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

작은 편이라고 해도 건장한 성인 남성이 하루하고도 반을 쉼 없이 걷고 뛰어야만 겨우 돌 수 있는 크기의 섬이다. 때문에 동쪽 외곽의 숲에서 정 반대편인 서쪽의 저택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빗물이 기기묘묘한 그림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창문을 수시로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주인을 기다리던 노집사가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비밀통로로 통하는 문이 열리자 그가 얼른 마른 수건을 들고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멍청이 하나가 촉매제를 착각하는 바람에….”

하늘을 맑게 만들라고 보내놨더니 되레 비를 뿌리고 말았다. 당연히 비가 내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 우산을 챙겨가지 않았던 비페르는 저택에 도착하기 직전 흠뻑 젖어버렸다. 그는 집사로부터 수건을 받아 물기를 대충 닦아냈다.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걸음을 옮기며 비페르가 대답했다.

“글쎄.”

엉덩이는 자신을 보자마자 괴상한 소리 한 마디를 남기곤 냅다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고 잠시간 기다려 보았지만 돌아오지 않아 로션만 남겨둔 뒤 발길을 돌렸다. 두루뭉술한 대답에 젤먼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퇴출시킬까요?”  

그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일까. 하지만 비페르는 짧게 고개 저었다.

“하얗더군.”

“…….”

젤먼은 반사적으로 예?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눌렀다. 요즘의 주인님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이 바로 세대차이라는 것인가. 더욱더 정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젤먼이 알겠노라 대답했다.

“동쪽 숲의 출입제한은 S등급 그대로 두겠습니다. 목욕물을 준비해놓았으니 들어가시지요. 젖은 채로 오래 계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노집사의 재촉 속에서 비페르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발짝 못가 이내 멈추었다. 그는 느릿이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벽의 3분의 1을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두 차지하는 커다란 유리창이다. 그 사이 약해진 빗줄기 사이로 낮게 깔린 안개가 스물거린다.

“비가 오는군.”

“그, 그렇습니다만….”

그 비를 직접 맞아놓으시고선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을. 어서 욕실로 들어가시라고 젤먼이 재차 재촉했지만 비페르는 꼼짝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 피할 곳 정도는 있겠지.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생각만큼 작았다. 170중반 정도일까. 동양인은 작은 편이라고 들었으니 그쪽에선 평균 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눈에는 여자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정도였다. 다만 몸만큼은 확실한 수컷이었다. 아래쪽은 키와 마찬가지로 작았지만 볕에 탄 육체는 단단히 근육 잡혀 있었다. 약간 마른 듯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도망칠 때 훤히 드러났던 엉덩이는 천체망원경으로 본 그대로 희었다. 둥글고 탱탱하고 풍만한 여성과는 달리 작았다. 

“…작은 엉덩이.”

“……주인님?”

한쪽 어깨에 수건을 걸친 채 비페르는 창문 너머 먼 숲 속을 떠올렸다. 보기도 썩 괜찮았지만 촉감도 좋을 것 같은 엉덩이였다. 부드럽고 풍만하며 물컹한 둔부도 나쁘진 않지만 지금 끌리는 것은 저 하얀 엉덩이다. 좀 더 지켜볼까 싶었지만, 그냥 잡을까.

“나를 보자마자 도망치더군.”

“그… 정원에 무단 침입한 남자 말입니까?”

“그래.”

“조난자치고는 특이한 반응이로군요.”

섬에 조난되었다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보통은 기뻐하며 달려들기 마련이다. 젤먼에 말에 비페르가 동감의 뜻을 표했다.

“내 정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억지로 붙잡으면 싫어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도망을 쳤다고 말씀하시니 좋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역시 그런가.”

하기야 제 서식지에서 잘 살고 있다가 난데없이 포획당한 야생동물이 좋아할 리가 만무하다. 겁내고 싫어하겠지. 하지만 엉덩이는 만져보고 싶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비페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향해 무어라고 외치더군.”

“무슨 말을 하던가요?”

“무라카노, 라고 했네.”

뭐라고 말한 거냐를 획기적으로 줄인 뭐라카노가 살짝 삐끗한 말이다.

“…외국어로군요.”

“외국어겠지.”

비페르도 젤먼도 동아시아 쪽 언어에는 약했다. 세상에 언어가 한두 가지던가. 영어는 기본 프랑스어는 조상의 나라이니 당연히 기본에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와 취미로 배운 몇몇 소수부족의 언어까지 능숙 또는 회화가능 수준이었지만 그 외에는 철자나 겨우 알았다. 한국어, 그것도 사투리가 삐끗한 언어를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휴대폰을 꺼내 든 젤먼이 두세 군데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한 뒤 비페르를 올려다보았다.

