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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Guard)
주말임에도 수트를 한껏 차려입은 도현이 클럽 안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어떤 미친놈이 고등학교 동창회를 이딴 곳으로 잡은 건지 만나면 욕이라도 한 사발 먹여야겠다. 웨이터가 도현을 모임 장소로 안내했다. 얼마나 구석이면 귀를 때리던 음악이 점차 희미해진다.
“어, 도현아!”
“야야, 이젠 우 대표라고 불러야지. 우 대표, 왔어?”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도현을 반겼다. 검은색 긴 테이블 위에는 이미 두 병의 양주가 오픈된 상태였고, 얼음주머니 한 통이 무슨 영문인지 나뒹굴고 있었다. 곱게 좀 처마시지. 물이 뚝뚝 흐르는 테이블에도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입에 양주를 털어 넣기 바빴다. 깊게 한숨을 내쉰 도현이 문 앞에 서 있던 웨이터를 불러 테이블 정리를 부탁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얼음통을 주웠다.
“야, 도현이가 줍잖아! 빨리 정리 안 하냐!”
테이블의 중심에 있던 남자가 도현의 행동을 보고는 기겁하며 웨이터를 다그쳤다. 이곳에서 우도현의 위치란 이러했다. 감히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기 위해 도현이 허리를 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위치. 도현은 딱히 이런 서열 질을 즐기진 않지만, 알아서 밑을 기는 건 볼만 하니 내버려 뒀다. 무리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남자가 제 옆자리를 치며 도현을 불렀다.
“도현아, 여기 앉아.”
“아, 염상인. 도현이 가로채기 있냐.”
“뭐, 새끼야. 너 술 처먹지 마.”
이런 무리에서는 은연중에 정해지는 것이 있었다. 입을 잘 터는 녀석, 힘이 센 녀석, 돈이 많은 녀석 순으로 권력의 크기가 커진다는 것. 그렇기에 언제나 꼭대기에 있는 것은 도현이었으며, 그 바로 밑에 있던 것이 바로 도현을 제 옆으로 부르는 염상인이었다.
“여기 내 가게니까 마음껏 먹어.”
아, 동창회를 클럽에서 하게 만든 미친놈이 염상인, 이 새끼였구나. 염상인을 향한 도현의 눈빛이 불만으로 바뀌었다. 벌써 집에 가고 싶은 티를 애써 숨기며 도현은 동창회에 얼굴을 들이민 녀석들을 훑었다.
쟤는 DBN 예능 조연출, 쟤는 드라마 작가, 쟤는 연극배우. 하나 같이 방송국이랑 연관된 직업을 가진 녀석들뿐이었다. 물론 졸업한 고등학교의 특성이 미디어 쪽 특성화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미디어는 꽉 잡은 W 엔터에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의도가 더 맞을 것이다. 도현조차도 동창회보다는 일의 연장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왔으니까.
“근데 박하진 진짜냐?”
“뭐가.”
묵언 수행이라도 하듯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도현이 이곳에 와서 내뱉은 첫 마디였다. 저도 모르게 일순간 날카롭게 떠진 눈에 아차 싶어 얼른 표정을 풀곤 녀석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고민채랑 사귀는 거 진짜냐고. 아니, 우리 고등학생 때 박하진 게이라는 소문도 있었잖아.”
“맞아, 맞아. 나도 그거 보고 놀랐다니까.”
“아, 게이가 아니라 바이인가?”
게이. 게이! 남의 입에서 듣는 게이라는 말이 이토록 불쾌한 줄 알았다면 박하진 앞에서 조금 더 조심할 걸 그랬다. 꿈틀대는 도현의 눈썹이 여실히 그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염상인은 눈치가 없는 모양이다. 제 옆에 조연출 녀석과 시시덕거리면서 박하진을 깎아내리는 꼴을 보자니 속이 끓었다. 박하진이 게이든 말든 본인들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진짜 같잖게.
“그때도 말하지 않았냐. 박하진 게이 아니라고. 고민채랑 사귀는 거 진짜 맞아.”
“아, 진짜? 아쉽다.”
“…….”
“박하진 얼굴이면 가능할 것 같았는데.”
뭐, 씨발? 염상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말이라고 하기엔 불순물에 가까웠다. 그 불쾌함에 치가 떨리는 도현을 염상인이 음흉한 미소로 바라봤다. 그 순간, 가슴께에서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그 분노가 주먹으로 모여 그대로 염상인의 얼굴에 내리꽂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도현의 행동은 그저 생각에 그치게 되었다. 도현보다 한발 빨랐던 누군가로 인해서 말이다.
“우리 상인이 꿈도 야무지네.”
비웃음이 다분한 목소리. 도현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체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테이블로 걸어오는 박하진이 있었다. 하진의 등장으로 잠시 조용해졌던 녀석들은 이내 웅성웅성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네 면상이면 내가 불가능한데.”
쿡-.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전염성 강한 웃음으로 인해 삽시간에 룸 안은 너도나도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중 유일하게 웃지 못하던 염상인은 수치심에 얼굴을 구기며 하진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진은 그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면서 염상인과 우도현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줄곧 하진만을 좇던 도현의 눈동자가 하진의 형형한 옆모습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길을 잃었다. 술은 아직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정신이 멍했다. 새하얀 피부, 그 위를 점유한 검은 와이셔츠. 살랑이는 은발과 그 아래로 언뜻 보이는 블랙 피어싱. 하진은 마치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게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아하하! 하진이, 네가 웬일이야.”
염상인에게 꽂힌 여러 개의 눈동자가 하진에게 사과하라고 종용했지만, 도저히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던 염상인은 멋쩍게 내뱉은 말로 사과를 대신하려 했다. 그런 염상인을 가벼이 무시한 채 하진은 도현 쪽으로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야.”
하진이 불쑥 도현 앞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분명 제게 시선을 던지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초점이 나가 보이는 도현이 이상해서였다.
“귀신이라도 봤냐?”
…아. 도현의 입에서 바람 빠지듯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현이 어색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이런 데 원래 안 오잖아.”
“그냥. 뒤에서 씹히느니 차라리 앞에서 씹히려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모두가 겸연쩍게 웃으며 먼 산을 바라봤다. 다들 찔리는 게 있으니 하진에게 섣불리 해명하진 못했다. 이내 하진이 제 앞에 새로 세팅된 글라스에 얼음 두 개를 넣었다. 많이 비워진 양주와 바닥을 드러낸 안주가 염상인의 쪼잔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차라리 돈을 내고 먹지, 고작 이 정도 먹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나.
“염상인, 여기 네 가게라고?”
“어? 어어.”
“오늘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거 더 시켜. 너희도 그냥 다 시켜. 이딴 풀떼기나 먹지 말고.”
“…어, 어… 왜?”
이리저리 바삐 굴러다니는 눈동자는 서로들 눈치만 볼 뿐이었다. 곧 하진이 본인과 잘 어울리는 회색 신용카드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 영롱한 자태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꽂혔다.
“너희보단 내가 더 벌 테니까?”
관장님 가라사대 ‘모든 것의 기본은 자기방어. 잽만 날리다 보면 언젠간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꼭 가드를 올려라….’
평소 욱하는 성질머리로 본인이 다치든 말든 남부터 패버렸던 하진에게 어느 날, 관장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최근 들어 계속된 도현과의 싸움에서 하진은 항상 자기방어 없이 공격만 날리기 급급했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 데미지가 쌓인 것은 당연지사. 하진은 관장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오늘만큼은 가드를 올리겠다, 마음먹은 상태였다.
“술도 없네. 여기서 제일 비싼 거로 가져와. 샴페인 말고 양주로.”
제일 비싼 거? 그 말에 염상인이 속도 없이 술을 가지러 나갔다.
박하진이 또 무슨 꿍꿍이일까.
도현은 속으로 박하진의 늘어난 인내심에 감탄했다. 지금쯤이었으면, 염상인 가게 뒤엎고, 낄낄거리던 녀석들을 말로 처발랐을 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새삼 대견하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술이 당겨 첫 잔을 입에 대려던 찰나였다. 하진이 도현의 술잔을 가져가 제 입안으로 술을 밀어 넣고는 대신 도현의 입안에 딸기를 넣었다.
“뭐야.”
“넌 안주나 먹어. 나 데려다줘야지. 차 안 가지고 왔단 말이야.”
박하진에게서 늘어난 건 인내심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날로 증가하는 하진의 뻔뻔함에 도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뻔했다. 하진은 친절하게도 도현의 빈 글라스에 물을 채워 주었다.
“내가 네 매니저야?”
“매니저면 이런 일 안 시키지.”
“그럼 뭔데.”
“친구?”
“이럴 때만.”
“이럴 때 아니면 넌 그냥 남이야.”
“그건 그렇네.”
픽-.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단순한 웃음치고는 담고 있는 감정이 다소 복잡했다. 심지어 담은 감정도 각자 달랐다. 자조와 조소, 상대는 다르지만, 그 중간 어디쯤의 ‘조’는 같았다.
그 사이, 염상인이 양손에 고급 양주를 들고 와 테이블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흥에 겨운 콧노래가 퍼졌다. 관장님이 말한 가드가 이런 것일까. 하진은 염세주의적인 녀석들의 태도를 비웃으며 술자리에 섞여 들어갔다.
“야야. 받아, 받아.”
그런 하진을 도현이 못마땅히 쳐다봤다. 본인 덕분에 강제적으로 금주하는 도현은 연신 물만 들이켜고 있는데, 하진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아주 본인이 술판을 주도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하진이 기울이는 술을 받은 건 다름 아닌 예능 프로 조연출 녀석이었다. 도현의 눈에 비친 녀석은 박쥐 같은 새끼였다. 좀 전까지 염상인 장단 맞춰주더니 이젠 박하진 옆에 찰싹 붙어있는 꼴이 몹시 거슬렸다. 보나 마나 시청률 바닥인 제 프로에 한 번 나와달라고 아양 떠는 거겠지.
“다음에 우리 프로그램도 한번 나와줘라.”
저 새끼, 저거 청탁인데 확 고소해버릴까. 와그작-. 도현이 어금니로 얼음을 깨부수며 마뜩잖은 이 상황을 관전했다.
“상인이, 너도 한잔해.”
“아냐, 아냐. 난 너 마시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하진아, 넌 역시 성공할 줄 알았다니까!”
지랄한다. 같은 반일 땐 박하진이랑 말도 안 섞어본 새끼들이 이제 와서 친한 척이다. 박하진이 성공할 줄 알았다고? 뭘 보고 알았는데?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소리였다. 그리고 그 개를 자처한 도현이 혼자 끌끌대며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맞다. 너네 희나 누나 소식 들었냐?”
“뭔 소식?”
“그 누나 요새 힘들다더라. 듣기로는 도박에 손댔대.”
도박? 도현의 눈썹이 돌연 들썩였다. 며칠 전에 전화 온 게 단순한 안부 인사는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도박이라니, 그게 무슨….
“도현아,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심히 뜬금없는 타이밍에 언급된 도현이 눈을 치켜떴다.
“내가 왜?”
“고등학생 때, 희나 누나가 너 좋아한 거 여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래도 옛정이 있지.”
별 시답지 않은 소리라 대꾸조차 아까웠다. 그런데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신나서 염상인이 말을 덧붙인다.
“그 누나가 널 얼마나 좋아했으면, 네 옆에서 박하진 떼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잖냐. 게이라고 소문도… 헙.”
어디까지 지껄이나 내버려 뒀더니 기어코 선을 넘네. 덕분에 간신히 끌어올렸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물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그것도 엄청 차가운 냉수로다가. 하나 같이 원망의 눈으로 염상인을 바라볼 때, 도현의 시선은 하진에게로 꽂혔다. 무심결이었다. 역시나 무심결에 하진을 향한 걱정이 피어올랐다. 정작 당사자인 하진은 여상하게 잔을 흔들 뿐인데도 불구하고.
“소, 소문이 다 그렇지, 뭐…. 고민채랑 만난다며? 축하한다…!”
수습도 꼭 저같이 하는 염상인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얼어붙었다. 머쓱한 얼굴로 염상인이 잔을 들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3초가량 지났을까. 여태까지 아무 리액션도 취하지 않았던 하진이 챙, 하고 정적을 깨뜨렸다. 염상인과 잔을 부딪치면서 말이다.
“누굴 만나는 게 축하받을 일인가?”
“…….”
“그럼 뭐, 남자 만나면 비난받고 그래야 해?”
온기를 불어넣는 줄 알았던 하진이 실제로 부은 것은 급속 냉각제였다. 그것은 모두를 얼어붙게 할 만큼 강력했다.
“흐흐, 농담.”
하진이 가볍게 양주를 털어 넣었다.
***
“야. 나 눈 좀 풀린 것 같지?”
연거푸 양주를 들이켜던 하진이 뜬금없이 도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진의 눈매가 평상시보다 나른하긴 했다. 자꾸만 초점을 잃는 눈동자 역시 이상하긴 매한가지였다. 아직 양주가 반도 비워지지 않은 걸 보면 본인의 주량까지는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왜 저러지.
“너 양주는 못 마셔?”
“아니. 나 잘 마셔.”
“근데 눈이 왜 벌써 풀렸어. 취한 것 같은데.”
“몰라.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몇 잔 안 마셨는데.”
“갈래?”
“뭘 벌써 가. 나 화장실만 갔다 올게.”
도현이 어긋나는 하진의 시선을 바로 잡았다. 이어 하진이 몸을 일으키기 위해 테이블 틈으로 다리를 집어넣자 도현은 곧바로 하진을 지탱하곤 끼익, 테이블을 밀었다. 무지막지하게 한쪽으로 밀리는 테이블에 갑자기 자리가 좁아진 녀석들이 어어, 소리를 냈다. 그러나 지금 온 신경이 하진에게 있는 도현은 듣지 못했다.
“같이 가.”
“뭐래. 변태 새끼가….”
취해도 박하진 성깔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다. 기껏 생각해서 물어봐 줬더니 도리어 욕만 얻어먹은 도현은 저를 뿌리치는 하진을 다시 잡을 용기가 없었다. 그 용기는 예나 지금이나 도현에게는 없었다.
툭-. 하진이 문 앞에서 도현의 손을 놓았다.
***
몸이 무거웠다. 세면대에 얼굴을 박고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가차 없이 얼굴에 뿌렸다. 철썩, 철썩-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는데도 별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더 열이 오르기만 했다. 요즘 무리해서 그런가. 몸 상태 진짜 나쁜가 보네. 아까 우도현이 가자고 할 때 그냥 갈 걸 그랬다.
정신이 몽롱하니 영 기운이 안 난다.
“아… 머리 아파….”
마지막으로 제일 찬물을 양손 가득 받아 얼굴에 비볐다. 화려한 거울에 비친 하진의 모습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자꾸만 떨구어지는 고개마저 불안정했다.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대강 휴지로 닦아낸 하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흐릿한 시야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퍽-.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하진과 부딪힌 이는 웨이터 복장의 남자였다. 하진과의 충돌로 남자의 손에서 하얀색 뭉텅이가 떨어졌다. 하진이 이를 주우려 하자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가로챘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남자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홀연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꺼림칙했으나 우선 제 몸부터 가눠야 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을 빡, 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반짝거리는 복도를 지나 아까 밟은 곳을 그대로 되돌아가다가 어느 순간 나온 갈림길에서 하진은 주저 없이 왼쪽 방을 택했다.
이내 텅 빈 방, 그곳에서 하진은 돌연 쓰러졌다.
***
도현은 초조한 듯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하진이 나간 지 벌써 10분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없었다. 하필 박하진 번호도 없는 터라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 이게 누구야?”
손가락을 튕기던 도현이 누군가를 반기는 염상인의 목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나 누님이 오셨네?”
그곳엔 방금 일정을 마치고 온 건지 진한 방송 화장 상태의 여희나가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염상인이 부른 모양이다. 여희나 온 거 알면 박하진 개지랄할 텐데 큰일 났네. 도현은 이 와중에 하진을 떠올렸다. 물론, 이건 순전히 하진의 기분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피해받을 본인을 걱정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며칠 만에 또 본다고 인사도 안 해주는 거야?”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도현 옆에 희나가 앉으며 말했다. 말을 딱 오해하기 좋게 한다고 생각하던 찰나, 역시나 염상인이 놓치지 않고 말에 살을 붙였다.
“오, 뭐야. 둘이 사적으로 만났었어?”
덕분에 한 명씩 말을 얹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에 희나도 도현도 굳이 반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희나는 도현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진짜 인사 안 하네?”
“아,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고개를 끄덕이며 희나는 앞에 놓인 두 개의 잔 중 정확히 도현의 잔을 골라 양주를 따랐다. 그리곤 도현에게 이를 밀었다. 몹시 자연스러운 이 행위에서 부자연스러운 점은 어떻게 희나가 도현의 잔을 알았냐는 것이었다. 저가 예민한 건가. 도현이 술잔을 멀리 밀며 생각했다.
“저 술은 안 마셔요.”
“왜? 주말에도 일해?”
“그런 건 아니고 박하진 데려다줘야 해서요.”
“아, 하진이도 왔어? 의외네. 동창회는 안 올 줄 알았는데.”
“들어올 때 못 보셨어요? 화장실 간다고 나갔는데.”
“…어? 아, 응. 나랑은 안 겹쳤나 보다.”
희나의 말이 다소 변명처럼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 도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까 보니 화장실은 입구 쪽에 있던 것 같다. 하진이 나간 시간과 희나가 들어온 시간 역시 얼추 비슷했던 것 같고. 그런데 어떻게 못 봤지? 도현의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은 채 의심을 만들어냈다.
“여기 화장실 구석에도 있더라. 거기 간 거 아닐까?”
도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희나가 먼저 말을 덧붙였다. 이 또한 도현에겐 변명처럼 들렸다.
“아, 그래요? 그건 몰랐네. 저 잠깐 갔다 올게요.”
“하진이가 애도 아니고, 무슨 데리러 가기까지 해?”
“제가 지금 화장실이 급해서요.”
도현이 자신을 붙잡는 희나를 뿌리쳤다. 그에 옆에 있던 염상인이 물었다.
“어디 가게?”
“잠깐 화장실.”
“그럼 뒤쪽에 구석으로 가. 거기는 아는 사람 별로 없거든.”
“그래, 고맙다. 근데….”
잠깐 뜸 들인 도현은 턱짓으로 희나를 가리켰다.
“네가 초대했냐?”
“나? 아니. 나 아닌데. 누나는 네가 초대했다던데 아니었어?”
