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1)

성무는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쉽게쉽게 잘 풀린다는 뜻이다. 화나거나 삐치거나 우울하거나 두려운 것도 금방 연기처럼 흩어져버리곤 했다. 때문에 죽어라 도망친 지 약 30여분이 지난 지금, 한성무는 머리 싸잡아 매고 땅을 파고 있었다.

“으아아아, 내가 미쳤지! 대체 왜 그런 거야! 성무야, 이 바보멍청아! 니가 화낼 처지냐?! 암만 더러운 꼴을 보더라도 꾹 참고 웃어 넘겼어야지! 나는 바보야, 진짜 바보야! 유일한 동아줄을 콱 깨물고 도망쳤으니! 후각 뛰어난 주제에 동아줄 썩은 내도 못 맡고 무턱대고 매달리는 호랑이보다 더 멍청해! 이제 또 어떻게 여기서 탈출 하냐고! 흐어어엉… 이런 무인도에 또 누가 오겠어……. 생선 좀 안 받아먹었음 어때서! 이젠 나 싫어하겠지? 그렇겠지? 있는 힘껏 콱 깨물고 도망쳤으니…… 나라도 정나미 다 떨어지겠다……. 진짜 왜 그랬냐, 참을 인자 셋이면 무인도 탈출이건만 왜 그랬냐고오!”

아무래도 그때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었나보다. 살갑게 애교를 떨어도 모자랄 판에 바락바락 소리치며 대들다가 피가 나도록 깨물어버리다니! 성무는 자책했다. 나는 바보다. 왜 그때 욱해가지고서. 짜증나고 더러워도 꾹꾹 참아야만 했는데.

“아아아아- 이 바보! 생선이 미워, 생선이 싫어어!”

나쁜 생선, 나쁜 조기. 역시 옳은 것은 육고기다. 소화 잘 되는 소고기가 최고다. 자책감에 휩싸여 나무에 머리를 박아대던 성무는 비칠비칠 바닷가로 걸음을 옮겼다. 가서 사과하자. 석고대죄를 하자. 머리 박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빌며는 그래도 좀 봐주겠지. 

-끼룩끼룩

철썩 쏴아-

“………….”

하지만 사과의 말을 연신 읊조리며 찾아 간 해변은 텅 비어있었다. 사람그림자는 물론이요, 바닥을 나뒹굴던 음식들도 찌꺼기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곤 빈 그릇 뿐이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며 음식은 죽어 빈 그릇을 남기나니. 성무는 터덜터덜 걸어가 빈 그릇을 주워들었다. 딱딱한 부리 가진 놈들이 재주도 좋게 깨끗이 핥아먹기까지 했다. 깃털 두엇만 달라붙은 빈 그릇을 손에 든 채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 내 인생 쉬운 길이 없구나.

“아냐,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얼굴 맞대면 얼마나 뻘쭘하겠냐고.”

속마음 감추는데 자신이 별로 없다. 솔직히 잘 못한다. 넌 얼굴에 다 드러나, 하는 소리를 여러 수차례 들어봤다. 그러니까 아직 삐진 게 조오금 남아있는 지금으로서는 솔직한 사과를 하기 힘들 것이다. 쪽팔리기도 하고. 사실 잘못한 거, 몇 없는데. 난데없이 따라오라 잡아끄는 쪽이 잘못한 거 아닌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 상대라면 납치범이나 성범죄자로 고소당할 일이다.

“…역시 나는 별 잘못 없어.”

성무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과를 하고 다시 친하게 지내야만하니까. 어쩔 수 없다. 무인도에서 평생 살기는 싫으니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모래밭에 메시지를 남기기로 결심했다. 역시 이런 일에는 편지가 최고다.

“근데 어느 나라 말로 하지?”

프랑스 인인 거 같지만 일단 불어는 제외. 기억이 안 난다. 그렇다면 한국어 또는 영어다. 한국어도 아는 거 같고 영어도 아는 거 같던데. 그래도 외국인이니까 영어가 더 좋지 않을까? 뭘로 할지 고민하던 성무는 근처에 떨어진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안쪽이면 영어, 바깥쪽이면 한국어.”

핑그르르 높이 던져 올렸다. 모래밭이라 소리도 거의 없이 떨어진다. 안쪽 면이다.

“영어네. 아임 소리라고 하면 될라나? 좀 부족한가…. 암소 소리라고 적어놓을까?”

전에 암소 소리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던 것을 생각하자면 불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암만 고민해 봐도 암소 소리가 맞는데. 어쩌면 발음이 나빠서 못 알아들은 건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필담이니까!

“……어떻게 적더라.”

성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스펠링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암…이니까 A로 시작하나? Am? 결국 성무는 차 선택을 찾았다. 한글로 영어 쓰기. 그는 빈 그릇을 삽 삼아 모래를 파헤쳤다. 오래 남아있게 하려면 깊게 파내서 적어야 한다. 이왕이면 크게. 이만큼 많이 미안하다고 생각하도록 큼직하게.

