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무는 단벌 신사다. 이것은 비유가 아닌 사실이다. 그가 지니고 있던 몇 안 되는 옷들은 모두 마XX수 호의 묵직한 쇳덩어리 선체와 함께 바다 깊숙이 수장되고 말았다. 셔츠며 바지에 양말은 물론이요 속옷까지 모조리, 몽땅. 때문에 성무 씨는 너덜너덜한 바지도 한 벌이요 늘어난 셔츠도 한 벌이요 꼬질꼬질한 팬티도 달랑 한 벌뿐이다. 진짜 원시인도 가죽 팬티는 두 벌 이상 있었을 텐데. 갈아는 입어야 했을 테니까.
그런고로, 한성무의 목욕은 세탁과도 동일했다.
섬에서 발견한 식수원은 제법 큼직한 개울이었다. 그거 말고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울을 발견한 것으로 만족한 성무는 탐색을 중지했다. 살아 온 인생이 가난하다보니 과한 욕심은 부릴 줄을 모르는 그였다. 그냥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걸로 충분했다. 때문에 행동반경도 집과 낚시터, 개울가가 전부였다. 사냥감을 쫓아 좀 더 멀리 나갈 때도 간혹 있었지만 섬의 동쪽 부근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고국에서든 이름 모를 외딴 섬에서든 소박한 삶이었다.
아무튼 지금 성무는 그 개울로 향하고 있었다. 막 낚시를 했는지 물고기도 큼직한 거 두 마리 짊어진 채다. 개울로 가는 김에 내장이랑 뼈 제거하고 잘 씻어서 말린 어포로 만들 생각이었다. 요새는 먹고사는데 풍족하니 만일을 대비한 식량저축에 힘을 쓰는 중인 것이다.
“옷까진 무리라도 팬티 한 장 쯤은 가방에 넣어 놓을걸.”
세일 할 때 큰맘 먹고 무려 이만 원-각각 이만 원이다!-이나 주고 산 티와 청바지에 비해서 여섯 장에 만원 주고 산 팬티의 내구성은 현저히 낮았다. 최대한 조심조심해서 입었지만, 빨 때도 건드리면 날아갈까 살살 빨았지만 벌써 구멍이 세 개나 나버렸다.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까. 머잖아 노팬티 신세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상에 성무의 얼굴이 어두침침해졌다. 등골 빠지게 절약생활을 해왔어도 문명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모양새는 갖추고 살아왔는데….
“노팬티는 안 되지, 노팬티는.”
더욱 더 살살 빨아야겠다. 실과 바늘이 있으니 수선도 해가면서 최대한 오래 입어야지. 그리고… 마지막 날이 온다면 팬티의 사체로부터 고무줄을 빼내어 티셔츠를 팬티로 개조해서 입을 테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팬티는 헤져 고무줄을 남긴다. 노팬티 보다야 상반신 누출이 백배는 더 인간적이다.
“아아, 팬티. 네 존재의 소중함을 나는 이제사 깨달았다. 만원에 한…장은 심했고, 오천 원에 한 장짜리 사 입을걸. 그럼 십년은 더 버텼을 터인데. 왜 나는 팬티 한 장 더 집어 들지 못했을까. 이놈의 바다야, 삼켜버린 내 팬티 내놔라아아. 배 타기 직전 새로 산 만원에 다섯 장 세트 팬티! 아직 입어보지도 못한 그 팬티! 이 팬티보다 무려 삼백삼십삼 원이나 더 비싼 팬티! 아까워서 만원에 여섯 장 팬티 다 낡고 나면 입으려고 모셔뒀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거 입을 걸, 아이고 아까워라아아!”
삼백삼십삼 쩜 삼삼삼삼…… 원이나 더 비싼 팬티는 수몰되고야 말았다. 성무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쳤다. 아끼면 똥 된다더니 그 말이 정답이다. 이제부턴 안 아껴야지. …덜 아껴야지.
