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Sput
닉 클레이튼은 무작정 밖으로 나서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흠집 하나 없는 그 핸드폰은 노아 웨슬리가 이전의 핸드폰을 완전히 망가뜨린 탓에 새로 산 것이었다.
「어디야?」
아무런 고민 없이 빠르게 쓰여진 문자는 다니엘 레널드에게로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에 대한 답 또한 빠르게 도착했다.
「그라운드.」
메시지를 본 닉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
학교에 아예 오지 않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풋볼 연습은 쉬지 않고 계속해 온 것이 분명했다. 하여간 다니엘 레널드의 왕자님 같은 이미지에 거짓이 아닌 점이 있다면, 그가 지독하게 성실하단 점일 것이다!
닉은 풋볼 팀이 한창 연습 중일 그라운드로 발을 옮겼다.
「무슨 일 있어?」
다니엘은 이어서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원래 SNS를 꼬박꼬박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메시지를 보낼 때면 바로 답을 보내 주고는 했다. 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닉은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기는. 닉 클레이튼의 인생에서 가장 큰 ‘무슨 일’은 늘 다니엘 레널드가 가져왔다. 그런 장본인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게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만 조용히 있으면 내게는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렇게 보내기 위해 키패드 위로 손가락을 가져갈 때였다. 닉은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히면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아!”
그와 부딪힌 여학생이 들고 있던 종이들을 우수수 떨어트리며 휘청거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비틀거리는 여학생의 어깨를 잡아 준 닉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여학생은 눈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보던 닉의 눈이 잠시 커졌다. 예쁘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닉은 곧 허리를 숙였다.
“미안, 내가 앞을 제대로 못 봐서.”
그가 발밑으로 와르르 떨어진 종이들을 주워 주며 사과했다. 곧바로 따라 허리를 숙여 떨어진 것들을 줍던 여학생이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제대로 못 봐서 부딪힌 거니까!”
곧 보조개를 보이며 웃는 여학생에게 닉도 무의식적으로 마주 웃어 주었다. 학교에 이런 애가 있었나. 눈앞의 여학생은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비시시 웃는 구김 없는 미소 또한 눈길을 끌었다.
닉이 주운 포스터를 넘겨주며 물었다.
“댄스부?”
“아, 맞아요! 곧 공연이라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어요.”
“다음 주네.”
닉은 떨어져 있는 제 핸드폰도 주워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같이 몸을 일으킨 여학생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눈길을 주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너도 공연해?”
“네!”
여학생은 닉의 물음에 핸드폰을 신경 쓰던 것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공연에 대한 질문이 들어온 것이 퍽 반가웠는지, 제법 들뜬 얼굴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센터에 뽑혀서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아, 물론 다 같이 열심히 했어요. 정말 멋진 공연이 될 거예요! 2곡을 연달아 하는데…… 핫.”
공연에 관해 주절주절 늘어놓던 여학생이 곧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서서 잠자코 그녀가 말하는 걸 들어 주던 닉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홍보에 소질이 있는걸. 시간이 맞으면 보러 갈게.”
“정말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여학생이 발뒤꿈치까지 들며 기뻐했다. 닉은 고개를 끄덕여 주며 그 반응이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 참. 그가 잊을 뻔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나는 닉. 니콜라스 클레이튼이야.”
“알고 있어요!”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닉은 이미 알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슬쩍 눈을 크게 떴다
“날 안다고?”
“보스턴 스쿨에서 선배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여학생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곧 제가 한 말에 뒤늦게 놀라며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런 여학생을 바라보던 닉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하하,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너는?”
“저는… 니콜이에요.”
그녀의 대답을 웃는 낯으로 기다리던 닉이 설핏 눈썹을 들었다. 눈을 크게 뜬 채 니콜을 내려다보던 닉은 곧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흠결 하나 없이 잘생긴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어라, 너도 니키네. 우리가 같이 있으면 헷갈리겠다.”
가볍게 내뱉어진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니콜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색도 조금 비슷해.”
닉이 그녀의 머리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결국 니콜은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닉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삼켰다.
그런 와중 주머니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 닉이 손을 내렸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금이 간 액정 위로 문자 여러 통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떠 있었다.
아무래도 다니엘로부터 온 것이리라. 여기까지 나왔던 이유를 상기한 닉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니콜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먼저 가 볼게. 또 보자, 니콜.”
닉은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니콜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긴 그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화면 위에는 굵직한 줄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핸드폰을 보면서 가다가 니콜과 부딪히면서 떨어뜨릴 때 액정이 깨진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쥐여 준 다니엘이 보면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닉이 한가로운 생각을 하며 알림 창을 훑어보았다. 쌓여 있는 SNS 알림들을 걷어 낸 시선이 방금 다니엘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로 향했다.
「니키」
「너는 어디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리가. 그러나 코웃음을 치며 넘기기에 메시지에는 어쩐지 걱정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닉이 나지막하게 음, 하는 소리를 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운동장 가까이로 다가가자 그라운드 위에서 디펜스 연습을 하는 수비 팀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주시했으나 그 틈에 다니엘은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 레널드는 사람 틈바구니에 섞여 있어도 눈에 띄는 이였으니, 찾지 못하는 걸 보면 연습 중인 건 아닌 듯했다.
그라운드를 둘러싼 빨간 트랙 위에서는 육상부 부원들이 달리고 있었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다가가던 닉의 눈에 벤치에 앉아 있는 다니엘이 들어왔다.
그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도 간간이 서 있었는데, 시선에 곧장 꽂혀 들어오는 것은 오직 다니엘뿐이었다. 주변에서 그를 흘끔거리는 이들을 보면 아마 그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닌 것 같았다.
방금까지 연습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벤치에 앉아 물병에 든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고개를 내려 핸드폰을 노려보는 표정이 퍽 심각했다.
설마 내 연락을 기다리나? 문득 대회를 나갈 때마다 보냈던 문자에 왜 답을 하지 않았냐 묻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닉이 보폭을 넓혀 그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으로 다가가 팔을 걸쳤다. 재수 없긴 하지만, 억지로라도 트집 잡을 수 없는 반듯한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다니엘 레널드의 못된 성격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그건 명백했지만, 그에 대한 사감을 빼놓고 본다면 닉은 다니엘을 두고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가끔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꽤나…….
“아.”
내가 무슨 생각을.
닉이 머리를 흔들어 순간 들었던 생각들을 털어 냈다. 그러곤 난간 가까이 상체를 기울인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레널드.”
그 짧은 부름에 물을 마시려던 다니엘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훈련하면서 땀을 흘려서인지 앞으로 흘러 내려온 검은 머리칼이 그의 눈 위로 흐트러졌다. 그 사이로 드러난 녹색 눈동자에 닉의 모습이 담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건조하던 눈빛에 금방 이채가 돌았다.
“니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닉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조용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남자도 고개를 들었다. 그와 닉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어? 닉!”
남자는 보스턴 스쿨 풋볼 팀의 명망 있는 코치, 레오였다. 닉이 고등부에 막 올라왔을 때 그도 코치로 영입되었으니 올해 막 4년 차가 될 터였다. 그간 몇 번 마주친 전적이 있는지라 레오가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닉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레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 수영은 아직도 하고 있고? 풋볼 팀에 들어올 생각은 아직도 없나?”
“하하하. 수영은 아직도 하고 있고, 풋볼 팀에 들어갈 생각은 아직도 없어요.”
오랜만에 마주치자마자 또 러브콜을 보내오는 레오에게 닉이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그보다, 저한테 풋볼 팀 들어오라고 한 거 션이 또 들으면 어떡하려고요?”
수영 코치인 션은 그가 닉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알고 레오를 찾아가 한바탕 뒤집었던 역사가 있었다. 다행히 레오 또한 아직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인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비밀로 해 줄 거지….”
“그럼요.”
가볍게 대꾸한 닉이 다시 다니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니엘 레널드는 조금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뭐가 불만인지. 닉이 팔에 턱을 괴며 그를 마주 보았다.
시선은 제법 오랫동안 서로를 향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다니엘이었다.
“있잖아, 물어볼 게 있어.”
“…나도 있어.”
물어볼 것이 있다는 닉의 말에 다니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온 다니엘이 난간을 짚으며 그의 앞에 섰다.
“먼저 말해.”
닉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다니엘은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나지막하게 성마른 웃음소리를 흘렸다.
비딱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닉은 멀뚱히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보며 물었다.
“니키. 너는 모든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면서 왜 나만 성으로 부르는 거야?”
다니엘 레널드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닉 클레이튼을 예상하지 못한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뜬금없는 지적에 닉은 잠시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멀거니 서 있었다.
왜 자신만 성으로 부르냐니? 내가 그랬나? 그가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에게만 줄곧 성으로 불러 왔던 것 같기는 했다. 의식하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닉 클레이튼은 성별과 나이와 피부색과 친밀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이름으로 불러 젖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으로 지적받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지적을 받았던 순간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머릿속에 들이지 않고 바로 튕겨 내는 것이 닉 클레이튼의 특기라면 특기였다.
“어, 글쎄…….”
닉은 다니엘을 처음 봤던 순간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순간을 시작으로 다니엘 레널드와의 지독한 인연을 10년째 이어 오는 중이었으니까.
-안녕, 다니엘!
-…안녕, 클레이튼.
처음에는 그렇게 살갑게 불렀던 적도 있었다. 지금의 다니엘은 니키, 라는 애칭을 꼬박꼬박 부르며 자신을 괴롭히지만. 첫 만남에서는 그 또한 자신을 성으로 부르던 때가 있었지.
그러니 모든 시작은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에게 주먹을 날리면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단숨에 결론을 내린 닉이 코웃음을 쳤다. 그 장본인이 이렇게 불공평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네가 나를 다짜고짜 때렸을 때부터 너랑은 친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나 봐.”