“아…암.”

제 머리보다 더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허리머리 팍 숙이고 엉덩이를 하늘 높이 치켜든 채 동그라미 옆에 선을 길게 내린다. 옆으로도 그리고 그 아래는 반듯한 사각형. 모래와 흙을 열심히 파내며 또렷한 암 자를 그리곤 허리 한 번 폈다.

“후우, 이것도 꽤 힘드네. 내 마음을 알아줘야 할 텐데.”

나 진짜 미안하거든? 진심이야, 진심. 이 열성만큼은 진짜 진심이다. 약간 삐뚤어진 소 자를 파내고 반자 띄웠다. 띄어쓰기도 제대로 해야지. 물론 제대로 하자면 아임 소 소리겠지만. 다시 한 번 소 쓰고 이리저리 굽어진 리 자도 완성했다. 아주 큰 글자다. 한 자 크기가 제 키만 한 글을 바라보며 성무는 헤죽 웃었다.

“좋아! 이 정도면 그 외국인도 화 풀리겠지.”

조금 삐뚤어지긴 했지만 또박또박 참 잘 썼다. 성무는 보람찬 가슴으로 아픈 허리와 팔을 빙글빙글 돌렸다. 힘들긴 했지만 결과물은 만족스럽다. 성무는 한결 편해진 마음과 밝아진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응?”

그때 숲 쪽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랑지가 보였다. 무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들거리던 꼬랑지가 쏙 사라지고 조그마한 머리가 톡 튀어나온다. 골프공처럼 동그란 알을 입에 문 작은 여우다. 성무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가느다란 눈에 멋쩍은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은 낚시 안했는데…. 에이, 기분이다! 우리 집까지 따라오면 말린 생선이라도 줄게.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오면 다 준다!”

쏘겠다고 외치곤 앞서 천천히 걸어갔다. 인간의 말, 한국어를 알아들었을 리 만무하겠지만 무언가 통한 것은 있었는지 꼬마 여우는 일정거리를 둔 채 예민한 고양이 걸음으로 성무의 뒤를 쫓았다. 집에 도착한 성무는 빈 그릇을 안쪽에다 던져놓고 말린 생선을 두 손 가득 들고 나왔다. 여우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몸을 뒤로 뺀 채 덩치 큰 생물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자, 원하는 만큼 다~ 들고 가.”

내가 오늘 배가 좀 두둑하거든. 하도 맛있는 것만 먹었더니 말린 생선 따위 맛없어서 못 먹겠다. 말린 생선들이 바닥 가득 떨어졌다. 성무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집 앞에 앉았다.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던 작은 여우가 생선 무더기에다 코끝을 대고 움찔거린다.

-뀨웅?

“가지고 가, 가지고 가. 괜찮아. 난 안 먹어.”

함정은 아닌 모양이다. 솔직히 함정을 만들 만큼 똑똑하게 생긴 생물도 아니다. 여우는 슬그머니 입을 벌려 가장 큼직한 생선을 물고는 후다닥 숲으로 도망쳤다. 성무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열매나 따러 가 볼 테니까 더 가지고 가고 싶거든 가지고 가~.”

착한 일을 하니까 기분 좋다.

순백의 퀸이 힘없이 쓰러졌다. 동시에 닥터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새겨진다. 아직 체크 메이트는 아니지만 불리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가 투덜투덜하면서 말했다.

“내일은 바둑으로 하지.”

퀸을 쓰러뜨린 검은 나이트의 주인인 젤먼이 히죽 웃었다.

“내 바둑 실력은 체스 못지않다네. 경력이 달라.”

“성실한 집사님께서 바둑까지 배울 시간은 어떻게 내셨나.”

“늙으니 잠이 줄어서 말이야, 험험.”

아무리 맡은바 소임에 충실하다 해도 취미생활 할 짬 정도는 있어야지. 백색의 말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흑백이 교차되는 체스판 위를 달린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을 이곳에 붙잡아 둔 장본인이 나타났다. 젤먼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고 패배 일보 직전이었던 닥터는 조용히 판을 엎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아니 그 손은 어찌되신 겁니까!”

출혈은 멈췄지만 검붉은 핏물의 흔적이 역력한 오른손의 모습에 젤먼이 놀라 소리쳤다. 피라니! 피를 흘리셨다니! 심지어 상처도 제법 깊다. 판을 엎은 닥터가 일어나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힐끗 손등에 난 상처를 살펴보았다.

“이빨자국? 크기나 모양을 봐선 사람의 잇자국인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을 한 게 아니라 당하신거겠지! 짐승도 아니고 사람 손을 물어뜯다니! 아이고, 이런! 일단 소독부터 하셔야!”