성무의 집에서부터 개울까지는 희미한 길이 나있었다. 씻기도 하고 물도 퍼 나르느라 적어도 이삼일에 한 번은 개울엘 가야만했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길이 난 것이다. 오솔길이라고 하면 오솔길이 화내다 못해 고소할 정도로 허접했지만 그래도 길은 길이다. 그 길의 끝에 다다른 성무가 어깨를 활짝 폈다.
“자, 그럼 빨래부터 할까나.”
개울은 도약까지 해야지만 아슬아슬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깊이는 고만고만했지만 제일 깊은 곳이 정강이까지는 차올랐다. 비 좀 오면 무릎까지도 올라왔다. 성무는 우선 개울 가 넓적한 바위 위에 생선을 내려놓았다. 꾸물꾸물 상의 벗어 내려놓고 바지도 벗어 내려놓는다. 마지막으로 소중한 팬티를 조심스럽게 벗었다. 훤한 햇빛아래에 알몸이 덩그러니 드러났다. 어깨랑 허벅지까지는 볕에 탄 갈색이지만 몸뚱이는 허옇다. 팔다리와 대비되어 더욱 허옇게 보였다. 특히나 소중한 팬티에 잘 보호된 둥그런 엉덩이는 백인 뺨치게 새하얗다. 운동량이 많아서인지 탱탱하기도 참 탱글탱글했다. 팔다리는 되게 선탠이요, 몸뚱이는 고운 황인종이요, 둔부는 탱탱한 백인인 성무는 두 손으로 팬티를 경견하게 들고서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살살살, 팬티를 빨기 시작했다. 마치 한 번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작품을 깎아내고 있는 조각가처럼.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힌 얼굴을 한 채 세심하고도 조심스럽게 팬티를 빨았다.
“휴우, 좋아! 멀쩡해!”
드디어 세탁이 끝났다! 성무는 새하얘진 팬티를 높이 들어 올리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젖은 팬티에 대롱거리는 물방울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반짝반짝반짝반짝. 팬티가 반짝반짝.
“자, 너는 여기에 얌전히 있고.”
성무는 바위 위 햇볕이 가장 잘 비쳐드는 자리에 팬티를 고이 뉘였다. 다음으로 원래는 평범하게 길었지만 이제는 핫팬츠가 된 청바지와 몸에 적당히 맞는 긴팔이었지만 이제는 헐렁한 나시티가 된 셔츠를 동시에 들고선 다시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셔츠는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청바지는 아직 튼튼하다. 덕분에 팬티와는 달리 손에 힘줄 살짝 세워서 벅벅 빨았다. 찰랑이는 물소리와 함께 몸도 흔들흔들, 엉덩이도 흔들흔들 들썩거린다.
“한~강~수우야~ 깊고 널브은 무우우울에!”
성무가 흥얼거렸다. 그는 아는 노래가 몇 없었다. 최신 유행가요 같은 건 거의 몰랐다. 치마만 둘렀다하면 열광하기 마련인 군 시절에도 여가수 이름 하나 알지 못했다. 고자인 건 아니고, 말년 때도 남일 도와주고 돈벌이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노래라고는 아직 여유로웠던 학창시절 유행했던 몇 곡과 교과서에 수록 된 노래, 수십 번 반복재생으로 들었던 어촌 동네 어르신들의 애창곡들뿐이었다. 아, 동요도 좀 안다.
잘 부른다고 말하기에는 양심이 제법 찔려오는 솜씨의 노래가 끝나갈 즈음 빨래도 함께 끝이 났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바위에 나란히 널어놓은 그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생선 두 마리를 쳐다보았다. 역시 손질은 몸부터 씻고 나서 하는 게 좋겠지. 생선 내장범벅에 비린내가 진동하는 냇가에서 몸 씻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성무는 몸을 돌려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봤자 정강이 근처였지만. 다리의 반의반만 물에 담근 채 그는 열심히 몸에 물 칠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물새가 무심코 부딪칠 높디높은 관찰실의 열두 대 천체망원경은 그 사이 위치를 조금 달리하고 있었다. 여섯 대는 본래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여섯 대는 옛 자리를 이탈해 서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각각이 바닷가며 낚시터, 기타 나무가 덜 무성해 살펴보는 것이 가능한 곳을 향해 렌즈를 부라리고 있었다. 덧붙여서 그 부리부리한 고가의 렌즈가 담아내는 장면은 고스란히 망원경 각각과 연결 된 모니터에 비춰지고 있었다. 그 모양새를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돈처발랐다.
