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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Punch)
호텔 W의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태희가 도현이 알려준 룸 문을 열었다. 사람 하나 없던 복도와는 달리 열린 문 앞에는 호텔 측 경호원 2명과 도현의 비서가 대기해 있었다. 태희의 비서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김 비서가 태희를 따로 마련된 비즈니스 룸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이미 태희를 여기로 불러낸 도현이 앉아 있었다.
“우 대표. 우리 사이에 호텔은 좀 그렇지 않아?”
태희가 도현의 반대편에 앉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에 픽 웃은 도현이 맞받아쳤다.
“우리 사이 들키지 않으려면, 호텔만큼 좋은 곳도 없죠.”
“작당 모의하기도 아주 좋은 장소고?”
“에이. 비즈니스라는 좋은 표현이 있는데 왜 그러실까.”
“비즈니스라기엔 너무 사적 감정이 들어가 있으셔서.”
어깨를 으쓱거린 태희는 앞에 놓인 생수를 따 목을 축였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은 듯 보였으나 마냥 웃지는 못한 도현이었다. 사적 감정이 들어가 있다는 태희의 말이 꽤 뼈를 때리는 것이어서 도현은 그저 멋쩍은 미소만 내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란 게 뭐야?”
태희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도현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아마도.
“하진이 얘기지?”
태희가 다시 물었다. 웃음을 거둔 도현은 태희에게 서류 봉투를 건넴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이를 받아든 태희는 봉투를 열어 안에 든 것을 테이블 위로 쏟아냈다. 사진 두 장과 메모리카드 하나. 먼저 태희의 시선을 끈 것은 사진 두 장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태희의 눈썹이 우그러졌다.
“여희나랑 거래했어요.”
도현이 말을 꺼내자 태희가 손바닥을 펼치며 도현을 멈췄다.
“잠깐.”
자신이 보고 있던 사진을 도현 쪽으로 돌린 태희는 사진 속 남자를 가리키곤 말을 이었다.
“얘가 최윤조니?”
“네, 맞아요. 박하진이 얼마 전까지 만나던 파트너.”
“어머, 그 빌어먹을 아가가 얘구나.”
태희의 언어가 상당히 순화되었음에도 도현은 왠지 분노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하진과 윤조가 부둥켜안고 있는 사진은 구깃구깃, 태희에 의해 제 형체를 잃어 갔다. 이어서 남은 한 장을 확인한 태희가 말했다.
“이 사진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태희는 사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곤 툭툭, 못마땅하다는 듯 건드렸다. 하진이 그냥 잠들어 있는 거라기엔 어두운 장소도, 흐트러진 옷가지도 꺼림직한 사진이었다. 태희의 눈치를 살핀 도현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여희나가 박하진 술에 약을 탔어요. 그걸로 박하진 마약 제보를 하겠다면서 절 협박했고요.”
“…뭐?”
웬만해선 당황한 티를 내지 않는 태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마약이란다. 같은 멤버 마약으로 탈퇴한 뒤에는 약이라면, 감기약도 벌벌 떨던 하진이었는데 무슨. 태희가 화를 억누르기 위해 생수를 들이켰다. 그에 도현은 태희가 진정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내 태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거래를 했다고?”
“네. 여희나 성격 아시잖아요. 말로만 협박하는 사람 아닌 거.”
“조건이 뭔데.”
“공개 연애요.”
“허. 애 약 먹이고 협박할 만큼 너를 사랑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이유로?”
“저도 얘기들은 건 없어요. 그냥 본인도 협박받는 중이라고만 했지.”
협박이라는 단어에 태희는 기시감을 느꼈다. 얼마 전, 한서빈도 그런 얘기를 했었으니까. 다만, 그저 한서빈에 국한된 일인 줄 알고,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여기에 여희나까지 엮였다는 건, 한서빈이 했던 말의 무게가 꽤 무거워짐을 뜻하기도 했다. 쉽게 외면하지 못할 만큼.
아으. 뒷머리를 세게 휘적거린 태희가 운을 뗐다.
“한서빈이 나 찾아왔었어.”
“제가 아는 그 한서빈이요? 왜요?”
“여희나랑 똑같아. 박하진으로 날 협박했어.”
“뭐라고요?”
“섹스 동영상 있대. 따끈따끈한 최신판.”
그 말에 도현의 손이 움찔했다. 그와 함께 여태껏 평정심을 유지하던 도현의 얼굴이 한순간에 와락, 무너져 내렸다. 마약은 어떻게 해결해보겠는데 섹스 동영상까지? 이건 완전 박하진 한 명을 사지로 몰아넣는 거 아닌가. 박하진이 동네북도 아니고, 왜 다들 박하진으로 협박하는 거야, 씨발. 솟구치는 짜증에 도현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다행히 이를 읽은 태희가 도현을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한서빈은 그냥 협박하려고 거짓말한 것 같으니까.”
“어떻게 아세요?”
“우리 하진이 요즘 욕구불만이거든. 섹스 안 한 지 몇 달은 됐을 거다.”
“아, 다행이네요.”
진짜 다행이긴 한데 이 와중에 하진이 몇 달 동안 섹스 안 했다는 말이 기쁘다니. 도현은 스스로를 미친놈이라 칭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협박한 이유는요?”
“살려달라고. 소속사에서 나가고 싶대.”
역시 그런 건가. 여희나와 한서빈의 소속사, YN 미디어. 그리고 사장 영남기.
“정말 살려줘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도현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조사해온 YN 미디어와 영남기 관련 서류를 태희에게 넘기며 말을 덧붙였다.
“YN 미디어 영남기 사장. 마약. 폭행. 도박. 스폰서까지. 더러운 건 다 손대는 인간이더라고요.”
빠르게 서류를 훑어본 태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습생 폭행에 본인 도박 빚 갚겠다고, 소속 연예인을 접대까지 내보내다니. YN 미디어가 조용히 몸집을 불리면서도 소위 말해 한물간 연예인들만 고집하는 이유가 이거였나. 다시 뜨고 싶다는 간절함을 이용해 먹으려고? 태희는 읽던 서류를 덮어버리곤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서류를 읽는 내내 살려달라던 서빈의 말이 귓가를 웅웅 댄 탓이었다.
“중요한 건, YN 미디어가 몸집을 키우는 이유예요.”
“그게 뭔데.”
“내년 상장 준비 중이라네요. 그것 때문에 로비 넣느라 접대를 엄청 돌리나 봐요. 물론 거기에 여희나랑 한서빈도 속해있겠죠.”
도현의 말이 태희의 죄책감을 한껏 부풀렸다. 젠장. 이런 거였으면, 협박이 아니라 애원을 했어야지. 영남기가 이렇게 나쁜 새끼니까 살려달라고 빌었어야지, 서빈아.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태희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래서 우리가 뭐 어쩌자고.”
태희의 어투가 날카로웠다. 자신이 지금 너무 감정적인 상태란 걸 알기에 태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는 도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려줘야죠.”
“YN을 건드리자는 얘기니?”
“그냥 건드리자는 게 아니라 아예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 거예요.”
단호하게 말을 잇던 도현이 잠시 말을 멈추곤 숨을 돌렸다. 그 사이로 내뱉어진 숨결마저 확고한 도현을 드러내는 듯했다.
***
태희가 가고, 도현은 혼자 남아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천장으로부터의 빛이 너무 강렬해 소파 아래로 축 처진 왼손을 들어 눈 위에 얹은 도현은 그대로 눈꺼풀을 내려 모든 빛을 차단했다.
그 덕분에 눈앞이 새까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촘촘한 어둠 틈새로 하진이 떠올랐다.
‘내가 없는 동안 넌 항상 누군가의 표적이 됐겠구나. 지금처럼.’
그냥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혼자 견딘 하진이 대견하면서도, 혼자 놔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하진으로 향하는 마음엔 언제나 도현의 죄책감이 무겁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쉽사리 그 마음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저 용기가 없음에 대한 변명일 뿐이겠지만.
그 순간, 다급한 발소리가 도현의 옆에서 멈췄다.
“대표님. 지금 박하진 씨가….”
번뜩, 도현이 눈을 떴다. 박하진이라는 이름에 도현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곤 김 비서를 올려다봤다. 박하진이요? 도현이 되물었다. 김 비서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아래층 스위트룸에 계신데 소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이를 듣자마자 도현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 김 비서에게 말했다.
“가면서 듣죠.”
김 비서는 도현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가며 자신이 들은 상황을 전달했다.
“박하진 씨가 계신 스위트룸 층에서 소란이 벌어졌고, 이를 박하진 씨가 제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란을 일으킨 주범은 영남기 사장으로 파악됐으며, 박하진 씨가 자신의 애인을 강제로 끌고 갔다고, 보안팀에 신고를 넣었고요.”
“사실입니까?”
“복도에서 영남기 사장에 의해 한 여성이 맞고 있었고, 이를 박하진 씨가 자신의 룸으로 밀어 넣는 장면이 CCTV에 찍혔습니다. 그 여성은 여희나 씨로 추측됩니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도현은 안절부절못했다. 혹여 하진이 다치기라도 했을까 걱정부터 치솟았다.
“대표님. 상황은 제가 정리할 테니 대표님께서는 바로 박하진 씨에게 가보시죠.”
“…….”
“정신 차리시고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김 비서는 도현이 앞으로 나가게끔 등을 떠밀었다. 타의에 의해 한 발자국을 뗀 도현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다음 발자국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하진아. 하진아. 하진아.
머릿속으로 수십 번 하진을 부른 끝에 도현은 자의에 의해 한 걸음, 두 걸음, 종국엔 하진에게로의 뜀박질을 시작했다. 덩달아 심장도 같이 내달렸다. 그 순간, 도현은 깨달았다. 언제나 무심코 박하진을 걱정했고, 무심결에 박하진을 생각했고, 무의식중에 박하진을 보며 웃었다는 것을.
무심코, 무심결에, 무의식중에.
이 말들의 의미는 결국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진에게 스며들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인정해야 할 때였다. 내딛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동안 부족했던 용기가 도현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 가시 하나하나가 물음을 던졌다.
‘박하진이 걱정되니?’
‘박하진이 생각나니?’
‘박하진이 보고 싶니?’
‘동정이니? 연민이니?’
그러다 결국, 끝내 튀어나온 물음 하나.
‘아니면, 사랑이니?’
언제나 그렇듯, 답하지 못한 물음의 끝엔,
“이번엔 안 늦어서 다행이야.”
박하진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마음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사랑이었다.
“하진아.”
“…….”
“내가 너 좋아해.”
품에 안은 하진이 자그맣게 떨었다. 뒤엉킨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일렁이는 하진의 눈동자를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도현은 제 손을 하진의 눈 위로 덮었다. 그리곤 나지막하게, 하지만 단단하게 제 진심을 토해냈다.
“나는 그냥….”
“…….”
“그냥 널 좋아해서 그런 거야, 하진아. ”
“…….”
“그때도, 지금도 그냥… 그래서… 그런 거야.”
도현은 느꼈다. 제 손바닥을 적시고 있는 것이 하진의 눈물이라는 것을. 일순간 머리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그 눈물의 의미가 두려웠다. 그게 덜컥 겁이 나 도현은 하진의 눈동자를 가린 제 손을 치울 수 없었다. 파들거리는 하진의 속눈썹이 도현을 무섭게 찔러왔다.
“…야.”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진이 도현을 불렀다. 이윽고 하진은 저와 도현의 사이를 가로막던 손을 치우곤 온전히 도현과 시선을 얽었다. 하진의 눈동자엔 도현이, 도현의 눈동자엔 하진이 그 안을 채우고 있었다. 덕지덕지 눈물 자국이 묻은 하진의 눈두덩이를 도현이 문질렀다. 그 온기를 느끼며 하진은 도현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맞췄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정하자.
“나도.”
“…….”
“나도 너 좋아해, 우도현.”
툭-.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하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의 원인은 하진조차 알 수 없었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도현을 향한 원망도, 미움도 아니라는 것을. 도현의 마음과 같은 형태의 그것은 역시,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쿵. 쿵. 맞닿은 심장이 수선스럽게 들끓었다. 비등점에 도달한 마음은 이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솟아올랐다. 언제부터 끓기 시작했는지, 어쩌다 이렇게 펄펄, 끓게 되었는지. 표면만 봤을 때는 아무 티도 나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사실은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데워지고 있었을 텐데. 서로에 의해서 조금씩 느리게 데워지던 마음은 그렇게 물이 비등점에 도달했을 때처럼 순식간에 표면 기포를 생성하며 이토록 하진과 도현을 펄펄, 끓게 만든 것이다.
“박하진, 너….”
수증기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 하진은 가만히 도현을 눈동자에 들이곤 뒷말을 기다렸다. 어떤 말을 할까.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좋아할까. 아니면, 언제부터였냐고 질문을 던질까. 그것도 아니면 좋아한다고 한 번 더…
“충격 많이 받았구나. 혹시 머리 아파? 막 지끈거리고 지금 상황이 뭔지 모르겠고 그래?”
“…뭐, 뭐?”
심히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하진의 예상에도 전혀 없던 전개라 하진은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현이 ‘역시나’라는 얼굴로 하진의 이마와 제 이마에 번갈아 손을 올려 본다. 두 눈동자에는 거짓 없이 걱정을 한 아름 얹은 채.
“하진아, 괜찮아. 너 지금 충격 때문에 잠깐 정신을 놓은 거야. 괜찮아, 다 괜찮아.”
하진은 제 머리통을 어루만지는 도현의 손길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새끼, 미쳤네. 정신 놓은 건 내가 아니라 넌 거 같은데. 하, 참나. 눈동자를 가득 채우던 눈물이 쏙 사라질 만큼 어이가 없었다.
“나 누군지는 알겠어?”
그리고 거기에 도현이 기름을 부었다. 미친. 하진이 채 삼키지 못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 우도현….”
“아, 다행이다. 난 기억하는구나.”
도현은 정말 기뻐하고 있었다. 이를 보는 하진은 속이 터지다 못해 뭉그러질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간신히 끓은 몸과 마음이 확, 식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순수하게 제 등을 토닥이는 도현을 하진이 떼어냈다. 멍청한 우도현한테는 백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행동하는 게 낫겠지.
쪽-.
이윽고 경쾌한 소리가 둘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뭐, 뭐야?”
도현이 멍한 얼굴로 제 입술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금 뭐가 부딪친 거지? 박하진 입술이 여기에?
“미친놈아. 나 너 좋아한다고.”
“…….”
“박하진이 우도현을 좋아한다고요.”
입술의 촉감은 진짜였다. 그러나 하진이 내뱉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박하진이 우도현을 좋아한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근데 박하진이 먼저 뽀뽀하는 것도 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나. 그럼 이 모든 게 다 꿈? 어째 도현은 점점 혼란의 늪으로 빠져갔다.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하진이 도현에게 한 번 더 입술을 부딪쳤다.
쪽-. 그와 동시에 도현의 귓가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진짜네.
“너 나 좋아한다고?”
“어.”
“나도 너 좋아하고?”
“어.”
이로써 명확해졌다. 우도현이 박하진을 좋아한다. 박하진도 우도현을 좋아한다. 둘은 서로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좋아해, 박하진.”
낮은 음성이 거역할 수 없게 하진을 붙잡았다. 제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하진을 보고 있자니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 도현은 곧바로 새가 모이를 먹듯이 쪽쪽, 하진의 입술을 쪼아댔다. 하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도현의 뽀뽀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 미친. 너무 귀엽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꾸욱, 하진에게 입술 도장을 찍곤 하진의 양 볼을 움켜쥐어 시선이 자신을 향하도록 올렸다.
“하진아. 진짜네. 이거 꿈 아니다, 그치?”
“얼굴이라도 한 대 맞아야 믿겠어?”
“어, 그럼 입술로 맞을게.”
하진이 반박하려 입술을 벌린 그 순간을 도현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흐읍. 놀라 들이마신 숨에 도현의 숨이 섞여 들어왔다. 그 뜨거운 숨이 끈적한 침과 함께 하진의 입안을 구석구석 침투했다. 아래가 열감으로 뻐근해졌다.