노집사의 호들갑에 닥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보나마나 자업자득이겠지.”

상당부분 그러하다. 비페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묵묵히 서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뤄뒀던 일정들을 다시 정리하게.”

“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어졌으니 돌아가겠다.”

젤먼은 당황했고 닥터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비페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찌 흥미가 떨어진 모양이지? 그럼 불쌍한 조난자는 내가 돌려보내주도록 하지. 오늘 녹음한 거나 내놔 봐. 뭣 때문에 마음이 바뀌셨는지 궁금하군.”

“…….”

비페르는 잠깐 망설이다가 녹음기를 닥터에게 던져주었다. 이제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젤먼이 각 방마다 비치되어 있는 구급상자를 꺼내오고 왜 안도와주냐고 투덜거리고 결국 별장 내 다른 의사를 전화로 부르는 사이 닥터는 녹음기를 재생시켰다. 

“……바보냐.”

가만 들어보고 있자니 참 어이가 없다. 좋아하는 상대가 주는 거라면 워스트 1의 데친 샐러리라도 묵묵하게 받아먹는 것이 연애의 기본이 아니던가. 아니면 최소한 부드럽고 상냥하게 핑계-데친 샐러리를 먹지 못하는 데에는 슬픈 전설이 있지-를 대가며 거절을 했어야지. 이건 뭐 소리만 들어도 표정이 눈에 선할 정도로 냉담한 ‘No’다. 그래놓고선 앞뒤 설명도 없이 따라오라고, 반항하는 것을 분위기 팍 잡은 채 억지로 잡아끄니 애가 놀라서라도 콱 깨물고 달아나는 것이 당연지사지. 하여간 이놈의 연애세포 소멸 종자들. 닥터는 혀를 쯧쯧 차며 치료받는 중인 비페르에게 말했다.

“얘가 너 ‘사랑’한단다.”

한국어 부분을 알아듣지 못한 비페르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사랑?”

닥터는 잠깐 망설였다. 말해줘도 되는 걸까. 불쌍한 야생인 청년을 위해서라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 놈 아들은 저 멍청한 녀석이지 야생인A가 아니다. 결국 닥터는 입을 열었다. 

“Amour. Love. 말하자면 I love you, 라는 거지.”

“……뭐? 그럴 리가.”

악악 소리치고 화내고 발버둥 치며 깨물었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시선에 닥터가 다시금 설명했다.

“정확히는 먹을 걸 가져다줘서 사랑할 정도로 좋다는 표현이지만. 뭐, 그래도 love는 love지.”

“…….”

이 정도면 할 건 다 해줬다. 싫다 하면 고국으로 돌려보내주면 그만이고. 차라리 속 시원하다며 닥터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비페르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 됐습니다. 다행히 상처가 별로 깊지 않군요.”

의사의 말에 비페르는 희게 붕대 감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날뛰던 감정은 많이 가라앉은 뒤다. 여전히 괘씸하고, 여전히 속이 쓰리고, 여전히 노기의 잔재가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이성보다는 훨씬 약했다. 

‘사랑한다고?’

그렇게 악을 쓰고 덤빈 주제에? 사랑이 아니라 좋아하는 감정 정도만 있어도 따라오라는 말에 그리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닥터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도 녹음기는 닥터의 손에 있다. 다시 되찾아 올까. 비페르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에게 젤먼이 말을 걸어왔다.

“어쩌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헬기를 준비시킬까요?”

생각보다 길어진 휴가 탓에 미뤄진 일정도 한가득이다. 소소한 것은 모두 제외한다 치더라도 한동안 바빠질 것임이 분명했다. 노집사의 말에 비페르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잠시 기다리도록.”

일단은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해야만 할 듯하다. 비페르는 관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벽면이 온통 유리로 된 방에서는 여전히 촬영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비페르는 방의 가운데에서 잠시 멈춰 섰다. 죄다 삭제해 버릴까. 지난 며칠간의 행적들은 용량 두툼하게 디스크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버튼 하나로 가볍게 지워버릴 수 있다. 완벽한 소멸을 위해서는 물리적인 충격도 가해야 하겠지만.

비페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바닷가 쪽을 비추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바위와 백사장. 헌데 무언가 익숙하지 않는 것이 그의 눈에 들이박혔다. 백사장 위로 거무스름한 직선과 곡선들이 그려져있다.

“…뭐지.”

그는 스크린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무슨 그림인가 싶었지만 잘 보니 한글이다. 

“암…소…?”

읽는 것은 대충 가능했지만 해석까지는 불가능했다. 비페르는 휴대폰으로 화면을 찍어 통역가에게 전송했다. 이내 답변이 돌아왔다.

“암소 소리? 암소의 울음소리라고?”