당황스러운 얼굴로 염상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초대라니. 얼마 전까지 희나의 번호도 몰랐는데 초대했을 리가. 아까부터 묘하게 찝찝했지만, 도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을 찾는 게 도현에겐 그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아, 내가 말했던 것 같네.”
그치? 염상인이 별 의심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에 도현이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고, 곧바로 갈림길을 맞닥뜨렸다. 앞으로 가느냐, 뒤로 가느냐. 젠장. 이건 박하진이랑 마음이 통해야 하는 거잖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아는 도현은 그 자리에 멈춰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도현이 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걸음은 오른쪽으로 향한 채였다.
“대표님.”
-어, 우 대표. 이 시간에 웬일이야?
“박하진 번호 좀 주세요.”
-하진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잠깐 얼굴 좀 보게요.”
-하진이가 싫어할 것 같은데.
“뒷감당 제가 할 테니까 문자로 찍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어, 어?
태희가 다른 의심을 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박하진한테 무슨 일 생겼다고 말하면 바로 달려올 것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 도현은 걸음을 떼면서도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했다. 곧이어 도착한 화장실은 염상인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지 텅 비어있었고, 약간의 물기만이 세면대에 흩뿌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하진은 없었다. 이를 확인한 도현이 복도로 다시 몸을 움직였다.
때마침 태희로부터 하진의 번호가 왔고, 도현은 답장도 잊은 채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1초, 2초. 3초. 연결음이 이어졌다. 뚜르르 소리가 계속될수록 복도를 거니는 도현의 걸음 또한 조급해졌다. 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한 번 더. 한 번 더. 도현은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걸었을까. 달칵, 드디어 하진이 전화를 받았다.
“야, 박하진! 넌 왜 전화를 안 받아?”
-…하아…. 골 울리니까 작게 말해.
“하? 내가 얼마나 찾…! 야, 됐고. 어디야 지금.”
-몰라…. 하으… 다른 방인 것 같은데.
도현이 말을 멈췄다. 박하진이 이상했다. 목소리만으로 녀석의 달뜬 숨이 전해져올 정도였다. 하아… 하아… 하진의 숨이 가빴다. 씨발.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옆에 뭐 보여? 큰 소리로 대답해 봐.”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도현은 샅샅이 주변을 뒤졌다. 아직 클럽이라면 작게라도 하진의 목소리가 들릴 테니 몸을 최대한 방 쪽으로 붙여 걸었다. 무질서한 소음들이 도현을 어지럽혔다.
-…설명하기 좆같으니까 그냥!
마침내 도현의 걸음이 멈췄다. 쿵쿵, 귓구멍을 때릴 만큼 두근대는 심장 소리와 함께 도현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룸 안엔 아무도 없었다. 아, 젠장. 여기가 아닌가. 이내 도현이 발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그냥 좀 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열린 문 뒤에 주저앉아 있는 이는….
“찾았다.”
하진이었다. 도현이 단번에 하진 앞에 무릎 꿇었다. 작게 흔들리는 머리통은 누가 봐도 도현이 찾아다니던 하진이 맞았다. 그러나 도현이 알던 하진은 아니었다.
“꼴이 왜 이래.”
이미 붉어 질대로 붉어진 하진의 얼굴을 도현이 거칠게 잡아챘다. 동공이 반쯤 풀려서는 더운 숨을 내뱉는 하진은 도현이 아는 하진이 아니었다. 적어도 제 앞에선 이따위로 무방비해지지는 않을 녀석인데, 왜…. 이윽고 미처 도현이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하진은 그대로 도현의 품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맞닿은 몸이 뜨거웠다. 곧 도현이 재킷으로 하진의 얼굴을 가려주고 나서야 하진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현은 하진을 업은 채 서둘러 룸을, 그리고 클럽을 빠져나왔다.
***
자신이 어떻게 하진의 집에 도착했는지 모를 만큼 도현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차를 몰았다. 조수석에서 줄곧 흐느끼는 하진을 보며 이러다가 송장 치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빨리 가려고 액셀을 얼마나 밟았는지 모른다.
“업혀.”
조수석 차 문을 연 도현이 하진에게 등을 내주며 말했다.
“…싫어.”
정신이 좀 돌아왔나. 하진은 이제 와서 내외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볼딱지는 붉게 물들이곤 고개를 내저었다.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몸이면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안전벨트를 푸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현이 푹,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 안기라도 해줄까?”
그 말에 저를 위로 올려다보는 동공이 너무 나른했다. 그 몽롱한 눈빛을 마주치고 있자니 어째 아래가 뭉근해져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젠장. 박하진은 도대체 뭘 한 거야. 뭘 어떻게 하면…. 아, 설마. 그 순간 도현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 불안함을 고조시켰다. 약은 아니겠지. 혹시 누가 강제로 먹였다거나….
“씨발.”
더 상상했다가는 도현의 어금니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지금도 까드득, 모조리 부술 기세로 이를 깨물고 있었으니까. 이내 도현은 하진의 얼굴을 재킷으로 감싸곤 번쩍 들어 올렸다. 맥이 풀린 하진이라 무거웠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박하진이 내려달라고 발버둥은 안 쳐서 다행이었다. 도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하진은 계속해서 흥분으로 점철된 숨을 토해냈다. 덕분에 열기가 오른 심장이 덩달아 펌프질을 해댔다.
도어락 앞에서 몇 번이고 손이 어긋나는 하진 때문에 도현은 제 손을 하진의 손 위에 포갤 수밖에 없었다. 단단히 하진의 손마디를 쥐니 그제야 손끝이 정확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5678. 띠리릭- 문이 열렸다. 하. 순간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린 도현이었다. 이 쉬운 비밀번호를 감추자고 저번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어락을 가렸던 건가. 1234에 이어서 5678이라니. 단순한 게 영락없는 박하진이었다.
집에 발을 디디자 냉기가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열 내리긴 딱 좋은 온도네. 얼어 죽기에도 딱 좋은 온도고. 도현이 곧바로 하진을 침대에 눕혔다. 힘겹게 달싹거리는 하진의 눈꺼풀 위에 왼손을 얹은 채 토닥토닥 오른손으로 하진을 진정시켰다.
“야아….”
내뱉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열부터 내려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물수건이면 되나? 온도는 차갑게? 뜨겁게? 생전 처음 해보는 간호에 도현이 안절부절못했다. 그 와중에도 토닥임은 계속되었다. 으응. 하진이 또다시 앓는 소리를 뱉었다.
“어, 어.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너 가….”
“야, 너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가.”
“…그때처럼.”
“…….”
“…가라고.”
그때처럼. 불분명한 시점이었으나 도현과 하진 사이에서 그때라는 시점은 딱 하나뿐이었다. 우도현이 박하진을 외면하고 가버렸던 그때, 바로 그날. 그에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도현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침착한 척 다시 손을 움직였지만, 어딘가 자꾸만 삐거덕댔다.
“존나 위선 떨어, 개새끼가….”
지독히도 붉은 하진의 입술 새로 지독하게 잔인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이 차디찬 온도에 얼어붙어 도현의 가슴께를 관통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때가 도현은 여전히 버거웠고, 또한 두려웠다.
“미안해.”
그때도 지금도.
이내 잠이 든 하진은 듣지 못한 도현의 진심이었다.
***
곤히 하진을 재운 뒤, 도현은 다시 클럽으로 돌아왔다.
“야, 도현아. 어디 갔다 왔어.”
“잘 왔다. 우리 지금 막 여기 정리 중이었거든. 근데 박하진 이 새끼는 계산 안 하고 어디 간 거야?”
두 시간 동안 사람이 사라졌으면 전화는 안 하더라도 걱정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새끼들은 개념을 술이랑 같이 말아 먹은 모양이다. 그러니 흉하게 일그러져 있는 제 얼굴을 보고도 2차 갈 거냐는 소리나 해대고 있지. 도현은 퍽 비위가 상했다.
“박하진이 마시던 잔 어디 있어.”
“어?”
“이거네.”
단숨에 테이블 끝으로 이동한 도현이 제 물컵 옆에 있던 글라스를 쥐었다. 잔 안에는 녹아버린 얼음이 물이 되어 도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자제력을 잃은 듯 치켜뜬 눈이 매서웠다. 참자, 참아.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도현은 되도록 차분히 말을 꺼냈다.
“누가 여기에 뭘 탔어. 근데 그게 내가 생각하기엔 약인 것 같거든.”
“…….”
“누굴까?”
한껏 감정을 누른 목소리와 다르게 도현의 눈에선 남자들을 향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드러났다. 그 분위기에 짓눌려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 한 녀석에 의해 등 떠밀린 염상인이 멋쩍게 웃으며 도현에게 다가갔다.
“약이라니 무슨 소리야. 도현이 네가 착각한 거겠지.”
“…….”
“그리고 너, 이거 좀 오버하는 거야. 박하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를 보지 못했는지 염상인은 눈치 없이 계속 지껄였다.
“막말로 박하진 게이라고 너도 피해 다녔잖아. 이제 와서 왜 이….”
와장창-! 순식간이었다. 유리잔이 벽에 부딪혀 깨지다 못해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흩어진 가루가 날카롭게 빛났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고 했던가. 염상인은 정확히 제 옆을 스치고 지나간 유리잔에 턱, 숨이 막혔다. 바들바들 몸이 떨렸다.
이어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든 도현은 그 속에 비친 본인과 눈이 마주쳤다. 염상인이 적시한 사실이 도현을 또다시 과거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울먹거리던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야. 너 요새 나 왜 피하는데?’
그때의 박하진은 물었다. 자신을 왜 피하느냐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그렇게 악에 받쳐 물었다.
‘…너 진짜 게이야?’
그때의 우도현은 대답했다. 이유라기엔 한없이 비겁한 물음을 던지면서 그렇게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하진의 탓으로 돌렸다.
‘응. 나 남자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하진이 지은 표정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현의 기억 속에 또렷이 존재했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하진은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위태로웠다. 그걸 뻔히 알면서 외면했다. 졸렬하고, 또한 무력했다. 열아홉의 도현은 그랬다.
“나, 난 진짜 모르는 일이야….”
새하얗게 질린 염상인이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서야 도현은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염상인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공포가 적나라하게 묻어났다. 그 얼굴 위로 도현이 천만 원짜리 수표를 뿌렸다.
“이건 박하진이 주고 간 술값.”
이어서 백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염상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이건 방금 깨부순 잔 값.”
“…….”
“오늘 일 밖에선 안 들리면 좋겠다.”
툭툭. 도현이 염상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언의 경고가 실린 행위였다.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도현을 붙잡았지만, 이내 도현은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곧바로 시간을 확인하며 도현이 걸음을 재촉했다. 혹여 자신이 밖에 있는 사이 하진이 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한층 더 조급해졌다.
“벌써 가?”
하필 희나를 마주쳤다. 담배를 피우고 왔는지 코끝을 찌르는 짙은 담배 향에 도현이 무심코 인상을 찌푸렸다.
“일이 좀 있어서요.”
“근데 너 손이 왜 그래?”
희나가 도현의 오른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는지 도현이 그제야 손바닥을 펼쳐 상처를 확인했다. 이미 진득한 피가 손바닥을 점령한 상태였다. 아! 자각하고 나니 고통이 몰려왔다.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별거 아니에요.”
좀 전에 깨뜨린 유리 파편이 꽤 깊게 스친 모양이었다. 벌어진 살 틈에서 붉은 피가 울컥 솟아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약국이라도 들러야겠네. 그러는 김에 혹시 모르니까 해열제 같은 것도 사고… 박하진 먹을 것도 좀…
“하진이는 잘 들어갔어?”
도현의 눈꼬리가 가늘게 늘어졌다.
“박하진이랑 같이 있었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하진이 찾으러 나갔었잖아. 늦길래 데려다줬나 생각했지. 내가 감이 좀 좋거든.”
“감 조금만 더 좋으면 신내림이라도 받으시겠네요.”
다분히 조롱 섞인 말투에 희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나는 금세 여유를 되찾았고 차분한 걸음으로 성큼 도현에게 다가갔다.
“도현아. 조만간 회사로 찾아갈게.”
“…….”
“너랑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제 귓가에 대고 속삭인 말,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 그리고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희나가 드러낸 것 중 도현은 무엇하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진이 잘 챙기고.”
다만 분명한 것은 희나의 입에서 나오는 하진의 이름이 심히 거슬린다는 거였다. 기분이 못내 꺼림칙했다. 곧이어 멀어지는 희나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도현이 아린 손바닥을 꽉, 쥐었다. 그로 인해 응고됐던 혈이 다시금 뚝뚝 떨어졌다. 손수건으로 대강 피를 닦은 도현은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하진이 보고 싶었… 아, 아니 보… 보필해야만 했다.
***
웬만한 가게들은 이미 다 닫혔고, 열린 곳이라곤 술집뿐인 늦은 시간이었다. 죽이라도 사 가야겠다 싶어 들른 편의점에서 죽 이외에 우유와 시리얼 등, 간단히 먹을 식품들을 샀다. 계산 중에 눈에 들어온 상비약들도 죄다 쓸어 담았다. 집에 밥도 없는데 약이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나갈 때와 달리 양손 무겁게 집으로 돌아온 도현이 서둘러 손을 씻고, 제 오른손을 소독하기 시작했다. 아으, 따가워. 욱하는 성질머리는 박하진이랑 똑같아서는 거기서 잔을 던지다니. 그나마 꿰맬 정도는 아니라 연고 바르면 아물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치료를 마친 도현이 살짝 열린 방문 틈새로 조용히 하진을 지켜봤다. 그 방만 다른 세상인 양, 후덥지근한 온도가 숨쉬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끼익-. 방문을 열고 들어가 가까이서 들여다본 하진은 이마가 반 이상 땀으로 젖어 있었다. 뭐야. 이거 열 식혀야 하는 거 아니야? 평생 누구 수발을 들어본 적 없으니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예전에 얼핏 듣기론 옷을 벗겨서 체온을 낮추라고 하던데. 축축한 머리칼을 정리하며 도현은 하진의 상의 탈의에 대해 고민했다.
“…나… 줘….”
돌연 가쁜 숨을 뱉어내며 하진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작게 열린 입술 사이로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데 잘 들리지 않아서 도현이 귀를 가져다 댔다. 만. 줘. 뭐라고?
“…나 좀 만져줘.”
…뭐? 귓바퀴를 타고 굴러들어온 말이 믿기지 않은 나머지 도현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게슴츠레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하진의 입에서 방금 무슨 개소리가 튀어나온 것 같다. 만져달라는 의미가 혹시 제가 아는 터치 외의 뜻이 있는 건가. 아니, 씨팔, 그럴 리가 없잖아. 일단 진정해, 우도현. 심호흡. 심호흡을 하자. 후. 도현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도현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하진이 또 한 번 도현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몸이, 몸이 너무 안달 나. 돌아버릴 거 같아.”
젠장. 지금 돌아버릴 거 같은 건, 하진이 아니라 도현, 자신이었다. 발그레한 볼을 띠며 저딴 말을 잘도 해대는 하진 탓에 도현은 괜히 얼굴이 낯뜨거웠다. 약에 취해서 몽롱한 새끼한테 흔들리면 안 된다. 정신 멀쩡한 사람이 자제해야 한다. 도현이 박하진의 눈두덩이 위에 제 손을 얹고는 몇 번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제발 닥치고 그냥 자.”
“그럼 손만….”
“…….”
“응?”
귀엽게 무슨… 하. 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하진에게 등을 진 채로 제 왼손을 넘겨주었다. 이내 그 손을 덥석, 잡은 하진이 꼼지락대며 도현의 손가락을 만져댔다. 그러다가 결국 도현의 손이 하진의 앞섶을 훑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야, 씨발. 너 손이 자꾸 어디로 가.”
“어… 뭐야? 왜 여기 있지?”
“하, 네가 움직였잖아.”
도현의 손은 어느새 하진의 배꼽 부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도현이 힘을 줘 멈추지 않았더라면 대참사가 벌어지고도 남을 위치였다. 도현이 질색하며 손을 빼냈다. 단숨에 손이 허전해진 하진은 제 의지가 아니라는 듯 억울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너 가….”
“뭐?”
“…그냥 가라고. 이러다가 내가 너 덮칠 것 같아.”
아, 분명 저가 피해자인데도 저렇게 울상을 지으니 괜히 안쓰러워진다. 손을 너무 요란스럽게 빼냈나. 본인도 실수한 거 아는 눈친데. 아니, 근데 박하진 수발들다가 눈치 보다가 지금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도현은 문득 제 신세가 처량해졌다. 그중 눈치 없이 꺼떡대는 제 새끼가 가장 처량했다.
“손 내놔.”
난감함에 제 머리를 쥐어뜯던 도현이 결심한 듯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하진이 순순히 두 손을 넘겼다. 도현은 아예 하진의 몸을 제 쪽으로 돌아 눕히곤 하진의 양손을 움켜쥐었다. 이 요망한 손이 아무 짓도 못 하게 포박해놓을 셈이었다. 자꾸만 꿈틀대는 손을 따라 움찔거리는 제 새끼 때문에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일단 박하진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살다 살다 박하진한테 자장가 불러주는 날이 올 줄이야.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잘도 잔다. 우리 아가.”
한 손으로 어깨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니 점차 하진의 숨소리가 골라졌다. 도현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보답이라도 하듯 하진의 몽롱했던 눈동자도 다시 눈꺼풀로 뒤덮였다. 그렇게 하진은 잠에 빠졌다.
간신히 하진을 재우고 방을 나오려는데 별안간 하진의 핸드폰이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번쩍였다. 이 씨발! 어떤 새끼야! 도현이 다급하게 볼륨을 줄였다. 다행히 하진은 깨지 않았다. 아이를 이제 막 재운 엄마의 기분이 이런 걸까. 도현은 뒤꿈치까지 들고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왔다. 이어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도현이 빌어먹을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떤 수식어구도 없이 딱 최윤조, 세 글자가 액정에 나타났다. 그게 뭐라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두 번 정도 이어진 전화 끝에 문자가 왔다.
[형, 지금 뭐 해요? 집 가도 돼요?]
안돼, 이 자식아. 도현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문자 내용이 어째 거슬렸다. 형부터 시작해서 집까지 드나드는 사이라는 게, 그게 그렇게 언짢을 수가 없었다. 문자를 노려보던 도현은 이내 씨익,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나름 박하진 말투로 신경 써서.
[뜨거운 밤 보내고 있으니까 오면 뒤진다.]
지금 박하진은 열이 들끓고 있으니까 뜨거운 밤은 맞지 않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온갖 것에는 죄다 비밀번호를 걸어 놨으면서 핸드폰은 패턴조차 없었다. 이러면 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어지잖아. 딱 하나만 확인해볼까.