천 단위는 가볍게 넘어서서 억 단위를 돌파 한 설비의 주인은 그 중 한 망원경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서쪽의 울창한 숲 가운데 나무가 거의 없는 지점, 바로 개울이 흐르는 곳이다. 흐르는 물 위에 나무가 자리 잡기도 힘들고 근처에 큼직한 바위도 많아 하늘이 훤히 뚫려있는 곳이었다. 즉, 관찰하기 참 편하고 좋다.
뛰어난 성능을 지닌 천체망원경은 태어날 적 지닌 임무인 천체관측도, 주인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인 야생동물 관찰도 아닌 웬 벌거숭이 남정네를 또렷하게 비춰내고 있었다. 머리털 수염 거시기털 빼고는 매끄러운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 개인정원 무단침입 및 무단취식자 한성무 씨는 물 튀겨가며 제 몸을 벅벅 닦아내는 중이었다. 때수건 대신 꺼끌꺼끌한 나뭇잎 한 장 뜯어다가 구석구석 닦아낸다. 팔도 닦고 가슴도 닦고 등도 닦고 엉덩이도 닦고 거시기도 닦고. 그 적나라한 모습을 훔쳐보던 비페르의 입가에 죄책감이라곤 한 점 없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비록 도촬중이긴 하나 저긴 그의 정원이다. 자기 정원 자기가 지켜보고 녹화한다는데 무슨 잘못이 있으랴. 무단침입해 먹고 자고 씻는 놈이 잘못이지.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숫총각 목욕하는 거 훔쳐보던 비페르 씨가 짧은 감상을 입에 담았다.
“귀엽군.”
특히 엉덩이를 들썩들썩 흔드는 모양새가 귀엽다. 다른 데는 시꺼멓고 누르팅팅한 것이 유독 조 쌍 둔덕만은 허옇다. 동그랗고 탱탱하니 불쑥 튀어나온 주제에 혼자만 새하야니 시선을 주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절로 빤히 쳐다보게 된다.
귀여운 엉덩이.
얼굴은 솔직히 못생겼다. 주관적으로 보자면 평범하고 얌전하게 생겨먹었지만 비페르의 눈은 높았다. 가족이며 친척, 친구 등 주위에 보는 이들이 죄다 천연미인, 아니면 성형미인인 탓이다. 때문에 그의 눈에 비치는 한성무는 작고 못생기고 누르팅팅 시꺼먼데 엉덩이만 하야니 귀여운 원시인이었다. 뭐, 하는 짓도 보고 있자면 제법 귀엽기는 했다.
그때 목욕하던 야생인이 돌연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알몸으로 허우적대다가 욕정이라도 생겼는지 제 거시기를 덥석 손에 쥐는 것이 아닌가. 조물조물 대는 것이 단순히 때 빼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
비페르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자도 아닌 같은 남자의 자위를 훔쳐보는 취미는 당연히 없을뿐더러 아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볼 만 했다. 인상 팍 쓰고 낑낑거리는 것이 살짝…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렌즈 너머 저 멀리 손에 감싸 쥔 그것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대충 크기를 가늠한 비페르가 중얼거렸다.
“작군.”
동양인 평균크기는 됩니다. 남성으로서 눈물 나다 못해 자살충동이 드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성무는 열심히 손을 놀린 끝에 드디어 허연 액을 배출하는데 성공했다.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거시기의 모습에 픽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성무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정말로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덧붙여서 이 광경은 전부, 모조리 녹화되고 있었다. 3D로도 관람 가능하다.
“후아아아- 진짜 오랜만이었다.”