“그 전에 네가 나를 물속에 빠트렸던 건 기억하지?”
“야, 속 좁게 굴지 마. 나는 그냥 너랑 같이 놀려고 그랬을 뿐이야.”
“그래. 함께 놀자고 다짜고짜 물속으로 끌어 들였었지. 참고로 나는 수영할 줄 몰랐고.”
닉은 그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거짓말! 네가 못하는 운동이 있을 리가 없어.”
“하하. 적어도 그때는 할 줄 몰랐어, 니키. 네 행동은 충분히 살인 미수에 가까웠어. 그러니까 그 이후에 내가 너를 때린 건 정당방위야.”
“어려운 말 쓰지 마, 이 자식아.”
다니엘이 자신을 뚱하게 노려보는 닉을 보며 실소를 삼켰다.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쓰지 않았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닉을 자극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다니엘 레널드에게 지는 것만 같았다. 닉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가 다니엘에게로 바짝 붙었다.
“그래, 너도 못하는 운동이 있겠지, 다니엘.”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제법 달짝지근했다. 다니엘은 무슨 꿍꿍이냐는 듯한 시선으로 닉을 내려다보았다.
“섹스에는 영 소질이 없던걸.”
닉 클레이튼의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휘어졌다. 반쯤 가려진 푸른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여실히 담겨 있었으나, 다니엘은 그의 말에 곧장 받아칠 수 없었다. 잠시 멈칫하고 굳어 있던 그가 닉의 팔을 꽉 잡았다.
“다시 해.”
“이게 무슨 경기인 줄 아나. 뭘 다시 해.”
닉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여유로운 닉의 얼굴과는 달리 그를 바라보고 있는 녹빛 눈동자에는 언뜻 투지까지도 엿보였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다가오는 대회가 끝나면.”
이를 악물고 있던 그가 닉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다시 해 보자. 전처럼은 안 할 테니까.”
“연습이라도 해 오게?”
다니엘이 그 말에 다시 한번 멈칫했다. 골 때리는 질문이라도 들은 듯 이마를 짚은 채 내뱉는 웃음에는 어이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누구랑 연습을…….”
그는 말을 잇다 말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진짜 눈치가 없어.”
“또 시작이네.”
“너랑 대화하다 보면 꼭 다른 곳으로 새게 돼. 이것 봐.”
다니엘은 자신에게 바싹 붙어 있는 닉의 어깨를 붙잡고 바로 세워 주며, 눈을 맞추었다. 햇빛 아래서 유난히 더 선명한 녹빛 눈동자는 어딘가 불만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언뜻 초조한 기색 또한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그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왜 나만 이름으로 불러 주지 않느냐니까.”
“네가 예쁘게 굴어 보든가.”
“이보다 더 어떻게? 네가 쌓일 틈도 없이 입으로 풀어 주는데….”
“레널드!”
닉이 경악하며 발을 들어 다니엘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입 다물라는 뜻이었으나, 그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살짝 눈가를 움찔 떨 뿐 고분고분하게 굴지는 않았다.
“오늘 밤에도 원하는 대로 예쁘게 굴 테니까, 너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
“왜 자꾸 이름에 집착하는 거냐고!”
다니엘은 그 말에 마땅한 대답을 꺼내는 대신 놀리듯 손을 움직였다.
“입으로 하는 거 좋아하잖아, 니키. 기분 좋게 해 준다니까.”
닉의 어깨를 쥐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차츰 위로 향했다.
“내가 언제 좋…….”
목덜미를 쓸어내린 손끝이 옷의 깃을 살짝 들춘 채 안의 맨살을 살살 긁었다.
“야, 손 빼….”
“싫어.”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누가 보면, 윽. 알겠어! 대니, 대니, 대니. 됐지!”
닉이 손을 들어 다니엘의 팔목을 잡고 힘을 주어 아래로 끌어 내렸다. 끌어 내리는 대로 순순히 손을 내린 다니엘이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했어.”
“넌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너무 생각 없이 구는 거 아니야? 널 보는 눈이 몇 개인데.”
닉이 불퉁하게 다시 발을 들어 다니엘의 발끝을 툭툭 쳤다. 축구화를 신은 터라 도리어 자신의 발이 아플 뿐이었지만, 닉은 구태여 내색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로부터 생각이 없다는 지적을 듣다니…….”
“죽는다 진짜.”
충격적인 얼굴을 하고 있던 다니엘은 닉을 보며 설핏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제정신, 아니지.”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반성이라고는 일절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그래서 뭐?’ 하고 되묻는 듯했다. 다른 설명을 덧붙일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물어보려고 한 건 뭐야?”
“아.”
닉이 그 물음에 뒤늦게 자신이 그를 찾아왔던 이유를 되새겼다.
그러니까 자신이 찾아온 이유는… 다니엘 레널드에게 그가 던진 의문의 답을 직접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답이 주어지지 않은 문제에 닉 클레이튼은 단 한 번도 정답을 적은 적이 없었다. 공백으로 남겨 둔 채 치워 두고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더러는 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의 도움으로 답안을 채웠다.
그런 제게 다니엘은 계속해서 풀어야 할 문제들을 내던졌다. 닉은 그가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날부터 시작된 물음들은 대충 던져둔 채 의식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깊게 고민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는 이번의 물음은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너도 생각이라는 걸 하기는 하는구나.”
“닥치고 들어 봐.”
닉은 다니엘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합리적인 답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늘 그래 왔듯 직접 물어보기를 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네가 나 대신에 언론에 나선 거 말이야.”
“그게 왜 이해가 안 가는데?”
“당연히, 너는 괜한 일에 휘말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파파라치도 질색하잖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싫어하지.”
“바로 그거야!”
자신의 의문을 털어놓던 닉이 언성을 높였다. 다니엘의 탐색하는 시선이 닉의 얼굴로 향했다.
“그런데 왜 그랬어? 왜 그렇게까지 한 건데?”
호기심으로 떠진 푸른 눈동자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올곧았다. 그 악의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눈빛을 받으며 다니엘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아무런 고민을 갖지 않고 사는 듯한 시선을 마주할 때면 그는 늘 묘한 기분에 휩싸이고는 했다.
저 얼굴이 혼잡하게 흐트러지는 꼴을 보고 싶어.
못된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손을 들어 눈 위를 꾹꾹 눌렀다. 일주일 가까이 웃기지도 않은 납치극의 뒤처리를 요란하게도 했다. 정작 그 납치극의 당사자는 자신이 왜 그런 쇼를 벌이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표출하고 있었지만.
“…너는 정말 멍청한 거 같아.”
다니엘이 니키에게 붙잡힌 팔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증거가 이렇게나 많은데 간단한 추론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야.”
“그래, 난 멍청이다. 됐지. 그냥 알려 줘, 계속 신경 쓰이니까.”
설핏 얼굴을 찌푸린 채 서 있는 닉 클레이튼의 머리칼이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지나치는 이들의 시선이 한 번쯤은 그의 얼굴에 머무르는 것을 다니엘은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선선한 가을바람이 얇은 머리칼을 스쳐 가는 것이 아주 느릿하게 다니엘의 눈에 들어왔다.
다니엘은 스스로도 제법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손끝에 칼을 달았다는 영화 평론가들조차 다니엘의 연기력을 폄하하지는 않았다. 명실상부 그는 타고난 연기자였다.
단 한 사람의 앞에서만 빼고.
“네가 나를 계속 신경 썼으면 좋겠어.”
다니엘의 입에서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온 말이 툭 튀어나왔다. 아주 덤덤한 어조로,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멍청이는 직접 말해 주지 않고선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왜 모르는 거야? 나는 네가 원한다면 그 어떤 귀찮은 일들도 전부 할 수 있어.”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진 마음을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던 닉 클레이튼뿐이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멍청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덤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닉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잠깐의 멈칫거림도, 미세한 떨림도 없었다. 다니엘은 얼이 빠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닉을 마주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닉은 자신이 들은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또 제게 허튼 장난을 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치부하고 넘기기에 다니엘 레널드의 표정은 제법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닉이 삐걱거리고 있는 동안 펜스 너머로 다니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 이제 패스 연습할 거니까 돌아와!”
“갈게요.”
다니엘은 멍청하게 서 있는 그를 흘깃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닉의 머릿속을 새하얀 백지로 만들어 둔 채.
***
닉 클레이튼의 하루는 그 흔한 하이틴 영화처럼 매일같이 흥미로운 일들이 펼쳐지지는 않았다. 얼마간 얼어붙어 있던 영화계를 녹일 만한 히트를 친 하이틴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인 다니엘 레널드가 바로 옆방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퍽퍽한 얘기일 수 있겠으나, 그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니어였다. 물론 닉은 늘 그렇듯 대학 입시에 관한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중요한 수영 대회가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탓에 매일같이 수영장으로 출석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닉 클레이튼! 이 망나니 자식. 워밍 다운 하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쉴 틈 없이 물살을 가르던 그의 귓가에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나 닉은 잠시의 멈칫거림도 없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물을 긁어내는 스트로크가 차츰 느려지더니 그가 곧 유려한 동작으로 풀의 벽면 타일을 짚었다.
수면 밖으로 빠져나온 닉이 물로 젖은 얼굴을 쓸어 내며 고개를 들었다. 스타트대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수영 코치 션이 화를 억누르느라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수영장 안에 있던 다른 수영부 선수들이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짜 준 훈련 내용을 따르지 않을 거면, 수영장에 오지 마라.”
“짜 준 대로 훈련했어요, 코치.”
“오늘은 100미터 페이스 연습 이후에 스타트, 턴 대시 연습만 하라고 했을 텐데?”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다 했다니까요.”
“…….”
