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1)

아버지가 건넛집 아줌마와 눈 맞아 도망쳤다. 홀아비 10년이 넘었으니 새로운 사랑을 찾은 거야 이해하고도 남겠지만, 문제는 집안의 통장이란 통장은 다 긁어낸 것도 모자라 보증금까지 들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지만 그래도 성무는 열심히 노력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고 덕분에 제 입에 풀칠하는 것만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가진 거 하나 없는 빈털터리이니 군대엘 들어갔다. 과거에는 십만 원도 채 못 되던 군대 월급이지만 그가 입대했을 때에는 이등병도 월 삼십은 받았다. 먹고자고입는거야 공짜니 죽어라 모아, 제대 때 손에 쥔 돈은 천오백만 원 가량 되었다. 집에서 용돈까지 받아쓰는 놈들의 편의를 봐주거나 잡일을 도와주며 조금씩 벌어들인 덕분이었다. 특히 빨래와 다림질, 군화 광내기는 세탁소 동업하지 않겠느냐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능숙해졌다. 아무튼 그리 모은 돈으로 성무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다달이 월세 낼 돈은 없다. 무조건 전세다. 어차피 배운 것도 없기에 직업을 딱히 가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천만 원 내외의 전셋집에 집에서 도보 출퇴근 가능한 막일이면 충분했다. 

성무가 자리 잡은 곳은 바닷가 도시였다. 집값도 쌌거니와 젊은이들도 부족해 힘쓰는 일자리라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딱 겨울에 동사하는 것만 면할 작고 허름한 방을 저렴하게 얻고는 열심히 막일을 뛰었다. 재주는 메주였지만 말년장병일 때도 늘어지지 않고 관리해온 육체만은 믿음직했다. 키도 고만고만하고 체격도 고만고만하지만 몸뚱이 하나만은 탄탄했기에 어촌 토박이 어르신들에게 고운 눈길 가득 받을 정도로 쓸모 있게 굴었다. 굴러온 돌이 아주 차돌이라며 칭찬도 제법 들었다. 그렇게 일 년쯤 부지런히 굴자 제법 자리도 잡고 손에 쥐는 돈도 슬슬 늘어나기 시작했다. 재주도 좀 늘어 단순한 막노동뿐 아니라 뱃일도 조금씩 돕게 되었다.

이른 새벽에 들어 온 고깃배의 일을 도우며 성무는 화려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서 못을 박자. 시골 어촌에서 뼈를 묻는 것이 뭐 어떠랴. 어촌은 내가 지킨다. 이대로 열심히 돈을 모으며 인맥도 쌓고 기술도 배워서 기력 떨어지는 40대 때는 그럴 듯한 사업 하나 차리는 거다. 배를 살까 횟집을 할까 양식업에 손대볼까. 면허증 따서 활어차 모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렇게 순조로이 돈을 모은다면 늦어도 2년 안에 활어차 한 대 살 돈이 마련된다. 월세 안 나가고 공과금 적고 통신비 제로에 식비도 휴일 빼곤 일터에서 얻어먹다 보니 그냥 차곡차곡 모이는 것이다. 2년 간 선주 아저씨, 할아버지들한테 열심히 줄도 놔서 싸게 가져다가 도시에서 팔자. 최근엔 회 뜨는 법도 배우고 있다. 활어차에서 즉석 회를 쳐서 파는 거다. 싸게, 저렴하게!

성무의 부푼 꿈은 실현 가능성이 꽤 높았다. 그렇게 일 년을 더 열심히 살자 목표한 금액이 코앞에 보였다. 싱싱한 활어 대준다는 약속도 넉넉히 받아 놓았다. 이대로 부지런히 산다면 손녀 사윗감으로 생각해보겠다는 소리도 들었다. △□횟집 외동딸과 눈도 슬쩍슬쩍 맞았다. 잘하면 활어차 사기도 전에 번듯한 횟집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에 가까운 앞날! 몸은 좀 고되어도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다.

“아, 요 사랑스러운 통장!”

성무는 적금 통장에 쪽 입을 맞추며 골목길을 걸어갔다. 겉보기엔 얄팍해도 속은 아주 실하다. 웃음이 절로 히죽히죽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의 모습에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성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남자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한성무 씨 되십니까?”

“…맞는데, 왜요?”

“약 4년 전에 아버지 빚보증을 섰지요?”

“……예?!”

이게 뭔 소리냐. 어리둥절해하는 성무의 눈앞에 낡은 종이가 팔랑거렸다. 복사 된 주민등록증의 멍한 낯짝은 틀림없는 성무다. 거기에 친필 사인까지 되어있다. 그 뒤로 인감증명서도 보인다.

“당신 부친 되시는 분께서 갚아야 할 오천만원, 대신 내주셔야겠습니다.”

오, 오천만원!! 성무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기억에도 없는데!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야반도주하기 얼마 전 민증 좀 빌려가자 하며 뭔 종이에 서명하게 한 적이 있긴 했다. 그땐 아직 순진하고 뭘 모를 때라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다 했었는데…… 그게 빚보증이었냐! 뒷골이 확 당겨 목뒤로 손을 얹는 성무에게 빚 받으러 온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

“아버지는 종적을 감추고, 아들은 군대 들어갔다가 제대하자마자 시골로 숨어들고. 처음부터 짠 거 아닙니까.”

말투는 험하고 냉정했지만 경어기는 했다. 아직은. 무어라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성무의 손에서 적금 통장을 발견한 남자가 재빨리 그것을 빼앗아갔다. 성무가 입을 크게 벌렸다.

“아, 아- 그, 그건!”

“여기에 전세금까지 더하면 그럭저럭 되겠군요.”

“저, 전세금까지!!”

“아니면 돈을 끌어안고 묻히겠습니까?”

“……아니요.”

앞의 남자가 뒤쪽의 두 남자보다 덩치는 왜소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만은 장난이 아니다. 성무는 깨갱하고 꼬리를 내렸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만큼 순박한 성격이었다. 비록 자신도 모르는 빚보증이었지만 제 손으로 사인하고 민증 내어준 것은 사실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 날 만 한 법적 지식도 전무했으니 그저 남자가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그렇게 성무는 4년 간 개고생하고 다시금 집도 절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산낙지가 발랑발랑 몸부림치다가 썰려나간다. 초고추장을 경유한 다음 목적지는 혓바닥 위다. 어찌 버텨보겠다고 들러붙는 것을 꿀꺽 삼키고는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어허허허헝! 아저씨, 저 진짜 열심히 산 거 아시죠!”

마주 앉은 박 씨가 쯧쯧 혀를 찼다.

“그니까 빚보증은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서면 안 되는 거라 안카나.”