“일본어인 듯합니다.”

“일본어?”

“예. 일본어로 ‘무라’ 와 ‘카노’를 붙여 말한 모양이라고 하는군요.”

일본이라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동양인이 맞다. 비페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이지?”

“무라는 동음다의어인지라 뜻이 여럿이더군요. 마을이나 얼룩, 또는 무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카노는 저나 그로 통역사의 말에 따르면 말을 하던 도중에 멈춘 것이 아닌가 싶다더군요.”

“도망치느라 급했으니. 일본인이라.”

별장은 있지만 가본적은 없는 나라다. 모친이 여섯 번째 세계일주-십여 년 전에 일본에서 산거라며 회색 괴물인형을 보내 온 기억은 난다. 토로(Taureau : 황소)- 였던가. 황소인형?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주인님.”

계속해서 지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젤먼이 또다시 얼른 씻으라 잔소리를 내뱉었다. 비페르는 창문에서 눈을 뗐다. 가늘어졌지만,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조난자라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적응 잘했다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배만 부르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다 안다. 알고는 있지만.

“끄응… 그것도 살아있을 때 얘기지.”

성무는 깨달았다. 아아, 죽으면 끝이다. 다 모른다. 굶주림 앞에서는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뭣도 없다. 바로 어제만 해도 외로워 죽겠다고, 뼛속까지 시리다고 엉엉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그런 값비싼 감정 따위 뱃속의 우르릉거림에 싸악~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밥통이 대장이다. 먹고 살아야 외롭고 자시고 울 힘이라도 있지.

“…밥…….”

있을 때 먹어 둘 걸. 어제는 아예 쫄쫄 굶었고 그제와 엊그제는 갈매기한테 뜯기고 비 오고 해서 말린 음식만 조금 먹었다. 말린 음식은 그래도 많이 있었는데 맛없다고 조금만 먹었던 것이다. 배가 불렀지. 가난한 과거를 까맣게 잊고 반찬투정이나 했다니. 때문에 굶은 것은 어제와 오늘 뿐이지만 뱃속 상태는 사흘은 더 굶은 느낌이다. 성무는 양 팔에 로션 통을 각각 끼워들고선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쪽이 맞긴 한거냐…….”

외로워 죽겠다고 무작정 날뛰었더니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이다. 길치나 아니냐 상관없이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동물적인 길 찾기 감각이라도 지녔으면 모를까, 성무에게 그런 형편 좋은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심지어 상식도 부족했다. 나무의 나이테를 본다거나 바위의 이끼를 본다거나 하는 그런 방향 찾기 방법들 말이다. 때문에 밤새도록 나무 밑에 웅크린 채 배고파 배고파 중얼거리다가 해가 뜬 지금에서야 길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아무리 상식 부족이라 해도 해가 어디서 뜨는 지는 안다. 해 뜨는 곳은 동쪽, 해 지는 곳은 서쪽. 달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빛이 너무 여려 잎새 무성한 숲에서는 잘 비쳐들지도 않았다. 해도 사이사이 간간히 들어오는 빛을 보고 대충 때려 맞춰 방향을 잡는 것이었다.

그렇게 헤매다 헤매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야 겨우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V자로 갈라진 굵직한 나무! 거대한 거시기 같은 나무뿌리! 앉기 딱 좋도록 엉덩이 모양으로 둥글게 파인 바위! 성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바위를 뛰어넘고 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바로 이 앞. 그는 감격으로 크게 소리쳤다.

“밥!!”

로션 통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식량 보관고를 향해 덤벼들었다. 말린 고기를 볼이 둥글게 부풀도록 밀어 넣고는 우물우물 씹어 삼킨다. 도중에 목이 막혀 켁켁거리며 물도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아- 살았다.”

굶어죽는 줄 알았네. 배가 차니까 기분도 좋아졌다. 성무는 집안으로 기어들어가 깔아놓은 가죽위를 뒹굴뒹굴 거렸다.

“아이고 좋아라~.”

어젯밤에는 참 춥고 배고팠다. 그 고생을 하며 헤매다가 집에 돌아오니 천국이 따로 없다. 등 따시고 배부르다. 양팔을 크게 벌리며 대자로 누웠다. 부드러운 털가죽이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그래. 어차피 돌아가 봤자 노숙자밖에 더 되냐. 집도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일 년 쯤 지난 거 같으니까 한국은 겨울일지도 몰라. 돌아가면 노숙자로 빌빌거리다가 비참하게 얼어 죽을지도 모르지." 

