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거리 관계의 장점. 상대방에게 열 받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달려가는 동안에 어느 정도 풀어진다. 몽둥이 들고 이눔의 자식 죽어라, 하고 세 시간 쯤 뛰다보면 도착할 즈음엔 헥헥, 회초리로, 헥헥, 좀 맞자, 정도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약이다. 특히 감정적인 문제에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안절부절 못하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 젤먼은 기계가 작동하는 희미한 소리에 숨겨진 문 앞으로 얼른 걸어갔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다 해도 뛰지 않고 빠르게 걷는 것이 품위 있는 집사의 기본이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아이스박스 가방을 들어드리고자 손을 내밀다가 흠칫했다. 어째 공기가 싸하다. 비페르는 묵묵히 가방을 내밀었다. 집사가 그것을 받아들자 몇 발짝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우뚝 멈춘 그가 한 손에 든 정글도를 허공을 향해 던졌다.
-차앙!
핑그르르 맴을 돌던 칼날이 천장에 매달린 소형 샹들리에를 지탱하는 굵은 사슬과 부딪쳤다. 끼긱거리는 소리와 함께 샹들리에가 좌우로 크게 흔들거린다. 떨어지던 정글도가 샹들리에의 크리스털 장식에 걸려 함께 대롱댄다. 젤먼은 괜한 참견 않고 주인의 뒷모습만 조용히 지켜보았다. 한참 만에서야 우두커니 서있던 비페르가 입을 열었다.
“싫다더군.”
젤먼이 얼른 물었다.
“치워낼까요?”
“아니.”
약 두 시간 전쯤이었으면 다른 대답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쪽 해안에서부터 이곳 저택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편도 약 세 시간이다. 그것도 무성한 수풀이며 나뭇가지들을 헤쳐 가며 걸어야만 한다. 처음에는 비페르도 상당히 화가 났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막 돌아섰을 때에는 일본 별장 쪽 고용인들 목을 죄 치고 불법침입자를 잡아다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버리겠다 중얼였지만 세 시간여를 걷다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때문에 피해자는 소형 샹들리에(03년산, 무성) 하나로 끝이 났다. 하지만 기분 상한 것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이 정도까지 신경 써주고도 거절당한 것은 처음이다. 생선을 먹지 못하는 것도 아니건만. 비페르는 노집사를 향해 돌아섰다.
“일본인은 아닌 듯하더군.”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가요?”
비페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로는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의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워낙 솔직한 반응인지라 알기 쉬웠다. 그런 점은 귀엽긴 했지. 상했던 기분이 살짝 풀렸다. 우우 거리면서 폴짝폴짝 뛰던 모습도 지금 돌이켜보니 제법 즐겁게 볼만하기는 했다. 녹화가 되어있겠지. 상했던 기분이 조금 더 풀려졌다.
“…생선 외의 다른 음식을 준비해주게.”
젤먼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또다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한 번 만 더.”
한 번 정도는 기회를 더 주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비페르는 관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자, 젤먼은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상하시단 말이야….”
화를 내면서 돌아오셨는데 쫓아내기는커녕 또다시 직접 가시겠다니. 이런 적 한 번도 없으셨는데…….
“닥터는 왜 이렇게 늦는 건지.”
한숨이 더욱 더 깊어졌다.
이곳의 나무들은 울퉁불퉁하니 큼직큼직하게 자라난 것이 많다. 다시 말해 오르기 상대적으로 쉽다. 매끈하니 쭉 뻗은 야자수 같은 것은 쳐다도 보지 말 못 오를 나무지만 오를 법한 나무들도 지천에 널려있었다. 다만 먹을 만한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얼마 없었지만.
집에서 머지않은 제법 맛있는 붉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성무가 가장 총애하는 나무 1호였다. 열매도 많이 열리고 오르기도 쉽다. 성무는 고개를 꺾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짜식, 오늘도 주렁주렁하네.”
비록 물새 떼에게 패하긴 했지만 숲속에서의 한성무 씨는 여전히 최상위 포식자였다. 때문에 성무의 집 주위 나무들은 열매가 항상 그득했다. 새들이 잘 찾아오지 않은 덕이다. 열매야 다른 곳에도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툭하면 알은 물론이요 몸뚱이도 노리는 원시인 근처에 터를 잡을 이유가 없다. 성무는 굳이 올라갈 필요도 없이 낮게 매달린 열매 서넛을 따다가 입에 넣었다.
“자 그럼 오늘은 사냥을 갈까 낚시를 갈까.”
낚시가 편하긴 하지만 생선보다는 육고기가 더 좋다. 게다가 바닷새들과 마주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어젠 그 정체모를 외국인도 나타났었고.”
아니 그놈은 왜 안가고 여기 머무른대? 성무는 혀를 쯧쯧 찼다. 경찰서에 신고 당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대로라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다. 혹여 라도 천연기념물 급 동물을 사냥하고 있는데 현장에서 딱 걸린다면…….
“끄응… 안 되지, 안 돼. 한동안은 그냥 낚시나 해야겠다. 에이, 써글놈.”
로션 준 거 말고는 도움이 안 된다. 허여멀건 하니 짜증나게 잘생겨가지고선. 집에 안가나? 설마 신고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중인가? 신고하면 포상금도 나오겠지. 포상금 몇 푼 얻겠다고 집도 절도 없는 놈 교도소로 보내려들다니, 세상 참 각박하다.
“에휴, 이놈의 세상. 살기 힘든 세상. 돈 있는 놈만 잘 먹고 잘사는 세상 같으니라고.”
성무는 낚싯대를 챙겨 들고서 해변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며 습관처럼 투덜거렸다.
