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카운터펀치(Counterpunch)
지난밤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에 대해 긴 얘기를 나눈 뒤, 도현과 하진은 각각 본인의 집으로 갔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당분간 떨어져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오랜만에 집이 좀 낯설긴 했지만, 늘 혼자였던 집이니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진은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날 하진은 밤잠을 설쳤다. 어릴 때 자던 일인용 침대든 숙소 생활 시 자던 2층 침대든, 독립하고부터 자던 킹사이즈 침대든, 그 위에서 잠을 청하던 이는 늘 하진, 혼자였다. 그게 당연한 거고, 일상이었다. 그런데 일주일도 안 되는 동안 옆에 사람을 두고 잤다고 몸이 그새 달라진 모양이다.
우도현이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운 뒤, 맞이한 별 볼 일 없는 크리스마스였다.
[여희나 잠적, 드라마 ‘너와 나의 거리’ 비상.]
나갈 준비를 마친 하진이 마지막으로 읽고 있던 기사를 닫았다. YN 미디어는 여희나의 부재로 상황 파악이 어렵다며, 공식 입장을 미루었고, 그 불똥은 드라마에 튀었다. 조연인 여희나, 박하진, 무려 두 명의 공백. 이를 감당하고 계속 진행하기엔 드라마 측 리스크가 너무 크니 투자자들도 골머리를 앓는 듯했다. 거기다 아직 드러나진 않았지만, 얼마 후면 이강운과 장인수도 엮일 테니 사실상 드라마는 가망이 없었다.
뭐, 이 문제는 우도현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렇게 하진은 집을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옷차림은 회색 트레이닝복에 검은 롱패딩. 거기에 살짝 눌러 쓴 하얀 캡모자와 마스크. 일부러 숨기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드러내지도 않게, 하지만 누군가 불러 급히 나온 사람처럼, 하진은 이를 의도한 채, 차로 향했다.
이윽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니 약간의 시차를 두어 반대쪽 차가 움직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계획대로 파파라치가 붙었다. 하진이 주자장을 빠져나올 동안 잠시 모습을 감춘 파파라치는 차가 아파트를 나오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진은 파파라치를 따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뒤에 잘 따라붙도록 속도를 조절했다.
천천히. 파파라치가 자신을 놓치지 않도록 하진은 힐끔힐끔 뒤를 확인하며 운전을 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기껏해야 차로 5분? 그런 거리에 보란 듯이 차를 움직인 이유는 말 그대로 보라는 거였다. 박하진이 오늘 누구를 만나니까 그게 누군지 잘 보고, 한번 부풀려보라고.
***
유유히 골목길에 진입한 두 대의 차량, 앞선 차량이 어느 카페에서 내리자 뒤이어 멀찍한 곳에서 다른 차량도 멈추었다. 뒤 차량의 운전자가 조심히 카메라를 들어 앞 차량의 운전자를 찍기 시작했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였지만, 확대하면 얼굴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진이 카페로 들어가는 걸 본 남자는 카페 내부가 보이도록 차량 위치를 조정하며, 눈으로 하진을 좇았다.
“오, 예스. 대어 물었고.”
중얼거린 남자가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다. 남자의 포커스가 향한 곳은 하진의 맞은편에 앉은 인물이었다. 남자는 사진 찍던 손을 멈추곤 당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제가 지금 박하진 뒤를 밟았는데 누굴 만났는지 아세요?”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누군데.
“한서빈이요.”
-뭐? 한서빈? 이 상황에서 둘이 왜?
“모르죠! 이유는 우리가 알아서 갖다 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야, 막내야. 들키지 말고, 제대로 물어와라.
네-!
***
카페에 들어서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 때 밖에 나온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 처음이 하필 한서빈이라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야, 야.”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고 두리번거릴 때였다. 뒤에서 들리는 속삭임이 하진을 향했다. 눈만 내놓은 터라 하진을 식별하기 어려웠는지 사람들이 대놓고 하진을 쳐다봤다. 이내 하진이 창가로 향하자 일제히 시선들이 따라 움직였다.
“일찍 왔네.”
작은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하진이 상대의 앞에 앉았다. 그에 고개를 든 상대는 한서빈이었고, 순식간에 그곳으로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유어 멜로디가 해체하고 1년 넘게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멤버가 한 프레임에 잡힌 적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이 늦은 거야.”
“그런가?”
하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5분 지나있었다. 늦긴 늦었네. 그런데 이미 서빈 앞에 놓인 커피 속 얼음은 절반 이상 녹은 뒤였다. 그로 인해 서빈이 한참 먼저 와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하진의 시선을 깨달은 서빈은 왠지 치부를 들킨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꼭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만나야겠어?”
서빈의 목소리가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본인 자존심 긁히면 냅다 화부터 내는 성미는 여전했다. 그에 하진은 늘 태연하게 답했었지, 아마.
“너 관심 받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무슨 관종인 줄 알아?”
“아니면 말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 연예인 티 낸 것 같다만 본인이 아니라는데 어쩌겠나 싶었다. 곧 하진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왼쪽 다리를 오른쪽에 얹었다. 그리곤 탁. 탁. 제 앞에 놓인 유리잔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이를 가만히 보던 서빈이 팍, 인상을 찌푸리곤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밖에서 만날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다고 안에서 만나는 것도 웃기지. 크리스마스에 너랑 내가, 은밀한 장소를?”
“재미있겠네.”
“미안한데 내가 박는 취미는 없어.”
하진이 능글맞게 속삭였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어쩐지 조급해지는 건, 서빈이었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하진은 대답을 잠시 미뤄둔 채,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달그락-. 아직 녹지 않은 커피 속 얼음이 움직여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 유리잔 표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하진의 허벅지를 적셨다.
“아, 답답해.”
그러거나 말거나 참다못한 서빈은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이강운.”
그러나, 그 이름 세글자에 서빈의 몸은 어정쩡한 자세로 굳고 말았다.
“얼마나 믿어?”
눈에 띄게 당황한 서빈이 안절부절못하자 하진이 서빈을 끌어앉혔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불안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반응은 하진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뚜렷했다. 단순한 친구 사이에선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내가 걔랑 친구인 거 어떻게 알았어?”
“이강운한테 들었지.”
“이름 말하지 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래?”
한껏 하진 쪽으로 몸을 뺀 서빈이 나지막이 호통쳤다. 그 격한 반응에 하진은 서빈의 마지막 말을 되짚어 볼 수밖에 없었다. 친구인 거 어떻게 알았냐는 건, 남들에겐 드러나지 않은 사이라는 거고, 누가 들으면 어쩌냐는 건 누가 들어서는 안 될 관계라는 걸 은연중에 꺼낸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강운이 말했던 남보다 못한 친구가 이런 의미인 걸까.
“걔가 어디까지 얘기했는데?”
어디까지라. 보통은 뭐라고 했는지를 물어 사실의 진위를 따질 텐데 서빈은 그러지 않았다. 어디까지 얘기했냐는 처음부터 상대가 사실을 말했을 거란 생각을 기반에 둔 질문이었다. 이는 다른 말로 상대에 대한 불신이기도 했다.
아. 그제야 하진은 알 것 같았다. 한서빈은 이강운을 믿지 않는구나. 그러니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이게 이강운이 말한 남보다 못한 친구였던 것이다.
“내가 어디까지 들었을 것 같아?”
그럼 이제 이 모든 걸 눈치챈 하진이 할 일은 하나.
“재밌더라. 너희 둘 얘기.”
불신. 그 씨앗을 하진은 서빈에게 잔뜩 뿌리기만 하면 됐다.
계획보다 일이 훨씬 수월할 듯싶었다. 서빈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여러 시나리오를 짜왔는데 예상과 달리 서빈의 지반은 몹시 물렀다. 불신이 피어나기엔 최고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너 어제 내 스캔들 터지는 거 봤지? 그거 걔가 터트린 거야.”
“뭐? 지랄하지 마. 걔가 왜….”
“왜겠어.”
한서빈은 전형적으로 자존감은 낮으나 자존심은 센 유형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자신의 유일한 편인 이강운을 항상 아래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을 조종하던 게 이강운이다?
“걘 그냥 모든 사람을 이용한 것뿐이야. 너도 그중 하나인 거고.”
그것만큼 한서빈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없을 테다.
“…그러니까 걔가 날 왜 이용하는데.”
서빈은 크게 동요했다. 주변을 의식하곤 목소리를 억눌렀으나 그 속에 짜증이 섞여 나왔다. 그것에 하진이 더 불을 지폈다.
“이젠 네가 필요 없나 보지.”
화르륵, 서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와 함께 타들어 가는 가슴을 서빈이 움켜쥐었다. 악, 다문 입술을 짓이기면서도 서빈은 꾸역꾸역 말을 꺼냈다.
“형이….”
“…….”
“형이 뭘 안다고 지껄여….”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하진은 그 알량한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기로 했다.
