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Dash
닉 클레이튼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하늘이 어둑해진 지 한참이나 지난 이후였다.
방 안 그 어디에도 창문은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하늘을 보고 안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몇 시냐고 물었을 때 노아 웨슬리가 11시 40분이라고 대답해 주었을 뿐이었다. 노아 웨슬리는 사자 우리 속으로 먹이를 주기 위해 들어온 사람처럼 긴장한 상태로 닉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부터 잠에서 깨어나는 데에 약한 닉은 시간을 묻고 나서도 얼마가 지난 뒤에야 차츰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디야?”
“지, 지하실…….”
“그건 나도 눈이 있으니까 알고 있어.”
대충 둘러보아도 지하실이나 창고쯤 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는 자신이 누워 있는 벙커 침대와 천장에 붙어 있는 기다란 철봉뿐이었다. 철봉에 묶인 끈은 자신의 양 팔목과 연결되어 있었고, 발목을 묶고 있는 알 수 없는 가죽으로 된 벨트는 침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묶여 있네.”
닉 클레이튼은 황당함이 잔뜩 배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마지막 기억은 차 안이었다. 그 뒤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들기 전 노아 웨슬리와 사지를 결박하는 플레이를 즐기자고 합의한 기억은 없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묶이는 것보단 묶는 게 좋았고 대상이 남자인 건 별로였다. 그게 노아 웨슬리라면 더더욱.
약이라도 한 게 아닌 이상 자신이 이딴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장단을 맞춰 주었을 리 없었다.
……약?
“이런 씨발.”
닉이 거친 욕설을 짓씹자, 놀란 노아가 어깨를 화들짝 떨었다.
“노아.”
그가 꾹꾹 화를 눌러 참으며 물었다.
“나한테 약 먹였어?”
“으, 그, 그게….”
“무슨 약인데.”
금방에라도 자신을 씹어 먹을 듯 이를 갈며 물어 오는 모습에 노아가 급기야 코를 훌쩍였다. 그러나 겁먹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도 더듬더듬 닉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수, 수면제.”
“그냥 수면제야? 확실해?”
닉이 다시 한번 재차 물어 왔다. 그에 노아는 목이 떨어져 나갈 듯 쉼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굳어 있던 닉이 그 절실한 꼴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알겠으니까 그만둬.”
덤덤한 목소리에 노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닉을 올려다보았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수영 선수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은 없었으나, 수영을 좋아했다.
수영을 전문적으로 한다는 건 편리한 일이었다. 체육 특기생으로 학교를 다니며 유망주로 칭송받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껏 수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마음에 드는 지점이었다. 닉은 할 수 있는 한 그 환경을 지키고 싶었다. 처음으로 전국 대회에 나갔을 때 공식 기록이 없어 8번 레인에 섰을 때를 제외하고, 그 이후로 줄곧 4번 레인을 지켜왔던 것처럼.
그러니 정체도 모르는 약물을 먹고 이상한 이슈에 휘말려 커리어를 망칠지도 모르는 일에는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왜 수면제를 먹여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네, 네가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서.”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이곳에 날 묶어 두면 내가 널 좋아하게 되기라도 해?”
“적어도… 레널드와 떨, 떨어져 있잖아.”
“뭐?”
“그럼 레널드와 키스할 일도… 없겠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닉 클레이튼은 당최 웨슬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들이 하는 대화가 자연스러운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어딘가 핀트가 나간 듯한 웨슬리의 말에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닉을 향해 웨슬리가 천천히 소심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좋, 좋아해.”
얼굴이 빨간 미어캣이 더듬더듬 고백했다. 자신의 눈치를 잔뜩 살피며 꺼낸 고백을 듣고 닉이 가만히 웨슬리를 바라보았다.
닉은 고백을 받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상한 일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깨어나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사랑 고백쯤은 별 감흥 없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가 이윽고 나지막한 침음을 흘리며 물었다.
“…섹스하고 싶다는 의미의 고백이야?”
그 말에 크게 한 차례 몸을 떤 웨슬리가 충격적인 말을 들은 사람처럼 멈춰 섰다. 그러나 부정은 없었다. 그 침묵을 지켜보며 닉은 걸핏하면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웨슬리가 자신을 성적으로 좋아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노아 웨슬리의 고백은 자백처럼 들려왔다. 자신에게 수면제를 먹인 것, 이곳에 자신을 납치해 온 것, 사람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 것, 설마 했는데 정말로 스토킹해 왔던 것. 그의 고백은 그 모든 잘못에 대해 ‘좋아하기 때문에 그랬다’는 자백에 가까웠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따른 죄책감은 동반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좋아한다는 것이 면죄부라도 되는 양 거리낌 없이 잘도 이딴 짓을 해 대다니. 허. 닉이 입꼬리를 비틀며 실소를 흘렸다.
