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Touch!
그러니까, 잠시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다니엘 레널드의 스캔들은 이후 쏟아져 나온 정정 보도로 인해 다시금 잠잠해졌다. 무엇보다 타마라가 직접 논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힘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은 금세 그곳으로 향했다.
물론 학교 내에서 다니엘에게 향한 시선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딜 가나 시선을 끌었고, 가끔은 인터넷에 그를 찍은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애초에 다니엘 레널드는 처음 전학 오던 순간부터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스턴 스쿨에서 그를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너는 최고로 운이 좋은 녀석이야, 닉.”
닉 클레이튼은 불규칙한 호흡을 고르며 벤치에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그라운드를 둘러싼 스탠드에 앉아 있던 제니가 한 말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뭔가를 끄적이던 그녀는 방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걸어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뭐가?’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제니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왜 행운아인지는 크리스마스에 알게 될 거야.”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 네가 그렇게 호언장담할 때면 나는 좀 불안해져.”
“기대해도 좋아!”
약간 상기되기까지 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닉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기대는 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는 대망의 선물 교환식 시간이 반드시 있었는데, 그때마다 제니는 꼭 자신에게 이상하고 쓸모없는 선물을 주곤 했던 것이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끔찍할 정도로 화려한 프릴이 달린 점프 슈트와 흰 토끼 귀 머리띠를 선물했다. 그걸 입고 나온 자신을 보며 자지러지게 웃으며 좋아하던 그녀를 닉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안 어울릴 수 없다면서 폭소하다 못해 결국 찔끔 눈물을 흘리던 것까지도.
그때 자신과 함께 찍은 사진은 여전히 그녀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장식하고 있었다.
“너는 뭘 갖고 싶은데?”
닉이 그녀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싶던 제니가 흐음, 하고 미심쩍은 소리를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다니엘 브라이언.”
그녀의 말에 닉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니엘 브라이언이라면 명실상부 하이틴 영화계의 역사를 다시 쓴 인물이기는 했다. 현실에 없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건 배역이잖아, 제니.”
“그렇다면… 다니엘 레널드.”
“걔는 안 돼.”
“왜 안 돼!”
“왜긴…….”
내 거니까. 뒷말을 삼킨 닉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그녀를 보았다. ‘그와는 언제쯤 사이가 좋아질 예정이야?’ 하고 묻는 그녀에게 웃는 낯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아직 스포츠 클럽이 끝나지 않은 방과 후의 그라운드에서는 육상부와 여타 운동부의 학생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서 나무들이 온통 건조하게 말라 갔지만, 운동하는 이들의 열기로 인해 겨울 특유의 적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풋볼 연습이 한창이었던 잔디밭은 평소처럼 파릇할 정도였다.
함께 집에 돌아갈 이를 기다리며 멀뚱히 운동장을 구경하던 닉의 시야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섰다. 주니어 시절 파티에서 고작 한 번 대화한 것이 다기는 했지만, 아직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 안녕, 켈리.”
닉이 체육복 소매에 땀을 닦으며 벤치로 걸어오고 있는 켈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툭.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물병이 바닥을 굴렀다. 데굴데굴 굴러 자신의 발치 가까이로 다가온 물병에 닉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울 생각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닉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인사해 올 줄 몰랐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닉 클레이튼이 찡그리듯 웃었다. 옆에서 제니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잊어버렸어? 프롬에서 만났었는데.”
팔을 뻗어 물병을 주운 닉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가 이윽고 물병을 건네주자, 얼어 있던 그녀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왔다.
“아, 고마워….”
인사를 전하는 목소리가 숨이 찬 사람의 것처럼 떨려 오고 있었다. 별말씀을. 닉이 그런 뜻을 담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손끝이 닿을락 말락 한 순간 그는 바로 손을 떼었다. 거칠게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간 것도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헉…!”
놀란 듯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는 닉이 아닌 그의 앞에 서 있던 켈리에게서 나왔다. 갑작스럽게 몸이 뒤로 넘어갔지만, 닉은 오른발을 뒤로 뻗어 바닥을 디디며 가까스로 무게 중심을 잡았다. 휘청이지 않게 되어서야 몸에 들어간 긴장을 푼 그가 기우뚱한 상체를 그냥 그대로 뒤의 벽에 기대어 섰다. 진짜 벽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닉 클레이튼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 벽이 뭔지, 자신을 잡아당긴 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하.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닉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곧 거칠게 몸을 돌리며 제 뒤에 선 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제길,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한 대만 팰까?
