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비페르는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은 아니고 필요한 단어와 대화 위주로 조금씩 익혔다. 한글 자체야 쉬운 글로서 정평이 난 것이기에 읽는 것은 제법 능숙해졌다. 하지만 한국어 구사 능력은 정원 서식 원시인의 영어실력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앞으로 무척이나 실용성 높을 한국어를 익히고 있었다.
“여기가 좋아? 귀여운 녀석. 어떻게 해 주길 바라나.”
일명 밤일의 대사다. 듣는 것도 가능해야하기에 안기는 쪽의 대사는 히어링 위주로 공부했다. 싫어, 좋아, 앗 거기, 좀 더, 최고야, 죽을 것 같아, 몸이 뜨거워, 당신 것 너무 커 등등. 그런 적나라한 대사들을 엉덩이가 입에 올린다 생각하니 가슴 속 한구석이 뜨끈해졌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성무 씨는 비페르가 즐거운 밤-때로는 낮-을 함께 보냈던 여자들에 비하면 볼품없었다. 그 여자들 중 한 명에게 덤으로 붙여놔도 정상적인 취향의 남자라면 차라리 돈을 더 줄 테니 덤 빼! 라고 화를 낼 정도다. 무슨무슨 미인대회 타이틀 하나쯤은 기본으로 지닌 미녀들과는 비교 자체가 무색한 것이다. 하지만 비페르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술렁거렸다.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인기 절정의 젊은 여배우든 갓 선출 된 미스 유니버스든 코앞에다 놓고 봐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성욕이야 느껴졌지만 그저 생리적인 반응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정 이상의 미모만 소유하고 있다면 누가 침대에 누워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욕구만 충족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다.
한데 지금은 심장이 마치 짝사랑 상대를 앞에 둔 사춘기 소년처럼 두근거린다. 물론 비페르는 그냥 좀 기분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사춘기는 겪어 봤어도 짝사랑이니 첫사랑이니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도 왜 이러지, 검사를 받아봐야 할까 싶을 뿐이다. 덧붙이자면 그의 부친도 비슷했다. 닥터의 설대로 유전적으로 연애세포 소실 종자일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처음이겠지.”
처음일 것이다. 키스가 무척 서툴렀어. 처음이겠지. 처음이어야 한다. 그렇게 못생겼는데 다른 남자가 손댔을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귀여우니.”
귀여운 것이 문제다. 게다가 엉덩이는 일품이지 않던가. 여인의 것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품고 있었다. 비페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 손대 봤다면 맛도 보고 싶어질 엉덩이다.
“…….”
설마. 비페르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터치스크린 레이저 펜을 까닥였다. 아니겠지. 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밤중에 뛰쳐나가 뽀얀 둔덕 사이 안쪽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프리미.”
다른 놈과 바람피운 적, 없겠지. 그 귀여운 엉덩이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인 적, 당연히 없겠지. 역시 최대한 빨리 데려와야겠다. 비페르는 정원에 사람의 출입을 엄금해둔 스스로의 결정에 찬사를 표했다. 엉덩이를 가린 둥 만 둥 야하게 돌아다니는 꼴을 다른 놈이 볼 수도 있었다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자각 없이 순해빠진 것이 더 문제다. 몸도 약하고 힘도 약하고 크기도 작고. 데려다 돌보며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험한 꼴 당할 게 뻔하다.
확실하게 보호 해 주지. 제 침실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는 원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비페르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삼계탕님은 점심과 저녁은 물론이고 아침까지 살뜰히 챙겨주시고는 세상을 완전히 하직하셨다. 국물 한 방울, 밥알 한 톨 남김없이 완벽히. 심지어 인삼과 대추와 밤 등등도 흔적 하나 없이 뱃속으로 사라졌다. 저녁때는 오지 않았지만 아침에는 시간 맞추어 찾아 온 여우는 큼직한 닭 가슴살 한 조각을 얻어먹었다. 이제는 대놓고 내 입에 고기-를 몸짓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성무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애완동물 한 마리 키우는 셈 치지 뭐. 다만 키우고 싶었던 충직한 개보다는 집사를 간택하는 고양이에 가까웠지만. 너는 내 밥 셔틀.
“이 통, 큼직한 게 제법 쓸 만하겠는걸?”
성무는 보온 효과가 떨어진 삼계탕 통을 살펴보았다. 보온장치 때문에 좀 무겁기는 하다. 하지만 이 정도 크기라면 거북이 등껍질만큼이나 쓸모가 많을 것이다. 뚜껑도 있고. 그는 통을 들고 개울로 향했다. 깨끗이 씻어서 쓸 셈이었다.