“저 이제 남은 거라곤 이! 몸뚱어리 하나뿐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좀 있음 날도 추워지는데 노숙해야…… 으허헝! 추운 겨울 지나고 동태로 발견되는 건 아닐 까요! 월세 보증금도 없는데! 고시원 들어갈 돈도 없는데!”

최소한 잘 곳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늦은 봄이나 여름쯤 되면 노숙이라도 하겠건만, 이미 가을이다. 성무는 차라리 적당히 죄라도 지어 감방 속에서 겨울을 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얼어 죽느니 전과자.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둥그런 철제 식탁에 머리를 박고 흑흑대는 성무의 어깨를 박 씨가 툭툭 쳤다.

“내 원양어선 알아봐 주까?”

성무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워, 원양어선…요?”

“거 타면 숙식은 해결된다 아이가. 내 아는 선주 있거든. 갈래?”

숙식해결! 성무는 박 씨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래, 까짓것 아직 젊은 나이다. 좀만 더 고생하자! 죽으란 법은 없는 거다! 그는 커다랗게 소리쳤다.

“갈래요! 가겠습니다! 부디 보내주이소!!”

한성무 나이 스물넷. 부지런했지만 박복한 인생 끝에 결국 세상…아니, 나라를 뜨고야 말았다.

그리고 약 석 달 후 그는 어느 해변 가에 우뚝 섰다.

이름 모를 바닷새가 날아다니고 있다. 성무는 흠뻑 젖은 채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삐뚤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쯤 되지 않는 이상 인생길 곳곳마다 불행이 닥쳐오면 열이 뻗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도 착하고 성실하고 올곧게 살아왔는데 말이다. 나쁜 놈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착한 사람들은 뼈 빠지게 고생해봤자 가난하다더니만.

성무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이 빌어 처먹을 인생아아아!!!”

그의 신분은 현재 조난자 1. 아버지가 전 재산 다 가지고 튄 것으로도 모자라 4년간 고생해서 모은 돈 다 날리고 겨우 연줄 닿아 탄 원양어선은 난파당해 홀로 이 해변에 흘러온 불운한 청년이다. 그나마 목숨도 건지고 사지도 멀쩡하니 행운이 바닥을 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고래고래 소리치던 성무는 실성한 듯 허허허 웃다가 다시 으악 거리곤 모래밭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후덥지근한 날씨로 보아 사철 뜨끈한 적도 부근의 바닷가가 아닐까. 어쩌면 대륙이고 어쩌면 섬이고 어쩌면 무인도일지도 모른다.

“……무인도인가.”

24년 인생 여정 상 운 좋게 도시가 근처, 대사관도 요깃네일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성무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젠 운 같은 거 별로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그거 무리. 요행 바라지 않고 성실하게 꼬박꼬박 모은 돈도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팔자다. 여기서 뼈를 묻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막 쓰면서 살 걸. 방바닥도 좀 뜨끈하게 데우고 솜이 가득 든 이불도 사고 옷도 두툼한 거 사고 선풍기도 사고 식당에도 제 돈 내고 사먹고 닭다리도 한 번 뜯어보고……. 무엇보다 찜질방에 가보고 싶었다. 일고되게 한 뒤 거기 가면 아주 좋다고 다들 입 모아 말하던데.

“으어어어헝! 어허헝!!”

성무는 팔다리를 파닥거렸다. 억울하다. 반만, 아니 반의반만, 아니 딱 백만 원, 아니 딱 십만 원이라도 시원하게 써 볼걸!

“자장면에 군만두! 아니, 잡채밥! 겨울에 뜨끈한 갈비탕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 아아, 삼계탕! 나도 고기 먹고 싶다고! 새고기, 육고기, 돼지껍데기라도 좋았어!”

눈물이 좍좍 흘렀다. 그놈의 돈, 그놈의 돈. 돈이 다 뭔지. 전부 다 지긋지긋하다! 한참을 엉엉대던 성무는 바다 위 어른어른 거리던 해가 머리꼭대기로 솟은 뒤에야 비칠비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일단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인생이요 팔자라해도 넋 놓고 죽기는 싫다. 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모래밭을 뒹구는 물건이 몇 보였다. 거친 풍랑에 휘말리기 직전, 그는 취사보조를 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었던 접시며 재료들은 당연히 없었지만 허리춤에는 아직 식칼과 냄비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거기에 죽어라 매달린 속이 빈 상자. 반사적으로 챙긴 소중한 물건 위주로 들어찬 배낭. 파편과 구명튜브였다. 구명튜브가 옆에 떠다니는 줄 알았으면 그걸 붙잡는 거였는데. 아무튼 운도 지지리 없다.

“아이고, 내 팔자야.”

성무는 울적하게 배낭을 열었다. 생활방수도 안 되는 싸구려 가방이라 안까지 흠뻑 젖었다. 하지만 바다에 나간다는 생각에 물건들을 비닐봉지 삼중으로 단단히 감쌌다. 적응할 틈도 없이 바빠서 꺼내보질 못해 아직 포장한 그대로였다. 성무는 부스럭대며 묶은 봉지를 풀었다. 첫 번째 봉지에는 물이 조금 들어갔지만 두 번째 세 번째는 멀쩡했다. 그 속에는 어릴 적 가족사진과 연인관계로 발전 할랑말랑 했던 △□횟집 외동딸 미숙이의 사진, 그 밖의 몇 안 되는 소지품들이 들어가 있었다. 옷가지는 선실에 있었기에 이것이 성무의 전 재산이다. 성무는 제법 비싸 보이는 레X맨 맥가이버 칼을 꺼내들었다. 제대 직후 우연히 만난 부잣집 군대 후임이 덕분에 말년까지 편하게 보냈다며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때는 돈으로 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성무는 배낭을 등에 메고 오른손에는 식칼을, 왼손에는 나이프를 들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해변을 따라 걸어 가볼 생각이었다. 만일 이곳이 무인도가 아니라면 문명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무인도만은 봐주라. 그는 이 악물고 신에게 빌며 발을 내딛었다.

“아, 축축해.”

젖은 운동화가 질퍽질퍽 백사장을 걸어 나갔다.

우와, 역시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눈에 익은 큼직한 상자를 바라보며 성무는 중얼거렸다. 역시 내 팔자 죽 쒀서 개줄 팔자. 고픈 배를 붙잡고 하루하고 반 동안 죽어라 반은 뛰고 반은 걸은 결과가 이거였다. 이곳은 섬이다. 하루 반 만에 맨 가장자리 한 바퀴 돌 수 있다는 크기로 봐선 무인도일 가능성이 높다. 성무는 상자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경치 조오타.”

