 약하지 않다고!

“…헉!”

풀쩍 뛰어 수풀을 벗어 난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 뭐냐 저게.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차가 한 대 두 대… 총 다섯 대. 거기에 모여 서있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다. 심지어 다들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복장도 심상치가 않다. 무언가 조직이라거나 아니면 군대… 경찰?

‘무, 무장경찰?!’

성무는 쫄았다. 바싹 쫄았다. 엄마야, 나 잡으러 온 건가! 아니면 밀렵꾼 외국인을? 힐끔 돌아보았다. 외국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저쪽 사람들이 정중하게 인사도 해온다. 이건, 이건-!

“소, 속였구나!”

밀렵꾼이 아니었어! 사실은 저 무리의 우두머리, 군대나 경찰 같은 곳의 지휘자였던 것이다! 밀렵한 날 잡으려고, 증거 수집도 하려고 그렇게 쫓아다닌 것인가!

“이, 이 배신자아아!!”

“Primi?”

의아스런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고 성무는 즉각 뒤돌아서 달렸다. 눈물을 흩뿌리며 뛰었다. 나는 다 줬는데! 믿고 다 줬는데! 배신하다니! 역시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으허어어엉! 나쁜 놈, 나쁜 새끼! 날 팔아먹어? 이 빌어처먹을 변태 양놈의 새끼야아아!

성무의 뒷모습은 빛의 속도로 사라져갔다. 그 와중에 흘러내린 담요가 팔랑팔랑 흙 땅을 내리덮는다. 약간 멍하게 서있는 비페르의 곁으로 노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방금 그 분이….”

“…음, 좀 놀란 모양이로군.”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비페르는 젤먼을 돌아보았다.

“당장 수색 시작하게. 시계를 차고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겠지. 단, 내가 가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고선 절대로 손을 대지 말도록.”

“예, 주인님.”

모여 있던 사람들이 집사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페르는 다시 숲 쪽을 돌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귀여운 것.

“뛰어봤자 내 정원의 원시인이지.”

내 정원에 원시인이 산다 End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