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

비페르는 약간 멍하게 이마를 짚었다. 창에는 아직 블라인드가 내려져있다. 광량과 시간에 따라서 자동으로 오르내리는 블라인드다. 그것이 창을 가리고 있다는 뜻은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이르다는 뜻이다. 

“…몇 시지.”

[오전 4시 47분입니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에 대답해 탁상시계로부터 녹음 된 성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그의 기상 시간은 5시 반에서 6시 사이다. 40분 이상 이르다. 비페르는 약간 숙이고 있던 머리를 바로 들었다. 

“……엉덩이.”

[입력되지 않은 명령어입니다.]

“…….”

비페르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탁상시계를 노려보았다. 저것 좀 치워버리라 말했건만. 선명하게 남는 꿈을 꾼 것이 얼마만인지 돌이켜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이른 시간인지라 경비와 당직을 제외하면 깨어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사람을 부를까 하다가 가운만 하나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산책이나 잠깐 할 심산이었다.

“연락 한 지가 언젠데 오늘도 내일도 아닌 모레라니!” 

내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나직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젤먼이다.

“아니, 학기 중이라는 건 알고 있네만, 그래도 한시가 바쁜 와중에……. 오늘은 안 되더라도 내일 오게, 내일. 글쎄 그나마 자네 말이라면- 아, 주인님. 오늘은 조금 이르셨군요.”

비페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노집사가 근심이 희미하게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오늘도 또… 나가실 예정이십니까?”

즉각 돌아오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시선에 세월 어린 얼굴 가득 한숨이 맺혔다. 뭐, 나간달 줄 알고는 있었지만. 젤먼은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주인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오늘은 피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젊은 층에게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음식 베스트 중 하나가 그거라더군요. 아무리 엉덩이가 좋아한다 하더라도 같은 음식을 삼일 연속으로 먹일 수는 없다는 비페르의 말에 통계자료 뽑아다가 고른 메뉴다. 덧붙여서 이번 가방의 색상은 정열의 붉은색. 젤먼은 작게 중얼거렸다. 내일은 파란색으로 해야지.

남의 집 정원에 멋대로 터 잡고 서식 중인 한성무 씨의 기상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지닌 시계라고는 꼬르륵 울리는 생체시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대충 해가 떴다 싶으면 일어났다. 이르면 6시에서 늦으면 9시, 10시 까지. 평균적으로 8시 내외로 기상하곤 했다. 

예전에는 주로 팬티만 입고 잤지만 팬티 도난 사건 이후로는 잠옷이 알몸이 되었다. 일명 샤넬 넘버 5. 정확히는 대용량 로션 바디 용과 엉덩이 용이다. 주인 태도 보아하니 찾아 갈 기색도 안보이고, 어차피 주운 거 쓰자 싶어서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꼬박꼬박 발라주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가죽 옷 입기 전에 찰싹찰싹 발라 줬다. 그리곤 집에서 기어 나와 기지개를 크게 폈다.

“아이고- 천장이 높으면 좋을 텐데.”

일어서면 머리 박을 만치 낮은 천장에 입구는 더욱 낮다. 덕에 드나드는 것은 기다시피 해야 한다. 불편하기도 불편하지만 무슨 짐승 동굴에 사는 기분이라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으면 어쩌랴. 비바람 피하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지. 

성무는 한 손으로 뒤통수 벅벅 긁으며 어제 떠다 놓았던 물을 마셨다. 거북이 등껍질이 없으니까 참 아쉽긴 하다. 물을 담아 놓을 만한 곳이 없다. 못해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떠다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은 신고 할 기미도 안보이고… 쳇. 그냥 버리지 말 걸.”

거북이를 또 언제 어떻게 잡냐! 성무는 투덜거렸다. 사실 한 서너 시간 만 일찍 일어나서 해변에 대기타고 있으면 잡기 어렵지 않다. 아직도 바다거북이 알 낳으러 올라오는 시기니까. 하지만 성무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알았다면 식칼 창 들고 바닷가에 새벽 대기 탔겠지.

성무는 어제 교환 한 거북이 알을 꺼내었다. 냉장고는 없지만 괜찮았다. 냉장고 사다가 거기에 알 보관해두는 바다거북은 없으니까. 물론 새도 안 그런다. 참고로 날씨는 그냥 놔두면 부화하기 딱 좋은 온도였다.