하아, 하아. 숨은 점점 가빠졌다. 일전에도 느꼈는데 역시 도현과의 키스는 설탕을 때려 부은 것처럼 달콤했다. 파트너 관계에서의 본능에 충실한 마구잡이의 키스가 아닌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마음에서 나온 키스가 달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뒤섞이는 숨마저 달았으니까.
“하진아.”
그 달콤함에 취해 의식은 몽롱해지고, 가느다란 신음 또한 희미해졌다. 끊어질 듯한 이성을 붙잡는 데에 온 힘을 쓴 하진은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림을 느꼈다. 흐읏. 하진의 다리 사이로 도현이 왼발을 집어넣은 채, 하진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그에 단단한 무언가가 묵직하게 서로를 짓눌렀다. 이내 혀의 놀림이 서서히 느려졌다.
“하진아.”
연신 하진을 부르며 입술을 뗀 도현의 다음 목적지는 하진의 귀였다. 귓바퀴에 바짝 붙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도현에 하진은 저절로 말꼬리가 늘어졌다.
“하읏. 왜애….”
하진이 꼼지락거렸다. 그럴 때마다 바위처럼 단단한 서로의 아래가 생생히 부닥쳤다.
“이거.”
도현의 손이 하진의 샤워가운으로 향했다. 사실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벗겨도 돼?”
도현은 하진이 대충 묶어놓은 샤워가운의 허리끈을 당장이라도 푸를 기세였다. 내리깐 시선엔 이미 하진의 가슴팍이 존재감을 내보였다, 감췄다 하는 터라 더는 기다리기 힘든 도현이었다. 하진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도현 앞에 하진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수줍게’였다. 입술을 앙, 다문 채로 눈동자를 굴리면서 수줍게. 적어도 도현의 눈동자엔 그리 비쳤다.
이내 도현이 천천히 허리끈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샤워가운 사이로 하진의 군살 없는 몸이 드러났다. 바다를 가르던 모세의 기적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냥 개소리다. 도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 벗겨도 돼.”
박하진은 알까.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얼마나 상대를 자극하고, 충동적으로 만드는지. 그래, 박하진이라면 알 것이다. 분명 이를 알고 이용하는 것일 테다. 그럼 우도현은 속수무책으로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것도.
도현이 하진의 어깨 위 샤워가운을 끌어내렸다. 툭. 중력을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샤워가운을 따라 도현이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자 투둑.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시야를 가득 채운 새하얀 살결의 향연에 도현은 굴복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박하진의 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미치겠는데 무슨 몸이 이리도 야해 빠졌는지.
키가 작은 편이 아니라 골격도 어느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타고난 뼈대가 얇은 건지 목덜미를 타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선이 너무 예뻤다. 적당히 붙어 있는 근육은 딱 슬랜더한 몸매에 잘 어울릴 정도였고, 그 아래로 뻗은 매끈한 다리는 당장이라도 깨물어 자국을 남기고 싶은 지경이었다. 게다가 검은 드로즈라니.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하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집요한 시선을 받아냈다. 도현의 시선이 닿는 곳곳이 화끈거렸다. 누가 제 몸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진이 도현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곤 우물거렸다.
“그만 봐.”
“더 볼래.”
“…싫어.”
아, 귀여워. 박하진이 부끄러움도 타는 모양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싫다고 말하면서, 손바닥은 움찔거리는 그 귀여운 간극을 직접 보고 싶었다. 도현이 제 눈을 가린 손바닥을 끌어내려 입술로 가져갔다. 그제야 다시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하진의 정수리도 귀여운데 얼굴은 얼마나 귀여울까.
도현이 부드럽게 하진의 턱을 쥐곤 들어 올려 눈을 맞추게 했다. 긴 속눈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 씨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엽다.
“존나 야해.”
도현의 나른한 음성이 달뜬 숨과 함께 하진의 손바닥을 점령했다. 마주친 눈동자가 색기로 가득 찼다. 옥죄듯 시선을 하진에게 고정한 채, 도현이 손을 하진의 드로즈로 가져갔다. 드로즈 위로는 이미 몽골몽골하게 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흑. 너도 벗어.”
도현은 셔츠에 바지까지 다 입고 있으면서, 저만 벗고 있는 게 어쩐지 억울해진 하진이 도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도현이 드로즈에서 손을 떼어내곤 액이 묻은 중지를 핥으며 말했다.
“벗겨줘.”
하, 미친. 하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열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더는 참기 힘든 하진이 먼저 도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을 열고 혓바닥이 뜨겁게 뒤얽혔다.
온 정신을 혀끝에 집중하면서도 하진은 도현의 탄탄한 상체를 손으로 매만지며 셔츠 단추를 찾았다. 그리곤 그대로 하나하나 푸르니 그에 맞춰 도현이 팔을 아래로 뻗었다. 순식간에 벗겨진 와이셔츠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아, 침대로 가자.”
쿵. 쿵. 쿵.
여유 따윈 없어진 지 오래였다. 계속해서 입술을 붙인 채, 도현이 우악스러운 발걸음을 뗐다. 거칠게 헤집어지는 입안은 이상하리만치 달고, 부드러웠다. 단물이 빠질 때까지 물고 빨고 싶을 정도였다.
하아. 한 손은 단단히 하진의 뒤통수를 잡은 도현이 숨을 고르기 위해 침실 벽으로 하진을 밀었다. 잠시 떨어진 입술 새로 도현이 능글거리며 하진을 불렀다. 덕분에 감고 있던 눈을 뜬 하진의 시야가 상아색의 근육으로 뒤덮였다.
“박하진.”
습한 목소리가 귓가에 퍼지는 순간, 도현이 단숨에 하진의 드로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막을 틈도 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 읏….”
“왜 벌써 이렇게 젖었어.”
“…흐으.”
“응?”
미끄러운 성기가 도현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더운 신음이 공간을 꽉 채웠다.
“몰라, 씨발…흣.”
“하아…. 욕 더 해주라. 더 꼴리니까.”
“변태 새끼….”
작은 감각에도 예민해진 하진을 아는 건지 도현은 계속해서 하진을 애태우기만 했다. 보다 못한 하진이 제 드로즈에 손을 올리자 도현이 찰싹, 하진의 손을 쳐냈다.
“벗고 싶어?”
“씨발, 그걸 말이라고…!”
“벗겨달라고 애원해 봐.”
도현이 하진의 성질을 돋웠다. 못 할 줄 알고? 하진은 망설임 없이 도현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곤 철컥, 능숙하게 도현의 바지를 벗겼다.
이제 공평해졌다. 드로즈만 걸친 나체의 몸이.
바지가 사라지자 나타난 도현의 드로즈는 하진 못지않게 반질거렸다. 그 위로 하진의 달뜬 혀가 액을 쓸었다.
“큿…. 뭐해.”
이미 드로즈 밖으로 튀어나온 성기가 터질 듯이 부풀어있었다. 그 벌어진 틈새로 하진이 도현의 드로즈 끝을 치아로 물었다. 하진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던 도현이 제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애원해 보라며.”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진에 이미 부풀 대로 부푼 도현의 성기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하진이 입으로 드로즈를 내리 끌었다. 닿는 숨이 뜨거웠다. 박하진은 진짜 대단한 놈이다. 사람을 이렇게 미친 변태 새끼로 만들다니.
“하, 씨발. 나도 못 참겠다, 이제.”
그 말을 끝으로 도현이 거칠게 하진을 일으키곤 그대로 안아 들었다. 발밑에 채는 드로즈를 멀리 차버리며 두 손으로 하진의 엉덩이를 받쳤다. 얇은 드로즈 위로 움직이는 도현의 손이 하진을 더욱 애태웠다. 흑, 하진이 도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신음을 참았다.
하진의 등이 침대 시트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다리가 천장으로 치켜 들렸다. 하진의 드로즈가 단숨에 벗겨졌다. 눈앞에 드러난 성기의 무모한 자태에 도현의 욕망이 펑, 폭발해버렸다. 이게 박하진이 일전에 말했던 잘 빠진 바나나 모양인가. 하, 씨발. 바나나 속살 같긴 하네.
딱 박하진스럽다. 존나 사랑스러워.
하진이 도현의 목덜미에 손을 걸고 아래를 보챘다. 좁혀진 거리에 다시 입술이 부딪혔다. 맞닿은 성기에서 질척거리며 마찰음이 발생했다. 혀를 섞으며 도현이 하진의 척추를 쓸어내리자 하진이 열띤 신음을 뱉어냈다.
“하윽!”
여유 없이 키스를 퍼붓던 도현이 입술을 떼었다. 코끝에서 뒤엉키는 뜨거운 숨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서로의 틈을 메웠다.
눈을 꼭, 감고는 처음처럼 긴장감이 역력한 하진의 얼굴을 보자 푸흐, 간지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마에 닿는 웃음에 하진이 바들거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 씨발. 왜 웃어.”
아, 이제 알았다. 박하진은 부끄러우면 입이 더 거칠어지는 모양이다. 귀여워. 사랑스러워. 예뻐. 온갖 주책맞은 단어들을 떠올리며 도현이 하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역시 그중에서 제일은.
“좋아해.”
난데없는 사랑 고백에 심장이 귓가를 때릴 정도로 쿵쿵, 울렸다. 한 줌의 재가 될 것처럼 귀가 새빨갛게 타들어 갔다. 이미 사라져버린 이성 탓에 하진은 뭐라 대꾸도 못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를 놓칠 리 없는 도현이 다시 입을 열고 혀를 얽었다. 그러면서 한 손은 하진의 귓불을, 다른 한 손은 가슴팍의 돌기를 매만졌다. 아윽, 제 몸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하진의 흥분은 배가 되었다.
어느새 목울대로 옮겨 간 도현의 입술이 열기를 토해냈다. 아! 혓바닥이 볼록 튀어나온 목울대를 쓸자 하진은 그대로 자지러졌다. 가뜩이나 예민한 성감대가 도현의 열감으로 인해 한껏 달아올랐다. 하진이 고개를 쳐들었다. 미치겠다. 이렇게 전희가 길었던 적이 있었나. 하진에게 섹스는 그저 성욕을 배출하는 게 목적인 행위이다. 그러니 섹스하기 위해 만나는 관계에선 전희란 중요치 않았다. 그런데 우도현은 온갖 정성으로 몸을 살살 달래주며 손길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았다. 이런 게 사랑을 나누는 진짜 섹스인 건가.
흐윽. 뭐든 일단 뭉근해지는 아랫배가 죽을 맛이었다. 자꾸만 서로의 성기가 미끈하게 스쳐 애가 탔다. 빨리 만져달라고, 박아달라고 하고 싶은데 우도현의 느릿한 손놀림이 주는 쾌감은 또 그거대로 너무 좋아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우도현이 입을 맞추는 곳마다 휘몰아치던 흥분은 유두를 머금는 순간 극에 달했다.
“하아, 그만, 넣, 윽, 어.”
도현은 혀로는 집요하게 하진의 돌기를 문지르면서, 손으로는 협탁을 열어 젤과 콘돔을 꺼냈다. 쭈욱, 도현이 그대로 하진의 아랫배 부근에 젤을 짰다. 차가운 젤이 배에 닿자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린 하진이 몸을 비비 꼬았다.
“넣어달라면서 왜 앙다물었어.”
“...차가워.”
“금방 뜨겁게 해줄게.”
도현이 허벅지에 축축하게 입을 맞추며 하진을 달랬다. 이내 힘이 풀린 하진의 다리를 벌리니 선홍빛의 구멍이 뻐끔대고 있었다. 하, 존나 귀여워. 도현의 입술이 허벅지 사이를 점점 깊게 파고들다가 작은 구멍에까지 입술을 문댔다.
“아, 윽!”
그 생경한 감촉에 가쁜 숨을 토해내며 하진이 발끝을 오므렸다. 도현이 손가락에 콘돔을 끼우곤 하진의 구멍에 가져다 댔다. 그 귀여운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려던 도현을 하진이 막았다.
“아흐, 맨손으로…흣…쑤셔줘.”
“…하, 너 진짜.”
진짜 욕 나온다. 박하진, 진짜 욕 나오게 야하다. 이 붉게 물든 야한 얼굴을 최윤조 등등의 다른 새끼들이 봤다는 게 돌아버리게 짜증 날만큼. 도현이 물기 서린 제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거칠게 콘돔을 벗기곤 맨손으로 하진의 구멍 주위를 문질렀다. 넣어 달라는 건지 자꾸만 벌름거리는 입구에 도현이 검지와 중지를 단번에 넣었다.
“흣!”
순식간에 제 속으로 파고든 도현의 손가락에 하진이 허리를 튕겼다. 우도현의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찌걱대며 내벽을 긁었다. 젤이 스며든 탓에 소리가 더욱 질척였다.
“꽉 물었네.”
“흐윽.”
“응? 하진아, 나 손가락 잘리겠어.”
손가락 관절에 따라 하진의 안쪽이 조여들었다. 두 개도 빠듯한데 어쩌지.
“아파?”
도현은 하진이 아프다면, 여기서 그만둘….
자신은 솔직히 없고, 조금 더 공을 들여 부드럽게 아래를 풀어주려 했다.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박하진이 먼저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얹고는 한 손으로 구멍을 꾸욱, 눌렀다. 그에 좁혀있던 구멍이 조금 더 열렸다.
“…더, 더 넣어줘.”
“돌아버리겠네, 씨발.”
뭘 참고 말고의 겨를도 없이 도현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제 아래에서 나른한 눈동자를 하고선 넣어달라고 보채는 박하진을 보며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냐고.
도현이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꿀쩍대며 먹혀들어 가는 제 손가락을 보다가 끈적한 점액이 흐르고 있는 하진의 성기 끝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할짝. 혓바닥으로 귀두를 핥으니 읏, 순간 하진의 허리가 치솟는다. 도현의 혀가 집요하게 성기를 먹으면서 아래로는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성기를 뿌리까지 입안에 삼킨 도현이 기둥을 사탕 빨 듯 부드럽게 빨았다.
그 순간, 꺼떡, 하진의 성기가 반응을 일으켰다.
“아, 하윽, 갈 거 같아. 그만, 학.”
하진이 도현의 머리칼을 쥐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도현은 더욱 진득하게 혀를 문질렀다. 동시에 손가락도 하진의 스팟을 찾아 헤맸다. 자꾸만 달싹거리는 허리를 멈출 수가 없던 하진은 손가락이 어느 극점을 누르자 쾌감에 몸부림쳤다.
“흐읏!”
탄성과 함께 하진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아. 하아. 쾌락에 젖은 숨을 가쁘게 토해냈다. 열기가 줄어들자 아래로 시선을 내리깐 하진은 도현의 입안을 점령한 정액과 눈이 마주치곤 기겁했다.
“미친놈아, 뱉어!”
하진이 벌떡 일어나 도현 앞에 제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나 도현은 애초에 뱉을 생각이 없었다. 박하진 꺼면 뭐든 다 좋으니까. 다 갖고 싶으니까. 도현은 꿀꺽, 하진의 정액을 삼켜냈다.
“달다.”
“미친 새끼.”
우도현은 진짜 미친 새끼다. 남자랑 처음인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정액까지 먹을 생각을 하지?
“박하진한테 미친 새끼인가 보지.”
도현이 하진의 귀를 물곤 장난스레 속삭였다. 이젠 우도현의 사소한 행동도 가볍게 치부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게 달콤하게 사랑을 지저귀고 있으니 저절로 마음이 동했다. 벅찬 가슴이 울렁댔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보답해주고 싶었나 보다.
“큭, 뭐해, 박, 하진,”
“이제 다른 거 먹으라고.”
하진이 호기롭게 도현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곤 도현의 성기를 그러쥐어 제 입구 주변에 문질렀다. 두께감이 하진의 한 손을 꽉 채웠다. 어째 아까보다 두 배는 커진 듯해서 하진이 잠시 주춤거렸다.
“이거 지금 고문인 거 알지?”
“잠깐만.”
이 상황에 잠깐이 말이 되나. 순식간에 도현이 포지션을 바꿨다. 곧 터질 것 같은 제 성기를 쥐곤 하진의 입구에 꾸욱, 누르며 귀두로 입구를 서서히 늘렸다. 끝부터 전해져오는 조임에 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하, 박하진, 힘 풀어. 다쳐.”
도현의 손가락이 입구를 벌렸다. 하진의 신음이 더욱 야릇해졌다.
