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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My Friend (8/8)

Epilogue

: My Friend

겨울과 봄의 경계.

열네 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

실제 몸보다 한 치수는 큰, 전혀 맞지 않는 교복처럼 새로운 보육원에서의 생활 또한 잘 맞지 않았다. 학대를 당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보육원보다 분에 넘치는 곳이었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 행복에 끼지 못하는 건, 하진 뿐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그 감정이 하진은 너무 싫었다. 왜?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누군가 옆에 있다가 없어지면 원래부터 혼자인 것보다 더 외로울 것 같으니까. 무엇이든 영원한 건 없을 테니까.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

보육원은 새 학기 맞이 축하 파티가 한창이었다. 머리카락에 꽂은 파란색 리본을 어색하게 매만졌다. 부끄러웠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이나 되어선 이딴 장식품이나 하는 게, 그걸 다른 아이들처럼 즐기지 못하는 저 자신이 하진은 창피했다. 아마 그래서 그랬나 보다. 주위의 관심이 다른 아이에게 쏠린 틈을 타서 건물을 몰래 빠져나와 뒤뜰로 향한 것이.

뒤뜰 구석, 건물과 건물 틈에 있는 하진만의 아지트. 언제나 조용했던 그곳으로 걸음을 내딛던 하진은 돌연 두 발이 얼어붙었다. 훌쩍대는 소리가 그 틈을 메우고 있어서였다.

‘누가 울지?’ 보다는 ‘누가 내 아지트를 침범한 거지?’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아주 조심히 그 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질펀한 흙을 밟아버렸다. 발소리에 놀랐는지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또래였다. 보육원에서는 보지 못했던 또래 남자아이. 그렇다면 둘 중 하나. 새로 온 보육원생이거나, 축하 파티에 초대된 후원자이거나.

무엇이든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못 본 척, 등을 지고 아이에게서 벗어나려던 하진의 손목이 곧 다급하게 붙잡혔다.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간 고개가 아이의 얼굴을 향했다. 눈꼬리 끝에 달랑거리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진의 흰색 스니커즈 앞코가 반짝이며 젖어 들어갔다.

“…우는 거 아니야.”

안 물어봤는데. 하진의 눈동자는 무미건조했다. 그게 좀 무서웠는지 아이가 킁킁 코를 훌쩍였다. 저렇게 코 먹으면서 우는 게 아니라고? 그럼 방금 내 운동화에 닿은 건 콧물이라는 건가. 반박할 것은 많았지만 하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타인의 관심을 받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고, 타인에게 관심을 주는 것 역시 귀찮은 일이니까. 그렇게 녀석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떼어 하진이 다시 등을 돌리려 할 때였다.

“…사람이 우는데 그냥 가?”

다 갈라진 목소리 사이로 나온 불퉁한 어조, 그게 하진의 발길을 붙잡았다. 평상시였으면 그러든 말든 그냥 갔을 텐데 은연중에 나쁜 사람은 되기 싫었는지 하진은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대답했다.

“우는 거 아니라며.”

털썩, 녀석의 옆에 앉았다. 볼에 닿는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그러자 녀석이 먼저 하진의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덕분에 그 좁은 건물 틈에서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붉은색 벽돌이 가득했던 시야에 불쑥 녀석이 등장하고 만 것이다.

“이유 안 물어?”

“무슨 이유.”

“우는 이유.”

“우는 거 아니라며.”

“맞으면. 물어 봐줄 거야?”

“아니.”

제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 자국을 닦아내던 녀석의 손이 멈칫했다. 본인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왜?”

“별로 안 궁금해.”

솔직하게 말한 것뿐인데 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눈물 버튼이 눌린 걸까. 어떡하지. 달래줘야 하나. 아까처럼 무시할 수는 없게 됐다. 이젠 하진 본인이 이 녀석을 울린 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알았어. 물어볼게. 왜 울고 있었어?”

질문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녀석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일부러 우는 척했나 보다. 뭐야, 진짜. 하, 허탈함에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한층 내려가 있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어서….”

뭐? 하진은 금세 웃음을 거두었다. 미간 역시 짜증스레 구겨진 뒤였다. 이거 완전 애새끼네. 보아하니 나이는 저와 비슷한 것 같은데 오냐오냐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런가. 꽤 쓸모없는 것에 미련을 두는 성정인 듯했다.

“야, 그딴 게 무슨 대수라고 울어.”

“…그, 그딴 거?”

“그래. 친구, 그딴 거.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다 잊어버릴 것들이야.”

“…크응….”

녀석의 콧방울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 젠장. 또 울렸다. 필터링 없이 말이 심하게 나온 탓이었다. 하진이 당황스러움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릿속으론 열심히 수습할 말을 찾고 있었다.

“새로….”

“…….”

“그래. 친구 새로 사귀면 되지!”

다행히 이번엔 녀석의 마음에 든 대답이었는지 녀석이 눈을 반짝였다. 대충 울음도 그친 것 같으니 하진은 더 이상 녀석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울렸다는 도의적 책임감으로 이 정도까지 달래줬으면 된 거겠지.

“그럼 너랑 친구 할래.”

그러나 녀석은 하진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야. 지금 이 상황만 봐도 너랑 나랑 존나 안 맞는데 친구를? 퍽이나 하겠다, 그거.”

“이름이 뭐야?”

기가 차서 하진이 쏘아붙였으나 녀석은 꿈쩍 않고 오히려 하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느새 녀석의 눈가를 적시던 눈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불그스름한 눈 밑만이 처연하게 드러난 채였다. 그 눈망울은 기어코 대답을 들을 작정으로 물끄러미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하진.”

동정의 힘은 컸다. 적어도 하진에겐 그랬다. 우는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아이의 막무가내 질문에 마지못해서라도 대답해줄 만큼.

“나이는?”

“이제 중학교 들어가.”

“나랑 똑같네.”

두 무릎을 꼭 껴안으며 그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녀석은 한시도 하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굴을 수놓은 해맑은 미소가 줄곧 저에게 닿자 하진은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예쁘다.”

이어 들린 녀석의 속삭임은 하진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묘한 기분이 심장을 간질였다. 그 감정이 사라지기도 전에 녀석은 하진의 머리카락에서 똑딱 머리핀을 빼내었다. 그리곤 손바닥을 펼쳐 그것이 잘 보이도록 놓았다. 파란색 리본으로 된 머리핀이 그렇게 녀석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이질적인 모양새였다.

“이거.”

“…….”

“예뻐.”

그리고 그 순간, 겨울과 봄 사이의 여린 바람이 하진과 녀석 사이를 두드렸다. 그 낯선 감각에 몸이 굳어버린 하진은 눈조차 감지 못하며 멍하니 그 바람을 맞았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롯이 그 감각을 느낄 뿐이었다.

“우도현! 어디 있니?”

녀석을 찾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낯선 침묵 새로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

그렇게 한 번으로 족했던 녀석을 다시 만났다. 중학교 입학식이 한창인 이곳, 강당에서.