“삶아 먹을까~ 구워 먹을까~.”

요 알이 무슨 새알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고소하고 맛있다. 성무는 즐겁게 돈 주고도 먹기 힘든 보호 종의 하얀 알을 끓는 물속에 집어넣었다. 바다거북 한 마리에 바다거북 알 총 스무여 개. 기타 국제보호종 사냥 및 알 갈취. 조난자만 아니었더라면 벌금 거하게 물고 창살 너머로 던져졌을 것이다. 하지만 성무에게는 변명거리가 있었다. 먹고 살아있어야 감옥에도 가지. 그렇다고 감옥엘 가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삶은 알과 말린 고기로 아침을 때운 성무는 냄비를 들고서 냇가로 향했다. 아침 해먹은 걸로 물이 똑 떨어졌으니 다시 가서 길어와야만 한다. 냄비 가득해서 두 번 쯤 퍼 날라 야자열매 그릇들에 담아 놓으면 이틀 치 쯤 된다. 먹는 물로만. 그래서 세수는 이틀에 한 번이다. 그 정도면 됐지 뭘.

첨벙첨벙첨벙

“푸하~.”

흐르는 개울물에 이틀만의 세수를 한 성무가 물방울을 휘날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왕 세수하는 김에 머리도 씻었다. 간단하다. 그냥 흐르는 물에다 머리 박고 흔들고 손으로 비비면 끝. 목도 씻고 귀 뒤도 씻고. 이 정도면 참으로 깔끔하다 싶어 씨익 웃는다.

“무인도에 조난당해서 이만큼 깔끔 떠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야. 나 너무 깨끗하게 사는 거 아냐? 다른 사람한테 원주민이 아니라는 거 들키면 안 되는데.”

먹을 거 가져다주는 살벌한 외국인은 다행히 자신을 신고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원주민으로 생각하고 있거나. 맞아, 그런지도 몰라. 영어 쪼끔 배운 원주민. 국제화 시대니까 요새는 원시부족에도 영어를 쪼끔 아는 엘리트가 있을지도 모르지. 기브 미 초콜렛 같은. 

“맞아, 그러니까 신고 안하고 먹을 걸 가져다주는 거겠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맛있는 걸 공짜로 줄 리 없잖아? 학자라서 내게 관심 있나보다. 오늘도 오려나?”

돌연 가슴이 두근거렸다. 첫사랑에 빠진 여드름투성이의 소년처럼, 성무는 뺨을 조금 붉히며 보이지 않는 바닷가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맛있었지…….”

아아, 오늘도 오면 좋겠다. 살벌하니 무섭긴 해도 맛있으니까. 빵만 준다면 괜찮아요, 외국인.

“사랑해!!”

빵!!! 성무는 먼 하늘을 향해 외쳤다. 진심이었다.

탁- 붉은색 가방이 해변의 넓적한 바위 위에 내려놓아졌다. 이제는 거의 지정석이다. 떡고물을 고대하며 모여든 물새들이 바위 옆에 당당하게 선 수컷을 우러러보았다. 힘! 그리고 맛있는 먹이! 그야말로 완벽한 수컷이 아니던가. 비록 동료 한 마리가 무참히 당하기는 했지만 저 수컷이 노리는 암컷을 괴롭혔으니 당연한 일이다. 수컷들이 암컷과 둥지를 두고 싸우다가 다치는 일이야 흔하고 죽는 것도 드물긴 해도 없진 않았으니까. 야생은 적자생존이다.

바닷새들은 슬금슬금 주위를 어슬렁대며 빨간 가방을 힐끔거렸다. 또 저기에서 나오겠지. 벌써 네 번째다 보니 그들도 상황파악이 끝났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땡- 하는 알람과 함께 비페르가 가방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피자 한 판. 얇고 바삭한 도우에 최고급 피자치즈가 듬뿍 얹어진 비프피자다. 솔솔 풍겨 오르는 향은 거센 바닷바람도 움찔할 정도다. 그야말로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꼴깍 넘어가다 못해 혀가 입술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수준! 줄줄 흘러넘치는 타액은 기본이다.