해석은 되었지만 이해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대체 왜 모래밭에 암소의 울음소리라는 글을 적어 놓았단 말인가. 저기다 한글 새길 사람은 엉덩이 외엔 없으니 분명 그겠지. 하지만 의도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고심하던 비페르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닥터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냈다. 잠시 뒤 문자가 도착했다.

[암소 소리? 말 그대로의 뜻은 아닐 듯하고, 콩글리시 같은데. 내 생각이 맞다면 I′m so sorry일거다.]

I′m so sorry. 아이고 이것 참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려. 사과의 말이다. 비페르는 닥터의 문자를 세 번 쯤 되풀이해 읽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말, 아니 글 한 마디. 고작 그것뿐이건만 이상하게도 입꼬리가 제멋대로 위를 향해 달려간다. 미안하다고, 그래. 미안한 줄은 아는 모양이로군. 아주 못쓸 엉덩이는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귀엽기는 귀엽지. 색도 좋고 감촉도 그만하면 뛰어났고. 비페르는 소파에 걸터앉아 녹화 된 영상을 틀어보았다. 자신이 떠나고 얼마 안지나 돌아 온 엉덩이가 열심히 모래를 파헤치는 모습이 스크린 가득 나타난다. 누가 엉덩이 아니랄까봐 가죽쪼가리로 겨우 가린 엉덩이를 잔뜩 치켜든 채 글을 새겨나간다. 사이사이 허리 펴고 땀을 닦고 기지개를 켜며 숨도 크게 내쉰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마냥 귀엽다. 뭐 저런 귀여운 생물이 다 있나 싶을 정도다. 역시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 사과까지 했으니까.

“…저러다 또 앓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

조그만 몸으로 너무 열심히 땅을 파헤쳤다. 아무래도 내일은 몸보신 용 한식을 준비하라 말해야겠다. 이제나저제나 주인님 돌아가신다는 말만 목메어 기다리고 있는 가엾은 노집사는 까맣게 잊은 채 비페르는 다시 보기 버튼을 눌렀다.

귀여운 Fesse.

루프스 가문에 거의 평생을 봉사해온 노집사 젤먼은 슬펐다. 이제야 겨우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감히 주인님 손등을 깨문 이상한 원시인과 영원히 작별하게 되는가 싶었는데! 야생의 동양인(男)을 주인마님으로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했는데!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이요, 물거품이 되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그의 잘나가도 멋지신 마스터께서는 오늘도 도시락가방 지참한 채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버린 것이었던 것이었다. 

어쩌겠는가, 그냥 눈물이나 훔쳐야지 뭐.

“어째서 다시 마음을 바꾸신 건지… 손등까지 그렇게나 깨물렸는데. 어째서…….”

젤먼의 한탄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닥터가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바람 앞의 갈대처럼 앞뒤좌우 가릴 것 없이 맘 뒤바뀌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라도 왔나보지 뭐.”  

“…….”

우리 완벽하신 주인님한테는 그런 거 안 옴. 지긋하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뾰족한 눈초리가 쏘아져 왔다. 

“그보다 슬슬 제대로 된 정신과의사를 데려오게나.”

닥터의 말에 노집사의 주름진 얼굴이 창백해졌다.

“서, 설마… 주인님께 정말로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아니아니, 그놈 말고. 그놈도 정상은 아니지만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정원의 원시인이라네.”

젤먼이 동의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더없는 친절을 베풀어 주신 주인님의 손을 가차 없이 깨물다니. 정신적인 치료가 필요해.”

“…그건 솔직히 그놈 잘못이 크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지극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과의 일말의 교류 없이 오랜 시간 고립되게 된다면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거라네. 얼마나 오래 저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하기론 일 년 남짓 정도이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인터넷 검색. 여기까지 표류해 올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거리에서 침몰한 한국인 탑승 선박이 일 년여 전쯤에 한 척 있더군. 파텍 필립을 못 알아볼 정도라면 개인적인 경로로 여기까지 올 재력은 지니지 못했을 터이니.”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한 한 빨리 구해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건만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고작 며칠 늦어지는 것 가지고 별 문제 있겠냐는 안이한 마음 탓도 크다. 게다가 정말로 원양어선에 탔던 젊은이라면 그냥 돌려보내봐야 보험 적용도 안 되는 값비싼 정신과 치료를 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가득이나 한국은 정신과에 대한 시선이 냉담한 편이니. 어쩌면 그냥 사람이 그리운 마음으로 비페르에게 빠져 잘되는 것이 나을는지도. 최종적인 선택이야 본인의 마음이겠지만.

“한데 오늘은 뭘 들고 갔지?”

“뭐라더라?”

젤먼이 잘 안돌아가는 혀를 꼬며 대답했다.

“삼계탕?”

오늘은 인삼과 격하게 포옹한 닭님이시다.

“어쩌지.”