자신과 타협한 도현이 키패드에 익숙한 전화번호를 눌렀다. 처음엔 뭐로 저장되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올라갔던 입꼬리가 점차 웃음기를 잃더니 11자리를 다 입력하고 나서는 삐뚤어져 있었다.
[010-XXXX-XXXX]
저장 안 된 번호였다. 그리고 그 번호는 우도현의 번호였다.
***
아, 골 아파. 배구선수한테 스파이크 맞은 느낌이 이럴까. 머리가 띵- 한 것이 묵직하게 눌러왔다. 커튼 틈새로 햇볕이 들어오는 걸 보니 오전은 족히 넘은 듯하다. 얼마나 잔 건지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몸을 일으킨 하진은 방을 나오다 말고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분명 저의 집 소파는 검은색이다. 소파 위에 쿠션도 검은색이다. 그런데 지금 어째선지 소파 위에서 살구색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웬 남자가 자고 있다. 살구색은 남자의 너른한 등판이었다. 젠장. 기억이 안 난다. 혹시 자신이 어젯밤 사고라도 친 건 아닌가 싶어 하진의 뇌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누구실까요?”
하진이 조심스럽게 남자의 맨 어깨를 흔들었다. 그에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든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하진은 기겁해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우도현?”
옷은 어디다 팔아 처먹었는지 바지만 입고 부스스 눈을 뜬 건 정말 우도현이었다. 선명하게 드러난 복근이 하진을 보며 모닝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하진이라도 아침부터 잔뜩 성이 난 몸을 보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눈을 어느 곳에 둬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홱, 돌리니 뒤에서 간지러운 웃음이 들려왔다.
“새삼스럽게 왜 이래. 어제 다 봤으면서.”
“…뭘 봐?”
“나의…….”
“…….”
“전부?”
그렇게 말하면서 도현이 몸을 비비 꼬았다. 동시에 어디선가 삐그덕 삐그덕, 기묘한 소리가 났다. 약간 녹슨 경칩에서 나는 쇳소리 같은 거. 하진의 집에 그런 소릴 낼 만한 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진의 귓가를 때리는 끼익 소리는 무엇일까. 아! 정답! 입도 벙긋 못 할 충격으로 뻣뻣하게 굳은 하진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끼익, 끽-! 하진은 살아있는 로봇이 되어버렸다.
“하진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뒷덜미에 닿았다. 그뿐만 아니라 뒤에서 몸을 부딪쳐오는 우도현 때문에 생경한 촉감이 엉덩이에서 느껴졌다. 정확히 길고 딱딱한 게 하진의 엉덩이골 사이에 안착했다. 이, 이! 말도 안 나온다. 사고회로가 엉켜버린 하진은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멀어졌다.
“야, 너, 임마, 박하진! 하고많은 것 중에 왜 씨발, 성을 빼고 내 이름을 불러?!”
“우리 사이에 어떻게 성을 붙여.”
“지랄! 우리 사이가 뭔데?!”
하진이 버럭 성질을 냈다. 은근슬쩍 제게서 벗어나려는 하진을 도현이 돌려세웠다. 하진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제 어깨 위에 얹어진 도현의 손을 떨어뜨렸다. 어젯밤을 회상하는지 도현은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곧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뜨거운 밤을 보낸 사이?”
온몸에 털이 바짝 섰다.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 우도현이 던진 시선은 뜨겁다 못해 맹렬하기까지 했다. 그 기세에 하진은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애꿎은 침만 몇 번을 넘겼는지 모르겠다. 입안이 텁텁해서 죽을 것 같다. 그런데도 우도현은 몹시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
“먹고 먹힌 사이?”
끈덕지게 얽힌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뱉어냈다. 정작 말한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은데 화끈거리는 얼굴은 하진 차지였다. 하진이 다급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하필 시야에 들어온 게, 우도현의 탄탄한 가슴이었다.
아, 미친. 그러고 보니 우도현이 상의 탈의 중이다. 어째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진이 두 눈으로 도현에게서 혹시 모를 흔적을 찾았다. 다행히 벌건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이어 하진은 초조하게 물었다.
“주어, 서술어, 목적어 빼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이런 빌어먹을 상황은 죽어도 없을 줄 알았다. 우도현과 박하진이 잠을 잤을 리가 없잖아. 평상시라면, 우도현 뒤통수를 후려치며 장난도 정도껏 치라고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는 좀 달랐다. 기억이 먼지 한 톨만큼도 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도현이 싱그럽게 웃었다.
“박하진이 우도현을 먹었다.”
저 단순한 말 한마디가 몰고 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우선, 하진의 사고회로가 정지해버렸다. 누가 박하진 로봇에 전기 공급을 끊은 게 분명했다. 순식간에 고철 덩어리가 되어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번째로 어제 일이 딱 먼지 한 톨만큼 기억났다. 근데 그 기억이 하필 저가 우도현한테 만져달라고 하는, 그런 개 같은 기억이었다.
아, 좆됐다. 그냥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 이를 실천으로 옮길 작정인지 하진이 재빨리 부엌으로 도망쳐 도현의 끈질긴 시선이 닿지 않는 테이블 아래에 주저앉았다.
“하진아, 그럼 조금 다르게 말해볼까?”
“…….”
“박하진이 우도현한테 박았다, 이 정도?”
우도현은 존나 잔인한 새끼였다. 하진이 지금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눈치채고는 했던 말을 또박또박 다시 얘기하면서 확인 사살을 시켜주니 말이다. 도현을 등진 채로 물 한 컵을 따라 마셨다. 그러면서 도현의 말을 되뇌었다.
박하진이, 우도현한테, 박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기름처럼 방금 삼켜낸 물과 따로 놀았다. 어딘가 묘하게 잘못된 듯한 문장을 계속해서 혓바닥 위에 굴려본다. 아. 하진은 짧은 탄식과 함께 핀트 나간 문장을 정정했다.
“주어랑 목적어랑 뒤바뀐 거 아니야?”
“아니… 포인트가 거기야? 먹었다, 박았다. 이 상황에선 서술어가 더 중요한 거 같은데.”
도현은 하진의 엉뚱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금세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포인트가 서술어란다. 먹었다, 박았다. 이런 남사스러운 단어가 우도현과 박하진 사이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보다.
그래, 사실이구나. Fact. Fake가 아니라 진짜 Fact라고? 와, 진짜 Fucking인데.
마구잡이로 단어들을 끄집어내던 하진은 이내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야, 거짓말하지 마.”
“난 좋았어.”
기어코 우도현이 쐐기를 박았…. 씨팔, 이것도 박는 거네.
“아니, 씨발. 내가 못도 못 박는데 그걸 어떻게 박아!”
“…….”
하진의 충격 발언. 순식간에 문을 두드린 정적이 두 사람을 침묵 속으로 빠뜨렸다.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아니, 적어도 박하진은 나올 생각이 없었다. 수치스러움에 그냥 질식사라도 하고 싶었다. 혀 깨물고 죽을까. 그럼 영원히 침묵할 수 있지 않을까.
큭-. 큭큭-.
오래도 참았다. 긴 침묵을 견딘 도현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웃음을 몹시 얄밉게 뿜어냈다. 비소와 함께 내뱉은 말은 더욱 얄미웠다.
“농담. 어제 아무 일도 없었어.”
모멸감과 자괴감이 앞다투어 하진의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 전에 먼저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너…. 씨발, 나가.”
하진의 속에서 천불이 났다. 열 뻗쳐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걸까. 저 태연자약한 우도현을 보고 있자니 피가 거꾸로 솟아 지구 밖으로 튕겨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하진의 반응을 그저 재밌게 눈에 담던 도현이 드디어 셔츠를 찾아 입었다.
“죽 사다 놨어.”
도현이 테이블 한쪽에 밀어뒀던 편의점 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간 도현은 칫솔을 입에 물고 나왔다. 그 모습이 너무 예사로워서 하진은 순간 도현이 원래 이 집에 살았나 착각이 들었다. 이내 하진이 봉투를 뒤적였다. 편의점 상비약을 쓸어왔는지 약만 한 열 개는 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죽, 시리얼, 우유는 덤이었다. 하진은 그중 전복죽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난 시리얼.”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부터 하는 우도현을 고깝게 째려본 하진이 그릇에 시리얼을 부었다. 식탁에 그릇과 우유, 숟가락을 세팅해놓고 반대쪽에 자신의 숟가락을 놓았다.
삐익- 삐익-. 데우기를 완료한 전자레인지가 소리를 냈다. 얼른 죽을 꺼내 식탁에 놓은 하진은 한 손으로 죽에 참기름을 짜 넣고, 다른 한 손으론 어젯밤 연락을 확인했다. 그러다 불현듯 메시지 창을 연 순간 핸드폰을 거칠게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악!”
“뭐야.”
참기름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진은 메시지를 열어 보고는 못 볼 거 봤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진이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너 최윤조한테 문자 보냈어?”
“어.”
“뜨거운 밤? 너 미쳤어? 진짜 돌았지?”
“우리 어제 뜨거웠다니까.”
하진이 도현에게 경멸 섞인 시선을 던지며 치를 떨었다. 도현은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할 말을 이었다.
“너 어제 열났잖아. 그게 뜨거운 밤이지, 뭐.”
도현은 시리얼에 우유를 부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덕분에 하진의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애써 데운 죽을 이리저리 숟가락으로 휘적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퍽 뜬금없는 질문이 들려왔다.
“최윤조랑은 왜 섹파 하냐?”
하진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반대로 눈매를 추켜올렸다.
“뭔 소리야?”
“잘 맞으면 연애하면 되잖아.”
아침부터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해대는 우도현을 하진이 턱을 괸 채 물끄러미 관찰했다. 혹시 우유가 맛이 갔나 싶어서 숟가락으로 콕, 찍어서 먹어봤다. 그냥 우유 맛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시리얼인가. 시리얼 한 줌을 왕, 입에 넣었다. 맛있다. 역시나 그냥 시리얼 맛이다. 맛이 간 건, 그냥 우도현이었던 모양이다.
“섹파가 편해. 가볍잖아.”
“넌 뭐가 그렇게 맨날 가벼워.”
“내가 무거우면 그 무게에 비례해서 우리 엔터 주가가 내려갈걸.”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에 푹 담가진 눅눅한 시리얼이 취향인 도현은 아직은 바삭거리는 시리얼을 입에 넣으며 인상을 썼다.
“그것만 먹고 꺼져라.”
“너무하네. 다 죽어가는 새끼 살려놨더니.”
입안에서 시리얼을 녹였다. 이어서 한술 더 뜨는 동안에도 하진은 말이 없었다. 언뜻 달싹이는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듯했다. 도현이 숟가락을 놓고 빤히 하진을 바라보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별일 없었어. 그냥 네가 많이 취했었나 봐.”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영 마음에 걸려서 한 거짓말이었다. 약 얘기 꺼내면 지레 겁먹고 걱정부터 할까 봐. 그럼 귀찮아지는 건 도현 본인이니까. 그냥, 그래서 그랬다.
“큼.”
하진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러다가 돌연 목을 큼큼거리더니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려댔다. 왜 저래.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는 하진을 도현이 걱정스레 바라봤다. 혹시, 아직도 약 기운이 남은 건가. 그러나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도현은 곧 깨달았다.
“큼. 고. 크흠. 맙다.”
죽어도 자존심은 세우고 싶은지 박하진은 감사 인사를 참 박하진처럼 했다. 그 모습이 쬐금 귀여웠다.
***
하진에게 그 일이 있고 난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도현과 하진은 여느 때처럼 남이 되어 각자 무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도현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그 이후로 아침에 눈을 떠 다시 감기까지 [박하진 마약]을 수시로 검색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몸은 좀 어떠냐고 먼저 물어보면 될 일이었는데 절대 그러진 않았다. 그게 자신과 하진의 적정한 거리인 것을 도현은 알고 있었다.
“이번 재능기부 라인업입니다.”
김 비서가 도현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이를 받아든 도현이 나열된 이름들을 훑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칫했다. 빼곡하게 차 있는 칸 사이 뜻밖의 공란.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블릿을 다시 김 비서에게 넘겼다.
“춤이 미정이네요? 고민채로 정해진 거 아니었습니까?”
“부득이하게 홍콩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을 찾는 중이라고 합니다.”
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 봐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하도록 한 것인데 역시나 발생하고야 말았다. 물론 고민채가 빠지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W 엔터의 재능기부라면 대중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획득할 기회이기에 하고 싶어 하는 연예인들이 수두룩할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게 춤 부분이라는 것이다. 춤과 노래는 한시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추진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일정 조율이 중요했다. 그래서 일부러 소속 연예인으로 정한 거였는데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니. 그럼 당장 누가 있지. 도현의 머릿속에 춤 좀 춘다고 언급되는 연예인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자연스레 머리가 한 사람으로 귀결되었다.
“아, 이거 박하진이 딱인데.”
작게 중얼거린 말을 김 비서가 들었는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하실걸요.”
“제가 설득해보죠.”
“더더욱 안 하실 것 같은데.”
김 비서의 말은 들은 채도 안 한 도현은 말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이건 딱, 박하진한테 어울리는 자리였다. 재능기부로 이미지도 좋아져, 자연스럽게 춤으로 복귀도 할 수 있어. 박하진이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제 턱을 매만지면서 도현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얼굴로 승부 보는 게 좋겠죠? 미남계 같은 거.”
“패배를 원하시는 건가요?”
“오, 김 비서님. 방금 되게 얄미웠어요. 박하진인 줄.”
“부쩍 박하진 씨 얘기를 자주 하십니다.”
본인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을 김 비서가 지적하자 도현은 곧바로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밑으로 처박았다.
“제가 그랬나요?”
“네. 무의식이 무서운 법이죠.”
“김 비서님이 착각하신 거겠죠.”
“오늘만 박하진 씨 성함을 세 번 정도 들은 것 같긴 하지만 다 제가 잘못들은 모양입니다.”
“큼. 김 비서님, 점심시간이네요. 비서실 사람들이랑 맛있는 거 드시고 오세요.”
도현의 입에서 머쓱한 헛기침이 흘렀다. 이내 도현은 화제 전환을 위해 슥, 김 비서 앞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개인카드이니 마음껏 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김 비서가 카드를 받아들곤 물었다.
“대표님은 안 드십니까?”
“저는 가볼 곳이 있어서요.”
“미남계 쓰시러 가시게요?”
“네,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젊은 게 좋구먼, 허허. 속으로 너털웃음을 짓던 김 비서는 나가 보라는 도현의 말에 신난 발걸음을 숨기며 대표실을 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 대표의 미남계를 위한 레스토랑 예약도 잊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한 도현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오른손은 이미 하진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저번에 친절히 제 번호를 입력해놨으니 모르는 번호라고 안 받지는 않을 것이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번호가 없는 번호라는 음성이 도현의 귓속을 파고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
와, 오늘 복싱 진짜 역대급으로 힘들었다. 머리를 탈탈 털며 샤워실을 나온 하진은 곧장 집으로 가 뻗을 생각뿐이었다. 임수찬도 없으니까 얼른 택시나 타고 가야지. 캐비닛을 열고 로션을 꺼내 바르는 하진의 손길이 빨라졌다. 이제 어플로 주변에 있는 택시를 배치받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그때, 돌연 검은 그림자가 하진의 시야에 스쳤다. 하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악!”
놀랍게도 그곳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도현이 캐비닛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하진이 무의식적으로 어깨에 걸친 수건을 던져버렸다. 주륵-. 수건이 정확히 도현의 얼굴을 맞히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도현이 짧은 탄식과 함께 미간을 구겼다.
“환영 인사가 생각보다 격하다?”
“환영 인사 좋아하네. 미친놈아, 기척 좀 하고 다녀. 간 떨어질 뻔했네.”
“애는 안 떨어지고?”
“뭐, 이 새끼야? 네 좆을 떨어뜨려 줘?”
갑자기 찾아와선 개소리나 지껄이는 도현에게 하진도 똑같이 개소리로 응수했다. 차려입은 꼴을 보아하니 회사에서 온 것 같은데 문제는 도현이 왜 왔느냐,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알고 왔느냐였다.
“스토커냐? 나 따라다녀?”
“본의 아니게 스토커 짓을 좀 했지. 번호 바꿨더라?”
땅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우며 도현은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에 하진은 대답보다 먼저 도현에게서 수건을 뺏어 빨래통에 집어넣었다. 수건에서 냄새날 텐데 왜 만지고 지랄이야. 킁킁, 하진이 괜히 제 팔뚝에 코를 비비적거리곤 냄새를 맡았다. 우도현한테서는 명품 향수 향이 나는데 저한테서는 싸구려 샴푸 냄새가 났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 그거. 네가 내 번호 아는 게 영 기분이 별로더라고.”
그래서 더 빈정댔는지도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번호를 바꿨다고?”
“어. 내 맘인데 왜?”
“넌 진짜….”
도현은 기가 찬 얼굴로 뒷말을 삼켰다. 여기서 더 싸워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됐고 부탁 있어서 왔어.”
여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하진 앞으로 도현이 쇼핑백 두 개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뭔데? 뇌물인가?”
하진이 쇼핑백을 받아 내용물을 꺼냈다. 베이지색 니트, 검은 슬랙스, 거기에 로퍼까지. 하나같이 명품 로고가 박혀있는 그것들은 마치 마네킹에 입혀진 옷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구성된 차림이었다.
“점심 예약해뒀어.”
“그래서 이거 입고 가라고?”
“어. 네 꼴을 좀 봐봐.”
도현이 턱짓으로 제 옷차림을 지적하자 하진이 발끈했다.
“다들 이렇게 입고 운동하거든? 넌 뭐 운동할 때도 양복….”
그렇게 따지려던 순간 하진은 하필 거울에 비친 제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위아래 검은 쫄쫄이에 트레이닝 반바지를 덧입은 그 모습이 오늘따라 부끄러운 건 왜일까. 진작 복근이라도 만들어 놓을 걸 그랬다. 쫄쫄이가 하진의 빈약한 근육 상태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체격 좋은 우도현 옆에 있으니 괜히 더 연약해 보이는 몸이었다.
짜증 나. 하진이 신경질적으로 상의를 벗어 재꼈다. 그러자 곧 노골적인 시선이 하진을 파고든다. 니트를 집어 태그를 제거하는 동안에도 그 진득한 시선은 이어졌다.
“옷 갈아입잖아. 안 꺼져?”
“왜, 꼴려?”
“허, 아니?”