마치 미끼를 놓아 둔 사냥꾼과 비슷한 표정으로 숲을 주시하던 비페르가 따끈한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새들의 눈빛이 샤삭 변한다. 오오, 관대하셔라. 날갯죽지들이 움찔움찔 거린다. 준비 됐고, 쏘세요!

-푸드득! 파닥! 까악!!

던져진 피자를 향해 새떼가 개떼처럼 덤벼들었다. 비페르는 그 소란 통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별 재미는 없지만 심심풀이 정도는 된다. 바로 그때,

“우아아악!!”

낯익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페르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갔다.

“자, 물은 다 떠다놨고!”

물 긷기를 완료한 성무는 나이프를 챙겼다. 이제 그 살벌한 외국인이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다. 혹시 모르니까 무기는 반드시 챙겨야지. 위험한 놈이야….

“나도 군 경력이 있는 몸이라고! 사격으로 포상 받은 적…은 없지만. 아… 우리 민족은 원거리 종특이라던데 왜 나는 딸린다냐.”

활 쏴본 적은 없지만 사격점수가 솔직히 좋은 편은 못되었다. 그래도 칼질 하난 끝내주지! 회치는 데에만.

“에이, 생선이나 사람이나.”

어쨌거나 무기를 가졌다! 빵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성무는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서 바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끼악! 까악!

“응?”

바다가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요란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성무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저것들이 왜 난리래? 뭐 맛있는거라도 발견해서 싸우고-

“어억?!”

설마? 설마설마설마, 그 외국인이 또?!

“우아아악!!”

야 이 미친놈아! 그 아까운 걸 새 주냐! 날 줘, 날!! 성무는 진심어린 괴성을 지르며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의 눈에 남자가 들고 있는 음식물이 포착되었다.

“허억?! 으아아아!!”

피자다, 피자다, 피자잖아! 그렇다, 피자. 동네에서 제일 싼 데가 팔천 원하고 유명 메이커는 기본 이만 원대-1~2인용은 먹다가 입맛만 버린다-에 삼만 원 이상까지도 한다는 바로 그 피자! 분식점 육천 원, 중국집 만 오천 원의 탕수육보다도 비싼 몸의 바로 그 피자!

성무는 뛰었다. 꿈결처럼 뛰었다. 웰컴 투 코리… 아니, 무인도! 무인도는 영어로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반가워요, 피자 든 외국인~!

“흐아으하아!”

거칠어진 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성무는 흡사 평소에는 잘 놀아주지 않더니 웬일로 공을 들고 거만하게 선 주인 앞의 충견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던지시면 받아먹겠습니다, 월. 그런 성무를 비페르는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Petit primi.”

“…엉?”

쁘띠라, 어디서 들어 본 말인데. 성무는 무인도 생활로 딱딱해진 머리를 굴렸다. 그래, 쁘띠. 앙 쁘띠 쁘띠 쁘띠 쁘띠 쁘띠 피노키오! 뜻은 기억나지 않지만 노래는 기억난다. 그의 제 2외국어는 다름 아닌 불어였던 것이다. 불어. 아니 이 외국인, 프랑스인이었단 말인가! 

“…아, 씨.”

불어는 영어보다 더 모르는데. 성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데자 데자 데자 데자 띠 꿀레? 봉쥬르는 아침인사였던 거 같은데…. 낮에는 뭐라고 하더라? 그때 뇌리를 두들기고 지나가는 단어가 떠올랐다. 감사하다는 말! 그래, 틀림없이!

“멸치 볶음!”

성무는 당당하게 외쳤다. 멸치 볶음. 분명히 기억난다. 수업시간에 프랑스 사람도 멸치 볶음 먹는다면서 친구 놈과 낄낄거리다가 선생님한테 사이좋게 뒤통수를 맞았었다. 틀림없다. 고맙다는 말을 프랑스어로 하면 멸치 볶음이다. 성무는 자신만만하게 외국인을 올려다보았다.

“헤헤.”

“…….”

그런 성무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비페르는 들고 있던 피자를 내밀었다. 당연하게도 멸치 볶음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눈치 빠르다 해도 Merci beaucoup와 또박또박 발음한 멸치 볶음을 동일한 단어라고 알아차리기란 좀 많이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멜치 볶구 정도는 되어야지. 무어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귀여우니까 줬다. 냉큼 받아들더니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바로 앞에서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흐윽….”