“아, 너무 커. 이거 안 들, 읏.”
그리곤 단번에 하진의 배를 가르듯이 파고들었다.
“흐읏!”
아찔한 감각에 하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아니다. 이건, 그냥 다른 새끼들 거랑 차원이 달라서 그런 거다. 하으, 존나 아파. 근데 또 존나 좋아.
하진의 안쪽이 도현의 성기를 세게 물었다.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꽉, 조여든 하진을 보며 도현이 하진의 종아리를 혀로 쓸어올렸다. 순간 아래로 내리깐 시선이 우도현과 얽혔다. 흥분으로 뒤덮인 눈빛이 진득하게 하진을 쫓았다.
“말했잖아. 키만 큰 거 아니라고.”
도현이 발목을 꽉 붙들곤, 느리게 허리 짓을 시작했다. 하진의 전부를 훑고 나오려는 듯 느른하게 귀두까지 빼낸 성기를 천천히 다시 밀어 넣었다. 그 느린 움직임이 만들어낸 소리는 습기를 머금고 찌걱, 찌걱 방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하으윽, 빨리 움직여, 줘.”
하진의 고통과 흥분으로 뒤섞인 신음이 도현을 보챘다. 좀 전보다 빠르게, 더 깊게 박아넣자 쾌감에 젖은 하진의 허리춤이 일순간 쳐들렸다. 그로 인해 서로의 상체가 맞부딪혔다. 하진이 단단한 도현의 등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찾았다. 도현은 하진의 턱을 그러쥐곤 키스에 응했다.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격정적으로 혀가 얽혔다.
하아, 하. 숨이 차올라 하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도현의 입술이 하진의 뒷덜미로 향했다. 축축한 숨이 얇은 피부에 닿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했다.
“하진아.”
“…흑….”
“대답.”
“…왜애.”
“다른 새끼들이랑 할 때도”
“…….”
“이렇게 엉겨 붙었어?”
질문에 답할 겨를도 없이 도현이 제일 깊은 곳을 찔렀다.
“힉!”
도현의 골반이 퍽, 퍽 하진의 엉덩이와 부딪혔다. 살끼리의 마찰음이 커질수록 도현을 껴안은 하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물이 날 정도로 선득한 감각이었다.
“대답.”
“하아윽, 아니. 씨발, 너니까, 윽, 이러지.”
미친. ‘너니까’란다. 도현의 허리 짓이 격렬해졌다. 이건 박하진이 잘못한 거다. 여유롭게 하려고 했는데, 씨발. 여유는 무슨. 도현이 하진의 극점을 연달아 찔러댔다. 흣. 쉴 새 없이 상체를 밀어 올리는 도현에 하진이 금세 사정감에 이르렀다.
“아! 으, 좋, 악.”
하진의 손이 자연스럽게 제 성기를 쥐었다. 이미 성기 끝에선 흠뻑 흐른 점액이 실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손바닥이 귀두를 문지르자 흥분이 끝까지 차올랐다. 힘이 바짝 들어간 하진의 손위로 도현이 제 손을 포개었다.
“…큿. 주어, 목적어 빼지 말고 뭐가 좋다고?”
“아으, 너, 미친, 흑 새꺄.”
“누가?”
“박, 하진이, 하윽! 우도, 현, 응!”
“…하, 너 진짜 존나 야한 거 알고 일부러 이러지?”
“뭐래, 씹, 악!”
그 순간, 도현이 상체를 뒤로 쭉 뺐다가 단번에 뿌리까지 박아넣었다. 덩달아 쳐들린 하진의 허리가 곱게 휘었다. 그 틈에 도현이 손을 집어넣었고 하진을 고정했다. 턱, 턱. 도현이 허리춤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곤 꽈악, 하진의 속이 도현의 성기를 감쌌다.
“나, 나 갈 것, 아, 하.”
삐거덕거리는 침대 소음과 쿨쩍거리는 야릇한 소음이 뒤엉킨 공간 속에서 허리 짓이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아, 갈, 거, 흐앗!”
“…하아, 하.”
파르르, 하진의 성기 끝이 정액을 쏟아냈다. 그와 동시에 도현 또한, 제 성기를 밖으로 빼내어 하진의 배 위에 울컥, 정액을 토해냈다.
두근. 두근. 심장의 울림이 귓가를 때렸다. 몽롱해지는 의식 사이로 도현이 제 아래 쾌락의 결정인 하진을 바라봤다. 온몸이 붉어져 가쁜 숨을 내뱉는 하진은 흐트러진 몸을 한껏 늘어뜨린 채 도현과 시선을 맞췄다. 박하진의 배 위에 싸질러 놓은 정액은 우도현의 것이었다. 그게 미치도록 야했다, 젠장.
하진의 위에 쓰러지듯 엎어져 입술을 비볐다. 꺼떡대는 두 성기가 꾸욱, 서로를 짓눌렀다.
“하진아.”
“하아, 왜.”
흥분으로 점철된 숨이 습한 공기를 더욱 열띠게 만들었다. 한껏 달뜬 공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안정을 취해가던 하진의 아래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기 전까지는.
“너 씨발….”
도현의 성기가 마치 처음처럼 벌떡 일어나있었다. 하진의 욕지거리에 도현이 능청스러운 손길로 하진의 유두를 빙글, 돌렸다.
“못다 한 십 년 치 해야지.”
***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네 번째? 다섯 번째? 했을 때쯤 마지막이라고, 이제 씻겨주겠다며 욕실로 따라오던 우도현을 막았어야 했다.
“우리 하진이 부끄럽구나.”
“… 야이… 씨발, 안 꺼져?”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세면대에 올라가 우도현에게 구멍을 보이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환한 조명 아래서 적나라하게 말이야.
“하진아, 구멍 분홍색 됐어.”
줄곧 움찔대던 입구를 감상하다 도현이 손가락 하나를 그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그러자 하진의 입에선 막을 새도 없이 흐읏, 젖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짜릿한 감각이 다리를 스쳤다. 머리가 핑 돌았다.
“흣, 야, 안 빼? 야.”
히익!
하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도현은 더욱 집요히 하진의 속을 파헤쳤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찌걱대는 소리가 욕실 천장에 부딪혀 한껏 크게 울렸다. 찌걱. 찌걱. 찌걱. 야한 소리에 맞춰 자꾸만 들리려는 허리를 하진이 간신히 참아냈다. 아, 또 설 것 같….
응? 돌연 단단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스쳤다. 그에 하진이 쳐든 시선을 내리깔고 아래를 봤다. 그리고 1초 만에 후회했다. 그냥 보지 말걸. 우도현, 이 새끼가 또 세웠다. 조만간 나라도 세우겠다, 씨발.
이윽고 도현이 하진의 성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오른손은 하진의 속에 넣은 채, 도현은 왼손가락을 움직여 하진의 기둥 위를 타고 올랐다.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 가며, 딱딱해진 성기 위를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애가 타도록, 아주 느릿하게.
“그마은, 읏. 해.”
다 뭉개진 발음으로 하진의 잇새에선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그 순간, 고점에 도달한 손가락이 빙글, 귀두를 문질렀고, 흐악! 하진은 단번에 신음을 내질렀다. 동시에 하진의 구멍 속을 점령하던 손가락이 빠지면서 주륵, 질펀한 점액이 흘러나왔다.
“이게 뭐야, 하진아.”
도현이 그것을 잔뜩 손가락에 묻히며 말을 이었다.
“내 좆물 맛있었어?”
“…흐윽….”
“더 줄까?”
분명 끝은 물음표였지만, 도현에게 하진의 대답 따윈 중요치 않았다. 질척한 손가락으로 도현이 하진의 성기를 쥐니 그 끈적함이 마치 젤을 한가득 뿌린 것 같았다. 근데 그보단 더 뜨겁고, 더 끈적거리는 뭐, 그런.
“더, 더 줘.”
애타는 감각이 하진을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반쯤 풀린 눈동자가 도현을 갈구했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옆으론 뜨거운 침이 흘렀다. 그리고 이 모습을 구석구석 눈에 담던 도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하진의 입술을 삼켰다. 이미 녹을 때로 녹은 혓바닥이 입속에서 뜨겁게 뒹굴었다. 하아, 하진아.
“이건 네가 유혹한 거다.”
그 순간, 도현은 자비 없이 한 번에 하진에게 성기를 박아넣었다.
“하읏! 깊, 읏. 어!”
내벽을 가르는 고통에 하진이 울먹였다. 고통도 고통인데 쾌락이 너무 짙어서 하진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도현의 것을 뿌리 끝까지 삼킨 하진의 구멍이 움찔거렸다. 도현이 살살 아래를 움직이자 하진이 발바닥으로 도현의 가슴팍을 밀었다. 윽, 잠깐, 만. 아니, 하진아. 눈꼬리에 방울 달아놓고 그런 소리 하면, 어떻게 멈춰. 너무 사랑스럽잖아.
하진의 요구대로 잠시 허리 짓을 멈춘 도현이 난데없이 하진을 그 상태 그대로 들어 올렸다. 놀란 하진이 양팔로 도현의 목덜미를 꽉, 껴안았다. 이내 중력을 이기지 못한 몸이 더 깊게 도현에게 박혔다
“앗, 읏. 야. 깊. 다고!”
“…하아, 깊기만 해?”
쪽쪽. 어린아이를 달래듯 도현이 하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니, 깊기만 한 게 아니고… 조금씩 허리 짓을 시작하는 도현에 하진이 뒷말을 삼킨 채, 얼굴을 파묻었다. 흐읏. 이건, 윽. 뭐야…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온 적이 없는데… 이건 너무…
“좋아.”
윽. 도현이 콰득,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하진의 젖은 목소리가 가져온 파장이란 너무 어마어마해서 도현은 실오라기만큼 남은 이성의 끈마저 놓칠 뻔했다. 이대로 미친 듯이 박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랬다간 하진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될 것 같아 참았다.
정말 참으려 했는데.
이런 노력을 알 리 없는 하진이 겁 없이 도현의 양 볼을 쥔 채, 맹렬히 키스를 퍼부어버렸다. 이윽고 하진은 제 속에서 도현의 것이 점점 부풀어감을 느꼈다. 내벽의 공간이 두껍고 단단한 성기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야… 너….”
“…….”
“잠, 깐. 앗. 그, 그렇게 걸으면 흣. 응!”
쿵쿵쿵. 도현이 우악스럽게 발을 뗄 때마다 더 깊은 곳을 찔러오는 탓에 하진은 본의 아니게 자지러졌다. 제 입에서 나올 법하지 않은 유약한 신음까지 흘리면서. 응, 응. 계속해서 터지는 신음을 막을 재간이 없던 하진은 아예 도현에게 제 몸을 맡겨버렸다.
“애교부리는 거야?”
“…으응.”
하진이 도리도리, 도현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아, 귀여워. 도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간 도현이 하진의 등을 벽에 붙였다. 우응, 차가워. 갑작스러운 냉기에 하진이 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툭, 발에 챈 무언가를 하진이 꾹 밀었다.
솨아아-.
“읏, 차가워….”
하진이 민 것은 샤워 꼭지였다. 후두둑, 머리 위에서 차디찬 물이 뿜어져 나와 흠뻑 두 사람을 적셨다. 일순간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큭. 하진아. 도현의 입에서 흥분이 터져 나왔다. 제 성기를 끊어 먹을 듯 세게 달라붙은 하진의 내벽 때문이었다.
“하…….”
그러나 끊어진 것은 도현의 실오라기 이성이었다.
“아! 빨, 라. 윽. 너무.”
퍽. 퍽. 도현의 여유 없는 허리에 하진의 비명이 마르질 않았다. 응, 거기! 읏, 좋. 아. 하진은 성기가 자꾸만 도현의 배에 문질러져 자극이 두 배였다. 물소리가 배경음이 된 채, 그 사이로 야한 소리가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찌걱찌걱. 탁탁. 찌걱. 탁탁탁.
높아진 속도와 반복된 행위 속에서 사정감이 끝까지 들어찼다. 복숭앗빛으로 붉게 물든 하진의 성기가 이젠 한계라는 듯 파르르 떨렸다.
“같, 같이, 흣, 갈, 래!”
하아, 하아. 도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진의 엉덩이를 쥐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곤 그대로 쑥, 하진을 내리박았다. 도현의 귀두가 정확히 하진의 스팟을 찔렀다.
“아앗!”
“하아……윽….”
하진과 도현이 동시에 쾌감을 부르짖었다. 흐으. 하진이 몸이 떨었다. 하얀 정액이 도현의 가슴팍을 적신 채였다. 달뜬 열을 방출하던 몸뚱어리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떨어지는 물로 인해 하진이 토해낸 정액은 금세 씻겨 내려갔다. 그 속에서 남은 건, 하진의 안을 뜨겁게 달군 도현의 정액뿐이었다.
“우리 하진이 홀딱 젖었네.”
“…….”
“위도 아래도.”
흐르는 물줄기가 하진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와 함께 축축한 도현의 음성이 하진을 간질였다.
***
아, 음. 잠결에 하진이 옹알이를 시전했다.
통창 너머로 햇볕이 내리쬐는 걸 보면, 오전은 훌쩍 넘은 것 같은데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짓눌린 것처럼 가슴이 이상하리만치 답답했다. 뭐지? 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몸만 살짝 뒤척이니 단단한 무언가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툭. 가벼워진 것도 잠시, 곧바로 그 무언가가 하진의 허리를 감싸 쥔다. 아. 그제야 하진은 제 옆에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자.”
다 갈라진 목소리가 낮게 목덜미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이게 뭐라고 부끄러워서 뒤돌아 우도현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깨지 않은 척, 다시 숨을 골랐다. 일정한 박자의 숨소리가 등에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푸흐.”
우도현의 웃음이 간지러웠다. 꼼지락거린 게 들통난 모양이었다. 일찍이 하진이 깬 걸 눈치챈 도현이 허리에 안착한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바짝 붙였다. 아, 이 새끼 아침부터 건강하네. 궁둥이에 닿는 이물감이 몹시 적나라해서 몸을 살짝 앞으로 뺐더니 그새를 못 참고 도현이 다시 하진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거리지. 차라리 마주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한 하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판단 미스였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를 가득 메운 맨살에 감각이 저절로 곤두섰으니 말이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맨살을 비비며 물고 빨았으면서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 괜히 가슴이 끓었다. 눈길을 둘 곳을 찾아 눈동자를 굴리다가 도현과 시선이 부딪쳤다.
“부끄러워?”
품 안에 가둬둔 하진이 고개만 들곤 아래에서 저를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 눈동자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부끄럽냐고 질문했지만, 정작 부끄러운 건 도현 자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박하진의 하얀 살결을 보고, 만지고, 이게 정녕 꿈은 아닐까 싶다.
“나 처음이다.”
“뭐가?”
“섹스하고 눈 떴더니 상대방이 옆에 있는 거.”
의외의 대답에 도현이 눈을 번쩍 떴다. 하진이 내비친 눈동자는 진실했다. 그 진실함 속에 도현이 들어있었다.
“파트너는 딱 그 정도거든. 성욕 배출구로 서로를 찾고, 목적 달성하면 끝. 뒤처리 알아서 하고, 각자 쿨하게 갈 길 가는 거지.”
하진이 내뱉는 무미건조한 말이 도현에게는 무척이나 절절하게 들렸다. 공허함만이 남는 외로운 관계에서 박하진이 느꼈을 감정이 처음엔 저렇지 않았겠지. 익숙해지고 무뎌져서 저렇게 무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도현은 하진을 더욱 꽉,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박하진의 공허가 채워지길 바랐으니까.
“나는.”
“…….”
“나도 파트너야?”
차마 하진의 눈을 보고는 물을 용기가 없어 정수리에 대고 말하니 하진이 몸을 부르르 떤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박하진 뇌 굴리는 소리는 들리는 듯했다. 숨을 내쉬며 머뭇거리던 입이 한참이 지나서야 떼어졌다.
“뒤처리 네가 했지?”
“응.”
“그럼 파트너 아니야.”
“그게 뭐야. 그럼 뭔데?”
하진의 엉뚱한 대답에 도현이 부루퉁하게 물었다. 진지하게 물었던 건데, 박하진한테는 가볍게 들렸던 건가. 그래서 저렇게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건가. 어쩐지 조금 상처였다.
