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Quick turn (7/10)

6. Quick turn

「그러면」

「할로윈 파티에 함께 갈래요?」

니콜과 메신저를 주고받던 닉이 마지막으로 온 연락에 잠시 멈칫했다.

다음 주 할로윈 데이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도시고 학교고 가릴 것 없이 들뜬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닉은 할로윈 데이 그 자체보다는 그날 있을 파티를 기대하는 편이었다. 작년에는 제니의 파티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클로이가 파티를 열 예정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으음.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닉이 작은 침음을 흘리며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고민은 짧았다. 끊어짐 없이 연락하던 와중 잠깐의 텀을 두고 할로윈 파티에 함께 가자고 제안을 보내온 메시지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고민했을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좋아.」

그는 흔쾌히 짤막한 답을 보냈다. 그때 소파에 거의 누울 것처럼 비딱하게 앉아 있는 닉의 옆으로 다니엘이 다가왔다. 학교에서 다녀오자마자 씻은 건지 아직 다 마르지 않아 축축한 검은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닉은 자신의 옆에 와 앉은 다니엘의 무릎 위로 털썩 누우며 머리를 올렸다.

저를 쿠션 취급하며 눕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움직이는 니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다니엘이 고개를 떨궜다.

“아, 차가워.”

이마 위로 떠오른 물방울에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인 닉이 핸드폰 든 손을 내렸다. 시선을 올리기도 전에 입술에 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뺨을 간질이는 젖은 머리칼. 춥, 아랫입술을 빨아 들이는 상대에게 순순히 입을 열어 주던 닉 클레이튼은 뒤늦게 손을 들었다.

기습적으로 다가온 상대의 이마로 손을 밀어 넣고 떨쳐 내는 동안에도 그는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가볍게 내려앉았던 입술이 이내 멀찍이 떨어졌다. 닉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수영 대회가 끝난 날 다시금 몸을 섞은 이후로, 다니엘은 침대 밖에서도 곧잘 입을 맞춰 왔다. 이전처럼 단순히 욕구를 풀고자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익숙하지 않은 다정한 침투에 닉 클레이튼은 계속해서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갑자기 왜 키스하는 건데?”

“그러는 넌?”

“내가 뭐.”

다니엘도 그를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먼저 제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운 주제에 키스하자 기겁하는 닉 클레이튼의 인성에 상당한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편히 스킨십하는 저 성격은 자신에게 향할 때나, 남에게 향할 때나 똑같이 짜증스러웠다.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니엘을 향해 닉이 손을 뻗었다.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어, 대니?”

턱을 간질이는 손길에 다니엘이 설핏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거부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향할 때면 아무 의미도 담기지 않은 손짓에 안달하는 스스로가 싫었고, 남에게 향할 때면……. 다니엘이 입가에 냉소를 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손을 들어 닉의 얼굴 위의 곡선 위를 따라 덧그렸다. 손끝이 눈 위를 배회할 때면 반사적으로 찡그려지는 눈과 눈썹 모양조차.

“네가 멍청하다는 생각.”

사랑스러워. 입을 맞추고 싶어.

그러한 눈빛을 하고 있는 주제에 무덤덤하게 내뱉는 말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닉 클레이튼은 그 시선을 받으며 기꺼이 코웃음을 쳤다.

“너 정말 짜증 나.”

“나도 마찬가지야, 니키.”

낮은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닉이 다시 핸드폰을 들자, 니콜에게서 답이 온 메신저 창이 떠올랐다.

「코스튬 맞춰 입어요!!」

그 발랄한 답문에 닉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걸었다. 귀여운 발상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오해의 소지가 많은 장면이 될 게 분명했다.

닉 클레이튼은 이미 매년 할로윈 코스튬을 맞춰 입은 전적이 있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들과.

「의상을 맞춰 입는 건 곤란하지만, 그래. 색 정도는.」

답을 보낸 닉이 문득 떠오른 장면에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과도 할로윈을 보낸 적이 있었다. ‘Trick or Treat’을 하기 위해 그가 보스턴에서 지내는 집으로 찾아갔을 때였다. 할로윈답지 않게 아무런 장식도 없는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연달아 누르자 벌컥 문이 열렸지. 그리고 그곳에는 다소 히스테릭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다니엘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놀래 주고자 분장한 얼굴로 팔을 들고 있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옷깃을 잡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전 할로윈 때, 날 방 안에 가두고 네 연기 연습의 상대역을 시켰던 거 기억해?”

“그래서 결국 너는 내 대본을 찢어 버렸잖아.”

“…그랬나?”

눈을 굴리던 닉이 시선을 돌리며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조각난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 시간이 넘게 다니엘의 요구를 들어주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대본의 양쪽을 잡고 쭉 찢어 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창밖으로 내던지기까지 했다.

황당하단 얼굴을 하고 있는 다니엘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던 닉은 그가 꽉 쥔 주먹을 뻗기 전에 한발 먼저 팔을 뻗었다. 그렇게 다니엘의 팔을 잡고 끌고 나간 닉 클레이튼은 동네의 모든 집을 순회했다.

아역으로 스크린 데뷔를 마쳐 이미 제법 유명했던 다니엘을 끌고 다니는 건 유용했다. 그는 무려 코스튬 없이 단정한 일상복을 입은 채로도 마을에서 가장 많은 캔디를 수거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실 너도 하기 싫었지?”

닉이 그를 보며 제게만 털어 보라는 듯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누운 탓에 앞머리가 흐트러져 매끄러운 이마와 푸른 눈동자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노을이 드리워져 웃는 얼굴에 금가루가 뿌려진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해 씩 웃고 있는 닉을 보며 다니엘도 눈웃음을 지었다.

“응.”

“제길, 그럴 줄 알았어! 그래 놓고 엄마한테는 내가 대본을 찢었다고 고자질했겠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를 갈며 그가 다니엘의 명치에 쿵 머리를 들이박았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한껏 아픈 척 얼굴을 찡그리는 그에게 닉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머리는 돌로 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

이어진 말에는 울컥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부에 탄탄히 근육이 짜여 있어 단단한 벽에 박은 것 같은 제 머리가 더 아픈 게 당연했다.

“이렇게 연기를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를 하고 있는 거야?”

“나한테 연기를 못한다고 말하는 건 네가 유일해, 니키 클레이튼.”

다니엘은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래서 좋아.”

이어진 목소리에 닉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괜히 핸드폰을 보는 척 다시 손을 들어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닉을 알겠다는 듯 다니엘도 쉬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할로윈은 왜?”

“다음 주잖아.”

할로윈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관심 없는 얼굴을 하는 다니엘을 닉이 힐끔거렸다.

“일요일에 파티에 가게 될 것 같아.”

“그럼 그날은 함께 경기를 보지 못하겠네.”

“…….”

추궁하거나 책망하는 말투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닉은 당황한 낯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면서도 다니엘은 모르는 척 그의 손가락을 쥐고 손장난을 치다 물었다.

“해밀턴의 집에서 열리는 거야?”

“음… 아니. 아마도 다른 사람일 텐데, 누구의 파티인지는 나도 아직 몰라.”

그게 무슨 말이지? 다니엘 레널드의 대책 없는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닉이 물었다.

“너는 할로윈에 파티에 가지 않을 거지?”

질문의 끝에는 당연하단 기색이 묻어 있었다. 다니엘이 파티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파티를 싫어할 수 있지?

가끔 닉은 다니엘 레널드와 자신이 어릴 때 바꿔치기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의 완벽한 부모님을 보면, 다니엘의 강박적인 성격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모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머금고 자라난 사람답지 않게 다니엘 레널드는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했고, 예민했으며, 티를 내진 않지만 까칠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사람의 시선과 들이밀어지는 카메라 앞에서 어른스럽게 웃을 수는 있어도, 그걸 즐기지는 못하는 부류였다.

아, 잠시만. 어쩌면 그렇게 꾹꾹 눌러 참았다 내 앞에서만 터트리면서 화풀이를 하는 건가? 진실에 가까운 합리적인 의심이 닉의 머릿속에 싹텄다.

