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Naughty Pair
UC버클리에서 니콜라스 클레이튼을 모르는 사람은 단언컨대 손에 꼽을 것이다.
매일같이 랩에 처박혀 연구만 하느라 다크서클이 볼 아래까지 내려온 캐서린 마키마저도 그가 하계 올림픽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의 영웅임을 알고 있었다.
캐서린은 닉에게 최근 관심을 보이고 있는 케이의 언니였다. 동시에 노벨상을 받았다는 어떤 교수 아래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좀비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콧대 높은 동생이 관심을 보이는 대상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 대상을 직접 구경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말미를 내어 랩실에서 나왔다. 캐서린은 캠퍼스 앞의 유명한 비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 바로 닉 클레이튼이 있었다. 클레이튼은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밀린 레포트를 쓰고 있었고, 자신의 동생은 그런 클레이튼을 보며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
잘생기긴 했네…. 캐서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눈을 비비적거렸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 닉 클레이튼은 여전히 흰 티셔츠 하나만 입은 채로도 눈에 띄는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봤던 건 TV 화면 속에서였다. 작년 하계 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봤을 때 그녀는 어느 정도 특수 효과가 들어갔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운동선수 팬이 선수가 운동을 잘하는 모습을 보며 잘생겼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닉 클레이튼의 실물을 앞에 둔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편협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법 집중한 얼굴로 한 손에는 펜을, 한 손으로는 샌드위치를 쥐고 있는 클레이튼은 확연히 일반인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모델로 전향해도 되겠는걸. 그에게 온 신경을 빼앗긴 캐서린은 그가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울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건 클레이튼이 쥐고 있던 펜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어 케이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을 때였다.
“끝났어. 도와줘서 고마워, 케이.”
“뭘. 경제학의 원론적인 부분은 도와줄 수 있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줘.”
허. 캐서린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콧대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던 동생이 상냥하게 웃는 것을 발견하고 실소했다. 눈이 높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높을 줄이야.
“케이.”
그녀가 클레이튼이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동생을 불렀다.
“언니!”
“안녕하세요.”
캐서린은 다가와 케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런 그녀를 향해 클레이튼이 가볍게 인사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가방을 옆으로 치우려는 케이를 말렸다. 그리고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앉아 있던 카우치를 내어 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나는 이제 일어날게, 케이.”
“더 있다 가도 되는데요!”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클레이튼을 보며 캐서린이 눈을 크게 떴다. 음식점을 나서려는 몸짓을 보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훈련하러 가야 할 시간이어서요.”
그가 캐서린을 보며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닉이 자리를 뜨는 건 아쉬웠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훈련을 막을 수는 없었다. 캐서린이 아…, 하고 짧게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있던 케이도 어쩔 수 없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닉, 오늘 밤에 열리는 루프탑 파티에 올 거지?”
가게를 나서기 위해 테이블 옆으로 빠져나온 닉이 그녀의 물음에 멈춰 섰다. 음.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곧 미안하다는 얼굴로 케이가 앉은 카우치의 등받이 윗부분을 짚었다.
“글쎄. 어려울 것 같은데.”
“네가 꼭 왔으면 좋겠어.”
“내가 파티에 왔으면 좋겠어?”
닉 클레이튼은 살짝 찡그리듯 웃으며 되물었다. 케이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흐음, 하며 탄식을 흘렸다.
잠시만, 지금 내가 파티에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건가?
문득 그는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다. 아마 고등학생이었던 닉 클레이튼이라면 파티 초대에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으리라. 문제는 이제 자신이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닉 클레이튼은 타인의 초대에 조금쯤 고민이 필요했다.
다니엘 레널드라는 이름의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졸업 전부터 연애를 이어 오고 있는 제 애인은 예민하고 독점욕이 강한 편이었다. 파티에 간다고 하면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쫓아와 목덜미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미안. 아마 못 갈 거야. 기다리지 마, 케이.”
닉 클레이튼은 그녀를 달래듯 말하곤 가게를 빠져나갔다.
***
음식점에서 나온 닉은 캠퍼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영 특기생들의 훈련을 위해 구비된 수영장은 캠퍼스 안에 있었다. 오후 수업이 없으니 수영장에 가서 몸을 풀 생각이었다.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그는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벌써 9월이 한참은 지났는데도 보스턴의 여름만큼이나 날이 더웠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확연히 보스턴의 것과는 달랐다.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닉이 원래 서부가 아닌 동부에서 태어나 자라났다는 말을 들을 때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케이트 또한 처음 파티에서 봤을 때 대화를 하는 시종일관 감탄을 내뱉곤 했다.
-거짓말! 네가 동부 사람이라니 믿을 수 없어. 나의 동부에 대한 이미지는 편견이었던 거야?
-나 같은 동부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케이.
캘리포니아와 잘 어울린다는 것과는 별개로 닉은 자신이 이곳에서 살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닉 클레이튼은 동부에 있는 대학을 골라 갈 수 있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까지 왔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했다.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다니엘 레널드만큼이나 장거리 연애를 못 견뎌 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레널드는 할리우드의 왕자님이었고 자연히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는 기간이 길었다.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닉 클레이튼은 캘리포니아로 날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배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프로를 지망했던 미식축구 선수기도 했으니까. 닉은 그가 꼭 뉴욕 스파크스의 쿼터백으로 영입되기를 욕심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시니어 시절, 대학 입학 원서를 넣을 때 다니엘은 그런 닉에게 폭탄을 떨어트렸다.
***
“프로 선수 말고 배우 활동을 할까 해.”
쾅!
사전에 고지하지 않고 투하한 폭탄에 닉 클레이튼은 잠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왜?”
이윽고 그가 퍽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프로 리그에서 뛰지 않겠다는 거지? 충분히 그에게 제안을 걸어온 팀들이 있을 텐데? 그가 프로로 나가지 않는다면 뉴욕 스파크스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도 정규 구단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다니엘의 말에 닉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원래라면 그는 다니엘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깊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응원하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건 당연했고, 닉은 다니엘 레널드가 얼마나 미식축구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프로로 나아가지 않고 썩히기에는 그의 재능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나 때문이라고 하면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거야.”
“음, 따지고 보면 네가 이유가 되기는 하지.”
