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

비가 내린다. 굵직한 빗방울이 후두두둑 나뭇잎을 두들기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곳곳에 조그만 웅덩이가 생기고 하얗던 모래밭은 갈빛으로 물들었다. 바다 위에도 수없이 많은 파문이 일었다. 이런 날에는 낚시도 사냥도 영 시원찮다. 성무는 물그릇을 앞에 놓고 바깥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세 그루의 큰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얽혀 동굴처럼 만들어진 곳이 그의 집이다. 사이사이 잔가지를 얹고 진흙을 발라 나뭇잎과 가죽으로 둘러쌌기 때문에 비는 거의 새지 않았다. 지금은, 말이다. 처음 이곳에 자리 잡고 비를 맞이했을 때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물이 샜었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넓적한 나뭇잎을 우산삼아 덜덜 떨기만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참으로 아늑하다. 비 때문에 꺼져버린 불씨는 거북이 등껍질 속으로 옮겨져 집 안, 바로 곁에 두었다. 바다거북의 등껍질 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다. 한쪽에는 마른 가지가 가득 쌓여 있다. 빗줄기가 제법 세찼지만 집안까지 물이 흘러들어오지는 않았다.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집 주위로 둥글게 수로를 파놓았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어설픈 집을 만들었을 때 겪을 수 있는 일 중 절반은 족히 넘게 겪어왔지만 성무는 그 불운을 토대로 열심히 보수를 해왔다. 운 나쁘게 벌어지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두 번은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그의 단순하고도 명확한 지론이었다.

“언제쯤 그치려나….”

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따뜻한 곳이라 하나 종일 비를 맞고 돌아다닌다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예전에 먹을 것이 없어 하루 종일 빗속에서 덜덜 떨며 낚시를 했더니 다음날 약한 감기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움직이는데 큰 지장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만일 몸살이라도 났었단 봐라, 그땐 저장된 음식도 없었으니 꼼짝없이 굶었을 것이다. 혼자 사는 데는 누가 뭐래도 건강이 최우선이다.

“늦어도 내일쯤엔 그치면 좋을 텐데. 말린 음식은 맛없단 말이야.”

성무는 작게 투덜거리며 손에 쥔 칼을 턱 아래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제법 길게 자란 수염을 살살 깎기 시작했다. 앞에 둔 물그릇이 거울 대용이었다. 다치면 바를 빨간약도, 밴드도 없기에 그의 손놀림은 조심스러웠다. 칼날의 움직임을 뒤따라 제법 빠르게 수염이 아래로 툭툭 떨어진다. 조난되기 전에도 1회용 면도기는 너무 비싸 거의 쓰지 않았다. 아침마다 백 원이면 한 달이면 삼천 원, 일 년이면 무려 삼만 육천 원이다. 때문에 그때도 지금처럼 선물 받은 맥가이버 칼을 유용하게 사용했다. 

“음, 좋아.”

매끈해진 턱을 만지작거리며 성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후임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한성아, 넌 진짜 천사야. 덕분에 내가 이렇게 인간답게 잘 살고 있다. 비록 벌거숭이로 숲 한가운데 앉아있긴 했지만.

떨어진 수염을 대충 밖으로 쓸어낸 성무는 물그릇을 치우고 반짇고리를 꺼내들었다. 피부의 통일성을 위하여 지금은 비록 잠시 벌거벗고 있지만 내도록 이렇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 팬티는 입어야지. 실과 바늘을 한쪽에 놓아 둔 그가 이번에는 가죽을 꺼내들었다. 고이 보관해뒀던 질 좋은 토끼 짝퉁의 모피다. 워낙 잡기가 힘들어서 바닥과 천장 보수엔 애들 사탕 가죽을 쓰고 토끼 짝퉁 가죽은 모아두었던 것이다. 성무는 가죽 한 장을 집어 엉덩이에 대어보았다. 크지 않은, 남성의 평균보다 약간 작고 탱탱한 엉덩이였지만 작은 토끼의 몸에서 없는 솜씨로 뜯어내 다듬은 가죽이다 보니 하나로는 모자라다. 그는 아까워하면서 가죽 한 장을 더 꺼냈다.

“크흑, 20만 원짜리 팬티다…….”

워매 아까운 것……. 이것 두 장을 포함해 총 네 장뿐이니 팬티나 두 벌 만들고 끝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에 성무가 코끝을 훌쩍거렸다.

“개새들, 앞으론 국물도 없어! 그래도 인간답게 살고 싶었는데 팬티만 걸치게 만들다니…….”

애들 사탕 가죽이라도 써볼까 했지만 어찌나 질기던지 칼로 자를 수는 있어도 바늘은 도통 들어가질 않았다. 그냥 몸에 걸치면 모를까, 곱게 바느질해 입기는 무리였다. 성무는 가죽 두 장을 앞뒤로 이리저리 대어보았다. 고무줄이 없으니 한쪽은 바느질 하지 말고 가죽을 가늘게 자른 줄을 달아 묶어야겠다. 아니면 그냥 바지처럼 만들어서 허리에 가죽 끈을 질끈 동여매든가. 잠시 자신의 가죽팬티 입은 모습을 떠올려보던 성무는 벽-나무뿌리에 머리를 쾅 박았다.

“……무지하게 촌스럽다….”