그래, 여긴 따뜻하니까 최소한 얼어 죽지는 않겠네. 냄비 있고 라이터도 있으니까 바닷물 끓여서 식수 만들면 되고. 저기 보니 야자수도 있더라. 숲에 들어가면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있을지도 몰라. 섬이 코딱지만 한데 맹수까지야 있겠냐. 전에 텔레비전서 얼핏 보니까 이런 섬에는 포식자가 없어서 초식동물이 순하고 새도 막 못 날고 그런다던데. 가방 속에 반짇고리도 있었지. 잘하면 낚시도 가능하겠다. 저쪽에 암초 있던데 갯강구나 조개류 같은 거 있으려나. 그걸 미끼삼아서 시도를 해 봐? 먹을 수 있는 생선 종류도 대충 알고 회도 뜰 줄 안다.

“그래,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야. 어차피 나 찾을 사람도 없고, 여기까지 누가 찾으러 올 리도 없고! 이렇게 된 거 그냥 여기서 살자. 최소한 억울하게 돈 뜯길 일은 없잖아!”

아자아자 파이팅. 24세 겨울이 가까운 늦가을, 성무는 무인도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다. 운은 지지리도 없지만 참 낙천적이다.

무인도 생활 5일 째.

식수원을 발견했다. 앗싸. 이제 힘들게 바닷물을 끓일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 다시 집이 무너졌다. 어떻게 해야 못도 망치도 본드도 없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무인도 생활 7일 째.

낚시 포인트를 찾았다. 이제 끼니 걱정은 덜었다. 매일 생선만 먹느라 입에서 비린내가 풍겨져 나올 지경이긴 하지만. 토끼 비슷한 것을 발견했는데, 어떻게 잡을 수 없을까.

무인도 생활 10일 째.

커다란 나무 세 그루가 얽힌 곳을 발견했다. 덩굴과 나뭇가지를 엮고 하니 드디어 사방 가려지는 집이 탄생했다. 토끼 비슷한 것을 얼른 잡아서 바닥을 가죽으로 깔아야겠다.

무인도 생활 16일 째.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토끼 비슷한 것을 잡았다! 옷에다 바닷물 적셔 말린 뒤 털어낸 소금을 뿌리고 고기를 구워먹었다. 이게 얼마만의 고기냐. 행복하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청바지에 런닝에 가까운 짧은 셔츠. 햇볕에 탄 피부는 갈색으로 번들번들하다. 부스스한 검은 머리카락은 목을 가득 덮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둥그렇게 뜬 눈동자가 숲을 홱 헤집는다. 손에는 창-끝에 식칼이 동여매져 있다-이 단단히 들려져 있었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힌 맨발이 드러난 나무뿌리만을 밟으며 소리 없이 움직였다. 저 앞으로 뚱뚱하면서도 둔한 털북숭이 초식동물이 보인다. 맛은 중하급이지만 잡기는 가장 쉽다. 털도 깔개로 쓸 만하다. 호칭 애들 사탕. 성무는 스스슥 다가가 식칼 창을 내리꽂았다.

-쿠에엑!

식칼은 정확히 머리를 꿰뚫었다. 줄줄 흘러넘치는 핏물이 섬뜩하게도 보였지만 성무는 아무렇지 않게 애들 사탕의 꼬리를 붙잡고 들어올렸다.

“오늘 점심.”

혼자 살다보니 혼잣말이 늘었다. 이렇게 실없는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았다간 언어 자체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다. 역시 혼자는 좀 외로워. 중얼중얼 거리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오, 나의 스위트 홈.”

성무는 집에서 좀 떨어진 나뭇가지에 애들 사탕을 거꾸로 매달았다. 피를 뽑기 위해서다. 집 근처에다 매달아 놓으면 벌레가 꼬인다. 집 앞에는 해변에서 퍼다 나른 모래가 가득 깔려 있었다. 바닥을 둥그렇게 파내고 그 속에다 모래를 채웠다. 가운데에는 불이 피어오르고 있다. 불 피운다고 매번 백사장까지 가긴 귀찮아서 만든 것이다.

“점심 준비를 하자, 점심 준비를 하자.”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며 성무는 집안에서 야자열매 껍질로 만든 그릇을 들고 나왔다. 그릇 안에는 하얀 가루가 가득하다. 소금이다. 하나 뿐인 소중한 냄비 속에는 큼직한 생선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바닷물도 함께 들어있는지라 아직 아가미는 움직이고 있다.

“신선한 회에 고기건만 라면이 그립단 말이야.”

옛날에는 지겹기만 한 라면이었는데. 아아, 자장면 먹고 싶다. 안되면 짜파게티라도. 그래도 어제는 운 좋게 계란프라이를 해먹었다. 슬슬 번식 철인지 새들이 알을 낳기 시작한 것이었다. 알 좋지, 알. 그저께는 제법 큰 게도 잡았었고. 조미료와 기타 재료만 충분하면 식생활에는 큰 불만이 없는데 말이야.

“비타민이 부족하지는 않으려나. 해초와 과일을 먹고는 있지만 걱정되네.”

아직 몸 튼튼 건강한 것으로 보아 별문제는 없는 듯하다. 성무는 중얼중얼 거리며 풀어 낸 식칼을 돌에 문질러 갈았다. 점심 먹자, 점심.

“내일 아침에도~ 둥지를 뒤져서~ 모닝 프라이~.”

야생 생활에 완벽히 적응해가고 있는 그였다.

야생화 되어가고 있는, 아니 이미 된 한성무가 모르는 사실 그 하나. 사실 이 섬은 무인도가 아니다. 숲을 헤치고 헤쳐 열심히 들어가다 보면 으리으리한 저택이 하나 나온다. 어느 나라 왕의 성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커다랗고 화려한 대저택이다. 야생인 한성무가 모르는 사실 그 둘. 숲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숲이 아니었다. 물론 일반적인 상식의 눈으로 보자면 틀림없이 울창한,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은 다르게 칭하고 있었다. 저택에 딸린 정원. 다른 이야 무어라고 하든 부르는 것은 주인 마음이다. 따라서 한성무가 서식하고 있는 숲은 숲이 아니라 정원이었다. 좀 많이 넓고 울창한 정원 말이다.

섬에는 선착장도 도로도 없었다.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섬의 주인은 자신 소유의 정원이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길 원했다. 그래서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저택을 제외하면 섬에서 인간의 문명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성무라는 인간이 하나 더 있긴 했다. 참고로 한성무는 불을 사용하고 채집과 수렵단계의 원시인이다. 아직 농경도 목축도 시작하지 못했다. 앞으로 한 5년은 더 지나야 농경시대로 진화할 듯싶다. 도구는 철기인데 생활은 신석기도 멀었다.