물 안에서 서서 풀의 벽에 팔을 걸친 닉이 그 위로 턱을 괴며 웃었다. 뭐가 문제냐는 듯 도리어 깨끗한 낯으로 웃는 그를 내려다보던 션이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 말인즉슨 짜 준 훈련 내용을 모두 소화한 뒤 개인 연습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적어도 강화 기간이었다면 그 성실함에 박수라도 쳐 줬을 것이다. 지금이 수영 대회를 앞두고 연습의 양을 줄이는 대신 질을 높이는 테이퍼링 기간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양을 줄이며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은 선수의 체력 회복을 위한 당연한 과제였다. 션은 제 인생에 다시없을 유망주를 위해 밤새 고심하며 훈련의 양을 정했다. 션은 제법 유능했고, 그가 내 주는 훈련의 양은 적절했다. 문제는 그의 유망한 선수가 물속에 들어가면 도통 나올 줄을 모르는 닉 클레이튼이라는 것에 있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야.”
“무리하지 않았어요.”
닉이 션을 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자신의 코치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함을 내지르기 전에, 타일에 손바닥을 짚은 채 힘을 주어 풀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코치가 그만하라고 한다면 그만해야죠.”
그가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천진하게 웃었다.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눈가에 힘을 주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코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지레 눈치를 볼 만한 험상궂은 얼굴이었으나, 닉은 그가 들고 있던 타월을 자연스럽게 가져갈 뿐이었다.
어차피 나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닌가? 닉은 그렇게 생각했고,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션은 닉이 자신에게서 가져간 타월로 머리를 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닉.”
“네?”
“하…….”
션은 닉 클레이튼에게 한 번도 화를 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유망한 선수이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훈련 내용에 늘 군말 없이 웃으며 따라왔기 때문이 컸다.
뭐, 훈련 기간에 곧잘 파티에 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걸 알고부터는 그 역시 딱히 제재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올해 생일을 지내 이미 성년이었다. 수영 이외의 일에 잔소리할 수는 없었다.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
“…너도 고민이라는 걸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절 얼마나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코치가 하는 낯간지러운 말들을 멀뚱히 듣던 닉이 팍 인상을 찡그렸다. 들고 있던 타월을 신경질 섞인 손길로 션에게 돌려준 그가 손으로 머리를 털어 냈다.
“아무튼, 고민이 있다면 털어놔도 좋다는 소리야.”
“그런 거 없어요.”
“올림픽이 걸린 마지막 시합이니 부담이 크겠지.”
“시합은 매년 있는데 무슨 소리예요?”
닉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멋쩍은 마음에 괜스레 툴툴거린 것이 아니었다. 닉 클레이튼은 션의 답지 않은 격려가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올해 여름 대회에서 순위권에 들었을 때도 기존 기록보다 0.02초 느려진 것을 닦달하던 그였다. 갑자기 마지막 시합이니 부담이니 운운하며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아하. 눈을 가늘게 뜨고 코치를 훑던 닉이 코웃음 치며 팔을 뻗었다.
“이리 와요, 코치. 부담이 컸어요? 말을 하지.”
“뭐, 뭐야, 클레이튼.”
“안아 줄게요. 격려차.”
“됐어…! 아, 빌어먹을! 이제 됐다니까!”
닉이 팔을 넓게 벌려 션을 꽉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서 버럭 소리치는 코치의 목소리에 닉은 키득거리며 채 삼키지 못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화난 듯한 코치의 흉흉한 분위기에 긴장한 채 주시하던 다른 수영부 학생들도 그 모습을 보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런 걱정 할 필요 없어요.”
닉이 션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 션에게 닿았다.
“이번에도 코치의 진열장에 새로운 트로피를 넣게 해 드릴 테니까.”
“……아무 문제 없는 거지?”
닉 클레이튼은 그럼요, 하고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는 라커 룸으로 향하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문제없어요.”
***
물론, 문제는 있었다.
“하아….”
닉 클레이튼은 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씻고 나와서 옷까지 챙겨 입고서도 그는 여전히 라커 룸에 앉아 있었다.
닉은 수영부의 그 누구보다 가장 양이 줄어든 훈련 메뉴를 받고 있었다. 원래라면 가장 마지막까지 물속에 머물러 있었을 테지만, 요즘 들어서는 가장 먼저 수영장을 나서게 되었다. 수영장이야 집에도 있으니 헤엄치는 데에는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기다려.」
다니엘 레널드였다. 아, 제기랄. 닉이 다니엘로부터 온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닉 클레이튼이 다니엘 레널드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면서도 여태 함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지극히도 단순한 성격이 한몫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눈앞에 없을 때면 닉은 그에 관해 일절 고민하지 않았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그런 무던한 성격이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건 여전히 거슬렸지만, 다니엘이 걸어오는 도발에 매번 걸려 넘어져 주면서도 그것을 속에 담아 두지 않았다. 닉은 똑같이 비아냥거리거나 영 못 참겠으면 주먹을 내지르기도 하면서 그때그때 푸는 성격이었다. 걸어오는 도발을 무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다니엘 레널드와 의도치 않게 선을 넘어 버리긴 했지만…… 정말로, 깊이 담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러하듯이 다니엘 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상관없었다. 다니엘의 섹스는 조금 형편없었지만,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 둘 다 윈윈이었다. 닉의 생각은 그 정도에서 그쳤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멍청아.
다니엘이 던진 폭탄이 머릿속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전까지 말이다. 빌어먹을 다니엘 레널드. 그가 곤란한 얼굴로 멀뚱히 화면 속 문자 메시지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려.」
핸드폰 화면에는 그가 보냈던 메시지가 여전히 떠올라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니엘은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과 같이 굴었다. 그 태도가 닉을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 따지고 보면 완전히 이전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니엘 레널드는 중등부 때라면 안 할 스킨십들을 했고, 닉은 그 스킨십들을 이전과 같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늘 아침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니키, 일어나.
-오늘은… 지상 트레이닝 없어…….
잠에 취해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웅얼거리던 닉은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다니엘의 시선을 느꼈다. 평소라면 들어서 수영장에 내던지거나 했을 다니엘은, 그렇게 험악하게 구는 대신 몸을 숙여 침대 한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흐트러져 내려온 닉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닉은 잠기운을 한 번에 몰아내는 그 지나치게 다정한 손길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잠을 깨게 만든 것은 뒤에 이어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학교는 가야 할 거 아니야.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릴 거야.
그 말에 번쩍 눈을 뜬 닉이 신경질적으로 상체를 들며 휙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여유로운 태도로 닉을 내려다보던 다니엘은 부스스하게 뜬 그의 머리를 눈짓하며 몸을 일으켰다. 얼른 일어나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닉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얼마나 열심히 굴렸는지 모른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아침에 약했고, 머리를 쓰는 일에는 더더욱 약했으니까.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다니엘을 미친놈으로 간단히 정의 내리고 머릿속에서 지우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디야?」
닉이 아침의 일을 불현듯 곱씹고 있던 사이 화면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역시나 다니엘 레널드였다. 닉은 자신도 모르게 비죽 내밀고 있던 입술을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텅텅 빈 스포츠 백을 멘 그가 라커 룸을 빠져나갔다. 메시지를 보며 답 보내기를 주저하는 사이 다니엘의 훈련도 끝난 모양이었다.
그는 노아 웨슬리의 접근 금지 명령이 자신에게 걸려 있으니 자신과 함께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따지고 보면 무척이나 이상한 논리였는데, 어딘가 타당하게도 들려왔다. 무엇보다 합리적이었다. 다니엘과 매일같이 함께 다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한집에 사는 이상 마주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니엘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닉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닉, 지금 집에 가나 보네.”
“어. 너희도 훈련 끝났어?”
“방금 막.”
수영장을 빠져나와 교정을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향하던 그를 부르는 것은 농구부의 학생들이었다. 잠시 멈춰 서서 인사를 나누던 닉은 곧 손을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차장에는 시동이 이미 켜진 차가 헤드라이트를 빛내고 있었고, 그 앞에는 누가 봐도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놈이 서 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놈이 고개를 들고,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눈웃음을 짓는다.
닉이 그 웃음을 바라보다 묵묵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배고파.”
인사 대신 건네진 덤덤한 음성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집에 가자는 듯 차를 향해 고갯짓한다. 그에 닉이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타는 것을 본 후에야 본인 또한 차에 올라타는 것이다.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닉은 이 미묘한 평온에 탑승해 고민거리를 내려 두기로 했다. 뭔가를 고민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을뿐더러, 대회가 코앞이었으니까.
오늘도 괜히 오버 페이스로 훈련을 하지 않았나. 닉이 창틀에 툭 이마를 기댔다. 그에게는 코치에게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트로피를 안겨 줘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한다면, 괜히 그때마다 불편해하기는 싫었다. 더 고민하는 것도 질색이다. 닉 클레이튼은 평소처럼 당장 눈앞에 주어진 것만 바라보기로 했다.
***
닉 클레이튼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그가 가진 무기의 일종이었다.
고백을 받은 이후로도 닉은 정말 아무런 내색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완벽하게 훈련을 소화하며 대회 날을 맞이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가문의 원수와도 문제없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닉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요점은, 다니엘 레널드는 고백한 사람답지 않게 침착했다는 것이다. 또한, 닉 클레이튼은 10년 지기 동성 친구로부터 고백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무신경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지금껏 관계를 이어 올 수 있던 비결이었다.
그러니까…….
다니엘 레널드와는 알고 지내 온 10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번 주말에는 NFL 경기가 끝나고 같이 영화도 봤다. 물론 영화를 봤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다. 다니엘이 가진 취미라곤 운동 아니면 영화 보기가 다였던 탓에 그동안 함께 영화를 봤던 적은 수두룩하게 많았다.
