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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0/10)

외전

다니엘 레널드의 결점은 무엇인가?

그건 몇 년간 할리우드를 꾸준히 달궈 왔던 화제였다. 다니엘이 모친과 부친이 원하는 할리우드 유명인들의 그린 듯한 2세 역할을 완벽히 해내는 동안, 그의 사생활은 깨끗하리만큼 알려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니엘의 파파라치샷에 닉이 걸핏하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썩 가까워 보였고, 심지어는 가끔 옷을 돌려 입는 듯한 모습도 적발되었던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은 닉 클레이튼은 종종 휴일에 다니엘과 해변에서, 쇼핑몰에서, 또는 라스베가스의 호텔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던 와중 다니엘이 했던 인터뷰는 그의 대한 관심에 한층 더 불을 붙였다. 아마 레드카펫 위에서 받았던 질문일 것이다.

-모두가 다니엘의 연애사를 궁금해하는 거 알고 있나요?

-제 연애사에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기자는 바라는 게 있는 듯한 눈빛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게 내민 마이크 앞에서 그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걸쳤다. 사르르 접히는 눈매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사실 오래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단정한 어투로 답한 다니엘은 손을 들어 목에 걸린 크라바트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더 말할 것 같은 모양새에 다들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했으나,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아무튼, 닉 클레이튼 또한 머지않아 다니엘이 예고도 없이 사고를 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름 훈련을 떠났던 그는 속보로 뜬 다니엘의 기사를 보며 머리를 부여잡았고, 돌아와서는 다니엘의 볼을 쿡쿡 찌르며 웃었다.

-이럴 거면 선셋대로에 네 연인이 나라는 광고판이라도 걸지 그래?

-그래도 돼?

-정말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헛웃음을 흘리는 닉 클레이튼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다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때는 그 정도로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것마저도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닉 클레이튼과 다니엘 레널드는 연인이 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사사건건 부딪치고 쉽게 으르렁거리던 이들이 사귄다고 해서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일 것이다. 오브리 레널드의 초대를 받아 다니엘의 본가에서 열린 만찬에 다녀왔던 날이었다. 식사하면서 마신 샴페인 몇 잔에 취해 다니엘의 방에서 입술을 비비던 와중, 닉은 본능적으로 그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더듬었고….

-…닉.

-이건.

이런, 제길. 닉 클레이튼이 변명거리를 찾아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부딪히던 입술을 뗀 채 저를 서늘하게 주시하는 다니엘의 시선에 술기운 따위는 단숨에 날아간 후였다. 닉은 저도 모르게 허리까지 바로 세운 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기야, 오해야.

-오해?

-…….

그가 어디 한번 변명해 보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두운 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한 닉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됐다. 그 자리에 등 뒤를 더듬던 손이 뭐를 찾던 건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니키는 떨리는 시선을 숨기지 못한 채 침을 삼켰고, 그날 닉 클레이튼은 그렇게 몸에 밴 버릇을 단숨에 고쳤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을 때면 주먹을 날렸고, 가끔은 몸을 섞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은 가수 라일리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파티에 갔을 때였는데……. 닉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는 듯 눈을 깜박이며, 더 거칠게 물을 박찼다. 어쨌든 나란히 주먹을 주고받았던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겉보기엔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관계였다. 어쩌면 연인 치고는 제법 과격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애는 제법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순조로운 게 맞을 것이다. 아마도.

“클레이튼!”

후욱, 거친 호흡을 뱉으며 물 밖으로 몸을 뺀 닉에게로 벼락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고함의 주인은 대학 수영부의 코치에서 이제는 수영 국가 대표 헤드 코치가 된 잭 맥케인이었다.

수영장의 벽을 붙잡은 채 움찔한 닉이 얼굴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닦아 내렸다.

“최근에 쉬고는 있는 거야? 집에 가서도 수영장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니지?”

날이 선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닉은 잭이 몰아붙이는 말 안에 걱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 그의 차가운 얼굴에선 선수를 향한 애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잭 맥케인은 그 누구보다 닉 클레이튼의 컨디션에 예민했다. 훈련량으로도 모자라, 휴식 시간까지 관리하는 그에게서 어물쩍 고개를 돌린 닉은 가벼운 변명을 꺼냈다.

“뭐……. 전 원래 물속에서 쉬는 거 알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

완곡하게 꺼낸 시인에 맥케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시합이 끝났는데도 회복이 더딘 게 이상하다 싶었지. 올림픽이 시작되기도 전에 몸 고장 내려고?”

“그럴 리가요.”

“이봐, 욕구 불만이면 차라리 섹스를 해.”

노골적인 비아냥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흠칫 닉을 돌아보았다. 같은 선수들 사이에선 간간이 키득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잭 맥케인의 옆에 서 있던 어린 코치가 내민 타월로 젖은 얼굴을 닦으며 닉은 한숨을 삼켰다. 입을 다문 건 대꾸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다지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욕구 불만?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장기간 이어진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영화제다 뭐다 쉴 틈도 없이 더럽게 바빠진 애인 탓에 여러모로 불만이 쌓여 가던 중이었으니까. 섹스? 이것도, 애인이 바빠서…… 이런 제길.

“알았어요. 쉬면 되잖아요, 쉬면.”

닉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털던 타월을 어깨에 걸쳤다.

몇 년이나 알아 왔지만, 물속에 있는 게 몸에 무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코치에게 여전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 몸에는 착실히 피로가 쌓이고 있을 거라나. 닉 또한 그의 말마따나 다른 방식으로 몸을 푸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생각은 있지만….

그렇다고 스케줄을 감당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애인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

짧은 한숨이 입가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순조롭기는 무슨.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니엘 레널드와의 연애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얼마 전, 그는 다니엘이 자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진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 잠들었던 모양이지만, 촬영 중에는 수면제를 복용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쩐지 떨어져 있을 때는 상태가 더 심각해지더라니.’

누적된 피로는 하필이면 촬영 도중 빠져나와 닉을 보러왔을 때 터졌다.

침대 위로 후드득 떨어진 핏방울에 기겁한 사람은 닉뿐이었다. 다니엘 레널드는 익숙하단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충 코를 틀어막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가 미식축구를 그만두기 전, 공을 안은 채 엔드존을 향해 돌진하던 때를 연상시키는 모습은 당연하게도 닉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터치다운 직전 닉의 격정적인 수비로 순조롭게 득점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게 닉 클레이튼이 일주일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다니엘의 모습이었다.

“말만 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

“갈게요.”

닉은 눈을 부릅뜬 잭 맥케인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몸을 돌렸다. 다른 이들은 더 훈련시키지 못해 안달이면서…. 저는 쉬게 하지 못해 안달인 맥케인이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덤덤한 얼굴로 샤워실을 향했으나, 사실 닉의 머릿속은 제법 복잡했다. 물속에서 온몸을 이용해 앞으로 뻗어 나갈 때만이 잡다한 생각을 잊어버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물속에 있다 보면 생각과 감정은 금방 휴지 조각처럼 녹아내리곤 했다. 애초에 고민이란 단어와 닉 클레이튼은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빠르게 몸을 씻어 낸 닉이 샤워실을 나왔다. 금방 옷을 갈아입고 라커 룸 밖으로 나서던 그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고개를 들었다.

“하하, 어디로 가려고?”

“딜런.”

제 어깨에 팔을 걸친 주인공은 잭 맥케인보다도 더 오래 보고 있는 딜런 와이트였다. 훈련 도중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는 수영복 위에 파란색 윈드치터 집업만 걸치고 있는 채였다.

딜런은 앞으로 걸어가는 닉을 따라 발길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많이 쌓였나 본데. 닉, 애인이랑은 헤어졌어?”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애인 소리에 핸드폰에 쌓여 있는 연락을 훑어 내리던 닉의 손이 멈췄다. 눈만 굴려 바라본 딜런 와이트는 건수라도 잡은 사람처럼 즐거워 미치겠단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설핏 그를 곁눈질한 니키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안 헤어졌어.”

“쌓인 건 사실이고?”

“귀찮으니까 저리 좀 꺼져.”

시큰둥한 대꾸에도 딜런은 쉬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쌓인 것 같아 걱정된다느니, 컨디션에 영향을 미칠 정도면 애인 말고 다른 사람이랑 자는 것도 괜찮지 않냐느니….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안 그래도 최근 신경 쓰던 부분을 쿡쿡 건드리는 것뿐이었다.

그때였다.

“너 다니엘 레널드랑 잘 붙어 다니잖아. 혹시 그거냐? 레널드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여자들한테 네가 옆에서 말 몇 마디만 해 주면서 넘어오게 하려고.”

귀를 후비적거리며 흘려듣던 닉은 들려온 이름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닉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딜런 와이트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 새끼는 진짜 나를 좋아하나. 몇 년에 걸쳐 공고해져 가던 가설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빠르게 딜런을 훑어 내린 닉이 짧게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바위처럼 생긴 게 제 취향은 아니었다.