“걔가 너 세상 물정 모른대. 그래서 나한테 오겠대. 스캔들 터트린 것도 내 편 되고 싶어서 협박하려고 그런 거래. 어때? 이 정도면 내가 지껄일 자격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하, 서빈의 잇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진의 말을 들은 순간, 서빈은 일전에 강운이 보였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박하진 편이 되고 싶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꾸물댔던 거야? 앞에선 나한테 빌빌 기는 척, 뒤에선 날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취급하면서? 빌어먹을 새끼.
강운을 향한 서빈의 생각이 점점 모나졌다.
“나한테 얘기해주는 이유가 뭔데.”
“옛정이랄까.”
“우리가 옛정이 있어?”
“8년 동안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니까”
덤덤한 얼굴로 하진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무미건조한 말투가 오히려 진심처럼 느껴진 서빈은 그렇게 완전히 하진에게 넘어왔다.
“그러니까 서빈아, 그 지옥에서 널 꺼내줄 사람이 누군지 잘 생각하고 결정해.”
잠깐의 침묵. 그 사이에 하진이 서빈 앞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네 편이 아니었던 놈을 계속 잡고 있을지.”
“…….”
“아니면, 새로이 네 편이 될 놈을 잡을지.”
서빈은 제 앞으로 뻗어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내 짧은 고민 끝에 서빈이 그 손을 잡았다.
“웃어, 서빈아.”
“…….”
“그래야 사진 예쁘게 나와.”
하진과 서빈은 그렇게 유어 멜로디 현역 시절처럼 환히 웃음 지었다.
***
도현의 인생에서 거지 같은 크리스마스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열아홉 살, 박하진과 멀어지고 유학길에 올랐던 크리스마스. 두 번째는 스물아홉 살, 박하진과 사귀고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그리고 그 빌어먹을 후자가 바로 오늘이었다.
[나 이제 한서빈 만나.]
크리스마스에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 심정을 누가 알까. 망할 이강운. 망할 한서빈. 망할 영남기.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도현은 계속 이 사태의 원흉들을 저주하는 중이었다. 아. 망할 여희나도 있었네, 참. 아무튼 이 망할 인간들 모조리 연예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해줄 거라고, 도현은 약 백번째 다짐을 했다.
[보고 싶어ㅠㅠㅠㅠㅠㅠㅠ]
답장을 쓰면서 도현은 무의식중에 ‘보고 싶어 엉엉’을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봐도 ‘저 사람 되게 간절한가 보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도현이 W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하진은 답장이 없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크리스마스라는 특수성 덕분에 호텔은 이미 모든 룸이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그만큼 사람들도 넘쳐났다. 그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도현이 호텔에 들어서자 실장이 뛰쳐나왔다. 실장은 자연스레 도현 옆에 서며 도현의 가방을 들으려 했다.
“이건 제가 들게요, 실장님. 지시한 건요?”
“605호에 계십니다.”
“거기는 준비해뒀죠?”
“네. 연락만 주시면, 음식도 바로 세팅할 수 있습니다.”
도현이 최대한 꼼꼼히 상황을 확인했다. 원래는 김 비서가 할 일이겠지만, 가족 여행 간다고 어제 야근까지 하면서 일을 처리해놓은 김 비서를 다시 부를 만큼 도현은 악덕 고용주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번 일은 공식적으론 W 측에서 고민채만 관련되어있기에 김 비서 없이 비공식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럼 전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대표님. 남 과장 먼저 올려보내겠습니다.”
엘리베이터는 6층에 멈췄고, 실장이 605호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이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7층, 8층. 점점 높아지는 층수. 그렇게 도현이 내린 곳은 스위트룸 층이었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스페어 룸에 들어선 도현은 먼저 전체적인 내부를 훑었다. 이 룸은 W 호텔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곳이었다. 명목상 예비 룸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실제론 극비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오늘 도현이 만나는 남성식, 서울지방국세청 조세3국 과장처럼 말이다.
언제쯤 오려나. 중앙 소파에 앉은 도현이 들고 온 가방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리곤 일부러 상대가 잘 볼 수 있도록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겉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봉투였지만, 오히려 그게 상대에게 더 압박을 줄 수 있으니까.
곧 도현이 손목시계를 확인할 때였다. 똑똑. 노크와 함께 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에 도현이 여유롭게 일어나 남자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남 과장님.”
도현이 건넨 손을 남자가 정중히 잡으며 인사했다.
“우 대표님.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습니다.”
“하하. 제가 원래 서프라이즈를 좋아해서요.”
“크리스마스 선물인가요, 하하.”
주고받는 대화가 화기애애했다. 이어 도현이 자리에 앉자 남자 또한 반대편에 앉았다. 그러다 힐끗, 도현이 꺼내놓은 서류를 본 남자는 잠시 동공이 흔들렸으나 태연히 도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를 본 도현이 내적 웃음을 지었다. 아마 지금쯤 저 인간 머릿속엔 자신이 저지른 비리들을 나열하며, 봉투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전 과장님 편입니다.”
도현이 과장의 눈앞에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자기 편이라고 말하는 놈치고 진짜 자기 편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던 과장은 불안감이 증폭됐다. 특히나 사업하는 놈들은 세금 낸다고 하고 몰래 안 내는 새끼들이 태반이라 더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엔 몇 번 본 적도 없는 사업하는 놈이 자기 편이라고 말하니 남 과장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나오시기 전에 크게 공 한 번 세우셔야죠.”
“예?”
남 과장의 당황스러움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오시기 전에? 이게 무슨 의미심장한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보기엔 켕기는 게 너무 많은지라 그는 일단 도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이어 도현이 제게 서류 봉투를 건네자 남 과장은 재빨리 봉투를 낚아채고, 내용물을 꺼내었다.
“대, 대표님. 이게 무슨….”
남 과장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남 과장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한 채, 간절한 눈빛으로 도현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도현은 흔쾌히 그의 요구에 응하며, 그의 손에서 서류들을 뺏어갔다. 남 과장이 텅 빈 손을 바라보는 동안 도현이 테이블에 두 장의 신상 명세서를 놓았다. 그중 한 명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남성식 과장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고등학교 동창에 대학교 때는 같이 창업도 하셨었고. 아주 각별한 사이겠어요?”
“…….”
“장인수랑.”
장인수 감독이었다. 남 과장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게 진작 누가 눈치챌 수도 있으니 적당히 받아먹으라고 했는데! 이 빌어먹을 국장 새끼.
앉은 상태에서 연신 발을 구르는 남 과장에게서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대충 머리 굴러가는 소리로는 아마 도현이 자신과 장인수 관계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국장과의 관계도 알고 있는지 등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내 그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현이 말을 얹었다.
“지금 과장님 상태가 딱 낙동강 오리알 신세던데.”
정곡을 찌른 도현에 남 과장이 움찔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이미 진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그냥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남 과정에겐 그저 ‘태연한 척 살살 웃기’라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하하.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도현이 따라 웃었다. 하하. 소리 내어 웃던 도현은 금세 얼굴을 굳히곤 남 과장을 몰아붙였다.
“YN 영남기. 장인수한테 소개받았죠? 과장님이 국장님한테도 소개해줬고. 근데 요즘 따라 셋만 노니까 과장님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이 줄어 매우 섭섭하다.”
“…….”
“이 정도면 알아들으셨을까요?”
도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어진 뼈가 남 과장을 찔러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함께 남 과장은 머리가 새하얘짐을 느꼈다. 그 찰나 동안 수십 가지의 생각을 스쳐 보낸 남 과장은 결국 도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표님, 살려주세요. 저는… 저는 진짜 억울합니다.”
식상한 레퍼토리였다.
“그건 조사받을 때 하시고요.”
도현은 남 과장을 매정히 뿌리쳤다. 이 판에서 주도권은 제대로 잡았으니 이제 자신의 요구사항을 내보일 차례였다. 도현이 남은 서류 파일을 남 과장 앞에 던지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이거.”
그 순간, 남 과장은 깨달았다. 이게 자신이 살 수 있는 동아줄이라는 것을. 남 과장이 서둘러 도현이 건넨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내용은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읽어 내려갈수록 남 과장의 미간 주름만 깊어졌다.
이게 터지면, 모조리 다 죽는다. 서류를 끝까지 훑은 남 과장의 머릿속엔 이 생각 하나만이 남게 됐다. 아니, 하나 더.
“담당자가 남 과장님이잖아요. 독박 쓸 게 눈에 훤하네.”
자칫하면, 혼자 다 뒤집어쓰겠구나.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악몽이네, 젠장. 분하다. 억울해. 왜 나만…. 그렇게 남 과장의 소리 없는 외침이 이어질 때였다. 무릎 꿇은 남 과장 앞으로 도현이 웅크려 앉았다.
“그런데 과장님. 제가 아까 누구 편이라고 했죠?”