“이왕 온 김에 물도 좀 떠갈까.”
성무는 일단 나뭇잎 꺼칠한 거 하나 따서 기름진 통 속을 박박 문질러 씻었다. 세제가 없으니 기름기를 완전히 제거 할 수는 없었지만 쓰다 보면 괜찮아 질 것이다. 물에 닭기름 좀 뜨면 어때. 먹고 탈 안 나면 그만이다.
커다란 통을 씻고 물도 뜨고 하다 보니 몸의 절반 정도가 젖었다. 가죽 원시인룩도 여기저기 축축하다. 성무는 옷을 벗어 햇볕 잘 드는 바위 위에다 걸쳐놓았다.
“쩝. 벌거벗고 멍하니 앉아있기도 뭣하고.”
어차피 벗고 젖은 거 몸이나 씻어 볼까. 성무는 물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비페르의 컬렉션이 하나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세수부터 깨끗이 하고 목과 귀 뒤를 벅벅 문질러 씻었다. 나뭇잎도 몇 장 더 따서는 본격적으로 몸을 씻기 시작한다. 비록 목욕비누도 때수건도 샴푸나 린스도 없었지만 나름 열심히 때 빼고 광냈다. 그러고 나서도 물장구를 슬렁슬렁 치며 노닥거리다가 햇볕에 몸 말리고 역시나 다 마른 옷을 껴입었다.
“이제 돌아가서 로션만 바르면 되겠군!”
이 정도면 조난당하기 전보다 더 깔끔하다. 로션이야 꿈에도 못 꾸었고 겨울에는 물이 차 고양이 세수만 겨우 하는 날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귀국하게 되면 최소한 온수는 제대로 나오는 곳에서 살고 싶은데. 조금 더 바라자면 난방도 잘되는 집. 거기서 좀 더 바라자면 화장실에 욕조나 못해도 샤워부스는 있는 집. 조금만 더 욕심내자면 제대로 된 가구도 있으면 좋겠다. 가령 침대라거나 식탁이라거나. 특히 주방 시설! 또또 세탁기! 허리 펴고 설거지하고 세탁기로 빨래 돌리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 청소기도 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텔레비전도. 컴퓨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참, 전화기를 빼먹으면 안 되지.
“하아, 전부 꿈이다, 꿈.”
그래도 완전한 꿈만은 아니었는데. 성무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면 아내가 반겨주고, 차려진 밥상 받아 맛있게 먹고, 자기 전에 텔레비전 같이 보며 대화도 나누고…. 오륙년 쯤 뒤에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을지도 몰랐는데.
“…아무튼 내 팔자야.”
이제는 말짱 헛거다. 맨손으로 시작해서 언제 거기까지 가냐. 차라리 돈 많고 취향 특이한 여자 만나서 남자전업주부가 되는 것도 좋을지도. 난 시댁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회 잘 써는데. 누가 데릴사위로 좀 안 데리고 가주려나. 에이, 불가능하겠지. 누가 날 데려가. 그는 까맣게 몰랐지만 실현가능성 약 90%이상의 미래였다. 다만 돈 많고 취향 특이한 ‘여자’가 아니라 돈 많고 취향 특이한 ‘남자’라는 점이 다를 뿐. 데릴사위가 아니라 사모님-주인마님이 되는 것이다.
“어라?”
휘적휘적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성무의 눈에 낯익은 방문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시간이 되려면 아직 좀 남았는데. 성무는 의아해하면서도 손에 뭔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외국인을 향해 반갑게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또 무얼 들고 오셨습니까! 하하하하!”
어제의 첫 키스 강탈 사건은 강력 세제로 뇌를 빨아낸 듯 잊었다. 탈수 건조도 마쳤다. 때문에 또 먹을 것 추정을 가득 들고 온 외국인이 마냥 반갑고 좋기만 했다. 나 당신 사랑해!
“Fesse.”
비페르 또한 반가이 미소 띠며 성무를 돌아보았다. 까만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몸을 씻으러 갔던 모양이다. 말도 안했는데 눈치를 챈 건가. 하기야 마음 통한 사이에 키스 다음이면 뻔하다. 그래도 귀엽게 미리 준비까지 해두다니.
‘그렇게나 내게 안기고 싶었던 건가.’
기특하기도 하지. 아직 정오도 채 지나지 않은 아침이긴 하지만, 가릴 것 없는 야외기는 하지만 상관없다. 비페르는 자신의 주위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맴도는 성무에게 녹아내릴 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그래, 그런 눈 하지 않아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도록 노력하마.
