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풋워크(Footwork)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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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워크(Footwork)

한 달 만에 밟는 한국 땅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유난스럽다고 말할 정도로 도현이 내딛는 발걸음은 유달리 들뜬 채였다.

대표 자리에 오르면 해외로 눈 돌리기 쉽지 않으니 시야를 확장하고 오라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미국 출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미국에서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는 제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W 엔터 본부장 자리에 있으면서 연예계 사건·사고는 꽤 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미국은 미국이었던가. 연습실에서 마약 파티를 여는 그 정신머리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 중 하나이며, 그러다 경찰까지 들이닥쳐 총 맞아 뒈질 뻔한 건 제 인생 통틀어 가장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다. 아마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한들 쉽게 바뀌진 않을 것 같다.

말 그대로 지옥과 같은 나날 끝에 드디어 오늘, 도현은 그 지옥으로부터 탈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짐 카트를 미는 손이 설렘으로 가득했다. 곧이어 보이는 입국장 문에 도현의 설렘과 흥분은 극에 다다랐다. 때마침 저를 마중 나왔을 김 비서에게 전화가 오니 정말 한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됐다.

“네, 김 비서님. 저 지금 나가….”

…요?

삐끗. 목소리도 발걸음도 순식간에 볼품없이 어긋났다. 원인은 입국장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화려한 플래카드.

[우도현 (구) 본부장 (곧) 대표이사님의 입국을 환영합니다.]

저거 씨발, 초상권 침해 아닌가. 누가 저기다가 얼굴 박아 넣으라고 했지. 도현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켜내며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김 비서를 애써 외면했다. 눈이 마주쳤지만 마주치지 않았다고, 저 남자는 모르는 남자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찰나, 그 모르는 남자가 도현에게 소리쳤다.

“대표님!”

아침 든든히 드시고 오셨나 보다. 목소리 한번 우렁차시네. 이럴 줄 알았으면, 꼭두새벽에 올 걸 그랬다. 김 비서가 다시 자신을 부르려 하자 도현이 재빨리 김 비서에게 뛰어가 입을 다물도록 했다.

“아니, 김 비서님. 이게 지금 뭐예요!”

“한 달 만에 한국 들어오시는 건데 쓸쓸하실까 봐 준비했습니다.”

김 비서의 철저함이 이런 곳에서까지 빛을 낼 줄은 몰랐는데. 하. 도현이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이 망할 광경을 마무리 지었다. 자연스럽게 제 짐을 받아들곤 뿌듯해하는 김 비서를 책망할 정도로 도현은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출장은 어떠셨어요.”

“아주 개판이에요. 누가 미국 아니랄까 봐 연습생으로 마약 하는 애가 들어오질 않나, 연습실에서 광란의 파티를 열지 않나. 한 달 동안 그 빌어먹을 아메리칸 마인드 코리안 마인드로 개조해놓느라 죽을 뻔했습니다.”

“총 안 맞으신 게 다행이네요.”

“그것도 이미 맞을 뻔했습니다. 전 정말 앞으로 한국에 뼈를 묻을 거예요.”

한 달여간의 미국 출장이 얼마나 고됐는지는 도현의 상한 얼굴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잘생기긴 했으나 뭐랄까. 얼굴에 핏기가 없고 좀 수척해졌다고나 할까. 제 대표의 몰골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안쓰러워지는 마음에 트렁크에 짐을 넣는 김 비서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 사이, 도현은 까슬한 볼을 매만지며 반가운 한국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역시 한국은 빠름의 민족이었던가. 대낮부터 뭐가 그리들 바쁜지 하나 같이 손에 카메라를 들고는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따라 눈길을 돌린 도현이 어느새 수십 개의 카메라가 자리 잡은 곳을 가리키며 김 비서에게 물었다.

“김 비서님, 제가 그새 유명 인사가 됐나 보죠?”

“대표님 찍으러 온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도현의 실없는 농담에 김 비서가 조수석 차 문을 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누구?”

“박하진 씨요.”

잠시 내려앉은 침묵. 운전석에 올라탄 김 비서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 홍콩으로 출국하신다더군요. 공항 패션이라도 찍으려나 봅니다.”

역시나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김 비서는 차를 출발시키면서 흘끗, 도현을 곁눈질했지만 제 대표의 시선은 창밖에 머물러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끝이 어딘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흠. 짧게 내쉰 숨과 함께 고민을 마친 김 비서가 일부러 카메라가 밀집되어있는 곳으로 아주 느리게 차를 몰았다.

그 덕분에 도현의 시야 속으로 화려한 은발의 박하진이 들어왔다. 가을의 따스한 햇볕이 오로지 박하진 위로만 부서진 양, 멀리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박하진이, 그렇게 우도현의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온 것이다.

“잘살고 있나 보네요.”

혼잣말을 가장한 안심이 무심결에 흘러나왔다. 하진이 사라지자 도현은 금방 시선을 떼어 앞에 두었다. 저번 방송국에서 마주친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1년 만인가. 뭐, 좀 반갑네. 미국 갔다 와서 그런가. 살다 살다 박하진이 반가울 때가 있다. 무심코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에 도현은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궁금하시면 연락이라도 해보시죠.”

“안 궁금한데요.”

“방금 굉장히 아련한 말투로 잘… 살고… 있나 보군이라고 하셨잖아요.”

“아, 제가 또 언제 그렇게 말 사이사이 뜸을 들였다고!”

저도 모르게 찔렸는지 도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농담이었는데 쉽게 흥분한 제 대표를 봄으로써 김 비서는 확신했다. 아련한 거 맞네, 뭘. 그에 도현이 본인은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변명을 주절거렸다.

“그냥. 불쌍하잖아요. 군대 다녀왔더니 별 사고를 다 친 멤버들 때문에 팀은 해체돼. 욕이란 욕은 은퇴 안 한 박하진이 다 먹어. 그 좋아하던 무대에도 못 서.”

“…….”

“그런 게…. 그냥 다 불쌍해서 그래요.”

무려 십오 년이었다. 그중 오 년을 친구로, 십 년을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도현에게 하진은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한순간의 잘못으로 인해 그 좋던 친구 사이가 틀어졌고, 그 잘못이 본인에 기인했다는 것을 도현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하진을 생각하면 동정과 연민이 뒤범벅된 아주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러면서 아직 친구도 뭣도 아닌 애매한 사이로 지내는 이유를 묻노라면, 도현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이다.

“박하진 씨께도 자선 파티 초대장 보내드릴까요.”

“나 대표 취임 축하 자린데 그 새끼가 오겠어요?”

“박하진 씨 성격이면 오실 것 같은데요.”

“하긴. 깽판 치고 싶어서 안달이겠네요.”

하나 확실한 건, 하진과 도현은 이제 친구 사이보다 앙숙 사이가 더 편해졌다는 것. 뭔가를 변화시키기엔 십 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고, 둘은 현상 유지만 하기에도 벅찰 만큼 각자 너무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도현이 하진에게 갖는 감정은 딱 연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적어도 도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의 끝에서 씁쓸함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를 숨기고자 라디오를 트니 마침 한 여성 DJ가 유려한 말솜씨로 남자 게스트에게 질문을 던지는 중이었다.

[이번 코너 내가 뭐뭐라면! 자, 내가 스타라면! 이 연예인과 친해지고 싶다! 하나. 둘. 셋!]

[박하진 선배님이요! 제가 데뷔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망할. 오늘은 이런 날인 모양이다. 박하진 생각을 그만두려 튼 라디오에서조차 박하진 얘기가 들려서 도저히 녀석의 생각을 끊을 수 없는 그런 날.

[박하진 선배님은 제 이상형이세요.]

[하하. 이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인데요?]

뭐야, 저 새끼? 도현의 눈썹이 사납게 구겨졌다. 신인이라 이슈 한번 되고 싶은 건가? 한참 라디오를 노려보던 도현은 그대로 채널을 돌려버렸다. 잔잔한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이리저리 헤집어진 도현의 머릿속을 안정시켰다. 도현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김 비서에게 물었다.