뒤이어 들려온 말이 그 상처에 연고를 듬뿍 발라줬지만.
“애인?”
아, 미친.
“존나 귀엽다, 진짜.”
도현이 하진의 정수리에 대고 웅얼거렸다. 그로 인해 하진의 귀도 붉어졌다. 우도현, 저럴 때마다 도무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죽을 것만 같은데 무슨 대꾸를 하랴.
하진이 못 들은 척 도현의 가슴팍을 밀쳤다. 아, 이 새끼 옷 안 입고 있….
씨발. 지금 보니 우도현이나 저나 똑같이 맨살의 향연이었다. 이를 인식하자 시선이 자연스레 우도현의 넓은 가슴팍으로 향했다. 지난밤 몸을 뒤덮었던 끈적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보송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보면 부끄러운데.”
“지랄한다. 배고파. 밥이나 먹자.”
괜히 짝사랑 상대 몰래 보다가 들킨 사람처럼 뻘쭘해진 하진이 머쓱함에 더욱 퉁명스럽게 말했다. 배고픈 건 사실이라 몸을 일으키며 배를 문지르니 도현이 벌떡 일어난다. 아마도 박하진 배고프단 소리에 일어난 것 같다. 근데 놀랍게도 일어난 게, 우도현만은 아니었다. 벌건 대낮에 완연한 나체인 우도현의 아래가 건강하게 꺼떡대고 있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하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 지금 존나 숭해.”
“이 숭한 걸 어젠 좋다고 받아먹었으면서.”
미친놈이 말도 존나 숭하게 한다. 하진이 도현의 말에 냅다 베개를 던졌다. 능청스러운 도현의 입꼬리 아래로 주륵, 베개가 떨어졌다. 빨리 본인이라도 먼저 옷을 입고 싶은데 망할 드로즈가 어디 처박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하진은 이불을 몸에 둘둘 만 채로, 침대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툭, 발에 챈 검은 실오라기에 하진이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거 못 입을걸.”
젠장.
“우리 하진이가 좀 젖었어야….”
퍽-! 궤도를 그리며 날아간 검은 물체가 도현의 가슴팍을 명중시키곤 처참히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다가 말고 중간에 걸렸다. 마치 나뭇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안착한 것처럼 사뿐히. 하진의 검은 드로즈는 도현의 위풍당당한 그것 위에 내려앉은 채였다.
“이 변태 새끼야! 옷 좀 입으라고!”
아, 큭큭. 큭큭큭. 하진의 마음도 모르고 도현은 그저 웃었다. 본인 꼴이 제법 웃겨서. 그리고 하진이 붉어진 볼로 화를 내는 게 제법 귀여워서.
“변태 새끼는 먼저 씻고 나올게요.”
“…….”
“자기.”
찡긋. 하진에게 윙크한 도현은 또 맞기 전에 얼른 욕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혼자 본인이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자기, 라고, 했다.
으으으! 도현이 몸을 베베 꼬았다. 눈꼬리와 광대가 곧 조우할 지경이었다.
***
메시지를 확인하는 도현 옆으로 하진이 머리를 들이밀고, 같이 내용을 읽었다. 샤워가운을 걸치곤 침대 머리에 나란히 등을 기댄 모습이 퍽 연인 같은 건 둘째치고, 메시지 내용이 너무 서프라이즈라 하진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김 비서님 : 이쯤 일어나실 것 같아 룸서비스 시켰습니다. 방 문고리도 확인해보세요.]
놀란 건, 도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완벽한 비서를 어쩌면 좋을까. 칭찬에 야박한 하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사실상 여기서 김 비서의 능력 평가는 끝난 거다. P.E.R.F.E.C.T. 완전 펄쀅트.
“연말 보너스 두둑이 넣어드려라.”
그렇게 말하면서 하진이 침대 밖으로 도현을 밀었다. 이어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아아. 문고리 확인해보라고? 찰떡같이 알아들은 도현의 물음에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아.”
“응?”
“김 비서님 선견지명 있나 봐.”
도현이 문고리에 걸린 쇼핑백을 가져 와 하진 앞에서 뒤집자 후두둑, 내용물이 쏟아졌다. 각양각색의 패턴과 더불어 다양한 사이즈를 뽐내고 있는 그것들은 다름 아닌 새 속옷들이었다.
“와, 이게 다 뭐야.”
대박이다, 진짜.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하진은 눈앞에 쌓인 속옷 산으로 손을 뻗었다. 도현 말대로 김 비서는 선견지명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고서야 하진과 도현이 거사를 치를 것을 대비해 미리 새 속옷을 준비해둘 수가. 게다가 어제 같은 정신없는 와중에 도현 몰래 방 문고리에 걸어 두기까지. 이게 선견지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당분간 속옷 살 일 없겠다.”
그렇게 말한 하진의 손에 웬 드로즈 하나가 채였다. 화려한 호피 무늬가 인상적인 그것은 정말 너무 하진 스타일이 아니어서 하진은 그걸 즉시 멀리 던져버렸다. 그런데 뜻밖에 도현이 호피 드로즈를 집어 올렸다. 그리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제 앞에 대어본다.
“취향 참….”
아무래도 저게 우도현 취향인 모양이다. 취향 존중은 하는데 안 맞는 건, 안 맞는 거라 하진이 무심결에 중얼거리니 도현이 대번 속옷을 입고는 하진 옆에 앉았다. 하진은 어제와 같은 검은색 드로즈를 선택한 뒤였다.
“내 취향, 넌데?”
“아침부터 비위도 좋다. 그런 소리가 잘도 나오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하진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빼곤 종아리까지 속옷을 올렸다. 이제 일어나 단번에 입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왁, 뭐야!”
이처럼 도현이 갑작스레 하진을 들어 올리지만 않았어도 하진은 벌써 속옷 착용을 완료했을 것이다. 강제적으로 도현의 어깨에 들쳐 매진 하진이 발을 동동거리자 툭, 하고 속옷이 떨어졌다. 그 덕분에 하진은 다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되었다.
“사실인데.”
“야, 일단 나부터 내려놓고 말해.”
하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도현의 맨살에 아래가 짓눌리면서 자극이 오니 하진은 실로 죽을 맛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은 내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봉긋 솟아있는 엉덩이에 냅다 뽀뽀를 갈기는 꼴을 보아하니 일부러 저러는 것 같기도 하다.
“너라니까. 내 취향.”
“아, 알았어. 알았다고! 입술 좀 떼, 미친 새끼야!”
읏차. 하진의 격한 반응에 한 번 더 쪽 소리 나게 입술을 찍은 도현이 하진을 내려주었다. 간신히 땅에 발을 디딘 하진은 곧바로 도현의 정강이를 깠다. 윽! 어찌나 센지 도현은 신음과 함께 그대로 침대에 엎어지고야 말았다.
“야.”
그와 동시에 하진이 도현의 위에 올라탔다. 정확히 도현의 호피 드로즈 위에 엉덩이를 붙인 하진이 살짝씩 허리를 튕겼다. 윽, 야. 뭐해. 갑작스러운 유혹에 도현이 속수무책으로 제 것을 세웠다. 하진의 아래 또한, 이미 단단해진 상태로 도현의 아랫배를 간질이고 있었다.
“너 때문이야.”
“…….”
“네가 책임져.”
색기 묻은 말투가 도현을 자극했다. 제 위에 올라탄 박하진이라니. 분명 어제 봤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유혹하는데 안 넘어갈 수가 있을까. 매번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하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부정맥으로 일찍 명을 다할지도 모르겠다.
“평생 책임질 테니까.”
그래도 그게 운명이면 받아들여야지.
도현이 엎어진 상체를 일으켜 하진과 마주 앉았다. 그리곤 하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같이 살래?”
“…….”
“…….”
“개수작 부린다.”
***
“빨리 들어와. 모기 들어온단 말이야.”
먼저 문을 열고 캐리어를 집안으로 밀어 넣은 도현이 하진을 재촉했다. 순간, 손목을 끌어당기는 힘에 하진이 어정쩡한 자세로 도현의 집에 발을 디뎠다. 묘한 어색함이 자신을 휘감자 하진은 괜히 도현의 말꼬리를 잡았다.
“한겨울에 모기가 어디 있어.”
“없지. 그냥 너 갈까 봐 재촉한 거였어.”
“딱 일주일만이야.”
“네네.”
하진의 단호함에 도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답했다. 망할. 호텔에서 그렇게 단호하게 잘라냈는데 왜 자신이 지금 우도현 집에 와있는 건지, 우도현이 제 짐을 들고 있는 건지, 하진은 이마를 짚었다.
그래, 맞다. 우도현이 제시한 입주 혜택이 너무 좋았다. 호텔과 달리 무상 숙식 제공에 본인 옷 제공. 여기에 가장 혹했던 것은 집 여기저기를 누비면서 하는 ‘무제한 섹스’.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밥 먹다가 눈 맞아서 하는 섹스. 씻다가 분위기 잡혀서 하는 섹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하는 섹스. 장작 2개월에 걸친 금욕 생활 끝에, 섹스 천국이 열린 것이다.
이걸 뻔히 알면서도 주저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솔직히 말해서, 하진은 본인이 무서웠다. 원래도 성욕이 많은 편이라 주기적으로 파트너를 둔 것인데, 좋아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또 얼마나 황홀한지. 없던 성욕도 끓어 넘칠 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과 같은 집에서 산다고? 이건 뭐, 그냥 뇌한테 성욕에 지배당하라고 판 깔아주는 거잖아.
하진은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지. 절대 좆에 지배당하진 않을 테다.
“여기서 자면 돼.”
성큼성큼, 하진을 방으로 이끈 도현이 하진을 킹사이즈 침대에 앉혔다. 응? 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이지와 그린으로 꾸며진 방은 온통 무채색인 하진의 방과는 다른 포근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이건 뭐냐고. 왜 한 침대에 베개가 두 개나 놓여 있는데? 하진이 베개 하나를 집은 채 물었다.
“이건 뭔데?”
“베개.”
“아, 그거 말고. 베개가 왜 두 개냐고.”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이 말뜻을 이해하기까지 하진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도현의 싱글벙글, 순진한 얼굴이 자꾸만 생각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어, 그러니까… 사귀는 사이이니 한 침대에서 같이 자자는 개소리였다. 이는 곧, 하진의 성욕을 들끓게 만드는 소리기도 했다.
“집에 널린 게 방인데.”
“혼자 자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여기가 미국이야? 뭐, 씨발 갑자기 총이라도 맞고 뒤질까 봐?”
“그럴 수도 있겠네. 역시 같이 자야겠어.”
베개를 던지면서까지 표한 거부 의사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질리게 만들어야지.
“나 코 골아.”
“드릉드릉? 아, 귀여워.”
“이도 갈아.”
“빠득빠득? 아, 귀여워.”
“자면서 방귀도 막 뀌어.”
“뿡뿡? 아, 귀엽….”
하진이 기겁하며 단어가 완성되기도 전에 얼른 도현의 입을 틀어 막아버렸다. 이 짧은 순간, 귀엽다는 소리를 몇 번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 하물며 팬들도 이러진 않을 것 같은데.
“또 빨개졌네, 우리 하진이.”
도현이 하진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능글맞은 새끼. 혀 밑에 욕을 품은 하진이 도현을 한껏 노려봤다.
“너 일부러 이러지?”
어깨를 으쓱인 도현은 천연덕스럽게 제 손을 하진의 손 위에 겹쳤다. 스륵, 손가락 사이의 공간이 좁혀지며 자연스럽게 깍지가 끼워졌다. 이내 도현이 허리를 구부려 하진의 입술 위에 도장을 꾸욱, 찍는다.
“어. 우리 자기 반응 귀엽다니까.”
이게 자꾸만! 욱, 할뻔한 하진이 말을 삼켰다. 그래. 사귄다는 게 원래 이런 걸 수도 있다. 이렇게 사소한 거로 놀리고, 귀여워하고, 뭐 그런. 그러니까 우도현이 지극히 정상적인 걸 수도 있는 거다. 그렇다면, 바뀌어야 할 사람은 우도현이 아니라 박하진이겠지. 이렇게 애써 합리화한 하진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아주 작게, 지나가던 강아지도 못 들을 만큼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자, 자기야.”
못 들었겠지?
“…어?”
들었네, 젠장. 물론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듣길 바랐던 건 아니고. 아니, 듣긴 들어야 하는 말인데…. 아! 몰라!
“자기라고 불렀다, 왜!”
박하진 고질병 나왔다. 욱해서 다짜고짜 내뱉어버리기. 좀 전의 수줍음은 어디로 갔는지 하진이 당당하게 도현을 바라보며, 자기! 자기야! 라고 소리쳤다. 어떠한 무드도 없던 말이었지만, 도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자기래. 미친. 박하진이 나보고 자기래! 흥분한 도현의 감정이 널뛰었다. 자연스레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진이 아프다며 손가락을 빼려 했지만, 도현은 절대 놔주지 않았다. 어떻게 잡은 손인데, 어떻게 닿은 박하진인데 쉽게 놓을 수 있을 리가.
“하진아, 나 어떡하지.”
“또 뭐가.”
이윽고 도현이 배시시 웃으며, 하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 아무래도 박하진한테 미친 새끼 된 것 같은데.”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가볍게 전하지 않으면, 하진이 도망칠 것만 같았다. 혹시나 부담스러울까 봐. 그래서 영영 보지 못할까 봐. 10년을 안 보고 살았는데 이젠 안 보고 10분도 못 견디겠으면, 미친 새끼 맞겠지? 언제부터 이렇게 하진에게 전전긍긍하게 됐는지는 도현, 본인조차 잘 모를 일이었다. 다만, 얼핏 추측하기론 말이야.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한 거 같아.”
그런 것 같아, 하진아.
“계속 너 좋아했어. 친구? 우정 이딴 거 아니고, 나 그냥 너 좋아했던 거야. 너 좋아해서 네가 다른 새끼랑 있으면 눈 돌아갔던 거고, 네가 내 마음 몰라주니까 화 났던 거야.”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런 거더라.
도현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너무 있는 그대로의 진심 같아서 하진은 그저 도현이 그랬던 것처럼 손등에 입을 맞춤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나도 너 좋아했어. 나한테 먼저 손 내밀어 줬던 너를, 내 경계벽을 무너뜨린 너를, 날 지키려 애쓰던 너를. 어쩌면 너보다 먼저 내가 너를 좋아했을지도 몰라.
도현에게는 영원히 얘기하지 않을, 하진의 작은 비밀이었다.
***
모두가 잠든 시간. 해도 아직 자느라 고개를 내밀지 않은 새벽 4시였다. 하진 역시 갑작스럽게 재촬영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도현의 집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을 것이다. 도현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앞까지 바래다주면 안 돼?”
“이상하잖아.”
도현이 촬영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로변에 하진을 내려줬다. 누가 보면 이상하지 않겠냐고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하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가? 새벽 4시에 친구 좀 바래다줄 수 있지 않나. 다들 삶을 참 팍팍하게 산다.
“아니, 하진아. 막말로 너 고민채랑 사귀고, 나 여희나랑 사귀는 거 사람들이 다 아는데 누가 우릴 이상하게 보겠어.”
“먼저 갈 테니까 나중에 오든지.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든지 해.”
도현이 대답 대신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에 하진이 도현의 눈치를 슥, 보곤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자기야.”
응? 놀란 얼굴로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쪽, 소리가 귓바퀴 속으로 굴러들어왔다. 으응?
“갔다 올게.”
도현이 미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하진은 도망치듯 차를 빠져나왔다. 쾅, 문이 세게 닫혔다. 그 사이로 엿본 하진의 귀는 아주 새빨개져 있었다. 본인도 부끄러운지 촬영장으로 팔랑대며 뛰어가는데 폴폴,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이를 계속해서 눈에 담던 도현의 심장이 찌르르, 울어댔다.
“아, 존나 귀엽다… 진짜.”
참아 보려 했지만, 양손에 파묻은 주둥이가 기어코 주책을 떨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 들었다면 쌍욕을 퍼부었을 수도 있겠다. 그만큼 지금 도현의 상태는 박하진 귀엽다만 무한 반복 중인 대가리 꽃밭 상태였다.