자신을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바다빛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다니엘이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러 가도 되겠어? 이번 네 1쿼터 성적표를 봤는데, 처참하던걸. 특히 화학 성적이 말이야.”

“내 성적표를 왜 봐!”

“저런. 보라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다니엘을 보며 닉이 왈칵 외쳤다.

“네가 우리 엄마냐?”

“그렇지는 않지, 너와 매일 밤 섹스하고 있잖아.”

매일은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닉이 억울한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날들이 확연히 늘기는 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다니엘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지?

닉 클레이튼이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다니엘이 혼잣말처럼 조용한 물음을 꺼냈다.

“네가 간다면, 나도 갈까.”

“장난해? 안 하던 짓 하지 마. 저번 주 네가 경기에 나갔을 때도 파파라치 컷이 올라왔는데, 하이스쿨 파티에나 갔다는 걸 보여 주려고?”

비아냥거림에 곧장 불만스러운 눈빛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무기가 있기는 했다. 닉은 이미 다니엘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오브리가 비명을 지르며 당일 편도 티켓을 끊고 날아올 거야.”

다니엘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약점은 명실상부 그의 부모님이었다. 흠을 보일 수 없다는 그의 강박증은 부모님 앞에 섰을 때 유독 더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확실히 제이콥 레널드와 오브리 레널드는 다니엘에게 엄격한 면이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꾹 입을 다물고 제 머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한 다니엘을 올려다보던 닉이 곧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지상 훈련이 있었던 날이어서인지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했다. 그가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에서 무거운 한숨이 떨어졌으나, 그때쯤에 닉 클레이튼은 이미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 후였다.

***

10월 31일을 기다리지 않는 고등학생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의’에 속하는 다니엘 레널드는 현관 앞에 서서 가장 보내기 싫은 사람을 배웅하는 중이었다.

그는 노란색 와이셔츠에 노란 바지를 입은 닉 클레이튼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전부터 이미 오십 번 정도 눈으로 못마땅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펀지밥 같아.”

“귀엽다는 소리지?”

“별로야. 못생겼어. 갈아입지 그래.”

“그건 안 돼. 노란색을 입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누가?”

뒤늦게 흘러나온 물음에선 약간의 동요가 느껴졌다.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가 호기심보단 비난에 가까워, 닉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굴려야만 했다.

“누구의 파티에 간다고?”

“2학년 여자애.”

다니엘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 가감 없는 비웃음에 닉이 비죽 입을 내밀었다.

클로이가 파티에 오라고 말했을 때는 조금 고민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미 니콜과의 선약이 잡혀 있었다. 어차피 그녀의 파티에는 많은 이들이 들이닥칠 테고 파티야 누가 열든 노는 분위기는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실제로 2학년 때 갔던 파티나 시니어가 된 후 갔던 파티나 닉은 크게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닉은 자신을 노려보듯 주시하는 다니엘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후 몸을 돌렸다. 최근에는 거의 다니엘을 운전기사처럼 쓴지라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은 닉이 익숙한 손길로 시동을 걸었다.

그가 막 출발하기 위해 파킹 브레이크를 푸는 찰나, 유리창을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뭐야?”

창문을 연 닉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니엘을 향해 물었다.

“데려다줄게.”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운전석에서 나와.”

닉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핸들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다니엘이 이내 운전석까지 친절히 열어 주며 나오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푹 한숨을 내쉬며 운전석에서 빠져나왔다.

다니엘 레널드는 내비게이션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신에 한 번 보고 길을 머릿속에 박아 넣은 건지 앞만 보며 운전하기 시작했다. 닉은 그 고요한 얼굴을 힐끔거리며 그가 과연 자신을 멀쩡히 목적지에 데려다줄지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그의 운전은 완벽했다. 차는 처음 보는 주택 앞에서 멈췄고, 닉은 창을 통해 밖까지 화려한 조명이 장식된 집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아플 정도의 성의였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조명을 덕지덕지 붙여 놓을 수가 있지?

“갔다 올게. 먼저 들어가.”

떨떠름하게 흘러나온 인사에도 그에게선 대꾸가 없었다.

“어? 닉!”

내리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고개를 든 닉의 눈에 같은 수영부에 속한 크리스가 들어왔다. 아, 참. 이쪽도 2학년이었나?

별로 관심이 없던 이를 향해 닉이 대충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샘의 파티에 올 줄은 몰랐다며 이를 드러내고 웃던 크리스가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 먼저 들어가면 뒤에 들어오는 난 아무도 안 봐 줄 거고, 형이 내 뒤로 들어오면 직전의 나는 바로 묻히겠지.”

“그럼 함께 들어갈까?”

“그게 가장 최악의 경우야.”

콧잔등을 찌푸린 채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크리스를 보며 닉은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씩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걸친 채 문 앞으로 끌고 갔다.

문 너머에서는 요란한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밑이었다. 파티 장소가 집 안이 아닌 그 옆의 지하실이었던 것이다. 잠시 멈칫하는 닉의 앞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닉!”

발그레한 얼굴로 나타난 니콜은 체크무늬가 들어간 노란 투피스 형태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내 문가에서 기다렸는지 바로 달려 나온 그녀를 보며 닉이 인사했다.

“안녕.”

“들어가요!”

그녀를 따라 셋은 계단을 밟았다. 닉의 모습이 보이자 계단의 아래서 춤추던 이들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꽂혔다. 익숙한 시선 집중에 닉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목덜미가 잡힌 크리스가 옆에서 이럴 줄 알았다며 투덜거려 왔다. 비록 그 목소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혔지만 말이다.

닉이 크리스를 놔주자, 니콜은 그를 붙잡고 안쪽으로 데려갔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별로 서지 않은 구석으로 향하는 둘을 보며 더 소란스럽게 굴었다. 환호성 사이에 간간이 섞인 휘파람 소리까지 들으며 닉은 어색한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조금 곤란한 것 같기도 했다.

“너무 시끄럽죠? 죄송해요. 그, 선배는 인기인이라서….”

“아니, 익숙해서 괜찮아. 내가 좀 인기인이라서.”

우물거리며 꺼내진 사과에 닉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니콜은 그런 닉을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불현듯 웃음을 삼켰다.

인기인이라는 걸 알고 있구나….

그런 것치고는 잘난 척을 잘 안 하는 사람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선배, 그거 알고 있어요?”

“뭐를?”

“저는 홈커밍 파티에서 선배를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음악 아래서도 닉은 놓치지 않고 알아들었다.

노랫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와 뒤섞여 더욱 시끄러워졌다.

“그래? 몰랐어. 마주친 적이 없었나?”

“그냥 제가 멀리서 선배를 본 것뿐이니까요. 홈커밍 파티에 간 누구나 선배만 바라보고 있었다고요.”

네가 나를 보고 있을 줄은 몰랐어. 닉 클레이튼은 주변에 맞춰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에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입 모양을 보고 그가 하는 말을 알아차린 니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넘어간 다음 곡은 쉴 틈 없이 악을 지르는 록 음악이었다. 닉은 평소 그런 노래를 듣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사방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듣는 것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가져왔다. 그건 니콜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을 열다 말고 설핏 미간을 찌푸린다.

닉이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의 귓가를 막았다. 고막을 찌르는 듯한 노랫소리에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 니콜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배는, 정말이지…….”

그녀는 말을 해도 되나 싶은 얼굴로 눈을 굴렸다.

본인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닉 클레이튼의 연애사는 학교 내에서 제법 인기 있는 가십이었다. 지금은 비록 여자 친구가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옆자리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교내에 제법 많았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보스턴의 대표 수영 선수인 것을 넘어, 다른 주에서도 알고 있을 수영 스타였다. 영화배우 같은 외모는 그가 수영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돌아보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처음 고등부에 올라왔을 때 닉의 옆자리를 대놓고 노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옆자리는 이미 한 학년 위의 시니어 여자 선배가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니콜은 하이틴 영화의 장면들을 눈앞에서 그대로 재연하는 것 같은 둘이 몹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헤어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을 때도 니콜은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그 둘이 잘 어울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당일 아침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전 여자 친구가 되어 버린 여자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을 때, 웃는 얼굴로 이마에 입을 맞춰 주던 닉 클레이튼의 다정한 얼굴을.