“그래, 그래. 차라리 여기가 낫지. 외로워도 슬퍼도 그냥 좀 훌쩍이면 되고. 최소한 굶을 일은 없잖아? 돌아가 봐라,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있겠냐. 회? 잡어 최소 2만원부터 시작이다 이거야. 여기선 그냥 낚으면 싱싱하게 한 접시 나오잖아.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싱싱한 새알도 가끔 얻을 수 있고. 달걀 한 판이 얼만데. 방목한 유기농 달걀은 배는 더 비싸더라. 여긴 다 유기농에 유정란이거든? 돌아가면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죄다~ 돈이야, 돈. 노숙도 맘 편하게 못하는 세상! 됐거든! 안돌아가!”
흥이다, 흥! 등골 빠지게 돈 모아 봤자 엄한 놈이 하루아침에 다 털어가는 세상! 그 정도 당했으면 됐지 뭐 하러 제 발로 돌아가서 또 생고생을 하겠냐. 차라리 무인도 원시인이 되겠다!
“혹시 또 모르지. 어제 그놈 잘 속여 넘기면 진짜 여기 원주민이라고 생각되어 질지도. 그러면 인간문화재가 되는 거야. …될 수 있나? 에이, 아무렴 어때. 원주민이라고 생각되면 최소한 쫓아내지는 않겠지.”
성무는 앞으로도 열심히 한국어 모르는 여기 토박이 노릇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원시인, 나는 원시인.
“나는 워… 엉?”
파도가 철썩 철썩 촤르르르 밀려드는 바닷가에 누군가 서있었다. 훤칠한 뒷모습 주위로 물새들이 와글와글 떼를 지어 기웃거린다. 무심한 손끝이 빵의 귀퉁이를 떼어 휙 던지자 바닷새들이 빵조각을 차지하기 위하여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까옥까옥, 끼륵끼륵.
“아…….”
저 틈에 끼어들었다간 발버둥 잠깐 치다가 녹다운이다. 살벌하다. 과연 무인도 최상위 포식자다운 모습이었다. 멍하니 새들의 난리부르스를 쳐다보던 성무의 눈에 남자의 손에 들린 빵이 비춰졌다. 빵이다. 밀가루. 빵!
“빵!”
나도나도나도나도! 한성무 씨는 눈에 불을 켰다. 왜 새만 주냐! 나도 줘! 그렇게 남아돌면 내 입에도 던져달란 말이다아아!! 밀가루, 나도 밀가루!
“우워어어어어!!”
괴성을 내지르며 바닷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순간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울렸지만 도망치는 새는 몇 없었다. 도리어 눈이 시뻘개져서 늘어난 경쟁자를 노려봐온다. 기세 좋게 뛰어들었던 성무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어… 저기…….”
엄마야, 무서워. 아무래도 성급했나보다 하고 도망치려는 그때, 성무의 코앞으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그 손이 쥐고 있는 것은 뜯겨지지 않은 멀쩡한, 갓 구워 따끈따끈한 빵이었다. 성무는 깜짝 놀라며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우…우우……?”
해석, 이거 나 주는 거야?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 걸 봐선 그런 모양이다. 성무는 감격에 벅차 떨며 따뜻한 빵을 손에 쥐었다.
“어흑… 우어어…….”
해석, 너 사실 좋은 놈이었구나. 손바닥은 물론이고 마음속까지 온기로 따스해졌다. 세상 살 만 하다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성무는 스리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맘 바뀌어서 도로 뺏어갈지도 몰라. 1미터 쯤 물러서고 나서야 성무는 안심하고 손에 쥔 빵을 내려다보았다.
“히야아…….”
고놈 참 폭신폭신하니 맛있게도 생겼다. 부드럽게 갈색으로 물든 빵의 모양은 조금 특이했다. 도넛도 아니고 꽈배기도 아니지만 배배 꼬였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맛있으면 그만이지. 아니, 그냥 평범한 빵맛이기만 하면 된다. 빵이다, 빵. 진심으로 잘 먹겠습니다. 성무는 입을 크게 벌렸다.
“아-.”
-끼악!
바로 그때였다. 기회를 엿보던 덩치 큰 바닷새가 성무를 향해 거세게 덤벼들었다. 파닥파닥 커다란 날개가 거칠게 얼굴을 때리고 날카로운 부리의 끝이 손등을 쪼았다.
“으악!”
뺨이 발갛게 물들고 손등에 긴 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성무는 버텼다. 이게 얼마만의 밀가루 음식인데!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입으로 가져가려 했지만 다른 새들까지 폭력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물고 쪼고 할퀴고 날개로 두들겨 팬다.
“아윽, 아, 아퍼! 아야!”
공격을 막느라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손에서 잽싼 부리 하나가 빵을 갈취해갔다. 성무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내 빵!
“아, 안 돼! 으아아아! 새새끼! 으허어어엉!”
다른 새들의 공격을 힘겹게 피해가며 푸득푸득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도둑새의 뒤꽁무니를 성무는 반쯤 울면서 쫓아갔다. 팬티를 빼앗겼을 때보다 더 슬프고 분했다. 누가 그러던가, 먹는데 방해받는 것이 제일 분하고 서글프다고.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격언도 있지 않는가. 생선이라면 그러려니 한다. 고기라도 웃어넘길 수 있다. 새알이라 해도 조금 화가 날 뿐이다. 하지만 빵이다.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이후 처음 손에 쥔 밀가루 음식이다. 성무는 빵이 좋았다. 동네 제과점에서 유통기한 다 된 빵을 얻는 날이라면 뛸 듯이 기뻤다. 방글방글 웃으며 집에 돌아와 조금씩 아껴먹었다. 손바닥만 한 게 천 원, 이천 원 씩 해대서 제대로 못 사먹는 것이 바로 빵이었다. 특히 소시지나 치즈라도 들었다 하면 막 삼천 원 이상 몸값이 뛰어올라 운 좋게 얻을 때 말곤 사먹을 엄두조차 못 내었다. 싸구려 라면이 오백 원 아래위고 중국집 자장면이 발품 좀 팔면 이천 원, 이천오백 원 하는데.