“방금 나온 게스트 누군지 아세요?”

“모델 최윤조인 것 같습니다.”

“처음 듣는데.”

“연차에 비해 늦게 주목받았습니다. 요샌 방송 쪽으로 잘 풀리는 것 같고요.”

김 비서의 대답을 듣는 동안 도현의 손가락은 바쁘게도 움직였다. 최윤조. 초록창에 검색해보니 연관 동영상이 수두룩하다. SNS 계정도 엄청 많다. 그중 도현은 별그램을 눌러 최윤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키 크고, 귀엽게 생긴 얼굴.

“나이는요?”

“이십 대 초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어린 나이까지.

“박하진 스타일인가.”

“네?”

아, 젠장. 속으로만 생각한 줄 알았는데 입 밖으로 내뱉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작은 소리를 어떻게 들었지. 도현이 얼굴을 굳혔다.

“아닙니다.”

단호히 아니라고 답하는 도현의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최윤조의 사진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런 도현을 김 비서가 안타깝게 바라봤다. 대표님, 별그램 아이디 없으실 텐데…. 아니나 다를까. 로그인하고 보라며 자꾸만 창이 뜨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닫는 도현이었다. 저럴 줄 알았지. 일찌감치 별그램 계정을 열어놓은 김 비서가 도현에게 핸드폰을 건네었다. 곧 이를 기쁘게 받아드는 도현을 보며 김 비서는 문득 궁금증이 차올랐다.

“근데 박하진 씨랑 친구시죠?”

“아닐걸요?”

***

[W 엔터테인먼트, 우도현 대표이사 선임]

[더블유, 젊은 감각 우도현 대표이사에 거는 기대]

졸린 눈을 비비며 기사를 읽던 하진이 신경질적으로 태블릿을 던져버렸다. 검색 차트 1위가 우도현으로 도배되길래 무슨 일인가 싶더니, 본부장에서 기어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모양이다. 여기서 굳이 ‘기어이’라는 말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진은 이 상황이 영 달갑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금수저 물고 태어나 인생 탄탄대로인 우도현은 재수 없다. 보정 하나 없는 기사 사진마저 잘생긴 것도 여전히 재수 없고.

하진이 괜스레 제 부스스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부들부들한 볼을 찔러본다. 그래도 우도현보다는 내가 더 어려 보이지. 난 가끔 학생이냐는 소리도 들으니까. 기어코 정신 승리를 마친 하진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재수 없는 새끼.”

운전석에서 하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수찬이 룸미러로 하진을 흘끔거렸다. 내뿜는 분위기가 어두운 것을 보니 오늘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골로 가게 생겼다. 박하진 전담 매니저가 된 지 어언 1년이지만, 오늘만큼 본인 기분을 온전히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평소엔 고양이 정도였다면, 오늘은 최소 살쾡이, 조금만 더 건드렸다가는 호랑이가 될 것만 같은 하진이기에 위기를 풀어보고자 수찬이 물었다.

“형, 우도현 대표님이랑 친구 맞죠?”

“아닌데.”

순식간에 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말실수한 모양이다. 수찬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하진이 말을 덧붙이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친구였지. 지금은 아니고. 고등학생 때 쌩깠어.”

“헐, 왜요?”

“싸웠어.”

수찬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에 안전이라곤 없다는 것을 수찬은 조금 뒤늦게 깨닫고야 말았다. 차가 분명 신호에 걸려 섰는데 이상하게 덜컹거렸다. 텅 빈 조수석에 발길질을 해대는 박하진 때문이었다.

“너 뭐, 씨발 내가 더러운 성질머리로 우도현한테 지랄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대답을 안 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다. 대답했든 안 했든 상황은 똑같았을 것이다. 수찬은 가뜩이나 처진 눈꼬리를 한층 늘어뜨리며 울먹였다.

“아, 아니요. 진짜 아니에요….”

“야, 나 때문 아니거든? 그 새끼가 먼저 나 피했어.”

“우, 우 대표님이 잘못하셨네요.”

“그치? 그렇다니까.”

파란불이 들어와 차가 출발하자 하진은 제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대었다. 후, 그 모습을 본 수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도를 냈다.

“파티가 몇 시지.”

“6시요! 샵까지는 20분 정도 남았어요.”

지금이 3시, 파티가 6시. 천천히 준비해도 충분한 시간인데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은, 아마도 우도현보다 잘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경쟁심 때문일 것이다. 수찬이 개소리하는 바람에 잠도 다 깨버린 하진은 슥슥, 빠르게 연예 뉴스를 훑어 내렸다. 그러다 멈칫. 하진의 손가락이 어느 기사 위에서 멈췄다.

[유어 멜로디, 박하진. ‘하하호호’ 일일 DJ 맡는다.]

아, 유어 멜로디 좀 쓰지 말라니까. 쓸 거면 앞에 ‘전’이라도 붙이던가. 유어 멜로디 해체된 지가 언젠데. 저절로 구겨진 인상을 풀지 않은 채, 하진이 자연스럽게 댓글 창을 열었다. 댓글과 관심은 비례한다고 했던가. 아직도 하진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들이 수백 명은 족히 넘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수백 개의 댓글. 이중 절반은 악플이었다. 싫은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 그만이니까 상관없었다. 남들은 무신경하다고 뻔뻔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진은 스스로가 삶에 있어 초연한 것이라 여겼다. 이런 성격이었으니, 학창 시절부터 아이돌 시절까지 그 많은 욕을 먹고도 견딘 것이겠지 생각하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asdf****

얘네 데스노트 그룹 아니냐?

↳ㅇㅇ 맞음.

↳ㅋㅋㅋㅋㅋㅋㅋ데스노트

↳왜 데스노트 그룹임?

↳리더가 음주운전으로 탈퇴, 보컬이 갑질 논란으로 탈퇴, 막내가 마약으로 탈퇴함.

↳박하진 하나 남음? 근데 끼리끼리잖아. 박하진도 조만간 뭐 터지겠지.

↳아는 사람이 연예계 관계잔데, 박하진 약한다는 소문 있음.

딱 거기까지 읽은 하진이 댓글 창을 꺼버리고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존나 싫다, 진짜.”

다 고소해버릴까.

초연하다고, 댓글에 연연하는 타입 아니라고 했던 거 취소다. 자신이 댓글에 존나 연연하는 타입이었다는 걸, 29살 인생 살며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하도 욕을 많이 먹다 보니 단단했던 마음이 물러진 걸까. 아니면, 같이 지내왔던 멤버들의 비참한 말로가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두려워진 걸까. 뭐가 됐든, 일단 박하진 약한다는 소문 있다고 댓글로 구라 치는 새끼는 콩밥 먹여주고 싶다. PDF 따놔야지.

캡처. 어, 너도 캡처.

***

[HOTEL W]

은색으로 휘갈겨진 W가 건물의 중앙을 수놓으며 화려하지만 우아한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는 곳.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서울의 한 가운데를 차지한 30층짜리 5성급 호텔 더블유. 그 덕분에 사람이 끊이질 않는 곳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북적였다. 대한민국 3대 엔터테인먼트 중 하나인 W 엔터테인먼트의 우도민 대표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인 우도현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내어줬다는 기사가 불과 몇 시간 전에 떴으니, 이렇듯 취재 열기가 뜨거운 것도 당연했다. 단순히 자선 파티라기엔 여러모로 과한 감이 있기도 하고.

어쨌든 덕분에 호텔 로비는 마치 시상식 레드카펫처럼 양옆이 기자들로 채워졌으며, 연예인들 또한 화려한 옷차림으로 한 명씩 밴에서 내려 로비에 들어섰다. 이뿐만 아니라 파티의 분위기가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대형부터 중소 엔터의 연예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초대했다는 것.