닉 클레이튼은 그 대부분을 숙면 시간 정도로 활용해 왔지만 말이다.
-영화 볼래?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의 인터뷰가 흘러나오자 슬슬 방으로 돌아가려던 닉은 들려온 물음에 멈춰 섰다.
다니엘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의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본 내용은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닉과 달리 다니엘은 좋아하는 작품은 몇 번이고 돌려 보는 취미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닉 클레이튼은 이성과 데이트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액션 영화가 아니면 영화 보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그렇게 닉은 <타이타닉>의 도입부만 세 번, <트루먼 쇼>의 도입부만 네 번을 봤다. 기절하듯 잠이 드는 지점은 늘 비슷했다.
-…뭐 볼 건데?
그의 얼굴에 떠오른 머뭇거림을 발견한 다니엘이 소리 없이 웃었다.
-스파이더맨.
-……?
소파에서 일어난 채로 다니엘을 내려다보던 닉이 잠시간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곤 다시 털썩 그의 옆에 앉았다.
-볼래.
짧은 화답에 다니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는 잠시 방에 다녀오나 싶더니 비닐도 뜯지 않은 DVD를 꺼냈다. 그날 밤 닉 클레이튼은 처음으로 잠들지 않고 다니엘과 끝까지 영화를 보았다.
이후 돌아온 평일은 대회가 있는 주였다. 따라서 코치고 선생님이고 할 것 없이 닉의 컨디션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건 다니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신경 거슬리는 말을 꺼내지 않는 걸 넘어,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도 없었다.
“답지 않게….”
경기가 열리는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닉이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면에는 매일같이 확인해도 들어갈 때마다 연락이 쌓여 있는 메신저 어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수많은 이름 속에서 다니엘을 찾아냈다. 아침에도 마주쳤던 탓인지 그에게서 새로 온 연락은 없었다.
“흐음….”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온 소리에 운전하고 있던 코치 션이 흘깃 닉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문제 있어?”
“문제라면 있죠. 속도 좀 높여요. 이러다 늦겠네.”
그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 대꾸에 평소라면 거칠게 받아쳤을 션은 ‘혹시 사고라도 나면….’ 하며 말끝을 흐렸다. 한숨을 삼킨 닉이 고개를 돌려 션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코치는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이번 대회에서 내년 올림픽 국가 대표가 선발…, 아니다.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니었어.”
“지금 여기서 부담은 코치만 가지고 있다고요.”
경기를 나가는 건 자신인데 주변이 요란스러운 게 영 귀찮았다. 올해 치렀던 여름 대회 때문인가. 주 종목인 자유형 400미터에서 평소보다 뒤처진 기록을 내기는 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션의 태도는 요란했다.
“그렇죠?”
닉이 뒷좌석을 바라보며 수영부의 보조 스태프를 향해 물었다. 돌아온 것은 어색한 미소였다.
“아니. 여기서 아무런 긴장도 안 한 건 너뿐이야, 닉.”
보스턴 스쿨에는 아이비리그 진학반이 따로 존재했다. 닉 클레이튼은 그 진학반의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는데, 가장 가시적인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GPA 성적표를 들 수 있겠다.
그런데도 그가 어렵지 않게 아이비리그의 입학 허가를 받으리라는 건 보스턴 스쿨의 모두가 예상하는 일이었다. 지금껏 걸어온 길에 주렁주렁 매달린 금메달이 그의 능력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주니어 시절 국가 대표로 뽑혀 세계 청소년 수영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경험도 존재했다.
올해 여름 대회에서 닉의 기록이 0.02초 느려지지만 않았더라면. 아주 미세한 차이로 1등을 가져간 서부 선수에게 국가 대표 자리를 넘겨주진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 선수는 이후 도핑한 것이 걸려 그의 여름 대회 메달과 선수권 대회의 기록까지 모두 소각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세계 청소년 수영선수권 대회의 국가 대표 선발권은 놓쳤지만, 이번 대회에는 다가오는 내년도 하계 올림픽의 출전권이 걸려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지역 결선에서 1위를 차지해 매사추세츠 주의 대표로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차 안의 공기가 제법 묵직했으나, 그는 아무런 근심도 없는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그 사람은 이번 대회에 못 나오죠?”
“누구?”
“왜, 여름 대회에서 1등 했던 선수요.”
“도핑한 게 걸려서 세계 대회 기록도 지워진 마당에 어떻게 나오겠냐.”
여름 대회를 완전히 잊고 살았던 닉이 불현듯 물었다. 그에 션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답했다. 그는 운전하면서도 괜히 닉을 흘긋흘긋 곁눈질했다. 통 관심이 없던 주제에 관해 묻는 모습이 다소 수상쩍었던 것이다.
타인이 주는 술이나 음식에 뭔가를 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던 닉이 약에 민감해진 것은 아무래도 여름 대회 사건이 계기였다. 타고난 건강 덕에 약을 먹을 일 자체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건 아니겠지?”
닉의 머릿속에 잠시 삐쩍 마른 미어캣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굳이 그 얘기를 꺼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약물 검사 결과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지 않았나. 말해 봤자 코치만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가 여전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채로 대꾸했다.
“코치, 잊고 계신 거 같은데 전 닉 클레이튼이에요.”
닉 클레이튼은 프로를 지향하고 있었고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유명해질 예정이었다. 마냥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번 대회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하물며 약물 따위에 의존해 추락이 예정된 단상 위에 올라가는 건 사양이었다.
처음 세계 대회에 나가서 화제가 된 이후로 이미 SNS의 팔로워는 천 단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한 뒤 행동하는 신중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행동이 엠마의 사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최소한의 인식은 있었다.
“그래… 이름에 먹칠할 짓 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닉의 태도에 션이 그제야 안심하며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차는 매끄럽게 경기가 열리는 체육관 안으로 향했다. 그를 태운 차가 막 주차장 안으로 진입했을 때 즈음, 닉은 익숙한 이름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발견했다.
「행운을 빌어요! :-D」
니콜이었다. 짤막한 응원 메시지에서 어쩐지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해 닉이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니콜은 저번에 다니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부딪혔다가 알게 된 여자애였다. 다음 날 그녀가 자신의 SNS 계정을 팔로우했다는 걸 발견한 닉이 DM을 보내면서 길게는 아니어도 대화가 곧잘 이어지고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주변인에게서 오는 응원 메시지에 꼬박꼬박 답을 하는 성실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경기가 끝나면 니콜에게 답을 보내야겠다 생각하며 메신저를 내렸다.
“진짜 없네.”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말에 션이 다시금 닉을 흘긋거렸으나 그는 제게 향한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닉은 어제 이후로 새로 온 연락이 없는 다니엘의 메신저 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경기가 끝날 때 즈음, ‘잘했어.’ 하며 짧은 메시지나 남겨 놓을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
닉이 손가락을 움직여 다니엘이 전에 했었던 메시지 로그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는 사이 차는 완전히 주차된 채 시동이 꺼졌다.
“다 왔다.”
션이 차에서 준비해 온 짐을 내리는 동안 스포츠 백 하나 덜렁 든 채 서 있던 닉이 곧 경기장 안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익숙한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적당한 긴장감과 물기가 뒤섞여 묵직하지만, 평소보다 한층 뜨겁게 살갗에 닿아 오는 공기.
오랜만에 서게 된 익숙한 풍경 앞에서 그의 입꼬리가 무의식중에 올라갔다.
“클레이튼! 오랜만이네.”
소집실의 벤치에 앉은 닉은 자신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회색빛이 도는 갈색 머리를 짧게 바짝 깎은 놈이 자신을 보며 반갑게 웃고 있었다.
“아.”
닉으로서는 그렇게 달갑지는 않은 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게, 딜런.”
“훈련은 잘했고? 너 이번 여름 전국 체전에서는 세계 대회 기록을 갱신하지 못했잖아. 하하.”
“그랬지.”
귀찮을 정도로 제게 관심이 너무 많은 놈이었던 것이다.
딜런 와이트. 그가 아직 청소년 대회에 출전할 때까지는 자신과 몇 초 사이로 1위를 다투던 사이였다. 물론, 늘 자신이 1위를 가져갔지만 말이다.
주니어 자격이 아니라서 같은 조로 출전하지 못한 여름 전국 체전까지 운운하는 걸 보니 모니터링한 모양인데…. 혹시 이 자식도 날 좋아하나? 닉이 제게 달라붙어 오는 딜런을 가느다란 눈으로 주시했다.
남자의 관심은 더 이상 사양이었다. 머리를 빡빡 민 덩치 큰 남자라면 더더욱. 닉은 딜런의 얼굴을 보며 여전히 바위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를 볼 때면 그랜드 캐니언 국립 공원이 떠올랐다.
“오늘 컨디션은 어때?”
“좋지. 최고야.”
닉이 고개를 돌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평소라면 달려와서 딜런에게 눈을 부라려 줄 코치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저스틴 그놈처럼 약이라도 하고 온 건 아니지? 하하, 너는 늘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 과한 아드레날린 작용도 도핑 부작용인 거 알아?”
“아드레…놀?”
딜런이 꺼낸 생소한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던 닉이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여름 대회와 세계 대회에서 도핑한 게 걸렸던 선수 이름이 저스틴이었지. 뒤늦게 떠오른 이름을 조용히 곱씹던 닉이 딜런에게 아무런 악의가 담기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아드레놀인지 아놀린인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너 해 봤냐?”
“……그걸, 내가 왜 해 봐.”
천진한 물음에 말문이 막힌 듯 멈칫했던 딜런이 뒤늦게 딱딱하게 대꾸했다. 경직된 입가를 억지로 당겨 웃던 그는 이내 시답잖은 말들을 몇 번 더 던지더니 등을 돌렸다.
건성으로 받아 주던 닉은 딜런이 사라지자 달려오는 션을 발견했다.
