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녹다운(Knockdown)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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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다운(Knockdown)

찬 바람이 매섭던 1월은 바쁘게 흘렀다. 도현도 하진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모든 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의 길에 걸림돌이었던 이들은 법의 판단을 받기도 했고, 대중의 판단을 받기도 했다. 전자는 영남기와 장인수였으며 후자는 여희나였다.

그중 가장 먼저 대가를 치르게 된 이는 장인수였다. 드라마 너와 나의 거리가 아예 엎어지면서 그가 그동안 힘없는 단역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했던 악행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자잘한 폭언부터 성희롱, 성추행까지 장인수의 잘못들이 드러나면서 그가 이전에 일으켰던 배우 폭행 사건도 다시 주목받았고, 그 과정에서 영남기 사장과의 모종의 커넥션이 드러나기도 했다. 또한, 세간의 관심이 장인수와 영남기로 쏠리게 됨으로써 YN 미디어와 관련한 성매매 알선 및 탈세 의혹이 법의 잣대 아래 서게 되었다.

여희나는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영남기에 의한 피해자이긴 해도 그녀가 실제로 마약을 투여한 정황이 드러났기에 관련 재판 역시 열릴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영남기의 손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설령 감옥이라 할지라도 더 낫다는 인터뷰를 남긴 채였다.

한서빈 역시 영남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럭저럭, 아니 이전보다 잘사는 듯했다. 이 사건에서 한서빈은 오로지 피해자의 위치였기 때문에 대중은 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아마 앞으로도 그가 하진의 동영상을 빌미로 서태희 대표를 협박했다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이강운과 박하진이 함께 언급되어야 하므로 하진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묻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한편 자신이 설계한 판의 주도권을 도현에게 빼앗긴 이강운은 잠적했다. 표면적으로 그는 이번 YN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W 엔터는 그가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연예계 활동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별도의 위약금 없이 그와의 모든 계약을 해지했다. 사건이 터지고 한서빈에게 매일 같이 전화했다던 이강운은 이제 어디서 뭘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서빈이 군대 가기 전에 보러 가겠다고 했다니 잠자코 그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이강운에겐 연예계 은퇴보다 서빈과의 연락 두절이 더 그를 무너뜨리는 촉매 역할을 한 듯싶다. 한서빈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날, 그가 어떻게 될지는 감히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빈은 강운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가 행한 악들이 면죄부를 얻을 수는 없겠지만.

연예계를 꽁꽁 얼어붙게 했던 최악의 스캔들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사이, 세상엔 봄이 찾아왔다. 2월의 입춘이었다.

“크, 제목 한 번 기깔나지 않습니까?”

준수가 도현 앞에 태블릿을 들이밀며 말했다. 어깨가 한껏 솟아오른 것이 보아하니 칭찬을 갈구하는 눈치다. 다짜고짜 대표실 쳐들어와서는 뭔 소린가 싶어 도현이 기사로 눈을 돌렸다.

║ W 우도현 대표, 그가 쏘아 올린 작은 善

등록 20XX-02-XX 오후 17:54:02

○○○ 기자

W 엔터테인먼트 우도현 대표가 연일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이번 YN 사태를 제일 먼저 수면 위로 끄집어낸 사람이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대표의 이러한 행보 덕분인지 W 엔터 역시 소속 배우와의 계약 해지와 드라마 투자 실패 등의 연이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장중 8%를 돌파하는 등 좋은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다. 우 대표의 선한 영향력이 통한 것일까. W 엔터가 주도하는 연예계 인사들의 재능기부 콘텐츠 또한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중략)…

이렇듯 누군가를 위한 작은 선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음을 우리는 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기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도현의 입가에 번지르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의미로 소고기 쏘시죠. 이제 퇴근 시간인데”

“이거 어쩌죠.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박하진 씨 만나러 가세요?”

“네. 오랜만에 데이트합니다.”

도현의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어쩐지 준수를 열받게 했다. 오랜만? 분명 이틀 전에도 영화 봤다고 그 영화가 어쨌다느니, 하진이가 귀여워 죽겠다느니- 지껄였으면서 오랜만이라고? 우도현의 하루는 한 삼천 시간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고작 이틀을 오랜만이라고 표현하지.

“그럼 셋이 만나면 되겠네요. 저도 박하진 씨 소개 좀 해주세요.”

“왜요?”

도현이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경계심 가득한 반문과 함께였다.

“원래 애인 생기면 친구한테 소개해주고 그러잖아요.”

“굳이? 우리 하진이한테 관심 있어요, 강 팀장?”

“제가요? 저 여자친구도 있는데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행실 좀 조심해야겠다.”

예? 도대체 제 행실이 어디가 어떻다고…. 준수의 잇새로 기가 찬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눈동자엔 도현을 향한 징글징글함이 잔뜩 껴있었다. 희미야, 미안해. 오빠가 친구 잘못 둬서 졸지에 외간 남자한테 눈 돌리는 바이 새끼가 됐단다. 준수가 속으로 제 여자친구에게 사죄했다. 정작 사죄하게 만든 장본인은 실실 웃으며 박하진 기사를 검색하는 와중인데 말이다.

[전 유어멜로디, 박하진. 신선한 재능기부 콘텐츠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다….”

도현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엄지는 태블릿 속 하진을 하염없이 쓸어넘기기 바빴다. 검은색 트레이닝 팬츠에 아노락 바람막이라는 평범한 옷차림이었음에도 영상 내내 하진은 특별했다. 웨이브의 기초를 알려준다면서 살짝씩 꿈틀대는 가슴은 어딘가 야했고, 돌아가는 골반은 어딘가 요염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중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박하진의 미소였다. 오랜만에 추는 춤이 신이 났는지 20분짜리 영상 내내 하진은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단순히 오랜만이라 뭉뚱그렸지만, 인생의 전부였던 춤을 1년 만에 새로이 시작한 것이었다. 하진의 그 시작이 자신과 함께라는 것에 도현은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와, 그 영상을 또 보세요?”

도현이 핸드폰과 연동해서 TV로 영상을 틀자 준수가 기겁하며 물었다. 그 영상은 노래로 따지면 도현의 18번이었다. 역시 하진이 찍은 춤 콘텐츠였는데 그중 가장 해맑은 하진을 볼 수 있는 영상으로 귀하디귀한 하진의 “아이쿠”가 담겨 있었다. 이 영상이 조회 수 백만을 넘은 데에는 아마 도현의 지분이 상당할 것이다. 하루 눈뜨자마자 한 번, 삼시세끼 밥 먹을 때마다 한 번, 자기 전에 또 한 번. 적어도 다섯 번은 돌려보니 또 보냐며 준수가 혀를 내두르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표님, 침 흘러요.”

스읍-. 도현이 숨을 들이마셨다. 괜스레 입매도 닦아본다. 어디 댓글이나 볼까. 하루 사이에 수백 개의 댓글이 추가된 채였다. 이는 하진의 콘텐츠가 얼마나 큰 인기를 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진이 춤의 기본기를 알려준 뒤 그것과 관련된 아이돌의 댄스를 커버하는 방식의 콘텐츠는 초보자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하진의 설명 덕분에 올리는 족족 백만 뷰를 넘는 중이었다.

[아이쿠? 미쳤네. 박하진 애교 작작해라 진짜. 당장 쳐들어가기 전에.]

기분 좋게 댓글을 내리던 도현이 움찔했다. 뭐…지? 신고 눌러야 하나…. 이런 댓글에 좋아요가 왜 몇백 개나 눌렸는지 모르겠다. 좋은 말인가 싶다가도 언행이 너무 과격해서 움츠러든다. 이제 서른이 된 도현 어르신은 아무래도 요즘 사람들의 애정 표현을 알아듣기 힘드신 모양이었다.

[이제야 봤읍니다…무릎 꿇고 봤읍니다…이제 컴백해 주세요… 그립읍니다…]

이건 또 뭐야. 요즘 애들은 이런 사소한 맞춤법도 모르나? 한국 교육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 걱정이 됐다. 끌끌 혀를 걷어차며 도현은 친절히 [읍니다X 습니다O]라고 대댓글을 달아주고 싶었다. 그랬다면 아마 그 밑에 [진지충 놉]이라는 대댓글이 달리지 않았을까.

[오빠 나랑 이혼하자. 우선 결혼부터 하고.]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댓글을 발견한 도현은 살며시 공감 버튼을 눌렀다. 안타깝지만 너희 오빠 나랑 결혼할 거란다. 스웨덴이 좋으려나. 가까운 곳은 대만이 좋긴 한데. 박하진 닮은 아이도 있으면 좋겠다. 너무 귀여워!

“아, 귀여워.”

지금 막 아기 박하진이 우다다다 저에게 뛰어오는 상상을 하던 참이었다. 도현은 무심결에 흘러나온 주접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를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며 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독심 술사도 아닌데 도현의 속마음은 왠지 그냥 읽힌다.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속마음이었다.

“대표님, 퇴근 안 하십니까?”

참다못한 준수가 TV 전원을 꺼버리며 말했다. 그에 도현이 시간을 확인하곤 헐레벌떡 핸드폰을 확인했다. 왼손엔 이미 외투와 차 키를 챙긴 뒤였다.

[나 끝방 연습실]

[에고 힘들어…]

[데리러 와…]

마지막 메시지를 읽은 도현이 그대로 대표실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준수와 김 비서가 “어디가세욧!”하고 소리 질렀지만, 도현은 그저 “다들 퇴근하세요!”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냅다 계단으로 내려가니 딱딱한 구두 굽 소리가 비상계단에 울려 퍼졌다.

헉. 헉. 그렇게 지하에 도달한 도현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드문드문 개인 연습 중인 방들을 지나 하진이 말한 끝방에 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눈으로 연습실 안을 훑던 도현은 곧 시야에 들어온 하진에 입꼬리가 찢어졌다. 하진은 힘들었는지 연습실 구석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형체가 심히 동글동글했다. 그게 몹시 귀엽고, 사랑스럽고, 막 그랬다.

도현은 하진이 깰까 싶어 시끄러운 제 구두를 벗은 채 조심히 연습실로 들어갔다. 색색 소리가 도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도현이 조심스럽게 하진의 옆에 앉아 물끄러미 하진을 내려다봤다.

“우응… 언제 왔어….”

이내 꾸물거리던 하진이 코를 찡긋거리며 눈을 떴다.

“하진아.”

“웅….”

“예쁘다.”

“…새삼스레.”

“봐도 봐도 새삼스레 또 예쁘네.”

도현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하진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진의 입술 새로 터진 웃음에서 단내가 났다.

“네 회사 연습생들이 다 보겠는데.”

“보라고 하지, 뭐.”

“아서라. 난 아직 박하진 게이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며 몸을 일으킨 하진이지만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도현은 그런 하진에게 더 엉겨 붙었다. 그러자 찰싹, 하진이 도현의 팔뚝을 내려친다. 아야. 도현의 눈썹이 금세 축 처졌다.

“이따 집에서 실컷 만져.”

“오늘 자기 집으로 갈까?”

“응. 나 내일 스케줄 없어.”

뭐라고? 도현이 돌연 눈동자를 번뜩였다. 몸은 이미 하진에게서 떨어져 진지하게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이었다.

“자기야.”

“응?”

“저녁에 장어 먹어야겠다. 복분자랑 같이.”

그 말에 하진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도현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너무 음흉했다. 저 미친놈이 또 얼마나 들이댈까를 생각하면 저절로 허리춤이 아려올 정도였다. 평상시엔 다 져줄 것처럼 하면서도 침대 위에선 눈깔이 뒤집히는 도현은 제아무리 문란한 하진이라도 버거웠다.

“현아.”

하진이 결심한 듯 낯간지러운 애칭으로 도현을 불렀다. 열심히 장어집을 예약하던 도현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오늘 집 가서 일기 써야겠다. 하진이가 현이라고 불러준 열한 번째 날-. 이내 도현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자기 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면 오늘 하고 싶은 체위….”

“오늘은 손만 잡고 자면 안 돼?”

…어? 도현이 어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랑 하는 거 너무 좋아. 좋은데….”

“…….”

“한 번에 너무 많이 하니까 엉덩이도 아프고… 춤출 때 좀 힘들어….”

우물대는 하진의 말을 들을수록 도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청천벽력이었다. 애인 사이에 관계란 자고로 양측이 좋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저 혼자만 좋아서 무식하게 박은 꼴이라니. 물론 하진이 이런 식으로 얘기하진 않았으나 도현의 귀엔 그렇게 들렸다. 이 색마 새끼야! 작작 좀 박으라고! 씨발, 네 궁둥이 아니라고 함부로 대하냐!

“…하진아….”

후우. 푹 내쉰 한숨엔 자책이 묻어 있었다. 떨어져 있던 십 년만큼 하진을 아껴주겠다 다짐했는데 오히려 아프게 해버렸다. 어쩌면 좋지. 아니, 근데 솔직히 박하진 얼굴이 유죄 아니야?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손만 잡고 자? 당장이라도 물고 빨고 귀여워해 주고 싶은데! 지금도 눈치 본다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눈동자가 얼마나 앙증맞은데! 하진이 들으면 기겁할 마음의 소리를 실컷 외친 도현은 곧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역시 박하진과 손만 잡고 자는 건 무리니까.

“그럼…네가 박을래?”

“…뭐?”

“…박는 건 안 아프잖아.”

이번엔 하진이 어벙하게 되물었다. 1번 싫다. 2번 알았다. 3번 노력하겠다. 하진이 생각한 세 가지의 경우의 수 중 도현이 내민 최후의 카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유사 답안, 이런 수준도 아니었다. 그냥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었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나는 너라면 박혀도 괜찮아”

그런데 문제는 도현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거였다. 정말 하진을 걱정해서 본인의 엉덩이를 내어주겠다는, 뭐 그런 황당한 진심.

