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블로킹(Blocking)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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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킹(Blocking)

도현과 하진이 연락을 끊은 지, 아니 하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긴 지 거의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던 우연한 만남이 모두 고의였던 것처럼 지난 일주일간은 방송국에서도, 복싱장에서도 하진과 도현은 마주치지 않았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교차점이 존재하지 않는 우도현과 박하진의 제자리. 하진은 가끔 대표님이라는 소리에 혹시 우도현일까 싶어 뒤를 돌아본 것 빼고는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일상을 보냈다. 귀찮게 하던 놈 없어지니까 오히려 좋다는 생각도 했다. 어딘가 공허한 마음은 제 착각일 것이라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자 하진은 오늘 강운을 만나기로 했다. 귓가에 꽂히는 통화연결음이 너무도 익숙한 탓에 하진이 이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러다 전화를 받은 강운에 하진이 물었다.

“어디야?”

-저는 거의 다 왔어요. 형은요?

“나도. 골목만 꺾으면 바로야.”

-가게 안에서 만날래요?

“어. 먼저 올라가 있을게. 이름 임수찬 대면 돼.”

-알겠어요. 얼른 갈게요.

데뷔한 이래로 이렇게 일상적인 만남은 처음인 것 같다. 다른 새끼들이랑은 침대에서 뒹굴기나 했지, 서로 연예인이라 밖에서 만나지도 못했으니까. 그나마 강운과는 드라마를 같이 찍는다는 핑곗거리가 있어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거였다.

물론 대놓고는 아니고 선글라스로 얼굴 정도는 가렸다. 마치 톱스타 비밀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이 순간, 하진은 본인이 고민채와 공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수찬아.”

“네, 형.”

“오늘 나랑 있었다고 하고, 일찍 퇴근해.”

“그러다 형님이 사고라도 치시면…. 헙.”

수찬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이런 망할 말실수!

“수찬아.”

아, 좆 됐다. 수찬은 몇 초 전의 자신을 원망하며, 곧 쏟아질 하진의 욕 다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눈을 감았다.

“오늘 형이 기분 좋으니까 참는….”

“잘못했습….”

“…뭐?”

“…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수찬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하진에게 되물었다. 수찬의 반응에 하진도 당황한 상태였다.

“…화 안 내세요?”

“수찬아.”

“네, 네….”

“누가 들으면 형이 맨날 쌍욕 하는 줄 알겠어.”

아까보다 하진의 목소리가 사뭇 낮아졌다는 것을 눈치챈 수찬은 곧바로 태세 전환을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형이 언제 욕을 하셨다고요. 그런 고운 얼굴로 쌍욕이라니 가당치도 않죠. 전 형의 바르고 고운 말만 들어왔습니다.”

“그렇지? 오늘 내 모습은 어때?”

“아휴, 말해 뭐합니까. 오늘도 빛나십니다!”

차가 한옥 앞에 완전히 정차함과 동시에 수찬이 쌍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제야 하진의 얼굴 위로 만족감이 떠올랐다.

“데이트 잘하십쇼, 형님!”

나날이 발전하는 수찬의 아부를 들으며 하진이 차에서 내렸다. 약속 장소는 분위기 좋은 한옥이었다. 정원은 가을의 고즈넉함이 담겨 노란색,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일자로 놓인 돌길은 자연스럽게 이곳과 어울렸다. 점심 예약이 어찌나 꽉 차 있던지 시간을 앞당겨 겨우 잡은, 소위 말해 요즘 별그램에서 핫한 곳. 한 번쯤 오고 싶었던 곳이라 하진은 지금 기분이 몹시 좋았다. 수찬에게 화내지 않은 것만 봐도 하진의 기분 상태는 추측 가능했다.

그런데,

“어머, 하진아?”

그렇게 붕 떠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상당히 낯익지만, 절대로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하진을 불렀기 때문이다. 잠깐 주춤했으나 그녀를 무시한 채 하진은 곧장 점원에게로 향했다.

“임수찬, 예약이요.”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하진의 태도에 점원이 빠르게 예약 목록을 확인했다. 그동안 하진은 마음속으로 수없이 빌었다. 제발 그냥 가라. 아는 척하지 말고 그냥 가라.

“저 사람 여희나 아니야?”

“헐, 미친. 옆에 남자는 누군데?”

듣고 싶지 않은 여희나의 소식을 들어버렸다. 웬 남자랑 이곳을 온 모양이다. 여희나의 사생활 따위 알 게 뭐람. 쯧, 짧게 혀를 찬 하진이 점원을 따라나섰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어쩐지 따가웠다.

마룻바닥으로 된 복도 옆으로 방이, 그 가운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세워진 공간에 들어섰다. 끼익-, 이곳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오로지 어긋난 나무 바닥이 만들어내는 소음뿐이었다. 난데없이 침투한 음성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

그와 함께 강압적인 힘이 하진의 손목을 붙들었다. 꽉, 세게 잡힌 손목은 아무리 비틀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코에 걸친 선글라스를 하진이 제대로 고쳐 썼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선 점원을 불러 말했다.

“저기 제일 끝번 방이죠?”

“네.”

“그럼 이제 알아서 갈게요. 음식은 동석자 오면 준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진의 말에 작게 고개를 숙인 점원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곧 무거운 목소리가 하진에게 한 번 더 말을 건다.

“잠깐 얘기 좀 해.”

점원이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하진은 강하게 손목을 흔들어 제 손목을 남자로부터 빼내었다. 툭, 하진의 손목이 아까완 달리 쉽게 자유로워졌다. 그제야 하진이 제 앞의 남자와 시선을 얽었다.

“무슨 일이세요, 우도현 씨?”

같잖은 호칭 하나로 하진은 정확히 도현과 제 사이에 선을 그어버렸다. 마치 자신들의 영역을 상기라도 시키듯이. 그에 도현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뭐하냐.”

도현은 하진이 그은 선 위에 서서 하진을 내려다봤다.

“용건 없으시면 저 먼저 갑니다.”

그러나 하진은 도현에게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 물러나 다시 제 앞에 선을 긋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도현의 입에서 하, 허탈함이 흘렀다. 이어 하진이 모르는 척 걸음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하진이 맞지? 그냥 가길래 아닌 줄 알았어.”

이번엔 희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하진을 붙잡았다. 도현 옆에 바투 붙어 웃는 꼴이 가증스러웠다. 보아하니 제 속 좀 긁어보려고 수작 부리는 것 같은데 어디 맞장구나 한번 쳐줘 볼까 싶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건데, 기어코 아는 척을 하시네요?”

“아는 척이라니. 도현이랑 내가 널 얼마나 잘 아는데.”

“아, 그러세요. 그럼 저 오늘 뭐 먹으러 왔는지 알아요?”

“…어?”

“잘 아신다길래요.”

이내 하진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부러 다 들리게 중얼거린다.

“모르면서 아는 척은.”

하진의 어조는 상당히 무미건조했지만, 내용은 희나를 열받게 할 만큼 충분히 통통 튀었다. 희나의 붉어진 얼굴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하진은 슬며시 승자의 미소를 내비쳤다. 이어서 희나가 매서운 눈빛으로 하진을 쏘아붙이려 하자 도현이 둘 사이를 막아선다.

“그만.”

그러면서 도현의 눈동자는 정확히 하진을 향하고 있었다.

“그만합시다.”

그 말은 즉, 도현의 단호함이 하진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게 너무 기가 찬 나머지 하진은 그대로 굳어버리고야 말았다. 왜? 먼저 시비 건 건, 여희난데 왜 나한테만 그래?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 꼬리를 물고 따지려던 말들은 목구멍을 상처 내다가 끝내는 나오지 못했다.

‘하진아, 그만해.’

상처가 번져 옛 기억을 들쑤셨다. 그 속에서조차 도현은 제게 그만하라고 했다. 뭘 맨날 그만하래. 그럼 씨발, 네가 그만하든가.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하진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더라도 참기는 싫었다.

“네. 제가 눈치 없이 데이트를 방해했네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든 맞든 제 알 바는 아니고요.”

“박하진 씨.”

어느새 하진을 따라 존댓말을 내뱉는 도현 때문에 둘 사이의 선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 하진은 그 선을 넘지도, 밟지도 않으려 애썼다. 이윽고 도현이 다시 하진을 붙잡아보려 했지만, 돌연 뒤로 젖혀지는 하진의 몸에 손을 놓쳐버린다.

“형.”

도현은 순서를 빼앗겼다. 순서뿐만 아니라 영역까지도. 갑자기 등장한 이강운은 쉽게 하진의 선을 넘어 하진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도현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그곳으로 말이다.

“왜 나와 있어요. 방에 들어가 있지.”

“잠깐 얘기 좀 했어. 빨리 왔네?”

“형이랑 전화 끊고 바로 달려왔어요.”

도현의 눈썹이 전화라는 단어에 반응해 들썩였다.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하진이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 속에는 ‘넌 내 번호 없지? 이강운은 있는데.’와 같은, 상당히 얄미운 뜻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 쐐기라도 박듯 하진이 강운에게 바짝 붙어 섰다. 도현이 무심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은 둘의 맞닿은 어깨 쪽으로 고정된 채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먹을래? 같이 먹을래요, 강운 씨?”

주변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에 희나가 강운을 콕 집어 물었다. 희나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런 희나를 막아선 하진이 똑같이 얼굴에 웃음기를 띠우며 대답했다.

“데이트는 그쪽끼리 하세요.”

그쪽-.

‘그’에 도현을 ‘쪽’에 희나를 가리키면서 하진이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강운의 등장 이후로 입을 다물고 있던 도현이 느리게 입술을 연다.

“박하진 씨.”

못마땅함이 묻어 있는 어투가 하진을 불렀다.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데이트 아니니까 같이 먹어요.”

하진이 코웃음 쳤다. 우도현, 여희나, 박하진, 이강운. 넷이서 밥을 먹자고? 누굴 밥 먹다가 질식사시키려고 작정했나. 간신히 비소를 참은 하진이 도현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가까워진 거리에 하진의 숨이 도현의 귓바퀴에 닿았다. 몸을 움찔한 도현에게 하진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좆 까세요.”

그리곤 그대로 강운의 손목을 쥔 채, 자리를 벗어났다.

***

같은 시각. 태희는 대표실 의자에 앉아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손님 오셨습니다.”

그렇지. 역시 양반은 못 되는 녀석이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태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벌컥, 문이 열렸다. 남의 사무실 문을 다 부술 기세로 힘있게 등장한 남자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곤 태희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정체는 좀 감추고 오라 했더니 청개구리처럼 오히려 분홍 머리를 죄다 드러내고 온 서빈이었다. 그에 태희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앞에 우리는 빼 줘. 나 이제 너희 대표님 아니니까.”

“어쩜 그대로시네. 여전히 매정하셔. 그니까 그렇게 안 만나줬나?”

서빈이 어깨를 들썩이며 농담조로 말했다. 거기엔 오랜만에 만난 가족처럼 약간의 반가움도 녹아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반가운 건, 서빈뿐인지 태희는 서빈의 말장난에 응해주지 않았다.

태희 입장에서 서빈의 등장은 썩 달갑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팀을 해체로 이끈 게 결국은 한서빈의 자격지심이란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 자격지심이 박하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란 것 또한.

“갑자기 만나자는 이유나 들어보자.”

태희에게 유어 멜로디는 모두가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래서 복귀한다는 서빈의 소식에도 만남은 되도록 피해 온 것이다. 괜히 묻어둔 옛 생각에 마음이 아플까 봐. 혹여나 무리한 부탁을 하는 서빈을 옛정에 내치지 못할까 봐.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뭐?”

“소속사요. 제발 저 좀 꺼내 주세요, 대표님.”

태희가 염려했던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정확히 1년 전, 태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서빈처럼 지금의 서빈 또한 태희에게 다가와 손을 붙잡고 울먹였다. 같은 공간, 같은 모습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태희의 태도였다. 그때의 태희가 서빈을 믿었다면, 지금의 태희는 서빈을 믿지 않음에서 나오는 태도. 그 단호함이 달랐다.

“그런 부탁이라면, 돌아가. 나 너 못 구해줘.”

툭. 태희가 내친 서빈의 손이 떨구어졌다.

“저 대표님 아니면, 진짜 그 새끼 손에 죽어요.”

태희의 눈썹이 달싹였다. 이내 이 작은 동요를 알아챈 서빈이 곧바로 틈을 파고들었다.

“저 스폰 뛰어요. 우리 사장이 하래요. 이거 보여요?”

서빈이 목티를 내렸다. 그 아래로 울긋불긋하게 일어난 상처들은 언뜻 보기에도 심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은 줄 형태의 자국이었다.

“못한다고 했다가 죽을 뻔했어요. 목을 조르더라고요.”

서빈은 제 목을 감싸 쥐며, 목 조르는 흉내를 내었다. 줄곧 무심한 표정을 짓던 태희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곤 인상을 썼다.

“너 소속사가 어디야.”

“YN 미디어요.”

대충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 YN 미디어였다. 비교적 최근에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으로 연예인들을 모으고 있는 중소 엔터테인먼트. 그 이면엔 사장이 조폭 출신이라는 질 나쁜 소문이 떠도는 회사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아직은 소문뿐이라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서빈의 얘기만 들어보면, 사장이 완전 또라이 같긴 하다. 돈에 미친 건지, 권력에 미친 건지 저대로 내버려 두면 사람도 죽일 듯싶다. 누군가는 말려야 했다. 그러나, 태희는 그 누군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넌 나한테 뭘 해줄 건데?”

이건 거래였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는 거래. 아무 대가 없이 서빈을 구해주기엔 녀석이 이미 태희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태희는 이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일단 한서빈이 거는 것을 확인한 뒤,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태희는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했다.

“저 하진 형 동영상 있어요.”

그러나, 서빈의 한 마디에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뭐? 구체적으로 어떤?”

“형이 남자랑 몸 섞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찍힌.”

잠시 말을 멈춘 서빈이 싱긋 웃었다.

“아주 최근 동영상이요.”

한서빈의 부탁은 순식간에 한서빈의 거래, 혹은 협박 정도로 전락했다. 거기에 갑자기 박하진을 끼워 넣은 것이다. 태희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면서 서빈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한서빈이 얻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지금 소속사에서 빼달라는 것.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본인을 소속사에서 빼주지 않으면, 박하진의 섹스 동영상을 풀겠다는, 그 정도의 저급한 협박일 테다.

“너 그걸로 나 협박하니?”

“네.”

한서빈이라면, 없는 걸 가지고 협박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얻고자 하는 것은 얻는 녀석이기에 지금 당장은 없어도 동영상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다 만약 그게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생각도 하기 싫은 상상에 태희가 짐짓 얼굴을 굳혔다.

“서빈아.”

“…….”

“너 왜 이렇게 바닥이 됐어.”

소란스러운 머릿속을 뒤로한 채, 태희가 강하게 서빈을 나무랐다. 거래 초반의 기 싸움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그런 태희의 의도가 먹혀들어 갔는지 서빈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태희는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네 제안은 생각해볼게.”

“언제 답 주실 건데요.”

“삼일.”

일단 오늘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태희에겐 판단을 유보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이윽고 태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일 있어서 먼저 간다. 여기 있을 거면, 더 있어도 되는데 혹시나 허튼짓할 생각은 접고.”

“…….”

“여기 카메라만 5대야. 사각지대 그런 거 없다, 서빈아.”

그 말이 끝나고 얼마나 지났을까.

태희는 정말로 매정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서빈이 못마땅한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안 돼요, 대표님.

서빈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자 통화연결음에서 해체 전 마지막 유어 멜로디의 곡이 흘러나온다. 아, 이것 좀 바꾸라니까. 듣기 싫다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초조하게 상대방을 기다리던 서빈의 귀에 박힌 것은 단호한 거절 메시지였다. 뭐야? 잔뜩 짜증이 난 서빈이 다시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문득 어제 들은 것이 생각나 픽, 웃어버린다. 맞아. 오늘 만난다고 했지, 참.

부디 잘 속고, 속이기를.

***

“맛있다. 너도 얼른 먹어.”

하진이 꿀꺽, 부풀려진 볼을 삼켜내며 말했다. 그리곤 곧바로 앞에 놓인 밥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 젓가락질도 쉬지 않았다. 음식이 차려진 뒤로 계속 무리해서 밥을 먹는 듯한 하진의 모습에 강운이 물컵을 채워 하진에게 밀었다.

“형. 천천히 먹어요.”

저렇게 먹으면 체할 텐데. 강운의 말에도 하진은 여전히 젓가락을 쥐곤 음식 위를 방황했다.

“우 대표님 때문에 그래요?”

아. 짧은 탄식과 함께 하진의 젓가락질이 그제야 멈추었다. 행동을 멈추니 역으로 생각들이 밀려 들어왔다. 짜증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아침부터 설레던 제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고작 우도현, 여희나 투 샷에 추락할 만큼의 보잘것없는 감정이었으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우 대표님이랑 사이 안 좋은 거 알아요.”

“…….”

“왜 그런 사이 됐는지 물어봐도 돼요?”

하진의 침묵에 강운이 질문을 덧붙였다. 결국 하진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냉수가 든 물컵을 들었다. 꿀꺽, 차디찬 물을 삼키니 열이 조금 식는 기분이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저 형 좋아하잖아요.”

강운은 처음부터 하진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쉽게. 하진은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진도 사람인지라 자꾸만 좋아한다고 말하는 상대에겐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딱, 약해질 타이밍이었다. 하진은 당장이라도 강운에게 기대어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과거 얘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하진이 입을 떼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둔 강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매니저님]이라고 띄워진 액정. 강운은 이를 보고는 재빨리 거절 버튼을 누른 뒤, 핸드폰을 뒤집었다.

“전화 받아도 돼.”

“안 받아도 되는 전화예요.”

어딘가 부산스러운 강운의 행동에 하진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매니저 전화를 굳이 안 받을 이유가 있나? 저야 뭐, 원래 막 나가는 사람이라 쳐도 강운은 저번에 보니 매니저에게 깍듯한 것 같았는데. 아닌가. 잘못 본 건가. 찝찝함을 잠시 미뤄둔 하진이 삐딱하게 강운을 바라봤다.

이윽고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전화가 아닌 메시지인 듯했다. 곧 짧게 자판을 두들긴 강운이 핸드폰을 다시 뒤집었다. 더 이상의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맴돌았고, 그 사이로 강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무척이나 뜬금없이.

“저도 그런 사람 있어요.”

강운의 시선이 하진과 부딪쳤다.

“그런 사람이 뭔데.”

“남보다 못한 친구.”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하진이 움찔했다. 제가 하려던 말을 강운이 먼저 꺼낼 줄은 정말 몰랐다. 놀랍기도 놀라운데 맞닿은 강운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아서, 하진은 뭘 더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처럼 강운도 누군가와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그렇게 넘겨야만 했다.

“…그딴 걸 친구라고 할 수 있나.”

다만 자조적인 물음은 막지 못했다. 이 질문은 아마 하진이, 본인에게 하는 것이었을 테니.

“친구도 아니면, 그냥 남이 되잖아요.”

남이 될 게 두려워서 허울뿐인 친구를 유지한다는, 뭐 그런 뜻인가. 하진은 강운의 모습에서 얼핏 자신을 엿보았다. 그래서 꼭 강운의 대답이 제 대답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도현과 박하진은 친구와 남, 그 경계 어디쯤일까. 정말 남이 되기 두려워 이런 식의 친구를 유지하려 하는 걸까. 하진은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너 나 좋아한다며. 말하는 걸로 봐서는 그 친구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 또한, 본인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으나 하진은 의식하지 못했다.