“왜 이렇게 늦어요?”
“조 배정이 다시 되었다고 해서…… 근데 저놈이 또 뭐라고 했어?”
“뭐, 별말 안 했어요.”
“와이트 저 음흉한 자식, 자기 코치랑 하는 짓이 똑같아.”
“혹시 날 좋아하나?”
흉흉한 시선으로 딜런이 사라진 쪽을 노려보던 션이 황당하단 얼굴로 닉을 돌아보았다. 대체 눈앞의 자식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닉은 자신에게 향한 의문 어린 시선에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매번 경기에서 마주칠 때마다 주인 본 강아지처럼 꼬리 흔들면서 달려오잖아요.”
“그건…….”
네 기분을 잡치게 만들려고 수작 부리는 거 아니겠어?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으나 션은 그가 가진 모든 인내심을 동원해 꾹 삼켰다. 딜런이 들었다면 비명을 내지르며 기겁했을 말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그냥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웬 듣도 보도 못한 나르시시즘을 묻혀 왔는지 의아했지만, 션은 구태여 그의 착각을 고쳐 줄 생각은 없었다. 연습 때라면 편견도 없고 생각도 없는 놈이라며 버럭버럭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경기 전에 괜히 기분을 망치는 것보다는 편할 대로 생각하게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것도 따지고 보면 타고난 마인드 컨트롤 방법이었다.
그가 두 달간 두 명의 동성에게서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션은 닉을 마치 괴생명체 보듯 바라보았다.
“입장하겠습니다.”
그때 들려온 스태프의 목소리에 닉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그는 자유형 종목에 전부 출전 신청을 넣었다. 장거리를 선호하는 닉에게 션이 이번에는 단거리에도 도전해 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닉 클레이튼을 4년 정도 지켜봐 온 자신의의 판단에 따르면 그는 분명 단거리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도 닉이 장거리를 주 종목으로 꼽은 이유는 단순히 물에 오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션은 확신했다.
정말이지 그의 몸 어딘가에는 아가미가 붙어 있으리라.
아무튼, 단거리에서는 공인 기록이 없는 닉으로서는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며 페이스 배분을 가장 중요한 훈련 내용으로 꼽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첫날은 100미터. 닉이 공식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출전하는 종목이었다.
“닉 클레이튼, 다른 선수에게 휘둘리지 말고 네 페이스 유지해. 너는 남 눈치 보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으니 잘할 거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스퍼트 내면 되는 거잖아요. 고작 100야드 남짓인데.”
“그래, 전략이고 뭐고 들어올 때까지 죽어라 킥이나 해. 아무 생각 없이 헤엄치는 건 네 주 특기잖냐. 그럼 뒤처질 일은 없을 거다.”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그가 션에게 투덜대듯 대꾸하며 웃었다.
“네가 해 온 훈련을 믿으란 소리야, 이 망나니 자식아.”
“알겠으니까, 코치도 절 믿어요.”
입고 있던 흰 저지를 벗고 수영 팬츠만 입은 차림으로 닉이 가장자리를 따라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대기하면서 몸에 물을 묻힌 그는 말없이 다이빙대에 오르기 전 제자리에서 가볍게 뜀박질을 하며 몸을 풀었다.
수경까지 쓰고 나자 물에 들어갈 준비는 끝났다. 주변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다이빙대 위에 올랐다. 아직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닉은 그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단절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Take your marks.]
시작이 다다랐음을 알리는 기계음이 흘러나오자 다이빙대 위에 서 있던 닉이 몸을 숙이며 자세를 잡았다. 양옆의 선수들의 자세도 모두 정지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곧.
삐익-
출발 신호 음이 떨어졌다. 풍덩! 다이빙대에 아슬하게 붙어 있던 발이 떨어지고 몸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물속으로 입수한 것도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빠른 다이브였다.
일렁이는 그림자를 내비치며 잠영을 하던 닉이 수면 밖으로 올라왔다. 긴 팔이 곧게 뻗어지며 물살을 헤집었다. 군더더기 없는 스트로크로 물을 긁어내며 앞을 향해 질주해 나가던 그가 가까워진 벽을 앞에 두고 몸을 말았다.
첫 번째 턴.
벽을 힘껏 찬 발이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장거리에서는 첫 번째 턴이 끝나자마자 피치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 초반부에 힘을 빼면 후반부까지 끌고 갈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닉 클레이튼이 장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물에서 가장 오래, 끈질긴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칠 수 있는 종목이었으니까. 단거리까지 출전 종목을 늘리지 않은 것에는 그럴 이유가 없어서일 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클레이튼은 턴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킥에 힘을 주었다. 물길을 걷어차는 소리가 이전보다 한층 더 거칠어졌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보라도 이전보다 눈에 띄게 거세졌다. 물길을 가르던 팔이 빠르게 벽면에 닿았다. 결승점에서의 터치였다.
평소보다 이르게 닿은 골 지점에 닉이 즐거움과 함께 약간의 아쉬움을 삼키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뒤를 도는 순간, 관중석에서 시끄러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열광 어린 목소리는 쉬이 끊이지 않았다. 쏟아지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를 들으며 잠시 서 있던 닉이 수경을 들어 올리며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MEN’S 100M FREE
HEAT 3
1 NICHOLAS CLAYTON 48:03.70
1위 자리에 박힌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이름이었다. 등수만 가지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고 너스레를 떨며 웃을 수 있었다. 닉 클레이튼을 결코 침착하게 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옆에 적힌 타임 레코드였다.
그가 손을 들어 젖은 얼굴 위로 흐르는 물기를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전광판에 비추어진 기록은 여전히 똑같았다. 48:03.70.
“아…….”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에 닉의 입에서 얕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출전이 처음이었으므로 공식 기록을 거머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처음 만든 공식 기록은 지금껏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최고 기록보다 1.3초 앞서 있었다.
최고 기록.
최고 기록과 신기록을 동시에 세운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닉 클레이튼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전율이 발끝부터 머리까지 관통하는 짜릿함을 경험했다. 닉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 입가를 질근 짓씹었다.
머리 위로 수경을 들어 올리던 그대로 멈춰 있던 그는 이윽고 주먹 쥔 팔을 그대로 수면 위로 내리쳤다.
첨벙!
수면과 팔이 부딪치며 위로 튀어 오른 흰 물방울 사이로 닉 클레이튼의 웃는 낯이 비추어졌다. 100미터 첫 출전에서 그는 하계 올림픽의 출전 티켓을 쟁취했다.
***
이번 대회에서 가장 빛나는 주역이 누구였느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닉 클레이튼을 말할 것이다.
100미터 경기에서 그가 따낸 기록은 세계 주니어 기록을 새로이 세웠다. 이어진 200미터와 400미터에서도 올림픽 티켓을 따내면서, 3관왕 타이틀을 거머쥐기까지 했다.
400미터 경기에서 보여 준 오버 페이스 탓에 마지막 날에 있던 1500미터에서는 비록 은메달에 그치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성적에 대체로 만족했다.
무엇보다 원래 주 종목이었던 400미터에서도 최고 기록을 갱신했던 것이다. 3분 51초 60! 6개월 만에 0.82초를 줄인 닉을 향해 션은 키스라도 퍼부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이 사랑스러운 망나니 자식!
-칭찬 맞아요, 그거?
물론, 닉 클레이튼은 질겁하는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날아드는 그를 피했지만 말이다. 션이 발을 헛디뎌 수영장으로 빠지는 우스꽝스러운 쇼를 보여 준 것도 이번 시합에서 기억할 만한 장면이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닉 클레이튼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허튼소리를 할 것을 염려한 스태프가 외워 달라고 신신당부한 예상 질문을 코치의 감시하에 달달 외웠기 때문이다.
-자유형 100미터 부문 첫 출전에서 올림픽 티켓을 따냈는데요, 예상하고 있었나요?
-음…….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몸에 꼬치를 꽂아 화로에 넣고 태워 버릴 것처럼 노려보는 션의 시선이 느껴졌다.
-언젠가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꿈은 있었는데, 100미터 부문에서도 출전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성인이 되어 처음 데뷔하는 국제 무대가 올림픽이 되는 건데 떨리진 않으시고요?
-글쎄요. 별로 떨리진……. 아,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해 좋은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닉은 사람들의 이목을 뒤로한 채 탈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션도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젖은 머리를 빼고는 제법 멀쩡한 꼴을 하고 있었다. 축하 파티라도 하자는 코치와 스태프의 제안이 이어졌으나 닉은 픽 웃으며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찮았으니까.
“괜찮아요. 집에 있는 풀에 들어가서 쉴래요.”
“방금 시합 끝났는데 또 물에 들어가겠다고?”
“왜요?”
“…….”
4일 내내 물속에서 헤엄치고도 휴식을 물속에서 취하겠다는 닉을 보며 코치는 질린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도 기분 좋은 내색을 숨길 수는 없는지 곧장 표정을 폈다.
닉이 가방을 대충 들쳐 메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경기를 치르는 기간 동안 답을 보내지 못해 잔뜩 쌓인 연락들을 감흥 없이 넘기던 손길이 한곳에서 멈췄다.
「Daniel Leonard (0)」
“허…….”
닉 클레이튼의 눈썹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비딱하게 치켜세워졌다. 그전까지 꾸준히 보내오던 ‘잘했어.’ 따위의 문자도 없었다. 닉이 콧잔등을 모으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는 여태껏 다니엘이 보내오던 축하인지 적선인지 모를 연락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뿐일까. 다니엘이 보스턴으로 돌아와 왜 연락에 답하지 않았냐는 말을 하던 순간에도, 굳이 답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다름 아닌 다니엘 레널드였으니까.