“이강운 씨, 여기 좀 봐주세요!”

중소 엔터를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배우 이강운도 그에 해당했다. 어우, 피지컬 봐. 얼굴은 또 뭐야. 완전히 내 취향인데. 하진이 선팅된 밴의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로 강운을 보며 주절댔다. 요즘 새 기획사 찾는다고 기자들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어서 건드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입맛을 다시던 하진은 어느새 다가온 제 차례에 푸르르- 입을 풀곤 차에서 내렸다.

“박하진 씨! 여기요!”

“이쪽도 봐주세요!”

크롭된 블랙 자켓을 걸친 하진은 등장만으로도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박시하게 늘어진 검은 슬랙스로 슬렌더한 몸매를 한껏 부각한 하진이 호텔 로비를 쭉쭉 뻗어나가자 셔터를 누르던 기자들의 손놀림이 조금 더 빨라진다. 하진의 깔끔한 워킹을 보면서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의 생각이 떠올랐다. 확실히 얼마 전까지 유어 멜로디 비주얼 센터답다고.

“친구이신 우도현 대표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오신 건가요?”

예쁜 사진을 위해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하진의 인상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친구? 축하?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린지. 태희의 협박만 없었다면 지금쯤 집에서 떡을 먹는지 치든지 둘 중 하나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 웬만한 연예인은 다 가는 자리니 얼굴이나 비추고 오라고, 태희는 그렇게 말했다. 안 가면…, 뭐라고 하셨더라. 아, 그렇지. 금주에 금욕에 ‘금’ 자로 시작하는 건 다 시킨다고 했다. 그러니까 재수 없는 우도현 면상 보러 온 거 아니라고, 이 망할 기자들아! 일순간 짜증이 치밀었으나 하진은 얼른 표정을 재정비했다.

“연예인 박하진으로 왔습니다.”

하하하. 뒤에 웃음은 보너스였다. 하지만 어딜 가나 보너스는 짧은 것처럼 하진의 웃음 또한 뒤이어 들린 말로 인해 금방 멈추고야 말았다.

“오늘 파티에 한서빈 씨도 오신다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한서빈이란 이름은 무방비했던 하진을 무너뜨리기 충분한 일격이었다. 씨발. 하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순식간에 표정 관리에 실패한 하진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번쩍이는 카메라 불빛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에 기자들은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더욱 빠르게 셔터를 눌러댔다. 애써 올린 하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곤 점점 적나라하게 굳어갈 때였다.

“제 친구가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 여기 붙잡혀 있었네요.”

정확히 레드카펫의 반대편에서부터 여유로운 걸음으로 한 남자가 등장했다. 깔끔한 명품 수트로 멋을 낸 남자는 자연스럽게 하진 옆에 멈춰 서곤 하진을 바라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미친. ‘찡긋’이란다. 남자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하진은 곧바로 남자의 얼굴을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야야, 우도현 대표 아니야?”

“…맞는데 왜 나왔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기자들의 수군거림이 멍하니 있던 하진을 일깨웠다. 진짜 우도현이 왜 있는 거지? 질문할 틈도 없이 카메라가 이쪽을 찍어대는 탓에 하진은 어색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도현의 손이 하진의 어깨 위로 안착했다. 와, 씨.

“므흐는 그느.”

순간 어깨에서부터 쫙, 전해져오는 소름에 하진이 어금니를 꽉 문 채로 도현에게 물었다.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더욱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박하진 구출 작전?”

미친놈이 처 돌았나.

“즈를흐지믈그 슨치으르.”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복화술까지 하려니 얼굴에 경련이 왔다. 이러다간 눈꼬리부터 안면 전체가 굳어 버릴 것만 같다. 얼굴도 이런데 거기다가 얼떨결에 우도현에게 내어준 어깨까지 몹시 불편했다. 아니지. 불편한 게 아니라, 불쾌한 거다. 이러한 불쾌함이 곧 한계점에 도달할 것 같아 하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도현의 손을 떨구기 위해 노력했다. 남들이 보기엔 심히 우스꽝스러울지라도 본인은 진지했다. 그 어지간한 노력을 눈치라도 챘는지 도현이 슬슬 발걸음을 뗀다.

“오늘 같은 파티에 피차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말죠.”

기자들을 향해 으름장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웃는 낯 밑에 서린 단호함은 분명 경고였다. 아무리 막무가내 기자들이라도 더 이상 입을 여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도현은 본인이 말한 대로 그곳에서 하진을 구출해냈다. 물론 구출했다는 건, 순전히 도현 본인의 생각에 불과했지만.

“쇼하지 말고 이제 떨어져.”

연회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하진은 제 어깨를 짓누르던 손을 가차 없이 쳐냈다. 연회장 내부부터는 비공개라더니 정말 카메라가 한 대도 없었다. 아, 살았다. 그제야 하진은 편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니꼬운 시선이 하진의 볼을 찔러댔다.

“구해줘도 지랄이지.”

도현이 시선만큼이나 고깝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이 잠자던 하진의 코털을 아주 왕창 뽑아버렸다.

“야, 구해줘? 나 엿 먹으라고 한서빈이랑 같이 초대한 네 새끼 입에서 나올 말이냐, 그게?”

“누가 한서빈을 초대했는데?”

“너요. 이 파티 주최자, W 엔터 대표 우도현. 너잖아, 씨발놈아.”

하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거친 욕설들이 한데 뭉쳐져 도현을 명중시켰다.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도현은 귀가 얼얼할 정도로 갑자기 꽂힌 욕설 때문에 잠깐 정신이 혼미했으나, 이내 이성을 붙잡곤 침착하게 대답했다.

“난 한서빈 오는 줄도 몰랐어.”

“아, 그러세요? 대표가 존나게 무능력하시네.”

하지만 도현의 참을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는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이런 식으로 나오니 열 안 받고 배기겠냐고. 딱 한 번만 더 참으리라, 도현이 그렇게 다짐할 즈음이었다.

“병을 주든 약을 주든 하나만 해. 좆같으니까.”

참겠다는 다짐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도현이 잡아먹을 기세로 하진에게 다가가자 엉킨 시선에서 타닥, 스파크가 튀었다. 그와 동시에 도현은 바닥 난 참을성을 냅다 하진에게 던져버렸다.

“너 진짜 말본새 개 같은 건 여전하다.”

“너도 제멋대로에 싸가지 없는 거 여전해.”

“하, 이딴 새끼 뭐가 반갑다고….”

아. 무심코 내뱉은 본심에 도현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 반갑긴 개뿔. 1년 만에 보든 10년 만에 보든 반가울 리가 없는 새낀데 잠깐 착각했던 거다. 하진이 기자들 앞에서 욕을 하든 눈물을 보이든 제 알 바 아닌 것을, 고작 저 착각 하나로 구해준 거, 그게 도현의 잘못이었다.

“다 내 잘못이지, 씨발.”

“알면 비켜.”

하진은 분명 알 것이다. 도현이 뱉어낸 한탄에 자조가 가득한 것도, ‘다’라는 말에 함축된 시간이 비단 오늘만은 아닌 것도. 그걸 다 알면서도 외면한 채, 사라지려는 하진을 보고 있자니 도현은 어딘가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제 옆을 지나치려는 하진을 도현이 붙잡아 세게 끌어당겼다.

“파티 먹칠하기만 해.”

목덜미 부근에 닿은 숨이 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하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자존심 상한다. 도현에게 반응했다는 그 사실이 하진의 자존심을 긁었다. 게다가 도현이 숨을 내뱉을 때마다 목덜미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이를 참아낸 하진이 천천히 도현 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곧 키스라도 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짧은 순간, 서로가 내뱉은 숨이 얽혔다. 제법 뜨거웠다. 그게 퍽 낯설었다.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를 본 하진은 싱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럼 똥칠하지, 뭐.”