“형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 친구 좋아하는 건… 잘 모르겠어요.”

“나 좋아한다는 새끼들은 왜 이렇게 다들 마음이 두 개씩인지 모르겠네.”

“…미안해요. 그래도 형한테는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어요.”

뭐가 미안하냐는 비련의 주인공 같은 대사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위로 같은 것도 제 성질머리에는 영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하진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제 식대로 가벼이 출구를 찾아 나선다.

“어차피 나도 무거운 건 싫으니까 잘됐어.”

대수롭지 않은 듯 그저 어깨를 으쓱이면서.

“가자, 그럼.”

“어디요?”

“우리 집 여기 근처거든.”

“…….”

“가볍게 만나야지.”

가볍게. 감정을 나누는 것 말고 서로의 생각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욕구만 푸는 관계. 박하진한테는 이게 어울린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가벼움 말이다. 하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키 줘. 내가 운전할게.”

“아,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그럼 나 먼저 차에 간다. 넌 좀 이따가 나와.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은 거 없잖아.”

강운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본 하진은 곧바로 방을 나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토록 ‘가볍게’를 외쳤으면서 퍽 우스운 일이었다. 아까의 적막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소란스러운 바깥임에도 하진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도현 생각하느라 본인 머릿속이 더 난장판이니 당연했다. 식당의 출입문을 열기 전까지도 하진은 계속해서 도현을 떠올렸다. 그렇게 하진이 문을 연 순간이었다.

“우도현 씨, 여희나 씨. 열애설이 사실입니까?”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웅성거림이 하진에게로 쏟아졌다. 아, 아니다. 하진에게가 아니었다. 갖은 소음과 관심의 종착지는 문을 연 하진 앞에 서 있는 두 남녀였다. 우도현. 여희나. 열애설. 질서정연한 단어들의 나열임에도 하진은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네. 저희 서로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도현이랑 여희나랑 열애설이 터졌다고? 둘이 진짜로 사귄다고?

“하! 미친놈.”

저도 모르게 하진은 비소가 실린 혼잣말을 내뱉었다. 대본 리딩 때 사랑놀음 어쩌고 하던 게 진짜였어? 우도현, 저 새끼가 하도 정색하길래 가짜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또 엿을 먹이네. 사람 존나 안 바뀐다, 그치?

잠시나마 남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게 한심해졌다.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남보다 못한 친구가 될 바엔 남이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네. 돌고 돌아 하진이 내린 결론이었다.

“우도현 대표님은 할 말 없으신가요?”

“…아.”

“…….”

“감사합니다.”

하진의 미간이 단번에 우그러졌다. 들끓는 속이 당장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았지만, 억지로 꾸역꾸역 참아냈다. 화가 났다. 억울했다. 뭐가 화가 나? 뭐가 억울한데? 감정이 물음표를 달고 튀어나왔다.

몰라. 모른다고.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을 하진은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하진 씨도 한마디 해주시죠!”

아? 어떻게 알았…. 더듬거리며 얼굴을 만지니 뭔가 허전했다. 씨발. 선글라스를 두고 왔다.

“아, 저요? 하하.”

갑자기 제게로 들이닥친 기자들의 관심에 하진은 하마터면 대뜸 욕부터 내뱉을 뻔했다. 그랬다면 아마 저 둘의 열애설보다 자신의 욕설 파문 기사가 더 이슈화됐을 테지. 하지만 하진은 프로였다. 무거운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도현과 희나 사이를 파고들곤 어깨동무까지 하는 그런 프로.

“잘 어울리는 커플 같아요. 오래오래 만나시길 바랄게요.”

그날 실시간 검색어는 1위 [여희나 열애설] 2위 [우도현] 3위 [여희나 우도현]의 뒤를 이어 4위에 [박하진 인터뷰]가 엎치락뒤치락 순위 싸움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박하진 욕설은 없었다.

***

또 그 꿈을 꾸었다.

‘박하진 게이래.’

눈 앞에 펼쳐진 익숙한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 정확히 수능을 앞둔 한 달 전이었다.

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와 동시에 우도현은 박하진을 피하기 시작했다.

‘야, 오늘 야자….’

‘미안. 나 과외.’

다른 반이니까, 야자를 하지 않으니까 등의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수능만 끝나면 달라지겠지. 시간이 많아지면 같이 놀겠지. 그런 희망 하나로 무자비한 소문의 공격을 버텨냈다.

하지만, 수능이 끝났어도 똑같았다. 우도현은 여전히 박하진을 피했다. 명확해졌다.

‘도현아, 너 박하진이랑 친했잖아. 걔 게이인 거 알았어?’

‘야, 더러우니까 그딴 소리 좀 그만해.’

‘아, 염상인 눈치 존나 없어. 도현이 박하진 게이인 거 알자마자 손절 친 거 안 보이냐.’

껄렁한 녀석들의 농담에도 우도현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떠한 대꾸나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방관일 뿐. 우도현을 향한 믿음에 돌아온 것은 배신감이었다.

분노로 얼룩진 눈물과 함께 꿈은 늘 여기서 멈추었다. 그때 진짜로 울었던가. 눈물이 없는 편이라 울진 않았던 것 같은데 꿈에서 저는 왜 항상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착했어요, 형.”

희미한 아이들의 목소리 위로 수찬의 선명한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곧바로 하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만 안 떴을 뿐, 일찌감치 깨어있던 터라 정신이 또렷했다. 그래서 차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보육원의 모습 또한, 아주 선명했다.

“지금 일정이 재능기부였나.”

“넵. 저기 보이는 건물이 W 재단에서 후원하는 보육원이에요.”

많이 달라졌네. 하진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자신도 보육원 이름 보고 안 것이지 그것마저 바뀌었다면, 아마 못 알아봤을 것이다. 본인이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그 보육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분명 붉은색 벽돌이었는데 언제 저런 시멘트로 바꿨대. 데뷔하고 나서부터 안 왔으니까 한 10년 됐나. 그맘때쯤 원장님이 돌아가셔서 올 명분이 없어졌었지, 아마.

“오늘은 릴레이 토크라서 춤은 안 추고요. 자세한 건 W 재단 측 관계자랑 얘기해보고 알려드릴게요.”

“춤은 언제부터랬지?”

“2주 뒤부터 한 달간 진행이요. 연초 재능기부 콘서트까지 하면 끝이에요.”

춤 얘기에 하진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와 더불어 입술 안쪽 살을 씹어대는 행동은 불안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역시 우도현이 재능기부 어쩌고 할 때, 확실히 거절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할까. 근데 이제 와서 뭐라고 말해. 아직 춤을 시작할 준비가 안 됐다고? 내년이면 데뷔 10년 차 아이돌이 그런 소리 하면 잘도 믿겠다. 그냥 무대 공포증이 생겼다고 솔직히 말할까? 아니야. 열애설로 ST 주가 하락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래. 젠장. 우도현의 꾐에만 현혹되지 않았어도 이런 고민할 필요 없었을 텐데. 하여튼 뭐든 우도현이 문제다, 망할 새끼.

“형, 안 내리세요?”

뒷좌석 문을 열었는데도 가만히 있는 하진에게 수찬이 재촉했다. 아씨, 그래. 당장 무대서는 건 아니니까 일단 해보자. 그렇게 하진은 겨우 늘어진 불안감을 진정시키곤 차에서 내렸다. 찬 공기가 훅하고 하진에게 밀려 들어왔다. 얇은 옷 아래로 소름이 돋아났다.

“와씨, 너무 추워.”

하진은 그대로 몸을 웅크린 채 앉아버렸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존하려는 방법이었다. 하진이 이렇게 추위 타는 것을 보자 아차 싶었던 수찬이 재빨리 트렁크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에, 누군가 하진에게 접근했다. 곧 하진의 시야에 번지르르한 갈색 구두가 나타났다.

“박하진 씨, 오셨네요.”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함께 남색 양복을 훑고 올라간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썩 반갑지 않은 인물이라 곧바로 미간이 구겨졌다. 이 새끼는 왜 왔대.

“우도현 대표님이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네요.”

하진은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어쩐지 아침부터 우도현 나오는 꿈을 꿨다 했더니 오늘 하루는 재수 없으려나 보다. 망할 새끼라고 욕하자마자 진짜 그 망할 새끼를 마주하다니.

“우리 W 재단 첫 번째 재능기부 행사인데 당연히 와야죠.”

“대표님, 되게 한가하신가 보다.”

떨떠름한 표정의 하진에게 도현은 비즈니스 미소로 화답했다.

“그럴 리가요. 박하진 씨 보려고 특별히 시간 내서 온 겁니다.”

“대표님이 특별히 시간 내서 보러 가실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 속에 무수히도 많은 뼈가 있었다.

“데이트하기도 바쁠 때잖아요.”

“글쎄요. 데이트 안 한 지가 오래돼서. 어쨌든 제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네요.”

도현도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도현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진에게 대답했다. 허? 하진은 기가 찼다. 불과 24시간 전에 열애설 터진 사람이 할 말인가 싶어서. 그리고 그게 하진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놈의 방관자 노릇은 언제까지 할는지, 존나 비겁하게.

“여자친구분이 들으시면 서운하시겠네.”

“안 그래도 그거 관련해서 할 말이 좀 있는데. 행사 끝나고 잠깐 얘기 좀 하죠.”

“이거 어쩌나. 제가 저녁에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요.”

“박하진 씨, 스케줄 없으실걸요? 제가 좀 전에 확인했거든요.”

도현이 말하면서 수찬을 가리켰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수찬은 하진이 보기 전에 얼른 차 뒤로 몸을 숨겼다. 조금만 더 느렸다면, 하진의 매서운 눈초리를 온몸으로 당해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갈 곳 잃은 하진의 시선은 도현을 향하게 됐고, 이내 하진이 다시 공격 모드를 장착할 때였다.

“두 분 말싸움… 아니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한데 원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김 비서가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개입했다. 그 덕분에 하진과 도현의 신경전은 승자 없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제야 롱패딩을 손에 쥔 수찬이 쭈뼛쭈뼛 하진에게 다가온다. 딱 봐도 무서워서 피한 눈치였다.

“…형, 이거 입으세요.”

“야, 임수….”

“아이고! 하진 씨, 오셨구나!”

신이 수찬을 도왔다. 하진이 수찬에게 뭐라 하려는 순간, 때마침 보육원 원장님께서 등장하시니 말이다. 하진은 어색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가수 박하진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알죠. 이렇게 재능기부까지 해주시다니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특출난 재능은 아닌지라 송구스럽지만, 좋은 보탬이 되면 좋겠네요.”

원장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하진이 손을 잡곤 허리를 숙였다.

“모쪼록 오늘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합니다.”

“네. 이따 끝나고 다시 인사하러 오겠습니다. 원장님께서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래요, 그래.”

마무리 인사와 함께 하진은 차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괜히 보육원 쪽으로 갔다가는 인사까지 다 한 마당에 같이 걷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아서였다. 손에 든 롱패딩을 입으면서 하진이 주위를 둘러봤다. 이상하게 무언가를 잊은 듯한 기분이 들어 뭔지 생각해보니 임수찬이었다. 얜 또 어디로 간 거야. 차 키도 없는데 설마 차 문 닫은 건 아니겠지.

“저기….”

하진이 거의 차에 도달했을 즈음, 힘없는 목소리가 하진을 불렀다. 아니, 정확히는 불명확한 지칭 대명사라 하진, 본인인지는 모르겠다. 걸음을 멈춘 하진이 일단 뒤를 돌았다.

“응?”

거기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한 명이 뻘쭘한 듯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눈도 안 마주치고 그렇게 있는 아이를 향해 하진이 갸웃거리자 아이가 말했다.

“팬이에요…!”

아이는 하진 앞에 불쑥 무언가를 내밀면서 소리쳤다. 하진의 시선이 그것에 닿았다. 유어 멜로디의 마지막 앨범이었다.

“와, 내 팬이에요?”

하진이 앨범을 받아들며 물었다. 자세히 보니 한정판이다. 이거 가지고 있으면, 진짜 찐팬인데. 뭔지 모르게 가슴이 뭉근해졌다.

“네… 형 너무 멋있어요.”

“우리 친구 사람 볼 줄 아네. 사인해줄까요?”

“헐, 진짜요? 네, 네!”

여느 때보다 밝게 대답하는 아이의 모습에 하진이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하진의 마음이 변할까 싶었는지 아이는 얼른 제 주머니에서 유성펜을 꺼내 하진에게 건넸다. 이를 받은 하진이 [To.]를 적어 놓고 밑 공간에 정성스레 사인을 시작했다.

“형이 제 롤 모델이에요.”

“꿈이 가수?”

“네. 형처럼 멋진 아이돌 되고 싶어요. 저 형 무대 영상 보고 춤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행복해하는 아이의 모습에 하진도 따라 미소 지었지만, 입꼬리는 점점 경직되어 갔다. 예전엔 자신이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 가슴 벅찰 수가 없었는데 요즘엔 그 말 하나하나가 제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될 만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그룹이 해체되고부터는 부쩍 그런 생각이 늘었던 것 같다.

“컴백할 때까지 응원할게요! 형 춤추는 거 진짜 너무 보고 싶어요.”

컴백이란 말에 하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답지 않게 머뭇머뭇하던 입은 결국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하진은 그랬다. 어느 순간 춤이라는 한 단어가 품고 있는 수만 가지의 의미가 폭풍우처럼 몰아쳐서, 그 속으로 들어가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주춤주춤, 춤으로부터 멀어졌었다.

무대를 바라는 팬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넷이 함께했던 무대에 혼자 서는 게 아직은 두렵다는 핑계를 대며, 미루고 미룰 뿐.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 무대를 채워나갈 역량이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무대가 그립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그립기보다는 무서웠고, 무섭기보다는 미안했다. 손가락질 정도야 견딜 수 있다지만,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유어 멜로디 팬들을 향한 죄책감이었다. 그들의 사랑과 정성을, 그 모든 추억을 일순간에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그 죄책감이 과연 제가 무대에 서도 되는지에 대한 반문으로 돌아왔으니까.

유어 멜로디가 해체한 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남은 건 박하진 하나라는 그 자체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차라리 현실이 아닌 게 나을 법한데, 빌어먹게도 현실은 현실인지라 견디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도 도망쳤다. 그 현실로부터 지금까지도 도망치고 있었다.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 가벼워져야 했고, 가벼워졌기에 더더욱 멀리 도망치고 있는, 악순환의 반복.

“아, 친구 이름이….”

“야, 이도현! 얼른 와!”

“어, 잠깐만!”

마음 한구석에선 이 고리를 끊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도현이요. 이도현!”

들뜬 아이의 입술이 도현이라는 이름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펜을 쥔 하진의 손이 멈칫했다. 이 타이밍에 저 이름을 들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분명 성이 다른데도 괜히 찔렸다.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아침부터 우도현으로 시작해서 온종일 우도현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그런 날.

“감사합니다, 형. 늘 응원할게요! 이따 봐요!”

“그래. 이따 보자, 도현아.”

하진이 앨범을 건네자 어린 도현이 감격한 얼굴로 앨범을 품에 안았다. 이내 어린 도현은 자신을 부르던 친구에게로 발걸음을 뗐고, 하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하진을 휘감은 묘한 감정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도현때문에 춤을 시작했고, 춤을 그만둔 지금 다른 도현이 와서 춤을 응원한다는 이 기이한 광경. 하진은 이 속에서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가슴께가 답답했다.

“박하진 씨, 왜 대답이 없어요?”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도현이 하진의 어깨를 거칠게 쥐고는 본인 쪽으로 돌렸다. 저 멀리서부터 서너 번은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는 하진에 잔뜩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아니, 왜 말을….”

하진의 초점 없는 눈동자와 시선이 엉킨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넋이 나가 보인 터라 도현이 세게 하진을 흔들었다. 그 탓에 하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러다 툭. 뜨거운 무언가가 하진의 콧잔등을 타고 떨구어졌다.

지진이 아니라 해일이었다. 하진의 눈동자 속에 해일이 몰려왔다.

“야. 너 울어?”

아닌데. 울 리가 없는데. 분명 그럴 리 없는데도 우도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우그러져 있었다. 몰려온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 툭. 투두둑. 하진의 볼을 침범했다. 급하게 손등으로 막아보려 해도,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손등만 더욱 축축해져 갔다.

“좆 까. 안 울어.”

그 와중에도 우도현만은 밀어냈다. 나약해진 틈을 타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더욱 꽉, 짓누르며 참았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그런 하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도현은 떨군 하진의 고개를 우악스럽게 쳐들어 올렸다. 눈동자 속 해일이 도현, 자신까지 집어삼킬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삼켜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뭔데.”

하진의 손등을 쳐낸 도현이 제 엄지로 하진의 볼을 강하게 쓸어내렸다. 하진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억눌린 그의 화가 흩뿌려져 볼을 달아오르게 했다. 어느새, 볼을 메웠던 물기는 사라진 상태였다.

“왜 울어.”

“왜 불렀어.”

“왜 우냐고.”

분명 물음표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도 하진과 도현은 무미건조한 어투로 일관할 뿐이었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던 시선을 먼저 떼버린 것은 한숨을 내쉰 도현이었다. 제 물음에 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하진과 더 이상 무슨 대화를 하랴. 사실 더 채근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위태로운 하진을 대하는 방법을 도현은 아직도 잘 몰랐으니까.

“야.”

“…….”

“같잖은 위선 떨지 말고 비켜.”

도현이 붙잡은 손을 하진이 놓은 채, 그렇게 하진은 멀어져갔다.

***

한 시간가량 이어진 릴레이 토크는 이제 마지막 질문만이 남아 있었다. 눈이 뻐근했다. 이유도 모른 채 울어버려서 그런가. 그것도 하필이면 우도현 앞에서.

“이제 질문 하나만 더 받겠습니다.”

건조한 눈을 비비는 하진의 옆에서 사회자가 말했다. 사회자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처음과 같이 카랑카랑했고, 그 기세로 사회자가 관객석을 바라봤다. 하진 역시 사회자를 따라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손든 이는 없었다.

“춤이나 꿈 관련된 거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요즘 하는 고민 같은 것도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꽤 민망한 상황. 이를 탈출하고자 하진이 말을 덧붙였다. 이 큰 강당에서 백여 명 남짓한 아이들이 만들어낸 정적이 상당히 뻘쭘했다. 제발 아무나 하나만 질문해줘라. 하진은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관객석을 살폈다. 이윽고, 하진의 눈에 띈 아이가 있었다. 곧 그 아이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고, 하진이 아이를 가리켰다.

“무슨 고민 있어요?”

하진의 물음에 아이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순식간에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아이를 향하게 되었다.

“친구랑 싸웠는데 어떡해요….”

와하하-!

강당을 휘감았던 침묵이 돌연 웃음으로 뒤덮였다. 그에 간신히 입을 열었던 아이의 입술이 다시 꾹 다물렸다.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떡하냐고 주변 친구들이 아이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아이는 굳건히 서 있었다. 비록 부끄러움에 고개는 숙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진이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마이크를 들었다.

“너무 좋은 질문인데요? 우리 중에 친구랑 안 싸워본 사람 손에 꼽잖아요.”

하진은 말끝에 부드러운 웃음을 달았다. 그러자 강당을 맴돌았던 비소가 멈추었고, 아이도 고개를 들었다.