언제 다가온 건지, 닉은 자신한텐 잘못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다니엘을 노려보며 잠시 고민했다. 지난번 복도에서 벌어졌던 난투극이 다시 한번 벌어지는 건지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제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결국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닉이 짜증스러운 손길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리곤 걸음을 옮겼다. 벤치에 뒀던 자신의 가방을 들어 올린 그가 제니를 향해 ‘먼저 가 볼게.’ 하고 눈인사를 했다. 앞만 보고 걷기 시작한 닉 클레이튼의 뒤를 다니엘이 쫓았다.
탁. 차에 올라탄 닉은 다니엘이 운전석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걸고, 학교를 빠져나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는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던 고요를 깬 닉이 다니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앞을 주시한 채로 다니엘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빨리 씻고 오겠다고 했잖아. 그 잠깐을 못 기다려?”
“무슨 소리야? 난 널 기다리고 있었어.”
“다른 여자애랑 대화하고 있었지.”
“야, 그건 물병이 떨어져서…….”
억울하다는 듯 답하던 닉이 이내 한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은 내 말을 들어 먹을 생각이 없다. 아, 원래 이랬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의 다니엘 레널드에게는 말을 걸어 봤자 헛수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상 화난 연인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변명이 아니라 오해에 대한 해명이었지만 말이다. 억울해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 미안해.”
‘너를 기다리고 있을 땐 아무와도 대화하면 안 된다는 거야?’ 하고 불만을 꺼내고 싶었으나, 그럼 다니엘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할 것이다. 분명 그러겠지.
“다음부턴 다른 사람이 물병을 떨어트리든 물벼락을 맞고 기절하든 상관하지 않을게.”
“…그 정도로 극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웃기는 놈. 닉이 앞을 주시하는 다니엘의 표정이 풀린 것을 확인하며 실소를 삼켰다. 이전이라면 짜증을 냈을 제멋대로 구는 태도가 어이없을 정도로 귀여워 보였다.
닉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손을 뻗어 차의 오디오를 켰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귀에 익숙한 영국 록 밴드의 것이었다. 그 멜로디에 금방 정신을 뺏긴 닉이 흥얼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틈으로 조금씩 쌀쌀해지기 시작한 겨울바람이 새어 들어와 뺨을 스쳤다.
닉 클레이튼에게 다른 형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형제끼리 밴드를 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 나오는 곡을 부르는 록 밴드도 가족 싸움으로 해체했다던가. 그가 노래를 들으며 실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 옆에서 운전하고 있던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니키, 너희 어머니께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오신다더라. 오늘 연락받았어.”
왜 그녀는 늘 본인의 자식이 아니라 다니엘에게 연락을 하는 건지 닉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닉 클레이튼이 가진 의문은 그가 자신을, 아니 자신의 대책 없는 성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면 풀릴 문제였다. 알고는 있었으나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걸 굳이 말해서 다시 한번 그에게 멱살을 틀어잡힐 이유는 없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셨어.”
“너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집에 안 가?”
“크리스마스 당일에 갈까 생각 중이야.”
그는 흘긋 닉을 바라봤다가 금세 다시 앞을 주시했다. ‘나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려고?’라는 장난스러운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하고 대답하기까지 했다.
닉은 그 당연하다는 대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늘 그는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면 캘리포니아에 있는 본가로 돌아갔다. 따라서 다니엘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그가 다니엘의 옆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껏 한 번도 준 적 없었지만 말이다.
“있잖아, 다니엘.”
생각에 잠겨 있던 닉이 불현듯 다니엘을 불렀다.
“너는 어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갖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어?”
“그런 거 빈 적 없어. 산타를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한 번도?”
“한 번도.”
뭐 이런 삭막한 유년 시절이 다 있지? 닉이 헛웃음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다니엘 레널드는 어릴 때부터 착하고 얌전한 아이의 표본처럼 굴기는 했다. 나무랄 데 없는 명문가의 도련님처럼.
그를 처음 봤을 때를 회상하던 닉 클레이튼은 이내 납득했다. 그가 어른들 앞에서 무척 순진한 꼬마 행세를 한 것과는 별개로, 그는 다소 염세적인 구석이 있었다.
“너는 뭘 빌었었는데, 니키?”
닉은 되돌아온 다니엘의 질문에 곧장 답했다.
“바다가 갖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닉 클레이튼이 시원스레 입매를 휘었다.
“프라이빗 비치가 있는 별장을 받았지. 다음 여름에는 같이 가자.”
같이 가자는 말에 다니엘은 바로 화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운전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닉은 곧 숨겨지지 못한 기쁜 기색을 발견했다.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키득거리며 놀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고작 이런 작은 제안에 기뻐하는 다니엘을 보니 괜히 머쓱해진 탓이었다. 닉은 왜인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목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대니, 내가 이뤄 줄 테니까 이번에는 소원 빌어 봐.”