그런 빵이다. 조난당하기 전에도 없어서 못 먹었던 빵이다. 간절하게 점프했지만 이미 빵은 팬티처럼 손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간 뒤였다. 성무의 뺨을 타고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녕, 빵. 팬티에게 안부 전해주렴…….
-끼엑!!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빵을 떠나보내려는 바로 그때, 칼날이 번뜩였다. 성무는 눈물 젖어 뿌예진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후두둑, 깃털과 핏방울과 새. 그리고 빵. 그것들이 성무의 발치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잔뜩 모여 있던 바닷새들이 삽시간에 흩어진다.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새의 몸뚱이는 짧은 손칼에 관통당한 채다. 핏물이 울컥울컥 모래 위로 퍼져나간다.
“……어…?”
성무는 바싹 굳었다. 칼을 던져 새를 잡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 또 다른 손으로 칼을 던질 수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 뿐이다. 뒤쪽에 서있을 외국인 남자. 온몸의 털이 서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 설마…… 빵 훔쳐갔다고…?’
먹으라고 준 게 아니었던 건가!! 성무는 꼼짝 못하고 얼어붙은 채 발치를 나뒹구는 빵을 힐끔거렸다. 어쩌지, 무릎 꿇고 빌까. 칼 던지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활도 총도 아닌 칼을 던져서 단 한 번에 날아가는 새를 맞춰 떨어뜨린 것이다. 새보다 더 덩치 크고 느린 사람이라면 훨씬 더 맞추기 쉽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니 도망도 칠 수 없었다. 무, 무서운 사람이다…….
“사, 사, 사…….”
살려달라고 말하면, 알아들을까? 영어로 살려달라는 말이 뭐였더라? 그래, 미안하다는 말은 기억난다. 그냥 미안하다는 건 쏘리였고 그것보다 더 많이 미안하다는 말은-.
“아, 암소 소리.”
성무는 아주 또박또박 정확하게 발음했다. 분명하다. 학창 시절에 친구 놈들이랑 음메~ 거리며 낄낄댔던 기억이 난다. 장난치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음메~ 하기도 했었다. 암소 소리야, 틀림없어. 차마 뒤돌아볼 엄두도 못낸 채 다시 한 번,
“음메~ 아, 아니, 암소 소리.”
수소가 아니라 암소. 모래밭이다 보니 다가오는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성무는 자신 쪽으로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에 몸을 파들 떨었다. 다가온 외국인이 바닥을 나뒹구는 빵을 발로 지그시 밟았다.
“헉!”
무심코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아까운 것을! 모래만 털어 내면 먹을 수 있는데! 역시 무서운 놈이다. 매정하고 잔인한 놈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게야, 귀한 빵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로 마구 짓밟다니. 이렇게 된 거 얼른 튀어야겠다며 눈치 살피는 성무의 앞으로 다시금 빵이 내밀어졌다. 새 거다. 성무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어… 어어…….”
먹고는 싶은데, 진짜 먹고는 싶은데… 덥석 받았다가 발치의 새 꼴 나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내민 손을 무시하는 것도 무섭다. 주는데 안 받았다고 화낼지도 몰라. 아 씨, 돈 다 잃고 무인도에 조난당한 것도 서러운데 미친놈한테까지 걸리다니! 팔자 한 번 더럽다. 대놓고 투덜대진 못하고 속으로만 꿍얼거리며 성무는 살그머니 내민 빵을 붙잡았다. 다행히 미친놈은 순순히 빵을 가져가게 두었다. 눈치를 살펴가며 뒷걸음질을 쳤다. 따라오지는 않는다. 그냥 쳐다만 보고 있다. 하지만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미친X란 그런 거니까. 성무는 홱 돌아서서,
“으아아아아!!”
있는 힘껏 숲을 향해 내달렸다.
한성무 씨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어릴 적 들은 모 만화주제곡을 떠올리며. 달려라, 달려라~. 본능적으로 발길은 집을 향해가고 있었지만 중간에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그놈이 집을 발견했을지 못했을지 아직 모른다. 바보같이 집의 위치를 알려 줄 수는 없다! 나름 지그재그까지 그려가며 도망치던 성무는 손아귀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냄새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발을 멈추었다. 침이 츄릅 흘러내릴 정도로 좋은 냄새다. 새벽 일찍 빵집을 지나치면 솔솔솔 풍겨나는 바로 그 냄새. 성무는 제 손에 단단히 쥔 빵을 내려다보았다.
“맛있겠다….”
입을 열기 전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았겠지. 다행히 주위는 조용했다. 인간의 것-신발을 신은 발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심 한 성무는 느리면서도 빠르게, 빵을 입으로 가져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으어…?”
빵은 아직 따끈했다. 그 속은 더욱 더 따뜻했다. 베어 문 온기 사이로 무언가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것이 흘러나온다. 액체는 아니지만 고체는 더더욱 아니다. 절로 눈이 감겨지는 그 맛. 성무는 몰랐지만 빵 안 가득히 들어찬 것은 상질의 크림치즈였다. 손바닥만 한 통 하나에 들어찬 것이 5천 원대를 넘나드는 비싸디 비싼 음식을 그가 입에 대어봤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노란 슬라이스 치즈라면 맛본 적 있긴 하다. 군대리아도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종교를 바꾸어가며 박쥐처럼 배회하던 중에 피자 한 조각 얻어먹은 적도 있다. 진짜인지는 의심가지만 하얗고 짭조름한 피자치즈! 물론 군대 나와서는 햄버거는 물론이요 피자같이 비싼 음식은 구경만 해봤다. 한 판 만원이면 후루룩 한입에 흡수할 크기의 저 얇은 한 조각이 천원이 넘는다는 소리니. 암만 맛있어도 저거 두 조각 먹을 바엔 자장면 또는 라면 네 개를 선택할 성무였다.