“왕자님의 이번 상대는 비비 모리슨이라던데, 너도 노리고 있는 거 아니야?”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지?

“내가?”

닉 클레이튼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누구를?”

비비안과 다니엘이 함께 영화를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찌라시가 도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닉에게 있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딜런이 지껄인 말 중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은, 자신이 다니엘 레널드 주변의 사람들이나 꼬여 내려고 그와 붙어 다닌다는 듯이 말한 부분이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

잠시 위아래로 딜런을 훑던 그는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며 툭 말을 던졌다.

“혹시 뒤가 박히고 싶어서 애가 달았냐? 아무리 쌓였다고 해도 너는 아니야.”

“뭐… 뭐?”

“미안하지만, 딜런.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잖아.”

얼빠진 딜런을 보며 닉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찡그린 눈가에는 얼핏 정말로 미안한 기색마저 스친 것 같았다. 잠시 당황한 듯 굳어 있던 딜런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하……. 씨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고.”

시니컬한 목소리가 언성을 높인 딜런의 말을 간단히 잘라 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닉 클레이튼은 휙 몸을 돌려 딜런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웃음기 없는 눈매에 딜런 와이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딜런은 닉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였다. 그는 닉이 평소처럼 귀를 후비적거리며 웃어넘기는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입가를 비튼 표정이 아니라.

“네 50미터 기록이 사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길다는 말이 도는 건 알고 있어?”

탁, 닉이 제 어깨에 올라온 팔을 쳐 내며 말했다. 워낙 꽉 쥐고 있던 탓에 손을 밀쳐 내는 것만으로도 제법 큰 타격음이 울렸다. 그는 딜런의 경직된 얼굴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잠시 눈꺼풀을 내렸다가, 천천히 든 닉이 평소와 같은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닉이 어깨를 으쓱하곤 딜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격려하는 듯한 몸짓에 딜런 와이트의 입에서 기가 찬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게서 몸을 돌린 닉이 건물 밖으로 몸을 옮겼다. 귀에 이어폰을 꽂자 뒤에서 들려오는 ‘클레이튼, 그거 거짓말이지?’ 따위의 물음 정도는 쉽게 차단되었다.

다니엘 레널드와 함께 사는 동안 발전한 게 있다면, 말로 누군가를 열 받게 하는 능력일 것이다. 불현듯 멈춰 선 닉은 그런 기술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곤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문제는 다니엘의 가혹한 스케줄 따위가 아니라는 걸, 닉 클레이튼은 결국 인정해야 했다. 이번에는 비비안 모리슨이라고 했었나. 닉이 조금 전 딜런의 입에 올랐던 이름을 다시금 상기해 냈다.

그때의 인터뷰 이후로 다니엘을 쫓는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의 호기심은 그의 숨겨진 연인에게로 향했다.

다니엘 레널드의 오랜 연인은 과연 누구인가?

그 의문을 풀려는 듯 추측성 기사는 물밀듯 쏟아져 내렸다. 촬영지에서 여배우와 찍힌 영화장 사진만으로도 찌라시에 불이 붙을 정도였다. 요 몇 년 사이 그의 이름 옆에 나란히 섰다가 지나간 이름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다니엘의 연인을 추측하는 기사에 따라붙는 엉뚱한 이름들을 볼 때마다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아, 젠장.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닉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이상할 정도로 하나도 순조롭지 않았다. 단 하나도.

***

캘리포니아에 아예 정착하게 된 닉은 다니엘과 같이 살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니엘이 닉의 집에서 제집처럼 지내고 있었다.

사전에 서로 합의된 사항은 아니었으나, 불만을 가진 이도 없었다. 집을 구매하면서 닉은 당연히 다니엘이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다니엘 레널드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파파라치 컷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거리가 유난히 가깝다는 건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들을 보는 시각 또한 다양했다. 할리우드 배우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친밀한 관계를 그저 유쾌한 에피소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두 사람이 정말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쪽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의 관계가 할리우드에서 제법 화제가 된 것은 분명했다. 다니엘 레널드는 요즘 가장 주가가 치솟는 배우였고,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예외가 바로 닉이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는 닉 대신, 다니엘은 토크 쇼에 나갈 때마다 ‘절친한’ 닉 클레이튼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했다.

어쨌거나 집에 도착해 막 주차를 마친 순간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띠링, 경쾌한 알람 소리와 함께 제게 날아든 수신인 불명의 이메일을 받았다.

「to. Nick」

이메일의 제목은 짧았다. 제 이름이 박힌 제목을 잠시 내려다보던 닉은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것이 고등학생 때까지만 쓰던 메일이라는 점은 그에게 조금의 위화감도 주지 못했다. 메일을 연 그는 곧장 커다랗게 첨부된 한 장의 사진을 마주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익숙한 배경은 고등학교의 강당 뒤편이었고, 가운데에는 더 익숙한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주변이 어두워도 닉은 사진에 담긴 이들이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그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건 당연하게도, 다니엘이었다.

“뭐야.”

닉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그의 시선을 붙잡은 건 화려한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는 장면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사진 속에서 자신들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보던 니키가 무표정한 얼굴로 떠올린 게 있었다.

“이게 언제야?”

닉은 숱하게 맞춰 왔던 입술의 감촉이 어떤지, 제 바보 같은 연인이 어떤 식으로 키스를 하는지, 그가 애탄 채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 얼마나 자극적인지는 알아도 입을 맞췄던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해 내진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닉 클레이튼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사진 아래에 달려 있는 짧은 메시지 덕분이었다.

「보스턴 스쿨 체육관, 일요일 오후 1시」

보스턴 스쿨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장소였다. 닉은 그제야 사진 속 장면이 다니엘과 프롬 파티에서 빠져나와 쏘아 올리는 폭죽을 보던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언제 적 사진을….”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은 그가 다시 사진을 눌렀다. 금방 확대된 사진이 핸드폰 화면에 가득 들어찼다.

여전히 의아한 점은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진을 보낸 것인지와 같은. 게다가 일요일이라면 내일모레인데……. 쾅, 차 문을 닫은 그가 차체에 몸을 기대며 메일에 답했다.

「누구?」

짧은 답을 보내고 몇 분 정도 기다렸으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건 없었다. 메일 속 사진을 내려다보던 니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이런 사진에 당황할 만큼 그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다니엘과 둘이 있는 사진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종종 받아 왔었으니까.

주로 자신의 SNS 개인 계정으로 팔로워들이 보내는 사진이었는데, 그들은 사진을 보낸 뒤 꼭 ‘두 사람이 산타모니카에서 키스하는 걸 봤어. 하지만 두 사람이 친구라고 한 걸 나는 믿어. 앞으로도 응원할게!’ 같은 신난 코멘트를 덧붙이곤 했다. 다니엘 레널드의 말에 따르면 눈치가 어류 수준이라는 닉일지라도 그들이 자신과 다니엘이 연인 사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들은 앞으로도 ‘비밀’을 유지해 주겠다는 듯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딱히 비밀로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잠시 사진을 내려다보던 그가 입가를 매만졌다. 아무튼 이런 사진을 찍을 만한 사람은 많았다. 제시 해밀턴, 커너 재거, 그것도 아니면…… 잠시만, 이름이 뭐였지? 노아 파슬리? 어쨌거나 누가 보낸 것인지는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잠시만.”

그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굳이 다니엘이나 그의 에이전시가 아니라 이쪽으로 보낸 걸 보면, 제게 원하는 바가 있는 건 분명했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이메일을 보낼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닉은 차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풍덩, 그가 테라스에 딸린 풀장으로 뛰어들자 수면에 커다란 파동이 생겼다. 집에 가면 제발 쉬라며 신신당부하던 코치의 말은 체육관에 두고 온 듯 거침없는 다이빙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물살을 가르는 데에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잖아.’

잭의 말대로 욕구 불만인 걸지도 모른다. 그는 쉬이 인정하며 물속에서 답도 없이 끓어오르는 열감이 식기를 기다렸다.

그가 헤엄치는 동안 노을로 얼룩덜룩하던 하늘은 금세 어둠에 뒤덮였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물속에 잠겨 있던 닉의 귓가에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진 않지만, 성큼성큼 내딛는 발소리는 상대가 누군지 곧바로 짐작하게끔 했다. 물 밖으로 상체를 꺼낸 니키가 발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말도 없이 그들의 집에 올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니?”

테라스의 문턱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의 모습에 닉이 풀장에서 빠져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꼴로 제게 다가서는 그를 보면서 다니엘이 설핏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감기 걸리려고 작정한 모양이지.”

짧게 혀를 차면서도 그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니키에게 덮어 주었다. 못해도 삼천 불은 족히 넘을 고급 재킷이 닉의 어깨 위에서 물에 젖어 들어갔다. 그러나 고작 옷이 망가지는 것 정도에 연연해하는 이는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연인을 향한 반가움과 걱정이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피곤해 보이는 그의 낯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린 니키가 고개를 기울였다. 쪽, 가볍게 닿는 입술이 따뜻했다. 입술이 맞닿자마자 다니엘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숨이 얽혀들기 직전이었다. 평소였다면 그 틈으로 파고들어 혀를 빨았을 닉이 주먹을 쥐며 몸을 떼어 냈다. 그런 닉의 얼굴로 의아한 시선이 꽂혀 들었다. 닉 클레이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니엘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여유로운 미소가 점차 흐릿해졌지만, 닉은 그대로 말을 돌릴 뿐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온다고 말 안 했잖아.”