차라리 원시인처럼 허리에 두르기만 할까봐. 북실북실한 모피 팬티는 마치, 마치… 기저귀와 같았다. 특히나 허리춤에 끈 묶는 건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질 만큼 꼴불견이었다. 결국 성무는 고민 끝에 팬티 디자인을 수정했다.

“원시인으로 하자.”

자연사 박물관으로 수학여행가서 본 원시인을 떠올리며 성무는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앞뒤만 가린 스타일과 치마처럼 가린 스타일, 그리고 한쪽 가슴을 가리는 스타일. 끌리는 건 마지막 것이었지만 가죽이 모자랐다. 성무는 그림을 손바닥으로 지웠다가 다시 그리길 반복하며 고심했다. 그렇다면 복부 정도만 넓은 모양새 그대로 하고 나머지는 끈으로 할까? 한쪽 가슴과 등을 가리긴 가리되 얇게 만드는 거다. 나머지 가죽 두 장도 마저 꺼내와 알몸 이리저리 대어보았다. 대충 견적이 나온다. 아래쪽에 댈 두 장을 칼로 적당히 자른 그가 바늘을 치켜들었다.

“나의 새로운 동반자여. 너만은 개새들의 악랄한 부리로부터 반드시 지켜주겠다.”

진심을 담아 경건히 맹세를 하곤 다른 손으로 실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쑥… 쏙… 바들바들……

“아-씨! 바늘구멍이 왜 이리 작아?”

그 뒤로도 비슷한 외침이 두 번 더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스크린 가득 붉은 선이 오르내리고 있다. 다른 화면에는 각 나라의 환율지수가 초단위로 변경되고 있었다. 금과 원유 등 주요투자 상품의 가격이 빠르게 변동되는 스크린도 보인다.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저 나라의 주가, 이 나라의 옵션, 요 나라의 선물 등 갖은 경제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본가의 정보실에서는 A기업 신제품이 유망하니, B기업과 C기업이 협약을 맺었다느니, G국에 폭동이 일어나 N원유생산지에 문제가 생겼다느니 하는 각종 정보들이 빠르게 입수되어 백여 명이 달라붙어 죽어라 분석중이다. 

자금력을 바닥에 깔고 확실한 정보를 얹어 적당한 인력과 권력을 뿌려주면 깔린 자금이 합법적으로 수십 배 이상 뻥튀기되는 세상이다. 일정 이상 부유하게 되면 망할 일도 거의 없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두는 미련한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 현 세계경제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일정 이상의 재벌이라면 그 지구촌 곳곳에 돈을 박아 놓기 마련이다. 루프스가도 마찬가지다. 루프스 가와 그와 비등한 수준의 재벌가라면 내부에서 일부러 망치려 들지 않는 이상 세계경제가 망하기 직전까지 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가주인 비페르가 딴생각 좀 한다고 해서 타격 가는 일은 없었다. 무심코 한 손가락질에 콜옵션 50만 달러 치를 샀다가 순식간에 41만 달러로 가치가 하락했지만 눈 하나 깜박 하지 않았다. 9만 달러쯤 그가 보유한 주식 중 극히 일부의 하루치 변동 폭조차 되지 못한다. 한 시간치도 못될지도.

“…….”

비페르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한성무 씨의 뽀얀 엉덩이가 삽시간에 한화로 약 1억을 날려먹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끊임없이 창문을 두들기는 빗줄기는 상당히 거슬렸다. 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들어 창밖을 노려보았다. 아침나절 내내 망원경에 비치는 화면들을 주시했지만 저 굵은 비 탓인지 엉덩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엉덩이 보는 것을 포기하고 평소와 달리 관찰실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엉덩이가 없으니 거기 머무르는 것도 짜증났다. 

“…엉덩이.”

영어로는 히프. 난데없는 엉덩이 소리에 근처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던 남자가 머리를 들어 상관을 바라보았다. 비페르의 비서 중 한명인 슈에트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테 얇은 안경을 습관적으로 추켜올렸다. 잘못 들은 거겠지. 아니면 그 뜻이 그 뜻이 아니거나.

빗줄기를 노려보며 인상 팍 쓰고 있던 비페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비구름을 헬기로 흩어버릴 수 있던가.”

“헬기에 장착된 로켓포를 발사한다면 가능 할 겁니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비구름을 약하게 만들어 이내 비가 그쳐버리겠지요.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촉매제를 사용하거나 근처 다른 지역에 인공강우를 발생시키는 방법도 있고요.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섬의 생태에 문제가 생길 텐데요. 원하신다면 준비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비페르는 잠시 고민했다. 자연보호주의자는 살짝 옆에 치워두고, 첫 번째 해결책이 상당히 끌리긴 했지만 실행에 옮겼다간 엉덩이가 놀라겠지. 그는 손가락 끝으로 데스크를 툭툭 두들기며 섬과 그 주변지역의 기상상태를 확인했다. 87%의 확률로 내일 오전이면 날이 갠다. 반짝반짝 빛나는 맑음 표시에 비페르는 로켓포 발사계획을 일단은 접어두었다.

“만일 내일 오전에도 비가 온다면 최대한 조용히 비구름을 치우도록.”

“예.”

슈에트는 공손히 대답했다. 예전에는 비 오는 거 좋아하셨는데 그사이 취향이 바뀌셨나보다. 그는 키보드를 두들겨 집사 젤먼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마스터께서 흐린 날씨를 싫어하심. 내일 오전 이후 섬의 날씨조절 요망. 단, 최대한 조용하게.