일하다가 얻어먹었던 피자보다 열배는 더 맛있다! 성무는 혓바닥 위를 춤추는 맛의 감동에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살벌한 외국인의 등 뒤로 천사의 날개가 어른거릴 정도다. 

“멸치 볶음…! 진짜로!”

그러니까 하나만 더! 염치없이 납죽 손 내미는 성무에게 비페르가 피자 한 조각을 더 건네주었다. 아아, 멸치 볶음. 너 최고. 피자를 앙 베어 무는 성무를 향해 비페르는 천천히 손을 뻗어갔다.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느리게 다가오는 손에 성무가 흠칫 눈을 치떴다.

“머, 먹던 거 뺏으면 나빠! 배드!”

bad인지 bed인지. 도망칠 기세에 조급해진 비페르가 홱 손으로 까만 머리를 짚었다. 동시에 성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안, 배드가 나쁜 말이었지….

“노, 노, 배드….”

“Fesse mignon….”

귀여운 엉덩이, 예쁜 엉덩이. 절로 그 말이 흘러나왔다. 만일 성무가 그 말을 알아들었더라면 이 변태! 하고 도망쳤을 소리다. 당연하다. 멀쩡한 성인 남성, 그것도 여성적인 미는 물론이요 남자로서의 미색도 별로 없는 평범한 한국 남자A를 두고서 엉덩이가 귀엽네, 이쁘네 하고 있는 꼴이니. 아무리 제 눈에 콩깍지라 해도 영락없는 변태 확정이다. 가엾은 노집사가 이 꼴을 보면 땅을 치다 못해 다 제 불충이라며 천장에 목맬 끈을 달려들지도.

하지만 성무는 뜻을 아는 프랑스어 단어라곤 손에 꼽힐 정도다. 때문에 도망치는 대신, 얌전히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머리끄덩이 붙잡고 패려고 한 게 아니었구나.

“때, 땡큐, 아니 멸치 볶음.”

머리 감길 잘했다. 안 감고 그냥 왔다간 손이 더러워졌다고 화냈을지도 모른다. 척 보기에도 짜증나게 잘생기지 않았는가. 저런 놈은 틀림없이 깔끔 떨 거야. 성무는 피자를 우물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외국인을 힐끔힐끔 올려다보았다. 아줌마들이 미장원가서 보는 잡지에 나올 만한 면상이다. 거둬지는 손목에 찬 시계도 비싸보였다. 아마 몇 십만 원 할 거야. 양식장 최 씨 아저씨가 사돈댁에서 사백만원짜리 롤렉스시계 해줬다고 자랑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금줄 번쩍번쩍 하던데 이건 가죽 줄처럼 보이니까 그렇게 비싸진 않겠지.

비페르는 자신의 시계로부터 눈을 뗄 줄 모르는 성무의 모습에 옅게 소리 없이 웃었다. 가지고 싶은 건가. 하기야 시계 없는 생활이라면 불편할 것이다. 그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내밀었다.

“어?”

“A.M, eleven.”

보통 열한시 즈음 되어서 이곳에 온다. 못 알아 들을까봐 시계의 숫자 11도 가르쳐주며 성무의 손에 쥐어주었다. 참고로 파텍 필립이다. 1년 두 개 한정 생산의 스카이문 뚜르비용(Grand complications Sky Moon Tourbillon). 성무는 얼결에 얻은 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우와, 뒷면은 파랗다. 양면 다 사용할 수 있는 시계인 모양이었다. 그는 기뻐하며 손목에 시계를 찼다. 한때 유행하긴 했었지. 뒤집으면 다른 모양으로 쓸 수 있는 상품들이.

‘유행은 좀 딸리네.’

그래도 모르는 눈으로 봐도 참 예쁜 시계다. 비싸보이지는 않지만. 최 씨 아저씨네 황금 시계가 비싸보이긴 진짜 비싸보였지. 성무는 헤죽헤죽 웃으며 비페르를 올려다보았다.

“멸치 볶음!”

아이고 좋아라, 잘 쓸게. 잘 가지고 있다가 팔아먹어도 되지? 팔면 뉴스에 뜬다. 비페르는 좋아하는 성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이 저- 아래로 내려갈 날도 머지않은 듯 보였다.

“벌써 삼일 째입니다! 얼굴조차 뵙기 힘들다고요, 정말로….”