한 번 비관적으로 돌아서게 되자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성무는 제가 깔고 누운 모피를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이놈이 천연기념물 같은 거일지도.”

막 세계에서 보호하는 그런 희귀생물인지도 모른다. 어제 그 탐험가가 여기 온 것도 살펴 볼 만 한 게 있어서겠지. 마구 잡아먹었다는 걸 들키게 되면 감옥 갈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이 갈 거 같다. 애들 사탕도 잡아먹었고 토끼 짝퉁도 잡아먹었고 새알도 갈취했고 거북이랑 물고기도 잡아먹었다. 바다거북이가 보호생물이던가? 머릿속을 더듬어보았다. 고래는 잡으면 안 된다고 어부 아저씨들이 이야기하던 걸 들은 적이 있다. 운 좋게 그물에 걸리면 로또라면서. 그리고 또… 맞아, 거북이. 바다거북이도 잡으면 안 된다고 말했던 거 같아! 동해안에 바다사자 어쩌고 하면서 분명히 말이 나왔었다. 허억, 진짜로 보호동물?! 번개 맞은 듯 골이 띵하다. 성무는 벌떡 일어나 서…기엔 천장이 낮아서 앉았다.

“으아아악! 나 범죄자 된 건가?!!”

먹었는데! 잡아먹었는데! 껍질도 유용히 사용하고 있는데! 파바박 밖으로 기어나갔다. 밤새 내린 빗물이 가득 담겨진 바다거북 등껍질이 보였다. 성무는 얼른 그것을 끌어안으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무도 안보지?!

“어제 그 남자, 못 봤겠지. 못 봤을 거야. 여기까지 안 왔을 거야.”

일단 숨기자. 또 누가 올지도 모른다. 성무는 얼른 등껍질 속에 든 빗물을 버리곤 안아들었다. 땅을 파서 감출까 하다가 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다에다 내다버리자. 설사 다시 떠밀려온다 해도 자연사한 거북이의 껍질이라고 우기면 된다. 껍데기에는 칼자국 없으니까!

“우우… 이역만리 무인도에서 범죄자가 되다니……. 벌금이 얼마나 될까. 일이만 원은 아니겠지…….

단돈 백 원도 없는데! 귀국하면 노숙자가 아니라 수감자가 되는 건가. 한 번 빨간 줄 그이면 일자리 찾기도 힘들다던데. 성무는 코끝을 훌쩍였다. 그냥 잡아먹지 말고 보내줄걸….

“거북아, 미안해! 용서해줘!”

난 그냥 먹고살려고…. 흐윽. 

“감옥가기 싫어어…….”

이날 이때까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한성무다. 불법적인 일이라곤 무단횡단 말곤 없다. 길바닥에 쓰레기 한 번 버린 적 없었다. 버릴 쓰레기가 있어야 버리지. 경찰서도 못 들어 가봤는데 교도소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더욱 더 걱정인 것은 한국의 교도소가 아니라 외국의 교도소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외국의 보호동물을 잡아먹었으니까. 성무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외국에는… 인종차별도 하고 그런다는데……. 어제 그 외국인 키도 크던데…….”

자기보다 훨씬 키 크고 덩치 큰 외국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감옥. 성무는 무심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영어를 모르니까 말도 안 통하겠지. 따돌림 당하는 건 물론이요 때릴지도 모른다. 결국 감옥에서 덩치 큰 외국인 흉악범에게 얻어맞고 죽을지도…….

“크흑… 그렇게 죽긴 싫어…….”

맞아죽다니. 고작 스물 중반의 젊은 나이에 빈털터리로 조난당한 것도 모자라 감옥에서 맞아죽다니. 인생이 너무너무 불쌍하다. 성무는 밀려오는 파도 위로 거북이 등껍질을 있는 힘껏 내던졌다.

“가! 가버려!”

단단하고 묵직한 등껍데기는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증거는 인멸했다. 성무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그 외국인… 그 외국인이 다 봤을지도 몰라. 어쩌면 내 집을 보고 신고하러 자기 물건도 냅두고 가버린 걸지도 몰라.”

그래, 그런 거다. 어쩐지 가득 남은 로션을 그대로 두고 갔더라. 아깝게 물건을 버려두고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쯤 섬을 벗어나 가까운 경찰서로 가 신고했을지도. 성무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감옥가기 싫어… 나는, 나는 그냥 살려고, 먹고 살려고 잡아먹은 거라고!”