입꼬리에 걸친 미소만큼이나 능청스러운 말투가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 과장은 도현의 눈치를 보다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제, 제 편이라고….”
“그렇죠. 전 과장님 편이라니까요. 과장님이 논개 작전으로 국장 껴안고 떨어진다? 그럼 제가 과장님 편인데 어딨겠어요.”
도현이 잠시 말을 멈추곤 뜸을 들였다. 그 찰나가 남 과장에겐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이었다. 이를 빤히 바라보던 도현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밑에 있겠죠. 밑에서 떨어지는 과장님 받아야지, 내가.”
그와 동시에 남 과장은 턱하고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살 구멍이 생긴 것 같다.
“…절 구해주신다는 겁니까?”
“구해주는 것보다는 환생시켜주는 게 맞는 말이겠네요.”
도현이 남 과장의 셔츠 포켓에 자신의 명함을 넣었다. 그리곤 톡톡,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희 쪽 자리 하나 마련해놓겠습니다.”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든 남 과장이 두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왜? 라는 질문이 입안을 맴돌았다. 이런 좋은 조건을 왜 자신한테 제안하는 걸까. 남 과장은 도현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왜 하필 접니까. 제가 장인수나 영남기한테 말할 수도 있는데.”
“지금 가장 돈이 필요한 사람이니까.”
“…….”
“큰 아드님 유학 비용에 막내 따님 의대 학비까지. 돈 나갈 곳 많으시잖아요.”
남 과장은 바닥에 놓인 서류를 보며 여태껏 도현이 말했던 것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논개 작전이라. 모 아니면 도였다. 국장과 같이 빠져서 사느냐, 아니면 같이 죽느냐.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이 물에 빠진다는 사실은 변함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남 과장은 짧은 고민 끝에 도현의 손을 잡았다.
이윽고 밖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에 도현이 곧바로 남 과장을 일으켰다.
“밖에 가족들 오셨네요.”
얼떨결에 일어난 남 과장이 종아리를 주무르다가 뜻밖의 단어에 휘청였다.
“모쪼록 편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도현은 남 과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을 덧붙이면서.
“아, 참고로 뇌물은 아닙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605호가 내부 수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남 과장님께선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묵으시는 거니까요.”
“…….”
“그러니까 오늘처럼 제가 잘 차려놓은 밥상에 남 과장님은 숟가락만 제때 얹으시면 됩니다.”
쉽죠? 그 물음만을 남겨둔 채, 도현은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곳에 덩그러니 남은 남 과장은 제 발밑에 채는 서류를 얼른 주워 숨기기 바빴다. 그러다 잠시 도현이 나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마지막 도현의 말을 되새김질 했다.
도현이 차려놓을 밥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YN 미디어와 영남기 개인의 탈세 혐의겠지.
남 과장이 들고 있는 서류 속 내용은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었다.
***
띡. 띡. 띡. 띡. 도어락 문이 열렸다. 도현은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든 채, 그대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고단한 하루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도현은 소파로 직행해 몸을 던졌다. 들고 있던 택배는 아무 데나 던져버린 채였다.
택배가 더럽게도 빨리 왔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라고 하진과 주문했던 산타 복장이었다. 오면 뭐 하나. 같이 입고 즐길 사람이 없는데. 망할 택배 때문에 다시금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걸 실감했다.
박하진은 지금 뭐하지. 아까 운전하느라 답장 못 했는데 얼른 집 도착했다고 보내야겠다. 그리고 씻고 나와서 잠깐 전화하고…. 혼자 쓸쓸히 잠이나 자야지, 뭐.
[나 집 도착ㅠㅠㅠ]
[하진이 뭐해?ㅠㅠㅠㅠㅠ]
[보고 싶]
응?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열심히 제 감정을 호소하던 도현이 자판을 치다 말고 태희가 보낸 메시지 창을 띄웠다. (사진)이라고 되어있는데 안 볼 수가 있어야지. 별생각 없이 사진의 로딩을 기다리던 도현은 뿌연 사진이 선명해진 순간,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무려 잠옷 입은 박하진 사진이었다. 그것도 태희의 잠옷인지 발목을 조금 웃도는 원피스 잠옷!
“…미친.”
너무 귀엽잖아! 저장. 저장. 저장. 도현은 같은 사진을 약 열 번 정도 저장했다. 그러고 나서 사진을 확대해 하진을 샅샅이 눈에 담았다. 티브이에 열중한 하진은 찍힌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집중했는지 앙 다문 입술이 귀여웠다. 두 다리를 웅크린 채, 소파에 앉아 있는 구도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그 때문에 발만 빼꼼히 내밀어져 있는 것 또한, 무척이나 깜찍했다.
이게 사진이라니. 이 귀여운 박하진을 실제로 볼 수 없다니. 억울한 도현이 당장 하진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러나, 길고 긴 연결음 끝에 전화는 거절을 알렸다. 응? 거절? 검은 액정이 도현의 어벙한 얼굴로 가득 찼다. 그럴 리가 없지. 이내 도현이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였다. 하진으로부터 음성 통화가 걸려 왔다. 도현이 곧바로 이를 받았다.
“얼굴 보고 싶은데.”
-안돼. 지금 못생겼어.
박하진과 못생김이 공존할 수 있는 단어인가.
“귀엽던데.”
-응? 뭐가?
“하얀 땡땡이 잠옷 입은 거.”
-아, 뭐야! 어떻게 알았어? 이씨. 대표님! 대표님이 사진 보냈어요?!
큭큭. 통화 너머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하진이 혼자가 아니라 태희와 있다는 것에 도현은 마음이 놓였다. 곧 하진이 씩씩거리며 다시 통화를 이었다.
-너 그거 저장하지 마.
“알았어.”
-진짜로.
“응.”
이미 사진첩에 그 사진이 열 장이나 있었지만, 도현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에 하진이 안심했는지 숨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귀여워. 하진이 질겁할 게 뻔해 도현은 속으로만 ‘박하진 귀여워’를 백만 번 외쳤다.
“보고 싶어.”
-…….
“너무너무 보고 싶다, 하진아.”
-…어.
하진의 건조한 반응에도 도현은 제 마음을 온전히 표현했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귓속을 파고드는 작은 떨림이 좋았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고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진의 대답은 끝인 줄 알았다.
-나도.
“…….”
-나도 보고 싶어, 우도현.
뚝-. 그 말만 남긴 채, 하진은 부끄러움에 그만 전화를 끊어버리고야 말았다.
***
여희나를 중심으로 우도현, 박하진, 고민채. 무려 네 명이 얽힌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대한민국이 떠들썩한 것은 당연했고, 온 연예부 기자들의 포커스가 이들에게 쏠린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발 빠르게 부인 기사를 낸 W와 ST 측과는 달리, YN은 여전히 여희나의 행방이 묘연하다며 말을 아끼는 실정이었다. 그로 인해 여희나의 잠적설은 그녀를 향한 수많은 음모론을 피어오르게 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지핀 게, 잠적설 3일 만에 그녀가 올린 SNS 게시물이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멍으로 얼룩진 종아리 사진과 함께 올린 딱 한 마디. 그것이 몰고 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이미 하진 측에서 여희나와의 스캔들을 전면 부인했고, 강경 대응을 예고한바, 그녀의 이러한 행보는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주기 충분했다. 어쩌면, 희나를 때린 게 우도현이 아닐까. 혹은 박하진일까. 기자들은 자신의 입맛대로 기사를 써 내려갔고, 연예계 너튜버들은 이때다 싶어 두 사람의 과거 행각들을 파헤쳤다. 물론 죄다 허위에 무의미한 것들뿐이어서 ST와 W가 대응할 가치도 못 느꼈지만 말이다.
소속사의 대응과는 별개로 도현은 하진의 악플을 보는 족족 신고 버튼을 눌렀다. 저를 욕하는 거야 어차피 일반인이니 별 타격도 없다만, 우리 슈퍼 아이돌 박하진을 욕하는 건 안 된다는 게 도현의 생각이었다.
“김 비서님. CCTV는 어떻게 됐어요?”
“언론에 슬쩍 흘렸습니다. 아마 곧 냄새 맡고 달려들겠죠.”
갖은 루머에도 도현이 이토록 태평하게 신고 버튼이나 누르고 있는 것은 사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그날의 모든 행각이 담긴 W 호텔의 CCTV 영상. 이거 하나면, 여론이 뒤집히는 건 금방일 테다. 표면상으론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공개를 미룬 것이지만, 실질적으론 철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이 일련의 상황들은 이제 슬슬 클라이맥스를 향하는 중이었다.
“YN 쪽 움직임은요?”
“지금은 온 신경이 여희나 씨에게 쏠린 듯합니다.”
“다행이네요.”