흐르는 물에서다 슬렁슬렁 손을 씻으며 성무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리 보는 사람 하나 없는 무인도라지만 대낮에 야외에서 자위를 하자니 쪽팔리긴 쪽팔렸다.
“…흠, 흠.”
하지만 오랜만이다 보니까… 좋긴 좋았다. 아직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 본 숫총각이지만 성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창때인데다가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신선한 영양식을 섭취하다보니 오히려 전보다 더 왕성해졌다. 슬프게도 상대는 오른손뿐이었지만. 사귀기 직전까지 갔었던 횟집 외동딸이 새삼 그리워졌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한 일이년 후에는 결혼도 하고 총각딱지도 뗄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망할 아버지. 욕 안 할라고 해도 입술까지 비집고 올라온다.
“앞으로 평생 오른손이랑 살아야하는 걸까…….”
이곳 생활이 편하기는 하다만 옆구리가 시리다. 그렇다고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리 잡은 무인도를 탈출 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야 한국 돌아가 봐야 노숙자밖에 더될까. 노숙자가 되어 공원을 전전하다 겨울에 얼어 죽느냐, 등 따시고 배부른 무인도에서 외롭게 일생을 보내느냐. 그나마 후자가 조금 더 낫다. 노숙자랑 결혼해줄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무는 쪼그라든 성기를 물로 씻어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내 팔자야…….
“…응?”
그때 푸득푸득 날갯짓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바닷가에서나 보이던 물새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꺾은 채 성무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저놈들이 왜 여기까지 왔지? 여기 뭐 주워 먹을 거 있… 앗!!”
있다! 내 생선! 성무는 화들짝 바위를 향해 목을 돌렸다. 이미 커다란 바닷새 몇 마리가 내려앉은 뒤였다. 생선이 파닥파닥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다가 육지에 끌어올려지더니 이제는 하늘구경까지 하게 된 육해공 모조리 섭렵한 생선이다. 성무는 재빠르게 도망치는 물새를 뒤쫓아 가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 개새야!! 그렇게 처먹고도 또 빼앗아가냐! 두고 봐! 앞으론 국물도 없어어억!!”
암만 소리치고 양손을 휘두르며 펄쩍펄쩍 뛰어봤자 날아가는 새를 어찌 쫓으리. 성무는 열 받쳐 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래, 까짓 생선 두 마리. 잡는데 십분도 안 걸린다 이거야. 오늘 잡은 것 중에 제일 큰놈들이긴 했지만…… 어제도 이만큼 큰 것은 못 잡았지만…… 이번 주, 아니 요 한 달 사이 가장 대어이긴 했지만…… 크다고 맛있는 건 아니다!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개울로 돌아 온 그의 눈에 경천동지할 광경이 콱 들이박혔다. 아직 남아있던 물새들. 그 개새들이…….
“머, 머, 머, 멈춰어어어!!”
-끼룩?
새 두 마리가 경기를 일으키는 인간 남자 1인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 그 부리에는 각각 한때 티셔츠라 불리었던 천 조각이 하나씩 물려져 있다. 생선냄새가 배인 탓에 먹이로 착각한 모양이다. 역시 새대가리다. 다른 새 한 마리가 급히 청바지의 일부분을 물고 달아난다. 그리고…… 팬티. 성스러운 팬티를 자랑스럽게 물고 있는 하얀 바닷새 한 마리. 성무의 눈이 뒤집혔다. 팬티. 내 팬티.
“패, 팬티는 안 된다! 팬티는 안 된다, 이 썅놈의 새새키들아아아!!!”
성무의 처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팬티는 훨훨 하늘 높이 멀어져갔다. 아아, 내 팬티가 날아가고 있어. 여섯 장 만원 주고 산 내 팬티가……. 팬티를 뒤쫓아 달리다가 돌에 걸려 쓰러진 성무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바닷새 노란 부리 콱 깨물려 야속한 파란하늘 위로 훨훨 날아갔습니다. 아으아으아흐흑 아으 동동다리…….