각설하고, 아버지한테 털리고 빚쟁이한테 털리고 폭풍우에 털리고 바닷새한테도 털린 한성무 씨(약 25세, 남)는 지금 현재 행복했다. 단 한 입에 살아있길 잘했다는 충만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아…….”
맛있다. 그 외국인, 어쩌면 미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래, 맞아. 나 같아도 이런 걸 빼앗겼다면 칼부림까진 안가도 주먹다짐 정도는 했을 거야. 칼질은 좀 심했지만,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겠어. 순간 빡 돌겠지. 성무는 행복에 몸서리치면서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으와, 진짜 맛있다. 한 입, 또 한 입, 바들바들 한 입….
“으엥?”
없다. 모름지기 세상 무엇이든 끝이 있는 법.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빵의 끝은 딱 다섯 입이었다. 그렇게 행복은 다섯 입으로 끝이 났다. 좀 천천히 먹어서 5분 정도. 짧다. 성무는 하아-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움에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문득 떠올렸다.
“떨어뜨린 거!”
백사장에 떨어진 그 빵! 비록 그 미친놈이 무참하게 짓밟았지만 어찌 먹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성무는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으아아, 역시 미친놈 맞아! 어떻게 이런 걸 좀 떨어뜨렸다고 발로 밟아 뭉갤 수가 있지? 제정신 맞아? 모래만 좀 털어내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거였는데! 아주 멀쩡했다고!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게야, 비정상이라고!”
잠깐이나마 좋게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영혼이 절로 승천해버릴 정도로 맛있는 걸 좀 떨어뜨렸다고 짓밟아? 돈 아까운 줄 모르는 것을 넘어서 잔인하다. 이제까지 먹어 본 그 어떤 빵보다도 맛있었는데! 일 도와주다가 운 좋게 얻어먹은 소시지 빵보다 세 배는 더 맛있었는데!
“빵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아아!!”
내가 먹어 줄게! 모래투성이라도 괜찮아! 좀 밟혔으면 어때! 맛있기만 하면 다 괜찮다,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성무는 도망칠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바닷가를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끼룩끼룩
-끼악!
그대로 뭉크의 절규가 되어버렸다.
“으아아아아악!!”
잠깐 물러났던 바닷새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광경이 그의 눈 가득히 들어박혔다. 저건 무리다. 조각은커녕 가루하나 남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하다. 아아, 님은 가셨습니다. 팬티에 이은 두 번째 충격이 성무의 가슴을 강타했다.
“……쓰글, 개새…….”
그의 눈가가 희미하게 반짝 빛이 났다. 영원토록 잊지 않으마…….
참다랑어의 뱃살을 고이 옮기는 데에 지대한 도움-비록 결과는 나빴지만-을 준 기계식 아이스박스-소형 냉장고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형 오븐이었다. 작고 가벼우며 충전식으로 가동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검은색 가방이었다. 그 속에 들어간 것은 아직 굽지 않은 크림치즈 프레즐. 발효도 모두 끝나 구워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프레즐이 선택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제비뽑기였다.
전날의 실패 이후 비페르는 일본인도, 동양인도 아닌 세계인이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가기로 결정 내렸다. 인종이 여기저기 마구 섞여있는 세상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동양인이지만 누가 알겠는가, 부모가 해외로 이주했을 수도, 격세 유전으로 툭 튀어나왔을 수도, 사실은 금발인데 염색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선택된 것이 빵이었다. 일단은 무난하게. 비페르는 이번에도 건방지게 거부하면 개목걸이 채워서 저택으로 끌고 와 혈액형부터 첫 몽정까지 죄다 불어놓게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개목걸이도 실제로 준비했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부드러운 악어가죽에 천연 백진주를 박았다. 누렇고 갈색인 피부에는 흰 보석이 어울린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이아가 더 나았을까.”
비페르는 다이아몬드 박은 걸로도 하나 만들어 두라고 명한 뒤 저택을 나섰다.
원시인이 종종 출몰하는 바닷가에 도착한 비페르는 검은 가방처럼 보이는 휴대용 오븐을 넙적한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손잡이 오른쪽의 버튼을 누르자 미리 설정되어있던 온도와 시간으로 작동이 되기 시작했다. 겉으론 보이지 않았지만 아래쪽에서 예열이 끝나자 위쪽에 따로 보관되어 있던 빵 반죽이 툭툭 떨어져 노릇노릇 익어갔다. 비페르는 느슨히 팔짱을 낀 채 숲을 바라보았다.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면 개울 쪽으로, 그곳에도 없으면 집에 직접 찾아갈 심산이었다. 집의 위치는 이미 파악한 뒤였다. 숲이 아무리 무성하다 해도 한밤중의 불빛을 포착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이 섬의 숲, 정원에서 인공적인 불빛을 낼 존재는 불법침입자 외엔 없다.
우두커니 서있는 낯선 인간의 모습에 겁 없는 물새들이 슬금슬금 주위를 맴돌았다. 늘상 봐온 ‘생선셔틀’ 보다 더 크고 훨씬 위협적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비스무리하게 생겼다. 일자로 섰고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손을 사용한다. 몇몇 새들이 수군거렸다. 저것들은 ‘봉’ 빼고 서쪽에서만 사는 줄 알았는데. 영역을 넓히려는 것일까, 서식지를 옮기려는 것일까. 가만히 기다리기 심심했던 비페르의 눈길이 바닷새를 향해 옮겨갔다. 때마침 빵 다 구워졌다고 땡, 소리가 들려왔다. 가방-휴대용 오븐을 열자 갓 구워진 프레즐 넷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냄새다 몰려 든 물새들이 끼룩끼룩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야성의 감이 저놈은 생선셔틀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경고해주고 있었다. 비페르는 다시 한 번 숲 쪽을 바라보았다.