“지금 주제가 꿈이라서 여러분들이 저 질문을 등한시하는 것 같은데 사실 친구가 자신의 꿈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커요. 특히 여러분 같은 청소년기 학생들은 더욱. 저 역시도 그랬고요. 그러니까 친구랑 싸운 건 아주 중요한 문제죠.”

다정한 하진의 말이 주변을 감싸 안는 듯했다. 정작 본인은 그 때문에 수도 없이 상처받았으면서. 어쩌면 그래서 더 아이의 고민에 공감해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자신에겐 누구도 먼저 손 내밀어 주지 않았으니까.

곧 하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강당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털썩, 그 끝에 걸터앉았다.

“친구는 이름이 뭐예요?”

“이도현이요.”

이미 알고 있어 놀라지 않은 하진을 대신해서 놀란 것은 이를 앞에서 듣고 있던 도현이었다. 하진과 아이들의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이나 도현과의 거리도 가까워진 탓에 하진은 제 볼에 닿는 시선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도현이는 싸운 친구랑 화해하고 싶어요?”

하진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도현이 움찔했다. 하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사실은 혓바닥 위를 맴도는 이질감에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제 질문이 도현을 향한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 이질감이 지나쳐 언뜻 서글픔도 들었다.

“싫은 건 아니죠?”

“네….”

하진이 시선을 떨구었다.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사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긋나버린 시선이었지만, 종착지는 같았다.

“그럼 먼저 손 내밀어보세요.”

아마도 열아홉 그때로.

“제가 잘못한 거 아닌데….”

“그럴 수 있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먼저 사과해야 하지? 자존심 상하죠. 근데 자존심은 짧고, 후회는 길 거예요. 그리고 보통 후회는 했을 때 보다 안 했을 때 더 크더라고요.”

“…….”

“제 경험이에요.”

하진이 덤덤히 내뱉는 말 하나하나는 모두 그때의 하진을 향하고 있었다. 용기가 없어 먼저 내밀어보지 못했던 그 손은 뒤늦은 후회 속에서 모진 바람을 견뎌야 했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했다고 사과라도 해볼걸. 그 후회 하나로 날카롭게 베인 살갗은 아물고, 다시 베이고를 몇 년간 반복하여 간신히 무뎌졌다.

“형도 후회했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 때면, 시리고 아팠다.

“후회했죠.”

무던히 미소를 지은 하진은 어린 도현에게 대답하곤 그대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애써 끌어당긴 입꼬리가 유약하게 떨려왔다. 이내 표정을 숨기고자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하진에게 또다시 물음이 던져졌다.

“지금은 어떻게 됐는데요?”

발걸음이 멈췄다. 하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윽고 여전히 관객석을 등진 채 대답했다.

“음.”

“…….”

“남이요.”

남보다 못한 친구도 아니라 그냥 남. 이게 하진이 내린 자신과 도현의 관계였다.

***

“형, 고생하셨어요. 전 관계자분이랑 얘기할 게 있어서 형 먼저 차로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어.”

꿈 토크에서 고민 상담으로 바뀌어버린 행사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마지막 질문을 하고도 세 명의 고민을 더 들어준 뒤에야 완전히 끝이 났다. 그 후, 보육원 아이들이 강당을 먼저 나가도록 한 하진은 끝까지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강당을 빠져나왔고, 수찬의 말에 따라 차로 걸음을 옮겼다. 점심도 거른 채 시작한 행사였는데 벌써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겨울이라 그런가, 해가 빨리 졌다. 약간 푸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진이 그렇게 차 앞에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썩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차 문에 기대어 하진을 맞이했다. 하진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우 대표님이 무슨 일이신지?”

도현이었다. 하진의 대답에 이번엔 도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놈의 대표님 소리 좀 그만해.”

“대표님을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왜요?”

“차라리 그냥 야라고 불러.”

“친구도 아니고 남인 사이에 어떻게 그래요.”

도현이 틈을 노릴 수 없도록 하진은 견고히 벽을 쳤다. 그것은 도현의 눈동자에서 밝게 빛나던 기대감을 잿빛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시선은 하진을 향해 있었다. 곧고, 단단한 그 시선이 하진의 벽을 부수려 했다.

“아까 네가 한 말 듣고 혼자 생각 많이 했어.”

도현은 좀 전의 어린 도현에게서 하진이 그랬던 것처럼 열아홉의 자신을 보았다. 도현에게 피어난 기대감 역시 그것의 일종일 테고. 혹시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하진은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붙잡은 도현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래서 뭐 하자고.”

마지못해 자리에 멈춘 하진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떨어진 시선 끝에 자신을 붙잡은 도현의 손이 닿았다.

“미안해. 저번처럼 욱해서 하는 말 아니고 진심이야.”

“…….”

“그때 먼저 손 내밀지 못한 것도, 네가 내민 손 잡지 못한 것도 미안해.”

도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진은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네가 내민 이 손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우린 달라졌을까.’

미련한 후회였고,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이었다. 그리고 하진은 더 이상 미련해지고 싶지 않았다. 설령 저것이 도현의 진심일지라도 그저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 심하게 벽을 쳤는지도 모르겠다.

“나랑 잘래?”

“뭐?”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듯한 말에 도현이 눈썹을 구겼다. 하진의 입가엔 어느새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나 우는 것 좀 봤다고 이러는 거잖아, 너.”

하진이 내뱉은 말은 도현의 진심 또한 사정없이 구겨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도현은 참았다. 하진이 일부러 제 성질을 건드린다는 것을 잘 아니까 앞머리를 거칠게 넘기면서도 화는 내지 않았다. 하지만, 하진은 굴하지 않고 말을 보탰다.

“내가 네 밑에서 앙앙거리면, 너 아주 죽겠다?”

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일그러졌다. 박하진 머릿속에는 연구소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그 연구소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도현 심사를 뒤틀리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종일 진행 중일 것이다. 덧붙여서 정떨어지게 말하는 법도 같이. 그 연구소는 늘 일을 잘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하진이 뱉어낸 말이 어떻게든 화를 참아내려던 도현의 성깔을 확, 건드린 것을 보면 말이다.

결국 도현이 졌다.

“앙앙대보든가.”

도현은 당장이라도 하진을 넘어뜨릴 기세로 다가갔다. 하진이 뒤로 물러날수록 도현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이내 퍽하고 하진의 등이 차 문에 부딪혔다. 도현의 드센 발걸음이 멈췄고, 얽히고설킨 시선에 냉랭함만이 감돌았다. 곧 도현은 무지막지하게 하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곤 차 문을 열어 하진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차 시트에 몸을 기대게 된 하진의 위로 삽시에 도현이 올라탔다.

“어디 한번 울어 봐.”

도현이 하진의 귀를 물었다. 흣.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아낸 하진이 도현의 가슴팍을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속삭일 뿐이었다. 하진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맞부딪친 아래가 달싹거렸다.

“아까처럼 울어 보라고.”

“…야. 씨발, 안 꺼져? 야이씨….”

윽. 일순간 목덜미를 침범해오는 생경한 감각에 하진이 필사적으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도현의 입술이 턱 밑을 쓸고 내려오면서 하진의 목울대를 건드렸다.

“…아흐. 우도… 흣”

목울대는 하진의 성감대였다. 이를 알아챈 도현이 혀끝으로 살살, 목울대를 비비자 하진의 의지완 달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힘 빠진 손으로 도현을 밀었지만, 이는 오히려 도현을 자극할 뿐이었다. 이윽고 도현은 이미 두어 개 풀려 있는 하진의 셔츠 단추를 가슴까지 풀었다. 그러자 새하얀 피부 위로 붉은 반점처럼 열띤 홍조의 하진이 드러났다. 불그스름한 피부를 노골적으로 훑던 도현은 쇄골 바로 아래 부근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그가 보고야 만 것이다. 쇄골 바로 아래 새빨갛게 남아 있는 키스 마크를.

“박하진, 참 빨라.”

도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윤조랑 그렇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씨발.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내 도현의 엄지가 키스 마크 부분을 강하게 짓눌렀다.

“이번엔 또 어떤 새끼야?”

“아! 아흣… 파…!”

하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도현은 멈추지 않고 그 자국 위에 제 이를 가져다 댔다. 그리곤 꽉, 본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도록 그곳을 깨물었다. 하진이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도현의 얼굴을 붙잡자 도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섹스할 사람 많아서 좋겠다, 하진아.”

이 새끼 눈깔이 돌아버렸다. 어느 포인트에서 꼭지가 돈 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 우도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퍽퍽, 사정없이 도현의 단단한 가슴팍을 가격하던 하진의 손마저 도현에게 붙잡혔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도현이 하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파… 씨발, 아프다고!”

하진이 발악하자 그제야 도현은 힘을 풀곤 손목을 내팽개쳤다. 하지만, 달뜬 숨은 여전히 하진의 목덜미를 적셨다. 이어서 뻐근한 아랫배에 묵직한 것이 닿았다. 그와 동시에 도현의 낮은 으름장이 귓바퀴를 타고 굴러들어왔다.

“박하진. 말본새 좀 고쳐. 사람 욱하게 하지 말고.”

“…….”

“경고했다.”

그렇게 도현은 하진에게서 떨어져 그대로 차를 나왔다. 곧 쿵 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하진은 그저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시트에 몸을 늘어뜨릴 뿐이었다. 하아.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숨은 몹시도 뜨거웠다. 더불어 그 좁은 차 안은 이미 하진과 도현의 흥분으로 얼룩져버린 상태였다. 이 상황 하나하나가 모두 꼴사나웠다. 그중에서 제일은 역시 잔뜩 서버린 아래일 테고.

“…씨발.”

하진이 움찔거리는 제 아래를 보면서 진심으로 욕을 뱉어냈다.

***

“우리 하진이 드라마 시작 전에 영양 보충시켜주려고 데려왔는데 왜 이렇게 깨작거려?”

태희가 제 앞에서 힘없이 젓가락을 놀리는 하진을 타박했다. 그에 그렇지 않아도 몇 번 움직이지 않은 젓가락을 탁하고 내려놓는 하진이었다. 하진은 심히 익숙한 음식들과 내부 인테리어를 훑고는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어제 여기 왔어요.”

“진짜? 네가 언제?”

“낮에 우도현 열애설 나고, 제 인터뷰 기사 대문짝만하게 나왔잖아요. 거기가 여기예요.”

하진의 나름 덤덤한 대답에 경악한 것은 태희였다. 태희는 어제 곧 데뷔시킬 그룹 때문에 너무 바빠 미처 하진의 기사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욕 안 했으면 됐다는 생각으로 기사 헤드라인만 읽고 넘겼던지라 사진은 자세히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 여기라니.

“어머. 거기가 여기였니? 일어나. 다른 거 먹으러 가자.”

미안한 마음에 태희가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를 보이자 하진이 피식, 웃었다.

“역시 우리 대표님 화끈해.”

“사주고도 욕먹을 뻔했다. 뭐 먹을래?”

“됐어요. 그냥 장난 좀 쳐본 거예요.”

하진이 싱겁게 대답했다. 그리곤 옆에 있던 메뉴판을 펼쳐 제일 마지막 주류 종류를 정독한다. 맥주, 소주는 오늘따라 안 당긴다. 그렇다면, 오늘은 막걸리로.

“막걸리 시켜도 돼요?”

“내일 스케줄 없니?”

“넹. 이틀 뒤부터 드라마니까 오늘 딱 막걸리 마시고 내일 집에서 푹 쉴게요.”

“말이라도 못하면.”

말과 달리 태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혹여 태희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얼른 벨을 누른 하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밤 막걸리 두 병을 시켰다. 왜 두 병 시키냐고 눈으로 묻는 태희에게 하진이 똑같이 눈으로 대답했다. 직원분 왔다 갔다 하시기 귀찮으니까 한 번에 시켰어요. 술에 관해서는 참으로 관대한 주당 박하진 선생의 배려였다.

“대표님도 한잔하실래요?”

하진은 막걸리 두 잔을 빠르게 세팅했다. 밤 막걸리 너무 맛있지. 생각 끝에 콧노래도 섞여 나왔다. 그러다 “하진아.”라고 진지하게 자신을 부르는 태희에 고개를 들었다.

“우리 오늘 오랜만에 마시고 죽어볼까?”

막걸리를 따르던 하진의 손이 멈칫했고 마주한 태희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는 마치 어언 3년 전, 하진이 군대 갈 무렵 다 컸다며, 대작해도 되겠다던 태희를 떠올리게 했다.

“대표님.”

그에 하진 역시 태희처럼 결연하게 대답했다.

“완전 찬성.”

하진은 안다. 태희는 슬플 때 술을 찾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도 겉으로 티는 안 나지만, 어디서 몹시 슬픈 일을 겪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하진이 아는 또 하나. 태희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기본 단위가 열댓 병이며 이것을 다 개인카드로 결제한다는 것. 하진은 코끝을 찡긋거리면서 태희에게 꽉 채운 막걸릿잔을 건넸다.

“짠!”

지금 하진이 건넨 것은 태희를 향한 위로의 손길, 아니 위로의 술 길이다. 태희는 위로받아 좋고, 하진은 맘껏 술 마셔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크으-! 목구멍으로 막걸리를 넘긴 하진이 기깔나게 소리를 내뱉었다. 오늘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그런가, 술맛이 달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알코올 때문인지 쇄골 아래는 화끈거렸다. 하진이 무심결에 인상을 썼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 괜찮아요. 그냥 아까 좀 짜증 나는 일이 있었어요.”

“박하진 짜증 나게 만드는 건, 역시 우도현 관련일 테고?”

“그렇죠, 뭐.”

하진은 태희에게 차마 ‘우도현이 제 목덜미를 빨았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진이 대충 말을 얼버무리자 태희는 더는 묻지 않은 채, 그저 빈 잔을 채워줬다. 이내 잔이 가득 찼고, 태희가 먼저 제 잔을 들어 올리며 묻는다.

“넌 아직도 도현이가 밉니?”

그와 동시에 툭-. 노란 양은 그릇의 둔탁함이 울려 퍼졌다. 하진의 잔 속 연노란색 막걸리도 함께 출렁였다.

“미운 정도가 아닌데요.”

“애증, 뭐 그런 건가?”

“애는 빼주세요. 우도현한테 남은 감정은 증뿐이니까.”

잔을 제 앞으로 가져온 하진이 막걸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탁해서인지 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진은 생각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잘만 지내던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앙숙이 됐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던 태희는 이번에도 똑같았다. 이런 태희의 배려 앞에서 하진이 무방비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 참. 도현인 갑자기 웬 열애설?”

“진짜로 사귀나 보죠.”

제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무심하게 대답한 하진에게 태희는 단호히 말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희나, 걔는 사람 보고 움직이는 거 아니야. 돈 보고 움직이지. 어릴 때부터 그랬어.”

태희는 하진보다 희나를 먼저 알았다. 도현이 하진을 연습실로 데려오기 전부터 희나는 W 엔터 연습생이었고, 태희는 희나를 캐스팅한 개발팀 팀장이었으니까. 물론 희나를 회사에서 방출시킨 것도 태희였고.

“우도현은 진짜로 좋아했잖아요.”

“누가? 여희나가? 도현이를?”

하진의 기정사실화에 태희는 연달아 물음표를 던졌다. 그 모습이 하진으로서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태희의 말투에 비소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진이 연습생 초반일 적에 희나와 다른 연습생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대강 알지만,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지라 태희의 비소가 그때와 관련된 건 아닐지, 하진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우도현도 여희나 좋아했다던데요.”

“그거 여희나가 그랬지? 걔는 거짓말 병이야. 그거 때문에 도현이가 피해를 얼마나 봤는지 아니? 연습생들 사이에서 여희나 빽이 우도현이라고 소문이 파다해져서 사장님한테도 불려가고 그랬어.”

“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건데요? 진짜로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닌가?”

“연습생들이 자길 무시하는 게 싫었대. 아이돌 하기엔 여희나는 외모나 재능이나 어중간했으니까.”

결국 여희나의 자격지심이 문제였다는 말인가.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격지심 참 무섭지. 잠깐 방심한 사이 자신을 좀 먹으니까. 태희가 잠시 물로 목을 축이고는 이어 말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우도현이랑 여희나의 열애는 사실일 리가 없다. 이게 내 결론이지. 서로 기브 앤 테이크가 있지 않았겠어? 내가 궁금한 건, 우도현이 여희나한테서 얻을 테이크가 뭘까, 이거고.”

그 순간, 하진은 저번부터 얘기 좀 하자던 도현이 떠올랐다. 아, 설마 이걸 말하려고? 생각해보니 우도현은 열애설이 터지던 날조차 데이트가 아니라는 식의 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대놓고 비즈니스라고 계속 언질을 줬는데 그걸 무시한 건, 하진 본인이었다. 우도현이 여희나와 비즈니스로 열애설을 터트리든 말든 그건 제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시점에서 태희가 궁금한 게 두 사람의 비즈니스 조건이라면, 하진이 궁금한 건 다른 거였다. 우도현이 왜 자신에게 여희나와의 비즈니스 사실을 알리려고 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이 문장 속에서 빠져서는 안 될 부사 하나.

‘굳이.’

그러니까 우도현이 비즈니스 열애설을 터트리든 말든 그걸 왜 굳이 박하진에게 말하냐는 것이다. 단순히 우도현의 TMI 기질이 빛을 발한 것인가 싶었지만, 우도현은 그 정도로 한가로운 새끼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진은 생각을 끝맺지 않았다.

갑자기 더부룩해진 가슴을 쿵쿵, 주먹으로 내리쳤다. 무언가 체한 듯 꽉 막혀서 하진을 괴롭혔다.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고, 하진은 애써 이유를 갖다 붙였다. 그리곤 모순되게 막걸리를 연달아 들이켰다. 얼른 취해 이 이상한 감정을 잊고 싶어서였다.

“그건 그렇고 요즘은 누구 만나? 최윤조 아웃 됐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없어요.”

“저번에 이강운 네 스타일이라면서.”

“대표님. 제가 예전부터 촉이 좋았잖아요?”

하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태희의 동의를 구했다. 사실 어제 강운과는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가벼운 섹파 사이가 되기로 했다. 그러다 잘 맞으면, 조금 더 깊은 사이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둔 채 말이다.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그 뒤였다.

“그건 그렇지. 왜? 이강운 촉이 별로야?”

“그냥 좀 그래요. 절 좋아한다고는 하는데 뭔가 오래된 관계가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 사람이랑 엮이면 괜히 골치 아프잖아요.”

섹스를 안 했다. 아니, 못 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강운의 다정한 손길이 상체를 훑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결국 쇄골에 키스 마크 하나 남기곤 끝나버린 것이다. 목에 열이 올랐다. 쇄골 부근은 이미 뜨거운 상태였다. 이 또한, 막걸리 때문이라고 넘기며 하진이 목을 문질렀다.

“근데 하진이 너도 그런 관계 있잖아.”

“네?”

“도현이 말이야.”

아. 하진이 애써 막걸리 탓으로 돌리며 외면하려 했던 것들을 태희가 직시하도록 했다. 태희의 말은 날카롭게 하진을 꿰뚫었다.

“10년이면 싸우다 정이 뭐야. 없던 사랑도 피어나겠어.”

“세상에 사랑이 다 말라비틀어졌나 보네요.”

“너나 도현이나 말로 빚지는 타입인 건 똑같구나. 서로 행동하는 거에 반만큼만 말을 예쁘게 했어도 지금처럼은 안 됐을 텐데.”