“앞을 써본 적도 없는 순수 게이한테 뭔 개소리야, 너.”

“…….”

“…….”

“…아. 그렇지, 참.”

하하. 도현도 하진도 멋쩍게 웃었다. 짧은 정적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딴 개소리를 할 거면, 너랑 섹스 안 해. 미안해, 하진아. 내가 실언했어. 앞으로도 박는 건 나만 할게. 어쩐지 조금 엇나간 결론이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하진이 먼저 절충안을 제시했다.

“한 번만 해.”

“한 입 먹으면 정 없대.”

“그럼 두 번.”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홀수를 사랑했어. 짝을 이루고도 하나가 남는 게 미덕이라고 여기셨지.”

뭔 개소리….

“세 번.”

역시 박하진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우도현이었다.

***

‘마지막으로 이번 화보가 두 분이 같이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신호탄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인터뷰어의 마지막 질문. 하진이 이를 몇십 번이고 되뇌는 사이 모든 화보 촬영 일정은 끝이 났다. 질문은 이질감이 드는 단어들의 충돌이었다. 두 분이라는 말도 같이 활동하게 되냐는 것도 모두 일 년 동안 혼자였던 하진은 듣지 못한 단어들이었으니까.

“하진 씨, 서빈 씨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인터뷰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에디터가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하진과 서빈이 함께한 화보였다. 서빈조차 하진이 거부할 거라 예상했던 화보를 하진은 응했다. 단순히 의리 혹은 의리 있는 이미지를 위함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그냥, 그냥 했다. 하진은 그냥 응한 거다. 서빈과의 옛정도, 서빈을 향한 원망이나 동정 같은 감정도 일절 배제한 채 그냥. 그래야 이 틀어진 관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작을 원하는 건 하진뿐만은 아닌지 서빈은 예전과 달리 촬영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었다. 이미지 메이킹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진은 그래도 서빈의 노력에 가산점을 주고 싶었다.

“야.”

하진이 조용히 서빈을 불렀다.

“…….”

다음 말의 텀이 길어졌다. 하진이 우물쭈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돌아 가려고 할 때였다.

“내 차 타고 가든지.”

분명 오지랖이었다. 심지어 남 일엔 크게 관심 두지 않는 하진이 부리기엔 지나친 정도였다. 그런데도 하진은 서빈에게 저런 제안을 했다. 서빈의 자격지심이, 일탈들이 본인에게서 기인했다는 일말의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됐거든?”

하지만 서빈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센 자존심이 하진을 허락할 리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 사이 존나 좋은 줄 아는데 나만 홀랑 매니저 차 타고 가는 게 말이 되냐? 그냥 잔말 말고 같이 가.”

하진이 서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신보다 약간 더 작은 서빈이 안정감 있게 들어왔다. 그길로 하진은 서빈을 이끌어 제 SUV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에 차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찬이 당황한 듯 하진을 쳐다봤다.

“호의.”

“네?”

“호의 좀 베푸는 거라고. 얘 면허도 없어서 걸어간대.”

“아, 그러면 먼저 집으로 모셔다드리면 될까요?”

“응. 너도 회사로 가지 말고 일찍 퇴근해. 내가 일 시켰다고 말해둘 테니까.”

수찬의 얼굴에 금세 감동의 물결이 퍼졌다. 넵! 신나게 답한 수찬이 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다소 공기가 차가웠다. 수찬은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순간 아차 싶었다. 아차. 매니저가 되기 전 일이라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관계가 되게 껄끄럽잖아?

수찬은 냉기로 인해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본인이 이 냉기를 뚫고 질문을 해야 할 판이었다. 수찬은 정말 울고 싶었다.

“저기…그…주소를 안 알려주셨는데….”

수찬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다행히 그 질문으로 공기의 전환이 일어나는 듯했다.

“너 아직도 거기 살아?”

“내가 어디 사는지 형이 어떻게 알아.”

“우리 살던 숙소 근처로 독립했잖아, 너.”

“…어. 거기 살아.”

5년 차쯤이었나. 이미 팀 활동보다 개인 활동이 더 활발해서 숙소에서도 서로를 보기 힘든 시기였고, 각자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터라 숙소는 결국 무의미해졌다. 그런 숙소를 서빈은 제일 마지막까지 지키다 독립한 멤버였으니 의미가 조금 더 컸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언제는 서빈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가식적인 이유는 여전하고?”

멤버들과의 추억을 기억하고 싶어서 숙소 근처에 집을 마련했다고. 데뷔 초반이나 할 법한 가식적인 대답에 하진은 기함했었지, 아마. 피식, 하진이 웃음을 흘렸다. 뜬금없이 옛 추억을 꺼내려 드는 하진에 서빈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래? 이 꼴 되니까 불쌍하기라도 해?”

서빈의 어조가 몹시 날카로웠다. 그러나 하진은 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단호했다.

“아니. 너 하나도 안 불쌍해.”

하. 서빈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그렇지. 박하진이 제게 무슨 동정을….

“네 선택이었잖아. 그냥 넌 지금 네가 선택한 결과를 짊어지는 것뿐이야. 나한테 이렇게 꼰대 같은 잔소리 듣는 것도 네가 같잖은 동영상 하나로 나를 끌어들여서고. 그러니까 넌 책임지면서 살아야 해.”

“…….”

“고작 네 스스로가 불쌍하다는 그따위 생각 하나로 모든 걸 무마하려 들지 말고 진심으로 네 잘못 뉘우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진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서빈을 발가벗기는 듯했다. 서빈이 무장한 동정이란 갑옷을 벗기니 드러난 나체의 서빈은 한없이 나약했다. 그 안에서 썩어 문드러진 살들이 서빈을 고약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작았을 상처가 치료받지 못해 썩어버렸다. 이제라도 그를 곪게 만든 갑옷을 벗어야 할 때였다.

“씨발, 진짜….”

서빈의 눈가에 물기가 들어찼다. 내뱉는 목소리 역시 축축했다.

“존나 재수 없어… 꼰대 같아….”

“어, 그래. 나 이제 서른 살 꼰대다.”

하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서빈은 웃었다. 드디어 웃을 수 있었다.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처음처럼.

“…나보다 훨씬 어른이네.”

“…….”

“그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든가.”

***

“진짜 괜찮겠어?”

차를 모는 내내 본인이 더 긴장했는지 연신 하진을 살피던 도현이었다. 이내 차가 목적지에 다다르자 도현은 한 번 더 하진과 눈을 맞춰 물었다.

“괜찮다니까.”

하진은 덤덤하게 답했다.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도현이 좀 유난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서빈의 집이었다. 일전에 서빈이 말했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다만, 꺼림직할 뿐.

“너 그때 이후로 이강운이랑 처음 보는 거잖아.”

강운과의 만남에 동행해달라. 이것이 서빈의 부탁이었다. 도저히 혼자는 용기가 안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도현이 이토록 걱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다. 이강운이나 한서빈처럼 속이 새까만 놈들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니까. 하진을 어떤 꿍꿍이로 부른 건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복수라도 하려나. 갑자기 막 때리면 어떡하지? 그러면 일단 내가 맞고, 하진이한테 얼른 도망가서 신고하라고….

“네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도현을 오히려 하진이 안심시켰다. 올곧은 눈동자가 도현에게 닿았다. 그 순간 쿵, 하고 도현의 심장이 떨어졌다.

“하, 자기야.”

“왜.”

“말을 그렇게 예쁘게 하면 어떡해. 나 완전 심쿵했잖아.”

도현은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기 옆에 찰싹 붙어 있을게.”

그러면서 하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안전벨트는 언제 풀었는지 말 그대로 몸이 찰싹 하진에게 붙은 상태였다.

“현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도현이 살짝 시선을 올려 하진을 바라봤다. 긴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만큼이나 느릿한 어조로 하진이 운을 뗐다.

“난 한서빈이 그냥 자격지심 때문에 나한테 그러는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닌 것 같더라.”

“…….”

“그냥 미웠던 거 같아. 나를 혼자 뒀던 너를 내가 미워했던 것처럼 걔도 그냥 그룹을 버린 멤버들이 미웠던 거야.”

단지 그랬던 거야.

도현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섣부른 위로도 공감도 도현이 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진이 내뱉은 말의 무게와 그 속을 채운 감정들은 오로지 하진 본인만이 매만질 수 있는 것이었기에 도현은 그저 온 마음으로 하진에게 제 온기를 나눠줄 뿐이었다.

이제껏 혼자였던 하진은 받은 적 없는 온기였다. 그 작은 하나가 하진을 예전과 다르게 만들었다. 깍지 낀 손이 따뜻했다.

“가자.”

하진이 마지막으로 손을 한번 꽉 잡고는 놔버렸다. 아직 손바닥에 감도는 따스함이 좋았다. 이를 두어 번 더 쥐었다 핀 하진은 곧 후드를 뒤집어쓰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 하진의 뒤를 도현이 따랐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로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인 양 엘리베이터를 거쳐 이내 어느 집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들어와.”

서빈은 차분한 어투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너무 튀었던 분홍 머리는 어느새 검은색으로 덮인 뒤였다. 그게 서빈의 분위기를 한층 더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비장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좀 풀고자 도현이 먼저 말을 건넸다.

“나 보고도 안 놀라네요?”

“같이 오실 줄 알았어요.”

“어떻게?”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혼자 보내진 않을 것 같아서.”

서빈이 턱짓으로 하진을 가리켰다. 그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도현은 하진을 끌고 소파로 가 앉았다. 조금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하진과 바짝 붙어 앉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잘 알면서 위험할지도 모르는 부탁을 왜 박하진한테 한 건데요?”

“글쎄요.”

도현의 물음이 꽤 적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빈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부엌에서 커피 머신을 작동하려는 행동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에 한 번 더 서빈을 재촉하려던 도현을 하진이 제지했다. 조용히 지켜보자는 눈빛과 함께.

“블랙밖에 없는데 아이스 마실래요, 뜨거운 거 마실래요?”

“아이스요.”

“형은?”

“나도 아이스.”

서빈이 버튼을 누르자 커피 머신이 위잉,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서빈은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컵 두 잔에 나눠 담곤 가만히 커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웅장했던 소음은 점점 잦아들었다. 그러다 띠익띠익, 기계음이 완성을 알렸다.

“연하게 탔어.”

이윽고 서빈은 도현과 하진 앞에 각각 아이스커피를 놓았다. 그리곤 멀리 소파가 아닌 다이닝 테이블에 앉는 서빈이었다. 그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진은 제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로 시선을 던졌다. 커피 추출액과 물, 얼음이 한데 엉켜 오묘한 색을 내기 시작했다. 이를 들자 컵 너머로 의자에 기대고 있는 서빈의 모습이 투영됐다. 일렁거리는 투명한 물속에서 커피와 물이 서로에게 융화되는 과정만큼이나 서빈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좀 무섭더라고.”

달그락-. 얼음이 도현의 입술에 닿으며 소리를 낸 순간, 서빈 또한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건네는 말인지는 불분명했다.

“난 항상 이강운이 나보다 아래라고 생각했어. 순한 얼굴로 나를 위해선 뭐든지 하는 애니까. 그런데 아니었잖아. 걘 한참 위에서 날 깔보고 있었잖아. 한 번도 내 앞에서 속내를 보이지 않았던 거야. 무슨 생각이었을까. 도대체 걘 날 무슨 감정으로 보고 있던 걸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빈이 뱉고 있는 진심이었다. 서빈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일렁였다. 자신을 향한 강운의 감정이 뒤틀린 집착이라는 것을 서빈은 알면서도 외면해야만 했다.

“나는 이제 걔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그래서 무서워. 걔라면 날 죽이러 올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우당탕-!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소음이 순식간에 주변을 가라앉혔다. 놀란 하진이 주위를 살폈지만 그런 소음이 날 만한 곳은 없었다. 서빈도, 도현도, 하진 본인조차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어디서….

-한서빈.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서빈을 불렀다. 서빈의 핸드폰 액정이 깜빡였다. 아, 설마. 하진이 서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테이블 위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하진의 눈썹이 단번에 구겨졌다. 둔탁한 소음도 억압적인 목소리도. 근원지는 모두 서빈의 핸드폰이었다. 서빈의 핸드폰은 줄곧 누군가와 통화 중인 상태였다.

-서빈아.

그리고 그 누군가는 강운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혼란스러운 하진은 일단 제 존재를 숨기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통화가 이루어진 시간은 약 3분. 언제부터지? 커피를 내왔을 때부터? 아니면 갑작스레 본인의 속마음을 드러낼 때부터?

-서빈아. 누구랑 있어?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내가 널 왜 죽여. 다 너를 위한 일이었잖아. 내가 미안해. 응? 제발 나 버리지만 마….

강운은 애걸했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음성은 쩍쩍 갈라진 채였다. 그 메마른 목소리는 안쓰럽기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래서 두려웠다. 아마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뭐든 할게. 내가 박하진 폭로해줄까? 아니면 ST에 뭐 해줄까? 그럼 나 안 버릴래? 응? 서빈아.

두서없이 내뱉어진 강운의 말은 종국엔 파멸로 치닫는 듯했다. 서빈 역시 그것을 인지했는지 여태껏 악물고 버티던 입술을 서서히 벌렸다. 그 사이로 냉정하고도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그만해.”