“저기, 오늘은 뭐예요?”
성무는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코앞에 둔 소년처럼 기대에 차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맛있는 음식일까! 맨 처음의 물고기와 중간의 멸치볶음을 빼곤 기대를 배신 한 적 없는 외국인이다. 아니, 오히려 너무너무 뛰어난 음식들을 잔뜩 가지고 왔었다. 빵과 피자는 그야말로 시작으로, 3단 죽에서 10단 도시락, 어제는 귀하디귀한 토종 삼계탕까지! 평생 할 입 호강을 며칠 사이에 다 했다 싶을 정도다. 비페르는 들고 온 짐을 내려놓았다. 10단 도시락보다 더 넓고 높은 짐이다. 때문에 성무의 기대치는 더욱 높이 치솟았다.
“Fesse.”
짧은 부름에 성무가 음식 추정 짐에서 눈을 떼어 외국인을 올려다보았다. 뜻이야 전혀 짐작치 못했지만 하도 불러대다 보니 저 말이 자신을 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 챘다. 눈치가 없는 편이라지만 아예 바닥은 아니었다. 바닥보다 살짝 위다.
“이리와라.”
“왜요?”
그는 의심 한 조각 없이 비페르에게로 다가갔다. 이게 다 닭 때문이다. 45일짜리 흔하디흔한 육계가 아닌 최소 6개월 이상 온갖 약재를 간식삼아 먹으며 자라난 토종닭. 2kg에 가까운 우량 씨암탉을 두 마리나 얻어먹었더니 좋지 못한 기억들은 자동으로 소거된 것이다. 달구의 효험이다. 닭대가리의 부작용이거나.
순진하게 쫄랑쫄랑 다가오는 그 모습에 비페르는 스스로의 추측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었다. 그래도 일말의 의심이 남아있기는 했었다. 따라오라고 좀 잡아끌었을 뿐인데도 물어뜯는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가. 한데 어제 그리 키스 당해놓고서도 얌전히 다가와 붙는 모습이란. 더 이상 의심할 필요도 없다. 확실하다. 요 귀여운 엉덩이는 얼른 진도 더 나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제 할 이유가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는 비페르는 손을 덥석 뻗었다. 이틀 전처럼 손목을 붙잡힌 성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저기, 또 따라오라고 할라고요?”
이번에는 순순히 따라갈 생각이었다. 아마도 외국인은 제법 그럴 듯한 텐트나 야영지를 소유하고 있을 테니까. 이제껏 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식량도 풍부한 모양이고. 그러니 이성적인 상태에서라면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반갑다. 한국으로 돌아 갈 가능성도 높아지고. 때문에 성무는 손목을 잡아당겨도 얌전히 끌려갔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응?”
근데 뭔가 좀 이상하다. 성무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끌고 가는 듯하더니 안 간다. 게다가 팔이 슬금…도 아니고 대놓고 허리를 감싸 안는다. 성무의 머릿속에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이것은!
“으아아악?!!”
드디어 어제의 키스가 떠올랐다. 성무는 스스로의 기억력을 저주했다. 까마귀 고기를 삶아먹었나! 사실 까마귀는 머리가 좋다. 아무튼 그 떠오른 기억, 그 무시무시한 기억이 단순한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재생되려 하고 있었다. 성무는 몸을 바싹 굳혔다. 어쩌지, 어쩌지. 선택지는 두 가지다. 그냥 입술 내주고 앞으로의 밥과 귀국의 통로를 보장받느냐, 그제처럼 날뛰어서 무인도에 평생을 짱박히느냐. 선택의 기로에서 성무는 갈등했다. 왜 선택지가 두개냐. 매너 있게 사지선다로 해 달라. 둘 다 싫어! 하지만 후자가 더 싫다. 잠깐의 고통이냐 평생의 고통이냐. 결국 성무는 잠깐의 고통을 선택하고는 눈 딱 감았다.
“으으으으…….”
괜찮아. 눈 딱 감고 버티면 돼. 상대가 여자라고 생각하자. 그래도 얼굴은 무지 잘생겼잖아? 성무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눈앞의 외국인은 여자다. 키 크고 보이쉬하게 생긴 여자다. 나는 여자와 키스하는 거다. 내 허리를 감싸고 당기는 손과 팔은 미녀의 것이다. 턱 아래를 쓰다듬는 손길도 미녀의 것이다. 입술 위를 핥아 내리는 혀도 쭉쭉 빵빵한 미녀의 것이다. 내 입술을 틀어막고 치열을 훑으며 헤집어대는…
“우읍, 웁!”