“선서. 신입생 대표, 우도현.”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스크린에 떠오름과 동시에 단단한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곧 녀석은 반듯하게 펼친 손바닥을 내리곤 저벅저벅 단상을 내려갔다. 하진의 시선은 그런 녀석의 뒤꽁무니를 따르기 바빴다. 무의식이었다. 제 눈에 비친 녀석이 그때 눈물 콧물 흘리던 녀석과 너무 달라서. 그게 역시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우도현. 입술을 달싹여 작게 녀석의 이름을 불러봤다. 얼핏 듣긴 했으나 잘 떠오르지 않던 이름이라 썩 입에 붙진 않는다. 그래도 단정한 녀석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뭐, 아무렴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녀석일 테니…·

안- 녕-.

하진의 생각은 끝을 맺지 못했다. 느닷없이 시선을 가로챈 녀석 때문에. 하진이 서 있는 맨 끝으로 걸어와 자연스레 하진의 뒤에 서는 우도현 때문에. 그리고 그 녀석이 환하게 웃으며 입 모양으로만 건넨 그 인사 때문에. 하진은 멍청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은 내려야지.”

선서 후 다 같이 내린 손을 아직 들고 있을 만큼 멍청했다.

“아.”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손을 내렸지만, 이미 볼은 창피함에 붉게 달아오른 뒤였다. 혹여 본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돌아보려던 하진의 몸이 별안간 고정됐다. 뒤에서 도현이 못 움직이도록 어깨에 손을 올린 탓이었다. 이윽고 하진의 귓가에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들면 혼나.”

뒷덜미에 숨이 닿았다. 흠칫.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당연할 정도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바로 그때, 갑자기 끼이익- 마이크가 쇳소리를 내었다. 쿵쿵. 심장이 뛰며 목구멍까지 부닥쳤다. 언제부터 이만치 뛰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서야 심장 박동이 제자리로 돌아온 거, 그것만 어렴풋이 알 뿐이었다.

그렇게 입학식이 진행될 동안 하진은 속으로 빨리 끝나기만을 기원했다. 뒤통수를 뚫어버릴 것처럼 닿는 시선이 너무 뜨거워 온 신경이 그리로 쏠려버렸으니 당연했다. 차라리 착각이기를. 그래서 붉어졌을 제 목덜미를 보지 못했기를.

“1반부터 교실로 돌아가세요.”

드디어 끝났네. 하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교실로 뛰어가고 싶었다.

“하진아.”

아, 단어를 하나 빼먹었다. 조용히. 조용히 빨리 가고 싶었는데.

“…뭐야?”

그 ‘조용히’의 의미가 적어도 지금처럼 도현과 나란히 걸어가는 그림은 아님이 분명했다.

“우리 같은 반이잖아.”

“근데?”

“같이 가자고.”

“왜?”

“나 친구 없어서.”

도현이 눈꼬리를 예쁘게 접었다. 그러나 그 웃음과는 별개로 도현이 거짓말하고 있단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벌써 녀석의 주위로 아이들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믿을 리가. 이내 주위의 수군거림은 하진을 향하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이랑 가. 너랑 놀고 싶은 애들 천지다.”

하진이 턱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시큰둥한 말투가 정말 도현에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관심 없는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현에 대해선 이미 처음 봤던 날 모조리 알게 됐으니까. 녀석이 후원 기업의 아들이라는 것도 그 기업이 유명한 W 엔터테인먼트라는 것도.

“난 너랑 말하고 싶은데.”

“왜?”

“우리 친구잖아.”

“아닌데.”

그래서 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녀석이 말하는 친구 사이에도 엄연히 부류라는 것이 있을 텐데, 하진은 저와 녀석의 부류가 천지 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아니야?”

“나 친구 없어.”

“나 있잖아.”

“너 친구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왜 아닌데.”

도현을 떨어뜨리기 위해 빠르게 걷던 하진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뒤따르던 도현이 관성을 이기지 못하곤 하진을 앞질러버렸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도현을 보던 하진은 곧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어? 야! 도현이 애타게 하진을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그렇게 옆자리가 빈 도현은 순식간에 아이들로 둘러싸였다.

그 사이 하진은 원치 않는 관심에서 벗어나 교실로 들어갔다. 아, 자리 없네. 우도현 따돌린다고 너무 돌아서 온 게 문제였다. 뒷자리에 앉고 싶었으나 이미 다 채워진 터라 하진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도 어중간한 자리보다는 맨 앞 구석이 나을 것 같아서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문 바로 옆은 아무도 선호하지 않는지 다행히 두 자리 다 비어 있었다. 하진은 재빨리 메고 있던 가방을 복도 쪽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그리곤 그대로 앉아 가방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 학기의 시끄러운 설렘은 하진과 동떨어진 것인 양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였다.

드륵-. 바로 옆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빛이 차단된 시야에 청각이 곤두서 의도치 않게 옆자리의 행동이 파악됐다. 의자에 앉아 가방을 뒤적이고, 달깍 펜을 눌러 무언가를 끄적대고. 그러다 아무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우리 왜 친구 아니냐고.”

아, 씨발. 깜짝이야. 놀란 하진이 어깨를 떨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뜨거워진 귀를 문지르며 처박은 고개를 드니 마주한 것은 도현의 싱글거리는 낯짝이었다. 젠장. 같은 반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옆에 자리 있어.”

“그래?”

나름 무섭게 인상도 쓰고 목소리도 깔며 말했는데 도현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도현이 갑자기 일어나 반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여기 앉을 사람 있어?”

미친놈. 녀석한테서 벗어나려고 한 거짓말이 오히려 녀석을 자극한 꼴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당연하지. 애초에 빈 자리였으니까. 곧 이어진 하진의 마뜩잖은 시선을 도현은 얄궂은 표정으로 받아쳤다.

“없대.”

으쓱거리는 어깨 역시 몹시 얄미웠다. 도통 의중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하진이 정말 상종하기 싫은 부류이기도 했다. 차라리 무시로 일관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가도 옆에 꽂히는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친구 왜 안 하는데?”

그놈의 친구, 친구. 친구 못 사귀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말끝마다 친구를 외치는 도현에 하진은 진절머리가 났다. 그러면 그냥 도현의 질문에 대답해주고 끝내면 될 일인데 그러지도 못한다. 왜?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그냥이 이유니까. 이렇게 말한들 도현이 포기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달싹이는 하진의 입술에서 옅은 고민이 묻어났다.

“자자, 다들 자리에 앉아라.”

때마침 담임이 들어오는 덕에 하진은 그 난감한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던 시선 역시 떨어져 나갔다.

“나는 1학년 1반 담임을 맡게 된….”

담임이 칠판에 써 내려가는 이름 석 자는 하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머리가 생각으로 가득 찬 탓이었다. 우도현을 어떻게 떼어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역설적으로 우도현만을 생각하고 있단 것을 하진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담임의 목소리는 허공 속으로 내버리며 도현만이 하진의 신경을 독점한 채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진아.”

“…….”

“하진아.”

“어….”

“…….”

“어?”

멍하게 있던 하진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어리벙벙한 얼굴로 답했다. 톡톡. 도현이 책상을 쳤다. 그에 고개를 떨구니 웬 유인물 한 장이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유인물의 제목이었다. 새 학기면 으레 하는 자기소개, 뭐 그런 건가 보다.