아무튼 육로도 해로도 없는 이 섬에 드나드는 방법은 단 하나, 공로뿐이다. 물론 거대 여객기가 착륙할 만한 장소는 없다. 그런 큰 덩치가 드나들었다면 아무리 둔한 한성무라도 눈치 까고 해변에다 커다란 SOS를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섬을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는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헬기였다. 그것도 한성무가 터 잡은 곳과는 정 반대편인 서쪽으로만 드나들다보니 눈치 채려야 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주 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바로 어제, 한 대도 아닌 무려 다섯 대의 헬기가 섬의 저택에 도착했다. 다섯 대라는 것을 보면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섬의, 한성무가 무단 서식하고 있는 숲-아니 정원의 주인이 도착한 것이었다.

섬 하나 사다가 으리으리한 저택 지어놓고 울창한 숲을 정원이라 칭하는 인간은 열에 열은 부자다. 부자도 아닌데 이러고 사는 놈 있다면……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이 섬의 주인도 돈 많은 재벌에 능력 좋고 잘생겼다. 자수성가한 부자가 아니라 대물림한 부자이기 때문이다. 대물림한 부자의 모친이 미인이 아닐 가능성은 좀 낮다. 유전자가 영 이상하게 꼬였을 땐 성형수술이라는 돈 바르는 기술도 존재한다. 천연미남인지 성형미남인지까지는 몰라도 잘생기고 능력 좋고 돈 많은 이 섬의 주인은 자연보호주의자였다. 정확히는 자기 외에는 자연보호하자 주의였다. 아무리 자연보호가 중요하다지만 재벌로 태어난 이상 냉온방 빵빵해야하고 가죽 좀 걸쳐줘야 하며 데스크-책상 아니고요-는 최소 백년은 묵은 원목에 나쁜 쪽으로 연비 죽이는 스포츠카를 타줘야 하는 법이다. 대신 자연보호기금으로 X억 씩 투척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벌의 자연보호.

헬리콥터가 차례차례 비행장에 내려앉았다. 집사와 경호원 외 고용인들이 줄줄이 나오고 온갖 짐들이 덜컹덜컹 쌓여간다. 남들 다 분주하니 일하는 와중에 느지감치 여유롭게 걸어 내리는 남자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쏠렸다. 이 저택과 정원의 주인이자 루프스 가의 젊은 주인인 비페르 루프스다. 그의 조상은 프랑스의 귀족으로 시민혁명 때 영국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주해 부동산과 원유사업에 투자해 돈을 상당히 긁어모았다. 그 뒤 운도 좀 따라주고 먹다 남은 사과에도 일치감치 투자를 하는 등 돈이 생쥐마냥 새끼치고 새끼치고 새끼를 쳐 지금은 타임지에서도 종종 얼굴을 비추는 대재벌가가 되었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바람에 짧은 금발과 3대째 양복점을 하고 있는 프랑스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흰 셔츠가 팔랑거린다. 사시사철 더운 곳이다 보니 옷깃과 커프스단추는 풀어헤쳐진 채다. 주인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저택-별장을 관리하고 있는 총책임자가 얼른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2년 만에 뵙는 군요, 주인님. 그간 많이 바쁘셨나봅니다.”

해마다 바다거북의 번식기가 되면 그거 구경하러 못해도 며칠씩은 머물렀다 떠나던 남자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은 영 소식이 없었다. 

“약간.”

짧게 대답한 비페르는 대기되어 있던 차에 올라탔다. 워낙 넓은 저택이다 보니 목적지까지 걸어가려면 10분은 족히 걸린다. 흑색의 대형차가 매끄럽게 굴러가다가 소리 없이 멈추었다. 저택 중앙 건물의 앞이다. 특이하게도 탑과 비슷한 높은 건축시설이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성무가 맑은 날 낮에 서쪽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았더라면 발견했을 만큼 높다랗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 뚜렷한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여전히 섬을 무인도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식사는 관찰실로 올려드릴까요?”

비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저 탑은 전망대로, 꼭대기 바로 아래층에 사방이 유리벽으로 된 섬의 생태관찰실이 마련되어 있다. 그는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내의 버튼은 단 네 개. 1층과 관찰실, 그리고 관찰실 아래위 한 층씩뿐이었다. 빠르게 수직상승 한 엘리베이터가 생태관찰실 앞에 멈추었다. 가운데 자리 잡은 욕실과 엘리베이터 룸을 제외한다면 둥글게 뻥 뚫린 거대한 방이다.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유리벽 앞에는 천체망원경이 모두 열두 대가 각각 방향을 달리하여 설치되어 있었다. 그 천체망원경 각각의 옆자리마다 디자인이 모두 다른 안락의자와 소파,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으며 널따란 중앙에는 일반적인 생활공간처럼 꾸며졌다. 중앙의 침대며 데스크 등을 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커다란 수조였는데, 생물은 없이 색등이 켜지며 기포가 올라오는 것부터 해파리만 가득하거나 새우나 작은 물고기 정도만 넣은 수초항까지 스무여 가지의 각기 다른 테마로 나뉘어져 있었다.

비페르는 이곳에서 홀로 머무는 것을 좋아했기에 식사 외 필요한 것들은 한쪽에 마련 된 작은 엘리베이터로 올라온다. 식사가 도착했다고 짧은 벨소리와 함께 빛이 깜빡깜빡 거렸지만 비페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천체망원경 쪽으로 걸어갔다. 바다거북의 번식 철이다. 보통 밤중에 뭍으로 올라와 아침 일찍 알을 낳고 떠나지만 혹시나 몰라 천천히 돌아가며 사방의 해변을 살펴보았다. 비싼 만큼 성능 좋은 망원경인지라 저 먼 바닷가를 바로 코앞에서 보는 것 마냥 가까이 살필 수 있었다. 새하얀 백사장에는 파도만이 살랑살랑 올라왔다 뒷걸음질 친다. 이쪽저쪽 자리를 옮겨가며 오랜만에 들린 별장의 정원 해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수상한 물체가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상자다. 비페르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

“…….”

섬을 사들이고 본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돈을 들였던가. 숲과 해변에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자재 하나하나를 배가 아닌 헬기로 들여와 별장을 지었다. 생활 폐수나 기타 쓰레기도 전부 헬기를 통해 섬 밖으로 가지고 나가 버린다. 섬에서 인간의 손길이 닿은 곳은 이곳, 저택건물 뿐이었다. 이것도 자연훼손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는 장소를 고르고 골라지었다. 크기도 다른 별장에 비하면 절반도 못 될 만치 작다.

불쾌감에 인상을 굳힌 채 상자 주위를 살피던 비페르의 눈에 거북이 한 마리가 비춰졌다. 해가 중천에 뜬 하늘 아래서 말라붙은 몸으로 열심히 바다를 향해 기어가고 있다.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던 모양이다. 딱딱해진 입가가 슬쩍 풀리려는 그때, 또 다른 무언가가 망원경의 렌즈 안에 비춰졌다.

