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1)

무인도에 표류당한 이후 칼질은 확실히 늘었다. 생선이나 고기 써는 거 외에 나무 써는 것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나무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몸체며 손잡이는 모양새를 거의 갖추었다. 동그랗게 파내기만 하면 꽤 쓸 만한 숟가락이 될 것이다. 예전에 만들어 뒀던 숟가락은 어제 모닥불 근처에서 저녁식사 후 잘못 놔뒀다가 까맣게 태워먹고 말았다. 성무는 손잡이 부분을 거칠한 돌에다가 쓱쓱 문댔다. 사포 대신이다. 완성한 숟가락을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다시 아래, 정확히는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예전 같았으면 해 떠있는 모양새나 그림자로 대충 시간을 짐작했겠지만 이제는 시계가 생겼다. 시간은 오전 열한시를 조금 넘겼다.

“대충 이 즈음에 가니 있던데.”

비페르가 11을 가리켜 보였지만 성무는 못 알아들었다. 그 정도로 빠릿한 눈치는 지니질 못한 탓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 만난 것이 아니라 대충 언제쯤 오더라- 하는 것은 느낌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성보다 본능이 더 뛰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야생에서 일 년여를 굴렀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오늘도 오겠지.”

성무는 엉덩이를 탈탈 털며 일어났다. 처음 한 번은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다. 두 번째는 어라 싶었고 세 번째부터는 내일도 오려나 싶었다. 우연히 한 번 일어난 일은 또다시 바라기 힘들지만, 두 번 연속으로 일어나면 세 번 이상을 기대케 되는 법이다. 그리고 네 번, 다섯 번 이어지면 일상이 되게 된다. 성무도 슬슬 정체모를 외국인의 방문을 당연함에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말이 통한다면 여기 나갈 때 데리고 가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는 여전히 비페르가 이곳에 연구나 그 비슷한 것을 하러 온 탐험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여긴 코딱지만 한 무인도니까. 그의 상식으론 이 작은 섬에 사람이 살 리가 없었다. 일단 선착장이 없다. 최소한 드나들 곳은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을게 아닌가. 뱃일 도우면서 사람 사는 섬에도 몇 번 가본 적 있는 그였다. 암만 작은 섬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이 산다면 부두가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섬 반대편에 커다란 저택이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사람은 어디서 머무르고 있는 걸까. 이 근처는 아닌 거 같고.”

근처라면 사냥한다고 헤집고 다닐 때 발견했을 것이다. 호기심에 더 먼 곳을 뒤져본다거나 뒤를 밟아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엔 상대가 좀 살벌했다. 일단의 남의 영역-집이 아닌가. 괜히 신경 거슬리게 만들었다간 도움은 고사하고 그나마 얻어먹던 것도 끊기게 될지 모른다. 심하면 얻어맞거나 껙- 하게 될지도. 성무는 음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이런데서 사람 하나 죽어 나가봐야 누가 알겠냐고. 경찰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목격자 하나 없으니까 쓱삭 해버리고 입만 다물면 완전범죄지. 아아, 무섭다. 역시 조심해야겠다.”

욱해서 살인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들킬 염려 없는 곳이다. 게다가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었겠지. 바다 한 가운데서 조난당하고 감감무소식이니까 말이다. 실종자처리 후 얼마 만에 사망자처리 되더라? 아무튼 법적으로도 죽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성무는 몸을 조금 떨었다. 먹을 것도 주고 시계도 준 사람이지만 그래도 조심하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지. 도와달라는 건 좀 더 눈치 보다가 찔러봐야지. 구조 신호가 SOS였지?”

조난 초기에는 혹시나 몰라 바닷가에 커다랗게 그려놓기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지만. 솔직히 백사장에 SOS크게 그려놔 봤자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이상은 발견되기 힘들 것이다. 배나 비행기의 항로가 근처에 있는데다 거기에 탄 사람들 중 한 명이 망원경 들고 주위 풍경을 관찰하는 취미가 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보통은 그냥 지나치고 말겠지.

“나는 운이 나쁜 놈이니까 항상 조심해야해. 아무렴, 나처럼 더러운 팔자가 몇이나 되겠냐.”

가족이 돈 다 들고 튀고 빚보증 잘못 서서 재산 훅 날리는 사람이야 제법 많이 널렸겠지만 거기다가 조난까지 당해 1년 넘게 야생생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기야 목숨은 건졌다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나쁜 운은 아니다. 뒤로 넘어져서 코 깨지고 뒤통수도 까졌지만 빨간약 바르면 되는 운이랄까.

사지 멀쩡하고 신체 건강하니 됐다. 성무는 나이프 접어서 원시인 룩 안쪽에다 넣어 묶고 바닷가로 걸음을 옮겼다.