-니콜! 따끈따끈한 새 소식이 있어.

닉 클레이튼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몇 가지 소문을 더 접하고서였다.

먼저 이별을 고한 것은 여자 쪽이었으며, 이후로도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클레이튼은 쿨하게 승낙했고, 이후 정말로 그렇게 굴었다는 소식을. 사귈 때와 같이 다정하게 굴면서도 사귈 때처럼 선을 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는 누군가 그 여자 선배가 화장실에서 눈물을 닦는 걸 봤다는 소문과 함께 들려왔다.

1학년이었던 자신에게까지 말이다!

“연인이 아닌데도 다정하게 구는 건 잘못이에요.”

노래는 어쿠스틱 선율의 최신 히트곡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던 닉이 들려온 말에 눈을 깜박였다.

“나한테 하는 말이야?”

부담스럽게 굴었나? 그가 짧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나는 그저 너를 존중하는 것뿐인데.”

“…같은 행동도 선배 같은 사람이 하면 상대한테 여지를 주는 게 되는걸요.”

“나 같은 사람이라면, 괜찮은 남자를 말하는 거지?”

시원시원하게 올라가는 입매와 장난스러운 시선은 도무지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 선배가 울었는지 니콜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는 조금쯤은 구제 불능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음… 그런 소리 자주 들어. 네가 불쾌하다면 더 다가가지 않을게.”

“결코! 불쾌한 건 아니에요!”

“그럼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니콜.”

“친구…….”

그녀의 중얼거림에 가만히 지켜보던 닉이 입을 열었다.

“그래, 친구.”

“좋아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테다. 그는 그 점을 쉬이 수긍했다. 그러나 오직 그뿐, 호감 이상의 관심은 아니라고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다니엘 레널드가 채워 놓은 머릿속에는 새로운 사람이 파고들 여유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닉 클레이튼은 그 사실이 무척 우습고 한편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워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다니엘이 제게 구제 불능이라고 했다면, 아마 똑같이 네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말해 줬겠지. 불쾌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면서도 기분 상하지 않은 웃음을 지을 것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하지만 애초에 그에게는 친구가 되자는 말 따위도 내뱉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과 자신이 친구가 된다고? 그보다 우스꽝스러운 소리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1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닉 클레이튼은 다니엘과 친구가 되기에는 옅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다니엘 레널드는 그와 친구가 되기엔 너무나도 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감정이 서로가 가진 색과 무게를 완전히 꺼내 놓게 되는 순간 무슨 색으로 뒤섞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한데, 이만 가야겠어.”

닉이 어설픈 미소를 걸친 채 속삭였다. 두려워도 꺼내어 볼 필요가 있는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한 번도 망설여 본 적이 없었다.

***

호감이 있던 여자애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선을 긋게 만든 원인이 다름 아닌 다니엘 레널드라니. 닉은 그게 우습다고 생각할지언정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시끄러운 음악 아래서도 그의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하면 다니엘은 비웃을까.

-좋아해.

그 고백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고.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그래서 다른 것에는 도저히 신경을 쓸 수 없었다고 말이다.

계단을 올라온 닉 클레이튼을 맞이한 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의 차였다. 시동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안에 여전히 있는 거겠지. 닉은 당황한 낯을 숨기며 가까이 다가갔다.

다니엘은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가만히 듣다가 간간이 입을 열 때는 아주 짧은 대답만을 꺼냈다. 차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통화를 끊으며 닉을 노려보듯 주시했다.

제법 위협적인 시선에 닉 클레이튼은 잠시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이내 너털웃음을 흘리며 창문을 툭툭 두드렸다. 다니엘은 시선은 앞에 고정한 채로 옆의 버튼을 눌러 잠금장치를 풀어 주었다. 닉 클레이튼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네가 먼저 갔을 줄 알았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니엘은 잠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줄 뿐 마땅한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닉이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후 침묵 속에서 출발한 차는 어두운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다니엘 레널드의 표정은 워낙 미동이 없었으므로 생각하는 바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 것만 같아졌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배신자가 된 느낌이었다. 닉은 괜스레 창문을 연 채 차 안으로 쏟아지는 바람을 맞았다.

“노란색 옷을 입어 달라고 요청받은 줄 알았는데….”

차가 솔리저 애비뉴로 접어들었을 때,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닉 클레이튼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다니엘 레널드 또한 그를 힐긋 보았다.

“그게 파트너 요청인 줄은 몰랐네.”

제길. 이어진 말에 닉이 그를 보던 시선을 비스듬히 떼어 냈다. 니콜을 본 것이 분명했다. 방향을 잃은 동공이 옆얼굴의 윤곽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이내 굳게 닫힌 입에 멈추었다.

닉은 다니엘의 성격을 두고 늘 고집이 세다고 평가해 왔지만, 딱딱하게 다물린 턱은 고집이 세다는 느낌보다는 죄책감을 유발했다. 어째서지? 닉 클레이튼은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이 불가사의한 통증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고 싶었다. 유래를 찾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니엘의 특기였는데도 말이다.

생각해 보니,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이 그의 몽블랑 만년필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반 여자아이에게 색이 있는 볼펜 하나를 받았을 때 더 못되게 굴었었다. 미국의 소유권의 개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부터 설명하더니 결국은 선물이 아니라 점유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그녀에게 돌려주는 게 낫겠다는 조언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놈이다. 하도 귀찮게 구는 탓에 별생각 없이 받았던 볼펜을 다시 돌려주자 그다음에는 ‘이건 정당한 증여야.’ 하고 새로운 만년필을 선물해 주지 않나…. 만년필은커녕 평소에는 펜조차 잘 쓰지도 않기 때문에 그건 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파트너로 간 것은 아니었어. 그냥 코스튬 색만 맞췄을 뿐이지.”

닉이 조용히 항변했다. 침묵이 들어설 새도 없이 짧은 되물음이 돌아왔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실소가 섞여 있기는 했으나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물음에 비난은 담겨 있지 않았다.

질문의 형식을 취하곤 있지만, 사실 다니엘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라면 하지 않을 일들을 닉 클레이튼은 아무런 고민 없이 해내고는 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하면 불쾌할 수 있는 일들도 그가 하면 왜인지 문제없이 포용되어지곤 했다.

‘너야말로,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런 대꾸가 튀어나와야 할 차례였으나 조수석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여간, 너는 지나치게 꽉 막힌 구석이 있어.’ 하고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몰아가는 비아냥거림도 없었다.

카바인 스트리트로 진입해, 집에 다다를 때까지 닉 클레이튼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닉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핑핑 돌리고 있었고, 그건 다니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의 회전이 보다 빠르다는 것뿐이었다.

“그 여자애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는 내리지 않은 채 물었다. 안전벨트를 푼 채 나갈 준비를 하던 닉이 다시 등을 차 시트에 붙였다.

“음…….”

부정도 긍정도 없이 흘러나온 나지막한 침음에 다니엘은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알고 있었어,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닉 클레이튼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가라앉은 채 흘러나온 목소리에서 그가 내려놓은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느껴졌다.

“너는 멍청해서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까 말한 것뿐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고백을 했으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어?”

불현듯 신경을 긁어 오는 말에 닉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물음에는 반박할 수 없었지만, 그걸 말하는 다니엘 레널드의 태도에는 반박할 점이 많았다.

그러나 닉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의 여유 없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왜인지 모르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아, 저 표정.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고민했던 것이 잊힐 정도로 다니엘은 그 어느 때보다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때보다도 더.

어둠 속에서도 안광이 도는 녹색 눈동자에는 꾹꾹 눌러 담은 짙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그 순간 단번에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는 울컥 반박하는 대신, 양손을 들어 경직된 다니엘의 뺨을 감쌌다.

“미안해.”