닉은 그 말에 꽉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차마 얼굴을 향해 내지를 수는 없었다. 재수 없는 다니엘 레널드와 연인인 대니 사이에는 그 정도의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쉽게 주먹을 뻗을 수 없게 만드는.
“프로가 되면 너랑 만나는 날은 더 적어지게 될 테니까. 우리는 시합도 훈련 일정도, 주로 활동하는 필드도 전부 어긋나잖아.”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 아니야, 니키 클레이튼. 난 도무지 견딜 자신이 없어.”
다니엘은 오히려 자신이 너무 냉정한 말을 한다는 듯 상처 입은 눈을 했다. 닉은 금욕적인 얼굴에 물드는 처연한 빛을 보며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여우 같은 자식. 닉 클레이튼은 그가 꾸며 낸 얼굴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넘어갔다. 그의 입에서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너는 계속 프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잖아.”
“그보다 더 오래 네 곁에 있고 싶어 했지.”
“…….”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담담하게 읊조리는 다니엘에 닉은 결국 말을 잃고 말았다. 다니엘 레널드는 이미 결심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항복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가뿐히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다니엘의 의지가 확고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닉 자신 또한 슬쩍 치켜드는 욕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곁에 있고 싶다는 애인의 말을 듣고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지? 그와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자신도 똑같았다. 그래서 닉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으로 오게 되었다.
변수가 있다면 다니엘의 배우 생활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가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
“사기꾼.”
닉 클레이튼은 걸음을 옮기며 짧게 투덜거렸다. 자신과 더 자주 만나고 싶어서 배우를 선택했다더니. 다니엘 레널드는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분명했다.
다니엘은 작년 하계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두 개의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하나는 그가 고등학생 시절 찍었던 로맨스코미디의 속편이었고, 다른 하나는 책을 원작으로 한 비극적 결말의 로맨스 영화였다.
그는 거기서도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그 영화는 개봉한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흥행을 이어 오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봉 초반보다 지금이 훨씬 더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영화는 원작을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초반의 비평이 거셌지만, 두 배우의 케미가 결국 눈물을 쏟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는 호평이 초기의 평가를 전복했다. 닉 클레이튼은 원작도 영화도 보지 않았으므로 어떠한 편에도 설 수 없었지만 말이다.
영화는 해외에서도 동시 개봉되었다. 캐스팅만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였던 영화는 역시나 국외적인 반응도 뜨겁게 나타났다. 따라서 개봉 이후 다니엘은 해외 스케줄까지 소화하고 다녀야 했고 닉 클레이튼은 그의 얼굴을 못 본 지 일주일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닉이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마치 그런 그를 예상이라도 한 듯이 화면에 기다리던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니키」
「뭐 하고 있어?」
메시지의 주인공은 다니엘이었다. 자신의 투덜거림을 들은 사람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보내온 다니엘의 연락을 보며 닉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니야? 메시지를 내려다보던 그는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캠퍼스 내에 있는 야구 스타디움을 지나면 수영장이 있는 건물이 나타났다. 스타디움 주변의 잔디밭에는 속옷만 입은 채 누워 있는 남자가 있었다. 선탠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나야 수영장으로 가고 있지」
그를 스쳐 지나가며 닉이 손가락을 움직여 답을 보냈다.
다니엘은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어젯밤 전화하며 언뜻 들었던 것도 같은데 대충 넘긴 모양이다. 그는 다니엘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대신에 맥락에서 벗어난 메시지를 보냈다.
비록 그의 의지는 아닐 테지만, 다니엘은 캘리포니아까지 날아온 자신을 두고 일하느라 바빴다. 그런 다니엘에게 짓궂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대니, 케이가 오늘 밤 파티에 같이 가자고 했어.」
닉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1초 만에 되돌아왔다.
「가지 마.」
「제발.」
꼬리처럼 따라붙은 간절한 메시지에 그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쿨한 척하며 잘 다녀오라고 말할 법도 한데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의 앞에서 늘 진심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파티에 가도 그가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가끔 지나친 집착을 보이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완전히 구속하려고 들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파티에 가지 않겠다 결심한 건 단지 오늘은 별로 파티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수영장에 도착한 닉 클레이튼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빌어먹을. 다니엘이 보고 싶었다.
“닉!”
“아, 잭.”
닉은 라커 룸에 도착해 입고 있던 하얀 반팔티를 끌어 올리며 벗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로 잭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그는 이 학교의 졸업생인 동시에 닉이 출전했던 해의 바로 이전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전 국가 대표였다.
잭 맥케인은 닉 클레이튼과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파티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닉과 달리 수영을 하기에 최적화된 몸을 갖고 있었다. 또 그의 유명세도 한몫했겠지만,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 연설을 위해 단상에 섰을 만큼 똑똑했다.
그는 은퇴를 한 후 한동안 두문불출했는데, 닉 클레이튼은 다름 아닌 학교 수영장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왜 그가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할 여유는 부릴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수영계를 책임질 후배들에게 무척이나 유한 편이었으나 닉 한정으로 몹시 엄한 코치였기 때문이다.
-킥에 힘이 빠지고 있잖아, 클레이튼. 다음 올림픽에도 1500미터 출전은 포기할 작정인가 보지?
그는 평상시에는 마치 사랑에라도 빠진 소년처럼 닉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훈련에 들어가면 그는 누구보다도 엄격하고 까칠하며 혹독했다. 따라서 같은 수영부원들은 닉에게 쏟아진 잭 맥케인의 차별적인 애정을 감히 부러워하지 않았다.
닉이 대학에 들어오기 바로 직전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음에도, 수영부의 부원들에게 있어서만큼은 경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닉 이전에 미국 수영계의 역사를 새로 썼던 잭 맥케인이 스포트라이트를 전부 가져갔으므로.
“오늘 밤에 뭐 해?”
잭이 물었다. 수영 팬츠 위에 저지를 걸치던 닉이 라커를 닫으며 몸을 돌렸다.
“왜요?”
“오늘까지인 영화 티켓이 생겨서.”
같이 가자는 건가? 닉 클레이튼은 잭 맥케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딱 잘라 말했다.
“설마 우리 둘이서요? 전 남자랑 단둘이 영화 보러 안 가요.”