닥터 박이 말했다. 멸치 볶음만 들고 가면 OK. 안타깝게도 그의 말을 반박해줄 사람은 별장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계는 닥터 외에도 두엇 있었지만 한국에서 살아 본 사람 또는 한국에 대해 아는 사람은 닥터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기로 되어 있었던 한식 요리사는 기상 악화로 출발이 늦어졌다. 멸치 볶음을 시식해본 비페르는 그냥 먹기엔 짜고 맵다고 의아해했지만 닥터가 당당하게 말했다. 한국인은 매운 거 좋아하거든. 그러면서 친절하게 인터넷 검색까지 손수 해 보여주었다. 고춧가루 팍팍 넣은 김치. 그렇잖아도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기. 입에서 불이 난다는 불닭. 역시나 시뻘건 계통의 떡볶이며 낙지볶음, 각종 찜 등등. 길거리 분식점 사진까지 보여주며 그냥 막 먹잖아, 라고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고추며 마늘 등의 매운 음식을 매운 소스에 찍어먹는 다는 것에서 약간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닥터는 네놈들은 그렇잖아도 느끼한 음식을 튀겨먹는 주제에, 라고 코웃음 쳤지만.

어쨌거나 비페르는 멸치 볶음 하나만을 손에 들고 별장을 나섰다. 덕분에 이번에는 가방도 따로 필요 없었다. 젤먼은 파란색으로 하려고 했는데 라고 약간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열한시인데.”

바닷가에 도착한 비페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엉덩이에게 줘버린 파텍 필립 대신 차고 온 바쉐론 콘스탄틴이다. 예술적인 무브먼트를 자랑하는 주문제작품으로 스카이문과 비슷한 가격대다. 실용성으로만 따지자면 전자시계가 훨씬 낫긴 하지만.

그의 주위로는 맛을 본 물새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어 있었다. 성무가 생션셔틀이었다면 비페르는 거대한 상어다. 지금의 바닷새들은 배에 달라붙어 먹다 흘리는 먹이를 노리는 빨판상어와 비슷했다. 먹다 남은 것 OK, 흘린 것 OK! 잠시간 서있던 비페르가 멸치 볶음이 든 통의 뚜껑을 열었다. 새들의 날개가 들썩인다. 오늘은 또 무슨- 통에 딸린 스푼으로 멸치를 조금 던 비페르가 그것을 바닥에 던졌다.

-…끼룩?

새들의 동그란 눈이 일제히 모래밭에 떨어진 멸치 볶음을 향해 모였다. 아주 작은 생선이다. 발톱 만 하다. 들썩거리던 날개가 다시금 얌전히 몸통에 달라붙었다. 뭐냐 저거. 고개를 들어 비페르 한 번 멸치 볶음 한 번. 그리고는 주둥이 모아 꺅꺅댄다. 아, 저 수컷 오늘은 사냥 실패했구나. 줘도 안 먹어, 임마. 이걸 누구 부리에 붙이라고. 일부 수컷 새들은 위로의 의미로 끼룩거렸다. 그래, 살다 보면 실패하는 날도 있기 마련이지. 근데 암컷한테 무지 구박 받겠다 너. 그나마 번식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지, 사냥 못하는 수컷이 얼마나 까이는 줄 아냐?

“…….”

새들의 반응이 영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비페르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듯하다. 역시 닥터에게 속은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확실하지도 않고. 일전에 물새들은 좋아라 난리법석을 부렸던 참치도 엉덩이는 꽥꽥대며 싫어했으니.

일단 두고 보기로 하고 잠시 기다리자 숲 쪽에서 성무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이제는 좀 익숙해졌다고 손을 번쩍 들어 인사도 해온다.

“봉쥬르~.”

파닥파닥. 아침에는 봉쥬르고 저녁에는 봉수아고 점심에-영어와 헷갈리는 중-는 뭐라고 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12시 안됐으니까 봉쥬르 해도 되겠지. 성무는 풀쩍풀쩍 다가가다가 근처에서 속도를 늦추었다. 어제는 피자를 내밀었지만 오늘은 칼을 내밀수도 있으니까.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 성무를 비페르는 약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무식해 보이는데 인사말은 그럭저럭 3개 국어를 하는 모양이다. 그 정도면 야생인 치고는 엘리트가 아닌가. 비페르는 이유모를 흐뭇함을 느끼며 멸치 볶음이 담긴 통을 내밀었다. 성무가 고개를 쑤욱 빼어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으엑?! 이, 이건 설마!”

멸.치.볶.음!! 손톱만큼 잔잔한 멸치들만 골라 간장과 마늘, 파, 깨와 참기름 등을 넣고 달달 볶아 만든 반찬. 바닷가 살적 저렴한 편이라 김치와 함께 애용하는 반찬 중 하나였다. 사실 김치가 더 비쌌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리운 반찬의 자태에 성무는 급히 눈알을 굴렸다. 으레 따라와야 할 그것을 찾기 위해.

“바, 밥은?!”

“…바, 밥?”

한국어는 인사말과 간단한 회화 몇 가지만 습득해 온 비페르는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보이지 않는 쌀밥을 찾아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성무가 두 팔을 휘적거렸다.

“밥! 밥이 없잖아! 밥을 줘, 밥! 쌀밥을 줘! 보리밥이라도 좋아! 팥밥이든 잡곡밥이든 밥!”

“…….”

“매너 없는 놈! 반찬 가지고 오면서 밥을 안가지고 오냐! 멸치 필요 없- 아니, 그건 일단 주면 고맙고. 아무튼 밥! 밥 줘! 밥!” 

성무를 밥을 외쳤다. 밥밥밥. 물에서 꺼내줬더니 보따리 내놔란 격이지만 밥에 눈 먼 그는 뻔뻔하게 주장을 했다. 내게 밥을 달라. 기왕이면 김치도. 비페르가 내민 멸치 볶음 통을 냉큼 챙겨 든 뒤에 계속해서 외쳤다. 밥!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반찬만 곁에 둔 채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밥! 이왕이면 쌀밥!