툭, 하진이 도현을 밀쳐냈다. 이내 아름다운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하진의 말 위로 얹어져 단어를 희석했다. 얼핏 들으면 아름답기만 한 그 소리를, 그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도현은 하진의 말을 한 번 더 곱씹어야만 했다.

똥칠. 똥칠한다고. 내 파티에 똥칠한다고?

물론 깨달음이 조금 늦었다. 하진은 이미 도현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뒤로 물러나 있었으니까. 덕분에 도현은 멀어져가는 하진의 뒷모습만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박하진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그게 분한 나머지 도현이 애꿎은 구두 앞코를 바닥에 쾅쾅 내리찍었다. 그에 놀란 김 비서가 도현에게 달려왔다.

“하, 김 비서님.”

“네, 대표님.”

“한서빈을 누가 초대했어요?”

“중소 엔터테인먼트는 연예인 개인이 아니라 회사 이름으로 초대장을 발급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서빈 씨가 최근에 이적한 엔터테인먼트가 껴있었던 것 같습니다.”

“담당자 누구예요? 아니,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해체해서 얼굴도 안 보는 새끼들을 같이 초대하는 게 말이 돼요?”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이마를 짚는 도현의 손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짜증을 털어내고자 손을 휘적거린 도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일련의 동작은 혼자 있고 싶다는 무언의 압박인 듯했다.

“지금은 됐고, 월요일에 부르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두 걸음 정도 도현에게서 떨어졌다. 혹여 불똥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거리였다. 잠시 쉬시는 건 어떻겠냐고 물으려던 김 비서가 멀리서 제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하곤 안전거리를 늘렸다. 저건 백 퍼센트 폭발물이다. 10분 이내에 제 대표가 폭발할 것이라고, 김 비서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도현이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흉측하게 인상을 구겼으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우도현 대표님.”

남자가 도현 앞에 섰다.

“유어 멜로디였던 한서빈입니다.”

악수를 청하면서 도현에게 눈웃음을 짓는 이는 본인의 소개대로 한서빈이었다. 이 타이밍에 한서빈이라니. 도현은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찬찬히 서빈을 훑었다. 분홍색 머리칼. 얼굴과 꽤 잘 어울렸음에도 이상하게 조화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좀 과하다고나 할까. 박하진의 은발은 그다지 튄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 한서빈은 왜 이렇게 별로지. 색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고. 박하진이 분홍 머리했으면 잘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약간 앙칼진 분홍 토끼처럼….

“어…. 인사 안 받아주시나요?”

“…아.”

머쓱하게 말하는 서빈에 도현은 순간 당황하고야 말았다. 뜬금없이 떠오른 박하진을 생각하느라 앞에 사람을 투명 인간 취급해버린 자신이 조금 어이없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반갑습니다, 한서빈 씨.”

얼른 머릿속에서 하진을 지운 도현이 서빈의 악수를 받으며 말했다.

“대표되신 거 정말 축하드려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한서빈 씨가 제게 부탁할 게 뭐 있나요. 저희 소속사도 아니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아무리 몰라도 한서빈 씨가 W 엔터 올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도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킨 채 비즈니스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뒤이은 서빈의 말은 도현을 굳게 만들었다.

“저 이번에 연예계 복귀하거든요.”

일순간 도현의 눈썹이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갑질 논란으로 탈퇴해놓고, 복귀를 운운하는 꼴이란. 그 뻔뻔함이 가히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어떤 중소 엔터가 한서빈을 데려갔는지 몰라도 망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망하실 거예요, 라고 말할 순 없으니 입에 발린 소리를 할 수밖에.

“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대표님….”

“…….”

“하진 형, 어딨는지 아실까요?”

한서빈 입에서 박하진? 썩 유쾌하지 않은 조합이었다. 적어도 유어 멜로디 때문에 혼자 남은 박하진한테는 예의가 아니지 않나. 도현의 어투가 다소 날카로워졌다.

“왜요?”

“오랜만이라 인사하고 싶어서요.”

“글쎄요. 박하진 씨를 왜 저한테 묻는지 모르겠는데.”

“두 분 친구시잖아요.”

도현의 입술 새로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놈의 친구, 친구. 씨발. 친구면 어쩔 거고, 아니면 어쩔 건데. 딱 봐도 박하진과의 사이를 떠보려는 의도가 분명한 한서빈의 말에 도현은 애써 숨겨왔던 적의를 드러냈다. 이건 박하진 때문이 아니라, 고작 한서빈 같은 새끼가 저를 떠보는 게 엿 같아서, 그래서 그러는 거라고 합리화하면서.

“서빈 씨. 이 파티 재능기부가 목적이거든요.”

“…….”

“근데 서빈 씨는 조용히 잘 즐기다 가시면 되겠어요. 서빈 씨한테 기부받을 재능은 없는 것 같거든. 노래든 연기든.”

도현의 말이 끝나자 이제까지 활짝 올라가 있던 서빈의 입꼬리가 단번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와 반대로 도현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서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그를 지나쳤다.

“그럼, 재밌게 노세요.”

그렇게 혼자 남겨진 도현은 금세 사람들로 둘러싸였지만, 시선만큼은 은연중에 하진을 쫓았다. 하진이 어느 남자 모델과 시시덕거리며 와인을 홀짝거릴 때까지, 그러다 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

“야, 최윤조…. 읍, 방으로….”

“하…. 형.”

하진의 입술을 아작낼 작정인지 윤조의 키스는 거칠었다. 간신히 룸 안으로 들어간 하진은 있는 힘껏 윤조를 밀어낸 뒤, 그의 머리통을 갈겼다. 금세 울상이 된 윤조가 손바닥으로 축축한 입술을 닦으며 소리쳤다.

“아, 왜요! 이러려고 온 거 아니에요?”

“맞아. 맞는데 순서가 있지, 새끼야. 발정 났어? 입에서 술 냄새나니까 씻어, 우선.”

“와, 형은 진짜.”

“뭐.”

“순하게 생겨서 말 거칠게 하는 거, 개 꼴림.”

허. 완전 애가 따로 없다. 뒤통수 맞아도 실실, 발정 났냐고 뭐라 해도 헤벌쭉. 뭐가 그리 안달 났는지 옷을 벗는 와중에도 최윤조는 쪽쪽, 쉴 새 없이 하진의 볼을 빨아댔다. 한 번 더 머리통을 치고 나서야 최윤조는 그것을 덜렁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솨아아-. 샤워하는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면서 하진은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아, 졸린 데 그냥 자버릴까. 근데 물소리 들으니까 좀 꼴리긴 한다. 와인을 괜히 마셨나. 눈꺼풀이 무거웠다. 수면욕과 성욕. 두 양대 산맥 사이에서 갈등하던 하진의 귓속으로 갑작스레 불청객이 찾아온 것은 찰나였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며, 그와 동시에 고민채로부터 전화가 왔다. 요즘 TV만 틀면 나오는 아이돌, 그 고민채가 맞다. 그러나 하진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의…. 일단 너무 성가신 녀석이었다.

띵동, 띵동-! 미처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재촉이라도 하듯 연달아 초인종이 울렸다. 거의 부술 기세였다. 끊어진 진동도 곧바로 한 번 더 울렸다. 그에 하진이 짧은 한숨과 함께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밖에 너냐?”

-네. 선배 문 열어요.

“나 바빠.”

-상의할 거 있어요. 빨리 문 열어요. 안 열면 선배네 대표님한테 전화할 거야.

“해보든가.”

-같이 들어간 새끼, 최윤조 맞죠? 요새 핫한 모델이던데.

하진은 그리 정의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이기심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게 너 때문이라는 남 탓이었다. 박하진 너 때문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데 이걸 고민채가 어떻게 알아서 협상 카드로 꺼냈는지 모르겠다.

하, 씨발. 그러니까 고민채가 이겼다는 소리였다.

“민채야.”

-네, 선배.

“5분만 기다려.”

-3분.

“좋아.”