순순히 흘러나온 사과에 야트막이 벌어져 있던 입술이 소리 없이 닫혔다. 제 얼굴 위로 올라온 손바닥이 꾹, 뺨을 누르며 장난을 쳐 왔는데도 다니엘은 뿌리치지 않은 채 다만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비스듬히 시선을 내린 채 누가 봐도 빈정 상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다니엘을 보며 닉이 웃음을 삼켰다. 표정이 딱 삐진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제가 처음으로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펜을 받아 왔을 때와 같은.

어른스러운 낯을 한 꺼풀 벗겨 내니 드러난 속살은 여전히 그때와 같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닉은 다니엘이 내비치는 감정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는 감정의 무게를 재고 따지는 것 대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 다만, 갑작스러운 일이었잖아. 그렇지, 대니?”

그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고, 거침없이 물길을 헤집어 가장 빠르게 골 지점에 닿는 일의 전문가였다. 헤집는 것이 자신의 마음속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나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어.”

“그래, 너에게만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지.”

퉁명스럽게 튀어나온 대꾸에 닉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꼬시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다니엘 레널드의 빈정거림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님을 알았다. 다니엘 레널드가 귀엽게 보이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그가 상체를 완전히 다니엘에게로 돌린 채 그에게로 다가갔다. 할 말이 있는 듯 달싹거리는 입 위로 가까워진 닉이 장난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너한테 물들었나 봐, 대니. 아마 나도 미친 것 같아.”

닿을락 말락 가까워져 있던 입술이 맞닿았다.

***

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거닐던 닉이 캐비닛 앞에 섰다. 기름칠을 하지 않아 삐걱거리는 캐비닛을 연 그는 잡동사니 속에서 1교시에 들고 갈 노트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 옆을 스쳐 가는 이들이 반갑게 인사했지만, 닉은 씩 웃으며 알은척을 할 뿐 평소처럼 실없는 인사말을 꺼내진 않았다. 잔뜩 쉬어 버린 목을 거쳐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나면 모두가 괴상한 표정으로 쳐다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닉 클레이튼은 드물게도 영리하게 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인 다니엘 레널드는 혼자 새벽 조깅도, 웨이트 트레이닝도 모두 마친 채 학교로 자신을 데려다준 이후 사라졌다. 닉은 한숨을 삼키며 어제도 참지 못한 자신의 짧은 인내심을 저주했다. 그는 이 상황을 초래한 또 다른 원인이었다.

어젯밤을 후회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자신의 쾌락에 솔직한 닉 클레이튼은 기꺼이 인정했다.

-너… 많이 늘었네.

-네가 뒤로도 느낄 수 있게 된 거겠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끔찍한 목소리로 짧은 칭찬까지 전하지 않았나. 물론 그 칭찬을 받는 장본인은 덤덤하게 받아쳤지만 말이다.

그 멀쩡하다 못해 활기를 띤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닉은 알 수 없는 억울함을 느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삽입하는 쪽보다 삽입당하는 쪽이 훨씬 육체적인 피로도가 심했다. 계속하다 보면 괜찮아지려나….

훈련량을 늘려서 체력을 더 키울까. 그의 수영 코치가 듣는다면 벌게진 눈으로 환호성을 지를 만한 생각을 하던 닉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닉!”

평소보다 조금 흥분한 얼굴로 달려온 제니가 그의 앞에 섰다.

보통 같으면 용건부터 꺼낼 제니가 자신을 탐색하듯 요모조모 살펴보자 닉이 고개를 기울였다. 별로 입을 열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제니퍼 해밀턴이었다. 자신의 괴상한 목소리를 들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유일한 사람.

주저하던 입술이 슬그머니 열렸다.

“새로운 동작을 성공시켰어?”

그가 물었다.

“아니!”

“지역 치어리딩 대회에서 우승한 건가?”

“아니야!”

그렇다면 그녀를 이렇게까지 들뜨게 만들 것들이 뭐가 있지? 고민하듯 살짝 눈을 찌푸린 채 제니의 표정을 들여다보던 닉이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내려 속닥거렸다.

“라이언이 드디어 고백한 거야?”

“뭐?”

“어제 할로윈이었잖아. 라이언이 파트너 신청을 했을 텐데?”

그녀는 계속 헛다리를 짚는 닉 클레이튼이 못마땅하단 얼굴이었으나, 그가 틀린 물음을 던지진 않았으므로 반박할 말을 찾진 못했다.

실제로 그녀는 어려워서 몇 번이나 실패한 동작을 성공시켰고, 지역 치어리딩 대회의 결승에 나가게 되었으며, 할로윈 파티에서 라이언으로부터 고백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면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또 섬세하고 예리한 구석도 있었다. 그건 어떠한 관찰과 유추를 통해 귀납적으로 도출된 결과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감에 가까웠다.

“그건 맞는데…….”

말꼬리를 흐리던 그녀가 제법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닉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할로윈 파티에 같이 가자고 했잖아.”

“나를 언제까지 네 방패막이로 쓸 생각이야, 제니.”

당당히 자신을 탓하는 제니를 보며 닉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닉 클레이튼은 제니퍼 해밀턴에게 있어 제법 유용한 명분이었다. 다가오는 이들을 쉬이 거절할 수 있는 방패막이. 애초에 닉을 옆에 두고 있으면 용감하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이성에 관심이 없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눈이 매우, 아주 매우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관심은 보통 현실보단 이상에 있었다. 그녀의 취미는 소설 탐독이었다. 특히 로맨스에 치중된.

“니키, 너는 왜 날 좋아하지 않는 거야?”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내가 널…….”

그 말에 잠시 닉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짓궂은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향해 닉이 킥킥거리다가 곧 상처받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내가 어때서.”

무의미한 항변을 꺼내기는 했으나, 닉 스스로도 이유를 알고 있기는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건 다니엘을 알기도 더 전이었다. 그 세월 동안 둘은 서로에게 가장 솔직했다. 그러니 따지자면 이성보다는 가족에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제니 해밀턴은 이따금 이렇게 자신에게 수수께끼를 내듯이 굴곤 했는데, 그건 그녀가 자신에게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내가 뭘 알고 있는 게 있나? 닉이 의문을 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쓰고 있던 글에 대해, 앤디인지 앤더슨인지 하는 사람에게서 답을 받은 거야?”

“아니야! 음, 그리고 그 글은 아직 보내지 못했어. 뉴욕대에 가서 직접 보이고 감상을 받을 거야.”

“아하. 행운을 빌어.”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만큼 단순한 성격은 제니 해밀턴이 닉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는 점이었다. 그는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재고 따지는 일도 일절 없었다.

평소에는 그의 그러한 점을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정말 왜 그러는 건데?”

“정말 모르는 거야?”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닉을 보며 제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학교 안에선 그녀는 닉 클레이튼이 다니엘 레널드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노아 웨슬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그는 중등부 시절 닉과 다니엘이 줄곧 붙어 다녔던 것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약 닉에게 다니엘에 관해 묻는다면 그는 시큰둥한 반응이나 아니면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일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말이다. 그걸 예상하면서도 묻는 것은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다니엘 레널드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닉 클레이튼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서 닉에게 화면을 들이밀어 보여 주었다. 수두룩하게 뜬 기사들의 향연을 보며 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연예 뉴스란에서는 전부 다니엘의 가십뿐이야.”

“왜? 무슨 일인데?”

그러나 그는 제니의 생각과는 다소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다.

닉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제법 궁금해하는 듯했다. 기사의 보도 제목만 봐서는 쉬이 가십이 뭔지 알아채기 어려운지, 되묻는 닉을 향해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하고 그녀가 작게 혀를 찼다.

“어제 타마라 신곡이 공개됐잖아.”

“그래?”

그는 대꾸하면서 괜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어제 어떤 신곡이 나왔는지 닉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할로윈도 뒤로한 채 다니엘 레널드와 밤새 침대 위를 뒹굴었는데, 유튜브에서 가수의 신곡이나 찾아볼 시간이 있었을 리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닉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대체 그녀의 신곡도 듣지 않고 뭐 한 거지? 제니는 타마라의 신곡에 관심이 없다는 듯 따분한 낯으로 서 있는 닉을 외계 생물 보듯 바라보았다.

“가사에 전 남자 친구와 찍은 섹스 테이프가 언급됐거든.”