[XX 중학교 1학년 1반 이름 : 박하진]

[졸업한 초등학교 : XX 초등학교]

[친한 친구 : ]

별 탈 없이 인적 사항을 기재하던 하진의 손이 일순 어느 한 질문에서 멈칫했다. 자기소개면 자기만 소개하면 될 텐데 이런 건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하진이 그 칸을 넘기곤 짜증스러운 손길로 나머지 칸들을 채워 넣었다. 그러다 또 한 번 [장래 희망] 칸에서 손을 멈추었다. 이번엔 아예 쥐고 있던 펜까지 던지듯 놔버렸다. 옆에 녀석은 잘만 쓰는데 저만 막히는 게 많아서, 그게 퍽 심술이 났다.

이내 또르르 굴러가던 펜이 도현의 책상으로 넘어갔다. 도현은 열심히 유인물을 채우는 중인지 펜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뭘 저렇게 열심히 쓰는 거야? 심술과 호기심이 뒤섞여 불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도현의 유인물로 살짝 눈동자를 내렸다. 이어 하진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친한 친구 : 박하진⧓]

친한 친구 옆에 박하진. 그 옆에 파란색으로 리본을 꽉 채워 넣은 우도현의 자기소개서. 어째 본인보다 하진이 더 주인공 같은 그 모양새가 하진의 시선을 붙잡았다.

“미친.”

오밀조밀한 입에서 결국 탄식에 가까운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

“집 가?”

일찌감치 책가방을 멘 하진에게 도현이 물었다. 하진은 입학식이라고 점심 급식도 안 주는 학교 때문에 어디서 끼니를 때워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는 도현에게 쓸 정신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

핸드폰을 보며 대강 답하니 도현도 머쓱했는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하진은 하던 고민을 마저 할 수 있었다. 보육원에 도착할 즈음이면 점심시간이 지나있을 텐데 따로 밥 차려달라고 하기도 뭐 했다. 그냥 한 끼 굶는 게 나으려나.

“뭐 먹고 갈래?”

주머니를 뒤적이던 하진이 순간 멈칫했다. 손에 딱 천 원이 잡혔다. 도현이 얼마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천 원만 더 합하면 김밥 한 줄은 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조금 혹한다. 지금 하진으로서는 쉽사리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떡볶이 먹자.”

“…….”

“내가 살게.”

아. 잠깐 흔들렸던 하진의 마음이 돌아섰다. 도현이 의미 없이 내뱉은 마지막 말 때문에.

“아니, 됐어.”

누굴 돈 없는 거지새끼로 보나. 결코 이런 마음은 아니었다. 돈 없는 거지새끼는 맞으니까. 오히려 그래서 거절했는지도 모르겠다. 거지새끼 주제에 후원자 도련님이랑 같이 어울리는 모습이 퍽 꼴사나울 듯해서.

“왜?”

하진의 단호함이 제 예상과 달랐던 모양인지 도현은 꽤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진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종례를 마치겠다는 담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갈 뿐이었다. 버스만 바로 타면, 얼추 보육원 점심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딛는 하진의 걸음이 조급했다.

그러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제일 꼭대기 층인 1학년이 밑에 층에서 물밀듯이 나오는 2학년, 3학년보다 빠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결국 학생들 틈바구니에 낀 하진은 뒤따라오던 도현과 앞뒤로 나란히 걷게 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인파에 휩쓸린 채로 간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걸어가? 아니면 버스?”

저 새끼는 자존심도 없나. 하진이 마뜩잖게 도현을 쳐다봤다.

“야.”

“응?”

“따라오지 마.”

“따라가는 거 아닌데?”

도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랄하네. 딱 봐도 따라오는 거구먼, 뭘 아니래. 하진이 속으로 도현을 비웃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버스 정류장에서 멈춘 뒤였다. 여전히 제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하진에게 도현은 버스노선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 버스 타.”

그와 함께 도현이 짓궂게 웃었다. 아, 젠장. 잘못 짚었다. 하진이 무안한 나머지 입을 다물었다. 사과해야 하는데 민망함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도현의 눈치를 슬쩍 본 하진은 그냥 잠자코 도현 옆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 타나 보네?”

“어.”

“같은 버스면 좋겠다.”

어이없는 바람이었다. 녀석이 사는 집과 저가 가는 보육원이 비슷한 방향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버스가 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버스가 한 시간에 몇 대 안 다니는 게 문제였지만.

“몇 번 타?”

“마을버스.”

“그거 잘 안 오잖아. 나도 기다려봐서 알아.”

“응.”

“이제 뭐 해? 할 거 없어?”

몹시 유연하게 넘어간 질문에 하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도현의 웃는 낯이 무슨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하진의 미심쩍은 눈초리를 느꼈는지 도현이 어깨를 으쓱이곤 그냥이라고 답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냥이라고 안심시키려는 것을 보니 저 녀석, 분명 제 발 저린 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번지르르한 차 한 대가 도현 앞에 섰다. 이내 지잉- 창문이 내려가고 그 틈으로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 끝났나 봐?”

그에 도현이 대뜸 차에 달라붙어 대답했다.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실장 누나! 어디 가세요?”

“나 회사. 집 가니? 데려다줄까?”

그녀는 도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차 도어락을 열어주었다. 그리곤 그 옆에 무심히 서 있는 하진을 보며 외쳤다.

“친구야, 너도 타!”

“…네?”

“빨리!”

난데없는 여자의 재촉에 하진은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그런 하진을 도현이 냅다 붙잡아 차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엉덩이가 차 시트에 안착했고,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대낮에 그것도 학교 인근 대로변에서 납치라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차 문이 닫히고 차가 다시 출발하는 순간까지도 하진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혹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말해두는데.”

“…….”

“친구야, 나 이런 사람이야.”

새파랗게 질린 하진의 시야에 명함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하진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명함을 받아들었다.

[W 엔터테인먼트 신인 개발팀 실장 서태희]

아. 다행히 신분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하진을 태희가 백미러로 확인하곤 피식 웃는다.

“안녕, 친구. 거기 보이지? 실장 서태희.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뭐야?”

백미러로 하진을 훑는 태희의 눈빛이 노골적이었다. 이건 딱 길거리 지나가다가 곧바로 캐스팅 명함 꺼낼 때, 바로 그 번뜩이는 눈빛이었다. 이를 알아챈 도현이 먼저 대답을 가로챘다.

“누나. 얘 낯가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아이돌 해볼 생각은 없니?”

“갑자기요?”

“얼굴이 딱 덕후몰이상인데.”

태희는 도현의 대답을 전혀 듣지 않는 듯했다. 혼잣말을 가장한 진심을 흘려보내며 머리로는 이미 춤추는 하진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그냥 튀지 않고 적당하기만 하면…

“박하진이요.”

“…….”

“제 이름.”

됐다. 심지어 목소리도 예쁘다. 하진의 얼굴 위로 옅게 띄워진 미소는 투명하기까지 했다.

“너 진짜 아이돌 해야겠다.”