이강운과 한서빈의 첫 만남은 피투성이의 강운을 서빈이 구해줬던 날이라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 이강운에게 한서빈은 구원자가 아니었을까. 오로지 자신만이 독점하고 싶은 구원자. 어쩌면 강운은 서빈이 모든 걸 잃었을 때, 온전히 자신에게 올 것이라 여겼을지 모르겠다. 그 착각이 강운과 서빈을 모두 위태롭게 만들었지만.

“제발.”

-…….

“네가 끔찍이 생각하는 날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하자.”

비틀어진 관계의 결말은 이토록 참혹했다.

***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에서 해주는 무료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이제 막 첫사랑이던 주인공들이 30대가 되어 재회하는 부분이었는데 하진과 도현은 통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비루한 현실을 마주했던지라 아름답기 짝이 없는 영화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진아.”

“응?”

여전히 시선은 화면에 둔 채로 도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진 역시 굳이 도현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답했다. 두 사람은 일방향으로 TV 화면 속 남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텅 빈 눈동자가 담아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좀 무섭더라.”

“뭐가.”

“이강운이랑 한서빈. 우리만큼 오래된 관계였잖아.”

“그치.”

“잘잘못을 떠나서 그런 관계가 눈앞에서 깨져버리는데 내가 다 울컥하더라고.”

도현과 하진은 동시에 같은 감정을 느꼈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진 못했다. 상당히 꼬이고 꼬여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이었다. 연민도, 그렇다고 동병상련도 아닌 이 감정은…

“우리 관계도 걔네처럼 틀어졌으면 어떡해.”

어쩌면 본인들 역시 그렇게 됐을지 모를 불안감은 아닐까.

“이강운이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어. 나랑 너처럼 본인도 남보다 못한 친구 사이가 있다고. 난 그때 걔네가 우리랑 닮았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한서빈은 이강운을 친구로 여기지 않았더라고. 이용하면서도 믿지 않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무서워했던 것 같아.”

“잡아 먹힐까 봐 먼저 잡아먹는 척을 했다, 뭐 그런 느낌인가?”

“응. 그러니까 애초에 걔네는 비정상적인 관계였던 거지.”

“그럼 우리는?”

도현은 본인이 답하지 못한 질문을 하진에게 전가했다. 이를 통해 확인받고 싶은 눈치였다. 우린 걔네와 다르니까 앞으로도 틀어질 일이 없을 것이라는, 그런 종류의 안심을 도현은 내심 바랐던 것이다. 위로나 공감엔 영 소질이 없는 하진이 과연 알아들었을지는 의문이지만. 하진은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꽤 오랫동안이나 이어진 침묵이었다.

“우리는.”

이내 결론을 내린 하진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도현이 꼴깍 침을 삼켰다.

“착하잖아.”

“어?”

“…….”

“어… 음?”

도현의 입에서 자꾸만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나온 대답치고는 과하게 순박하지 않은가. 착해서라니. 아, 박하진 진짜… 귀여워! 도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내쉬는 숨마다 하진을 향한 애정이 묻어났다.

“큭큭. 그게 뭐야.”

“야, 나 진지하거든? 생각해봐. 우리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이강운처럼 싸이코 새끼였거나 한서빈처럼 이기적인 새끼였으면 우리 관계도 어떻게 됐을지 장담 못 하지.”

아, 그런가?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터무니없는 말 같은데 잘 생각해보면 또 일리 있는 것 같고, 아무튼 그랬다. 도현은 하진이 하는 말이라면 당장 내일 좀비 세상이 도래한다고 해도 믿을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그럼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정상적인 사람임을 감사해야겠네.”

“그렇지. 우린 진짜 서로한테 잘해야 해.”

어느새 영화는 크레딧영상을 띄우고 있었다. 검은 배경 위로 하얀 글자만이 천천히 올라가는 그 속에서 도현과 하진이 시선을 겹쳤다. 텅 비어있던 눈동자엔 서로가 담긴 채였다. 이내 화면을 통해 얽힌 시선은 도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림으로써 어긋났다. 그 시선을 끌고 와 도현은 지그시 하진을 마주했다. 입꼬리가 능글맞게 올라갔다.

“그럼 우선 밤일부터 잘해볼까?”

말아쥔 주먹으로 도현이 콩하고 하진의 팔뚝을 쳤다. 하진이 제 팔뚝을 부여잡으며 씩씩댔다.

“넌 일단 그 개수작 부리는 것부터 고쳐, 새끼야.”

“자기야. 내가 개수작 빼면 시체인데 어떻게 그래.”

도현은 퍽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그건 그렇네. ‘우도현 = 개수작’ 이게 공식인데 개수작을 빼면 진짜 0이 되는구나. 하진이 약간 수긍한 듯 보이자 도현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애인한테 새끼가 뭐야. 우리 자기는 입이 너무 험해요.”

“현아.”

“응?”

“좀 닥쳐봐.”

꼬박꼬박 말꼬리 잡는 도현의 주둥아리가 너무 얄미운 나머지 하진이 욱해버렸다. 조용히 하라고 할걸. 닥치라는 건 연인 사이에 좀 거친 언행이긴 했다. 아씨. 우도현 분명 상처받았다면서 뭐라 할 텐데. 하진이 제 주둥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런데 지금쯤이면 와다다- 말을 뱉어냈을 도현이 말을 안 한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싶어 하진이 빤히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은 입을 비죽이면서도 감쳐물고 있었다.

“…….”

“뭐 하냐.”

“…….”

“대답.”

“닥치라 해서 닥치는 중.”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도현과 하진은 분명 정상적인 사람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일 것이다.

***

얼마 뒤, 하진은 서빈의 입대 소식을 뉴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급박하게 진행된 듯한 입대는 사실 서빈이 쥐고 있던 최후의 탈출 수단이었던 거로 보인다.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방법이 수포가 되어 영남기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서빈이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 지금은 영남기에게서 벗어났지만, 서빈은 그런데도 군대를 택했다. 아마도 이번엔 이강운과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하진은 서빈에게 잘 다녀오라는 안부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다. 그저 군대 안에서 여상히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서빈이 조금 달라진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길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이렇듯 유유히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하진과 도현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서로에게 집중했다. 서빈과 강운이 그들에게 심어준 경각심이 오히려 하진과 도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준 셈이었다. 그렇게 안정적인 일상이 이어졌다. 그다지 싸울 일도, 놀랄 일도 없는 그런 일상이었다.

“네? 잠깐만요. 대표님, 뭐라고요?”

그러니 지금 하진은 아마 근래 중에 가장 심히 놀란 것일 테다. 하진이 아연실색하며 되물었다. 옆에 있던 도현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여서 하진에게 주려고 집었던 회 한 점을 그대로 내려놓고야 말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태희에게로 꽂혔다. 캬! 술맛 좋다! 태희는 찰랑이는 소주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 태연한 행동은 마치 뭘 그렇게들 놀라냐고 꾸짖는 것 같았다.

“봄의 신부 한 번 해보려고.”

무던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면서 태희는 하진과 도현 앞에 아기자기한 청첩장을 놓았다. 그때까지도 태희의 깜짝 결혼 발표를 믿지 못했던 하진은 청첩장을 보고 나서야 실감했다. 제 대표가, 아니 십오 년을 함께한 제 부모와 같은 이가 결혼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태희의 취향이 듬뿍 반영된 듯 노란색으로 꾸며진 청첩장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감히 펼쳐보기가 두려울 만큼 아름다워서 하진은 그것을 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이내 큰마음을 먹고 열어봤을 때, 시야에 담긴 그 한 줄이 하진을 울컥하게 했다.

[가장 빛날 신부 서태희]

하진이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늦게 말해서 미안.”

“…….”

“왠지 너희한테는 부끄럽더라고. 자식들한테 재혼 소식 들려주는 엄마 느낌이랄까?”

농담으로 던진 말이긴 했으나 태희는 정말 그런 기분을 느꼈다. 하도 어릴 때부터 봐와서 그런가. 하진은 십오 년, 도현은 이십오 년을 봤다. 그러니 아직도 태희 눈에는 학생 같은데 그런 아이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다는 게 참.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고맙다, 우 대표. 우리 하진이는 축하 안 해주나?”

“아, 대표님. 당연히 축하드리죠.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요.”

하진이 제 앞에 빈 잔을 괜히 한 번 툭, 건드리며 말했다.

“나는 대표님 워커홀릭이라 혼자 늙어 죽을 줄 알았거든요.”

“어머, 얘는 말을 고따위로 하니.”

“잘됐어요, 진짜. 에효, 우리 서 대표님 데려갈 분 이름이나 봐둬야겠다.”

하진은 다시 청첩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신부 서태희 옆에 있는 신랑의 이름을 천천히 확인했다. 이혁. 성함이 이혁이시구나. 외자시네. 이혁. 잠깐만, 이혁?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 바닥에서 흔한 이름, 안 흔한 이름 다 들어봤으니 특별한 것도 없다만 이상하게 이혁이란 이름은 얼마 전까지도 들어본 것처럼 친숙했다. 이혁이라. 몇 번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던 하진은 이내 그 실체를 깨닫고는 기함했다.

“우리 관장님 이름인데?!”

그렇다. 이혁은 하진이 드라마 때문에 줄기차게 드나들던 복싱장 관장님의 성함이었다. 에이, 설마. 세상에 동명이인이 한두 명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그런 하진의 생각은 머쓱하게 웃고 있는 태희의 얼굴을 보자 곧바로 기각되었다. 아니, 진짜로? 하진이 이번엔 고개를 틀어 도현을 바라봤다. 도현은 눈치도 없이 싱글벙글 청첩장 예쁘다는 칭찬이나 지껄이는 중이었다.

“야, 너 알고 있었어?”

“응? 뭐를?”

“관장님이랑 대표님이랑 사귀는 거.”

“아아.”

아아? 이 새끼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을 안 해? 하진은 퍽 기분이 상했다. 그에 하진이 눈꼬리를 치켜떴다. 그제야 도현의 잃어버린 눈치가 돌아왔다. 살짝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진아. 일부러 숨긴 거 아니고, 나도 어제 알았어. 복싱장에서 관장님 통화하는 거 진짜 우연히 엿들었다니까?”

“왜 바로 말 안 했는데?”

“어제 말할 타이밍이 어디 있었어. 우리 집 오자마자 눈 맞아섭…읍!”

하진이 다급하게 도현의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아마 도현은 눈 맞아서 밤새도록 섹스했다는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오싹한 기분에 하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럼 그때 헤어졌다던 마이 달링이 관장님이었어요?”

“응. 내가 찼었지.”

“와, 난 대표님이 술 엄청나게 마시길래 차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결혼하재서 시간을 좀 가지자고 했어.”

“왜요? 결국 결혼하시잖아요?”

“애들은 모르는 어른들만의 깊은 사연이란 게 있단다.”

뭔진 몰라도 그 사연이란 것이 심히 복잡해 보여서 하진은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두 분이 좋아서 결혼한다는데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기고. 그런데도 어딘가 쓸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어 하진이 냅다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에 옆에서 도현이 작게 속삭였다. 천천히 마셔, 하진아.

그 일련의 행동들이 몹시 자연스러웠다. 마치 몇 년 산 부부 바이브랄까. 이거, 이거 수상한데?

“둘이 살림이라도 차렸니?”

“네.”

“아니요.”

전자는 도현, 후자는 하진의 대답이었다. 하나의 질문에서 나온 대답이 너무도 상반된 터라 태희가 의아한 눈길로 둘을 바라봤다. 이윽고 하진이 손에 힘을 푼 틈을 타 도현이 기어코 입을 놀렸다.

“아직 차린 건 아닌데 거의 그런 셈이죠. 일주일은 하진이 집에서 자고, 일주일은 제집에서 자고. 열심히 두 집 살림 중이거든요.”

“그 정도면 그냥 합치지.”

“그럴까? 우리 그냥 합칠까?”

도현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하진에게 물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하진은 왠지 도현의 엉덩이 밑으로 꼬리가 살랑이는 것 같았다.

“합치긴 뭘 합쳐. 괜히 기사만 나.”

“힝. 그렇대요.”

도현의 ‘힝’은 아쉬움이 가득 묻은 채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웠던 태희는 지금만큼은 도현의 편에 서주고 싶었다.

“그럼 윗집 아랫집 살든가. 내가 그 근방에 부동산 업자 좀 아는데 하진이 사는 동에 매물 나왔다더라. 이참에 이웃 주민하고 좋지, 뭐.”

***

“하진아.”

먼저 샤워를 마친 도현이 칫솔을 입에 문 채 욕실로 향하는 하진을 불러 세웠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기만큼이나 촉촉한 음성이었다. 그에 하진이 양치 거품을 가득 머금고는 뭉개진 발음으로 답했다.

“웅?”

입술 주위에 하얀 거품이 마시멜로처럼 귀여웠다. 확 먹어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순서라는 게 있어서 참는다. 이내 도현은 성큼성큼 하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주저 없이 툭, 하진의 어깨 위에 제 고개를 떨구었다. 단숨에 좁혀진 거리에 하진이 양치질을 멈추곤 물었다.

“므야?”

마치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도현은 대꾸 없이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잠옷의 보드라운 촉감과 살결의 향기로운 후각이 앞다투어 도현을 자극했다. 이어 도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내려간 시선이 동그란 하진의 눈동자와 얽혔다.

“나 진짜 이사 올까?”

사실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니 태희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 계속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너무 가볍거나 무거워선 안 될 것 같아 타이밍을 재고만 있었는데 어느 포인트에 꽂힌 건지 열심히 우물거리는 하진을 보자 불쑥 말이 나와버렸다.