닉 클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맙소사.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손을 뻗어 닉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와 직전에 스캔들이 났던 상대가 다니엘이잖아, 닉!”

그 외침에 닉이 멈칫 굳었다.

다니엘과 타마라가 스캔들이 났던 건 알고 있었다. 하도 떠들썩하게 둘을 엮어 대서 SNS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었으니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잠시만, 그러니까 다니엘이 그녀와 섹스 테이프를 찍었다고?”

이번에 멈칫한 사람은 제니였다. 그녀가 곧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눈을 굴리며 닉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 지금 다니엘이라고 부른 건가? 닉이 언제부터 그를 저렇게 불렀지?

평소 닉이 다니엘에게 늘 퉁명스러운 태도를 고수해 왔음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여전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 근데 타마라랑 스캔들이 났을 때 다니엘은 아직 생일이 지나기 전이었잖아.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기 전이었으니까 문제가 된 거지.”

성인이 되기 전이라서?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성인이 되기 전의 어린애와 관계를 갖는 영상이 있다는 걸 말한 쪽이 제정신이 아닌 것 아닌가? 비록 작년의 다니엘 레널드가 ‘어린애’라고 말하기에는 부적합한 외관을 갖고 있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얼빠진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던 닉이 실소를 흘렸다. 성인이 되기 전에 첫 경험을 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문제는 나이보다도 그가 다니엘 레널드였기 때문이겠지.

다니엘 레널드는 9살에 아역 데뷔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지라시 거리를 던져 준 적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널드의 성을 달고 태어나자마자 모든 매체에 대서특필된 삶을 살면서도 한 번도 파파라치에게 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번 건은 할리우드의 완벽한 왕자님 타이틀에 흠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직 그녀 쪽에서 공식 입장은 내지 않았는데, 사람들 반응은 저격한 상대가 다니엘일 거라고 추리하고 있어.”

“그래…….”

“지금 다른 애들도 다 다니엘의 가십에 대해 떠드는 중일걸?”

그녀의 말에 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모인 이들이 약간의 흥분기가 도는 얼굴로 수다를 떠는 것이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학교에 들어올 때부터 평소보다 열렬한 시선을 받았던 것 같긴 했다.

유독 들뜬 것 같은 학교의 분위기가 그래서였던 건가. 몸에 쌓인 피로 때문에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닉이 그제야 뭔가를 알아챈 듯 탄식을 흘렸다.

“고작 그거 갖고 다들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거야?”

“고작이라니! 루머의 주인공이 바로 그 다니엘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지.”

제니가 발뒤꿈치를 들어 가며 반박했다. 고동색 머리칼이 어깨 부근에서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그 움직임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릿하게 닉의 눈으로 들어왔다. 단지 시야만이 아니었다.

그래, 고작이 아니었다. 루머의 주인공이 바로 다니엘이었으니까.

닉 클레이튼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다니엘이 가끔 꺼내어 보던 아주 오래된 흑백 영화 속에 빠진 것처럼, 세계는 삐걱거렸고 음성은 뚝뚝 끊겼다.

“닉?”

자신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그가 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믿기지가 않네.”

닉 클레이튼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정말 섹스 테이프가…… 그래, 있을 수 있다.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허공을 배회하던 푸른 눈동자가 이내 손에 든 핸드폰으로 향했다. 잠금 화면을 풀어 메신저 어플에 들어가 봤지만, 도착해 있는 연락은 없었다.

충격적인 것은 오직 다니엘이 그런 영상을 남겼다는 사실뿐이었다. 왜 그랬지? 그 자식, 사랑에 미쳐서 눈이 돌아가기라도 했던 건가? 제게 하는 꼴을 보면 그것도 그럴 만했다. 아니면 혹시 마약이라도 했던 거 아니야? 약을 할 만한 놈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드물게 작동되는 닉 클레이튼의 합리적 의심은 오로지 다니엘 레널드의 섹스 테이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다니엘 레널드는 결단코 자신의 명성에 흠집을 낼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영상을 남겼다는 뜻밖의 사실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라면 고작 스토커가 붙었다는 이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라시였다.

“그의 테이프가 유출되길 내심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을걸.”

“그건 범죄야, 제니.”

“알고 있어.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어, 그냥 그럴 거란 얘기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가벼웠으나 표정은 사뭇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제니가 자신의 말을 주워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인지 아닌지 너도 몰라, 닉?”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가.”

그가 혼잣말하듯 대꾸했다. 루머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미 다니엘이 이러한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이 문제였지. 하여간에, 누가 할리우드 스타 아니랄까 봐 평소에는 얌전한 척 굴어 온 주제에 예상하지 못한 순간 할리우드스러운 사고를 친다.

아니지.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다니엘 레널드는 최소한 기삿거리가 날 만큼의 사고를 친 전적은 없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닉 클레이튼은 문득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며 손을 들어 입가를 쓸었다. 이상하게 다니엘이 돌아온 이후 소란스러운 일이 많이 터지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착각이라기에 그는 하이스쿨 생활을 통틀어 가장 요란한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도 시니어가 되고 한 학기도 채 마치지 못한 기간 동안에.

동시에 다니엘 레널드 또한 그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요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오브리가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는데.”

한 번도 엇나간 적 없던 아들의 파격적인 행보에 기겁하고 있을 오브리가 눈에 선했다. 오, 신이시여.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린 가느다란 떨림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온화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성격도 그러한 사람은 아니었다. 늘 부드럽게 웃는 낯을 한 그녀가 얼마나 냉철한지를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들은 이미 할리우드에 넘쳐 났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닉이 핸드폰을 들었다. 여전히 그에게서 와 있는 연락은 없었다.

망할 다니엘 레널드! 꼭 이럴 때만 연락이 없지. 학교에 데려다줄 때쯤에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었겠다….

눈가에 꾹 힘을 준 탓에 닉의 눈썹이 아래로 휘었다. 왜인지 못마땅해져서는 핸드폰을 노려보던 닉이 결국 손을 움직였다.

「야」

「괜찮아?」

짤막하게 보낸 메시지에 답은 평소처럼 빠르게 도착하지 않았다. 답이 도착하기 전에 수업이 시작되는 종소리가 한발 먼저 울려 퍼졌으므로, 닉은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는 수밖에는 없었다.

원래부터 수업에 곧잘 집중하는 모범생은 아니었으나, 오늘 그의 집중력은 끔찍할 지경이었다. 화학 수업에서도 몇 번 교사의 경고 어린 눈빛을 받았던 그는 결국 이어진 영미문학 수업이 끝난 후 에바에게 붙잡히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니?”

그녀가 친절하게 물어 왔다. 닉이 그 물음에 멈칫했다. 그녀는 다니엘이 전학 온 첫날에 자신에게 이미 스쿨 투어를 시킨 역사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에바의 물음이 구하고자 하는 정해진 답이 있음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두터운 안경알 너머로 탐색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연갈색 눈동자. 그 시선을 마주한 닉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하고 순순히 내뱉는 대답이 제법 차분했다.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수업을 마치는 종이 두 번이나 더 울린 이후였다.

「들었어?」

제가 물은 것에 대한 대답 없이 대뜸 들었냐고 되물어 온다. 닉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 어디야?」

보내는 메시지 또한 상대의 물음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아니었다. 다니엘은 애초에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는지 고분고분하게 물음에 답해 왔다.

「일이 생겨서 먼저 집에 왔어.」

「차는 늘 세우는 곳에 뒀고, 키는 하디에게 맡겨 놨으니 오늘만 훈련 끝나고 혼자 집으로 와.」

답장은 지극히 평소와 같았다. 닉은 담담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익숙한 기분까지 느껴야 했다. 왜 이렇게 멀쩡해 보이지?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든 유명 인사는 자신의 가십을 모르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본인이 괜찮다면 자신이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닉 클레이튼은 메시지에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문득 허기가 밀려왔다. 그가 멀뚱히 서 있는 제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환경 보호 캠페인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카페테리아는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했고, 그 소란 속에서 테이블에 앉은 닉이 앞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대충 끼어들었다.