“…단호하네.”
“그나저나 오늘 훈련 내용은 뭐예요?”
닉이 화제를 돌리며 묻자 잭도 금방 훈련 내용을 말해 주었다.
이렇게 물속에 들어가 있지 않을 때면 잭은 마치 그와 자신이 베스트 프렌드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코치일 때는 고등부 시절 자신의 수영 코치였던 션보다 더 지랄맞게 굴었지만 말이다.
물론 닉 클레이튼은 그의 코치로서의 모습도 싫어하진 않았다. 어차피 물속에 들어가 있을 땐 남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건 물 밖에 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원체 남의 말에 쉽게 상처받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미 와 있는 사람이 있네….”
수영장 안으로 들어선 닉이 4번 레인을 쓰고 있는 다른 누군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자신보다 먼저 와 구태여 4번 레인에서 헤엄치고 있다니.
그가 걸치고 있던 저지를 곧장 벗어 잭에게 건넸다.
스트레칭을 하며 1번 레인의 스타트대에 올라선 그가 자세를 잡았다. 부랴부랴 목에 걸고 있던 스톱워치를 손에 쥐는 맥케인이 보였지만, 닉 클레이튼은 그가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잭은 걸핏하면 그가 첫 올림픽에서 1500미터 부문에 출전하지 않은 것을 걸고넘어졌다. 닉 클레이튼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구태여 발끈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어차피 다음 올림픽에서는 자유형의 모든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을 가져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닉, 오늘 밤 파티에 너도 올 거지?”
훈련을 마친 후 씻고 나와 옷까지 모두 갈아입은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소지품을 챙기며 닉에게 한 수영부원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라커 룸에 있던 닉은 제게 날아온 질문에 데자뷔를 느꼈다. 자신이 당연히 파티에 올 거라는 기대감이 담긴 목소리에 그가 로커를 닫으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일이 있어서.”
“케이트 마키도 오는데?”
“그래서 뭐?”
닉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케이가 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말에 라커 룸에 있던 녀석들은 도리어 소란스러워졌다. 분명 끝내주는 애인이 있을 거라느니, 그렇지 않고선 케이트의 대시를 계속 거절할 리가 없다느니. 상상에 기반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닉, 솔직히 말해 봐. 대체 애인이 누구야?”
하여간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은 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똑같았다. 닉 클레이튼은 자신에게 애인이 있으리라고 확신하기 시작한 수영부 부원들을 보며 픽 웃었다.
“알려고 하지 마. 비밀이야.”
“너 정말 애인이 있던 거야?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 안 올리더니!”
그가 던져 준 떡밥을 문 부원들은 이제 신나서 자신의 애인이 어떨지에 대해 추리하기 시작했다. 닉은 그녀가 대체 얼마나 죽여주는 거냐고 짓궂게 물어 오는 데이비드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내 애인에 대해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 멍청이들아.”
그는 짜증스럽게 웃으며 대꾸한 뒤 라커 룸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또 뭐라고 말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왔으나 그는 이미 그들의 대화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였다.
수영장이 있는 건물에서 나온 닉이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연습이 한창인 스타디움에서는 배트에 공이 맞으면서 깡, 깡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튼 닉은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그는 곧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익숙하게 시동을 켠 그가 매끄럽게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주하고 있는 호텔이 아닌 도심지로 차를 몰았다.
닉 클레이튼이 모든 약속을 거절한 채 향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그는 영화관에 가는 것을 즐기는 타입도,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으나 충동적으로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박스 오피스 앞에 서서 가장 눈에 띄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가장 가까운 시간으로 한 자리 주세요.”
“저… 혹시 니콜라스 선수 아니세요?”
포스터에 담긴 배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닉이 되돌아온 물음에 고개를 내렸다.
아. 야트막하게 벌어진 입가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박스 오피스에 서 있는 직원은 모니터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뚫어질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맙소사. 팬이에요!”
그녀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조용히 외쳤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빠른 시간대의 표가 있을까요?”
“있, 있어요! 10분 뒤 시작하는 표로 끊어 드릴까요?”
“네.”
닉 클레이튼은 제법 공손한 태도로 그녀가 건네주는 티켓을 건네받았다. 티켓에는 중앙에 <여름이 지나기 전에>라는 영화 제목이 고딕체로 박혀 있었다.
그건 다니엘이 출연한 영화였다. 한참 히트를 치면서 그를 로맨스 영화계의 어쩌고로 만든. 닉은 제 입으로 그 오글거리는 별명을 꺼낼 수 없어서 어물쩍 넘겼다.
다니엘 레널드가 스스로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로맨스 장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석적인 할리우드 미남 배우의 계보를 잇는 근사하고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목소리나 분위기 또한 로맨스 장르와 제법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그는 사생활이 금욕적이리만큼 깨끗하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최근 들어 미국의 수영 국가 대표와 함께 찍힌 파파라치 컷이 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파파라치 컷에 함께 나온 주인공인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 영화가 시작되려는 건지 주변이 어두웠다. 닉은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상영관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팝콘이라도 사 올 걸 그랬나.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옆 좌석 사람들을 돌아보던 그가 머쓱하게 입가를 쓸었다.
곧 웅장한 영화사 오프닝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다니엘이 나온 영화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닉은 스크린에 떠오른 익숙한 얼굴을 보며 흠칫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다니엘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사랑에 빠져드는 광경에 함께 빠져들고 있었다.
***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다시 상영관에 희미한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닉 클레이튼은 옆에서 들려오는 훌쩍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흑…….”
옆에 앉아 있던 여자는 손에 쥔 휴지 뭉텅이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영화에 완전히 감정 이입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 닉은 단 한 번도 영화를 보며 울어 본 적 없었지만, 여자가 울고 있는 모습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 또한 먹먹한 기분을 추스르며 괜스레 주먹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과 다니엘을 완전히 분리하는 데에 성공한 건 아니었다. 다니엘이 스크린에 나올 때면 움찔하는 순간들이 더러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영화가 막바지로 치달을 때, 닉 클레이튼은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 한껏 몰입해 있었다.