“밥을 줘, 밥! 내일은 부디 밥! 밥만 주면 진짜로 고맙겠는데. 부탁이니까 밥 좀 주라, 응? 밀가루도 좋지만 밥 먹고 싶어! 밥 못 먹은 지 일 년이 넘었다고, 제발 밥! 쌀밥!”

재잘재잘 잘도 지껄인다. 한국어가 깜깜한 비페르는 성무의 간절한 목소리를 마치 새소리처럼 듣고 흘렸다. 듣긴 듣는데 이해 할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한참을 밥밥대던 성무가 지쳐 조용해지자 그제야 비페르가 입을 열었다.

“안녕.”

하도 소리소리 친 탓에 기진맥진해있던 성무가 파다닥 고개를 치켜들었다. 방금 뭐라고…

“어, 엉?”

멍청한 표정이다. 한국인이 아니었던 건가. 비페르는 의아해하면서도 다시 한 번 말했다.

“안녕.”

“으, 으어… 어…….”

성무의 두 눈이 놀란 토끼마냥 똥그래졌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똑똑히, 제대로 귀에 콱 박혔다. 한국어다. 일 년여 만에 들은 한국어다. 자신의 혼잣말이 아닌, 타인이 말하는 한국어다. 

“으허… 엉…….”

안녕이래. 안녕. 안녕안녕안녕안녕…….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그득 차올랐다. 성무는 코끝을 훌쩍이며 말했다.

“아, 안녕, 안녕하세요…!”

한국인 맞군. 대답해오는 성무의 목소리에 비페르는 옅게 미소 지으며 또 다른 한국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 닥터에게 부탁해 제대로 발음하는 것인지 몇 번이나 확인받았기에 거의 한국인의 그것에 가까웠다.

“해칠 생각은 없다. 무서워하지 마.”

또 한국어다. 성무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 외국인, 한국어 잘해! 겉모습으로 봐선 동포는 절대 아니지만 한국말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뛰고 무한한 정이 샘솟았다. 감격에 겨운 성무가 와락, 비페르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으허어어엉! 집에 가고 싶어! 한국말 할 줄 알면 진작 말하지! 나 좀 여기서 내보내주라! 한국에 보내 줘어어!!”

“…….”

비페르는 당황하면서도 부비적 달라붙는 성무의 등을 어색하게 감싸 안았다. 혼자 외로운 타향살이 한 번 한적 없는 그였기에 같은 나라 말 좀 했다고 울면서 달라붙는 성무를 이해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안겨오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비록 값비싼 셔츠는 눈물과 콧물로 얼룩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불쾌감이 들질 않았다. 다른 놈이었더라면, 설사 여자라 해도 친분 깊은 사이가 아니라면 냉정히 밀쳐냈겠건만 채 한 달도 보지 않은 벌거숭이 못난이 사내가 싫지 않다. 대화다운 대화조차 한 번 못 나눈 사이건만 싫기는커녕 어떻게 달래나 걱정이 들었다. 

“음… 괜찮아, Good boy….”

통역기는 그렇다 쳐도 전자사전정도는 들고 올 걸 그랬나! 젤먼이 하도 귀찮게 굴어서 휴대폰도 놓고 와버렸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는 비페르를 실컷 울어서 어느 정도 진정한 성무가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파다다닥, 놀라 떨어진다.

‘으아아악!’

성무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오랜만에 고국의 말을 들은 기쁨으로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한국어를 잘한다, 즉 한국어를 안다는 뜻은 자신이 여태껏 내뱉은 한국말을 알아들었을 거란 뜻이다. 성무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기억을 헤집었다. 혹시 욕이라도 하진 않았겠지?! 다행이 지난 기억 속에 이 외국인 앞에서 대놓고 한국어로 욕한 적은 없는 듯했다. 나쁘다는 소리는 했지만. 다만 숲에서는 미친놈이라고 한 적 있는데…… 게다가 방금 전 밥 달라고 징징대기도 했다. 악! 중간에 매너 없는 놈이라고 외쳤어! 거기다 반말! 성무는 자신을 빤히 쳐다봐오는 비페르로부터 슬그머니 물러섰다. 살고 싶다는 본능으로 아부성 웃음이 절로 얼굴 가득 맺힌다.

“바, 방금 전 그건… 농담, 농담이에요. 멸치 볶음만 주셔도 매우매우 감사합니다! 밥 없어도 돼요, 되고말고요. 멸치만 먹으면 뭐 어때요. 뼈에 좋은 멸치, 고맙습니다!”

품에 안겨 매달려 우는 도중에도 한 손으로 꽉 붙들고 있던 멸치 통에 얼른 다른 손을 집어넣었다. 한 움큼 멸치 볶음을 쥐어 입속에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어 보였다.  

“마, 마시….”

아, 짜다. 저 바닷물이 강물이었더라면 뛰어들었으리라. 더욱더 흰쌀밥이 간절해지는 것을 느끼며 성무는 멸치 볶음을 꿀꺽 삼켰다. 그리곤 더없이 맛있어 죽겠다는 듯 환히 웃었다.

“최, 최고! 진짜 맛있어! 맛있어요.”