“온다고 말해야 했어?”

다니엘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리며 웃었다. 못마땅할 때마다 나오는 미소는 왕자님 같은 생김새의 다니엘과도 썩 잘 어울렸다.

“네가 보고 싶어서.”

“…….”

“도무지 참을 수 없었어.”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제법 집요했다. 평소보다 피로한 기색을 하고서도 연신 저를 관찰하듯 살피는 녹색 눈동자에 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가를 허물었다. 그는 다니엘의 뺨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며 다시 한번 가볍게 입을 맞췄다. 걸핏하면 제멋대로 구는 연인의 약점은, 우습게도 자신이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부터 닉 클레이튼은 덩달아 다니엘에게 약해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다니엘의 뺨을 쥐고 입을 맞추며 풀장의 비치 베드에 눕힌 뒤 올라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지금의 닉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집에 돌아온 연인을 재우는 일이었다.

“그거 알아? 네 얼굴에 지금 졸음이 가득해. 얼마나 못 잔 거야?”

“하나도 안 졸려, 니키.”

“거짓말하지 마, 멍청아.”

실소를 흘린 니키가 안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몸짓에 테라스의 유리창에 기대어 서 있던 다니엘이 몸을 바로 세웠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2층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닉이 침실 안의 욕실로 향하며,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먼저 자.”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에 뒤에 서 있던 다니엘의 몸이 굳었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으나, 이미 욕실 안으로 들어간 닉으로서는 알 겨를이 없었다.

샤워를 끝낸 닉은 욕실 밖으로 나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를 멈칫하게 만든 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다니엘이었다. 상의를 입지 않은 채 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그의 손에 걸려 있던 수건이 툭, 아래로 늘어졌다.

닉은 느슨하게 서 있던 몸을 곧추세우며 반사적으로 다니엘을 훑어 내렸다. 다니엘은 풋볼을 그만둔 뒤로 이전처럼 까다롭게 체중을 관리하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아예 운동을 관둔 것은 아니라 몸은 늘 한창 운동할 때처럼 단단했다.

닉의 시선은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힌 상체를 거슬러 올라가, 저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는 두 눈동자에서 멈췄다. 그 어떤 것보다 노골적인 건 바로 저 갈증 어린 시선이었다. 어두운 녹색 눈동자에 떠오른 이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대니.”

저도 모르게 목 안쪽으로 침을 삼킨 니키가 침대에 올라가며 다니엘을 불렀다. 이불까지 끌어 올려 몸 위로 덮은 채, 그는 제 옆자리를 툭툭 가볍게 쳤다.

“뭐 해. 얼른 누워.”

옆에 누우라는 듯 눈짓하고선, 닉은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잠들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를 보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1시간 반을 날아온 다니엘 레널드는 말을 잃었다.

“…….”

다니엘이 아는 니키 클레이튼은 결코 섹스 시그널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알면서도 거부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사귀게 되고 난 후 그가 처음으로 내비친 거절 의사였다. 자신이 불러온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닉은 태평하게 침대에 누워 제 옆자리를 가리킬 뿐이었다.

말없이 그의 옆에 누운 다니엘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니키.”

“응.”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을까?”

“딱히.”

“…그렇지?”

혼잣말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린 다니엘이 몸을 일으켰다. 등 뒤로 그가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음에도, 닉 클레이튼은 꿋꿋이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와 함께 끝내주는 숙면을 할 생각이었다.

“그럼 역시 네가 잘못한 거겠군.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당장 실토해.”

이어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추궁이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린 닉이 눈을 떴다.

“나한테서 등 돌리지 마, 닉.”

“너야말로 나한테 명령하지 마, 대니.”

“명령이 아니라.”

다니엘 레널드는 완전히 상체를 일으킨 채 닉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느릿하게 떨어졌다.

“명령이 아니라… 애원하고 있잖아. 너는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으니 모르겠지만.”

빌어먹을.

닉은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다니엘의 얼굴은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특유의 거만한 낯 위로 떠오른 절박함은 닉 클레이튼의 몸에 찌릿한 전류를 흐르게 했다. 초조함과 불안이 뒤섞인, 그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애원하는 듯한 표정.

닉은 굳게 말린 채 떨리는 다니엘의 주먹을 내려다보다 거칠게 머리를 털어 냈다.

“오늘은 그냥 자, 멍청아.”

“…….”

투덜거리듯 나온 목소리에 다니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그의 나직한 물음이었다.

“내가 지겨워졌어?”

이런 제길. 가까스로 입을 다문 닉이 욕설을 짓씹어 삼켜 냈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말이 되냐는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정말이지, 멍청한 다니엘 레널드. 그는 결코 제게 멍청하다고 할 처지가 못 된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자신을 자극하는 방법을 지나치게 잘 알았다.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 끝에 붙은 자신 없는 기색이 가슴팍에 꽂혀 들었다. 이건 그가 습관적으로 내보이곤 하는 가식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지만.

“할 마음이 생겼어?”

“그러라고 무시하지 못할 말들을 꺼낸 거 아니야?”

니키가 불퉁하게 답하며 입고 있던 흰 티셔츠를 끌어 올려 벗었다.

“하고 싶어졌어.”

옷을 벗느라 붕 뜬 머리를 한 채 닉이 씩 웃었다. 휘어지는 눈매를 따라,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한 금색 속눈썹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사이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다니엘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졌다.

이 푸른 눈에 자신이 가득 들어차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면 목을 태울 듯 죄는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았다. 결과는 보다시피, 형편없을 정도였지만.

망망대해를 떠도는 사람처럼, 갈증은 날이 갈수록 더더욱 심해졌다. 다니엘이 한숨과 함께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었다.

“넌 정말이지 제멋대로야, 니키 클레이튼.”

이게 누구 때문인데. 닉은 그런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스스로를 숨기는 다니엘을 답답하게 여기던 닉 클레이튼은 이제 없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는 본인의 평판에는 일절 관심 없는 주제에 다니엘의 평판을 신경 썼고, 하루 종일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나서도 2시간을 운전해 다니엘이 있는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런 주제에 다니엘의 건강 상태에는 민감했다.

닉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는 결코 잭 맥케인이 지나치게 휴식을 강조한다고 투덜거릴 처지가 못 됐다. 쯧. 반박할 말들을 꾹 삼킨 그가 웃는 낯으로 혀를 찼다.

“그래, 알아. 나도 사랑해.”

순식간에 다니엘의 몸 위로 올라탄 그가 가볍게 대꾸했다. 상체가 닿을 듯 깊숙하게 고개를 숙인 탓에, 웃음기 어린 숨결이 다니엘의 입가를 간지럽혔다. 닉은 여전히 다니엘의 컨디션이 걱정되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니키.”

입술이 빈틈없이 맞닿은 순간 고민은 모두 날아갔다. 야트막하게 열린 입술 틈으로 혀가 얽혀 들었다. 닉은 그의 전부를 빨아 먹기라도 하려는 양 다니엘에게로 몸을 숙였고, 얇은 파자마는 금세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

솔직하게 말하건대, 어젯밤 다니엘 레널드 앞에서 끝까지 절제하지 못했던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다니엘이 먼저 자신을 자극했다는 점이나, 몇 번이고 재우려고 했던 제 노력에 서운함을 내비쳤던 점으로 변명하자면 할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참지 못하고 그의 위로 올라탄 것은 여지없이 본능에 져 버린 결과였다.

「다니엘은 걱정 마! 최근 봤던 모습 중 가장 생기 있어 보이니까.」

비행기에서 내린 닉 클레이튼은 에블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며 한숨을 삼켰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보스턴으로 오기 전 봤던 다니엘의 상태가 썩 괜찮아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다음 예정된 스케줄이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닉은 조금 더 참아 봤을 것이다.

아주 조금쯤은.

「그나저나,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

그는 이어서 날아온 에블린의 메시지에 짤막한 답을 보냈다.

「전혀요.」

하룻밤 사이 닉을 캘리포니아에서 보스턴까지 날아오게 만든 것은 이메일이었다. 과거 프롬 파티에서 다니엘과 키스하는 사진이 담겨 있던 이메일을 받았다는 사실을 에블린에게 말했다. 에블린은 다니엘의 에이전시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닉은 보스턴으로 오기 전 그녀에게 이메일에 대해 알려 주어야 했다.

사실 에블린에게는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인물이 있었다. 누군지 조금의 짐작도 할 수 없었다면, 제가 없다는 이유로 잠조차 제대로 못 이루는 애인을 두고 올 리 없지 않나.