여긴 무인도잖아! 슈퍼도 마트도 없으니까 자급자족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억울하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초범인데, 어떻게 봐주면 안 될까? 하지만 초범이라고 우기기엔 집안 가득 깔려있는 모피들이 걸렸다. 그것도 다 숨겨야하나. 하지만 바닥에 깔 거 없으면 지내기 불편한데. 어차피 다 들켰을지도 모르고.

“우우… 모르고 그랬어요, 한 번만 봐 주세요…….”

어쩌지, 어쩌지. 감옥가기 무서운데. 한 마리당 1년씩만 쳐도 3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 새알이랑 물고기까지 치면 무기징역이 선고될지도. 아니면… 사형……?!

“으아아악! 안 돼! 주, 죽기 싫어! 살려줘!”

전기의자에 앉게 되는 걸까? 나라마다 사형방법이 다를지도 모른다. 교수형이라든가 총살이라든가……. 성무는 괴로움이 모래밭을 뒹굴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 남짓인데! 죽기엔 너무나도 젊다고! 그 나쁜 외국인! 변명도 한 번 안 들어보고 신고하기냐! 그는 이미 잠깐 본 외국인이 경찰서에 신고했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아니면 물건까지 놔두고 바쁘게 섬을 떠날 이유가 없으니까. 경찰차가 오고 있는지도 몰라… 아니, 경찰선인가. 아무튼 나는 감옥 갈 거야… 맞아 죽든 사형당하든 아무튼 죽게 될 거야…….

“흐으으윽,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으흑, 진짜로 몰랐는데…….”

하지만 과실치사도 살인은 살인이다. 우어어어! 성무는 모래를 벅벅 긁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운으로 가득 찬 걸까! 나 말고도 불법 수렵하는 사람 많다던데! 전에 얼핏 보니까 인디언이나 원주민들은 막 아무 동물이나 사냥하고 그러던데! 왜 나만… 나만…….

“아…… 원주민?”

제 무덤이라도 파려는 듯 모래를 파헤치던 성무가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래부터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흘러들어온 외국인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여기서 먹고살던 사람이라면?

“괘, 괜찮으려나……?”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여기 원주민이라고 우기면… 괜찮을까……?”

법이니 글이니도 모르고 그냥 여기서 평생 살던 원시인이라면! 진짜로 모르는데 어쩔 수 없잖아? 성무는 자신의 팔을 들어보았다. 볕에 타 누렇다기 보다는 갈색에 가까운 피부다. 옛날에 텔레비전서 잠깐 보았던 아프리카 부족민이랑 좀 비슷한 것도 같다. 까맣다기엔 옅긴 해도 제법 그럴듯하긴 하다. 좋아, 결심했어.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섬의 원주민이다! 한성무 씨는 결심했다. 문명이고 국적이고 다 포기하고 야생의 원시인으로서 살아갈 것을.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단단히 믿어버렸다.

오늘도 관찰실에 오른 비페르 씨는 만족스러웠다. 어제의 녹화 분을 돌려보니 야생의 엉덩이는 착실하게 로션을 발랐다. 그리곤 로션 통을 품에 안고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망원경의 시야를 벗어난 데다 숲이 무성해서 그 이후의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들고 갔으니 앞으로도 착실히 바르겠지.

“착한 아이로군.”

첫 만남에 괴물이라도 본 듯 도망친 것은 불쾌했지만 의도대로 잘 따랐으니 봐주기로 했다. 사람보고 도망칠 만큼 내 정원이 마음에 들었던 거겠지.

“해칠 생각은 없건만.”

그때 짧은 알람이 울렸다. 천체망원경에 일정 크기 이상의 생물체가 포착되었다는 신호다. 어제의 녹화 분을 되감아보던 비페르가 망원경과 연결 된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거벗은 인간남자 하나가 바다거북의 등딱지를 끌어안은 채 해변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감감무소식이더니 드디어 나타났다. 비페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닷가를 향하고 있는 망원경으로 다가갔다.

‘뭘 하는 거지.’

비척비척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로 앞까지 가더니 난데없이 거북이 껍질을 내던진다. 무어라 소리도 고래고래 지른다. 비페르로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저 등껍질은 여러모로 쓸모 있는 것일 텐데. 바다 속에 가라앉는 거북이 껍질을 바라보던 원시인이 힘없이 뒤로 돌아선다. 그러더니 갑자기 처량 맞게 쪼그리고 앉는다. 확대해보니 참으로 슬프고도 울적한 표정이다.

“…….”

설마 버리고 곧장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비페르는 턱 아래를 느릿이 문질렀다. 저 흰 엉덩이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쭈그려 앉아 잠시 훌쩍거리더니 발라당 뒤집어져 버둥대기 시작한다.

“………….”