“젠장, 토끼 짝퉁 놈!”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식칼 창을 사용하는 것도 제법 능숙해졌다. 하지만 맨 처음 잡았던 토끼 비슷하게 생긴 동물, 즉 토끼 짝퉁만은 아직 사냥하기 힘들었다. 무인도라 인간을 보지 못한 탓에 처음에는 그래도 경계가 덜했다. 하지만 요새는 성무의 기척만 살짝 느껴져도 쏜살같이 도망치곤 했다. 둔감한데다가 느려 터져 도망도 잘 못 가는 애들 사탕과는 달랐다. 식칼 창으로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져, 요즘에는 함정도 파고 있지만 어설프다 못해 허접한 구덩이에는 애들 사탕조차 걸려들질 않았다. 올가미 만드는 방법을 배워 둘 것을! 덩굴은 많은데! 성무는 투덜투덜 거리며 바닷가로 향했다. 생선이나 낚아 구워먹을 심산이었다.

“…어?”

주 활동지역 중 하나인 조난당한 해변으로 들어서던 성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웬 넙적하고 둥근 것이 모래밭을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인도에 표류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뭍으로 나온 바다거북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 지면 자고 해 뜨면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한밤중에 올라왔다가 새벽에 돌아가는 거북이랑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늑장부리다 걸린 거북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파닥파닥 더 열심히 네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딱해 보이지만 두툼한 덩치에 성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고기다! 거북이라면 대충 자라와 비슷한 것이 아니던가. 몸보신에 좋은 고기다! 그렇잖아도 무인도에서 살아남으려면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 아프기라도 했다간 병원도 의사도 간호사도 주사도 약도 없이 그냥 골골대다가 알아서 낫든가 그냥 죽든가 둘 중 하나다.

“거북아!”

저리 느리니 조심할 필요도 없다. 성무는 와다다닷 달려가 커다란 바다거북의 등에 매달렸다. 

“어이쿠!”

크다. 게다가 무겁다. 몸길이는 성무의 반 정도로 작았으나 등딱지가 단단하고 크니 몸무게는 두 배쯤 됨직했다. 힘도 어찌나 좋은지 성무를 등에 매단 채 바다로 계속해서 기어가고 있었다. 속도는 느려졌지만 이대로라면 얼마 안지나 놓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죽여서 잡자니 위협이 가해질 때마다 재빠르게 머리를 쏙, 집어넣는다. 급해진 성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래! 뒤집자!”

일단 막아야하니 뒤집어 놓자. 성무는 얼른 뛰어가 넓적한 돌과 굵직한 나무막대를 들고 왔다. 부드러운 모래밭인지라 거북이의 배 아래로 막대를 찔러 넣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힘껏 지렛대를 내렸다. 발라당, 바다거북이 배를 드러내고 뒤집어졌다. 넓적한 네 다리가 바둥거린다.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다가 목을 길게 빼어 다시 몸을 뒤집으려 애쓰는 모습이 가여워보였지만, 야생화 된 성무의 눈에는 그저 고깃덩이 1로 비칠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 야생인 한성무는 식칼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길게 빼진 목을 향해 단숨에 내리찍었다. 피가 팍 튀었다. 그가 히죽히죽 웃었다.

“으하하, 이게 대체 몇인 분이야? 냉장고만 있었으면 일주일은 사냥 안하고 놀아도 되겠다. 역시 음식을 장기 보관 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생선 포 떠서 햇볕에 말리듯이 고기도 그렇게 해 볼까?”

아니면 염장이나 훈제도 있다. 소금 팍팍 뿌리면 짜기는 해도 잘 상하지는 않는다던데. 성무는 즐겁게 죽은 거북이의 뱃가죽을 눌러보았다. 배 부분은 등에 비하면 훨씬 부드럽다. 그래도 단단하기는 한지라 배딱지와 등딱지 사이의 옆을 잘라내는 편이 좋을 듯했다. 고작 둘 뿐인 식칼과 나이프, 소중히 아끼고 아껴야지. 부러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 망할 생선들이 물고 가버려서 바늘도 이제 절반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자아, 그럼 거북이 고기 맛 좀 볼까나. 등딱지가 크기도 하지. 잘 씻으면 물 담아 둘 그릇으로 써도 되겠다. 개울에서 물을 떠와도 둘 곳이 없어서 불편했는데. 이 정도면 하루에 한 번 만 물 퍼와도 되겠는 걸?”

좋은 거북이다! 콧노래가 절로 흥얼흥얼 새어나왔다. 성무는 칼질하다 말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앗싸, 기분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거북이도 잡고~ 오늘 저녁은 거북이 구이~.”

팔다리가 흐느적흐느적 허리와 엉덩이가 흔들흔들. 일명 막춤이었다. 양팔을 번쩍 올렸다 휘휘 돌리고 허리를 으싸으싸 오른쪽왼쪽 젖히는 것이 초등학교 시절 국민체조도 섞여 들어간 듯하다. 남들 앞에서는 안면 두께가 미터단위 쯤 되지 않는 이상 차마 못 보여 줄 막춤이었지만 뭐 어떠랴. 여기는 무인도다. 성무는 왼쪽 팔을 높이 올리고 오른쪽 팔을 크게 휘저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보람찬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한참을 그렇게 기쁨 겸 식전 운동의 춤사위를 펼치던 성무는 다시금 거북이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팥고물 떨어질 것을 눈치 챈 바닷새들이 슬금슬금 모여든다. 뜯어낸 뱃가죽을 던져주자 붙어 있는 살점을 향해 물새들이 파다닥 덤벼들었다. 성무는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먹고 알 많이 낳아라. 이왕이면 좀 낮은 곳에서.”

이것이 바로 상부상조. 내장이랑 살점도 몇 던져준 뒤에 덩굴로 살덩이가 그득한 등껍질을 꽁꽁 동여맨 채 숲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짐은 묵직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참으로 가벼워 보였다.