엉덩이로 인한 지출금액은 이미 억 단위를 가볍게 넘어서고 있었다. 그즈음 한성무 씨는 두 장 더 붙었으니까 40만원, 이라고 주장하는 원시인 룩을 열심히 바느질 중이었다.

해가 쨍-하고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다. 자연적인지 인공적인지 모를 맑은 날씨에 성무는 기지개를 활짝 펴며 집에서 기어 나왔다. 입구가 좁고 낮다보니 어쩔 수 없다. 속의 천장은 그래도 설만 한데 입구의 높이는 딱 앉은키였다. 하기야 문이 커봤자 바람밖에 더 들어오겠는가.

“어허, 날씨 조타!”

종일 집안에 들어앉아 있었던 몸을 가벼운 체조로 풀어 준 그는 우선 불씨부터 마당에다 옮겨 놓았다. 그런 뒤 야자열매 그릇을 손에 들고서 주위를 살폈다. 비 온다고 기어 나왔다가 미처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지렁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것이 바로 비와서 좋은 점. 미끼를 적당히 채취한 그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쳐 메고 바닷가로 향했다.

“아래쪽이 좀 허하긴 하네.”

스킨 컬러 통일을 위하여 한동안은 벌거숭이 신세다. 여기가 무인도라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성무는 히죽 멋쩍게 웃었다. 누가 보면 무슨 창피래. 창피 이전에 변태로 신고당해 쇠고랑을 차겠지. 여고 앞 아담도 코트는 걸쳐 입고 다니는데.

“선탠로션 같은 게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 물에 안 떠밀려 오려나.”

그거 바르면 피부가 빠르게 갈색으로 변하겠지? 특히 엉덩이가 급하다. 성무는 순결한 자신의 엉덩이를 긁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 이 개쉐들아아아!!!”

성무는 목청이 터져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저놈의 뻔뻔한 새새키들!! 그제 그 사단을 내고도 아무 일 없었던 척 자리 잡고 있는 것 좀 보게나. 자신의 주요 낚시터 근처에서 태연자약하게 어슬렁거리는 바닷새들을 본 성무의 속이 발칵 뒤집혔다. 양심도 없는 것들! 내가 그동안 지들을 얼마나 챙겨주고 이뻐 해줬는데! 얻어먹은 거 다 토해놔!

“꺼져! 꺼져! 꺼지란 말이야!”

낚싯대를 마구 휘두르며 달려가자 몇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하지만 대다수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슬쩍 물러나기만 했다. 아아, 저 익숙한 자태. 마치 닭둘기를 보는 듯하구나. 여기가 한국이냐 무인도냐. 붕붕 휘둘리는 낚싯대가 위험하다 싶으면 풀쩍 날긴 했지만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앉는다. 도망칠 생각이 도통 없어보였다.

“크윽, 닭둘기 같은 새끼들.”

한참을 낚싯대 들고 망나니 춤추듯 날뛰던 성무는 결국 포기한 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낚싯대를 드리우자 물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칵!!”

푸득, 파닥. 아주 살짝 물러나더니 다시 다가붙는다. 아주 속이 팔팔 끓다 못해 라면이라도 익힐 수 있을 정도다. 젠장, 스트레스 받아봤자 나만 손해다. 그냥 못 본 척 하자. 신경 쓰지 말자.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중얼중얼 마음을 가라앉히는 성무의 곁으로 보송보송한 연회색 깃털의 늘씬하고 예쁘장한 물새 한 마리가 다가왔다. 종종 뛰어온 녀석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 하더니 부리에 물고 있던 것을 성무의 맨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천 조각이다. 어딘지 익숙한 천 조각이다. 익숙한 스프라이트-줄무늬! 성무의 목이 끼기긱 물새를 향해 돌아갔다.

“…너…….”

-끼룩?

물새가 다시금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선물 받아서 좋아? 성무의 손이 물새의 애정표현을 꽉 틀어쥐었다. 이건, 이것은…….

“내, 내, 내 팬티이이이!!!”

파다다닥 물새가 재빠르게 도망쳤다. 성무는 팬티의 잔해를 손에 쥐고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향해 포효한다.

“내 오늘 새고기를 먹고야 말리라!!”

아침도 새! 점심도 새! 저녁도 새! 너는 구이! 너는 찜! 너는 튀김! 으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벌거숭이 인간남자(25세 가량, 숫총각)가 바닷새들을 향해 돌진했다.

해는 어느새 서쪽 하늘 저편으로 먼 길 떠나버렸다. 붉다 못해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성무가 대자로 크게 누워있었다. 주위에 깃털 몇 개가 팔랑거린다. 지렁이 잡아 온 그릇은 텅 비었지만 손에 쥔 수확은 하나 없다. 아아, 인생은 괴로워라.

“……새새키들….”

그래, 역시 땅을 딛고 사는 인간이 날아다니는 새를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어. 총이나 하다못해 활 정도는 있어야지. 멍청하게 낚싯대하나 달랑 들고 덤빈 내가 미안해.

“배고프다…….”

아침도 점심도 못 먹고 이게 무슨 꼴이냐. 뱃가죽 아래가 꾸륵꾸륵 요란하게 울린다. 성무는 머리 위를 맴도는 새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휴전, 휴전하자! 그러니 내 먹을 것만은 남겨줘!”

