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1)

비페르가 관찰실의 녹화 된 영상을 확인하는 시간은 별장을 나서기 전 잠깐과 돌아 온 후 저녁까지다. 하지만 어제 오후에는 한동안 일을 떠맡겨 놓았던 비서 슈에트가 어찌나 징징대며 매달리는지 관찰실에 올라 갈 틈이 없었다. 비가 온데다 안개까지 꼈으니 확인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어차피 화면 가득 드라이아이스라도 깔아놓은 것처럼 뿌옇기만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비페르는 아침을 먹은 직후 관찰실로 향했다.

‘오늘도 조금 흐리군.’

유리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정원에 어제보다는 옅은, 희미한 안개가 스물거리고 있었다. 거의 새벽까지 비가 줄기차게 내린 탓이다. 이래서야 확인해 볼 가치도 없겠다 싶어 그냥 삭제하려는 그때, 망원경의 센서에 붉은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

일정 크기 이상의, 일정 시간 이상의 움직이는 물체가 포착되었을 때 켜지는 센서다. 하루 종일 망원경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기에 설치해놓은 것이었다. 그 망원경의 위치는 바닷가, 정확히는 야생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장소 부근이다.

“…설마.”

어제는 비가 왔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아니, 왔다 하더라도 없으니까 돌아갔겠지. 어쩌면 그냥 바닷새나 다른 동물일지도 모른다. 섬에 야생동물이야 얼마든지 존재하니. 어쩌면 거북이 알을 찾으러 나온 여우일지도. 비페르는 녹화 된 화면을 재생시켰다. 처음에는 마냥 하얗다. 진득하게 흐르는 안개만이 화면 가득 들어차있었다. 그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시간을 돌렸다. 자신이 방문하는 시간대에 가까운, 열시 즈음으로.

어제 오전 10시. 안개가 많이 걷혔다. 하지만 여전히 모래사장은 텅 빈 채였다. 10시 10분. 아무도 없다. 10시 20분. 역시나 비에 젖은 모래와 거무칙칙해진 바위뿐이다. 10시 30분, 10시 40분, 그리고 10시 50분.

“…!”

숲에서부터 슬금슬금 걸어 나온다. 홀딱 젖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불쌍하게도 추운 듯 양팔로 몸을 감싸고는 연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비페르의 손이 무심코 꽉 주먹 쥐어졌다. 화면 상단에 위치한 흰색 시계표시는 계속해서 숫자를 바꾸었다. 11시, 11시 10분, 11시 20분…… 그 동안 스크린 속의 청년은 이따금 오락가락 하면서도 결국 바위 주위를 떠나질 못했다. 희미하던 몸의 떨림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간다. 입술의 색도 점차 파랗게 물이 든다. 비페르는 참다못하고 영상을 돌렸다. 10분 단위로 계속해서 돌리고 돌려도 영상 속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고장이라도 났나 의심 갈 정도로 끈덕지게 붙어있다. 결국 모래사장이 텅 비게 된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엉덩이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해놓고서도 미련을 못 버리고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스크린 밖으로 사라져간다.

“………….”

처음에는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페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이마를 짚었다.

“…미련하게.”

사람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면 되건만 왜 미련하게 기다리고 섰단 말인가. 기다린다고 해도, 1, 20분이면 충분하다. 11시가 되어도 오지 않으면 돌아가야지! 한 시간도 아니고 네 시간이 넘도록!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스크린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몸을 돌렸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지금 가슴을 콱 메운 감정이 무엇인지 잘 가늠되지 않는다. 분노와 걱정, 짜증,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묘한 기쁨, 만족감. 그것들이 한데 뒤섞여 무어라 말하기 힘든 감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축약하자면, 속이 아주 갑갑했다. 멍청한 엉덩이! 엘리베이터 문이 채 열리기가 무섭게 들어 선 비페르는 1층 버튼과 닫힘 버튼을 거의 내리치듯 눌렀다.

“도대체가… 용케도 여태껏 살아있었군!”

그렇게나 미련하고 멍청하고 순해빠져서……. 답답할 정도로 느린 엘리베이터 벽을 팔로 쾅 소리 나게 두드렸다. 

“……역시 그냥 둬서는 안 돼.”

저런 걸 혼자 내버려둬서야 시체밖에 더 치울까. 데려다가 곁에 놓고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비페르는 천천히 지켜보며 설득해보자는 생각을 뒤엎었다. 일단 가서 상태부터 확인해보자. 약해졌을 때 많이 놀라고 겁먹거나 갑자기 환경이 변하게 되면 몸에 좋지 않으니 다시 건강해지면 데리고 오자. 최대한 빨리. 비페르는 결심했다. 저 불쌍하고 연약한 생물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노라고.

한성무 씨가 알았다면 신체 건장한 대한의 건아에게 무슨 헛소리냐! 분기탱천 소리 칠 결심이다. 

젤먼은 바라던 대로 오늘의 음식 통에 파란색 칠을 했다. 다만 가방이 아닌 보온 도시락이었고, 10단 도시락이 아닌 3단 죽 그릇이었지만. 참고로 1단부터 전복죽, 쇠고기죽, 호박죽이다. 그는 주인이 내려오길 기다리면서도 의아하게 자신이 든 둥근 도시락 통을 힐끔거렸다.

“흰 쌀밥을 포함한 10단 도시락을 준비하라고 하더니만. 왜 갑자기 수프인가?”

“수프가 아니라 죽.”

소파에 걸터앉은 닥터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저껜 그저께고 오늘은 죽이 더 걸맞으니까. 너무 많으면 물리니 3단이면 딱 맞아.”

왜 걸맞은지는 끝까지 말 안 해준다. 그 배배꼬인 성격이 형성되는 데에 60퍼센트쯤은 선대 가주가 기여해주었기에 젤먼은 별달리 토를 달지 않았다. 나머지 40퍼센트의 기여자는 선대 가주의 부인되시겠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비페르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는 두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비밀 문으로 가려했다. 젤먼이 잽싸게 젊은 주인의 앞을 막아섰다.

“평소보다 빠르시군요. 여기 죽입니다.”

“…죽?”

낯선 단어에 의아해하면서도 비페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3단 죽 보온 통을 받아들었다. 설명을 들을 시간이 아깝다는 투로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이번에는 닥터의 말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감기약도 필요할 텐데.”

“아!”