그는 다니엘 레널드가 꽤 훌륭한 배우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렇지, 일상에서 보여 주는 그의 연기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남긴 여운을 가볍게 털어 낸 닉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화를 보고 나와 핸드폰을 꺼낸 닉 클레이튼은 쌓여 있는 연락들을 확인하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다니엘 레널드의 연락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통 와 있는 부재중 전화를 본 그는 다니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졌다. 슬쩍 미간을 구기며 메신저를 켠 닉이 곧 어디냐는 물음이 가득한 메시지의 퍼레이드에 헛웃음을 흘렸다.
닉은 묵묵히 손가락을 움직여 그에게 연락했다.
「네 영화 봤어.」
메시지에 대한 답은 빠르게 도착했다.
「어땠어?」
지금껏 왜 연락이 없었냐는 추궁 대신 그는 영화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닉은 그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걸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키스 신이 엉망이던걸. 난 그렇게 가르쳐 준 적 없는데.」
메시지를 보낸 그가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전화가 걸려 온 핸드폰을 다시 들어 올렸다.
발신인은 예상했던 대로 다니엘이었다. 닉의 입꼬리가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인사말 대신 짧게 응, 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다니엘이 자신이 보낸 문자에 관해 항의하거나 또는 비웃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자신과 같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렇게나 엉망이었다니, 아무래도 선생님께 다시 배워야겠어요.]
“음. 좋은 태도예요. 착한 학생이군요.”
갑작스러운 상황극이었으나 닉 클레이튼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 능청스러운 대답에 다니엘이 숨죽인 채 자그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한참 웃던 그는 이윽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화를 안 받길래 네가 파티에 간 줄 알았어.]
…다른 여자랑. 말끝을 흐리며 작게 덧붙여진 말을 들은 닉이 피식 실없이 웃었다.
“말했듯이 영화를 보고 있었어.”
[잠들지는 않았고?]
금세 흘러나온 장난스러운 물음에 닉이 설핏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네가 지금껏 재미없는 영화만 보여 줬기 때문이잖아.”
[내가 찍은 영화는 재밌었나 보네?]
“그래.”
[…….]
닉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 담담한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니엘과 전화하며 걸음을 옮기던 그는 어느새 주차해 놓았던 차 앞에 도착했다. 차 안에 올라타 시동을 걸 때 즈음 다니엘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랑 결혼하고 싶어.]
또 시작이군. 그의 퍼블리시스트가 들으면 기절할 소리에 닉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걸핏하면 자신이 싫다며 성질을 부리던 다니엘 레널드는 이제 걸핏하면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건 단순히 다니엘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일이 바쁘면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데, 다니엘은 오히려 일이 바쁠수록 정신 상태가 안 좋아졌다. 물론, 대중의 앞에서 꾸며 낸 모습을 하고 있는 건 힘든 일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번듯한 왕자님의 이미지를 보여 주고는 있었지만, 다니엘 레널드의 실상이 꾸며진 대로 왕자님 같지만은 않다는 걸 닉은 알고 있었다. 그런 연인이 안타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한 닉 클레이튼이 단호하게 답했다.
“헛소리 좀 그만해.”
짧은 일갈에 다니엘이 곧장 대꾸했다.
[왜 헛소리지? 나랑 아니면 누구랑 할 건데?]
그런 말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는 또 집요하게 굴어 왔다. 닉이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핸드폰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외쳤다.
“미친놈아! 난 스무 살에 결혼할 생각 없어!”
[그렇다면 기자 회견이라도 열까, 니키? 인터뷰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공식 입장을 내도 돼? 아니면…….]
에블린과 상의되지 않았을 말을 쏟아 내고 있다. 닉은 결국 입을 열어 다니엘의 말을 끊어 냈다.
“입 좀 다물고 진정해 봐.”
[…불안해.]
하. 그의 입에서 기가 차다는 듯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분리 불안증에 걸린 강아지처럼 구는 다니엘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아서 문제였다.
“불안해할 게 뭐가 있어? 대니, 너는 일이 바빠서 조금 지친 것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미식축구를 선택했어야 했다. 닉 클레이튼은 입술을 씹으며 생각했다. 적어도 공을 들고 그라운드 위를 달리는 쿼터백일 때 그는 이렇게 배포가 작지 않았으니까.
[일이 많은 건 문제가 안 돼. 너를 보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지.]
“일이 많은 게 왜 문제가 안 돼? 너 카메라 앞에 서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건… 참을 수 있어.]
다니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곁에 없는 걸 참을 수 없을 뿐이야.]
말을 잃은 닉 클레이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는 절대 자신감이 부족한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무슨 카사노바라도 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할 때가 있었다.
마치 지나친 그리움이 그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자신이 다니엘을 보고 싶어 하는 것만큼, 그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의 불안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닉은 그가 잊고 있는 바를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대니, 너 지금 네가 이미 내 거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가끔 다니엘은 제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듯했다.
덤덤하게 흘러나온 말에 수화기 너머로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조용히 웃음을 삼키고 있을 다니엘이 눈에 그려져서 닉도 소리 없이 웃었다.
[다시 말해 줘.]
그가 뒤늦게 대답해 왔다. 그 요청에 닉 클레이튼은 기꺼이 입을 열었다.
“뭘, 네가 내 거라는 거?”
[…한 번 더.]
“너는 내 거야. 잊지 마, 대니.”
닉은 여전히 파킹 브레이크도 풀지 못하고 있는 채였다. 그가 손을 뻗어 브레이크를 풀며 뒷말을 덧붙였다.
“나도 네 거고.”
작게 튀어나온 목소리를 들었는지 다니엘은 결국 입 밖으로 웃음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네 목소리가 피곤하다고 말하고 있어.”
닉이 말했다.
[견딜 만해. 그냥 단지 네가 보고 싶을 뿐이야.]
덤덤하게 대답한 그는 이내 강조하듯 재차 말했다.
[보고 싶어, 니키 클레이튼.]
“알아.”