하진이 눈썹을 와락 구긴 채 니트를 입었다. 그 상태에서 반바지를 벗으니 다리에 짝 달라붙은 레깅스가 허벅지와 종아리의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품이 큰 니트가 하진의 엉덩이를 덮은 채였다. 집요한 시선이 몸을 구석구석 훑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묘한 긴장감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이내 하진이 꿀꺽 침을 삼키곤 느릿한 손길로 레깅스를 내렸다. 그러자 나타난 새하얗고 매끈한 다리에 도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부끄럼이라도 타듯이 하진의 무릎이 붉어졌다. 이어 툭, 발목에 걸쳐져 있던 레깅스가 완전히 벗겨졌다.
“야.”
“왜.”
“나가 있을 테니까 빨리 입고 나와.”
도현이 다급하게 탈의실을 나갔다. 뭔가 이긴 것 같으면서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마저 옷을 입고 핏을 정리하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버핏으로 예쁘게 떨어진 니트, 길이감이 딱 맞는 슬랙스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5단위라 웬만한 신발은 크거나 작거나 둘 중 하나인 구두 사이즈까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진이 당장 탈의실에서 나와 도현에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차라리 그냥 욕을 해라.”
무미건조한 눈빛이 하진에게 달라붙었다. 도현이 먼저 뒤를 돌아 복싱장을 나가자 그 뒤를 하진이 성난 발걸음으로 따랐다.
“안 좋아한다고? 근데 씨발, 내 사이즈를 어떻게 딱 알아?”
“네 좆만 한 체격 딱 보면 견적 나와.”
뭐? 좆만 한? 박하진, 29세. 군대도 현역으로 마친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성으로 키도 무려 177㎝였다. 그런데 뭐? 좆만 한 체격? 남성의 평균 키가 약 174㎝인 이 나라에서 우도현은 지금 대한민국 평균 남성 모두를 깎아내린 것이다.
“야, 나 반올림하면 180이거든?”
“어, 그래? 난 반올림하면 190인데.”
“키만 존나 멀대같이 큰 새끼가?”
“키만 큰 건 아닐걸.”
어느새 다다른 조수석 문 옆에서 멈춘 도현이 피식 하진의 아랫도리를 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거기도 견적 나온다.”
“야, 씨발. 야! 까 봐! 어디 한번 까보자고!”
“대담하네. 박하진 취향 야외인가 봐?”
저, 저 재수 없는 얼굴! 온갖 욕들이 서로 자기 먼저 꺼내달라며 하진의 목구멍을 간질였다. 그 사이 조수석 차 문을 연 도현이 하진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반강제적으로 하진이 조수석에 궁둥이를 붙였다. 젠장. 욕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내 하진은 허공에 대고 휙휙 에어 펀치를 날렸다. 도현이 보기엔 그저 냥냥 펀치 정도였으나 하진에겐 비밀이었다.
***
엘리베이터가 8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전망 좋은 레스토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옆으로 직원들이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일제히 인사를 건넸다. 도현은 그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하며 프라이빗 룸으로 걸어갔다.
이게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면, 남자주인공은 분명 우도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옆에 있는 박하진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주인공? 하진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런 하진의 생각을 알 리 없던 도현이 룸 안으로 발을 디딜 때였다.
“형?”
옆 방에서 나온 남자가 별안간 하진에게 다가가며 아는 체를 했다. 푹 눌러쓴 모자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분홍색 머리. 도현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와 달리 하진은 단번에 남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한서빈.”
서빈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다지 반가운 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좁은 파티장에서도 안 마주친 녀석을 서울 한복판 레스토랑에서 마주치게 된 것에 대한 짜증이 서려 있는 듯했다. 하진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빈처럼 모자를 쓰지도 않은지라 하진의 적대적인 눈동자가 훤히 드러났다.
“너무 오랜만이다, 형.”
서빈이 친한 척 하진에게 다가오자 하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를 눈치챈 서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이렇게 피해? 난 형 되게 보고 싶었는데.”
오랜만에 마주한 한서빈은 그대로였다. 말투에 진심이라곤 담겨 있지 않은 것도, 거짓을 꾸며내기 위해 지어내는 웃음도, 하진보다 하진의 주변 사람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도. 모두 가증스러운 것들뿐이었다.
“앨범 낸다며. 축하해.”
“고마워. 그래도 무대 안 서는 형보다 인기 없겠지. 내가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결국 형이었잖아.”
그래, 이거였다. 서빈의 가증은 모두 하진으로부터 기인한 것들이었다. 본인보다 잘나간다는, 그 못난 시기와 질투로부터. 그것이 서빈을 망가뜨렸다. 결국 하진이 서빈을 망가뜨린 거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생각은 어쩌면 해체된 팀에서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일지도 모르겠다. 하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틈을 뜻밖에 도현이 파고들었다.
“한서빈 씨를 여기서 다 보네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도현이 안 되겠는지 제삼자를 자처하며 둘의 대화에 개입했다. 도현은 의도적으로 서빈을 훑어 내렸다. 그러다가 잠깐 경로를 이탈한 시야에 꽉, 깨문 하진의 아랫입술이 담겼다. 짓이겨진 입술 새로 핏기가 고인 채였다. 그를 보자 퍽 기분이 상했다.
“친구가 대표라니 든든하겠네, 형은.”
“…….”
“하긴. 형은 늘 그랬지. 든든한 게 참 많았어, 그치?”
하, 이 새끼가? 도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서빈 씨 눈엔 제가 공과 사도 구별 못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봐요.”
“아! 그게 또 그런 뜻이 되네요? 어머, 죄송해라. 전 그냥 빽 있어서 좋겠다는 뜻이었는데.”
“같이 밥 먹는 정도가 빽 이면 서빈 씨는 그런 것도 없으신가?”
이 정도 비꼬는 건 하진과의 대화로 이미 숙달된 도현이었다. 그러니 한서빈이 아무리 개소리를 지껄여도 타격감은 제로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솟구치는 모르겠다. 박하진 엿 먹이는 건 저만의 권리였는데, 그 권리를 함부로 누군가가 탈취하려 해서 그런가. 물론 그냥 가져가게 두진 않을 거지만. 이어 도현의 시선이 서빈이 나온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서빈이 방안이 보이지 않게 몸으로 문틈을 가렸다.
“방금 같이 밥 먹은 사람이 들으면 섭섭하겠네.”
“…….”
“자기가 서빈 씨 빽이 아니라서.”
도현이 눈으로 계속 방안의 남자를 좇으니 서빈은 조용히 문을 닫곤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제가 일정 있는 걸 깜빡했네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대표님. 형도 조만간 또 보자.”
서빈은 황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반응이 과했다. 저런 경우는 보통 자신의 치부를 들켰을 때 보이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한서빈의 치부는 무엇일까. 도현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려고 하자 하진이 이를 제지했다.
“됐어. 우리도 그만 들어가자.”
가만 보면 은근히 여리단 말이야. 꼭 나한테만 기를 쓰고 대들지. 도현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
테이블 위로 접시와 뜨거운 수프, 물이 차례대로 올려졌다.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예약 안 하면 코스로는 먹기 힘들 정도로 매우 인기 있는 그런 곳. 그러니 분명 맛은 보장일 텐데도 하진은 선뜻 숟가락을 들기가 어려웠다. 꾸욱 뭔가가 가슴께를 짓누르는 탓이었다.
“얼음물 좀 주실래요?”
그런 하진을 알아챘는지 도현이 직원에게 얼음물을 부탁했다. 이윽고 직원이 얼음물을 들고 오자 하진이 곧바로 이를 삼켰다. 시원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니 그제야 뜨거웠던 가슴이 차게 식는 듯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괜찮아?”
“어.”
“많이 먹어.”
다정한 말투와 함께 제 앞으로 불쑥 건네진 빵 한 조각을 하진이 고깝게 내려다봤다.
“왜 이래?”
“방금 기 싸움해서 배고플 거 아니야. 많이 먹어야 욕도 찰지게 하고 그러지.”
도현이 살살 웃었다. 뭘 부탁하려는지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개수작이라니. 뇌물이라는 좋은 표현이 있는데.”
뇌물도 썩 좋은 표현은 아닌 것 같다만, 우도현 말대로 이미 한번 기 싸움을 한 터라 말꼬리 잡을 기운도 없었다. 하진은 도현이 내민 빵을 왕, 베어 물곤 우물우물 씹으며 도현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돈 갚아.”
“무슨 돈?”
“동창회. 내가 수표 뿌리고 왔거든.”
“아, 그래? 얼만데?”
“1억.”
도현의 대답에 연기가 폴폴 나는 수프를 떠먹던 하진이 그만 입천장을 데고 말았다. 얼른 물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이미 입 안이 얼얼했다. 그러니까 지금 단위가 천이 아니라 억인 게 맞나? 1억? 하루 술값에 1억? 하진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확인 사살을 했다.
“미친놈아. 그 새끼들한테 1억을 뿌렸다고?”
“정확히는 삼천이백에 이자까지.”
“…씨발. 사채 이자도 그것보단 싸겠어.”
“내 사랑이 더해졌잖아.”
“네 사랑을 나한테 왜 더해. 그건 마이너스 요소지.”
어, 그런가. 하진의 논리적인 대답에 도현이 잠시 말을 멈추곤 생각했다. 아씨, 벌써부터 밀리면 안 되는데. 여기서 하진이 한 마디만 더 이기면 부탁이고 뭐고 완전 말리는 거다. 도현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때마침 메인 음식을 가지고 직원이 들어왔다. 잘 구워진 미디움 레어 스테이크가 황홀한 자태를 뽐내며 식탁 위에 올려졌다. 하진이 경계심을 낮출 때, 그러니까 스테이크 향이 코를 찌르는 타이밍을 잡아챈 도현이 하던 말을 이었다.
“이자는 빼고 원금만 받을게. 단, 내 부탁 들어주면.”
“또 헛소리 지껄이면 그냥 간다.”
큼. 도현이 마른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잘 정돈된 머리칼도 괜스레 한 번 더 매만졌다. 재력의 상징, 명품 시계도 찰칵 돌려주고. 좋아, 이 정도면 됐다. 남은 건 하나. 잘생긴 얼굴뿐이었다.
“재능기부 좀 해줘.”
“…….”
“춤으로.”
도현은 필살기로 멋들어진 웃음을 선보였다. 이 정도면 성공이….
“싫어.”
삐끗. 한창 멋지게 자세를 취하던 도현의 팔꿈치가 멋없게 미끄러졌다. 그와 동시에 도현의 목소리도 삑 사리가 났다.
“아, 왜.”
“그냥 싫어.”
“다시 한번 생각해봐.”
초조하게 방금 상황을 되짚던 도현이 스킨십 부족을 실패 요인으로 꼽았다. 맞아. 원래 따뜻한 손은 심신을 안정시켜준다고도 하니까. 이어서 도현이 덥석 하진의 손을 잡았다. 하진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다시 생각해봤는데 역시 싫어.”
“내 얼굴을 보고도?”
하진은 꿈쩍도 하지 않는 눈을 도현이 대신하듯 연달아 깜빡였다. 아주 간절하게, 아주 예쁘게. 깜빡깜빡.
“…뭐 하냐?”
“미남계.”
“탈락.”
휙, 도현이 토라져서는 하진의 손을 내팽개쳤다. 삐죽 나온 입술은 장작과도 같았다. 거기에 기름이라도 부으려는지 하진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너 내 취향 아니라니까.”
“씨발, 그놈의 취향, 취향. 네 취향이 뭔데?”
“음.”
손등을 문지르던 하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개인적으로 취향이 굉장히 확고한 편이라 생각했다. 귀여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몸. 이게 딱 취향이었는데…. 생각하다 말고 하진이 무심결에 도현을 바라봤다.
“아무튼 넌 아니야.”
어물쩍한 생각과 달리 하진은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그 와중에 쉬지 않고 칼질을 하던 도현이 다 잘린 본인 스테이크를 하진의 접시랑 바꾸었다. 하진 또한,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좀 전에 싸우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싶은 광경이었다.
“외모 다 필요 없어. 남자는 결국 정력이랑 재력만 있으면 된다니까?”
“그래서 뭐. 네가 그 정력을 나한테 쓸 거야?”
“쓰면 되지! 아주 밤새도록!”
“…….”
“…….”
단숨에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갈라놨다. 말 그대로 그냥 침묵이 아니라 도현의 실언으로부터 비롯된 뻘쭘한 침묵이었다. 어쭙잖은 말로 수습하기엔 이미 타이밍을 놓친 터라 도현과 하진 모두 애꿎은 물만 들이켤 때였다. 똑똑.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직원의 실수로 이제야 와인을 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어디 괜찮을 뿐이랴. 끝이 보이지 않았던 침묵을 깨뜨리셨으니 감사하기까지 했다. 직원이 먼저 하진의 잔에 와인을 따랐고, 뒤이어 도현의 잔에도 와인을 따르려 했으나 도현이 이를 막았다.
“아, 전 됐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직원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덕분에 침묵이 내려앉았던 방에 숨이 트였다.
“안 마셔?”
“어. 너 데려다줘야지. 내가 이렇게 널 챙긴다.”
“…아무리 수작질해도 춤 안 춰.”
“하진아.”
“소름 끼치게 부르지 마.”
“나 너 안 좋아해.”
“피차일반입니다만.”
와인잔을 두어 번 돌리던 하진이 들고 있던 잔을 놓고는 시선을 올려 도현에게 던졌다. 비아냥대는 저와는 달리 도현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내걸고 있었다.
“근데 네 춤은 진짜 좋아해.”
사실 우도현이 이렇게 숙이고 들어와 제게 대접하는 이유가 비즈니스 빼고는 없다는 것을 하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춤일 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단어는 무의식중에 하진을 움찔거리게 했다. 이처럼 하진이 도현의 계략을 알면서도 따라온 건,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춤은 당분간 못 출 것 같다는, 아니 추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사 표명을 하려고.
“네 춤 보고 싶어.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일 거야.”
“…….”
“언제까지 도망만 칠 수는 없잖아.”
아무리 춤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우도현일지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
S/S 패션위크 둘째 날이었다. 옷 좀 입는다는 이들 모두가 모여 자신의 패션 감각을 뽐내는 그런 날. 바꿔 말하면, 조금만 신경을 덜 써도 바로 패션 테러리스트니 뭐니, 비율이 어쨌니 저쨌니 하면서 지적받기 쉬운 날이기도 했다.
“수찬아.”
“네, 형.”
“나 요새 잘생겨진 거 같지 않니?”
아침 댓바람부터 나와 풀 세팅을 한 얼굴이었다. 스스로가 봐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외모여서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인데 임수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 그때 호텔 가신 분이랑 잘 되셨나 봐요?”
“뭔 개소리야.”
“연애하면 잘생겨진다잖아요.”
“호텔은 뭔데?”
“그때 방송국에서 저랑 통화하신 분이요.”
미친. 이건 예상 못 한 대답이었다. 수찬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그 ‘호텔 가신 분’이 하필이면 우도현이라서.
“호텔 안 갔어.”
“그럼 집 가셨어요? 집 데이트가 제일 안전하긴 하죠.”
“아니, 집 간 건 맞는데…. 그거 우도현이었다니까.”
“헐, 진짜 우 대표님이랑 잘 되신 거예요? 집 갔으면 사실상 끝난 거긴 한데.”
“뭘 끝나, 이 새끼야. 네 인생이 끝나고 싶어?”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 수찬에게 하진이 냅다 발길질을 날렸다. 포토존을 위해 일렬로 대기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하진과 수찬의 인생이 끝났을지도. 격렬하게 흔들리는 차를 밖에서 본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 수찬이 급하게 하진을 말렸다.
“형, 형!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우도현이랑 그런 사이 아니라고.”
“네, 네. 알죠, 당연하죠! 제가 잠깐 형의 눈부신 외모에 실성했나 봐요. 윽, 눈부셔!”
연예인 갑질에 대처하는 을의 행태란 이런 것일까. 수찬은 해괴망측한 손놀림으로 제 눈을 가리면서 하진의 외모를 칭찬해야만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에 굴복한 을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에 만족했는지 하진이 발길질을 멈추곤 머리를 정리했다.
“어디 가서 꿀리진 않겠지?”
“네, 네. 형이 여기 사람들 다 압승하실 것 같아요.”
하진은 개인적으로 무난한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외모가 튀는데 옷까지 화려하면 투 머치 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곤 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톤 다운된 그레이 색 점프 슈트를 선택했다. 거기에 베레모로 마침표. 벙거지 쓰라는 거, 곧 죽어도 벙거지는 싫어서 30분을 코디 누나와 싸워 얻은 결과물이었다.
“앞 순서가 우 대표님인가 본데요?”
대형차들 가운데에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 슈퍼카가 한 대 있더니 우도현이었나 보다. 그런데 하필 그 외제 차가 자신의 앞 순서일 건 뭐람. 하진이 창문에 딱 달라붙어 차에서 내리는 도현을 샅샅이 훑었다. 검은색 목티에 그레이 색 체크 슈트. 간결하면서도 도현의 다부진 몸매를 한껏 드러내 주는 옷이었다.
다 좋다. 다 좋은데 하필 왜 같은 그레이 계열이냔 말이야. 앞뒤로 등장하면 비교될 게 분명했다.
앞선 도현의 차가 빠지고 하진의 차가 그 자리에 멈췄다. 옆으로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환호가 고막을 덮쳐왔다. 하진은 어느 때보다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차에서 내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예쁘게 휘어진 눈꼬리가 귀여운 베레모와 어우러져 하진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주변을 둘러싼 이들에게 손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으며 그렇게 당당히 걷던 하진은 계단 앞에 도착한 순간, 그만 발을 삐끗할 뻔했다. 일찌감치 내려가서 포토존에 서 있어야 할 도현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하진 씨, 우도현 씨 같이 내려갈게요.”
예? 왜요?
반문할 틈도 없이 관계자가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하진은 도현과 나란히 계단을 내려가게 됐다. 이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운 하진과 달리 도현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가 내딛는 걸음마다 아름답게 뿌려지는 듯했다. 하진의 시선 역시 무의식중에 그 미소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도현은 확실히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이마를 훤히 드러낸 탓일까. 덕분에 훤칠한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긴 속눈썹 아래 자리 잡은 짙은 눈동자는 청명한 가을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였다.
“그렇게 보시면 얼굴 뚫려요, 박하진 씨.”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 도현이 옅게 웃었다. 따뜻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선명히 하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은은한 과일 향이 코끝을 두드렸다. 하진이 좋아하는 향수였다. 그게 도현의 목덜미에서 풍겼다. 그 순간, 카메라의 셔터 소리는 희미해지고, 간질거리는 향이 하진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야.”