-왜 보스턴으로 가는지 말 안 해 줘?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까지 삐딱한 자세로 추궁하던 다니엘이 떠오르자 문득 머리가 아파졌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도 그는 쉬이 납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같이 가면 안 되는 거냐고 묻는 다니엘에게 닉은 끝내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돼 놓고 불참하겠다고? 개소리 그만해, 미친놈아!

끝내 짜증스럽게 대꾸한 니키는 다니엘을 뒤로한 채 보스턴으로 향했다. 의심도 이 정도면 병적인 수준 아닌가? 그에게 있어 자신의 신뢰도는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출발하기 직전, 핸드폰으로 다니엘에게 메시지를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한창 시상식에 있을 그로서는 당장 확인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네가 걱정할 일 따윈 단 하나도 없어. 이따 집에서 봐, 대니」

메시지를 전송한 닉이 핸드폰을 조수석 시트 위로 던져두었다. 남자답게 길쭉한 손이 핸들을 잡았다. 메일에 쓰여 있던 시간에 맞추려면 촉박하게 움직여야 했다. 차를 몰고 학교로 가는 내내 보이는 풍경은 오랜만에 봐서인지 익숙하기보단 낯설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주차한 닉이 차에서 내렸다. 사람이 없는 보스턴 스쿨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한적한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닉은 늘 땀방울로 젖어 있던 그라운드를 지나쳐 사진 속 장소인 체육관으로 향했다. 일요일인데도 체육관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볼을 긁적이다 천천히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밖에서 새어 들어온 빛 덕분에 안은 제법 밝았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농구 코트 안쪽의 스코어판에 무언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

이게 무슨 엉뚱한 보물찾기인지. 그 앞으로 다가간 닉은 스코어판에 붙어 있는 사진들을 툭, 뜯어냈다. 사진은 한두 장이 아니었다. 손끝에 걸린 여러 장의 사진은 한결같이 닉의 고등학교 생활을 담고 있었다.

그 중 홈커밍 파티에서 당시 사귀던 여자애와 제가 키스하는 사진을 본 닉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그가 사진을 반으로 접어 뒷주머니에 대충 욱여 넣었다. 보스턴을 떠나기 전 태워 버려야 할 것이 생겼다.

“닉.”

사진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던 도중 등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닉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추리라고 할 것도 없이, 이메일을 보낸 사람을 예측하는 건 쉬웠다. 고등학생 때 쓰던 메일을 아직도 알고 있을 만한 사람, 그의 사진을 찍었을 만한 사람, 그걸 여태 혼자만 가지고 있다 뒤늦게 보내올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닉 클레이튼에게는 수수께끼를 내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런 보물찾기로 사람을 캘리포니아에서 보스턴까지 날아오게 만들 사람이. 닉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니.”

악의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제니퍼 해밀턴밖에 없었다. 그의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에 제니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오늘은 안 늦었네, 매일 늦으면서.”

“네가 정확하게 1시까지 오라고 적어 놨잖아.”

닉이 느릿한 시선으로 그녀를 눈에 담았다.

제니는 얼마 전까지 영상 통화로 보던 모습과 똑같았다. 작년 여름에는 캘리포니아까지 날아온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내지도 않았나. 그때와 달라진 점은 크게 없었다. 어깨 부근까지 찰랑이던 고동색 머리칼이 어느새 훌쩍 길어져 있었고, 이전보다 확연히 어른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런 장난을 치는 걸 보면 여전히 어른스럽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닉, 화났어?”

“그럴 리가.”

조심스럽게 눈을 굴리는 그녀를 보며 니키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당겼다. 퍽 다정하게 그려진 미소에 바짝 경직되어 있던 제니의 어깨도 한결 가벼워지는 게 보였다.

“나일 줄 알았어?”

“내 사진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당연히 알 수밖에 없지 않냐며 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얼굴에 장난스럽게 번지는 웃음기를 보며 제니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 이윽고 망설이듯 물고 있던 입술을 뗀 그녀가 천천히 그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를 꺼냈다.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거 아니야, 제니.”

닉은 제니의 물음을 단칼에 부정했다. 그의 아콰마린 색 눈동자에 담긴 짙은 확신에 제니는 입술을 물었다.

“난 우리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네 말이 맞아.”

“…나는 네게 많은 시간을 줬어.”

“그것도 맞아.”

니키 클레이튼은 그녀의 말에 조금의 반박도 없이 기꺼이 수긍했다. 비록 서부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거리가 멀어지긴 했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녀를 빼놓을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흔쾌히 흘러나오는 긍정에 제니는 도리어 울컥한 얼굴을 했다.

“네가 먼저 말해 주지 않아서 그랬던 거야. 나한테는 말해 줄 수 있었잖아.”

“그래, 잘했어. 이번에도 네가 옳았어, 제니 해밀턴.”

키득키득 낮게 웃은 닉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보다 5인치 정도 작은 제니의 이마가 닉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 한 번 힘줘 안았다가 놓았다.

“언제 말해 줄 계획이었어?”

제니가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닉을 올려다보았다.

제니퍼 해밀턴은 자신의 단순한 친구가 늘 그랬듯 다니엘과의 관계 또한 머지않아 말해 주리라 생각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프롬 파티에서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녀는 줄곧 기다려 왔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닉 클레이튼이 볼을 긁적거리며 멋쩍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잘못했어, 제니.”

“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닉 클레이튼. 잘못이 있다면 절친에게 몇 년이 지나도록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하하, 맞아.”

눈을 흘기는 제니를 보며 그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닉은 다니엘과의 연애 사실이 매스컴에 알려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대회 기록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사람이었지, 평판에 연연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관이 있는 건, 도리어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라이징 스타인 다니엘 레널드 쪽이었다.

그런 주제에 다니엘은 걸핏하면 기자 회견을 열고 싶다고 했다. 결혼하자는 말도 거의 비등한 빈도로 몇 년째 그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의 커밍아웃이 자신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기자의 앞에서 당당히 ‘오래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입에 담은 거겠지.

그건, 몹시…… 다니엘 레널드답지 않은 일이었다.

“너답지 않은 일인 건 분명해.”

“어?”

멀뚱히 생각에 잠겨 있던 니키가 멈칫 고개를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제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건, 다니엘을 위해서야?”

제니퍼 해밀턴이 봐 왔던 닉 클레이튼은 여전히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그녀는 물으면서도 아마 그것이 정답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다니엘과 연애한다는 걸 숨기는 건 전부 그를 위해서라고 말이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정답도 아니었다.

(로.벨)“다니엘은…….”

말을 멈춘 닉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곧 얼굴에 초조한 미소를 띄웠다.

“이런, 나 그만 돌아가야 할 거 같아.”

뜬금없는 선언에 제니 해밀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깜박했어. 미안해.”

닉은 정말 미안하다는 듯 그녀를 다시금 가볍게 안고 놓아주었다. 조만간 뉴욕에 들리겠다고 속삭이자 제니는 눈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체육관 밖으로 달려 나온 닉은 바쁘게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켠 그가 한숨과도 같은 욕설을 짓씹었다. 이윽고 공항으로 향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제니가 했던 말이 울리고 있었다.

다니엘을 위해서냐던 물음.

…정말 그를 위한 일이 맞나? 닉은 다니엘이 이전에 자신의 곁에 있기 위해 풋볼을 포기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그 결정을 두고 ‘포기’가 아닌 ‘선택’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다니엘이 그의 커리어보다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겁을 먹은 건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다니엘의 불안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불안증세를 해결할 방법은 이미 존재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실소와도 같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대체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 버렸지? 빌어먹을, 너답지 않다던 제니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닉 클레이튼은 엑셀을 밟은 발에 힘껏 힘을 실었다.

***

닉은 에블린이 끊어 준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항공편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뜬 것은 다니엘이 보낸 메시지였다.

「mine (11)」

닉 클레이튼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가 쌓아 둔 연락을 확인했다. 제가 보냈던 메시지 아래로 따라붙은 그의 물음이 보였다.

「네가 걱정할 일 따윈 단 하나도 없어. 이따 집에서 봐, 대니」

「오늘 안으로 돌아올 거지?」

「언제 올 건데?」

「돌아와」

「돌아와 줘」

「가능한 한 빨리.」

인내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짤막한 메시지들에 닉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돌아오기를 채근하는 메시지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 정말. 귀여워 미치겠네….

어쩐지 몸이 간지러운 기분에 닉은 괜스레 움찔거리며 턱을 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을 아래로 내리던 그가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니키」

「너는 가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 알아?」

“허?”

「걱정할 일 없다는 말, 사실이 아니기만 해.」

“협박까지.”

닉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는 걸 보니, 아마 레드카펫에 오르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인 듯했다. 뭐라고 답을 할까 고민하던 그는 관둔 채 핸드폰을 껐다.