“걔는 행동도 똑같죠. 저 게이라니까 피하다가 유학 간 새낀데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인간관계와 관련된 여러 명언 중 하진은 이쪽을 믿는 편이었다. 그러니 과거에도 나빴던 우도현이라면, 지금도 나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그땐 도현이가 어렸던 거지. 괜히 본인이랑 있으면, 너 더 안 좋은 소문 날까 봐 피한 거니까. 그거 수습하는 데도 꽤 걸렸어. 맨 처음 소문 퍼트린 새끼 잡아서 족치고, 소문 언급하는 새끼들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아마.”

그런데 만약, 과거의 우도현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면?

“…….”

하진은 갑자기 자신을 두드리는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전제가 바뀌었다. 원래대로라면, 결론도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쉽게 바꿀 수 없는 건, 어쩌면….

“하진이 너… 몰랐구나?”

혼자였던 시간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도.

그렇게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한 하진은 태희와 막걸리에 이어 소주 10병을 더 마시고는 필름이 끊어졌다.

***

“김 비서님.”

올 게 왔구나. 앞만 보고 운전하던 김 비서가 자신을 부르는 대표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점심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이던 대표의 기분이 정확히 재능 기부 행사가 끝나고부터 추락했다는 것을 김 비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묻지는 않았었다. 귀찮은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직장인의 마음이 대표를 향한 충성심보다 컸기 때문이다.

“네, 대표님.”

김 비서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백미러를 통해 제 대표를 보니 답답하다는 얼굴로 넥타이를 헝클이고 있다. 저 정도 반응이면 사이즈가 딱 박하진 씨 얘긴데.

“박하진은 도대체 왜 그럴까요?”

역시나. 어쩜 예상을 빗나가질 않는다. 차선을 바꾸느라 김 비서의 대답이 늦어지자 이를 못 참고 도현이 말을 덧붙인다.

“아니, 왜 사과를 해도 화를 내냐고요.”

“사과가 마음에 안 드신 거 아닐까요?”

“어째서요?”

“뭐,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보통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렇게 반응하죠.”

진정성? 도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진심을 담은 사과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감을 잡지 못하는 도현에게 김 비서는 아까의 대화를 잘 생각해보라고 조언했다. 그에 도현은 눈을 감고 조금 전의 자신과 하진을 떠올렸다.

‘그때 먼저 손 내밀지 못한 것도, 네가 내민 손 잡지 못한 것도 미안해.’

사과는 정말 진심이었다. 공교롭게 자신과 이름이 같은 아이에게 하진이 건넨 말은 꼭 도현,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도현은 그 이후로 행사가 끝날 때까지 멍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먼저 손 내밀어보라고 했으면서. 자기도 후회했다면서. 근데 왜 정작 내민 손은 쳐내는 건데, 왜.

“혹시 윽박지르셨어요?”

“아니요? 진짜 젠틀하게 미안하다고 했는데요?”

“그 뒤엔 어떻게 했는데요?”

“그거야….”

도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재생된 윽박 비스름했던 자신의 행태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그게….”

박하진이 갑자기 사과는 넘겨버리고 자기랑 자자고 ‘앙앙’ 드립을 치길래 울컥 화가 나서 차 시트에 넘어뜨리곤 그 위에 올라타서 목덜미를 쭉쭉 빨았어요- 라고 주절주절 말할 수는 없으니 도현이 우물쭈물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김 비서는 자신의 대표가 꽤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만큼은 제 상사가 아니라, 그냥 고 ‘크흠.’ 자 우도현 씨를 상담해주는 김상곤 씨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대표님은 왜 화가 나셨어요? 박하진 씨가 사과를 안 받아주셔서?”

“저는요, 그냥….”

“…….”

“그냥 박하진이 야속해요.”

도현이 툭, 하고 내뱉은 말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야속이란 단어 안에 든 무정과 섭섭 등의 감정들이 무겁게 도현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냥 박하진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자신이 이렇게 노력한다는 것을. 박하진, 너를 보호하려고 예나 지금이나 네 뒤에서 애쓴다는 것을. 그러니 이걸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 하진이 도현은 야속할 뿐이었다.

“근데 박하진 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얼마나 좋은 친구였던 간에 끝에선 그냥 자기 피하다가 외국으로 도망친 비겁한 새끼 아니겠어요?”

“…….”

“…아. 친구요. 비겁한 친구. 말이 헛나왔습니다.”

하하. 자신도 모르게 감정 이입한 김 비서가 새끼라는 호칭을 수정했다. 하지만, 도현의 귀에 지금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심장을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마음 어느 구석에 처박아 놓은 죄책감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잊고 있었다. 제 실수를 되돌리기에만 급급해서 박하진을 혼자 둔 채, 도망쳤던 그때를. 그 비겁했던 시절의 우도현을 잊었으면서, 박하진에게 용서를 구하는 꼴이었다니. 그게 제대로 된 사과였을 리가 없었다.

“대표님.”

“…….”

“대표님! 전화 계속 울리십니다.”

혼자 생각의 심해로 빠져들던 도현을 다급히 김 비서가 불렀다. 그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트 주머니에서 격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누구지 싶다가 오늘이 주말이란 사실을 깨닫곤 쓸데없는 전화라고 단정 지을 즈음이었다.

끼익-. 차가 급정거했다.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취객이….”

“전 괜찮아요. 김 비서님은요?”

“네, 저도 괜찮습니다.”

도현은 괜찮았지만, 그 바람에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를 구부려 요란하게 빛을 내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은 도현은 이내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곤 얼른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이는 서태희 대표였다.

“여보세….”

-누가 네 여보야악!

그런데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태희가 아니었다. 하지만, 도현은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박하진?”

-에에! 어뜨케 알았지!

목소리가 영락없는 술 톤이다. 그것도 완전 만취 상태. 박하진이 이러기 쉽지 않은 터라 얼마나 마신 건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도현이 생각을 위해 잠깐 조용한 틈을 타 하진이 소리쳤다.

-여보! 여보! 여보세요!

대답 없는 도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냅다 큰 소리로 ‘여보’거리는 하진에 도현이 화들짝 놀라 귀를 떼었다. 하는 짓이 완전 애가 됐다. ‘여보’라니. 귀여… 귀 아파. 도현은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지웠다.

“…너 괜찮아? 서 대표님은?”

-옆에서 주무셔! 바꿔 주까?

아, 아니야! 도현이 다급히 하진을 말렸다. 히잉-. 하진의 칭얼거림이 도현의 귓바퀴로 굴러들어왔다. 하마터면 그대로 ‘존나 귀엽네.’를 말할 뻔한 도현은 일단 침착하게 자신을 다독인 뒤, 하진에게 맞장구쳤다.

“대표님 피곤하신데 깨우면 될까, 안 될까?”

-음, 안 돼!

“그렇지. 착하다, 하진이. 우리 착한 하진이는 방금까지 뭐 했어?”

-대표님이랑 막걸리 마셔써.

“우와. 정말 맛있겠는걸? 어디서 마셨는지 물어봐도 될까?”

도현은 생전 해보지도 않은 말투로 하진을 달랬다. 이게 뭐라고 김 비서 눈치를 잔뜩 봤다. 그러다 백미러로 자신을 흉측하게 바라보던 김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 어색한 미소가 도현과 김 비서 양쪽에 퍼졌다.

-음… 으음!

“…응?”

-어제 왔던 곳!

“한식당?”

-으응!

술 취한 박하진은 말끝에 느낌표를 붙이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덕분에 애교가 철철 넘치도록 들리는데 그게 또 영 싫지만은 않은 도현이었다.

“지금은 어디야?”

-여기 대표님 차! 엄청 넓어! 오늘 여기서 잘꾸야!

박하진 진짜 미쳤나 봐. 애교라는 게 본디 속에 내재 되어있지 않으면, 무의식이라도 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박하진은 막 애교가 흘러넘치잖아. ‘잘꾸야’라니. 이 세상에 꾸라는 어휘가 이렇게 귀여운 줄 도현은 방금 처음 알았다.

아. 귀엽다고 인정해버렸네. 허무하게 인정하고 나니 걱정이 몰려왔다. 이 추운 겨울에 차에서 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서 대표님은 나이도 있으신데. 그러다 문득 도현의 뇌리를 스치는 이가 있었다. 태희의 달링이었다. 여자친구 데리러 오겠지, 설마 차에서 자게 내버려 두겠어?

“대표님 애인분은 오신대?”

-쉬잇! 금기어야 금기어!

설마가 조금 다른 쪽으로 사람을 잡게 생겼다. 마이 달링인지 덜렁인지 그새 헤어졌나 보다. 혹시 그래서 술 마신 건가. 그렇다면, 박하진이 이렇게까지 취한 이유가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작정하고 술을 마시는 태희를 이길 사람은 적어도 도현이 이제껏 본 사람 중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하진이어도 태희에게는 주량으로 비빌 수 없었다. 대강 상황 파악을 마친 도현은 지금 시간과 한식당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리곤 아이에게 말하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잘 들어, 박하진. 내가 거기로 갈 거야.”

-데리러 올꾸야?

“응, 데리러 갈 거야. 20분 정도 걸릴 테니까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알았지?”

-웅!

‘올꾸야’의 공격을 간신히 버텨낸 도현은 마지막 ‘웅’에서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렸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하진이 야속하다던 우도현은 어디 갔는지 지금 도현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드는 데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 대표의 기행을 떨떠름하게 보고 있던 김 비서가 이내 조용히 물었다.

“어제 그 한식당으로 갈까요?”

“네. 그럼 김 비서님은 거기서 바로 퇴근하세요.”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식당에서 퇴근하면, 집까지 20분도 안 걸리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도현을 간지럽혔다. 헤실헤실, 웃음이 났다. 도현이 순간 흠칫하며 입꼬리를 정리했다.

“저 지금 웃었나요.”

“네. 세상 세상, 이런 귀여운 게 없다는 식으로 웃으셨어요.”

앗. 코앞으로 다가온 퇴근 생각에 신이 난 김 비서가 미처 필터링을 거치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슬쩍 대표의 눈치를 보니 별생각 없는 듯하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도현과 하진의 싸움은 그럼 뭘까. 혹시 10년 동안 싸우다가 정들어서 이미 마음속으로는 부부의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김 비서가 속도를 높였다.

***

“이놈들! 나 빼고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이냐!”

“대표님… 이러지 마세요… 집 들어가셔야죠.”

도현은 태희의 집 앞에서 10분째 씨름 중이었다. 심지어 하진을 등에 업은 채로. 차에 혼자 놔뒀다가 뭔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하진을 업은 게 문제였을까. 아니다. 애초에 두 만취자를 데려다주겠다면서 호기롭게 온 자신이 문제였다.

“그럴 순 없다. 내 이 한 몸 불태워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

“…몸을 왜 불 태워요… 나라를 대표님이 왜 지켜… 도어락 열고 집이나 지키세요, 제발….”

태희는 아까부터 사극 톤을 남발했다. 사극에 꽂힌 모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조선의 국모다!’ 를 외칠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는데 설상가상 하진이 귀에 바람을 불었다. 윽. 도현은 순간 풀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텨냈다.

“으흐흐.”

“우리 하진이 기분 좋구나. 나는 죽을 맛인데.”

등에서 떨어지려는 하진의 엉덩이를 도현이 다시 들쳐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아흣.”

…예? 야릇한 숨소리가 도현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당황한 도현이 동작을 멈추었다.

“흐흥.”

하진이 한 번 더 숨을 불어넣었다. 도현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곤 다리에 힘도 빡 주었다. 그러다 다른 곳에 힘이 들어갈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버티려 했다. 하지만, 도현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어진 하진의 행동은 도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야야. 안 돼. 그건 안 돼. 하진아. 안 된다.”

도현이 다급하게 하진을 막았으나 하진은 이미 제 아래를 도현의 등에 비비적거린 뒤였다. 그러면서 신음도 내뱉었다. 씨발. 도현의 아래가 고개를 들기 직전이었다.

“미친놈아. 그만….”

바로 그때였다. 띠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렇게도 빌고 빌었던 태희의 집 문이 열렸다. 짧은 순간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 도현에게 그것은 마치 천국의 문과 같았다. 이내 집 안으로 들어가는 태희의 뒤를 따라 도현은 하진을 소파에 눕혀놓으려 했다. 갑자기 제 앞을 막아서는 태희만 아니었어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이만 물러가시게나.”

태희는 남녀칠세부동석을 외치며 도현을 절대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놈의 망할 유교 국가가 문제였다.

“내일 아침 문안 인사를 올려라.”

쾅-! 손 쓸 틈도 없이 집 문이 닫혔다. 태희의 단호함에 도현은 정말 물러나고야 말았다. 아직 손엔 태희의 차 키가 있었다. 이것도 못 줬다. 내일 문안 인사 때 줘야 하는 건가. 씨발. 도현은 그냥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진이 얌전해졌다는 것 정도.

그래. 대한의 건아, 우도현. 여기서 포기하지 말자. 주차장까지만 가면 돼. 다시 차 타고, 박하진 집… 아니. 우리 집으로 가는 거야.

하진의 집 앞에서 또 태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웠던 도현은 목적지를 자신의 집으로 정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탄 뒤, 주차장까지 무사히 내려온 도현이 이제는 익숙해진 태희의 차 안으로 하진을 밀어 넣었다. 불편한 조수석 대신 뒷좌석에 하진을 눕히려던 도현은 일순간 발이 꼬여 그대로 하진 위에 엎어졌다. 갑작스러운 묵직함에 하진이 눈을 떴다. 둘 사이의 간격은 한 뼘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좁은 틈으로 천천히 시선이 얽혔다. 아까와는 달리 곧은 하진의 눈동자가 도현을 옭아맸다. 도현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윽고 들려온 하진의 어조는 고저 없이 진지했다.

“너 나 좋아하네.”

***

머리가 아팠다. 뒤척거리다 자세를 바꾸니 세게 뒷골이 울렸다. 윽. 이 몸 상태는 누가 느껴도 숙취였다. 어제 많이 마셨나. 막걸리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완전히 블랙아웃….

“헉.”

미처 생각을 끝내지 못한 하진이 벌떡 일어났다. 숙취고 뭐고, 지금 자신의 안위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가슴을 더듬거리며 옷의 여부를 확인하니 다행히 부드러운 실크 잠옷이 만져졌다. 술 취해서 이름 모를 새끼랑 뒹군 건 아니구나, 안심한 하진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하진은 제 문란함을 탓해야만 했다.

씨발. 그러면 그렇지. 옆에 웬 남자가 누워있었다. 널찍한 등판엔 실오라기 하나 걸쳐 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도 재질만 익숙했지 처음 보는 거였다. 이불도, 침대도, 심지어 베이지 톤의 벽지도. 모두 제 취향이 아닌 것들 뿐이었다.

“으음….”

남자가 뒤를 돌았다. 남자의 얼굴이 정확히 하진의 허벅지 옆에서 멈췄다. 그 덕분에 하진은 남자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젠장. 우도현이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새근새근 자는 남자는 옆으로 보고, 뒤로 보고, 앞으로 보고, 아래로 봐도… 아니지. 아래는 본 적이 없으니 패스하고. 아무튼 우도현이 확실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하진은 볼때기를 뜯다시피 쥐었다. 존나 아프다. 망할. 꿈이 아니다. 현실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문제는 하나였다. 왜? 왜 우도현과 자신이 나란히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잔 것일까? 그리고 우도현은 왜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까? 순간, 온몸이 쭈뼛 서며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장악했다.

‘나 씨발… 설마 우도현이랑?’

좆됐다. 박하진 인생 아무리 섹스에 살고, 섹스에 죽는다지만 어떻게 우도현이랑 그럴 수가 있냐고. 하진이 기억을 더듬었다. 몇 년 만에 끊긴 필름을 복구하려니 아주 죽을 맛이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막걸리 마시고 어, 그래. 소주까지 마셨네. 그러고 나서….

‘흐흥.’

…응?

‘야야. 안 돼. 그건 안 돼. 하진아. 안 된다.’

박하진, 이 미친놈아. 그걸 어디다 비비는 거야. 우도현이 그만하라잖아. 제발 그만둬, 이 색마 새끼야!

간신히 되돌린 기억은 여기서 끝이 났고, 하진은 범람해오는 수치심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먼저 유혹한 쪽이 자신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 하진이 이불을 들춰 제 아래를 확인했다. 아침부터 활기차구나, 녀석. 욕구가 많이 쌓였었니? 그렇다고 우도현을 덮치면 어떡하니. 그래서 어제는 좋았어? 행복했어? 만족…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씨팔….

그렇게 하진이 기억의 파편들을 맞추는 사이 부스럭거리던 도현은 눈을 떴다. 아니, 뜨려 했다.

“뭐, 뭐야! 이거 안 치워?”

갑자기 도현의 눈두덩이를 못 뜨게 짓누른 하진만 아니었어도 도현은 아침 햇살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돌연 봉변을 당한 도현이 발버둥 쳤지만, 하진은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하게 물을 뿐이었다.

“눈 뜨기 전에 설명부터 해. 너 씨발 왜 내 침대에 있어?”

“네 침대 아니고 내 침대. 여기 우리 집이야. 너는 어제 만취 상태였고, 차 안에서 잔다는 거 간신히 업고 우리 집 온 거야. 됐지?”

“그게 끝이야? 내 옷은 왜 갈아입혀져 있고, 넌 왜 벗고 있는데?”

“…야, 박하진.”

하진의 취조에 순순히 응하던 도현이 무겁게 하진을 불렀다. 하진은 두려웠다. 저 입에서 혹시나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따위의 아련한 말이 튀어나올까 봐.

“너….”

잠깐의 침묵 사이로 꿀꺽, 하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곧 도현이 낮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와 동시에 하진 또한 입을 열었다.

“토했….”

“섹스는 없던 일로 하자!”

“…….”

“…….”

“…뭐?”

“…어?”

하진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도현 역시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물음은 있지만, 대답은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두 사람 모두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하진이 내뱉은 단어는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또렷했다. 거의 귓구멍에 때려 박는 랩 수준이었다. 최근 연기 연습 때문에 발음 연습을 했더니 효과가 이런 곳에서도 나나 보다.

“…씨발.”

상황 파악을 마친 하진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는 욕을 뱉으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곧 어깨 위로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진다. 토닥토닥. 괜찮아. 그럴 수 있어.

“큭.”

위로의 말 사이로 참지 못한 도현의 웃음이 삐져나왔다. 큭큭. 한번 터진 웃음은 참으려 할수록 크기를 부풀렸다. 이내 방안 전체가 도현의 학학 소리로 가득 차게 됐다.

***

말끔하게 샤워한 하진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거실로 나왔다. 도현 또한 이제 막 나왔는지 목에 수건을 건 상태였다. 냉장고 앞에 서 있던 도현이 물을 꺼냈다. 그리곤 하진이 달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그것을 건넸다.

“너 해장해야지.”

마침 갈증이 났던 하진은 곧바로 물을 들이켰다. 500ML 페트병 물의 절반이 사라졌다.

“됐어. 집 가서 할래.”

하진이 다 마신 물을 도현에게 주며 대답했다. 다시 제 손에 물이 들어온 도현은 그제야 목을 축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남은 절반을 마저 비운 도현이 와그작, 페트병을 뭉개며 말했다.

“라면 끓여줄게.”

“됐….”

“콩나물 한가득 넣고 시원하게.”