감기약. 그래, 틀림없이 감기에라도 걸렸겠지. 비페르는 당장 뛰쳐나가고픈 마음을 억누르고 뒤돌아섰다. 그런 그를 향해 닥터가 한 움큼의 색색 포장 된 사탕 같은 것들을 꺼내어 보였다. 그리고는 싱긋 웃는다.

“무슨 맛 줄까.” 

“…….”

벌벌 떨며 돌아 온 직후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별 맛없는 마른 음식은 입이 껄끄러워 한입 물었다 뱉어버리고 물만 조금 마시고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젖은 옷을 벗어서 구석에 던져버리는 그 잠깐의 움직임도 힘이 들었다. 성무는 베개 대신 제 배낭을 반은 베고 반은 끌어안은 채 끙끙 앓았다. 밖으론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설상가상으로 해까지 져 온도는 더욱 내려갔다. 한기가 스물스물 턱 아래까지 기어들어온다. 성무는 본능적으로 몸을 잔뜩 움츠렸다.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에 떠나온 집의 낡은 이불이 빙글빙글 함께 돈다. 재활용 수거함에서 몰래 빼돌린 허름한 것이라지만 솜이 꽉 들어찬 따뜻한 이불이었다. 일부러 저 먼 시내의, 그 중에서도 잘사는 동네라고 소문난 곳까지 원정 가서 구해온 것이었다. 동네 아줌마가 메이커 듣고는 제 돈 주고 사려면 십만 원이 훨 넘는다고 그랬는데. 기운 자국이 덕지덕지 있어도 덕분에 겨울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그 이불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우…으…….”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성무는 더듬거려 쓰고 남은 가죽을 당겨다 몸을 대충 덮었다. 따뜻한 곳이다 보니 평소에는 아무것도 안 덮고 잤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담요 비슷한 거라도 하나 만들어 둘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추위와 함께 스며든다. 

오한에 덜덜 떨며 까무룩 잠들었다가 망치로 쾅쾅 내리치는 듯한 두통에 깨기를 십 수 번 반복했다. 이러다 진짜 콱 죽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여러 차례 들었다. 여기는 병원도 약국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여기가 아니면 또 뭐 다를 게 있을까도 싶었다. 땡전 한 푼 없이 다 날리고 병원비도 약값도 없는 신세잖는가. 집도 없이 길거리에서 끙끙 앓겠지. 학창 시절 친구들이랑은 연락 끊긴지 오래고 하나 뿐인 혈육인 아버지는 생사도 불명이니. 

“……훌쩍.”

뎅뎅 울리는 머리를 움켜잡고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훌쩍 삼켰다. 별로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냥 남들처럼 살고 싶었는데. 열심히 일해서 돈 모으고 좀 더 넓은 집 마련하고 그러다 결혼해서 애들 낳아 키우고 늙어가고…. 무슨 운이 터지거나 과한 호사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일한 만큼만 손에 쥐면 충분히 족했는데. 그런데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가 않는다. 나 전생에 뭐 큰 잘못이라도 했나봐…….

“쿨럭! 으흑…….”

머리 아프고 열나고 콧물 좀 나오더니 이젠 목이 걸걸해지며 기침까지 튀어나온다. 그야말로 종합감기의 표본이다. 으슬으슬 춥고 온몸이 뻣뻣한 것이 몸살도 추가. 그새 비는 그쳤는지 바깥이 조용하다. 차가운 새벽공기 사이로 새소리가 가늘게 들려오다 멈춘다. 성무는 켈록거리면서 눈을 반쯤 뜨고 마른 생선을 찾아다 억지로 씹었다. 먹어야 살지. 무슨 모래 씹는 기분이었지만, 그냥 웩하고 토하고팠지만 눈 딱 감고 삼켰다. 빨리 나아야 어떻게든 살지. 여기서 혼자 쓸쓸히 죽기는 싫다. 한줌 될까말까한 것을 겨우 목구멍 너머로 우겨넣고 다시 머리를 배낭에 박았다.

“우… 괘,괜찮……아.”

그래, 고작 감기 때문에 죽기야 하겠냐. 하루 쯤 아프다 말겠지. 차라리 감기라 다행이다. 약 먹어도 일주일 안 먹어도 일주일이라잖아. 심각한 병이라면 영락없이 황천길 건너야하니까. 성무는 끙끙거리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비도 그쳤고 해도 떴다. 푹 자고 일어나면 좀 낫겠지.

엉덩이의 주거지는 이미 알고 있다. 해변에서 그리 멀지않은 숲속이었다. 무성한 나무에 가려져 망원경을 사용해도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만 약간 나뭇가지를 친 흔적이 있었다. 또한 종종 연기가 피어오르고 밤이면 불빛도 약하기 비친다. 비페르는 죽과 감기약을 들고서 평소 향하던 바닷가가 아닌 동쪽의 숲 언저리로 향했다. 손에는 나침반 대신 PDA가 들려있다. 화면에는 현재 위치와 목적지의 방향이 반짝반짝 표시되고 있었다.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고 큼직한 바위를 뛰어넘어 나아가자 반쯤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야자열매 껍데기와 칼로 잘라낸 나뭇조각, 생선가시와 짐승의 뼈다귀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모래를 옮겨다 깔아놓은 곳 가운데로는 불에 탄 흔적이 까맣게 남아있었다. 비페르는 잠시 멈춰선 채 숨을 골랐다.

“…….”

장소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보는 것은 처음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참으로 초라하다. 살아가는데 있어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간신히 충족 된 삶의 흔적들. 물론 이런 삶을 기꺼워하고 일부러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극소수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자료를 읽은 적도 있고 직접 만나본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껄끄럽고도 답답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페르는 짧게 한숨을 토해내곤 나무뿌리가 뒤엉켜 만들어진 작은 동굴로 다가갔다. 허리를 굽혀 안을 들여다보니 컴컴한 어둠 속에 끙끙거리는 몸뚱이 하나가 늘어져있다. 가죽 쪼가리 하나 덮고선 잔뜩 웅크린 채다.

“Fesse…….”

아침에 본 영상 속 마지막 모습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안색이 좋지 못하다. 미련하게 네 시간이 넘게 비를 맞고 있었으니. 혀를 쯧쯧 차며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좁긴 했지만 그럭저럭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다. 비페르는 배낭에 파묻힌 얼굴을 위로 향하게끔 돌려 뺨을 살짝 두드렸다.

“Fesse.”

“우…응…….”