바동바동바동바동.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소리치다가 하며 뒹굴어대더니 숫제 모래를 파헤친다. 온갖 원시부족 문화를 섭렵한 비페르의 머릿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행위다. 거북이 등껍질을 버리고 쪼그려 앉아 훌쩍이더니 마구 뒹굴다가 땅을 판다. 왜 저러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보고 있자니 재미는 있다. 불쌍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조그맣고 사색인 것이 열심히 발버둥을 친다. 계속 보다보니 걱정도 슬며시 들었다. 혹시 어딘가 병에 걸려 저러는 것이 아닐까. 미간이 일그러지려는 순간, 망원경 너머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환하게 표정이 펴지는가 싶더니 이내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바뀌었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무어라 외친 엉덩이가 폴짝폴짝 다시 숲으로 뛰어간다.

“아픈 건 아닌 모양이로군.”

비페르는 무심코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스스로의 행동에 의아해했다.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또 안도할 일이던가. 짧게 혀를 찬 그는 다시 관찰실 중앙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숲으로 들어갔으니 한동안 다시 보기 힘들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직접 간다고 해도 놀라서 도망 칠 뿐이니.

“해치지 않는데.”

정원에서 살고 싶다면 그냥 내버려 둘 의향도 있다. 조금, 심심풀이 삼아 관찰만 조금 할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있을까. 일본어를 배운다 해도 보자마자 도망치면 말을 걸 틈조차 없다. 글을 적어둘까. 그렇게 하면 믿어 줄까? 의심할지도 모른다. 원래 야생동물은 민감하고 의심이 많으니까. 고민하던 비페르의 머릿속에 ‘먹이’가 떠올랐다. 야생동물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의 상당수는 음식을 제공한다. 꾸준히 먹을 것을 주다보면 조금씩 경계를 풀고 가까워지는 것이다. 비페르는 휴대폰을 들었다. 조난당한지 꽤 오래 되어 보이니 자국의 음식이 그립겠지.

“일본의 별장에 연락하게.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음식 재료를 현지 요리사와 함께 내일까지 수송해오도록.”

제트기가 또다시 날아올랐다. 

뾰족한 끝이 거침없이 안쪽으로 꿰뚫고 들어간다. 성급한 움직임에 결국 피부가 찢기고 발간 피가 튀었다.

“아앗!”

짧게 비명이 올랐다. 벌거벗은 몸을 화들짝 움츠린 성무가 제 손가락 끝을 쪼옥 빨았다. 짭조름한 피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아파라….”

마무리 단계라고 신나서 바느질 하다가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제법 크게 찢어진지라 걱정이 살짝 들었다. 세균에 감염되거나 그러면 안 되는데. 군대에서 파상풍 예방접종을 해서 다행이다. 10년은 간다니까 별 문젠 없겠지. 성무는 입에서 손가락을 빼고 다시금 바느질을 시작했다. 몇 번 바늘이 오락가락 하고 마지막 마무리로 실을 감아 단단히 묶었다.

“완성!”

이것으로 완성이다! 가죽이 좀 모자라 상의 부분은 가늘지만, 그래도 그럴듯한 원시인 룩. 성무는 옷을 번쩍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안은 천장이 낮아 서서 옷을 입어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생 손수건 한 장 만들어 본 적 없으니만큼 원시인 룩은 매우 단순했다. 그냥 짧은 미니스커트와 비슷한 모양새로 비스듬히 걸치는 어깨끈이 다였다. 성무는 차례차례 옷에다 다리를 끼워 넣고 엉덩이께로 쑤욱 올렸다. 늘어진 어깨끈을 올려 머리를 넣고 걸치는 것으로 끝. 다 입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보았다. 짧은 치마 같은 팬티인지 옷인지가 덜렁거린다.

“좀 헐렁한가?”

하지만 이곳은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무인도. 허리춤에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헐렁하긴 했지만 허리띠도, 지퍼도, 단추도, 고리도 없다. 성무는 헐렁한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옛날 사람들은 조가비로 단추를 만들었던데.”

가능하려나? 만능 나이프에는 송곳도 물론 있다. 적당한 크기의 조개껍데기에 구멍을 살살 뚫어서 달면 그게 바로 단추지 뭐. 간단하다. 단추 구멍도 올 풀리는 천이 아닌 가죽이니까 그냥 칼로 살짝 잘라 내주면 된다. 성무는 낚싯대를 찾아 들었다.

“낚시도 하고 단추도 주워와야지~.”

한성무 씨의 문명 발전도가 살짝이 상향되었다. 