비페르의 눈이 독사처럼 사납게 가늘어졌다. 인간이다. 처음에는 이 섬에 원숭이도 서식했나 싶었지만 털 하나 없이 맨들맨들한 저 팔다리는 틀림없는 인간의 그것이다. 감히 어떻게! 사유지로 보호되고 있는 섬에 들어와서 멋대로 헤집고 다니다니!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드나들 길이 없는 외딴 섬이다. 허름한 옷 꼴도 그렇고 꼬질꼬질한 모양새가 조난당한 사람인 듯했다. 헬기를 보내어 잡아들인 뒤 제 나라로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떼려는데, 남자가 펄쩍펄쩍 뛰어서 바다거북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냥 거북이가 신기해서 그런 것이겠지. 흔히 먹는 물고기나 게도 아니고, 거북이 봤다고 덤벼들어 잡아먹는 현대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했다. 저 갈색에 가까운 누런 남자로부터 야생의 향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비페르는 약간 긴장하며 거북이와 남자를 살펴보았다. 남자가 거북이의 등에 답삭 매달린다. 잠시 낑낑거리더니만 어디론가 달려가서는 막대와 돌을 가지고 왔다. 나무막대를 지렛대처럼 사용하더니 바다거북을 발라당 뒤집는다.

“…….”

그리고 이어지는 피 튀기는 장면. 아주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다거북의 시체를 해체하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입모양을 봐선 하하하 웃더니 온몸을 흐느적대기 시작했다. 엉덩이도 흔들고 팔다리도 마구 휘저어댄다. 비페르는 눈가를 찌푸렸다. 저거 혹시… 춤……? 무어라 표현 할 수 없이 난잡하고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단 하나, 감정만은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기쁨이다. 저것은 기뻐서 흔들흔들 추고 있는 춤이다. 비페르의 머릿속에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사냥을 성공한 원시부족. 물론 거기 나온 원주민들의 춤이 훨씬 더 절도 있고 능숙했지만 표현하는 것만은 유사했다. 

펄쩍펄쩍 뛰면서 괴상망측한 춤을 추던 누런 남자가 다시 바다거북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근처에 새떼가 와글와글 몰려든다. 남자는 배딱지와 내장, 살점 얼마간을 새들에게 던져주었다. 그 모습을 보자 더욱더 오지에 야생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원시부족이 겹쳐졌다. 순간적으로 이 섬에 원주민이 살고 있었던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섬에 무슨. 또한 위아래를 대충 가린 옷은 틀림없이 공장에서 생산 된 옷의 일부다.

이윽고 작업을 마친 남자가 고깃덩이가 담긴 등껍질을 끌고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울창한 숲인지라 그 안까지는 아무리 성능 좋은 천체망원경이라 해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비페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 인간을 쫓아 낼 것인가 그냥 둘 것인가. 처음에야 당연히 전자였지만,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전기로 불 밝히고 총 들고 사냥하고 전기톱으로 나무 잘라가며 도로 내서 차 몰고 다닌다면 생각 할 것도 없이 아웃이겠지만 저 남자는 달랐다. 저렇게 살아간다면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 끝에 저 넓디넓은 정원의 주인은 일단 두고 본다, 로 결정을 내렸다. 그의 정원에 무단 서식중인 한성무 씨는 너무 야생적인 덕분에 구조당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찌익- 집의 한쪽 기둥=굵직한 나무줄기에 나이프로 깊숙이 금을 그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꼬박꼬박 금을 그었는데 무인도에 떠내려 온 지 한 달쯤 지나자 슬슬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단순 날짜표시가 아니라 일기라도 쓰려 했었다간 10년이 1년 되었었겠지. 성무의 초등학교 방학숙제 결과물은 평균적인 수준이었다. 하기는 대충 다 했는데 미뤄서 하기. 특히 일기는 개학 전날 후다닥. 그래도 생각 날 때마다 슬슬 긋긴 그어서 대충 백 개가 넘었다. 성무는 덥수룩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여기 못 박은 지 일 년은 지났으려나? 한국이었더라면 달력 없이도, 금 안 그어도 날씨 보고 대충 감 잡겠건만 이곳은 사시사철 뜨뜻하다. 물론 아예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닌데 잘 모르겠다. 초기에는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저 덥구나, 생각 외엔 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요새는 얼마 전보다 좀 덜 더운 거 같기도 한데. 겨울이 오려나?”

성무는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국자로 끓고 있는 냄비 속을 휘휘 저었다. 거북이 고기와 말린 생선포 좀 넣고 검초록 해초를 넣어서 국을 끓이는 중이었다. 간은 오로지 소금 뿐! 하지만 의외로 맛있었다. 강한 조미료에 길들여졌던 혓바닥의 때가 그간 제법 벗겨진 덕이기도 했지만 재료의 신선함도 한몫했다. 왜, 자연산 때깔 좋은 미역은 그냥 물에다가 미역만 넣고 끓여도 맛이 끝내준다고 하지 않던가. 바다의 참맛! 성무는 국자로 국을 떠 홀짝 들이마셨다.

“크으- 소주가 고프다.”

해초의 모양새는 파래와 비슷한데 맛은 미역국에 가까웠다. 고기도 들어가니 맛이 아주 그만이다. 소주도 소주지만 아, 쌀밥. 고슬고슬하니 갓지어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을 크게 푹 떠서 국에 말아 먹으면……. 상상만으로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밥 먹고 싶어. 벌건 김치에 하얀 쌀밥. 탱글탱글 하얀 쌀알.

“여기는 왜 쌀이 없는 거냐!”

예전 같았으면 맨밥은 지겨워 고기가 먹고 싶어 회도 먹고 싶어 중얼중얼 거렸겠지만 지금은 역전되어 버렸다. 고기도 생선도 매일매일 먹는다. 이제는 맨밥과 김치가 그리웠다. 야채도 그리웠다. 여기저기 풀이 많기는 많은데 먹어도 죽을지 살지 알 수가 없으니. 그나마 과일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앗 뜨, 앗 뜨.”

성무는 뜨끈뜨끈한 미역국 짭퉁을 훌훌 둘러마셨다. 날도 덥다보니 금세 땀방울이 송골송골 뺨이며 목덜미 위로 솟아오른다. 

“아- 조오타.”

넓적한 나뭇잎 하나 꺾어 슬슬 부채질을 하며 하늘을 향해 목을 젖혔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일그러진 동그라미를 그리며 비춰진다. 이 경관을 위해서 나무 꽤 타야만 했다. 숲이 어찌나 울창하던지 해변이나 물이 있는 개울가 아니고선 도통 하늘이 보이지도 않았다. 성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느릿이 끔벅거렸다.

“살만하지 뭐.”

좀 덥기는 해도 춥지는 않겠다, 배 안 곪겠다. 심심하고 외로운 것만 빼면 나쁜 거 하나 없는데. 뭣보다, 외로운 게 문제다. 여자. 아니면 남자라도. 대화상대가 있으면 좋겠는데.

“……뭔가 잡아다가 키우기라도 할까?”

개나 고양이를 자식삼아 키우는 사람들도 있다지 않는가. 전에 보니까 조그만 여우 비슷한 것도 살고 있던데. 일단 먹이로 꼬드겨봐? 손등으로 입가를 슥슥 닦아내며 성무는 목축생활로의 진보를 향한 첫발을 내딛었다. 