괜히 건드렸다가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빼앗겼다. 나 그동안 쟤들한테 나눠준 게 아니라 삥 뜯겼던 건가. 쟤들이 나 봐준 거였구나. 허허허허. 눈물이 찔끔 흘렀다. 무인도의 최상위 포식자는 사실 바닷새.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알몸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내는 몸짓이 힘없이 처연하다.

“…오늘도 말린 생선이나 씹어야겠네.”

내일은 새들이랑 안 싸워야지. 역시 평화가 좋은 거다. 고픈 배를 문질거리며 성무는 힘없이 돌아섰다. 

100달러짜리 지폐로 도배를 한 것과 비슷한 값어치의 방에서 금덩어리를 1대 1 사이즈로 조각한 것과 비슷한 값어치의 샹들리에 불빛 아래. 과하게 싸늘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난방기구의 고장은 아니다. 주위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싸늘함의 원인은 다름 아닌 영자신문을 펼쳐든 채 앉아있는 비페르 루프스 씨였다. 그의 표정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있었고 때문에 주위사람들 역시 기침소리라도 나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로 바싹 굳은 채였다. 41년 경력의 베테랑 집사 젤먼 또한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의 주인이 저토록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가장 최근이 러시아의 현 대통령이자 전 총리와 약간의 마찰이 생겼을 때였다. 그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덜덜거린다.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노집사가 강심제 처방을 고민하는 그때, 침묵을 지키던 비페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미백에 선블록.”

“…예?”

“그러면 되겠군.”

심각한 고민에 잠겨있던 비페르의 표정이 밝아졌다. 엉덩이의 보존과 엉덩이의 노출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완벽한 해결책인 것이다. 벗고 돌아다니게 놔두자니 순백색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고, 그렇다고 입히자니 또 무척이나 아쉽다. 보존이냐 노출이냐 그 두 가지 선택지 속에서 한참동안이나 갈등했던 비페르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전문 관리사가 붙어있는 탓에 화장품 쪽으론 신경을 쓰지 않아 떠올리는 것이 늦었다. 그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에 어리둥절 해있는 젤먼을 손짓해 가까이로 불러들였다.

“준비해주게.”

“무엇을….”

“기능성 화장품. 종류는 두 가지로. 하나는 미백에 확실한 자외선 차단 기능이 든 것으로, 다른 하나는 미백은 제외하고 자외선 차단은 피부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난데없이 웬 화장품이란 말인가. 당최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젤먼은 성실히 주인이 바라는 것을 필기했다.

“용량은 몸 전체에 넉넉히 발라도 두어 달은 쓸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군.”

“지금 연락을 보낸다면 내일 정오 전후로 도착할 것입니다.”

루프스 가 가주의 격에 맞는 화장품을 판매하는 곳은 이 별장으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에 특별 주문 제작이라면 시간이 좀 더 걸린다. 젤먼은 재빨리 본가 쪽에 연락을 취했다. 화장품 내용물과 용기 제작이 넉넉잡아 내일 아침까지. 배송은 제트기로 근처 비행장까지 옮긴 뒤 다시 헬기로 섬에 들이면 된다.

“도착하는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비페르는 잠시 접었던 신문을 다시 펼쳐들었다. 싸늘하게 맴돌던 공기가 어느새 훈훈해졌다. 집사 이하 고용인들은 안도와 동시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체 왜 그러셨지? 화장품? 요즘 쓰시는 화장품이 마음에 안 드셨던 건가? 그렇게나 싫으셨다니, 피부 관리사를 족쳐야겠구나. 그래도 우리 잘못은 아니니까 다행이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애꿎은 피부 관리사는 빼고.

2000g짜리 화장품 두 개가 특급 배송으로 섬에 도착했다. 어른 팔뚝만한 거대한 용기에는 글자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비페르가 추가 주문한 것으로 짤막한 사용 설명서다. 한쪽에는 로션-얼굴과 몸 전체에 바를 것, 다른 한쪽에는 엉덩이 로션-엉덩이에만 수시로 바를 것, 이라고 온갖 나라의 언어로 적혀져있다. 당연하게도 엉덩이 로션 쪽이 미백과 완벽한 자외선 차단이 되는 기능성 화장품이다. 덧붙여서 보습, 주름개선, 탄력, 트러블 등 온갖 효능이 첨가 된 화장품 과학의 집약성이다. 손가락 길이도 못되는 화장품 앰플 병 하나가 만 원대를 넘어서 십만 원대를 가볍게 진입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생각하자면 이 유례없이 거대한 최고급 화장품의 가격이 얼마일지는 대충 상상이 가지 않을까.

그 억! 소리 나는 화장품 두 통을 앞에 두고 비페르는 다시금 고심했다. 이것을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르는 집사 젤먼이 나직이 참견해왔다.

“혹시 선물하실 것입니까?”

처음에는 지금 쓰시는 화장품이 마음에 안 드셔서 직접 주문하셨나, 싶었지만 가만 지켜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만약 직접 쓸 것이라면 최소한 내용물 확인은 해보았겠지. 비페르는 그냥 화장품 두 통을 테이블에 놓아 둔 채 노려보기만 했다. 

젤먼의 물음에 비페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에 서식중인 엉덩이에게.”

“그… 요즘 관찰하시는 생물말씀이십니까?”

“그래.”

“…주인님, 그 로션은 인간용입니다.”

게다가 네발 달린 동물이 로션 용기를 능숙하게 열어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다. 훈련받은 원숭이나 앵무새쯤 된다면 모를까. 비페르가 화장품으로부터 눈을 떼어 옆에 선 젤먼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이야.”