“팸플릿은 거의 완성됐고, 배지는 아직도 구상 중이야.”

아비가일이 말을 잇다 말고 살며시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걔는 아무리 그래도, 맡은 바에 대한 책임은 다해야 하는 거 아니야?”

동아리를 함께하던 한 학년 아래의 여자애와 가졌던 데이트가 순조롭게 끝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닉은 대충 호응하며 포크를 들었다.

그는 친구들과 시도 때도 없이 대화를 나누는 편은 아니었으나, 뭐라도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오전 내내 모든 대화의 중심에 서 있던 다니엘 레널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던 건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의 이름 때문이리라 닉은 확신했다.

모든 학년이 모이는 점심시간의 카페테리아는 그런 닉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장소였다. 예상한 그대로 남자애들끼리 모인 옆 테이블에서는 다니엘의 가십을 토대로 한 음담패설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십 대 남자애들이라면 무릇 그러하듯이.

“그런 저질스러운 말을 하기에는 나이를 제법 많이 먹지 않았어?”

다른 무리의 대화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제니조차 귀에 걸려 있던 헤드폰을 내린 채 옆 테이블을 째려봤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다니엘은 괜찮대?”

이윽고 고개를 돌린 그녀가 닉을 향해 물었다. 당연하게도 닉은 그녀에게 충분한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런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닉을 향해 제니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너희 둘이 가장 친하잖아.”

“…친한가?”

그녀의 말에 닉 클레이튼이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다니엘과 자신이 친하든 아니든 그로서는 정말이지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숱한 의문과 걱정의 종지부를 찍어 줄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지도, 안심이 될 만한 연락을 해 오지도 않았으니까. 따지고 보니 다소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온 이후 매번 눈앞에서 어슬렁거려 놓고 이럴 때는! 닉은 입을 열어 불만을 토해 내는 대신, 평소보단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포크를 들어 감자튀김을 무자비하게 짓뭉갰다.

“닉, 이거. 다니엘이 전해 달래.”

아하. 그러고 보니 문자로, 차 키를 라이언에게 맡겨 놨다고 했었지. 닉이 라이언이 건네는 차 키를 건네받아 바지 뒷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으며 물었다.

“너 그 자식을 만났어?”

“어? 응.”

왜? 입을 열어 물은 것은 아니었으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이 라이언에게 정확히 꽂혀 들었던 것이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도 그 말에 모두 라이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순식간에 자신에게로 집중된 눈들을 보며 소심한 곰은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야 같이 풋볼을 하고 있으니까….”

이 와중에 오전에는 한가하게 운동을 했다고? 닉이 자신도 모르게 설핏 찡그려진 얼굴로 입을 벌렸다. 미친 거 아니야? 아무래도 실성해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SNS에 다니엘이 학교에서 나가는 사진이 올라왔어.”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올렸을 때, 멀뚱히 라이언을 주시하던 닉도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보이는 화면 속에는 분명히 학교 앞에서 차에 올라타고 있는 다니엘 레널드가 있었다. 그건 분명히 다니엘이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사진 속에서도 훤칠한 태와 여느 때처럼 단정한 얼굴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올라타고 있는 차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차 키는 자신에게 주고, 다니엘은 누구의 차를 타고 간 거지? 혹시 그의 부모님이 보낸 건가? 그렇다면 상황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터였다. 다니엘이 자신의 부모 앞에서 얼마나 어른스러운 아이 흉내를 내는지, 그의 부모가 그에게 얼마나 엄격한지를 따져 본다면 말이다.

신경 끄자.

닉 클레이튼이 주문을 걸듯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다니엘은 잘 지내고 있을 게 분명해.

그러니 괜한 신경 꺼, 닉 클레이튼.

“닉, 뭐 하는 거야? 얼른 받아.”

“…아. 미안.”

방금까지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교실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닉은 어서 받으라는 듯 팔락거리고 있는 페이퍼를 건네받으면서도 도무지 오후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근데 정말 괜찮을까? 그는 다니엘이 자신과는 다르게 아주아주 예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닉은 자신에 관해 그런 기사가 나도, 잠시 모친의 위협적인 시선이 떠올라 움찔할 뿐 크게 고민하지 않을 스스로를 알았다. 혹은 그렇게 순식간에 각종 SNS와 웹 사이트를 점령한 자신에 대한 루머를 보며 친구들과 함께 낄낄거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다니엘은 그러한 성격이 아니었다.

“아, 맙소사…….”

조금의 과장을 보태 대략 100번 정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던 그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금 다니엘 레널드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제 이마를 짚은 채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던 닉은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을 챙겨 들었다. 수업이 끝나도 훈련이 남아 있었으나, 그는 다니엘이 있을 집으로 향했다.

***

닉 클레이튼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집 앞에 세워져 있는 낯선 차를 발견했다. 낯선 차였지만, 처음 보는 차는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봤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찍힌 사진. 파파라치처럼 무단으로 그의 모습을 찍어 올린 누군가의 사진에 등장한 차였다. 한동안 검은 세단을 내려다보던 닉의 고개를 들게 만든 것은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제게도 원하는 곳에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있어요, 에블린.”

“알아! 하지만 네가 이곳에 있는 게 너한테 좋지 않다는 소리야!”

“그걸 누가 정하는 건데요?”

이와 비슷한 공방이 이어졌던 것인지, 다니엘 레널드는 제법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베이지색 슈트를 차려입은 여성은 오히려 그의 그러한 태도가 더 답답하다는 듯 쏘아붙이다가, 달래다가, 설득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그녀의 이름을 에블린이라고 부른 것 같았다. 어쩐지 들어 본 것도 같았으나,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은 이름이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퍼붓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닉은, 문득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휘둥그레 떠지는 눈은 선명한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것보단 조금 더 연한 빛의 눈을 마주한 닉이 반사적으로 웃는 낯을 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갑작스럽게 그녀가 부르는 풀 네임에 웃고 있던 닉이 흠칫했다. 그녀의 부름에 비스듬한 시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다니엘 또한 번쩍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낯선 여인의 부름보다 닉을 더 긴장시킨 것은, 미미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니엘이었다. 괜스레 목을 가다듬은 닉이 그들에게 향했다. 다니엘과 대치하듯 서 있던 여자 또한 닉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맞죠? 주니어 수영 국가 대표!”

손가락을 튕기며 자신을 가리키는 그녀의 태도에 닉이 눈썹을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는 동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다니엘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고 차가 세워진 쪽으로 몸을 틀게 만들었다.

“일단 돌아가요.”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자신의 클러치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닉에게 내밀었다. 평소라면 예의상으로라도 받았을 닉이었으나,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상황이 마땅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버럭 내지를 듯 꾹 눌러 참고 있는 다니엘의 표정이 걸렸던 것이다.

“아직 에이전시에 들어가지 않은 거로 아는데, 관심 있으면 연락 줘요.”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저와의 계약 파기를 고려하게 될 것 같은데요, 에블린.”

“…알았어. 알았다고. 대신, 오늘 내로 다시 연락 줘. 오브리에게 전해야 하니까.”

에블린은 닉 대신 다니엘의 손에 자신의 명함을 쥐여 주더니,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닉은 그녀의 입에서 친근하게 흘러나온 오브리의 이름에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에이전시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가 속한 기획사의 사람인가?

시동이 걸리고, 검은 세단은 매끄럽게 후진하다가 이내 집 앞을 떠났다. 멀어지는 차의 꽁지를 바라보던 닉이 고개를 틀었다. 다니엘은 조금 화가 난 얼굴로 이마를 짚고 서 있었다.

“누구야?”

“매니저. 그녀에게서 관심 꺼, 니콜라스 클레이튼.”

“……딱히 관심 가지지 않았어.”

너는 내가 뭐 여자만 보면 다 좋다고 쫓아다니는 줄 알아? 항변할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닉은 꾹 눌러 참고 대답했다. 확실히 에블린의 외관은 언뜻 자신의 취향과 겹치는 모습이 군데군데 있었으므로.