진짜로! 진심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무는 열과 성을 다해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조금 전의 일은 부디 잊어 주시고, 제발. 하지만 아무리 과장된 감사를 표해 봐도 딱딱하게 굳은 외국인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아니, 굳다 못해 아예 싸늘할 정도다. 성무는 외국인의 허리춤을 힐끔거렸다. 물새를 단번에 승천시킨 칼. 심지어 반대편에는….

‘초, 총?!’

총이다. 작은데다 옷깃에 가려져 이제껏 미처 보지 못한 권총이었다. 그 총이 성무가 뛰어들어 부비작거리는 통에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무는 기겁해 후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비페르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진다.

“사, 살려…….”

엄마야, 총이다! 한국에서는 군대 밖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총이다. 국내에서는 엽총도 사냥 때 외엔 경찰서에 맡겨야 할 정도로 규제가 심하지만, 외국에는 총기 규제가 느슨한 곳이 많다. 저거 실총이겠지. 모델 건이나 물총은 당연히 아니겠지. 마른 침이 꿀꺽 삼켜졌다. 가슴과 등 언저리가 동시에 싸늘하게 식는다. 총 든 사람한테 욕하고 앵기다니, 내가 미쳤지!

“사, 사람 살려!!”

하늘에 계신 어머니, 살려주세요! 성무는 그대로 도망쳤다. 꽁지가 빠져라 부리나케 도망쳤다.

“…….”

홀로 덩그러니 남은 비페르를 보고 물새들이 수군거렸다. 역시 먹이가 맛이 없었나봐. 도중에 안기긴 했지만 맛보더니 도망쳤잖아. 하기야 저런 쬐끄만 생선을 가져다주는 수컷을 좋아라 할 암컷이 있을 리 없다. 몇몇 수컷들은 꼬시다고 깍깍거렸고 몇몇 수컷들은 동질감을 느끼며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닥터는 처음 납치되었을 때와 같이 소파를 차지했다. 다만 오만상을 찌푸린 채 축 늘어져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나이보다 훨씬 활기찼다. 아무튼 소파에서 박장대소하며 바동거리는 짓은 나이 지긋이 먹은 중년에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드니까. 근엄함을 평균보다 좀 더 많이 요구하는 직업이라면 더더욱.

“으하하하하하! 남자였다니! 게다가, 푸핫! good boy? 네, 네놈이 그렇게 얼빵하게도, 풉, 쿨럭, 말 할 수-.”

박한석 씨는 소파 등받이에 매달리며 머리를 파묻었다. 아주 죽는다고 끅끅거린다. 관찰실에 고이 보관 된 자료들을 봤다간 아예 돌아가시겠다. 소파를 팡팡 내리치는 그를 비페르는 무심하게, 젤먼은 언짢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보게. 웃음이 좀 과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참견하는 노집사의 눈가는 물기로 젖어있었다. 저기서 바둥거리는 중년남처럼 웃음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이 아니다. 그는 슬펐다. 주인님의 상대가 여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닥터는 상담 같잖은 상담이 끝나자마자 젤먼에게 쪼르르 달려가 저놈 저거 첫사랑 하는 듯, 하고 일러바쳤고 노집사는 놀람과 동시에 기대를 품었다. 주인님께서 관심은 가지고 계시다 생각했지만 사랑일 줄은 몰랐는데. 비록 상대방이 정체불명의 무단침입자이며 못생긴데다 야생생활을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의 여성이라지만 그의 주인이 좋다면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뭣보다 결혼은 물론이요 이성과의 진지한 교제에 통 흥미가 없던 주인님께서 드디어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아무렴 겨울이면 옆구리시린 솔로보다야 고릴라 사촌 야생녀라도 짝이 있는 편이 낫지. 슬슬 도련님을 맞이할 시기도 되었고. 그런고로 젤먼은 상대가 도련님을 생산 가능한 인간여성이라면 쌍수 들어 환영할 자신이 있었다.

있었는데, 있었는데…….

‘…주인님께서 게이셨다니!’

어쩐지 연애 할 기미가 눈곱만큼도 없더라. 지나친 여자야 더러 있었지만 깊게 사귄 여자는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아아, 늙으니 감도 덩달아 떨어져서는…. 젤먼은 슬퍼하면서도 동시에 자책했다. 주인님의 성적취향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그간 미녀만 소개시켜드렸으니! 미남을 소개시켜드렸어야 하는 건데! 아니… 추남인가?

한쪽은 웃고 한쪽은 슬퍼하는 사이에 심드렁하니 서있던 비페르가 웃다 지쳐 소파에 늘어져있는 닥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닥터가 소파 팔걸이에 턱을 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해석해달라고?”

“할 수 있다면.”

못하면 전문 통역사에게 맞기면 그만이다. 비페르는 조금 짜증스럽게 내민 손을 흔들었다. 녹음기는 닥터의 손아귀에 쥐여있었다. 통역 안 해줄 거면 당장 그거 내놓으란 뜻이다. 해석을 하면 기특하게도 스스로 달라붙어 왔던 엉덩이가 왜 갑자기 도망쳤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일을 떠올리자니 미간이 더욱 좁혀진다. 대체 왜. 인사하고 안겨왔다가 준 거 잘 먹더니 왜 돌연 도망을 쳤단 말인가. 그대로 안겨있어도 괜찮건만. 