하진은 거절할 수도, 승낙할 수 없었다. 콩나물 넣은 해장라면이라니. 부대끼는 속을 달랠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해장까지 하고 가기엔 너무 염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진이 양심과 해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도현이 던진 페트병이 정확히 분리수거 통에 들어갔다. 오케이, 골.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나 골인했다.”

“그게 뭐.”

“음, 내 소원은 말이야.”

“야야, 잠깐만. 누가 들어준대?”

갑자기 소원을 말하려는 도현을 하진이 막았다. 골인 내기를 한 것도 아니고, 본인 소원을 왜 자신한테 말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하진이었다. 하진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은 도현은 기어코 소원을 말했다.

“네가 내가 끓인 맛있는 라면 먹고 가는 거.”

“…….”

“라면에 자부심이 좀 있거든, 내가.”

도현이 싱그럽게 웃으며 턱짓으로 다이닝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 새끼 술이 덜 깼나. 아니지. 쟤는 술 안 마셨을 텐데. 도현의 소원이 얼마나 뜬금없던지 하진은 황당하다 못해 아연하기까지 했다. 그런 하진의 턱을 살며시 닫아준 도현은 하진을 의자에 앉히곤 본인은 앞치마를 둘러 싱크대 앞에 섰다.

“계란 넣어 말아?”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내던 도현이 물었다. 어리둥절하게 가만히만 있는 하진에게 도현이 한 번 더 물었고, 그제야 하진은 대답했다. 다소 얼떨떨한 채로.

“…넣지 마. 국물 흐려져.”

“오케이.”

그 말을 끝으로 도현은 완전히 하진을 등진 채, 요리를 시작했다. 딱히 도와줄 것도 없을 것 같아 가만히 있긴 하지만, 왠지 역할이 뒤바뀐 듯한 상황이 하진은 영 불편했다. 그러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그런 느낌이다. 어제 갖은 고생을 다 시켜놓곤 오늘 해장라면까지 얻어먹어도 되는 건가. 괜히 멋쩍은 기분에 하진이 손톱을 매만졌다.

“맞다. 네 옷 드라이클리닝 해서 돌려줄게. 대충 토만 치운 거라 아직 더럽거든.”

“그럼 나 뭐 입고 가냐?”

“내 옷 입고 가든지. 방에 새 옷 많아.”

“어, 그래. 고마워.”

응? 도현이 인덕션에 양은 냄비를 올리다 말고 뒤를 돌았다. 자신의 제안을 순순히 응하는 하진에 도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저 버튼을 누른 도현이 다시 하진을 쳐다보니 평소 같았으면 쫑긋 서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귀가 조금 쳐진 것도 같다.

“어제 기억나?”

“안 나.”

“아쉽네.”

“뭐가.”

“애교부리던 박하진.”

어깨를 흠칫 떤 하진이 손톱에서 시선을 떼어 도현에게 가져갔다. 뒤통수밖에 안 보이지만, 옆으로 광대 들썩거리는 게 티가 났다. 저 새끼 일부러 놀리려고 그러는 걸 거야. 하진은 애써 도현의 말을 부정했다.

“…야. 너 내가 기억 안 난다고 개소리하지 마.”

“진짠데. 어떻게 하면 믿을래?”

“안 믿어. 그러니까 말하지 마.”

하진의 단호함 때문인지 도현은 정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어떤 식으로 놀릴 것인지에 대한 준비 단계였다는 것을 하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콩나물 위에 라면을 살포시 얹은 도현이 냄비 뚜껑을 덮었다. 그리곤 한층 신이 난 얼굴로 하진과 눈을 맞췄다.

“데리러 올꾸야?”

“…….”

“라고 네가 나한테 물었어.”

미친. 소름이 돋았다. 당장 꺼지라고 도현의 얼굴에 냄비 받침대라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건, 불현듯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망할 기억이 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데리러 올꾸야?’

‘웅!’

하진은 범람하는 애교의 홍수 속으로 휩쓸려 갔다. 29년 살면서, 제 주사가 애교인 건 처음 알았다. 아니, 나이 들면 주사가 없어져야지 왜 새로 생기고 난리야. 그것도 하필이면, 왜 우도현 앞에서! 등에 아래를 비빈 것도 모자라서 애교까지 부리고, 거기에 토까지? 아주 다양하다. 다양하게 추태 부렸어, 박하진. 대단해, 정말!

“기억났나 보네.”

도현이 웃었다. 완전 방긋. 존나 얄밉게 말이다. 도현의 입꼬리가 올라갈수록 반대로 하진의 입꼬리는 축축 처졌다.

“다른 건 기억 안 나?”

“또 뭐.”

“기억 안 나면 말고.”

지금도 충분히 수치심에 허우적대고 있는데 뭐가 또 있다니. 하진은 절망했다. 도현이 얼버무리긴 했으나 딱 봐도 애교보다 강력한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혹시 진짜로 잔 거 아니야? 톡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하진의 초조함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하진이 추궁하려는 순간, 달그락달그락 냄비 뚜껑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그에 도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인덕션을 끄고, 테이블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는다.

“받침대 좀.”

“…어, 어.”

하진이 옆에 있던 받침대를 중앙으로 끌고 오자 도현은 곧바로 냄비를 그 위에 얹었다. 이 상당히 일상적인 움직임을 보면 어제 큰일 치른 사람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보통 아무리 취해도 그렇게 강한 자극을 느꼈으면, 장면 장면이라도 기억이 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이씨, 그냥 대놓고 물어볼까. 그랬다가 맞으면? 뭐, 우도현이랑도 섹파로 지내게?

하진의 머릿속이 시끄러운 사이 도현이 마주 앉아 냄비 뚜껑을 열었다. 뿌연 연기가 공기 중으로 번지며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도현은 집게로 라면과 콩나물을 적절히 퍼 하진의 그릇에 먼저 옮겨주었다. 그래. 뭐든 일단 먹고 생각하자.

“크으.”

하진이 국물을 들이켰다. 아, 아! 이거지! 니글거렸던 속이 사악,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면을 한가득 집어 후루룩 입 안으로 넣었다. 면발이 꼬들꼬들한 게 딱 하진의 취향인 것과 더불어 라면 사이사이 씹히는 콩나물의 식감 또한 완벽했다. 이윽고 하진이 국물 한 모금을 더 뜨려 할 때, 테이블에 올려둔 하진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흘끗 본 하진은 숟가락과 핸드폰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선택했다. 곧이어 도현이 이를 지켜보다가 물었다.

“너 이강운 좋아해?”

하진이 답장하던 손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글쎄.”

“그럼 파트너야?”

“그걸 왜 물어보는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리며, 하진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진이 생각하기에 도현이 할 대답은 뻔했다. 고민채랑 사귀니 사생활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는 식의 개소리를 지껄이겠지.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우도현 속이 뒤집힐….

“그냥.”

“…….”

“궁금하네.”

어? 도현이 내뱉은 대답은 라면으로 입안이 한껏 매워진 하진에게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싱거웠다. 그래서 더 추궁하게 됐다. 원하는 마라 맛 대답을 얻기 위해서.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나도 몰라.”

“뭐?”

그러나 도현은 하진의 뜻처럼 마라 맛 대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도현 중에서 가장 순하고 부드러웠다.

“몰라서 이제부터 좀 알아보려고.”

도통 이해되지 않는 소리에 하진이 얼굴을 구겼다. 말을 왜 저렇게 빙빙 돌려서 하는 거야. 진짜 꼭 뭐라도 있는 것처럼. 하진은 이 상황이 영 마뜩잖았다. 확실하지 않은 일로 전전긍긍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 물어보자. 젓가락을 쥔 하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내 탁,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친 하진이었다.

“야. 우리 말이야.”

큼. 기세와는 다르게 말이 조금 얼버무려졌다. 도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하진은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최대한 덤덤하게 운을 뗐다.

“그 우리.”

“…….”

“잤냐?”

그 순간, 쿨럭-! 도현은 라면 국물을 잘못 삼켰다. 식도가 아니라 이상한 곳으로 흘러 들어간 국물이 도현의 코를 찡하게 만들었다. 너무 쓰라려서 당장 하진에게 뭐라 하고 싶었지만, 마주한 하진의 표정이 꽤 진지해서 그러진 못했다.

“아. 씨발…. 진짜로? 진짜 잔 거야? 하, 박하진… 미친놈.”

도현의 어색한 반응을 보아하니 잔 게 백 프로라고 확신한 하진은 곧바로 제 이마를 퍽, 쳐버렸다. 아, 왜 그랬을까. 내려친 이마가 몹시 아픈데도 하진은 관둘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대가리. 섹스 생각밖에 안 든 돌덩이 가지고만 다니면 뭐 하냐. 딱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하진이 주먹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퍽퍽,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들릴 동안, 도현은 안쓰러운 얼굴로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하진의 손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눈치채곤 일어나 하진에게로 몸을 기울인다.

“그 정도로 정신을 차리겠어?”

아님, 내가 때려줄까? 능글맞은 미소를 띤 도현이 순식간에 하진의 주먹을 낚아챘다. 덕분에 허공에 손을 포박당한 하진은 뒤이어 날아 올 것만 같은 도현의 주먹에 눈을 질끈 감았다. 윽. 그렇게 1초. 2초. 3초가 지났을 무렵, 예상했던 타격감은 온데간데없고 간지러운 웃음소리만이 하진에게 닿았다. 그와 동시에 하진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하진이 슬며시 눈을 떴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

“안 잤어, 미친놈아.”

어리둥절한 하진을 뒤로한 채 도현은 픽, 웃음을 흘리곤 다 먹은 그릇을 치웠다. 도현이 싱크대 물을 틀 때까지도 하진은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우도현이랑 박하진이랑 안 잤다고….

“헙!”

머릿속으로 결론이 나자마자 하진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치솟는 광대는 막을 수 없었다. 곧이어 도현이 싱크대 물을 틀었고, 하진의 웃음은 그에 묻히기 시작했다.

“아, 그럼 그렇지! 내가 너랑 미쳤다고 잤겠냐!”

안도감이 몰려온 하진이 소리쳤다. 그것이 물소리를 뚫고 도현에게 닿았는지 도현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무슨 말을 내뱉은 것 같은데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 커서 하진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하진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이내 탁. 도현이 싱크대 물을 잠그고, 하진을 등진 채 말했다.

“이강운이랑은?”

“아까부터 왜 이렇게 이강운 이강운 거려?”

“너도 나랑 섹스했는지 궁금해했잖아.”

“야, 그건!”

“나도 네가 이강운이랑 섹스했는지가 궁금할 뿐이야.”

말문이 막힌 하진 때문에 돌연 정적이 찾아왔다. 도현은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고, 내려앉은 침묵 위로 물소리만이 쌓였다. 그릇이 몇 개 없었던지라 설거지는 금방 끝이 났다. 마지막 숟가락까지 물로 헹군 도현이 수도꼭지를 끄자 하진은 잠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안 했어.”

그 말에 도현이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하진과 얽힌 시선은 금방 떨어져 아래로 향하게 됐다. 시선이 멈춘 곳은 어제 자신이 덧씌웠던 키스 마크였다. 늘어진 실크 잠옷 아래로 드러난 하진의 쇄골 아래는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살짝 인상을 쓴 도현이 천천히 운을 뗐다.

“그거.”

도현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그곳에 머물러있었다. 그것을 느낀 하진이 잠옷을 여며 자국을 감추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느새 하진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도현은 하진의 잠옷 위로 그곳을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 달린 물방울이 잠옷을 물들였다. 그 때문에 투명해진 잠옷은 붉은 자국을 더 선명히 보이게 만들었다.

“미안해.”

“…….”

“진심으로.”

손길이 닿는 곳마다 죄책감이 묻어났다. 그래서일까. 자국이 욱신거렸다. 낯선 감정이 하진을 들쑤셨다. 제게 닿아있는 도현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인 눈동자는 곧 도현의 눈동자 속에서 멈춰버렸다. 서로의 눈동자 속에 서로가 담겼다. 도현은 곧았지만, 흔들렸다. 하진의 눈동자가 일렁인 탓이었다. 이어 하진은 도현의 손을 쳐내면서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때 소문 네가 없앤 거라며.”

불명확한 시간을 지칭함에도 도현은 하진의 내뱉은 ‘그때 소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도현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 어….”

서로에게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묵한 일이었다. 서로 물으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때를 갑자기 10년이 지나서야 끄집어내려고 하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이제 와서 잘했다고 칭찬받을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어, 그런데 박하진이 어떻게 알았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을 텐데. 도현의 의아한 표정을 알아챈 하진이 대답했다.

“들었어. 십 년 전 일을 이제야.”

하진의 말엔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 가시가 매섭게 도현에게 다가왔다.

“네 입으로 얘기해봐. 어떻게 된 일인지.”

찌를 기세로 달려온 가시는 도현의 앞에서 주춤거렸다. 차마 찌르진 못하겠다는 듯이 뾰족함을 숨기고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에 도현이 머뭇거리자 하진이 일어서서 도현과 눈높이를 맞췄다. 조금 전과 똑같이 마주한 눈동자에 서로가 담겼다. 그러나 흔들리는 주체는 뒤바뀐 채였다. 이내 도현이 힘겹게 운을 뗐다.

“솔직히 처음엔 너 피했어. 그렇다고 네가 게이라서 피한 건 아니고”

“너 나 이해 못 한다며.”

“그때 그 말은 화나서 한 말이었어. 근데 뭐가 그렇게 화났는지는…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잠시 말을 멈춘 도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더는 비겁해지기 싫어서 솔직히 터놓으려 한 건데,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말이 분명히 나오질 않아 답답했다. 하. 차분히 숨을 고른 도현이 그날로 기억을 옮겼다. 그리곤 하나하나 내뱉었다.

“소문은 점점 과장됐어. 너와 나, 그렇게 우리 소문이 되니까 더욱 네 옆에 못 있겠더라. 소문이 사실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어.”

우리 소문? 처음 듣는 소리였기에 하진이 반문했다.

“네가 날 이용했대. 날 이용해서 연습생이 됐고, 데뷔까지 따놨다는 거야.”

“아. 그거 자주 듣던 말인데.”

“뭐?”

“네 옆에서 날 시기하던 애들이 하나 같이 입 모아서 했던 말인데 몰랐어?”

“야, 넌 그걸 왜 지금 말해.”

도현이 황당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걸 몰랐던 게 말이 되나 싶다가도 그 새끼들이 우도현 앞에서는 빠른 태세 전환을 보였으니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너 아니었으면 나 연습생도 못 됐을 거고, 데뷔도 못 했을 텐데. 그럼 유어 멜로디 박하진도 없었겠지.”

“뭐라는 거야. 서 대표님이 먼저 너 캐스팅한 거잖아. 네 춤 보고, 네 얼굴 보고, 너한테 오디션 보라고 한 거잖아. 넌 네 능력으로 연습생 된 거고, 데뷔한 거야.”

“애초에 너희 재단이 날 후원해줬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네가 내 친구니까 내가 너희 소속사 눈에도 띈 거고.”

도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진의 가시가 도현의 목구멍까지 다가왔다. 도현이 한 마디라도 내뱉는다면, 곧바로 찔릴 거리였다. 그러나 도현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물음이 남아 있었기에.

“…그럼 네가 날 이용했다는 건? 넌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처연한 눈동자가 하진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아니라고 말해. 고동색 눈동자가 꼭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진은 이를 알면서도 외면했다.

“어느 정도는.”

“…너 진짜 잔인하구나.”

하진이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어떤 말도 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다문 채로.

“나 너 친구로 생각했어.”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도현의 한마디가 하진을 울컥하게 했다. 뭉개진 입술이 어긋나 피가 났다. 비릿한 입술 새로 꾹 눌러왔던 진심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왜 혼자 뒀어. 친구면 옆에 있었어야지.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지 말았어야지.”

“내가 네 옆에 없어야 소문이 사라질 테니까. 그때 난 그게 맞는 줄 알았어. 뒤에서라도 열심히 소문을 없애다 보면 언젠간 네가 알아주겠지, 안일하게 생각했어. 나한텐 시간이 얼마 없었고, 그 생각 하나만 하다 보니까 정작 중요한 걸 놓쳤던 거야.”

“…….”

“혼자 둬서 미안해, 하진아.”

깊게 뿌리내린 원망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기존의 전제 또한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이 말하는 데 십 년 걸렸네. 미안하다.”

이제 새로운 전제가 쓰여질 시간이었다.

***

갑작스러운 기상 변동으로 하진의 생애 첫 드라마, 그 대망의 첫 촬영은 예정일보다 하루 뒤로 밀렸고, 그 덕분에 잘 잡혀있던 스케줄들이 연달아 꼬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하진의 역할 비중이 크지 않아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기껏 잡아놨던 주말 예능이 통으로 날아갈 뻔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첫 촬영을 마무리 짓고, 오늘은 벌써 세 번째 촬영이었다. 꼬인 스케줄 때문에 촬영 끝나고 곧바로 회사에 가야 하지만, 그래도 한 신밖에 남지 않았으니 다른 날보다 여유로울 것 같다. 비록 그 한 신이 동네 양아치들과의 액션 신이지만 말이다.

mintmelody_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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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tmelody_jin 너나거 촬영. 우리 민트멜로디 커피차 고마워요. 사랑해요.

#너나거 #커피차 #민트멜로디 #너와나의거리 #이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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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전

남은 촬영을 기다리면서 하진은 방금, 자신이 올린 사진의 댓글을 읽고 있었다. 고맙게도 팬클럽 측에서 커피차를 보내준 덕분에 하진은 드라마 판에서 기가 좀 살았다. 지나가던 스태프마다 하진에게 잘 마시겠다며 인사를 건넸고, 하진 또한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쥔 채 일일이 인사를 받았다.

“형, 커피 잘 마실게요.”

갑작스레 볼에 닿는 차가움에 하진이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이강운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는 한 손에 하진과 똑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채로, 하진의 옆에 앉았다. 장 감독 옆에 버젓이 [이강운] 이름이 박힌 의자가 있는데도 굳이 제 옆으로 온 이강운의 저의를, 하진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왜 여기 앉아?”

“촬영 끝나서요.”

“저기 네 자리로 가면 되잖아.”

“형 옆이 더 좋아요.”

그런데도 물은 이유는 최근 들어 더욱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강운의 태도가 어딘가 미심쩍었기 때문이다. 그날 섹스를 하다 말았을 때부터 어딘가 좀….

“너 전화 왔다.”

그래, 특히 저런 거. 유난히 [매니저님]이라는 전화를 피하는 저 행위가 하진은 몹시 꺼림칙했다.

“곧 촬영 시작하잖아. 얼른 받고 와.”

하진의 말에 강운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으며 자리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역시나 받을 때부터 수상한 모습이었다. 마치 어려운 상대를 대하듯 심히 쩔쩔매는 말투와 더불어 늦게 받아서 미안하다는 사과까지. 도무지 매니저 전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촬영 들어갈게요!”

저 멀리서 조연출이 소리쳤다. 찝찝함을 뒤로한 채 하진은 걸치고 있던 롱패딩을 벗었다. 그러자 백수의 상징과 같은 초록색 추리닝이 드러났다. 극 중 백수이면서 아마추어 복싱선수인 이현이는 아마 드라마 내내 이 추리닝만 입을 것 같다. 즉, 이 추운 겨울에 하진은 줄곧 여름 추리닝만 입게 될 거란 얘기였다. 감기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곧바로 촬영이 시작됐고, 교복을 입은 세 명의 스턴트맨이 하진을 둘러쌌다. 액션은 처음이라 왠지 모르게 긴장된 하진이 머릿속으로 사전에 맞춰본 합을 복기했다. 먼저 왼손으로 방어하고, 오른손으로 잽 날리고, 뒤돌아서 발차기 하고….