뭐야! 왜 손이, 손이 허리에서 더 아래로 내려가는 건데! 성무는 기겁하며 파닥거렸다. 엉덩이를 콱 잡혔다. 엉덩이를 주물거리고 있다. 엉덩이를 마구-!
“착하지, Fesse.”
입이 풀려났다. 성무는 몸을 빼내려 바동거리며 소리쳤다.
“착하긴 뭐가! 이 변태새끼야!”
“괜찮아, 괜찮아.”
“으아아악! 엉덩이나 놔!”
비페르는 발버둥치는 성무를 꼭 끌어안으며 다독거려주었다. 처음이라서 긴장한 걸까. 자신에게서 도망치려하는 행동에 화나고 섭섭하기는커녕 되레 안도의 미소가 머금어졌다. 반응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무경험이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며 겁먹고 당황한 눈빛을 보라.
“귀여운 Primi. 걱정하지 마라. 상냥하게 해 줄 터이니.”
10톤 망치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다. 성무는 두려움에 떨며 외국인을 올려다보았다.
“뭐, 뭘…….”
뭘 상냥하게? 뭘 하려고?! 엉덩이에 달라붙은 손은 떨어질 줄을 모르고 허리를 감싸 잡은 팔은 무쇠마냥 튼튼하다. 성무는 사색이 된 채 머리를 굴렸다. 어쩌지. 물어야하나. 또 물어야하나. 어딜 물어야하지. 한 뼘은 되는 키 차이 때문에 성무의 입은 상대방의 목덜미 아래서 알짱대고 있었다. 발돋움을 좀 하면 목을 물 수 있겠다. 입을 쩍 벌리다가 목 물어서 외국인이 죽기라도 할까봐 겁이 들었다. 성무는 경로를 살짝 바꾸었다. 어깨를 물자 팔이랑 이어져있으니까 좀 살살 물어도 깜짝 놀라 팔에서 힘이 빠지지 않을까.
“으히으악!”
끄악, 내 엉덩이! 아주 터져라 콱 틀어쥐는 것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어깨를 물었다. 외국인의 몸이 흠칫 떨린다.
“…성급하기는.”
역시 처음이라서인지 애무가 서툴다. 천천히 가르쳐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비페르는 작은-물론 상대적으로-몸을 가볍게 안아들었다. 파다닥 몸이 굳는다. 긴장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숲이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비페르는 바싹 얼어 굳어버린 원시인을 안아 든 채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굴집으로 걸어갔다. 한데 입구가 워낙 낮아 이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
어쩔 수가 없다. 비페르는 성무부터 집 안에 넣었다.
“으악!”
던져서. 모피 깔린 방바닥을 데구르르 구른 성무는 허둥지둥 나무뿌리가 얽힌 벽에 달라붙었다.
“허억, 헉!”
무섭다. 날 어떻게 하려는 거지! 하나 뿐인 입구를 막고 들어오는 놈이 보였다. 성무는 벽과 한 몸이 되고 싶은 듯 달라붙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이젠 도망도 못 치겠구나. 무기가 될 만한 식칼은 밖에 있다. 안에 있다 하더라도 총 든 놈에게 식칼 들고 덤빌 수는 없지만.
“아으, 저… 저…….”
마, 말로 합시다! 워낙 낮은 입구 탓에 기다시피 들어 온 비페르가 성무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확- 끌어당긴다.
“자, 잠깐, 잠깐, 잠깐!”
나무뿌리에 죽어라 매달려 봤자 소용이 없다. 외국인은 한 손으로 다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원시인 룩을 훌러덩 벗겨 내렸다. 수풀 사이 맥없는 주니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페르가 짧게 웃었다.
“역시 작군.”
“펴, 평균이야!!”
목에 칼이 들어오고 관자놀이에 총부리가 겨누어졌으며 호랑이가 안녕 내 먹이 인사하는 상황이라 해도 남자라면 버럭 소리칠 수밖에 없는 막말이었다. 나의 주니어는 작지 않아! 평균이라고!
“니건 무슨 맥주병 만 하- 허억!”
만졌다, 만졌어. 아니, 잡았다! 성무는 그대로 굳었다. 반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급소 중의 급소, 남자에게 있어서 목숨만큼, 어쩌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부위다. 그것을 붙잡힌 이상 반항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손아귀 힘도 센데, 괜히 반항했다가 콱- 틀어쥐기라도 하면…… 끔찍하다.
“죄, 죄송합…읏?!”