다니엘은 몸을 돌려 현관을 향해 고갯짓했다. 일단 들어가자는 눈빛에 닉도 그를 따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이 닫히자마자 다니엘이 우뚝 멈춘 채 몸을 돌린 탓에, 닉도 안으로 들어오다 말고 문에 등을 댄 채 멈춰 서야만 했다.

“훈련 안 하고 돌아온 거야? 왜?”

“왜긴….”

네가 걱정되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닉은 조금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전교생이 너에 대한 가십을 떠들고 있어. 그래서… 혹시 네가 안 좋은 마음을 먹고 수영장에 빠져 죽으려고 할지도 모르잖아.”

다니엘은 그 빈정거림에 짧게 실소했다.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닉 클레이튼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단 한 점의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네 성격에 섹스 테이프를 남겨 둔 자신을 쉽게 용서해 줄 리도 없고.”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듯 가만히 닉을 바라보던 다니엘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니콜라스 클레이튼. 너는 내가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영상을 남겨 놨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그럴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빌어먹을, 그런 건 없어. 너 아닌 다른 사람과는 한 적도 없다고!”

그 말에 닉 클레이튼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들은 말을 곰곰이 곱씹고 있는 모양인지,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해가 잘 안 돼.”

“어떤 부분이?”

“나 외의 사람과 한 적이 없다는 건, 그러니까 동성과 이성을 통틀어서 말하는 거야?”

다니엘 레널드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한심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처음이었다고? 다니엘 레널드, 젠장,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정말 나랑 한 게 네 인생에서 처음 한 섹스야?”

그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다니엘을 바라보던 닉이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며 외쳤다. 다니엘 레널드와 함께 스캔들이 났던 연예인들의 리스트가 그의 머릿속에서 줄줄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타마라와도 연애설이 터졌으면서 섹스는 안 했다고? 그 타마라랑?”

“…내 스캔들까지 챙겨 봐 줬다니 고마운데.”

그는 헛웃음을 삼키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스캔들이 나기는 했지만, 그녀와 교제한 적은 없어. 그쪽에서 사실을 정정하는 보도를 내기로 했어. 논란은 곧 사그라들 거고, 도가 지나친 오보에는 법적으로 대응할 거야.”

이미 모든 것이 결정이 난 듯 그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그 나긋하고 조곤한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닉 클레이튼은 이윽고 두 번째 의문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아까 그 여자는 왜 온 거야?”

닉이 물었다. 그러나 그는 다니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숨을 고르고 보다 신중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너를 캘리포니아로 데려가기 위해서?”

닉 클레이튼은 다니엘이 보스턴으로 돌아온 이후 유난히 평온하지 못한 일상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 또한 다니엘이 돌아왔을 때, 일상의 변화를 한차례 겪게 되리라는 불안감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닉은 제 앞에 주어졌던 고난 정도는 다가오는 파도를 가로지르듯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그는 자신이 다니엘을 잡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불충분했고, 어쩌면 이기적으로 보일 태도라는 것도 알았다.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거야, 다니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 클레이튼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정해진 건 아니야. 에블린은 그런 제안을 하러 왔을 뿐이고.”

“갈 거야?”

“그건…….”

대답하고자 열렸던 입이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다시 다물렸다. 자신의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그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건 그저 감에 불과했고, 지나치게 애가 탄 나머지 정신이 나가 하는 헛된 기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못마땅하다는 시선을 보면서 모순적으로 몇 년 전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중등부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 전날 밤, 닉의 방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을 때.

그는 창가 앞의 카우치에 앉아 있었으나, 창밖을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다니엘은 어둠이 내려앉아 방 안이 고스란히 비치는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창에 비치는 닉 클레이튼을.

-눈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어.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다. 째깍거리며 초침을 움직이는 시계가 살면서 그토록 야속했던 적이 있었을까.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원을 알 길 없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갈 뿐이었다.

자신의 중얼거림에 그가 했던 대답까지, 다니엘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멍청아, 그럼 비행기 못 뜨잖아.

멍청이는 너야. 다니엘은 눈치라곤 전혀 없는 그를 비웃어 주고 싶었으나, 도무지 웃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비웃는 얼굴이 늘 그렇듯 지나치게 얄밉고, 지나치게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저 얼굴.

아. 고민하는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저 얼굴만이 다니엘의 놓을 수 없는 긴장을 풀게 만들었다. 양쪽 뺨에 핀 보조개에 입을 맞추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던 그는 다만 그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는 걸 닉 클레이튼은 아마 영영 알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떠나든 말든 그렇게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웃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다니엘은 그걸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

알고 있었으므로, 닉의 고집스러운 바다빛의 눈동자를 마주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니키,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 분명히, 충동적인 일이었어. 인정해. 하지만 너를 좋아한 것은 전혀 충동적인 일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내가 선택한 일도 아니었지만.”

닉 클레이튼은 그때와는 다르게 자신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동요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말이다.

“나는 단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내가 뭘 포기했을지 너도 한 번쯤은 생각해 줄 수 있잖아. 네가 책임질 감정은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이렇게 구는 게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면.”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으나 한 마디 한 마디에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 말들이 닉의 가슴께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다니엘은 그를 보며 어르듯 재촉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닉이 팽팽하게 쥐고 있는 줄을 계속해서 느슨하게 만들었다.

“니키. 이런 어설픈 짓은 그만두자. 어서 내가 원하는 말을 꺼내 봐.”

“…그래,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닉 클레이튼은 또 한 번의 선을 넘어야만 했다. 다니엘이 먼저 성큼 나아가 있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다니엘 레널드와 닉 클레이튼은 아주 훌륭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쌍이었다.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둘 중 한쪽만 선을 넘는 법은 없다.

“왜? 내가 왜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젠장, 넌 진짜 못됐어. 알아? 널 왕자님인 줄 아는 여자애들이 네 이런 모습을 봐야 한다고.”

웃고 있던 얼굴은 그 말에 단번에 굳었다. 조금 신경질적인 기색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은 끼워 넣지 마.” 하고 냉소적으로 말하던 그는 이내 다시 표정을 풀었다. 순식간에 여러 번 바뀌는 표정을 닉은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잖아. 내가 왜 가지 않았으면 좋겠냐고 물었지.”

끈질기게 이어진 물음에 닉 클레이튼은 결국 한숨을 삼켰다.

그는 속으로 두 손을 들다 못해 백기를 들었다. 슬그머니 눈치만 보던 마음이 이내 항복 선언을 하고 나섰다. 더 자존심을 내세우며 신경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상대는 이미 진작에 백기를 꺼내 들고 제 앞에 나선 전적이 있었으므로.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이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곧잘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마치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본 것처럼. ‘너는 감정이 얼굴에 전부 드러나서 알기 쉬워.’ 그렇게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꼭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끔 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면서.

“왜냐하면…….”

다니엘의 그런 성격은 정말 못됐다고 생각한다. 그의 못된 점은 한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말이다.

“널 좋아하니까.”

한숨 같은 고백이 내뱉어졌다. 짓씹듯 꺼낸 말에 상대의 얼굴에 떠오른 기쁨의 빛을 목도한 순간, 닉 클레이튼은 더 이상 불평할 수 없어졌다.

그는 그 순간 자신들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를 떠올렸다. 눈앞에서 다니엘 레널드가 그렇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닉 클레이튼은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문학적으로 묘사할 능력은 없었다.

따라서 수영으로 비유하자면, 그의 미소는 마치 올림픽에 나가 1500미터의 코스에서 가장 먼저 도착해 벽면을 터치한 선수처럼 들떠 있었다. 만족스러움 이상의 감정에 휩쓸린 사람의 웃음이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멍청아.

그가 내뱉었던 장난 같은 고백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사실 닉은 그 고백을 몇 번이고 장난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웃기지 마, 멍청아. 정신이 나간 거 아냐?’ 그렇게 낄낄거리며 다니엘의 마음을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 고백을 모른 체하지 못한 순간부터 다니엘 레널드에게 졌던 건지도 모른다. 이미 예정된 패배를 향해 도미노를 세워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에 주르륵 무너질 결과가 정해진.

