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잽(Jab)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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잽(Jab)

“이번 FA에 나온 연예인은 총 3명으로, 저희 쪽에선 배우 이강운과 모델 최윤조를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최윤조? 회의 자료를 한 장씩 넘기던 도현이 이강운의 필모그래피 뒤로 나타난 최윤조의 사진에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또 최윤조다. 그놈의 최윤조, 최윤조! 박하진만큼이나 듣기 싫은 그 이름에 도현의 얼굴이 굳자 직원들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일하게 이 회사에서 도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준수 팀장이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배우 이강운은 젠틀한 마스크를 바탕으로 최근 출연한 드라마들이 모두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전 소속사가 일을 못 했던 건지, 본인 의지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미디어 노출이 적어 아직 대중적이지 않은 게 흠이긴 하지만요.”

빔 프로젝터를 통해 크게 띄워진 이강운은 흑발이 잘 어울리는 단정한 느낌의 배우였다. 어른과 소년이 공존하는 얼굴이 그의 매력을 한껏 높여주는 듯했다. 그에 반해, 최윤조는 좀 속된 말로 날 티 나게 생겼다고나 할까. 절대 박하진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진짜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에 그랬다.

“아무래도 잠재력으론 이강운보다는 최윤조가 더 괜찮습니다. 최윤조는 저희가 처음부터 키워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예능 쪽으로 넓히기도 쉽고, 연기도 웹드라마부터 시작하면 충분히 정극까지 나갈 수 있어 보입니다.”

“생긴 게 양아치같이 생겼네요.”

“…네?”

“…자, 잘생겼다고요.”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은 얼떨결에 대표의 멋의 기준을 알게 되었다. 양아치같이 생긴 사람을 좋아하시는구나. 메모, 메모.

“사생활은요? 엄청 문란할 것 같은데. 막 클럽 다니고, 밤의 황제처럼….”

제 대표의 취향 리스트를 적던 손들은 도현이 말을 멈추자 일제히 멈춰졌다. 딱 문란까지 적어놨다. 문란한 게 취향이신 건가. 뒷말을 듣기 위해 직원들이 도현을 힐끗거렸다.

반면 그 시선을 질타로 느낀 도현은 큼큼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잠시 이곳이 회의 자리라는 것을 망각하곤 주둥아리가 멋대로 최윤조를 험담해버렸다. 일에 사적인 감정을 끌어들여선 안 되는 건데.

…응? 근데 무슨 사적인 감정이 있지? 최윤조가 제게 무슨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싫은지 모르겠다. 애새끼 같은 얼굴? 별로지. 까불거리는 목소리? 역시 별로지. 빨간 머리? 아, 이거네. 머리가 빨간색인 거. 그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빨간색을 유독 싫어했으니까. 음. 일리 있어. 제멋대로 결론 내린 도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카디건이 빨간색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하하. 워낙 잘생겨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겁니다.”

“최윤조는 꽤 건전한 것 같습니다. SNS도 다 동성 친구들하고만 하는 것 같고요.”

게이니까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거겠죠-.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도현이 꿀떡, 넘겨버렸다.

“오히려 사생활은 이강운 쪽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왜요?”

“알려진 게 없으니까요. 본인 SNS도 안 하고, 목격담 같은 것도 별로 없고. 사람이 너무 번듯하면 의심스럽기 마련이죠.”

“이강운 나이가 몇이죠?”

“스물여섯입니다.”

흠. 나이 스물여섯인 젊은 배우가 SNS를 안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일도 아니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사생활 공개를 극도로 꺼리는 타입인데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본래 성격 때문에, 다른 하나는 공개하기엔 사생활이 너무 난잡해서.

“아직 계약까지 시간 좀 있죠?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도현이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네, 대표님.”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칩시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성난 얼굴의 준수가 도현의 뒤를 따랐다. 아까도 말했듯이 W 엔터 내에서 유일하게 우도현 대표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강준수였다. 도현의 유학 시절 친구이자 무려 아이비리그를 나온 준수이니 그럴 만도.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강준수 팀장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 것이 중요했다.

“대표님, 드릴 말씀 있습니다.”

“뭔데요?”

“여기선 말하기 곤란합니다. 당신의 난잡한 사생활에 관련된 내용이라.”

준수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가 내뱉은 말에는 뼈가 가득했다. 그 분위기에서 도현은 약간의 살기를 엿본 것 같았다. 도현이 김 비서에게 ‘제가 뭘 잘못했나요?’라고 눈짓했지만, 김 비서는 ‘글쎄요. 잘못하시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요.’라며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이 회사는 어찌 된 게, 대표를 존중하는 사람이 없다고 속으로만 구시렁대던 도현은 묵묵히 대표실로 올라갔다.

“차 준비해드릴까요?”

“냉수요. 전 벌써 목이 타서요.”

김 비서의 물음에 준수가 “얼음 가득!”을 강조하며 대답했다.

“아, 저도요.”

대표실 입구를 열어주는 김 비서에게 도현 또한, 냉수를 부탁하곤 중앙에 놓인 검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뒤이어 김 비서가 테이블에 냉수 두 컵을 올려놓고 다시 나갈 때까지 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대표가 팀장 눈치를 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대표님.”

그 침묵을 깨고 준수가 진지한 어투로 도현을 불렀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수는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냉수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도현은 괜히 준수를 따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제 앞의 컵을 쥐었다. 그러나, 미처 들지는 못한 상태에서 준수가 질문을 던졌다.

“여희나랑 무슨 사이세요?”

“…예?”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으면 무릎에 대고 있던 팔꿈치가 어긋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이런 행동을 보일 만큼 도현은 무척이나 어이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사이냐고 물으니까.

“찌라시 돕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알 리 없던 준수는 도현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이를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계속 쏘아붙였다.

“W 엔터 우도현 대표랑 배우 여희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미친.”

“그치? 미친 거지? 대표 취임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스캔들에 휘말려? 그것도 대표가 다른 회사 연예인이랑? 어? 어어?!”

이성을 잃은 준수가 존댓말을 집어치우고 반말로 도현을 몰아세웠다. 멱살만 잡지 않았을 뿐이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도현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덕분에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현은 일단 항복을 외쳤다.

“아, 아니야. 파티에서 한번 말 섞은 게 다야.”

박하진한테 찌라시 돈다고 거짓말한 게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 건가 싶었다. 양손을 들고 부인했지만, 강준수는 믿지 않는 눈치다. 준수의 두 눈엔 원망이 가득했다.

“아, 진짜 아니라니까? 그럼 내가 파티에서 말 섞은 여자가 몇 명인데 그 여자들이랑 다 사귀는 거냐?”

“이 친구, 아주 큰 일 날 친구네. 너 도대체 몇 명을 만나는 거야!”

“글쎄, 아니라니까!”

도통 말귀를 못 알아먹는 준수에 도현이 언성을 높였다. 연예계 종사자라 찌라시에 민감한 건 알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말해도 믿지를 않으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도현의 호통에 준수가 의심의 눈초리를 살짝 거두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도현이 변명을 덧붙였다.

“이건 진짜 억울하다. 그리고 내가 왜 여자만 사귄다고 생각해? 아니, 막말로 한서빈이랑도 얘기했지. 박하진이랑은 심지어 어깨동무까지 했는데 그 새끼들이랑도 사귄다고 하지, 왜.”

“…….”

“…….”

“…….”

“하, 씨발. 나 지금 진짜 막말했구나.”

억울함을 토로하던 도현은 순간 내려앉은 침묵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실언했다. 그래, 사람이 너무 억울하다 보니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나온 거다. 단지 그뿐인데 시종일관 못마땅한 얼굴로 저를 보던 강준수가 갑자기 자비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게 상당히 꼴불견이었다.

“난 널 존중해, 친구야.”

“아, 미친 새끼 뭐라는 거야. 아무튼, 여희나랑 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고등학교 선후배 정도라고.”

“그럼 됐어. 난 또 찌라시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사실인 줄 알았지.”

단호한 도현의 대답에 그제야 마음을 놓은 준수가 소파에 널브러졌다. 아직까지 찌라시니 굳이 대응할 필요는 없겠지. 준수가 핸드폰에 선후배 사이를 메모했다. 그러다 문득, 아침부터 기자들에게 받은 몇 개의 메일 내용이 떠올라 금세 얼굴을 굳혔다.

“맞다. 박하진 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코트는 또 뭐야?”

“코트를 네가 어떻게 알아?”

“사진 못 봤냐?”

도현의 찌푸려진 미간은 펴질 틈이 없었다. 여희나 다음엔 박하진인가. 말하기도 지친다는 듯 손만 내미는 도현에게 준수가 본인의 핸드폰을 넘겼다. 뜬금없이 무슨 사진이야. 구시렁대며 핸드폰을 받아든 도현이 사진 속 코트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 속 남자에게로 시선을 박았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 그는 일부러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 명품 코트가 잘 나오도록 각도를 조절해 찍은 듯했다. 그리고 그 명품 코트는, 도현의 눈에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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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tmelody_jin 오늘 낮 12시, 하하호호 스페셜 DJ, 하디.

#라디오출근길 #하하호호 #많관부 #코트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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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

박하진이었다. 하진은 해시태그로 친절하게 코트와 W를 언급했다.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더 많은 관심을 가지도록. 그리고 딱 한 사람이 이 글을 보고 열 받도록. 대성공이었다. 도현은 박하진, 이 또라이가 이번엔 무슨 생각인지를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했고,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도현이 순간 손에 들린 핸드폰의 명의자가 준수라는 것을 망각하고는 집어 던지려 했다. 준수가 화들짝 놀라 큰소리로 할부를 외치지 않았더라면, 이미 핸드폰은 저세상으로 갔을지도.

“강 팀장. 이거 내가 준 거 아니고 박하진이 뺏어간 겁니다.”

코트의 내막을 아는 도현이 괜히 찔려서 준수에 대한 호칭을 강 팀장으로 변경했다. 차마 성희롱 값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대강 둘러대니 맹렬하게 도현을 째려보는 준수였다.

“그렇게 공식 입장 내보낼까요? 박하진 씨가 도벽이 있어서 대표님이 주무시는 사이에 코트를 훔쳤다고?”

“뭘 또 도벽에 훔친 것까지….”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진짜 그냥 가져간 건 맞으니까 사실이긴 했다. 그래도 도벽은 좀 그렇지. 도현이 말을 얼버무리자 준수는 영 탐탁지 않은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파티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난리가 나는데, 아주 한 번만 더 했다가는 대표님 게이설까지 돌겠어요.”

“…….”

“어깨동무하신 박하진 씨랑.”

강준수가 원래 말을 험하게 하는 편이 아닌데 화가 많이 나긴 했나 보다. 그 말들이 무척이나 까칠해서 도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대한 능글맞게 웃어넘기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이럴 땐, 강준수가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화를 누그러뜨리는 게 좋을 것 같다.

“하하. 강 팀장, 요새 무리했죠? 오늘은 먼저 퇴근하세요.”

“아직 5시인데요.”

“어, 아닌데? 제 눈엔 6시로 보이는데요?”

도현이 능청스럽게 말하며 준수의 등을 떠밀었다.

“수습할 게 산더민데 제가 어떻게 퇴근합니까?”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해놓을 테니 제발 가주세요.”

“정말요?”

“네. 진심입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내일 뵙겠습니다.”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의 준수가 도현에게서 제 소중한 핸드폰을 빼앗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내 준수는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퍽-. 딱딱한 문이 그대로 준수의 이마에 명중했다. 아야, 아파라. 하지만 괜찮다. 이제 퇴근인데 이 정도 아픔이 무슨 대수랴.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준수는 자신을 지나쳐 급하게 대표실로 들어가는 김 비서를 볼 때까지도, 아니 김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도 큰일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그 큰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야근을 동반한다는 것을.

아, 오늘도 야근하는 빌어먹을 세상이다.

***

[단독| 박하진♥고민채, 1군 아이돌 커플 탄생!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아, 미친. 세기말도 아니고 기사 제목을 누가 이따위로 뽑은 거야. 하진이 연예 뉴스 메인에 걸린 자신과 민채의 열애설을 클릭하며 얼굴을 구겼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사실을 인정한 ST 엔터와는 달리, W 엔터는 확인 중에 있다며 답을 미루고만 있다고. 하진이 의도한 대로였다. 하진은 7층 창문에서 ST 엔터테인먼트 앞을 점거한 기자들을 내려다보곤 픽, 웃었다.

“우리 하진이, 이제 만족하니?”

“기사 제목이 촌스러운 것만 빼고요.”

똑같은 기사를 읽고 있던 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언론사에 가이드 라인만 정해줄 게 아니라 기사 제목까지 기깔나게 뽑아줄 걸 그랬네. 태희가 하진 옆에 서서 아래를 봤다.

“기자들 많이도 왔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톱 아이돌, 박하진의 열애설이잖아요.”

그와 함께 하진은 양손을 하늘로 뻗은 채 빙그르르 돌았다. 어우, 남사스러워. 태희가 차라리 안 보고 말겠다는 의지로 두 눈을 감았다. 박하진을 케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한결같은 또라이 기질에 이젠 두손 두발 다 든 태희였다.

“그럼 이제 하기 싫은 복싱시켰다고 그만 찡얼거리는 거지?”

“아, 대표님. 내가 언제 또 찡얼거렸다고.”

“매일.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고작 도현이 엿 먹이려고?”

태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니 그래도 제 대표 눈치 본다고 하진이 조금 누그러진 톤으로 대답했다.

“뭐, 그런 것도 있고. 고민채랑 win-win 하기로 했거든요.”

“win-win의 뜻은 알고 쓰니? 이건 win-win이 아니라 lose-lose 같은데. 벌써 내 귀에 박하진 팬 떠나는 소리 들린다.”

그 소리가 태희 귀에만 들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근심 걱정이라는 건 전적으로 박하진을 소속 연예인으로 둔 서태희의 몫이었다. 세상에 본인 열애설을 본인이 터트리는 연예인이 어디 있을까 했는데 실존했다. 그것도 바로 제 눈앞에.

“에이, 대표님도. 내 찐팬들은 나 게이인 거 다 아는데, 뭘.”

“그거야 네가 하도 여자 연예인한테 관심을 안 주니까 추측만 하는 거고.”

“근데 그건 본능이라 솔직히 어쩔 수 없어요. 아니, 내 눈이 남자 아이돌한테만 가는 걸 어떡해?”

“어쩜 우리 하진이는 말 한마디를 안 지고 따박따박 대꾸할까?”

“어릴 때부터 대표님과의 대화로 다져진 혓바닥이잖아요.”

“그래. 내 새끼, 잘 컸어. 무척이나 대견하구나.”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 누구보다 하진 걱정을 하는 사람이 태희였다. 며칠 전, 파티에서 도현과 또 무슨 신경전을 벌였는지 다짜고짜 전화해서 열애설을 터트려달라던 하진을 태희는 막을 수 없었다. 박하진 고집을 꺾을 자신도 없었을뿐더러 둘 사이를 아는 사람으로서 이젠 차라리 서로 갈 데까지 가고 풀었으면 해서였다. 박하진도, 우도현도 더는 열아홉의 소년들이 아니니까.