장난처럼 내뱉어진 말에 다니엘은 잠시 닉을 곁눈질할 뿐 대답이 없었다.
“왜 말이 없어?”
소원이 없나? 닉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어진 되물음에도 묵묵히 운전하던 그는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상체를 틀어 시선을 마주했다.
차에서 내리려던 닉은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멈칫할 수밖에는 없었다.
“내 소원의 대상은 늘 너였어. 근데 소원만 빌고 있었다면 너와 이렇게 되지는 못했겠지.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소원은 빌지 않을 거야.”
“…….”
“그런 거 없이도 절대 널 놓치지 않을 테니까.”
다니엘은 덤덤하게 말하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이윽고 땅을 밟고 선 그는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려 안 내리냐는 듯 눈짓했다.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꺼내는 다니엘 레널드의 모습은 마치 정말로 그가 주연을 맡았던 로맨스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닉 클레이튼은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제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다니엘 레널드는 지나치게 다정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린 닉이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너 그런 대사 외워서 다니냐? 아니면 혹시 어디서 나온 대사야?”
탁, 다니엘은 차 문을 닫으며 슬쩍 웃었다.
“낭만적이지 못하긴.”
자신 이전엔 누굴 만나 본 적도 없던 다니엘 레널드에게 지적을 받게 되다니!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은 닉이 차 문을 닫으며 지지 않고 받아쳤다.
“네가 너무 낭만적인 거겠지, 대니.”
***
“배고파요, 엄마.”
저녁 만찬을 앞에 두고 침만 삼키고 있던 닉이 결국 입을 열었다.
닉 클레이튼은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어서야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뉴욕과 보스턴 사이는 운전해서 4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그래서인지 경영에 바쁜 엠마는 집을 비우는 날이 더 많았다. 늘 그녀의 뒤만 쫓아다니는 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도 여전히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며 부엌을 서성이는 아버지를 닉이 멀거니 지켜보았다. 엠마는 요리를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주부보다는 CEO에 적성이 있었으니까.
식탁에는 이미 하우스키퍼가 만든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요리를 위해 부엌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길, 기존의 인프라가 충분한지, 설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자신이 인사를 담당한 고용인이 업무를 어떻게 해내고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혼자 지내고 있는 아들의 생활을 분석하고 검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닉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태생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이해시키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굳이 따지자면, 설득 혹은 협상하는 이에 가까웠다.
이미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저곳을 살피며 문제점을 찾는 그녀에게 닉은 ‘아무 문제도 없어요.’ 하고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는 다니엘은 조용히 웃으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닉 클레이튼의 만류가 그녀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으므로.
“좋아, 그럼 이제 식사할까?”
드디어 집 안의 검사를 마쳤는지 엠마가 단정한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런 그녀를 따라 아버지 또한 옆자리에 착석하자,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어 서 있던 닉과 다니엘 또한 식탁 앞으로 향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
“잘 지내고 있죠.”
어차피 보고를 받고 있을 터라 그녀의 물음은 염려보다는 인사치레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닉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에그노그로 손을 가져갔다. 그릇에 손끝이 닿기 직전, 그 손길은 이내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다니엘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게 네 거야, 니키.”
그렇게 말하며 다니엘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에그노그를 들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닉의 앞에 있는 것과 바꾸었다.
클레이튼들은 전부 다니엘이 하는 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엠마였다. 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은 다니엘이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 미소 짓는 것을 보며 물었다.
“뭐가 다른 게 있니?”
그 물음에 다니엘은 잠시 닉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대답했다.
“하나는 브랜디를 넣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거든요.”
“…나도 성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닉은 불만스럽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얌전히 그가 바꿔 준 에그노그를 쥐었다. 술맛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을뿐더러 여기서 더 퉁명스럽게 굴어 봤자 엠마의 차가운 눈초리나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에 맴돌자, 닉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엠마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 두었다. 그러고는 마치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처럼 어딘가 은근한 어투로 다니엘을 불렀다.
“다니엘.”
완벽한 예법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스테이크를 썰던 다니엘이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 네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둘이 결혼하게 된다면, 내 사업을 물려주마.”
챙그랑! 다니엘을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샐러드를 집다 말고 집게를 떨어트리는 자신의 아들에게 말없이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말이 닉 클레이튼에게 어떤 폭탄을 투척한 것인지 모를 것이었다. 그러나 그 농담에 지레 놀란 닉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삐걱거렸다.
“제 의사는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그가 엠마에게 황당함이 가득 배인 목소리로 물었다.