잠과 열에 취한 성무가 짜증스러운 신음성을 흘렸다. 뭐가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지. 나 아프단 말이야! 어리광부리듯 낑낑대는 모양새를 잠시 내려다보던 비페르가 감기약을 꺼냈다. 동시에 가슴 포켓의 수첩도 꺼내 펼쳤다. 수첩 속에는 닥터가 직접 적어 준 글들이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Fesse, 딸기맛 감기약 줄까, 사과맛 감기약 줄까, 멜론맛 감기약 줄까, 포도맛 감기약 줄까, 바나나맛 감기약 줄까, 땅콩버터맛 감기약 줄까.”

마치 모 화장실 괴담에서 등장하는 귀신이 내뱉는 말과 비슷한 어조다.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잠에 취해 멍한 머릿속으로도 성무는 생각했다. 저 중에서 멜론이 제일 비싸다. 다른 과일이야 겨울 아니면 그럭저럭 흔하지. 땅콩버터라는 낯선 단어가 결정을 조금 늦추긴 했지만 역시 고르라면 멜론이다. 성무는 그대로 눈을 꾹 감은 채 더듬더듬 대답했다.

“메, 멜론…….”

비싼 멜론. 

“멜론.”

이 엉덩이는 멜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도시락의 후식용 과일 멜론 당첨. 비페르는 감기약의 비닐 껍질을 벗겨냈다. 연록색 약은 딱딱한 사탕은 아니고 생캔디와 비슷했다. 정확히는 그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그러니까 캐러멜과 마시멜로우의 중간 정도쯤. 그는 멜론맛 감기약을 들고서 잠시간 고민했다. 알약처럼 삼키라고 넣어주기에는 너무 크다. 그렇다고 의식이 흐릿한 상태에서 그냥 입에 넣어두었다가 자칫 기도로 넘어갔다간 질식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부드러운 알약이니 녹아 들어가는 것은 빠르겠지만. 비페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냈다. 입안에 넣어서 한쪽 볼에 밀어 넣어 녹아 흘러들어갈 때까지 고정시킬 것. 혹여 잘못 들어가지 않도록 녹는 내내 안쪽에서 눌러주는 것이 안전하다. 그러니까 손가락이나 혹은-

“…….”

음, 타인의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은 불결한 일이다. 비페르는 그런 불결한 짓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손이야 씻고 왔지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이것저것 손대기도 했고 시간도 꽤 걸렸고 땀도 흘렸고. 또 손가락에 타액을 질척질척 묻히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 아닌가. 아무튼 남의 입 속에 손가락은 그다지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역시 손가락은 안 된다. 그러니까 손가락은 제쳐두고 근처에 마땅히 넣을 만한 것도 없고…. 비페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남는 게 혀뿐이군.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아픈 사람을 손안에 든 약도 안 먹이고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비페르는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약간 벌어진 틈새로 집어넣고 그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인공호흡과 비슷한 맥락이다. 의식 흐린 사람에게 먹이기 힘든 감기약을 준 닥터의 잘못인 것이다. 아무튼 입 맞추고 혀를 넣어 입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멜론맛 감기약을 한쪽 볼 쪽으로 밀어 넣었다. 멜론맛 감기약은 볼 안쪽으로 제법 단단하게 끼어들었지만 만약을 대비해 혀를 뺄 수는 없었다. 숨이 막힌 성무가 잠결에 파다닥거린다. 그러다 알약 삼킬까봐 비페르는 가만히 그의 몸을 내리눌렀다. 성무가 낑낑거린다. 꿈속에 돌덩어리가 떨어져 몸을 덮쳤다. 몸은 무겁고 호흡조차 가빠진다. 으허억, 사람 살려! 다행히 알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아내렸다. 달콤한 멜론맛이 입 속을 가득 메우자 성무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비록 바위에 깔린 채로 먹는 멜론이지만 그래도 맛있다. 할 일 다 한 비페르가 스윽 떨어져나갔다. 성무의 얼굴에 죽다 살아났다는 안도가 가득히 퍼진다.

“괜찮아진 건가.”

속사정 모르고 보기엔 약 먹고 편해진 것 같다. 상당히 효과 빠른 약이라고 중얼거리며 비페르는 늘어진 몸을 주욱 훑어 내렸다. 어제 본의 아니게 네 시간동안 샤워한 덕에 때깔은 좋다. 화장품도 오죽 좋은 걸 쓰는가. 갈색병도 발밑에 깔보는 가격대의 로션을 매일매일 온몸에 덕지덕지 문대고 있으니 아주 매끌매끌 윤이 다 난다. 특히 갈빛 자르르한 팔다리는 그 유명한 북경오리 껍데기 저리가라 할 정도다. 무심코 군침이 꿀꺽 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위는 엉덩이지. 비페르는 잘 자고 있는 청년을 홀라당 뒤집었다. 다시금 배낭에 얼굴을 처박게 된 성무가 꿈지럭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페르는 미간을 좁히며 드러난 엉덩이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하얗군.”

시킨 대로 관리를 잘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흐뭇해졌다. 뽀야니 하얀데다가 탱탱하게 윤기 흐른다. 운동량이 많은 덕인지 작으면서도 처짐 하나 없이 날렵하게 동그란 선을 그린다. 한 짝에 한 손이면 딱 맞을 듯하다. 정말로 그런가 싶어 비페르는 손을 뻗었다. 

“으음.”

딱 맞다. 마치 그의 손에 맞추기라도 한 듯 잡기 좋은 크기였다. 게다가 감촉도 상당히 좋다. 1여 년간 공기 좋은 곳에서 유기농 숙성 된 엉덩이라서 일까. 그간 투자한 가치가 있다 생각하며 비페르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가 봤으면 당장에 신고당할 모양새지만, 다행이도 보는 눈은 아무도 없었다. 봤다 하더라도, 또 그 목격자가 때마침 기자라서 사진 찍고 속필로 기사 써서 냈다 하더라도 다음날 일간지에 오르기도 전에 조용히 어둠속으로 묻히겠지만. 백억을 줄 터이니 무덤까지 가지고 가게. 조금만 더 쓰시지요. 지금 묻히고 싶나. 세상은 그런 법이다.

잠시간- 실은 꽤 오래 남의 귀한 집 자손 엉덩이를 조몰락거리던 비페르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 원시인 동굴보다 못한 집의 천장은 성무의 머리도 사정없이 박히는 높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바닥을 기어 좁디좁은 집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이군.”

그는 옷을 툭툭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걸음마 마스터한 뒤로 이렇게 땅을 긴 적은 처음인 듯하다. 노집사가 알았더라면 기겁해 성무의 스위트 홈 개축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주인님께서 바닥을 기다니! 비페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보곤 걸음을 옮겼다. 