잘만 키우면 박하진은 분명 독보적인 아이돌이 될 것이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태희는 제 안목을 믿었다.

“실장 누나 말 그냥 흘려들어. 부담될 텐데 내가 미안.”

태희의 적극적인 구애에 오히려 도현이 하진에게 사과했다. 허? 하진의 입장에선 대단히 어이없는 사과였다. 지금까지 본인이 가장 부담스러웠다는 걸 정녕 모르는 건가 싶었다. 한마디를 해주려다가 괜히 입만 아플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게 본인을 향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졌는지 도현은 들뜬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근데 너 진짜 잘생기고 예쁜가 보다.”

“…….”

“저 누나 눈 엄청 높거든.”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인데 하진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도현의 칭찬이 영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마냥 싫지도 않았다. 배시시 참고 참은 웃음이 남몰래 새어 나올 만큼 어쩌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진아, 나중에 도현이랑 연습실 놀러 와. 내가 책임지고 구경시켜준다.”

“들었지? 다음에 연습실 놀러 가자.”

타인이 베푸는 이유 없는 호의는 여전히 하진에겐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든가.”

그러나 호의 아래 깔린 선한 관심마저 외면하기엔 생각보다 그동안의 하진은 너무 외로웠던 모양이다.

***

“하진아, 이것 봐.”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도현은 끊임없이 별별 앨범들을 가져와서는 하진의 눈앞에 흔들어댔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녀석을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나 아이돌 모른다니까.”

“너 주려고 가져왔는데.”

“아! 다른 애들이나 주라고!”

툭-. 책상 위에 어질러져 있던 앨범 하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조례 전의 소음 사이로 짜증 섞인 하진의 목소리는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이내 도현이 고개를 숙인 채 떨어진 앨범을 주웠다. 머리 위에 쫑긋대던 귀가 한풀 꺾여 보였다.

“같이 보고 싶었는데….”

뭉개지는 말끝이 영 거슬렸다. 살랑거리던 꼬리도 축, 처진 것 같고. 무엇보다 행색부터 번지르르한 녀석이 세상 다 잃은 표정을 하는 게, 그 꼴을 만든 게 저라는 사실이 하진을 몹시 짜증 나게 했다.

“아, 알았어. 줘. 가져갈게.”

“정말?”

“어. 야, 맞다. 너 담임이 교무실로 오래.”

물론 거짓말이었다. 대놓고 말 돌리는 티도 났을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의심도 안 되는지 하진에게 앨범을 쥐여주고는 홀랑 교실을 나가버렸다. 순진한 건가. 어쩐지 미안해지는 하진이었다.

힘들게 구했다는 앨범 한 장만 빼고 도로 도현이 가져온 쇼핑백에 넣었다. 이건 잘 설득해서 다른 애들 주라고 할 셈이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속에는 그 나이대의 시기와 질투가 범벅되어 있었다.

“쟤 뭔데 도현이가 저렇게 잘해주냐?”

“불쌍해서 그런가 보지.”

하진을 향한 관심은 잔뜩 날이 선 채로 하진 옆까지 다가왔다. 찔리지 않으려면 무시해야만 했다. 상대하기 귀찮은 척, 관심 없는 척, 그렇게 귀를 닫아야만 했다.

“왜?”

“고아잖아. 보육원 산대.”

하지만 선을 넘는 새끼들을 두고 볼만큼 하진은 등신이 아니었다. 남의 가정사에 어떤 불행이 있든, 그래서 어디 살든. 이게 씨발, 지들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열 받게.

하진은 곧바로 일어나 성큼성큼 소음의 근원지로 걸어갔다. 서너 명의 무리. 그중엔 무리의 짱이라도 되는 양 하진보다 두 배 정도 큰 체격의 녀석이 주도적으로 하진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진이 제 앞에 서자 녀석이 일어났다. 내리까는 시선이 하진에게 닿았다.

“뭐야?”

명백한 기 싸움이었다. 녀석이 먼저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럼에도 하진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을 메마른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어 녀석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퍽-! 하진이 녀석의 종아리를 발로 찼다. 그에 녀석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하진은 그대로 녀석의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얼굴을 가격했다. 퍽, 퍽! 녀석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위 아이들이 하진을 붙잡았다.

하아. 하아. 숨을 헐떡이면서 하진이 순순히 물러났다.

“씨발! 야, 저 새끼 꽉 잡아!”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 시작이었다. 녀석의 호령에 하진을 포박한 녀석들이 꽉, 손에 힘을 싣는다. 벗어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하진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내 다시 퍽-! 조금 전보다 강한 타격음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욱. 우욱. 녀석의 발이 하진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러다 하진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종아리를 가격한다. 윽. 하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녀석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하진의 얼굴을 몇 번 더 내리쳤다.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흐르고, 흐르던 피가 입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정신 사납게 귓가를 때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찢길 듯한 고통이 온몸을 에워쌌다. 그렇게 점점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이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담임이 등장했다. 녀석의 주먹질이 멈췄고, 주위의 소음 또한 사그라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하진을 담임이 일으켜 세웠다. 상체만 들어 올렸는데도 복부가 아파서 뒤질 것 같았다.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이내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뜬 눈으로 하진은 보고야 말았다.

아이들의 무리에 섞여 겁에 질린 듯 저를 바라보는 도현을.

이래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씨발.

***

하진은 오전 내내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대신 교무실 구석탱이에서 반성문을 썼다. 죄다 까져서 아픈 손으로 꾸역꾸역 써 내려갔다. 물론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고규성? 맞다, 고균성. 존나 무지막지한 새끼.

“균성이랑 하진이는 선생님이 지켜볼 거야.”

“네. 죄송합니다.”

“그래. 일단 가 봐. 절대 싸우지 말고!”

“네.”

담임의 신신당부와 함께 점심 종이 울렸다. 고균성은 밥 먹을 생각에 지난 기억을 잊었는지 갑자기 하진에게 친한 척을 했다. 하진 옆에 바짝 붙어서 밥 안 먹으러 가냐고도 물었다. 하진이 대꾸 없이 눈길을 흘리니 그제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눈치였다. 하진의 얼굴엔 시퍼런 멍과 굳은 피딱지가 가득했다.

“너나 맛있게 먹어라.”

더 이상 상종하기 싫어 대강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균성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하진은 급식실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입맛이 없었다. 이 꼴로 교실에 가기도 싫었다.

그래서 무작정 보건실로 갔다.

“어머, 쌤 지금 나갈 건데?”

“그냥 누워만 있을게요.”

“그래, 그럼 쉬고 있으렴.”

혹시라도 제 얼굴을 보면, 이건 왜 이러냐, 저건 왜 이러냐, 사사건건 물어볼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대로 가니 선생님도 별말 없이 나가신다.

인기척이 사라진 보건실은 몹시 조용했다. 운동장에서 들리는 함성만이 간간이 적막을 깨뜨렸다. 털썩,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던 하진은 이내 시선을 거두곤 그대로 누워버렸다. 윽. 쪼그린 자세는 고통을 동반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것들이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진은 눈을 감았다. 점점 졸음이 몰려왔다.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그 순간, 미안해- 아득하게 들려온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침범했다. 나부끼는 바람에 커튼이 펄럭이고 강한 햇살이 하진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전부 하진에게 눈을 뜨라고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하진은 힘겹게 눈꺼풀을 올렸다.