“나를… 좋아해 줘, 니키.”
“너는 좋아하면 사람을 묶어 두고 고백하냐?”
“사랑, 사랑해서 그런 거야. 미안해, 미안해, 사랑해….”
“진짜 패 버리고 싶다….”
힘없이 흘러나온 말이 빈말처럼 들려왔는지 노아는 겁을 상실한 것처럼 제게로 다가왔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노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닉이 얼굴을 찡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노아 웨슬리가 눈을 감으며, 파들파들 떨리는 얼굴을 들이민 때.
“커윽!”
방금까지 닉의 코앞에 서 있던 웨슬리가 배를 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 닉이 경악하며 무릎을 들어 그의 명치를 가격한 탓이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꺽꺽 바닥에 쓰러져 있는 웨슬리를 보며 닉이 눈을 깜박였다.
그 또한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야, 갑자기 네가 키스하려고 하니까 나도 반사적으로….”
“우, 으윽…….”
“저기, 그러니까.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함부로 남한테 입술을 가져다 대면 처맞는다는 걸 너도 알아야지.”
타인의 명치를 온 힘을 다해 찍어 눌러 놓고 퍽 평안한 어조였다. 숨이 겨우 진정되고 나서도 노아 웨슬리는 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 곧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닉을 향해 흠뻑 젖은 얼굴을 들어 보였다.
그의 입에서 억울함이 토해져 나왔다.
“난 왜, 왜 안 돼?”
“안 되니깐 안 되는 거야. 짜증 나게 할래, 자꾸?”
진심으로 귀찮다는 양 신경질적인 어조에 노아가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그대로 쏟아 냈다. 침으로 젖어 있던 얼굴 위로 눈물이 떨어지면서 주룩주룩 물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제 발치에 엎드려 몸을 떨며 우는 노아를 보며 닉이 곤란한 낯을 했다.
“제길, 울지 마.”
그런 와중에도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설핏 부드러워서, 노아는 더더욱 눈물을 멈출 수 없어졌다.
저 다정함이 좋았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가진 다정함이 담담하게 보여지는 순간을 노아 웨슬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닉 클레이튼에게 반했던 날처럼.
적선하듯 떨어지는 것도 아닌 순수한 그의 호의가 미치도록 가지고 싶었다. 물속을 헤엄쳐도 흐려지지 않는 그 선명한 다정함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히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닉 클레이튼의 뒤를 따르는 화려한 연애 경력에 못난 데다가 남자이기까지 한 자신이 낄 자리는 없었으니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레… 레널드 때문이야?”
여기서 또 다니엘이 왜 튀어나오는 거지?
닉은 도무지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말하면 당장 다니엘을 찌르러 가기라도 할 것처럼 파들파들 떠는 꼴을 보니 기가 차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찌르겠다고 달려가도 순순히 찔려 줄 다니엘 레널드는 아니었지만, 만약 찔린다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될 테다. ‘속보, 할리우드의 왕자 다니엘 레널드가 동급생으로부터 칼을 맞아…….’ 볼만하겠군. 입에 조소가 걸렸다.
그를 굳이 보호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닉은 할리우드의 왕자님이 괜한 루머에 휘말리는 것을 가장 질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관련 없어.”
“하지만 키, 키스….”
“너는 빌어먹을, 키스가 무슨 영원한 사랑의 맹세라도 되는 줄 알아? 혹시 디즈니 월드에 살고 있어, 공주님? 응?”
닉이 빈정거렸다. 그 빈정거림에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눈물이 잔뜩 고인 눈을 든 노아가 집요하게 물어 왔다.
“그럼, 레널드와는 무슨 사이인데?”
이, 이런 다니엘 레널드보다 지긋지긋한 새끼. 그는 웬만해서는 뛰어넘기 어려운 다니엘 레널드의 자리를 꿰차고 당당히 ‘닉 클레이튼의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개자식 1순위’에 등극했다. 박수 대신에 주먹이 나가는 타이틀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 무슨 사이기는.”
가볍게 대꾸하려던 닉은 이내 느릿느릿하게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어쩌다…… 선을 넘어 버린 사이.”
제대로 된 표현은 아닐 테지만, 지금 당장은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버린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다니엘 레널드와는 아마 이전처럼 돌아가지 못하리라. 물론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다니엘은 여전히 짜증 나고, 귀찮았다. 더러는 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 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인지, 다니엘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와의 관계는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았다.