슈에트는 울먹거리다시피 하소연했다. 그는 비페르의 비서 중 한 명으로서 원시인 관찰 및 길들이기에 여념 없는 주인을 대신하여 며칠 간 눈도 제대로 못 붙인 채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서른 중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실력만큼은 출중했다. 다만 성격이 유하고 순진해서 10년 전 쯤 국제적인 범죄에 휘말려 경제사범으로 수배당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 여행 중이던 비페르의 모친이 그가 마음에 들었다며 대신 뒷수습을 해주고 남편의 비서보조로 취직시켜 주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젊은 가주의 바로 곁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수석비서의 자리에 올랐지만 여린 성격은 여전했다. 

젤먼은 아들 뻘 되는 젊은이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었다.

“그렇잖아도 팔체 군에게 연락을 넣어 두었다네. 늦어도 내일이면 올게야.”

원래 예정은 일주일 내외의 짧은 휴가였기에 동행한 비서는 슈에트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정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앞으로도 비페르가 쉽게 업무로 돌아 올 것 같지는 않다. 슈에트는 크흑, 눈물을 삼키며 노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스터께서는 요즘 무얼 하시는 겁니까? 이른 아침이나 저녁 늦게가 아니면 뵙기 힘드네요. 제가 바쁜 것도 있긴 하지만….”

젤먼은 짧게 헛기침을 했다.

“그냥… 취미활동이시라네.”

“……취미입니까?”

“…취미야.”

취미 : 한성무. 루프스가 가주님의 이력서 중 일부 되시겠다. 젤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슈에트를 배웅하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원래도 이래저래 전화 할 일이 많은 위치였지만 최근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건 그가 나직히 명령했다.

“그냥 잡아오게.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납치해.”

더는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취미가 한성무인 비페르 씨는 기분 좋게 귀가했다. 취미활동의 결과가 상당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만져보고 싶은 것은 좀 더 아래쪽이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감촉이었다. 

“…멸치 볶음, 이었던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비페르는 가슴 포켓에 넣어두었던 소형 녹음기를 꺼내들었다. 카메라나 캠코더는 일부러 들고 가지 않았다. 마음이야 사진이며 영상으로 남겨두고 싶었지만 경계심을 심어줄까 저어되었다. 대신 오늘 아침에 초소형 촬영 카메라를 들여오라 말해두었다. 넥타이 핀이나 커프스 단추 등으로 위장 가능한 종류로. 그는 손톱 끝으로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멸치 볶음!]

기쁨에 가득 찬, 크고 경쾌한 목소리다. 비페르는 무심코 웃었다.

“못생긴 주제에 귀여워.”

단순하고 둔한데다가 어수룩하고. 그리고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엉덩이만은 괜찮았다. 비페르는 속이 약간 젖어 있었던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씻은 거겠지. 개울 쪽은 특별히 세 대로 상시 녹화중이니 오랜만에 엉덩이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장품은 제대로 잘 바르고 있을까. 관찰실로 올라가 녹화 된 영상을 볼 마음에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희미한 기계음과 함께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문이 열렸다. 이제나저제나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젤먼이 한달음에 달려온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마침 딱 맞춰 오셨군요.”

“딱 맞추다니.”

“예, 그러니까-.”

젤먼이 뒤를 돌아보았다. 비페르의 시선이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긴 소파에 사람이 누워있다. 한쪽 팔을 올려 이마에 댄 채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비페르는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보았다.

“…닥터?”

“예, 납치해왔습니다.”

“…….”

젤먼이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그때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소파에 누워있던 중년 남자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일그러진 새카만 눈이 형형하게 두 사람, 정확히는 노집사를 노려봐온다.

“나는 비행기가 싫다고 했잖아!”

“그래서 수면제를 먹이지 않았나.”

“내가 수면제를 먹은 건 시험 시작 10분 전이었거든! 비행기 때문이 아니라 납치 때문이겠지. 빌어먹을, 배 띄워!”

“이곳에는 선착장이 없다네.”

“만들어! 나는 죽어도 헬기 안 타!”

“멸치 볶음.”

노년과 중년은 동시에 청년을 바라보았다. 둘의 공방을 무뚝뚝하게 지켜보던 청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멸치 볶음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젤먼이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곧장 알아보겠습니다.”

이어 닥터가 손을 슬쩍 들었다.