곧 핸드폰 화면에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장면이 재생됐다. 예상했던 대로 황금색 트로피를 손에 쥔 채 마이크 앞에 서게 되는 이는 다니엘 레널드였다. 할리우드의 왕자님이란 타이틀에 걸맞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가 어린 애처럼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제가 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 전합니다. 아카데미,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아카데미에선 처음으로 받는 상일 텐데도, 그는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그린 채 수상 소감을 내뱉는 모습은 정말이지 영화 같았다. 머지않아 그의 입가에서 그린 듯한 미소가 사라지고, 점점 닉 클레이튼만이 알고 있는 ‘진솔한’ 미소가 떠오르기 전까진 말이다.

[비록 이 자리에는 없지만, 여태 그랬듯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닉에게도, 애정을 담아 전합니다. 제 인생은 니키가 제 손을 잡고 수영장에 빠트렸던 여름날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목소리에 묻은 장난기가 언뜻 느껴지는 영국식 악센트를 부드럽게 들리게끔 했다. 늘 어른스러운 왕자님 이미지였던 그가 내뱉은 농담이어서인지, 회장에 있던 다른 배우들 또한 유쾌하게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물론 닉은 그가 내뱉는 말들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니엘이 단정한 얼굴로 내뱉는 목소리는 다정했고, 그건 오직 자신만을 향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수상 소감을 듣던 그는 곧 탑승 수속을 밟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빨리 캘리포니아로 가고 싶었다. 더 정확하게는, 다니엘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닉 클레이튼은 이제 자신을 보기 위해 보스턴까지 날아왔던 어린 다니엘 레널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올라타며 그는 에블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끊기자마자, 닉은 제법 진지하게 그녀를 불렀다.

“에블린, 부탁이 있어요.”

***

다섯 시간 정도를 비행하다 보니 몸이 제법 뻐근했다. 목뒤를 가볍게 쥔 채 스트레칭한 닉이 걸음을 옮겼다.

“여기야!”

입국장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그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펜스 너머에 서 있던 에블린이 그를 부르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금세 다가간 닉이 그녀의 빈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부탁한 건요?”

“어, 그게… 차 안에 있어. 너는 어때, 보스턴에 갔던 건?”

“별일 아니었어요. 차로 가요.”

에블린은 멋쩍게 웃으며 몸을 틀었다. 밖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차가 세워진 곳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따라 걸으며 닉 클레이튼은 다니엘을 만나면 해야 할 말을 떠올렸다.

우선, 에블린에게 부탁했던 것을 건넬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빠진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축하한다고 말해야지. 그가 자신의 시합마다 보냈던 문자를 그대로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잘했어, 대니.’ 하고 말이다.

머릿속으로 이어질 장면들을 그려 보던 닉은 에블린을 따라 어느새 검은 세단 앞에 도착했다. 눈에 들어온 차를 발견한 닉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건 에블린의 차도, 에이전시 소유의 차도, 그렇다고 자신의 것도 아니었다.

휙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에블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닉 클레이튼은 이 차 안에 누가 타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아마 차의 주인이 타고 있을 것이다.

“운전할 상태는 아니야.”

“제가 할게요. 차 키는 안에 꽂혀 있어요?”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 건 트렁크에 넣어 뒀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닉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곤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대니.”

“타.”

수상 소감을 말할 때는 분명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의 다니엘은 조금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삐딱한 자세로 고갯짓하는 그의 모습에 닉이 한숨을 삼켰다.

닉은 그의 말마따나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의 기분이 왜 안 좋은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제 비밀스러운 연인은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늘 솔직한 편이었고, 동시에 어딘가 늘 전전긍긍하는 편이었으니까. 차에 올라타 벨트를 찬 닉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법 큰 사고를 쳤던데?”

“내가 사고를 쳤다면 그건 너한테서 배운 거겠지, 니키.”

“…….”

할 말이 없었다. 닉 클레이튼은 다시 입을 다문 채 차를 몰기 시작했다.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위로 오른 차는 거침없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살짝 열린 창틈 사이로 조금은 습한 바닷바람이 들이닥쳤다. 차 안을 메운 건 오직 바람 소리와 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전부였다.

그가 묵묵히 운전하는 동안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해는 천천히 수평선 아래로 침몰했다. 타는 듯한 노을이 수면 위를 붉게 물들이며 사라진 바로 직후, 침묵 속에서 달리던 차가 멈췄다.

닉이 차를 세운 곳은 해변이 보이는 언덕 위였다. 언덕 위여서인지 말리부 로드에 위치한 저택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맥 레널드의 저택도 멀찍이 눈에 들어왔다. 다니엘과 몇 번이나 함께 왔던 장소는 그들만 아는 아지트처럼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닉 클레이튼은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뭐?”

다니엘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닉은 그의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말없이 씩 웃곤 차에서 내렸다. 차의 뒤로 가 트렁크를 열자, 에블린에게 부탁했던 꽃이 여전히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좀 낯간지러운데….”

잠시 꽃다발을 내려다보던 닉은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닉 클레이튼에게 있어 고민은 늘 무의미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가만히 고민하고 있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기를 택했다.

꽃다발을 든 채 돌아온 그가 차에 올라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니엘은 기다렸다는 듯 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닉이 픽 입꼬리를 올리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자, 선물.”

“…….”

“상 받은 거 축하해. 잘했어, 대니.”

다니엘의 단정하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 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진 꽃다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잘했어, 대니…….

다니엘은 제가 들은 말을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곱씹었다. 그건 그가 여태껏 닉에게 수도 없이 들려줬던 축하였다. 돌려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분홍색 꽃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닉 클레이튼이 미국의 공식 기록을 하나하나 깨 가며 신기록을 달성할 동안, 다니엘 레널드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최연소 자리를 갈아 치웠다. 영광스럽긴 하지만,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던 상이 닉의 잘했다는 한 마디로 빛을 얻었다.

검은색 셔츠의 목깃에 반쯤 가려져 있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목까지 단정하게 채워져 있는 와이셔츠가 답답하지도 않은지, 단추를 풀 생각도 없이 굳어 있던 다니엘은 이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내 거야?”

다니엘이 꽃다발을 품에 안아 들며 물었다.

“내가 꽃을 선물할 사람이 너 말고 또 있겠어?”

“…….”

닉이 무덤덤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니엘 레널드는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반응으로 그를 충족시켜 주고 있었다.

“니키, 아마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굳게 닫혀 있던 입술 틈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기 전까진 말이다.

고맙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왕자님다운 로맨틱한 말들을 꺼내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단숨에 부서졌다. 장난스레 눈을 접어 웃는 다니엘을 보며 닉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리시안셔스의 꽃말이 뭔지 알아?”

“뭐?”

꽃말이라니. 꽃한테도 말이 있다는 소리를 닉 클레이튼은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난생처음 들었다. 리시안셔스라는 꽃을 처음 알게 된 것도 다니엘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하다못해 꽃말을…….

그의 얼굴에 곧 불만스러운 기색이 차올랐다.

“자기야, 꽃이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내가 알아야 해?”

닉이 까칠하게 튀어 나갈 뻔한 말을 애써 다듬으며 물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표정만큼은 여전히 노골적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굴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결국 다니엘이 푹 고개를 숙였다.

“하….”

그는 꽃다발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이윽고 미치겠다는 듯 이마를 붙잡고 웃기 시작했다. 차 안에 숨죽인 웃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즐거워하는 걸 보면 방금까지 표정을 굳히고 있던 게 차라리 연기 같았다. 차마 숨기지 못한 채 흘리는 나직한 웃음소리에 닉의 표정은 점점 더 삐딱해지고 있었다.

한참을 큭큭거리던 다니엘이 겨우 웃음을 멈추며 시선을 들었다.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으로 눈가에 슬쩍 어린 물기를 닦아 낸 그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런 널 사랑해.”

다니엘은 꽃다발에 고개를 묻은 채 속삭이듯 말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만큼이나 달짝지근한 고백이었다.

어두워진 하늘에 차 안도 덩달아 어두웠지만, 이상하게 그의 미소만큼은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분홍색 리시안셔스 위로 파묻은 그의 얼굴에선 조금의 불안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때 닉 클레이튼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의 인생에 침범하지 않았던 때로 결코 돌아갈 수 없었다. 그것이 제가 뛰어든 삶이었고, 다니엘 레널드가 오랜 시간 기다리며 노력해 온 결과였다.

비록 여전히 아주 사소한 것들로 다투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부딪히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마음과는 다른 일들을 하게 되지만….

“이제 이만하면 된 거 같지 않아, 대니?”

그는 이미 불확실한 물살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미래를 두려워하는 게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널 떠나 보스턴에 갔을 때, 나는 뭐가 맞는 건지 고민해야 했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기분 좋게 눈가를 휘고 있던 다니엘이 초조하게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녹색 눈과 마주친 닉 클레이튼은 반사적으로 입 좀 다물고 들어 보라고 말할 뻔한 걸 꾹 참아 냈다. 대신, 한숨을 내쉬듯 웃으며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단 한 번도 물에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한 적 없는 것처럼, 닉은 이번에도 자신답게 굴기로 했다.

“다니엘, 나랑 결혼할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니엘의 표정을 살폈고, 다니엘은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이 프러포즈가 아닌 사형 선고라도 되는 양 굳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야. 나랑 결혼해 줘.”