“아무튼 조심해. 이 쇼 들키면 알지? 너 전 국민한테 사기 치는 거야.”

“그럼요. 조심할게요. 전 그럼 먼저 갑니다.”

“어차피 나랑 밥 먹을 거, 그냥 같이 나가지.”

같이 저녁 먹기로 했으면서 혼자 먼저 나간다는 하진에게 태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작은 머리로 또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아득하기만 하다. 태희의 걱정을 모르는 하진은 마냥 신이 난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거릴 뿐이었다.

“쇼에는 퍼포먼스가 빠질 수 없죠.”

저거 또 무슨 사고 치려고 하네. 태희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하진에게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이따 봬요!”

하진은 그렇게 싱그러운 끝인사를 남기며 대표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역시나 얼굴이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적당히 헝클어진 머리와 우도현이 보면 환장할 코트까지. 이 정도면 카메라 잘 받겠지. 하진이 거울에 비친 제 스타일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코트 깃을 다듬었다.

씨익. 마무리는 역시 미소 장착. 모든 준비는 끝났다.

“박하진이다!”

“박하진 씨!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하진이 회전문을 열자마자 기자들의 고함과 셔터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문 앞에 대기해있는 밴까지의 거리는 약 3M. 관심 끌기 딱 좋은 거리였다. 하진이 문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들이 몰려왔고 경호원들과의 몸싸움을 시작했다. 아, 좀 비킵시다! 비켜요! 그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오직 하진만이 유유자적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박하진 여기 있어요!”

하진이 기자들에게 대놓고 제 위치를 알려주었다. 찰칵. 찰칵.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제게 관심이 쏠린 때를 놓치지 않은 하진이 빙그레 웃으며 소리쳤다.

“기자님들, 궁금한 거 많으시죠? 제가 다 대답해드릴게요.”

“뭘 대답해준다는 거죠?”

“다요. 물어보시는 거 전부. 그러니까 일단 길 좀 비켜주세요.”

처음엔 주춤주춤하던 기자들은 어느새 모세의 기적을 연상시키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를 하진이 유유히 걸어갔다. 기자들의 반신반의한 눈은 하진이 차 문 앞에 설 때까지 쭉 이어졌다. 스륵- 차 문이 열리고 하진이 올라탔다. 기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 당했구나. 닫힌 문 너머로 드문드문 욕지거리와 함께 속았다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시는 건가요?!”

도망 아닌데. 곧바로 문이 열렸다. 마치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커튼이 촤락- 열리는 것처럼. 물론 이 연극의 주인공은 박하진이었다. 기자들 쪽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하진이 야살스레 코끝을 찡긋거렸다.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과 함께.

“지금부터 시작인데요?”

훅 불어오는 바람이 하진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은구슬처럼 반짝이는 머리칼 위로 주황빛 노을이 내려앉았다.열애설 나기, 아니 우도현 엿 먹이기 딱 좋은 날씨였다.

***

퇴근하려던 준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켜내며 어느새 대표실 소파에 앉아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열애설이 터졌다. 박하진과 고민채, 탑 아이돌 간의 열애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심지어는, 대형 기획사인 W 엔터에 아무 언질도 없이 터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은, 강준수의 퇴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과 같았다.

“기사 터지자마자 ST 엔터 측에서 인정했어. 우리 쪽은 고민채랑 연락이 안 닿아서 모르겠다고 일관 중이야.”

“우리 쪽이랑 사전에 얘기된 거야?”

“아니, 전혀. 적어도 내 선에선 아무 연락도 못 받았어. 애초에 연락이 왔으면 막았겠지.”

도현은 미간을 문지르며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뿅, 하고 도현의 머리 위로 튀어나온 하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도현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런, 씹. 도현이 그 허상을 떨쳐내려 마른세수를 했다. 늑장 대응으로 욕이라도 먹으라는 것처럼 퇴근 바로 전에 열애설을 터트리는, 참 개새끼다운 발상. 이런 깜찍한 짓을 벌일 새끼는 앞으로 보고, 뒤로 봐도 박하진밖에 없었다.

“대표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 비서가 대표실 TV를 켜고 100번 대에 처박힌 웬 듣도 보도 못한 연예 뉴스 채널을 틀었다. 그로 인해 검었던 화면 가득 박하진이 나타났다. 채널 밑에 ‘LIVE’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니 실시간인 것 같은데 뭘 찍을 게 있다고 이딴 걸 실시간으로 내보내나 싶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화면 속 박하진의 모습이 다소 특이했다. 차 문을 열어놓고는 고고한 자세를 취한 채로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는 모양새가 흡사 무슨 기자회견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 미친놈이 설마….

[어, 거기! 거기 와우 뉴스 기자님!]

[고민채 씨와의 열애 인정하신 겁니까? W 엔터 측에서는 아직 확인 중이라고 답변했는데요!]

[민채 씨와는 서로 호감을 가진 채 알아가는 중입니다. W 엔터는 음…. 다들 퇴근하신 거 아닐까요?]

설마가 사람을, 아니 우도현을 잡았다. 저 새끼, 저거 무슨 폭탄 발언을 하려고! 도현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며 쾅! 소파 손잡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아오씨!”

“Oh, no. 퇴근이라뇨…. 박하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퇴근이라니! 여기! 이렇게 멀쩡히! 회사에 처박혀 있는데!”

그리고 도현과는 조금 다른 포인트에서, 그러나 도현만큼이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준수가 절규했다.

[그 코트는 누구한테 받으신 겁니까?! W가 혹시 W 엔터 소속 고민채 씨를 말하는 건가요? 럽별그램이라고 팬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아. 확실히 말씀드리는데 럽별그램 같은 건 전혀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제 게시물은 고민채 씨와는 일절 관계없을 예정이고요. 코트는 W 엔터 우도현 대표로부터 받은 겁니다. 대표 취임 선물? 뭐 그런 거죠. 으레 친구들이 주고받는 것처럼요.]

선물? 저게 지금 말이라고! 도현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준수가 지금 자신을 향해 얼마나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지 말이다. 이유야 뻔했다.

“…대표, 이 나쁜 새끼. 나한테는 코트가 뭐야. 티셔츠 한 장도 준 적 없으면서….”

“…야, 내가 준 거 아니라니까? 뺏긴 거라고….”

아무래도 박하진이 제게 복수를 하는 모양이다. 말하는 내내 꿈틀거리는 입꼬리가 꼭 자신을 비꼬는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 저 빌어먹을 블랙 체크 코트는 박하진과 매우 잘 어울렸다. 지금 그게 할 생각인가. 도현이 인상을 구겼다. 미쳐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친구이신 우도현 대표가 부임하자마자 열애설이 터졌는데 친구에 대한 배려는 없으셨던 겁니까?]

[우리 우 대표가 응원해주더라고요.]

[그 말씀은 우도현 대표는 알고 있었다는 얘긴가요?]

[네. 저희 친구잖아요.]

티잉-! 도현이 TV를 꺼버렸다. 박하진으로 꽉 찼던 화면은 검은 배경 속에서 어느새 제각기 다른 세 사람을 담고 있었다. 대표실 전화를 대신 받는 김 비서, 언론 보도 문구를 작성 중인 강준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만히 멈춘 채, 멍한 눈동자로 화면을 응시하는 우도현.

친구라는 단어가 원래 이토록 낯선 것인가. 쿵쿵. 도현의 심장이 빠르게 내달렸다. 그 달리기의 끝에는, 열아홉의 우도현이 있었다.

이해하려 했던, 그러나 끝내 이해해줄 수 없었던.

***

“고민채.”

“네, 대표님.”

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은 제 앞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민채를 향한 채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니 그래도 고민채는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는 모양이다. 그게 잘못이란 것도 알고. 그걸 전혀 모르고 오히려 발광까지 하는 박하진과 비교하면 다행인 일이었다.

“목소리 안 들리니까 고개 들고 얘기해봐.”

도현의 말에 민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연습생 때부터 기 한번 안 죽던 녀석이 갑자기 수그러드니까 기분이 괜히 이상했다. 꼭 자신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라도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도 들었다. 이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선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었다.

“너, 박하진 좋아해?”

네? 민채의 입에서 황당한 되물음이 튀어나왔다. 대표실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왕창 깨질 것을 각오한 민채였는데, 대뜸 하진을 좋아하냐고 물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안 혼내세요?”

“혼내기 전에 물어보는 거야.”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가요?”

“어. 그러니까 대답해. 박하진 좋아해?”

왜 중요한지는 전혀 모르겠으나 저 진지한 물음에 거짓말까지 했다간 수습 불가일 것 같았다. 그에 민채가 솔직히 답했다.

“안 좋아하는데요.”

“진짜?”

“네.”

“알겠어.”

뭐지, 이 흐지부지한 마무리는? 차라리 혼나는 게 나을 정도로 제 대표의 태도가 께름칙한 민채였다.

“그게 끝이에요?”

“지금 네 입으로 가짜인 거 인정했잖아. 뭘 더 묻겠어.”

“하진 선배 좋아하냐고는 왜 물어보셨는데요?”

누굴 강하게 다그칠 만큼 모진 성격도 못 되는지라 애초에 혼내려고 부른 게 아니었다. 그저 사실관계만 확인하려고 부른 거였고, 고민채와 박하진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도현으로선 더 물어볼 것도 없는 게 당연했다.

“대표님이 선배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자꾸만 자신을 취조하는 듯한 민채의 말투에 기가 찬 도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하여간 박하진이나 고민채나 끼리끼리라고, 둘 다 이상한 놈들이다. 그냥 넘어가 준다는데 기어코 혼나야 정신을 차릴 셈인가.

“그럼 왜 물어보셨는데요?”

“그냥 네가 혹시 박하진 좋아하다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다, 됐냐?”

“저 레즈예요.”

“으응, 그래.”

“…….”

“…야, 잠깐만. 뭐?”

고민채, 얘는 무슨 숨 쉬듯이 폭탄 발언을 던지냐. 도현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정작 폭탄 던진 당사자는 덤덤하게 앞에 놓인 홍차를 마실 뿐인데 말이다. 몇 번 고민채의 말을 곱씹던 도현은 이제야 둘이 왜 이딴 열애설 쇼를 벌였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서로 비밀 지켜주려고 가짜 열애설을 퍼뜨렸다는 거지?

“세기의 커플이다, 진짜.”

도현은 진심으로 두 사람의 대담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저랑 선배는 비즈니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로한테 관심 하나도 없어요.”

민채는 마치 도현에게 변명하듯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의 결백을 밝혔다. 굳이 나한테 왜? 도현이 시큰둥하게 민채를 바라봤다. 본인과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뭐,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는데 이건 그냥 사건의 내막을 알아서 그런 거라고, 도현의 이성이 그렇게 외쳤다.

“나한텐 왜 먼저 말 안 했어. 내가 이해 못 해줄 것 같아서?”

“그건 아니고 하진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남이 이해해줄 거라고 함부로 확신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본인처럼 된대요.”

삽시간에 도현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 말은 분명 자신을 겨냥한 것일 테다. 하진은 또다시 도현을 과거로 밀어 넣으려 했다. 도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박하진처럼 되는 게 뭔데.”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관계가 됐대요, 그 사람이랑.”

“…….”

“제가 눈치가 좀 빠른 편인데 이거 대표님이랑 선배 얘기 맞죠?”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진이 내뱉은 말의 의미가, 단정 지은 서로의 관계가 너무도 선명해서 아직도 뿌옇기만 한 도현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본인마저 인정해버리면 혹여 발생할 관계 개선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런 막연한 불안감도 한몫했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직접 부딪혀보세요. 어쩌면 지금까진 도망치는 것에 모든 시간을 쓴 걸지도 모르잖아요.”

도망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단어가 도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희뿌연 그 속엔 당연하게도 열아홉의 친구 둘이 있었다.

“전 스케줄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미리 상의드리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해요.”

“그래. 공식 입장은 잘 내보냈으니까 웬만하면 열애설 관련 질문에 답하지 말고.”

“네.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인사를 마지막으로 민채가 나갔다. 텅 빈 방이 순식간에 적막으로 휩싸였다. 도현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팔목으로 눈을 가렸다. 곧바로 캄캄해진 시야가 도현을 좀 전의 그곳으로 이끌었다. 열아홉의 박하진과 우도현이 있었던 그곳엔, 두 친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재생시켰다. 연습실 문틈으로 보이던 정갈한 뒤통수. 분명히 하진이었다. 그러나 무덤덤한 어조로 내뱉는 그 말은 하진이 아니길, 도현은 못내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누나, 죄송한데요. 남자 좋아하는 건 맞는데 우도현은 안 좋아해요’

하진이 던진 작은 돌멩이가 도현의 호수를 뒤집어놨다. 아마 화가 났던 것 같다. 이유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겠다. 저 한 문장이 담고 있는 두 가지의 진실. 맞닥뜨린 진실로 인한 분노의 초점은 앞이었을까, 뒤였을까. 저게 왜 그리도 화가 났는지… 친구였던 제게 비밀을 공유하지 않아서? 아니면, 친구인 저를 좋아하지 않아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후자는 좀 등신, 쪼다 새끼처럼 유치하지 않나.

도현은 스스로 등신, 쪼다 새끼가 되고 싶진 않았다.

***

끔뻑끔뻑-. 하진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떠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제 눈을 비벼보기도 했으나 눈앞의 인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 인영을 응시하던 하진은 제 반대편이자 서 대표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그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대표님. 나랑 둘이 밥 먹기로 했잖아. 근데 얘는 뭐예요?”

“하진아, 섭섭하다. 친구끼리 얘라니.”

어이쿠! 말하는 걸 보니 그림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네. 하진이 언짢은 기색으로 인영을, 아니 도현을 바라봤다. 너랑 무슨 친구냐고 따지려다가 방금까지 우도현 엿 먹이겠다고 기자들이랑 신나게 떠들었던 자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10년 만에 가족 상봉 같고 좋다, 얘들아.”

태희는 제게 꽂힌 두 명의 눈초리가 몹시 따갑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10년 전의 추억을 들먹이려는 그녀를 하진이 제지했다. 대표님, 여기 회가 입에서 녹는다, 녹아. 하진이 태희의 앞접시에 간장 찍은 반지르르한 참치회 한 점을 올려놓았다. 태희가 젓가락을 들자 하진도 잘 까진 생새우를 집어 들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 혓바닥 위에 안착한 부드러운 생새우를 어금니를 이용해 잘 씹어 넘겨 그 환상적인 맛을 느낄 차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진은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앞으로 종종 봐요, 셋이서.”

어디서 훅하고 들어온 비린내 때문이었다. 쿨럭, 씹지 못한 새우를 뱉을 뻔했다. 콜록대는 하진의 앞으로 도현이 물컵을 밀었다. 아, 이런 게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그렇다기엔 우도현이 준 병이 너무 심각해서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을 것 같다. 종종 셋이서 보자니. 하진에게 이것보다 심한 고문은 없을 테니까.