“…뭐야.”

그리고 마주쳤다. 아주 조용히 제게로 걸어오던 도현과. 피하기도 곤란할 만큼 단번에.

“아…. 미, 미안.”

녀석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왕좌왕하며 말까지 더듬는 게 꽤 꼴사납기도 했다. 여태껏 녀석이 저를 대하던 친구의 모습이 아닌, 두려운 존재를 대하는 듯한 행동이 하진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역시 이젠 나랑 친구겠다는 개소리는 안 하려나.

“…나 이것만 두고 가려고 했어.”

도현이 하진에게 내민 것은 죽이었다. 그것도 방금 갓 사 온 것처럼 온기가 가득한. 얼떨결에 이를 받아든 하진이 도현을 올려다봤다. 녀석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흐르던 찰나였다. 이상하리만치 반짝거렸다.

“네가 사 왔어?”

“…아, 응.”

‘처럼’이 아니라 진짜 갓 사 온 거였네. 하진이 죽 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하여튼 미친놈이다. 하진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도현은 하진의 이해 범주를 넘는 녀석이었다. 도무지 모르겠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너조차 내가 불쌍해서 이러는 거냐고, 하진은 묻고 싶었다.

“미안해.”

그런데 묻기도 전에 이렇게 대뜸 미안하다고 하면…. 뭘 어쩌라는 거야. 하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조금 전, 질겁한 얼굴의 도현이 자꾸만 떠오른 탓이었다.

녀석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저런 새끼랑 친구 하겠다고 설쳐댄 본인이 한탄스러웠을까. 아니면, 처맞고 있는 그 순간조차 불쌍했을까. 뭐가 됐든 하진으로서는 최악일 테다. 가방에 챙겨둔 앨범을 생각하니 하진은 스스로가 더욱 비참했다. 그 속엔 혹시 녀석이라면,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작은 기대가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야.”

“…….”

“뭐가 미안한데.”

어조가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도현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애들한테 들었어. 괜히 내가 너한테만 잘해줘서 애들이 시비 걸었다며….”

괜히? 하진의 잇새로 퍽 허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괜히? 야. 그럼 넌 지금까지 괜히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

무심결에 섞인 원망이 도현을 탓했다. 대답 없이 그저 감쳐문 도현의 입술이 미웠다. 저 입에서 혹여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문득 두려워졌다. 차라리 대답을 듣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

“…친구니까.”

“…….”

“너랑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나지막이 들린 도현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하진에게 닿았다. 하진이 찬찬히 시선을 올려 도현을 마주했다. 도현은 떨고 있었다.

“너는…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계속 잘해주다 보면 너도 날 친구로 여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어.”

꾸밈없는 말들이 돌연 하진을 뒤흔들었다. 그중엔 하진이 걱정한 그 어떤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

그리고 그제야 하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현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저를 향한 두려움도, 연민도 아닌 그저 자책이라는 것을. 본인 때문에 하진이 위험에 빠졌다는 그러한 종류의 자책. 그것은 어쩐지 하진을 안심시켰다.

정말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우리 친구라며.”

그렇게 밀어내고 밀어냈던 친구가 녀석과는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친구면 그냥 내 편이나 들어줘.”

“…….”

“미안해. 이딴 말 하지 말고.”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 그 텅 빈 마음에 우정이란 감정이 피어올랐다. 몹시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감정이었으나 하진은 마냥 싫지 않았다. 왠지 조금 기쁘기도 했다.

“진짜?”

도현이 믿기 어렵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우리 이제 친구라고?”

몇 번을 확인할 셈인지 도현은 한 번 더 확실히 하진에게 물었다. 이번엔 하진도 정확히 말로 답했다.

“어. 우리 친구야.”

별것 아닌 말인데도 하진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미 팔뚝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 채였다. 이를 벅벅 문지르던 하진이 이내 도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갈색 머리칼이 햇살을 머금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아까의 땀방울이 그랬던 것처럼 도현은 또다시 빛나고 있었다.

순간 묘한 감정이 솟구쳤다. 심장이 쿵쿵대고, 숨이 막혔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하진은 무심코 굳어버린 입가의 피딱지를 핥아버렸다.

“아!”

갑작스러운 고통에 하진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 때문에 크게 벌어진 입가에선 간신히 아물던 피딱지가 도로 찢어져 붉은 피를 내보내고 있었다.

“괜찮아? 이거 치료도 안 했네.”

도현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하진에게 바투 붙었다. 도현의 단정한 눈동자가 올곧게 하진의 입술만을 담아냈다. 군데군데 터지고 갈라진 입술이 보기만 해도 아팠다. 이걸 치료도 안 하고 내버려 둔 하진에 도현은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약 바르자. 그래야 흉 안 져.”

이윽고 일어나려는 도현을 하진이 붙잡았다.

“야, 됐어.”

가뜩이나 어색한데 이 상황에서 무슨 약까지 바른다고.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도현은 단호히 하진을 떼어내곤 바로 약품 상자로 가 소독약과 연고를 꺼내었다. 이어 그것들을 들고 하진 앞에 선 도현은 어딘지 뿌듯해 보였다. 하진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말이다.

“안 어울려.”

도현이 거즈에 소독약을 묻혔다. 삽시간에 공기 중으로 알코올 냄새가 퍼졌다.

“네 얼굴에 이런 상처 안 어울린다고.”

도현이 닦아내는 입가가 간지러웠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자꾸만 코끝을 간지럽히는 탓에 하진은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심장 소리가 선명히 고막을 때렸다.

처음 사귄 친구라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

그날 이후로 하진은 자연스럽게 도현 무리가 되었다. 무리라는 표현이 어색하긴 한데 어쨌든 도현을 둘러싼 아이들과 같이 다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속엔 고균성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진의 팔을 붙잡았던 재민과 성윤도 있었다. 그들은 처음엔 하진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으레 그렇듯 무리에 융화되면서 하진과도 친구가 되었다.

“박하진, 여기!”

제일 먼저 급식을 받은 재민이 손을 흔들며 하진을 불렀다. 소란스러운 아이들 틈에서 간신히 재민을 발견한 하진이 얼른 그곳으로 걸음을 뗐다. 무조건 재민의 반대편에 앉아야 했다. 지난번 멋모르고 옆자리에 앉았다가 밥 먹는 내내 떠드는 재민 때문에 고막을 잃을 뻔했으니까.

“오늘 끝나고 피시방?”

하진이 제 반대편에 앉자마자 재민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귀찮은데. 차마 이렇게 답할 수는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 도현이 도착했다. 도현은 당연하게 하진 옆자리에 급식 판을 놓고는 의자를 빼 앉았다.

“하진이 오늘 약속 있을걸?”

응? 저도 모르는 약속이 갑자기 생겼다. 당황스러움에 하진이 도현을 바라보니 도현이 눈썹을 찡긋거린다. 자기만 믿어라, 뭐 이런 건가.