“…….”
인기척은 아직 느껴지지 않는다. 이대로 우두커니 서 기다리기는 지루했기에 따끈한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굶주리지 않은, 잘 먹고 잘 사는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진정한 자연보호주의자가 할 짓이 아니다. 비페르는 자연보호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지루함과 자연보호를 놓고 저울질을 한다면 전자로 기울었다. 하기야 제대로 자연보호주의자 노릇을 하려면 섬에 지은 저택부터 싹 밀어야하겠지. 그리고 수없이 많은 가죽제품과 수없이 많은 원목제품과 또 수없이 많은 기타 등등을 애초부터 사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냉난방도 좀 줄이고.
아무튼 심심한 비페르는 빵을 조금 뜯어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물새들을 향해 던졌다. 파닥파닥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깃털이 흩날린다. 꽥꽥거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진다. 어찌나 시끄럽게 난동을 피워대는지 비페르는 미처 숲을 빠져나오는 인기척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우워어어어어!!”
야생의 한성무가 튀어나왔다. 예기치 못한 등장에 비페르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일단 그를 지켜보았다. 기세 좋게 뛰어 든 원시인 룩의 청년은 이내 쏟아지는 새들의 눈초리 속에 움츠러들고 말았다. 일전에 새떼와 싸우더니, 혹시 무서워진 것일까. 비페르는 혀를 쯧 차며 둘 남은 빵 중 하나를 내밀었다. 눈을 커다랗게 깜박깜박하더니 얌전히 받아든다.
“우우…….”
그걸 꼭 쥐고선 뒷걸음질 친다. 마치 사탕을 빼앗길까봐 겁내하는 어린애와 같다. 비페르의 입술 위로 무심코 미소가 스며들었다. 자신이 준 빵을 보며 헤죽거리는 모습에 개목걸이는 일단 넣어두기로 했다. 그때 새 한 마리가 빵을 쥐고서 좋아라하는 야생인을 향해 덮쳐들었다. 이내 다른 새들도 마구 덤벼들고…….
“으허어어엉!”
“…….”
키도 작아서 팔도 짧은 것-비페르의 기준에서 작고 짧은 편-이 파닥파닥 하늘을 향해 몸부림을 친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맹금류도 아닌 흔히 보이는 바닷새다. 설마 저리 당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동시에 머릿속의 끈 하나가 뚝 끊어졌다. 날개에 두드려 맞아 발개진 얼굴로 울먹거리고 있다. 이성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빵을 물고 달아나던 새가 떨어지고 주위는 순식간에 다급한 날갯짓 소리로 꽉 찼다. 비페르는 흠칫 굳은, 거의 벌거벗은 동양인 청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움찔움찔 거리더니 무어라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암……리…….”
다 죽어가는 모기만한 목소리라 거의 들리지가 않는다.
“…메…….”
메?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바싹 다가가던 비페르의 발 아래로 떨어진 빵이 밟혔다. 어차피 바닥에 떨어진 거니 먹을 수도 없다. 그는 마지막 빵을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려대는 원시인을 향해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순순히 받아든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으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숲으로 뛰어간다. 비페르는 그 뒷모습을 흐뭇이 바라보았다. 엉덩이를 가린 것이 아쉽군.
“그렇게나 마음에 든 건가.”
겁에 질린 표정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처음의 빵을 쥐고 행복해하는 얼굴만 떠올린 비페르가 제멋대로 판단했다. 또 빼앗기기라도 할까봐 부리나케 도망치는 모습이라니. 어수룩하면서도 귀엽다. 저러니 새 같은 것한테도 당하지.
볼일 다 끝낸 비페르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번에는 카메라를 가지고 와야겠다.
빵……. 오동통하니 이리저리 꼬인 갈빛의 빵…….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자태에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 향기로운 냄새여. 내 고장 새벽은 빵과자가 구워지는 시간.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갈빛빵 굽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빵 때문에. 그러니 나는 두 개 너는 한 개.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고 눈을 떠도 아른거린다. 아아, 이것이 바로 상사병.
“으어우어어…….”
컴컴한 천장을 향해 드러누운 채 성무는 신음했다. 입맛도 똑 떨어지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빵… 빵을 다오. 흡사 마약중독자처럼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빵…….”
성무는 몸을 일으켰다. 밖이 훤하다. 하루를 꼴딱 새고 벌써 아침이었다.
“…빵…….”
어쩌면 그 외국인이 또 와있을지도 몰라. 성무의 머릿속은 빵으로만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낯선 외국인이 왜 무인도에 머무르며 어떻게 갓 구운 빵을 가지고 오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다. 알고 보니 무인도에 빵집 체인점이 들어섰든 알라의 요술봉에서 튀어나오든 무슨 상관이랴. 빵만 얻어먹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순수할 정도로 간절한 욕망이었다. 빵!!
“빵… 빵…….”
외국인 씨, 빵만 준다면 새가 아니라 사람을 잡아도 괜찮아요. 나만 안 잡으면 괜찮아. 혹시라도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살짝 솟아오르긴 했지만 빵이 공포심을 억눌렀다. 옛말에도 있잖은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 일단 먹고 보자. 어제처럼 도망치면 돼. 그래도 이 근처 지리는 빠삭하니까. 아무렴 한 해를 넘긴 야생인인데 갓 섬에 들어온 문명인의 손아귀도 못 빠져나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맥가이버 칼을 챙겼다.
“흐흐흐… 나도 무기 있다고.”
이래봬도 군대까지 나온 몸이다. 의무입대 없는 외국에서는 한국 전역 자를 알아준다던데. 해병대 출신이라고 뻥쳐야지. 근데 해병대가 영어로 뭐더라…… 바다니까 씨… 씨…….