하진은 대답이 없었다. 덕분에 내려앉은 정적이 도현을 긴장시켰다. 거절하면 설득하면 될 일이고, 승인하면 좋아하면 될 일인데 아무 말도 안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다 문득 도현의 시야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칫솔 때문에 앙, 다물어진 하진의 입술.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것만 없으면 하진이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현은 곧바로 하진의 입술 새 칫솔을 뺏어버렸다. 이제 걸리적거리는 건 없었다.

“나 취했나 봐.”

“…….”

“그러니까 봐주라.”

비겁하게 핑계를 댈 만큼 도현은 간절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한 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그 간절한 눈동자가 하진을 꼼짝없이 옭아맸다. 무슨 소리냐고 묻기 위해 입을 벌린 하진을 도현이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흣…야.”

갑작스럽게 입술을 덮쳐오는 도현 때문에 하진이 유약한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도현은 틈을 더 벌리고 하진의 입안을 침범했다. 풍성한 거품 속에서 혀가 유연하게 뒤엉켰다. 포슬포슬한 크림으로 가득 찬 아이스슈가 뜨거운 혀 위에서 녹아내리듯 차가웠던 거품이 열기를 만나 금세 달아올랐다.

“하윽….”

시원하고, 부드러운 맛의 향연이었다. 말랑한 혓바닥이 살살 굴러 거품 틈을 헤엄쳤다. 곧이어 서로의 혀끝이 닿는 순간, 그 찌릿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현도 하진도 점점 더 몽롱해졌다.

하진의 입안을 사정없이 범하며 도현은 자연스럽게 하진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맹렬하게 포개진 입술 옆으로 거품이 흘렀다. 목덜미를 타고 흐른 거품은 쇄골에서 멈췄다. 그 간지러움에 하진이 몸을 부르르 떨자 그제야 서로를 갈구하던 혀가 멈춘다.

“하아…하아….”

퉤. 거친 숨과 함께 하진이 세면대에 양칫물을 뱉어냈다. 그리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거품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갑자기 뭔데.”

가라앉지 않은 흥분이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알싸한 단맛은 여전히 입안을 감도는 상태였다. 머리까지 핑 돌 지경이었다. 그런데 도현은 무슨 생각인지 몇 번 입을 헹구곤 물 묻힌 손가락으로 하진의 입가를 문지르기만 한다.

“왜 그러는데.”

하진이 제 입가를 만지는 도현의 손을 잡아채 아래로 끌어내렸다. 애초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는지 쉽게 떨어져 나간 손이 하진의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칭얼거리지? 무슨 글씨라도 쓰는 것처럼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아, 글씨? 마저 입을 헹구면서 오른손에 감각을 집중한 하진은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24’ 도현은 줄곧 24를 쓰는 중이었다. 24? 이십사? 24가 뭐 어쨌….

“이사?”

하진의 물음에 도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하진은 깨달았다. 도현이 여태껏 태희의 말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 눈치를 보다가 난데없이 이사 얘기를 꺼내는 게 이상하긴 했다. 드디어 도현의 의중을 알아챈 하진은 빙그레 웃으며 깍지 낀 도현과 제 손을 물에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물이 서로의 손 전체에 흘렀다.

“현아.”

졸졸거리는 세면대 소리 위로 하진의 미성이 덤덤히 덧씌워졌다. 도현 역시 그에 맞춰 나직이 대답했다. 응-.

“나는 네가 이사 오면 좋아.”

“정말? 그럼 내일이라도 당장….”

“근데 말이야.”

도현의 안면에 떠오른 미소가 일순간 사라졌다. 잔뜩 경직된 얼굴이 하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시 거절하려는 건가. 그럼 이제 어떻게 설득해야 하지. 도현의 머릿속은 벌써 하진을 향한 설득 작업을 준비 중이었다. 이윽고 하진이 천천히 운을 뗐다.

“이사라는 게 오늘 뭐 먹을래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 자본에 인력에 시간까지 필요한 문제를 고작 나 때문에 그렇게 쉽게 결정하면 어떡해.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잠자코 말을 듣던 도현의 눈썹이 돌연 꿈틀거렸다. 첫째로 고작이라는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박하진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박하진이라서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마음에 안 드는 건.

“잘못될 리가 없잖아.”

이미 끝이 있을 거라 확신하는 듯한 하진의 가정이었다. 내가 그렇게 믿음을 못 줬나. 도현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십 년 돌고 돌아서 만났다고 제 감정에만 급급했지 정작 하진의 불안함은 놓치고 있었던 스스로가, 조금 미웠다.

“하진아.”

강단 있는 목소리가 하진을 불렀다. 물소리가 지워진 욕실엔 그 단단함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예전에 네가 했던 말 기억나? 우정이든 사랑이든 감정은 변질되기 마련이라고. 그래서 넌 그런 거 안 믿는다고.”

첫 만남 이후 도현이 줄곧 하진 곁을 맴돌던 시기가 있었다. 저 말은 그때, 하진이 했던 말이었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날을 세우던 그 시기에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아 날카로이 내뱉었던 말. 그 말을 도현이 지금껏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진의 마음이 요동쳤다.

근데 하진아-.

“너 나 믿었잖아. 우리 우정 믿었었잖아.”

“…….”

“그러니까 우리 사랑도 한 번 믿어주면 안 될까?”

도현은 알았다. 하진의 불안이 영원하지 않은 감정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그래서 무작정 영원할 거라는 낙관적인 희망이 아닌 진실한 부탁으로 하진을 붙잡았다. 어딘가에 정착하기 두려워 가벼움을 선택했던 하진이 이젠 저가 있는 곳에서 무겁게 내려앉기를. 도현이 간절히 빌고 빈 것이었다.

“야, 우도현.”

“응?”

“너 이사 오면 평생 나랑 가까이 있어야 해.”

“좋지. 우리가 설령 잘못되더라도 계속 네 얼굴 볼 구실이라도 있는 거잖아.”

도현의 눈매에 웃음이 번졌다. 사랑스럽게도 휘어진 눈꼬리를 하진이 매만졌다. 이런 애를 두고 괜한 걱정을 했다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던 걸지도.

“안아줘.”

도현이 양팔을 벌린 채 말했다. 이미 안긴 것보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하진은 군말 없이 넓은 도현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먼지 한 톨도 못 들어가게 꽉 껴안으니 적나라하게 서로의 것이 느껴졌다. 꼿꼿이 선 두 성기가 옷 위로 서로를 스쳐대기 시작했다. 읏. 도현이 노골적으로 하진의 엉덩이를 쥐었다. 그리곤 단번에 하진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발이 띄워진 하진이 도현의 목에 손을 두르며 입술을 갈구했다. 하진답지 않게 먼저 입술을 가져다 댈 만큼. 눈꼬리에서 광대를 타고 내려와 쪽쪽, 입술을 비벼댈 만큼. 하진은 도현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하진이. 오늘따라 급하네?”

하진의 손이 어느덧 도현의 티셔츠를 반쯤 말아 올린 채 등을 긁고 있었다. 도현은 능숙히 하진의 구애를 받아주면서 침실로 걸음을 서둘렀다. 여유로운 척했으나 사실 도현도 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움직일 때마다 입술이 어긋나니 하진이 울상을 지었다. 곧 조그맣게 달싹거리던 입술에서 달뜬 애원이 나왔다.

“키스… 키스해줘.”

미친! 귀여워! 이렇게 안달 난 박하진이라니!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도현의 마음속 색마가 들끓었다.

“키스해줘?”

“응….”

쪽. 도현이 짧게 입을 맞췄다. 하진의 눈썹이 더 축 늘어졌다.

“더, 더 해줘.”

젖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하진이 허리를 움직였다. 비벼지는 성기 탓에 도현의 아랫배가 점점 뭉근해졌다. 이내 침실에 도착한 도현이 조심스레 하진을 눕히곤 하진이 채 벗기지 못한 상의를 단번에 벗었다. 그러자 솟은 성기가 더욱 윤곽을 드러냈다.

이어 도현은 제 옷과는 달리 단추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푸르며 하진의 잠옷을 벗겼다. 하얀 가슴팍이 나타났고, 마지막엔 드로즈와 바지를 같이 내렸다. 이내 주인만큼 예쁜 하진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몽글몽글한 액이 나오고 있는 귀두 또한 예뻤다.

“내가 키스해 주면 하진이는 뭐 해줄래?”

짓궂은 시선이 하진을 탐했다. 손가락은 감질나게 귀두를 건드리고 있었다. 흐읏. 잇새로 터진 신음을 막을 틈도 없이 하진은 곧바로 도현의 손을 가로채 제 구멍을 문질렀다.

“이거 줄게.”

“…….”

“그러니까, 읏, 빨리… 가져가….”

아, 졌다. 이렇게 요망한 하진을 도현은 절대로 이길 수가 없었다. 일순 온몸에 전기가 오는 듯했다. 제 앞에서 빛을 뿜어대는 하진이 심히 눈부셔서 정신을 차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역시 꺼내달라고 아까부터 꺼떡대던 제 자지였다.

“…현아.”

하진의 발끝이 옷 아래 감춰져 있는 도현의 성기를 간질였다. 살짝만 닿았는데도 단단하게 부푼 것이 느껴졌다. 그 야살스러운 발끝은 점점 위로 올라가 종국엔 도현의 어깨에 안착했다. 도현이 하진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밴딩을 살짝 내리니 터질듯한 성기가 튕겨 나왔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하진아.”

“…흐으… 무슨, 생각….”

도현이 단번에 손가락 두 개를 쑤셔 넣었다. 하윽! 갑작스러운 자극에 하진의 허리가 쳐들렸다. 침대 시트를 방황하던 왼발은 이미 도현의 손에 붙들려 활짝 열린 채였다. 귀엽게 뻐끔대는 선홍빛 구멍이 도현의 두 손가락을 우물거렸다. 이내 도현이 왼손으로 그 구멍을 벌리며 망설임 없이 약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곤 세 손가락으로 느리게 하진의 내벽을 훑었다. 여기 어디쯤…

“으읏! 혀, 현아. 거기, 흣!”

찾았다. 도현의 얼굴에 얄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 도현이 한 번 더 중지로 그곳을 누르자 곧바로 하진이 신음을 터트린다.

“아! 윽, 거기, 거기 좋, 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자꾸만 다리를 오므리면서도 하진은 좋음을 숨기지 않았다. 더, 더 해달라고 도현을 보챘다. 말캉한 내벽을 휘젓는 도현의 손길이 빨라졌다. 그러다 꾸욱, 스팟을 누른 상태로 도현이 하진의 딱딱한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 으응! 하진이 자지러졌다. 그 모습에 도현의 잇새에서도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무슨 생각 하냐면….”

도현이 파르르 거리는 귀두를 원 모양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미끈거리는 쿠퍼액이 질질 흘러 도현의 손가락을 적셨다.

“이 좆이 정액을 몇 번이나 뱉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

그와 동시에 하진의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도 귀두를 문지르는 손가락도 모두 속도를 높였다. 아래론 찌걱거리며 위론 탁탁거리는 소리가 강하게 하진을 옥죄었다. 그 위로 얹어진 도현의 젖은 숨결이 하진을 더욱 안달 나게 했다.

“아! 현, 아! 같이, 응, 하면 안, 돼. 나, 나, 갈 것, 같, 단 말, 흣!”

들어찬 사정감에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내뱉는 박하진은 존나 야해 빠진 얼굴이었다. 당장 저 안달 난 구멍에 성기를 처박고 뒤흔들고 싶을 만큼. 하지만 예쁜 얼굴을 저만 보는 게 아쉬웠다. 하진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흥분으로 점철된 본인의 얼굴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하진아.”

일순간 도현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곤 하진을 불렀다. 쪽. 쪽. 목덜미에서부터 턱, 볼, 그리고 입술까지 빼놓지 않고 사랑을 퍼부으니 줄곧 신음을 흘리던 하진도 진정된 듯 입술을 연다. 그런 하진을 도현이 잘 달래며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단번에 하진의 몸을 바깥쪽으로 돌린 채 무릎을 꿇렸다.

“자기야. 저기 봐봐.”

“…….”

“너 존나 야해.”

거친 속삭임이 귓등을 스쳤다. 이내 하진은 마주할 수 있었다. 거울 속 사정없이 흐트러진 제 모습을. 그리고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도현의 성기가 단숨에 하진의 구멍을 쑤셨다.

“하읏!”

매끈한 하진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동시에 붉어진 귀두에선 울컥하고 질척한 액이 쏟아져나왔다. 이미 정점 부근에 있던 사정감이 도현에게 박히자마자 끝까지 도달해버린 것이다. 바르르, 떨리는 내벽은 도현의 성기를 강하게 조여댔다. 큿…. 도현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흥분을 참아냈다.

“한 번.”

“하아… 뭐가.”

하진이 숨을 헐떡였다. 몸에 힘이 빠진 나머지 그대로 움츠러드는 하진을 도현이 뒤에서 안아 젖혔다. 그 덕에 하진은 또다시 거울 속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잔뜩 흥분에 찌든 제 얼굴이 낯설어 하진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도현은 하진을 껴안은 채 손을 내려 하진의 아랫배를 묵직이 누른다. 제 단단한 성기가 만져질 만큼 세게.

“네 좆이 정액 뱉어낸 수.”

“…….”

“이제 고작 한 번이라고, 자기야.”

그 말을 이해할 틈도 없이 도현은 무자비하게 하진의 안을 찔러댔다. 단단히 포박된 하진의 몸이 찌걱, 찌걱 낯부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밋, 힌놈아… 나 방금, 갔 윽!”