“예?!”

방금 뭐라고…

“나도 가끔 헷갈리긴 하네만 인간이다.”

“희귀동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요?! 큰소리 내서 죄송합니다. 저는 틀림없이 희귀한 생물이라 생각하고 우리까지 준비해두었습니다만, 철거시켜야겠군요.”

인간이었다니. 아니 웬 사람이 육로와 해로로는 출입불가능인 개인 소유의 섬에 무단침입 했단 말인가. 동물원으로 연락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드는 젤먼에게 비페르가 말했다.

“그냥 둬.”

“예?”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 내가 보기엔 야생생활이 체질에 딱 맞는 듯하더군.” 

“…….”

노집사는 침착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며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최근 주인님의 마음을 사로잡아 관찰실에 머무르도록 만든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아마도 조난자겠지.

“…어떤 분이십니까?”

“동양인으로 보이더군. 나이는 스물 내외? 못생겼어.”

작고 못생겼다. 수염을 자르니 좀 나아졌지만, 그 전에는 영락없는 원시인이었다. 지금은 깔끔 떠는 원시인. 젤먼은 이해 불가능이라는 뜻이 담긴 낯빛을 애써 억눌렀다. 작은 거야 그렇다 쳐도 생기기도 못생긴 불법침입자를 왜 하루 종일 붙어서 관찰하시는 건지. 마스터의 취향에 대해 불손한 마음이 피어올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귀엽다고 하셨잖아. 못생겼지만 귀여운 건 의외로 많다. 그래, 귀엽게 생긴 걸게야. 아마도 귀여운 맛이 있는 여자겠지. 야생생활을 좋아하는 여자라니,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 특이함 때문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지도 모른다. 일종의… 야생 다큐멘터리를 보는 뭐 그런 거?

“헬기를 통해 보내겠습니다.”

“안 돼.”

“예?”

잠깐 사이에 세 번째 물음이다. 젤먼은 집사로서의 부족함에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나 주인의 의중을 몰라서야… 나도 늙었구나. 상 반납하던지 해야지.

“정원 서쪽으로는 출입을 엄중히 금하도록. 하늘이든 땅이든 바다든 모두.”

“그럼 화장품은-.”

“내가 가지.”

“곧 헬기를-.”

“걸어서.”

“주인님!”

비페르는 조용히 시선을 허공을 향해 돌렸다. 이어 노인의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귓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잔소리 듣는 것도 오랜만이다. 젤먼이 루프스 가에 봉사해온 시간이 비페르의 나이를 훨씬 웃돌다보니 가끔씩은 이렇게 고용인 이상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잔소리를 머릿속에 담아 듣지 않고 무심히 흘려보내며 비페르는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서 되짚어 보았다. 

‘역시 과한가.’

무단가택침입자(섬의 숲은 정원이고 정원은 집의 일부다)일 뿐이건만. 하지만 신경이 쓰인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다. 그나마 봐줄 만한 엉덩이의 색이 변하는 것도 기분 나쁘다. 또한 한 번쯤, 실제로 가까이서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 실제로 보고 싶다. 망원경 렌즈를 통한 것보다 더 귀여운지 아닌지. 스크린 속 영화배우들도 실물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 않던가. 실물을 확인하고 나면 불법침입자의 처분을 결정하기가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지금 가지.”

엉덩이 더 타기 전에. 잔소리 내용에 섞인 바람과는 정반대인 말에 젤먼이 펄쩍 뛰었다.

“위험합니다! 걸어서 가시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경호원도 없이 홀몸으로 숲엘 들어가신다니요!”

“나는 여기 머무는 것으로 쳐 둬. 저택을 빠져나가는 비밀통로가 세 군데 쯤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지만… 숲에 위험한 것이….”

“여우와 토끼와 원시인이 한 마리 있지.”

최상위 포식자가 바닷새 떼인 평화로운 섬이다. 비페르는 불안감에 애타하는 노집사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자꾸 막아서면 비무장으로 나가겠어. 그것만은 봐주시죠. 그럼 당장 준비하게. 진짜 안 되시는데. 이대로 간다? 준비하겠습니다!

비록 정원이라 칭하는 안전한 숲이라고 해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밀림이다. 당연하게도 차 한 대씩을 양어깨에 살포시 얹어드리겠습니다 가격의 슈트는 어울리지 않는다. 서쪽 숲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차 두 대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겠지. 또한 활동성에 있어서도 돈값을 못한다. 밀림은 냉난방 완비의 대저택이 아니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교체를 해야만 한다.

“조심, 또 조심 하셔야합니다. 독사나 독거미나 독충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없어.”

“그 사이 파도 타고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르지요. 인간도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조심하세요.”

당부에 당부를 더하는 노집사를 뒤로 하고 비페르는 만일을 대비한 탈출용 비밀통로 A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오랜만이군.’

그 엉덩이 색깔은 정말로 하얄까. 안 하야면 추방이다.

성무는 식칼을 들었다. 그리곤 잘 다듬은 나무막대의 끝에다 단단히 동여맸다. 식칼 창의 완성이다.

“…낚시가 더 편하긴 한데.”

하루 만에 나타나면 또 뜯길지도 몰라. 오늘 하루는 걸러야지. 새대가리니까 하루면 잊어먹겠지. 아침을 말린 고기 넣고 끓인 죽 비슷한 것으로 때운 성무가 에휴 한숨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애들 사탕이라도 얼른 잡아서 제대로 밥해먹자. 말린 음식은 짜고 딱딱해.