“씨…지브이?”
씨지브이. 많이 들어봤는데, 뭐더라? 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입에 착 달라붙는 영어단어다. 문화생활과 영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 온 성무는 머리 조금 긁적이다가 생각을 포기했다. 무인도에서 일 년이 넘도록 문명과의 교류 없이 단순한 생활을 해왔더니 머리도 좀… 솔직히 말해 꽤 굳은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해병대 출신. 성무는 빵을 고대하며 힘차게 해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무인도에서! 빵 얻어먹는! 행복에 살았다! 뜯기고 뜯어가며 맺어진 물새야!”
빵 하나의, 행복.
한성무의 서식지와는 정 반대편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저택에서도 기분 좋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물론 날개 안 붙이고도 하늘을 날아 갈 듯한 성무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이래서 행복은 성적… 돈 많은 순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기분 좋아진 저택 주인 덕분에 고용인들은 연말도 아닌데 보너스를 받았다. 덕분에 저택의 전체적인 행복지수 또한 상당히 상승했다. 단, 유일하게 한 명. 유일하게 주인의 외출을 알고 있는 노집사 젤먼만은 행복 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또 주인님께서 또 혼자 나가신대…….
“……여기, 휴대용 오븐입니다.”
젤먼은 울적하게 검은 가방을 내밀었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늙은 개와 같은 눈망울로 젊디젊은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왜 자꾸 늙은이 가슴을 후벼 파시나요. 그놈의 불법침입자, 마주대했다간 주먹부터 날리고 볼 심정이다.
“예정하신 휴가기간이 삼일 남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처리를-.”
“늘려.”
“……주인님, 약속이-.”
“취소해.”
아아, 신이시여. 무정히 돌아서는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집사는 길게 한탄했다. 마가 낀 게야. 틀림없어. 동양에 유명한 무당이 있다던데 푸닥거리라도 해야지 원. 아프리카 주술사도 초청하고 아메리카 퇴마사도 찾아보고……. 거, 무슨 형제가 악마며 귀신을 참 잘 잡아낸다던데.
“…닥터는 왜 이렇게 늦는 건지.”
아무리 학기 중이라지만 주인님의 정신건강-실례-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젤먼은 투덜투덜 거리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단 무당부터 찾아볼까.
와아~ 있다! 성무는 양 팔을 활짝 벌렸다. 바닷가에는 오늘도 외국인이 있었다. 반갑기는 했지만 막상 떡 마주치니까 겁도 슬금 들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가지는 외국인 공포증-특히 서양계통이 제일 무섭다-에 어제의 도둑 새 즉결처형이 겹쳐지며 빵에 대한 상사병을 살며시 억누른다. 덩달아 활짝 벌려졌던 팔도 살그머니 내려왔다. 조심해야해. 아무리 빵이 맛있어도 살아있어야 맛도 느끼지. 난 제사상 차려 줄 사람도 없잖아. 이대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도 굶어야 할 거야. 반쯤 뛰던 두 발이 걷다 못해 거북이 뺨치도록 느려졌다.
니가 믿을 만한 인간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콱 잡아다 물에 집어넣는 거 아냐? 라고 의심하면서도 먹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길고양이처럼 구는 성무를 비페르는 즐거이 바라보았다. 암만 봐도 못생겼는데 하는 짓 하나는 귀엽다. 그는 갓 구워 따끈따끈한 빵을 들어보였다.
“Come here, primi.”
이리 온, 프리미. primitive 또는 primitif. 컴 온이나 컴 히얼 정도는 기본교육만 받으면 어지간해서는 알아듣는다. 성무도 대충은 알아들었다. 다만 네이티브 발음인지라 좀 아리까리하긴 했다. 어쨌거나 좋은 냄새 폴폴 나는 빵을 인질로 붙잡고 있으니 오라하든 가라하든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입에 침이 절로 고인다. 비페르에게로 조심조심 다가가는 성무의 모습에 떡고물을 바라고 모여 있던 물새 떼 중 하나가 눈물을 훔쳤다. 일전에 성무에게 구애한 적 있었던 아리따운 물새 아가씨다. 저 놈, 열심히 먹이사냥 하기에 수컷인줄 알았더니 암컷이었나 봐. 저렇게 능력 좋고 무서운 수컷을 숨겨뒀을 줄이야. 속았어, 속았다고. 내 순정 돌리도.
손을 잔뜩 뻗으면 빵에 닿을까 말까 한 거리까지 다가간 성무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이, 이거…….”
나? 나? 제 가슴을 가리키는 성무의 손가락질에 비페르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역시 바디 랭귀지는 만국공통. 먹어도 된다는 뜻의 제스처에 성무가 배시시 웃었다. 와, 먹어도 된대. 무섭고 위험하지만 좋은 사람이다. 그래도 언제 어제처럼 돌변할지 모르니 천천히, 신중하게 손만 쭉 뻗어 빵을 잡았다. 눈을 데굴 굴리다가 풀쩍 뒤로 물러나 야금 베어 문다.
“아아…….”
역시 맛있다! 혓바닥이 기쁨의 탭댄스를 춘다. 남은 평생 이것만 먹고 살라 해도 좋을 거 같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아, 역시 사랑인가보다. 중학교 때의 첫사랑, 말도 한 번 못 붙여봤던 그 애를 몰래 바라볼 때에도 비슷한 느낌이었지. 하지만 빵과의 사랑은 너무나도 빨리 끝을 맺고 말았다. 딱 다섯 입. 그것을 끝으로 헤어졌다. 성무는 이별의 슬픔을 삼키며 호감도가 상당히 올라간 외국인을 돌아보았다. 또 다른 사랑 하나 없을까요…?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은 통했던지 또 하나의 사랑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성무는 수줍게 새로운 사랑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저어…….”