선득한 쾌감이 머리를 지배했다. 흔들리던 하진의 고개가 이내 도현의 어깨 위로 젖혀졌다. 도현이 혀끝을 세워 하진의 귓바퀴를 핥았다. 그에 감은 눈, 그것을 빼곡히 덮은 하진의 속눈썹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현이 그 눈두덩이에 살포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하진아, 눈 떠야지.”

닿는 숨이 열렬했다. 그 숨에 녹은 듯 하진이 느릿하게 눈을 뜨자 도현이 곧바로 하진의 턱을 쥐곤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더는 하진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하게 하진을 옭아맸다. 결국 하진은 정면으로 성기를 바짝 세운 제 나체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엄청 야하다, 그치?”

도현이 거울 속 자신들을 맹렬히 바라봤다. 욕망이 범벅된 노골적인 시선은 거울에 비친 하진의 구석구석을 훑어내렸다. 은밀한 부분 곳곳이 선홍빛으로 물든 채였다. 그와 달리 행동은 퍽 조심스러웠다. 하진의 매끈한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도현은 천천히 허리를 돌렸다. 마치 하진을 달래주려는 듯한 그 행동에 오히려 조급해진 건 하진이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곳에 하진은 저도 모르게 같이 허리를 돌렸다. 몹시 되바라진 움직임이었다.

“현아… 흐… 감질맛 나….”

하진이 도현의 목젖을 핥으며 말했다. 툭 튀어나온 목젖을 입 안에 머금곤 미끈한 혓바닥으로 문지르길 몇 번. 애써 천천히 욕정을 억누르던 도현이 봉긋 올라온 하진의 유두를 돌리다 말고 쭈욱 잡아 뜯는다. 아! 고통에 입을 연 하진을 도현은 그대로 물어 삼켜버렸다.

하아…. 거칠게 얽은 혀가 열기를 뿜었다. 츄읍. 흡.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조금의 숨 쉴 틈도 없었다. 도현은 그렇게 하진을 밀어붙이다가 하진이 고개를 완전히 젖혀서야 입술을 떼어냈다.

“하…….”

더운 흥분이 내쉬는 숨마다 분출됐다. 아직 제대로 사정하지 못한 도현은 그 흥분이 배로 더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도현의 얼굴에서 그것이 티가 났다. 잔뜩 끓은 몸 역시 너무 뜨거워서 하진도 금방 도현의 흥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혼자만 간 것이 어쩐지 미안해졌다.

“현아.”

하진이 잠시 제 몸에서 도현을 빼내었다. 그리곤 엉덩이를 도현 쪽으로 쳐들며 자세를 취했다. 얼굴을 침대에 묻은 채 하진이 양손으로 제 엉덩이를 활짝 벌렸다.

“박아줘.”

“…….”

“세게.”

그에 도현은 단숨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퍽! 퍽! 도현의 성기가 구멍에 쩍쩍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흐읏! 깊은 곳까지 한 번에 들어온 성기는 아까보다 더 꽉 찬 느낌이었다. 퍽! 이읏! 흑! 도현이 허리 짓을 빨리할수록 하진의 쾌감 역시 높아졌다.

“큭, 하진, 아.”

“으, 응. 왜애….”

“내가, 윽. 맨날 져… 너한, 테.”

“지, 읏, 랄… 하지, 응, 말라고 해도, 존, 나, 윽! 처박는, 주제에….”

하진이 퍽 억울한 듯 흐느꼈다. 지금도 제 몸이 덜컹덜컹 흔들릴 정도로 세게 처박으면서 지긴 누가 졌다고. 퍽. 퍽.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면서 도현이 하진의 뒷덜미를 콰득, 깨물었다. 아! 그 아찔한 감각이 일순간 하진을 점령했다.

“예쁘다.”

금세 모습을 드러낸 붉은 자국에 손을 뻗은 도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일종의 영역 표시였다. 이런 하진의 모습을 앞으로 다시는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존나 유치한 독점욕 같은 거랄까. 그것에서 시작한 도현의 손바닥이 하진의 척추 마디마디를 뜨겁게 쓸어내렸다. 그러다 이내 향한 곳은 사정감이 들어찬 하진의 성기였다.

“야, 혀, 나, 응! 나와 흐읏, 놔 줘….”

하진의 애원에도 도현은 자비 없이 퍽, 퍽! 빼고 넣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길게 빼낸 성기를 단번에 쑤셔 박았다. 아! 순식간에 하진이 고개를 쳐들었다. 도현이 곧바로 쥐고 있던 성기를 놔버리니 조금 전보다 농도가 옅어진 정액이 파르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도현의 성기 역시 끈적한 정액을 뱉어냈다. 하진의 아랫배가 심히 뜨거워졌다. 이어 도현이 성기를 빼내자 하진의 구멍에서 질질 도현의 것이 흘러넘쳤다. 하진은 완전히 녹다운된 채였다.

“두 번.”

널브러진 하진 옆에서 도현은 태연하게 숫자를 세었다. 이미 제 좆을 하진의 엉덩이골 사이에 비비면서 말이다. 하진이 기겁하며 도현을 밀어냈다.

“미친 새끼야… 좀 쉬자….”

“응, 우리 하진이는 쉬고 있어.”

나는 그냥 내 좆만 네 구멍에 넣어놓을게-. 그렇게 도현은 하진 뒤에 바투 붙어 삼차 전을 준비했다.

***

“하진아. 고개 살짝만 내려봐. 표정은 활짝 웃기.”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곤 바닥에 거의 드러누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에도 도현은 진지했다. 몹시 진중하게 사진 각도를 살피며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있는 하진을 찍는 중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얇은 넥타이 하나를 둘러맨 하진은 단정하면서도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듯했다. 사진은 찍어주는 사람의 마음이 반영된다고 했던가. 아마 도현이 찍어준 사진들 속 하진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일 것이다.

“내 얼굴 말고 이거 로고 잘 나오게 찍어줘. 민트멜로디가 준 거니까.”

“자기야. 자기는 아직도 민트멜로디의 마음을 몰라? 우리 민멜들은 그저 내 새끼가 이거 받고 기뻐하는 모습 사진으로 남겨주면 좋겠다. 이거 하나야. 로고? 그게 무슨 소용이니. 내 새끼 얼굴이 제일 중요하지.”

박하진 덕질 이제 근 두 달 차에 접어드는 도현이었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민트멜로디의 마음을 헤아려 자신이 하진 곁에 있는 한은 예쁜 사진 최대한 많이 찍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가뭄이었던 우리 민트멜로디에게 왕창 떡밥을 던져주는 게 도현 스스로가 짊어진 책임이었다. 예쁜 박하진을 얻었으니까!

“근데 너 여기 있어도 돼? 생방 얼마 안 남았는데 이것저것 체크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마지막으로 머리 손질을 마친 하진이 제 대기실이 안방인 양 편히 앉아 있는 도현에게 물었다. 저가 찍은 하진의 사진들을 보며 실실 웃고 있던 도현은 그에 시간을 확인하곤 다시 눈길을 돌렸다.

“우리 유능하신 김 비서님께서 하고 계시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도현에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곧 하진은 도현 옆에 앉아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무능력한 애인은 별론데.”

그 말에 도현이 벌떡 일어났다. 손은 이미 분주해져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고, 발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대기실 문 앞까지 도달한 채였다. 갑자기 다급해진 도현에게로 대기실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그중 W 전담 스타일리스트의 시선이 유독 번뜩였다. 아, 대표님. 제발 머리 헝클이지 마세요. 스타일링 다 해놓은 건데! 스타일리스트의 속이 타들어 갔다.

“김 비서님, 지금 어디세요? 제가 갈게요! 무능력하지 않은 제가! 얼른 가서 능력 발휘 좀 하겠습니다!”

하진이 들을 수 있도록 도현이 목청껏 외쳤다. 능력! 있는! 남자! 우도현! 이렇게 몸소 보여줘야 하진이 제 능력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의미를 진작 알아들은 하진은 애써 웃음을 참다가 도현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기어코 대기실을 나가는 도현의 표정이 안 봐도 울상이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가끔 하는 짓이 영 애 같았다. 그게 좀 귀여워 보이면 콩깍지 씐 거려나. 귀여운 애인 마중이라도 해줄 겸 하진이 일어서 도현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도현이 어딘가 이상했다. 이쯤이면 대기실을 나갔어야 하는데 우두커니 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마치 무엇인가를 감추는 것처럼 말이다.

혼잡한 소음을 뚫고 이내 하진이 마주하게 된 장면은 뜻밖이었다.

“헉! 선배님!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이수열입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하진을 향해 인사했다. 숙인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최근 종영한 드라마에서 인상 깊게 본 배우였다. 그 인상이라는 게 너무 하진의 취향이어서 무심코 틀었다가 2시간을 내리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배우가 왜…

“저희 소속 배우예요. 오늘 게스트로 모셨고요.”

하진의 의문을 읽은 도현이 대신 답했다. 아, W 소속 배우였구나. 알았으면 미리 사인 한 장 받아둘 걸 싶다가도 옆에서 마뜩잖은 시선을 보내는 도현이라 금방 마음을 접었다. 지금 우도현 눈빛이면 아마도…

“박하진 씨 팬이시랍니다.”

일주일은 족히 시달릴 질투였다. 아주 눈에서 광선 나오겠네. 하진이 도현을 뒤로 잡아끌곤 수열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저도 팬입니다, 수열 씨. 드라마 너무 재밌게 봤어요.”

“정, 정말요?”

“네. 그 해맑은 미소가 완전 제 취….”

“…….”

“…재치 있었습니다. 하하.”

젠장. 하마터면 제 취향이라고 할뻔했다. 하진이 급하게 수습했으나 도현이 이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힐끗 가자미눈으로 본 도현은 이미 화가 잔뜩 났는지 콧바람을 씩씩대고 있었다. 아. 저 정도면 일주일 치가 아니라 한 달 친데.

“너무 영광이에요, 선배님. 이따 생방에서 봬요, 파이팅!”

하하하… 네… 화이팅…. 애써 입꼬리를 올린 채 하진은 수열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하진에겐 아직 마무리 지을 게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옆에서 흥흥거리는 제 애인을 달래주는 것 말이다.

“취향.”

하진이 어물쩍거리는 사이 도현이 먼저 낮게 읊조렸다. 그에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하진이었다.

“한결같으시네요.”

도현이 내뱉은 말은 단 한마디였으나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여럿이었다. 아마 그중 도현을 가장 질투 나게 만드는 것은 한결같은 박하진의 취향 속에 절대로 속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놈의 귀여운 베이비 페이스, 씨발.

“하하!”

“하하하!”

“그게 아니고….”

어색한 웃음만이 두 사람의 주변을 메웠다. 그리고 막 하진이 변명을 시작할 참이었다. 도현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어 액정을 확인한 도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채 하진의 눈앞에 핸드폰을 흔들었다.

“저는 무능력한 애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박. 하. 진. 씨.”

아. 한 달이 뭐야. 저거 완전히 삐졌는데. 멀어지는 도현의 뒷모습을 보며 하진은 절망했다.

***

[Wonderful 재능기부 콘서트]

W가 주관한 새로운 형식의 재능기부는 처음 계획했던 10회분 콘텐츠를 마지막으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오늘은 그러한 성원에 보답하고자 W 엔터테인먼트가 특별히 준비한 온라인 콘서트의 날이었다. W와의 10주를 빛내준 재능기부자들이 모여 파티를 열고, 각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는 형식의 이번 콘서트는 온라인 무료입장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말이 재능기부 콘서트지 사실상 연예계에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모인 이 자리에 역시나 주최자인 도현이 빠질 수 없었다. 도현은 아침부터 하진과 풀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스타일링을 끝낸 상태였다. 본인이 우스갯소리로 연예인만큼 유명한 엔터 대표라고 하지만, 도현은 정말로 그런 축에 속했다. 금수저에 유학파 출신, 배우 같은 얼굴, 최연소 엔터 대표까지. 도현을 설명하는 것들 중에 모자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이 모든 게 겉으로만 비추어진 도현의 모습이라는 게 흠이었지만.

“아, 박하진 씨. 이 디저트 좀 드셔보세요. 귀여운 거 좋아하시잖아요.”

사실은 몇 시간 전, 제 애인이 외간 남자에게 관심을 줬다는 이유로 입술을 비죽이는 사람이란 것을 누가 알기나 할까.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하네요, 우 대표님. 근데 저 단 것도 안 좋아하고 귀여운 건 더더욱 안 좋아합니다.”

빨간 불이 번쩍이고 있는 생방송이었다. 앞에 세팅된 디저트 중 토끼 같은 마카롱을 집어 든 도현이 대놓고 하진을 약 올렸지만, 하진은 절대로 응하지 않을 셈이었다.

“그래요? 토끼가 꼭 박하진 씨 같아서 귀여운데.”

분명 혼잣말이었으나 도현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미친놈아. 마이크로 목소리 다 들어간다고! 갑자기 튀어나온 도현의 주접에 하진이 오른발로 도현을 쿡 찔렀다. 아. 도현이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젠장. 이 망할 무의식이 하진과 냉전 중인 상황에서까지 주접을 떨고야 말았다. 그러게 박하진은 왜 하필 토끼 같아서는 귀엽고 난리야! 도현은 퍽 억울해졌다.

“왜요?”

저를 향한 도현의 지긋한 시선에 하진은 떨떠름히 물었다. 손에는 마카롱이 아닌 담백한 크래커를 집은 채였다. 도현이 대답이 없자 하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 대표님.”

“네?”

“이게 제 취향이에요. 담백한 크래커.”