그러나 한번 그 메시지를 의식하고 나니, 이번에만 예외적으로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경이 쓰였다. 이번에도 와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탓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이 자식은….”
날 좋아한다더니 연락도 없어. 닉은 왜인지 모를 미묘한 아쉬움을 덮으며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에도 연락이 와 있다면, 기꺼이 답을 보낼 생각이었다. 금메달 세 개 중에 하나 정도는 원한다면 주겠다며 인심을 쓸 생각도 있었다. 다니엘 레널드가 그걸 원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라면 모를까.
연락을 받고 어이 없다는 듯 웃을 얼굴이 썩 기대가 됐던 탓이다. 정작 그에게서 연락이 없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뭐, 바쁜 일이 있겠지. 쉬이 생각을 털어낸 닉이 코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가죠.”
“연락 못 받았어, 닉? 집에서 사람을 불렀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집에서? 그전까지 담담하고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닉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떠졌다.
부모님이 사람을 보낸 건가? 엄마도 아빠도 아마 바쁠 텐데……. 닉이 의아한 낯으로 느릿하게 눈을 껌벅였다.
며칠 전, 그는 엠마의 사업이 최근 순조롭게 확장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해외에도 지점을 늘린다고 했던가. 소식을 전해 준 이는 다니엘이었다. 그는 통 뉴스를 보지 않고 사는 닉 대신, 기사에서 본 부모님의 소식을 보고 말해 주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어.”
“아하. 알겠어요.”
닉이 평탄한 어조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놀라긴 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바쁜 와중 신경을 써 줬다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주변에 인사를 마친 닉이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관계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 그가 문 근처로 나와 있지 않은 차를 보며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즈음, 주차장의 구석에서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 왔다.
“니키.”
주차장 가득 울리는 나지막한 저음에 닉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왜 네가 여기 있어?”
다니엘 레널드였다.
맙소사. 닉이 얼빠진 얼굴로 저도 모르게 야트막이 입을 벌렸다. 평소보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차에서 내린 다니엘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고요한 미소에 신경을 빼앗겼던 닉은 뒤늦게 그가 내미는 것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게 뭐야.”
“잘했어, 니키.”
얼떨떨한 얼굴로 꽃다발을 건네받은 닉이 고장 난 로봇 장난감처럼 버벅거렸다. 그는 손에 쥐어진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꼴깍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울렁였다가 꺼졌다.
아, 왜 이러지.
꽃다발을 처음 받아 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나비라도 한 무더기 집어삼킨 듯 속이 울렁거렸다. 괜스레 꽃다발을 쥔 손가락을 움찔거리던 그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들어 보였다.
“장미라니. 너무 로맨틱한 거 아닌가, 왕자님?”
곱게 감사를 표현하기에 다니엘과는 쌓아 온 역사가 있었다. 닉은 부러 짓궂은 말을 꺼냈다. 놀리려는 기색이 역력한 물음에도 다니엘은 그저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그게 어떻게 봐서 장미야. 눈이 안 좋은 거야, 멍청한 거야, 아님 둘 다인 거야?”
“장미 아니야? 그럼 뭔데?”
“리시안셔스.”
“리시…….”
눈을 깜박거리며 그가 말한 꽃 이름을 따라 말하던 닉이 입을 다물었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꽃이었다. 근데 꽃 이름이 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는 새로이 들은 이름을 머릿속 한편으로 치워 버렸다.
다니엘이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빌어먹게도 잘 어울렸다. 그게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들고 있는 거라는 사실마저도. 지금 그는 팬들이 말하는 대로 왕자님이라는 별명이 그럴듯하게 어울렸다. 그 꽃다발을 주려는 상대가 자신만 아니었다면, 닉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왜인지 모르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음… 어색한 일은 아닌가? 다니엘 레널드는 분명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닉이 멋쩍은 얼굴로 눈을 굴리다 말고 다니엘에게 꽃을 도로 넘겼다.
“잠시만 들고 있어 봐.”
“……왜?”
“나도 너한테 줄 게 있으니까.”
얼떨결에 꽃을 도로 돌려받은 다니엘은 닉이 들고 있던 가방을 열어 뒤적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눈앞에 꺼내진 것은 메달 더미였다.
시야를 가득 채운 채 닉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금빛 메달을 바라보며 다니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 세 개 있어. 하나쯤은 너에게 줄 수 있으니까, 골라 봐.”
“뭐?”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다니엘이 어이없다는 듯 벙한 얼굴로 웃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닉은 키득거릴 뿐이었다. 그가 자신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제법 웃겼다.
“내가 메시지에 답 안 해서 보스턴까지 날아왔다며.”
“……그랬지.”
“그래서. 주겠다고.”
“사과의 의미야?”
“내가 뭐 잘못했어?”
다니엘은 닉 클레이튼의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다니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치 입가가 허물어진 것처럼 둘은 서로를 보며 실없이 웃고 있었다.
그는 이내 비딱하게 서서 닉을 바라보았다. 아마, 여우처럼 굴면서 곰처럼 둔한 닉 클레이튼은 모를 것이다. 보스턴까지 날아온 건….
“사실 너한테 처음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었는데….”
닉 클레이튼에게 건넬 축하를 직접 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단순히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꽃을 건네고, 축하의 말을 건네면 낯선 제 행동에 놀라 할 얼굴이 보고 싶었다. 예상했던 대로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았다. 다니엘이 허물어지는 입가를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내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면 난리가 날 것 같았어.”
“재수 없어, 왕자님.”
“사실인 걸 어떡해, 멍청아.”
다니엘 레널드는 꾸며 내지 않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쳤다. 단 한 사람의 앞에서만 나오는 진솔한 얼굴이었다.
***
집으로 돌아와 쉬겠다고 말한 그대로 닉 클레이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고 있던 짐을 대충 던져둔 채 풀로 뛰어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조금 눈을 붙인 것이 고작인데, 대회의 피로는 전혀 없는 것처럼 생생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경기가 열리는 대회장으로 찾아갔을 때도 이 정도로 기뻐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이 준 꽃다발이 담긴 스포츠 백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을 눈에 담았다. 가느다랗게 뜬 눈매가 묘하게 비뚜름해졌다.
아마 인어공주가 닉 클레이튼처럼 단순한 뇌 구조를 가졌다면, 온종일 헤엄치느라 물거품이 될 새도 없지 않았을까. 아니… 성적인 쾌락에 지배된 닉 클레이튼이라면 이미 타국의 공주를 꾀어냈을지도 모른다.
다니엘은 괜히 불쾌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면 인어공주 이야기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왕자일 테다. 닉이 던져 놓은 짐을 주워 들며 따라온 그가 풀장 앞에서 멈춰 섰다.
“이제 10월이야, 니키.”
“그래서 뭐?”
“…….”
다니엘은 당당하게 들려온 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닉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뭐가 잘못된 거냐는 얼굴을 했다.
“너도 들어오지 그래.”
닉의 제안에 다니엘 레널드가 고민의 여지 없이 거절했다.
“싫어.”
“보면 너는 물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다니엘.”
“네가 지나치게 좋아하는 거야. 넌 전생에 물고기였는지도 모르겠어.”
“돌고래 같은 거?”
“그건… 돌고래의 의견도 들어 봐야겠는데. 그들이 너보다 똑똑할 것 같아서 말이야.”
또 시작이군, 망할 다니엘 레널드. 닉이 이를 빠득 갈았다.
“수영을 못해서 물을 싫어하는 거지?”
그가 전혀 냉정하지 못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닉은 처음 다니엘을 만났던 날을 아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맞아 본 날이었으니까. 여하간 그날 이후로 닉 클레이튼은 다니엘이 물속에 들어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상에서는 모든 스포츠를 통달한 왕자님이라고 불리는 주제에, 물속에는 단 한 번도 들어오지 않다니.
“여기가 바다도 아니고, 수영을 못한다는 이유로 깊지도 않은 풀에 들어가는 걸 피하진 않아. 그리고 니키, 너도 알다시피 살면서 내가 잘하지 못하는 운동은 지금껏 없었어.”
“그럼 수영은 왜 안 하는데?”
“그건 너의 영역이니까.”
의미하는 바가 직설적으로 담기지 않은 문장에 닉이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다니엘 레널드가 몸을 쓰는 것만큼이나 머리를 쓰는 것 또한 능하고, 질 게임인지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게임인지를 파악하는 통찰력 또한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닉은 그의 말에 내심 기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문맥에 담긴 은근한 존경심을 느꼈더라면.
그러나 닉 클레이튼은 상대의 말을 아주 오랫동안 음미하며 곱씹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말에 가시가 없다는 점과 어조가 무척이나 다정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물속에서는 내가 더 빠르다는 걸 인정하는 거지?”
“그래. 물을 빼는 속도도 네가 더 빠르지.”
“씨발, 뭐라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닉이 수면 위로 거칠게 팔을 휘둘러 풀 밖에 선 다니엘에게 물을 뿌렸다. 물세례를 맞은 다니엘은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 조금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제법 물방울이 많이 튄 탓에 상의고 하의고 가릴 것 없이 옷이 젖어 버린 것이다.
얼굴까지 튄 몇 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낸 다니엘이 들고 있던 짐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니키, 바로 물에 들어가는 거 보니 컨디션은 괜찮은 모양이네.”
다니엘 레널드가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닉에게로 와 닿았다. 닉 클레이튼은 그가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한 소리를. 오늘을 위해 계속 관리해 왔는데, 최고지.”
그 가벼운 대꾸에 다니엘 또한 눈을 접어 웃었다.
10월 보스턴의 건조하고 선선한 가을 공기가 살갗 위를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상의를 탈의한 채 물속에 잠겨 있는 클레이튼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유유히 물길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그럼 할래?”
“뭐를?”
“전에 다시 하기로 했던 거.”