“까비. 도현, 너는?”

“나도 약속.”

“아, 나 누구랑 노냐.”

“미안, 미안. 다음에 가자.”

사과의 의미로 도현이 소시지 하나를 재민에게 넘겨줬다. 아쉬워하던 재민은 이 정도 사과면 받아주겠다면서 그 소시지를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뒤이어 고균성을 비롯한 아이들도 주위에 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음이 쏟아졌다.

“야야. 어제 음악방송 봤냐? 소녀걸스 누나들 완전 귀여워.”

재민 옆에 앉은 균성이 흥분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에 재민도 잔뜩 신이 나선 맞장구를 쳤다.

“레몬핑크 누나들 제복이 진짜 오졌다.”

무심하게 둘의 대화를 듣던 하진이 지난 밤 보육원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떠올렸다. 제복이라고 하는 걸 보니 그 노래 부르던 가수가 레몬핑크였던 모양이다. 노래랑 콘셉트가 잘 어울려서 동생들 보는데 옆에 껴서 봤던 기억이 난다.

“야, 성윤. 넌 소녀걸스 파냐, 레몬핑크 파냐.”

두 그룹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균성이 이번엔 성윤에게 물었다. 각자 취향이 있는 거지 유치하게들 논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게 저 질문이 온다면, 누구라고 답해야 할까 하진은 고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진은 양쪽 그룹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둘 다 별로.”

“헐, 왜? 넌 그럼 누가 좋은데?”

“요즘엔 샤인보이즈 형들이 좋던데.”

굳이 따지자면, 하진도 성윤처럼 샤인보이즈에 더 눈길이 가는 편이었다. 그냥 잘생기고 멋진 춤을 추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그러나 이 단순한 호감이 퍽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하진은 곧바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게이야, 뭐야.”

또래 사이에서 같은 성별을 향한 호감은 먹잇감이 됐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그것은 별안간 이상한 것으로 전락하여 결국엔 맞고 틀리고의 문제로 귀결된다.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고? 그건 이상한 거야. 그건 틀린 거야. 이런 식으로 내던져진 먹잇감을 물어뜯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하진 또한 그래야만 했다.

“왜? 나도 샤인보이즈 좋아해.”

그런데 도현은 아니었다.

먹잇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소신 있게 본인의 의견을 내비칠 뿐이었다. 이내 낄낄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치게 됐고, 어색한 정적이 공간을 채웠다. 아, 젠장. 하진은 순식간에 스스로가 비겁해진 기분이 들었다. 푹-. 하진이 소시지를 찔렀다. 정곡을 찔린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무리에 물들려 한 제 모습. 그게 못내 부끄러워졌다.

“그, 그렇지. 멋있잖아.”

뒤늦게 혐오를 감추려는 균성보다 속으로 철저히 계산하고 있었던 자신이, 어쩌면 더 혐오스러운 인간일지도 모르겠다고, 얼핏 그런 생각을 하며 하진은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애꿎은 김치가 몇 번이고 뒤집혔다. 그러다 볼에 닿는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보네.”

“뭐가.”

“소매에 다 묻었잖아.”

곧바로 도현이 하진의 손을 낚아챘다. 하얀 옷 소매 끝엔 아주 살짝 케첩이 묻은 채였다. 아. 언제 묻었지. 아까 소시지를 너무 세게 찔렀나. 하진 본인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을 도현은 어떻게 봤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균성이 질문을 가로챘다.

“맞다, 도현아. 너 오늘 가족 모임이라고 했나?”

“응, 가족 모임. 엄마 출장 갔다 오셨다고 오늘 외식하재.”

입으론 균성에게 대답하면서 도현의 눈과 손은 하진을 향해있었다. 휴지에 물을 묻히곤 살살 하진의 옷 소매를 문지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불그스름한 자국은 서서히 번지더니 이내 완전히 스며들어 약간의 색만을 남겼다.

도현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대로 굳어버려 지워지지 않았을 자국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고마운 게 맞았다. 그런데도 하진은 이를 마냥 좋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완벽히 지워지지 않은 자국이 그저 오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도현의 행동이 고맙기보다는 불편했다. 아니지. 샘이 났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가.

“너희 가족 모임 되게 자주 한다.”

“응. 우리 집 진짜 화목하거든.”

저렇게 바르고 잘난 놈이 왜 저랑 친구를 하냐고, 기어이 하진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격지심의 문제였다.

***

“아, 거기. 조금만, 조금만 더.”

“윽!”

툭-. 집게에 달랑거리던 인형이 떨어졌다. 벌써 몇 번째 떨어짐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옆에서 하진이 코칭을 하는데도 도현의 망할 손은 자꾸만 어긋난다. 아니지, 이건 동체 시력의 문제인 것 같다. 매정하게 오락실을 나가려는 하진의 팔뚝을 부여잡은 도현이 간절히 외쳤다.

“하진아, 딱 한 판만 더 할게. 진짜 딱 한 판만!”

한 판만의 굴레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굣길에 느닷없이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며 학원을 빠지겠다던 도현이었다. 대충 어르고 달래서 딱 한 시간만 놀고, 돌려보낼 셈이었는데 애초에 도현은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지 하진을 놔주지 않았다. 결국 저녁으로 햄버거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래. 여기가 문제였다.

하필 보육원 가는 길에 오락실이 있는 것도, 그 안에 인형 뽑기 기계가 있던 것도, 그리고 도현이 인형 뽑기를 더럽게 못 하는 것도. 아주 총체적인 문제였다. 이렇게 하진이 고개를 내젓는 사이 도현이 몰래 기계에 천 원을 집어넣은 모양이다. 반짝반짝, 4판 남았다고 기계가 친절히 알려주고 있었다.

“같이해.”

“응? 어떻게?”

“이렇게.”

하진의 손이 살포시 도현의 손 위로 포개어졌다. 그에 도현이 움찔거렸지만, 하진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움직였다. 탁- 타닥- 탁탁-. 빠르게 조이스틱을 움직이던 하진이 잠시 멈추곤 허리를 숙여 기계 안을 살폈다. 약간 벗어난 것 같은데. 탁. 다시 왼쪽으로 집게를 움직였다. 이번엔 쪼그려 앉아 목표물과 집게의 위치를 확인했다. 완벽했다. 하진은 망설임 없이 단번에 내림 버튼을 눌렀다.

“어…어?”

집게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도현이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이윽고 정확히 목표물의 몸통을 감싸 쥔 집게가 그대로 인형을 골인 지점에 안착시켰다. 어벙한 도현을 뒤로한 채 하진은 상품 출구라 적힌 공간으로 쑥 손을 넣어 인형을 빼냈다. 그리곤 이를 도현의 품에 안겨주었다.

“됐지?”

헐, 대박. 대박, 하진이 진짜 대박! 도현은 냅다 하진을 껴안았다. 덕분에 도현의 품 안에 있던 토끼 인형이 둘 사이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이제 가자.”