아침부터 성무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시계바늘이 돌아가고 11시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어갔다간 수맥에 광맥에 원유까지 발견할 지경으로 깊었다. 아 젠장,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는 건 솔직히 쪽팔렸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그래도 안가자니 외국인 헛걸음 시킬까봐 또 걱정이 들었다. 안 그래도 미움 받았는데. 이제부턴 진짜로 잘 보여야하는데. 콩으로 메주를 쑨 다해도 예예 해야 하는데. …팥이든가? 아무튼.

“…정말로 어렵다. 어쩌지. 동전… 돌멩이라도 던질까. 하지만 가기 싫다고! 화내면 어쩌지? 깨물기까지 했는데! 우우… 그, 그래. 안 가도 글은 적어 놨잖아. 가더라도 그거 보고 마음이 진정되었을 즈음에 가자. 평소보다 딱 삼십분만 늦게 가는 거야. 그래, 그게 좋겠다. 좀만 늦게 가자. 가서 살펴보고 혹시라도 화 안 풀린 거 같으면… 그냥 튀어야지…….”

무인도 탈출이 중하다지만 목숨보다 중할까. 암만 밥이 맛이 있어도 살아야 얻어나 먹지. 이대로 죽으면 영락없는 총각귀신, 그것도 숫총각귀신으로 제삿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을 것이다. 성무는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금부터 딱 삼십분.”

…십분 정도는 더 늦어도 되겠지?

파도가 길게 올라오다가 길게 뒷걸음질 친다. 열과 성을 다해 새겨놓은 암소 소리를 밟지 않도록 피해서 선 비페르는 숲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를 물새들이 떡고물을 바라며 맴돈다.

“…….”

늦다. 11시는 이미 늦었는데 평소와 달리 코배기도 보이질 않는다. 그럭저럭 기분 좋게 여기까지 걸음 했던 비페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안 오지.

“…설마.”

어제 그 작은 몸으로 너무 열심히 흙을 파헤치다가 몸살이라도 난 것일까. 충분히 그럴 법했다. 이미 한 번 앓아누운 전적도 있지 않는가. 

“아무튼 미련하긴.”

그렇게 크게 새기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건만. 참으로 미련하고 바보 같은 엉덩이다. 연약한 주제에 제 몸을 챙길 줄을 모른다. 역시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제 얌전히 따라 올 것이지. 비페르는 혀를 쯧 차며 숲으로 발길을 돌렸다.

심심하다. 성무는 길게,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심심하다. 할 일없이 멍하니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자니 너무너무 심심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 외국인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눈앞에서 막 어른거린다. 가까이 왔다가 멀어졌다가 흐려지기도 하고 짙어지기도 하고 아래위로 막 흔들리기도 한다. 그냥 보러 갈까. 

“에이, 아냐. 조금만 더 참자.”

가만히 앉아있기도 뭣해서 가볍게 스트레칭이라도 하기로 했다. 성무는 일어나 두 팔을 양옆으로 길게 펼쳐 들었다. 다리도 어깨넓이로 벌렸다. 

“하나!”

짝!

“둘!”

짝!

“셋!” 

일명 PT체조. 머리위로 박수 짝짝 쳐가면서 30번까지 구령을 힘차게 외쳤다. 그래도 시간이 얼마 안 지나갔다. 이번에는 양 손을 허리에 걸쳤다. 그리곤 앞으로 크게 숙였다.

“으어어어어-.”

제법 유연하다. 이마가 무릎에 거의 닿는다. 다시 바로 펴고는 이번에는 뒤로 힘껏 숙이기 시작했다.

“허어어어어-.”

힘이 조금 과하게 들어갔다. 발가락이 대지와 작별을 고하더니 몸이 뒤로 홱, 크게 넘어간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무는 바닥을 뒹굴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파 죽겠다. 눈앞이 번쩍하고 별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귀도 먹먹하니 아무것도 들리질 않는다. 어디가 어떻게 부딪쳤는지 무지하게 아프다. 성무는 아프다고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역시 무리한 운동은 좋지 않다며 핑 도는 눈물을 끔벅 떨어뜨려내는 그때, 놀란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Fesse!!”

외국인이다! 성무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다가 아파서 낑낑거렸다. 어이구 아야. 흙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그의 몸을 단단한 손길이 붙잡더니 달랑 안아 올렸다. 성무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으엑? 어어?”

아니 이 외국인이 갑자기 왜 이런데? 사과 글 못 봤나? 놀라서 굳어버린 몸뚱어리를 비페르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Fesse, 음… Ok?”

괜찮냐는 물음을 한국어로 무어라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영어나 불어로 길게 물으면 알아듣질 못하겠지. 잠시 굳어있던 성무가 활발히 바동대기 시작하자 비페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놓아주었다.