“한국어가 맞다면 그거 음식 이름인데.”

비페르와 젤먼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소파에서 일어서며 닥터 박, 박한석 씨가 셔츠의 칼라를 느슨하게 풀었다.

“여긴 덥군.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었는데.”

그러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시차도 있을 거고. 몇 시야?”

“음식이라고?”

“자네가 한국인이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어.”

“몇 시냐니까.”

“그걸 먹고 싶다는 말이었나.”

“그럼 그 사람도 한국인인 건가. 한식을 준비해야겠군.”

“아, 젠장. 시계 어딨어!”

“멸치 볶음이라. 들어 본 적 없는 음식인데.”

“거기 한국 별장인가? 한식 요리사를 구해보게.”

“왜 이 방에는 시계도 없어? 대체 몇 시야?!”

“멸치 볶음 잘하는 사람으로.”

“예. 멸치 볶음 잘하는 사람으로 구하게나. 일단 멸치 볶음부터 보내고.”

“…멸치 볶음 통역해달라고 불렀냐!”

교수실에서 물 한 잔 잘못 마시고 정신을 잃었더니 어느새 머나먼 무인도다. 그런데 정작 끌고 온 자와 끌고 오게 만든 자는 멸치 볶음, 멸치 볶음거리고 있으니. 이런 빌어먹을 멸치 볶음. 닥터는 편식 목록에 멸치 볶음을 얹어놓았다. 목록 1위는 데친 샐러리다.

“아, 미안하네.”

통화를 끊은 젤먼이 사과하며 다가왔다. 동시에 비페르는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일전에 말했다시피 자네를 여기까지 불러 온 이유는 마스터의 건강검진일세.”

“저기 도망가는 저분 말인가.”

“뭐?!”

젤먼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미 문손잡이를 쥔 비페르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이박혔다. 이대로 보내면 관찰실로 올라가 저녁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을게 틀림없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주인님!”

“바빠.”

엉덩이 봐야 함. 취미생활에 바쁜 비페르는 노집사의 간절한 부름을 무시하고 휑하니 떠나버렸다. 닥터가 못마땅한 듯 혀를 쯧 찼다.

“헌데 정말로 고작 건강검진 때문에 부른 건가? 여기도 의사는 있잖아.”

“음… 그것이…….”

젤먼은 참으로 말하기 면구스럽다는 얼굴을 한 채 닥터를 마주보았다.

“정신적인 쪽, 말이네.”

“뭐? 저놈이 드디어 미쳤어?”

“어허, 무슨 그런 말을! 그냥 최근에 약간의… 이상행동을 보이셨을 뿐이라네.”

“약간? 내 기억으로는 원래 이상한 놈이었다만. 아무튼 번지수 잘못 짚었어. 정히 걱정이 된다면 정신과 전문의를 청하게. 나는 흥미위주로 조금 건드려봤을 뿐이야.”

“그거야 잘 알고 있지만….”

젤먼이 에휴, 세월이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분 성격에 상담이나 정신감정 같은 것을 순순히 받을 리가 없지 않는가.”

“하긴 성격 더럽지.”

젤먼만큼 곁에 쭉 붙어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닥터도 아주 오래 비페르를 봐왔다. 부친의 주치의이자 젊었을 적부터 친구였기 때문이다. 독신남인 그로서는 아들 비스무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만큼 비페르도 닥터에게는 그럭저럭 양보해주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간단한 상담이라도 좀 해주게. 틀림없이 뭔가 있긴 있어.”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닥터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멸치 볶음 말인가? 이 섬 어딘가에 마음에 드는 한국인이라도 숨겨 두었나보지.”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나?”

“풀 즙 묻은 칼날에 흙투성이 신발. 비밀통로를 통해 혼자서 바깥에 나갔다 왔음. 한국어. 방금의 대화. 뻔하지. 미인인가? 저놈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엔간한 미녀로는 부족할 텐데.”

젤먼은 침묵을 지켰다. 정말로 미녀라면 차라리 기쁘겠다.