이번에는 그냥 도망가지 않았다. 얻어먹는 데에도 염치가 있지, 상대가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인사 한 마디 안한다는 것은 동방예의지국 출신으로서 부끄러운 노릇이다. 성무는 굳어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공부와는 담쌓았던 삐뚤어진 학창시절, 그래도 영어, 배우긴 배웠다. 분명히 배우긴 배웠는데…. 단어는 그래도 제법 생각이 나는데 회하는 영~ 떠오르는 것이 없다. 끙끙대며 고민하던 성무가 아, 하고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소리 높여 외쳤다.
“하우 아 유!”
이게 잘은 몰라도 인사말이었다. 비페르는 기대어린 눈망울로 외치는 성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좀… 많이 콩글리시다. 그래도 능력 좋은 비페르 씨는 어찌어찌 알아들었다. 나이 든 비영어권 외국인들 중에서 저것과 비슷하게 발음하는 사람을 드물게나마 만나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으면 글쎄, 과연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무슨 소린지, 어느 나라 말인가 했겠지. 비페르는 조금 얼떨떨해 하면서도 기대어린 눈빛을 저버리지 못하고 대충 대답해주었다.
“Fine.”
성무가 움찔했다. 머뭇거리는 그의 태도에 비페르가 다시금 말했다.
“파, 인.”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더라. 그의 생각대로 굳어졌던 성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우와, 들어 본 적 있는 단어다! 그는 신이 나서 하우 아 유 다음에 이어지는 대사를 기억나는 그대로 읊었다.
“아임 파인, 땡큐. 앤 쥬~?”
“…….”
이번에도 비페르는 대충 알아들었다. 하지만 왜 다시 물어보는 건지.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외국인과 외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성무의 눈이 너무도 초롱초롱했다. 도저히 그냥 무시할 수가 없는 시선이다. 결국 비페르는 다시금 대답했다.
“…파인.”
“…어?”
이번에는 성무가 당황했다. 왜 또 파인이지? 인사말이라는 건 기억나지만 자세한 해석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고졸로 군대 약 2년, 막노동 약 2년, 아예 문명과 담쌓은 무인도 생활 약 1년여. 머리가 굳어가고 그나마 있던 지식과 상식도 깎아먹기에 충분한 환경이며 시간이었다. 그래도 생선 구별법과 낚시 및 낚시 포인트 찾는 법, 회 뜨기만은 프로 수준이다.
아무튼 또 파인이란다. 그럼 또…? 성무는 우물거리면서도 말했다.
“아임 파인, 땡큐. 앤 쥬…?”
비페르는 기세가 많이 쪼그라든 성무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걱정스레 힐끔힐끔 거린다.
‘…모르는 모양이군.’
어설프게나마 영어로 말을 하기는 하는데 저도 뜻은 모르는 모양이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다. 비페르는 또다시 말했다.
“파인.”
“…!!”
으아, 또 파인이래! 성무는 후회했다. 괜히 영어로 말 걸었다. 그냥 다른 나라 언어라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원시인인 척 할 걸. 그러고 보니 원시인인 척 하는 것도 다 틀려먹었다. 무어… 이제 와서 경찰서에 신고하진 않겠지? 설마 잘 먹여서 팔아먹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무튼 지금 당장 닥친 문제는 영어다. 파인, 또 파인! 빌어먹을 파이이인!
“아,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반쯤 울먹이며 성무가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제발. 그 모습을 비페르는 팔아먹는 게 아니라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운다, 운다, 운다. 이쯤에서 관대히 그만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무어랄까, 마치 통통하니 귀여운 아이를 일부러 울리는 못된 어른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당황시키고 싶다. 당황해서 코끝 빨갛게 훌쩍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생긴 건 못생겨도 우는 건 귀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비페르는 꿋꿋이 대답해주었다.
“파인.”
“으……으…….”
성무는 빵을 공손히 받아 쥔 두 손을 바르르르 떨었다. 엄마, 살려주세요. 나 외국인 무서워! 역시 외국인한테 말 거는 게 아니었어! 한국에서처럼 모르는 척 도망칠 걸! 성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억지로 입을 열었다.
“아…임… 파인, 땡큐…흑, 앤, 유…?”
그만하세요, 제발. 이 잔인한 놈아. 역시 무섭고 매정하고 잔인한 놈이었다. 힘들어하는 거 안보이냐? 내 얼굴 안보여? 나 영어 몰라! 근데 영어를 모른다는 말을 영어로 모르겠어! 삐쭉 튀어나와 부르르르 떨리는 입술을 빤히 쳐다보던 비페르가 싱긋 웃었다. 꿀물에 담근 듯 이성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화려한 미소로,
“파, 인.”
하고 말한다. 성무의 가슴이 저렸다. 저린 가슴을 붙잡고 성무는 울었다.
“으흑, 암소 소리…….”
내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암소 소리, 하고 훌쩍훌쩍 운다. 대놓고 펑펑 우는 건 아니지만 코끝이 발개졌다. 외국인 무서워, 영어 무서워. 빵을 꼬옥 붙들고 몸을 움츠린 채 비페르를 힐끔거렸다. 또 파인 그러면 도망칠 테다. 다행이 이번에는 끔찍한 파인 소리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한 발짝 다가온다?!
“에, 엑? 아, 암소 소리!”
깜짝 놀라 버둥버둥 미안하다고 소리쳤지만 외국인은 더욱 더 접근해왔다. 암소 소리가 사과의 뜻이 아니었던 건가? 알고 보면 욕?! 성무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 가까이 더 큰 외국인을 올려다보았다. 딱딱한 얼굴이다.
‘엄마야…….’
욕인가 보다. 암소 소리가 사실은 욕이었어. 그런 거야. 화났어. 성무는 한쪽 발을 뒤로 뺐다. 큼직한 손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다가온다. 으악! 머리끄덩이 붙잡고 팰 건가보다!