“…달래는 방법이 잘못된 건가.”

심각하게 중얼거리는데 닥터가 또다시 배를 움켜잡는다.

“아, 여기까지 끌려온 분이 조금은 풀린다. 녹화 떠놨지? 그거 보여주면 다 푸마.”

“거절한다.”

비페르는 단칼에 잘라 말했다. 부친이 살아 돌아와서 부탁해도 망설일 판에. 뭣보다 동영상의 상당부분이 엉덩이가 하얗게 드러나는 19금이다. 남에게 보여진다 생각하니 절로 핏대가 솟았다. 

“아, 그러냐.”

뭐 그럼 그러던지. 싫다니 어쩔 수 없다면서 조그마한 녹음기를 들어 리셋 버튼을 꾹 누른다. 녹음 된 음성이 죄다 삭제되는 와중에도 비페르는 눈가만 조금 찌푸렸다. 단순히 리셋 시킨 거라면 데이터를 복구시키기 어렵지 않-

“그리고 약간의 전기충격.”

닥터는 손바닥보다 작은 기계를 꺼내더니 익숙하게 녹음기의 충전단자에 가느다란 철사 같은 부분을 밀어 넣고는 전류를 흘려보냈다.

“이봐!”

놀란 비페르가 소리쳤지만 녹음기로부터 파직 하는 불꽃이 튀어 오른 후였다. 닥터는 씨익 웃으며 녹음기를 비페르의 손아귀에 공손히 쥐어주었다. 차게 노려봐오는 시선이 죽일 듯이 살벌하다. 진짜 단단히 빠지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닥터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뒤통수가 근질하다 못해 서늘할 듯싶어 그는 느슨히 깍기 끼며 입을 열었다.

“대화만으로는 왜 도망쳤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더군. 하지만 해결책은 알고 있지.”

살기등등하던 눈빛이 살짝 풀어진다.

“뭐지.”

“밥. 요리사 오거든 한식 구성 10단 도시락을 싸들고 가봐. 꼬리가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쳐대며 달라붙을걸. 장담하지.”

밥밥 거리는 목소리 꼴로 봐선 분명하다. 비페르는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짧게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관찰실은 절대 출입금지다.”

“쪼잔한 놈.”

타악, 성무는 멸치 볶음이 든 통을 집안 찬장에다 내려놓았다. 찬장이라 해도 나무뿌리가 교묘하게 엮여 볼록 튀어나온 부분일 뿐이다. 그래도 벽 윗부분에 있고 그럭저럭 물건을 올려놓을 만 하니 용도만은 이름붙인 그대로다.

어두침침한 방한칸짜리 집안에 털썩 주저앉아 그는 멸치 볶음 통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간 자르지 않아 조금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뒤엉킨다. 

“…역시 좀 심했나.”

생각해보면 나쁜 짓이라곤 한 적 없는 사람인데. 아니다, 새 잡아 죽였지. 그래도 빵을 훔쳐간 탓이니까 이유 없는 살생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무섭긴 하단 말이야.” 

먹고살기 위해서 죽이는 거야 무인도 오기 전부터 종종 해왔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는 지나가는 똥개에게 돌멩이 한 번 던진 적 없는 그였다. 들 고양이가 얻어 온 생선 물고 튀었어도 소리만 좀 질렀을 뿐이다. 헌데 그 남자는 진짜 일말의 망설임 하나 없이 새를 잡았다. 먹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빵 좀 들고 도망친다고 해서 돌도 아니고 칼을 던졌다. 성무는 소름이 살짝 돋은 뺨을 길게 문댔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쉽게 죽이진 못했는데.”

생선이야 그래도 익숙하니까 괜찮았지만 애들 사탕이나 짭퉁 토끼는 잡는 것도 먹는 것도 고역이었다. 고기와 가죽이 고파 칼을 들고서도 망설인 적이 몇 번이던지. 얼결에 잡고 나서도 피는 철철 흐르지 가죽 벗기기 힘들지 배를 갈랐더니 벌건 내장이며……. 막상 먹어보니 고기 맛이 그만이라 생존 본능이 동정심과 혐오감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지만. 입의 즐거움에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역시 밥통이 대장이다. 고기 맛을 안 이후에는 그 둘은 물론이고 거북이도 좋아라 사냥했지만 다시 슈퍼에서 쌀사다 밥지어먹는 생활로 돌아가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 같은 거 꿈도 못 꾸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참 쉽게 잡았단 말이야. 외국인이라선가? 아니면 혹시 본 직업이 사냥꾼? …밀렵꾼 아냐, 그거?”

성무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돌이켜보면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 총도 아니고 칼을 던져 날아가는 새를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총도 산탄이 아니라 단발이면 명중시키기 참 어렵다. 가만있는 과녁도 툭하면 빗맞췄던 사격 열등생은 확신했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야. 아마 총도 잘 쏘겠지. 

“…학자가 아니라 밀렵꾼이었던 건가!!”

그렇구나! 순간 눈앞이 환하게 밝아져오는 착각이 들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왜 이런 무인도에 홀로 나타났는지, 왜 돌아가지 않고 머물고 있는 것인지, 왜 자신을 신고하지 않고 되레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건지!

“뇌물이구나!”