비페르는 성무가 평균 크기라고 우기는 오글오글한 거시기를 손바닥으로 살짝 누르며 문질렀다. 타인의 남성기를 애무해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손으로든 입으로든 기타 등등 다른 부위로든 봉사를 받아 본 경험이야 많았고 지난밤에 각종 자료들을 토대로 나름 공부도 해왔다. 컴퓨터도 없고 피시방비도 없어 야동이라는 반찬도 제대로 못 갖춘 채 자위 몇 번 찔끔 해 본 한성무 씨와는 수준이 다르다. 잡고 무식하게 흔드는 것이 전부였던 성무는 입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바동거렸다.
“으아, 야! 우엑? 하, 하지 마- 읏, 아우!”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내리누르며 덮치다시피 다가 온 외국인의 미소가 두 눈 가득 커다랗게 들이박혔다. 머릿속 빨간색 경고등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기분 좋게 해주지, Fesse.”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는 성무의 귓속에 제대로 들어가질 못하였다. 하반신에 피는 물론이요 온 신경줄까지 죄다 몰려든 탓이다. 두뇌가 잠시 주니어로 자리를 옮겨간 듯한 기분이다. 평균 크기라 발기해도 좁을 텐데. 성무는 허리를 꿈틀거렸다.
“으앗, 악! 사, 쌀 거 같…!”
엄마야! 이건 자극이 너무 강해! 그냥 조물거리기만 해도 잘만 서고 잘만 싸는 감도 좋은 거시기다. 그런 민감한 곳에 타인의 손길이 닿으니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 직접 하는 자위보다 배는 더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한데 그 상대가 솜씨마저 좋으니…….
“우- 아아아…….”
결국 얼마 버티지도 못한 채 허연 액을 토해낸 성무가 축 늘어졌다. 하늘, 아니 천장이 샛노랗다. 엄마, 나 낯선 외국인의 손에다 쌌어……. 차마 고개를 들어 결과물을 볼 낯이 없었다. 그냥 드러누운 채,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노랗게 돌아가는 천장만 바라보았다. 흑, 너 나한테 왜이래.
“기분이 어때? Primi.”
“…….”
노골적인 물음에 성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대답하자면 좋긴 좋았다. 아, 이 비참하리만큼 솔직한 몸뚱어리여. 평소 하던 자위보다 훨씬 더 짜릿하고 훨씬 더 반응도 빨랐다. 그래서 더 쪽팔린다. 내 거시기는 너무 솔직해…….
“Primi?”
“으악! 조, 좋았어요, 좋았어! 굿!”
힘 빠진 거시기를 다시금 꾹 잡아오며 부르는 말에 성무는 얼른, 얼결에 솔직히 대답하고 말았다. 좋았다는 말에 비페르가 만족스레 낮은 웃음을 흘렸다. 겨우 이걸로 세 번이나 반복해 말할 정도로 좋았단 말이지. 심지어 반응도 빨랐다. 귀여운 엉덩이가 조루가 아니라면 사랑하는 상대에게 만져진 것 때문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고작 수음 정도에 만족할 수 있을 리가.
“귀엽군.”
비페르는 고심하며 쪽팔림에 얼굴을 감싼 성무를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차려진 밥상이다. 스푼만 들이대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금만 기다려 봐, 라는 작은 속삭임이 있었다. 사멸되려다가 궁둥이의 사랑스러움에 간신히 회생한 연애세포다. 아직 안 돼, 아직 안 돼, 쟤는 처음이잖아. 진도는 A다음 B다음 C. 키스하고 애무했으니 C는 조금만 더 있다가. 먼저 접근해서 하룻밤 즐기고 끝난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이 목석아! 목숨 줄 간당간당한 연애세포가 발악했다. 여기서 그르치면 더 볼 것 없이 비석 박아야한다. 공동묘지가 코앞이다. 먼저 간 순수와 수줍음과 겸손 등등이 강 건너 꽃밭에서 웃으며 손짓하고 있다. 아냐, 나는 아직 갈 수 없어! 힘내라, 엉덩이!
“…….”
비페르는 쓰디쓴 한숨을 길게 뱉어냈다. 건드리고 싶다. 더 손을 대고 싶다. 움츠러든 저 다리를 활짝 벌려 은밀한 부위까지, 그 안쪽 깊숙한 곳까지 샅샅이 확인해보고 싶다. 우는 것도 귀여울 텐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으니.’