박하진은 도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귀여웠을까. 일단 데뷔 쇼케이스에서 ‘귀신 꿍꺼떠’ 애교 부릴 때도 귀여웠다. 고등학교 때도 귀여웠고, 처음 만났던 중학교 일학년 때도 귀여웠다. 그럼 혹시 태어났을 때부터 귀여웠던 건가. 영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아, 생각했더니 또 보고 싶다. 이젠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에 감사해야겠다. 그렇게 도현은 감사해야 할 일 하나를 늘리며, 차에서 나와 바로 앞 편의점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 인사는 놀랍게도 편의점 알바생이 아닌 도현의 것이었다. 새벽 4시에,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건넨 인사치고는 과하게 해맑아서 알바생은 무시도 못 하고 떨떠름히 “네.”라고 대답했다.
“이거 다 주세요.”
“이걸 다요?”
“네!”
도현이 가리킨 이것은 계산대 옆 작은 온장고였다. 그에 알바생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현을 훑었다. 아무리 작아도 방금 막 채워 넣어서 50병은 될 음료들인데 이걸 다 달란다. 게다가 자꾸만 실실 웃는다. 하필 새벽에. 술 취한 사람인가. 술 냄새는 하나도 안 나는데. 괜히 바코드 다 찍었다가 나중에 카드 잔액 없다고 그냥 나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자본의 노예는 무려 50병, 아니 정확히 46병의 음료를 꺼내 일일이 바코드를 찍었다.
“팔만 칠천 원입니다.”
도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프리미엄 카드를 내밀었다. 미심쩍게 카드를 받아든 알바생은 계산이 완료됐다는 화면이 뜨고 나서야 웃을 수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조금 모자란 사람인 모양이다. 이내 알바생은 봉투를 서비스로 주며, 그 안에 음료를 가득 담아 도현에게 건넸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양손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가볍게! 끝까지 밝은 얼굴로 도현이 편의점을 나왔다. 촬영장까지는 걸어서 10분은 걸릴 테고, 봉투 4개에 분산해 담은 음료는 생각보다 너무 무거웠다. 그럼 그냥 차 끌고 가는 게 낫겠네. 그렇게 도현이 방향을 트는 찰나였다.
“지금이면 되돌릴 수 있어.”
도현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왠지 익숙해서였다.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는지 몹시 작게 말해서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이 목소리는 분명.
“그만하자.”
이강운이었다. 뭐지. 이강운이 연애라도 하나. 도현이 쫑긋, 귀를 세웠다. 절대 궁금해서 듣는 거 아니고, 그냥 소속 연예인 관리 차원에서 이러는 거다.
제발, 우리 그만하자.
“서빈아.”
……뭐?
예상치 못한 이름의 등장에 도현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다 힘이 풀린 손이 그만 봉투를 놓쳐 쨍,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내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현은 봉투를 품에 안고, 차로 내달렸다. 다급하게 조수석 문을 열어 음료들을 놓은 뒤, 운전석에 타 차를 출발하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일단 촬영장으로 가야겠다 싶어 핸들을 꺾는데 시커먼 골목길에서 강운이 나왔다. 젠장. 이거 완전히 엿듣다가 들킨 꼴이잖아. 도현이 일부러 촬영장 반대편으로 차를 돌렸다.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 좋은 한적한 밤거리였다. 도현은 느리게 차를 굴리며, 좀 전의 상황을 되짚었다. 새벽 4시. 이강운과 한서빈이 통화했다. 내용은 우리 그만하자. 연인 사이라면, 연애를 그만하자는 것일 테고, 그게 아니라면, 같이 하는 무언가를 그만두자는 얘기겠지.
톡. 톡톡. 도현이 핸들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 또한, 다른 쪽으로 튀었다. 한서빈과 박하진. 박하진과 이강운. 그리고 한서빈과 서 대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도현은 차의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해가 좀 된다. 일전에 한서빈이 서 대표에게 했던 협박이 이강운과 관련된 거라면, 이강운이 일부러 W 엔터에 온 것도, 조건으로 박하진과의 드라마 촬영을 내건 것도 전부 설명된다. 계속 박하진 주위를 맴돈 것 또한.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한서빈이 이강운을 이용해서 박하진을 협박하려 했다, 이건가.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누구세요?”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아, 차 선팅했지. 창을 내리니 조연출이 도현을 보곤 화들짝 놀라 묻는다.
“우도현 대표님 아니세요?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
“그냥 잠이 안 와서요.”
그게 무슨…. 조연출의 어벙한 반응을 뒤로한 채, 도현은 음료를 손에 가득 들곤 차에서 내렸다. 봉투 두 개를 나누어 들어주는 조연출에게 이번엔 도현이 물었다.
“잠은 안 자요?”
“재촬영 씬 하나만 찍고, 쉬는 시간입니다.”
그 망할 재촬영 씬이 이 새벽에 사람을 불러낼 만큼 중요한 거였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조연출이 무슨 죄겠냐. 딱 봐도 장인수 독단이겠지. 얼마 전, 박하진이 창피 준 것에 대한 옹졸한 복수, 뭐 그 정도.
“그래요. 장 감독은 어디 있죠?”
“아 그게….”
빠릿빠릿하게 도현의 옆에서 움직이던 조연출이 돌연 머뭇거렸다. 그에 이상함을 감지한 도현이 걸음을 빨리해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직 한 사람의 것이었다.
“애인이랑 있었나? 와하하, 한창 좋을 시간에 내가 방해한 거 아닌지 몰라.”
꽉 막힌 공간이라 그런지 말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누가 누구를 지칭으로 하는 말인지 불분명했지만, 조금의 눈치만 있다면 알 수 있었다. 방금 막 온 도현도 알아들을 정도면, 이곳에 있는 스태프들은 이미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 혹시 애인 말고 다른 사람이랑 놀았나? 하하, 요즘이 어떤 시댄데 다들 쉬쉬해주자고.”
저 늙은이가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장인수가 생각하는 요즘은 어떤 시대길래 저딴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도현이 와락, 눈썹을 구기니 옆에 있던 조연출이 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감, 감독님이 가끔 농담을 짓궂게 하세요.”
농담이라기엔 성희롱에 가까운 것 같은데. 속으로 말을 삼킨 도현이 촬영장 내부를 훑었다. 박하진은 의상실에 있나. 그렇다면, 지금이 장인수를 꼽줄 좋은 기회라고, 도현은 환히 웃으며 생각했다. 그리곤 곧바로 미친 광기의 눈빛을 장착한 채, 모두가 듣도록 말했다.
“박하진 씨, 저랑 놀았는데.”
일순간 모든 이목이 도현에게 쏠렸다. 그중엔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는 장인수의 눈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이내 도현이 능글맞게 웃었다.
“거, 되게 궁금해하시네. 뭐 하고 놀았는지도 말씀드려야 하나.”
“…….”
“추운데 따뜻한 것 좀 마시면서 하세요.”
어느새 장인수의 옆까지 온 도현은 혼잣말인 듯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걸었다. 그와 함께 음료 봉투를 흔드는 손이 꽤 흥겨워 보였다. 장인수는 이 상황을 말없이 주시하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장인수에게 도현이 봉투에 든 것 중 제일 비싼 캔 커피를 건네었다.
“하하. 하진 씨는 빽도 좋네.”
받아든 캔 커피 뚜껑을 열며 장인수가 던진 말이었다. 이는 농담으로 위장했지만, 명백한 싸움 걸기였다. 도현은 그에 흔쾌히 응했다.
“하하. 제가 박하진 씨 덕을 보는 거죠.”
“에이, 그럴 리가. 우 대표가 드라마도 시켜줘. 촬영장도 데려다줘. 보통 사이가 아닌가 봐요?”
또각. 힘을 주체하지 못한 도현이 캔 뚜껑을 세게 열어젖혔다.
“친구 사이가 좀 각별하긴 해요. 워낙 오래 봐서. 아, 근데 말이에요.”
말을 하다 말고 커피 한 모금을 들이마시는 도현에 모두가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스태프들은 모두 도현이 어떤 사이다를 날려줄지 기대 중이었다. 크흐! 커피를 맥주처럼 들이킨 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박하진 씨가 먼저 캐스팅되고 제가 투자한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
“선후관계가 그런 거면, 빽 써서 덕 본 건 오히려 장 감독님 아닌가. 제가 투자해서 감독님 계약금 늘어났잖아요.”
계약금? 처음 듣는 소리에 스태프들이 술렁였다. 장인수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기 싸움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듯했다.
“다들 모르셨구나. 촬영 예산 두 배로 늘렸는데 거기서 절반 감독님이 먹었어요.”
태연히 웃으며 말한 도현은 남은 음료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곤 와그작, 캔을 볼품없이 구겼다.
“아, 배부르다.”
“…….”
“감독님도 배부르시죠?”
도현의 말이 상당히 중의적이어서 장인수는 대놓고 화를 내지도 못했다. 그냥 도현이 구겨버린 캔처럼 장인수의 얼굴 역시 흉악하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기 싸움의 승자는 도현이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박하진과의 기 싸움 10년이면.
“나도 어디선 꿀리진 않어.”
도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다 끝났어?”
“으응. 피곤해.”
나른하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피곤이 묻어났다. 도현에서 하진으로 바통 터치된 장인수와의 기 싸움 때문이었다. 물론 싸움이라기엔 하진이 일방적으로 참은 거지만.
“얼른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왕자님.”
“…왕, 뭐?”
“왕자님. 우리 하진 왕자님.”
이름까지 넣어서 또박또박 말하는 도현에 하진이 질색을 표했다. 어제는 자기랬다가, 이번엔 왕자님이란다. 애칭을 하루에 한 번씩 바꾸기로 작정한 건가? 그것도 꼭 본인처럼 존나 오글거리는 걸로? 하진이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런 하진의 반응을 도현은 오히려 즐기는 듯 보였다. 그 웃음이 어딘가 미친놈 같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아, 왕자는 난가.”
“…….”
“왕자지.”
미친놈 맞네.
도현은 동화 속 왕자님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그로 인해 방금 도현이 내뱉은 단어의 의미가 희석… 되긴 개뿔. 저 미친 새끼를 진짜 어쩌면 좋지.
“제발 그 흉물스러운 언행 좀 집어치워.”
“흉물스럽다니. 나름 어필하는 건데.”
“넌 입 다물고 있는 게 어필이야.”
“얼굴이 잘생겼다는 건가?”
“응.”
어? 진짜?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뜸 하진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도현이었다.
“나 잘생겼어?”
반짝이는 눈동자가 대답을 갈구했다. 꽃받침을 하곤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기도 했다. 그게 약간 귀여워서 하진은 무심결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 너 잘생겼다니까.”
“네 취향 아니라며.”
“내 취향?”
우도현한테 언제 취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던가. 기억을 되짚어봤으나 잘 모르겠다. 있더라도 그냥 엿 먹이고 싶은 마음에 별생각 없이 얘기한 걸 텐데 우도현은 그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그냥 기억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라고 좀 귀엽다. 그러니까 뭐랄까. 되게 찌질하고 유치해 보이는데 애정을 바라는 행동이 귀엽고 그렇네. 큰일이다. 귀여워 보이면 답 없다던데.
“내 취향이 바뀌었나 보지.”
“…….”
“우도현, 너로.”
우도현 귀신에 홀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유치한 질문이나 하는 우도현에게 똑같이 유치한 대답을 내놓는 꼴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십구 년을 박하진으로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하진은 저 자신이 몹시도 낯설었다.
“와, 박하진 진짜….”
“뭐.”
“말 예쁘게 하니까 너무 예뻐. 귀여워. 사랑스러워.”
“꺼져. 난 원래 예뻐.”
당장이라도 뽀뽀를 갈길 기세로 다가오는 도현의 입술을 하진이 찰싹 때려버렸다. 아파…. 금세 풀이 죽은 도현이 불쌍한 눈망울로 하진을 바라봤다. 그에 하진이 단호히 말했다.
“여긴 보는 눈 많아서 안 돼. 집으로 가.”
“집으로 가면 마음껏 해도 된다는 거야, 뭐야. 사람 기대되게.”
도현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꽤 기괴하여 하진은 차라리 바깥 풍경을 보는 게 낫겠거니 싶었다. 지금부터 2시간 정도 쪽잠 잔다고 하더니 정말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그렇게 혼자 주변을 살피던 하진의 시야에 검은 실루엣이 들어온 것은 찰나였다.
똑똑.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얼굴을 보기 위해 하진이 창문 가까이 이마를 대었다. 이내 상체를 타고 올라간 시선에 반가운 얼굴이 들어찼다.
“어? 강운이네.”
하진이 얼른 차창을 내렸다. 그에 강운이 무릎을 굽히곤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형-.
“아. 대표님도 계셨네요.”
아? 아아? 저 기분 나쁜 추임새는 뭐지. 도현은 당장이라도 창문을 올려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제 맘도 모르고 옆에서 하진은 제게도 잘 보여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걸치고 있으니 퍽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무의식중 빈정거림이 튀어나온 도현이었다.
“네, 뭐. 하진이랑 나랑, 그러니까 우리 말이에요. 우리. 우리 이제 갈 건데 할 말이라도?”
퍽. 하진이 강운 몰래 도현의 팔뚝을 때렸다. 옆에서 듣자 하니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는 이유였다. 뭐, 왜! 도현이 오두방정을 떨며 제 팔뚝을 매만졌다. 그에 하진은 아예 도현에게서 등을 지고야 말았다.
“형한테 할 말이 좀 있어요.”
“나? 뭔데?”
“여기서 말하긴 그렇고, 잠깐 제 차로 가실래요?”
“그래, 그럼. 먼저 가 있어.”
강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진이 재빨리 차창을 닫았다. 제 볼에 닿는 따가운 시선이 당장 돌아보라며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시선을 던지니 역시나 삐진 모양새로 도현은 입을 댓 발 내민 상태였다.
“넌 경계심이 너무 없어.”
“지랄한다. 그냥 좀 친한 건데, 무슨.”
“자기야. 남자는 다 늑대라니까.”
“내가 아는 남자 중에 네가 제일 씹 변태 늑대 새끼야.”
도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아. 자랑스러워할 게 아니라고.”
“우리 하진이가 거친 수많은 남자 중 제일이라는데 당연히 자랑스러워해야지.”
이거 뭐지. 약간 웃으면서 순살로 바르는 게 이런 건가. ‘우리 하진이가 거친 수많은 남자’라는 표현에 하진은 살짝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발끈하면, 왠지 지금껏 만난 파트너들을 일일이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뭐, 사실 그냥 제 발 저린 거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무심코 집어 올린 비엔나소시지가 줄줄이 달려 열댓 개는 딸려오는 그런 상황. 하진은 적어도 그런 상황은 방지해야 했다.
“갔다 온다.”
도현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하진은 차를 박차고 나왔다. 그래. 부딪치기 무서우면,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하진이 강운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의 활기는 어디로 갔는지 적막만 흐르는 촬영장, 그 구석에 세워진 차 앞에서 강운이 손을 흔들었다.
아, 추워. 급하게 나오느라 패딩도 안 걸친 바람에 얼어 죽겠다 싶은 하진이 서둘러 강운에게로 뛰어갔다. 곧 하진이 가까워지자 강운은 먼저 차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하진이 차에 들어갔고, 얼른 문을 닫았다.
“으, 추워.”
양팔을 비비적거리며 열을 내는 하진에게 강운이 핫팩을 건넸다.
“고마워.”
“촬영은 잘 끝냈어요?”
“응. 재촬영이라 금방 끝났지, 뭐.”
“감독님이 억지 부려서 재촬영한 거라면서요.”
“어, 맞긴 맞는데 누가 그래?”
추궁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말투가 사나웠나. 하진의 물음에 강운이 멈칫했다. 그에 덩달아 하진까지 당황해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하진과 강운의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만남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낯선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냥. 스태프들이 하는 소리 들었어요.”
그렇구나. 불안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몇 번씩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는 강운의 주저로부터 하진은 눈치챌 수 있었다. 강운이 말하려는 무언가가 그를 불안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을.
“형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어요?”
의미 모를 질문, 그 속의 간절함이 둘 사이 공간을 유영했다. 하진이 차마 외면할 수도 없게 강운은 그 속으로 하진을 끌어들였다.