뇌물이다. 틀림없다. 어쩐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먹을 것을 꼬박꼬박 가져다 받치더라. 그거 다 뇌물이었던 거다. 신고하지 말라고 주는 뇌물. 성무는 득도의 기분을 느끼며 무릎을 탁 쳤다.

“아아, 왜 새 잡는 솜씨를 보고서도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척하면 삼천린데! 한두 번 잡아 본 실력이 아니었잖아. 틀림없어, 밀렵꾼이야. 이 시계도 입막음용 뇌물이겠군.”

성무는 손목에 찬 때깔 좋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내 살다살다 뇌물도 다 받아보고. 양심이 따끔따끔 찔려왔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도 같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게다가 괜히 나는 정의의 사자~ 이러며 신고했다가 총으로 탕, 뒤통수 맞으면 어쩌려고.

“…너무 착하게 사는 것도 안 돼.”

고럼고럼. 세상은 적당히 나쁘게도 살아야하는 법이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봤자 요 모양 요 꼴인걸. 뇌물 같은 거 받아주겠다 이거야.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엉?!

“나도 뇌물 받아먹으며 살 거라 이거야! 왜, 정치인들은 만날 하는건데! 오늘 뇌물은 좀 별로였지만. 내일은 좋은 거 좀 가져다주려나?”

한국어 할 줄 아는 거 같으니까 밥을 줄지도 모른다. 내일 가서 비밀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말해줘야지. 그러면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뇌물을 계속 받을 수 있고, 더 운이 좋다면 섬을 빠져나갈 수도…….

“음…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네. 밀렵꾼이랑 같이 갔다가 덤탱이 씌워져 감옥 갈지도 모르잖아. 우씨, 기껏 만난 사람이 범죄자야. 내 팔자 진짜 왜이래?”

성무는 투덜투덜 대며 낚싯대를 찾아 들고 밖으로 기어나갔다. 안 걸리고 한국 대사관까지 갈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혹여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그는 불길한 상상에 몸을 파들 떨었다. 도와준 건 없지만 뇌물은 받아먹었다. 게다가 자신도 밀렵을 하긴 했다. 꼼짝없이 공범으로 콩밥 먹을 신세다.

“에휴… 이렇게 된 거 진짜로 공범 되게 해 달랠까?” 

말도 통하겠다, 그냥 전직을 해버리는 거지! ……그래도 범죄자가 되는 건 좀 그런데. 아오, 진짜 왜이래! 세상이 날 나쁜 놈으로 몰아가네! 난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었다고!

“내가 타락하는 건 전부 다 세상 탓이야! 어흐흑….”

엄마, 난 착하게 살고 싶었어요. 성무는 코끝을 훌쩍거리며 바닷가로 향했다. 생선이나 잡아서 회쳐먹어야지. 여우 녀석, 또 오려나.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이번에는 인공적인 실수가 아닌 자연적으로 내리는 단비다. 처음 며칠간은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도록 만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워낙 작은 섬이라 비가 오지 않으면 금세 수원이 말라버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 달쯤 가뭄이더라도 마실 물 정도는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을 씻을 정도는 되지 못한다. 때문에 비페르는 하루 정도를 심각하게 고민-엉덩이를 만나느냐 엉덩이를 보느냐-하고 그냥 비가 오게 내버려두기로 결정 내렸다. 이 시기의 비는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내리니까. 그 하루는 일에 치이는 비서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즉 내도록 취미활동에 힘쓰다가 일주일에 한 번 일하시겠다는 소리다.

아무튼 그래서 마지막 비가 내린지 일주일 가까이 지난 오늘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곳의 비는 그리 굵지 않다. 처음과 끝만 물꼬를 트느라, 또 억지로 틀어 잠그느라 왈칵왈칵 토해낼 뿐 중간은 가느다랬다. 가늘고 성기게 내리는 비에 안개가 뿌옇게 차오른다. 꾸준하게 잘 뒤섞은 크림처럼 질다.

온통 희게 뒤덮인 창밖을 바라보며 비페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래서야 망원경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것이다. 마치 생크림으로 토핑 한 것 마냥 바닷가도, 냇가도 보이지 않겠지. 하기야 어차피 정원 무단 서식자는 비가 오는 날이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산도 없이 빗방울에 온기를 뺏겨 평소보다 차가워진 공기 속을 알몸으로 축축히 젖은 채 돌아다녔다간, 어지간한 건강체라 하더라도 앓고 말테니까.

“…굶지는 않겠지.”

낚시도 못하고 사냥도 못할 텐데. 걱정이 살며시 들었다. 물새에게나 당하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였기에 더욱 그랬다. 타인의 도움도 없이 하루하루 잘도 살아왔다 싶을 정도였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야생생활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억지로 끌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도 없는 일이다. 내버려두고 떠나기엔 불안해서 안 되겠다. 

“……죽어버릴지도.”

새떼에게 먹을 거 다 빼앗기고 그 불쌍한 면상으로 쫄쫄 굶다가 결국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인지라 비페르의 미간이 무심코 일그러졌다. 역시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 비페르는 결심했다. 못생긴데다가 약하고 멍청하고 겁도 많은 조그만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정히 야생생활을 하고 싶다 고집을 피우면 소유 동물원의 사파리에 자리를 마련해주면 된다. 아니, 그곳은 겨울이 되면 추우니 섬과 비슷한 기온의 커다란 온실 우리가 좋겠군. 