그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며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한결 분위기가 풀어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닉 클레이튼은 영화관을 빠져나가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
닉은 버클리에 있는 호텔에서 살고 있었다. 딱히 집을 사기도 귀찮았고, 새로운 하우스키퍼를 구하는 일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연인은 지나치게 유명한 감이 있었다. 그가 호텔 안으로 들어서는 사진을 찍어 대는 파파라치까진 말릴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보안상 호텔이 더 나았다.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오직 수영을 하고 싶을 때뿐이었다. 호텔 내부에도 수영장은 있었지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즐길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은 그는 문득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닉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방금 먹었으니 룸서비스를 위해 온 것도 아닐 테고, 청소를 하러 올 시간도 아니었다.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이 없었는데. 닉이 슬리퍼를 끌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밖에 서 있는 상대를 발견한 그가 그대로 문고리를 잡은 채 굳었다.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열어 주면 어떡해?”
다니엘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닉은 그 말에 곧 정신을 차렸다. 그는 대꾸 없이 다니엘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안으로 끌어당기며 문을 닫았다.
부드럽게 닫힌 문에 다니엘이 등을 대고 섰다. 닉 클레이튼이 그를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고 가로막은 채 섰기 때문이었다.
등에 닿은 문을 흘긋 눈짓했던 다니엘이 자신을 막고 선 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점차 가늘어질 때 즈음 닉이 손을 들어 다니엘의 얼굴로 가져갔다.
“뭐 하는 거야?”
자신의 뺨을 조물거리며 만지는 닉을 향해 다니엘이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보자마자 키스해 줄 줄 알았는데.”
“LA에 있던 거 아니었어?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지?”
“키스는 안 해 주는 거야? 배우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요, 선생님.”
“너 진짜…….”
자신의 말에 대답해 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입술만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을 보며 닉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는 뺨을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다니엘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쪽,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바로 코앞에서 멈추었다. 눈을 내리깐 채로 그 거리감을 가늠하고 있는 다니엘을 보며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닉은 다시 혀를 내밀어 다니엘의 입술을 핥았다. 기다렸다는 듯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파고든 혀가 금세 뒤얽혔다.
“음….”
그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 오는 단단한 팔을 느꼈다. 손은 그 아래보다 더 내려가 엉덩이를 꽉 쥐었다. 그대로 자신을 안아 올리는 힘에 닉 클레이튼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기듯 들어 올려진 닉이 다니엘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숨죽여 웃었다. 입술을 맞대고 있는 탓에 고스란히 느껴진 웃음소리가 간지러웠다. 다니엘은 그가 웃는 것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따라 웃었다.
“뭐가 널 웃게 했어?”
그가 묻자 닉이 겨우 웃음을 삼키며 대꾸했다.
“네가 영화에서 바보 같은 분장을 하고 나왔던 게 떠올랐어.”
“…니키, 그건 제법 슬픈 장면이야. 벤은 에밀리를 웃게 해 주려고 일부러 그런 꼴로 찾아갔던 거라고.”
다니엘은 그의 말에 조곤조곤하게 반박했다. 알고 있었다. 닉은 자신을 멍청이 보듯 바라보는 다니엘에게 작게 코웃음을 쳤다.
영화를 보면서는 그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에 이입해 몰입했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그 멍청한 꼴이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할로윈 데이에도 한 번도 코스튬을 입지 않았던 그가 털이 복슬복슬하게 달린 인형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귀여웠다.
다니엘 레널드는 아마 모를 테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읽는 대신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키스 신도 여러 번 나왔는데, 한 번도 질투 안 했어?”
“했어.”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다니엘은 예상외의 답을 들은 사람처럼 잠시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나 곧 닉을 마주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옆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매력적인 미소였다.
닉은 이전까진 자신이 레널드의 원 밖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걸 볼 때면, 사실 그가 자신의 좁은 원 안에 넣어 준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어졌다.
우습게도 영화를 보며 알량한 질투심을 느꼈던 건 그가 찍은 키스 신 때문이 아니었다. 이 웃음이 스크린에 가득 차 보여질 때마다, 닉은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의 눈앞을 전부 가려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이것도 다니엘 레널드는 아마 모르겠지.
솔직하게 말해 줄지 고민하기도 전에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 얼굴에 입술을 맞춰 왔다. 따뜻한 입술이 쪽, 쪽 입가와 뺨 주변에 닿았다. 닉 클레이튼은 슬쩍 고개를 비틀어 피하며 말했다.
“그 전에. 이제 대답해.”
“뭘?”
“어떻게 여기 있어?”
다니엘은 그가 의아한 점을 짚고 넘어가는 모습에 놀라움을 삼켰다. 자신의 페이스에 휘말려 그런 건 묻어 둘 줄 알았던 그가 잊지 않고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묻고 있었다.
다니엘은 굳이 감탄을 뱉어 닉의 성질을 건드리는 대신 고분고분 대답했다.
“네가 영화관에 있을 때부터 이미 운전해서 오고 있었어.”
“내일은 스케줄 없어?”
내일도 일정이 있다면 곤란했다. 아무리 다니엘이 체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닉은 충분히 자지 못한 그에게 장시간 운전을 시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만나지 못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쌓인 욕구를 풀기에 밤은 짧았다. 그러니 내일도 그에게 일이 있다면 시작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담담한 물음이었지만, 닉의 시선에는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다니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제 휴식기야.”
닉 클레이튼은 그 대답에 더 묻지 않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제게로 다가와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행동에 다니엘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쪽, 쪽 간지러운 키스를 하던 닉이 깨물듯 잘근거리기 시작하자 그의 입에서는 이내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잔뜩 잇자국을 내던 닉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이 그를 안아 들고 있는 팔에서 힘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허공에 들려 있던 닉의 발이 완전히 바닥에 닿았다.
이번에는 닉의 등이 벽에 닿았다. 다니엘은 몸을 숙여 그의 앞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바지 버클을 풀고 그대로 입술을 가져간 다니엘이 바지 지퍼를 입에 물었다.
지이익- 닉의 시야에 입으로 지퍼를 내리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가 들어와 박혔다.
입가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너……. 이런 건 어디서 배워 왔어?”
“글쎄, 타고난 것 같은데.”
“일할 때 들키지 마. 눈이 돌아가서 포르노를 찍자고 널 쫓아다닐지도 모르니까.”
다니엘이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이 돌아갈 정도의 장면이었어?’ 그가 물었다. 닉은 보면서도 모르냐는 듯 제 하반신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얇은 천으로 된 홈웨어는 발기한 성기의 형태를 하나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목을 긁으며 새어 나왔다.