“소금 솔솔 뿌려서 통째로 구워먹어야지~.”

문득 지난번의 거북이가 떠올랐다. 그것 참 맛있었는데. 다음날 발견한 알도 진짜 맛있었다. 프라이도 맛있고 삶아도 맛있고 모래 덮고 구워도 고소하니 꿀맛이었다.

“내일은 바닷가 주위나 파 뒤집어 볼까? 혹시 아냐, 여우가 또 숨겨놨을지.”

그럼 참 고마울 텐데. 맛있는 알. 동글동글 맛있는 새알. 입맛을 쩝쩝 다시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상대적으로 잡기 쉽다곤 해도 애들 사탕 역시 야생동물이다. 포식자의 기척을 느끼면 당연히 숨어든다. 도망치는 속도는 하품 나오게 느렸지만 털색이 보호색이라서 구석에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니 숨기 전에 포착해서 잡아야했다.

‘어디 있을까나, 내 점심밥.’

인간의 언어를 잊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하던 혼잣말도 쑥 감춰 들어갔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드러난 돌이나 뿌리만을 밟는 걸음걸이가 제법 능숙하다. 원시림의 원주민들 사이에 섞어 놓아도 그럭저럭 따라잡을 정도다. 운은 더럽게 나빠도 적응력과 생존력만은 강한 한성무였다. 어쩌면 그쪽에 능력치를 다 몰아넣느라 운이 나쁜 것일지도.

한참을 헤맸지만 잡을 만한 사냥감은 도통 눈에 띄질 않았다. 눈치 빠르게 숨어버렸는지, 아니면 사냥꾼의 서식지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건지. 성무는 잠시 멈춰서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덥다.’

여긴 원래 덥지만 오늘은 유독 더 더웠다. 울창한 수림 덕분에 그늘이 지지 않았더라면 쪄죽었을지도 모른다. 손부채질을 두어 번 한 그가 발길을 돌렸다. 계속해서 숲을 헤맸더니 목이 마르다. 마침 개울이 멀지 않았기에 그리로 향했다. 근처의 유일한 수원이니 가다보면 물 마시러 온 사냥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잇과 짐승처럼 소리 없이 발을 옮겼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무성한 덤불 너머서 들려왔다. 폴짝 뛰어가려던 성무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

시야를 가리는 축 늘어진 나뭇가지의 잎사귀 사이로 뭔가 큼직한 것이 어른거렸다. 뭔지 몰라도 크다. 아래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위쪽의 높이는 자신의 키보다 더 컸다. 일순 소름이 등골을 달리고 털이 바싹 섰다. 여기 무슨 곰 같은 것도 살고 있는 거 아냐? 그래서 작은 동물들이 죄다 도망쳤다거나…….

‘서, 설마…….’

성무는 창을 꽉 틀어쥐었다. 하지만 너무 크다. 저렇게 큰 생물은 여기선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길쭉하니 어슬렁거리는 모양새가… 암만 봐도 두 발로 우뚝 선 곰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덤으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아버지, 살려주세요. 도망쳐야 하나. 이대로 도망쳐야 할까. 하지만 진짜 곰이라면 이미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성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전에 얼핏 듣기론 육식동물은 도망치는 상대를 따라가는 습성이 있다고 그랬어. 동네 아저씨가 요새 산에서 멧돼지가 많이 내려온다면서 마주치면 어떡하라고 그랬더라…. 맞아, 천천히 걸어서 피하거나 몸집을 크게 보이게 만들어서 놀래키라고 했었지! 천천히 물러서서 도망치느냐, 버럭 소리치며 덤벼들어 쫓아내느냐. 마음 같아선 전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갈 곳이 없어!’

근처에서 마실 물 있는 곳은 여기뿐인데! 집도 번듯이 다 마련해 놓았는데! 야생동물에겐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쫓겨나게 된다면 이 근처는 저 곰 추정 동물의 영역이 된다는 뜻이다. 기껏 잡은 나의 삶의 터전을 잃을 수는 없다. 성무는 굳게 결심했다. 여기서 도망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곰한테 물려죽나 쫓겨나 배회하다 말라죽나 그게 그거다. 차라리 당당하게, 남자답게 싸워서 끝을 보자!

“우워으아아!!!”

고래고래 소리치며 수풀 사이로 뛰쳐나갔다. 이놈의 곰! 이놈의 곰 새끼! 정정당당하게 일대 일로…

“으…어어……?”

어어…? 성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곰이 아니다. 저건 곰이 아니라, 곰이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생물체인데……. 그때 개울 건너편에 서있던 낯익은 형태의 생물체가 입을 열었다.

“&%%$%&@#%.”

외국어다. 고등학교를 우수하지 못한 성적으로 졸업한 성무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미지의 언어였다. 헬로우나 하이 정도라면 모를까. 아니, 그것도 본토 발음으로 굴리면 못 알아들을 확률이 70%쯤 된다. 성무는 잔뜩 당황한 채 뒷걸음질 쳤다.

“무….”

외국인. 금발 청회색 눈의 외국인. 어정쩡하게 창을 든 채 또다시 한 발 물러섰다. 뭐, 뭐…

“무라카노!”