“엠마만큼 사업을 잘 이끌어 갈 자신은 없어요.”
“내 의사는 고려하지 않는 거냐니까?”
이번에는 다니엘을 보며 물었다. 다니엘이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쪽이 더 얄미웠지만 말이다.
“지나치게 겸손하구나.”
약간의 만족스러움이 담긴 엠마의 말을 끝으로 테이블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친아들보다는 다니엘 레널드가 사업을 더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침묵의 원인이었다.
닉은 자신의 의견을 철저히 묵살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아버지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마카로니를 입에 넣던 그의 아버지가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했다. 닉 클레이튼은 결국 입을 다물고 다시 샐러드를 접시에 퍼 담기 시작했다.
엠마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큰 사고를 치지만 않는다면 그의 사생활에 터치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다니엘과 자신이 처음 만났던 여름날, 그와 주먹질을 하며 싸웠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도 그랬다. 사건의 전말을 물은 그녀는 앞으로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전략을 작성하게 했다.
그때 자신은 아마… ‘그 녀석이 또 까불어도 한 번쯤은 참아 볼게요. 하지만 이번 일은 그 재수 없는 자식의 잘못이었어요.’라고 적어 갔다. 그 보고서, 아니, 끄적임을 읽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느지막하게 물었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니?’
이성적인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가끔은 사고를 쳐도 좋다고 했다.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건 때때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엄마를 이해하려면 제정신이 아니어야 하는 거예요?
-원래 사랑이란 건 제정신으로 하는 일이 아니란다, 아들.
-지금 아빠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겠어요.
물론 이렇듯 보통은 닉이 대화를 포기해 흐지부지 끝이 나곤 했지만 말이다.
닉은 엠마가 가끔 아버지의 브리프케이스나 지갑 속 따위를 뒤져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물론, 아버지는 약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닉이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봐 온 아버지는 늘 똑같았다. 똑같이… 어딘가 조금 나사가 빠져 있었지.
이런 날이 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닉은 이제는 어쩌면 조금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의 연인은 제정신이 아닌 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자신 또한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니키의 곁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엠마의 말에는 닉 클레이튼이 영위하는 생활에 대한 불신이 전제되어 있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말에 예의 바르게 웃으며 자신이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하단 말을 전했다.
닉은 그 젠틀한 대답에 다시 한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음을 느꼈다. 허. 그가 심술이 난 얼굴로 다니엘을 바라보다가 이내 신발에서 발을 꺼내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의 바짓단 안을 파고든 발끝이 정강이까지 타고 올라갔다.
포크를 들고 입가에 음식을 가져가던 다니엘 레널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눈만 올려서 팔에 턱을 괴고 있는 닉 클레이튼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그가 조용하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가식은 집어치워, 대니.’
닉도 웃는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자신을 놀리고자 하는 게 고스란히 드러난 짓궂은 표정에 다니엘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는 닉이 장난을 걸어오는 쪽의 다리를 뒤로 뺐다가, 조용하고 날렵한 동작으로 닉이 뒤로 물리려던 발을 꽉 밟았다.
“윽…!”
빙긋 웃고 있던 닉 클레이튼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삼키긴 했지만, 미약하게 터져 나간 짧은 신음에 아버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 닉?”
“으음, 실수로 혀를 씹었어요.”
그는 가까스로 웃으며 대답했다. 저런. 정말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걱정하는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린 닉이 다니엘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나는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다니엘이 아무 일도 없다는 평온한 얼굴로 멈춰 있던 포크를 다시 들 동안, 닉은 그의 구둣발 아래서 자신의 발을 빼냈다. 개자식. 장난을 좀 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받아 주지 않을 줄이야.
계속해서 이어진 만찬은 지루했다. 식사가 대충 마무리 지어지자마자 와인을 들고 오는 아버지를 본 닉 클레이튼이 벌떡 일어나 다니엘의 어깨를 잡고 끌었다.
“와인 한잔 안 할래?”
“취해서 카펫에 토해도 괜찮아요?”
“그건, 고민을 좀 해 봐야겠는데…….”
닉 클레이튼은 아버지의 고민이 끝나기 전, 보다 못한 엠마가 자신의 말투를 지적하기 전에 다니엘을 끌고 계단을 올랐다. 고분고분히 그의 손에 끌려간 다니엘은 문이 닫히자마자 자신을 벽으로 밀어붙이는 닉을 껴안았다.
“이거 놔 봐. 나 지금 널 한 대 때려야겠어.”
“싫어. 그 말을 듣고 놓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어, 니키.”
“제길, 너 진짜 재수 없…….”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던 닉이 말하다 말고 멈칫 굳었다.