“우리 우 대표가 드디어 마음을 열었구나?”

“대표님 말대로 10년이잖아요. 저희가 애들도 아니고, 이제 그만할 때도 됐죠.”

“이걸 어쩌냐? 난 아직도 애새낀데.”

“우 대표, 많이 먹어.”

“대표님도 많이 드세요.”

퉤. 하진은 결국 씹던 새우를 뱉어내 휴지로 꽁꽁, 감쌌다. 그 과정에서 덩달아 튀어나온 불퉁한 말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식어버린 하진의 전복죽으로 들어갔다. 와, 이런 식으로 무시한다, 이거지? 자신은 투명 인간 취급을 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도현과 태희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배알이 꼴리는 하진이었다.

“대표님.”

“응?”

“사케 시켜도 돼요?”

“되겠니?”

퉁명스러운 어투와 달리 어째 태희는 좀 미안해졌다.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얼굴에 뾰로통한 게 다 티나 나길래 좀 귀여워서 놀린 것뿐이었는데 하진이 입술까지 삐죽- 내미는 꼴이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 태희에게 하진은 더욱 불쌍함을 어필했다. 그리곤 몰래 벨을 눌렀다. 태희는 들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하진이 뭘 하려는지 가만히 지켜봤다. 곧 점원의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여기 소주 두 병 주세요.”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럼 그렇지. 박하진이 고작 이런 놀림으로 기가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을, 태희는 십 년을 넘게 봐오면서도 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 지분에 8할은 역시나 하진의 얼굴이었고.

“우리 하진이, 지 좆대로 할 거면 왜 물어봤지?”

“사케 안 된다고 해서 소주 시켰어요.”

“오, 기적의 논리구나?”

“제가 못 배워서 논리를 잘 몰라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 하진이 눈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는 이도 무장 해제시킨다는 박하진의 주무기가 나왔으니 태희는 두손 두발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주문한 소주 두 병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인원수에 맞춰 나온 세 개의 소주잔 중 하나를 제 앞으로 가져간 하진이 태희에게 눈짓하자 태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바로 옆에서 도현이 하진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하진은 도현에게 눈길 한번을 안 주며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나한테는 안 물어봐?”

“알아서 마시든가.”

“안 마실 건데.”

…이 새끼가? 저번부터 화법이 묘하게 사람 신경을 긁는다. 순간 차오른 분노에 힘을 주었더니 손가락 사이사이로 소주가 흘러넘쳤다. 도현이 강제적으로 소주병을 뺏지 않았더라면 한 병을 모조리 쏟을 기세였다. 아, 차가워. 이제야 축축함을 느낀 하진이 휴지로 소주를 닦아냈다. 이게 다 우도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진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 인해 표면장력을 동원한 소주가 찰랑댔다. 행여 또 넘칠세라 가득 채워진 잔 앞으로 얼른 입술을 가져다 댄 하진은 그대로 꿀꺽, 소주를 삼켜냈다. 크으-! 청량감이 마치 CF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진이, 예쁘지?”

“네.”

“…….”

“니요….”

미친! 돌았구나, 우도현. 무심결에, 아니 정말 무심코. 아, 그러니까 뭐랄까.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이었다. 쉬지 않고 세잔 째 소주를 들이붓는 박하진이 너무 신기해서 구경하다 보니 제멋대로 주둥이가 움직인 거다. 절대 홀짝거리는 입술이 귀여워서 그런 거 아니고!

술은 박하진이 마시는데 벌게진 건 우도현인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도현도 이걸 느꼈는지 붉어진 제 귀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턱을 괴었다. 도현 딴에는 정말 다행히도 하진은 도현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딱히 표정 변화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아까 쏟은 소주 냄새가 거슬리는지 손등에 코를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방을 나서려는 하진의 볼이 살짝 빨개진 것도 같다. 그게 취한 건 줄 안 도현은 혹여나 하진이 비틀거릴까 싶어 조마조마한 눈으로 하진을 바라봤다. 도현의 염려와는 다르게 하진은 아주 멀쩡히 방을 나갔다. 그에 태희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우 대표, 쟤 주량 6병이야.”

“아, 거짓말. 무슨 사람이 6병을 마셔요.”

“쟤 사람 아니야. 술 귀신이지. 컨디션 좋은 날은 무한대로 마시더라.”

“아니, 대표님이 따로 관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술 마시고 떡 치는 것밖에 더하겠어?”

그게 제일 문제죠! 태희의 호탕한 대답에 도현이 기겁했다. 하진이 태희한테 물든 건지, 태희를 물들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같이 있다 보니 둘 다 성격이 더 막돼먹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얼마나 외롭겠어. 그렇게라도 기댈 곳 있어야지. 너도 알잖아. 하진이 저렇게 가볍게 구는 게 다 자기 보호라는 거”

“그건 아는데 그러다가 이상한 새끼 만나면 어떡해요.”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만나주든가.”

태희의 술잔에 소주를 따르던 도현이 뜬금없는 농담에 손을 떨었다. 흔들린 소주가 술잔의 절반쯤 채워지자 태희가 됐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태희는 그대로 소주를 입안에 골인시키곤 꿀떡 넘겼다. 크으-. 감탄사를 내뱉으며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이 좀 전의 박하진과 똑같다. 박하진이 술 배운 사람 누군가 했더니 서 대표님이었나 보네. 도현이 작게 혀를 내둘렀다.

“아, 참. 너 파티에 한서빈 초대했다며?”

“박하진이 그래요?”

“아니. 걘 나한테 유어 멜로디 애들 얘기 안 해.”

“담당자 실수였어요. 미리 주의 안 준 건 제 책임이고요.”

태희가 자신을 탓하려고 물어본 게 아님을 알면서도, 도현은 어째 태희한테 혼날까 봐 눈치 보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아마 도현, 본인도 파티 일은 잘못인 걸 아니까 그런 것 같다. 하진에게 20대를 함께한 유어 멜로디의 해체가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는 도현조차 가늠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도현은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하진이 뺨 한 대 갈겼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다른 멤버랑은 연락 한 대요?”

“안 하지. 그런 면에선 쟤 단호하잖아.”

아. 태희가 곧바로 자신이 내뱉은 말의 오류를 정정했다.

“너는 제외. 이상하게 너랑은 끊어낼 듯하면서 안 끊어내더라?”

백김치 위에서 방황하던 젓가락은 목표물을 정하지 못한 채 여러 회 위를 돌아다녔다. 마치 도현의 무질서한 머릿속이 반영된 것처럼. 언제나 그렇듯 그 무질서는 박하진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그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10년 째하고 있네요.”

“네가 좀 봐주지.”

“제가 늘 봐주고 있는 거예요. 쟤 저한테 하는 거 보면 대표님도 화나실걸요.”

“큭큭, 하긴. 나한테도 그러는데 너한테는 오죽하겠니.”

태희가 안 봐도 비디오라는 듯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남 일이니까 저렇게 재밌지, 진짜 박하진 태도 보면 화병 안 나는 게 용할 정도인데. 특히 그 바락바락 대드는 태도. 그게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얼굴만큼만 귀여웠어도….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도현의 볼이 화악, 달아올랐다. 미친, 귀엽긴 뭐가 귀엽다고. 하여튼 조금만 방심하면 이 지랄이지. 제 머리 위를 떠다니는 하진의 허상을 없애며 도현은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ST는 이번 FA 안 들어가요?”

“우린 다음 달 노리는 중. 하진이도 곧 계약 만료라 신경 쓸 게 많아.”

“박하진 계속 데리고 있으실 거예요?”

“그럼. 우리 회사 건물 올려준 녀석인데.”

“넘길 생각은 없으시고요?”

“왜. 탐나니?”

상당히 무미건조한 어투와는 달리 태희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태희가 제 술잔을 다시 채워 넣으면서 무심히 잔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을 도현이 빤히 내려다봤다.

“솔직히 탐나긴 하죠.”

“넌 아직 안 돼.”

“왜요?”

“우리 하진이 안 예뻐할 거잖아.”

“예쁜 짓을 해야 예뻐하죠.”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람. 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시선은 여전히 투명한 소주의 요동에 둔 채였다. 아슬아슬하게 술잔을 누비던 소주는 이내 태희의 손을 적시고야 말았다. 그제야 태희가 소주잔을 놓으며 말했다.

“아, 넘쳤네.”

“그렇게 흔드셨는데 안 넘칠 리가 있나요.”

“그런가. 반밖에 안 따라서 괜찮을 줄 알았지.”

애초에 반만 채운 술이 흘러넘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반을 채우든 가득 채우든 술잔 자체를 흔들어버리면 넘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니 가장 중요한 건 흔들리지 않는 것일 테다.

“아무튼 박하진 예뻐할 일은 없어요.”

“글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도현은 어쩐지 사람 일이라는 단어가 사랑 일이라고 들리는 착각에 빠졌다. 공기 중에 알코올이 퍼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하진이 너무 미워하지 말고.”

말투에서 묻어나는 씁쓸함이 후- 하고 내뱉은 태희의 한숨을 타고 도현에게까지 번졌다.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제가.”

녀석을 외롭게 만든 주범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히 박하진을 미워할 수조차, 그렇다고 외면할 수조차, 도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누군가를 혼자 남겨둔 벌이라면 달게 받아야겠지.

***

“…미친 새끼. 예쁘긴 뭐가 예쁘다고….”

술 취한 것도 아닌데 휘적거리며 화장실로 들어선 하진이 세면대 물을 튼 채로 중얼거렸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얀 피부와 붉어진 볼의 선명한 대비. 술기운이라고 변명하기엔 주량에 한참 못 미치는 술을 마신 터라 이걸 뭐라고 둘러대기도 어려워서 일단 화장실로 도망쳤다. 수도꼭지를 냉수 끝으로 돌려놓곤 흐르는 물을 손바닥에 가득 담아 얼굴에 끼얹었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네.”

냉수가 금방 볼의 붉은 기를 가라앉혀줬다. 덩달아 널뛰던 심장도 어느 정도 차분해졌다. 우도현, 이 미친놈이 예쁘니 뭐니 그딴 말을 해서 그렇다. 욕구불만인가? 섹스 안 한 지 오래돼서 흥분이 아무 때나 되는 건가? 미친. 아무리 그래도 우도현을 상대로?

“차라리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랑 하지.”

“뭘요?”

옆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근데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 웬 멀끔한 남자가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거울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부딪치며 되물어오기까지 했다. 뭘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뭘요? 남자의 말을 되짚던 하진이 문득 스치는 행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와, 설마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그런 빌어먹을 행위를 한 건 아니겠지?

“옆 사람이랑 뭘 한다면서요.”

했네. 그런 빌어먹을 행위를 해버렸네, 했어. 죽자. 지금이다, 박하진. 스물아홉 인생 더러운 추문 없이 아름답게 마무리할 시간, 바로 지금이야. 결연한 표정으로 하진이 세면대를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 찰나였다.

“박하진 씨.”

“…….”

“예쁘세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목소리가 귀를 두드리자 하진은 그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제 이름을 어떻게?’처럼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표정은 굉장히 바보 같을 것 같다. 얼빠진 얼굴. 딱 그거다. 이름을 안다는 건 연예인 박하진을 알아봤다는 거고, 예쁘다고 말하는 건 좀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들었다는 거니까. 이 정도면 내일 신문 1면에 수치사로 즉사한 연예인 1호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음에 또 봐요.”

남자는 마치 신기루처럼 그 말만을 남기곤 사라졌다. 잘생겼던데. 그것도 딱 내 스타일로. 연예인인가. 묘하게 얼굴이 낯이 익었단 말이지. 멍한 기분을 뒤로한 채 하진이 얼른 남자의 뒷모습을 쫓았다. 벌써 사라진 건가. 그렇게 하진이 아쉬워할 즈음, 하진이 있던 방 바로 옆의 문이 닫혔고, 남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운아, 어디 갔다 오냐?”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진은 남자의 정체를 알고야 말았다.

아, 젠장! 이강운. 요즘 박하진이 가장 눈여겨보는 섹스파트너 삼고 싶은 남자 1위, 그 이강운이었다.

***

“와, 대표님. 나 지금 누구 봤는지 알아요?”

“호들갑 떠는 거 보니 어디 잘생긴 남자라도 봤나 보네.”

하진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누군데? 태희의 질문에 하마터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이강운을 말할 뻔했다. 옆방을 한번 흘끗 보곤 조용히 입을 떼려던 때, 하필 우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불쾌해 보이는 듯한 그 시선에 하진은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맞다. 저 새끼, 게이 이해 못 하지. 하진은 작게 태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강운이요.”

오, 전부터 박하진이 만나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배우 아닌가. 태희가 잘 됐다면서 맞장구라도 쳐주려다가 제 앞에서 한 상 가득 차려진 맛있는 회가 아닌 본인의 입술만을 씹고 있는 도현을 보곤 그만두었다. 저런. 본인 불쌍한 걸 본인만 모르는 도현에게 떡 하나라도 더 줘야지 싶은 태희였다.

“이강운 봤대.”

“아, 그걸 얘기하면 어떡해요!”

“비밀이었어? 몰랐네, 미안, 미안.”

딱히 비밀일 것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우도현한테 말하면 귓속말한 의미가 없지 않나. 하진이 괜히 소주 한잔을 원샷 했다.

“그쪽 대표랑 나랑 동창인데 이강운이 너 엄청 팬이래.”

“대표님.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일찍 말했으면, 뭐.”

“에이, 알면서.”

불시에 하진의 눈매가 반달로 꺾이더니 해맑은 웃음을 내보였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었다. 이를 관망하던 도현은 어쩐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태희와 하진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술잔을 부딪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소외감까지 들었다. 아까 박하진 기분이 이랬으려나. 되게 별로네, 이거.

“잘생겼니?”

“완전 내 스타일.”

“잘 꼬셔 봐. 넌 아무나 잘 꼬시니까.”

탁-. 난데없는 둔탁한 소음이 화목한 분위기 사이를 파고들었다.

“안 돼요.”

그뿐만 아니라 몹시도 단호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지기까지 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도현의 무의식이었다는 것. 태희와 하진이 도현에게 의문 섞인 눈길을 보냈지만, 도현은 답해줄 수 없었다. 본인조차도 행동의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안대… 안대를 어디에 뒀더라…”

임기응변이랍시고 도현이 갑자기 코트 주머니를 뒤적였다. 잘 때나 쓰는 안대를 들고 다니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냐마는 도현은 상당히 진지하게 안대를 찾았다. 씨팔. 그러다가 불현듯 현실을 깨달았을 때, 도현은 도망치듯 방을 나가버렸다.

“저 새끼, 왜 저래요?”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하진이 끌끌 혀를 찼다. 가만히 있다가 안대를 찾지 않나, 안절부절못하다가 방을 나가질 않나. 하진은 도무지 도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질투라도 하나 보지.”

“누굴 질투해요? 쟤 이강운 팬이래요?”

하진의 ‘0’에 수렴하는 눈치에 태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우도현만 눈치 없는 줄 알았더니 여기 그보다 더한 녀석이 있었네. 역시 끼리끼리는 불변의 진리인 모양이다.