“액션!”

하진이 미처 다 생각하기도 전에 감독이 스타트를 알렸다.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하던 하진, 아니 현이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그리곤 툭툭, 현이의 다리를 누군가 운동화로 건드린다.

“아저씨.”

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덩치 좋은 남학생 셋이 이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누가 봐도 조폭 일손 돕는 양아치 관상이었다. 현이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라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학생 하나가 후, 현이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뿌린다. 쿨럭. 현이가 코를 막고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 우리 담배 좀 사다 줘.”

“뭐?”

“백수잖아. 심부름 값 줄게.”

“얼마 줄 건데.”

“오천 원.”

“…….”

“두 갑.”

애초에 사다 줄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두 갑에 오천 원은 너무 쌩 양아치였다. 현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우둑우둑 목과 어깨를 풀었다.

“타임슬립 해서 오셨어요?”

“뭐라는 거야.”

“요즘 담배가 한 갑에 사천오백 원인데 두 갑에 오천 원을 준다길래. 뭐 어디 조선 시대에서 오신 줄.”

현이가 벤치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야. 저 새끼 잡아.”

그와 동시에 현이의 어깨가 돌아갔다. 타이밍 딱 맞췄네. 속으로 생각한 현이는 실실 웃으면서 자신을 잡은 학생의 팔을 꺾었다. 이제부터 액션 시작이었다. 하진은 아까 복기한 대로 왼팔로 상대를 막았으며, 오른팔로 공격했다. 그리곤 뒤돌아 발차기까지. 그에 학생들이 하나씩 나가떨어졌다. 이제 마지막 제일 덩치 큰 놈만 남았다.

어, 잠깐만. 왼손이었나. 아니, 오른손이었….

“윽.”

하진이 고민하는 찰나에 상대의 손바닥이 하진의 왼쪽 볼을 가격했다. 와, 미친. 존나 아파. 순간 비틀거린 하진이 상대와 눈을 맞췄다. 상대는 당황한 얼굴로 하진을 쳐다봤다. 하진이 눈동자로 ‘저 기억이 안 나요.’라고 묻자 상대가 티 안 나게 자신의 배를 부풀리며 힌트를 줬다. 아, 기억났다. 왼 볼 다음에 복부!

퍽-! 상대의 힌트를 알아들은 하진이 곧바로 복부를 가격했고, 그에 상대가 쓰러졌다.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울리자마자 상대 배우가 하진에게 다가왔다. 하진의 혓바닥은 자연스럽게 찢어진 입술로 향했고, 따끔한 고통이 이어졌다. 아픔에 하진이 얼굴을 구겼다. 이를 본 상대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냉큼 허리를 숙였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 이 정도 사과받을 건 아닌데…. 따지고 보면 자신의 실수인데 이거 완전 방귀 뀐 놈이 성내는, 몹쓸 광경 아닌가. 괜히 머쓱해진 하진이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대를 얼른 일으켰다.

“저 완전 괜찮아요. 이 정도야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제가 잘못한 건데요.”

“그래도….”

“에이. 그보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눈치 진짜 빠르시던데? 덕분에 오케이 받았잖아요”

하진이 웃으며 엄지를 치켜드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 상대도 따라 웃었다. 결국, 서로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상황은 마무리됐다. 으아, 오늘 촬영도 끝이구나. 그렇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하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하진 씨, 이리 와봐.”

모니터 앞에 있던 장 감독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띤 장 감독이 자신의 옆자리를 치며, 하진을 부른 것이다. 아, 저 새끼 또 저러네. 속으로 중얼거린 하진이 마지못해 그쪽으로 발을 돌렸다. 장인수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새끼였다. 취미라고 부르기엔 좀 프로 정신과 변태 성욕 사이에 있는 것이긴 한데, 촬영 모니터링을 꼭 배우와 함께하며, 배우와 의논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면 괜찮은 이 짓거리가,

“어때?”

늘 이런 식으로 배우와 접촉한다는 데에 있었다. 지금도 역시나 장 감독은 하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어떠냐면서 주물럭대는 중이었다. 저번엔 은근하게 하더니 이젠 아예 대놓고 이러기로 한 모양이다. 하진이 불쾌함을 내비치며 어깨를 털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스태프들도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 감독은 드라마 판에서는 꽤 아성이 큰 인물이었다. 게다가 성격은 또 어찌나 쪼잔한지 제 맘에 들지 않은 스태프는 기억했다가 응징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니 스태프들은 괜히 장 감독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하진 씨? 어떠냐니까.”

좆같아요, 씨발 새끼야. 하진은 턱 끝까지 차오른 욕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하하, 웃었다. 그리곤 고민했다. 어깨 정도 내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만, 이 새끼 하는 꼴로 봐서는 조만간 허벅지도 쓰다듬을 것 같아서.

“합도 잘 맞았고, 전 괜찮은 것 같아요.”

뭐든 그냥 빨리 장 감독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하진이었다. 하진은 일단 한번은 참기로 했다. 여기가 자신의 일터이기는 하나 주연도 아니고, 고작 조조연 정도인 자신이 감독과 마찰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진 씨가 괜찮다면, 나도 좋지.”

그러나, 그 한 번을 장인수는 참 빨리도 두 번으로 만들었다. 짧은 사이에 하진의 어깨에서 등으로 손을 옮긴 장인수가 척추를 따라 등을 쓸었다. 존나 야시시하게. 아. 씨발. 못 참겠다. 결국 억누르던 하진의 화가 펑, 폭발했다. 물론 대놓고는 아니고, 하진의 방식대로.

“감독님.”

“응?”

“그만 좀 주무르세요. 제가 무슨 돼지주물럭도 아니고.”

상당히 밝은 톤이었다. 싱그러운 웃음은 덤이었고. 그래서 얼핏 들었을 때는 이게 장난인지 진짜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장 감독도 그런 모양인지 어리둥절한 눈으로 하진을 바라봤다. 하하. 하하하.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한 장 감독이 하진에게서 손을 뗀 뒤,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진 씨. 농담도 참.”

“농담이요?”

이때까지는 스태프들도 그저 감독과 배우의 장난인 줄 알았을 것이다. 농담이라는 단어에 열받은 하진이 뒤이어 어떤 말을 내뱉을지 상상도 못 한 채로 말이다. 안면에 미소를 한껏 띤 하진은 아까보다 더 명랑하게 말했다.

“그럼 저 감독님 고추 만져도 돼요?”

“…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한 정도를 넘어서 그냥 다들 바짝 얼어선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중 가장 얼빠진 건, 역시 장인수였다. 장인수는 제 귀를 의심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잘못 들은 거라고 하기엔 주변 공기가 차가웠다. 하진은 이 상황에 쐐기를 박았다.

“히힛. 농담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진이 오랜 연예계 생활로 깨달은 진리였다. 어차피 참든 안 참든 나중에 욕먹는 건 똑같은 연예계니까 화병 안 걸리려면, 참지 않는 게 나았다.

“전 오늘 촬영 끝났으니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형, 괜찮아요?”

눈 감고 있는 하진에게 수찬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촬영장에서 일정 조율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엄청난 일이 있었다고 스태프에게 들은 수찬은 그 후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였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괜찮다고 물은 게 잘못이었는지 하진은 답이 없었다. 수찬은 일단 차를 세웠다. 우리 회사가 아니라 W 엔터로 왔다고도 얘기해야 하는데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형, 여기 W 엔터예요…. 재능 기부 관련해서 직접 보는 게 좋을 거라고 회사에서 이쪽으로 가보라고 해서요.”

“그래.”

“W 엔터 연습실에서 찍기로 했어요, 콘텐츠를.”

“응.”

“촬영은 다음 주부터요.”

예상보다 차분한 하진임에도 수찬은 마치 시한폭탄을 안은 사람처럼 줄곧 하진 눈치를 봤다. 하진이 묻지도 않은 것을 자꾸만 대답하던 수찬은 먼저 내린 뒤, 빠르게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운 없는 몸으로 하진이 걸어 나왔다.

“형, 어디 아파요?”

“아니.”

“그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요.”

“수찬아.”

“네, 형.”

“나 너무 졸려. 오늘은 콘텐츠 촬영 없다고 했지? 연습실만 보고 바로 집 가서 쉬어도 되는 거지? 나 3일 동안 합해서 6시간 잤어.”

아, 형이 그냥 피곤해서 힘이 없으신 거구나. 마음을 한시름 놓은 수찬은 얼른 일을 끝내고 하진을 쉬게 해주리라 다짐했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며 수찬이 W 엔터로 들어갔다. 하진 또한, 수찬을 따라 들어갔다.

“형, 지하로 내려가서 끝방….”

수찬이 말을 하다 말고 그 자리에 멈췄다. 수찬의 눈에 띈 한 사람 때문에. 저 정도 키에 멀리서 봐도 잘생긴 외모. 망할. 우도현 대표였다. 수찬은 뇌리를 스치는 지난날의 하진과 도현의 기억에 몸부림쳤다. 오늘 하진과 도현의 만남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뭐하냐.”

“…운, 운동이요! 제가 요새 틈틈이 스트레칭하거든요.”

핫둘. 핫둘. 수찬이 어색하게 팔을 휘둘렀다. 이 새끼, 과로로 정신이 어떻게 됐나. 하진이 혀를 끌끌 찼다. 하진은 제 진로를 방해하는 수찬을 옆으로 밀었지만,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오뚜기처럼 그 자리로 다시 오는 수찬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수찬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여어, 박하진?”

저 멀리서 눈치도 없이 하진을 부르는 우도현 대표 때문에. 긴 다리로 휘적거리며 도현은 한달음에 하진에게 다가왔다. 표정엔 반가움이 잔뜩 묻은 채였다. 수찬이 하진을 지키고자 도현과 하진 앞을 막아섰다. 그리곤 입 모양으로 ‘제발 오늘 하진 형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울부짖었다. 물론 도현은 못 알아들었다.

“여긴 웬일….”

도현이 말을 멈췄다. 반가움에 휘어져 있던 눈꼬리가 금세 치켜 올라갔다. 들뜬 목소리는 가라앉은 뒤였다.

“너 뭐냐.”

“…….”

“얼굴 왜 이래.”

***

“요새는 박하진 씨 안 만나시네요?”

며칠 전, 늦게 출근하신 이후로 통 맥이 없어 보이는 제 대표를 보며 김 비서가 대뜸 의문을 표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박하진 이름만 들어도 펄쩍, 뛰셨으면서 지금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야근까지 하신 것 같던데.

혹시 상사병인가.

“구실이 없네요, 만날 구실이.”

“…….”

“…네? 김비서 님, 뭐라고 하셨어요?”

맞네, 상사병.

김 비서의 눈빛이 금세 안쓰러움으로 물들었다. 그 와중에 패션위크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베레모가 선반 한가운데에서 꼿꼿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가 보면, 훈장이라도 달린 줄 알겠다. 어떻게 저러고도 모르실까. 김 비서는 가엾은 마음에 그만 혀를 찰 뻔했다. 혀끝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아닙니다.”

김 비서는 괜스레 오싹해지는 기분을 떨쳐내면서 도현의 일정을 확인했다. 마침 오늘 외부 일정이 취소돼서 별다른 게 없었다. 그 말은 즉, 회사안에서나 밖에서나 딱히 얽매일 일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큼큼, 김 비서가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 재능기부 콘텐츠 상의하러 오신다던데요.”

“누가요?”

“박하진 씨요.”

싱긋. 중년의 꽃 미소를 입에 건 채, 김 비서가 말했다.

“구실.”

“…….”

“생기셨네요.”

김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현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기는 중이었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가 감춰지지 않았다. 붙잡아두려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표정만 더욱 우스워졌다.

“여기로 옵니까? 언제 온다는데요?”

“미팅 1시간 정도 남은 것 같네요. 혹시 모르니 밑에 얘기해두겠습니다. 박하진 씨 오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뭘 또 그렇게까지.”

언행 불일치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지금 도현은 말은 여유롭게 내뱉으면서 이 짧은 사이에 시계를 세 번이나 확인했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꽤 안타까워서 김 비서는 도현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곤 자신의 SNS 계정을 열어 도현 앞에 내밀었다. 육아 박사 김 비서가 제 딸을 달랠 때, 좋아하는 것을 먼저 입에 물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 올리셨더라고요.”

김 비서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 얼떨결에 김 비서의 폰을 받게 된 도현은 김 비서가 열어놓은 SNS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엔 놀랍게도 김 비서의 셀카가….

“…김 비서님 사진 올리셨다고 저한테 보여주는 건가요?”

“…그건 제 사생활입니다, 대표님.”

“보고 싶지 않았는데요, 전….”

서로 머쓱한지 주고받는 대화의 텀이 길었다. 김 비서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직접 검색창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박하진 씨 보시라고요. 검색!”

아. 그제야 김 비서의 의도를 알아들은 도현이 톡톡, [박하진]을 써 내려갔다. 그러자 여러 명의 박하진이 나왔고, 제일 위에 자신이 아는 박하진이 떴다. 오! 박하진 중에 제일가는 박하진인 모양이다. 그 박하진을 클릭하니 불과 4시간 전에 최신 게시물을 올렸단다.

mintmelody_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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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tmelody_jin 너나거 촬영. 우리 민트멜로디 커피차 고마워요. 사랑해요.

#너나거 #커피차 #민트멜로디 #너와나의거리 #이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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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전

도현의 시선이 사진에 고정됐다. 하진은 커피차 앞에서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로 브이를 짓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에 결국 피식, 감춰지지 않은 웃음이 도현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예쁘네.”

도현이 무심결에 속마음을 내뱉었다. 아마 본인은 내뱉었는지도 모를 테다. 이런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도현은 하진의 사진 하나하나를 분석하느라 바빴다. 탈색을 또 했나. 이전의 은발보다 색이 조금 더 밝아진 것 같다. 그거 자주 하면 두피 아프다던데. 이 추리닝은 백수라서 입은 건가. 너무 귀엽다.

“대표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하트 누르지 마세요. 그거 제 계정입니다.”

앗. 이미 ‘좋아요’를 누른 도현이 핸드폰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좋아요 수 끝자리가 4예요.”

“그런데요?”

“4라니까요? 김 비서님, 죽을 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죠? 괜히 기분 안 좋으니까 제가 5로 만들려고요.”

제 대표가 늘어놓는 엄청난 궤변에 김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비공개 계정 하나를 만들어 드리든지 해야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현은 아예 편한 자세를 취하곤 하진의 별그램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대표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모습이 퍽 웃겨서 김 비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뭐 재밌는 거 보세요?”

“저요? 아니요. 별로 재미없는데.”

“근래 들어 가장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도현은 본인이 웃고 있단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냥 조금 피식한 정도를 김 비서가 과장해서 말한 것은 아닐까. 도현이 금세 얼굴을 굳히곤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제가요?”

“네. 대표님이요.”

“저 원래 웃는 상이잖아요.”

“지금은 안 웃고 계신데요?”

김 비서의 말에 핸드폰 액정으로 얼굴을 비춰봤다. 입꼬리가 평행선을 넘어서 뒤집힌 이차함수처럼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확실히 웃는 상은 아니네. 근데 왜 실실거리고 있었지? 도현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물음에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김 비서님. 저 좋은 일 있어요?”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죠?”

“잘 모르겠어요.”

“박하진 씨 보는 게 기분 좋은 일 아닐까요?”

“그게 왜요?”

아나, 이 대표 새끼가….

김 비서가 툭, 튀어나올 뻔한 말을 천사 같은 딸과 아내를 떠올리며 간신히 참아냈다.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더니 피멍이 들었는지 아파 죽겠다. 비록 자신은 몸이 아프지만, 제 대표는 정신이 아픈 것 같으니 조금 이해해주자고, 그렇게 본인을 달래는 김 비서였다. 이내 업무용 핸드폰을 확인한 김 비서가 다시 특유의 친절함을 걸치곤 말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대표님께서 직접 찾으셔야겠네요.”

“…….”

“도착했답니다, 박하진 씨.”

얼굴에 급속도로 미소가 번지다가 순간 아차 싶었는지 도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두어 번 만진 도현은 그보다 더 천천히 대표실을 나왔다.

“미팅 시간 여유롭게 도착했네요.”

“촬영장에서 바로 오신 거 아닐까요?”

“밥도 못 먹었겠네.”

도현이 점심이 끝나갈 무렵의 시간을 확인하곤 혼자 중얼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를 귀신같이 들은 김 비서가 대답했다.

“저도 못 먹었습니다.”

“거참. 사람이 잘 좀 챙겨 드시지.”

“…제 점심시간을 가져간 건 대표님이십니다.”

“아, 그런가. 그럼 박하진이랑 밥이라도 같이 먹을까요?”

“그건 하진 씨 의사가 제일 중요할 것 같은데요.”

엘리베이터 거울 속 제 모습을 다듬던 도현이 김 비서의 말에 움찔했다. 너무 정곡을 찔린 터라 딱히 대꾸를 못 하겠다. 같이 밥 안 먹으려나. 하긴 뭐 배고프다고 자연스럽게 밥 먹을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물어나 보겠다며 도현은 의지를 불태웠다.

이윽고 빠른 속도로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달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총알처럼 튀어 나간 도현이 좌우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직 하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이 차오를 즈음, 저 먼 시선 끝에 하진이 닿았다.

“여어, 박하진?”

이제껏 참은 보람도 없게 도현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하진을 불렀다. 아차.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해야지. 도현이 얼른 얼굴에서 반가움을 지우곤 웬일이냐는 표정을 띄웠다. 그런데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멀리서 매니저가 입 모양으로 뭐라 말하는데 하필 박하진을 죄다 가린 상태라 박하진 얼굴은커녕 머리카락도 안 보인다. 일부러 가리는 건가. 도현이 보폭을 더 넓혔다. 긴 다리로 몇 걸음 안 가서 도현은 하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긴 웬일….”

반가움도 잠시, 도현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눈동자는 집어삼킬 듯 하진의 입가를 향한 채였다.

“너 뭐냐.”

“…….”

“얼굴 왜 이래.”

하진이 고개를 숙였지만, 도현은 무릎을 굽히면서까지 하진의 얼굴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른쪽 입가. 하진은 누구에게 맞은 것처럼 오른쪽 입가에 피딱지를 얹고 있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도현이 얼굴을 구겼다.

“무슨 일인데.”

제 물음에도 대답이 없자 도현은 하진에게 한 발 더 다가가며 물었다. 그 집요함이 부담스러워 하진이 도현을 밀었다.

“그냥. 촬영하다가 좀 다쳤어.”

헉. 이건 도현의 입에서 나온 소리도, 하진의 입에서 나온 소리도 아니었다. 놀란 나머지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수찬에게서 나온 소리였다. 옆으로 비켜 서 있던 수찬은 기겁하며 둘에게서 물러났다. 뭐지, 이 상황? 예전 같으면, ‘네 알 바냐.’부터 시작해서 ‘꺼지세요.’까지 나왔을 텐데 대화가 너무 평화롭지 않은가. 수찬이 물러난 틈을 타 도현은 하진의 코앞까지 서서 조심스레 턱을 감싼 뒤 들어 올렸다.