여희나는 YN과 영남기의 눈과 손을 묶어두기 위한 일종의 맥거핀인 셈이었다. 진짜는 이들의 비리 파일이니까. 이를 위해 며칠간 도현이 고위 간부들과 마신 술만 해도 억대가 넘을 것이다. 술 취해서 야밤에 하진에게 건 전화만 수십 통이 넘기도 했다. 처음엔 잘 받아주던 하진이 마지막엔 발 닦고 잠이나 자라며 도현을 구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인터뷰만 끝나면, 오늘은 다들 칼퇴합시다.”
“언론이고 너튜버고 난리가 날 텐데 불가능합니다.”
“공식 입장 내걸고, 퇴근해버리면 그만이죠.”
“대표님.”
“12월 31일이잖아요. 누가 열심히 일하겠어요.”
어깨를 으쓱이는 도현을 보며, 김 비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고집은 절대 못 꺽지. 그래도 일찍 퇴근하면 딸내미 케이크는 사다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는 김 비서였다.
이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는 일 처리에 모두가 행복한 듯 보였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대표님, 이강운 씨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김 비서가 도현을 쳐다봤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왔네. 강운이 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도현과 김 비서는 담담히 그를 맞이했다. 이내 강운이 들어오자 김 비서는 그에게 목인사를 건네곤 조용히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강운은 [대표 우도현]이 새겨진 명패 앞까지 단번에 걸어왔다. 다소 화가 난 발걸음이었다.
“한서빈한테 무슨 짓 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했나요?”
강운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도현을 몰아붙였다. 물론 도현이 쉽게 당할 리는 없었지만.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무슨 짓을 했길래 한서빈이 내 전화를 안 받는지.”
“이강운 씨 본인 문제겠죠.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대표님. 이러시면 안 되죠. 제가 판 깔아드렸잖아요.”
강운이 책상 끄트머리를 잡은 채로 상체를 기울였다. 삐딱한 태도와 말투로 보아하니 협박인 듯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현의 입에서 별안간 하하, 폭소가 터져 나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저기요, 강운 씨.”
매끄럽게 올라간 입매 사이로 나온 목소리는 여유롭지만, 단호했다. 그에 강운이 한발 물러섰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돈이 아주 많아요. 빽도 아주 많죠.”
“…….”
“이게 무슨 의미일 것 같아요?”
강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이를 관찰하던 도현은 시간을 확인하곤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당신이랑은 다르게 내 사람을 지킬 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는 뜻이에요.”
그와 동시에 틱-. 도현이 티브이 전원을 켰다. 도현과 강운을 비추고 있던 검은 화면은 어느새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으로 채워진 뒤였다. 한껏 구겨진 제 얼굴을 보자 강운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영상 속 너트뷰 기자의 모습 옆으로 떠오른 실시간 댓글 창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이윽고 기자가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여보세요?
“내가 설계한 판의 주인공.”
여희나 씨, 맞으세요? 기자가 연결한 사람은 여희나였다.
***
[Q. 여희나 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 멍은 누군가에 의해 맞은 건가요?]
[A. 네. 전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Q. 대상을 밝힐 수 있나요?]
[A. 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당당히 밝히겠습니다.]
침대 위에서 인터뷰를 다시 듣던 하진은 여희나의 연출력에 혀를 내둘렀다.
[A. YN 미디어 영남기 사장과 장인수 드라마 감독입니다.]
가녀리게 떨리는 목소리가 음성만으로도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본래의 여희나를 아는 하진조차도 이 인터뷰 속 그녀가 안쓰러운데 이를 모르는 대중들은 어떨까. 이미 그녀를 향한 여론이 동정표로 확 바뀐 게, 그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Q. 그렇다면, 최근에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란 거죠?]
[A. 네, 사실이 아닙니다. 저와 얽힌 두 분은 제 이런 상황을 알고, 절 도와주려고 했던 은인이지 절대 쓰레기가 아닙니다. 저를 현재 안전한 곳에 머물게 도와준 것도 두 사람입니다. 부디 두 사람을 향한 질타를 멈춰주시고, 용기 없던 저를 탓해주세요.]
툭-. 하진이 영상을 멈추곤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올린 지 1시간 된 영상인데 벌써 실시간 급상승 동영상에, 조회수가 10만이 넘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100만은 훌쩍 넘을 모양이다.
[부디 세 사람을 향한 질타를 멈춰주시고, 마음대로 기사를 쓴 기레기들을 탓해주세요.]
벌써 여희나의 말을 인용한 댓글까지 등장했다. 무려 ‘좋아요’ 1천 개의 베스트 댓글이었다. 댓글은 하나 같이 여희나를 응원하면서, 영남기와 장인수가 저지른 일을 샅샅이 공개하고 처벌하라고 말했다. 간간이 도현과 하진의 누명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댓글도 보였다. 이로써 여론은 완전히 뒤집힌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해 바뀌기 전에 누명 벗어서. 이따 대표님한테 와인이나 한 병 까자고 말해야지. 그간의 마음고생이 일단락되자 하진은 제일 먼저 도현이 생각났다. 퇴근은 했으려나. 아직 연락 없는 걸 보면, 야근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하진은 그냥 메시지를 남겨 놓기로 했다.
[뭐 해? 퇴근했어?]
이 짧은 질문에도 물음표를 하나 붙일까 두 개 붙일까, 띄어쓰기는 맞는 건가 생각하며 서너 번을 지우고 고쳤다. 예전 같으면 물음표는커녕 띄어쓰기조차 하지 않았을 하진이지만 이제는 좀 잘 보이고 싶달까. 더욱이 옛날엔 도현이 뭘 하든 본인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하진이었는데 이젠 도현의 스케줄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박하진이 사랑의 힘으로 ‘배려’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비록 하진 본인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진이 오른손에 핸드폰을 쥔 채, 침대 위에서 몸을 뒹굴뒹굴했다. 평상시엔 답장 빠르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늦지. 혹시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은 건가 싶어 확인해봤으나 진동 상태였다. 하진이 다시 액정을 두드렸다. 이번엔 시간 확인을 위해서였다. 한 30분 지난 것 같은데.
“잉….”
3분 지났네.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손에 쥔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드디어 메시지가 왔다. 무의식중 하진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솟구쳤다. 흥흥. 코에선 콧노래가 저절로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메시지 창에 뜬 이름과 눈이 마주친 순간, 하진은 스륵- 입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진아. 지금 택배 가니까 받아 놔.]
집주인 태희의 택배 심부름이었다. 이씨. 어차피 대표님 곧 올 거면서 왜 보내신 건지 모르겠다. 어? 그러고 보니 퇴근 시간 지났는데 왜 안 오시지. 인식하고 나니 그제야 깜깜해진 창밖이 눈에 들어왔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슬슬 하진이 거실로 나왔다. 걸을 때마다 천이 살랑살랑 발목을 간질였다. 저번에 입었던 땡땡이 잠옷보다 레이스가 심해서 그런지 영 불편하다.
문득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하진이 쯧, 혀를 찼다. 원피스가 생각보다 편해서 그냥 입고는 있지만, 역시 건장한 성인 남성이 입기엔 꼴이 좀 우습긴 했다. 이 집 나가면 다시는 안 입어야지. 괜스레 머리칼을 휘적이며 부엌으로 향하던 하진은 때마침 울리는 인터폰에 발길을 돌렸다.
“누구세요.”
“택배 왔습니다.”
“앞에 놔두고 가세요.”
“직접 받으셔야 하는 거라서요.”
방금 태희가 받으라던 택배이니 별 의심 없이 현관문을 열려다가 하진이 급히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런 꼴이 알려졌다가는 간신히 벗은 누명이 박하진 변태라는 소문으로 재확산될지 모르니 말이다. 이어 눈만 빼꼼히 내민 하진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좁은 틈으로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자 조금 더 문을 연 하진은 이내 확, 젖혀지는 문에 그만 중심을 잃어버렸다.
기우뚱해진 몸이 앞사람의 품에 안겨 폭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달콤한 목소리가 귓바퀴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선물 왔습니다.”
“…….”
“박하진 씨.”
뭐야. 이 익숙한 목소리. 하진이 눈동자를 움직여 위를 바라봤다. 그 순간, 하진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것은 사랑스럽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우도현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가 6일이나 지난, 조금 늦은 인사였다. 그리고
“해피 뉴 이어.”
새해를 5시간 앞둔, 조금 이른 인사이기도 했다.
멍한 하진을 대신해서 손목을 낚아챈 도현이 그대로 몸을 밀었다. 쾅-! 거세게 닫힌 문만큼이나 격하게 도현의 손에 들린 케이크가 흔들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하진이 주춤거리자 도현은 그대로 하진의 마스크 위에 입술을 비볐다.
“나 왔어, 자기.”
비비던 입술을 멈추고 잠시 떨어진 도현이 싱그럽게 웃었다. 그리곤 돌연 케이크 위에 장식된 붉은 리본을 제 머리 위에 얹으며 말한다.