“…그냥 본가 온실 정원에 넣어둘까.”

인공 폭포도 있는 곳이다. 동물원은 아무래도 멀고, 자주 찾아가기 힘드니. 아니면 새로 하나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 실내로. 아래위 두 층의 방 몇 개를 뚫어서 하나로 만들고 흙을 깔고 인공 연못을 만들어 열대우림을 조성하는 거다. 천장에는 천체 프로젝터를 틀어 두고 섬의 동물들도 몇 풀고. 침실 옆에다 마련해두면 아무리 바빠도 아침저녁으로 볼 수 있겠지.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우천으로 인해 딱딱히 굳어있던 비페르의 입가가 슬며시 풀렸다.

박한석 씨에게는 몇 가지 취미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교수로서의 직업과 관련 된 것으로 학생들을 참으로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성적확인 후의 면담이다. 닥터는 시험 결과와 수업태도 등을 적당히 반영한 결과에 따라 랜덤으로 성적을 매겼다. 가령 A라면 B+에서 C-, C라면 C-에서 D정도다. 그리고 공고한다, 불만 있으면 와서 땡깡부리라고. 학생들이 와서 무슨 짓이든 눈에 차게 한다면 원래 받을 성적이나 그 이상을 주었다. 하지만 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명분은 간단했다. 세상은 단순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만으로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할일 제대로 하는 건 기본이다, 그 이상도 할 줄 알아야지. 붙임성 없고 목석같은 놈은 제 능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는 이상은 성공하기 힘들거든? 할 말 없으면 와서 노래라도 부르게.

그 즐거운 시간이 코앞이었는데! 닥터가 평소보다 좀 많이 삐진 이유였다.

“그래도 주인님께 좀 심하지 않았나. 웃기도 너무 웃었어.”

젤먼의 투덜거림에 접시에서 파프리카를 골라내던 닥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 편식도 상당히 심했다.

“심하기는. 내가 제 부모에게 얼마나 휘둘렸는데. 나도 옛날에는 성격 좋았거든? 자네도 보았잖나, 저놈 아비가 얼마나 제멋대로 굴었는지. 부창부수라고, 로니에도 똑같았고.”

“그건 선대 주인님께 따져야지.”

“유산 따라 빚도 가는 법이야. 그것보다 몇 가지 주문 좀 하고 싶은데.”

헬기만 오가는 개인소유의 섬인지라 외부 물품은 단순 쇼핑으론 구입할 수 없었다. 홈쇼핑도 인터넷쇼핑도 안 된다. 젤먼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뭐가 필요한가.”

“감기약.”

“감기약? 그거라면 별장 내에 종류별로 재고가 충분하네만.”

젤먼은 식사 중인 닥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감기라도 걸렸나?”

은제 스푼이 접시를 차그랑 쳤다.

“나는 아니고. 애들 용 맛있는 감기약 있지 않은가. 액체보단 젤리나 사탕류로. 딸기맛, 사과맛… 뭐, 이것저것 몇 가지만 내일 아침까지 들여와 주게.” 

“여긴 애도 없는데. 대체 어디에 쓸 생각인건가.”

“다 쓸데가 있어. 정확히는 감기 걸릴 사람이 있지.”

노집사는 의아해하면서도 물품출입부로 통하는 단축키를 길게 눌렀다.

천개하나 없이 휑하니 뚫린 입구로부터 흘러들어온 빗소리가 투둑투둑 귓전을 때린다. 성무는 팔을 들어 두 눈두덩을 비볐다. 

“아 씨….”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짜증 섞인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또 비다. 잠에서 덜 깬 채로 투덜거렸다. 아우, 지긋지긋한 비. 쩌척 길게 하품을 하곤 비실비실 상체만 일으켰다.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곤 끔뻑끔뻑 떴다.

“…몇 시냐.”

손목의 시계를 보자 열시 조금 넘었다. 평소보다 많이 늦었다. 비가 내려 하늘이 흐린 탓이다. 바깥으로 흐물거리는 안개가 옅게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새벽보다는 많이 옅어졌다. 성무는 빗물을 받아 대충 목을 적시곤 구석에서 말린 생선포를 꺼내어 우물우물 씹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낚시도 못하고 사냥도 못하고 음식을 하기도 힘들다. 등불 대신의 작은 관솔불이라면 모를까, 나무뿌리로 된 작은 집이라서 안에서 큰 불을 피우기는 겁이 났기 때문이다. 

“빗물에다 샤워나 할까.”

비가 와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면 물 뜨러 안가도 된다는 것이다. 그냥 밖에 그릇 내놓고 기다리면 금세 차오르니까. 햇볕이 없어 머리칼이나 몸 말리기가 힘들었기에 성무는 그냥 세수나 하기로 맘먹고 시계를 끌렀다. 방수 안 되는 걸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좀 있으면 외국인 올 시간이네.”

손을 밖으로 내밀어 빗물을 바로 받아 세수하며 중얼거렸다. 매일같이 나타나긴 했는데, 오늘도 오려나. 비 오는데. 비 오니까 안 오겠지 싶었지만 또 모른다. 우산을 가지고 있을지도. 아니,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 길게 여행갈 때 필수품 중 하나가 우산이나 우비가 아니던가. 그럼 와있으려나?