그는 다시금 긴 한숨을 흘리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몸도 작고 약한 아이이니. 오늘도 보양식을 챙기라 했으니 잘 먹이고 내일 쯤 되면 진도를 더 나가도 괜찮을 것이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확인했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반응을 보아선 틀림없이 첫 경험이다. 비페르는 마지막으로 성무의 입술 위로 가벼운 키스를 내렸다.
“그럼 내일 다시.”
아쉬워도 울지 마, 엉덩이. 원래라면 함께 점심식사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떤 음식보다도 먹음직스런 엉덩이를 앞에 두고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비페르는 굴집을 나서 자리를 떠났다.
“……우 씨.”
성무는 비페르가 떠나고 나서야 꾸무적꾸무적 몸을 일으켰다. 기분 참 묘하다. 딱 잘라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육체적으로는 좋았는데 정신적으로는 더럽다. 근데 정신적으로도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참 묘하다는 거다. 질색팔색 싫어야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래도 제법 봤다고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들어버렸나?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크아아아! 변태 자식!”
그놈은 변태다. 성무는 쓰다 남은 모피 조각으로 흔적을 닦아내고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으며 악악거렸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변태라니! 키스까진 그렇대도 거, 거길 만지냐! 어떻게 사람이 그러냐! 제길, 내 팔자 왜 이래? 돈 다 잃고 조난당하더니 이젠 유일한 탈출구가 변태냐! 으허어엉, 세상아, 내게 왜 이러는 거야!”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죄를 져서 이리 된 거라면 아주 대역 죄인이었을 거다. 성무는 어이구, 어이구 아주 곡소리를 내며 밖으로 기어나갔다. 외국인은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썩을 놈! 그래도 먹을 건 놔두고 갔네.”
성무는 일전의 10단 도시락과 비슷하게 겹겹이 쌓인 음식 그릇의 맨 위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장어다. 특히 꼬리가 유독 많다. 토막토막 잘려진 것을 이어붙인다면 무슨 구미호도 아니고 꼬리 아홉 달린 장어가 탄생할 정도다. 성무는 양념을 발라 구운 장어 꼬리를 날름 주워 먹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튀자.”
점쟁이 뺨치는 뛰어난 육감! 은 멍멍이 소리지만 그래도 본능적인 감이 존재하기는 존재했다. 어제는 키스 오늘은 거시기였으니 내일은 더욱 소중한 것을 강탈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뻔한 미래를 알면서도 잡아 잡수, 하고 얌전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성무는 일단 짐을 챙겼다. 사실 별로 챙길 것도 없었다. 식칼이랑 나이프, 바늘 등을 배낭에 집어넣으면 끝이다. 로션은 너무 무거워서 아깝지만 포기했다. 대신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온몸 가득 넉넉히 발라주었다. 배낭 속에 말린 고기 남은 거 몇 넣고 등에 맨 다음 외국인이 가져다 준 음식 꾸러미를 손에 들었다.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변태의 거주지엘 가면 뭔가 바깥과 연락할 장비가 있겠지.”
알랑방귀 껴가면서 나갈 수 있게 도와 달라 부탁하려 했는데 더는 못 참겠다. 자신의 탈출로는 자신이 개척하는 법! 기지국이 없으니까 핸드폰은 무용지물일 테고 무전기나 모스 전신기 같은 것을 지니고 있겠지. 통신병은 아니었지만 구조 부호 정도는 얼핏 들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니면 가장 마지막에 쓸 방법으로, 보트 탈취도 있다. 설마하니 이 섬에 수영해서 들어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십중팔구 배겠지. 외국인의 거주지에서 키를 몰래 훔쳐서 타고 달아나면 된다.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어촌에서 이리저리 잡일 도우는 와중에 어깨너머로 대충 익히기는 했다. 새벽 고기잡이 뱃일 도우러 가면 선장 아저씨가 눈 잠깐 붙일 테니 키 좀 잡아라, 하는 일도 이따금씩 있었고.
“배 탈취는 미안하지만… 변태의 희생양이 될 수는 없어!”
크게 외치며 성무는 정든 집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대로 떠나가면 두 번 다시는 돌아 올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몇 발짝 걷다가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
“에휴…….”
그래도 정 많~이 들었는데. 제법 아늑한 집이었지. 귀국하게 되면 평생토록 다시 볼 순 없을 것이다. 서울서 부산 가는데 만 해도 저가항공 이용하고 할인 받아봤자 5만원 돈이 넘는다. 해외여행이라니, 꿈도 못 꿀 일이지.
“안녕, 안녕…… 정든 나의 집이여.”