이 즈음에 망원경 붙잡고 숨넘어가시는 분 한 분 계시겠다.
일곱 번 넘어져도 일곱 번 일어나고 다시 한 번 더 넘어지는 우리의 성무는 벌떡 일어나 팔뚝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래, 고작 팬티 한 장에 질쏘냐. 기껏해야 만원에 여섯 장, 장당 천칠백 원도 안 되는 팬티다. 오천만 원도 하루아침에 날려먹은 이 몸에게 그깟, 그, 그까…앗…… 팬티 한 장 쯤이야!! 무려 오천만 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던 몸이라고! 그깟 팬티 삼만 장이나 살 수 있는 돈도 순식간에 날려먹었건만 고작 팬티 한 장가지고 눈물을 보일쏘냐!
“……크흑….”
뭔가 더 슬퍼졌다. 성무는 잠깐 더 훌쩍거렸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마음먹어도 이놈의 팔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덤으로 뒤통수도 죄다 까질 팔자다. 하늘 너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야. 너한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거든? ……조금 전에 손장난 좀 한 거 빼고. 투덜투덜 거리며 애꿎은 하늘을 향해 삿대질 하던 성무는 이내 맥이 빠져 흙 묻은 무릎을 탈탈 털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날아간다. 돈도 날고 팬티도 날고 덤으로 아버지도 건넛집 아줌마랑 날랐다.
성무는 터덜터덜 개울 속으로 발을 담갔다. 물에 젖은 채로 뛰어다니고 넘어지고 구르고 하다 보니 온몸이 흙투성이다.
“그래, 비록 천쪼가리 하나 없는 알몸 신세지만-.”
새들이 뜯다 남은 천 조각 하나가 팔랑팔랑 날아들었다. 성무는 말을 멈추고 그것을 콱 틀어쥐었다.
“…천쪼가리 하나 남은 알몸 신세지만 대체 할 건 얼마든지 있다고! 나뭇잎, 풀잎, 꽃잎, 거북이 등딱지, 가죽! 그래, 가죽!”
맞다, 가죽! 성무는 제 뒤통수를 제 손으로 퍽 내려쳤다. 섬에 자리 잡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여태껏 생각질 못했을까. 사람은 위기에 닥쳐서야 제 능력을 발휘한다더니 드디어 머리가 좀 돌아가려는 모양이다. 성무는 훗, 하고 제 딴에는 시크하게 웃었다.
“천연 가죽을 걸치게 된다 이거지. 우와, 럭셔리하다. 인조가죽 옷도 못 입어봤는데.”
언제 울었냐는 듯 절로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나왔다. 가죽도 그냥 가죽이 아니다. 모피다. 부잣집 마나님이나 걸치신다는 바로 그 모피. 성무의 두 뺨이 살짝이 상기되었다. 내, 내가 그런 걸 입어도 괜찮은 걸까? 천연 모피 팬티라니,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장 당 삼천 원짜리가 제일 비싼 팬티였는데…… 천연 모피 팬티라면 대체 얼말까. 한… 오만 원? 십만 원?
“시, 시, 십…만 원짜리…… 팬티!”
상상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렸다. 우와, 세상에. 팬티에 십만 원이나 쓰다니. 십만 원이면 자장면이 대체 몇 그릇이냐. 성무는 양 팔을 크게 벌려 들어 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축복하듯 맑고 화창한- 팬티가 사라진 하늘.
“세상은… 살만하구나.”
비온 뒤에 땅 굳는다더니 비극의 팬티 도난사건 직후 럭셔리 모피 가죽팬티를 입게 되다니. 단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전대 팬티가 고무줄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고무줄 없는 팬티라니. 앙꼬 없는 찐빵이요 김치 없는 라면이다. 기호에 따라서는 치즈나 파, 만두, 드물게 방아 등. 상추나 깻잎을 곁들여 먹는 것도 꽤 괜찮다. 아무튼 결론은 최소한 노팬티 신세는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무는 다시금 히죽거리며 무사히 보호받게 된 제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엉덩이의 색이 다른 곳과 상당히 다른 것을 발견했다. 앞쪽은 그래도 누런 살빛인데 뒤쪽이 좀 많이 하얗다. 그나마 엉덩이 위쪽 피부는 옷에 가려져 흰 편인데 아래쪽 허벅지는 식빵 껍질 색으로 노릇노릇 잘 구워졌다보니 아주 따로 놀고 있다. 꼭 누가 엉덩이 두 짝에 흰 페인트칠이라도 쫙 해놓은 모양새다.