다니엘 레널드의 말은 그런 닉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이내 닉은 다니엘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풀장의 벽에 팔을 걸친 채 고개를 올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다니엘의 얼굴과는 달리 그의 머릿속에는 미묘한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해.
이를 갈며 자신을 내려다보던 다니엘 레널드의 진녹빛 시선도.
-니콜라스 클레이튼, 다가오는 대회가 끝나면.
-…….
-다시 해 보자. 전처럼은 안 할 테니까.
그 목소리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날 다니엘이 자신에게 했던 말 때문일 것이다. 닉 클레이튼은 몸을 섞었던 상대에게서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상기해 냈다.
“그게… 뭔데?”
“네 시합이 끝나면 다시 하기로 약속했잖아.”
“거짓말하지 마. 언제 그런 약속을 했어!”
“네 기억력은 물고기만도 못한 거야?”
사기꾼! 닉의 눈이 황당함을 가득 담고 휘둥그레 떠졌다. 다니엘 레널드는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연기하는 모습에 닉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아마 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도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의 연기 재능을 십분 써먹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닉은 기가 찬 얼굴로 실소를 흘렸다.
“네가 못하니까 너랑은 안 하겠다고 한 건 기억 안 나?”
“풋볼에서도 4쿼터제를 운영하는데, 겨우 한 번 해 보고 단정 짓는 건 너무 이르지 않아?”
“너는 저번에 이미 연장 경기까지 치렀어.”
비죽 내민 입술 틈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럽게 힘 좋은 자식. 대체 몇 시간을 뒹군 건지 닉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다니엘 레널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 닉을 보며 조금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오늘따라 말초 신경이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굴지.”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안 그러더니, 왜 오늘은 비싸게 구냐는 소리야.”
“너야말로 왜 답지 않게 가볍게 굴어?”
닉의 되물음에 다니엘이 멈칫하며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깐의 침묵 후 닉의 머리 위로 나지막한 물음이 떨어졌다.
“내가 가볍게 구는 것 같아?”
“어…… 잠시만, 방금은 실수. 취소할게.”
닉이 빠르게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물론 그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는 그저 지극히 보수적인 다니엘이 선뜻 자자고 제안하는 상황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니엘은 무려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나.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미지근한 상대를 꾀어내고자 하는 것도 모두 다니엘 레널드답지 않았다.
“왜…….”
닉의 입에서 억울함이 묻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닉 클레이튼은 스스로가 대단히 도덕적인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덕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기적이라는 것도 알지만, 닉은 다니엘이 조금쯤은 원망스러워졌다.
왜 하필 좋아한다고 말해서 나를 이렇게 시험에 들게 하는 거지? 다니엘이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고민 없이 욕구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하기 싫어?”
다니엘이 물었다. 시합을 준비하는 동안 몸에 맞지도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살았던 닉은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럼?”
닉이 다니엘을 올려다보며 침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얄밉게 느껴졌다.
상대로부터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난 이후에도, 그와 동등한 마음 없이 몸을 섞어도 되는 걸까? 단순히 서로 쌓인 욕구를 해결하고 즐기자고 합의한 거라면 모를까. 아무리 쾌락에 약한 자신이라도 이쯤 되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니콜라스 클레이튼의 인생에 있어 가장 도덕적인 고찰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니키.”
다니엘 레널드는 고뇌하는 듯한 닉을 보며 조소인지 자조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곧 그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오른팔 위로 걸쳐 놓았다. 그러고는 왼손을 움직여 느릿한 손길로 셔츠의 가장 위 단추를 풀었다.
가장 위 단추 하나를 푼 채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가만히 닉을 내려다보던 다니엘이 입가에 볼록한 미소를 걸었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에 똑바로 마주한 채 그는 다시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툭, 곧게 뻗은 손끝에 걸린 두 번째 단추가 풀어졌다.
“줘도 못 먹는 건 아니지?”
“야.”
세 번째 단추가 풀리자, 근육이 짜인 어깨선 아래로 얼핏 쇄골이 드러났다. 다시 또 툭, 탄탄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닉은 평소에 관심도 없던 다른 남자의 가슴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제기랄. 닉은 남자한테 꼴리는 자신을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게 다니엘 레널드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건 전적으로 다니엘의 잘못이었다. 입으로는 자길 잡아먹으라는 듯 말하면서, 눈빛은 당장에라도 잡아먹겠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니까….
“…하, 빌어먹을.”
결국, 닉 클레이튼은 잇새로 욕설을 짓씹으며 팔로 풀 밖의 땅을 짚곤 단숨에 몸을 빼냈다.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메마른 땅 위를 적셨으나, 자신에게로 점점 가까워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면서도 다니엘 레널드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도덕이니, 상식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집어 던진 채 다가오는 열의가 바로 그가 가장 바라던 것이었으므로.
“할 마음이 생겼어?”
“그러라고 눈앞에서 스트립쇼 한 거 아니었어?”
“그러라고 벗은 건 맞지만, 스트립쇼라니…. 어쩐지 천박하게 들리잖아.”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뜬금없이 말꼬리에 붙은 영국식 억양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또 가식 떨기는. 닉 클레이튼이 코웃음을 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오늘도 못하면 예외 없이 공수 교대야.”
한 번도 주전 쿼터백을 놓쳐 본 적 없는 이를 향한 선포였다.
그 엄포에 다니엘 레널드는 어딘가 곤란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여전히 미소를 잃지는 않은 채였지만 말이다. 닉은 불퉁한 얼굴로 다가가 다니엘의 입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애매하게 휘어 있는 입술 위로 물기가 어린 손가락이 닿았다.
“분위기 망치지 말고. 입 벌려, 대니.”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어 아랫입술을 쓸 듯 매만지는 손길은 재촉에 가까웠다. 순순히 벌어지는 입술 위로 닉이 고개를 내렸다. 맞닿은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떠밀듯 파고드는 입술에 다니엘 레널드는 굳이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지 않았다. 닉 클레이튼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겠다는 듯이 그를 몰아세웠고, 떠밀리던 다니엘의 등은 이윽고 집 안의 거실이 비치는 유리창에 닿았다.
다니엘 레널드는 제게 입을 맞추는 닉을 갈증 어린 눈으로 주시했다. 혀가 얽히는 와중에도 그는 닉 클레이튼을 바라보는 것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아래로 향한 시선 탓에 길게 늘어진 금색 속눈썹이 푸른 눈동자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입술을 떼면 타액이 투명한 실타래처럼 죽 늘어졌다. 닉이 제 입가를 손등으로 대충 문지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자.”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니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니엘의 팔을 그러쥔 닉이 성큼성큼 안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고, 묵직한 걸음 소리가 그런 닉의 뒤를 연이어 쫓았다.
2층에 올라온 닉은 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니엘 또한 고분고분 그의 손에 이끌려 침대 위에 앉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니엘의 시선에 닉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니엘의 다리 사이로 왼쪽 다리를 집어넣어 침대에 대충 무릎을 올려 지탱했다.
“음….”
다니엘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목을 긁으며 튀어나왔다.
닉이 그대로 그의 턱을 쥐었다. 휙 들어 올려지는 고개에 설핏 눈을 찌푸렸던 다니엘은 입술에 와 닿는 촉감에 꽉 주먹을 쥐었다. 입술을 빨던 닉은 무릎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다니엘의 즉각적인 반응에 잠시 놀라기는 했으나,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거나 몸을 빼지는 않았다.
다만 얕은 헛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키스를 받으면서 서다니, 조급한 몸짓이 영 왕자님답지 않다.
“야, 네 뒤에 있는 서랍에…….”
콘돔이 있다고 말하려던 닉이 입을 다물었다. 매끄러운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다. 침실 가까이에 콘돔이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것조차 다니엘 레널드를 비참하게 만들까?
상대가 누구든 간에 닉 클레이튼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해 온 상대가 저 때문에 초라한 얼굴을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떠한 보상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기 마련이니까.
“서랍?”
“…됐어.”
닉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다니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생각하는 걸 멈추기로 했다.
“그냥 하자.”
다니엘 레널드가 그 말에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굳었다. 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콘돔이 꼭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섹스를 할 때면 꼭 피임을 해야 한다고 배워서 습관적으로 찾기는 했지만, 남자랑 하는데 안에 사정한다고 임신하는 것도 아니고.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던 닉은 이해보다는 체념에 가깝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닉이 아래로 손을 내려 다니엘의 바지 지퍼를 잡았다. 지익, 지퍼를 끌어 잡고 바지를 내리자 이미 발기한 성기가 천에 가려진 채로도 제 흉흉한 모습을 드러냈다. 콘돔을 쓴다고 해도 고작 고무 표면에 묻은 오일로는 하등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크기였다.
이걸 어떻게 뒷구멍에 넣어?
“너, 이런 걸 잘도 넣고 다니네.”
“…평소에도 세우고 다니진 않아.”
“세우기 전에도 내 손보다 크잖아.”
아, 제길. 못 하겠어.
닉 클레이튼은 자신이 경솔하게 나섰음을 인정했다.
“안 들어갈 것 같아.”
그 중얼거림에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그가 못 하리라는 것을 예상한 얼굴이었다.
다니엘은 닉을 들어 제가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 눕혔다. 흰 천장이 시야에 가득 찼다. 순식간에 역전된 자세를 보며 닉 클레이튼은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으나, 그러기에 다니엘 레널드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늘 처음이 어려운 법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이번엔 전보다 수월할 거란 소리지.”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특유의 거만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천박하게 굴어 줄게.”
다리 사이로 들어온 다니엘이 수영 팬츠를 가볍게 끌어 냈다. 그가 닉의 몸을 뒤집어 무릎을 세우고 침대에 엎드리게끔 했다. ‘이 자세, 별론데….’ 닉의 입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니엘은 대꾸하지 않고, 닉이 왼쪽 발목에 걸려 달랑거리는 팬츠를 벗어 던질 새도 없이 성기를 쥐었다.