“…….”
“박하진.”
어…. 하진이 저를 끌어당기는 힘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것처럼 기분이 얼떨떨했다. 어느새 두 발은 블루 카펫의 중심에 선 상태였고, 포토존 앞을 여러 대의 카메라가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찰칵. 찰칵.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그 눈부심이 익숙한 하진과 달리 도현은 잔뜩 인상을 구겼다.
“얼굴 펴라. 예쁘게 나오고 싶으면.”
하진의 충고에도 도현은 쉽사리 미간을 펼 수 없었다. 이러다가 실명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옆에서 하진은 프로페셔널하게 멋짐을 표출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아니네. 오늘 하진의 콘셉트는 귀여움인 것 같다. 도현 눈에 베레모가 특히 그래 보였다. 감히 말해보자면 지금 하진은 도현의 취향에 가까웠다. 도현은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두 분, 조금만 더 붙어주세요.”
“더 친한 느낌으로요!”
하진이 억지로 도현에게 어깨를 붙였다. 그에 도현이 어깨동무로 화답하자 기겁한 하진이 어깨를 들썩였다. 썩 치우지 못하냐는 거부의 신호였다. 그러나 도현은 꿋꿋하게 어깨 위 손을 고수했다. 이윽고 두 시선이 얽혔다.
“손 안 치우냐.”
“그럼 손잡을래?”
하진이 미간을 우그러뜨렸다. 그 모습을 예상이라도 한 듯 도현은 단숨에 긴 손가락으로 뻗어 하진의 미간을 살살 폈다. 그리곤 작게 속삭였다.
“웃어야 예쁘게 나오지.”
“…….”
“아, 원래 예뻐서 상관없나.”
도현이 사랑스럽게 하진을 담아냈다. 그 변칙적인 공격에 하진은 그대로 몸이 굳어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
박수갈채와 함께 쇼가 끝났다. 한두 명씩 자리를 벗어나는 틈을 타 하진도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하필 제 자리가 우도현 바로 옆자리였다는 그 이유, 딱 하나. 고작 그 하나 때문에 패션쇼 내내 하진의 시야 끄트머리에 도현이 걸렸다. 턱을 괸 채 순서를 확인하는 우도현, 진지한 눈으로 모델을 꿰뚫는 우도현, 만족스럽다는 듯 박수를 보내는 우도현까지.
하진은 어째 모델보다 도현을 더 많이 본 것 같았다. 그나마 제대로 집중해서 본 게 최윤조 정도랄까. 쇼 보러 오라고 어찌나 성화해대던지 안 가면 최윤조 성격에 몇 날 며칠 찡찡댈 게 뻔해서 딱 이 날짜에 온 거였다. 하고 많은 디자이너 쇼 중에서 하필 우도현이 최윤조가 모델인 쇼를 볼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거, 그게 실수였다.
“형.”
최윤조가 오라던 곳으로 발을 디디자 누군가 하진을 끌어당겼다. 그 힘에 휘청거린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대놓고 이럴 사람은 최윤조뿐이었다. 끝나자마자 튀어왔는지 최윤조는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채로 하진을 보자마자 감탄사를 내뱉었다.
“형, 오늘 진짜 미쳤네요.”
대꾸할 틈도 없이 이곳은 자기가 꿰뚫고 있다면서 윤조가 하진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갔다. 다음 쇼를 위해 분주한 백스테이지를 지나 일반인들이 다니는 통로,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최윤조가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밋, 야. 윽. 뭐 하는 거야!”
다급하게 최윤조를 막았지만, 최윤조는 혈기 왕성한 나이에 맞게 성욕이 뇌를 지배해버린 새끼였다. 세게 가슴을 밀어봐도 끄떡없었다. 어두컴컴한 그 공간에 오로지 질척한 소리뿐이었다. 아씨, 최윤조한테 맞춰주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하진은 먼저 반응하는 몸을 이길 수가 없었다.
츄읍. 야릇한 소리가 났다. 하진이 다시 윤조를 밀쳤다. 그렇게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찰칵-!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하진과 윤조가 동시에 서로에게 떨어지며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던졌다.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남자였다. 그의 손엔 카메라가 들린 채였다. 최윤조가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리, 리안. 왜 여기 있어?”
“윤조가 없어져서.”
리안이라는 남자는 어눌한 발음으로 최윤조에게 대답했다. 외국인인가. 혼혈? 아니지, 알 게 뭐야. 그는 최윤조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하진에게 꽂은 시선에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싸늘한 공기가 이어졌다. 아. 하진은 왠지 이 상황의 결말을 알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 떠오른 몇 개의 시나리오 중 아마 최악일 것이다. 그 시나리오 속에서 자신은 불청객이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틀리질 않았다.
짝-! 아주 짧은 틈에 하진의 고개가 무지막지하게 돌아갔다. 곧바로 볼이 붉어졌다. 얼얼했다. 입술 안쪽에선 피가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감돌기까지 했다. 무질서한 감각들이 들이닥치다가 끝내는 푸하, 하진이 생뚱맞은 웃음을 터트렸다.
“…형. 괜찮아? 내가, 내가 다 설명할게.”
최윤조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하진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리안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애써 숨기며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하진이 최윤조의 손을 냉정히 떨쳐냈다.
하진은 제삼자가 되고 싶었다. 이 상황에 몹시 당황스러워하지도,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않으면서 그저 관찰자로서 조용히 마무리되길 원했다. 정말 이 이상은 끼고 싶지 않았다.
“윤조. 날 사랑한다며.”
“그게 아니고 리안….”
“내가 저 한낱 섹파보다 못해?”
그래, 맞다. 한낱. 최윤조와의 관계는 기껏해야 파트너였는데, 왜 제가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 직면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가벼운 관계를 지향한 것이 이토록 무거운 책임으로 돌아올 줄이야. 맞은 뺨이 아팠다. 어쩐지 억울해졌다. 어차피 최악의 시나리오인 거, 치정극으로 방향 좀 튼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 하진은 관찰자 타이틀을 버리고 주인공 둘의 사랑을 훼방 놓는 방해꾼을 자처하기로 했다.
“리안. 잘 들어요.”
“…….”
“한국은 받은 만큼 꼭 돌려줘야 해요.”
하진이 가볍게 손을 풀었다.
“그게 한국의 정이거든.”
짜악-! 아까보다 조금 더 찰진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리안의 고개가 반 이상 돌아갔다. 딱히 분노를 실은 건 아니었다. 말했듯이 한낱 파트너 사이에 깊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우스웠다. 제 꼴이 너무 우스워서 아마 그에 대한 자조감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 같다. 구겨진 자존심을 이렇게라도 펴지 않았다면, 하진이 이 자리에서 저놈들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불상사를 볼 수 있었을지도.
최윤조가 울먹거리는 리안을 챙기는 사이 하진은 조용히 걸음을 떼려 했다.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가 하진을 붙잡는 탓에 우두커니 걸음을 멈췄다.
“살벌하다, 살벌해.”
박수와 함께 등장한 이는 뜻밖에도 도현이었다.
“…뭔데. 너 나 따라왔냐?”
하진으로선 달가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씨발. 쪽팔리게. 하진이 짜증스레 머리칼을 넘겼다.
“이거 두고 갔길래.”
도현이 제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하진이 도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던지니 아주 익숙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자가 도현의 머리에 씌워져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하진이 쓰고 있던 검은색 베레모였다. 아, 미친 새끼. 무심결에 튀어나온 살벌한 말과 다르게 하진은 어째선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존나 안 어울린다, 너.”
“지금부터 더 안 어울리는 짓 할 거거든. 보기 싫으면 먼저 가든가.”
고개를 까딱이며 도현이 하진을 낱낱이 살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붉어진 볼, 입꼬리 끝에 살짝 굳어진 피딱지. 그것들을 찬찬히 훑은 도현은 바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박하진, 꼬라지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도현은 하진의 머리 위에 살포시 베레모를 얹었다. 검은 베레모가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역시 이게 예쁘다.
마침내 도현의 등장으로 치정극의 주인공은 순식간에 하진으로 바뀌었다. 극은 새로운 클라이맥스를 향해 내달렸다. 순식간에 도현이 리안의 손에서 카메라를 뺏어 들었다. 그리곤 그대로 바닥에 쾅! 거기에 피날레로 우지끈- 밟기까지. 렌즈 깨지는 소리와 산산이 조각나는 카메라 소리가 섞여 기이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알려주는 것은 한 가지. 카메라가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Oh, fucking!”
리안의 절규가 카메라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도현은 덤덤하게 작살낸 카메라 조각을 들춰 빠져버린 칩을 집었다. 칩을 회수한 도현이 지갑에서 명함 한 장과 지폐 몇 장을 꺼내 바들거리는 리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싸구려 같은데 많이 쳐줬어요. 혹시나 부족한 카메라값은 이 앞으로 청구하시고요.”
“…….”
“앞으로 웬만하면 말로 하세요. 그러다가 진짜 박하진한테 얻어맞아요, 그쪽.”
나긋한 음성이 하는 말치고는 과하게 협박성이라 리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What? 제대로 못 알아들었어도 분위기만은 이해한 리안에게 도현이 다시 한번 친절히 영어로 말했다.
리안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킬? 킬 미? 도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과 함께. 안색이 파래지는 리안을 최윤조의 가슴팍으로 밀어버린 도현이 최윤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는데 이게 박하진 취향인가. 가슴 한구석에서 묘하게 짜증이 차올랐다. 이내 도현은 능글맞은 얼굴로 최윤조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하진이랑은 여기서 끝. 질척거리고 싶으면 나한테 하세요.”
그쪽이 꽤 내 취향이니까-.
***
“야, 같이 가.”
도현이 애타게 하진을 불렀지만, 하진은 이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저벅저벅 앞으로 향하는 하진을 도현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멈춰 세웠다. 일반인인 자신은 그렇다 쳐도 저 흐트러진 상태로 하진을 사람들 틈에 밀어 넣는 건 위험했다. 벌써 몇몇은 하진을 알아보고 힐끔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일단 차로 가자.”
도현이 코트를 벗어 하진의 머리칼을 가렸다. 밝은 대낮에 보니 은발이 가관이었다. 나 연예인이에요- 동네방네 광고를 하지, 아주. 피부는 또 더럽게 하얘서 맞은 게 그대로 티가 났다. 좀 부은 것도 같고.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은 꼴에 도현의 시선은 당연히 곱지 못했다.
“쪽팔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그 시선을 느낀 하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에 웬일로 도현이 입을 다물곤 조용히 차로 걸어갔다. 하진의 손에 들린 베레모가 잔뜩 구겨져 살짝씩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론 저래도 속은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차는 참 다행히도 쇼 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차가 좀 튀긴 해도 덩그러니 주차되어있는 걸 보니 주변에 기자는 없는 듯했다. 뒤이어 따라온 하진을 도현이 재빨리 차 안으로 욱여넣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내부. 얼른 히터를 틀었지만, 냉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현 역시 그 냉기에 얼어붙어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윽고 그러한 적막은 잔잔히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덕분에 깨질 수 있었다. 하진의 것이었다.
“전화 안 받아?”
“어. 최윤조야.”
도현의 눈썹이 사선으로 기울었다. 나이도 한참 어린 새끼가 구질구질하게 왜 매달려? 다른 남자 만나란 말이야! 도현은 이 순간만큼은 세 살 많은 꼰대 어른이 되어 최윤조를 앞에 두고 설교하고 싶었다. 주제는 ‘이미 지나간 인연에 집착하지 말기!’였다.
“야, 넌 만나도 그런 새끼를 만나냐?”
“내가 좀 예쁜 바나나 모양을 좋아하긴 하지.”
“농담이 나와?”
“그럼 뭐 우냐?”
“이 정도면 울어도 할 말 없지 않냐?”
“저딴 걸로 뭘 울어. 똥차 가면 벤츠 온다잖아.”
마인드가 긍정적인 건지 아니면 괜찮지 않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건지. 전자든 후자든 탐탁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에 도현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페라리 왔네.”
“뭐?”
“지금 네가 타고 있는 이 차가 페라리라고.”
“그게 뭐.”
“아, 똥차 가고 페라리 왔다고! 두 번 말해야겠어?”
“…….”
삽시간에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히터는 제 기능을 아주 잘하고 있었는데도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얼음물을 착, 부어버린 듯했다. 도현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이런 유치한 말장난을 위로랍시고 할 줄이야.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다.
이윽고 그 견고한 침묵 사이로 청량한 웃음이 퍼졌다. 푸흐. 난데없이 하진이 웃었다. 귀가 간지러웠다. 마침 신호에 걸린 차 덕분에 도현이 천천히 하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현의 눈동자가 단번에 하진으로 뒤덮였다. 맑은 눈이 예쁘게도 휘어지면서 하진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간지러운 건 귀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빠앙-! 성난 클랙슨 소리가 시끄럽게 귓가를 때렸다. 그제야 도현은 하진에게 사로잡혀 있던 시선을 떼어낼 수 있었다. 바뀐 신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 번 더 울린 클랙슨 소리에 도현이 다시 액셀을 밟았다.
“너 방금 그거 위로야?”
하진의 말투에는 아직도 웃음이 묻어나 있었다. 괜히 수치스러워했다가는 하진의 좋은 먹잇감이 될 것 같아 도현은 오히려 뻔뻔하게 답했다.
“그럼 내가 이 상황에서 갑자기 재력 어필이라도 한 거겠어?”
다만, 도현이 잠시 망각한 것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뻔뻔함은 하진이 한 수 위라는 것을. 하진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종착지는 도현의 허벅지였다.
“그런 거였으면 못 이기는 척 받아주려고 했지.”
“...뭐… 뭐….”
“네가 그랬잖아. 남자는 정력과 재력만 있으면 된다고.”
“….”
“그 정력, 오늘 한번 써보든가.”
하진의 손가락이 야금야금 도현의 허벅지 안쪽으로 옮겨갔다. 그 순간 움찔한 도현이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힘이 다른 곳으로 쏠릴 것 같았다.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데 이런 식의 자극은 사절이었다. 탁, 도현이 하진의 손을 떼어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꽉, 깨문 어금니는 부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사고 난다.”
“사고 쳐볼까?”
“그런 건 네 취향이랑 해. 이강운이었나, 네 취향이.”
아, 씨발. 도현의 입안에 욕이 고였다. 정말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이름이었다. 한 번 곱씹고 나서야 그 이름이 이강운이라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고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실수. 근데 왜 하필 그 실수가 이강운이냐고. 졸지에 도현은 이강운을 내내 신경 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이강운이 왜 나와?”
하진 또한, 뜬금없이 튀어나온 강운에 곱게 접었던 눈꼬리를 치켜떴다. 기분이 팍 상해버린 탓이었다. 하진의 눈치를 보던 도현이 수습을 시작했다.
“네 팬이라잖아.”
본인이 뱉은 말이 수습보다는 심술에 가까운 걸 도현, 본인만 모르는 눈치인 게 문제였지만.
“그런 사이 아닌데.”
그때였다. 끼익-! 옆 차선 운전자가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었다. 주변에 차도 없는데 굳이 이 앞으로 왔다. 열이 확 뻗친다. 그 심술이 괜히 하진을 향했다.
“네 주위 남자는 다 그런 용도잖아.”
심술에서 끝나면 그나마 용서받을 수 있었는데 도현은 결국 입으로 설사를 뱉어낸 꼴이 되었다. 한 번의 실수는 용서되지만, 두 번째 실수는 용납 불가다. 그런데 지금 도현은 두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등신 새끼. 도현이 속으로 자책했다. 얼마나 화를 낼지 차마 하진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현의 예상대로 하진은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히터 때문인가. 답답함이 숨을 조였다. 용도라는 말이 귓속이 아닌 심장을 파고들었다.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용도가 뭐야, 씨발. 용암이 끓듯이 몸속에서 서서히 화가 끓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예전의 기억이 함께 차올랐다.
‘박하진은 좋겠다. 친구 잘 만나서 후원도 받고.’
‘연습생도 도현이 빽으로 들어간 거래.’
‘야, 도현이가 친구로 생각하겠냐?’
‘그럼?’
‘용도가 있겠지.’
문득 떠오른 기억은 초라했고, 비참했다. 저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와 생각해보니 우도현이 자신을 친구로 여긴 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든다. 친구였다면 그렇게 외면하고, 버릴 수는 없었을 테니.
“어, 그래. 다 그런 용도지. 너는 뭐 예외일 것 같아?”
“…….”
“내릴래.”
“여기 도로 한복판이야.”
“골목길로 가서 차 세워.”
뜨거운 공기로부터 하진은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하진의 단호한 어투에 도현이 낮게 한숨을 내쉬곤 핸들을 꺾었다. 차가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하진은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었다. 삐익삐익-. 위험을 감지한 경보음이 울리는데도 하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하진을 감싸 안았다. 그제야 하진은 숨이 쉬어졌다. 오로지 앞만 보면서 골목길을 걷는 하진의 옆을 도현의 차가 따랐다. 이윽고 차창이 내려갔다. 그 틈으로 도현이 하진을 보려 애썼다.
“야. 미안해.”
“어디서 개가 짖나.”
하진이 싫증 난다는 얼굴로 귀를 후볐다. 졸졸, 하진의 걸음에 맞추다 보니 거북이 기어가듯 느리게 차가 굴러갔다. 뒤에 다른 차가 없어서 망정이지 있었다면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을 것이다.
“맞아, 내가 개소리한 거야. 그니까 그냥 다시 타면 안 돼?”
우뚝, 하진의 걸음이 멈췄다. 제 간절한 사과가 먹혔다고 생각한 도현이 차창을 조금 더 내려 하진을 보려던 찰나, 주차되어있던 차에서 번듯한 남자 한 명이 내렸다. 하진의 시선이 그리로 꽂혔다. 그리곤 환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남자를 반겼다. 뭐야, 누구지? 도현이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빠앙, 클랙슨을 눌렀다.
곧 남자의 고개가 도현의 차 쪽으로 돌아갔다. 앞 유리가 뚫릴 정도로 남자를 노려보던 도현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기함을 쳤다. 미친. 오늘 운 더럽게 없네. 이강운, 그 이름 석 자를 잘못 꺼내서 이렇게 됐는데, 진짜 이강운이 등장했다. 진짜 뭣 같은 상황이었다.
도현이 애써 짜증을 감추며 둘에게 가까이 갔다. 이제 차창은 완전히 열린 상태였다. 날카로운 가을바람이 고스란히 도현을 스쳤다. 너무 추웠다. 하진이 타야 차창을 닫을 수 있는데, 망할 박하진은 탈 기미가 안 보인다. 도현이 하진을 재촉했다.