“내가 저번에 말한 사람 있잖아요.”
남보다 못한 친구-.
“한서빈이에요.”
강운의 비틀린 목소리가 내뱉은 이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와 함께 몹시도 지친 눈동자가 하진의 그것과 얽혀 어지러이 마음을 들쑤셨다. 하진의 손에 들린 핫팩 역시 유약하게 흔들렸다.
“제가 걔를 좋아하나 봐요.”
강운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 행동에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메마른 강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근데 걔가 살고 싶대요.”
“…….”
“누군가를 이용해서라도 살고 싶대요.”
하진이 미간을 좁혔다. 살고 싶다고? 누구로부터. 누구를 이용해서? 어느 곳 하나 명확하지 않은 문장. 그러나, 누가 들어도 그 속에 간절함이 티가 나는 문장. 강운이 하진에게 던진 말은 그러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이 앞뒤 문맥 없는 말의 의미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세게 일렁이는 시선의 외줄 타기 속, 침묵의 심연을 뚫은 것은 강운이었다. 강운은 불안정한 표정을 내건 채, 하진 코앞까지 제 얼굴을 들이밀곤 멈추었다. 강운의 불안은 마치 하진을 집어삼킬 듯 다가왔다. 그리고 이를 하진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래서 넌. 여기까지 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요동치는 눈동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해 봐.”
하진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대응했다. 건조한 눈빛. 강경한 말투. 그 행동에 놀란 것은 오히려 강운이었다. 흔들리는 강운과 달리 하진은 미동조차 없이 강운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강운은 망설였다. 자신이 지금 할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감히 예측할 수 없었기에 두려웠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강운이 하진의 목덜미로 다가갔다. 그리곤 콰득, 목덜미에 잇자국을 새겼다.
윽. 쾌감보다는 고통이 커 하진이 이를 악물었다. 뒤이어 강운이 입술을 떼자 하진은 곧바로 강운을 밀쳐버렸다. 그에 강운이 쉽게 물러났다.
“정당방위다, 이거.”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진은 주먹으로 강운의 복부를 가격했다. 복싱을 허투루 배운 건 아닌지 복부에 착 감겨 들어가는 주먹이 꽤 쓸만한 것 같았다. 흡. 갑작스러운 공격에 막을 틈도 없이 강운은 속수무책으로 하진의 주먹을 받아내야 했다.
“걔 살리자고 네가 죽게 생겼네.”
복부를 감싸 쥔 채, 쿨럭대며 허공을 응시하는 강운에게 하진은 태연히 말을 덧붙였다.
“살고 싶으면, 나한테 직접 말하라고 해.”
“…….”
“남은 옛정으로 정상참작 해줄 테니까.”
하하. 강운은 허탈하게 웃었다. 두 눈에 초점은 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은 낮고, 묵직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사리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강운이 품고 있었을 죄책감이 묻어났다. 그 진심이 하진의 분노를 잠시 잠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강운은 예전부터 동질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이런 짓까지 하는 거 보면, 분명 배신감 들고, 밉고 그래야 하는데 막상 옆에서 불안하게 떠는 모습을 보니 그저 안쓰러웠다. 애초에 이강운에게 큰 기대가 없었던 걸 수도 있겠다. 처음에야 파트너나 돼볼까 해서 관심 가졌던 건데 지금은 우도현이 있으니 그나마 있던 관심도 사라진 상태였다. 원래 우도현 외에 다른 사람한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더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무튼 그래서 하진은 생각보다 덤덤했고, 태연했다.
곧장 차에서 내려 도현에게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날카로운 바람이 목덜미 부근을 스치니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강운이 새겨놓은 흔적만은 홀로 뜨겁게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좆됐네, 씨발. 우도현한테 뭐라 변명하지. 이거 보자마자 눈깔 뒤집혀서 지랄할 게 뻔한데.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와 달리 한겨울의 새까맣던 하늘은 조금씩 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인 양 반갑게 하진을 맞이하던 도현이 뒷말을 뭉갰다. 도현의 시선을 덜컥 붙잡은 곳은 역시나 붉게 물든 하진의 목덜미였다. 일순간 도현의 눈동자가 오해로 뒤덮였다.
“야, 진정해. 미안해. 내가 설명할게.”
하진이 다급히 도현을 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도현, 이 새끼 눈이 완전히 돌아버렸잖아!
“뭔데.”
“그, 이게 네가 생각하는 그건 맞는데….”
도현의 모든 안면근육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핸들 위에 말아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렸다. 씨발…. 도현이 혼자 중얼거렸다. 적나라한 욕짓거리가 강속구로 귓구멍에 꽂힌 하진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씨발. 너 존나 미워.”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며, 말한 것치고는 상당히 애새끼 같은 말… 아니. 애정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 무턱대고 화내고 들이박을 줄 알았던 도현이 이렇게 하찮게 나오는 것은 하진의 예측 범위를 넘어간 일이기도 했다. 적잖이 당황해버린 하진이 일단 도현을 어르고 달랬다.
“이, 이강운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렇게 했지만, 내가 잘 타일렀고, 또….”
흣. 야, 아니 잠깐만! 순식간이었다. 도현이 하진에게로, 정확히 말하자면 하진의 그 불그스름한 자국으로 돌진한 것이. 깜짝 놀란 하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도현은 그저 입술을 자국 위에 묻은 채로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무방비한 살결 위로 뿌려진 열띤 숨에 하진이 신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하으…. 그만, 그만해.”
이러다간 촬영장 한가운데에서 섹스라도 한 판 뜨겠다 싶어 간신히 정신 차린 하진이 도현을 밀쳤다. 그에 한발 물러난 도현이 마지막으로 혀끝을 세워 하진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리곤 빨간 그 흔적 위를 혓바닥으로 꾹, 눌렀다. 일종의 영역 표시와 같았다.
“외간 남자 키스 마크 없어질 때까지 거기다가 계속 화풀이할 거야.”
뾰로통한 그 말을 끝으로 도현은 차를 출발시켰다. 이 찰나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하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우도현이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그렇게 하진은 집으로 가는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애인 화 풀어 주는 방법]을 열심히도 검색했다.
***
“하진아.”
정말 맹세코 이럴 의도는 없었다. 그저 새벽부터 고생했을 하진을 위해 따끈하게 물을 받아 씻겨주려고만 했다. 그런데 하진의 몸을 본 순간, 처음의 의도 따위는 중요치 않게 되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에 누군가 발자국을 찍은 것처럼, 그래서 그게 몹시 못마땅한 것처럼. 하얀 하진의 목덜미를 점유한 붉은 자국은 도현에게 그런 것이었다. 꼴 보기 싫은, 그런 거.
도현이 잠시 샴푸질을 멈추곤 제 입술을 그곳에 문댔다. 둥근 욕조에 머리를 받힌 채, 노곤히 샴푸질을 받던 하진은 갑작스러운 자극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도현이 제 손에 가득 묻은 샴푸 거품으로 그 흔적을 덮었다. 구석구석, 하진의 머리를 감겨주던 손길은 어느새 뒷덜미로 옮겨간 뒤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자꾸만 열 받아. 어떡해?”
하진에게 상황 설명은 다 들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한서빈의 배후엔 이강운이 있었으며, 강운은 하진을 이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이 키스마크는 하진 말에 따르면, 피할 수 있었는데 정신 차리라고 일부러 당해준 것이라고도 했다. 솔직히 화가 안 난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진을 책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조금 속이 상하고, 얼른 저 흔적을 하진의 몸에서 떼버리고 싶은 정도지.
“으응…. 미안해.”
하지만, 예상보다 하진이 더 고분고분한 탓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렇게 순한 고양이 같은 박하진은 다시는 없을 기회이니 어디 한 번 괴롭혀보겠다고. 도현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도현은 살살, 하진의 뒷덜미를 긁었다.
“읏, 야. 갑자기 뭐….”
흐읍. 도현이 제 입술로 무자비하게 하진의 뒷말을 뭉개버렸다. 벌어진 입술 안쪽으로 도현의 혓바닥이 들어와 그 속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혀 아래쪽 물컹한 부분을 훑자 하진이 옅은 신음을 흘린다. 이어 도현의 윗입술이 하진의 아랫입술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뒤집힌 상태로 입술을 비비니 숨이 쉽게 가빠졌다.
“하아, 하아…….”
내뱉는 숨마다 서로를 향한 욕구가 들끓었다. 바스락거리며 터지던 거품은 이미 도현의 아랫배를 적신 뒤였다. 그 아래로 바짝 선 도현의 성기가 꿈틀댔다. 그러다 툭. 검붉게 피가 쏠린 성기가 하진의 볼에 닿았다. 그에 하진이 고개를 돌려 혀끝으로 귀두를 건드린다.
“어떻게 해줄까.”
그렇게 말하면서 유혹이라도 하듯 볼록 튀어나온 귀두관을 혓바닥으로 쓰니 도현은 당장이라도 그것을 하진의 입 속으로 처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 목표는.
“자위해줘, 하진아.”
순한 박하진 괴롭혀보기니까.
“어?”
“벌이야.”
“…….”
“외간 남자 키스마크 달고 온 벌.”
순간 하진의 눈동자가 안절부절못한 상태로 일렁였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욕조에 기대었던 몸이 미끄러져 그만 완전히 물에 잠겼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크게 울렸고, 이내 곧바로 하진이 푸후- 숨을 내뱉으며 튀어나왔다. 그 때문에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샴푸 거품이 싹 씻겨 내려갔고, 그 과정에서 거품이 하진의 눈동자로 들어갔다.
“으, 따가워.”
눈도 못 뜬 채 하진이 연신 물을 눈동자에 부어댔다.
“물은 위험하니까 이제 나오자.”
도현이 하진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끼워 하진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으쌰,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하진을 욕조 밖 타일에 앉혔다. 뚝. 뚝. 제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하진이 물끄러미 보았다.
“벌이니까 안 넣어줄 거야.”
“…….”
“혼자 해 봐, 하진아.”
솔직히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장난이 아닌 것 같다. 도현의 끈적한 시선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마땅히 누구를 사귈 수 없는 직업이기에 늘 섹스 파트너를 두었던 하진은 이제껏 혼자 욕구를 푼 적이 없었다. 그런 박하진 인생에 자위라니. 가당치도 않은 행위를 우도현 때문에 하게 생겼다.
“흣!”
머뭇거리는 하진 대신 도현이 먼저 하진의 다리를 벌리곤 마찬가지로 벌떡 선 성기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하진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쳐들었다.
“…씹.”
이를 본 도현은 새어 나오는 욕지거리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반쯤 풀린 눈동자와 그 아래를 수놓은 홍조 띤 볼까지는 어떻게 참아 보겠는데 저를 향해 활짝 벌어진 다리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이를 악문 도현이 무의식중에 손에 힘을 주자 하진이 윽, 하고 소리를 뱉는다.
“이제 하진이 거는 하진이가 쥐어야지.”
도현이 하진의 성기에서 손을 떼었다. 꺼떡대는 성기가 예쁜 바나나 모양으로 솟아있었다. 도현은 이제 관객으로 물러나 하진의 흥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볼 생각이었다.
“하, 씨발….”
그 노골적인 시선이 제 몸에 닿을 때마다 하진은 온몸이 손으로 만져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선 끝에 묻은 것은 뒤범벅된 욕정이었다. 지극히 끈적이는 시선은 그 자체로 짜릿함을 가져왔다. 그로 인해 바짝 선 성기와 제게 눈을 떼지 않는 도현을 번갈아 보다 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결심한 듯 하진이 검지와 중지를 입에 넣었다. 도현과의 키스를 떠올리니 혓바닥이 저절로 손가락을 감싸며 움직였다. 다른 한 손으론 성기를 그러쥐었다. 손바닥의 식은 감촉이 본능을 일깨우는 듯했다.
귀두에서 나오는 끈적한 액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곤 그대로 윤활제 삼아 성기를 쓸어내렸다. 미끈거리는 그것으로 둥글게 성기를 훑자 순간 뜨거워지는 것이, 마치 도현의 입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하진의 욕구가 상상을 만들어냈다. 상상 속 도현은 두 무릎을 꿇은 채, 성기를 입안 가득 머금고 휘젓다가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아, 윽. 상상인데도 우도현이 너무 잘 빤다. 생생한 감촉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탁탁탁. 탁탁.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에 맞춰 안달 난 허리가 자꾸만 허공에 대고 날갯짓을 한다. 꽉, 눈을 감고 열띤 자극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하진은 그렇게 점차 몰려오는 사정감에 숨을 참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탁탁. 맹렬한 쾌락이 몸을 지배하는 찰나였다.
“하, 흐읏!”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정액이 울컥, 손안에 퍼질러졌다. 관음적인 시선이 성기 끝부터 천천히 배, 가슴, 젖꼭지, 마지막으론 목덜미까지를 훑어 올렸다. 노골적인 그것이 하진을 완전히 발가벗겼다.
그래서일까. 분명 절정에 다다랐음에도 아래가 안달이 났다. 넣어줘. 박아줘. 쑤셔줘. 서로 먼저 나가겠다는 말들로 인해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그러다 이내 뒤죽박죽 섞인 말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나왔다.
“줘. 네 거 줘….”
“…….”
“…여기에… ‘박고 쑤셔줘….”
하진의 뇌가 기어코 성욕에 지배당하고야 말았다. 지금 하진은 저가 무슨 말을 내뱉는 건지도 모른 채, 그저 발을 뻗어 도현의 성기를 건드릴 뿐이었다. 도현의 귀두는 이미 쿠퍼액으로 질척한 상태였다. 그 빳빳이 선 기둥을 하진이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넣고 흔들었다.
“크윽.”
꽉 깨문 잇새로 도현이 묵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곧 터질듯한 성기라 작은 자극에도 금세 사정해버릴 것만 같았다. 적극적인 박하진은 도현이 가장 견디지 못해 하는 포인트 중 하나였다. 그것만으로도 좆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뭐? 박아줘? 쑤셔줘? 씨발. 그냥 죽으라는 거지. 도현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토해내는 숨마다 하나둘씩 이성이 빠져나갔다.
“허벅지 모아, 하진아.”
하윽! 일순간 하진의 허벅지 사이를 도현의 성기가 관통했다. 쭉 뻗어진 하진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도현이 하진의 발목을 잡곤 그대로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묵직한 놀림에 허벅지 안쪽의 마찰이 그대로 성기에 전해졌다.
“벌은 받아야지.”
습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하진을 다그치는 듯했다. 그 의미를 물어보기도 전에 퍽, 퍽 도현의 허리 짓이 거세졌다. 부드러이 문질러지던 살결은 귀두와 성기 표피 하나하나를 자극하며, 쾌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으, 으흣. 더, 더 세게.”
넣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몸짓에 저절로 흥분된 하진이 도현을 재촉했다. 도현의 성기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하진의 성기와 부닥쳐 생성된 마찰음이 노골적이었다. 하아, 하아. 계속되는 마찰에 하얗게 쌓인 눈 위로 봉숭아 물이 떨어지듯 하진의 허벅지 또한,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탁. 탁탁.
“읏, 아, 좋아. 갈, 것, 응, 아!”
“하아……큭….”
그리고 곧바로 부르르, 정액을 토해내는 성기였다. 하으. 습기와 열기가 뒤엉킨 욕실, 그 공기를 가득 채운 야한 정액 냄새. 붉게 달아오른 하진의 볼과 허벅지. 도현은 끝내 계획을 틀 수밖에 없었다.
“벌이고 뭐고 씨발….”
그렇게 중얼거린 도현이 널브러진 하진을 들쳐업고는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쿵쾅대는 발걸음에서 도현의 욕망이 새어 나왔다.
***
삼 일째다.
우도현 집에서 산 지? 그것도 틀린 건 아닌데, 그것보다 우도현, 저 새끼가 사람 불편하게 매 끼니 요리한답시고 앞치마를 차려입은 꼴값을 본 지가 삼 일째란 말이었다.
“일어났어?”
지금도 부엌에서 부스럭대며 마치 우렁총각처럼 자신을 맞이하는 모습에 하진은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일어났냐는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은 채 그대로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 스크린 속에선 아침 생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모처럼 휴식인데 왜 이 시간에 일어난 거지. 하진이 졸음이 그득한 눈꺼풀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그 이유를 찾았다.