젤먼은 그의 주인이 외출한 이후로는 줄곧 비밀통로가 있는 방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비페르가 혼자서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위치가 위치니만큼 적도 많은 사람이다. 홀로 섬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독니를 품은 자들이 슬금슬금 섬으로 기어들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비페르는 반드시 이 방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만 했고, 젤먼은 사실은 없는 주인 곁에 못 박혀 있어야만 했다. 평소에는 휴대폰과 컴퓨터를 이용해 맡은바 일을 처리하거나 독서나 음악 감상 등의 소소한 시간을 보냈지만 오늘은 말동무가 있었다. 갑작스런 납치 핑계로 일을 죄다 조교들에게 떠넘겨 한가해진 닥터가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도와주는 것이 마음이 좀 풀린 모양이지.”

젤먼의 말에 닥터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처음부터 도와주고 있었다만?”

“뭐? 녹음기도 망가뜨려 놓고서는?”

“도와 준거라네, 그거. 동포의 불쌍한 처지도 무시하고 도와주었건만. 이래봬도 나는 비페르 그 새끼 뱀을 아끼고 있다고.”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는 않구먼.”

“멀쩡한 남자라면 그놈 재산 좀 많다고 날름 엉덩이를 대 주진 않겠지. 마음은 돈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겠지만….”

그게 뭐 어쨌느냐는 시선에 닥터는 대답대신 홍차를 홀짝였다. 세상에 단 둘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게 되기 마련이다. 외롭고 힘들고 아픈데 그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해 온다면 더더욱. 특히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때 돌봐주는 것이 최고다. 때문에 닥터는 자신이 있는 곳을 무인도라고 착각한 채 바둥거리는 불쌍한 청년을 모르는 척했다. 대신에 정히 비페르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겠다면 책임지고 돌려보내 주리라 마음먹었다. 일종의 보상이다. 혼자서 도망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아무튼 주인님께서 진심이시라면….”

젤먼이 땅이 꺼져라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뵙기는 먼 꿈인가…….”

“무얼, 남자사이에서도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네. 비용이 상당히 들어가고 대리모까지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뭣하면 정자라도 보관 해 둬.”

“이미 보관되어 있다네. 만일을 대비해서 말이지. 정 안되면 조카 분들이 태어나시면 양자로 들여야지.” 

“그게 제일 낫겠군. 하지만 연애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 어라?”

닥터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젤먼이 얼른 일어나며 막 들어서는 비페르에게로 다가갔다.

“다녀 오셨-.”

“아니 왜 벌써 와?!”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노집사의 인사말을 먹어치웠다. 닥터는 곱지 못한 눈초리로 비페르를 쳐다보았다.

“제대로 갔다 오기는 한 거냐?”

비페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론 충분하고도 남았다.

“약 하나 먹여주고 죽을 주고 왔어.”

직접 걸어가서 그 정도까지 해줬으면 과분할 정도로 신경을 써준 것이다. 젤먼 역시 그에 동의했다. 마스터께서 손수 약을 먹여준 사람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정원의 불법침입남 한 명 뿐이다. 

“참으로 상냥하십니다. 말만 들어도 감격스러울 지경이로군요.”

“상냥은 개뿔이!”

하지만 어쩌다가 재벌가에 휘말린, 10대 후반까지는 평범한 서민이었던 박한석 씨는 어이가 없다 못해 뒷골이 당길 지경이었다. 하여간 이놈들은 현대판 왕족이다. 사람이, 그것도 마음에 둔 사람이 앓아누워있는데 달랑 약만 먹이고 바로 돌아 오냐?

“네놈은 간병이란 걸 해 본 적도 없-! 당연히 없겠지. 후우. 그렇다고 해도 그냥 덜렁덜렁 돌아 와? 애가 앓고 있는 거 보고 뭔가 느껴지는 것도 없더냐? 엉? 가슴에 뭔가 걸리지도 않아?!”

“걸리기야 걸리더군.”

돌아오는 내내 손바닥이 근질거려 열 걸음에 한 번은 돌아갈까 싶긴 했다. 무심코 한쪽 손을 움찔거리는 비페르를 향해 닥터가 혀를 쯧쯧 찼다. 차려놔도 못 먹냐. 나이가 몇인데 떠먹여줘야 하는 거냐. 그만큼 판을 펼쳐 놨으면 알아서 좀 잘 해볼 것이지. 닥터는 양팔 넓게 벌리며 흔들어보였다.

“아, 몰라! 알아서 해라! 그 환경에 단순한 놈이라면 먹을 걸로도 넘어오겠지 뭐. 하여간 아비나 자식 놈이나!”

이런 문제에 대책 없기론 아주 똑 닮았다. 관심 조금 보여주는 걸로 모든 사람이 다 고마워 할 줄 아나? 아무튼 태생부터 잘난 것들이란. 악수만 해줘도 감격하는 자들이 주위에 널려있다 보니 저 모양 저 꼴이다. 그거 다 돈보고 그러는 거거든! 닥터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가버렸다. 쾅 닫히는 문을 비페르와 젤먼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글쎄요. 제 생각으론 아무 문제없습니다만.”

“……감기약이 1회 두 개 복용 분량이었나?”

고심하던 젤먼이 손바닥을 탁 쳤다.

“아! 생각해보니 감기약은 식후복용이 많더군요. 죽부터 안 먹이고 약만 먹여서 화내는 게 아닐까요.”

“그렇군. 다음번에는 죽부터 먹이고 약을 먹여야겠어.”

두 사람은 사이좋게 헛다리를 짚었다.

멜론… 멜론… 아, 달다……. 아직도 입안을 맴도는 달콤함에 성무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꿈이 너무 리얼해. 행복할 정도로 생생한 꿈이다. 맛있어라. 이건 진짜 너무… 음…… 진짜 꿈 맞나? 성무는 흐리멍덩하게 눈을 끔벅였다. 어라, 눈을 떴는데도 입속이 달달하다. 꿈이 아닌가? 하지만 꿈이 아니라기엔 입속이 돌연 달콤해질 리가 없었다. 침샘이 꿀샘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뭐지.”

단 열매가 제 발로 걸어 입안으로 다이빙이라도 했나. 그러고 보니 열도 많이 내렸다. 뎅뎅거리며 아프던 머리도 이제는 괜찮아졌다. 기침도 콧물도 멎고 목만 조금 깔깔했다. 성무는 비실비실 몸을 일으켰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어?”