닉은 손을 꽉 그러쥐어 긴장을 숨긴 채 경쾌하게 웃었다. 밀려든 파도가 단숨에 부서져 내리는 것만큼이나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화려하지 않은 프러포즈였으나, 그 어떤 할리우드 영화보다도 극적인 순간이었다. 다니엘은 감독이 영원히 ‘컷’을 외치지 않는 장면 속에 갇힌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닉 클레이튼을 주시했다.

“다니엘?”

“…….”

“대니.”

“…….”

“부디 ‘그래’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길어지는 침묵에 결국 다시금 입을 뗀 것은 닉이었다. 웃음기를 거둔 그가 간절함을 담아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녹색 눈동자에는 즐거운 기색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바로 답할 수 있으면서, 제가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어 일부러 시간을 끈 게 분명했다! 닉 클레이튼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토하며 그를 불렀다.

“자기야.”

“응.”

“대답.”

짧게 짓씹어진 재촉에 다니엘이 그린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기분 좋은 미소와는 다르게 입은 가지런히 다문 채였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닉이 볼 안쪽에 혀를 집어넣은 채 그를 주시했다.

닉의 머릿속에 있던 그림은 자신의 프러포즈에 곧장 좋다고 대답하는 다니엘뿐이었다. 그의 예상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 닉은 다니엘에게로 한층 더 몸을 기울여, 그의 어깨 위에 턱을 걸쳤다. 코끝이 다니엘의 볼에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숨이라도 내쉰다면 곧장 숨결이 살갗에 닿을 만한 거리.

그 순간 밖에 서 있던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어둡던 차 안이 한층 밝아지면서, 두 사람의 시선이 선명하게 마주쳤다. 닉 클레이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다 알아차렸다. 다니엘이 지금 당장 ‘그러자’고 말하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걸.

“안 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끝을 확실하게 맺지 않는 말은 닉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청혼을 한 사람과, 아직 답을 주지 않은 사람.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는지는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명백했다.

그가 다니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항의했다.

“그럼. 복수하는 거야?”

“내가? 너에게?”

다니엘은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순순히 눈을 내리까는 모습에서 반항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닉은 그 아래 비죽 올라와 있는 입꼬리를 발견했다. 보나 마나 웃음을 억누르고 있는 거겠지.

“이런.”

닉 클레이튼은 못마땅한 숨을 내쉬며 그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다니엘이 자신을 따라 비스듬히 고개를 틀자 조각한 듯한 콧대가 도드라졌다.

아, 어쩌다 사랑하게 된 걸까?

겉으로만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가식을 집어던진 다니엘 레널드는 사실 착하지도, 어른스럽지도, 남들의 기대처럼 완벽하지도 않았다. 제 앞에서는 못되고 예민한 성정을 숨기지 않았으며, 걸핏하면 치솟는 질투를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가끔은 처음 만났던 여름날의 여덟 살짜리 애로 돌아가 버린 듯 유치하게 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한 달, 그리고 한 계절, 이후에는 한 해를 몇 번이나 함께 보냈다. 다니엘은 늘 자신의 앞에서만 여유를 잃었다. 살면서 무엇이든 손쉽게 얻어 낸 주제에 자신의 앞에서는 때때로 절박한 표정을 짓는다. 다니엘이 닉을 알고 있는 만큼, 그 또한 다니엘에 대해 알았다.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도.

“레널드.”

성으로 부르자 곧장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이 보였다. 다니엘이 입을 떼기도 전에 닉은 팔을 뻗어 그가 앉은 시트를 짚었다. 그러고는 눈을 맞춘 채 씩 웃더니 몸을 낮게 일으켜 간단히 조수석으로 넘어갔다. 순식간에 몸 위로 올라탄 닉을 올려다보며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니키.”

느릿한 부름이 떨어졌다. 닉은 그가 메고 있는 어두운 색의 넥타이를 풀어내면서 대답했다.

“왜?”

“이건 무슨 플레이지?”

중얼거리는 것 같은 물음에 닉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양손을 모아 잡았다. 다니엘은 자신의 두 손목이 넥타이로 결박되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목에 감기는 넥타이는 조금 갑갑하긴 했지만, 동시에 마음먹고 힘을 주면 풀릴 정도로 묶였다.

다니엘은 앞으로 묶인 제 팔을 슬쩍 들어 보였다. 묶인 모양새를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곧 고개를 들고는 이제 어쩔 거냐는 듯한 시선으로 닉을 올려다보았다. 닉은 다니엘의 손목을 턱짓하며 말했다.

“이게 풀리면 지는 거야.”

“쉽게 풀릴 것 같은데.”

“가만히 있으면 안 풀려.”

가만히 있으라는 듯 쉬, 쉬-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낸 그가 다니엘의 팔을 잡았다.

“언제까지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지 보자.”

입술을 깨물며 웃은 닉은 그대로 다니엘의 양팔을 제 목에 걸었다. 팔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된 채로, 그는 다니엘을 마주 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아차린 다니엘이 침음을 흘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자 팔목을 묶은 타이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물고 있던 손가락을 뺀 닉 클레이튼은 바지 지퍼를 내렸다. 지이익, 지퍼를 내린 그가 다니엘의 위에 앉아 있던 몸을 살짝 들었다. 드로즈와 함께 끌어내린 청바지는 완전히 내려가지 않고 허벅지 중간에서 멈췄다. 티셔츠 아래로 슬쩍 보이는 허벅지에 탄탄하게 잡힌 근육이 두드러졌다. 다 벗겨 놓지 않아도 다니엘 레널드는 옷에 가려진 나체가 어떤 모양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반사적으로 피어오르는 열감에 목이 말랐다. 다니엘은 시선으로 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티셔츠 아래, 허벅지 사이를 노려보았다.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것만 같았다.

“나를 애태우고 싶은 거잖아.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닉 클레이튼 또한 그런 다니엘을 알았다. 침으로 적신 손가락을 뒤로 가져가는 닉을 보며 그가 잇새로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너는 모든 게 몸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대체로 그렇게 해결되니까.”

“…….”

다니엘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종종 짓곤 하는 찡그린 표정은 대충 ‘이 멍청이를 어떡하면 좋지?’ 정도의 의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닉은 뒤를 풀어주기 위해 다리에서 힘을 풀었다. 바로 어제 밤새 해 댄 덕분인지, 조금 뻑뻑한 구멍은 손가락을 고통 없이 받아 냈다.

설핏 미간을 찌푸린 채 입구를 벌리는 데에 집중하던 닉이 잊을 뻔했다는 투로 말했다.

“대답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해.”

어느새 웃는 이는 뒤바뀌어 있었다. 대답을 피하며 그를 놀리던 다니엘이 여유로운 낯을 집어 던진 채 그를 주시했다. 주도권을 강탈해 온 닉 클레이튼은 이윽고 안쪽에 검지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는 데에 성공했다.

물길을 빠르게 가르기 위한 손가락은 결코 짧거나 가늘지만은 않았다. 남자답게 툭 불거진 마디가 비좁은 내벽 안쪽을 가르고 들어갔다. 숨을 들이켜는 닉의 목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혼자 풀거나 뒤로 자위하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다니엘의 위에서 이 짓을 하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 따끔할 정도로 꽂히는 게 제법 흥분됐다.

“…이건 반칙 아닌가?”

안을 쑤시며 제 팔에 머리를 기대는 니키를 향해 다니엘이 물었다.

“고상하게 하는, 게임이… 음, 취향인가 보지? 왕자님.”

닉 클레이튼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다니엘의 표정이 무너진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빠듯하던 입구가 반복된 자극 덕분인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적당히 젖어 있던 손가락은 내벽을 비비며 한층 더 축축해졌다. 상체를 숙이며 다니엘의 어깻죽지에 머리를 기댄 닉이 손을 더욱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헉.”

더듬거리듯 내벽의 조금 더 안쪽 부분을 꾹 누른 닉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이 토해졌다. 튕기듯 허리를 세운 그가 입술을 물었다. 척추의 가장 아랫부분부터 뒤통수까지 통하는 전기에 배 속이 홧홧해졌다. 그가 숨을 내쉬며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지점을 다시 한번 더 꾹 눌렀을 때였다.

“읏….”

상의에 가려져 있던 성기가 까딱, 고개를 들면서 티셔츠 아랫자락을 밀어 냈다.

좆의 갈라진 머리에서 투명한 액체가 비죽 새어 나왔다. 프리컴이 붉어진 기둥을 타고 주륵 아래로 흘렀으나 닉 클레이튼은 그걸 닦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잔뜩 짓씹어 붉어진 입술,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숨소리. 앞은 한 번도 만지지 않은 채로 뒤를 쑤시며 발기하는 모습에 다니엘의 입에서도 기어코 거센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제길.”