또 어딘가 병이 들어 못 오는 것인가 싶어 여기까지 찾아 온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바닥에서 발광하는 엉덩이의 모습이었다. 입은 아프다고 낑낑대고 팔다리는 마구 허우적대고 눈은 촉촉이 젖은,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마나 아프면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저러고 있는 것인지. 저 불쌍한 것을 내버려두고 떠나려했던 자신의 결정에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나 작고 연약한 것을 버리다니, 인간도 아니지.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다행히 가엾은 원시인은 약간 비틀거리면서도 똑바로 섰다. 몸에 크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 모양이다. 비페르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머리칼만큼이나 까만 눈동자가 그를 주춤주춤 올려다봐온다.

“화… 풀렸어요?”

화, 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다. 아직 화났냐는 물음인 걸까. 그냥 통역기를 준비 시킬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것을 거친, 번역을 통한 대화는 내키지 않다는 마음도 여전히 컸다. 어차피 지금은 없으니까 나중의 고민으로 미뤄두자. 비페르는 어조를 부드럽게 하여 대답했다.

“아니.”

“헉!”

성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살짝 가셨다. 아직 화 안 풀렸구나! 어쩐지 보자마자 사람을 막 들어 올리더라. 그는 아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최대한 불쌍하면서도 아부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기, 나 여기 일 년 넘게 표류한 불쌍한 인간이거든요.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어, 어제는 진짜로 미안했거든요… 많이… 다쳤어요?”

붕대 감긴 손이 보인다. 으악, 좀 세게 깨물었나보다. 그러니까 화가 안 풀렸지.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제 손을 제 입에다 물었다.

“아오, 우어어!”

나도 물게요! 우물우물 침칠하다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 침 범벅의 손을 비페르의 코밑으로 들어 내밀었다.

“무, 물어도 돼요!”

원하시는 만큼 무십시오! 다만 조금만 살살…….

“…….”

비페르는 자신의 입술 앞에서 어른거리는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쩌자는 걸까. 왜 손등을 쪽쪽거리더니 그 쪽쪽거린 손등을 내게 내미는 거지. 그것도 입 앞에. 그는 고심했다. 어쩌면 한국의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간접키스 비슷한, 뭐 그런 거. 동양의 문화는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니까 대놓고 키스를 하는 대신 이런 식으로 애무하는 것일지도.

결론. 이 원시인은 지금 키스를 원하는 것인가.

“…그런가.”

하기야 사랑한다고까지 말했으니 키스를 요구해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랄까. 바로 어제만 해도 바둥바둥 튕기더니.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사과해오기는 했지만. 아무튼 의외로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남자에 작고 못생긴, 볼품없는 상대기는 하지만 엉덩이가 예쁘고 귀여운 짓을 종종 해주니 그럭저럭 먹음직스럽긴 하다. 

“…저기요, 안 해요?”

성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안 하면 나야 좋고. 비페르는 그 고갯짓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재촉하기는.

“해 주지.”

정말로 물건가보다! 성무는 긴장하면서도 어깨를 당당히 펼쳤다.

“하, 하세요!”

대한민국 사나이, 한 번 뱉은 말은 지킨다! 그래도 조금 무섭기는 해서 눈을 슬며시 감았다. 힘이 세니까 무는 것도 세게 물겠지. 눈까지 감은 채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성무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비페르는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상대적으로 조금 작은 손이 흠칫 떨린다.

“Primi….”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라.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프랑스계 미국인의 사유지이니 당연히 미국 또는 프랑스의 법을 따라야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페르는 내민 손은 그냥 잡기만 했다. 잡고 가볍게 당기며 다른 쪽 팔로 성무의 상체를 감쌌다. 성무가 파들 떨었다. 이 자식이 도망도 못 치게 하려고…. 몸이 확 끌려간다. 가슴과 가슴…은 키차이 때문에 살짝 무리고 가슴 아랫부분과 가슴 윗부분이 닿을 동 말 동 서로 다가간다. 대체 얼마나 세게 물려고 이러는 건지 상상조차 두려웠다. 성무는 더욱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두려운 고통은 아무리 기다려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어?’

뭔가 입술에 닿더니만 몰캉하게 누르며 문지른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열며 안으로 들어와서는 혀를 툭툭 건드린다. 성무는 눈을 번쩍 떴다가 화들짝 놀라 도로 감았다. 바로 앞에 외국인의 눈알이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며 이성이 빙글빙글 맴을 돌며 도망친다. 꺄하하하, 나 잡아봐라~ 거기 서 이 새끼야~. 요리조리 잘도 도망치는 이성 탓에 현재의 상황이 얼른 인식되질 않았다.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읍?”

자, 이성 씨. 그렇게 도망 다니지 마시고 우리 마주 앉아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봅시다. 그러니까 현재 상황은 외국인의 입술이 내 입술과 붙어있고 외국인의 혀가 내 혀랑 휘감겨있는…….

“으으으읍?!!”