잠깐, 이전에는 무슨 사이였지?
웨슬리가 물어 오기 전까지 지금껏 닉은 한 번도 자신과 다니엘이 무슨 관계인지에 관해 고민해 본 적 없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평소 생각을 하며 사는 타입이 아니었고, 다니엘 레널드는 한 번도 그에게 그러한 물음을 강요한 적 없었으니까. 따라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물음들 앞에서 닉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고민했다.
친구? 절대 아니다. 자신은 그렇게 인성이 글러 먹은 놈과 우정을 쌓은 기억이 없었다.
원수? 그것도 아닐 것이다. 자신은 여태껏 다른 누군가에게 악의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다니엘이 재수 없기야 하지만, 그 정도로 증오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언젠가부터 다니엘 레널드와 있는 것이 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서로에게 무례한 말들을 흘리면서도 그가 서부로 돌아가기 전까진 줄곧 함께였을 정도였으므로.
대부분 치고받고 싸우는 결말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니엘 레널드와 해 온 미친 짓들은 대체로 재밌었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얼굴로 다니엘은 기꺼이 못된 꿍꿍이에 동참했다. 걸리고 나서는 어른들의 앞에서 혼자 얄밉게 빠져나간 건 사실이지만, 함께 사고를 치고 다닐 때만큼은 제 앞에서 가식적인 도련님 행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한 쌍… 같은 건가?”
닉이 자신의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깊은 고민 없이 튀어나온 단어가 괜스레 마음에 들었다.
너티 페어.
닉 클레이튼은 그 별칭을 입 안에 담고 한 차례 굴려 보았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러나 너무 멀지도 않았던 관계에 이름이 붙었다. 그럴듯하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정작 노아 웨슬리는 자신의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 아닌데….”
사랑.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해 대던 노아 웨슬리가 제법 무거운 감정을 입에 담았다. 까칠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닉이 노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키스… 할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어떻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물음에 멈칫했던 닉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미치겠네. 어떻게 키스하는 거냐고?”
그는 잠시간 흐음, 하고 고민하다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웨슬리. 먼저, 입술을 대고 혀를,”
“아, 아, 아니…!”
말로 키스하는 법을 설명하기라도 할 생각인지, 아, 하고 입술을 벌리는 모습에 노아 웨슬리가 벌떡 일어나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빨갛게 익은 모습으로 이까지 딱딱거리며 덜덜 떠는 모습이 웃겨서 닉은 자신도 모르게 키득 웃었다.
노아 웨슬리는 그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떠오른 미소에 신경을 뺏겨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의도를 다시 상기해 낸 것은 닉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이후였다. 딱딱한 낯을 뒤늦게 발견한 그는 어딘가 잔뜩 기가 죽은 태도로 닉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좋아하지 않아도, 키, 키스할 수 있냐고.”
그 물음에 닉은 덤덤히 되물었다.
“노아, 너 살면서 한 번도 키스해 본 적 없어?”
“…….”
침묵에서 긍정을 읽은 닉이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섹스도?”
“그치만, 그건, 좋아하는 사람과…!”
“맞네. 어쩐지 경험 없는 너드나 할 소리를 하더라니.”
닉 클레이튼이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노아 웨슬리는 그 태연한 한 마디에 치명상을 입은 듯 딱딱하게 굳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UFC였다면 링을 마련한 것도, 상대를 고른 것도 자신이었으나 그는 왜인지 스스로가 코너에 몰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 투, 쓰리…. 식은땀이 흐르는 살갗으로 패배의 열기가 물씬 닿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웨슬리는 의지를 다지며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니키, 너는 좋, 좋아하지 않아도 할 수 있어?”
그는 자신에게 향한 반격에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 그럼 내가 안 될 이유는, 없잖아….”
“그거야….”
닉은 그 말에 곧장 대꾸하지 못했다.
노아 웨슬리의 말이 꽤나 타당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마따나 대단히 좋아한다는 마음을 품지 않아도 섹스는 가능했다. 그의 처음도 그랬고, 이후에도 몇 번 그러했으며, 심지어는 그 다니엘 레널드와도 가능했으니까.
“허…….”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해 온 다니엘과도 했다.
그러니 다니엘 레널드가 아닌 다른 사람과도 가능해야 했다.
그 외의 사람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쾌감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닉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가?”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긍정의 말에 웨슬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아냐, 역시 말도 안 돼. 그렇다고 아무나와 잘 수 있는 건 아니야, 노아. 너 멍청이 아냐?”
“…….”
“공부는 잘하면서 왜 그런 건 몰라?”