파다닥 일어나다가 천장에 머리박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무의 두 눈이 집 한쪽 구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낯선 물건이 한 자리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파란색… 원형의 보온 도시락이다. 그의 기억 속에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물건. 성무는 머뭇거리면서도 슬그머니 도시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따뜻하다. 단순 보온이 아니라 배터리로 30시간 동안 온도를 유지하는 도시락 통이다. 성무는 뜨끈뜨끈한 도시락 통을 들어 뺨을 가져다대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허겁지겁 뚜껑을 열었다. 맨 위에 은제 스푼이 나오고 그 아래로 따뜻한 죽이 새하얀 자태를 드러낸다. 모락모락 김과 함께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전복죽이다. 성무의 두 눈이 놀람과 기쁨으로 커다랗게 뜨여졌다. 마치, 마치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를 동시에 맞이한 꼬마아이의 기분이다. 세상에, 죽이라니. 따뜻한 죽이라니.

“으흑… 우흐흐…흑, 하하하, 흑흑…….”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요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성무는 스푼을 꽉 틀어쥐었다. 먹어도 되겠지. 먹어도 될 거야.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놓아두고 간 거잖아. 틀림없이 먹으라고 주고 간 거겠지. 분명해. 

“훌쩍, 그, 외국인인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1년이 넘도록 그 외국인 말곤 사람 그림자도 못 봤으니까. 성무는 감격했다. 진짜 좋은 사람이었구나. 먹을 것 줄 때부터 씨 뿌려진 호감도에 물은 물론이고 거름에 영양제까지 주어졌다. 아, 좋은 사람. 아, 좋은 사람~. 한 숟갈 크게 떠서 호호 분 다음 입에 넣었다. 절로 눈이 감긴다. 

“흐으으.”

쌀이다. 그냥 아주 사르르 녹는다. 혀는 물론이고 볼과 입천장, 목구멍까지 죄다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어릴 적 봤던 요리만화의 그 과장된 모습들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싶을 정도다. 정말로 승천하겠어. 

“외국인 씨, 당신은 천사예요!”

욕한 거 미안해요! 사랑합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좋은 사람이 다 있었다니. 어쩐지 생기기도 잘생겼더라. 그 금발을 봐, 완전 천사잖아. 성무는 외국인에게 찬사를 쏟아내며 아구아구 죽을 퍼먹었다. 아아, 좋다. 행복해. 진짜로 진짜로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야. 그 친절하고 착한 천사님께서 엉덩이를 한참이나 조몰락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이 조금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성무는 잠든 사이의 일은 까맣게 몰랐다. 모르는 게 약이다.

“역시 한국 음식이 최고야! 참, 멸치 볶음! 같이 먹어야지~ 으아, 좋다! 으흑, 맛있어! 외국인님, 고마워요! 우와, 또 있다! 호박죽이다! 밑에 또 있어! 이건… 고기?! 설마 소고기인가? 돼지라도 좋아! 아아, 맛있어, 맛있어!!”

행복했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표현하자면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진짜로 죽으라면 입 딱 닫고 먹던 죽 그릇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밀겠지만. 

한 번에 다 먹기로는 한창때의 성인 남자의 밥통으로도 벅차 남은 것은 고이 뚜껑 닫아 보관해두었다. 보물 1호다. 2호는 시계. 파텍 필립이 죽에게 패배했다. 성무는 입 주위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곤 벌러덩 드러누웠다. 배부르다. 뜨끈한 죽을 양껏 먹었더니 감기도 훨훨 달아난 모양이다.

“행복해….”

정말이지 더는 바랄 것이 없다. 비록 상황이 변화한 것도, 나아진 것도 하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 행복이 별거냐. 이렇게 작고 짧은 행복이라 해도 행복은 행복이지.

“외국인님, 진짜로 최고.”

성무는 볼록 부른 배 두드리며 행복한 잠에 빠져들었다.

밤이 깊었다. 잠들어야 했을 시간은 이미 넘긴지 오래다. 하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다. 시간 맞춰 눈만 감는다고 해서 잠들 수 있다면 각종 수면요법이며 약물들이 존재하지 않았겠지. 비페르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려진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자 키보다 더 큰 유리창 너머로 달이 새하얗게 흔들거린다. 하얗게 아주 하얗게. 그만큼이나 흰 엉덩이가 떠오르다가 순간 비에 홀딱 젖어 창백해진 낯빛으로 뒤바뀐다. 

“…….”

이전 같았으면 하얗고 뽀얀 엉덩이만이 눈앞에 아른거렸을 텐데 어째선지 핏기 가신 얼굴이 더 또렷하게 나타난다. 쓸데없이 감정적인 달빛 때문일까. 비페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원으로 나갔다.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밤인지라 그의 기준으로 조그마한 실내 정원에는 벌레소리만 작게 흐르고 있었다. 그마저도 이따금씩 끊겨 완벽한 침묵을 자아낸다. 발끝이 풀잎을 스치게 둔 채 걸어가던 그의 눈에 저만치 앉아있는 선객이 들어왔다. 정원의 야생인과 같은 한국인, 박한석이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조용한 시선이 얼굴 근처로 다가와 붙는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러는 닥터야 말로.”

“나야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서. 아무튼 사람을 난데없이 납치해오고 말이야.”

비페르는 투덜대는 닥터의 맞은편에 앉았다. 짙은 검은색 눈을 마주대하니 심장이 더욱 수런거린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봐 넌 그 녀석이 젊었을 때와 똑같아.”

시선을 밤하늘로 옮기며 닥터가 말했다.

“거만하고 오만하고… 그에 걸맞게 잘나서 더 짜증났다.”

“…이 정도면 자리에 비해서는 겸손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아, 뭐. 그건 그렇지. 악취가 날 정도로 분에 맞지 않는 거만을 떠는 놈들도 널리고 널렸으니. 하지만 진짜 짜증났어. 사람을 동등하게 보질 않으니 말이다. 내가 무슨 제 애완동물 쯤 된다는 태도에 멱살이라도 틀어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저 없어도 잘 살 수 있거든? 필요 없다고 내버려 두라 해도 말귀를 알아듣길 하나. …빌어먹을 놈. 그렇게 잘난 척을 해댄 주제에 쉰도 못 되서 뒈지기나 하고.”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닥터는 다시 눈을 내려 마주 앉은 친구의 아들놈을 바라보았다.