묶인 팔을 당겨 오자, 닉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니엘은 망설임 없이 그의 젖은 입술을 물었다. 달뜬 숨이 새던 입술을 물자 곧장 혀가 얽혔다. 기다렸다는 듯 섞이는 살덩이를 빨면서 다니엘 레널드는 손목을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냈다.

“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닉 클레이튼이 참아 왔던 숨을 내쉬었다.

“대니.”

“널, 당해 내지 못하겠어.”

다니엘은 닉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여유 없는 손길이 글로브 박스를 열어 포장된 콘돔을 꺼냈다. 숨을 몰아쉬며 그를 지켜보던 닉은 그의 손에 걸린 걸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그게 왜 거기서 나오냐고 물을 틈은 없었다. 다니엘이 한발 먼저 손등으로 검게 선팅된 유리창을 탕탕, 두드렸다.

“이러려고 샀던 거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이로 물어 포장을 뜯은 그가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그대로 앞섶을 끌어 내리자 굵은 기둥은 건든 적 없는데도 잔뜩 발기되어 옷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제 좆을 쥐고 콘돔을 끼운 다니엘은 곧장 닉의 다리를 쥐었다.

단단한 허벅지를 한쪽 손으로 그러잡은 채, 그는 입구에 귀두를 맞추고 안으로 서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미 젖어 있는 데다가 손가락으로 풀어 놓았기에 구멍은 빠듯하긴 해도 어렵지 않게 다니엘을 받아 냈다. 안으로 집어넣는 게 아니라, 구멍이 성기를 빨아 들이는 것처럼 내벽이 달라붙어 왔다. 벅찬 이물감에 입구가 반사적으로 수축했다.

성기를 전부 집어넣지 못하고 도중에 멈춘 다니엘이 닉의 허벅지를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그대로 달래듯 가볍게 두드리며 쓸어내렸다.

“후….”

낮은 숨을 내쉰 그는 닉을 기다리듯 움직임을 멈췄다. 한 번에 처박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좁은 차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였다간 닉이 힘들어질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니엘이 참고 있다는 사실은 닉 클레이튼도 머지않아 눈치챘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닉이 입술을 물며 한 번에 주저앉았다. 퍽, 거친 소리와 함께 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입에서 숨기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건 다니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번에 찌르고 들어온 성기가 안을 가득 채웠다. 배 속이 부른 느낌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어쩐지 내부에 들어찬 공기가 후덥지근한 것도 같았다. 열기 때문인가. 숨을 몰아쉬던 닉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다니엘과 눈을 맞췄다.

“하, 빨리, 좋다고 말해.”

그가 눈을 내리깐 채 웃어 보였다. 곧 닉은 한 손으로 꺼떡이던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이미 프리컴으로 젖은 성기를 느릿하게 쓸어내리자 물기 어린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그는 제 성기를 천천히 흔들면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자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성기가 내벽을 긁어내렸다. 안에서부터 울리는 묘한 쾌감에 닉이 몸을 빼다 말고 허리 짓을 했다. 힘이 들어간 허벅지에는 근육이 도드라졌다.

페니스의 끄트머리가 입구에 걸릴 때까지 몸을 일으킨 그가 다시 천천히 주저앉았다. 나직한 신음을 삼킨 그가 다니엘과 눈을 마주쳤다.

“응? 자기야.”

어두웠던 눈동자가 조명에 반사되어 푸른빛을 선명히 드러냈다. 그 눈빛을 홀린 듯 바라보던 다니엘은 이내 제 입에 가볍게 닿는 온기를 느꼈다. 그는 익숙하게 입을 열어 더 깊숙한 키스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러나 입술은 금방 떨어질 뿐이었다.

아쉬움과 의아함, 조급함이 뒤섞인 눈이 닉 클레이튼을 향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지 않냐는 양 눈짓할 뿐이었다. 이내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닉에 다니엘이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잡았다.

“좋아. 빌어먹을, 좋다고….”

그 순간 수축하는 구멍에 다니엘이 이를 악물었다. 일어나려던 닉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다시 앉히는 손길은 다정하지 못했다. 퍽, 다시금 거칠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었다.

윽. 짓씹어진 잇새로 짧은 신음이 샜다. 휙 고개를 든 닉은 다니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혼탁한 녹색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참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눈이 돌아간 걸 보니 어쩐지 좆 된 것 같다는 예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야, 잠시만.”

“입 다물어, 니키.”

다니엘은 야트막하게 벌어진 닉의 입에 입술을 맞댔다. 젖은 아랫입술을 가볍게 질근거리던 그가 곧 빨아 들이기라도 할 듯 닉의 혀를 물었다. 동시에 팔에 힘을 줘 니키의 상체를 세운 그가 끌어 앉는 자세로 닉을 다시 앉혔다. 예고도 없이 퍽, 주저앉은 닉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아, 씹…!”

닉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욕설은 다시 입 안에 먹혀 들었다. 다니엘은 상체를 일으켜 닉을 대시보드 위에 기대게 했다. 혹 움직이다가 유리창에 박기라도 할까, 손을 올려 닉의 머리를 감싼 그가 허리 짓을 시작했다. 허리를 뒤로 뺐다 다시 닉의 다리 사이로 깊숙이 파고드는 몸짓은 유연했으나, 부드럽지는 않았다.

퍽퍽 소리를 내며 안으로 치닫는 몸짓은 그라운드를 내달리던 쿼터백의 것이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몸짓에 닉이 붉어진 눈으로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흡, 헉, 개, 새끼야….”

다니엘은 제게 꽂히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닉의 허벅지를 감싸듯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엉덩이를 잡았다. 그대로 강하게 쥐듯 벌리자, 성기를 물고 있던 구멍이 움찔거리며 가까스로 힘을 풀었다. 조금 힘이 풀리나 싶으면 굵은 성기는 주먹을 박아 넣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닉 클레이튼은 결국 앞을 주무르던 손도 멈춘 채 다니엘에게 몸을 맡겼다.

일그러진 표정, 짓씹은 입술은 고통에 가까운 쾌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주춤할 겨를은 없었다. 다니엘은 제게 매달리듯 다리를 말아 오는 닉 클레이튼의 몸짓에 드물게도 욕설을 삼켰다.

“닉, 니키, 아파?”

사납게 쳐올리는 허리와는 다르게 제법 달콤한 목소리였다. 참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온몸을 만지작거리면서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주제에. 닉은 신음이 뒤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아니, 좋아. 작은 대답을 들은 모양인지 다니엘의 등이 움찔 떨렸다. 전보다 한층 더 흥분한 듯한 몸짓으로 그는 닉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더 깊숙하게, 마치 모든 걸 삼키고 싶다는 듯, 끊임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구의 헐떡임인지 모를 소리만이 두 사람의 귓가에 맴돌았다.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차는 내부가 확연히 넓은 편이었지만, 성인 남자 둘이 마주 보고 있기에는 당연하게도 좁았다. 다니엘은 몸을 욱여넣듯 닉을 끌어안아야만 했다. 허리 짓이 거칠어질수록,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멈추지 않고 박아 넣던 몸짓이 멈춘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낮은 탄성이 터졌다.

“읏.”

“아….”

다니엘의 손안에 울컥 쏟아진 정액은 그의 손바닥을 적시고 아래로 주륵 흘러내렸다. 옷이 젖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닉의 성기를 쥔 채 한 방울도 빠트리지 않고 짜내려는 듯 힘줘 쓸어 올렸다. 파드득, 다리를 떠는 닉의 몸서리에 다니엘의 입에서도, 그리고 닉의 입에서도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다니엘은 옆의 콘솔 박스를 열어 손바닥만 한 휴대용 티슈를 뜯었다. 그가 손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내는 동안에도 닉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대시보드에 누워 있다시피 기대고 있던 닉이 입을 열었다.

“이 자세, 허리가 부러질 거 같아.”

이전보다 갈라진 목소리가 맥없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멈칫한 다니엘이 닉을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닉의 허리를 쓸어내린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가 앉아 있던 시트를 뒤로 젖혔다. 닉은 순식간에 누운 그의 위에 다시금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그럼 이대로 네가 움직여.”

잠시 멍하던 닉의 얼굴에 비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헛웃음을 흘린 그가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누운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어쩐지 오만해 보인다는 감상이 들었다. 누가 왕자님 아니랄까 봐….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린 닉이 입꼬리를 올렸다.

“명령이라면.”

중얼거리듯 답한 그는 곧 끝자락이 얼룩진 윗옷을 끌어 올려 벗었다.

“네가 졌어.”

호흡을 고른 닉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다니엘이 그 말을 듣곤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춘 채 말 대신 시선을 주고받았다.

닉 클레이튼은 이의를 제기할 거냐는 양 눈썹을 삐딱하게 들었다. 다니엘은 그런 닉을 올려다보며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프러포즈하다 말고 왜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더 쉽게 만든 거겠지.”

닉은 키득거리며 모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 대화는 한 발 빼고 하면 더 잘 되잖아.”

“…그건 지금껏 들었던 모든 말 중 가장 멍청한 소리인데.”