일식, 일본음식은 많다. 가장 흔히 떠올리는 스시 외에도 낫토, 오니기리, 다코야끼, 각종 냄비요리나 라면, 돈가스 등등. 각양각색의 요리들이 즐비하다. 그 수많은 음식들 가운데 남의 집 정원에서 표류중인 한성무 씨를 위해 선택 된 것은 다름 아닌 참치였다. 그것도 보통 참치가 아닌 몸값 비싸기로 유명한 근해의 참다랑어다. 꽁꽁 얼린 것이 아닌 싱싱한 생물! 귀하신 몸 사망하지 않도록 온갖 기술력을 다 동원해가며 참치 해체로 유명한 요리사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에서 떠오른 비행기는 음속을 가볍게 돌파하여 날고 날고 또 날아서 섬에서 가까운 비행장에 착륙했다. 부랴부랴 헬리콥터로 옮겨가는 사이 간당간당하던 참치님의 숨이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욱더 바빠졌다. 참다랑어 사망! 참다랑어 사망! 무전기를 들고서 다급하게 외쳐가며 헬기를 하늘 위로 띄워 올린다. 타타타타-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헬리콥터는 부랴부랴 섬을 향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젤먼이 하얀색 서류가방 비슷한 것을 내밀었다. 무게를 최소화한 기계식 아이스박스-소형 냉장고다. 서쪽 해변까지 빠른 걸음으로 약 세 시간. 그 세 시간 동안 명인의 손길이 듬뿍 담긴 참다랑어의 뱃살을 신선하게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참치회가 넉넉잡아 네 시간 동안 가장 신선하고 맛있게 보존 될 수 있는 적정 온도로 맞추어 놓았다. 노집사는 언짢은 기색을 속으로 감춘 채 자신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무엇하러 사서 고생이신건지.

“차라리 초대를 하십시오. 어쩌면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싫어 할 수도 있지.”

가방을 받아들며 비페르가 말했다. 돌아서는 주인의 뒷모습을 젤먼은 슬픔이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기 말입니다,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쓰셨습니까? 답지 않게 대체 왜 그러세요, 마스터. 저는 당신을 그렇게 키운 적 없습니다!

“고작 원숭이 한 마리 때문에…….”

원숭이 엉덩이가 허연지 빨간지 모르겠지만 고작 불법침입자 한 놈 때문에! 젤먼은 가슴께를 꽈악 움켜쥐었다. 평소라면 사람이고 동물이고 흥미가 가면 그냥 포획해서 적당히 넣어 두실 분께서 겁낼지도 모른다고 홀로 무거운 짐까지 든 채 숲으로 들어가시다니. 한 번은 변덕이라고 쳐도, 연속으로 안하던 짓을 하니까 걱정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젤먼은 맵시 있게 모양 낸 콧수염을 바르르르 떨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닥터인가? 미안하지만 이곳으로 좀 와주게나. 마스터의 정기건강검진 일을 앞당겨야겠어. 요즘 좀… 이상하시다네…….”

사실 좀 많이 이상하셔……. 돌이켜보니 섬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상 징후가 보였다. 이놈의 섬에 미확인 바이러스라도 맴돌고 있는 건가. 설마 내일도 또 가시진 않으시겠지.

“…오늘은 볕도 따가운데…….”

고작 모자 하나에 선크림으로 괜찮을까! 마스터의 티 하나 없이 완벽한 피부가! 이 동네 태양은 질이 그다지 좋지 못하건만……. 젤먼은 휴대폰을 부서져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이놈의 별장 관리인을 내 그냥…….”

별장 관리인은 정원에 벌레가 꼬이도록 그냥 두고만 보고 있었단 말인가. 충직한 노집사는 발을 동동 굴렀다. 주인님께서 이만큼 빠지시기 전에 얼른 포획을 해 둘 것을! 이제는 참견하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그저 얼른 주인님께서 흥미를 잃으시거나 아니면 야생의 조난자가 섬 생활을 포기하고 제 발로 걸어들어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양자 모두 아직 좀 많이 먼 듯 보이지만.

“…….”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한 걸음, 하늘 두 번 쳐다보고 두 걸음. 성무는 소심하게 눈치 살펴가며 자신의 낚시 포인터로 향했다. 그를 발견한 바닷새들이 하나 둘 주위에 내려앉는다. 예전이라면 거지새들 또 얻어먹으러 왔냐며 호탕하게 웃어보였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저놈들은 거지가 아니다. 깡패다. 쪼여보면 알리라, 저 부리의 짜릿함을. 긁혀보면 알리라, 저 발톱의 따가움을. 큼직한 날개에 양싸다구 맞으면 눈앞에 별이 반짝 보인다. 성무는 자신을 노려보는 노오란 눈동자를 향해 헤헤헤 웃어보였다.