“다른 놈들한테는 그래도 돼. 그런 위치니까. 하지만 정말로 마음에 드는 상대라면 조금이라도 더 동등하게 대하도록 노력하는 게 좋을 거다. 나야 유순하지 못한 성격이 되놔서 불만 있으면 대놓고 쏘아붙였지만, 순한 애 데려다놓고 네 맘대로 굴렸다간 말려죽이기 딱 좋으니.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척하니 알아듣고 하루아침에 변할 리가 만무하겠지만.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그 난리를 안쳤지. 아무튼 네놈 아버지나 네놈이나 차려놓은 밥상도 제대로 못 먹어요. 네놈 가문은 유전적으로 연애세포가 사라졌나? 잘 좀 해봐라, 멍청아.”

닥터는 몸을 일으켜 휘적휘적 자리를 떠나갔다. 비페르는 잠시간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솔직히 그가 왜 저런 말을 꺼내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모친으로부터 그가 젊었을 적 부친 탓에 고생 깨나 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왜 그 이야기가 지금 나온단 말인가. 차려놓은 밥상은 또 뭐고.

“…마음에 드는 상대라고.”

문득 추위에 하야니 질린 못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에 드는 얼굴은 절대 아니건만, 어째서인지 떠올랐다.

“흐아아아으아!!”

성무는 팔다리를 쫙쫙 펴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햇살은 반짝이고 머리 위에서 새들이 짹짹거린다. 언제 끙끙 앓았냐는 듯이 맑아진 날씨와 함께 성무의 건강상태도 상쾌한 녹신호를 깜박거렸다. 당장에 철인 3종 경기를 주파할 수 있으리만치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이다.

“흐아아암, 우음, 흠.”

한번 앓고 났더니 보상이라도 하는 듯 더 기운이 샘솟는다. 띄엄띄엄 기억나는 국민체조를 가볍게 해 준 성무는 새파랗게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 같은 외국인님이 또 와 주려나.”

보물 1호 남은 죽은 조금 전 아침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쯤 뱃속에서 열심히 소화되는 중이겠지. 맛 좋고 소화 잘되는 죽이여, 안녕. 멸치 볶음도 반찬삼아 다 먹어버렸기에 이제 문명화된 음식은 남아있지 않았다. 성무의 눈가가 조금 슬프게 쳐진다.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먹었어…….”

외국인님의 배식이 끊기면 앞으로 무슨 재미로 사냐. 역시 어떻게든 달라붙어서 문명으로의 복귀를 노려봐야하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돌아가면 되레 더 쫄쫄 굶게 될 것만 같다. 시계 팔아봐야 백만 원도 안 나올 텐데, 월세 보증금으로도 모자라는 돈 가지고 지금처럼 매 끼니 잘 챙겨먹고 사는 건 힘들겠지. 지금은 지겹긴 해도 매일매일 싱싱한 생선에 고기 먹으며 살고 있는데. 무사히 돌아가도 문제가 산더미요 앞날이 천리 가시밭길이다. 그래도 돌아는 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역시 혼자는 외로워.”

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외국인 밀렵꾼이 일 다 끝내고 돌아 갈 적에 어떻게든 달라붙어 봐야지. 그때까지 최대한 비위를 맞춰줘야만 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칼에 총까지 들었으니 탕하면 억하고 세상 뜨는 것이다. 조심조심하면서 아첨을 떨어보자.

“오 마이 엔젤!”

맛있는 밥만 주면 당신도 오늘부터 천사님.

새들은 오랜만에 눈을 반짝거렸다. 삼일 전에는 부리도 대기 싫은 발톱만한 말라빠진 생선이었고 그제는 비가 내렸다. 어제는 아무도 오지 않아 실망만 잔뜩 했다. 하지만 오늘, 돌아 온 저 검은색 먹이통을 보라. 설마 저렇게 큰 먹이통에 전처럼 자잘한 멸치 따위가 들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들었다면? 배신이다. 눈치가 있는 수컷이라면 오늘만큼은 제대로 된 먹이를 가지고 왔겠지. 맛있는 거, 맛있는 거.

10단 칠기 보온 도시락을 바위 위에 내려놓은 채 비페르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늘도 습관처럼 여기까지 왔다. 일정까지 바꾸고 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냥 무시하기에는 자꾸만 떠오르는데다가 이틀 전처럼 미련하게 마냥 기다릴지도 모른다. 비는 오지 않지만 쫄쫄 굶으며 버림받은 개처럼 배회하겠지. 그러니 이렇게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잘 따르고 있으니.’

싱숭생숭한 마음에 눈살 찌푸리다가도 그것만 생각하자면 미소가 번진다. 그래, 귀엽긴 하지. 시키는 대로 잘 하고 목메어 기다릴 줄도 알고. 이래저리 지켜보는 맛도 상당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내리자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정도는 아니다. 아닌데.

“…왜 안 오지.”

설마 감기가 아직 다 낫지 않은 건가. 되레 더 심해져 폐렴 같은 걸로 발전해버린 것은 아닐까. 조금 전의 자신이 왜 이러고 있나 하는 고민은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렸다. 역시 얼른 동물원이든 본가에든 데려다 놓던지 해야지. 불안해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남자 주제에-

“우와, 천사님!”

저만치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성무가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폴짝폴짝 뛴다. 검은색 도시락 상자를 보고는 더 좋아서 팔딱거린다. 비페르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미소를 짙게 머금었다. 뭐라고 소리치는지는 모르겠지만 팔팔한 것이 다 나은 모양이다. 활짝 웃는 면상이 평소보다 조금 덜 못생겨 보이기도 하다. 꼬리가 있으면 탁탁탁 쳐댈 듯 즐겁게 뛰어오는 모양새에 손이 근질거린다. 쓰다듬는다면 머리겠지만 아래쪽도 나쁘지 않다. 반짝반짝 쳐다봐오는 까만 눈망울이 이상하게 예뻐 보여 비페르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잠이 부족한 탓인가.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자기는 했다.

“고마워요! 죽 진짜 맛있게 잘 먹었어요!”

성무는 성심성의껏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 엑기스다. 눈앞의 외국인이 밀렵꾼이든 범죄자든 살인자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상관없었다. 그냥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만 비춰졌다. 죽이 다 소화되고 나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혹은 어제의 첫 키스 강탈이나 엉덩이 주물럭 사건을 알게 된다거나.

고맙다는 말과 죽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었기에 비페르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10단 도시락 가방을 하나씩 열어 바위 위에 펼쳐 놓았다. 성무의 입과 눈이 동시에 커다랗게 벌려진다.