뚝-. 전화가 끊겼다. 동시에 샤워실에서의 물줄기도 끊어졌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하진이 바닥에 널브러진 최윤조의 옷가지를 주워 품에 안았다. 택시비라도 줘야 하나 싶어 지갑을 열었다가 이러면 너무 화대 같아서 다시 닫았다. 이내 욕실에서 나온 윤조에게 하진은 안고 있던 옷을 냅다 던졌다.

“뭐야. 어차피 벗을 텐데 왜요?”

“최윤조, 너 가.”

“응?”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윤조를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하진 역시 이 어이없는 상황의 피해자이기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 내일 연예 신문 1면에 게이라고 얼굴 팔리기 싫으면, 지금 당장 얼굴 가리고 나가.”

윤조가 멀뚱히 서 있었다. 하진이 빨리 입으라고 소리치자 그제야 윤조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옷을 입었다.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던 하진은 1분 남짓한 시간에 서둘러 윤조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었다.

“형, 나 지금 까인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나 요새 파파라치 붙어서 너까지 당할까 봐 그래.”

“헐, 혀엉.”

“어, 어. 왜?”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어. 맞아, 걱정하는 거야. 그니까 제발 좀 가라….”

“그럼 나중에 마저 해요.”

쪽-. 아, 이 맛에 연하 만나는구나. 하진이 입맛을 다셨다.

최윤조의 애교에 그냥 확, 덮쳐버릴까 싶다가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고민채를 생각하니 이성이 저절로 돌아왔다. 먼저 문을 열고 고개만 내민 하진이 양옆을 살피곤 최윤조를 내보냈다. 얼굴 가리고 가란 말을 착실하게 지키며 윤조는 그렇게 하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 옆방의 문이 열렸다.

“오실래요? 아니면 내가 갈까요?”

“네가 와.”

하진의 말에 주저 없이 민채가 하진의 방으로 넘어왔다. 하진이 침대에 걸터앉아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화려한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고민채는 수수한 화장에도 미모를 감출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런 민채가, 하진은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다. 요새 이 예쁜 후배가 저를 보면 하는 말이 딱 하나라서.

“선배, 나랑 열애설 내요.”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열애설 내자는 저 말, 딱 하나. 하진이 지겹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민채야.”

“네.”

“너희 그룹 곧 해체하냐?”

“우리 요새 잘나가는데요.”

“근데 왜 열애설을 내려고 해? 너 말대로 너희 잘나가지. 그중에서도 네가 제일 잘나가잖아. 너 메인 보컬로도 상승세잖아.”

“저 메인 댄서예요.”

…아. 그래? 머쓱함에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민채가 하진에게 이런 구애를 하기 시작한 것은 2주 전, 우연히 하진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무슨 고집인지 마주칠 때마다 열애설 내자고 하는 터라 아주 난감하기 그지없었는데 이제는 하진의 섹스 사업까지 망칠 작정인가 보다. 머리칼을 벅벅대며 고민하는 하진을 민채는 상당히 비장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결판내고 말 테다, 와 같은 표정으로.

“네가 나랑 열애설 나서 득 볼 게 뭐가 있어서 그런 짓을 하냐고.”

“이유 말하면 사귈 거예요?”

“이유가 타당하거나 공감 가면.”

“저, 레즈예요.”

뭐? 하진은 그만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을 뻔했다. 켁켁. 간신히 삼킨 물이 잘못 넘어가 코를 따갑게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이런 하진의 반응이 민망하게 정작 폭탄 발언을 한 장본인은 퍽 담담했다.

“선배랑 사귀면 적어도 강제 커밍아웃은 안 당할 거 아니에요. 선배가 남자친구니까 내가 여자 좋아한다고 다들 의심 안 할 거 아니야.”

“…야.”

와, 살다 살다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하는 애는 처음 보네.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냥 감탄이 나온다. 어린 날의 패기라고 하기엔 26살이 어린 것도 아니고, 저를 믿는다고 하기엔 특별한 접점도 없는 관계인데, 고민채가 도대체 왜 제게 커밍아웃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하진이었다.

하-. 마른세수를 하며 하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나한테 커밍아웃한 거야.”

“알아요. 선배는 괜찮아요.”

“날 뭘 믿고?”

“이해해줄 것 같아서요.”

이해? 혓바닥 위에 굴려보던 이해라는 두 글자가 융화되지 못한 채, 하진의 입안을 까슬하게 만들었다. 이해의 본 형태는 별과 같아서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깎이고 깎여 둥글어지기 마련인데 하진에게는 아직도 그것이 뾰족했다. 그 모난 파편들이 잘도 하진을 찔러댔고, 그렇게 입은 상처 중엔 열아홉의 박하진도 있었다. 이해를 바랐던, 하지만 끝내 이해받지 못했던.

그러니 이해라는 단어는 여전히 하진에겐 버겁고 아픈 것이었다.

“남이 이해해줄 거라고 함부로 확신하지 마. 그러다가 나처럼 된다.”

“선배가 어떤데요?”

“글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과 주고받은 상처에 언제 함몰될지 몰라 두렵다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관계가 됐지, 그 사람이랑.”

“그런 관계가 어디 있어요.”

픽,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없을 줄 알았는데, 있긴 있더라고. 하진은 자꾸만 민채의 얼굴 위로 투영되는 열아홉의 박하진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고민채의 말도 안 되는 장단에 같이 춤춰 줄 생각까지 갔으니 이미 말 다 한 거다. 그래, 뭐 어려운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정말 쉬운 일이었다. 척만 하면 되니까.

오로지 그 생각 하나로 하진이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하진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빠른 소리가 방안을 메워버렸다. 삐리릭-. 난데없이 열린 문. 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남자는 다름 아닌 우도현이었다.

“…대표님?”

고민채가 당황한 눈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하진 역시 이 뜬금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조금만 늦게 오지. 지금 딱 우도현이 박하진을 어떻게 쌩깠는지 얘기해줄 참이었는데 아쉽게 됐다.

그렇게 하진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은 채 도현은 말없이 방 한가운데까지 들어왔다. 무미건조한 시선이 방을 천천히 훑으며 민채를 지나 하진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도현의 미간이 사정없이 우그러졌다. 일부러 의도한 건지 뭔지 한쪽 어깨가 드러날 정도로 무방비한 상태의 하진이 심히 거슬린 탓이었다.

“박하진 씨.”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박하진의 외모가 유별난 것 같다. 원체 튀는 얼굴이긴 한데, 오늘은 색기가 흐른다고 해야 하나. 속이 다 비치는 검은 실크 셔츠와 그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피부. 거기에 백발의 머리칼까지. 박하진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홀릴 법했다. 그리고 그 망할 색기가 왠지 모르게 도현의 심기를 건드렸다.

“우리 애 데리고 뭐 하시는 거죠?”

“너희 애가 먼저 나 찾아온 건데요?”

도현이 추궁하듯 민채를 바라보니 민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의 입에서 짜증으로 범벅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왜 이렇게 골치 아픈 짓거리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하나 확실한 건, 실실 쪼개고 있는 박하진의 저 입꼬리는 반드시 비틀어버리고 말겠다는 거였다.

“우 대표님, 제 취향 아시면서.”

하진이 얄밉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분명 자신이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어쩐지 도현은 하진에게 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새어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후-.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뱉은 도현이 제 뒤를 바짝 따라온 김 비서를 불렀다. 목소리의 단호함이 그가 이성적인 결론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김 비서님.”

“네, 대표님.”

“고민채, 숙소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럼 대표님은….”

“여기서 자죠, 뭐.”

사실은 매우 감정적인 결론이라는 걸, 본인만 모르는 게 문제였지만.

얼떨결에 방을 뺏기게 생긴 하진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도현의 앞에 섰다. 슬쩍 밀어 봤지만, 도현은 진심으로 자고 갈 생각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밥 먹고 운동만 하나 힘이 왜 이렇게 세. 몇 번 더 시도해봤으나 도현을 이길 재간은 없어서 하진은 금방 포기했다. 김 비서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가는 고민채를 향해 하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깊은 애도를 표하는 것뿐이었다.