***

“나 급하게 가야겠다.”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던 태희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해산물이 아직 반도 채 사라지지 않은 때였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하진은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복어탕과 태희를 번갈아 쳐다봤다. 태희가 가방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내 팡팡, 화장을 수정할 때까지도 그저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장난하지 마세요.”

“마저 다 먹고 가. 계산은 이걸로 하고.”

하지만 태희는 진지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하진의 앞에 카드를 들이밀었고, 하진은 그 카드의 종류를 보고서야 태희가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면 그 카드는 장난으로 줘버리기엔 너무도 귀한 태희의 블랙 카드였으니까.

“어디 가시는데요?”

“연애하러 간다. 마이 달링이 기다리는 중이라.”

마이 달링? 아무리 영어는 젬병인 하진이라도 마이 달링이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우리 자기라는 말인데 보통 연인들 사이에서나 주고받는…. 어, 어? 하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리는 핸드폰을 태희가 도현과 하진에게 보여줬다. 액정에 뜬 이름은 정말 [마이 달링]이었다.

“연애 안 한다면서요?”

“내가 언제? 젊었을 때 질리도록 했다고 했지.”

“그게 그 말 아니었어요?”

“하진아. 연애는 질렸다가 또 하고, 또 질렸다가 또 또 하고. 그래도 재밌더라. 그러니까 너네도 젊을 때 많이 해.”

태희가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제 대표의 저런 모습을 오랜만에 본 하진은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팔뚝을 문지르면서도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커홀릭으로 평생 혼자 살다가 가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무언가를 까먹었는지 빼꼼히 고개를 내민 태희가 도현과 하진을 보며 짓궂은 말을 내뱉었다. 단언컨대 농담은 아니었다.

“너네는 특별히 호텔비 긁어도 모르는 척 넘어가 줄게.”

하하하! 태희가 호탕하게 웃으며 쾅-! 문을 닫았다. 아! 대표님! 두 사람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지만, 태희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녀가 남기고 간 묘한 분위기를 견뎌야 하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었다. 태희의 존재 여부만으로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방 안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위로는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쌓이고 있었다. 챙챙, 불규칙한 소음 사이로 꼴꼴, 소주가 이질적인 소리를 내었다.

이내 곧바로 이어진 도현의 질문 또한, 몹시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하진과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그런.

“그날 한서빈이랑 만났어?”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하진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파티 초대해주신 너 새끼 덕분에.”

“나 아니라니까.”

“네, 네.”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사람이세요? 개새끼 아니고? 아니다. 이건 개새끼한테도 실례지.”

술 마셔서 텐션이 높아진 건지 하진이 자꾸만 빈정대는 탓에 도현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면서 짜증을 참았다. 그 사이, 하진은 목구멍으로 소주를 넘기고 후 한숨을 내뱉었다. 그 씁쓰름한 알코올 향이 도현의 코끝에 닿았다. 코가 시큰거렸다.

“무슨 얘기 했는데? 한서빈이 너 찾았어.”

또다시 한서빈을 언급하는 도현에 하진이 들고 있던 소주잔을 쾅 내리찍었다. 잔뜩 우그러진 얼굴이 다소 놀란 듯 하진을 바라봤다.

“안 만났어. 근데 왜 이렇게 한서빈 한서빈 거려? 뭐, 관심 있어? 소개라도 해줘?”

“말이 또 왜 그렇게 튀어.”

“몰라, 씨발. 내가 모났나 보지.”

도현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이유는 그저 알코올 향이 독했기 때문이며 한서빈 얘기를 꺼낸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하진이 저렇게 날이 선 말로 대꾸할 만큼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어째 억울해진 도현이 쓱 하진의 눈치를 봤다. 화 많이 났나. 미간을 펼 기미가 안 보이네. 그렇게 두 잔을 연거푸 마시던 하진이 세 번째 잔을 따르려던 찰나였다.

“한서빈 얘기 꺼낸 건 미안해.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네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나 너도 노골적으로 존나 싫어하는데?”

“그래, 씨발. 나 말고. 됐냐?”

한껏 감정 상한 어투로 대답하는 도현에 하진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애새끼도 아니고, 입술은 삐죽 왜 내미는지 모르겠다.

“싫어하는 건 아니야. 걔가 날 싫어하니까 피해 주는 거지.”

“나랑 똑같네.”

“네가 누굴 피해 다니는데?”

“너.”

“…….”

“네가 날 존나 싫어하니까.”

도현의 버석한 목소리가 하진의 귓가를 울렸다. 도현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하진이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떨어뜨린 시선은 도현을 올려다볼 자신이 없었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탓이었다.

“너도 나 싫어하잖아.”

“…그런가.”

이상한 기분은 도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를 보며 치켜올리는 눈꼬리는 분명 여느 때의 박하진과 같은데 어긋난 시선을 비집고 나온 감정이 하진을 가엾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금 도현의 눈에 비친 하진은 그러했다. 원망하고 있었다, 도현을. 그 눈빛이 맨정신으론 버거워서 도현은 소주잔을 들었다.

“마시지 마.”

“왜?”

“운전해야지.”

“대리 부르면 되잖아.”

“얼굴 팔리는 거 싫어.”

“데려다 달라는 소린가?”

“어.”

하진은 재빨리 소주병을 낚아채 도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았다. 하진의 이런 막무가내인 행동을 보자 도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차라리 이렇게 제멋대로인 박하진이 낫다. 방금처럼 가련한 얼굴의 박하진보다야, 훨씬.

이따금 본인도 모를 처연한 박하진이 도현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도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멍청히 굴곤 했다. 그저 얽힌 시선을 뿌리쳐 외면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겼다. 그 무력함에 불퉁한 언어가 나오는 것 또한 막을 순 없었다.

“열애설로 얼굴 팔리는 건 괜찮아?”

“알 바야?”

“알 바지. 상대가 우리 회사 연예인인데. 고민채랑 뭐냐, 너.”

“뭐긴. 사귀는 사이지.”

“지랄 말고.”

“진짠데?”

시선이 부딪혔다. 누구 하나 먼저 물러나지 않은 채 서로의 시선을 받아냈다.

“너 게이잖아.”

“아닌데. 나 바인데.”

“아니. 너 게이야.”

“아니라고.”

“게이 맞잖아.”

그놈의 게이, 게이! 진짜라도 그렇게 확신하면, 왠지 인정하기 싫어지는 게 사람 마음 아닌가. 하진은 자신에 대해 다 안 다는 듯이 말하는 도현의 태도가 심히 거슬렸다.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이. 소식은 연예 뉴스로 확인하는 사이.

“헤테로 주제에 뭘 안다고 확신해?”

고작 이 정도 사이면서, 뭐라도 되는 듯이 군다. 같잖게.

“너 그럼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 3초 안에 대답해 봐.”

“야, 싫어. 내가 왜….”

“일.”

“…….”

“이.”

말은 싫다고 하면서도 하진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이 있어야 말하지. 아니 애초에 여자 연예인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 생각해본 적조차 없어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삼-. 시간 초과. 그 와중에 하진의 머릿속에서는 최윤조와 이강운 중 누가 더 제 스타일인가에 대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어려운 질문 아니잖아. 고민채라고 답하면 됐는데.”

어, 그렇네. 하진이 어벙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우도현의 덫에 걸린 기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도현은 생글생글 웃으며 농어회 한 점을 하진의 앞접시에 놓았다. 덫에 걸려 잡아 먹히기 전에 배라도 불리라는 작은 배려인가. 퉤다, 새끼야.

“지금 넌 두 가지를 증명했어. 첫째, 네가 여자에 좆도 관심 없다는 거. 둘째, 고민채랑 거짓이라는 거.”

하진의 입꼬리가 보기 흉하게 뒤틀렸다. 팽팽한 기 싸움, 아니 유치한 싸움이 이어졌다. 회 쳐진 생선 대가리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진은 도현이 놓아준 농어회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새로운 농어회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우도현이 준 건 외관부터 때깔이 더러웠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아는데 적당히 해.”

“…….”

“괜히 너만 다쳐.”

하진이 씹던 턱관절을 멈췄다. 우도현은 참 신기한 재주를 가졌다. 분명 방금까지도 맛있게 씹어 넘기던 음식이 한순간에 맛없어지는 그런, 신기하고도 개 같은 재주 말이다. 속이 답답했다. 물을 따르기 위해 내리깐 하진의 눈길이 자연스레 도현의 젓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젓가락이 멈춘 곳은 김치였다. 꿀꺽, 다급하게 얼음물을 마시자 골이 울렸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야. 김치 먹지 마. 굴 맛 나.”

“뭐?”

“너 굴 안 먹….”

켁켁. 말을 하다 말고 사레에 걸렸다. 미쳤지. 끝맺지 못한 말이 혓바닥 위를 굴러다녔다.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니 눈동자도 막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굴러… 굴… 굴, 씨발! 그래, 굴이 문제였다. 굴과 관련된 기억이 무심코 재생되어 멋대로 오지랖을 부린 것이다. 기억이란 게 참 무섭다. 10년이나 지났어도, 고작 단어 하나에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가는 걸 보면.

이딴 기억은 지워지지도 않는다. 짜증 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하진이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니다. 네가 아니라 최윤조였다. 하하.”

멋쩍게 웃어넘긴 하진이 흘끔 도현의 눈치를 봤다. 도현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이었다. 핸드폰을 휙휙, 넘기던 도현이 하진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최윤조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굴이래.”

아? 당혹감이 소리가 되어 나왔다. 도현의 핸드폰을 가득 채운 건 최윤조의 최근 인터뷰 기사였다. 그중 친절하게 형광펜까지 쳐놓은 한 질문을 하진이 속으로 읽었다.

[Q.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세요?

A. 고향이 바닷가라 해산물을 좋아해요. 특히 굴이요!]

최윤조가 굴을 되게 좋아하는 모양이다. 글인데도 ‘굴이요!’ 느낌표가 최윤조의 해맑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왜 하필 굴을 좋아하냐. 단순히 섹파라 밥 한 번을 같이 먹은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하여튼 최윤조 이 새끼는 도움이 안 된다. 이건 뭐, 변명하기도 이미 그른 것 같다. 이렇게 쉽게 들통날 거짓말이었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 텐데. 하진이 괜히 제 발 저려 큰소리를 냈다.

“그래! 너 예전에 굴 먹고 죽네, 마네 거린 거 생각나서 그랬다, 뭐! 말을 해줘도 지랄이야!”

씩씩, 흥분한 호흡 때문에 하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 모습을 보곤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기색의 도현이 하진을 놀릴 총알 한 발을 더 장전했다.

“기억해?”

“그걸 어떻게 잊어. 사람 죽는 거 실시간으로 볼 뻔한 경험인데.”

“그때 네가 나 인공호흡….”

흡-. 도현의 주둥이보다 이를 막는 하진의 젓가락이 조금 더 빨랐다. 덕분에 도현은 말과 함께 회 한 점을 꿀꺽 삼키게 되었다. 이어 도현이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 생명의 은인이 줘서 더 맛있네.”

아. 탄식을 내뱉은 하진이 냅다 젓가락을 던졌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현은 그런 하진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사실 굴 못 먹는 거 기억해줘서 신난 거면서.

***

차에 올라타자마자 히터를 튼 도현이 핸들 위로 엎어졌다. 밥만 먹었을 뿐인데 녹초가 된 기분이다. 이제는 더 싸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아 턱으로 내비게이션을 가리켰다. ‘집 주소 찍어. 데려다줄 테니까.’의 의미였다. 이를 알아들은 하진이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잠자코 그 화면을 바라보던 도현은 자음과 모음이 단어를 완성해내자 와락, 눈썹을 구겼다.

“길바닥이 네 집이냐?”

하진이 검색한 곳은 [한남돌다리]였다. 도현의 말에도 하진은 꿋꿋하게 검색 완료를 눌렀다.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백 미터 앞에서 우회전-. 그러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진이 제 볼을 찌르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근처에서 내려줘.”

“개소리 말고 집 주소 찍어. 내일 네 송장 치르기 싫으니까.”

“내리면 우리 집 바로야.”

“그럼 지금 바로 차에서 내리든가.”

도현은 여유롭게 웃으며 달칵- 잠금장치를 열었다. 본인은 손해 볼 거 없다, 이거지. 치사한 놈. 구시렁대던 하진은 결국 제대로 된 집 주소를 찍었다. 도현이 액셀을 밟았다. 이어 차는 부드럽게 식당을 빠져나와 4차선 도로를 탔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행히 하진의 집이 제집과 그리 멀지 않아 12시 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로가 몰려왔다. 이 피로의 지분은 9할 이상 박하진이 차지한 채였다. 역시나 본인도 피곤했는지 힐끗 본 하진은 머리통을 흔들어대며 자고 있었다. 그렇게 빨빨댔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도현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곧이어 울린 하진의 전화벨에 화들짝 놀라 금세 입꼬리를 내린 것 또한, 도현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우리 집으로 와. 으응… 비번 1234. 어어, 들어가 있어….”

끼익! 미처 신호를 보지 못한 도현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에 하진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가 뒤로 젖혀지면서 퉁 하고 뒤통수를 부딪쳤다. 아씨, 뭐야. 꿈인가. 막 잠에서 깨 얼떨떨한 상태로 하진이 도현을 쳐다봤다. 머리통을 비비적거리는 하진과 달리 일부러 그런 건가 싶을 정도로 도현은 태연했다. 뭐야, 이거 진짜 꿈이었나. 하진이 다시 눈을 감았다.

“넌 최윤조 뭘 믿고 비번까지 알려주냐?”

“엿들으셨어요?”

“다 들리던데요? 스피커폰인 줄.”

뭐가 또 심사를 뒤틀리게 했는지 자다 깬 사람한테 신경질이다. 잠자기는 그른 것 같아 눈을 뜬 하진이 도현에게 고까운 시선을 보냈다. 우도현의 심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더러워진 탓에 그냥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밤의 길거리가 익숙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는 게 빠르겠다.”

“가기 싫어졌어.”

“뭐?”

“여기서 내려.”

아니, 시발? 뭐라는 거야, 지금. 한국말 맞아? 이해가 안 되는데.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가만히 앉아있는 하진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도현이 잠금을 풀었다. 그에 하진의 눈썹이 점차 솟구쳤다. 곧 눈썹끼리 미간에서 조우할 정도였다.

“내리라고.”

“진짜?”

“어.”

“와….”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내리라면 못 내릴 줄 알고? 하진이 세게 문을 열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 이내 문을 닫기 전에 참았던 욕을 쏟아내는 하진이었다.

“야. 너 병원 꼭 가 봐라. 뇌에 문제 있는 것 같거든?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콰앙-! 자신의 분노를 한데 모아 하진이 차 문을 닫았다.

“아, 미친…. 등신 새끼야.”