그는 팔을 뻗어 닉의 바지와 팬티를 잡고 한 번에 수월하게 벗겨 내렸다. 닉은 퉁 튕겨져 나온 성기를 입에 물려던 다니엘을 제지했다.
“같이 해.”
“니키, 쥐고 흔드는 건 자위나 다름없잖아.”
“둘이서 하면 섹스지, 멍청아.”
자신의 옷깃을 잡고 끌어 올리는 손길에 그가 아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닉은 다시 앞에 선 다니엘의 바지 버클을 풀며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방금의 사소한 반항이 무색하게 그도 이미 발기한 채였다. 밖으로 꺼내진 성기가 자신의 것과 닿았다.
길이도 길이였지만, 다니엘 레널드의 것은 다소 두꺼웠다. 닉은 자신의 손이 작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손가락이 길쭉하고 큰 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다니엘의 것을 자신의 페니스와 겹쳐 잡자 한 손으로 완벽하게 쥘 수 없었다.
다니엘이 손을 뻗어 닉의 손등 위를 감싸 쥐자, 그제야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시작했던 움직임은 곧 격렬해졌다. 손바닥이 기둥을 쥐어짜듯 힘주어 쓸어 올릴 때마다 성기끼리 부딪히며 마찰했다.
다니엘은 고개를 숙여 정신없이 닉에게 키스했다. 키스를 받는 쪽도 이미 온몸을 달구는 쾌감에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덮치듯 파고드는 키스에 머리가 벽에 쿵 부딪혔으나 고통을 느낄 새는 없었다.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닉은 잡아먹을 듯 그의 혀를 빨았다.
“윽….”
불현듯 느껴진 찌릿한 감각에 다니엘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라앉은 음성은 아픔보다는 성적인 흥분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흥분할 때면 곧잘 상대를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혀를 얽다 잠시 숨을 고르는 틈에 그는 또 입술을 물어 왔다. 그러고는 쪽, 쪽 빨아 대는 것이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설핏 눈꼬리를 내리는 그를 보며 다니엘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제길, 시각적 자극이 지나쳤다. 다니엘 레널드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의 손등을 덮고 있던 손아귀에 꽉 힘을 주었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터져 나온 것도 동시였다.
“하…….”
다니엘의 입술이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빨던 닉이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입술을 뗀 그가 여전히 손을 움직이는 채로 물었다.
“먼저 갔어? 대니, 그동안 한 번도 뺀 적 없어?”
두 개의 성기를 잡고 흔드는 손에 쏟아져 나온 희뿌연 색의 정액이 묻었다. 쿠퍼액으로 이미 젖어 있던 성기에 정액이 펴 발라지면서 물기 어린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다니엘 레널드의 성기는 한 번 사정했음에도 여전히 단단하게 서 있었다. 그가 숨을 고르다 말고 닉의 물음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넌, 다른 사람이랑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어떻게 하면 바로 거기로 생각이 새는 거지? 이 정도면 자신의 말을 꼬아 듣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게 분명했다. 못 본 지 몇 주가 넘지 않았나. 당연히 혼자 한 번쯤은 뺐어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흐트러진 호흡에 기가 차다는 듯한 웃음기가 어렸다. 닉 클레이튼이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를 보며 짜릿한 전율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별수 없이 상체를 기울여 그에게 기대듯 안겼다.
“너를, 읏, 두고?”
탁, 탁 거칠게 비벼지던 손에 다시 한번 뜨거운 정액이 쏟아졌다. 헉. 그와 동시에 닉 클레이튼이 참아 왔던 숨을 내뱉었다.
다니엘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 들었다. 포장지의 끄트머리를 잇새로 살짝 물고 그대로 뜯어낸 그가 말했다.
“니키, 오른쪽 다리를 올려 봐.”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닉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의 허리춤에 한쪽 다리를 감아 오자 다니엘이 한쪽 팔로 그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다니엘이 다른 쪽 팔을 아래로 가져갔다. 닉이 벌려진 다리 아래로 내려온 손길에 잠시 흠칫했다. 정액이 묻은 손가락이 단번에 구멍의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곧 들어올 물건을 기대하듯 구멍이 연신 움찔거리고 있었다. 간지럽히듯 입구 위를 맴돌던 손가락이 이내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
오랜만에 뒤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닉이 얕은 신음을 흘렸다.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은 느리게 움직이며 입구를 넓히려 들었다. 그러다 살짝 구부려 손끝으로 살살 내벽을 긁어낼 때마다 닉이 반사적으로 발끝을 들었다.
움찔 몸을 떨던 닉 클레이튼은 결국 손을 들어 다니엘의 어깨에 올렸다. 열기를 띤 손끝이 불만을 표하듯 옷깃을 그러쥐었다. 장난 같은 손짓에 만족하기에 그는 이미 더 큰 쾌락을 알고 있었다.
닉이 상기된 얼굴로 다니엘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그, 냥 바로 들어, 와.”
손가락 하나조차도 꽉 물고 있는 주제에 호기로운 명령이었다. 자신의 것을 원한다는 듯 재촉하는 표정을 보며 다니엘은 곤란한 낯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도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 돼. 전에 그랬다가 다음 날 내 목을 졸랐던 거 기억 안 나?”
“빌어먹을, 별걸 다 기억하고 있어. 으, 응….”
그가 달래듯 닉의 뺨에 제 뺨을 비비적거렸다. 눈가를 스치는 머리칼의 간지러움에 닉이 눈을 찡긋거렸다.
손가락이 하나씩 늘어 갈 때마다 닉 클레이튼은 힘에 부쳐 하면서도 다니엘의 옷깃을 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얼른 들어오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젠장. 망할 다니엘.
닉의 눈꼬리에 물기가 맺혔다. 아래를 들쑤시는 손길이 여전히 지독하게 다정했다. 정작 제 것을 박아 넣을 때는 인정사정을 두지 않을 거면서 말이다.
그가 결국 다니엘의 어깨를 붙잡지 않은 다른 손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의 페니스를 쥔 닉의 손이 거칠게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을성 없기는. 다니엘은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고개를 내려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 가쁜 숨소리가 섞인 신음을 흘리던 닉은 결국 두 번째로 사정을 했다.