한 손은 허리춤에 걸치고 다른 한 손은 태양을 향해 번쩍 들어올렸다. 평소와는 다르다, 평소와는. 오늘의 손목에서는 찬란한 빛이 난다. 반짝반짝 태양광을 반사하는 빛이. 성무는 턱을 잔뜩 치켜들며 웃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

시계다! 그것도 길거리 만 원짜리 싸구려가 아니다! 보면 볼수록 멋진 놈이었다. 어쩌면 한 백만 원쯤 할지도 모른다고, 성무는 생각했다. 명절날 내려온 대기업 다닌다는 뒷집 아들. 가죽 줄 시계였지만 백만 원이 넘는다고 했었지. 

“내가 보기엔 이놈이 그것보단 더 좋아 보인단 말이야?”

중고로 팔아도 백만 원 가까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 돈이면 귀국하더라도 한동안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일을 구하는 거야. 

“알고 보니 싸구려, 그런 건 아니겠지? 옷은 잘 입었던데. 아닐 거야. 생기기도 잘생겼잖아? 그런 면상이면 모델이라도 하겠다. 쳇, 좋겠다. 얼굴만 잘 타고나도 먹고사는 덴 지장 없으니.”

성무는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당기며 꾹꾹 눌렀다. 아, 이 평범한 면상. 그나마 몸은 봐줄 만 하다. 노동에 단련 된 나름 탄탄한 육체! 책상 앞에서 일하면서 운동도 제대로 안하는 현대인과는 비교불가!  다만 옷 자국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안 없어지네…. 하기야 다시 옷을 입었으니까. 이젠 원시인처럼 옷 자국이 남겠군. 젠장.”

귀국하면 목욕탕은 다갔다. 그냥 옷 자국도 쪽팔리는데 원시인룩 자국이라니. 뭐하는 사람인가 하고 쳐다볼게 분명하다. 갈색으로 잘 익은 몸뚱이에 가슴을 가로지르며 아래쪽을 가리는 선명한 허연 자국! 성무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뜨신 물 콸콸 나오는 샤워부스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지난 과거의 일들이 몰려들면서 가슴이 아파왔다. 그 돈… 오천만원. 그거면 시골에서는 꽤 괜찮은 전셋집을 얻고도 남을 텐데. 아니, 소박하게 가면 아예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일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물차 사서 신나게 장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 차에, 내 장사…….”

남의 잡일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초라하지만 자기 자본 가진 자기 사업이다. 성무는 쪼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땅에다가 괴발개발 물탱크 달린 자동차를 그렸다.

“산지 직송, 싱싱한 활어가 싸요, 싸. 아줌마, 아가씨, 아저씨, 총각들 이거 한 번 잡숴 보세요. 아, 공짜니까 먹어보고 사라니까.”

중얼중얼중얼. 고단한 몸을 잠자리에 누인 채 머지않은 활어차의 꿈을 그리며 장사 멘트도 연습해보곤 했었다. 회 써는 솜씨는 더욱더 늘었건만 활어차 살 돈이 없다. 또 얼마나 긴 시간을 맨손으로 모아야만 할까.

“휴우… 내게 남은 거라곤 이 시계밖에 없구나.”

성무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돈 탈탈 다 털리고 조난당해서 팬티까지 털린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어쩌다 얻은 시계 하나뿐이었다. 약 10억짜리 시계 하나.

“아아, 슬프다. 나는 팬티도 없는 땅거지. 집도 절도 팬티도 없이 손목에 시계 하나 달랑 찬 땅거지.”

세상에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또 있을까. 손목에 찬 10억을 조몰락거리며 성무는 훌쩍거렸다. 속담의 표본으로 삼으면 딱 좋을 꼬락서니였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비페르는 상담 받을 것을 흔쾌히 수락했다. 녹화 된 영상을 확인하고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엉덩이는 여전히 만족스러울 만큼 뽀얗다. 화장품을 꾸준히 발라주고 있는지 전보다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얗고 탱탱하며 윤기도 자르르 흐른다. 만지면 손바닥에 쫙쫙 달라붙을 것 같은 예쁘고도 귀여운 모양새였다. 그 정도면 합격점. 증명사진 크기로 출력해 지갑 속에 넣어두고 싶을 정도였다. 

“이 음식이 멸치 볶음이 확실하오?”

그리고 상담 수락의 또 다른 이유. 닥터가 엉덩이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십대 후반에 한국을 떠났고 국적도 바꿨지만 그래도 토박이 한국인인 닥터 박은 한국에서 음속을 돌파한 속도로 날아 온 멸치 볶음을 내려다보았다.