참 많이 그리울 거야. 집안 곳곳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인데. 다시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정붙이고 살면 고향이라더니 가슴이 아파. 그래도 변태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다. …좀 느끼기는 했지만. 좀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게이가 되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도-
“나 다시 돌아갈래!”
비록 춥고 배고플 테지만 그리운 고향땅으로!
“…춥고 배고프고…….”
어, 그건 좀 안 좋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다. 성무는 어디 있는지 모를 외국인의 거처를 찾아 무작정 발길을 옮겨 나갔다.
항문은 보통 들여보내기보다는 내보내는 일을 하는 기관이다.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넣는다는 것은, 특히 굵기가 제법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 특히나 정원의 원시인은 엉덩이가 작다. 탱탱하고 모양 좋고 감촉 좋지만 크기는 작은 편이었다. 겉이 작은데 속이 클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무슨 도○에몽의 주머니도 아니고 보통은 겉 크기에 비례해서 속 크기도 정해지는 법이다. 때문에 비페르는 좀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해가기로 결심했다. 마취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픔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아픈 만큼 느끼게도 해주자는 마음이었다. 엔도르핀이 분비되면 진통효과가 있을 터이니.
그런 이유로 72인치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인체해부도였다. 1:1 실물 사이즈 둔부 해부도. 앞뒤좌우로 드러난 그것은 직장과 그 주위 기관들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중점적으로 표시된 것은 전립선의 위치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에 스크린에 나타난 위치 또한 여러 군데였다. 동양인이며 키와 몸무게, 체형이 사랑스러운 엉덩이와 흡사한 케이스만 모아 표시한 것이다.
“이즈음인가.”
그는 스크린의 화상에다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입구에서부터 대충 이 정도. 어느 정도 깊이로 넣어야하는지는 대충 확인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평면이다. 완벽을 기하려면 당연히 입체적으로 연습을 해봐야하는 법. 비페르는 가상현실 장갑과 안경을 착용했다. 눈앞에 뽀얀 엉덩이가 빙그르르 돈다. 그걸 척 잡아서는 둔덕 사이의 구멍에다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허공에 빨간 불빛이 작게 뜨며 글자가 나타난다. 평균 전립선 3번 위치 현재 위치로부터 위로 1cm, 좌로 0.7cm. 비페르는 천천히 손가락을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불빛이 주황색으로 바뀌더니 초록색으로 반짝한다. 정확합니다, 그 부분을 살살 누르면서 긁어주세요.
첫 경험부터 상대를 홍콩 너머 우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완벽한 남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돈지랄이었다.
“…대체 어디 사는 거야?”
전 재산 든 배낭 메고 큼직한 음식보따리를 손에 든 채 성무는 울창한 숲을 헤매고 있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지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이곳은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원시의 밀림이다. 심지어 몸통도 가늘, 잎사귀도 가늘한 북방계 나무도 아닌 울퉁불퉁 두툼하고 넓적한 잎새 무성한 남부 열대수가 가득한 숲인 것이다. 운 나쁘면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다람쥐 쳇바퀴를 돌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길은커녕 흔적하나 보이지 않건만 무슨 방법으로 외국인이 향한 곳엘 다다를 수 있겠는가. 이건 그냥 운이다. 나침반 하나 없고 눈썰미도 좋지 못한 성무로서는 그냥 운에 맡기고 무작정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넓네…….”
외곽 한 바퀴 도는데 이틀 조금 못 걸렸다. 그래서 쉽게 생각해버렸다. 이렇게 작은 섬이니까 사람 사는 텐트나 캠핑지 찾는데 넉넉잡아 하루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상태라면 일주일은 족히 헤매게 생겼다. 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 그것조차 모르겠으니.
두리번두리번하며 걸어가던 성무는 널찍한 바위 하나 발견하고서 그 위에 걸터앉았다. 한참을 걸었더니만 배가 꼬르륵 울렸다.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니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3시 경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밥 먹고 다시 힘내서 찾아볼까.”
그는 도시락 통을 열었다. 맨 위의 장어는 틈틈이 꺼내먹었더니 두어 조각 남고 텅 비어버렸다. 남은 거 마저 먹고는 아래 뚜껑을 열어젖혔다.
“…애걔.”
이게 뭐야. 성무는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병이다. 음료가 찰랑찰랑 거리는 상당히 고급스런 유리병이었다. 원하던 음식이 아니라 잠시 실망했던 성무는 병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으음… 이거 혹시…?”
술인가! 암만 봐도 평범한 음료수 병은 아니다. 대형마트에서 장보다가 흘낏 구경만 해봤던 양주, 그 중에서도 와인 병과 비슷하게 생겼다. 실망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탈바꿈했다.