낑낑대며 도현에게서 빠져나온 하진은 마치 며칠 전 본 영화의 남자주인공처럼 쿨하게 뒤돌았다. 그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멋진 어른의 정석이었나, 아무튼. 하진의 걸음이 의기양양했다. 인형 뽑기를 한 번에 성공한 본인에게 한껏 취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느끼는 게 하진만은 아닌지 도현 또한, 품에 안은 인형을 사랑스럽게 매만졌다.

“닮았다.”

“뭐?”

뜬금없는 소리에 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도현이 인형을 가리켰다.

“얘랑.”

이어서 도현의 손이 하진의 동그란 머리통 위에 놓였다.

“얘랑.”

그리곤 슥슥 머리칼이 부드럽게 헤집어졌다. 그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진은 제 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퉁명스럽게 도현의 손을 쳐냈다.

“뭐야.”

“너랑 닮았어.”

“지랄.”

“진짜로.”

그렇게 말하면서 도현은 대뜸 하진 옆으로 인형을 들이밀었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 눈썹이 화났는지 잔뜩 올라가 있는데도 본래 순하게 생겨 그저 귀엽기만 한 토끼는 딱 하진, 그 자체였다.

“가질래?”

“안 가져.”

도현이 저를 놀린다고 생각한 하진은 그대로 도현을 앞질러 갔다. 물론 몇 발자국 못 가 도현에게 따라잡혔지만.

“하진아.”

“왜.”

“아쉽다.”

“뭐가.”

“헤어지기.”

그와 동시에 도현은 하진의 손목을 붙들곤 방향을 틀었다. 저 멀리에 보이는 보육원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진 채였다.

“어디 가게?”

“공원 벤치!”

“갑자기?”

“다리 아파. 좀만 쉬다 가자.”

하진이 피식 웃었다. 변명도 좀 그럴싸하게 할 것이지. 점심시간마다 나가서 축구 하는 놈이 고작 몇 분 걸었다고 다리가 아프단다. 누가 들어도 거짓말 아닌가. 그걸 뻔히 알면서 하진은 속아 주었다. 사실 하진도 어쩌면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웠는지도 모르겠다.

“노래 들을래?”

“그래.”

도현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MP3를 꺼냈다. 빙빙 꼬아져 있던 이어폰을 풀어 하진에게 한쪽을 나눠주곤 나머지 한쪽은 본인 귀에 꽂았다. 둘이 얼마나 자주 노래를 들었는지 손길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하진 역시 자연스레 받아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러자 곧바로 잔잔한 선율이 귓바퀴로 굴러 들어온다.

“무슨 노래야?”

“What if I love you.”

“…….”

“만약에 내가 널 사랑한다면, 넌 어떡할래?”

도현의 낮은 음성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선율 위 음표가 되어 하진의 마음을 울렸다. 쿵. 쿵. 또다. 심장이 또 울렁거렸다. 가로등 불빛이 켜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형편없이 붉어진 얼굴로 도현을 마주하게 됐을 테니까.

“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물어봐도 돼?”

“…뭔데.”

“친구 안 사귀려고 했던 이유가 뭐야?”

그냥-.

평상시의 하진이었다면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진은 조금 달랐다. 귓가를 수놓는 음악이 아름다워서일까. 옅게 드리워진 밤하늘이 몹시도 반짝여서일까. 아니면, 저와 시선을 얽고 있는 이가…사랑스러워서일까. 잘 모르겠다. 너무나 어려운 감정이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혼자만의 독백을 하진은 도현이 알아차릴 수 없게 다시 깊은 가슴 속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곤 그것과 전혀 다른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감정은 변질되기 마련이니까.”

“…….”

“나는 사랑도 우정도, 시간이 흐르면 본래 모습을 잃고 변한다고 생각해.”

“…….”

“날 버린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안 믿어, 그런 거.”

그 순간, 탁하고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어둠이 물러난 자리에 빛이 들어찼다. 빛은 곧게 하진과 도현을 비추고 있었다.

“어렵다.”

도현이 내뱉은 말에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친구라고 해서 제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울 테니까. 특히 자격지심과 같은 못난 감정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근데 하진아.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더라? 우리 할아버진 아직도 중학교 때 친구분이랑 장기 두셔.”

그러나 도현은 마치 제 감정을 이해해보겠다는 듯 환한 웃음과 함께 못난 감정으로 뒤범벅된 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주위로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한 번 믿어봐. 나랑 그런 친구가 될지 어떻게 알아.”

벚나무의 꽃봉오리가 아직은 입을 다문, 그런 착각의 밤이었다.

***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이 지나고, 하진은 완연한 봄을 맞이했다. 물론 혼자가 아니었다. 도현과 함께였다. 도현은 아주 빠르게 혼자였던 하진의 옆을 차지했고,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하진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하진의 일상엔 도현의 자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 나 집게 망가졌나 봐.”

“내 거랑 바꿔줄까?”

“헐, 진짜? 그럼 너는?”

“난 손으로 줍지, 뭐.”

언제나 다정한 도현은 그렇게 하진의 일상에까지 온기를 뻗친 것이다. 도현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쓰레기를 줍는 하진이 줄곧 시선을 도현에게 던질 만큼. 그 시선이 무심결인 만큼. 그러다 눈이 마주쳤을 때, 환히 웃는 도현에 같이 따라 웃을 만큼.

“애기들 봉사활동 왔나 보네.”

“어쩐지 여기 깨끗해졌더라.”

지나가던 대학생들이 교복 입은 학생들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불과 어제까지 벚꽃축제가 열린 곳이었다. 이를 알려주듯 길가엔 아직 지지 않은 벚나무들이 즐비한 채였다. 그 아래에 일찌감치 떨어진 벚꽃잎들은 축제의 잔해들과 함께 나뒹구는 중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수한 잔해들을 치우는 것이, 오늘 봉사활동이랍시고 전교생이 바로 옆 대학교에 온 이유였다.

“자, 1반! 잠깐 쉬었다 하자!”

담임의 외침에 아이들은 저마다 쉴 곳을 찾아 흩어졌다. 1반 구역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던 하진 역시 곧바로 큰 나무 아래 벤치에 궁둥이를 붙였다. 쨍한 햇볕을 나뭇잎들이 막아줘서 적당히 그늘진 자리였다. 등을 완전히 기댄 채 주변을 살피니 저 멀리서 부반장 여자애의 쓰레기봉투를 들어주는 도현이 보였다.

우도현은 그런 녀석이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성정을 가진 녀석. 그렇기에 녀석을 찾는 아이들은 많았다. 아마 하진을 제외한 반 전체가 도현을 찾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에 하진은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역시나 ‘굳이’ 혹은 ‘왜’와 같은 부정이 다수를 차지한 생각들이었다. 물론 그중엔 희미하지만, ‘행복’과 같은 긍정도 존재했다. 이렇듯 도현을 향한 하진의 감정은 비대칭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좋고 싫음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다.

“찾았다, 박하진.”

나긋나긋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훅 불어와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는 봄바람만큼이나 따뜻했다. 이내 하진이 완전히 고개를 꺾어 저를 내려다보는 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우도현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반대로 얽혔다. 그게 퍽 부끄러워서 하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뜬 시야엔 여전히 도현이 들어차 있었다.

“졸려?”