띠리릭-! 두 사람이 나갔다.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달리기의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처럼, 경쾌한 잠금 소리가 대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먼저 스타트를 끊은 사람은 하진이었다.

“여기 내 방인데.”

“내 호텔인데.”

“나 손님이거든?”

“난 주인이거든.”

“아, 씨발. 존나 유치한 새끼.”

하진이 허공에 분노의 주먹질을 해댔다. 스코어는 1대0. 첫 번째 싸움의 승자는 도현이었다. 별안간 욕을 얻어먹었는데도 도현은 그저 뿌듯한 미소를 내보이며 유유자적하게 침대로 걸어갔다. 툭, 도현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던졌다. 의자에 아무렇게나 놓인 코트는 못 해도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일 것이다.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하진이 보기엔 죄다 재수 없었다.

“너 나한테 집착하냐?”

하진이 팔짱을 낀 채 비아냥거렸다. 마뜩잖은 시선은 도현이 던져놓은 마스터키를 향하고 있었다.

“그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실까.”

“아니, 그렇잖아. 마스터키는 진짜 오버 아니야?”

“네가 최윤조랑 내 파티에 똥칠하려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

허! 하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쯤 되면, 저랑 엮인 최윤조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고민채가 안 것까지는 그렇다 쳤는데 우도현까지 알게 됐으니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그러게, 밖에서는 좀 자제하라니까. 이러다가 자신 때문에 최윤조가 강제 커밍아웃하게 되는 건 아닌지, 하진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뇌했다.

“야.”

단호한 어투와는 다르게 어딘가 우물쭈물하던 하진이 신중히 다음 말을 골랐다. 저 작은 머리가 이번엔 또 어떤 어이없는 생각을 할지 도현은 꽤 흥미로웠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매만지며 도현이 유유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턱을 괸 채 이리저리 열심히 뇌를 굴리는 하진을 감상했다. 입 다물면 저렇게 예쁜데, 쯧. 곧이어 하진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티 났어?”

“뭐가.”

“…최윤조랑 나랑. 막, 음. 섹파? 같았냐고….”

“…어?”

정적이 흘렀다.

동시에 도현의 머리 위로 큰 물음표가 띄워졌다. 하진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최윤조… 섹파… 같았냐고? 천천히 말을 곱씹어보던 도현은 이내 푸하하!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물음표는 금세 지워져 느낌표로 변해있었다. 박하진, 진짜 대단하다!

“뭐! 썅! 왜 웃는데!”

도현의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웃으니 기분이 뭐 같아진 하진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너도 생각이란 걸 하는구나?”

“…씨발. 너한테 물어본 내가 병신이다.”

저답지 않게 너무 흥분했더니 목구멍이 따가웠다. 하진은 냉장고 문을 열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는 맥주캔을 괜히 툭툭 건드렸다. 비싼 해외 맥주 옆에는 자신이 광고하는 국산 맥주가 있었다. 해외 맥주가 마시고 싶은 이 상황에서도 빌어먹을 직업 정신은 하진이 국산 맥주를 집어 들도록 했다. 계약기간이 올해까지였던가. 이다음엔 해외 맥주를 마시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하진은 시원하게 분출된 탄산을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크으, 이제야 속이 뚫린다.

“그래서 최윤조는?”

켁켁. 맥주 마실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저 새끼는 매너를 팔아먹었나. 뜬금없는 질문에 사레가 들린 하진이 턱밑으로 흐르는 맥주를 손등으로 대강 닦으며 답했다.

“벌써 만족하고 갔지.”

“아, 그래?”

뭐야, 저 존나 재수 없는 반응은? 하진이 미간을 좁혔다. 귓구멍을 타고 들려오는 우도현의 피식거림이 몹시 거슬렸으나 일단 무시했다. 이윽고 금세 다 마신 맥주캔을 우그러뜨린 하진이 한 캔 더 따려던 찰나였다.

“근데 너만 만족했나 봐.”

흉하게 우그러진 맥주캔의 복수였을까. 하진의 얼굴도 덩달아 일그러졌다. 그 얼굴이 도현은 그저 재밌기만 했다. 바득, 어금니를 뭉갠 하진이 더 말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최윤조, 벌써 다른 새끼랑 붙었던데?”

도현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파티 참가자들을 위해 프라이빗하게 마련해놓은 8층은 입실과 동시에 도현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당연히 비밀 보장이 원칙이며 누가 누구와 들어갔는지는 도현조차 알 수 없지만, 도현은 하진이 아까 그 남자 모델과 사라졌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챌 수 있었다. 줄곧 시선이 하진을 좇았으니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도현이 사람들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

하진은 진짜 파티를 망칠 만큼 막돼먹은 녀석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그저 유흥을 위해 8층에 갔다는 것인데 분명 그걸 머리가 똑똑히 아는데도 도현은 굉장히 허무맹랑한 결론을 내렸다.

박하진이 파티를 망칠 수 있으니, 당장 잡으러 가야겠다는.

그래서 도현은 부리나케 마스터키를 받아 하진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엘리베이터에서 아주 낯이 익은 얼굴과 마주쳤는데 전화로 연신 사랑을 고백하는 꼴이 우스웠다. 금방 갈 테니까 뜨거운 밤 보내자는 민망한 소리도 대놓고 하던 남자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박하진이 머무는 방 앞에 섰을 때야 도현은 남자의 정체가 떠올랐다. 아, 최윤조구나. 피식. 잇새로 도현이 웃음을 흘렸다.

“미친 새끼 아니야? 아니, 상도덕이 있지!”

“박하진, 실력 다 죽었네?”

“야, 씨발. 죽긴 뭘 죽어! 안 잤거든?”

박하진 자존심 갈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서걱서걱. 썰리다 못해 실처럼 가늘어진 자존심이 하진의 발밑에 채는 듯했다. 아니, 잤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진짜 안 잤는데 우도현, 저 새끼가 안 믿는 눈치다. 그래서 더 꼭지가 돈다. 하진이 차가운 눈꼬리를 더욱 매섭게 치켜뜬 채로 도현을 노려봤다. 그 분노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던 도현은 아예 팔짱까지 낀 채로 하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새끼 발정 난 거 다른 새끼랑 풀려나 본데, 나랑 안 잤다고!”

어지간히 억울한 모양이다. 박하진이 저렇게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꼴은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도현은 퍽 즐거웠다. 도현이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하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열받아! 아!”

하진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젠장. 우도현한테 또 졌다. 녀석의 인자한 미소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빌어먹게도 현재 스코어 2대0. 이대로라면 반격도 못 해보고 박하진의 완패로 끝날 것이다. 그건 안 되지. 하진이 초조하게 엄지를 뜯었다. 그 와중에 느닷없이 핸드폰 불빛이 번쩍였다. 고민채의 전화… 어? 고민채? 하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역전. 가능하겠는데? 하진이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나 너희 애랑 사귀려고.”

일순간 도현의 매끄럽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듯 안면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이어 도현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러 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벌써 화내면 쓰나. 싱그럽게 웃음 지은 하진이 천천히 도현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멈췄다. 그리곤 도현의 목에 걸쳐 있던 넥타이를 툭,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손길 하나하나가 숨이 막힐 정도로 느릿했다. 이내 도현과 하진의 시선이 사슬처럼 얽혔다. 여기서 이기는 자의 시선이 상대방을 옭아매게 될 것이다. 도현은 침착하게, 그러나 독한 말로 응수했다.

“좆 받아먹는 새끼가 여자를 사귄다고?”