다니엘이 비웃듯 웃으며 팔을 뻗었다. 이윽고 닉 클레이튼은 저를 끌어안아 오는 강한 힘에 윽, 하고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이대로 터트려 죽일 셈인가? 허그인지 공격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하지만, 니키.”

단단한 몸을 가득 끌어안은 다니엘이 웃음기 어린 칭찬을 건넸다.

“내 패배가 맞아. 너의 지능을 과대평가해 온 점 사과할게.”

“이 새끼가?”

이를 악문 닉이 그를 노려보았다. 욕을 듣고도 뭐가 좋은 건지, 다니엘은 닉의 귓가에 유쾌한 기색이 가득 묻은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닉 클레이튼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팔에 아주 조금, 힘이 풀어진 것을 느꼈다.

그제야 닉 또한 몸에 가득 실었던 힘을 풀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몸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밀착되었다. 다니엘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그가 느릿한 한숨을 뱉었다. 바로 그때였다.

“약혼 발표하자, 니키.”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그 순간 떨어진 목소리에 닉이 다시금 혀를 찼다. 하여간 잠시도 마음 놓을 틈을 주지 않는다. 체념한 듯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던 닉은, 곧이어 보다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오해할 여지 없는 분명한 긍정이었다.

***

“레널드와 만나고 있어요.”

닉 클레이튼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니키.”

닉이 무덤덤한 얼굴로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엠마는 찻잔을 허공에 든 채 멈췄고, 다니엘은 침음을 흘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닉이 왜 그러냐는 듯 그런 다니엘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이 엠마 클레이튼의 응접실에서 그녀를 대면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첫 번째로, 닉의 프러포즈 이후 다니엘은 굳이 그들의 관계를 숨기고 싶지 않아 했다. 두 번째, 약혼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에게 그들의 관계를 털어놓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고 직접 전할 말이 있다는 닉의 연락에 엠마는 ‘어떤 사고를 쳤니?’라고 물었다. 그런 거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한참이나 스케줄러를 뒤적이다, 뉴욕행 항공편의 퍼스트 클래스 티켓 두 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들이 대면하기로 한 날이었다.

“…….”

말없이 닉을 바라보던 엠마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에서 제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건 자신의 아들도 아닌 아들의 친구, 아니, 이제는 남자 친구가 된 다니엘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와 자신의 아들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갑작스럽구나.”

“결혼 소식으로 알리는 것보단 덜 갑작스럽지 않아요?”

닉은 제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건지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가볍게 넘길 목적이었으나, 엠마가 삐딱하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순간 그는 자세를 바로 했다. 이런 표정을 짓는 엠마는 쉬이 넘어가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에서 ‘니콜라스 클레이튼.’이라는 기나긴 호명이 들려오기 전, 닉은 자진해 입을 열었다.

“저 멍청한 녀석을 사랑해요.”

덤덤하게 내뱉어진 말에 엠마가 처음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의 표정을 본 닉이 멋쩍은 듯 입술을 짓씹다,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지 좀 됐어요. 프러포즈는 며칠 전에 했고, 당장이 아니어도 결혼하게 될 거예요. ……아마.”

그가 말끝을 흐리며 덧붙인 애매모호한 부사에 옆에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연인에게 건네는 시선이라기엔 살벌할 정도의 눈길이었다. 닉은 애써 못 본 척할 뿐이었다.

엠마는 표정의 변화 없이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은 채 이어지는 닉의 고백을 들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딱 두 번 정도 눈썹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의 말이 전부 끝났을 때, 드물게도 조심스러운 얼굴을 한 자신의 아들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짙은 브라운색의 벨벳 소파에서 일어난 엠마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닉의 옆에 서 있던 다니엘이 제게로 다가오는 그녀의 시선을 받고 긴장한 듯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엠마에게 항상 서글서글하고 예의 바르게 굴었던 그가 처음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닉은 제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쥔 그의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오로지 다니엘만이 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서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이방인의 역할을 주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다니엘.”

그의 앞으로 다가간 엠마가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그대로 다니엘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어, 엄마?”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것은 닉뿐만이 아니었다. 엠마는 주춤하듯 굳은 다니엘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쉽지 않을 거야. 아마 단순한 내 아들보단 네가 짊어질 짐이 훨씬 더 크겠지.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그렇지만 누군가와 앞으로를 함께 하겠다 다짐하는 건, 그런 불확실성조차 껴안는 일이란다.”

그게 누구 건 상관없이 말이야.

평소보다 한층 더 다정한 목소리에 다니엘의 어깨에서 차츰 힘이 풀렸다. 엠마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앉아 있던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저를 바라보는 닉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힘들 때면….”

말을 하다 입을 다문 그녀의 어두운 고동색 눈에 푸른 눈동자가 담겼다. 어릴 적, 침대맡에 앉아 세상의 모든 청색 보석들을 가져다 불러 주었던 그 눈동자가.

“니키에게 답을 구해. 이성과는 먼 멍청한 대답을 듣고 있으면 정신이 들 테니까.”

“엄마!”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니엘.”

“네.”

“원래 배우자는 반반하고 좀 멍청한 편이 좋단다.”

니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엠마를 바라보는 두 눈은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반반하고 멍청한 배우자라니, 대니에게 건네는 단순한 조언인지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나온 경험담인지 닉은 쉬이 구분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그런 엠마에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잡을 데 없는 근사한 태도였다.

“이따 네 아빠와 함께 저녁을 먹자.”

그녀가 다시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그것은 허락을 넘어선 환대였다. 다니엘은 무의식적으로 몸에 실려 있던 긴장을 풀었다. 황당해하던 표정을 지워낸 닉은 잘 풀릴 줄 알았다는 듯 연인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봐, 내 말이 맞았지?’

닉의 입 모양을 확인한 다니엘도 결국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회사는 맨해튼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건물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저녁까지 공원에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날이 따뜻해서인지 주말이 아니었음에도 공원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니엘은 작은 아이스크림 트럭 앞을 지나치다 말고 멈춰 서서, 소프트아이스크림 하나를 샀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었어?”

닉은 커다란 손에 잡힌 아이스크림콘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다니엘은 그런 닉을 향해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 말고 너.”

말과 동시에 그는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얼떨결에 아이스크림을 받은 닉이 잠시 당황한 듯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스크림 좋아하잖아, 니키. 술에는 약하면서 달달한 건 잘 먹지.”

“내가?”

“응, 너 단 거 좋아해.”

그는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목소리를 낮춰 속닥였다. 눈을 깜박이던 닉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갔다.

자신이 한 입 베어 무는 것을 보면서 대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혀끝에 감도는 아이스크림은 차갑고, 달았으며, 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이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도, 입가에 보조개를 건 채 웃는 다니엘을 보면 ‘그랬나?’ 싶어지는 게 문제였다.

맙소사. 다니엘과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보던 닉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공원 안쪽으로 향한 두 사람은 나무 그늘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니엘과 나란히 앉아 한가롭게 아이스크림을 먹던 닉은 또 갑자기 제게 내밀어지는 물체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다니엘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였다. 그는 내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씌워 주기까지 했다.

“뭐야?”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든 닉의 시야에 웃고 있는 다니엘이 들어찼다. 웃고 있긴 했지만, 어딘가 불만스러운 게 있는 듯 불편해 보이는 미소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드문드문하긴 하지만, 이쪽을 힐긋거리는 시선이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단숨에 다니엘이 의식한 게 타인의 시선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아주 익숙하고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전과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늘 남들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던 레널드가 자기 자신보다 닉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바뀐 만큼, 다니엘도 바뀌었다는 깨달음이 새삼스럽게 찾아왔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손을 내린 닉이 입술에 묻은 크림을 혀로 쓸어내렸다.

젠장, 너무 달았다.

“대니.”

닉을 바라보고 있던 다니엘이 그의 부름에 귀 기울이려는 듯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닉은 제게 다가오는 그를 향해 고개를 비틀었다.

입술이 닿은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실수 같은 게 아니라는 듯 닉은 고개를 곧바로 빼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는가 싶던 다니엘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그는 제 입술에 가볍게 몇 번 더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떼는 니키를 향해 말했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않는 건 여전하네.”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닉 클레이튼은 한결같았다. 어느 여름날, 자신의 손을 잡고 물속으로 끌어들일 때처럼.

“그래서 내가 좋은 거잖아.”

씩 입꼬리를 올린 닉이 다니엘과 여유롭게 시선을 마주했다. 완벽하게 졌다. 자신은 니키 클레이튼에게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된 명제가 다시금 떠오른 순간, 다니엘은 부정하지 않고 찡그리듯 웃었다. 닉이 사랑해 마지않는 미소였다.

사파이어, 아콰마린, 토파즈……. 그의 눈동자에 대고 지금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숱한 보석들을 가져다 애정을 속삭이던 엠마 클레이튼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의 아들이 이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에메랄드를, 비가 갠 뒤의 숲을, 그 언젠가 본 초록색 해변을 떠올린다는 것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금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니키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끈적하게 녹아내릴 때까지,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너티 페어 (외전)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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