“맞긴 한데.”

맞긴 맞는데 보통 멸치 볶음만 먹지는 않는다. 밥, 하얀 쌀밥과 함께 먹지. 하지만 닥터는 그 사실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았다. 뭐가 이쁘다고. 눈앞의 거만하게 다리 꼬고 앉아있는 놈 때문에 이 먼 섬까지 납치를 당했다. 아무튼 아비나 아들놈이나. 뒤끝 있는 박한석 씨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인이 자주 먹는 음식이지.”

밥이랑. 밥 없으면 짜서 물켠다. 그는 양 손을 깍지 끼며 푹신한 등받이에 느긋이 기대었다. 상담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젤먼의 억지를 받아들인 것은 그냥 호기심 때문이다. 이놈 내 기억으론 첫사랑도 제대로 안했는데.

“그러니까 섬에 무단 침입 및 거주중인 한국인이 신경이 쓰인다 이 말인가?”

비페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경이 쓰인다. 그것도 제법 많이. 오죽하면 꿈에서까지 나타났겠는가.

“흐음, 미인?”

“못생겼지만 귀여워.”

못생겼다. 닥터는 깍지를 풀고 수첩에 사각사각 적었다. 취향이 특이했던 거였군. 비페르의 근처에 못생겼지만 귀여운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사용인을 뽑을 때 외모도 본다.

“마음에 들면 데려오면 되잖나.”

“…싫어할 거 같아서.”

짧게 한숨을 내쉬는 비페르의 모습에 닥터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저놈이 언제부터 남의 마음에 신경을 썼다고…. 다시금 만년필이 사각거렸다. 아무래도 첫사랑. 단순히 흥미가 간다, 좋다 정도로는 저렇게까지 배려하지 않을 놈이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 거지?”

“엉덩이.”

대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비페르는 한쪽 손으로 턱 아래를 매만지며 먼눈을 했다. 닥터도 어이없어 함께 먼눈을 했다.

“아, 그래. 마음에 드는 점, 엉덩이. 랄까, 봤냐?”

“보여주더군.”

“보여 줘?”

닥터가 수첩에 적었다. 진도는 아무래도 Z나 그 근처 즈음. 정원 거주 한국인도 저놈이 마음에 드는 듯. 하기야 돈 많고 잘생겼으니 거부 할 사람이 몇 없을 것이다.

“야생 생활을 좋아하는 못생기고 귀여우면서도 엉덩이가 매력적인 한국인인가. 과연, 과연.”

닥터는 조용히 비페르를 쳐다보았다. 네가 왜 첫사랑도 못해봤는지 잘 알겠다. 취향이 이래서야 상대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지. 평생 혼자 살기 딱 좋은, 참으로 난해한 취향이다. 

“인사말이 한국어로 뭐지.”

이번에는 비페르가 물었다. 변태 같은 취향, 이라고 끄적거리며 닥터가 되물었다.

“통역기계 있잖아?”

“기계를 통해서 듣거나 말하고 싶지 않아.”

“얼씨구? 한국어로 인사말은-.”

닥터는 잠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뒤끝의 눈금을 확인해보았다. 아직 좀 남아있다.

“멍청이.”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반갑습니다, 나 안녕하십니까, 겠지. 인사말 정도는 한국어로도 할 수 있어.”

“……젠장.”

하기야 인사말 정도는 자신도 열댓 가지 쯤 알고 있다. 좀 골려 먹어볼까 했더니, 독사 같은 놈. 알면서 일부러 떠보는 것 좀 보게나. 닥터는 투덜투덜 거리며 제대로 가르쳐주었다.

“그냥 안녕이라고 해. 엉덩이가 매력적이면 젊은 놈 아니냐.”

“스물 아래위? 동양인은 나이 파악하기가 어려워.”

“젊다 못해 어린놈이군. 그러니까 밖에서 자는 게 좋다 하겠지. 내 나이쯤 되면 뼈가 시려서…….”

닥터는 수첩을 덮었다. 진도 나갈 만큼 나갔으니 알아서 잘 되겠지. 젤먼 영감보고 신경 끄라고 말해야겠다. 이왕 온 김에 못생겼지만 귀엽고 엉덩이가 매력적이라는 한국인 얼굴이나 보고 가자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