“우, 우와아아!”

뭐지 이건. 꿈인가요, 꿈입니까? 아니면 밤새 감기로 앓다가 결국 비참히 세상 하직했지만 고생 끝에 낙이라고 천국에 들어 선 건가! 귓가에 노래가 맴돌았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흰 쌀밥이 가운데 놓이고 오른쪽에는 소갈비가, 왼쪽에는 색색의 나물에 김치가. 앞에는 삼색전이요 뒤에는 대하와 꽃게라. 북서로 굴비와 조기가 보이며 남서로는 편육과 냉채다. 남동에 육회와 오리훈제가 벌겋게 어우러지고 북동에는 메밀묵 도토리묵 게장 두고 놓였도다. 마지막으로 국그릇이 반 칸 씩 둘인데 각각 된장국과 북엇국이다. 

성무는 할 말을 잃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이 바로 이런 때 쓰이는 건가보다. 참으로 풍성하다. 눈물 나게 풍성하다. 반찬이 대체 다 몇 가지란 말인가. 감히 어디부터 숟가락이며 젓가락을 대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경견하게 모아 쥔 두 손을 가슴 앞에 대며 성무는 눈물 그렁그렁한 채 비페르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금발 뒤쪽으로 찬란한 후광이 비쳐 내린다. 믿쑵니다!

“머, 먹어도…돼요…?”

성무는 있는 힘껏 불쌍한 표정을 짓고 절절한 목소리를 내었다. 안된다고 하면 사나이 체면 다 내버리고 울 거다! 엉엉 울 거야, 으허어엉! 조금만 더 시간 끌었다간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애원할 듯 간절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비페르가 숟가락을 내밀었다.

“먹어라.”

“우와으아으어! 사랑해요!”

좋아한다까지는 배워뒀지만 사랑한다까지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익히지 않은 비페르는 고맙다는 뜻이겠지, 하고 들어 넘겼다. 감격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받아 든 성무는 이리저리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부터 먹지, 뭐부터 먹지. 하나같이 죄다 맛있어 보인다. 그래도 일단은 밥이다! 반찬이 장식이라 하면 새하얀 쌀밥은 메인보석! 쌀밥이 달이면 반찬은 별이다. 

“자, 잘 먹겠습니다!”

성무는 밥을 크게 한 술 퍼서 입에 넣었다. 이어 젓가락이 닿는 곳은 다름 아닌 김치. 그래, 역시 한국인이라면 김치지. 잘 익은 배추김치를 찢지도 않고 크게 하나 들어 끄트머리부터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볼을 양껏 부풀린 채 우물우물 씹었다. 아, 이게 얼마만의 김치인가! 따끈한 쌀밥에 짭조름한 김치라니! 입에 든 밥을 다 삼키지도 않고 이번에는 큼직한 소갈비를 뼈째 들어올렸다. 꿈도 꾸지 못했던 1등급 한우 소갈비! 양념 배인 진갈색 고깃덩어리를 사양치 않고 콱 베어 문다. 엄마, 행복해! 살이 아주 뚝뚝 떨어져 나온다. 남은 뼈는 등 뒤로 던져버린 채 이번에는 게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것이 바로 밥도둑이라는 간장게장! 붉은 알이 가득 들어찬 암게장이다.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들어 본 적은 있다. 성무는 내장과 알이 뒤범벅 된 게딱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밥을 푹 떠 게딱지에 넣고 비볐다. 이것이 바로 진미. 먹어 본 사람은 알리라, 꽃게든 대게든 참게든 게의 진수는 내장이라는 사실을! 혀가 아주 살살 녹아내리는 것이 바로 게장이다! 흰쌀밥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그 맛,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바다의 맛! 게장 한 번 제대로 맛들이면 다리 살이고 몸통 살이고 혀에 차지를 않는다. 아주 그냥 후루루룩 비빈 밥을 들이마셨다. 밥알 한 톨까지 박박박 긁어 먹었다. 밥도둑, 밥도둑 소리소리 하는 이유를 알겠어!

잠깐 숨 크게 내쉬고는 북엇국을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하니 맑은 국물에 눈앞이 다 훤해진다. 그 훤해진 눈에 들이비치는 음식들의 향연이란- 와구와구 먹어댔는데도 아직 저만큼이나 남았다. 회가 아닌, 제대로 소금치고 양념해 구운 조기 한 마리를 들어 올리던 성무가 힐끔 옆에 선 비페르를 쳐다보았다.

“…크흠.”

처음엔 밥이다 싶어 먹느라, 입에 마구 집어넣느라 정신없었는데 배가 조금 차니까 옆 사람에게도 신경이 조금 쓰였다. 동시에 살짝 쪽팔리기도 했다. 한국인이 다 이런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먹을 것에 눈 돌아간 민족이 아니라 예의바르고 정이 많은 민족인 것이다. 고로 성무는 조기 꼬리를 휙 꺾어 새하얀 살을 노릇한 껍질과 함께 길게 발라냈다. 그대로 입에 쏙 집어넣으면 참 맛나겠지만 욕망을 억누른 채 친절한 외국인 씨를 향해 내밀었다.

“저기, 좀 먹어보세요.”

슬슬 점심시간인데. 생글 웃으면서 내미는 것을 비페르는 약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주는 건가. 맛있게 먹다가 호의로 저리 내미는 행동이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받아먹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No.”

“아….”

기초적인 영어회화도 세계 7대 수학 난제만큼이나 어려운 성무라지만 예스, 노 정도는 알아듣는다. 냉정하리만치 짧고 가차 없는 대답의 그의 어깨가 힘없이 쳐졌다. 생선 안 좋아하나보다…. 일말의 표정변화도 없이 섬세한 조각상처럼 무심하게 서있는 비페르를 잠시 힐끔거리다가 그냥 물새들을 향해 던져주었다. 이제나 저제나 목 빼고 기다리던 새들이 잽싸게 생선살을 낚아채간다.  

“어… 음…….”

성무는 쭈뼛쭈뼛하다가 그냥 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가 부른 탓일까, 아까보다 맛이 덜하다. 생선 말고 갈비나 전을 줘볼걸. 생선 준 내가 나빠. 성무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생선 쪽에는 눈길도 안 준 채 밥을 마저 먹었다.