“박하진, 얼른 타.”
제발 타라-. 차마 이렇게 비굴한 말까지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얼른 목구멍을 닫았다. 하지만 그 티끌만 한 자존심을 도현은 곧바로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창문으로 상체를 집어넣고는 피식, 비소를 흘리며 하진이 내던진 말 때문에.
“벤츠 맛 먼저 보고.”
“…….”
도현이 그 말을 이해한 건, 하진이 이미 이강운의 차에 타고 난 다음이었다. 젠장. 이강운이 벤츠다. 하진이 남긴 그 말이 차디찬 바람을 타고, 둥둥 도현의 차 안을 떠다녔다.
“야, 씨발. 야!”
도현의 공허한 욕지거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
도현이 화가 잔뜩 묻어나는 발걸음으로 대표실 문을 열었다. 한 손에는 박하진이 버려두고 간 베레모를 쥔 채로. 확,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려다가 예뻐서 참는다.
아, 물론 베레모가.
“대표님, 실검 오르셨네요. 박하진 씨랑 같이.”
도현을 따라 들어온 김 비서가 태블릿을 건네며 말했다. 네모난 태블릿 화면을 가득 채운 사진 속, 우도현과 박하진은 상당히 친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완벽히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물론 그 자체로는 흠이 없었다.
[박하진, 우도현 우리 우정 영원히!]
몹시 촌스러운 기사 제목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어떤 기자가 쓴 건진 몰라도 다음에 W 소속 연예인 기사는 못 쓰게 막아야겠다. 깔끔한 사진에 침을 뱉어놓는 격이니 말이다.
우리 우정 영원히. 도현의 혓바닥 위에서 그 말이 계속 겉돌았다. 뭐 하나 맞는 구석이 없으니 도통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이었다. 박하진과 우도현 사이엔 우리를 붙일 수 없고, 우정 따위는 오래전에 잃어버렸으며 영원히는 개뿔. 잠깐 보기도 힘든데, 무슨.
오류투성이의 문장이 확실했다. 그런데도 도현은 거북하다거나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몇 번이고 기사 제목과 사진을 눈에 담을 만큼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러했다.
“잘 나왔네요.”
도현이 제 책상 위에 각 잡힌 모양의 베레모를 보며 말했다. 이어 매끄럽게 올라간 입매가 무의식중 말을 덧붙였다.
“박하진이.”
“…….”
“베레모가 특히 예쁘네요.”
“…….”
“…….”
…어. 단숨에 침묵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다물린 입은 어색하게 달싹일 뿐이었다. 1분간의 침묵이 마치 1시간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와 함께 도현은 그 시간 동안 혼란스러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지금 뭐라고 했죠?”
도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방금 자신이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 것 같아서였다. 뒤죽박죽 엉킨 생각들이 서로 충돌하여 뇌에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다. 거대한 혼란이 도현의 이성을 들쑤셨다.
“박하진 씨가 예쁘게 잘 나왔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김 비서가 안경테를 한번 들썩이곤 짐짓 냉철한 어투로 대답했다. 설마설마, 그런 말을 하다니. 도현이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벅벅 문지르며 어찌어찌 변명을 찾아냈다.
“제가 요즘 과로했죠?”
“꼬박꼬박 6시 퇴근하셨습니다.”
변명은 궁색했고, 빠르게 철회됐다. 단호한 김 비서의 말에 변명의 여지가 없어 도현이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지만, 도무지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럼 제가 왜 이런 개소리를 한 걸까요?”
“개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한 마디를 안 지는 게 꼭 박하진 같네요.”
“이 상황에서도 박하진 씨 생각하는 걸 보면 마음의 소리 거의 확실합니다.”
도현이 마른세수를 했다. 요즘 제 주위 사람들이 단체로 말발 학원에 등록이라도 했나 보다. 어쩜 이렇게 말대꾸를 잘하는지 대회 열고 상금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그 대회의 우승자는 박하진일 게 뻔하지만. 아, 망할. 또 생각이 박하진으로 끝났다. 도현은 머리를 뜯으며 절망했다. 아침부터 공들여 넘긴 머리가 덕분에 쑥대밭이 되었다.
김 비서는 그런 대표가 몹시 안타까워 몰래 기사 사진을 저장했다. 그리곤 태블릿 바탕화면을 그 사진으로 바꿔놓았다. 자주 보면 본인 마음도 깨달으시겠지. 김 비서의 작은 배려였다. 태블릿을 조심스럽게 도현 옆으로 밀어둔 김 비서가 별안간 들려온 노크 소리에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와 동시에 밖이 소란스러워졌고 김 비서가 문을 열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이윽고 또각또각, 뜻밖의 인물이 도현 앞으로 걸어갔다.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높은 구두를 신고 다가오는 그녀는 여희나였다.
“우도현 대표님. 할 말 있어서 왔어요.”
아는 얼굴이라 차마 그녀를 막지 못한 김 비서가 뒤에서 도현에게 눈짓하자 도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죠, 여희나 씨?”
“중요하게 할 말 있어.”
“얼굴도 알려진 사람이 함부로 다른 기획사 찾아오면 이적설이다 뭐다, 말이 많을 텐데요.”
W 엔터 왔다고 광고라도 할 셈인지 희나는 눈에 띄는 차림새로 도현 앞에 서 있었다. 저렇게 보란 듯이 올 거면 아예 기자라도 대동하고 오지. 순간, 하진에게 하는 것처럼 비아냥댈뻔한 것을 꾹, 참고는 도현이 희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거 노리고 온 거야.”
“…….”
“이적설 말고 열애설로.”
희나가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 꺼림칙한 기시감은 분명 지난번 희나를 만났을 때 느꼈던 것인데 역시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열애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던 도현보다 희나의 손이 더 빨랐다. 그리고 곧 도현의 책상 위에 무언가 놓였다.
흔하디흔한 갈색 서류 봉투, 그것을 도현이 천천히 집어 들었다. 봉투 입구를 열고 손을 넣어 휘적거리니 얇은 몇 장의 내용물이 잡혔다. 일반 서류는 아닌 것 같은데. 도현이 내용물을 꺼내기 전에, 희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흔들림 없이 웃는 얼굴로 도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희나가 입을 열었다.
“나랑 열애설 내.”
얼토당토않은 명령, 그러나 그것은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도현의 손에 쥐어진 두 장의 사진이 도현을 압박했다. 한 장은 박하진과 최윤조가 부둥켜안고 있는 사진. 장소는 호텔. 다른 한 장은 박하진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진. 장소는….
그때 그 클럽. 이 두 사진이 의미하는 것을 간파한 도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뒤이어 들려온 희나의 말은 도현을 더욱 자극했다.
“지금 마약 검사하면 양성 뜨겠다, 그치?”
희나의 여유로운 웃음 아래엔 몹시도 강압적인 협박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가 순식간에 도현을 짓눌렀다.
“협박하시는 건가?”
“거래하자는 거지. 박하진을 재료로.”
메인이면 메인이지, 박하진이 재료 취급받을 정도는 아닐 텐데. 재료란 말이 가뜩이나 심란한 도현의 기분을 헤집었다 썩 좋지 않았다. 그 기분이 목소리에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제안을 수락할 이유가 없는데요. 나한테 득 될 게 없는데.”
도현이 침착하게 사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에 희나가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등을 돌렸다. 희나의 움직임에선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감이 묻어났다. 마치 ‘넌 이 제안을 응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도현의 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대표실을 둘러보느라 한참을 또각거리던 구두 소리가 이내 문 앞에서 멈췄다. 희나가 다시 등을 돌려 도현을 마주했다.
“득 될 건 없어도 실은 막을 수 있겠지.”
“…….”
“네가 거절하면 일주일 이내로 이 사진 전부 기자한테 넘길 거야.”
도현이 눈썹을 우그러뜨렸다. 도현의 불안정한 심리가 책상을 두들기는 손가락 끝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쿡, 그 반응을 재밌게 지켜보던 희나가 말을 이었다.
“대신 수락하면 이 사진, 모두 넘길게. 물론 원본 파일까지.”
머리 굴리는 속도에 따라 손가락이 점점 빨라졌다. 무시.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건데. 박하진이 게이 스캔들에 빠지든, 마약 스캔들에 빠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기한은 일주일. 연락 기다릴게.”
친구도 뭣도 아닌 주제에.
“이유.”
“응?”
“이런 거래를 제안하는 이유요.”
그럼 되는 건데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도현의 질문에 문고리를 쥔 희나의 손이 멈칫했다. 생각보다 도현의 반응이 빨라서였다. 역시 박하진 관련된 건 참을 수 없다는 건가. 예상 적중. 희나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띄워졌다.
“나도 협박당하는 중이라.”
그 가증스러운 웃음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심하게 우그러진 얼굴처럼 도현 손에 쥔 사진 역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겨진 채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진에게 말해야 할까. 도와준다고 하면 어떤 눈으로 쳐다볼까. 아니 감히 도와주겠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
내가 씨발, 무슨 자격으로.
결국 도현은 이를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하진에게 전화를 걸어 받으면 말하고, 안 받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지. 그냥 받아라 제발.
***
얼떨결에 운전석으로 밀어 넣어진 강운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하진을 쳐다봤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에 진입할 때까지도 하진은 계속해서 백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다급해 보이던 하진이 조금 안정된 듯 보여 강운이 여태까지 참았던 물음을 던졌다.
“무슨 일이에요?”
강운의 질문에 하진은 그제야 자신이 상황 설명도 하지 않고, 강운의 차에 올라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 이렇게 염치없는 새끼를 받아주다니. 정녕 이강운은 천사가 아닐까 싶었다.
“혹시 어디 가는 길이었어?”
“그냥 혼자 커피 마시러 나왔어요.”
“그럼 그 커피 나랑 마시자.”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별 뜻은 없었다. 그냥 구해줘서 고맙다는 의미 정도. 그러니 강운이 저렇게 당돌하게 대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저번부터 팬이라고 호감을 표하긴 했으나 그게 어디까지나 정말 단순한 팬심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생각이 틀린 것 같다. 데이트라니. 강운이 던진 건 확신의 플러팅이었다. 그에 하진이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서 대표님. 아무래도 이강운이 이쪽인가 봐요.
“응. 싫어?”
섹스는 섹스로 잊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섹파 떠나면 다른 섹파 구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하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다른 섹파를 곧 구할 수 있겠다고. 29년 박하진 인생 중 틀린 적 없는 섹스 레이더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싫을 리가요.”
오! 예! 때마침 신호에 멈춘 차 덕분에 강운이 앞을 보던 시선을 떼어 하진에게 가져갔다. 그 시선엔 덕지덕지 꿀이 발려 있었다. 차 안 가득 단내가 진동했다. 서두르지 말고 우선 가볍게 하진이 대화를 이끌었다.
“오늘 패션위크는 왜 안 왔어?”
“섭섭하다. 형은 저한테 진짜 관심 없으시네요.”
“응?”
“저 어제 갔어요. 연예 뉴스 메인에도 걸렸는데.”
강운은 금세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저 귀여운 얼굴을 한 번 울려 보고 싶…. 아니지. 아무리 상상 속이라도 사람 면전에 대고 망측한 상상이라니. 하진이 떠오른 생각을 없애기 위해 손부채질을 했다.
“형, 지금 엄청 귀여운 거 알아요?”
“지금은 모르겠는데 내가 늘 귀엽긴 해. 예쁘기도 하고.”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하진에 푸하, 강운이 경쾌하게도 웃었다. 정작 그 말을 내뱉은 하진은 이게 정말 제 입에서 나온 말인가, 충격에 휩싸였다. 우도현이나 할 법한 자아도취적인 발언이니 그럴 만도 했다. 뻔뻔함도 전염되나. 아무래도 요즘 너무 붙어 다닌 모양이다. 하진이 망측한 제 입을 두어 번 때렸다.
“형, 그거 알아요?”
“뭐?”
“저 형이랑 드라마 찍고 싶어서 W 엔터 간 거예요.”
드라마? 너와 나의 거리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이강운이 남자주인공으로 발탁됐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아, 이건 좀 곤란한 듯싶다. 사적 친분 있는 사람이랑 같은 프레임 안에 잡히는 거 진짜 싫은데. 그 사적 친분이라는 게 뒤탈 생기기 딱 좋은 관계이니 더욱.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는 사이 하진이 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열 좀 받은 우도현이 이제 와서 전화했나 싶던 하진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곤 조용히 거절을 눌렀다. 망할 최윤조였다.
드르륵. 드르륵.
아, 새끼 존나 끈질기네.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아예 무음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차마 액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냥, 나름의 정 때문이었다.
“형, 전화 안 받아도 돼요?”
“응. 안 받아도 되는 전화야.”
액정이 계속해서 번쩍거렸다. 이강운이 뭐라고 생각할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 안 받아도 되는 전화가 이렇게 많이 온다는 게 말이 안 될 테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다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이내 최윤조는 전화를 포기하고 문자로 노선을 변경한 모양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메시지의 향연을 하진이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봤다. 별 감흥은 없었다.
[형, 진짜 딱 한 번만 전화 받아주라. 진짜 제발 한 번만.]
다만, 무슨 할 말이 있길래 저리도 애걸복걸인지 조금 궁금하긴 했다. 본인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는커녕 그대로 외면해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최윤조 정도면 양반이지.
“형, 연락이요. 받는 게 어때요? 흐지부지 끊어지는 것보다는 확실한 매듭이 좋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흐지부지 끊어진 관계는 애매하기 그지없다. 이어진 것도 아니고 끝난 것도 아닌, 그런 모호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런 빌어먹을 관계는 우도현 하나만으로 족했다.
“그래, 네 말이 맞네.”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열자 훅 불어오는 바람이 따갑게 얼굴을 찔러댔다. 꼭 이럴 때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허전한 입가를 매만지며 하진은 자신의 핸드폰을 뜨겁게 달군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나 기다린 건지, 1초 만에 통화가 성사됐다.
-형, 형. 드디어 받았네. 진짜 내가….
찡찡대는 최윤조의 말을 하진이 단호하게 끊었다.
“딱 1분 준다.”
-응?
“59초. 58초.”
하진이 손목시계의 초침을 확인하면서 나긋하게 말했다. 어차피 끊어낼 인연이라면 짧고 간결하게 끝내는 게 좋을 테니까. 최윤조의 입에선 연신 “아, 아….” 만 이어졌다. 그 덕에 벌써 10초가 흘렀다.
-일, 일단 미안해. 근데 진짜 리안이랑 사귀는 사이 아니야. 파리 패션쇼 갔다가 만나서 친해졌고, 최근에 고백받았어. 난 확답도 안 줬는데 혼자 나랑 사귄다고 오해했나 봐. 정말이야. 믿어줘, 형.
변명 한번 길고, 구질구질하네. 초침이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1분 끝.”
-형.
“이제 내가 말할 차례니까 입 다물어, 윤조야.”
-…왜 성 빼고 불러, 무섭게….
“입 다물라니까.”
최윤조가 긴장한 듯 꿀꺽 침을 삼켰다. 이어진 하진의 어조는 꽤 덤덤했으나 어딘가 싸늘했다.
“나한테 왜 변명 해?”
-…….
“대답.”
-형이 오해할까 봐….
“오해는 연인 사이에나 하는 거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 말대로 우린 섹파 사인데 내가 오해를 하든 말든, 널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야지.”
최윤조의 나이대를 잘 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나이대 연예인을. 사랑받는 이는 필연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싶어 한다. 베풀다 보면 마음이 공허해진다. 애정은 고프지만, 미움은 두렵다. 그러니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변명을 입에 달고 사는데, 그 이유는 나쁜 짓은 했지만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만큼 모순적인 행동도 없다는 걸 꼭 본인들만 모른다, 등신들이.
“세상에 착한 쓰레기는 없어. 둘 중 하나만 해.”
미움은 익숙해지면 그만인 것을, 꼭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최윤조가 알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쓰레기가 되라는 뜻은 아니었다. 어차피 최윤조 성격에 완전한 쓰레기는 못 될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전화를 끊으려던 하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함부로 다정하게 굴지 마. 진심이라 믿게 하는 사람이 제일 나쁜 거야.”
그 순간, 하진의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와 동시에 뚝- 하진이 전화를 끊고는 미련 없이 최윤조를 차단했다. 역시 끝은 간결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도현과는 이 쉬운 게 안 되는지 모르겠다. 이어 하진은 한껏 달아오른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복합적으로 뒤섞인 감정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형.”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하진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손가락은 지문이 닳도록 핸드폰을 문질러대고 있었다. 이를 빤히 보던 강운이 그대로 하진의 손을 가로채곤 꽉, 그러쥐었다. 쿵,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옆자리 비었으면 전 어때요?”
핸드폰은 빛을 뿜어내며 글로브박스 밑으로 처박혔다. 그러나, 이 순간 그 누구도 핸드폰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진에게 열렬히도 구애하는 강운이었기 때문에.
하진은 한참 뒤에야 그 빛의 근원이 우도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뒤늦게 전화를 걸었을 때 도현은 그저 잘못 걸었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
드라마 <너와 나의 거리>는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연이은 화제가 되었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남녀 배우를 뽑자면, 단연 1순위로 언급되는 이강운과 지수연이 주인공을 맡게 된 것과 더불어 시청률 보증 수표인 장인수가 감독이라는 점에서 미디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탓이었다.
이런 상황이 하진으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러다가 시청률이라도 대박 난다면 아이돌 출신이라 연기를 못 한다는 둥, 차라리 박하진 말고 신인 배우를 쓰지 그랬냐는 둥, 온갖 비난을 받을 것이 눈에 훤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첫 번째 비난을 받게 될 날이라는 것을, 하진은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확신했다.
오늘은 드라마의 첫 공식 일정, 대본 리딩 날이었으니까.
“형!”
긴장감으로 범벅된 몸이라 일찍이 앉아서 진정시키고 있는 하진에게 저 멀리서 강운이 다가왔다. 꼬리라도 달린 것처럼 살랑거리는 강운을 보자 하진이 작게 웃었다.
“일찍 왔네요?”
“응, 긴장돼서. 넌?”
“전 형 보려고요.”
연하남의 저돌적인 면모란 이런 것일까. 하진은 아침부터 짜릿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까지 곤두서 있던 신경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강운이 자연스럽게 하진의 옆에 앉아 자신의 어제 일과를 읊어댔다. 어제는 아침부터 광고 촬영에 연기 레슨에 너무 바빠서 형한테 연락을 못 했다는, 마치 연인이나 할 법한 대화였다.