난데없는 하진의 취향 고백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하진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크래커를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는 그 모습이 도현의 눈엔 마치 토끼가 야무지게 당근 먹는 모습이라 앙, 깨물어주고 싶었다. 아, 참. 냉전 중이지. 도현이 혹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내 꿀꺽, 크래커를 삼킨 하진이 말을 이었다.

“취향 바뀌었다고요.”

“…….”

“너무 달아서 애 같은 거 말고.”

“…….”

“담백하고 멋진 걸로요.”

너처럼요-. 도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 말이었다. 그 작은 속삭임이 놀랍게도 주변의 소음을 장작 삼아 도현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도현은 속절없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얼굴이 타올랐다.

“자, 그럼 우리 우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뭘 어떻게 생각해요. 박하진, 존나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도현이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생각했다. 그러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조용해져서야 깨달았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어…. 무슨 질문이었죠?”

도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에 사회자는 한껏 짓궂은 얼굴을 내걸곤 답한다.

“나랑 밥 먹는 도중에 내 애인이 내 친구의 깻잎을 떼어준다면? 대표님은 어느 쪽이세요. 괜찮다? 절대 안 된다?”

흥미롭다는 듯 도현의 답변을 기다리는 사회자와 별개로 도현은 이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건 너무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 아닌가?

“당연히 안 되죠.”

도현은 마치 정답을 말하는 사람처럼 의기양양했다.

“단호하시네요. 이유는요?”

이유? 도현이 잠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방금 막 도현의 머릿속에서 하진이 강준수의 깻잎을 떼어주던 참이었다. 그리고 강준수는 속도 없이 그 깻잎을 맛있게 처먹고 있었다. 와, 씨발. 저 정도면 간접키스 아니야? 상상 속에서 도현은 이미 뒷목 잡고 쓰러진 후였다.

“굳이? 진짜 구우지이? 내가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남 깻잎을 떼어준다고요? 와, 그건 진짜 내 앞에서 그냥 간접키스 하는 거 아니에요?”

“새로운 주장 나왔네요. 깻잎 떼어주기는 간접키스 급이다!”

“그렇죠! 하진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깻잎이 말이 돼?”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도현이 하진에게 공감을 구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말하겠지? 애초에 이걸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깻잎이 무슨 대수라고.”

“…어?”

일순간 도현의 낯빛이 창백해지면서 동공이 심하게 널뛰었다. 그와 함께 심장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진짜 있었다. 저걸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미치도록 귀엽고 예쁜 제 애인이라니. 도현의 절망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났다.

***

며칠 뒤, 이 영상은 한 커뮤니티에 소개됨으로써 깻잎 논쟁을 재점화시켰다.

제목 : F와 T의 극명한 차이

ㅇㅇ | 20XX.XX.XX. 12:36

내 애인이 내 친구 깻잎을 떼어준다?

F : 구우지이?

T : 뭐래. 깻잎이 무슨 대수라고.

F : 완전 간접키스 아니야?!

T : 응~ 깻무대~

ㅇㅇ | 20XX.XX.XX

구우지이? 존나 킹받네…

↳ㅇㅇ | 20XX.XX.XX

구우지이?ㅋ

↳ㅇㅇ | 20XX.XX.XX

앜ㅋㅋㅋㅋㅋㅋ 댓글이 더 킹받아 ㅅㅂㅋㅋㅋㅋㅋ

ㅇㅇ | 20XX.XX.XX

깻무대 ㅅㅂ 앞으로 깻잎 논쟁 벌이는 곳 있으면 무조건 있을 듯

F 우는 소리 여기까지 들림

↳ㅇㅇ | 20XX.XX.XX

응 깻무대

↳ㅇㅇ | 20XX.XX.XX

지나가던 F

그냥 지나갑니다.

ㅇㅇ | 20XX.XX.XX

난 저 영상에서 T가 깻무대 하니까 F 당황해하는 표정이 더 웃김ㅋㅋㅋㅋㅋ

↳ㅇㅇ | 20XX.XX.XX

ㄹㅇ 내 웃음지뢰ㅠㅠㅠ 이 새끼 뭐라는 거야? 딱 이 표정

↳ㅇㅇ | 20XX.XX.XX

누가 짤로 떠주면 좋겠음ㅋㅋㅋㅋㅋ

(…더 보기…)

그리고 이 영상을 방금 접하게 된 대한민국 거주 익명의 A 씨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돌판 십 년 차. 기본 장착된 호모 렌즈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 주식 될 주식이라고. 파랑새 팔로워 5천 명을 거느리는 A 씨는 당장 글을 올렸다.

호모렌즈 장착된 A

@FA_INT

이제 하다하다 대표X아이돌까지 먹게 됨

근데 존맛 cp이름이랑 왼른 내가 맘대로 정해봄

12:49 · 20XX. XX. XX.

1,520 리트윗 89 인용한 트윗

839 마음에 들어요

호모렌즈 장착된 A @FA_INT · 5분

도하

25 삐에로 @25B_ero · 2분

대표X아이돌? ㅁㅊ 미슐랭 쓰리스타임. 그래서 누구?

호모렌즈 장착된 A @FA_INT · 방금 전

ㅇㄷㅎXㅂㅎㅈ 최근 언급 많아진 두 사람 ㅇㅇ 소꿉친구 ㅇㅇ

이 글 하나가 돌판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일으켰다. 정작 당사자인 도현과 하진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

베란다 없이 큰 통창으로 된 거실엔 미처 풀지 못한 짐들이 차곡히 쌓여있었다. 그곳에 가구라고는 아직 침대와 소파가 전부지만 그린 톤의 벽지가 집안을 포근하게 채워주었다. 분명 색감이나 가구 배치나 하진의 집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띰에도 어쩐지 익숙한 이유는 집안의 구조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도현의 새 보금자리였다. 또한 하진의 아랫집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도현과 하진은 그 새집을 열심히 청소 중이었다.

“하진아! 나, 나 휴지 좀.”

휴지를 찾는 도현의 손길이 다급했다. 창틀을 닦다가 청소업체도 보지 못한 죽은 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윽.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어서 도현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하진에게 버려달라고 하기엔 이것도 못 잡냐면서 저를 애 취급할 게 뻔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휴지 다 썼는데? 물티슈라도 줄까?”

시작은 뭐든 새로운 것과 해야 한다는 강준수 말마따나 원래 있던 휴지를 죄다 버린 탓이었을까. 살다 살다 집에 휴지가 떨어지는 기이한 상황을 맞닥뜨릴 줄이야. 누가 알았냐고. 이삿날에 청소한답시고 휴지가 이렇게 많이 필요할 줄 말이야.

도현은 방금 얇은 물티슈로 벌을 잡는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울퉁불퉁한 촉감이 아주 생생히 느껴졌다. 최악이었다.

“아니면 우리 집 가서 가져올까?”

잔뜩 울상인 도현을 알아차린 하진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금세 도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우도현 집에 없는 것을 박하진 집에 가서 가져온다. 이 사소한 문장 하나가 도현을 들뜨게 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일상이 도래한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게 이젠 서로에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의미가 된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다.

“같이 갔다 오자.”

말간 웃음을 띠며 도현이 하진의 손을 잡았다. 봄의 쾌청한 햇살이 그들의 머리 위로 부서져 내렸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이삿날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될 만큼 행복했다. 오로지 둘만으로 채울 주말이…

딩동-.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딩동! 딩동! 도현의 끝내지 못한 생각과 맞바꿔 불청객은 꽤 빨리 등장했다. 개념 없이 초인종을 연달아 누르는 저 손길. 도현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에이, 아니겠지. 도현이 일단 하진을 제 뒤로 숨긴 뒤 월패드로 가까이 갔다. 화면엔 얼굴 대신 30롤짜리 두루마리 휴지가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아. 불안은 현실이 되어 도현의 현관문 앞에서 도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 여시죠, 대표님.]

휴지를 치우자 준수가 나타났다. 익살맞은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그냥 되돌아가진 않을 눈치였다.

“우리 강준수 팀장이 웬일로? 주말에? 저를 찾아왔을까요?”

[팀장 아니고 오늘은 친구로 왔습니다.]

“…….”

[이사한 집도 구경하고. 겸사겸사 인사도 좀 하고 그러게요.]

준수의 말엔 뼈가 있었다. 아마 지난번 저를 단숨에 행실 나쁜 놈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복수일 테다. 그때 준수는 다짐했었다. 기필코 제 눈으로 직접 하진을 보겠다고. 그래서 여태까지 우도현이 행한 집착 모먼트들을 다 밝히겠다고. 그 실전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집이 더러운데.”

[제집도 더러워서 괜찮아요.]

“너 새집 증후군 있지 않아?”

[나 지금 새집 살아.]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들어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모두 팽팽했다. 결국 이 싸움은 어서 열어주라는 듯 도현을 문 쪽으로 밀어버린 하진에 의해서 끝이 났다. 얼떨결에 문 앞에 도달한 도현이 울며 겨자 먹기로 문을 열었다. 그 좁은 틈으로 준수는 냉큼 휴지부터 들이밀었다. 하지만 도현은 쉽게 집안을 내주지 않았다. 이내 준수가 항복을 외치려던 찰나였다.

도현의 뒷덜미를 하진이 잡아끌었다. 그사이에 재빨리 틈을 벌린 준수는 간신히 집안으로 골인할 수 있었다.

“이야, 집 좋네.”

하진의 보호를 받은 준수가 의기양양하게 복도로 발을 디뎠다. 복도는 그린과 우드의 조화가 상당히 아름다웠다. 이를 찬찬히 훑어보던 준수의 시선이 복도 끝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도현을 혼내고 있는 하진을 본 순간, 준수는 버선발로 하진에게 뛰어갔다.

“와, 진짜 박하진 씨다!”

돌연 제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하진이 고개를 돌렸다. 준수가 한껏 신기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좀 낯설었다. 지금까지 도현에게서 듣던 외모와는 상당히 달라서였다. 못생겼다며, 이 자식아. 하진의 눈에 담긴 준수는 꽤 훤칠한 미남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현이 친구이자 W 엔터에서 일하고 있는 강준수라고 합니다.”

심지어 예의도 발랐다. 초면에 반말 찍찍하는 개싸가지라던 도현의 말과 달리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준수는 정중히 하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물론 곧바로 도현이 찰싹찰싹 준수의 손등을 때리는 바람에 하진에게 닿지는 못했지만.

“야, 너 그러다가 친구 잃어.”

보다 못한 하진이 도현을 밀쳐냈다. 그러나 준수는 도현의 저런 주접 따위엔 내성이 생긴 지 오래였다.

“어휴, 제 잘못입니다. 고귀하신 박하진 씨 손을 잡으려고 하다니. 이 막돼먹은 손 같으니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준수가 제 손등을 때렸다. 꽤 과장된 동작이었다. 마치 난 괜찮지만 실은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그럼요. 그건 그렇고 오늘 하진 씨 처음 뵙는데 내적 친밀감 장난 아니네요. 귀에 피가 나도록 들어서 그런가.”

“제 얘기 많이 들으셨나 봐요. 제가 괜히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뭐 그냥 귀엽다, 사랑스럽다, 예뻐 죽겠다. 이 정도만 들었는데요, 뭘.”

준수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부끄러워지는 건 하진이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 안 샐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좀 덜 할 줄 알았는데 어째 더 심한 듯했다. 얼굴이 저절로 화끈거렸다.

“그…. 집! 집 구경하실래요?”

하진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에 준수는 화색을 띠었고, 도현은 반색했다.

“좋죠!”

“집도 작은데 무슨 구경씩이나?”

“전용면적 25.7평에 해당하는 국민주택과 비교하자면 45평은 무척이나 큰 집이란다, 친구야. 물론 나도 국민주택에 거주 중이고.”

“들었지? 입 아프게 떠들지 말고, 준수 씨 집구경이나 잘 시켜드려. 난 준수 씨가 사 온 휴지로 벌이나 잡을 테니까.”

“…어? 벌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응. 네가 무서워서 못 잡고 있던 것도.”

하하. 누가 무서워했다고! 도현이 무안한 듯 웃어 젖혔다.

“가자, 준수야. 무려 45평짜리 큰 집 구경해야지!”

그러면서 얼른 준수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남의 집 침실을 제일 먼저 보게 된 준수는 곧바로 천장의 샹들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신혼집에서나 있을 법한 고풍스러운 모양새였다.

“여기 혹시 너희 신혼집이니?”

“응. 알면 일찌감치 꺼져줄….”

그때였다. 조금 전의 데자뷔처럼 초인종이 세 번 정도 울렸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또 등장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현이 거실로 나왔을 땐, 이미 하진이 문을 열어준 뒤였다.

“대표님! 이사 축하드립니다! 집들이는 안 하신다고 해서 가볍게 놀러 왔습니다!”

“…….”

“아! 하진 씨도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회사에서 저렇게 해맑은 김 비서를 본 적이 있던가. 도현은 잠시 숨을 골라야만 했다. 제 앞에서 하진과 인사를 나누는 김 비서가 혹시 환영일지도 모르니까. 아니, 그러길 바라니까. 하지만 양손 가득 디저트와 커피를 든 이는 진짜 김 비서가 확실했다. 뒤늦게 거실로 나온 준수가 도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오늘 자유의 몸이시라고 실컷 놀다 들어가신대.”

그걸…. 왜 굳이 우리 집에서? 도현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준수는 그저 활짝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하, 진짜 이 사람들이…. 결국 도현은 기가 차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졌다, 졌어.

“자자. 다들 식탁에 앉아 계세요. 차리는 건 집주인이 할 테니까.”