“맞았어?”

“어.”

순식간에 도현의 미간이 우그러졌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감히 어떤 새끼가?’였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그 새끼 잡아서 족친다.’였고. 새하얀 하진의 얼굴 위로 검붉게 내려앉은 피딱지는 심히 이질적이었다. 그게 몹시 짜증이 났다.

“존나 통쾌하지? 나 때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닐 테고.”

“…….”

“…….”

“…아파.”

높낮이가 없는 도현의 어조였다. 그러니 말의 끝이 물음표인지, 마침표인지도 듣는 쪽에서는 알아채기 힘들었다. 하진이 되물었다.

“아프냐고?”

“아니.”

“…….”

“내가 아프다고.”

아까와는 사뭇 다른 단호한 말투가 하진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엉킨 눈동자에선 걱정이 흘러넘쳤다. 건조한 눈빛으로 이를 받아내던 하진은 결국 먼저 눈을 피하고야 말았다. 그리곤 몸을 돌려 도현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뚜벅. 뚜벅.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이 사라질 때까지 도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을 피하는 하진을 보자 일순간 붙잡을 용기가 없어진 탓이었다. 여전히 비겁하게도.

“누구한테 맞은 겁니까.”

“네, 네?”

양쪽 눈치를 보다가 벗어날 타이밍을 놓친 수찬이 도현의 질문에 말을 버벅거렸다.

“박하진 입술 터졌던데.”

“아. 그건 액션 신 배우랑 호흡이 안 맞아서 다친 거예요.”

“그건? 뭐 다른 일도 있었나 보네요?”

헙. 예리하시네. 수찬은 고민했다. 이걸 사실대로 말하자니 하진이 화를 낼 것 같고, 그렇다고 말하지 않자니 도현이 투자하는 드라마라 좀 그렇고. 수찬이 머뭇거렸다.

“그게… 촬영장에서 좀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요?”

“말씀드리기가 좀….”

“내가 투자하는 드라만데?”

“아, 그… 저도 전화 받느라 정확히 본 건 아닌데 감독님이 하진 형을 좀 만… 졌나 봐요.”

차분히 듣던 도현은 마지막 부분에서 눈썹을 와락, 구겼다. 만져? 장인수가 박하진을?

“씨발.”

“…네?”

“아, 미안합니다. 갑자기 화가 나서. 그래서 박하진은 가만히 있었어요?”

“형 나름대로 참다가… 터졌죠, 뭐.”

그나마 그건 다행이네. 도현이 화를 누그러뜨렸다. 아니, 사실 아직도 열이 뻗치긴 한다. 망할 장인수 손목을 확 부러뜨릴까. 아니면, 그냥 댕강 모가지를 잘라버릴까. 뭐가 됐든 다시는 박하진 못 건드리게 해야겠다.

“대표님. 안 가보셔도 되겠습니까?”

이 상황을 지켜만 보던 김 비서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제일 구석 안무 연습실에 있다며 친절히 하진의 위치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이 도현에겐 꼭 용기를 복 돋아주는 주문처럼 느껴졌다.

“그럼 저 가보겠습니다. 김 비서님, 점심은 수찬 씨랑 드세요. 맛있는 걸로.”

그에 도현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도현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그 짧은 시간마저 하진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약 일주일만이었다. 직접 얼굴 본 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했는데 이젠 일주일 안 봤다고 이게 막 보고 싶고, 반갑고 그랬다. 그랬는데 웬 피딱지를 얹어오니 속이 상했다. 아니, 그냥 누구한테 맞았다니까 눈깔 뒤집히게 화가 났다. 왜 이러지. 감정이 왜 이렇게 박하진에 좌지우지되는 거지. 지난 일주일 동안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점령한 걸로는 모자란 모양이다.

‘너 나 좋아하네.’

아씨. 또 떠올랐다. 술 취한 사람 주정이라고 그냥 넘기면 될 텐데 그게 안 된다. 자꾸만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잖아. 진짜 박하진 좋아하는 건가 싶고. 그러다 말도 안 된다면서 부정하고. 그냥 연민이라고 치부하고. 무슨 감정인지 알아보겠다고 호언장담해놓고 현실은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러니까 박하진은 괜히 그런 말을 해서는, 본인은 기억도 못 하면서 억울하게.

그렇게 발걸음마다 하진 생각을 한 도현이 연습실 앞에 도착했다. 후, 이내 호흡을 가다듬곤 조심히 문을 열었다.

***

하진은 도망치듯 지하로 내려갔다. 왜 도망쳤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냥 낯설어서. 우도현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이, 그 진심이 너무 낯설어서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맨날 걱정이랍시고 화만 낼 줄이나 알지, 방금처럼 조곤조곤 얘기한 건 좀 뜻밖이었다. 아, 물론 하진은 자신이 간 뒤에 도현이 장인수가 하진을 만졌다는 소리를 듣곤 적나라하게 ‘씨발’을 내뱉은 걸 몰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긴 했다.

어쨌든 며칠 전, 도현이 하진을 데려다준 뒤로 어딘가 묘하게 태도가 달라진 것은 틀림없다. 적어도 10년을 원수로 지낸 하진은 느낄 수 있었다. 달라진 도현이 파고드는 게, 10년 전의 그때라는 것을 말이다.

하진은 수찬이 말한 지하 끝방 연습실 문을 열었다. 불은 꺼져 있었으나 조금 전까지도 누가 사용했는지 열기가 감돌았다. 아, 연습실 오랜만이네. 유어 멜로디 해체되고 춤 한 번도 안 췄으니까 한 1년만인가. 연습실 거울 앞에 홀로 서니 이제야 실감이 좀 난다.

“이제 진짜 혼자네.”

작게 중얼거린 하진이 그대로 연습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실 여기 오기 전부터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지금의 W 건물은 신사옥이라 구사옥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새지만, W 엔터테인먼트라고 쓰여있는 것도, 그 로고가 박힌 연습실도 하진에게는 너무 생생한 것들이니까. 이런 연습실에서 우도현이랑 거의 살다시피 했었는데. 기분 참 이상하다. 되게 궁상맞아.

눈을 감았다. 그 위에 손목을 올려놓고 빛을 차단했다. 캄캄한 어둠이 몰려오니 곧 정신이 아득해졌다. 요 며칠 꽉 찬 스케줄로 잠을 못 잔 탓이었다.

아, 졸려.

누워서 그런가. 급격하게 잠이 쏟아졌다. 크게 하품도 했다. 그 덕분에 눈동자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이내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이 몸을 옆으로 돌리자 그대로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축축했다.

그렇게 서서히 정신을 놓아가던 하진의 귀에 작은 소음이 들렸다. 문 열리는 소리. 누군가 들어왔다. 뚜벅. 뚜벅. 딱딱한 밑창 소리가 하진에게 가까워졌다. 누구지. 여기 올 사람 임수찬밖에 없는데. 임수찬이 구두를 신고 왔던가. 기억이 안 난다. 그보다 하품이 또 나오는 게 문제였다.

“수찬아. 나 십 분만 이러고 있을게.”

등 뒤에서 멈춘 발걸음. 대답은 없었다. 뭐지. 임수찬 아닌가. 하진이 웅크리고 있던 몸을 폈다. 그와 동시에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벅벅, 손등으로 문질렀다. 순식간에 환한 빛이 얼굴로 쏟아져 인상을 쓴 하진은 아주 천천히 눈두덩이를 들어 올렸다. 곧 뿌옜던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한 사람을 담았다.

“울어?”

허리를 반쯤 숙인 채 하진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묻는 사람. 도현이었다.

“뭐야, 왜 따라왔냐?”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하진은 태연한 듯 말했다. 그에 도현은 대답 없이 하진 쪽으로 손을 뻗을 뿐이었다. 곧은 손가락이 하진이 비비적거리던 눈가에 닿았다. 흠칫. 갑작스러운 도현의 행동에 하진이 어깨를 떨었다.

“울었네.”

도현이 낮게 읊조렸다. 아, 또다. 아까 봤던 낯선 우도현.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걱정을 한 아름 담은 도현 때문에 눈가가 화끈거렸다. 미친. 심장은 또 왜 이렇게 간지러워. 견디다 못한 하진이 도현의 손을 쳐내곤 일어나 앉았다.

“야. 이거 하품해서 눈물 난 거야. 나 지금 엄청 피곤해서.”

퉁명스럽게 말한 하진을 도현은 딱 봐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도현의 시선이 영 탐탁지 않았던 하진은 도현의 팔을 제게로 확 잡아끌었다. 그리곤 눈가를 도현의 코앞까지 들이밀며 말을 덧붙였다.

“이거 봐. 눈 안 빨갛잖아. 운 사람 눈이 이렇게 멀쩡할 리가….”

그때였다. 호기롭게 말을 내뱉던 하진의 입술 위로 진득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끈적함에 하진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없잖아….”

달싹거린 입술 새로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둘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도현의 꿀렁이는 목울대도, 집요한 시선도, 어딘가 달뜬 숨결도, 그 모든 게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꿀꺽. 하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도현을 밀려고 하자 도현은 곧바로 하진의 손을 포박하곤 쪼그려 앉아 하진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내 도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키스해도 돼?”

담백한 어조가 품은 내용치고는 꽤 단도직입적이었다. 지금 머릿속에서 이성과 본능이 격렬하게 싸우는 중인 하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도현이 하진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갈 즈음이었다.

“미친 새끼.”

간신히 이성이 이긴 하진은 고개를 뒤로 뺌으로써 도현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쿵쿵, 심장은 요동쳤다.

“좀 억울한데. 네가 먼저 꼬셨잖아.”

“꼬신다고 다 넘어가? 줏대 없는 새끼네, 이거.”

“꼬신 건 맞나 보네? 나 왜 꼬셨어? 진짜 나랑 키스하고 싶어?”

“아, 꺼져. 미친놈아!”

자꾸만 다가오는 도현을 하진이 냅다 밀어버렸다. 그에 풀썩, 주저앉은 도현이 푸하하, 재밌다는 듯 웃어 재꼈다. 망할. 그게 어찌나 얄밉던지 하진이 발로 도현을 멀리 밀어버렸다. 그 덕분에 도현의 검은색 슬랙스에 회색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래도 좋다고 도현은 계속 웃고 있었다.

“너 미쳤냐?”

“그래 보여?”

“어. 진짜 존나 정신 나간 새끼처럼 보여. 그렇게 쳐 웃기만 할 거면 나가서 웃어. 정신 사나우니까.”

하진이 제법 진지하게 도현을 꾸짖었다. 물론 도현에게 타격감은 없었지만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끅끅대던 도현은 몸을 일으켜 허벅지 쪽에 새겨진 발자국을 털었다. 그러면서 무심하게 운을 뗐다.

“솔직히 말이야.”

그에 연습실 거울을 등진 채 앉아 있던 하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또 헛소리하면 혓바닥이라도 뽑아버릴 심산으로 하진은 도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 네가 울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 방금도 네가 운 줄 알고 머리가 새하얘졌거든.”

…뭐? 뜬금없이 그게 무슨….

“그냥 막 화가 나. 너 울린 새끼 찾아서 잡아 족치고 싶어.”

“…지랄한다. 네가 왜?”

“모르지, 나야.”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너.”

“예? 나요?”

뭐야. 이게 무슨 말투야. 얼마나 당황했는지 하진은 저도 모르게 이상한 말투를 내뱉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만 데구르르 굴리니 이어서 도현이 쐐기를 박았다.

“넌 아는 것 같던데.”

“…….”

“내가 왜 이러는지.”

하진에게서 등을 진 도현이라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말과 말 사이의 공백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금 꽤 진심이고, 진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이 씁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 자꾸만 내가 뭘 안다는 거야. 속으로 구시렁대며 하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선은 널찍한 도현의 등에 둔 채였다. 가로세로, 어디 하나 좁은 구석 없이 탁 트인 넓은 등을 보고 있자니 그때가 생각난다. 저 등에 막 비볐었지, 그걸. 새삼 미친놈이었….

‘너 나 좋아하네.’

응? 이건 무슨 기억이지? 아니, 그보다 이게 무슨 말이지? 너. 나. 좋아하네. 이게 무슨….

‘너 나 좋아하네.’

그 순간, 똑같은 장면이 하진의 머릿속을 침투해 반복 재생되었다. 동시에 하진이 소리쳤다.

“악!”

미친. 씨발. 이거 내가 한 말이잖아? 돌았네, 돌았어, 박하진. 이 상또라이 새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너 나 좋아하네? 나 너 좋아하네도 아니고 너 나 좋아하네? 이게 무슨 자신감 철철 넘치는 발언이야? 내가 이런 말을 왜 했지? 아니, 아니. 그럴 수 있다 쳐도 그걸 우도현한테 한 게 말이 돼? 도대체 그날 술에 뭘 탄 거야. 온갖 수치스러운 일은 다 저질렀어, 씨발. 나가 죽어라, 박하진.

물 밀듯 밀려오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진은 그대로 가라앉고 싶었다. 눈 가리고 아웅처럼 양손으로 시야를 가려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진은 꽉 막힌 검은 시야 안에서 이상하리만치 생생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치심이 지나치면 막 얼굴이 쓰리기도 하나.

“야, 너 괜찮아?”

언제 앞까지 왔는지 도현이 하진의 손을 걷어냈다. 그리곤 턱을 쥐어 고개를 돌리도록 했다. 얼떨결에 왼쪽 볼을 드러내게 된 하진은 그제야 제 쓰라림이 입술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인지하고 나니 고통이 두 배로 몰려왔다. 굳었던 피딱지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혓바닥으로 그 부위를 슥 핥았다. 찝찔한 피 맛이 혀끝에 닿았다.

“아씨, 쓰라려.”

“어디 봐봐.”

하진이 미간을 구기자 도현도 덩달아 인상을 썼다. 아니, 오히려 도현이 더 아픈 사람처럼 굴었다.

“치료해야겠는데.”

“됐어. 그냥 다시 붙게 내버려 두면 돼.”

“구급상자 있어. 약이라도 바르자.”

말을 끝내자마자 도현이 얼른 일어나 연습실 뒤편으로 향했다. 정수기 옆 길게 놓인 의자로 간 도현은 몸을 구부려 의자 밑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하얀 구급상자가 도현의 손에 잡혔다. 그것은 구급상자라기엔 조금 특이한 모습으로 겉은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었고, 중심엔 큰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큰 리본이 왠지 낯익은 하진이었다.

“너 진짜 리본 성애자지?”

“어?”

하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현은 구급상자에 달린 리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기겁하고야 말았다.

“야, 아니야! 이건 연습실 사용하는 애들이 해놓은 거겠지! 나 진짜 아니야.”

“그렇다고 쳐줄게.”

“아니,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나 진짜 아니라니까?”

“어, 어. 그래.”

도현이 곧바로 변명했지만, 하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대충 알겠다며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뭐, 리본 성애자든 아니든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우도현 반응이 퍽 재밌어서 그랬다.

“그렇게 웃으면 입술 더 찢어진다.”

“나 웃었어?”

“어. 이만큼 웃었어.”

어느새 다시 하진 앞에 앉은 도현이 하진의 광대를 쿡, 찌르며 답했다. 아, 웃고 있었나. 이를 자각한 하진은 금세 표정을 굳혔다. 입꼬리에선 찢긴 피딱지 사이사이 붉은 피가 맺히고 있었다.

“소독약 바를 거야. 아프면 말해.”

그렇게 말한 도현은 소독약을 적신 면봉을 하진의 입가로 가져갔다. 톡. 아주 살짝 닿았는데도 상처 부위가 화끈거려 소리 지를 뻔했다. 저절로 내 천(川)자를 그리게 된 미간은 싸한 느낌이 계속되어 펼 수도 없었다.

어, 많이 아픈가. 아파하는 하진을 보며 어쩌지, 어쩌지만 되뇌던 도현이 대뜸 상처에 호오, 입김을 불었다. 그에 하진이 경악했다.

“너 돌았지.”

“양치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파 보이길래.”

뭐가 문제냐는 듯 도현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알싸한 민트 냄새가 하진의 코끝을 자극한 뒤였다. 곧이어 입가에 약이 발라질 때까지 하진은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문질러야만 했다.

“끝.”

혹여 또 입김을 불까 봐 하진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마침 뒤에 거울이 있어 상처 부위를 보는 척,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으, 생각보다 많이 찢어졌네. 입술 안쪽을 혀로 부풀려 상처를 보던 하진이 살짝 시선을 어긋 내 도현을 눈에 담았다. 도현은 어디로 굴러갔는지 모를 소독약 뚜껑을 찾는 중이었다. 그러다 거울을 매개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왜?”

도현이 눈꼬리를 접은 채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 그것이 하진을 몹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요즘 저 새끼, 진짜 이상해.

“야.”

요즘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이 찰나에 도현이 소독약을 엎지르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물어봤을 것이다. 연습실 한가운데에 엎지른 소독약이 풀풀,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가득 퍼져나갔다. 학교 보건실에서 나던 냄새처럼 알싸하게. 그 냄새가 코에서 뇌로 빠르게 하진을 비집고 들어왔다. 취할 것만 같았다.

“키스해볼래?”

하진이 물었다. 알코올 향에 취했다는 변명, 그 뒤에 숨은 채로.

대답은 없었다. 공백도 없었다.

“…야… 읏.”

도현은 그대로 돌진해 하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여유는 이미 엎질러진 소독약과 함께 흘려보낸 지 오래였다. 부드럽다기보단 거칠게, 느릿하기보단 조급하게. 도현은 그런 상태였다. 마치 억누르고 억눌러 잔잔해진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진 것처럼. 그게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것처럼.

다물렸던 입술이 열리고 삽시간에 서로의 혀가 뒤엉켰다. 질척한 타액 위를 혓바닥이 거칠게 항해했다.

“…하으….”

도현의 혀가 입천장을 건드리자 하진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터진 신음에 달뜬 공기가 섞여 뜨거웠다. 그 적나라한 반응을 도현은 놓치지 않았고, 더욱 하진에게 다가갔다. 밀려나던 하진이 거울에 완전히 등을 맞대게 되었을 때, 도현이 제 손으로 하진의 뒤통수를 그러쥐었다.

쿵-.

격렬한 움직임에 온몸이 거울에 부딪혔지만, 머리만은 무사했다. 아프지 않도록 하진을 감싼 손이 짓눌렸음에도 도현은 손을 빼지 않았다. 이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제 앞에서 열띤 입술로 자신을 갈구하는 박하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하진의 고른 치열 사이사이를 훑은 도현이 천천히 입술을 떼곤 하진과 이마를 맞붙이며 속삭였다.

“하진아.”

축축이 젖은 목소리가 하진을 불렀다. 그에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곧바로 도현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이 보였다. 풀린 눈꼬리에 색기가 흐르는 하진, 본인의 모습이 말이다.흡. 하진은 그제야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실감할 수 있었다.

“박하진.”

갑자기 몰아친 현실감에 턱턱, 목이 막혔다. 그런 하진을 도현이 다시 한번 나긋하게 불렀다. 뒤얽혔던 혀만큼이나 끈적한 시선이 둘 사이에 놓였다. 우물쭈물하는 하진을 향해 도현이 그 위를 조심히 거닐곤 하진 앞에 마주 섰다. 도현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했다.

“더 해볼까.”

“…….”

“아니면 그만할까.”