밥은 다 먹었지만 반찬 가짓수도, 양도 워낙 많다 보니 도저히 더는 뱃속에 우겨넣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성무는 슬금슬금 눈치 보면서 그릇 하나 빼돌려 거기다가 남은 반찬을 수북히 쌓았다. 구수한 편육부터 색색의 나물까지 차곡차곡 챙겨 넣었지만 생선만큼은 손대지 않았다. 조기도 굴비도 그냥 새들에게 던져줬다. 지겨운 회랑도, 반쯤 태운 소금간만 조금 된 구이랑도 비교 할 수 없는 양념의 맛이었지만 그냥 버렸다. 어쩐지 입대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주섬주섬 남은 거 챙기고 도시락 그릇들 차곡차곡 정리해서 가방에 넣는 성무를 가만히 지켜보던 비페르가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밥 먹여서 경계심을 푼 뒤 데리고 간다. 심플하지만 단순하고 먹을 것에 목메는 상대에게는 효과 좋은 방법이다. 성무도 원래라면 냉큼 대답하고 뭐 맛있는 거 주려고? 하고 졸랑졸랑 따라갔을 것이다. 생선만 아니었다면. 생선을 거절당하지 않았더라면. 생선을 싫어하는 거겠지, 모르고 준 게 잘못이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머리를 얌전히 따라가던가. 당연히 마음 상했다. 뼈까지 고이 발라서 줬는데. 먹고 싶은 거 참아가며 줬는데. 암만 싫은 음식이래도 준 사람 정성이 있지, 조금은 더 상냥하게 거절 할 수도 있었잖아. 노가 뭐야, 노가. 그거 한국말로 하면 싫다, 아닌가. 말하는 투도 그렇지만 태도는 더 심하다. 물론 저 외국인은 별 잘못 없지만, 애초에 도시락 가져다 준 것도 저 사람이지만…… 그래도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다. 

약 25세 대한남아 한성무 씨는 입술 뾰족이 내밀며 똑같이 대답했다.

“노!”

너만 싫냐, 나도 싫거든.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데. 칼로 무 베듯 싹둑 자르는 거절의 대답에 비페르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렇게까지 차갑게 거절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거절한다더라도 머뭇거리거나 수줍어하거나 미안스러워하는, 그런 종류의 대답이 나오리라 믿고 있었는데. 순간 핏대가 솟아올랐지만 꾹꾹 내리누르며 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해치지 않을 테니 따라와.”

“노! 싫다니까! 내가 왜? 안 가!”

한 번 맘 상하니까 죽도 밥도 기억 안 난다. 비위 잘 맞춰서 빠져나가는 거 도와달랄 거라는 생각도 까맣게 잊었다. 밥만 보여주면 꼬리 살랑살랑 흔드는 바닥 친 인생이라 해도 일말의 자존심은 남아 있다. 너 없어도 일 년 넘게 잘 살아왔거든! 성무는 닷 발은 입술을 내민 채 남은 반찬 그릇을 등 뒤로 스윽 숨겼다. 틱틱대는 목소리에 비페르는 이마를 짚었다. 싫다는 말도 안 간다는 말도 다 알아들었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건방지게. 이렇게까지 대놓고 거절당한 기억은 그의 삼십년 조금 못되는 인생 중에 거의 없었다. 보통은 조곤조곤하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거절을 표했지 떼쓰는 어린애처럼 버럭버럭 소리 지르며 싫다고 대드는 것은… 철없는 친척 꼬마라면 모를까 세상을 아는 성인 상대 중에서는 전무했다. 

“……Fesse.”

가라앉은 청회색 눈동자에 노기가 어렸다. 만약 상대가 다른 누군가였다면,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이었더라면 무어라 소리치고 대들든 무시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낯설기는 했지만 고작 이런 일로 화를 내거나 분통을 터뜨리는 섬세하고 감정적인 성격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이 정도야 애교에 가깝다. 대놓고 바락바락 반항하는 상대가 드물었을 뿐이지 더욱 비열하고 교활하게 수를 쓰는 자들이야 널리고 널렸으니. 그런 기생충들에게도 분노를 표한 적은 거의 없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끓었다. 심지어 배신감 비슷한 감정까지 치솟았다. 싫다고 했다. 소리 꽥꽥 지르고 인상 찌푸려가며 같이 가기 싫다고 한다. 어째서. 먹을 것은 넙죽넙죽 잘 받아먹으면서, 지금 이상으로 잘 돌봐주려 하는데 왜 싫단 말인가. 비페르는 도망칠 궁리를 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성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악!”

화들짝 도망치려다가 손목을 콱 잡혔다. 성무는 팔을 비틀어 빠져나가려하며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왜, 왜! 내,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따라 와.”

“으익, 싫다니까! 아, 아파 이 깡패자식아!”

성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잡아당기는 힘에 반항했다. 틀어 쥔 손아귀의 힘이 장난이 아니다. 자신도 노동과 야생생활에 푹 절여진, 평균보다 건장한 축에 드는 남자인데 어찌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체격의 차이일까. 낑낑거리며 바르작대는 성무를 비페르가 자신 쪽으로 확 잡아끌었다.

“악! 내 반찬!”

그 서슬에 뚜껑 없는 그릇이 크게 흔들리며 수북히 담았던 음식들이 모래밭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전이며 나물, 대하 따위가 모래투성이가 되어 나뒹군다. 성무의 눈동자가 그 처참한 광경을 까맣게 비추었다. 

“너, 너무해… 야 이 잔인한 놈아!!”

빵 밟을 때부터 알아봤어! 천사 같은 외국인님은 삽시간에 악마 같은 외국인놈으로 격하되었다. 바락바락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잡힌 손목을 빼내려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아니, 되레 조금씩 끌려가고 있었다. 노기 서린,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비페르의 모습에 성무는 덜컥 겁이 났다. 그의 시선이 외국인의 허리춤을 향해 내려갔다. 총 가진 놈이었지. 화가 난 나머지 숲으로 끌고 가 쏴 죽이려는 건지도 모른다. 성무는 한차례 몸을 부들 떨었다. 그리고는-

“큭!”

자신을 단단히 붙잡은 손을, 손등을 콱 깨물었다. 어찌나 힘껏 깨물었던지 살갗이 패이고 피가 빨갛게 흘러넘친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손아귀로부터 벗어 난 성무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살려라 도망쳤다. 

“…….”

서너 발 쫓아가던 비페르는 피가 흐르는 손등을 감싸 쥐며 멈춰 섰다. 스스로의 꼴이 우습다.

“…빌어먹을.”

짧게 욕설을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버려진 음식들에 바다새떼들만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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