“……으음.”

어쩌지. 성무는 젖은 손으로 뒤통수를 문질렀다. 비 오는데. 하지만 오늘은 밥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찬장에 고이 얹힌 멸치 볶음 통을 힐끗 쳐다보았다. 입에 침이 절로 고인다. 그냥 먹을 땐 짜지만 맨밥이랑, 흰 쌀밥이랑 같이 먹으면……

“쓰-읍!”

맛있겠다! 상상만으로도 얼굴에 웃음이 헤죽 맺힌다. 비록 우산은 없지만 잠깐 정도야 샤워하는 셈치고 가 볼까나. 고작 비 때문에 밥을 놓치기는 너무너무 아깝다. 게다가… 

“매일 보던 사람 안 보려니까… 좀 아쉽기도 하고 그러네.”

역시 습관이란 무서운 법이여. 성무는 가느다란 빗줄기를 한 번 쳐다보고 집을 나섰다. 굵은 비는 아니었지만 몇 발 못가 순식간에 온몸이 젖어든다. 커다란 나뭇잎 하나를 꺾어 들까 했지만 이왕 젖은 거, 그냥 관뒀다.

“밥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남는 우산도 하나 주면 좋고. 그럼 비와도 나무열매는 딸 수 있을 텐데.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훑어내며 그는 걸음을 옮겨갔다.

“하아…….”

빗소리와 파도소리가 섞여 울린다. 해변을 짙게 메웠던 안개는 그사이 거의 흩어져 사라지고 없었다. 물소리만 제외하면 바닷가는 참으로 고요했다. 멀리서 지나치는 물새 한 마리 외엔 아무도 없다. 성무는 젖은 팔을 다른 쪽 손으로 매만지며 총총이 걸었다. 물기 스며 흙에 가깝게 변한 모래가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로 달라붙는다. 잠시 멈춰서 두리번거렸지만 여전히 주위는 썰렁하기만 하다.

“……없네….”

없다. 아직 안 온 걸까, 오지 않는 걸까. 여기까지 오는 내내 비를 맞았더니만 으슬으슬 추워왔지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발목을 움켜잡았다. 아직 안 온 걸지도 모르니까. 성무는 다시 한 번 더 주위를 살펴보며 바위로 가 앉았다.

“그 사람도 늦잠 잤을지도 몰라.”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도 날이 흐려 해가 뜬지 몰라 늦게 일어났으니까. 성무는 어깨를 좁히며 양팔을 둘러 몸을 감싸 안았다. 아직까지는 버틸 만 했다. 이곳의 날씨가 원체 따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추웠더라면 쉽게 포기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추우니까. 몸을 연신 두드리는 빗물이 체온을 조금씩 앗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별로 안 추우니까. 그래서 그냥 앉아 기다렸다.

“언제 오려나. 빨리 오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밥 가지고 오면 좋겠는데. 아, 밥 생각 하니까 배고프다.”

정말로 밥을 가지고 올까? 정말로 밥 가져오면 어쩌지? 진짜 좋겠다, 하고 헤실헤실 웃는다. 그러면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생각해보면 거의 항상 그 남자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입막음용 뇌물을 주기 위함이라지만, 여기 일하러 온 걸 텐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불법이긴 해도 그 외국인도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니까.

“음음, 역시 먹고살긴 힘들어. 그래도 도둑질보단 낫지 않나? 사채업보다도. 아무렴,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것보다야 밀렵이 낫겠지. 사채는 진짜 나빠.”

돌이켜볼수록 억울하다. 아버지한테서 뭣하나 물려받은 것도 없는데. 키워준 값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성무는 에휴,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아버지가 나한테 돈 쓴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보내주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집에다 재우고 씻겨가며 키우셨잖아. 그 정도면 오천만원은 충분히 될 거야. 외국인한테 말 잘해서 운 좋게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열심히 살아야지.”

나쁜 짓 안하고. 성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힘들었다고 남도 힘들게 하면 안 되지. 그냥 착하게 살자. 하기야 돈 벌만한 나쁜 짓도 안 떠오른다. 기껏해야 도둑질 정도? 사채업도 기본 자금이 있어야 하지. 중얼중얼 거리다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우- 안 오네. 지금 몇 시야?”

시계는 혹시라도 방수 안 될까봐 놔두고 왔다. 해가 어디쯤 있나 하고 하늘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구름만 뿌옇다. 

“조금… 춥긴 하네.”

바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다리를 끌어당겨 완전히 쪼그려 앉았다. 돌아갈까. 이대로 버티다가는 감기 걸리겠다 싶어 그냥 바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몇 발짝 가지 못해 멈춰버리고 말았다.

“……올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십 분 정도밖에 안 지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 십 분만 더 기다리면 올지도 모른다. 저만치 오고 있어서 이대로 갔다간 엇갈리게 될지도 모른다. 성무는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몇 바퀴 돌았다.

“어쩌지, 갈까? 기다릴까?”

고민하며 맴을 돌다가 다시 바위로 돌아가 걸터앉았다. 아직까지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은 듯하니까. 빗물이 눈에 들이차는 것도 아랑곳 않고 하늘을 빤하게 올려다보았다. 

“왜 안와… 이 밀렵꾼 자식아…….”

또 멸치 볶음만 들고 와도 되니까, 얼른 오기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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