헛웃음을 흘린 닉이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그 물음에 웨슬리가 얼룩덜룩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노아 웨슬리는 그의 말마따나 성적은 좋은 게 분명했지만, 순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이상하리만큼 순진한 점은 다니엘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닌가? 다니엘 레널드가 터트렸던 스캔들을 회고하던 닉이 음, 하고 고뇌하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스캔들 이력만 보면 순진하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섹스할 때 무식하게 힘으로만 때려 박는 걸 보면 화려한 이력이 억울해할 만한 테크닉이었지만 말이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불현듯 찡그리듯 눈썹을 모았다.
적당한 선의 고통이야 쾌락으로 치부할 수 있으나, 그날 밤은 아니었다. 그 엉망이었던 섹스를 떠올리고 잠시 키득거리던 그가 쭉 상체를 펴며 침대의 헤드에 몸을 기댔다.
“노아.”
자신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웨슬리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의 시야에 악의 같은 건 전혀 담기지 않은 푸른 눈동자가 들어와 박혔다.
약을 먹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를 빼고는 줄곧 이러한 분위기였다.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깨끗한 바다 같은 눈동자는 평온했고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피는 것은 노아 웨슬리, 자신이었다.
닉이 자신의 다리 한쪽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물었다. 발목을 까딱거릴 때마다 발목을 묶은 가죽끈의 연결 고리와 체인이 맞부딪히며 짤그락짤그락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나 이거 언제 풀어 줄 거야?”
당연하다는 듯 묻는 얼굴에 노아 웨슬리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벌인 이 납치극이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임은 인지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정에 휩쓸려 돌이키지 못할 일을 벌였다는 두려움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그러나 닉 클레이튼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을 마주할 때면 자신 또한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노아 웨슬리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을 좋아해 주지는 않아도 괜찮다. 그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미, 미안. 못 풀어 줘.”
다니엘 레널드가 볼 수 없는 곳에 가둬 놓고 자신만 볼 수 있다면.
“하하…. 개소리하지 말고.”
“풀, 풀어 줄 수 없어. 미안해, 니키.”
“너는 날 사랑한다고 했지, 노아.”
“으응….”
“근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미안…. 그, 그냥 여기 있어 주면, 안 돼?”
“죽을 때까지? 빛도 안 들어오고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닉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휘어진 눈썹에서 못마땅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났으나, 평소라면 허겁지겁 자신의 말을 주워 삼켰을 노아 웨슬리는 꾹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집스러운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강력한 의지를 느낀 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말이 안 됐고, 이 상황을 초래한 상대는 말이 안 통했다. 막막한 상황에 맥이 풀려 그를 설득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키스를 해 주면 내보내 주려나. 그런 손쉬운 생각도 해 보았지만, 썩 끌리지 않았다. 그는 고작 하룻밤으로 그칠지도 모르는 잠자리에 의미 부여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자신과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에 걸맞게 어울려 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노아 웨슬리는 자신이 영영 그의 곁에 묶여 있기를 원했고, 자신은 그가 바라는 바대로 행동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는 상대와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나 다음 달에 전국 대회가 예정되어 있어.”
“…….”
“내가 수영을 안 하는 건 미국 체육계의 커다란 손실인데, 노아. 미래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지하실에 가둬 둘 생각이야?”
“…….”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욕심쟁이네.”
닉 클레이튼이 꿋꿋이 입을 다물고 있는 웨슬리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무의미하게 분노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찌감치 체념하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가둬 두겠다는 노아 웨슬리의 계획은 오직 그만의 것일 뿐이다. 닉은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극적인 결말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자신은 미국의 수영 유망주였고 나름 보스턴 스쿨의 인기인이었다. 훈련을 빠지면 몇 통씩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대다 못해 집까지 쫓아오거나 엄마에게로 연락을 돌리는 코치도 있었으며, 출석만큼은 성실했던 그가 결석할 경우 이상함을 느끼고 연락해 올 친구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쩌다 보니 함께 살고 있는 동거인은 노아 웨슬리보다도 더 집요한 구석이 있는 소시오패스였다. 그가 자신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무슨 일이 있건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을 찾아낼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때까지 무탈하게 시간을 끄는 일이었다. 닉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차츰 힘을 뺐다.
이럴 수가. 다니엘 레널드에게 기대를 걸게 되는 상황이 올 줄이야.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노아 웨슬리. 내 어떤 점이 좋았어?”
닉 클레이튼이 물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그 스스로도 궁리해 보았지만, 마땅한 답을 하나로 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 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은 웨슬리의 눈이 커졌다.
“말해 봐. 궁금하니까.”