놀란 나머지 혀가 꼬인, 이상한 소리를 외치고 꼬리에 불붙은 토끼마냥 달리기 시작했다. 튀자, 튀자, 튀자, 한걸음이라도 더 튀자꾸나. 한 발만 더 튀어보자꾸나. 숨에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고 또 뛰었다. 더 이상 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멈추었다. 발바닥의 아픔이 그제야 뇌리를 찔렀다. 여기저기 나뭇가지에 스치고 긁힌 상처들도 따끔따끔 저 다쳤다고 비명을 질러댄다. 성무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뺨을 누르고 비볐다. 

“바, 바, 방…금…….”

인간이다. 외국인 남자였다. 여기, 무인도 아니었어? 섬은 확실한 섬이다. 그것만은 이 발로 직접 걸어서 확인했다. 그럼 여기 원주민? 아냐. 그것도 아니다. 백인이었잖아. 금발이고, 번듯하게 옷 차려 입고.

“외국…인…….”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영언가? 한 손에는 묵직한 물건이 든 가방이, 다른 한 손에는 풀즙 든 정글도가 쥐어져 있었다. 허리춤에 총 같은 것도 보였고…. 

“…여행…왔나……?”

어쩌면 모험가나, 탐험가나, 생물학자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 여긴 무인도니까. 처음 보는 생물 같은 걸 찾으러 왔을지도 몰라. 생각을 정리하며 숨을 가다듬다가 놀란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헉!”

반사적으로 손이 앞을 가린다. 알몸이다. 홀딱 벗고 있었다.

“으아아악!!”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홀딱 벗고! 으아, 젠장! 대체 날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나마 여자가 아닌, 같은 남자라서 천만다행이다. 여자였다면 성희롱 변태로 양쪽 뺨 쫙쫙 맞고 고소당해 경찰서 감방을 향해 직진 당했을 것이다. 새빨개진 얼굴을 근처 나무에 몇 번 박던 성무가 고개를 들었다.

“……가…볼까…?”

일단 커다란 나뭇잎 하나 따서 아래부터 가렸다. 가보자. 비록 말 안 통하는 외국인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가슴이 두근 뛰었다.

“……사람이다….”

헬로우 정도는 할 줄 아는데. 도와달라는 영어가 뭐였더라. 뭔 미…였는데…… 텔미? 고졸로 막일에만 열심히 매달려 살았더니 기억나는 단어가 없다. 학창시절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 올리며 성무는 도망쳐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헤, 헬로…우…?”

들리는 대로 한글로 적어놓고 그걸 따라 읽는 듯한 발음이다. 실제로 학창 시절에 종종 써먹었던 방법이다. 성무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아직은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한 장 뜯어 앞만 가렸던 나뭇잎은 어느새 두 장이 되었다. 엉덩이도 가려야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앞뒤 가리느라 손이 모자라 창은 겨드랑이에 끼운 채 조금 전 도망쳤던 자리에 도착했다.

“저기…요……?”

조용하다.

“누, 누구 없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낯선 물체가 포착되었다. 물을 첨벙첨벙 건너며 얼른 다가가자 큼직한 통 두 개가 바위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일반적인 화장품이나 샴푸, 린스 통보다 훨씬 크다. 업소용인가? 성무는 허리를 숙여 살펴보았다. 통의 겉면에 무늬 같은 것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특이한 디자인이다. 자세히 보니 영어도 있고 한자도 있고…

“어? 한글이다!”

우와, 엄청 오랜만! 성무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그리웠던 한글을 읽었다.

“바디 로션. 얼굴과 온몸에 골고루 바를 것. 로션?”

이어 그 옆의 통에서도 한글을 찾아냈다.

“엉덩이 로션. 엉덩이에 수시로 가득 바를 것. 엉덩이 전용 로션도 있었구나.”

과연 세상에는 별의 별게 다 있다. 제 손으로 화장품을 사 본 기억이 없는 성무는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로션 주인은 어딜 갔지? 물건을 놔두고 갔으니까 곧 오겠지?”

자기 물건 놔두고 멀리 갔을 리가 없다. 이렇게 커다란 거니까 깜박 잊은 것도 아니겠지. 성무는 로션이 놓인 바위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창도 발치에다 내려놓았다.

“…한국인이면 좋았을 텐데.”

하필 외국인이람. 간단한 기초 회화도 안 되는데. A, B, C, D, E, F……. 제 2 외국어 선택과목은 불어였지만 그것 역시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알파벳이 에이, 비, 씨, 디가 아니라 아, 베, 세, 데 였던 건 생각나는데. 으, 아흑? 그래도 만국 공통 보디랭귀지가 있으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가슴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나-는.”

손으로 파도치는 물결모양을 만들어 내고는 허공에 배 모양을 그려냈다.

“뿌우- 뿌- 배! 낚시하는 배!”

낚싯대를 휙 던졌다가, 다시 휙 거두는 모션. 이어서 마구 허둥지둥하다가 풀쩍 제자리에서 뛰며 몸을 낮추었다.

“첨~벙! 어푸어푸!”

허공에서 팔을 휘적대며 헤엄치는 흉내를 낸 성무는 마지막으로 발치, 이 섬을 가리켰다.

“그래서 여기에 조난당했다! 라고 하면 대충 알아듣겠지?”

눈치가 아주 꽝이지 않는 이상 알아들을 것이다. 멋대로 판단하고 예행연습까지 끝낸 성무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슬슬 돌아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안 오나. 안 오나. 안 오…나?