다니엘이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 냈다. 처음보다 눈에 띄게 묽어진 정액이 기둥을 따라 울컥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그가 아래를 휘젓던 손가락을 빼냈다.
그는 이내 터질 듯 힘줄이 선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잡고 있던 닉의 탄탄한 허벅지를 더 벌리듯 들었다. 커다란 좆이 그의 구멍 입구와 맞닿았다. 프리컴으로 젖은 귀두가 구멍 위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후….”
그러다 천천히 구멍을 비집고 들어간 성기가 안을 꽉 채웠다. 배 속까지 차오르는 느낌에 닉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럴 줄 알았어. 다니엘이 초조한 얼굴로 마른 웃음을 삼켰다. 겨우 반절이 좀 넘게 들어갔을 뿐인데도 닉 클레이튼은 벌써 배가 부른 낯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밀어 넣던 다니엘이 그의 젖은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니키.”
다니엘은 왜 더 움직이지 않는 거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불렀다.
“응, 대니.”
“사랑해.”
닉 클레이튼은 그 조용하게 들려오는 고백에 비죽 웃음을 걸었다. 그건 다니엘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 또한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신호.
닉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그래, 나도 널 사랑해, 멍청아.”
대답이 다니엘의 귓가에 속삭거리며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팔을 풀고 자신을 보며 웃는 닉을 보며 다니엘이 항복을 선언했다.
“정말이지 너를 어쩌면 좋지.”
못 참겠다. 아니, 닉 클레이튼을 앞에 두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입술을 잘근거리던 그가 반이 좀 넘게 들어가 있던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그리고 귀두가 입구에 걸려 아슬아슬하게 나왔을 때, 퍽, 하고 단번에 안으로 처넣었다.
“흐, 아……!”
그 반동에 땅을 디디고 있던 왼쪽 발이 들렸다. 끝이 빠지기 직전까지 빼냈다가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강하게 밀어 넣어지는 삽입이었다. 닉이 그의 어깨를 쥔 손에 꾹 힘을 가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격한 추삽질의 중간중간에는 몇 번 정도 다정한 움직임도 있었다. 그 부드러운 삽입에 어깨를 쥔 닉의 손아귀 힘이 약해질 때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다시 강하게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읏…, 으, 대니, 잠, 잠시만…!”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 못돼 먹은 움직임에 닉의 눈에 생리적인 물기가 고였다.
“느린 거, 싫어하잖아.”
다니엘이 자신을 노려보는 눈에 담긴 물기를 할짝거렸다.
“아, 너무, 좋아…. 네가 너무 좋아, 니키….”
다니엘은 그가 결코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이 못 견디게 좋았다. 물기와 열기가 어린 파란 눈동자가 끈질기게 자신을 담아 올 때면, 그 어떤 것보다 큰 자극이 되었다.
단지 쾌락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받아 주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 사정감이 고조된 다니엘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안으로 성기를 찔러 올렸다. 쉼 없이 내벽을 긁듯이 파고드는 허리 짓에 닉도 덩달아 절정까지 내몰렸다.
“하읏, 응, 대니, 앗, 아, 흐…….”
아직 서 있는 닉 클레이튼의 페니스 끝에서 거의 투명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니엘도 그의 안에서 사정했다.
“하….”
다니엘이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말없이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호흡을 고르던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닉 클레이튼은 왜인지 더 어둡게 일렁이는 듯한 눈동자를 보며 멈칫했다. 아직도 벌건 눈가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불충분한 건 분명해 보였다. 다니엘은 아직도 안에 있던 성기를 빼내곤 그의 몸을 돌렸다. 원하지 않게 벽에 가슴을 붙이고 선 닉이 불만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으나 다니엘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대니, 앞에… 보고 싶어.”
“안 돼.”
그가 거절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닉은 그 확고한 대답에 미간을 찡그렸다.
“왜?”
“네 시선이 너무 야해서 갈 것 같아.”
“…그게 무슨.”
닉이 헛웃음과 함께 말끝을 흐렸다.
다니엘은 자신의 눈빛이 어떤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닉은 다음에는 거울 앞에서 그의 얼굴을 보여 주면서 해야겠다는 실없는 다짐을 했다. 자신을 물 것처럼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한 번이라도 거울을 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너의 눈을 보고 싶어, 멍청아. 그렇게 타박하고 싶었으나 닉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는 벽과 자신의 상체를 비집고 들어온 손이 젖꼭지를 꼬집듯 쥐자 흠칫 몸을 떨었다.
“뒤로 하면 더 깊숙하게 넣을 수 있어.”
“음….”
장난치듯이 젖꼭지를 쥔 채 문지르던 손가락이 펼쳐지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남자인 닉 클레이튼에게 가슴이 있을 리 없었다. 탄탄하고 매끄러운 가슴 위를 배회하던 손은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도드라지지는 않았지만, 보기 좋게 근육이 짜인 배를 타고 손은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몇 차례나 사정을 한 이후여서인지 조금 가라앉은 성기를 말아 쥐었다.
“헉.”
닉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페니스는 이미 살갗이 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다니엘이 주무르듯 쥐자 즉각적인 쾌감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발가락이 저절로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다니엘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것을 쥐었다. 축축한 기둥의 끝부분이 엉덩이 골을 타고 내려와 조금 벌어져 있는 구멍에 맞춰졌다.
처음에는 이전처럼 부드럽게 들어가는 듯하던 성기가 반도 채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한 번에 안으로 쑤시고 들어갔다.
“니키….”
흥분감으로 가라앉은 목소리에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다정한 부름과는 다르게 좆을 안으로 박아 넣는 허리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가 거칠게 허리를 쳐올릴 때면 뒤꿈치가 들린 발이 바닥에서 떨어질락 말락 했다. 닉 클레이튼은 앞에서 느껴지는 사정감에 못을 박는 듯한 그의 허리 짓에 본능적으로 도망갈 곳을 찾았다.
그러나 앞은 벽이었고, 뒤는 벽 같은 다니엘이 있었다. 그를 밀치고 도망칠 수도, 다니엘이 서 있기에 무너질 수도 없었다. 닉 클레이튼은 눈앞이 하얘진다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그가 버둥거리듯이 다니엘을 밀어내고자 했다. 너무 지나친 쾌감에 죽을 것 같았다.