우아아앙?! 성무는 기겁했다. 이것은, 이것은 바로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봤던 딥키스?! 설왕설래의 그것이란 말인가!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불법침입해온 혀는 열심히 이곳저곳을 헤집어 다니고 있었다. 이 자식 능숙하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경험 전무-의식이 있었을 때에 한해서-한 일이었지만 성무는 확신했다. 선수다! 하긴 얼굴이 반반하다 못해 빛이 나니까. 하지만 왜!

“허억, 후, 후윽….”

풀려나자마자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쳤다.

“내, 내 첫 키스가!”

두 번째다. 성무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국에서였다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주먹부터 날리고 볼 시추에이션이다. 여자 빼고. 쬐끔 묘하게 좋기는 했지만 그게 더 열 받는다. 하지만 그는 극도의 인내력을 발휘해 참았다. 또다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참아야 하느니라. 무슨 짓을 해도 참아야 하느니라. 콩으로, 아니 팥으로 메주를 쑨 다 하더라도 네 하고 웃어야 하느니라. 팥으로 메주를 쒀라, 팥 메주, 메주 팥, 팥으로 쑨 메주, 메주는 팥으로 쒀야 제 맛이지. 그래, 뭐든지 옳다. 참고 참고 또 참지 화는 왜 내냐. 메주로 팥을 쒔다 하더라도 예, 믿쑵니다 해야 하는 신세! 성무는 웃었다. 있는 힘껏 웃었다. 웃자, 그냥 웃자.

“아, 하하하하… 하하…….”

메주는 팥이고 팥은 메주다. 얼굴은 웃지만 속은 썩어 들어가는 성무를 보고 비페르는 마주 미소 지었다. 좋아하는군. 저렇게나 웃으면서 좋아하는 걸 보니 또 손이 슬금 움직인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데려가고 싶지만 여길 떠나기가 싫은 모양이니. 그렇잖고서야 키스까지 바라는 상대가 따라오라 했는데도 어제처럼 반항하고 거부할 리가 없다. 비페르는 아쉬워하면서 성무의 머리만 쓰다듬어주곤 손을 뗐다. 푸욱 한숨을 내쉬는 것이 저도 아쉬운 모양이다.

“기다려주마.”

한 3일 쯤.

“뭐, 뭘요…?”

아니 이 변태 놈이 또 무슨 짓을 하겠다고 기다린대? 비페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늦은 점심이나마 먹자 하면 슬슬 돌아가 봐야한다. 다음번에는 아예 자신의 점심 또한 들고 올까 싶었다. 

아쉬운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외국인의 뒷모습을 성무는 맥이 다 빠진 채 쳐다보았다. 스릴쇼크서스펜스다. 그래도 남은 것은 있었다. 그는 바닥을 뒹구는 큼직한 보온 통을 주워들었다. 묵직하다.

“그래, 그간 먹은 것도 있고 앞으로 먹을 것도 있고. 입술박치기 한 번 쯤이야! …크흑.”

맛없는 거면 울어버릴 테야. 성무는 두근두근한 가슴을 안고 뚜껑을 열었다. 출구가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 나온 김이 눈앞을 새하얗게 가린다. 앗 뜨거, 하고 목을 쑥 움츠렸던 그가 김이 탈출한 통 속을 들여다보았다. 입이 절로 쩍 벌어진다.

“우와아아-.”

이게 닭인지 오린지 의심 갈 정도로 큼직한 체구의 닭이다. 한국에서 특급 공수해온 진짜배기 시골 토종닭의 위엄이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무려 두 마리다. 제법 큰 둥근 통이 꽉 차도록 아래위로 겹쳐져있다. 변태 외국인에 대한 껄끄러운 마음이 봄볕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변태라도 좋아.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잖아. 잘 생기고 먹을 것도 주고, 맛있는 것도 주고, 밥도 주고, 음식도 주고, 아무튼 주고. 여자였으면 결혼하자는 소리가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엄마, 나 이 남자가 좋은 거 같아!

“아이고 무지하게 실하다. 외국인 주제에 닭 좀 볼 줄 아네! 어디서 이리 큰 놈을 구했대? 기름기 좌르르르 흐르는 것 좀 봐라. 예사 닭이 아니야, 장난이 아니야. 앗 뜨, 앗 뜨!”

그냥 손대기엔 너무 뜨거워 나무를 깎아 만든 젓가락을 들고 와 푹 찍어 냄비로 끄집어냈다. 고작 한 마리인데도 냄비가 아주 꽉 들어찬다. 다리를 쭈욱 찢어내자 탱탱한 속살이 주렁주렁 늘어진다. 흔히 보던 그 닭다리가 아니다. 거의 어린애 팔뚝만하다. 좁은 우리에서 빛도 제대로 못 보고 자란 허옇게 창백한 살점이 아니라 산이며 들이며 뛰어다녀 운동 제대로 하고 자란 근육질의 쫄깃한 살덩어리다. 아주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오오, 닭느님. 언제나 옮으신 닭이시여!