그렇다고 정말 연인은 아니었다. 그냥 패션위크 이후로 이강운이 수시로 연락하기에 답장해주면서, 가끔 만나 밥 먹는 정도? 옆자리 비었으면 본인은 어떠냐는 이강운의 적극적 플러팅은 아무래도 하진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하진은 화끈한 밤을 원했던 건데 이강운은 좀 잔잔하다. 뭐, 그래도 이런 일상적 관계가 썩 나쁘진 않아서 굳이 끊어내고 있지는 않은 하진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갑자기 등장한 방해꾼으로 인해 끊어졌지만 말이다. 저 멀리서부터 빈정대는 얼굴의 방해꾼, 우도현이 아니나 다를까 하진에게 시비를 걸었다.
“박하진 씨, 어디 죽으러 가시나 봐요.”
애써 끌어올린 텐션이 우도현으로 인해 다시 가라앉았다. 괜히 기 싸움했다간 이따 할 연기에도 지장이 생길 것 같아 하진은 도현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물론 하진만 무시하면 될 일이 아닌 게 문제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이강운이 W 엔터로 갔지, 참.
“강운 씨. 밖에서 이 실장이 찾던데.”
“실장님이요?”
“네.”
강운이 눈치를 한번 보더니 일어나 밖으로 걸어갔다. 도현이 능글맞게 웃고 있는 걸 보면 딱 봐도 거짓말인데 이강운은 속은 모양이다. 저 새끼는 이강운 쫓아내면서까지 나한테 시비를 걸고 싶나. 하진이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도현은 시비와는 조금 다른 마음이었다.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보였던 하진의 파래한 안색이 진심으로 신경 쓰였던 거니까. 아니, 어쩌면 그날 여희나의 협박 이후로 쭉, 박하진이 걱정된 걸지도. 그런데도 말이 조금 밉게 나온 건 제 걱정이 무색하게 강운과 시시덕거리는 꼴이 짜증 나서였다.
“박하진 씨, 어디 아파요?”
도현이 허리를 굽혀 하진의 얼굴을 더 자세히 훑었다. 역시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아니요. 긴장한 건데요.”
“연기 잘하잖아요. 긴장 좀 풀어요.”
“그쪽이 저 연기하는 걸 언제 보셨다고요?”
“고등학생 때요.”
아. 도현은 순간 아차 싶었다. 고등학생 때 얘기하는 거 싫어하는데 잘못 꺼내버렸다. 단숨에 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추억팔이하실 거면 가세요.”
“그게 아니….”
도현이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등장한 희나가 이를 막았다.
“둘이 무슨 얘기해?”
젠장, 하필이면. 도현이 작게 탄식했다. 대본 리딩이라고 혹시나 하진과 희나가 부딪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사 제쳐두고 오긴 했으나, 그래도 벌어지지 않길 바랐던 장면이 펼쳐지고야 말았다.
“하진이, 또 보네.”
“그러게요.”
“도현이랑은 며칠 전에 봤는데.”
“그러시구나.”
“왜 봤는지 안 궁금해?”
“네. 먼지 한 톨만큼도 안 궁금해요.”
하진이 빙그레 웃었다. 희나 역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사이에서 도현만은 웃을 수 없었다. 그저 둘의 대화를 초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도현은 희나의 손목을 붙들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아직 결정 내리지 못한 사안임에도 여희나라면 그것과 관련해서 하진이 오해하기 좋게 지껄일 게 뻔해서였다.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하진이는 들으면 안 되는 얘기야?”
무슨 얘기 할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박하진 심기를 건드리는 희나에 도현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손으로 하진이 냉소 섞인 눈길을 보냈다.
“두 사람이 사랑놀이를 하든 뭘 하든 관심도 없으니까 다른 곳 가서 하세요.”
“어머, 티 났니? 우리 진짜 사랑놀이하는데.”
희나가 제 손을 내려 도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하진 앞에 깍지 낀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현이 눈을 크게 뜨곤 희나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억압적인 눈동자를 어길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하진 눈에는 꽤 달달하게 비쳤다. 심사가 뒤틀렸다.
“드디어 결실 맺으셨나 보네. 그럼 제가 빠져야겠어요.”
“야, 아니….”
“축하드려요, 우 대표님.”
무미건조한 말투와 눈빛을 남긴 채 하진은 그들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속이 울렁거렸다. 일순간 몸을 지배한 기시감에 하진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간신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씨발. 머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뭔지 모를 온갖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 정신을 흔들어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 둘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조차 지금은 할 수 없었다.
“재수 없는 새끼.”
우도현은 변한 게 없다. 뒤통수쳐서 사람 한순간에 병신 만드는 것도 여전해. 언제나 거기에 놀아나는 건, 박하진인 것도. 하진이 입술을 꾹 짓눌렀다.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 덕분에 하진은 밀려 들어오는 과거의 홍수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기 싸움에서 남은 거라곤 좆같이 밀려오는 짜증과 잊고자 했던 그때의 기억뿐이었다. 애써 유지해왔던 평정심이 무너져내려 발밑에 뿌려질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집중력은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녕하세요, 정하이 역을 맡은 지수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한호 역을 맡은 이강운입니다.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작품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연 두 명의 소개에 열 명 남짓한 배우분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그 중간중간 옆에 앉은 강운이 하진을 찌르지 않았다면 하진은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이현이 역을 맡은 박하진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그리고 인사. 그렇게 반복된 소개는 아역배우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제부턴 정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대사를 놓쳐선 안 되기에 하진이 강제로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내 강운의 내레이션을 스타트로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잔잔했던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하나. 변화는 그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하이와 한호의 사이 또한 그러했다. 정하이가 한호를 피하기 시작한, 그 작은 변화로부터.”
온화한 강운의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하진은 1화 대본의 절반을 넘긴 뒤에야 나왔다. 고로 적어도 앞으로 20분 동안은, 하진이 목소리를 낼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차라리 대사가 있으면 어떻게든 집중하겠는데, 이건 뭐 옆에서 구경하는 게 전부이니 집중도 힘들고, 무엇보다도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이 집중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눈으로 배우들의 대사를 좇아가며 읽는데도 하진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처박힌 채였다.
“야, 정하이. 요새 보기 힘들다?”
동네를 비추던 장면이 전환되고, 도망치는 하이와 그녀를 잡는 한호의 첫 말다툼이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대사, 그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읊는 이강운의 목소리.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장면에서 하진은 어째선지 과거 자신의 목소리가 덧씌워져 들리는 듯했다.
‘야. 너 요새 나 왜 피하는데?’
목소리는 순식간에 하진을 주변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너 진짜 게이야?’
시시껄렁하게 다가와서 게이냐고 놀려대는 물음보다 우도현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훨씬 더 아팠다. 우도현의 눈은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잔인한 부탁을 들어주기엔 열아홉의 박하진은 너무도 미숙했다.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날의 치기였다.
‘응. 나 남자 좋아해. 왜? 너 그거 때문에 나 피했어? 내가 더러워?’
‘넌 내가 그것도 이해 못 할 거 같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 그래 그거 조금 바랐다. 그런데 애초에 이해를 바랄 기회도 주지 않은 건 우도현 아닌가. 울고 싶은 건 저였다. 그런데, 왜 우도현이 제게 울분 섞인 눈빛을 보내는 건지 하진은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먼저 도망갔잖아. 유학 간다는 거, 나한테 한마디 말도 안 했어, 너.’
‘나도 네 얘기 소문으로 알았어.’
‘야, 너 그전부터 나 피했어. 난 그럼 도망치는 너 붙잡고, 도현아, 나 사실 게이야. 이딴 말이라도 해야 했어?’
모진 말은 부메랑과 같아서 상대방을 스치고 다시 제게로 돌아왔다. 그러니 결국 상처 입는 건, 두 사람 다였다. 그때의 한없이 일렁거리던 눈동자가 누구의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둘 중 한 사람은 그 눈동자를 잡아줬어야 했다.
‘내가 너만 안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뭐가 문제야, 도대체.’
안타깝게도 하진은 그 한 사람이 될 용기가 없었다.
‘…지금 알겠다. 내가 문제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만이었네.’
‘…….’
‘나 너 이해 못 해.’
추억과 추한 기억은 한 끗 차이다. 결국, 그 한 끗을 망쳐놓은 사람은 우도현이었다.
***
“형.”
“…….”
“하진 형!”
그렇게 고립된 기억에서 허우적대던 하진을 강운이 끌어냈다. 강운은 쿡쿡 하진을 찔러대면서 계속해서 하진을 불렀다. 아. 그제야 자신의 차례를 인지한 하진이 백지장이 된 머리에 얼른 검은색 글자들을 채워 넣었다. 망했네. 어느 부분인지를 모르겠다.
“정신 안 차리지.”
“죄송합니다.”
장인수의 묵직한 질책에 하진이 고개를 숙였다. 빠르게 대본을 훑는 하진의 시야에 불쑥 강운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아마도 이 부분이라고 알려주는 건가 보다. 붕 뜬 정신을 다시 부여잡으며 하진이 대사를 읊었다.
“와, 한호가 정하이랑 싸웠다고?”
“싸운 건 아니고 그냥 좀 다퉜어.”
“그게 그거지. 근데 너네는 체급이 안 맞지 않아? 네가 무조건 발릴 텐데.”
실수는 없었지만, 버벅거리는 눈길로 대본을 읽는 게 들킨 모양이었다. 장 감독이 촬영 카메라에 대고 컷을 외쳤다.
“영상 촬영 잠깐 중단해주세요.”
삽시간에 살얼음판이 되어버린 분위기. 힐끔거리며 하진과 장 감독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 속에 도현의 것도 있었다. 도현이 무의식적으로 샤프 끝을 눌러댔다.
탁. 탁. 탁. 탁. 틱-.
규칙적인 소음의 끝에 틱, 하고 샤프심이 부러졌다.
“박하진 씨, 집중 못 해서 대사를 놓쳤으면 티라도 내질 말아야지.”
“죄송합니다.”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부러지는 게 샤프심이었다. 단단해 보여도 몹시 얇은 나약함을 지닌 그것은 하진과 어딘가 닮아있었다.
“아이돌 출신이라 이래? 뭐, 돌아갈 곳 있으니까 연기 그냥 엔간하게 하면 되겠다 싶어?”
“아니요. 죄송합니다.”
“아이돌 끝물에서 연기시켜주면 고마운 줄 알고 노력하세요.”
도현의 신경이 온전히 하진을 향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하진이 심히 거슬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쾌한 건, 끝물이라는 표현이었다. 박하진이 끝물? 현재 고정 광고만 3개인 박하진이 끝물이면, 누가 제대로 된 물이지? 뭘 알고서나 지껄이는 소린지.
뚝-. 부러진 샤프심 파편이 대본 위에 흔적을 남겼다. 지저분했다. 애초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벌어지고 후회하는 기분이 가장 엿 같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윽고 도현이 쥐고 있던 샤프를 테이블 위에 던지려던 찰나였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장인수는 그 말을 남기곤 바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여희나가 따라나섬으로써 얼어붙은 분위기에 자그마한 숨통이 열렸다. 그러나 박하진만은 아직도 숨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터벅터벅, 도현이 고까운 발걸음으로 하진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하진의 손목을 억지로 쥐고 일으켰다.
“뭐야.”
“나가서 얘기 좀 해.”
“놔라. 여기 보는 눈 많다.”
“그니까. 보는 눈 많은데 업혀 나가기 싫으면 곱게 따라오라고.”
무지막지하게 붙잡힌 손목이 이끄는 대로, 하진은 맥없이 도현을 따라 나갔다. 주변의 시선을 피하면서 도현이 멈춘 곳은 비상계단이었다. 조금만 크게 얘기해도 공간이 울리는 이 공간을 썩 선호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마땅히 대화할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툭, 도현이 하진의 손목을 놓자 아래로 떨궈지는 손은 심히 나약했다. 도현은 하진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맞닿을 정도로.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시선은 닿지 못했다. 하진이 자꾸만 시선을 어긋 내는 탓이었다.
“넌 나한테는 잘만 지랄하면서 왜 찍소리를 못하냐.”
“맞는 말이었잖아. 대사 놓친 거 맞고, 아이돌 출신인 거 맞고. 뭐, 특별히 틀린 부분도 없었어.”
도현은 제 앞에 서 있는 게 박하진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만큼 방금의 대처는 박하진스럽지 않은 행동이었다. 박하진이었다면, 거기서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연기와 아이돌 사이의 그 말도 안 되는 상관관계에 대해서 따졌어야 한다. 그런데 왜 움츠러들어서는 본인답지 않게 비난을 감내하려 하는 건데. 도대체 왜. 하진의 그런 모습이 도리어 도현의 분노를 돋우었다.
“각각은 맞아도 관계가 틀렸잖아. 대사 놓친 거랑 아이돌 출신이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도현이 다소 격한 말투로 하진을 몰아붙였다. 시선을 피하던 하진이 드디어 매서운 기색으로 눈을 맞췄다. 삐뚤어진 입꼬리가 상당한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이내 버석한 비웃음이 하진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너야말로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길래 이래?”
“뭐?”
“아니, 웃기잖아. 욕먹은 건 난데, 왜 네가 지랄이냐고.”
“넌 이게 지금 지랄하는 거로 보여?”
“그럼 뭔데.”
하진은 꾹 입을 다물었다. 원하는 대답이 뭔지 알지만, 제게는 절대 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요즘 좀 붙어 다녔다고, 저 혼자 예전처럼 친구라도 된 양 굴었던 모양이다. 그게 박하진 입장에서는 심히 마뜩잖았는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일순 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씨발, 됐다. 널 걱정한 내가 등신이지.”
짜증 나고, 화나고. 밉고, 억울하고. 그런 격정적인 감정들이 뒤엉켜 결국엔 도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넌 늘 이랬어. 뒤에서 챙겨주고, 앞에선 입 다물고.”
“…….”
“존나 비겁하게.”
하진이 맹렬하게 도현을 쏘아붙였다. 그 틈으로 도현은 보았다. 하진의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상처로 얼룩진 것을. 박하진을 걱정한 게 잘못이었다. 아니, 애초에 박하진과 다시 엮이기 시작한 게 잘못이었나.
“그래. 다 내 잘못이야.”
“…….”
“예전도, 지금도. 그냥 전부 다.”
도현이 내뱉은 건, 이제까지의 허탈함이었다.
***
대본 리딩은 모두의 우려와 달리 무사히 끝이 났고, 하진 또한 캐릭터에 무난히 스며들어 장 감독의 오케이를 받아냈다. 이어 하진은 복잡할 줄 알았던 마음을 생각보다 깨끗하게 정리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휘둘리고,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던 관계를 다시 한번 되짚으니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엮이면 엮일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관계. 그럴 바엔 차라리 누구 한 사람이 먼저 상처받고 끝나는 게 마음 편한 관계였다. 최근엔 어쩔 수 없이 자주 만나다 보니 그걸 잊은 모양인데, 아까의 대화로 서로 상기됐으리라 생각한다.
이대로 오늘 하루가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사회생활은 하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 감독님, 건배사 한 번 하시죠.”
장인수 감독은 어찌나 동료애가 깊은지 스태프들이 다 모인 김에 얼굴 익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난리를 피워댔다. 그렇게 그 망할 동료애 때문에 수십 명의 스태프가 퇴근도 못 하고 술자리에 끌려와 있는 참이었다. 거기엔 물론 하진과 도현도 포함이었고.
“너와 나의 거리, 큰 탈 없이 무사히 촬영 마치길 바랍니다!”
하진은 장 감독의 건배사에 의무적으로 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분명 배우들, 스태프들 합쳐서 몇십 명은 넘는 무리 속에 있는데도 왠지 혼자만 이질적인, 그런 찝찝한 기분이 든다. 스태프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고, 진짜 장 감독 말대로 연기 못하는 아이돌이라 그런가. 하진이 벌컥, 소맥 한 잔을 때려 부었다.
“형, 술 잘 마셔요?”
그런 하진을 보며 강운은 왼손으로 턱을 괸 채, 하진 쪽으로 몸을 틀며 물었다. 몹시 노골적인 호감의 표시. 이전 같았으면 약간 부담스러웠을 그의 행동이 동떨어진 기분을 느끼고 있던 지금은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하진이 그 호감을 받아들였다.
“못 하진 않아. 너는?”
사실 잘 마셔. 주량 6병이야.
“음, 형보다는 못 마실 것 같아요.”
“나 술 마시는 거 본 적 없잖아?”
내숭 조금 부렸는데 혹시 들켰나. 하진이 머쓱하게 웃자 강운이 하진의 빈 잔을 채우며 장난스레 말한다.
“제가 촉이 좋거든요. 형은 딱, 주당이라는 촉이 와요.”
“푸흐, 그게 뭐야.”
짠-. 강운이 하진의 잔과 제 잔을 부딪친 뒤,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을 잘 못 마시나. 이강운은 곧바로 코끝을 찡그렸다. 그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맞다. 나 저번보다 몸 좋아진 것 같지 않아?”
“복싱 열심히 하나 보네요?”
“응. 한번 만져 볼래?”
하진이 근육에 힘을 주며 팔뚝을 강운 앞으로 내밀었다. 스웨터 위로 팔근육이 살짝 도드라진 것도 같다. 물론 이강운 팔뚝에 비하면, 몹시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이어서 강운이 손을 뻗어 하진의 팔뚝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비집고, 누군가 하진을 잡아당겼다. 하진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뚱했다.
범인은 지수연이었다.
“야, 박하진.”
하진의 귀를 제 입술 앞까지 끄집어 당긴 수연이 소곤소곤 질문했다.
“너 우 대표랑 싸웠냐?”
“질문이 잘못된 거 같은데. 우린 안 싸운 적이 없어.”
하진의 대답을 곰곰이 되새김질하던 수연이 풀리지 않는 의문에 흠, 소리를 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라 하진이 다시 고개를 돌리려 할 때, 대뜸 수연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사귀어?”
켁! 아니, 미친 거 아니야? 저런 소리를 할 거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지. 하마터면 하진은 물 마시다가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하진이 눈꼬리에 눈물을 단 채로 수연을 째려봤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니. 우 대표가 널 지나치게 노려보고 있거든?”
“근데?”
“근데 너만 노려보는 게 아니라 네 옆에 이강운도 같이 노려보고 있어.”
수연이 가리킨 곳은 하진의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줄곧 저를 바라보고 있던 건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도현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노려보고 있다기엔 다소 무심한 시선은 하진과 짧게 마찰을 일으킨 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나도 몰….”