이게 무슨 유치한 짓거리냐. 하진이 내리자 도현이 빈 조수석을 바라보며 욕을 읊조렸다. 욕의 종착지는 자기 자신이었다. 박하진, 그 성질머리에 집 가는 내내 입에서 육두문자를 쏟아낼 게 뻔했다. 솔직히 이번 상황은 귀가 간지러워도 할 말 없긴 하다. 저답지 않게 변덕을 부렸다. 단언컨대 박하진을 향한 질투는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진짜 미쳤더라도 박하진이 누굴 만나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친구의 탈선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우정? 이것도 영 설득은 안 되지만, 질투보다야 더 가능성 있겠다. 그래. 아무리 물고 뜯는 사이라지만, 한때는 매일 붙어 다니던 사이였으니 제 마음 한구석에 녀석을 향한 우정 한 조각쯤은 박혀있을 수 있겠지. 그래서 친구가 집에 외간 남자를 들이는 게 걱정되고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암, 그럴 수 있고말고. 그렇게 도현의 길고 길었던 자기합리화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다 얼핏 도현의 시야에 낯선 무언가가 밟혔다. 하진이 있던 조수석 글로브박스 밑이었다. 그곳으로 손을 뻗은 도현이 종이 뭉텅이를 집어 올렸다. 통통 튀는 글씨체로 겉표지에 박힌 <너와 나의 거리>는 언뜻 보아도 로맨스가 물씬 풍기는 드라마 대본이었다. 박하진이 연기를 했던가. 대본을 휘리릭 넘기며 대강 훑는 와중에 중간중간 ‘현이’라는 인물에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괄호 안에는 연기 지시를 어떤 호흡으로 해야 할지, 어떤 감정으로 상대를 보아야 하는지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하진이 출연 예정인 드라마였다.

“이거네.”

도현이 잽을 날릴 차례였다.

***

준수는 아직도 어젯밤에 온, 아니네. 12시 지났으니까 오늘 새벽이라고 하자. 아무튼, 오늘 새벽에 제 상사로부터 온 문자를 보고 있으면 화가 절로 났다. 문자 내용은 이러했다.

[드라마, 너와 나의 거리. 내일 보고 바람.]

감히 신성한 퇴근 시간 이후에 업무 지시라니. 이건 대한민국 직장인들을 명백히 모독하는 행위였다. 이를 캡쳐해서 사내 인권 센터에 고발이라도 할까 싶었던 준수는 뒤이어 온 문자 내용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었다.

[개인적 부탁. 소고기 이용권 10회.]

인간의 간사함에 무릎 꿇은 준수는 결국 아침 출근을 회사가 아닌 방송국으로 나갔고, 남들 퇴근할 시간 다 되어서야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다. 정보 캐내느라 바짝 신경을 세운 탓에 삭신이 다 쑤셨다. 들어가셔도 된다는 김 비서의 말에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준수가 제 상사에게 분노의 눈길을 보냈다. 그 눈빛을 읽은 도현이 두 팔 벌려 준수를 환영했다.

“나 오늘은 반드시 칼퇴할 거야.”

“그래요. 우선 진정해요, 강 팀장. 내가 부탁한 것만 보고하고, 바로 퇴근해도 좋습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환한 미소의 준수가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대표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이 당당함. 역시 원천은 유능함에 있었다. 바로 이 노트에 적혀 있는 정보들을 하루 만에 공수해 오는 능력이랄까. 준수가 도현만을 위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제목, 너와 나의 거리. 편성은 DBN 방송국. 내년 상반기 방영 예정으로 다음 달부터 촬영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거기 전 국장이 탈세로 걸리지 않았나?”

“맞습니다. 새로 온 국장은 시청률 높게 잡아서 방송국 이미지 좀 바꿔볼 작정인 거죠.”

“그것도 드라마가 잘 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감독이 장인수입니다.”

장인수. 이쪽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이름. 그러나 도현은 그보다는 조금 다른 이미지가 떠올라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논란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 보던 도현의 머릿속으로 번뜩,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폭언. 생각났다. 3년 전, 촬영 스태프의 내부 고발로 폭로된 장인수의 인성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는다면 바로 폭언과 폭력을 날리던 그는 결국, 한 신인 배우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고, 그게 기사화되면서 드라마는 촬영 중단. 장인수는 감독 교체 등의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그 이후로 드라마 판에서는 완전 아웃된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그 사건 이후로 드라마 안 찍지 않았나요?”

“3년 지났으니까 이제 슬슬 복귀 타이밍 노리는 거죠. 이 바닥이 원래 그렇잖아요. 실력이 인성을 앞지르는.”

그때 뺨 맞았던 신인 배우가 아이돌 출신이었던 것 같은데. 연기를 못했었나. 왜 때린 거지.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럼 아무나 때리나? 그럼 박하진도….

도현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의 끝에서 느닷없이 하진을 마주했다. 어째서? 소파 위에 걸쳐 놓은 손가락을 빠르게 튕겨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찌어찌 연결고리를 찾자면, 아이돌 출신 배우 정도라는 거. 이 방대한 카테고리 속에서 하진을 끄집어낸 자신 놀랍기까지 한 도현이었다.

“캐스팅은요?”

“남자주인공 빼고는 거의 끝난 것 같던데요. ST 소속 연예인은 완전히 확정됐고.”

“ST 쪽 누구?”

“여주 지수연에 남주 친구로 박하진이요.”

장인수랑 박하진이라. 도현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꽤 평온한 얼굴이었다.

“투자하죠, 이 드라마.”

뭐? 난데없이 튀어나온 충격적인 말에 무의식적으로 준수가 반말을 내뱉었다. 이내 준수는 발언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겼다. 준수의 턱이 곧 분리될 듯 벌어진 것과 달리 도현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진지한 거 보면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준수는 왠지 일단 대표를 말려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쪽에 투자해달라는 드라마, 영화가 몇 갠데요.”

“ST도 뛰어들었다면서요. 괜찮아 보이니까 들어갔을 거 아닙니까.”

“제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대표님 설마 박하진 씨한테 복수하시려는 건 아니죠?”

도현의 한쪽 입꼬리가 광대까지 치솟았다. 순간 조커를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사악한 웃음에 준수는 제 팔뚝을 문질러야만 했다. 인간한테서 저런 악한 기운이 나다니. 조만간 성당에 들러 고해성사를 해야 할 듯싶었다. 대표가 선량한 이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모르는 척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준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니, 투자자로 들어가서 뭘 어쩌시려고요. 하진 씨한테 갑질이라도 하시게?”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역시 아이디어 뱅크십니다, 강 팀장님.”

“와, 너 진짜…. Fucking crazy.”

아이비리그 유학파의 찰진 욕이 대표실 가득 울려 퍼졌다.

“어쨌든 투자는 진심이니까 잘 추진해보세요.”

***

하진은 어째 열애설이 터진 이후 더 바빠졌다. 오늘만 해도 새벽에 끝난 예능 촬영을 마치자마자 바로 화보 찍으러 강원도를 다녀왔으니까. 욕구 풀기는커녕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이동하는 시간에 쪽잠을 자야 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못 잤다. 웬 기사 하나가 심기를 박박 긁어댄 탓이었다.

“대표님, 이거 진짜예요?”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하진이 다짜고짜 태희에게 제 핸드폰 속 기사를 들이밀었다. 기사에는 W 엔터테인먼트의 로고와 함께 친숙한 드라마 제목이 기재되어 있었다.

“아니, W 엔터가 갑자기 왜 투자해요?”

“나야 모르지? 네가 잽 한 방 먹였으니까 우 대표도 한 방 날리려는 거 아니야?”

“무슨 잽을 이렇게 스케일 크게 하냐고요.”

“열애설도 만만치 않게 큰 스케일이었다고 보는데? 덕분에 우리 주가가 얼마나 내려갔는지는 아니?”

“그래서 지금 좆 빠지게 일하잖아요.”

“넌 어차피 쓰지도 않는 거, 더 일해서 아예….”

아, 무슨-! 하진이 기겁하며 자신의 주니어를 보호했다. 태희가 가끔 내뱉는 이런 살벌한 말이 얼마나 사람 등골 오싹하게 만드는지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사람을 성전환시켜버리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하진이 소파에 앉아 아무리 봐도 적응하기 힘든 대표실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태희의 취향이 물씬 반영되어있는 소녀 감성 컬러가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맞다. 대표실로 택배 왔어.”

“뭔데요?”

태희가 책상 한편에 놔둔 작은 상자를 하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뭐냐고 묻는 하진의 물음에도 태희는 그저 열어보라는 듯 턱짓할 뿐이었다. 크기가 딱 와이셔츠 상자만 한데 혹시 대표님이 주는 선물인가.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을 했지만, 상자 겉에 유난스럽게 큰 분홍색 리본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이런 남사스러운 짓을 할 만한 새끼가 한 명 떠오르긴 하는데….

이거 상자 열면 갑자기 생크림 터지고 이런 거 아니야? 새벽까지 찍고 온 예능 프로그램의 악몽이 다시금 떠오른 하진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다행히 상자엔 이렇다 할 특별한 장치는 되어있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에 곱게 포장된 대본과 카드가 놓여 있었고, 그것들을 보자마자 하진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무척이나 익숙한 대본은 이틀 전 자신이 잃어버린 드라마 대본이 분명했다. 근데 카드는 뭐지? 하진이 경계 태세를 갖춘 채 검지와 엄지로 카드를 집곤 천천히 펼쳤다.

[하진 씨의 연기 기대할게요. 그대의 눈동자에 Cheers.]

“미친….”

카드에 적힌 문구를 따라 읽던 하진은 입에서 도저히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와, 진짜 진심으로 지금 온몸에 닭살 돋았어. 저 니글거리는 멘트만 보더라도 누가 보냈는지는 뻔했다. 우도현, 이 새끼 분명 이러한 반응을 기대하고 보냈을 것이다.

“그대의 눈동자에 Cheers.”

아, 깜짝이야. 어느새 소파 뒤에서 머리만 들이민 태희가 몹시 끈적한 어투로 카드 문구를 따라 읽었다. 그에 기겁한 하진이 카드를 집어 던지며 소파에 붙이고 있던 등을 떼었다.

“너무 싫다, 진짜.”

“둘이 화해했어?”

“화해? 이런 구린 멘트 치는 새끼랑은 화해 같은 거 안 해요.”

“왜, 멘트 좋은데.”

치얼스-. 태희는 정말 저 멘트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다양한 억양으로 제 옆에서 치얼스, 치얼스 거리니 그 얼굴 위로 우도현이 겹쳐서 꼭 저를 약 올리는 느낌이었다. 이거 둘이 짜고 친 거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점심은?”

“저 바로 라디오 가요.”

하진이 대본에도 붙어있는 리본을 떼어내며 답했다. 대본은 언뜻 무탈해 보였지만, 하진은 금방 옥에 티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옥에 티는 대본 첫 장 커다란 제목 밑에서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나는 투자사 W 엔터테인먼트 대표 우도혀니 너는 현이^0^]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인가.

목에서 신물이 올라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여태껏 대본 읽으면서도 몰랐던 거였다. 또한 계속해서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기도 했다. 극 중 이름인 ‘현이’와 우도현의 ‘현’이 겹친다는 빌어먹을 공통점을 우도현이 친절하게 찾아내 줬다. 이제 대사 볼 때마다 우도현 생각나는 거 아니냐고, 미친!

거기다가 웃는 표정은 덤인 모양이다. 해맑은 웃음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혈압이 상승한다. 꼭 옆에서 우도현이 낄낄대고 있는 것 같다. 지워보려고 엄지로 문댔지만 흐려지지도 않는다. 이 망할 새끼가 유성 매직을 썼나 보다. 아, 존나 유치한 새끼.

***

“하하, 우 대표님. 이번에 저희 쪽 드라마 투자해주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네. 대본이 꼭 제 얘기 같아서요.”

자신의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새 국장 앞에서도 도현은 기죽지 않고 여유롭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전 국장이 탈세로 쫓겨나서 그런지 국장실인데도 아직 물건들이 많이 없었지만 새 국장의 풍채와 배포만으로 이미 방 안이 가득 채워진 듯했다.

“히트 칠 것 같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요. 다음에 식사 자리 한 번 같이 하시죠.”

“좋습니다, 대표님.”

“네, 국장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드라마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국장을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대함으로써 도현은 W 엔터테인먼트의 세대교체를 알렸다. 드라마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끝으로 도현은 국장실을 벗어났다. 도현이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 비서가 도현 옆으로 붙으며 작게 말했다.

“이강운 씨 측에서 연락 왔답니다. 저희랑 계약하겠다고요.”

“배우 전문 에이전시에서 컨택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 쪽보다 조건 좋을 텐데, 왜?”

“글쎄요. 근데 저희 쪽에 조건을 하나 걸었답니다.”

“무슨 조건이요?”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저의 모습을 보던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열린 엘리베이터가 도현의 형상을 반으로 가르는 동안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김 비서가 1층 버튼을 누르며 답했다.

“너와 나의 거리.”

“…….”

“그 드라마 주인공으로 넣어달라고요.”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뻗던 도현이 뜻밖의 대답에 들어 올린 발을 내리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 자리에서 몸이 굳은 도현을 김 비서가 끌어당겨서야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강운이 너 엄청 팬이래.’

문득 며칠 전 태희가 하진에게 한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에이, 설마 박하진 때문이겠어. 그럼 애초에 ST 엔터로 갔겠지. 도현이 말도 안 되는 추측에 고개를 저었다. 요새 하도 박하진이랑 부딪치다 보니까 이 멍청한 사고가 뭐든 박하진이랑 연관 지으려고 안달인 듯했다.

“드라마에 꿀이라도 발라 놨나 보네요.”

“대표님 생각은 어떠세요.”

생각이야 이강운이든 최윤조든 둘 다 싫죠.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심을 억누르며 도현이 이강운과 최윤조를 떠올렸다. 그러자 박하진에게 쪽쪽 거리던 최윤조의 주둥이가 함께 재생되어 비위가 팍 상해버린다. 아, 역시 최윤조가 더 별로다. 되게 거슬려. 그니까 뭐가 거슬리는 거냐면 절대 박하진이랑 그러고 다녀서 그런 게 아니고. 혹시! 어, 그래! 게이 스캔들이라도 날까 봐! 이게 걱정되는 거다.

“주인공 이강운 준다고 하세요.”

최악과 차악 중 후자를 선택한 도현은 이내 문이 열리자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타는 사람은 없었다. 곧 문이 닫히는데 누가 잘못 눌렀나 싶어서 도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도현의 시야엔 한 사람이 담겼다. 몹시도 싫증 난다는 표정의 그 사람을 본 순간, 도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드라마 출연하시는 박하진 씨?”

마침 오늘 자로 W 엔터의 드라마 투자 기사가 떴을 텐데 하진이 봤으려나 모르겠다. 말하자마자 표정이 말린 오징어처럼 건조되는 것을 보니 본 것 같긴 한데 말이다. 문이 닫히려는데도 타지 않는 하진을 보자 어쩐지 다급해진 도현이 하진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그에 하진은 엉겁결에 도현과 어깨를 맞대게 됐다.

“그날은 잘 들어갔어요?”

“아니요. 어떤 미친놈이 길바닥에서 내려주는 바람에 감기 걸릴 뻔했죠.”