“헐….”
뒤쪽에 붙은 궁둥짝 자세히 들여다 볼일 없다보니 까맣게 몰랐다. 이놈이 왜 이리 허얘. 성무는 내친 김에 물살이 좀 여린 곳으로 가 제 몸을 수면에 비춰보았다.
“사, 삼색이잖아!”
몸이 삼색이다. 머리랑 거시기 털까지 포함하면 사색이다. 검은색 진갈색 누런색 허연색. 컬러풀한 육체였다. 팔, 다리, 몸뚱이, 엉덩이가 따로 놀고 있다.
“……심하다.”
컬러풀 三色 몸뚱어리. 털까지 치면 무려 四色. 백인부터 흑인까지 모조~리 커버합니다. 성무는 급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아니다. 마치 진갈색 몸에 황색 셔츠와 핫팬츠를 입고 그 위에다 엉덩이에 딱 맞는 흰 팬티를 덧입은 것 같지 않는가. 슈퍼맨이냐.
“누드냐 삼색이냐.”
그가 고민했다. 벌거숭이로 돌아다니는 것도 쪽팔리지만 삼색도 쪽팔린다. 특히나 엉덩이가 너무 희다. 원숭이의 새빨간 엉덩이처럼 너무나도 티 나는 순백의 궁둥이다. 순결한 첫눈과 같은 엉덩이. 실제로도 유아기 때 외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순결체다.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성무는 근처를 뒹구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제법 굵직한, 몽둥이 급의 막대다. 그것을 제 앞에 똑바로 세웠다.
“오른쪽이면 팬티, 왼쪽이면 선탠.”
그냥 흰 엉덩이 가리고 사느냐,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몸의 색상을 일통하느냐. 그는 신중하게 막대의 끝을 붙잡은 손을 뗐다. 자, 어느 쪽-
“으악!”
쾅-. 몽둥이 급 막대가 쓰러졌다. 뒤로. 즉 성무의 보호막이라곤 검은 수풀뿐인 거시기를 향해. 아슬아슬하게 피해 고자 되는 건 면했지만 몽둥이 끝에 발등 찍힌 성무가 잠시 발을 부여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믿는 몽둥이에 발등 찍힌다더니!
“으아아, 젠장! 보통은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고 운이 없어도 앞으로 넘어지더니 왜 나는 뒤야! 나만 미워해!”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까진 발등을 호호 불고 침까지 바른 성무가 쓰러진 나뭇가지인 척하는 몽둥이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정중앙이었지만 살짝 왼쪽으로 가있다. 선택은 선탠.
“으음… 좀 부끄럽긴 한데.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 생각해보면 이 섬에서 팬티 입고 사는 존재는 자신이 유일하다. 다들 제 몸에서 난 가죽이며 비늘이 전부다. 성무는 허연 엉덩이를 툭툭 쳤다.
“몸 색깔 일통 될 때까지만 참자, 내 엉덩이랑 거시기. 선탠 다 끝나면 팬티 정도는 입어야지.”
특히나 앞부분은 소중하니까. 비록 쓸 일은 없다지면 거시기의 건강은 문명인을 떠나서 인간이라는 종의 수컷으로서의 증거이자 자존심이다. 튼튼하게 지켜야한다.
어쨌거나 결론은 났다. 성무는 하늘을 향해, 이제는 보이지 않는 개새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살포시 들어주곤 저벅저벅 몸을 돌렸다. 다리 사이로 훤히 드러난 불알이 걸음을 따라 흔들거렸다.