“내가 선물.”
끔찍, 아, 아니. 깜찍. 하진이 그만 실언을 내뱉을 뻔했다. 이거 말했으면, 우도현 백 퍼센트 삐졌다. 리본 얹은 꼴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아 하진은 물끄러미 도현을 응시했다. 그러다 번뜩, 일전에 방송국에서 우도현 보란 듯이 리본을 얹고 다니던 제 꼴이 떠올랐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진짜 뭐 그런 건가 싶다.
푸흐-. 하진이 간지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 마음에 들어?”
“안 들면 교환해줄 거야?”
“안타깝지만 교환 불가 상품이야.”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말하면서 하진은 답답한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단번에 도현의 턱을 잡아당겨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가질 수밖에.”
하진이 샐쭉 눈꼬리를 접었다. 평상시엔 틱틱대는 눈매가 곱게 휘어지니 꼭 강아지 같았다. 적어도 도현의 눈엔 그리 보였다. 어쩜 저렇게 앙큼한 소리를 해대는지 도현은 당장이라도 하진을 잡아먹고 싶었다.
“하진아, 저녁 먹었어?”
“아니. 배고파.”
“근데 어쩌지. 우리 오늘 밥 못 먹을 것 같은데.”
툭-. 케이크를 손에서 놓은 도현이 그대로 하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진이 조금 더 빨리 이를 제지했다. 덕분에 허공에서 얼굴을 멈추게 된 도현은 그 모양새가 심히 우스꽝스러워졌다.
“왜애….”
도현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배고프다니까.”
그 말을 남긴 채 하진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부엌으로 걸어갔다. 덩그러니 남아 하진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도현은 그제야 보았다. 하얀 레이스 잠옷을 입은 하진의 모습을. 발목 부근까지 내려온 긴 원피스가 가볍게 흔들렸다. 분명 실내인데도 바람이 하진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싱그러운 초록색 나뭇잎도 하진이 걸어갈 때마다 흩날렸다. 간질간질. 달콤한 향기로 코끝마저 간지러웠다.
이는 필히 도현에게 씐 박하진 전용 필터 효과 때문일 테다. 콩깍지라고 그 사람 주위가 빛나고 푸르러지는, 그런 필터.
“아니, 야. 하진아.”
하진을 부르는 도현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왜?”
그에 하진이 물을 마시다 말고 대답했다. 입매를 따라 물줄기가 흘렀다. 흐르는 속도에 맞춰 성큼성큼 도현의 걸음이 빨라졌다. 곧바로 하진 앞에 선 도현이 대뜸 하진의 턱 끝에 달랑이는 물을 혓바닥으로 핥아 올렸다.
“읏, 야!”
무방비한 상태로 신음이 터졌다. 혀가 쓸고 간 자리가 뜨거웠다. 이러다간 저녁이고 뭐고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하진이 있는 힘껏 도현을 밀었다. 그러나 도현은 꿈쩍하지 않았다.
“배냇저고리 입은 아기 같아.”
“…미쳤나 봐.”
스물아홉, 아니 이제 몇 시간 후면 서른 되는 남성한테 저딴 소리가 잘도 나오는 모양이다. 우도현은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나? 아이돌 생활하면서 별별 애칭 다 들어봤어도 배냇저고리는 또 처음이라 하진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볼도 살짝 붉어진 채였다.
“귀여워.”
“개소리 집어치워.”
“윽. 귀여워!”
“아, 꺼져!”
하진이 버럭 소리를 질러서야 도현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물론 여전히 헤벌쭉한 상태로 말이다. 그 낯부끄러운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던 하진은 결국 도현에게서 멀찍이 떨어짐을 택했다.
그런 하진의 뒷모습을 도현이 아쉽다는 듯 바라봤다. 뭐, 밤은 기니까. 도현의 음흉한 미소를 하진은 보지 못했다.
“와인 마실래?”
“서 대표님 건데 함부로 어떻게 마셔.”
“괜찮아. 대표님이 집에 있는 거 다 쓰고, 다 먹으래. 비용은 후불 청구하신다고.”
“오늘 대표님은 안 와? 어디 가셨대?”
“애인이랑 보내시겠지. 내가 우리 호텔 스위트룸도 잡아드렸는데.”
아차. 대표님 애인이랑 다시 만나지. 평상시보다 준비시간이 길다고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그럼 새해는 우도현이랑 둘이 맞이하는 건가. 이 한 문장이 어찌나 현실감 없는지 하진은 지금 이 모든 게 사실은 꿈이 아닐까 싶었다.
“와인 마시면서 디저트로 케이크도 먹자.”
이렇게 다정다감한 우도현도 어쩌면 꿈….
“나는 우리 하진이랑 케이크랑 같이 먹어버려야지.”
…현실 맞네. 꿈에서조차 우도현이 이렇게 변태 새끼일 리 만무하니 말이다.
“토마토소스 있네. 스파게티 해줄까? 아니면, 스튜처럼 떠먹을래?”
하진이 꿈과 현실을 조율하는 사이 도현은 냉장고 문을 열고 재료를 탐색했다. 곧바로 우유, 양파와 버섯, 소시지를 꺼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이제 하진의 결정에 따라 면을 집을지 말지만 결정하면 됐다.
“면 안 땡겨.”
“오케이. 그럼 에그 인 헬로.”
브런치 카페에서나 먹던 그 토마토 스튜를 말하는 건가. 도현의 망설임 없는 메뉴 선정에 하진은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이 목까지 차오름을 느꼈다. 요리는 언제부터 했는지, 평소에도 자주 요리를 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질문들. 그러나 이를 답하기 위해선 자연스럽게 서로가 없던 공백의 시간을 들추어야 하기에 꽤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하진은 번번이 질문을 삼켰었다.
“뭐 도와줄까?”
오늘도 역시 그 질문은 다음으로 미룬 채, 하진이 도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음.”
하진의 질문에 도현이 주변을 살피며 고민했다. 사실 고민하는 척이었다. 하진이 할 일이라곤 그저 다 차려진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것뿐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도현이 하진에게 시킬 것을 찾는 이유는 딱 하나. 도현 손에 들려있는 앞치마가 그 정답이었다.
“그럼 옆에서 양파랑 버섯 좀 씻어주라.”
박하진한테 앞치마를 입히기 위해서. 세상에. 상상만 했는데도 벌써 짜릿하다. 도현이 히죽대며 하진을 싱크대 앞으로 끌었다. 그에 하진이 나풀거리는 팔을 걷어붙이곤 그대로 싱크대에 손을 넣었다.
“어어?”
이게 아닌데. 도현이 급하게 하진을 제지했다.
“앞치마 해야지, 자기야.”
“양파 하나 씻는데 누가 앞치마를 해.”
“버, 버섯도 씻어야 하는데….”
“그거 뭐 얼마나 걸린다고.”
“아니, 그래도 물 튀면….”
“너나 해.”
이미 도현의 검은 속내를 눈치챈 하진이 철옹성 같은 벽을 쳤다. 그 벽 앞에 깨갱, 움츠러든 도현이었다. 이내 하진은 도현에게서 앞치마를 뺏었다. 그리곤 팔을 쭉 뻗어 도현의 목에 앞치마를 걸었다. 태희의 취향이 가득 담긴 노란 꽃무늬 앞치마는 결국 도현의 차지가 된 것이다.
“섹시하고 좋네.”
거짓말. 이게 섹시할 리가 없잖아. 도현이 구시렁댔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은 하진이 마지막으로 예쁘게 허리끈을 묶어주었다.
“이제 맛있게 요리해주세요.”
“…….”
“자기.”
톡톡. 도현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하진이 나른히 속삭였다. 웅얼대는 목소리였지만, 도현의 귀에는 그 소리가 정확히 꽂혀 들어왔다. 미친다, 진짜. 흥분한 도현이 되물었다.
“어? 어? 뭐라고? 하진아, 뭐라고?”
도현의 간절한 외침에도 하진은 싱긋, 미소만 내보였다. 아마 어딘가에 우도현 길들이기 종목이 있다면, 박하진은 그 분야 최강자일 것이다. 이렇게 단 한 마디로 우도현을 쥐락펴락하니 말이다. 어느새 도현의 머릿속엔 앞치마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얼른 배고픈 우리 하진이 밥 먹일 생각뿐이었다.
탁탁탁. 도현이 칼질에 속도를 붙였다.
“나 유학 가서 처음 해 먹은 요리가 뭔 줄 알아?”
“몰라. 뭔데?”
“김치찌개.”
“왜? 갑자기 먹고 싶었어?”
칼질이 멈췄다. 인덕션에 불이 켜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얇게 두른 올리브유가 끓었다. 갖은 채소들을 넣으니 지글지글 소리가 났다. 그 사이로 도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먹는 거 봤거든.”