“으아아아아악!!”
성무는 도망쳤다. 붙잡히기 전에 도망쳤다. 어제보다 두 배쯤 빠르게 도망쳤다. 역시 살벌한 놈이었어! 그래도 빵은 건졌다.
“…….”
비페르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이어 자신의 허무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너무 일렀나.”
하는 짓이 하도 귀여워서 무심코 손을 내밀고 말았다. 하지만 손까지 대기에는 이르렀던 모양이다.
“영어권은 확실히 아니군.”
서툴기 짝이 없는 영어라니. 웃으며 돌아서려던 그가 아차 싶어 중얼거렸다.
“사진….”
찍어 두는 거였는데. 자동으로 촬영 가능하게 설정해두고 왔지만 방향이 달라 얼굴은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움에 절로 혀가 차졌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공짜 밝히다가 대머리 된다. 대머리는 안 되도 머리끄덩이는 붙잡힐 수 있다. 그러다보면 대머리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그래도 빵은 맛있다~.”
성무는 다섯 입 짜리 빵을 열 입 넘게 아껴먹으며 말했다. 머리 좀 뜯기는 것을 감수 할 만 한 맛이다. 또 나겠지 뭐. 망할 아버지지만 그래도 머리숱 하나만큼은 풍성하셨으니까. 하지만 그 맛있는 빵은 입댄지 채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아아, 인생은 길고 사랑은 짧도다. 성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으… 내일 또 가 봐야하는 건가…….”
난 암소 소리가 미안하다는 뜻인 줄 알았지!
“으음, 그래도 죽이지는 않을 거야. 오늘도 나름 친절했잖아? 내일 만나면 욕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아 씨! 미안하다는 말이 영어로 대체 뭐야? 암소 소리가 아니면 쏘리도 아닐 텐데…….”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쏘리는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원어민, 외국인이 더 잘 알겠지. 아니면 사실 미국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암소 소리가 욕으로 들리는 나라의 사람일지도.
“……공부 좀 할 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배를 문질렀다. 빵 두 개 가지고는 하루를 버틸 수는 없다. 고작 한 끼 수준인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성무는 집으로 가 낚싯대를 챙겼다.
미끼도 구해다가 다시 바닷가로 돌아가자 물새만 몇 보일 뿐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돌아 간 모양이었다. 성무는 의아해하며 터를 잡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러고 보니 그 외국인, 이 섬에 터라도 잡은 건가?”
알고 보면 조난자 2? 하지만 조난자라고 치기엔 너무 때깔이 좋다. 매일같이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는 사람이 단순한 조난자일 리가. 그렇다면 역시 무인도의 생태연구를 위해 이곳에 온 연구자인 모양이다. 성무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온 모양이지. 돈 많은 연구자인가 봐.
“엄청 좋은 텐트에서 자겠지? 옷도 너덧 벌 있는 모양이고. 음식도 많이 가져 온 모양이고.”
팔자 참 좋다. 누구는 땡전 한 푼 없어서 고향에 돌아갈 엄두도 못 낸 채 이러고 있는데. 돈만 있으면 그냥 집에 가지, 여기서 야생생활 하고 있겠냐고.
“에휴, 됐어 됐어. 여기도 좋아. 살어리 살어리랏다아~ 무인도에 살어리랏다~ 생선이랑 고기랑 머억고~ 무인도에 살어리랏다~.”
근처의 물새들이 시끄럽다고 꽥꽥거렸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물고기를 낚아 올렸는데도 먼저 다가오질 않는다. 성무는 의아해하며 근처를 맴도는 바닷새들을 쳐다보았다.
“야, 늬들 왜 그래? 얌전떨다가 한꺼번에 덮치려고…?”
몇몇 새들이 눈치 보며 끼룩거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서워서. 성무가 아니라 저 생선셔틀을 빵셔틀 해주는 수컷이 무서워서. 새들이 보기에 비페르는 구애 중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벌써 세 번이나 가져다 날랐다. 비록 처음에는 거절당했지만 어제와 오늘은 저 수컷인 줄 알았던 암컷이 받아먹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둘이 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미리 조심하는 것이었다. 무지 쎈 수컷의 짝을 잘못 건드렸다가 어제 그 친구처럼 비명횡사하기는 싫으니까.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성무는 저 녀석들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하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단체로 벼락 맞고 개과천선이라도 한 걸까.
“뭐… 솔직히 늬들 한 짓을 생각하면 안주고 싶지만, 남아도니까. 이후로 또 나 괴롭히면 국물도 없어!”
성무는 마음 좋게 남는 생선을 던져주었다.
“역시 난 너무 착한 거 같다니까. 우후후.”
성무는 기분 좋게 잡은 생선을 어깨에 걸쳐 멨다. 오늘의 저녁은 이걸로 땡.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숲과 백사장의 경계지점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는 작은 여우가 눈에 띄었다. 성무를 발견 한 여우가 수풀 사이에서 알 하나를 물고 나왔다. 새알은 아니고 거북이 알이다. 또 하나, 둘, 셋… 모두 다섯 개다. 조금 떨어져 않은 여우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생선 든 인간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이랑 똑같은 짓을 할지도 몰라.
“…새알이잖아?”
거북이 알이다. 성무는 알과 여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녀석, 똑똑하네. 또 교환하자는 거냐?”
안 될 거야 없다. 흔한 생선보다야 귀한 새알이 더 좋으니까. 성무는 두 마리의 생선 중 하나를 내려놓고 빈 미끼통에 거북이 알을 주워 담았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는 여우의 눈망울이 기쁨으로 반짝거린다. 역시 저건 덩치만 큰 바보였어.
“고마워, 꼬맹아.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성무가 숲 속으로 들어가자 여우가 재빨리 뛰어와 생선을 덥석 입에 물었다. 아이 좋아라, 봉 잡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