미세하게 하진의 눈썹이 움찔거렸지만, 하진은 금세 평정심을 찾고는 도현의 사슬을 쳐냈다. 툭-. 하진이 도현의 어깨를 밀었다. 그대로 무게 중심을 잃은 도현이 침대에 널브러졌고, 그 위로 하진이 올라탔다. 큿. 찰나였지만 서로의 아래가 민감히 스쳤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 역시 야릇했다. 꿀꺽. 이윽고 하진이 가차 없이 자신의 사슬을 던졌다.

“몰랐구나? 나 박는 것도 잘해. 언제 한번 박히러 와보든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묘하게 젖어 있었다. 축 늘어진 셔츠 아래 얼핏 보이는 가슴은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도현의 아랫배가 서서히 뭉근해졌다. 씨발. 작게 욕을 내뱉은 도현이 순식간에 포지션을 뒤집었다. 눈 깜짝할 새 도현은 하진의 팔을 포박한 채로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도현이 완전히 몸을 숙여 서로의 것을 부딪쳤다. 윽! 하진이 신음을 참아냈다. 그에 도현이 끈적한 목소리로 하진에게 속삭였다.

“뭘 미뤄. 지금 확인해볼까?”

“…야, 윽.”

“응? 박아줘 봐, 하진아.”

옅은 음성 뒤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장 나버린 사고회로를 어떻게든 움직이기 위해 하진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지는 도현의 힘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런 하진을 집어삼킬 듯, 도현의 끈질긴 시선이 계속해서 하진을 옭아맸다. 결국, 사슬에 감겨버린 이는 하진,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졌다. 망할. 3대0. 하진의 완패였다. 맥주의 알코올이 이제야 취기를 뿜어내는 걸까. 아니. 고작 맥주 두 캔에 그럴 리 없다는 것을 하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잔뜩 달아오른 얼굴과 힘이 풀려버린 몸은 그것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하진은 이 모든 원인을 취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틈으로 이성이 경고했다. 더는 안 된다고.

하진이 있는 힘껏 발길질로 도현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윽. 도현은 손쉽게 떨어져 나가며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하진이 으르렁대는 꼴로 봐서는 당장 발길질을 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하진은 도현을 지나쳐 그의 코트가 있는 의자로 걸어갔다.

“이건 성희롱 값이다, 개새끼야.”

그렇게 말하면서 하진은 도현의 코트를 입은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어서 문이 멋없이 콩, 작은 소리로 닫혔다. 원래 이런 장면에서는 쾅-! 하면서 큰 소리로 닫혀야 하는 거 아닌가. 작고 비참한 게, 딱 지금 본인 같아서 하진은 애꿎은 문을 세게 차버렸다. 오늘 자고 갈 거라고 임수찬도 퇴근시켰는데 집은 또 어떻게 가!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젠장. 이 꼴로는 얼굴 팔리면서 택시 타기도 싫은데!

이 와중에 코트엔 우도현 향기가 가득하다. 자꾸만 코끝을 간질거리는 향수 냄새는 분명 제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계속 코트 깃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킁킁거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사고와 행동이 따로 놀고 있다는 게 정답인 것 같다. 그 정신머리로 하진은 저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어디세요?”

-집 가는 중.

“그럼 이쪽으로 사람 좀 보내주세요.”

-우리 강아지, 또 사고 친 거야?

“아니요. 집 가게요.”

아직 12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천하의 박하진이 집을 들어간단다. 적잖이 당황한 서태희 대표는 놀라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하진이, 아파?

“안 아파요. 하씨, 대표님. 우도현 이겨요?”

-갑자기 뭔 소리야?

“우도현 이길 수 있냐고요.”

-지진 않겠지. 너나 도현이나 나한테는 완전 핏덩이니까.

“그럼 우리가 먼저 선빵 날려도 우도현이 깽값 받으러 안 오겠죠?”

***

“고생하셨습니다, 관장님.”

“하진이가 더 고생했지.”

“그건 맞아요. 근데 내일도 풋워크만 해요? 빨리 손 써보고 싶은데.”

샤워를 마친 하진이 관장님 사무실로 고개를 들이민 채 말했다. 3시간 동안 다리 운동만 했으니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필 처음 맡은 드라마 역할이 복싱선수일 건 또 뭐람. 운동이라곤 노출용 팔뚝 운동밖에 모르는 하진이기에 복싱장을 드나드는 요즘은 딱 죽을 맛이었다.

“풋워크는 기본이자 제일 중요한 동작이야. 이번 주까지만 풋워크 연습하고, 다음 주부터 잽 알려줄게.”

관장님의 단호한 대답에 하진이 울상을 지었다. 이씨. 차라리 상체도 번갈아서 하면 그나마 덜 힘들 텐데 복싱의 기본은 발재간이라면서 며칠째, 하체만 이리저리 뛰고 있으니 이건 뭐 그냥 두 배로 힘든 느낌이다. 어차피 아마추어라 복싱하는 장면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단계적으로 가르치셔야 하냐고요. 이렇게 구시렁대고 싶다가도 관장님의 선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저 조금만 이따가 갈게요.”

“그래. 천천히 쉬다 가라.”

사무실 문을 닫고 폭신한 바닥 한가운데에 하진이 벌러덩 누워버렸다. 역시 누우니까 천국이다. 운동하고 바로 누우면 근손실 오는 거 아닌가.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렴 뭔 상관인가. 드라마에서 노출할 것도 아니고. 요즘 제 맨몸을 보는 건 최윤조만으로 족했다.

이윽고 누워있는 하진의 귓가에 딸랑,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하진이 고개만 뒤로 젖히니 흡사 공포물을 연상시키는 괴이한 자세가 연출됐다. 복싱장으로 발을 디디던 남자가 억, 소리를 내며 주춤거렸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무서웠는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웬 미친놈이 저리 누워있는데 안 놀랄 수가!

하진 또한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뒤집힌 채로 보이는 남자를, 더군다나 모자까지 눌러쓴 남자를 하진이 알 턱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핸드폰이나 할 요량으로 몸을 뒤척거릴 때였다.

“도현이 일찍 왔네?”

도현이? 하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설마 우도현이겠어….

“몸이 뻐근해서요.”

빌어먹을. 목소리가 우도현이었다. 저 새끼한테 패배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재회라니. 이건 너무 엿 같은 상황 아닌가. 하진은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아, 그래! 이 상태 그대로 벽만 보면서 걸으면 우도현이랑 안 마주치겠지? 딱 그 생각 하나로 하진은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게처럼 옆걸음질을 쳤다.

“하진이 이제 가게?”

오, 알라신. 눈치 없이 울려 퍼지는 관장님의 목소리에 기겁한 하진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림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알았으면 더는 말 시키지 마시라고요!

“하진이 제가 아는 그 박하진이에요?”

아니야. 네가 아는 박하진 아니야. 난 너 몰라.

“응! 최근에 가르치고 있거든.”

“그럼 저 게걸음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박하진이겠네요?”

다리가 움찔거렸지만 일단 한번 참았다. 우도현이 저를 비꼬든 말든 저 새끼 면상만 안 보면 그만이니까. 그럼 어제 못 푼 욕구도 마저 풀고, 몹시 평화로운 주말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은 하진의 주말이 평화롭기를 원치 않으시는 모양이다.

“그렇지? 아, 참. 그러고 보니 둘이 친구 아닌가?”

허공에 멈춰버린 하진의 발이 이내 쾅, 체육관 바닥에 꽂혔다. 그놈의 친구, 친구. 망할 친구란 단어는 언제까지 우도현과 박하진 사이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닐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하진, 본인은 언제까지 그 단어에 얽매여서 화를 낼 건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두 남자의 시선이 하진에게 닿았다.

“친구 아니에요.”

관장님이 던진 질문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하진은 여태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면서까지 그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다. 하진의 단호한 어조와 진지한 표정은 아무리 눈치 없는 관장님이라도 그만 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하! 관장님이 웃음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흘긋거리며 두 사람의 눈치만 보던 관장님은 때마침 걸려 온 전화에 재빨리 사무실로 도망쳤다.

그렇게 도현과 하진만이 남았다.