도현이 강제로 사람들을 식탁에 앉힌 뒤 본인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이 약간 흥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챈 하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두 분 오신 거 좋은가 봐요.”

“어떻게 아세요?”

“그냥요. 저한테 하던 거랑 비슷해서.”

“…….”

“툴툴대면서도 막상 다 해주잖아요, 바보같이.”

하진의 말에 김 비서도 준수도 웃었다. 그 모습은 언뜻 가족과도 같았다.

***

“현아.”

“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체의 도현이 욕실 밖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몽글몽글한 샴푸 거품이 머리카락을 점령한 상태였다.

“나 라이브 켤 거야.”

“으응. 옷 입고 나갈게.”

“절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응!”

하여튼 대답은 잘해요. 폭신한 침대 위에 몸을 늘어뜨린 하진이 피식 웃었다. 제집에 있는 침대보다 한 사이즈 큰 도현의 침대는 언제 누워도 그 포근함이 하진을 감싸 안아 좋았다. 특히나 오늘처럼 고된 하루를 보낸 날은 더더욱. 그래서 이 나른하고 여유로운 기분을 팬들과 공유하고자 오랜만에 라이브를 켜고 싶어진 하진이었다.

욕실에서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렸다. 그에 하진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곤 반듯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꺼먼 액정을 거울삼아 괜히 머리도 매만져본다. 보드라운 실크 잠옷 아래로 혹여나 도현이 남긴 키스 마크가 있을까 유심히 살피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하진이 SNS 라이브를 시작했다.

“켜진 건가?”

화면에 대고 멍청히 물었더니 하나둘씩 댓글이 달린다. 동시 접속자도 금세 1만 명에 육박했다. 예고 없던 라이브에 팬들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박하진이냐부터 냅다 사랑을 고백하는 댓글까지. 하진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민멜들. 뭐 하고 있었어요?”

잘 나오는 카메라 각도를 찾으면서 질문을 던지니 댓글 창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이 속도는 언제 봐도 적응이 잘 안 된다. 노안인가. 다른 분들은 여기서 댓글을 어떻게 읽으시는 거지. 하진이 하나라도 읽기 위해서 눈을 핸드폰에 가까이 댔다. 그러자 댓글이 물음표로 도배된다. 갑자기 라이브 화면에 하진의 눈동자만 가득 들어찬 탓이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아직 라이브는 서툴러서.”

하진이 얼른 얼굴에서 핸드폰을 떼곤 머쓱히 웃었다. 어느새 댓글은 [ㅋㅋㅋㅋㅋㅋㅋ]으로 도배된 후였다. 그 자음의 향연 속에서 하진은 우연히 하나의 질문을 발견했다.

“어디냐구요? 집인데….”

입술이 저절로 다물렸다. 하진 집이 아닌 거야 팬들이라면 이불 색만으로도 알 수 있는 건데 그럼 누구 집이라고 해야 할지가 못내 고민돼서였다. 우도현 집이라고 하면 이 야심한 시각에 왜 둘이 같이 있냐면서 화제가 우도현으로 옮겨질 게 뻔했고, 그냥 친구 집이라고 하면 나중에 우도현이 삐질 게 눈에 선했다.

“누구 집일까요. 제집은 아니에요.”

아씨, 모르겠다. 하진은 고민을 그만두곤 그냥 질러버렸다. 쏟아지는 댓글들에 휩쓸려 아주 자연스레 지나갈 셈이었다. 그런데도 안 되면,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사람이라고….

“자기야! 나 수건….”

헙-!

HJ_lover

??

FAINT_N

?????

HJ_lover

???????????

hajin_sTAR

방금 소리 나만 들음???

MinMeL_06

자기야 뭐임?????

하진의 노력은 단 1초 만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도현이 우렁차게도 내뱉은 자기야 소리가 단번에 주변을 점령했다. 순식간에 물음표로 도배된 댓글 창. 하진은 수습할 생각도 못 하곤 그대로 넋이 나간 채였다. 그 상태로 1시간 같은 1분이 허망하게 지나갔다. 댓글은 완전히 전쟁터였으며 하진은 입안에서 ‘좆 됐다’만 수십 번 굴려댈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하진의 곁으로 도현이 어색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민멜들. 민멜들이 궁금하셨을 자기야의 주인공! 바로 접니다! 하하! 놀라셨죠?!”

도현은 카메라를 향해 심히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하진의 신신당부를 망각한 채로 이상한 소리를 내뱉은 죗값이었다. 하! 하하! 애절한 도현의 수습에 멍하니 있던 하진도 동참했다.

“여기는 W 엔터 대표이자 15년? 올해로 16년 됐나? 아무튼 제 오랜 절친 우도현 씨! 박수!”

hajin_sTAR

자기야… 할미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아쓰야…

MinMeL_0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상상도 못한 정쳌ㅋㅋㅋㅋㅋㅋㅋㅋㅋ

HJ_lover

자기가 거기서 왜 나와…?

댓글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 사실 도둑이 제 발 저려서 그렇지 하진과 도현의 사이를 연인이라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자기야’라는 단어가 친구 사이 호칭이 아닌 진짜 사랑을 담은 애칭일 거로 여길 사람도 없었고. 적어도 유교 국가 대한민국에선 그랬다.

“이 야심한 시간에 둘이 왜 같이 있냐고요?”

이런 질문도 그저 팬들이 던지는 농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도현과 하진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비밀.”

늦은 깨달음치고는 도현의 적응력이 너무 빠른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금세 이 분위기에 스며든 도현은 능글맞게 민트멜로디와의 밀당을 시작했다.

“우리 민멜들 궁금하죠? 아,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하나.”

도현이 마치 숨기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고뇌하는 표정을 드러내니 다시 한번 팬들의 손가락에 불이 붙었다. 그 반응이 꽤 재밌어서 도현이 계속 짓궂게 굴자 결국 하진이 핸드폰을 빼앗아버린다.

“이거 압수.”

“왜애.”

“민멜들 화났다. 이거 봐. 지금 댓글 불났어.”

하진 말대로 댓글 창엔 새빨간 불 마크가 가득했다. 간간이 성난 이모티콘도 껴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이 딱 지금 하진 같았다. 귀여워. 그 가수에 그 팬이라고 팬도 가수 따라 귀여운 짓만 골라 하는 모양이다. 저 눈썹이 축 늘어지도록 당장 뽀뽀를 갈기고 싶었다.

“이건 뭐야?”

도현이 일부러 말을 돌렸다. 손가락으론 화면 상단에 눈 표시 비스름한 것을 가리킨 채였다.

“지금 이거 보고 계신 분들 수.”

“2만? 지금 2만 분이나 이걸 보고 계신다고요? 우와. 왜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도현의 어조가 약간 시비처럼 들렸는지 댓글에 느낌표가 많이 붙어 있었다.

MinMeL_06

하진이 보려고!!!

haJin_mmel

내 새끼 잘 지내는지 확인!!!!!

Da11_song

우연히 들어왔다가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 보고 나가질 못하는 중…

빠르게 올라가는 댓글 더미 속에서도 기가 막히게 제 칭찬을 발견한 도현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리곤 하진 옆에 바짝 붙어 둘 다 카메라에 잡히도록 팔을 뻗는다.

“뭐 하세요?”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 보여드리려고요.”

“…….”

“댓글에 있었어요.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세요, 하진 씨.”

문제의 그 댓글을 보지 못한 하진은 눈으로 도현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가끔 기행을 보이긴 했으나 그런대로 봐줄 만한 정도였는데 제 입으로 본인을 잘생긴 애라 칭하는 건 도저히 못 봐주겠다.

“민멜들. 방금 발언은 오직 우도현 대표만의 생각입니다. 저랑은 일절 관계없어요.”

하진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게 퍽 섭섭했는지 도현은 들고 있던 카메라를 하진에게 던지듯 줘버렸다. 덜컹, 화면이 흔들리자 댓글 창 역시 요동쳤다. 열에 아홉은 우 대표 삐진 거냐면서 웃기 바빴다. 그러나 하진은 직감했다. 아, 이거 진짜로 토라진 거 같은데. 그 증거로 도현은 하진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애꿎은 핸드폰을 투닥이고 있었다.

“현아.”

하진의 작은 부름에 도현이 동요했다. 저를 부르는 애칭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입술을 비죽이면서 눈동자만 슬쩍 올리니 하진이 가까이 와보라는 듯 손짓한다.

“민멜들이 잘생긴 우도현 보고 싶대.”

“거짓말.”

“진짜로. 그렇죠, 민멜들?”

마지못해 도현이 하진 옆으로 움직였다. 도현과 어깨를 맞닿으며 하진이 톡톡 댓글 창을 가리켰다. 거기엔 열심히 도현을 달래는 중인 민트멜로디의 댓글이 한 아름이었다. 도현의 입매가 서서히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민멜들이 오해할까 봐 하는 얘긴데 저 그렇게 잘 삐지는 사람 아니에요.”

haJin_mmel

ㅋㅋㅋㅋㅋㅋㅋㅋ

HJ_lover

네ㅋ

“어어? 반응 뭐야. 나 다시 가요?”

“자, 싸우는 거 그만. 다시 질문받을게요.”

어째 하진보다 도현과 더 티키타카 중인 민트멜로디를 하진이 제지했다. 그에 평화를 찾은 댓글들이 여러 질문을 쏟아낼 때, 이를 가만히 보던 도현이 먼저 질문을 읽었다.

“둘이 왜 같이 있는지 얘기 안 해줬다고요? 아, 제가 오늘 이사했거든요. 밤에 혼자 자기 무서워서 하진이한테 자고 가라고 했어요.”

hajin_sTAR

맘대로 박하진 부르는 삶… 부럽다… 우 대표

Mint_0514

집 주소 찍어라 당장 쳐들어가게.

“집 주소 찍으라고요? 민멜들도 오고 싶다고요? 아, 그건 좀 곤란한데.”

말을 하다 말고 도현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곤 냅다 하진의 어깨에 제 턱을 얹으면서 약 올리듯 고개를 까딱인다.

“저희 둘이 맨날 붙어 있을 거라.”

삽시간에 하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실 웃고 있는 도현의 얼굴로 이내 베개가 날아왔다. 주륵, 얼굴을 맞춘 뒤 떨어진 베개. 그것이 맞춘 것은 비단 얼굴만은 아니었다. 같이 떨구어진 하진의 핸드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진이 다급하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행히 액정은 무사했지만, 라이브는 이미 종료된 채였다.

***

그리고 그 시각 파랑새에선.

하지니 전용 atm

@ATM_hajins

내가 지금 라이브로 뭘 본 거지… 현실 게이의 사랑…?

23:41 · 20XX. XX. XX.

149 리트윗 6 인용한 트윗

284 마음에 들어요

민트초코멜♬ @mincho_Mel · 11분

ㅁㅊ 도 이사 간 곳 하 아파트래

하지니 전용 atm @ATM_hajins · 10분

ㄹㅇ? 어케 앎

고구마 먹어라 @guma_GO · 3분

어그로 ㄴㄴ

민(트)박(하)집

@Mint_House

얘드라… 둘이 진짜 같은 아파트인 듯… 방금 하 근처 부동산 다 뒤졌는데 도랑 하 싸인 발견…

00:12 · 20XX. XX. XX.

1,943 리트윗 362 인용한 트윗

2,598 마음에 들어요

민트초코멜♬ @mincho_Mel · 3분

여기 며칠 전까지 하 아파트 매물 있었는데 지금은 없음… 이거 빼박 아니냐?

민(트)박(하)집 @Mint_House · 2분

ㅈㄴ 기만… 제발 더 해주라…

민트초코멜♬ @mincho_Mel · 1분

둘이 올해 사주에 새 가정을 꾸림 있음 결혼하나 봄 ㅇㅇ

하지니 전용 atm @ATM_hajins · 1분

오늘부터 도하 결혼 축의금 모은다 그러니까 결혼 무조건 라이브로 해줘

깻무대 @cat_if_NF · 방금 전

신혼 브이로그도 찍어주라

***

“카메라 엄청 많네.”

차창에 바투 붙어 바깥을 살피던 하진이 긴장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각 방송사는 물론이고 인터넷 신문사들까지 수십 대의 카메라가 예식장 한편에 마련된 포토존을 채우고 있었다. 이렇게 대한민국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은 서태희 대표였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의 단 한 번뿐인 결혼식 날이었다.

“서 대표님 완전 이 갈았잖아. 지금까지 남 결혼식에 뿌린 돈 다 걷어오겠다고.”

보아하니 제 애인이 잔뜩 긴장한 듯 보여 도현이 농담조로 가볍게 받아쳤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도현도 경직되긴 마찬가지였지만. 목 끝까지 잠근 와이셔츠가 괜히 답답해서 도현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러면서 저와 같은 셔츠를 한 치수 작게 입은 하진에게 손을 뻗었다.

“왜? 나 이상해?”

“아니.”

검은색 목폴라에 흰 와이셔츠, 그 위에 다시 검은 재킷. 격식과 캐주얼을 다 잡은 하진의 룩은 결혼식 한 달 전부터 도현이 각종 명품관을 드나들며 손수 고른 것이었다. 워낙 이목구비가 화려한 하진이기에 거적때기만 걸쳐도 멋지지만, 이렇게 한껏 멋을 내니 그 미모가 배로 빛이 났다.

“예뻐서.”

도현의 손길이 부드럽게 하진의 셔츠 깃을 매만졌다. 그와 함께 입술 새로 나온 말이 하진을 간지럽혔다. 푸흐. 하진이 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여태까지의 긴장감과 초조함이 붙어 같이 떨구어졌다.

“우리 이제 나갈까?”