“으응.”

갑작스럽게 몰려온 나른함에 말꼬리가 늘어졌다. 끔뻑대는 눈두덩이가 무거웠다. 도현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제 큰 손으로 하진의 눈을 가려줬다. 이어서 오는 길에 주운 벚꽃 한 송이를 하진의 귀에 조심스레 꽂았다.

“…뭐야.”

“누가 꽃일까요- 놀이.”

도현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곧 도현이 하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제 손을 떼곤 쿡쿡, 하진의 볼을 찔렀다.

“나는 이쪽이 꽃인 것 같은데.”

볼이 찔릴 때마다 푸스스, 하진의 입술 새로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하진도 똑같이 손을 뻗어 도현의 볼을 찔렀다.

“나는 이쪽.”

도현의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그러자 하진의 눈동자가 마치 카메라처럼 도현의 찰나를 박제했다. 그 웃음이 너무 예뻤다. 너무 예뻐서 한참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사라져버릴 아주 먼 환상 같았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왜 그렇게 빤히 봐?”

아. 갸웃거리는 도현의 물음에 하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둘러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니 툭 하고 귀에 꽂혀있던 벚꽃잎이 떨어졌다. 누가 밟기 전에 하진이 얼른 그것을 주웠다. 손바닥 위에 놓인 옅은 분홍색의 벚꽃잎이 하진의 시선을 붙잡았다.

“역시 이쪽이 꽃이네.”

하진은 도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 어여쁜 벚꽃을 도현의 귀에 꽂았다. 분명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진은 코끝이 간지러웠다.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에 매료되어서일까. 벚꽃 향에 형체가 있다면 그건 아마 우도현일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큭큭. 웬일로 그런 소리를 해?”

“그러게. 미쳤나 봐.”

“하진이가 드디어 나한테 마음을 연 건 아니고?”

여상히 말하며 걸음을 옮긴 도현이 하진 옆에 앉았다. 그에 하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럴 수도.”

사실 정말 미친 것처럼 심장이 널뛰고 있었다.

속도가 벅찼다. 따라가려다 보니 숨이 막혔다. 크흠. 그러다 하진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추워?”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춥다니. 오히려 열이 올라 덥기만 했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도현은 곧바로 제가 입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어 하진에게 건넸다. 그와 동시에 우도현 냄새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싱그럽고 달달한 봄의 향기였다.

“안 추워.”

그 익숙지 않음을 하진은 툭 밀어냈다.

“기침했잖아. 감기 걸려.”

“사레들린 거야. 하나도 안 추워.”

“그럼 반반씩 덮자.”

하진의 거절에도 도현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어서 기어코 집업을 펼쳐 제 무릎과 하진의 무릎에 반반씩 걸쳐 놓는 도현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만은 도현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으니 하진은 그냥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봄의 햇살은 산뜻하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몸이 나른해졌다. 그대로 눈을 감아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재민이 멀리서부터 호들갑스럽게 뛰어온 탓이었다.

“야야, 고균성 2반 여자애한테 고백한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재민은 헉헉거리면서도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누굴 좋아하고 고백하는 게 저렇게 재밌을 일인가. 하진은 그다지 관심 없는 영역이었다. 요즘 고균성이 점심 먹을 때마다 말하던 여자애가 같은 반인 줄 알았는데 2반이었다는 것이 하진에게는 더 충격이었다.

“오, 드디어?”

하진과 달리 도현은 재민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그에 재민이 도현을 재촉했다.

“어, 진짜 대박이라니까? 1열에서 직관해야 함. 얼른 가자!”

보든 안 보든 상관없지만, 도현이 간다면 따라갈 생각이었다. 이미 일어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집업 아래로 닿은 손가락은 하진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잠깐 스친 것이라기엔 손가락은 점점 닿는 면적을 넓히더니 곧 완전히 하진의 손등을 덮어버린다. 손끝에서부터 찌릿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온몸이 쭈뼛 섰다.

“안 가?”

분명 집업으로 가려진 상태인데도 무슨 은밀한 행각을 들킨 것처럼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까는 잘만 맞장구치던 도현은 웬일인지 대답이 없었다. 결국 재민의 눈치를 보다가 하진이 대신 대답했다.

“너 먼저 가. 우리 뒷정리만 하고 갈게.”

“그럴래? 알겠어. 빨리 와!”

재민은 사실 급했던 모양이다. 먼저 가라는 하진의 말에 부리나케 무리로 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재민이 사라지고 다시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겉으론 평화였으나 하진의 속은 제법 야단법석이었다. 여전히 제 손을 감싸 쥔 도현의 의중을 모르겠다. 그래서 손을 빼려고 하니 도현이 느리게 고개를 틀어 하진을 본다.

“뭔데.”

하진이 물었다. 꼼지락거리며 붙잡힌 손을 뒤집곤 손가락으로 톡톡 도현의 손바닥을 건드리면서.

“가지 말라고.”

“어디를.”

“어디든.”

“왜?”

도현이 하진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껴 넣었다. 둘 중 누구도 이를 꽉 잡지는 않았다. 그저 무심코 맞잡은 모양새가 된 것처럼, 누구도 의도한 바 없이 자연스럽게 포개진 것처럼.

“지금이 좋아.”

그렇게 닿은 손바닥이 열병처럼 들끓었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원래 친구랑 있으면 이렇게 열이 오르고 심장이 뛰고, 그래서 들킬까 봐 두렵고 그런 건가. 이상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치솟았다. 울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연서야!”

그 순간 고균성의 고백이 시작됐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당당히 사랑을 고했다.

“나 사실! 너 좋, 좋아해!”

어떻게 저토록 확실히 감정을 정의 내릴 수가 있지? 좋아한다는 게 뭔데? 하진은 묻고 싶었다.

“너랑 있으면 재밌고 다른 걸 하다가도 결국엔 네 생각으로 끝이나.”

‘하진아.’

“가끔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죽을 것 같은데 또 가끔은 너에 비해 내가 너무 초라해서 울고 싶어져.”

‘하진아’

저를 부르는 도현의 목소리가 자꾸만 겹쳤다. 일순간 견디기 버거운 감정들이 응어리져 눈시울을 적시려 했다. 이를 참아내기 위해 하진이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하진아? 왜 그래, 괜찮아?”

도현은 한껏 당황해선 하진과 눈을 맞추려 애썼다. 이 와중에 눈치 없이 벚꽃이 흩날렸다. 빌어먹게도 아름다웠다. 봄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이 툭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 때문에 하진의 볼에 안착했다. 도현이 하진의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자 도현이 뻗은 손가락으로 꽃잎이 옮겨갔다.

그와 함께 하진의 마음도 도현에게로 옮겨갔다.

그 순간, 하진은 불분명했던 감정의 형태를 깨닫고야 말았다.

우도현을 좋아한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의 수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많이. 박하진이 우도현을 좋아한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친구라는 이름의 요새를 쌓고 자격지심이라는 무기로 항복시킨 감정은 사랑이었다.

종국엔 하진 스스로가 변질시켜버린.

My Friend fin.

낫 마이 프렌드(Not My Friend)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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