“하악, 하악, 하악.”

성무는 부릅뜬 눈에 핏발마저 세우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큼직한 닭다리를 베어 물었다. 고기, 닭고기, 닭은 언제나 옳다! 내가 닭을 먹는 건지 닭이 나를 먹는 건지 모르겠구나. 살을 샅샅이 발라먹고 물렁뼈도 아득아득 씹어 먹었다. 아주 쪽쪽 빨아먹어 딱딱한 뼈다귀만이 손에 남았다. 성무는 다리뼈를 휙 하니 던져버리고 통통한 배를 갈라보았다. 인삼, 밤, 대추에 전복 등과 함께 찹쌀밥이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전복부터 날름 집어먹고는 밥 한 술 퍼먹었다.

“오오오!”

역시 삼계탕의 결정체는 육수에 절여진 찹쌀밥! 성무는 조류독감 파동으로 삼계탕 닭 한 마리 통째로 나왔던 군 시절을 떠올렸다. 비록 이게 병아린지 닭인지 의심 갈 정도로 작았었지만 맛은 참 좋았지. 우리 부대 취사병 최고.

-까드득

열심히 처묵처묵 하고 있는데 뼈를 갉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성무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 너냐?”

여우다. 작은 여우는 하도 쪽쪽 빨아먹어 육수 맛도 안 느껴지는 닭다리 뼈를 퉤 뱉었다. 그리곤 얌전히 앞발 모아 앉아 성무를 빤하게 쳐다보았다. 저놈 저거 먹을 거 막 퍼주더라. 육식동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이다. 기후가 원체 따뜻한 동네인지라 초식동물들의 먹이는 사방에 널려있다. 하지만 육식동물은 다르다. 주요 사냥감 중 하나는 가죽이 너무 두껍고 다른 하나는 너무 빠르다. 그나마 요즘은 바다거북이 알 낳는 시기라 식량 구하기가 평소보다 쉽지만 다른 시기에는 툭하면 쫄쫄 굶었다. 한데 저 이상한 생물은 먹을 걸 마구 낭비한다. 

역시 저건-

-끼앙

해석, 한성무 씨가 들으면 망나니 칼춤 출 말. 하지만 모르고 듣기론 고개 갸웃 하면서 참으로 귀엽게 깡깡거린다. 성무는 히죽 웃으며 남은 닭다리 하나를 길게 뜯었다. 한 마리 더 남아있으니까. 닭이 워낙 커서 이 한 마리도 혼자 먹기 벅찰 지경이다. 남으면 저녁에 먹고 내일 아침에 또 먹어야지.

“옛다, 특별히 줄 테니 먹어.”

어제 준 말린 생선이야 맛없는 거지만 이번에는 진짜 큰 인심 썼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없어서 못 먹는 고기를 사람도 아니고 지나가는 여우A에게 주다니!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닭은 풍성하고 친절한 외국인 씨는 내일도 와 줄 것이다. 성무는 활짝 웃는 낯으로 닭 날개를 뜯었다. 꼬마 여우도 즐겁게 제 앞다리만한 닭다리를 뜯었다. 성추행 사건은 삼계탕의 구수한 향내에 밀려 멀리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다.

“내 정원의 원시인이 나를 좋아하는 모양이더군.”

기분 좋게 귀가한 비페르가 말했다. 노집사는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야 주인님께서는 매력적이시니 까요.”

젤먼에게 연패당해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닥터가 중얼거렸다. 돈만 보면 확실히 그렇지. 사실 얼굴도 잘나기는 참 잘났다. 젊고 돈 많고 잘생겼다. 연애세포 소멸이라는 약점 정도로는 매력적이라는 말에 토 달기가 어려울 정도로 잘났다. 성격 좀 이상하면 어떤가. 아예 성격파탄자라해도 상관없다. 그 많은 돈으로 암살의뢰해서 싹 제거해버린 다음에 유산 물려받아서……이하 생략.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세계적인 인기 남, 결혼하고 싶은 상대 베스트에 드는 남자기는 하다. 

비페르는 닥터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 끝을 올려 소리 없이 미소했다. 귀여운 Fesse.

“내일은 내 점심도 함께 준비하게나.”

“알겠습니다.”

조금 더 오래 귀여워해주지. 마음 통한 상대와 키스에서 침대까지 하루면 충분하고 넘쳐서 느릴 지경이 아닌가. 그의 평균은 2시간이다. 엉덩이 상대로는 참 많이 봐주고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도면 다정남.

입술에 이어 또 다른 소중한 것까지 상납하게 될 위기에 처한 한성무 씨(약 25세 남)는 그 즈음 부른 배를 토닥이며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다. 모르는 게 약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