“쓰읍- 이거 진짜 술인가! 술이란 말인가! 아, 진짜 술이면 좋겠다. 그렇잖아도 소주가 무지무지 고팠었는데!”
일단은 옆에다가 고이 내려놓았다. 술도 좋지만 뱃속부터 채우고 봐야지. 빈속에 알코올 들이부으면 속상한다. 술병 말고도 뭔지 모를 조그만 음식들이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뭘까, 하다가 예쁜 포크도 함께 있고 하니 먹는 거겠지 싶어 날름 입에 집어넣었다.
“으웩! 퇫! 팻! 뭐, 뭐야 이건!”
이상한 맛이다! 짜! 맛없어! 난생처음 맛보는 블루치즈의 강렬함에 성무는 몸서리를 쳤다. 상한건가! 잘 보니 곰팡이가 핀 것도 같다. 손등에다 혓바닥을 닦아내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으에…… 뭐냐고 이게. 외국인네 식량창고에 곰팡이가 번식하기라도 한 건가. 설마 다른 음식들도 죄다 상한 건 아니겠지?”
성무는 남은 치즈들을 죄다 바닥에 던져버렸다. 내게 상한 음식을 주다니! 투덜투덜 거리며 다음 뚜껑을 열어보았다.
“으엉? 이건… 자라?!”
자라다. 오래 묵은 듯 상당히 큼직하다. 등껍데기만 없을 뿐 나머지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자라였다. 등껍질이 있어야 할 부분은 속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살점을 먹기 좋게 잘라 양념해 요리해두었다. 잠깐 당황했지만 성무는 이내 숟가락을 치켜들었다. 피 한 방울만 봐도 뒷목 잡는 요조숙녀도 아니고, 짐승가죽 손수 벗겨가며 요리한 경력이 1년여인 그에게 있어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음식G다. 맛있으면 장땡. 성무는 자라 고기를 퍼먹고 잘라먹고 뜯어먹었다. 머리만 남기고 다 먹었다. 맛은 꽤 좋았다.
“어째 보양식 위주로 챙겨오는 것 같네.”
전복 든 삼계탕에 장어에 자라. 전부 보양식 계통이다. 이 아래로는 흑염소나 낙지, 오리탕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을까. 혹시나 싶어 열어보았다. 해삼과 전복과 개불과 낙지다. 어떻게 처리했는지 위의 자라는 따뜻했는데 바로 밑의 해산물은 시원하다. 한쪽에는 초장과 쌈장, 와사비가 있다. 그것을 보자 그리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아아, 와사비 푼 초장! 다진 파와 마늘 넣은 쌈장!
“한국! 한국인인가! 어떻게 이런 걸 다…… 어흑.”
생선회라면 지긋지긋했건만 당장에 달려가서 낚싯줄 던지고플 정도다. 으왕, 낙지다. 아직도 꿈틀거려. 낙지 한 마리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초장에 푹 찍어 입에 넣으니 변태 외국인에 대한 억하심정이 슬금슬금 풀려나갔다. 그래, 뭐 큰일 났던 것도 아니고. 얌전히 따지길 기다리고 있는 술병을 내려다보니 변태라도 고마워진다. 양주도 좋지만 해산물 안주에 소주였더라면 더욱 최고였을 텐데. 그래도 참 좋다. 이리 쉽게 기분이 풀리는 걸 보니 역시 밥통이 대장이다.
“코르크 마개네~. 하지만 나에겐 이것이 있지!”
짜잔, 하고 배낭 속의 맥가이버 칼을 꺼내들었다. 코르크 마개 따기용 스크루. 평생 사용할 일 있을까 싶었던 건데 드디어 시전 들어가시겠다. 성무는 코르크 따개를 폭 쑤셔 넣었다.
“……어떻게 쓰는 거야?”
생긴 것도 요상해가지고는 잘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사못을 떠올리곤 돌려 박아 넣었다. 코르크 마개 속으로 스크루가 빙글빙글 들어간다. 어느 정도 단단히 들어박혔다 싶자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퐁!
성무는 꼴깍 군침을 삼켰다. 한 병인가! 내 주량은 이 병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소주 한 병이지만 상관없어! 부어라, 마시고 죽자. 와인 병과 함께 들어있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무렇게나 술잔을 잡고 시향이니 뭐니도 없이 그냥 소주처럼 벌컥 들이켰다.
“크으- 뭐 나쁘진 않네.”
안주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역시 해산물에는 소주가 최고지. 그렇게 한성무 씨는 목적을 까맣게 잊고서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