“그래.”

하진의 손등에 짧게 입맞춤한 뒤 도현이 먼저 차 문을 열었다. 하진도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두 사람이 조용한 야외 주차장을 지나 포토존에 도달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어 포토존의 통제를 맡은 직원이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그에 하진과 도현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 발. 두 발. 나란히 서서 바닥에 깔린 인조 잔디와 흩뿌려진 꽃잎을 밟았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벅차올랐다.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주세요]라는 배경 속 문구에서 두 사람이 마치 서로가 된 듯한 착각이 이어졌다. 꽤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그 찰나의 착각은 아주 오랜 시간 서로의 기억, 한구석을 차지한 환상이자 현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이었다.

***

“나 너무 떨려. 어떡하지?”

생전 처음 결혼식 사회를 맡게 된 도현은 곧 시작할 예식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회에서도 기죽지 않고 말하던 도현인데 누군가의 행복한 날을 망쳐버리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이사회에서보다 심한 듯했다. 그리고 이는 하진 또한 매한가지였다.

“나도. 왜 이렇게 떨리냐. 음 이탈 나면 어떡하지?”

축가는 하진이 맡기로 했다. 몇만 명 앞에서 생방송 무대도 했는데 결혼식 축가 정도야 뭐가 떨리겠냐마는 역시 도현과 같은 이유로 심장이 쿵쾅댔다. 혹여 음 이탈이라도 난다면 신혼부부의 꽃길에 흙을 뿌리는 셈이 되어버리니까 그게 영 불안했다.

“하진아. 떨리면 나 봐. 나도 너 볼게.”

“네가 안 보고 있으면?”

“난 계속 너만 볼 거야.”

도현의 확고한 대답은 늘 불안에 떠는 하진을 안심시켰다. 그에 하진은 언제나 맑은 웃음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이것은 어느새 두 사람에게 자리 잡은 일상과도 같았다. 예사로우나 시시하진 않은.

“아, 맞다.”

하진이 돌연 손뼉을 쳤다. 무언가 잊어버렸던 것이 생각난 듯했다. 이어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는 하진이었다. 오른쪽 하단엔 하진의 글씨체로 [고민채]가 적혀 있었다.

“고민채?”

“어. 일면식 없는 사이라 가는 건 좀 그렇다고 축의금만 대신 전해달래.”

“그걸 나한테 말하지 왜 너한테 부탁했대.”

“내가 걔랑 더 친하니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하진에 도현이 애먼 입술을 깨물었다. 부탁했다는 건 최근에 연락했다는 건데 그러면 핸드폰 기록에 당연히 찍혀 있겠지? 저 아닌 인물이 하진의 연락 기록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도현은 영 탐탁지 못했다. 괜히 심술도 났다.

“내가 낼게. 여기 기자들도 많은데 괜히 재결합이다, 뭐다 말 나와.”

“그러든지. 같이 가?”

“아니,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게.”

저 새끼 또 삐졌네. 단번에 도현의 심술을 눈치챈 하진이 작게 속삭였다.

“응. 기다릴게, 자기야.”

그 말과 함께 도현의 등이 떠밀렸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한 눈치던 도현은 이내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줄곧 도현을 좇던 하진이 없어진 도현에 두리번거릴 때였다.

툭. 어깨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숙인 고개를 따라 움직인 시선이 상대의 뾰족한 구두에 닿았다. 이어 그 옆에 떨어진 축의금 봉투로 손을 뻗으려던 하진은 상대방이 그보다 먼저 그것을 집어 든 탓에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아주 짧게 얼굴이 스쳤다. 상대는 검은 선글라스로 본인의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하진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아는 사람이야?”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던 하진에게 도현이 물었다.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살짝 부딪혔어. 들어가자.”

아는 사람이었다. 축의금 봉투에 쓰여 있던 이름은 분명 하진이 아는 그녀였다. 그러나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그게 서로를 위한 배려였기에.

“사회자님! 얼른 준비하셔야 해요!”

하진과 도현이 예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서 직원이 도현을 불렀다. 식장엔 잠시 후 결혼식이 진행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하진아, 우리 이제 떨어질 시간이야.”

도현이 울적한 목소리로 하진과의 이별을 고했다. 기껏해야 1시간 이별로 유난이었다.

“우도현.”

“응?”

“사회 잘 봐. 나도 축가 잘 부를 테니까. 그리고 이따 사진 멋지게 찍자.”

“그래.”

그러자-.

그와 동시에 도현과 하진은 등을 돌려 각자의 위치로 걸어갔다. 도현은 사회자 단상 앞으로 하진은 반대편 하객석으로. 비록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종국에 만날 목적지는 하나였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으면서도 중간중간 맞닥뜨린 장애물엔 속수무책으로 넘어지기도 했다. 도중에 샛길로 빠져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그러다 함정에 빠진 적도 있다. 그 길고 긴 여정의 버팀목은 오직 목적지에서 만날 서로였다. 그러니 늘 혼자였지만, 정작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식이 시작하오니 귀빈 여러분 모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진 곁엔 늘 도현이 함께였다.

“귀중한 자리에 사회를 맡은 우도현입니다. 우선 소중한 시간 내주신 하객 여러분께 양가를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그리고 도현 곁에도 늘 하진이 함께였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은 식장, 그 속에서 오로지 도현만이 빛을 받고 있었다. 누군가의 구세주는 저러한 모습일까. 온몸이 저릿했다. 사랑 한 점 없던 박하진의 세상에 등장한 구세주는 이윽고 섬광을 머금은 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좀 의외죠? ST 대표 결혼식에 W 대표가 사회를 맡는다는 게. 하하, 저도 괜히 기분이 이상하네요. 오늘의 주인공이신 신랑 신부는 저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깊은 인연을 맺고 있어 제가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더없이 소중한 자리이니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신랑 신부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신랑 이혁 군과 신부 서태희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힘찬 박수가 식장을 가득 메웠다. 그 환호와 함성이 심장을 울렸다. 축복이 흘러넘칠 듯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 벅찬 순간을 도현과 하진은 얽은 시선을 통해 공유하고 있었다.

결혼식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화촉 점화, 신랑 신부 입장, 혼인 서약이 진행되는 동안 하진은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짓눌렀는지 모르겠다. 좋은 날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순백의 태희가 입장하며 저와 눈이 마주친 찰나는 정말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게 꾹꾹 눌러 담은 눈물은 어느덧 하진의 눈가를 뜨겁게 달군 채였다.

“다음은 가수 박하진 씨의 축가가 있겠습니다!”

지금껏 차분히 진행하던 도현이 저에게만 느낌표를 붙였음에도 하진은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지금 하진에겐 무사히 축가를 끝내는 게 우선이니까. 하지만, 이러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식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태희를 눈에 담자마자 하진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열심히 세운 방어막이 단숨에 들이친 눈물에 와르르, 터지고야 만 것이다.

“흐엉… 안녕하세요. 귀한 흑, 자리에 축, 가를 맡게 된, 크응, 가수 박, 하진입니다.”

멀쩡히 등장해서 난데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하진에 식장이 웃음으로 뒤덮였다. 다만, 도현은 그럴 수가 없었다. 홀로 안쓰럽게 우는 하진을 당장이라도 달래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내일 아침 뉴스 기사에 태희보다 본인과 하진 얼굴이 더 크게 나올 듯했다.

왜 저렇게 서럽게 우냐, 우리 하진이…귀여워… 볼따구…. 아, 이게 아니지. 걱정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주접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마이크를 건드렸는지 식장에 끼익- 쇳소리가 울렸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

단번에 도현에게로 이목이 쏠렸다. 슬쩍 하객들을 살피니 다행히 아직은 너그러이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아, 오늘의 주인공 태희 빼고. 태희는 방황하는 도현의 시선을 가로챈 뒤 눈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쟤 좀 진정시켜. 결혼식 망칠 셈이니?’

가뜩이나 무서운 태희가 눈알까지 부라리니 그 압박감이 상당했다. 그에 도현은 뭘 망설일 새도 없이 사회자석을 비우곤 하진 옆으로 뛰어갔다. 물론 그 전에 직원에게 상황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현의 요청대로 도현이 축가용 마이크를 받아들자 반주가 시작됐다. 도현도 아주 잘 아는 곡이었다.

“하진 씨가 감정이 벅찬 관계로 축가는 제가 같이 부르겠습니다.”

부드러운 선율 위로 아름다운 가사가 마음을 간질이는 곡.

“Not My Friend 들려드리겠습니다.”

유어 멜로디 마지막 앨범에 수록된 하진의 솔로곡이었다. 오로지 피아노 반주에 목소리만 덧씌운 이 곡은 하진의 맑은 음색과 잘 어울려 공개 당시 수록곡임에도 차트인을 했던 노래였다. 당시 도현도 듣자마자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놓을 만큼 좋아했던 노래인데 이걸 하진과 듀엣으로 부르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박하진이 눈물 덕지덕지 묻힌 채로 제 소매 끝을 잡아당기는 귀여운 짓을 하리라고도 생각 못 했고.

응? 도현이 하진과 눈을 맞춰 물었다. 그랬더니 본인 주머니에서 고이 접어놓은 종이를 대뜸 도현에게 준다. 도현이 이를 펼쳐 읽었다.

“이걸 말하면 노래가 시작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하진 씨가 직접 적어오신 말,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곧 노래가 시작됐다. 이어 잔잔한 반주가 배경음처럼 도현의 목소리에 음표를 붙여넣었다.

“서 대표님, 저 하진이에요. ST 소속 연예인 말고 대표님이랑 십오 년 함께한 하진이요. 제가 대표님 결혼 소식 듣고 줄곧 기분이 이상해서 정작 중요한 말을 못 한 것 같아 이 자리를 빌려 말하려고 합니다.”

“…….”

“나의 어머니이자 때로는 아버지이던 내 유일한 어른, 서 대표님.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하진의 숨겨둔 진심이었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여태까지 덤덤했던 태희도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객들도 벌써 몇몇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읽던 도현 역시 중간엔 코끝이 찡해 멈춰야만 했다. 그렇게 모두를 울리고서야 하진은 제 눈물을 거둔 채 말간 웃음을 띨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네 생각이 같이 떠지고. 매일 저녁 눈을 감으면 네 생각과 함께 잠들어.”

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 음절, 한 음절을 내뱉기 시작했다. 깨끗한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누가 네 얘기를 해. 내가 모르는 네 얘기. 그럴 때마다 답답해. 내가 널 더 많이 안다고 말해주고 싶어.”

도현이 노래를 이어받았다. 가사가 꼭 저한테 하는 말 같았다.

“나 아무래도 너를 좋아하나 봐.”

지난 십 년 동안 하진 곁을 맴돌던 우도현이 우도현에게 해주는 말. 도현의 낮은 음성 위로 하진의 미성이 화음을 만들어냈다. 마치 보듬어주려는 듯 하진의 목소리는 다정하게 도현을 감싸 안았다. 사랑해. 당장이라도 서로를 향해 튀어나올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며 도현과 하진은 올곧이 서로만을 눈에 담았다.

“갈팡질팡했던 이 감정은 우정이 아니야.”

“…….”

“우리 이제 친구 아니야.”

“…….”

“사랑해, 너를.”

해사했고, 또한 찬란했다.

***

이날 태희의 결혼식은 [서태희 결혼] 실트가 온종일 파랑새를 장악할 만큼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 관심만큼이나 방송국 카메라에 담긴 도현과 하진의 축가 영상이 덩달아 화제를 얻었다.

민트초코멜♬

@mincho_Mel

얼굴 ㅅㅂ 극락간다.

08:11 · 20XX. XX. XX.

4,673 리트윗 1,546 인용한 트윗

6,931 마음에 들어요

민트초코멜♬ @mincho_Mel · 8분

박하진 우는 거 ㅈㄴ 귀엽네ㅋㅋㅋㅋㅋㅋㅋ

하지니 전용 atm @ATM_hajins · 8분

둘이 결혼함?

민트초코멜♬ @mincho_Mel · 7분

ㅇㅇ

하지니 전용 atm @ATM_hajins · 7분

와 우리나라 언제 동성결혼 합법화됨?

민트초코멜♬ @mincho_Mel · 7분

지금 ㅇㅇ

하지니 전용 atm @ATM_hajins · 5분

ㅋㅋㅋㅋㅋㅋㅅㅂ 뻘하게 웃기네ㅋㅋㅋㅋㅋ

그리고 그 시각 음지 역시 발칵 뒤집힌 채였다. 이미 엉엉 우는 하진과 그런 하진을 달래준 도현만으로도 한 달 치 떡밥이 생성되었는데 그보다 더한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깻무대

@cat_if_NF

오늘 부케 도가 잡았대…

10:36 · 20XX. XX. XX.

1,943 리트윗 362 인용한 트윗

2,598 마음에 들어요

지옥에서 온 쩝쩝이 @Hell_JJUP · 21분

ㅁㅊ 얘네 진짜 결혼함?

깻무대 @cat_if_NF · 20분

둘이 해외 출국하는 날이 도하 결혼하는 날임 ㅇㅇ 아무튼 그럼

지옥에서 온 쩝쩝이 @Hell_JJUP · 19분

편견이 지켜주는 도하…

민(트)박(하)집 @mincho_Mel · 17분

도 집이 도하 신혼집임

깻무대 @cat_if_NF · 9분

222 이거 맞다

친구 혹은 연인, 공식 혹은 비공식.

도현과 하진은 그 어딘가의 경계쯤에서 양쪽의 선을 넘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주 특별하지도 아주 평범하지도 않은 일상을 보내는 우리처럼.

낫 마이 프렌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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