“음… 혹시 길이라도 잃어버린 거 아냐? 섬은 별로 안 크지만 숲은 무지 울창해서……. 나뭇잎 땜에 하늘도 잘 안보이니 방향 잃고 헤매기 쉬운데.”

경험도 있다. 그래서 되도록 멀리까지 나가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근처에 불이라도 피워서 연기라도 낼까? 성무는 안절부절 못하며 바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왜 안 오지. 이거 찾아가야 하잖아. 로션 통을 툭툭 건드려도 보았다. 양 엄청 많네. 틀림없이 업소용으로 저렴히 나온 대용량 로션일거야. 덩치가 큰 만큼 무게도 만만찮았기에 뚜껑은 펌프식이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엉덩이 로션을 슬쩍 펌핑했다. 이렇게 많으니까 조금 써도 모를 거야. 하얀색 로션을 손에다 덜어 엉덩이에 찰싹찰싹 발랐다. 그러곤 또 잠시간 주위를 배회한다.

“……늦네.”

진짜 길 잃어버렸나? 심심하기도 해서 이번에는 바디 로션을 치덕치덕 발랐다. 팔에 길게 바르다가 흠칫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냄새 때문에 들키는 거 아냐? 이것도 도둑질인데……. 으음, 씻어 낼까?”

남의 로션 멋대로 썼다고 화내면 어쩌지. 잠시간 발을 동동 구르면서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 걱정의 대상은 도무지 나타날 줄을 몰랐다. 이제는 화내도 좋으니까 나타만 나줬으면 좋겠다. 성무는 또다시 바위 주위를 배회했다.

“왜…….”

왜 안 오는 걸까. 이거 필요 없나? 애꿎은 로션 통을 툭툭 쳤다. 안 오면 이거 나 한다? 나 할 거야? 커다란 로션 통을 하나는 오른 팔, 하나는 왼 팔에 껴안아들었다. 진짜 가져가버린다?

“저기요! 이거 안 가지고 가요?!”

조용하다. 물소리만 흐른다. 성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의 머릿속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비집고 올라와 채워간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 봤잖아. 사람 있는 거 봤잖아. 이렇게, 분실물도 있는데. 아닐 거야.

“저기요! 이, 이거, 놔두고 갔는데!!”

푸드득- 더욱 커진 외침에 놀랐는지 새가 날아오른다. 하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여전히 조용하다. 성무가 비틀, 숲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놔, 놔두고, 갔는데… 이거 안 챙겨가요?! 저기요!”

개울을 떠나 무작정 걸어갔다. 이거 놔두고 갔는데, 놔두고 갔는데……. 중얼중얼 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아니야, 이거 놔두고 갔는데,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다. 갔을 리가 없다. 그냥 갔을 리가……. 사, 사람도 있는데…….

“여, 여기-.”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렸다. 몸이 크게 비틀거리다 털푸덕 넘어졌다. 얼른 일어섰다. 

“여, 여기… 사람 있는데…….”

나 있는데…. 넘어지면서 흙에 긁힌 무릎이 아파왔지만 개의치 않고 걸었다. 점차 속도가 빨라진다.

“여기, 여기 사람 있어요!! 나 있는데, 조난자 있는데!!!”

푸드덕, 푸드덕- 날갯짓 소리만 요란하다. 양 팔에 로션 통을 꽉 끌어안은 채 성무는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헤매고 다녔다. 아니야, 그냥 갔을 리가 없어. 나 봤잖아. 눈이 마주쳤다고.

“사람 있어요! 사람 있다고!!”

이름 모를 새소리와 벌레소리가 간절한 외침에 뚝 끊겼다가 다시금 이어진다. 문득 우뚝 멈춰 섰다.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았다. 어딜 보나 나무다. 무성하게 그늘이 져 캄캄하다.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혼자다. 아무도 없다.

“흐으…….”

나 여기 있는데. 사람 있는데. 무게감도 모른 채 로션 통을 끌어안고 있던 팔이 돌연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도 마찬가지다. 몸도, 입술도, 심장도 마찬가지다. 떨렸다.

“사, 사람…흐끅… 사람, 있는데…….”

그냥 가버렸다. 놔두고 그냥 가버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어어… 어엉… 나, 나, 집에……. 흐윽.”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 갈 집 같은 거 없다. 돌아 가 봐야 어차피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지만… 여기는 더 아무것도 없다. 양팔이 가득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코를 훌쩍거렸다.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혼자 있단 말이야아!!”

푸드득, 새만 날았다.

먹구름이 우르르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먼 물이 든 하늘에서 빗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투둑, 잎사귀 위로 내려앉았다가 매끄러운 면을 따라 데굴데굴 다시 뚝- 더욱 더 아래를 향한다. 여기저기서 톡, 툭, 뚝, 똑, 주륵- 리듬을 타는 듯하더니 이내 쏴아아 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안개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히끅… 흑…….”

세찬 빗소리에 작은 훌쩍임이 파묻힌다. 성무는 잎새 두툼한 나무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품에는 여전히 커다란 로션 통 두 개가 꼭 끌어 안겨진 채다.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도 되는 양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다. 

“엄마…….”

나 엄마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외롭다. 진짜로 외롭다. 여태까지 어떻게 버텨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뼈에 사무치게 외롭다. 여긴 아무도 없어. 나 혼자야. 

“흐…으…… 끄흑…….”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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