3년에 한 번마다 열리는 135년 전통의 세계집사대회(WB, 은행그룹 아님 서쪽은행 아님 워너브라더스 아님) 4회 연속 챔피언이자 11회 수상경력을 지닌 교과서적으로 모범적인 집사 젤먼 씨는 최근 주인님의 스케줄 표를 재 작성했다. 그의 마스터는 규칙적인 일상을 고수하는 편이었다. 거대 가문의 주인이자 유명재벌인지라 평소생활은 규칙적 일래야 규칙적 이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처럼 휴식의 시간에는 거의 항상 일정에 맞추어 행동했다. 때문에 젤먼은 각 별장마다 각각의 스케줄 표를 수첩과 노트북과 아이패드와 휴대폰과 USB디스크와 웹하드에 저장해두었다. 언제 어느 별장을 가든 검색 하나로 스케줄 표가 튀어나오는 편리한 세상. 하지만 지금은 그 정해진 스케줄 표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오전 일곱 시 부터 오후 일곱 시 까지 관찰실…….”
심플하다. 터치스크린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는 노집사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의 주인은 무려 열두 시간을 관찰실에서만 보내고 있었다. 해 뜨고부터 해 질 때까지다. 깨어나 아침 먹고 올라가고 내려와 저녁 먹고 일처리를 끝낸 뒤 잠자리에 든다. 점심이나 간식 등은 필요할 때 호출해왔다.
“…규칙적인 일상이긴 하시지만.”
모처럼 시간이 나 휴가를 왔건만 방콕이라니. 아아, 주인님 얼굴 뵙기가 힘들어. 정체모를 생물 A가 그렇게나 좋으십니까. 정해진 일과를 무너뜨리고 주인님의 시간을 온통 빼앗아간 정체모를 생물 A가 밉기도 했지만 젤먼은 모범적이며 뛰어난 집사다. 그가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연락했다.
“포획망은 준비완료 되었나?”
[예. 덫과 우리, 이동장은 내일 오전 중으로 헬기를 통해 도착할 예정입니다.]
“생포전문 사냥꾼도 섭외해놓았겠지.”
[경력 23년의 베테랑입니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젤먼은 전화를 끊었다. 빨리 잡아다가 들여놔야 마스터께서도 관찰실에서 좀 내려오시겠지. 물론 자연보호주의자(자기가 건드리는 건 되고 남이 건드리는 건 안 됨)이신 마스터시니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마침 잠시 후면 식사를 위해 내려오실 것이다. 젤먼은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생물인지 궁금하구나.”
보통은 아닐 게야. 적어도 판다 수준은 되겠지. 젤먼 씨의 생각대로, 적어도 판다 수준으로 얼룩덜룩하기는 했다. 아니, 판다보다 두 색이나 더 많으니 우월한 한성무 씨였다.
비페르의 저녁 식단은 대재벌 가문의 주인치고는 검소했다. 심지어 금가루 하나 안 뿌렸다. 송로도 없었고 푸아그라도 없었다. 그냥 빵-밀가루 한줌에 50$-과 딸기잼-딸기 한 알에 20$-, 차가운 물-북극에서 공수해온지 3일 이내의 얼음-한 잔이 전부였다. 오늘은 복잡하게 먹기 싫다고 하셔서 참으로 소박하게 드셨다. 영양제도 거절해 집사의 이마에 주름 한 줄이 길게 그어졌다. 저렇게 적게 드셔도 괜찮으실까.
먹기 좋게 잘린 빵의 단면에 붉은 잼을 바르며 비페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죽을 뻔했다.”
“예?!!”
소스라치게 놀란 젤먼이 소리쳤다. 주위의 사용인들도 모두 기겁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아 누르며 젤먼이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암살자였습니까?”