밀착한 몸의 아랫부분에 비벼지는 것의 정체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닉은 화내던 것도 잊은 채 실소를 흘렸다.
“왜 세운 건데?”
“왜겠어.”
진짜 모르겠는데. 닉 클레이튼은 다니엘 레널드에게 이상 성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해 봐야만 했다. 욕을 처먹으면 흥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다, 못된 손버릇을 생각했을 때 사디스트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닉이 읏, 하고 나지막한 침음을 흘렸다. 자신을 껴안고 뺨을 비비적거리던 다니엘이 이내 귓불을 잘근잘근 물어 왔기 때문이다. 귓바퀴를 핥다 못해 안까지 파고들려는 행태에 닉이 상체를 뒤로 빼며 물었다.
“하자고?”
“지금은 못 하지.”
다니엘이 녹색 눈동자에 단호함을 담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건 아래층에 부모님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몸짓이었다.
닉 클레이튼이 열기 어린 숨을 내뱉으며 퉁명스럽게 항의했다.
“장난해? 그럴 거면 왜 불을 붙여.”
“…네가 쾌락에 너무 약한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지금 네가 할 소리야?”
그는 다니엘의 아래를 눈짓하며 코웃음 쳤다. 그러나 그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다니엘은 자신의 문제는 아니라는 양 뻔뻔하고 매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널 안고 있게 해 줘. 내일 떠나면 당분간 못 보잖아.”
당당한 요구에 닉 클레이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다니엘은 크리스마스 당일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가기로 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떠날 거란 생각을 하니 왜인지…….
닉은 결국 팔을 벌렸다. 다니엘이 나른하게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힘주어 자신을 안아 오는 연인의 등을 마주 안아 준 닉이 문득 물었다.
“함께 갈까?”
그는 다니엘의 등이 멈칫하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내일이 지나면 한동안 또 못 볼 텐데 그들과 함께 있어.”
웃기시네.
입으로는 어른스러운 말을 꺼내면서 제 옷자락을 꽉 쥐어 오는 것을 느낀 닉이 헛웃음을 삼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게 너무 티가 나는 거 아닌가. 좋아하는 기색을 꾹꾹 눌러 담는 게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다.
“내가 널 보내기 싫어, 멍청아.”
“연휴가 지나면 돌아올 건데….”
“거짓말하지 마. 너 지금 웃고 있지?”
닉이 몸을 떼어 내 다니엘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다니엘이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면서 몰래 소리 죽여 웃는 것이 분명했다! 여우 같은 자식.
“정말 나랑 갈 거야?”
문득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하라며 웃던 제니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닉은 금세 머릿속에서 그녀를 지워 냈다. 그녀와는 이미 수차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 오지 않았나. 한 번 빠지는 것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다.
“그래. 서부는 여기보다 더 따뜻하겠지?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을까?”
“캘리포니아가 아무리 따뜻해도 지금은 12월이야, 니키.”
“영하로 내려가지만 않으면 바다에는 들어갈 수 있어.”
“…….”
다니엘에게서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언뜻 들려온 나지막한 한숨 소리에 닉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입을 열기 전 다니엘이 먼저 선수를 치지 않았더라면, 둘은 또 티격태격하며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 방 침대 위에 선물을 뒀는데, 함께 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면 내일 줄걸.”
“선물? 뭔데?”
“맞혀 봐.”
젠장. 그가 불만을 토해 냈다. 수수께끼를 푸는 건 닉이 제일 못하는 종목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문제를 내는 다니엘 레널드의 심보는 정말 어떻게 된 걸까. 닉 클레이튼은 눈을 찡그린 채 그가 낸 문제를 맞추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잘될 리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를 쓰는 것은 그의 주 분야가 아니었으니까. 분명한 건 단 하나였다.
그것이 다니엘 레널드가 애정을 갈구하는 방식이라는 것. 닉 클레이튼은 그의 방식을 알고 있었지만, 순순히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다니엘에게 그만의 방식이 있다면 제게도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으니까.
닉이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것보다 더 근사한 선물이야?”
“너…….”
머리를 쓰지 않고도 다니엘에게 한 방 먹이는 방법은 차고 넘쳤다. 닉 클레이튼은 아주 재빠르게 그가 던진 의문들 사이를 헤엄쳐 골 지점에 닿았다.
“너는 정말….”
다니엘 레널드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자그마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내가 졌어, 니키.”
그 선언은 패배자가 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행복해하는 것처럼 들려왔으나, 닉은 그 정도는 모르는 척 웃으며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앞으로의 일상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물결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감이 닉 클레이튼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물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밀려드는 물보라 속으로, 그는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