“펴, 평화협정… 맺은 거다? 정전이야, 정전.”

신세 참 처량하다. 그냥 낚싯대 내팽개치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외친 뒤 숲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섬에서 가장 만만한 음식물이 생선인 이상 바닷가를 주름잡는 물새들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해초도 있고 조개도 있고 게도 있다. 성무의 냉장고요 전기밥통이 다름 아닌 바다다. 치사하고 더러워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사 다 그렇지 뭐.

성무는 에휴, 한숨 쉬곤 낚싯대를 드리웠다. 다행히 새들이 전처럼 덤벼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 두 마리만 빼고 다 가져라. 다 가지고 가라고, 이 나쁜 새끼들아.”

설마 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하겠지. 성무는 중얼거렸다. 개새들. 닭둘기 뺨치는 놈들. 빌어먹을 새대가리들. 삥이나 뜯고 사는 깡패새끼들. 끊임없이 투덜거리는데 무언가 푸드득, 곁으로 날아들었다.

“흐엑?!”

기겁해 몸을 움츠리는 성무의 곁으로 새 한 마리가 다가왔다. 눈에 익다. 몸은 새하얗고 날개는 보송보송한 연회색에 늘씬하고 예쁘장한 바닷새. 팬티 조각을 물고 온 바로 그 새. 새들에게 두들겨 맞게 된 원흉! 성무는 절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억지로 폈다. 연회색 날개의 새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머리를 약간 기웃하며 성무를 올려다보았다.

“뭐, 뭔데…….”

-끼룩

해석, 나 네가 마음에 들어. 그렇다. 이 섬의 바닷가 제일가는 퀸카 물새 양은 낚시하는 인간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도도한 암컷의 자존심을 버리고 선물까지 주었건만 그 난리를 쳤으니 성무가 몰매 맞는 것도 당연했다.

-끼루루, 끼륵

해석, 난 먹이 잘 잡는 수컷이 좋더라. 약한 게 흠이지만. 그녀의 눈에 비치는 한성무는 약하고 날지도 못하는 거 빼면 괜찮았다. 무엇보다 생선을 참 잘 잡는다. 알을 한 열댓 개 쯤 낳아도 다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다. 퀸카 물새 양이 가슴 깃털을 부풀렸다. 약하면 뭐 어때, 내가 지켜주면 되지.

“……이게 아주 대놓고 삥을 뜯네.”

모태솔로 25년 만에 처음으로 듣는 이성으로부터의 고백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성무는 물새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아리따운 물새 아가씨의 프러포즈가 그저 얼른 먹을 거 내놔라는 협박으로만 비춰졌다. 그래그래, 좀만 기다려 봐라.

“아무튼 밥 디게 밝혀요. 엇차!”

제법 큼직한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바위 위로 끌려올라왔다. 성무는 능숙하게 낚싯바늘에서 물고기를 빼, 옆에 버티고 선 새에게 주었다. 아가씨의 눈이 반짝거린다.

-끼르르

해석, 역시 내 미모란.

“그래, 먹어라 먹어. 다 처먹어라.”

물새계의 퀸카는 공물을 들고 날아올랐다. 오늘은 이 정도만. 수컷들이란 너무 잘 대해주면 기어 올라와서 안 돼. 아직 번식기도 좀 남았으니 천천히 길들여야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몇 수컷들이 불만스레 꾸륵거렸다. 못생긴 게 먹이만 많아가지고. 몇몇 암컷들이 대꾸했다. 불만 있으면 먹이 많이 잡아오든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물새의 세계였다.

대부분은 빼앗기긴 했지만 새도 양심은 있었던지 따로 챙긴 두 마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성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꼭 깡패들한테 자릿세 바치는 기분이네.”

별반 다를 바 없긴 하다. 힘없으면 어딜 가든 살기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뒤로 돌아서던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인간남자 하나가 모래사장에 떡하니 서있는 것이었다. 성무의 입도 덩달아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때 그놈이다. 틀림없다.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튄 줄 알았는데! 설마 로션 받으러 왔나? 그 로션은 집에다 잘 꿍쳐두었다. 바르니까 꽤 좋아서 오늘도 사용했다.

‘돌려주긴 아까운데…….’

그래도 저 사람 거고……. 성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말을 꺼내려다 화들짝 입을 다물었다. 맞다! 원주민인척 굴기로 했었지! 낚싯대를 꽉 틀어쥐며 그가 외쳤다.

“우, 우가우가!”