아주 쉬운 문제였다. 원인은 바로,
“밥 먹자.”
아침형 인간, 우도현 때문이었으니까.
또 시작됐다. 저놈의 밥 먹자. 우도현 몸엔 밥 안 먹고 죽은 귀신이 붙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여기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하진이 꼬박꼬박 세 끼를 챙겨 먹고 있는 것일 테다. 두 끼는 우도현이 손수 해다 바치고, 점심은 회사인데도 시간 맞춰서 배달 시켜주는 그 섬세함. 빌어먹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빌어먹을과 감탄, 서로 상충하는 두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진으로서 우도현의 이런 행위가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원체 귀차니즘이라 밥도 잘 안 먹는 하진이었다. 우도현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귀찮으면 끼니는 거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 우도현은 무슨 수를, 아주 많이 썼다. 누워있는 제 옆에서 호로록 짭짭 밥을 먹지를 않나. 동의도 없이 입안으로 음식물을 밀어 넣지를 않나. 그 외 기타 등등.
결국, 항복한 건 하진이었다.
“컹컹.”
난데없이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는 하진 앞에 도현이 오늘의 아침을 대령했다. 김이 솔솔 올라오는 오므라이스를 가만히 응시하던 하진이 다시 한번 컹컹, 소리를 냈다.
“아침부터 뭐야. 귀엽게.”
“돼지 사육하는 것 같길래.”
“네가 사육당하는 돼지야?”
“아마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도록 바로 앞에 밥을 대령해주고, 그 밥을 퍼먹기만 하면 되는 이 행위가 사육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진 옆에 나란히 앉은 도현이 숟가락을 하진의 손에 쥐여 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주인 말 잘 들어야지.”
다정한 손길이 부스스한 하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동안, 하진은 가만히 손길을 받아냈다. 하다 하다 이젠 이런 것도 익숙해지려고 한다. 오므라이스를 양반다리 위로 가져와 크게 한 숟갈을 떴다. 그리곤 입으로 직행. 우물우물 밥을 씹는 와중에도 도현의 손은 머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잘 먹네.”
“웅. 맛있어.”
밥 먹다 말고 대답한 거라 발음이 샜다. 정말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우도현이 또 귀엽다면서 목덜미를 물고 빨았다. 흐읏. 이건 몇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되는 행위였다. 부드러운 혓바닥의 자극이 은근히 세다니까.
“야, 아파. 언제까지 빨 거야.”
이 새끼는 키스마크를 없애려는 건지, 도로 새기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릇 때문에 도현을 밀어내기 힘들었던 하진은 고개를 도리도리 함으로써 도현을 떼어냈다. 그에 도현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멀어졌다.
“좀 옅어지긴 했는데, 아직도 있단 말이야.”
“너 때문에 더 티 나겠어.”
“알았어. 그럼 한 번만 더 할게.”
도현의 고집을 꺾지 못할 바엔 그냥 순순히 당해주자고 생각한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꺾어 키스마크가 더 잘 보이도록 했다. 도현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리곤 갑자기.
부르르르르르. 부르르르르.
입술에 진동을 일으켰다.
“아흑. 아, 미친놈아. 흐흐, 간지러워. 악.”
하진이 발버둥 쳤다. 그러다 숟가락이 떨어져 대리석 바닥과 부딪치고야 말았다. 쨍그랑-. 주변을 울리는 소음에 두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 그 사이로 푸하하! 도현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쳤어? 놀랐잖아!”
“아, 큭큭. 박하진 왜 이렇게 웃겨.”
“안 웃겨!”
“몸이 예민해서 그런가. 간지러움도 잘 타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화를 내는 하진을 보며, 도현은 다짐했다. 다음 섹스 때는 꼭 간지럼을 태워보겠다고. 상상만으로 귀엽다, 진짜.
“우리 하진이 내일 하고 싶은 거 있어?”
“내일이 뭔데.”
“크리스마스. 오늘이 이브고.”
“크리스마스? 뭐 딱히 해본 적 없는데.”
마지막 밥숟갈을 입으로 넣기 전, 하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곤 밥알을 씹으며 되뇌어봤다. 크리스마스 날 주로 무엇을 했는지 말이다. 연습생일 땐, 데뷔가 코앞이라 크리스마스고 뭐고 챙길 겨를이 없었고, 데뷔하고 나서는 숙소 생활로 멤버들과 몇 번 파티한 게 다였다. 그마저도 한 4년 차부터는 개인 스케줄이 바빠지면서 제대로 모이지도 못했고. 그래서 사실 하진에게 크리스마스는 별로 뜻깊은 날이 아니었다. 방송에서 크리스마스 특집을 찍으면, 아, 이제 크리스마스구나, 실감하는 정도로 의미 없는 날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벤트 같은 거 있잖아.”
“이벤트?”
하진의 눈빛이 돌변했다. 무심에서 기대로 가득 찬 눈빛이 도현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니까 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해.
“산타 복장 입고 섹스하기!”
“…어?”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도현은 당황한 티를 감출 수 없었다. 기껏해야 근사한 레스토랑 가서 밥 먹기나 영화관 통째로 빌려서 영화 보기 정도를 생각했던 도현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도현의 고장 난 리액션에 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너무 좋아서.”
“뭐가.”
“산타복 입은 박하진이.”
머릿속으로 잠깐 그려보기만 했는데도 꼴리잖아. 도의상 뒷말은 너무 변태 같아서 꿀꺽, 삼키는 도현이었다.
“지금 당장 주문하자.”
도현이 얼른 핸드폰으로 즐겨찾기에 추가해두었던 게이 성인몰을 열었다. 그 자연스러움에 홀랑 넘어갈 뻔한 하진이 잠깐, 을 외쳤다.
“너 게이도 아니면서 왜 이런 걸 추가해뒀어?”
“너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난 다시 태어났어. 게이 우도현으로 말이지.”
“성인몰은 뭔데.”
“우리 하진이가 나랑 하는 섹스가 질릴까 봐 내가 여러 가지를 준비…야, 야야. 안 돼!”
하진이 핸드폰을 뺏어 들자 제 발 저린 도현은 다급히 하진을 제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바구니에는….
“토끼 머리띠… 래빗 속옷….”
“…….”
“꼬리… 애널 플… 야, 너… 뭐 토끼 페티시 있어?”
하하. 도현도 부끄러움은 아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애인에게 성적 취향을 들켰으니 도현은 당장 나가 죽고 싶었다. 아. 악! 도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는 사이 하진은 제 마음에 드는 산타 복장 한 벌과 토끼 같은 루돌프 복장 한 벌을 세트로 구매했다.
“너 전화 왔어.”
혼자 음침하게 웅크려있는 도현 앞으로 핸드폰이 건네졌다. 김 비서님이시네. 아직 출근 전일 텐데 어쩐 일로….
“어?”
출근 시간 지났다. 누가 시간을 움직이기라도 했나. 도현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받았다.
-대표님, 지금 큰일 났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아직 집이라….”
-여희나 씨랑 결별 기사 떴어요. 당장 공식 입장 발표해야 합니다.
계약 연애에서 도현은 들은 바가 없는 이별이었다.
***
회사로 들어가는 동안 족히 열 통은 넘게 전화를 걸었으나 여희나는 받지 않았다. 그 사이 헤드라인을 장식한 건, [여희나, 결별 인정. 좋은 친구 사이가 되기로…]와 같은 결별 인정 기사였고, 이는 도현과 일체 상의 되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일단 알아야 대처를 하든 말든 하지, 젠장.
“여희나 측 연락은 아직도 없습니까?”
“네. 그런데 아무래도 YN 쪽에서 일부러 흘린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인정하는 게 이상하긴 하죠?”
대표실로 올라가는 길목이 온갖 전화 벨소리로 인해 시끄러웠다. 결별이라는 두 사람의 행위에 한 사람만 응하고 있으니 나머지 한 사람을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 사람이 도통 반응을 안 보이니 기자들로서는 살붙이기 딱 좋을 테고. 그러니 어서 입장 발표를 해야 했다.
“결별 인정하세요. 좋은 만남을 이어갔지만, 성격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별 뒤에도 서로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기로 했다. 늘 응원한다.”
“…….”
“뭐 이런 식으로 아주 아름답고 성숙한 이별로 포장해서.”
도현의 말을 전부 받아적은 김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실도 역시나 전화로 북새통을 이루는 중이었다. 그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 도현이 말없이 대표실 책상에 앉았다. 뒤따르던 김 비서가 문을 닫았다.
“익명으로 꽃바구니가 왔답니다.”
“네? 꽃바구니요?”
도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김 비서에게 되물었으나 이어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것이 진짜임을 깨달았다. 이내 직원이 보라색 꽃으로만 채워진 작은 꽃바구니를 소파 테이블에 놓았다. 김 비서가 그것을 도현 앞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상해서 뒤져봤는데 독이니 뭐니, 그런 건 없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다만, 선물로는 흔하지 않은 꽃이라 찾아보니 아네모네라네요.”
“…….”
“꽃말은 배신.”
보라색 꽃잎을 만지작거리던 도현이 멈칫했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 비서와 눈을 맞췄다.
“타이밍이 좀 뭣 같은데요.”
“여희나 씨일까요?”
“가능성은 있는데 명분이 없죠.”
협박 때문에 가짜 열애설 계약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계약을 파기했다. 그렇다는 건, 그 협박이 사라졌다는 건데. 여희나에게 협박할 만한 사람은 영남기 혹은 YN 측 다른 누군가. 여희나는 아직 영남기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끝날 관계가 아니며, 이를 끊기 위해선 분명 제게 도움을 요청했을 테니까. 영남기가 아니라면, 여희나를 협박하던 건 누구였을까.
그 사람이 지금 이 판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꽃말에 집착하고 싶진 않은데 배신이라는 게 메시지라면, 그 대상이 뭘까요.”
“여희나 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맘대로 계약을 파기했다는 게 배신이겠죠.”
“그게 아니라면.”
잠시 말을 멈춘 도현이 제 앞에 놓인 꽃바구니로 시선을 옮겼다.
“나를 향한 배신이겠네요.”
아네모네, 영롱히 빛나는 보랏빛 꽃은 본인의 아름다움 뒤로 본색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아네모네와 같은 존재가 제 주변에 있을 것이라 도현은 확신했다. YN의 내부사정을 잘 알면서, 저와도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사람. 예측건대 최근 들어 주변에 새로이 등장한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YN의 상장 추진이라는 변수가 어떤 식으로든 간에 그 인물을 들쑤신 것일 테니 말이다. 이를 기반으로 도현은 생각을 돌이키고, 돌이켰다.
그러다 불현듯 한 사람이 기억을 관통한 찰나.
“대표님. 이강운 씨가 오셨습니다.”
도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과 같은 이가 도현을 찾아왔다. 아. 그 순간, 도현은 탄식을 내뱉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한서빈의 측근이자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 도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강운을 놓치고 있었다. 강운이 하진에게 접근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경계했으면서, 정작 질투 외에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강운은 여유롭게 웃으며 도현에게 다가왔다. 김 비서가 그를 제지하려 하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 비서가 물러났다. 도현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눈치챈 김 비서는 그대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내 도현 바로 앞에 선 강운은 뒤에 감춰두었던 꽃 한 송이를 도현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예사로이 운을 뗐다.
“하얀 튤립.”
“…….”
“꽃말은 용서를 빕니다.”
이 판을 좌지우지하는 이는, 정말 이강운이었다.
“아직 놀라긴 이른데.”
***
“항복! 관장님, 나 항복!”
다리에 힘이 풀림과 동시에 하진이 항복을 선언했다. 이내 앞에 걸린 샌드백이 관성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관장님이 멈춰 세웠다. 복싱 촬영 얼마 안 남았다고 요 며칠간 특훈을 내린 게 기어코 힘에 부친 모양이었다. 냅다 바닥에 널브러진 하진을 향해 관장님이 물을 건넸다.
“엄살은.”
“…모든 인간이 관장님처럼 강철 체력은 아니에요.”
“알았어, 알았어. 쉬는 시간 20분.”
“오, 예.”
무려 20분이라니. 하진이 쾌재를 불렀다. 슬슬 배도 고픈데 관장님 꼬셔서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을까 싶다. 점심 맞춰 배달시켜주던 우도현은 지금 몹시 바쁠 테니 말이다. 수습은 잘했는지 모르겠다. 바쁜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할까 봐 궁금한 것도 참고, 하진은 복싱에 열중했었다.
팡. 팡팡. 잽. 펀치. 잽. 펀치.
“관장님, 일부러 저 쉬는데 옆에서 그러시는 거죠.”
핸드폰으로 시야를 가린 하진인데도 귀는 막을 수 없어서 관장님의 펀치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그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하진이 잠시 핸드폰을 내려 관장님을 쳐다봤다. 쭉쭉 뻗은 팔과 시원한 타격음이 확실히 하진의 펀치와는 달랐다.
“무슨. 난 그냥 스트레칭 하는 거야.”
“아무리 그러셔도 20분 꽉 채워서 쉴 거예요.”
그리고 20분 되면, 배달시켜 먹자고 해야지. 혼자만의 계획에 하진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리곤 아예 관장님을 등져 핸드폰을 하기 시작했다. 심심해. 연락 올 곳이라고는 도현뿐인 하진이라 핸드폰으로 하는 일은 기껏해야 너튜브 보기나 파랑새 서치. 그마저도 쉬면서 몰아 봤더니 슬슬 지루해졌다. 그래도 팬들 반응 몰래 엿보는 건 여전히 재밌긴 하지만.
하진이 능숙하게 파랑새 검색창에 하진을 쳤다. 연말이라 그런가. 예전에 섰던 연말 무대가 레전드 직캠이라고 재조명된 모양이다. 벌써 몇천 명이 답글을 달았고, 몇만이 리트윗을 한 상태였다. 와, 흑발이면 언제야. 마지막 앨범 때인가. 하진이 본능적으로 영상을 클릭했다.
쓰리피스 수트를 쫙 빼입은 영상 속 박하진은 팬들의 함성을 들으며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매끈한 그의 몸을 감싸 안은 절제된 웨이브가 그를 더욱 섹시하게 만들었다. 연말 무대에 빼놓을 수 없는 댄스 브레이크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메인 댄서답게 그는 자신의 팬덤뿐만 아니라 모든 팬덤을 아우르며, 무대를 즐겼고, 팬들 또한 그와 함께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꽤, 아니 매우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무대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진의 눈은 마치 제3자처럼 객관적이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 너머로 드리운 감정이 그리움인 것을 하진, 본인이 모를 리 없었다.
[이게 케이팝이지.]
[케이팝 기강 좀 잡으러 와라.]
[유어 멜로디 진짜 탑이었는데… 이젠 다른 의미로 탑이 되어버린…]
[하진아, 누나도 솔로 됐어. 그니까 너도 솔로로 나와줘라.]
답글을 내리는 하진의 손이 자연스레 하트로 갔다. 꾹. 꾹. 팬들의 마음에 지금 하진이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그저 지나가는 팬 한 명 정도로 생각될 하트겠지만, 하진은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듯 이를 열심히도 눌렀다.
그렇게 백여 개쯤 눌렀을까. 관장님이 고지 한 쉬는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것을 깨달은 하진이 인기글에서 나와 ‘최신’을 눌렀다. 포토카드 교환 글이나 몇 개 나오겠지- 생각하고, 정말 별 뜻 없이 누른 거였다. 그런데 왜.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와르르, 게시물이 쏟아져나오는 걸까. 이내 하진이 그것을 눈여겨볼 틈도 없이 화면은 바뀌었다. 도현으로부터의 전화였다. 뭐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보세요?”
-하진아.
무겁게 내려앉은 도현의 목소리가 하진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우리가 당했어.
“…무슨 말이야?”
-링크 보낼게. 그 기사만 읽어. 다른 기사는 읽지 마. 댓글도 보지 말고, 내가… 내가 당장 데리러 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그러니까….
도현이 쏟아내는 말 중에 하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감정적이긴 하나 일과 관련된 부분에선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도현인데도 이번만큼은 그러기 어려워 보였다.
“야. 나 괜찮으니까 정신 차려.”
도현은 대답이 없었다. 하진이 말을 덧붙였다.