그가 내뱉은 목소리 또한 그랬다. 그것에 흔들리는 건 하진이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를 기분이 거세게 하진을 흔들어놨다. 쿵쾅대는 심장에 머리는 아프고, 코끝을 맴도는 소독약 냄새에 정신은 아찔해져 갔다. 그리고 이 복잡한 감정이 하진은 달갑지 않았다. 아주 옛날에 느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아서.

“그만하자.”

혹여 여러 감정이 담길까 걱정하며 억누른 목소리는 하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건조했다. 그게 참 다행이었다. 여기서 도현이 한 번만 더 흔들면 꼼짝없이 그 파도 속으로 뛰어들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 이제 10년 전에 이미 잃었던 친구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남보다 못한 사이도 아닌 완전한 남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도현이 하진을 놓아주었다. 목에 닿아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술을 덮었던 온기만은 여전했다. 하진은 벅벅, 제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온기를 지워냈다. 얼른 사라지길 바랐다. 이 온기가, 이 떨림이 싫었다.

“먼저 갈게.”

그렇게 연습실에 남은 건, 도현 혼자였다. 연습실을 가득 채운 열기도, 그 사이로 퍼진 알싸한 소독약 냄새도,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

잠깐의 휴식 시간. 검은 SUV 문을 연 남자가 이미 그 안을 차지하고 있는 다른 이를 발견하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푹 눌러쓴 모자, 목 끝까지 채운 패딩, 거기에 검은 마스크까지. 철저하게 얼굴을 감춘 남자였지만,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불쑥 촬영장으로 올 만한 이는 한서빈뿐일 테니.

“일어나, 한서빈.”

남자가 서빈을 흔들어 깨웠다. 남의 차에서 잘도 자네. 잠시 뒤척이던 서빈은 곧 눈을 뜨곤 “어, 왔어?”라며 태연히도 답했다. 그게 퍽 어이가 없어서 남자가 웃었다.

“왜 웃어?”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아서.”

남자의 솔직함에 오히려 서빈이 당황했다. 남자는 멀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과 차려입은 양복이 상당히 잘 어울렸다. 그에 비해 서빈은 얼굴을 꽁꽁 싸매야 할 만큼 추레해서, 그 차이가 서빈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남자의 진심마저 의심이 들 만큼.

“갑자기 무슨 일인데?”

“네 일 처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서 서빈이 더욱 남자에게 빈정댔는지도 모르겠다.

“참 잘생겼는데.”

“…….”

“왜 사람 하나를 못 꼬시지?”

서빈의 정곡에 남자의 잇새로 피식, 다소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서빈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속을 다 꿰뚫기라도 하는 양 남자의 눈동자는 그토록 노골적으로 서빈을 훑어내렸다. 그러다 남자가 문득 거슬렸는지 마스크를 벗겼다. 그러자 새파랗게 멍이 든 서빈의 볼이 단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미간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또야?”

남자의 물음에 서빈은 그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의 손에서 마스크를 빼앗아 다시 얼굴을 가린다.

“이 꼴 보기 싫으면, 섹스 동영상이든 뭐든 빨리 가져오라니까?”

얼마 전 비굴하게 태희를 상대했던 본인을 떠올리니 갑자기 목소리가 불퉁하게 나왔다. 요즘 서빈은 늘 이런 식이었다. 괜찮았다가 하진이나 태희의 얼굴만 떠올리면 바로 자존감이 땅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워지곤 했다. 이걸 전화로만 들었을 때는 견딜 만했던 남자는 제 앞에서 무너지려는 서빈을 보자 그냥 화가 났다. 유하게 내려가 있던 눈꼬리는 어느새 치켜 올라가 못마땅히 서빈을 보고 있었다.

“서빈아. 서 대표가 진짜 너 도와줄 것 같아?”

“…….”

“너 도와줄 사람 나밖에 없다니까.”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억압적이었다. 이를 느낀 서빈이 하, 비소를 내뱉는다.

“그러길 바라는 거 아니고?”

남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차오른 화를 다스리려는 것 같았다. 이내 남자가 손을 뻗어 서빈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서빈이 질끈 눈을 감았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나만 믿어, 서빈아.”

무서웠다. 늘 제게 지는 남자가, 사실은 그저 져주는 게 아닌지. 제 모든 것을 휘어잡기 위해 속내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남자의 손길이 제 눈두덩이에 닿을 때마다 서빈은 저런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떨쳐낼 수 없는 이유는.

“나 그거 꼭 필요해.”

적어도 이 녀석은 제가 하자는 대로 하니까. 저를 배신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 종착지가 조금은 다르더라도, 그래도 이 녀석만큼은 저를 깔보지 않겠지.

“나한테 이제 너밖에 없어, 이강운.”

너밖에 없어. 그 한마디에 강운은 세상을 가진 것처럼 환히 웃었다. 그러나 서빈은 따라 웃지 못했다. 그 웃음 이면에 서린 뒤틀린 욕망을 언뜻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래. 맞아, 서빈아.”

“…….”

“너한테는 나밖에 없어. 지금도 앞으로도.”

우정이라기엔 오염된 감정이었다.

***

“야, 임수찬.”

고된 스케줄을 마친 뒤, 퇴근하는 길이었다. 열애설이 터지고 난 후 바빠진 하진 덕분에 덩달아 수찬 또한 바빠져서 주말엔 통 쉬지 못했는데 내일은 딱 주말 겸 스케줄이 없는 날이니 그야말로 기분 최고! 이는 한껏 들뜬 수찬의 목소리에서도 티가 났다.

“네, 형!”

“너 애인 있냐?”

“…아.”

둥둥, 떠다니던 수찬의 기분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다짜고짜 아픈 곳을 찌르는 하진 때문이었다. 수찬이 울상을 지었다.

“형, 너무해요! 저 헤어진 지 이제 두 달 됐단 말이에요.”

“두 달? 그게 뭐? 두 달이면 다른 사람 만날 수도 있잖아.”

“보통 사람들이 형처럼 그렇게 쿨하진 않아요.”

이게 쿨한 건가. 존나 찌질하게 며칠 전, 우도현과의 키스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면서 자책과 후회를 반복하는 중인데? 하진이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새까만 하늘 위로 오늘 아침 온 메시지가 두둥실 떠올랐다.

[얼굴 보고 할 얘기 있어. 시간 될 때 연락해줘.]

그날은 혼자 분위기에 취한 거라고 결론 내린 하진이었다. 가능하다면, 없던 일로 하는 것도 괜찮았다. 그래서 일부러 먼저 연락도 안 했고, 도현도 연락 없길래 아, 이거 모르는 척 지나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온 건데? 할 얘기는 또 뭔데? 괜히 무서워서 열두 시간이 지났지만, 하진은 아직 답장도 안 한 상태였다.

“그럼 친구랑 키스해봤냐?”

여전히 시선은 밖으로 피한 채, 하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곤 물었다. 그것도 아주 일상적으로 무심하게 말이다. 그 때문에 수찬은 제 귀를 의심하며 하진의 물음을 혓바닥 위에 굴려봐야만 했다. 친구랑. 키스. 해봤냐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 얘기가 왜 그쪽으로 튀어요? 형, 설마….”

수찬이 말을 멈췄다. 그리곤 의심의 눈초리로 백미러에 비친 하진을 쏘아봤다. 그에 하진이 괜스레 침을 삼켰다. 눈치가 바닥을 기는 임수찬이 알아챘을 리가 없는데 오늘따라 예리하게 군다. 혹시 들킬까 초조한 마음에 도리어 하진이 역정을 냈다.

“뭐. 설마 뭐, 새끼야.”

“아… 아니에요.”

수찬은 금세 쪼그라들었다.

“큼. 드라마! 거기서 현이가 여사친이랑 키스를 했었대. 그래서 한번 물어봤어. 난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더라고.”

아, 임기응변 좋았다. 수찬도 그렇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곧 도착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안 되는데.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 또 한 번 하진이 툭, 질문을 던졌다.

“친구랑 키스하는 게 흔한 일인가?”

“흔하진 않은데 간혹 있긴 하더라고요.”

“아, 그래? 그렇지? 그게 비정상적이거나 그런 일은 아니지?”

하진은 순간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역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 뭐 친구끼리 키스도 좀 하고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러다 눈 맞아서 잠도 자고,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하진의 세상은 꽤 관대한 모양이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정상, 비정상을 떠나서 전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해요.”

수찬의 단호함에 하진이 멈칫했다.

“왜?”

“키스를 한다는 거 자체가 애초에 상대를 친구로 생각 안 한 거 아니에요?”

“아니지. 친구라는 게, 호감이 기반이 된 상태니까 그럴 수 있지 않아?”

“놉. 그 호감이랑 키스하고 싶은 호감은 다르죠. 형, 친구끼리는 절대 키스 안 해요. 근데 만약에 키스했다? 요즘 그런 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차가 멈추고, 수찬이 뒤를 돌아 정확히 하진을 마주한 채로 말을 이었다.

“위장 남사친. 위장 여사친.”

“…그게 뭔데.”

“한쪽이 마음 숨기고 있는 거죠. 아니면 둘 다 숨기고 있거나.”

쿵. 지금껏 열심히 합리화했던 한 문장이 수찬의 말로 일순간 틀어졌다.

친구끼리는 키스할 수 없다. 만약 키스했다면, 그건 친구로 위장한 관계이다. 그러니 우도현과 박하진은 친구로 위장한 관계… 둘 중 누군가는 상대를 좋아한다.

혹은 둘 다 서로를.

“씨발.”

외마디 욕설이 지금 하진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

아, 좋다. 이런 게 천국이지. 달리 뭐가 천국일까. 호텔 침대에 포근한 샤워가운을 걸친 채 널브러진 하진이 생각했다. 임수찬이 고른 호텔이 하필 W인 것은 영 별로지만, 그래도 스위트룸 하나는 끝내주게 좋아서 만족 중이다.

하진은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정확히 말하면, 하진 잘못으로 일주일가량 집이 전면 개조를 거치게 된 거지만. 아니, 한겨울도 아니고. 12월 중순이면, 한겨울 맞나. 아무튼! 갑자기 한파주의보가 웬 말이고, 그날 욕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온 건 또 웬 정신 나간 일이며, 그로 인해 보일러가 터질 게 뭐람.

와, 진짜 지방 촬영 갔다가 집 들어왔는데 냉기가 거의 겨울왕국 급이었다. 한파에 어느 미친놈이 창문을 열어놓고 나오냐고, 그날 하진은 태희에게 참 많은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결론은 이 정도 객실이면, 일주일은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며 하진은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쿠당탕-!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이 하진을 깨웠다. 옆 객실에서 난 소린가. 의자가 넘어지다 못해 거의 집어던지는 수준의 소리였다. 어떻게 저런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오지. 하진은 왠지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지만, 금방 잠잠해진 소음에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쿵-! 쾅쾅-!

한층 더 세게, 더 가까이 소리가 들렸다. 아씨, 뭐야.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하진이 벽에 귀를 댄 채, 다음 소리를 기다렸다. 똑. 딱. 똑. 딱. 제 방에서 움직이는 초침 소리뿐, 벽 너머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 애초에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 옆 객실 소리가 들린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밖에서 들린 소리를 착각한 모양이다. 하진은 다시 누워 이번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또 한 번 들리면 프런트에 전화를…

덜컹-!

“아씨.”

건물 밖에서 들리는 게 아니었다. 옆 객실도 아니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분명 복도였다. 웬만하면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제 객실 문까지 덜컹거리게 하니 하진으로선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일단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문에 바투 붙은 하진의 귀로 아주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멀리선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윽윽, 고통을 참고 있는 듯했다.

하진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예상대로 문 근처에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의 반대편엔 한 여자가 몸을 반쯤 접고 힘겹게 서 있었다. 이를 보자마자 하진은 냅다 여자의 멱살을 잡아 그녀를 제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쿵-. 문을 닫았다. 밖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야! 문 안 열어?!”

“프런트에 신고당하기 싫으시면, 목소리 좀 낮추시고 객실로 돌아가 계세요.”

“어린 새끼가 뭐라는 거야.”

“네네. 나이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남자의 으르렁댐에도 하진은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하진이 본인의 생각만큼 겁을 먹지 않으니 당황한 남자가 발로 문을 아주 세게 한 번 차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하진은 별안간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아까 너무 급해서 던지듯이 방에 밀어 넣은 탓인지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진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늘어진 긴 머리,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던 하진이 그녀를 일으키려 할 때였다.

“아하하.”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여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그녀를 정확히 보게 된 하진은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희나 누나?”

놀랍게도 그녀는 여희나였다. 곧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넘기기 위해 쳐든 손엔 여기저기 멍이 가득했다. 하진이 이를 빤히 보자 희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좀 맞았어.”

희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자연스레 테이블로 걸어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옆 라인이 찢어진 스커트 때문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는 이미 시퍼런 멍들이 차지한 상태였다. 단 한 번도 여희나를 보며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을 느껴 본 적 없는 하진은 지금 제 눈앞에 상황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멀뚱히 자신을 보는 하진에게 희나가 먼저 말했다.

“물부터 좀 줄래? 목이 말라서.”

이런 상황에서조차 여희나는 뻔뻔하구나. 하진은 방금 살짝 고개를 들뻔한 일말의 동정심이 사그라듦을 느꼈다.

“와인이나 한잔할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는 하진의 뒤통수에 대고 희나가 물었다. 허.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하진이 생수 두 병을 손에 쥔 채 희나에게 걸어갔다.

“우리가 같이 술 마실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런가? 아쉽네.”

“물이나 드세요.”

그녀의 반대편에 앉은 하진이 그녀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다. 그리고 나머지 한 병은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시원함이 목구멍을 찔렀다. 정신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희나는 얼마나 갈증이 났는지 단번에 생수 반병을 꿀꺽, 삼켰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대답해줄게.”

“뭘 또 거창하게 생명의 은인씩이나.”

“맞을걸? 너도 봤잖아. 나 방금 죽을 뻔한 거. 그 새끼 눈깔 돈 상태였어.”

희나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덤덤했으나 생수병을 쥔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병 속 물이 넘실거렸다.

“없어요, 궁금한 거.”

그럼에도 하진은 단호히 거절했다. 남 일에 개입하는 건 딱 질색이다. 어차피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할 거 괜한 희망 주는 게 더 나쁘니까. 하진의 대답에 예상했다는 듯 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내가 하나 얘기해줄게.”

“…….”

“도현이.”

희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이름에 하진이 움찔했다. 이어 하진은 저도 모르게 귀 기울인 채 희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내 희나가 입을 열기까지의 그 짧은 정적이 이상하리만큼 긴장되던 하진이었다.

“나 좋아한 적 없어.”

“…….”

“10년 전에도, 지금도.”

단숨에 머리가 멍해졌다. 또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지금의 희나 모습 위로 한 장면이 덧씌워졌다. 늘 마음 구석에 응어리진 채로 남아 있는 초라했던 과거가, 그 마음이.

‘도현이가 나 좋아한대.’

아, 젠장. 왜 지금 이 장면이 떠오르는 걸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라고,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진이 질끈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이렇게라도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잇새로 어떤 말과 감정이 쏟아져 나올지 본인조차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왜 나랑 연인 행세하는지 알아?”

하진이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희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너 가지고 협박했거든. 열애설 안 받아주면, 너 강제로 커밍아웃시킬 거라고.”

아. 입술을 짓누르며 참고 참았던 하진은 결국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머릿속은 감정 역시, 뒤죽박죽되어버려 정확한 실체를 알기 어려웠다. 여전히 제멋대로 자신을 희생한 우도현에 대한 분노이자 원망일까. 아니면, 본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저를 구하려 하는 우도현에 대한 고마움일까. 역시나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 이름 모를 감정의 바위틈에서 작게 피어난 것이 있었다.

‘안심.’

우도현이 정말 여희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비롯된 안심. 그 못난 감정이 하진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말이야. 열아홉의 박하진이 그렇게 우도현과의 우정에 집착했던 것도, 그로 인해 받은 상처에 십 년을 아파했던 것도, 어쩌면…

쾅쾅-! 그때였다.

“안에 박하진인 거 다 알아. 더 소란 피우기 전에 좋은 말 할 때 나와라.”

하진의 생각은 채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강제로 끝이 나버렸다. 순순히 물러난 줄 알았던 남자가 다시 돌아온 탓이었다. 그에 하진과 희나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희나가 먼저 일어섰다.

“저 새끼 또 왔네.”

“나가려고요?”

“그래야지. 저 새끼가 이상한 소문 퍼트리는 거 금방이야.”

하진이 막을 새도 없이 희나가 빠르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걸음을 멈춘 희나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에 대곤 문 너머의 웅성대는 소음에 집중했다. 얼핏 마스터키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남자가 먼저 프런트에 신고를 넣은 모양이었다. 호텔 측의 곤란하다는 말과 남자의 막무가내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윽고 언성이 높아질 찰나였다.

“무슨 일입니까.”

익숙한 목소리. 주변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 사이로 누군가 대표님께서 여긴 어떻게, 라며 의문을 표했다. 이 상황을 문 안쪽에서 듣고만 있던 희나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하진에게 말했다.

“왔네.”

그 순간, 도어락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예나 지금이나 네 구세주.”

희나는 그 말을 끝으로 하진의 어깨를 두드리곤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중간에 도현과 스쳤지만, 짧게 눈만 부딪쳤을 뿐 둘 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도현의 뒤로 김 비서와 호텔 직원들, 그리고 덩치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희나를 잡아채려 했지만, 호텔 보안팀에 막혀 그대로 끌려 나갔고, 희나가 김 비서를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끝으로 방문은 닫혔다.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적막을 뚫고 제게로 걸어오는 도현이 마치 환상 같았다고, 하진은 얼핏 그런 생각을 했다.

“박하진. 괜찮아?”

단번에 하진 앞에 선 도현이 걱정 어린 물음을 던졌다. 하진의 어깨를 쥔 채 구석구석 상태를 훑던 도현은 하진이 괜찮음을 확인하곤 와락, 하진을 안아버렸다.

“이번엔 안 늦어서 다행이야.”

맞닿은 심장이 쿵쿵, 아주 무겁게 뛰었다. 그와 함께 하진의 뒤통수를 감싼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작은 떨림이 고스란히 하진에게도 전해져 파장을 만들어냈다. 얼마 전, 도현이 느꼈던 그것처럼. 작은 돌멩이 하나가 잔잔했던 마음에 깊은 파장을 일으켰던 것처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박동 위로 하진이 목소리를 얹었다.

“우도현.”

도현을 부르는 엷지만, 단단한 목소리. 그에 도현은 하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답했다.

“응.”

하진이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면서 심장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도현을 품에서 떼어낸 하진은 드디어 도현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하진, 본인까지도.

“여희나가 날 커밍아웃시키든 연예계 매장을 시키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날 도와줘.”

고저는 없었으나 감정은 차고 넘쳤다. 넘쳐서 흐르다 못해 툭, 치면 눈물이 터질지도 몰랐다. 이윽고 톡톡, 도현의 진심이 하진을 두드렸다.

“하진아.”

“…….”

“내가 너 좋아해.”

하진과 도현의 시선이 충돌했다. 아주 짧은 순간, 도현은 하진의 눈 위로 제 손을 얹었다. 하진의 시야가 금세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도현의 숨소리, 심장 소리만 귓가를 수놓았다.

“나는 그냥….”

“…….”

“그냥 널 좋아해서 그런 거야, 하진아. ”

“…….”

“그때도, 지금도 그냥… 그래서… 그런 거야.”

도현의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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