학창시절에 친구한테 빌려 본 만화책의 원시인이 이렇게 말하더라. 성무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슬그머니 발치의 생선 두 마리를 주워들었다. 나는 원주민,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뼈를 묻을 원주민. 한국말 몰라요. 한국 어느 나란지 몰라요. 한국인 아님. 슬금슬금 게걸음을 치며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그를 빤히 쳐다보던 외국인이 입을 열었다.

“恐ろしがるな.”

해석, 무서워하지 마라. 의역하자면 겁내지마, 우쭈쭈 쯤 된다. 성무의 발걸음이 흠칫 멈추었다.

‘뭐, 뭐라는 거야?’

못 알아듣겠다. 외국어인가? 당연히 외국어겠지. 자칭 원시인인 성무는 망설였다. 인사 한 건가? 말을 걸어왔으니 대답을 해줘야 하는 걸까.

“우갸… 으갸? 우우!”

해석, 뭔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안녕! 인사까지 해줬으니 됐겠지 생각하며 성무가 다시금 옆으로 게걸음을 쳤다. 숲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해가는 성무를 지켜보던 외국인이 돌연 들고 있던 흰색 가방을 내밀었다. 

“우, 우어?”

묵직해 보이는 하얀색 가방. 당황하는 성무의 눈앞에서 가방이 활짝 열렸다. 그 속에 든 것은 붉은색의 살코기. 꽃등심 뺨치게 우아한 마블링이 들어간 최고급 참다랑어 뱃살이었다. 생선회 좀 먹어본다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군침을 삼키며 젓가락을 따닥거릴 귀하고도 값비싼 몸! 금가루 살포시 치장하고 등장하시는 바로 그 대뱃살! 심지어 냉동과는 격을 달리한다는 근해참치! 전문점 가서 제대로 맛보려면 세종대왕은 물론이요 신사임당도 모자라다. 햇살아래 그 찬란한 자태를 발그레하니 뽐내는 대뱃살을 가리키며 외국인이 말했다.

“まぐろ”

마구로. 아는 단어다. 일본어라고는 인사말도 제대로 모르는 성무였지만 어촌에 자리 잡은 햇수만 2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생선 이름정도는 좔좔 꿰고 있다. 아, 참치구나. 성무는 가방 속의 불그스름한 생선 살점을 바라보았다.

“쳇. 우우우~.”

해석, 생선 따위 지겨워! 물론 참치 비싼 줄은 안다. 하지만 저게 얼마나 고급 참치인지는 생각지 못하였다. 참치 캔도 비싸서 못 사먹는 한성무가 눈으로 척 보고 아, 저거저거 근해에서 낚싯줄로 잡아서 비싼 놈은 마리당 억 소리 나는 그놈의 귀하디귀한 뱃살이로구나 하고 견적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알았으면 밥그릇 앞에 놓고 기다려 명령받은 개처럼 간절한 눈빛을 반짝거렸을 것이다. 허나 아무것도 모르는 성무의 머릿속에 참치는 비싸봐야 생선이었다. 생선. 지겨운 생선. 던지면 낚이는 생선. 차라리 컵라면이나 던져주지!

“워우워우 우우~~!”

불쾌한 기색을 잔뜩 내며 우우거리는 성무의 태도에 외국인이 살짝 당황했다. 다시 한 번 더 마구로, 오도로라고 말해주었지만 야유소리만 더 커졌다. 나도 생선인거 알거든? 생선 따위 줘도 안 먹거든? 너나 드시지?

“우가가 우우~!”

“…….”

내게 컵라면을 바쳐라! 라면도 하나 없냐! 생긴 건 짜증나게 잘생겨가지고 부자 티가 나는데 라면 하나 없어?! 아니면 초콜릿이라도. 기브 미 쪼콜렛!

컵라면을 내놔라는 야유를 보내며 폴짝거리던 성무는 꼬르륵거리는 배 울림에 숲으로 돌아섰다. 혹시나 싶어 뒤를 힐끔거렸지만 다행히 외국인이 쫓아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에 홀로 남은 비페르는 냉장가방 속에 든 붉은 살덩이를 내려다보았다.

“………….”

일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할 거라 장담하더니. 핏대가 조금 올랐다. 그는 가방을 탁, 털어 내용물을 모래밭 위에 내다버렸다. 눈치 보던 새 한 마리가 쪼르르 다가와 싱싱한 참치 회를 부리에 물었다. 아아, 물새로 태어나 행복해요. 다른 바닷새들도 앞 다투어 덤벼든다. 비페르는 그 광경을 잠깐 바라보다가 혀를 쯧 차곤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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