“예능? 무슨 프로였는데?”
“숙소 생활 찍는 거.”
“와, 그거 진짜 데뷔 초에 찍은 건데 어떻게 봤대.”
신기해하는 하진과 달리 도현은 무던히 말을 이었다.
“무의식중에 내가 계속 널 찾았나 봐.”
“…….”
“네가 김치찌개 먹는 걸 보고 따라 먹고 싶어질 만큼.”
뒤돌아 싱크대에 등을 기댄 도현이 하진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토마토소스와 우유가 어우러진 냄비에선 새콤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향만큼이나 도현의 말은 달았다. 도현을 따라 웃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로.
그래서 하진 역시 따라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아, 참. 신인상 누가 받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갑자기 생각났는지 도현이 계란 두 알을 부딪치면서 말했다. 이어 탁 소리와 함께 깨진 계란이 퐁당 스튜 안으로 들어갔고, 그 위에 치즈를 뿌림으로써 도현이 요리를 마무리 지었다.
“신인상은 왜?”
“그냥 습관. 나는 대상보다 신인상에 더 눈이 가더라고.”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TV를 틀었다. 때마침 신인상 순서였다. 도현은 아예 불을 꺼버린 채, 얼른 TV 앞으로 갔다. 쟁쟁한 네 명의 남자 후보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긴장된 얼굴들은 이내 한 명의 얼굴로 클로즈업됐다.
[축하합니다. 김성제 씨.]
아, 저 배우 연기 잘했….
“와, 김성제 역시 잘될 줄 알았….”
“…….”
“…….”
“…….”
“어….”
말 사이 공백이 수상쩍게 길었다.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가 아차 싶었는지 곤두박질친 것 또한 이상했다. 남자의 직감이 도현에게 말하는 듯했다. 주변을 감싼 공기가 몹시 어색하다고. 이것은 분명 전 애인 혹은 전 파트너의 문제임이 틀림없었다.
이윽고 흐르는 정적 속에서 하진이 조용히 채널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동작 그만.”
도현이 하진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하진은 푸르른 자연 다큐 채널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잘생긴 남자배우의 수상소감을 어색하게 듣고 있을 게 아니라!
“아는 사인가 봐?”
하하. 하진의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하하!”
“하하하!”
먼저 웃는 도현을 따라 하진 또한 따라 웃었다. 웃음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정말 웃음만 나오는 이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그래서 무슨 사이라고?”
“친….”
“설마 친구라는 개소리는 안 하겠지.”
“치, 친구는 아니지!”
캐내려는 자와 들키지 않으려는 자. 전자의 눈치가 빨라질수록 후자의 태세 전환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냥 선후배….”
“연극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너랑 겹친 적이 없을 텐데.”
“…되고 싶다고….”
“…….”
“내가 너무 좋아해서! 어?! 친한 선후배 사이가 되고 싶다고!”
오, 세상에나. 이게 무슨 막말이란 말인가. 본의 아니게 발끈해버린 하진이 황급히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그런 하진을 도현은 가자미눈을 뜬 채, 빤히 노려봤다. 하진이 비이성적으로 내뱉은 말을 다시 복기해보면서.
내가. 너무. 좋아해서. 라고 했다.
“야, 야. 우도현, 진정해. 연기를 좋아한다는 뜻이었지 성적으로 좋아한다, 뭐 이런 거 아니… 윽!”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 담기는커녕 수습도 어려운 정도인데 설상가상으로 수습을 들어야 할 대상마저 눈깔이 돌아버렸다.
“야, 잠깐만. 아흐… 야아….”
도현이 하진의 귀를 깨물었다. 그에 저절로 말꼬리가 늘어진 하진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적나라한 소음 새로 울리는 목소리가 자극적이었다.
“자기야.”
“…….”
“하진아.”
“왜….”
“네가 너무 좋아하는 상대는 나잖아.”
애초에 대답 따위는 필요 없었는지 도현은 그대로 하진의 입술을 집어 삼켜버렸다. 자연스럽게 열린 하진의 입안에서 말캉한 혓바닥이 엉겼다. 딱 한 모금 마신 레드 와인의 풍미가 혀끝에서 증폭되는 듯했다. 하아. 하아. 고개를 돌리는 동안 떨어진 입술 틈으로 달고도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이내 도현의 눈동자도 이성을 찾았다.
“우도현.”
이름을 부르며 내뱉은 숨이 도현의 코끝에 닿았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부딪친 눈동자는 온전히 서로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에 하진은 생각했다. 역시 거짓말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하진은 눈치 게임을 그만두기로 했다.
“진짜 솔직하게 말할게. 김성제랑은….”
“…….”
“그…예전에…스파.”
아, 젠장. 정말 사실대로 한 점 부끄럼 없이 말하려고 했는데 입술이 제멋대로 발음을 뭉개버렸다. 진짜로. 맹세코.
“스파?”
역시나 짓뭉갠 발음을 알아들었을 리 없는 도현이 눈썹을 구긴 채, 되물었다. 좀 전의 그 당당한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하진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단어를 단번에 터트렸다.
“…세파.”
“뭐?”
“…섹파! 섹스 파트너! 내 첫 섹파가 김성제였… 헙.”
오, 하느님. 부처님. 이런 걸 TMI라고 하나요. 이미 다 뱉어놓고서 뒤늦게 입을 막은 하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도현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도현의 안면근육은 이미 험악하게 일그러진 뒤였다. 하진은 당장이라도 초록창에 묻고 싶었다.
[Q. 현재 애인에게 전 파트너의 존재를 들켰습니다. 그것도 여러 명이요. 어쩌죠?]
[A. 아이고, 힘드시겠습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파트너가 있으셨다니 한 문란함 하셨나 보군요. 애인 분께 무릎이라도 꿇으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왜 이딴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적막이 내려앉은 둘 사이에 하진이 내뱉은 고성만이 윙윙, 주변을 떠다녔다. 첫 섹파. 첫 섹파. 첫 섹… 아오, 씨발! 생각하다 말고 하진이 제 주둥아리를 퍽퍽 내리쳤다.
“김성제가 섹파인 것도 싫은데 네 처음이라는 거지?”
“…처음은 아니고, 첫 섹파….”
“…처음은 또 따로 있다고?”
“…뭐, 그렇지?”
강압적인 말투도 아니었는데 왠지 술술 대답이 나왔다. 하진이 멋쩍은 듯 딴청을 피웠지만, 귀에 들리는 한숨 소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 도현의 잘 정리되어있던 머리카락이 거칠게 헝클어졌다. 못마땅함이 잔뜩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아니, 근데 오래 만난 것도 아니야. 한 세 번 봤나? 그리고 알잖아. 나 파트너는 그냥 파트너인 거.”
과거는 과거지, 뭐 어때! 여태껏 이런 마인드로 살아온 하진은 지금 생전 거의 처음으로 제 과거를 누군가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혹여 상처받을 자신의 애인을 위해서.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우도현.”
“…….”
“섹스도 너랑만 할게.”
도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아, 그래. 무릎! 무릎이라도 꿇자. 소파에서 엉덩이를 뗀 하진이 아래로 내려가 도현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도현의 허벅지 안쪽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행위에 당황한 도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뭐 하는데.”
“무릎 꿇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진은 비비적거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진이 무릎 꿇는다는 의미를 잘못 파악한 듯했다. 그러니 무릎을 이렇게 불건전하게 꿇는 거겠지.
“하진아.”
하지만 여기서 잠시 간과한 것이 있었다.
“무릎을 꿇었으면 봉사를 해야지.”
불건전함은 도현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
“자기야, 맛있어?”
“…흐, 흡…!”
도현이 제 아래에서 무릎 꿇고 있는 하진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도현의 잔뜩 부푼 성기가 하진의 입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버거운 듯 달뜬 숨을 내뱉는 하진의 입가엔 새하얀 생크림이 묻은 채였다. 열기에 녹은 생크림이 하진의 잇새로 질질 새어 나왔다. 그 모양새가 꼭 질질 흐르는 정액을 받아먹는 것 같았다. 야해 빠졌어. 도현이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내 좆에 발린 케이크라 더 맛있나?”
도현이 제 손가락을 할짝거렸다. 살짝 맛을 보니 무척이나 달았다.
“케이크가 맛있어?”
“…….”
“내 좆이 맛있어?”
도현의 터무니없는 질문에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거야 당연히.
“네 좆, 흣… 이지…….”
하진의 혓바닥이 성기 표면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그와 동시에 달콤한 생크림이 혓바닥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귀두를 할짝거리는 혀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마치 딱딱한 막대 사탕을 양손으로 쥐어 빨아먹는 것처럼, 하진은 그 단맛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진을 이렇게 만든 것은 도현의 성기에 발린 생크림 케이크였다.
‘케이크 먹을래. 네 거랑 같이.’