“읏….”
미약한 신음 소리가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 반쯤 서 있던 페니스가 손바닥 안에서 차츰 몸을 세워 갔다. 그저 손끝에 걸려 쥐어짜질 듯한 쾌감을 기대하던 닉은 이내 헉, 하고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상체를 세웠다.
엉덩이 골을 타고 내려온 축축한 살덩이가 구멍 주변을 덧그리듯 핥아 온 탓이다.
씨발.
소름 끼치는 감각에 닉이 뒤로 손을 뻗었으나, 기다렸다는 듯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한쪽 팔이 뒤로 묶인 닉의 무게 중심이 쏠려 이마가 침구에 닿았다. 상체를 다시 들어 보려 했으나, 구멍 주변을 핥다 못해 코를 박고 쭙, 쭙 빨기 시작한 다니엘의 기행에 닉이 입술을 짓씹었다.
“미, 미친… 새끼야.”
떨리는 목소리로 나온 욕설에 페니스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으. 뒤를 돌아보던 닉이 다시 침구에 얼굴을 처박았다. 기둥을 쥐고 있던 손은 아래로 내려가 고환을 손안에 쥐고 굴렸다. 동시에 축축하게 젖은 구멍 안으로 파고드는 이물감에 닉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흐, 잠, 잠깐만…!”
말도 안 돼. 씨발, 진짜 말도 안 돼. 구멍을 파고든 물컹한 물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혀였다. 닉은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오럴 섹스를 안 해 본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에게서 펠라를 받기도 하지 않았나. 그러나 이건 다른 영역이었다. 제길, 이곳에 혀를 집어넣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게 다니엘 레널드일 줄은, 더더욱 예상할 수 없었다.
무릎을 움직여 앞으로 기어 나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한쪽 팔이 단단히 잡힌 탓에 작은 시도조차 무산됐다. 그럴 때마다 다니엘은 페니스를 쥐고 있는 손을 쓸며 번번이 쾌락에 무너지게끔 만들었다. 귀두 끝에 맺힌 프리컴이 뚝, 침구 위로 떨어지며 흰 이불 위로 작은 얼룩을 만들어 냈다. 목부터 등까지 붉게 상기된 몸을 보며 다니엘은 페니스를 쥐고 흔드는 손을 더 빨리했다.
“앗, 흐, 아….”
구멍 안으로 파고든 채 춥, 빨아 들이던 입이 떨어졌다. 사정감이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프리컴에 젖은 기둥을 쓸던 손바닥이 귀두를 감싸 쥔 채 움직이며 자극했다. 기어코 닉의 입에서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희뿌연 정액이 토해졌다.
다니엘은 손안에 쏟아진 정액을 방금까지 핥아 내려 축축한 구멍으로 가져갔다. 구멍의 주름을 쓸던 젖은 손가락이 기습적으로 안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엉덩이가 움칫 떨렸다. 앞에서 자그맣게 욕설을 내뱉는 것 같았으나 침구에 얼굴을 박고 있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여기는 이미 젖었는데.”
다니엘이 구멍 안에 넣은 손가락으로 내벽을 긁어내듯 움직였다. 타액으로 범벅이 될 만큼 핥았던 구멍은 손가락의 움직임에 차근히 풀어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한 개에서 두 개, 세 개까지로 수를 넓혔으나 다니엘은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는 끄트머리도 넣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넣으려고 한다면 억지로 욱여넣을 수 있겠지만….
아프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욕구만 풀어 내고 끝날 것이 아니라. 상대도 기분이 좋았으면 했다.
“넣고 싶어.”
다니엘은 자신의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닉의 앞에서만 푸는 스스로를 모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처음 했을 때처럼 욱여넣고 꼴리는 대로 박아 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처음 맛본 쾌락에 정신이 나가 여유를 갖지 못했을 때의 일이었다.
“넣, 어.”
닉은 그런 자신의 망설임을 안다는 듯이 읊조렸다. 잇새로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 정돈되지 못한 음성은 다니엘의 안전장치를 풀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안을 휘젓던 손가락이 쑥 빠지고 움찔움찔 벌렁거리는 구멍의 입구에 손가락보다 두껍고 단단한 살 기둥이 닿았다. 이미 끝부분이 젖어 있는 귀두가 미끄러지듯 구멍 위를 비비적거렸다.
“씨발, 넣으, 라니까….”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어차피 더 못 참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실소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침대 위에 이마를 박고 있는 닉에게로 향했다.
고역이었다. 뒤를 간질거리는 느낌이 계속해서 전신에 찌릿찌릿한 감각을 몰고 왔다. 발가락이 절로 안으로 곱아 시트에 꾸깃거리는 주름을 만들어 냈다. 차라리 몸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고통이 지금의 간질거림보다 견디기 쉬울 것 같았다.
마치 이런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엉덩이 골을 타고 몸을 비비던 페니스가 구멍 위에서 멈췄다. 다니엘이 쥐고 있던 닉의 팔목을 놓으며 그의 엉덩이를 잡고 벌렸다. 커다란 손이 허리와 엉덩이를 꽉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혈관이 도드라지게 선 제 페니스를 잡은 채 벌어진 구멍 입구에 맞추고, 느릿하게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흐읍….”
아직도 영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에 닉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군살 없는 복부가 홀쭉하게 들어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끄트머리만 넣었는데도 배 속이 가득 찬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천천히 파고들던 성기가 이내 끝까지 파고든 모양인지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 위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떨어지는 것이 들렸다. 다니엘이 양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반쯤, 나가는가 싶던 성기가 다시 느릿하게 안을 긁으며 깊숙이 박혔다. 이물감보다도 먼저 그 느릿한 속도에 허벅지가 잦게 떨렸다.
“니키, 깊숙이 안쪽을 자극하다 보면 네가 느끼는 곳을 찾을 수 있다는데….”
이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혀 왔다.
“어디인 것 같아, 응? 여기야?”
안쪽을 파고들 때마다 미묘하게 바뀌는 각도에 입에 절로 거친 욕설이 담겼다.
“하, 윽…….”
탐색하는 듯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가 거대해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로 고꾸라지듯 침구에 처박힌 상체가 움찔거리며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읏, 아…!”
젖어 있는 옅은 색의 머리칼이 크게 들썩이는가 싶더니, 내내 아래를 향하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다니엘의 시야에 휘둥그레 떠진 벽안이 들어왔다. 푸른 눈동자는 여실히 쾌락의 빛으로 혼탁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찾아냈다는 것을 알아차린 다니엘이 슬쩍 눈을 휘며 웃었다.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기 무섭게, 뒤로 빠졌던 허리가 이전과 같은 각도로 거칠게 밀려들었다.
퍽!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에 맞춰 쭉 뻗어 있던 닉의 허리가 들썩였다. 퍽, 성기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왔다. 참아 왔다는 듯 같은 곳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허리 짓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 흣, 아, 응….”
파르르 몸이 떨렸다. 눈가에 맺혀 있던 물기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떨어져 침구를 적신다.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쾌락이 쉴 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처음 삽입했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쾌락에 눈앞이 새하얘진 닉이 침대 위로 몸을 무너뜨렸다.
빡빡한 구멍을 억지로 열고 들어온 성기 탓에 입구에 뜨거운 것이라도 가져다 댄 듯 홧홧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열감이 머리 꼭대기까지 쏟아졌으므로 닉은 작은 고통에 몸부림치지 못했다.
“아, 아! 흐아….”
결국, 벌어진 입에서 어린아이의 울음 같은 신음이 터졌다. 쿵, 내벽을 파고들었던 성기가 깊숙한 곳을 찌르고 다시 빠져나갈 때면, 달라붙은 점막이 덩달아 떨려 왔다.
끝까지 뺐다가 한 번에 안으로 성기를 찔러 넣던 허리 짓은 닉이 사정감을 보이자 더 거세졌다. 아, 빨, 빨리, 흣, 아, 더……. 우는 건지 신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퍽, 퍽 치받는 소리에 섞여 들었다.
“아읏, 하, 대니…!”
“윽…….”
속도를 높여 가던 피스톤질은 닉이 어깨를 떨며 사정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멈췄다. 하……. 함께 사정한 다니엘의 입에서 흐트러진 숨이 내쉬어졌다. 닉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위로 올라가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사정감으로 노곤해졌던 등에 다시 긴장이 들어가 근육이 꿈틀 움직였다.
뒤로 갔다는 사실에 대한 황망함은 없었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닉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해, 안에 싸는 거.”
그 여과 없는 감상에 다니엘이 붉게 상기된 얼굴을 들었다.
“있잖아, 대니. 한 번… 더, 하자.”
이윽고 이어진 말에는 굳어 있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닉의 허벅지를 잡은 그가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자세를 바꿨다. 옆으로 누운 채 한쪽 다리를 붙잡혀 위로 들린 닉 클레이튼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했다.
“대니! 야, 자세는 왜….”
“네 얼굴이 보고 싶어.”
다니엘이 고개를 틀어 닉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듯 키스했다. 미친 새끼. 차마 내뱉지 못한 욕설이 입 안에서 솜사탕처럼 녹았다. 다니엘 레널드가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좋아해.”
“좀….”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흥분해서 거칠어진 목소리 사이로 조금쯤은 냉소적인 기색이 묻어 나왔다. 상체를 숙여 닉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다니엘이 왜인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살갗 위로 내려앉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별도리 없이 닉 클레이튼은 그 씁쓸한 웃음에 조금씩 항복했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들을 내려 두고,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을 덮어 둔다. 단순히 쾌락에 져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의 자존심을 먼저 굽혀 왔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