“그 미친놈도 미안해하고 있을 거예요.”

“전혀요. 그럴 새끼가 아니라서요.”

둘 다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아 마치 허공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물론 허공에 얘기하는 것치고는 듣는 미친놈이 몹시 찔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좋은 새끼일 수도 있잖아요.”

풉. 줄곧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하진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집까지 30분을 걸어서 갔는데, 뭐? 좋은 새끼? 오늘 아침엔 약이라도 올리듯이 ‘혀니. 현이.’ 그 지랄을 했으면서? 퍽 어이가 없었다. 좋은 새끼란 말도 제 성질이나 돋구려고 내뱉은 게 분명했다.

그래. 그럼 어디 맞장구나 한번 쳐주겠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주머니에 쑤셔놓았던 리본을 꺼내 제 머리에 붙였다. 버리려다가 휴지통이 없어, 가지고 있던 것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꽤 소임을 다할 것 같다. 비비드한 컬러감이 하진의 머리 위에서 광을 냈다. 존재감도 대단해서 등장하자마자 도현은 그것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남사스러운 리본이 이상하게도 익숙한 도현이었다.

설마 그 리본을 했으리라고.

“그건 뭐예요?”

“아, 이거요? 아까 말한 그 미친놈이 선물 보냈길래 인증하는 거예요.”

설마 그 리본 맞네.

“…굳이?”

“리본 성애자 같길래 보고 흥분 좀 하라고요.”

[^0^] 하진은 딱 도현이 그려 놓은 이모티콘처럼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해맑아서 도현은 하진이 자신을 비꼬는 중이라는 사실조차도 인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심코 따라 웃고 있었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어 서야 도현의 안면 근육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차 가져오겠습니다.”

먼저 내린 김 비서가 눈치껏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김 비서의 배려는 인사도 없이 휙, 가버린 하진 때문에 빛을 발하진 못했다. 이윽고 하진이 1층 카페로 향하는 것을 좇으며 뒤따르려던 도현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도현아?”

***

도현이 무슨 말을 걸기도 전에 등을 보인 하진은 저벅저벅, 1층 카페로 향했다. 라디오 작가님이랑 나눌 얘기가 있다고 먼저 1층에 내려가 있으라던 매니저를 위해 손수 커피까지 사다 놓으려는 연예인이 어디 있을까.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카페모카 따뜻한 거 한 잔 주세요.”

카드를 내미는 하진을 직원이 빤히 쳐다봤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처음엔 자신을 알아봐서인 줄 알았던 하진은 곧 그 시선의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툭, 머리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분홍색 리본이었다, 젠장. 우도현 놀려주겠다고 머리에 붙인 리본을 망각하고 있었다. 하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리본과 같은 색을 띠게 되었다. 하진은 얼른 리본을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 요란한 행동에 퍽, 누군가와 부딪히고야 말았다.

“괜찮으세요?”

아씨, 오늘 되는 일이 없네. 하진이 고개를 들어 저와 부딪힌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

머리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친숙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친숙한 감탄사. 일단 친숙한 이유는 매우 낯익은 얼굴이라 그랬고, 감탄사는 정말 감탄할 만한 얼굴이어서 그랬다.

“박하진 씨, 맞죠?”

남자의 외모에 완전히 넋을 놓은 하진이 멍하게 있자, 남자가 먼저 하진을 아는 체했다. 얼굴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였다.

“저 완전 팬이에요. 배우 이강운입니다.”

와, 진짜 이강운이다. 강운의 눈동자가 깊게 하진의 눈동자와 얽혔다. 아무래도 카메라가 이강운 본연의 얼굴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 깊은 눈동자가 뿜어내고 있는 묘한 분위기는 이렇게 가까이서 시선을 부딪쳐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아, 네. 저도 이강운 씨 알아요. 만나서 반가워요.”

악수라도 건네야 할까, 하진이 짧게 고민한 사이 강운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곧바로 맞잡은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요컨대 남자들 사이의 기 싸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벼운 악수는 더더욱 아니었고. 하진의 힘이 풀릴수록 강운은 더 세게 손을 쥐었다.

“어… 아픈데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좋아서 힘 조절을 못 했나 봐요.”

강하게 얽매던 손이 풀림과 동시에 하진에게서 시선을 거둔 강운은 하진이 주문한 커피를 대신 받아들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진은 저릿한 손을 두어 번 털며 생각했다. 손도 크고, 악력도 좋고. 얼굴은 말해 뭐 해. 그냥 한 마디로 박하진 프리패스가 가능한 남자였다.

“혹시 시간 있으세요?”

“시간이요? 왜요?”

“하진 씨랑 얘기해보고 싶었거든요.”

하진의 커피를 하진에게 건네주는 이 낯설면서 자연스러운 행동은 문장 그 자체가 보여주듯이 몹시 이상하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의 호의를 믿지 않는 하진에게 있어선 더욱이 이러한 친절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누군들 이강운의 따뜻한 눈동자를 보곤 거절을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하진 또한 그랬다.

아니, 사실 다 핑계고, 이강운이 건네는 호의는 첫 번째든 두 번째든 감사히 받을 생각인데 그냥 한번 튕겨보는 거였다.

“잠깐밖에 안 돼요.”

“그것도 영광입니다.”

강운이 사뭇 상기된 발걸음으로 카페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뒤를 쫓아가던 하진은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음료를 테이블에 놓곤 메시지를 확인했다.

[형, 10분만 기다려 주세요!ㅠㅠ]

임수찬이었다. 이 새끼,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니야? 매번 빨리 나오던 녀석이 하필 오늘 늦어? 고맙기도 하지, 기특한 녀석. 하진의 이런 불순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주 앉은 강운은 조금 들떠 보였다.

“저 유어 멜로디 플레이리스트도 따로 있어요.”

강운이 제 핸드폰을 하진 앞으로 내밀었다. 유어 멜로디의 데뷔곡부터 해체 전 마지막 곡까지를 담아 놓은 플레이리스트가 하진의 눈에 들어왔다. 하진조차 듣지 않는 곡들이 수두룩했다.

“진짜 팬이시구나. 고마워요, 강운 씨.”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 스물여섯이거든요.”

“아. 그럼 그럴까?”

오랜만에 유어 멜로디의 곡을 본 하진은 애써 담담한 척 강운에게 다시 핸드폰을 넘겼다.

“네. 그럼 전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래.”

유어 멜로디가 해체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하진에게는 버거운 기억이었다. 듣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라 웬만하면 유어 멜로디와 관련된 것은 어떠한 것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렇게 팬을 만날 때면, 솔직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팬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건 도리가 아니니 혼자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전 사실 형이 제일 좋았어요.”

“…….”

“그래서 형 혼자여도 계속 좋아요.”

표정이 좋지 못함을 눈치챘는지 강운이 하진을 흘끗거리다가 위로의 말을 내뱉었다. 거기에 엄지도 치켜든 모양새가 퍽 귀여워서 하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 큰일 났네. 얼굴도 취향인데 성격은 더 취향인 것 같다. 저 순진해 보이는 어린 양을 어디 한번 잘 꼬드겨볼까. 불현듯 하진의 머릿속으로 늑대 같은 생각이 튀어나왔다. 아니지, 자제하자. 아직은 시기상조다.

“나도 너 좋아해 볼게.”

아. 자제한다고 했는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플러팅을 던져버렸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다. 다행인 것은 어린 양이 플러팅을 눈치채지 못한 듯 눈알만 굴리고 있다는 거였다. 이러니까 더 귀엽네.

조금 더 강운을 놀려주고 싶었던 하진이 강운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와 함께 움직인 눈동자가 살짝 어긋나 시야 프레임을 넓혔다. 그리고 하필 그 프레임에 도현이 걸렸다. 순간 하진은 무려 1.2인 자신의 시력을 원망해야만 했다. 도현이 어떤 표정인지,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지가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그 때문일까. 도현의 난처한 얼굴, 그게 자꾸만 하진의 신경을 그곳에 붙잡아뒀다. 하진은 눈을 떼지 못했다. 도현에게서도, 도현의 반대편에서 웃고 있는 여희나에게서도.

희나임을 자각하자 무섭게 범람한 기억들이 돌연 하진을 과거로 이끌었다. 마음속 어딘가에 꽁꽁, 숨겨 둔 과거는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귓가를 윙윙댔다. 언제나 그렇듯 초라한 기억이었다.

‘도현이가 나 좋아한대.’

‘그걸 왜 저한테 말해요?’

‘거슬려서.’

‘뭐가요?’

‘너 항상 도현이랑 붙어 다니잖아.’

‘친구니까요.’

‘남자 좋아하잖아, 너.’

열아홉, 박하진은 불완전했다.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지도 티를 내지 않는 법도 모르는, 그저 미숙한 아이였다. 그 감정에 단호히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었다.

‘누나, 죄송한데요. 남자 좋아하는 건 맞는데 우도현은 안 좋아해요.’

그래서 불안한 감정을 외면하는 것밖에는 방법을 몰랐다. 그건 스물아홉의 박하진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하진 형?”

하진을 과거의 구렁텅이에서 꺼낸 것은 당사자인 박하진도, 여희나도 아닌 제3 자, 이강운이었다. 강운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 하진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운의 시선에 정신을 차린 하진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아, 미안. 머리가 아파서. 우리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하진은 입으론 강운과 말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도현에게 두었다. 방송일 하는 사람 중에 여희나랑 우도현이 동창인 거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저렇게 대놓고 붙어있으면 말이 달랐다. 당장 연예 뉴스 1면에 열애 기사가 나와봐야 조심하지,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게 문제다. 안전에 너무 둔감해. 하진이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까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저 새끼는 왜 쩔쩔매고 있어. 여기 보는 눈이 몇 갠데.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하진이 짜증 섞인 손길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이내 머리가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하진의 엉덩이가 먼저 의자에서 떨어졌다. 뒤이어 하진이 강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 다음에 또 보자.”

강운이 하진을 붙잡으려 했지만, 하진은 이미 도현과 희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 뒤였다. 온갖 소음이 뒤얽힌 1층 복도, 그 사이를 활보하던 하진의 발걸음이 도현의 옆에서 멈췄다. 여태까지 흘끗거리며 도현과 희나를 보던 시선은 하진의 등장으로 인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그 시선들에 보답이라도 하듯 하진이 눈꼬리를 예쁘게 말아 접으며 도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있었네.”

흠칫. 손끝에서 도현의 떨림이 느껴졌다.

“가자, 도현아.”

하진의 난데없는 등장에 희나가 눈동자를 키웠다. 그러나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단언컨대 도현이었다. 제 어깨에 올려진 하진의 손도, 저를 보며 ‘도현아’라고 부르는 하진의 목소리도, 도현에겐 전부 낯선 것투성이였다.

“…뭐야?”

혼란스러움이 들어찬 물음에 하진은 도현의 목덜미로 얼굴을 들이밀곤 은밀히 속삭였다.

“우도현 구출 작전.”

코를 찡긋거리는 하진에게서 도현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저거. 이어 하진이 맞장구라도 치라는 듯 도현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하!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진이 진짜 오랜만이다.”

희나가 가증스러운 얼굴로 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을 빤히 보던 하진은 도현의 어깨에 올려놨던 제 팔을 거두곤 악수에 응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무시하는 건데, 안타깝게도 보는 눈이 너무 많은지라 그러지는 못했다.

“되게 안 반가운데 반가운 척해야겠죠?”

“여전히 나를 경계하네.”

“경계 아닌데. 경멸이에요.”

푸하! 희나의 입에서 예고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지?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웃음 버튼이 눌린 거지?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는데 여희나라면 침이 뭐야. 가래도 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진이 진짜 그대로구나.”

“누나도 뻔뻔하신 거 그대로네요.”

“우리 앞으로 자주 볼지도 모르는데 서로 얼굴 붉히지 말자.”

“자주 볼 일이 있나.”

“아! 아직 못 들었구나?”

즐겁다는 듯 손뼉을 치는 희나를 하진이 불안한 눈길로 바라봤다. 어째 기분이 싸하다. 하진의 격분이 미간에 드러날수록 희나의 입꼬리는 더욱 올라가기만 했다. 어느 정도 상황을 즐긴 듯 희나가 입을 뗐다.

“나 드라마 캐스팅됐어.”

“…….”

“너와 나의 거리.”

아. 젠장, 젠장!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아, 왜! 혓바닥 위로 갖은 욕지거리가 굴러다녔다. 여희나랑 엮여서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데뷔 무대 때도 그랬고, 연말 시상식 때도 그랬다. 그중 최악은 열아홉 때였는데, 아마도 이번 일로 인해 최악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재수 옴 붙은 아홉수 스물아홉이네. 씨팔, 굿이라도 해야 하나.

“그래도 우리 붙는 씬은 별로 없을 거야.”

“듣던 중 다행이네요.”

“날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니야?”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내가 미안했어.”

“뭐가 미안하신데요? 저한테 미안해하실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하진이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걸친 채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도 이만하면 욕도 한번 안 하고, 박하진 잘 절제했다. 물론 자꾸만 달싹이는 입술이 누군가 톡, 건들기만 해도 우수수 욕을 뱉어버릴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하진은 더욱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진의 노력을 모를 리 없던 도현이 그 사이에서 둘을 제지했다.

“둘 다 그만 해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싫어 개입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러다간 다음날 뉴스 1면에 [박하진, 여희나 대낮의 치정극! 원인은 우도현 대표?]같은 기사가 나올 것 같았다. 아니지.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인데 지금쯤 벌써 퍼지고 남았을지도. 뭔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일 듯했다.

“우리 먼저 가볼게요.”

도현이 말한 우리는 하진과 본인이었다. 그 우리에 얼떨결에 끼게 된 하진은 보다시피 도현에게 손목이 붙잡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건물을 빠져나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야, 아파.”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도현이 하진의 앓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놔버렸다. 그제야 우뚝, 멈춰 선 하진과 도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동시에 눈을 맞췄다. 미친. 어디까지 온 거야? 몰라. 서로의 눈동자가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하진은 아린 손목을 매만졌다. 하얀 손목이 적나라하게 붉은 자국을 드러낸 채였다.

“네가 꽂았어?”

“뭐?”

“여희나. 네가 드라마에 꽂았냐고. 너 투자자 대표라며.”

역시 고래 싸움엔 새우가 등 터지는 게 맞는 모양이다. 얼른 발을 뺐는데도 고래는 새우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새우도 고래만큼 몸을 부풀리면 된다.

“상상력도 풍부하다. 내가 왜?”

도현이 오히려 당당하게 하진에게 되물었다. 새우의 당찬 모습에 고래가 살짝 주춤했다.

“어? 그거야….”

고등학생 때 좋아했으니까? 음, 역시 이건 아닌가. 본인이 생각해도 좀 터무니없는 연관성이라서 하진이 뒷말은 꺼내지 않았다.

“아니면 말고.”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나 지금 되게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

“…저기 본인이 먼저 말 거신 건 아시죠?”