천체망원경에는 카메라의 기능도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촬영은 물론이요 동영상도 녹화 가능하다. 비페르는 관찰실 가운데 소파에 느긋이 자리 잡아 천장에서부터 내려 온 거대한 화면을 바라보았다. 크기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조그만 영화관 수준 쯤 되는 대형 스크린이다. 덕분에 그 속에서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원시청년은 1대1 사이즈에 가까웠다. 

“…….”

양 팔을 머리 높이 쭉 올리고 흐물흐물 웨이브가 들어간다.  그 상태로 골반 아래, 즉 엉덩이가 흥겹게 좌우로 크게 흔들거린다. 무음이지만 절로 흥에 겨운 목소리가 상상될 정도로 즐겁고 경쾌한 움직임이다. 바다거북을 사냥하고 저렇게나 즐거워하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몇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어쩌면 유일할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도촬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화면 속의 한성무는 마냥 기쁨에 차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알았으면 두더지보다 빠르게, 힘차게 쥐구멍을 파고 숨어버렸겠지. 프라이버시 운운하며 고소 할 위인은 못되니까.

영상이 멈췄다. 춤추는 장면은 10분 남짓으로 그리 길지는 않은 동영상이었다. 비페르는 버튼을 눌러 다시 춤의 처음부터 재생시켰다. 아예 구간무한반복재생 설정을 했다. 도촬 된 한성무 1은 끊임없이 기쁨의 막춤을 추었다.

할 짓도 그리 없는지 한 시간여를 시커먼 청년 막춤 추는 걸 구경하던 비페르가 휴대폰을 들어 저어-아래층과 연결했다.

“3D영상기기 수송해오도록.”

2D로는 좀 모자라셨나보다. 

자신의 막춤 영상이 준 영화관급 스크린에서 무한반복재생 되다 못해 곧 3D로 재탄생 되리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성무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쳐 멘 채 걸어가고 있었다. 한손에 들린 야자열매 그릇에는 말린 생선 및 고기 조각이 가득이다. 고기 잡는 사람이 없다보니 이곳에는 물 반 생선 반이었다. 담그면 그냥 달라붙는다. 낚싯바늘만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한다면 평생 배곯을 일은 없는 풍요로운 섬인 것이다. 날이 갈수록 어획량 준다고 한숨짓던 동네사람들이 여기 온다면 뒤집어지게 좋아 할 텐데. 이런 황금어장을 혼자서 누리려니 참으로 아쉬웠다.

“무인도니까 그런 거겠지만 알고 보면 막 보호구역 같은데 아닌 가 몰라.”

성무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불법어획이며 사냥이라 해도 들켜야 문제가 생기지. 어차피 이런 코딱지 만 한 섬, 조난자가 아니고서야 굳이 찾아 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머릿속에선 휴양지용 개인소유의 섬,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서민 중의 서민, 손에 돈 쥔 적은 있어도 제대로 써본 적은 없는 한성무가 생각하는 부자의 이미지는 저렴했다. 모든 물건을 백화점에서 사 쓰는 사람. 자동차 두 대 이상 가지고 있다거나 쇼윈도 너머에서나 구경했던 엄청 얇고 커다란 텔레비전을 현금으로 사는 사람. 중국집에선 요리만 시키고 매 끼니 고기 먹는 사람. PC방도 가본 적 없고 텔레비전이라곤 어릴 적 아버지가 주워왔던 것이 고장 난 이후에는 빌붙어 들린 가게에서나 봤던 그로선 갑부가 얼마나 엄청난 돈지랄을 벌일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조그마한 섬을 굳이 샅샅이 뒤지진 않았던 것이었다. 뒤져봤자 안 나올 텐데 뭐.

성무가 주요 낚시터인 바닷물 속에서 툭 튀어나온 넓적하고 커다란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새들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새들이 전부 눈을 희번덕대며 바위 끝에 걸터앉은 성무를 빤히 쳐다본다. 못 잡아도 한 스물은 넘어 보였다. 기웃기웃 대는 바닷새들의 모습에 성무가 혀를 쯧쯧 찼다.

“야, 공짜 밝히면 머리 벗겨진다!”

돌연 큰 소리에 두어 마리는 푸드득 날아올랐지만 대부분 깃털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둥지는 턴 적 있어도 새 잡아 먹은 적은 없다보니 저 배짱이다. 확 잡아다 새고기 맛 좀 볼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긴 했지만 그랬다간 무료한 섬 생활, 더욱 더 심심해지고 만다. 저것들이라도 있으니 낚시 하러 오는 게 그나마 재미있지. 

“엇차!”

그새 한 마리 낚아 올렸다. 그리 크진 않다. 성무는 펄떡이는 물고기를 낚싯바늘에서 빼내어 모여 있는 새떼들을 향해 던졌다. 푸드덕 파득 꽥꽥! 잠깐의 소동 끝에 한 놈이 생선을 단단히 물고 잽싸게 날아오른다. 승리자의 덩치는 제법 컸지만, 이 무리의 대장은 아니다. 생선 깨나 받아먹어 본 놈이라면 이젠 던져주는 물고기 크기도 재보고 덤벼든다. 방금 그건 너무 작았다. 낚시터 터줏대감들은 큼직한 놈 좀 낚으라며 성무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훌륭한 닭둘기의 소질을 지닌 녀석들이다. 사냥방법은 슬슬 잊어먹지 않았을까.

“오늘은 잘 안 낚이네.”

미끼를 갈아 끼우고 다시 낚싯대를 늘어뜨린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삼일 전부터 이상하게 근지럽다. 마치 누군가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뭐, 끽해야 지나가던 물새A, 짐승B, 벌레C의 눈길이겠지. 아니면 슬슬 씻으라는 뜻인가.

“내일은 오랜만에 때 쫌 뺄까~.”

무인도에서 시커먼 남정네 혼자 살다보니 아무래도 지저분했다. 조난되기 전에도 자주 씻는 편은 아니었다. 그놈의 물세며 목욕탕비! 여름에는 그래도 찬물 종종 끼얹었지만 추워지면 곤란했다. 목욕탕은 너무도 비싸고 뜨거운 물은 나올랑말랑 했다. 겨울엔 땀도 잘 안 난다는 핑계로 물을 멀리 하고 살았었다. 그나마 이곳은 사시사철 찬물 팍팍 끼얹어도 시원하기만 했으니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씻었다. 드물게 매일 씻은 적도 있었고.