바짝 선 도현의 성기에 먼저 케이크를 바른 건 하진이었다. 하진이 생크림을 찍어 귀두에 묻힐 때까지도 도현은 어안이 벙벙했으며, 하진은 몹시 호기로운 기세로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주도권이 도현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생각보다 시각과 미각이 자극적인 탓이었다.
츄읍. 츕. 평소보다 타액이 더 많이 흘렀다. 쿠퍼액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잠옷이 투명해지려 했다.
“윽… 하진아.”
“…우웅….”
“하아… 나와… 입 떼….”
도현의 예고에도 하진은 오히려 더 세게 흡입할 뿐 입을 떼지 않았다. 츄읍, 질척이는 소리가 심히 자극적이었다. 사정감이 몰려온 도현이 붉어진 하진의 귓불을 만졌다. 그러자 어깨를 흠칫 떤 하진이 시선을 올려 도현과 눈을 맞췄다.
큭! 도현의 굵은 신음이 터짐과 동시에 울컥, 정액 또한 터져 나왔다. 그 뜨거운 액이 하진의 입속을 가득 메웠다. 이내 하진이 입을 벌리니 진득한 정액이 거미줄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하…. 진짜 존나 야하네, 씨발. 땀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젖히며 도현은 다소 험한 감상평을 삼켜냈다. 곧 도현이 손바닥을 하진 앞으로 가져다 댄 채 말했다.
“하진아, 뱉어.”
그에 하진이 곧바로 도현의 손바닥에 정액을 뱉어냈다. 희뿌연 액에서 단내가 났다. 이를 휴지로 닦아내려던 도현을 하진이 막았다. 이윽고 줄곧 꿇었던 무릎을 펴 하진이 도현의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그리곤 도현의 손바닥을 제 구멍에 문질렀다. 미끄덩거리는 감촉이 구멍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걸로 얼른 쑤셔, 줘.”
안달 난 목소리. 여유 따윈 없었다. 원피스 잠옷 중앙에 불룩 솟은 성기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위는 이미 끈적하게 젖은 상태였다. 처 올라간 잠옷 밑으로 하진의 고환이 빼꼼히 드러났다. 그 불그스름한 고환을 도현이 움켜쥐었다.
“아! 뭐, 뭐… 읏, 야.”
도현은 대답 대신 하진의 어깨에 숨결을 내뱉으며 말캉한 고환을 매만졌다. 그러면서 정액 묻은 손바닥으로 그 아래 회음부를 마사지하듯 쓸었다. 다시 부푼 도현의 성기는 하진의 엉덩이골 사이를 매끈히 유영했다. 흐읏. 하진이 신음을 흘렸다.
“우리 자기, 벌써 젖었어.”
천으로 감싸진 귀두를 엄지로 빙글 문질렀다. 간접적인 그 감촉이 맨살보다 자극적이었다. 무심결에 하진이 허리를 튕겼다. 천 아래 발기한 성기가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진을 애태우던 도현이 번쩍, 하진의 몸을 들어 소파에 눕혔다.
“그럼 이제 내가 먹을 차례.”
케이크 위에 장식된 딸기 하나가 하진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읍! 갑자기 느껴진 새콤함에 눈을 크게 뜬 하진이 발버둥 치자 도현이 그 위에 앉아 제 입술을 포개었다. 둥근 딸기가 하진과 도현의 혓바닥 위를 굴러다녔고,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틈으로 분홍색 과즙이 넘쳐흘렀다. 그러다 콱, 도현이 딸기를 깨물었다. 입안 가득 새콤달콤한 딸기향이 퍼졌다.
“켁, 켁! 야, 읏. 숨, 좀 쉬자….”
몰아붙이는 도현을 밀어내며 하진이 간신히 숨을 쉬었다. 들이마시는 숨마다 다디단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감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 쉬어, 자기야.”
도현의 짙은 음성이 하진의 귀를 자극했다. 이어 도현이 생크림을 잔뜩 손에 묻혔다. 그리곤 단번에 하진의 옷을 벗겨 이를 분홍빛 젖꼭지에 문질렀다.
“뭐, 흑! 뭐야! 아읏….”
질척거리는 감촉이 상당히 생경했다. 도현의 집요한 손길이 미끄덩거리며 오른쪽 가슴을 만지는 동안 뜨거운 혓바닥은 왼쪽 가슴을 핥았다. 역시 아까도 느꼈지만, 생크림이 참 달았다. 계속해서 빨고 싶을 만큼.
“흐으, 그만… 아, 파. 미친, 윽… 놈아….”
안달 난 허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탓에 자꾸만 딱딱한 두 성기가 비벼졌다. 성기 끝에서 나오는 몽글거리는 액이 윤활제처럼 부드러이 움직임을 도왔다.
“달다, 하진아.”
도현의 입술이 크림으로 번들거렸다. 이를 혓바닥으로 슥, 훑은 도현은 또다시 손가락에 생크림을 묻혔다. 아까보다 많은 양의 생크림이 질펀하게 묻은 손가락을 도현은 망설임 없이 하진의 구멍으로 가져갔다. 조그만 구멍이 생크림을 원하는 것처럼 벌름거렸다.
“아! 으. 이, 이상해!”
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에 하진이 다리를 오므렸다. 그에 도현이 하진의 다리를 활짝 열곤 허벅지를 꽉 붙잡았다. 눈앞에 마주한 구멍은 꿀렁이며 생크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네 구멍은 먹고 싶다고 안달인데.”
뻐끔. 뻐끔. 그 귀여운 모양새를 보던 도현은 곧바로 그곳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곤 혀끝을 세워 구멍 속을 파고들었다.
“히윽! 야, 미, 읏. 친. 아! 앗! 하지, 마.”
하진이 손톱으로 도현의 뒤통수를 긁었다. 순간적으로 저릿해진 구멍이 움찔거려 도현을 떼어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무자비하게 구멍 안으로 들어온 도현의 혀가 하진의 내벽을 뜨겁게 핥아댔다. 아! 은밀한 부위가 닿을 때마다 힘이 들어간 하진의 구멍이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축축한 혀가 자꾸만 구멍을 괴롭혔다.
“케이크도.”
“…….”
“네 구멍도.”
“…….”
“너무 달아, 하진아.”
그 순간 하진의 볼이 화악, 붉어졌다. 미친 새끼…. 그게 달 리가 있냐고…. 타들어 가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하진이 중얼거렸다. 세워진 무릎이 부끄러움에 비비 꼬아졌다. 선홍빛 분홍엔 새하얀 생크림이 주륵, 흐른 채였다.
“부끄러워?”
“…그럼 씨발… 이게 안 부끄, 잇. 아! 말을 좀 들, 어!”
“어쩜 우리 자기는 상스러운 욕을 하는데도 귀엽지?”
“입! 좀, 윽, 닥, 쳐!”
그 말과 함께 곧바로 상체를 일으킨 하진이 도현의 턱을 당겨 입술을 뭉갰다. 흐읍. 달뜬 숨 사이로 거칠게 혓바닥이 얽혔다. 말캉한 아랫입술이 서로 먹히고 먹혔다. 눈을 감은 채 그에 장단을 맞춰주며 도현은 조심히 하진의 구멍을 찾아 검지와 중지를 꽂아 넣었다.
“으응!”
쉴 틈 없는 괴롭힘에 혀가 다 풀린 모양인지 하진의 입에선 앙칼진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에 도현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다시 살짝 움직이니 앙!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뭐, 뭐야… 제 입에서 나온 신음치고는 너무 이상해서 당황한 하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를 놓치지 않은 도현이 그런 하진의 내벽을 두 손가락으로 쫙, 벌렸다. 이어 빙글, 질척이는 그 안을 휘저으니 역시나 응, 하고 하진이 가냘픈 탄성을 뱉는다.
“넣, 응. 얼른 넣, 어줘….”
하진의 몸이 평소보다 더 예민했다. 살결이 스치기만 해도 자지러지는 것이 몹시 야했다. 천천히 더 괴롭혀주려고 했지만 나른해진 하진의 모습에 도현은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검붉어진 성기에 힘줄도 튀어나왔다. 이내 도현이 기둥을 잡고, 하진의 오물거리는 구멍 주위를 문질렀다. 구멍에서 흐르는 정체 모를 액을 성기 끝에 묻히곤 도현은 단번에 하진 속을 가로질렀다.
“아읏!”
탄성과 동시에 하진의 아래가 강하게 수축했다. 꿀쩍대는 내벽이 도현의 성기를 바짝 감았다. 열이 올랐다. 그 뜨거움이 하진의 안을 어지럽혔다. 퍽. 퍼억. 도현의 허벅지와 하진의 엉덩이가 강한 마찰을 일으켰다. 까칠한 음모가 궁둥이에 닿을 정도로 도현은 몇 번이고 성기를 처박았다.
“아! 천! 천히… 이!”
“하아… 자기야….”