“복싱 배워?”

도현이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그 소름 돋는 관심에 톡톡, 메시지를 보내던 하진의 손가락이 어긋났다.

“내가 복싱을 배우든 발레를 배우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죠?”

빈정거리며 답하는 와중에 미처 완성하지 못한 메시지가 전송됐다. [ㅃㅏ 리 오ㅏㄹ]. 이게 무슨…. 하진은 얼른 전송을 취소하곤 다시 메시지에 집중했다. 힐끗 하진을 훔쳐보던 도현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그럼 내가 길바닥에서 잤겠냐?”

“복싱장은 여기 다니고?”

“…….”

“복싱은 어때?”

자고로 질문이란 대답을 듣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도현은 질문, 질문, 질문. 오로지 질문뿐이었다. 신종 엿 먹이기 화법인 모양이다. 묘하게 거슬리는 화법에 하진은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야, 너 대답도 안 들을 거면서 질문은 왜 해?”

“대답은 별로 안 궁금해서.”

아아, 별로 안 궁금….

뭐? 씨발? 하도 당연하게 말해서 그냥 넘어갈 뻔했다. 아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구나. 차라리 상종을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어 하진이 그대로 옆을 지나치려 했다.

“너한테 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도현이 하진을 붙잡았다. 덕분에 오늘 처음으로 우도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는데 역시나 꼴사납게 웃고 있었다. 저 흥미로운 듯한 입꼬리가 무척이나 맘에 들지 않았다. 물론 뒤이어 들려온 말 역시 맘에 들지 않았고.

“너 곧 계약 만료되더라.”

“제 뒤 캐고 다니세요?”

하진의 눈썹이 와그작 뭉개졌다. 어쩐지 아까부터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해대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본론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빙빙 돌려서까지 말하려던 대단한 본론, 어디 들어나 볼 셈으로 몸을 돌려 하진이 도현을 마주했다.

“네가 대어긴 한 가봐. 계약 6개월이나 남았는데 찌라시 도는 걸 보면.”

“무슨 찌라시?”

“박하진 W 엔터 올 거라는.”

“오, 신박한 개소리.”

“맞아. 방금 내가 지어낸 거야.”

미친. 어이가 너무 없으니 대꾸할 의욕도 안 난다. 이 새끼, 미국 갔다 왔다더니 0개 국어 하나 본데. 한국말을 뭐 이따위로 하나 싶었다.

“계약하자, 우리랑.”

“대표되더니 대가리가 어떻게 됐어?”

“금액은 잘 쳐줄게.”

“네 면상을 치기 전에 꺼져.”

우도현의 능글맞은 얼굴은 딱 술 먹은 다음 날 크림파스타를 보는 것처럼 니글거렸다. 조금만 더 얘기를 나누다가는 저 면상에 토악질할 것만 같아 하진이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였다.

“너 예전에 우리 회사 연습생이었잖아.”

그 말이 돌연 하진을 멈춰 세웠다. 꿈틀대는 눈썹이 도현을 향한 날 선 적개심을 드러냈다.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데 우도현이 내뱉은 말은 명백한 후자였다. 그게 하진을 욱하게 만들었다.

“예전? 야, 착각하지 마. 내가 지금 너랑 노닥거린다고 우리가 그때처럼 친구인 것 같아?”

“…….”

“너랑 나는.”

“…….”

“그냥 남이야.”

가시 돋친 말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도현을 공격했다. 여기저기를 찔러대던 말들은 하진이 도현의 어깨를 밀치자 툭하고 발밑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하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하진과 하진이 남긴 말은 사라졌지만, 그것들이 남기고 간 상처는 고스란히 도현의 몫이 되었다.

“말 참 나쁘게 하네.”

도현이 멀어지는 하진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W 엔터로 하진을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하진에게 ST가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대놓고 저를 무시하는 박하진의 태도가 영 못마땅해서, 그래서 일종의 관종 기질로 박하진에게 시비를 건 것이었다. 그 끝이 이렇게 아플 줄은 예상 못 했지만.

덩그러니 남은 도현은 유리문 너머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하진을 응시했다. 하진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쭉. 이윽고 하진이 사라지자 시선을 옮기려는 도현의 눈에 난데없이 웬 남자가 튀어나왔다. 아주 꺼림칙한 타이밍으로 복싱장 옆에서 등장한 남자는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쓰곤 계단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마치 박하진이 내려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에이, 설마.”

그 순간, 도현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 이슈였던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 사생에 시달리던 가수가 참다못해 사생과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손가락이 골절됐다는….

아, 씨. 알 게 뭐야? 남이라는데 무슨 자격으로? 도현이 고개를 흔들며 애써 모르는 척했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온 사방으로 머리를 흔드니 골이 심하게 울렸고, 불안정해진 뇌가 이상한 경고를 해왔다.

‘저러다가 박하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하, 씨발.”

도현은 방금 말과 행동이 동시에 튀어나오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아니, 어쩌면 말보다 발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쿵쿵쿵쿵. 무작정 계단으로 내려간 도현이 재빠르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3층에서 2층, 2층에서 1층. 1층에서 지하 1층. 그렇게 층이 바뀔 때마다 도현은 이건 애정이나 우정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류애 때문이라고 본인을 세뇌했다.

헉. 헉. 이윽고 주차장에 도달한 도현이 숨을 몰아쉬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면서도 눈으로는 집요하게 하진을 찾았다. 없다. 구석구석 훑어봤지만 없….

“읏….”

뭐지? 말소리라기엔 애매했다. 소리가 난 곳은 도현이 등지고 있던 사각지대였다. 숨을 낮춘 도현이 그곳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이내 질척거리는 소리가 벽과 벽 사이, 좁은 틈에서 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는 점점 더 농밀해졌고, 사람 둘이 붙어먹고 있는 모양새만 보이던 것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은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하. 도현이 거칠게 남자 둘을 떼어놨다.

“아, 뭐….”

야…. 무지막지한 힘으로 인해 강제로 떨어지게 된 하진은 말을 멈추곤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도현이 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하진은 얼떨떨하게 도현을 바라봤다. ‘네가 왜?’라는 표정이었다.

이를 경멸 섞인 시선으로 도현이 내려다봤다. 스토커? 성추행? 걱정이 무색하게도 잔뜩 흥분에 젖은 하진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발정이 났으면 차에서 하세요. 파파라치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인류애는 무슨. 개같이 발정 난 새끼한테 인류애를 느낀 저가 병신이었다. 말이 삐딱하게 나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박하진은 이 상황에서조차 자존심은 굽히지 않을 모양이었다.

“너도 끼워줘?”

이딴 뻘소리나 하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혈관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제 취향은 아니라서요.”

“…….”

“마저 잘 박으세요, 박하진 씨.”

화를 억누른 건조한 목소리가 하진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귀뿐만 아니라 뇌까지 스며들어 하진의 사고회로를 망쳐놨다. 하진은 더 이상 도현에게 대꾸할 수 없었다.

툭툭, 하진의 어깨를 두드린 뒤 도현은 하진을 지나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하진은 도현의 말을 곱씹다가 조금 늦게 그 의미를 깨달았다. 악! 하진의 양 볼이 수치심에 달아올랐다. 그에 눈치도 없는 최윤조가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누구예요, 형?”

그러자 분노의 화살이 애꿎은 최윤조에게로 돌아갔다.

“넌 뭐 금붕어 새끼야? 어제 봐놓고도 기억을 못 해?”

“어제?”

“…….”

“헉. 우도현 대표님?!”

그래, 망할. 우도현이다. 맨날 자기만 잘난 듯이 말하는 저 빌어먹을 새끼가 우도현이라고! 솔직히 우도현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고. 근데 말을 꼭 저렇게 하대하듯 말해야겠냐. 진짜 재수 없는 새끼. 하진이 솟구치는 분노에 피가 고일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그리곤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했다.

우도현한테 잽 날릴 방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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