미끼통은 텅 비고 팔뚝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꼬랑지를 덩굴에 묶인 채 등 뒤서 대롱거린다. 한쪽 어깨에는 물고기가 매달린 덩굴을, 다른 쪽 어깨에는 낚싯대를 걸친 채 성무는 백사장을 걸어갔다. 갈빛 맨발이 사부작사부작 모래를 밟는다. 처음 며칠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는데 물속에 들어가서 낚시한다고 백사장에 벗어놓고 갔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파도에 휩쓸려갔는지, 물새가 뭣도 모르고 물어갔는지. 졸지에 맨발의 청춘이 되어버렸지만 예상외로 불편한 점은 별로 없었다. 뾰족한 돌멩이 밟고 깽깽댄 적 몇 번 있긴 했지만 그뿐이다. 적응력 좋은 발바닥은 금세 굳은살이 꽉꽉 들어차 제세상이라며 숲과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엉?”

숲으로 들어서려던 성무의 눈에 여우 비스무리한 놈이 눈에 띄었다. 그가 아는 한 이 섬의 유일한 육식동물인 흑갈색 털의 작은 개처럼 생긴 꼬마여우였다. 몇 번이나 가죽을 탐내했지만 짭퉁 토끼보다 경계심 많고 재빨라서 마주친 적도 얼마 없는 녀석이었다. 그놈이 땅에 코를 박은 채 죽어라 모래를 헤치고 있었다.

‘…뭐 숨겨놨나?’

개보면 먹다 남은 뼈다귀를 땅 파서 숨기고 그러던데. 성무는 낚싯대를 슬쩍 고쳐 쥐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창이 없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조그만 놈이니까 낚싯대로 후려쳐도 어찌 잡을 수 있을지도. 나도 부드러운 여우 털 좀 엉덩이로 깔아보자. 땅파는데 온통 정신이 쏠린 꼬마여우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다가가 낚싯대를 치켜드는 순간-

“엥?”

-컁?

여우가 후다닥 물러났다. 성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뭔가 허옇고 매끄러운 것이 모래알 사이로 아주 살짝 솟아나 있었다. 이게 뭐냐. 성무는 여우가 하던 짓을 이어받았다. 양손으로 땅을 파바박 파내기 시작했다. 과연 군대 삽질의 고수답게 엄청난 속도였다. 모래가 작게 산을 이루는 것을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선 꼬마여우가 쳐다보았다. 참 잘도 판다.

“어? 어? 뭐야, 이게. 왜 새알이 땅 속에서 나오지?”

바다거북의 생태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는 한성무 씨였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평소 보던 타원형과는 달리 아주 동그랬지만 그의 눈에는 틀림없는 새알로 보였다. 구덩이에서 머리를 들어 서너 걸음 밖에서 어슬렁대는 여우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나중에 먹으려고 숨겨놓았던 건가보다.

“야, 나 반 만 가지고 간다? 대신 이건 너 주마.”

성무는 등에 메고 있던 물고기를 휙 던졌다. 조그만 여우가 폴짝 뒤로 물러섰다가 코끝과 귀 끝을 동시에 움찔거린다. 물고기야 던지면 낚인다. 몇 안 되는 낚싯바늘만 채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새알은 고생고생해서 나무를 타야만 한다. 그나마 오를만한 나무요, 굵직한 가지라면 시도나 해볼 수 있지, 까마득한 높이에 한쪽 발만 올려도 우지끈 부러질 얄팍한 가지 끝에 붙어있으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모닝 프라이 먹기가 얼마나 힘든데! 성무는 히죽거리며 빈 미끼통에 하얀 알들을 차곡차곡 담아 넣었다.

“녀석, 재주도 좋지. 원숭이도 아니고 여우가 어떻게 새둥지를 털었대? 알고 보면 땅에다 둥지 짓는 새도 있는 거 아냐?”

거북이다. 꼬마여우는 난데없이 제 먹이를 던져주는 이 섬의 최고 포식자를 힐끔거렸다. 저 덩치 큰 동물이 미쳤나보다. 구경하기도 힘든 물고기를 버리고 요즈음엔 해변 사방에 널려있는 거북이 알을 선택하다니. 여우는 잠깐 눈치를 살피다가 제 몸뚱이의 절반이 넘어가는 커다란 물고기를 답삭 물고 숲으로 줄행랑을 쳤다. 성무는 멀어져가는 여우꼬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손까지 크게 흔들어준다. 아예 두 팔 다 들고 허우적허우적 마음을 담은 배웅인사를 보내었다.

“이거 나 다 가져가도 된다고? 그런 거지? 앗싸!! 다음번에도 좋은 거 있으면 불러라~!”

아이고 저놈이 뒤늦게 먹이 내놓으라고 발광을 하네. 여우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젤먼은 열다섯 살 어린 시절부터 머리며 눈썹이며 하얗게 서리가 앉은 지금까지 루프스 가에 봉사해온 노집사다. 루프스 가는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백여 개의 나라에 별장을 세워뒀다. 그러다보니 집사도 관리인도 건물 수 이상으로 많지만 젤먼은 그 중에서도 머리였다. 어느 한 지역이나 건물에 소속된 것이 아닌 젊은 주인 곁에 머무르며 속옷부터 포크까지 모든 일의, 모든 시중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주인의 취향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페르가 막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봐온 그다. 비페르의 부친은 5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모친은 열다섯 번째 세계일주 중이었기에 가장 오래 젊은 가주의 곁에 머무른 사람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최근 주인이 무언가에 지대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멸종되었다던 생물이라도 나타난 것일까.”

저택을 떠나가는 3D영상기기 기술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집사가 중얼거렸다. 그의 주인은 이곳에 도착한 직후부터 관찰실에서 도통 나올 줄을 몰랐다. 급한 일만 틈을 내서 처리할 뿐 온종일 무언가에 정신이 쏠려있었다. 이 섬에 마지막 도도라도 서식하고 있는 것일까. 젤먼은 깨끗이 깎은 턱 아래를 매만졌다. 뭔가 흥미로운 생물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찰실에서만 줄곧 머무르시지는 않을 터이니.

근데 뭘까. 진짜 뭐지. 어지간한 희귀동물은 모두 소유하셨는데. 루프스 가가 지은 동물원이 둘에 수족관이 하나다. 동물원 중 하나에는 판다까지 키우고 있다. 그런데 새삼 무얼까. 젤먼은 고심 끝에 루프스 가 동물원으로 연락을 취했다.

“오랜만이오, 허프슨 원장. 자리 하나 만들어 놓았으면 하는데. 환경은 적도 근처의 열대섬- 별장이 있는 곳 말이오. 그래, 거기.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가장 좋은 자리로 하나 비워 놓으시오.”

철저한 사전준비는 훌륭한 집사의 기본. 그렇게 집도 절도 없이 나라를 떠나야만 했던 한성무 씨에게 값비싼 우리 하나가 생겼다. 본인도 까맣게 모르는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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