하진은 대답을 끝맺지 못했다. 강제적으로 수연을 빼앗긴 탓이었다.
“수연 씨, 뭐 하고 있어. 일어나, 일어나.”
순식간에 하진의 양쪽이 비어버렸다. 분명 제 옆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어느샌가 수연은 강운과 나란히 테이블 중앙에 선 채였다.
“자자, 우리 주연 배우 지수연 씨, 이강운 씨 러브샷 한 번 하죠!”
술자리의 꼰대 문화가 시작됐다. 곤란한 표정의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지 사람들은 환호성으로 둘을 맞이했다. 하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작하면서 두 사람에게 애도를 표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연기자는 연기자인지 두 사람은 싫은 내색 없이 러브샷을 받아들였다. 곧 두 사람의 러브샷이 끝나자 다음 표적이 하진으로 변경됐다.
“박하진 씨도 러브샷 해야 하는데 짝이 없네.”
헤드샷을 날려버릴까.
“아하하. 전 조연이니까 괜찮아요.”
“가만있어 봐. 박하진 씨랑 러브샷 할 사람!”
그놈의 러브샷, 러브샷! 동방예의지국, 노인 공경이고 뭐고 누가 저 꼰대 작가 좀 처리해줬으면 좋겠다. 당사자의 동의 없는 스킨십 강요는 엄연한 범죄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게 문제다. 애써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하진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가 할게요.”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강운이었다. 그의 뜬금없는 발언은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 이목이라는 게, 좋은 의미보다는 약간 ‘쟤가 뭐라는 거야?’식의 의아함에서 비롯된 거였다. 보통 남남 커플의 러브샷은 벌칙인 경우가 많은데, 그걸 이강운이 자처한 거나 다름없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괜히 난처해진 하진이 복화술로 강운에게 말했다.
“분위기 어쩔 거야.”
“저도 이럴 줄은 몰랐어요.”
“빨리 농담이라고 해.”
“농담은 아닌데.”
강운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하진의 손을 그러쥐었다. 얼떨결에 만세 하듯 손이 들린 하진은 갑자기 제게로 꽂히는 시선에 귀가 뜨거워졌다. 그 시선 중, 유독 따끔거리는 시선은 지수연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우도현일 테다.
한 새끼는 저를 쪽팔려 뒤지게 할 셈이고, 다른 한 새끼는 저를 불태워 뒤지게 할 셈인가 보다. 그냥, 둘 다 뒤져버렸으면 좋겠네. 이런 하진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강운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호랑 현이랑 친구니까 실제로도 친구 하려고요.”
누군지 모를 이의 함성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띄워졌다. 그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강운은 망설임 없이 잡고 있던 하진의 손을 놓은 뒤 팔과 팔을 얽었다. 하진의 공허했던 손에 소주잔이 들렸다.
후-! 아주 동물원의 원숭이가 따로 없다. 나중에 원숭이 꼬리로 싸대기라도 맞아봐야 이 뭣 같은 기분을 이해하려나. 러브샷이고 뭐고, 하진은 타들어 가는 목에 얼른 술을 들이켜고 싶을 뿐이었다.
“오, 원샷!”
짝짝짝. 하진과 강운의 적극적인 러브샷에 스태프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기분은 개 같았지만, 그래도 하진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다 비운 소주잔을 머리 위에 터는 행동까지 했다. 그에 무르익은 분위기는 또다시 다음 목표물을 정했고, 집중이 그쪽으로 쏠려서야 하진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진 씨, 괜찮아?”
앉자마자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하진에게 장 감독이 다가와 물었다. 어느새 옆 테이블로 가 얘기 중인 지수연의 빈자리를 장인수가 차지한 것이었다. 하진이 애써 미소를 띠운 채 답했다.
“그럼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다행이네. 아, 참. 아까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지?”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장인수에 하진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촬영 중이던 카메라 끊고 온 스태프들 앞에서 면박 주던 게 고작 한두 시간 전이면서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건가. 그러나 하진의 이런 고민은 일순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장인수의 손이 느리게 하진의 등을 훑어내렸기 때문이다. 와, 이거 최악인데.
“미안했어.”
사과를 가장한 은근한 스킨십이 이어졌다. 처음엔 등, 그러다 서서히 위로 올라가 목덜미, 이젠 머리카락을 비비적대는 손길은 의도가 너무 뻔해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었다. 피부조직 하나하나 쭈뼛 선 하진이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이걸 참아, 말아. 선택의 기로에 선 하진이었다.
“감독님.”
“응?”
“저 머리 안 감았어요.”
“…응?”
“염색을 어제 해서 머리 못 감았거든요.”
참아 봤자 병만 나지. 하진이 싱그럽게 웃으며 장인수의 손목을 붙들었다.
“냄새나니까 안 만지는 게 좋아요.”
그리곤 톡, 던지듯 떼어내니 감독의 손이 맥없이 떨어진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장 감독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싫다고 했으면 권위로 억누르려 했고, 무덤덤했으면 계속 이어나갔을 텐데 이건 배려를 해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참 애매했다.
“하하.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고, 고맙네.”
“뭘요. 아. 저 잠깐 전화가 와서.”
하진이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가리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누가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했을까, 고맙게. 기쁜 마음으로 액정을 본 하진의 입꼬리가 금세 내려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도현이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도현의 귓가에 통화 거절 음성이 들려왔다. 이내 도현은 쓸쓸히 의자로부터 떼어낸 궁둥이를 다시 붙였다.
***
뒤풀이는 꽤 길게 이어졌다. 다들 장 감독 눈치 보느라 쌓인 게 있는지 감독 몰래 불만을 토로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그 긴 시간 동안 하진은 지수연과 여희나에 대해 욕하기도 했고, 이강운과 플러팅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대놓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우도현을 무시하기도 했다. 가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술을 입에 털어 넣던 우도현은 옆에서 말리는 사람 하나 없이 통제 불가능이었다.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우도현은 알쓰였다. 알코올 쓰레기.
“각자 옆자리 사람 좀 챙기고!”
드라마 뒤풀이는 처음이었는데 원래 다들 이렇게 널브러질 정도로 마시나 싶었다. 그 와중에 멀쩡한 왕 작가가 쓰러진 사람들을 챙기며 큰소리로 외쳤고, 슬슬 정리하는 분위기에 하진도 일어났다. 계속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그런가.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서 뒷걸음질을 친 하진이 뒤에 있던 막내 작가와 부딪혔다.
“우 대표님, 많이 취하셨네….”
등 뒤에서 막내 작가가 구시렁거렸다. 그냥 무시하자. 우도현이 취하든 말든, 길바닥에 버려지든 말든 알 바 아니니까. 물론 지난번 동창회에서 저를 구해줬지만…. 그래서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말자. 박하진 뻔뻔한 거,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그냥 모르는 척하면 돼. 그렇게 부지런히 합리화를 마친 하진이 발을 뗄 무렵이었다.
“야야, 여기 먼저!”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막내 작가를 다급하게 불렀고, 그에 잠깐 망설이던 작가가 그대로 우도현을 놔버렸다. 삽시간에 우도현은 어디에도 도움받지 못하는 짐짝이 되었다. 이건 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라는 신의 뜻인가 싶다. 하진이 도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얼씨구? 아주 지랄한다.”
보고 있자니 욕이 저절로 나왔다. 산만한 몸뚱아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해 의자에 거의 쓰러지듯 기대어 있던 도현은 이제 곧 식당 바닥과 엉덩이를 비빌 것 같았다. 신이 노리신 게 아무래도 이거인 모양이다. 이렇게 위태로운 사람을 모르는 척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귀에서 자꾸만 소리가 났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딱 은혜 갚는 까치처럼. 하진은 아까 그 막내 작가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 대표는 제가 같이 대리 불러서 갈게요.”
“아, 두 분이 친구시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혼자 많이 곤란했던 건지 막내 작가가 하진의 말에 화색을 띄웠다. 혹시 하진이 마음을 바꿀까 싶어 그녀는 곧바로 그 무거운 도현을 들어 하진에게 던져버렸다. 얼떨결에 돌덩이를 안게 된 하진은 주춤주춤하며 간신히 음식점을 나왔다. 우도현, 이 새끼 운동 좀 줄여야 하는 거 아니야? 쓸데없이 덩치만 더럽게 크네.
“야, 똑바로 좀 서 봐.”
“흐흐.”
“이 미친놈이 누가 귀에 바람 넣으래.”
우도현의 등을 세게 내려쳤다. 말이고 행동이고 곱게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하진이 낑낑대며 도현을 부축하고 있는 동안 뒤에서 조용히 강운이 다가왔다. 강운은 도현의 왼팔을 거두어 본인의 어깨에 걸쳤다.
“도와줄까요?”
“어어, 고마워. 일단 대리 좀 불러줘.”
하진의 눈엔 강운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본인을 도와주러 꾸역꾸역 나온 게 어딘가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솔직히 우도현만 아니었으면, 오늘만큼은 강운과 질펀하게 엮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집으로 갈 거예요?”
적당히 오른 취기와 서로를 향한 노골적인 호감, 거기다가 택시 잡기도 힘든 늦은 밤.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이 상황 속에서,
“아으. 2차! 2차 갑시드아!”
진짜 딱 우도현만 사라지면 되는데, 씨팔. 뻗치는 열을 참아내며 하진은 나불거리는 도현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2차는 너나 가세요, 아저씨!
“5분 내로 오신다네요.”
“아, 살았다.”
“형은 어디로 가요? 뒤에 스케줄 있어요?”
“없지. 집으로 갈 거야.”
“우리 집 근천데.”
강운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하진의 머릿속엔 비상이 걸렸다. 이거 백 프로 플러팅이잖아! 어떡하지? 오늘이 역시 날인가? 우도현 그냥 길바닥에 버려놓고, 이강운 집으로 직행할까? 갖은 악마의 속삭임이 하진의 귓가를 맴돌 때였다.
“집? 지입? 조아 가보자고!”
씨발. 역시 신은 우도현 편인가 보다. 이 새끼, 뭐 알고 이러는 거 아니야? 어떻게 타이밍이 이렇게 기가 막혀? 하진이 도현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툭. 도현의 머리가 하진의 어깨에 떨어졌다. 저 머리통을 갈겨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하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울며 겨자 먹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오늘은 보다시피 이 새… 아니, 이 친구를 데려다줘야 할 것 같네.”
“그래요, 그럼.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어쩜 저렇게 매너까지 두루 갖췄을까. 하진은 강운의 배려에 또 한 번 호감을 느꼈다. 도현을 사이에 두고 하진과 강운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대리기사님이 도착해 둘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 하진과 강운의 서로를 향한 플러팅은 계속되었다.
“연락할게요, 형.”
차 문을 닫아주면서 강운이 말했다. 그에 하진이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고, 차는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 왜 이렇게 힘들지. 이제 좀 눈을 감으려는 하진에게 기사님이 묻는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어, 잠시만요.”
망할. 우도현 집을 모른다. 하진이 도현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러나 도현은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야, 집 어디야.”
제 어깨에 완전히 늘어진 우도현을 열심히 흔들어봐도 대답은커녕 숨소리도 안 난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하진은 대리기사님께 내비게이션 기록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기록이 아예 없는데요?”
“아, 그래요? 아씨, 어떡하지.”
이 와중에 제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리는 도현을 보자 꿀밤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우도현의 코트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아낸 하진이 지문인식을 풀고, 최근 통화목록을 열었다. 김 비서님, 강준수 팀장, 변 기사. 죄다 회사 관련 사람들뿐인 목록. 그 사이에서 하진은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박하진]
그게 뭐라고 이토록 낯선 기분이 드는지. 우리가 번호를 저장해놓는 사이였던가. 홀린 듯이 그 이름을 누르니 전송하지 않은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쓰다만 메시지를 하진이 몇 번이고 읽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하진은 이내 잡념을 털어버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W 엔터테인먼트로 가주세요.”
[야. 내가 미안해. 그렇다고 이강운한테 가는 건 아니지. 걔를 얼마나 봤다고 믿어? 너는 왜 나는 안 믿으면서 남은 그렇게 잘 믿냐고. 전화 좀 받]
끊어진 메시지에 눌러 담긴 감정은 원망인 것 같았다. 왜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갔냐는 정도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날짜를 확인해보니 패션위크 때였다. 그때, 우도현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아마 그 후에 메시지를 보내려 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보내려던 게 맞나. 이 정도면 그냥 본인 마음을 늘어뜨려 놓은 수준에 불과했다.
박하진이 볼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우도현의 날 것 그대로의 마음. 그것이 잔잔했던 하진의 마음에 돌을 던졌다. 하지만 뒤이어 도현의 핸드폰에서 울린 진동은 그것을 깊숙이 가라앉게 했다. 그와 함께 액정에 띄워진 이름이 하진을 또다시 과거로 잠식시켰다.
“미안한데 나 이제 아무도 안 믿어.”
입술 새로 작게 중얼거린 하진은 곧바로 도현의 핸드폰 속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전화번호부터 최근 통화기록까지 모두. 물론 도현이 쓰다 만 메시지도 포함이었다.
***
“이봐요!”
도현은 저를 깨우는 손길에 입술을 우물거렸다. 볼뿐만 아니라 온몸이 추위에 경직된 듯,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내리쬐는 태양이 지금이 아침인 것을 알려줬다. 커튼을 안 쳤는지 직사광선이 눈을 찔러댔지만, 곧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제 보일러 안 틀고 잤나. 왜 이렇게 춥지. 도현이 이불 속에서 손을 빼 옆을 더듬거렸다. 핸드폰을 찾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집히는 것은 웬 축축하고 차가운 것들뿐이었다. 도현의 신경이 곤두섰다.
“날도 추운데 이런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가요! 일어나보세요!”
…이런 곳? 이런 곳이 어디….
“으악!”
현실을 자각한 도현이 냅다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자신이 누워있는 이곳은 회사 옆 잔디였으며, 지금 자신이 덮고 있는 것은 차에 처박아뒀던 캠핑용 침낭이었다. 이 상황에서 욕을 내뱉지 않은 게 대단했다.
미친. 돌겠네, 진짜. 자신을 깨운 경비실장님과 눈이 마주친 도현이 얼른 얼굴을 가렸다.
“…혹시 대표님?”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도현이 멋쩍게 손바닥을 내렸다. 그는 제 상사의 이런 추한 꼴을 보고도 믿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도현의 몸을 수치스러움이 짓눌렀다. 상체를 일으키니 우수수, 낙엽이 흩뿌려졌다. 침낭 위에 낙엽을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씨발, 데코레이션이야 뭐야.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제 주위에 딱 한 사람뿐이라, 도현이 어금니를 빠득, 물었다.
11월에 사람을 밖에 재워놓고 가다니. 아무리 박하진이라도 이런 짓은 너무 한 거 아닌가 싶다. 도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덕분에 골이 울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입술을 다물어 간신히 토를 막았다. 그 대신 콧물이 주륵 흘렀다
아주 가지가지 한다, 씨발.
“지금 몇 신가요.”
“8시 30분입니다. 곧 출근 시간인데 직원들이 보기라도 하면…. 이미 몇몇 분은 보셨지만요.”
“하, 실장님.”
“네, 대표님.”
“지금 본 거 비밀입니다. 제발요.”
비밀 유지 각서라도 쓸까, 아주 잠시 고민한 도현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딴 거 쓸 시간에 여기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우도현 체면 진짜 말이 아니다. 주섬주섬 침낭을 접으니 옆에서 경비실장님이 조용히 손을 거들었다. 그럴수록 창피함을 견뎌내는 건 도현의 몫이었다.
둘둘 만 침낭을 어깨에 들춰 멘 도현이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무거운 침낭에 짜증이 저절로 솟구쳤다. 힘겹게 침낭을 트렁크에 쑤셔 넣고 차에 올라탔다. 히터를 틀면서 어제의 일을 되짚어 보다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터라 도현이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김 비서님. 어제 저 끝까지 있었어요?”
-저야 모르죠. 중간에 저보고 가라고 하셨잖습니까. 설마 기억 안 나세요?
“네. 설마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럼 누가 데려다줬는지는 아세요?”
-박하진 씨가 저한테 문자 남기셨어요. 대표님 데려다줬다고.
이렇게 데려다줬는지는 아마 모를 거다. 아니, 몰라야 한다.
“김 비서님. 저 일이 생겨서 딱 1시간만 늦게 출근할게요. 급한 업무 처리 좀 해주세요.”
-네. 아, 참. 회사 앞에 어떤 미친놈이 자고 있더라고요. 괜히 다가가지 마시고 조심히 오세요.
네, 그 미친놈이 바로 접니다-.
도현은 차마 목구멍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백미러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도현이 꾀죄죄한 몰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제는 확실히 주량을 넘겼다. 어디서부터 핀트가 나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박하진과 이강운이 러브샷을 한 뒤로 필름이 끊긴 것을 보면 그게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박하진이 사용한 콘돔도 봤는데 러브샷이 뭔 대수라고, 그렇게 심사가 뒤틀렸는지 모르겠다. 저한테는 걱정도 못 하게 하면서 금세 이강운이랑 붙어먹는 꼴이 같잖아서? 저한테는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면서 이강운한테는 생글생글, 웃는 낯짝이 꼴사나워서? 뭐가 됐든, 박하진과 이강운이 같이 있는 게 눈깔 뒤집힐 정도로 싫었던 건 맞다.
도현이 핸들에 늘어진 채로 하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통화목록을 들어갔다. 박하진, 박하진…. 스크롤을 계속해서 내리는데도 박하진이 없었다. 연락처에 박하진을 검색했다. 역시나 없었다. 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제 동의도 없이 핸드폰에서 박하진이란 존재를 지워버린 모양이다. 갑작스레 덮쳐온 울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납게 구겨진 얼굴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안 한다. 수백 개가 넘는 연락처 중 박하진, 딱 한 명이 사라진 것뿐인데 그 한 명이 전부였던 양, 연락처가 돌연 제 기능을 잃은 듯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전화 안 하는 사이가 아니라, 전화 못 하는 사이. 박하진과는 원래 그런 사이였는데 잠시 착각한 거다. 혹시나 예전처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기대를 한 거다. 이를 일찌감치 알았는지 하진은 제 착각과 기대를 산산조각 내었다.
근 한 달간의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펑펑, 도현의 머리 위에서 터져나갔다. 잡으려 해봐도 거품은 손가락이 닿자마자 그대로 터져 없어졌다. 입술 새로 허탈한 공기가 빠져나왔다. 그 숨에 섞여 박하진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 2권에서 계속 -
낫 마이 프렌드(Not My Friend)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