하진의 변덕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 기가 막혔으나 도현은 그래도 참았다. 아까는 그렇게 예쁘게 웃더니 지금은 잔뜩 성난 얼굴이 좀 밉긴 했지만 어쨌든 방금 자신을 도와준 건 박하진이었으니까.

“매니저 기다려?”

“어.”

“여기 공원이라 차 진입 불가야. 정문으로 나가자.”

“미친놈이 어디까지 끌고 온 거야?”

“묵묵히 끌려온 네 잘못도 있거든?”

“꺼….”

그때였다. 꾸륵-. 배고픔에 헐떡이던 누군가의 배에서 신호를 내보냈다. 늘 아침을 챙겨 먹는 도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명.

“배고파?”

“응? 아니? 내 배 아니야. 나 배 안 고픈….”

꾸르르릉, 꼬륵! 씨발. 마지막 확인 사살까지 완벽했다.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이건 박하진 배에서 밥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였다. 또한, 박하진 수치심이 넘실대는 소리기도 했다. 하진이 고개를 숙였다. 달팽이관을 타고 도현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큭. 밥 먹으러 갈래?”

저렇게 처웃으면서 잘도 너랑 밥을 먹겠다, 이 새끼야.

“내가? 너랑? 왜?”

“네가 나 구해줬잖아. 고마우니까 밥 살게.”

꺼지라고 단호히 거절하려던 차에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빌어먹을 임수찬. 이 새끼만 빨리 데리러 왔어도 이런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었을 테다. 그러니까 이건 다 임수찬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에 따라 하진은 수찬의 전화를 거절했다. 곧바로 문자가 왔다.

[형형 죄성해야 진짜 죄송해오 저 지금 주차장잉에야 형엉디세여ㅠㅠㅠㅠㅠㅠ]

얼마나 다급했는지 문장이 죄다 오타였다. 하진한테 욕먹을 생각에 수찬은 손이 덜덜 떨리는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도 하진의 배꼽시계는 계속 울려댔다. 하진이 시간을 확인하곤 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임수찬.”

-헉. 네, 형. 진짜 빨리 갈게요. 죄송해요.

“아니야. 나 우 대표랑 밥 먹고 바로 집 갈 거니까 너도 회사로 가.”

-아, 혀엉…. 제가 잘못했어요. 형 또 이상한 곳 가시면 저 대표님한테 죽어요, 진짜….

수찬이 시종일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이로 언뜻 하진을 향한 불신이 비쳤다. 아니, 불신은 둘째치더라도 임수찬은 순식간에 하진을 이상한 곳 가는 형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이에 하진이 발끈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 진짜거든? 야, 네가 받아 봐.”

저가 백번을 말해도 믿지 않을 게 뻔해 도현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뭔데? 갑작스럽게 받아든 핸드폰을 가만히 보기만 하던 도현은 하진의 재촉에 목소리를 내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니, 누군지는 안 중요한데 제발 우리 하진이 형이랑 이상한 곳 가지 말아주세요.

“…네?”

-…건전한 호텔까지만요. 제발요!

“그, 그럴게요.”

아, 얼떨결에 수긍해버렸다. 사람이 이렇게 간절하게 얘기하니 아니라고 변명마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도현이 어벙한 얼굴로 귀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임수찬이 뭐래?”

“너랑 건전한 호텔까지만 허용이라는데.”

“…이게 돌았나. 넌 뭐라고 했는데.”

“…그러겠다고.”

임수찬보다 이 새끼가 더 돌았네. 하진의 얼굴이 단숨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손에서 놔버릴 뻔했다. 그대로 즉사할 뻔한 핸드폰은 다행히 수직 낙하 전에 도현이 낚아챔으로써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너 도대체 어떤 이상한 곳을 다니길래 매니저가 이 난리야?”

“그냥 과보호하는 거야. 클럽도 딱 두 번 가 봤다.”

“그럼 우리 하진이 나랑 호텔 갈까?”

“미친놈이 내가 너랑 호텔을 왜 가?”

거친 언행을 쏟아내는 하진이 그저 즐거운지 도현은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답했다.

“호텔 레스토랑 가자는 건데 왜 이렇게 흥분해?”

“…….”

“아, 혹시 다른 쪽으로 흥분한 건가?”

야릇한 도현의 목소리가 하진의 귓불을 자극했다. 그 숨이 닿는 곳곳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왠지 진 듯한 기분에 하진은 도리어 큰소리로 응수했다.

“흥분 같은 소리 하네. 네가 아무리 주물럭대 봐라! 서나!”

“허. 야, 진짜 만진다?”

“어! 만져 봐라!”

“진짜 만져?!”

“만지라니까? 내가 비벼줘?”

도현과 하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양손을 포박한 채 중간 지점에서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남사스러운 단어들의 향연은 두 사람의 대치를 더욱 긴장감 있게 만들었다. 그러다 하진이 진짜 비비겠다는 기세로 도현에게 몸을 붙이려 할 때였다.

“크흠.”

낮은 헛기침 소리가 정확히 두 사람을 겨냥했다. 그와 동시에 둘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옮겨갔다. 그곳엔 검은 승용차 앞에서 못 볼 것이라도 본 듯이 망측한 얼굴로 선 김 비서가 있었다.

“두 분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우선 차에 타시는 게….”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이 나라의 가장 김 비서가 두 사람을 차 안으로 쑤셔 넣었다. 사회적 지위도 있는 양반들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뭐 하는 건지, 참. 불평불만은 속으로 삼켜내는 김 비서였다.

***

“야. 일어나.”

제 어깨를 흔드는 거친 손길에 하진이 힘겹게 눈을 떴다. 아, 언제 잠들었지. 차에 올라타자마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와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그 뒤론 기억이 없었다. 오늘은 새벽 촬영 마치고 잠도 못 잤으니 졸릴 만했다. 하진이 아직도 몽롱한 정신으로 웅얼거렸다.

“머야…. 도착했어?”

“아니. 여기 우리 회사.”

아, 회사…. 아까 김 비서님 먼저 퇴근시켜야 한다고 회사로 가라고 한 건 얼핏 기억난다. 그럼 아직 식당은 아니란 말이네. 조금만 더 자고 싶다. 그 욕망에 잠식된 하진이 저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자 도현이 억지로 하진의 눈두덩이를 들어 올렸다.

“아! 미친. 뭐야?”

하진의 입에서 주저 없이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잠자는 동안은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아, 아니지. 그건 먹을 때구나. 아무튼 자다가 누가 깨우면 예민해지는 거야, 만고불변의 진리 아닌가.

“일어나. 조수석으로 가.”

그런데 우도현은 그런 진리도 모르는 모양이다. 분명 짜증스럽게 좁혀진 미간이 건드리지 말라고 압박 중일 텐데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깔을 뒤집는 녀석의 손길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치워라.”

“일어나면 치울게.”

어떻게든 다시 감으려는 하진의 속눈썹이 안쓰럽게 바들거렸다. 물론 하진 본인은 안쓰럽다고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이를 보는 도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러다가 결국 쿡하고 입술 새로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리곤 정적.

“…….”

“…….”

도현이 이를 악문 하진을 보곤 조용히 손을 뗐다. 하진의 자유로워진 눈두덩이가 이내 들어 올려지더니 불퉁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아마 자신의 흉악한 몰골이 우도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일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진이 먼저 욕을 내뱉냐, 도현이 먼저 사과를 하냐의 싸움.

도현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백기였다. 도현의 손이 불쑥, 하진의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 낯선 감촉에 하진이 화들짝 놀라자 태연하게 말을 덧붙이는 도현이었다.

“힘들어하길래 내가 안고 가려고.”

“…뭐?”

이 당황스러운 백기에 하진은 욕도 나오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도현의 손은 부지런히 하진의 허리를 파고들어 꽉, 하진을 포박했다.

“…이 씨발. 간다, 가.”

결국, 진정한 백기를 든 사람은 하진이 되었다. 하진은 제 허리께에 감겨있는 도현의 손을 찰싹 때리곤 있는 힘껏 내팽개쳤다. 이어서 쾅, 거칠게 뒷문을 열어젖힌 하진이 재빨리 조수석으로 몸을 옮겼다. 도현 역시 하진을 따라 운전석에 앉았다.

“왜 조수석으로 오래?”

“나 운전하는데 네가 뒤에 있으면.”

“…….”

“내가 네 운전기사 같잖아. 기분 더러워.”

별 거지 같은 이유 다 보겠네. 하진이 속으로 구시렁댔다. 저런 새끼랑은 상종하는 것도 귀찮아서 아예 몸을 돌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린 하진은 곧 제 가슴팍을 향해 있는 도현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변태 새끼도 아니고 남의 가슴은 왜 봐?”

목덜미라면 키스 마크라도 보이나 싶어서 걱정했을 텐데 가슴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다행이었다. 두꺼운 맨투맨 아래로 젖꼭지가 드러날 리는 만무하니까. 하진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던 도현이 난데없이 하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흡. 그 시간이 너무 찰나여서 하진은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도현의 볼이 하진의 콧방울 근처까지 왔다. 작게 내쉰 숨마저 크게 들릴 만큼의 가까운 거리였다.

“뭐하냐.”

도현이 하진의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그 아찔했던 거리는 생각보다 허무한 손길로 마무리되었다.

“벨트를 하도 안 매길래 해달라는 줄 알고.”

찰싹. 도현은 오늘만 두 번째로 하진에게 손등을 맞았다. 아야. 도현이 손등을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능청스럽게 웃는 꼴이 하진은 영 탐탁지 않았다. 저 입꼬리를 비틀고 싶었다.

“난 벨트는 가터벨트가 좋더라.”

이내 하진이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를 걸쳤다. 손은 이미 도현의 가슴 부근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끈적하고, 야릇한 손길이 도현을 훑어 내렸다. 단단한 가슴팍이 움찔거렸다. 내쉬는 숨이 금세 더워졌다.

“다시 잠이나 자.”

그렇게 말하면서 도현은 퍽 태연하게 손바닥으로 하진의 두 눈을 가렸다. 언뜻 도현의 입꼬리가 비틀린 것 같기도 하다. 돌연 어두워진 시야에 그제야 하진은 도현을 괴롭히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하지만 도현 말대로 다시 잠이나 자기엔 이미 정신이 또렷해진 상태였다.

저번에 했던 라디오 반응이나 볼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실검 1위가 [이강운]이다. 2위는 [이강운 보이는 라디오]. 반가운 마음에 클릭하니 방금 막 뜬 강운의 라디오 기사들이 쭉 나왔다. 아까도 느꼈지만, 고놈 참 잘생겼다.

“아, 우도현만 아니었으면 이강운이랑 한 번 하는 건데.”

입맛을 다시며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었다.

“…뭐?”

단언컨대 정말 무심코였다. 그냥 저도 모르게 이강운 얼굴 보면서 나온 감탄사, 딱 그 정도. 그니까 우도현이 저렇게 핸들을 쥐었던 손을 풀면서까지 저를 노려볼 만한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진이 그 신경질적인 시선을 따라갔다. 마침내 멈춘 곳은 제 손에 들린 핸드폰, 그 안을 가득 채운 강운의 기사 사진이었다. 우도현의 눈썹이 볼썽사납게 치켜 올라간 걸 보니 짜증이 난 모양인데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그 모습이 어쩐지 하진을 즐겁게 만들었다. 저 반듯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은 언제봐도 짜릿하니까.

“뭘 한다고?”

“뭐겠어.”

하진이 무심하게 답했다.

“섹스지.”

공기 반, 소리 반 섞인 목소리는 덤이었다. 야릇하게 울려 퍼진 섹스란 단어에 도현은 속수무책으로 얼굴을 구겼다.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마치 박하진과 이강운 사이에 방해꾼이라도 된 듯 불쾌하기까지 했다.

“넌 대가리에 든 게 섹스밖에 없지?”

“아니? 하나 더 있지.”

“…….”

“어떻게 하면 우도현 엿 먹일 수 있을까 궁리.”

하진의 손이 단번에 도현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 질펀한 손길이 맑은 미소와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저 얼굴로 이러는 건 반칙이지, 씨발. 도현은 금방이라도 흥분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박하진 손길에 흥분하는 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하는 도현이었다.

“이건 뭔데.”

도현의 시선이 제 허벅지 위를 돌아다니는 손길에 닿았다. 요리조리 움직이는 손가락이 망측하기 그지없었다.

“궁리의 결과를 실천하는 중.”

그와 동시에 툭, 툭, 툭. 튕기는 손가락을 따라 허벅지에 진동이 울렸다. 그것은 작은 자극이었지만 도현에게는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상당히 능숙한 손놀림이 딱 도현이 안달 낼 만큼만 파고들었다. 도현의 바로 옆까지 얼굴을 디민 하진이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농익은 손길은 여전히 도현의 아래를, 그 중심 부근을 맴도는 채였다. 도현을 올려다보는 시선은 기어코 도현의 흐트러짐을 볼 작정인지 집요하기만 했다. 점차 도현의 입이 더운 숨을 뱉어냈다.

“하진아.”

낮은 미성이 부드럽게 하진을 불렀다. 곧이어 도현은 하진의 손을 붙들어 제 손을 그 위에 포개었다.

“우리….”

말 줄임표가 만들어낸 공백. 그 위를 도현이 느리게 걸어 나갔다. 하나, 둘. 하나, 둘. 하진의 손등에서 시작한 손가락은 끈적한 자국을 남기며 하진의 팔뚝 위를 점유하더니 이내 팔꿈치 부근에서 멈추었다. 그 손길이 닿는 족족 하진이 움찔거렸다. 빼내려 했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러다 훅, 도현이 하진을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밥은 나중에 먹고 다른 거 먼저 먹을까?”

진득하게 얽힌 시선엔 욕정이 가득했다. 어느새 하진이 그랬던 것처럼 도현의 손은 하진의 허벅지 위에 놓인 채였다. 그것이 조금씩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미친놈.”

하진은 꽤 덤덤히 반응했다. 툭하고 도현의 손을 떼어내는 손길도 건조하기만 했다. 왈왈 대기를 바랐는데 재미없게. 그에 흥미가 떨어진 도현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도현은 보지 못했다. 하진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것을.

***

평소처럼 으르렁대지도 않은 채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도현과 하진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 그래, 차를 멈춰 세운 것을 보니 목적지는 맞는 것 같은데 어째서 여기가 목적지인지 모르겠다. 너무도 익숙한 건물 주차장을 훑은 하진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현에게 물었다.

“이 건물에 식당이 있나?”

“아니.”

“그럼 이 건물에 카페가 있나?”

“아니.”

“…….”

“이 건물엔 박하진 집이 있지.”

아, 우리 집. 그렇구나.

“…어?”

“뭐해, 안 내리고?”

운전석에선 언제 내렸는지 도현이 조수석 차 문을 열며 말했다. 그리곤 그대로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하진도 속아 넘어갈 뻔했다. 혹시 잠결에 우도현한테 집으로 가라고 말했었나? 아니면, 집에서 밥 먹자고 그랬나?

“야, 잠깐만.”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도달한 도현을 하진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왜?”