“잠, 시만, 대니, 으읏, 아…!”
그 몸짓에 그가 절정에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린 다니엘이 그의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좀 더 위로 말아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마치 분출을 막듯이 요도구 위를 힘주어 감쌌다.
“제발, 잠시만… 흣, 아, 제…발!”
무엇에 관해 비는 건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한 부탁이었다. 조금 쉰 목소리로 신음을 흘리던 그가 이내 몸을 떨며 거칠게 호흡했다.
다니엘이 팔을 뻗어 몸을 늘어뜨리듯 힘을 빼곤 덜덜 떨고 있는 닉을 끌어안았다. 다니엘은 정신없이 그의 안으로 파고들던 것도 멈춘 채 그의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닉 클레이튼은 명백히 사정한 사람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손에 묻어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니, 키?”
다니엘이 멈칫하며 그를 불렀다. 곧 그의 입가에 숨기지 못한 미소가 걸렸다.
“사정하지도 않고 간 거야?”
“……닥쳐.”
닉이 짓씹듯 답했다.
“제발.”
이번에는 무엇을 요구하는지 분명한 ‘제발’이었다. 다니엘은 입을 꾹 다물며 힘겹게 웃음을 삼켰다.
닉 클레이튼은 이번 여름을 캘리포니아의 바다에서 보내면서 마냥 하얬던 피부가 해변의 연한 모랫빛으로 물들었다. 그런데도 목덜미부터 귓등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한눈에 티가 났다. 다니엘이 고개를 내려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두 팔로 그의 배를 감싸 꽉 끌어안은 채 밀착한 탓에, 닉의 등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절정의 잔재가 여전히 척추를 타고 흐르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짜증을 내기 전에 다니엘은 그의 등에 마구 키스하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10월을 넘긴 캘리포니아의 밤은 짧았으므로.
***
닉 클레이튼이 겨우 눈을 뜬 것은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을 때였다. 지칠 정도로 해 대다 결국 기절하듯 잠든 것에 비해 일찍 일어난 편이었다. 그런데도 다니엘이 누워 있었을 침대의 옆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아침 운동이라도 간 거겠지. 닉이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나자 멍했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허기진 배를 붙잡았다. 배가 고파서 일어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습관적으로 전화기를 들어 룸서비스를 시키려던 닉이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음.”
직접 해 볼까?
그건 아마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던 닉 클레이튼이라면 절대 생각도 해 보지 않았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 성인이라고 부르기에 어색한 나이가 되지 않은 그는 슬리퍼에 발을 넣은 채 휘적휘적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뭐가 있나 살펴보는 그의 눈에 마땅한 먹을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물, 단백질 음료, 꼬박꼬박 채워져 있는 건강 주스 등등. 요리를 하지 않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냉장고를 노려보던 그의 눈에 계란이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계란을 꺼내 든 그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다시금 또 멈칫했다. 그러다 대충 서랍장을 뒤져 찾아낸 프라이팬을 올려 두었다. 불을 켜자마자 팬은 금방 뜨거워졌고, 닉은 계란 다섯 개를 서둘러 깨 넣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 찾아낸 깨끗한 뒤집개를 쥐었다. 그리고 계란 뭉텅이의 가장자리를 긁어 보다 말고 뭔가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으음….”
그의 목을 타고 어정쩡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계란이 뒤집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닉 클레이튼은 계란 프라이를 만들려던 계획을 수정한 채 스크램블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냥 휘저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가 뒤집개에 힘을 주어 가장자리부터 팬을 긁어 갔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건 계란이었다고 믿을 수 없는 시꺼멓게 탄 부스러기뿐이었다.
닉은 자신이 혹시 석탄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찾아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다니엘은 쉽게 했는데….
그가 프라이팬을 내려다보며 황당해하는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돌렸다. 운동을 마친 건지 안으로 들어오던 다니엘이 멈칫했다.
“무슨 타는 냄새가……. 니키? 니콜라스 클레이튼!”
곧 일그러진 얼굴로 닉을 부르며 부엌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다니엘의 시야에 어색한 미소가 들어왔다. 닉이 서둘러 불을 끄고는 그를 향해 인사했다.
“어, 왔어?”
“…….”
“그러니까. 아침을 해 보려고 했는데….”
“…….”
“제길.”
변명할 말은 없었다. 닉 클레이튼이 한숨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룸서비스 시키자.”
닉이 처참하게 망한 요리를 뒤로한 채 한 걸음을 뗐다. 멍하니 서 있던 다니엘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야…….”
“나한테 요리를 해 주고 싶었던 거야?”
웃음을 참듯 억눌린 음성이 목을 긁으며 튀어나왔다. 닉 클레이튼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별다른 대꾸 없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려라. 마음껏 놀리든지.
그렇게 체념한 채로 다니엘에게 끌어안겨 있던 닉의 귓가에 꾹 참는 듯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 이럴 수가…. 사랑해.”
그건 단순히 웃긴 걸 참는 건 아니었다.
다니엘은 밤새 시달리다 잠에 든 그가 이렇게 일찍 눈을 뜬 게 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일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뒤지다 못 찾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배가 고픈 채로도 자신에게 아침을 해 주기 위해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요리를 하겠다고 나선 것 아닌가.
비록 결과는 비참할 정도로 안쓰러운 꼴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귀여웠다. 정말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곤란할 정도로 닉 클레이튼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병은 더더욱 빠르게 가속화되고 있었다.
“고마워, 잘… 먹지는 못하겠네. 하지만 고마운 건 정말이야.”
“그래…. 그나저나 나 배고파, 대니.”
그 투덜거림에 다니엘이 결국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럴 줄 알고 이미 부탁하고 올라왔어.” 그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잊을 뻔했다는 듯 아, 하고 낮은 탄식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니키. 좋은 아침이야.”
다니엘 레널드는 꼭 닉 클레이튼과 결혼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상기해 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닉은 팔을 들어 올려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닉 클레이튼도 자신의 선택이 맞았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캘리포니아로 온 것은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조금 짓궂고 엉망이긴 하지만, 자신들은 떨어질 수 없는 페어였으므로.
너티 페어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