마음을 내보인 순간 닉을 사로잡은 것은 강렬한 패배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닉은 다니엘의 얼굴 위로 떠오른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소를 보며 저릿한 손끝을 쥐락펴락해야만 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이르게 말해 줄 걸 그랬노라는 후회까지 들 지경이었다.

“다시… 말해 줘.”

제대로 들었으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느라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닉이 헛웃음을 삼켰다.

조금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는 순순히 다니엘이 기다리는 대답을 꺼내 줬다. 한번 내뱉은 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가지 말란 소리야, 멍청아.”

유쾌한 음성이 다니엘의 얼굴에 걸려 있던 마지막 의심 한 조각을 걷어 냈다. 몸에서 힘을 풀며 설핏 고개를 내린 그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입가에 가져갔다. 가려진 입에서 하, 하고 깊은 숨이 토해졌다.

제길. 귀엽잖아. 닉 클레이튼이 손을 들어 다니엘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물었다.

“이게 네가 원하는 답이야?”

“그래.”

아직 입가에 닿아 있는 손을 내리지 않은 채로 다니엘이 시선을 올려 닉을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둘의 사이에 맴돌았다.

둘은 아직도 현관에 서 있었고, 오직 둘만 있는 집 안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이윽고 닉이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아래로 떨어지며 툭, 하고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닉 클레이튼이 머리칼을 헤집던 손을 내려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듯 잡자, 가까이 몸을 기울인 다니엘이 닉의 어깨를 잡고 그에게 키스했다.

쿵! 안 그래도 문에 등을 대고 있던 닉은 밀어붙이듯 입 안을 파고드는 다니엘에 의해 문에 머리를 박았다. 다가온 입술을 핥다 말고 윽, 하고 흘린 짧은 닉의 신음에 다니엘이 멈칫했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위치에서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다 말고 시선을 내린 다니엘은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왜인지 간질거렸다. 남은 팔을 뻗어 다니엘의 허리를 끌어안듯 당겨 몸을 밀착시킨 닉 클레이튼이 고개를 틀었다.

자신의 입술을 삼킬 듯한 몸짓에 응하던 다니엘 레널드는 아래로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탁, 문을 짚은 그가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입술을 빨아 댔다. 혀로 입 안을 훑던 닉이 얽히는 다리 사이로 난리가 난 중심부를 느꼈다.

다니엘이고 자신이고 둘 다 정상이 아니었다. 키스 한 번에 이러는 걸 보면, 분명히.

“하아….”

입술이 떨어지고 조용히 숨을 고르던 닉이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못 해.”

다니엘은 듣고 있지 않았다. 쭙, 아랫입술을 빨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제법 야했다. 닉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울렁거렸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할 수 없었다. 어제 밤새 뒹군 여파가 아직도 허리를 뻐근하게 만들고 있지 않았나. 결국, 그는 손톱을 세워 다니엘의 목덜미를 어르듯 툭툭 쳤다. 잠시 멈추라는 제재의 의미가 함축된 손짓에 다니엘이 언뜻 억울하단 얼굴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자고 말하지 않았어, 니키 클레이튼.”

목을 긁으며 튀어나온 항변에 닉이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주제에.”

“내 옷 안으로 손을 넣은 변태는 누구였지, 그럼?”

“변태라니. 키스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닉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동시에 다니엘의 셔츠 안으로 들어가 있던 손가락이 그의 허리를 살살 긁었다. 놀리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해 보이는 손길에 다니엘이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너…….”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던 왕자님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숙였던 상체를 바로 했다. 순식간에 떨어지는 몸을 보며 닉 클레이튼은 허전함을 느끼기도 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났나? 가볍게 장난친 거였는데, 다니엘은 왜인지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 겨울 숲을 연상시키는 녹색 눈동자에 어리는 단호함에 닉 클레이튼이 반사적으로 어설프게 눈웃음쳤다.

이 새끼는 또 뭐가 문제지? 하마터면 떠오른 물음을 또 머리를 거치지 않은 채 뱉어 낼 뻔했다.

“하나 말해 둘 것이 있는데, 니키. 너는 아무나와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곧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황당해진 닉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건 어쩐지 익숙한 오해였다. 이전에 이미 들었던 것 같은 말에 눈을 굴리던 그가 곧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잠시만, 왜 다들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나라고 아무나와 자는 건 아니라고.”

“그럼 너는 처음부터 나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닉 클레이튼은 그 말에 파도에 잘못 휩쓸려 온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처음을 따지자면, 그래. 상대가 다니엘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성욕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도발해 오는 상대의 들끓는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 상대가 다니엘 레널드였으니까. 닉 클레이튼에게 결코 질 수 없는 상대가 있다면, 오직 그뿐이었다. 다니엘은 침묵에서 대답을 읽었다는 듯 잇새로 말을 뱉었다.

“섹스가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가 나이기 때문에 네가 욕망했으면 좋겠어.”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무슨 섹스에 환장해서 아무나와 자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다. 빠득 이를 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지금 너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오직 나에게만.”

그 말에 닉이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나는 언젠가 너와 꼭 결혼할 거야.”

진지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결혼? 맙소사,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그 이전에 내 의사는 묻지 않는 건가?

그의 선언은 지나치게 불친절해서, 모자란 자신의 머리로도 수많은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그에게는 다니엘 레널드와 결혼할 계획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그는 제게 어떠한 의사도 물어보기 전이었다.

입을 벙긋거리던 닉은 마주 본 눈동자에 강렬한 의지가 깃든 것을 발견하곤 반박할 의지를 잃고 말았다.

“…야,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다른 사람한테 한눈파는 것도, 다른 사람과 자는 것도 전부 안 돼.”

“연인을 보는 거라기엔 지나치게 위협적인 눈빛 같아, 대니.”

사람 한 명 죽일 것 같은데.

닉 클레이튼은 문득 제시와 키스했다고 자신을 계단에서 밀어 버렸던 다니엘 레널드를 떠올리고는 쭈뼛거리며 몸을 세웠다. 그러고 보니 이 불량한 왕자님께서는 자신을 이미 죽이려고 든 적이 있었다.

갑작스레 되살아난 기억에 닉이 그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에 힘을 줘 옆구리를 꽉 쥐었다. 그것조차 간지럽다는 듯 움찔거린 다니엘이 왜 그러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짜증 나. 아무래도 잘못 걸린 거 같은 예감이 들어.”

“나한테?”

당연한 걸 묻고 있다. 닉 클레이튼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선선히 동의했다.

“맞는 말이야…. 처음부터 널 놓아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처음 봤을 때?”

닉이 눈을 휘며 웃는 다니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자신들의 첫 만남은 그야말로 최악이지 않았나. 그는 불신의 눈으로 다니엘 레널드가 혹시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때 네가 내게 주먹을 날렸던 거 기억하고 있는 거지? 나 그때 피도 났는데.”

“그래. 아마 네가 주저앉아서 날 멍청하게 올려다볼 때 반했던 것 같아.”

“뭐 이런…….”

가학적 성향의 소시오패스가 다 있어. 내뱉지 않은 말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니엘 레널드는 그 얼굴을 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상체를 접으며 키들키들 웃음을 흘려 댔다.

닉은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웃는 다니엘 레널드를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팔을 들어 눈앞에 보이는 다니엘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아직 제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돌아갈 거야, 안 갈 거야?”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다니엘이 움찔거렸다. 그를 끌어안은 팔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들썩이는 어깨를 보며 닉 클레이튼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갈 거냐고. 대니, 날 두고 갈 거야? 어?”

급기야 추궁하기 시작한 닉을 향해 다니엘은 숨죽여 웃던 것을 포기한 채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닉이 거의 그의 목을 조르듯 팔에 힘을 주자, 한참을 웃던 그가 결국에는 항복 선언을 하며 속삭였다.

“가지 않을 거야.”

그는 가볍게 키스하듯 뺨 위로 속살거렸다.

“너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다니엘은 신경질적인 물음에도 싱그럽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맥락과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꺼내며 팔을 올려 닉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도 널 좋아해, 니키.”

“…응.”

별수 없었다. 품 안으로 쏟아지는 애정을 닉 클레이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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