왜냐고? 질문을 던질 사람은 저인데 선수를 쳐버린 도현 탓에 하진은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도현은 하진 몰래 슬며시 웃고는 다시 뒤를 돌아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 하진도 일단 올라탔다. 곧 문이 닫히고, 도현이 12층을 눌렀다.

“너 내 뒷조사 해?”

“이번엔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일까?”

“내 집 12층인 거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최윤조한테 말하는 거 들었어. 집 비밀번호 얘기하기 전에.”

역시 박하진 입이 방정이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하진이 아랫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도현이 거울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살폈다. 보는 재미가 있는 얼굴이었다. 짜증 냈다가 기죽었다가.

“아니, 근데 집주인이 초대도 안 했는데 찾아가는 건 어느 나라 예절이야?”

지금은 돌연 화를 내는 얼굴이란.

“아, 초대. 그럼 지금 허락 맡지 뭐. 가도 돼?”

“안 돼, 미친놈아. 우리 집에 먹을 거 아무것도 없어.”

“밥 먹으러 온 거 아닌데.”

“뭐?”

“다른 거 먼저 먹자니까.”

흐흥. 도현의 작게 말아쥔 주먹이 하진의 가슴팍을 퉁, 때렸다. 그게 하진에게는 망치로 내려친 것보다 큰 충격을 가져왔다. 미친. 흐흥이란다. 먹은 것도 없는데 위액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하진이 반사신경으로 도현의 정강이를 차버리고 말았다.

“아!”

“어, 미안. 혐오스러운 걸 봐서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갔네.”

“진짜 존나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건데 당연히 아파야지.”

“그래도 용서해줄게.”

“안 해줘도 되는데.”

“대신 집 가는 거 허락해줘.”

“아니, 용서 필요 없다니까?”

우도현은 낯짝도 두꺼운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뻔뻔하게 남의 집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지. 그것도 주인한테 어서 열라면서 턱짓까지 한 채로 말이다. 그냥 확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말고 다시 내려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인 듯했다. 그에 하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자 도현이 다급히 외쳤다.

“집밥!”

“집합?”

“아니, 집밥! 집밥 해준다고!”

지이잉-.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던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하진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집밥이라니. 이 얼마나 정겨운 단어인가. 하진에게 집밥이란 1년에 몇 번, 서 대표가 챙겨주는 반찬을 즉석밥에 얹어 먹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가끔 너무 먹고 싶을 땐 한정식집을 가는 정도. 이 지경이니 집밥이라는 도현의 말에 혹할 수밖에.

“네가 집밥을 왜 해줘?”

솔직히 어서 들어가라며 도현을 집으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그건 또 자존심이 용납 못 하는지라 괜히 한 번 툴툴대봤다. 그에 도현은 집 앞에 놓인 뭔지 모를 흰 봉투를 들어 하진 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러자 커다란 봉투 밖으로 삐죽, 대파 한 단이 튀어나와 하진과 눈을 맞춘다.

“이 주위엔 김치찌개 잘하는 집이 없어서.”

도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평소 같으면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냐고 질책했을 하진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몹시 만족스러운 대답이니까. 김치찌개, 아주 좋은 선택이다. 우도현이랑 모처럼 마음이 맞네. 피식, 웃음을 흘린 하진이 도어락 앞에 섰다. 이내 도현이 볼까 싶어 필사적으로 도어락을 가리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야, 보라고 해도 안 봐.”

절대 들키지 않겠다는 일념 아래 이리저리 움직이는 하진의 뒤통수가 퍽 얄미웠다.

“어. 보라고 안 해.”

빈정대는 대답마저 얄미웠다. 아니, 음식 만들어주겠다고 친히 재료까지 배달시킨 사람한테 이게 보일 태도인가?

“안 봐, 안 봐. 뒤돌았다, 됐지? 그리고 1234. 번호 이미 알거든?”

“바꿨는데?”

“어?”

“내가 최윤조 뭘 믿고 번호를 그냥 알려줘.”

“오, 웬일로 빠릿빠릿….”

띠리릭-. 안타깝게도 도현의 칭찬은 하진에게 닿기도 전에 강제로 끝이 났다. 휙, 집으로 들어가버린 하진 때문에. 도현이 뒤를 돌자 느리게 닫히고 있는 문이 보였다. 젠장. 닫히기 전에 발부터 욱여넣었다. 복숭아뼈와 철문이 부딪쳤다. 존나 아프다, 시발. 박하진한테 조인트 까였을 때만큼 아팠다.

“그러게 빨리 들어왔어야지.”

말과 달리 하진의 입가엔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애써 화를 삭이며 꾸역꾸역 하진의 집으로 들어온 도현은 예상은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텅 빈 집안에 살짝 주춤했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도 보이는 거라고는 거실에 소파, 식탁, 방에 침대, 행거가 전부였다. 이렇게 휑하게 살 거면 뭐하러 큰집에 사나 싶을 정도로 하진의 집에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 옆에 화장실이야. 손부터 씻어.”

이 냉기가 익숙한 모양인지 하진은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갔다. 잘못하다간 밥 먹다가 콧물을 같이 먹게 생겼다. 보일러 고장 난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고개를 저으며 화장실로 걸어가던 도현의 발에 쿵, 무언가가 차여 쓰러졌다.

“야.”

“왜.”

“이거 모르고 엎었는데.”

도현이 난처하다는 듯이 말을 멈췄다. 그의 시야에 담긴 것은 거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휴지통, 그 속에서 나온 콘돔 2개였다. 사용 후, 정갈하게도 묶어 놓은 모양새였다. 침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하진이 그 광경을 보고는 경악했다.

“…너 씨발, 가지가지한다.”

하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자기가 치우겠다며 쭈그려 앉은 우도현을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 그에 철퍼덕, 도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확, 밟아버릴까. 널브러진 휴지 조각을 쓰레기통에 넣은 하진이 우도현 배 위에 발바닥 얹는 시늉을 했다. 딱 시늉만 했는데 뒤이어 들려온 도현의 말에 진짜로 밟아버릴 걸 후회했다.

“두 사람 거야? 아니면 두 번 한 거야?”

저딴 말을 우도현은 참 싱그럽게도 내뱉었다. 녀석에게 대답할 가치도 못 느낀 하진이 그대로 그것을 집어 화장실 쓰레기통에 넣었다. 말라비틀어진 쓰레기였어도 손이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거품을 잔뜩 내서 두어 번을 더 닦고 나서야 손 씻기를 그만두었다.

“두 사람?”

“아, 두 번 한 거야! 두 번! 됐냐?!”

화장실까지 찾아와 물어대는 도현에게 하진이 그만 손 닦던 수건을 던져버렸다. 주륵-. 정확히 얼굴을 맞고 떨어진 수건이 도현의 발등에 안착했다. 아. 얼굴은 좀 심했나.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여 수건을 줍는 도현에 하진이 미안해지려던 찰나였다.

“두 사람 먹을 만큼만 하면 되냐고 물으려던 건데.”

“…….”

“두 번 했다는 TMI를 들어버렸네.”

“…….”

“흐흥, 부끄러워라.”

아, 씨발. 또 나왔다, 저 흐흥. 존나 약 오르네, 저거. 하진의 속마음을 들은 모양인지 도현이 얼른 자리를 피했다. 녀석의 가벼운 발걸음마저 저를 놀리는 듯해서 하진은 밥이고, 뭐고 그냥 도현이 없는 곳에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

***

“진짜 아무것도 없네.”

하진의 냉장고는 정말 없으니만 못했다. 식재료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하진이 모델인 맥주 회사의 물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 섹스는 두 번이나 열심히 했네. 그 시간에 차라리 밥을 차려 먹지. 도현이 하진 몰래 혀를 끌끌 차며 봉투 속 재료들을 냉장고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거 배달시킨 거야?”

“어. 룸 아니면 식당에선 밥 먹기 힘들잖아. 김 비서님이 그럴 거면 집에서 먹으라길래.”

“그럼 너희 집 가면 되잖아.”

“여기가 더 가까웠어. 김 비서님이 재료 배달도 시켜줬고.”

“김 비서님이 센스가 좋으시네.”

“센스 넘치는 우도현 옆에서 몇 년을 같이 있었으니 좋을 수밖에.”

저 새낀 잘 나가다가 꼭 저렇게 핀트가 나간다니까. 도현의 기승전 자기 자랑에 하진이 얼굴을 구겼다. 장시간의 공복으로 하진에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르륵, 하진이 식탁 위로 늘어졌다.

“뭐 도와줘?”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응. 그래서 가만히 있으려고.”

“아, 김치 썰어도 돼? 부엌 더러워지는 거 싫으면 말해.”

“맘대로 주거 침입한 새끼가 할 말인가?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하진이 손을 훠이 저으며 알아서 하라는 듯 대답했다. 여전히 몸은 식탁과 물아일체를 이루고 있어 눈동자만 데구르르 도현의 뒷모습을 좇았다.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자신과는 달리 능숙해 보이는 도현이 꽤 낯설었다. 아닌가. 그냥 제집 부엌에 누가 있는 게 낯선 건가. 그 이질감은 하진이 도현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만들었다.

“너 원래 요리할 줄 알았나?”

“어릴 때는 조금? 내가 축제 때 볶음밥도 해줬었잖아.”

“축제?”

아예 쿠션처럼 팔뚝까지 접고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던 하진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탁탁탁. 식칼 소리와 섞여 듣지 못했는지 도현은 대답이 없었다. 축제라. 아, 고2 때 그 연극제 말하는 건가. 연극제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장면에 하진은 그만 고개를 파묻고야 말았다. 그때 무대에서 넘어졌었지, 아마. 관객석에서 우도현이 뛰쳐 들어온 거 진짜 웃겼는데. 그거 때문에 우리 담임한테 엄청나게 혼나고. 큭큭.

“재밌었는데.”

“응?”

“…어, 아니….”

“…….”

“별로 맛없었다고.”

본인도 모르게 하진은 변명하듯 말을 바꿨다. 그리곤 도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앞치마 줄까?”

“빨리도 물어본다.”

“달라고 하지.”

“흰옷인데 당연히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박하진 센스 없는 건 여전하네.”

“…씨발, 안 줘. 야, 네 알아서 해.”

서랍장에서 꺼낸 무언가를 하진이 거실 한가운데에 패대기쳤다. 딱 봐도 새것 티가 나는 하늘색 앞치마였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도현의 입가가 일순간 위로 올라가더니 건수 하나 잡은 양 칭얼대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안 줘? 너무해. 나 지금 너 먹이려고 밥 차리고 있는데.”

“…….”

“에휴, 매정하다, 매정해!”

아나, 저 새끼 또 지랄이네. 도현의 의중을 파악한 하진이 귀를 막고 도현을 무시해봤지만, 그럴수록 도현의 징징댐은 심해졌다. 뒤통수라도 한 대 치고 싶은데 지금 우도현 손에 식칼이 있어서 참는 거다, 씨팔. 결국, 항복한 하진이 나뒹구는 앞치마를 집어 도현에게 내밀었다.

“내가 지금 손이 없네.”

“그래서 뭐.”

“입혀줘.”

“네 손을 진짜로 없애버리는 수가 있어.”

하진의 무시무시한 발언에도 도현은 그저 고개를 숙여 하진에게 갖다 댈 뿐이었다. 이내 가만히 있는 하진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바로 옆 가스레인지에서 타닥타닥 기름이 튀어 올랐다. 아, 따가워. 하진이 눈을 치켜뜨며 도현의 목에 앞치마를 걸었다. 콱, 목 졸라 버릴까.

“너 성격 좆같은 거, 회사 사람들은 아냐?”

“모르지.”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는데 몰라?”

“너만 나한테 좆같이 굴어. 그래서 나도 특별히 너한테는 좆같이 구는 거야.”

“와, 특별 대우 눈물 나게 고맙네요.”

차마 목은 조르지 못한 하진이 허리끈이라도 있는 힘껏 조였다. 윽, 야! 도현이 비명을 지르자 하진은 그제야 손에서 끈을 놓곤 식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식탁엔 어느새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김이 나는 즉석밥이 하진 앞에 놓여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너 먼저 먹어봐.”

“왜,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어. 무슨 꿍꿍이라도 있으면 어떡해.”

하진의 맞은편에 앉은 도현이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왕, 물었다. 그리곤 숟가락으로 김치찌개도 크게 한 술 퍼서 밥과 함께 입안 가득 넣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에 하진도 숟가락을 들었다.

“와, 뭐야. 맛있어.”

감탄사를 내뱉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음식은 맛있었다. 진짜 딱 집밥 같아서 더 좋았다. 하진의 젓가락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도현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계란말이 하나를 하진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하진이 줄곧 음식에만 가 있던 시선을 들어 도현에게 던졌다.

“뭔데.”

“애정 표현?”

“지랄.”

“사랑을 담은 말인데 말본새 그게 뭐야.”

“아까부터 먼저 약 올린 건 너거든?”

“사과할게.”

“사과가 제철이 아니라 그런가. 존나 맛없네.”

“하진아. 지금 사과 제철이야.”

“…이 씨발. 그래, 너 유식해서 좋겠다.”

“이건 그냥 상식인데.”

탁-! 한없이 빈정대는 도현에 제대로 짜증이 난 하진이 그대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안 먹어.”

“에이, 미안해. 안 그럴게. 먹어. 응? 먹자.”

진짜 간절하게 빌어도 안 먹을 거다.

“음식에는 죄가 없잖아.”

“네가 만든 음식은 죄야. 너나 처먹어.”

“음, 맛있다. 진짜 안 먹어? 먹어주면 좋겠는데.”

“…….”

…먹을까? 우도현 말마따나 음식이 무슨 죄가 있다고. 오히려 남기면 벌 받지. 절대로 우도현 음식에 혹한 거 아니다. 그냥 안 먹으면 계속 질척댈 것 같아서 먹어주는 거다. 이윽고 하진이 밥 위에 덩그러니 있는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죄는 우리 무식한 하진이한테 있는 거지.”

하진은 그대로 입을 열어 내용물을 뱉어냈다.

“당장 꺼져. 우리 집에서 나가.”

“나 이제 한 입 먹었는데….”

“3초 안에 안 나가면, 주거침입으로 신고한다.”

“일.”

“…….”

“이.”

이번엔 장난이 아니었다. 잔뜩 성이 난 하진의 미간이 이를 증명했다. 하진이 당장이라도 신고할 태세를 취하자 도현이 서둘러 하진을 제지하며 사과했다.

“미안해. 진짜 너 화내는 게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놀렸….”

급박한 나머지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한 속마음이었다. 그에 본인이 더 놀란 도현이 헙, 입을 틀어막았다.

“…삼 센다. 얼른 꺼져.”

아무리 눈치 없는 도현이라도 여기서 안 꺼지면 목숨을 부지하긴 힘들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도현이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제 코트를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하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품은 채였다. 그러나, 역시나 헛된 희망이었다. 하진은 나가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듯 도현의 뒤를 바짝 따랐다.

“하진아.”

“뭐.”

눈꼬리를 내린 도현이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시켜줘….”

“…….”

“박하진 명예 요리….”

사-. 아련한 도현의 말은 거세게 닫힌 문에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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