“계속 연락할게. 이따 봐.”
최대한 담담히 대답한 하진은 혹여 손의 떨림이 느껴질까, 먼저 전화를 끊었다. 손에서부터 시작한 떨림은 왠지 모르게 쿵쿵, 심장까지 흔들어놨다. 웬만한 구설수 다 겪어봤는데 이번이라고 뭐 별것 있겠어? 괜히 우도현이 오버해서 그렇지 분명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하진은 조심히 도현이 보낸 기사 링크를 열었다. 아니, 열기도 전에 이미 기사 제목이 드러나 있었다.
[박하진, 고민채 두고 여희나와? 그의 은밀한 행각]
아주 뭣 같은 기사 제목이었다.
***
하진과 통화를 마친 도현이 대표실로 돌아가기 전, 다시 기사를 읽었다. 하진이 W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과 이후 여희나가 들어가는 사진이 함께였다. 각각만 본다면, 문제가 없었으나 기자들은 절대 각각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묵은 스위트룸이 바로 옆이었다는 공통점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결과, 기사 속 두 사람은 각자의 애인을 두고 밀회를 즐기는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형이랑 통화는 잘하셨어요?”
제 맞은편에 앉는 도현에게 강운이 웃으며 물었다. 애써 이성을 앞세운 노력이 무색하게 도현은 비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네, 잘했습니다. 강운 씨는 한서빈이랑 통화 안 하세요? 본인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터트렸는데.”
“서빈이는 제가 한 줄 모를걸요.”
“이강운 씨가 터트린 건 맞나 보네요.”
“그럼요. 이거 다 제가 기획한 건데.”
“여희나랑 공동 기획인가.”
“제 단독 기획입니다. 여희나는 조연 정도?”
능글맞은 태도, 이강운은 숨길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숨길 거였으면, 애초에 여길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도현은 시답지 않은 기 싸움을 관두기로 했다. ST 측에서 수습하고 있겠으나 이쪽도 고민채가 엮인 일이니 나서려면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뭐예요.”
“대표님.”
강운이 잠시 뜸을 들이다 핸드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켰다. 도현이 뭐하냐는 눈빛으로 강운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대표님도 녹음하세요. 동맹엔 신뢰가 중요하니까.”
동맹? 미심쩍었지만, 도현은 일단 강운이 하라는 대로 똑같이 핸드폰을 열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강운이 입을 열었다.
“우린 목표가 같아졌어요.”
“…….”
“YN 미디어 추락시키기.”
역시 그거였나. 상대가 먼저 본인의 패를 깠다. 동맹에 중요하다는 신뢰를 쌓기 위해서? 아니면, 또 다른 패를 쥐고 있어서? 그것도 아니면, 패를 다 보여줄 만큼 자신이 있어서? 다리를 꼰 채로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이는 걸 보면, 세 번째가 제일 가능성 있겠네.
“이 판에 박하진을 끌어들인 것도 본인?”
고개를 끄덕인 강운은 역시 느긋하게 답했다.
“내 목표를 대표님의 목표와 일치시키기 위해서 그랬어요.”
“그래서 남의 목에 그딴 걸 새겼고?”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이랄까요.”
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변명 같지도 않은 말을 강운은 잘도 내뱉었다. 그 모습이 도현으로서는 실소가 터질 만큼 어처구니없었다. 이내 도현이 시선을 내려 빠르게 변하는 녹음 시간을 확인했다. 1초. 10초. 1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혹시 이강운이 노린 게 이건가. 일부러 시간을 볼 수 있게 해서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려고? 아무래도 시간의 압박에 불리한 건, 이쪽일 테니까.
“오늘 기사도 그 희생의 일부예요?”
“네.”
“그런 것치고는 나를 너무 열받게 했는데.”
“원래 사람은 감정적일 때, 판단력이 흐려지거든요. 저는 지금 그걸 이용할 거고요.”
“날 어떻게 이용할 건데요?”
도현이 제게 응하는 듯 보이자 강운은 소파에 기댔던 등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YN을 뚫을 창과 YN을 막을 방패로요.”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강운의 핸드폰이 진동을 내뿜었다. 액정에 띄워진 이름을 본 도현이 받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나, 강운은 그저 핸드폰을 뒤집을 뿐 받지 않았다.
“왜 안 받아요?”
“안 중요해서요.”
“한서빈 때문에 이런 일을 하면서, 한서빈이 중요하지 않다? 재밌네.”
도현의 말에 강운이 처음으로 동요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강운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 틈을 타 도현은 자연스럽게 본인의 핸드폰을 뒤집었다.
“제가 설계한 판에서 주연은 우 대표님이세요.”
강운은 티 나게 말을 돌렸다. 이를 지적할 수도 있었으나 도현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강운이 의도하는 대로 끌려가는 척했다.
“왜 나예요?”
“박하진을 이용했을 때, 가장 크게 동요할 사람이니까요.”
“날 잘 몰랐을 텐데.”
“글쎄요. 잘 몰라도 보이는 건 있잖아요.”
그 순간, 도현은 강운에게서 자신을 엿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한서빈이랑은 무슨 사이에요?”
“좋아해요, 제가.”
“그래서 본인을 희생하시겠다?”
“좋아하는 사람 지키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대표님이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이강운이 우도현을 택한 이유를.
“박하진 지키고 싶잖아요.”
강운과 도현은 닮아있었다.
“판은 내가 새로 짭니다.”
***
[ST 측, “박하진 이미 고민채와 한 달여 전 결별. 여희나와는 친구 사이. 억측 삼가달라.”]
새롭게 뜬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하진은 댓글 창 직전에서 손을 멈추었다. 이미 댓글은 100개 이상 달린 뒤였다. 빌어먹을. 연예인 기사면, 연예면에 써야지. 이걸 굳이 사회면에 써서 댓글 달리게 하는 심보가 참 개 같았다.
asdf****
데스노트 그룹 드디어 전멸했네
어, 그래. 너 신고. 하진이 딱 신고 버튼을 누를 때였다.
“하진아, 도착했어.”
“아. 감사합니다. 관장님 아니었으면, 저 아무 데도 못 갔을 거예요.”
하진이 도착한 곳은 서 대표의 집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자기 집으로 가 있으라는 서 대표의 말에 따라 하진은 제 차도 복싱장에 놔두곤 관장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진의 차는 이미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너 그럴 애 아닌 거 아는데, 도와야지. 혼자 올라갈 수 있겠어?”
“그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관장님.”
꾸벅. 진심으로 관장님께 인사한 뒤, 하진이 차에서 내렸다. 주변의 적막이 괜히 신경을 건드린다. 평일 오후라 당연한 걸 텐데도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다. 혹여 누가 볼까 싶어 모자를 꾹 누르는 손길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한 번 곤두세워진 신경은 하진이 태희 집 안으로 들어서서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 좆같네.”
씨발.
아무도 없는 집,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지며 하진은 여태까지 참아왔던 속마음을 쏟아냈다. 아주 적나라한 욕설들이 곧 하진의 마음이었다. 욕이 익숙한 사람. 어감이 좀 그렇긴 하나 욕을 먹는 것도, 뱉는 것도 익숙한, 하진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아이돌로 살던 10년은 꽤 행복했고, 꽤 불행했다. 팬들의 관심은 즐거웠고, 감시는 힘들었다. 아이돌에게서 타인의 불행은 기회였다. 같은 그룹 내에서조차 최애와 차애가 갈리는 순위 싸움에서 타인의 작은 흠은 이를 뒤엎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진이 바친 20대는 이런 치졸한 경쟁 사회였다.
그 속에서 하진은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수천수만 명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한두 명씩 사라질 때마다 하진은 다짐했었다. 합법적인 일만 하자, 남에게 관심 두지 말자, 괜한 구설에 휘말리지 말자, 떳떳하게 살자-.
시간이 흐를수록 다짐은 늘어만 갔다. 그것들은 모두 옳은 것들이었으나 전부 받아들이기에 하진의 마음은 한계가 있었고, 하진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공간을 위해 스스로를 비우는, 그러한 선택을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는 하진, 본인이었다.
[근데 박하진 좀 불쌍하지 않냐… 멤버들 사고 친 거 욕 먹었지, 그 와중에 연애한다고 욕 먹었지, 이젠 본인이 아니라는데도 욕 먹지… 머글이라 미안한데 박하진 욕 좀 그만해라]
갑자기 왜 이 댓글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스무 살 때부터 8년을 함께한 유어 멜로디가 해체한 직후에도 바로 방송을 시작했던 하진이다. 그만큼 하진은 스스로가 단단한 멘탈을 가지고 있음에 자부했다. 문제는 그 생각이 요즘따라 자꾸만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무리 단단해도 시간이 지나면, 겉으론 금이 가기 마련이고, 속에선 부풀다 터지기 마련이었다. 하진이 데뷔 후 차곡히 쌓아뒀던 다짐들은 그렇게 점점 몸집을 부풀리다가 기어코 하진을 짓누르기에 이르렀다. 꽉 채워진 마음, 정작 그 속에 온전한 박하진은 없었다.
“아. 존나 궁상맞네, 박하진.”
이를 알면서도 하진은 외면하기 급급했다. 도현을 그리했던 것처럼 하진은 생각보다 겁쟁이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린 핸드폰 진동이 하진을 생각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냈다. 이윽고 액정에 뜬 이름을 본 순간, 하진의 마음이 무의식중 수선스레 들끓었다. 전화를 받는 손이 떨렸다.
“야.”
-응, 하진아.
“우도현….”
힘없이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툭-. 발밑에 채는 핸드폰을 주우려 하진이 몸을 숙였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바닥을 더듬거리다가 우연히 무언가 손에 닿았다. 핸드폰은 아니었다. 그것을 따라 천천히 들어 올린 시선의 끝에서 하진은 마주했다.
“나 왔어, 하진아.”
어둠 속, 온전히 자신을 부르는 도현을.
“왜 이제 왔어….”
금이 간 마음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
하진이 걱정돼서 무례를 무릅쓰고 태희 집 비밀번호를 알아낸 도현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두 눈을 의심했다. 불도 켜지 않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바닥에 떨구어진 핸드폰 액정만이 빛을 뿜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옮긴 걸음 앞에 위태로이 하진이 있었다.
가냘프게 떨리는 하진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도현은 그대로 하진을 껴안았다. 왜 이제 왔냐는 원망에 미안하다며 하진을 다독였다. 언제나 강할 거라 믿었던 하진이 제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것만큼 도현을 괴롭게 할 건 없었다. 하진의 마음 파편들이 도현을 아프게 찔러댔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머리가 새하얘진 도현은 이런 형식적인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다 좆 까라 그래….”
응? 도현이 움찔했다. 잘못 들었나.
“좆 까라고! 이 망할 세상아!”
어… 제대로 들은 거 맞네. 당황한 나머지 도현은 저도 모르게 등을 두드리던 손길을 거두었다. 가슴팍이 점점 뜨거워졌다. 하진이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하진은 지금 분노의 5단계 중 2단계, Anger 상태인 것 같다. 그러니까 그냥 화가 존나 많이 난 상태란 말이다.
“왜 맨날 나한테만 지랄이야. 내가 존나 만만해?!”
“…아니야. 하진이 하나도 안 만만해.”
무서우면, 무서웠지. 박하진이 만만할 리가.
“나 아니라고! 여희나는 그냥 도와준 거라고!”
“응, 알아. 나는 알아, 하진아.”
“씨발, 너만 알면 뭐 해! 아니라는데 믿지도 않고! 그럴 거면 관심을 주지 말든가! 악!”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일까. 얼마나 열이 차올랐는지 하진은 말끝마다 느낌표를 붙였다. 그리고 이런 하진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도현은 리액션이 고장 난 채였다.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리던 하진이 돌연 도현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양손을 맞잡았다. 그 눈빛이 몹시 수상쩍어 도현은 가만히 하진을 지켜봤다.
“착하게 살게요. 앞으로 욕도 안… 아니 줄일게요.”
“…….”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해결해주세요.”
분노 3단계, 협상으로 돌입한 모양이었다. 순간, 웃으면 안 되는데 신과의 협상 상황에서도 박하진이 과하게 솔직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눈 감고 기도하느라 하진이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다음 단계가 우울감이었던가. 이 상태면 펑펑, 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하진이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돌아버리겠는데 펑펑이라니. 도현은 이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그 전에 사실을 말해줘야 했다.
“하진아. 나 좀 봐봐.”
포근히 자신을 감싸 안는 목소리에 하진이 눈을 떴다. 곧바로 마주친 눈이 역시나 부드럽게 하진을 어루만졌다. 하진은 기도하던 손을 내려놓고 도현에게 집중했다.
“너한테 할 말 있어.”
차분한 목소리가 널뛰던 하진의 감정을 잠재우는 듯했다.
“지금 네가 들으면, 놀랄 수도 있고, 화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괜찮겠냐는 물음, 그 안에 담긴 걱정과 배려가 하진을 보듬었다. 그래서 도현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되진 않으나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그리고 솔직히 한 번 폭발해서 깨뜨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기도 했고.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 아니겠는가. 이미 부서진 하진은 다시 마음을 재건할 일만 남았다.
“뭔데. 나 지금 새로 태어났어. 뭐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진의 뒤로 마더 테레사의 모습이 드리워졌다. 마더 하레사로 착각할 만큼 하진은 너그러운 미소를 띤 상태였다. 물론 하진의 이런 행보에 당혹스러운 건 도현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어, 나 거의 어벤져스.”
반짝이는 눈동자가 도현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럴 수 없었다.
“어벤져스는 복수하는 사람이고. 하진이가 말하고 싶은 건 용서지?”
“그거나, 그거나.”
복수랑 용서는 뜻이 거의 반의어인데. 이 말까지 내뱉으면, 애써 유해진 하진이 다시 날카로워질까 싶어 도현은 혼자만 생각하기로 했다. 도현이 말이 없자 하진이 도현을 재촉했다. 어서 하려던 말이나 해.
그에 도현은 말없이 제 핸드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어리둥절하게 이를 보던 하진의 귀로 지직거리며, 대화 내용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의 적막 위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린 목표가 같아졌어요. YN 추락시키기.]
이강운이었다.
하진이 눈동자를 키워 도현을 바라봤다. 도현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운과 대화를 나누는 이는 도현이었다. 앞뒤 문맥이 없어도 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대충 파악이 됐다. 이어진 대화에선 여희나를 비롯해 한서빈, 심지어 박하진까지 언급되었다. 이들은 모두 자의적으로, 혹은 타의적으로 오늘 터진 스캔들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그중 하진은 타의에 속했다.
[서빈이는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본인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도 모르고요. 그게 답답해서 제가 나섰어요. 진짜 한서빈을 살릴 확실한 방법을 전 아니까요.]
이제껏 하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긴 서빈 또한, 사실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 그 역시도 타의였다.
[여희나는 서빈이 때문에 알게 됐어요. 그 거지 같은 소속사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던가. 사람이 영악하고, 수완이 좋더라고요. 같이 일을 도모하기에 적합했죠. 애초에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고.]
불쌍한 삶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여희나는 자의.
[아, 맞다. 장인수 있잖아요. 곧 써먹을 데가 있을 거예요. 내가 자기편인 줄 알거든요. 박하진 마약도 그 사람이 구해준 거였는데, 몰랐죠?]
이 판에 본인이 개입된 줄도 모르는 장인수는 타의.
[제가 설계한 판은 여기까지.]
결국, 모두가 이강운의 손아귀 안에 있던 것이다.
[이제 알려주세요, 대표님 판은 어떤 건지.]
녹음 내용은 이렇게 끝이 났고, 하진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 맞는 건 처음이라 머리가 꽤 얼얼했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떨어졌다. 연예계 십 년 있으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봤지만, 이런 진흙탕 싸움에 엮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네가 새로 짠 판은 뭔데.”
이강운은 본인이 한 것들을 일종의 예열이라고 표현했다. 단번에 상대를 녹다운시킬 펀치를 장전한 예열 단계. 그리고 그 펀치는 이강운에게서 우도현에게로 넘어간 듯했다.
“이용당한 만큼 우리도 이용해야지.”
이젠 장전한 펀치를 날릴 때였다.
- 3권에서 계속 -
낫 마이 프렌드(Not My Friend)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