비페르를 노리는 자들이야 많다. 널리고 널렸다. 일가친척이 그 1순위요 경쟁사가 그 2순위다. 그밖에도 부자는 다 짜증나 잘생긴 놈은 다 죽어야해 내 애인이 너 좋다고 날 찼어 네놈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간 다음날 홍수가 났다 너는 내 운명인데 왜 안 찾아오니 내 귀에 도청기 니가 설치했지 등 유명하고 잘생기고 돈 많은 만큼 적도 많고 많았다. 뽀얀 엉덩이를 떠올리느라 살기 담은 물음을 귓등으로 넘긴 비페르가 느긋이 대답했다.
“불가항력이더군.”
그렇게 웃긴 건 처음이었다. 웃다가 죽을 수도 있는 거였군. 비페르가 입술 끝을 희미하게 들어올렸다. 소사(笑死) 할 뻔 한 내막을 알 길 없는 젤먼과 휘하 고용인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부, 불가항력이라 하시면…….”
“나를 그렇게 만든 자는 처음이다.”
그리고 먼눈. 순결한 백색 엉덩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주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젤먼은 비명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겁니까아아아!!! 하지만 주인이 먼저 꺼내놓기 전에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집사 된 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 어쩌면 무언가,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굴욕적인 언사가 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젤먼은 심호흡을 하며 뒤로 살짝 물러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대체 어떤 삐리리~한 새끼가 그 높은 관찰실까지 기어 올라가서는……. 그는 당장에 별장 경비를 강화하라 명하곤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탁탁 쳤다. 고용인들 뒷조사도 한차례 실시해야겠다. 내통자가 틀림없이 있었을 게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검소한 식사를 마친 비페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곁으로 다가간 젤먼이 조용히 말했다.
“관찰실은-”
“한동안 그 누구도 들이지 말도록.”
정리중인 컬렉션을 타인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시인이 숲에 들어가 보이지 않을 때 틈틈이 편집을 할 생각이었다. 비페르의 명령에 젤먼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엘리베이터 입구 경호원을 세 배로 늘려야겠군. 새로이 인원을 투입할 배치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젊은 주인의 뒤를 따르던 노집사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주인님, 요즈음 관찰하시는 생물은 어떤 종류입니까?”
갑작스런 암살 건으로 물어본다는 것을 잠시 까먹고 있었다. 일단 종류부터 알아야 동물원의 우리를 완성시킬 수 있다. 순간 걸음을 멈추며 비페르가 약간 뒤쪽, 옆에 선 집사를 바라보았다.
“못생겼더군.”
“…예?”
“하지만 은근히 귀여워. 특히 엉덩이가.”
못생겼지만 엉덩이가 귀여운 생물. 비페르는 낮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어 설명했다.
“갈색에 누렇고 하얗지. 조금은 검었고. 물에서 놀다가 새에게 생선을 빼앗겼다.”
그 일을 떠올리자니 절로 입꼬리가 꿈틀거린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쉬웠지. 도청기를 설치할까 생각중인 그의 옆에서 집사는 여전히 정체불명인 짐승의 형태를 가늠해보았다. 일단 털색은 4Color. 생선을 빼앗겼다는 걸로 보아 육식동물이다. 생선이 주식일까.
“주로 생선을 잡아먹습니까?”
“그렇긴 한데, 해초나 바다거북, 바다거북의 알도 먹더군. 특히 알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얼마나 좋아라 땅을 파던지. 그의 말에 젤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잡식성.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생물. 수달과 비슷한 생물인 듯했다. 컬러풀한 모피를 지니고 있으니 아마도 멸종위기종이거나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종이 아닐까. 그는 마스터의 마음을 사로잡은 생물의 특징을 수첩에 기록해두었다. 동물원 우리에 수영장 포함.
“괜찮으시다면 포획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비페르가 짧게 고개 저었다.
“아니, 일단은 놓아두도록.”
사유지인 정원에 무단침입, 서식하는 것은 괘씸하지만 눈이 즐거우니 봐준다.
“한동안 더 관찰한 뒤에 처분을 결정 할 생각이다.”
“예, 주인님.”
젤먼은 수첩의 끝에다 작게 적었다. 당분간 자연 상태 그대로 놓아 둘 것. 그렇게 한성무 씨의 포획작전은 조금 더 미뤄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