“…으응. 왜애….”
“궁금, 한데… 자기 이거 관리해?”
도현이 하진의 무모한 아래를 문지르며 물었다. 성기 주변은 물론이고 회음부에도 털은 존재하지 않았다. 막 껍질을 벗겨낸 바나나처럼 새하얀 하진의 아래가 문득 도현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응. 읏. 관리, 해. 주기적, 으로.”
“나도 할까?”
그렇게 말하면서 도현은 불룩 튀어나온 하진의 아랫배를 뭉근히 짓눌렀다. 그에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백자지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잇…. 넌 있는 게….”
“있는 게?”
“섹, 시해.”
아. 미친. 젖은 목소리로 헐떡이며 저런 말을 하는 박하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도현은 제 자지를 한층 더 부풀리며 생각했다.
“미친놈아. 왜 더 키우고 지, 흣, 랄이야. 윽!”
이미 꽉 찬 속이었다. 성기 표면에 불룩이 튀어나온 핏줄까지 느껴질 정도로 꽉 조여진 내벽인데 도현의 성기가 움찔거리더니 굵기를 키웠다. 이어서 그 크고 단단한 것이 훨씬 깊게 하진의 안을 찔러댔다. 앗! 아! 들끓는 쾌감을 내뱉으며 하진이 도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더, 더 깊게. 응. 좋아! 아!
“야, 나. 가. 갈 것 같. 응. 아!”
음모에 비벼져 불그스름해진 궁둥이에 사정없이 마찰이 가해졌다. 꿀렁이며 자지를 삼켜대는 구멍 역시 새빨개진 채였다. 하아. 퍽. 읏. 퍼억. 오로지 마찰음과 거친 숨소리만이 주변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하아… 온몸이 뜨거웠다. 사정감이 몰려왔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성기를 빼낸 도현이 단번에 푹, 하진의 구멍을, 그 말캉한 내벽을 뚫고 들어갔다.
“흐읏!”
“…윽.”
왈칵, 하진의 성기 끝에서 터져 나온 정액이 도현의 가슴까지 튀었다. 도현의 성기 또한 울컥대며 정액을 쏟아냈다. 그 끈적한 액으로 가득 찬 하진의 아랫배가 용암처럼 뜨거웠다.
“…하아. 하진아….”
가쁘게 몰아쉬는 숨에 하진의 이름이 섞여 나왔다. 한껏 풀린 눈으로 하진이 도현을 내려다봤다.
“우도혀언….”
“으응.”
“…보고 싶었어.”
“…응?”
“좋아해.”
그 말에 꺼떡대던 도현의 성기가 좀비처럼 스윽, 일어났다.
***
[삼! 이! 일!]
댕-. 댕-.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한 해가 찾아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서 맥주 한 캔을 따 맞이하는 새해였지만 조금 다른 점은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점이었다.
“…새해야?”
도현과의 섹스 후 기절하듯 잠든 하진이 종소리에 꾸물대며 눈을 떴다. 그에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화면을 보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젖혀 하진을 바라봤다. 하진이 잠든 지 30분 정도 됐으려나. 제야의 종소리만 듣고 하진을 침대로 옮기려 했는데 그사이 먼저 일어난 하진이 도현은 퍽 사랑스러웠다. 뭔가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같이 새해를 맞이하는 느낌이랄까.
“응. 지금 막 12시 지났어.”
“…우음….”
잠을 깨보려는 듯 하진이 꼼지락거렸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다 마신 맥주 캔을 우그러뜨리며 도현이 흥분을 잠재웠다. 이어 도현은 소파에서 등을 떼고 아예 하진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졸음기 가득한 하진을 찬찬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뽀얀 얼굴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처음 만난 10대의 박하진 그대로인데 풍기는 분위기는 제법 성숙했던 20대의 박하진을 지나 이젠 30대라니.
흘러간 시간이 아쉬웠지만 어쩐지 도현은 더욱 행복했다. 하진과 함께하지 못했던 20대를 후회하는 것보다 이제부터 함께할 30대가 너무도 기대되기 때문이다. 10대의 절반을 함께했고, 20대의 끝자락을 함께했다. 이제 30대는 첫 자락부터 온전히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감. 그게 도현을 가득 채웠다.
“반가워. 30대의 박하진.”
살며시 하진과 맞닿은 도현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 하진 역시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빙그레 웃었다. 새해를 축복하는 소리가 둘 사이의 여백을 채웠다. 그 여백 위로 심장이 선율을 만들어냈다. 쿵쿵. 몹시 떨리는 선율이었다.
“나도 반가워.”
“…….”
“30대의 우도현.”
나지막한 목소리가 선율을 따라 흘렀다. 그 고운 미성이 도현의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심장에 안착했다. 두근. 두근. 간지러운 심장을 뒤로한 채, 도현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사랑스러운 소리가 이어지고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도현과 하진의 목소리가 마치 한 사람처럼 완벽히 포개졌다.
***
1월 1일 아침. 이것패치는 탑 클래스 연예인의 열애설 대신 이러한 기사를 내보냈다.
║ 이것패치 단독 | “박하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YN 미디어의 진실
이것패치 단독 | “박하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YN 미디어의 진실
등록 20XX-01-01 오전 9:14:27
○○○ 기자
# 20XX.12.19. W 호텔.
세 사람이 있었다. A는 스위트룸에, B와 C는 같은 층의 바로 옆 스위트룸에. 이들은 일행이 아니었다. 당연히 서로의 존재도 몰랐다. 그런데 A가 룸에 들어가고 1시간 뒤, 세 사람은 복도에서 만나게 됐다. 우연히. 그것도 아주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날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이것패치가 단독 입수했다. 이것패치는 영상을 바탕으로 그날의 상황과 대화를 복구했다.
“야. 너 요새 왜 이래? 미쳤어? 오냐오냐해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지?” (B 씨)
B 씨가 C 씨에게 발길질을 했다. C 씨는 온몸으로 이를 막으며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C 씨의 입에선 신음이 흘러나왔고,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쿵쿵 소리가 났다. 누구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때, C 씨가 기대고 있던 문이 열렸고, 누군가 C 씨를 끌어당겼다.
A 씨였다.
“야! 문 안 열어?!” (B 씨)
“프런트에 신고당하기 싫으시면 목소리 좀 낮추시고 객실로 돌아가 계세요.” (A 씨)
문을 부술 듯 쾅쾅대던 B 씨는 곧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보안팀과 함께 B 씨가 다시 등장했다. B 씨는 호텔 측에 자신의 애인을 A가 강제로 끌고 들어갔다고 항의했다. B 씨의 말만 듣고 따라간 호텔 측은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B 씨의 말이 거짓이었고, C 씨는 B 씨에 의해 폭행당한 모습이었던 것. 때마침 이 호텔에 묵고 있던 대표 D 씨가 상황을 수습했다. D 씨는 B 씨에게 책임을 물으며 C 씨를 도와주려 했다.
A는 이 호텔에 묵었다는 이유로 C와 바람피운다는 열애설이 터진 전 유어 멜로디 박하진이었다. C는 배우 여희나, D는 그녀와 불과 몇 달 전 열애를 인정했던 W 엔터테인먼트 대표 우도현.
그렇다면, C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언어폭력을 일삼던 B는 누구일까. 바로 그녀의 소속사 YN 미디어의 사장 영남기였다.
# 20XX.12.25. 서울 모 카페
두 사람이 만났다. A와 새로운 인물 E였다. E가 A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살려달라고. 이날은 같은 소속사 C가 잠적설이 터진 날이었다. 그리고 3일 뒤, C 또한 SNS에 그저 살고 싶었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A와 E는 꺼림칙한 관계이다. E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잘못으로 팀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해체 이후, 둘 간의 교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A는 E를 외면하지 않았다. 며칠 전 자신이 알게 된 것들과 E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것을 무시할 만큼 A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후에 취재진을 통해 E는 그렇게 말했다.
“염치없게도 제가 기댈 사람이 형밖에 없었어요. 제가 먼저 연락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준 형에게 너무 고마워요.” (E 씨의 인터뷰 中)
역시나 A는 박하진. E는 한서빈이다. E는 C와 마찬가지로 B에 의해 물리적, 정신적 폭행을 당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B는 YN 미디어와 관련된 탈세 및 여러 의혹에 휩싸인 상태이며, 그와 관련해 드라마 감독 F까지 거론되는 중이다. 이 부분은 이것패치가 후속 기사를 통해 자세히 파헤칠 예정이다.
이제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아직도 A가, 박하진이 여자친구를 두고 바람이나 피운 파렴치한으로 보이는가.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먼저 C와 E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
기사가 터진 직후 파랑새에는 이러한 실트가 올라왔다.
#절대지켜_박하진
#민트멜로디가_박하진을_지켜줄게
도현이 설계한 판에서 승기는 완전히 하진 쪽으로 기운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