그는 궁금했다. 대체 자신의 어떤 점이 이런 웃기지도 않은 납치극을 벌일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건지.
겸손을 떨기에 닉 클레이튼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스스로 보기에도 얼굴이든 몸매든 빠질 것 없이 괜찮은 편이었다. 키는 말할 것도 없이 훌쩍 컸다. 성격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등수에 연연해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그는 대회에 나가 단상에 오르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부족한 점이 단 한 개도 없네. 닉은 울면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미치광이 미어캣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비를 쫄딱 맞은 미치광이 미어캣, 아니, 눈물을 잔뜩 머금은 노아 웨슬리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하게 여기지도, 우습게 여기지도 않고, 그냥… 그냥, 나를 평범하게 대해 주는 게.”
바닥을 짚은 손가락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땅을 긁어내듯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이윽고 꾹 쥐어진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네가 나를 바, 바라봐 주는 게 너무 좋았어, 니키….”
“…….”
“왜, 왜 나는 안 돼? 나를, 사랑해 줘, 제발. 너는 레널드 같은 사람만 좋아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잖아….”
그 말을 꺼내며 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웨슬리를 보는 닉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귀찮았지만,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고백하는 사람을 모르는 체하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야.”
혀를 차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던 닉의 몸짓은 손목을 묶은 끈에 의해 저지당했다. 손을 뻗으려 해도 팽팽하게 묶인 끈에 의해 손은 허공만을 휘저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생각해 보니 자신은 납치범을 걱정할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다니엘 레널드가 봤다면 멍청하다고 비웃을 게 분명했다. 닉 클레이튼은 치미는 불쾌감을 짓씹으며 몸을 완전히 침대 위로 무너트렸다.
“자야겠어.”
졸린 건 아니었지만 그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잠은 쉽게 밀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고 있는 탓에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유독 더 선명히 들려왔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구조를 기다리는 것 뿐이라는 게 짜증 났다.
***
니콜라스 클레이튼의 장점 중 하나를 뽑아 보자면, 단순할 정도로 긍정적이라는 점이 있겠다. 뉴욕에서 태어나 10년이 넘도록 보스턴에서 살아온 동부 사람인데도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종종 서부 사람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그의 낙천성은 어느 정도 인정받은 셈이다.
그리고 그의 단순함은 여지없이 오늘도 발휘되었다. 지루하고 끔찍했던 납치 첫날 밤을 뒤로한 채 잠에서 깨어난 닉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 없어 낮인지 밤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밤에 잠들어 눈을 떴으니 아침이겠거니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닉이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주한 사람은 당연히 노아 웨슬리였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웨슬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하품하던 닉이 그를 불렀다.
“노아.”
“으, 응.”
“나 배고파.”
투덜대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아직 잠겨 있었다. 닉이 잠긴 목을 가다듬을 동안 웨슬리는 그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배고프다니까.”
“어, 어떡하지…?”
“어떡하긴. 나 사랑한다며. 그런데 날 굶길 작정이야?”
닉의 입에서 흘러나온 평탄한 물음에 웨슬리가 허겁지겁 고개를 내저었다. 신성 모독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덜덜 떨던 웨슬리가 불안한 시선으로 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켜 문가로 향했다. 문의 안쪽에 걸려 있는 잠금장치를 전부 연 웨슬리가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쿵, 닫히는 문을 닉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닫힌 문 너머로 잘그락거리며 잠금장치가 여럿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내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 돌아온 노아 웨슬리의 손에 들린 종이 상자는 익숙한 것이었다. 밖에서 음식을 사 온 모양이다. 포장지에 그려진 그림은 닉으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로고였다.
미국 전역에 프랜차이즈 지점을 가진 샌드위치 가게. 미국인들에게는 유명함보다도 익숙함이 더 먼저일 브랜드가 가장 익숙한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그 샌드위치는 닉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으며, 닉의 모친인 엠마가 CEO로 있는 요식업 회사의 브랜드였다.
“샌드위치네.”
“시, 싫어해?”
“그럴 리가.”
닉은 노아가 포장지를 벗겨 준 샌드위치를 손에 받아 들며 크게 한 입 물었다. 우물우물 입 안에서 씹히는 맛 또한 여전히 익숙한 것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늘 바빴고, 무척 바빴으며, 쉴 틈 없이 바빴으니까. 안 그래도 바쁜 그녀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일을 제쳐 두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으니, 되도록 다니엘이 자신을 조용히 찾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경찰에 연락했을까? 경찰에 연락했다면 곤란해지는데……. 음식물을 씹어 삼키며 그가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다니엘이 자신을 찾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애초에 닉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목말라, 노아.”
“응, 여기….”
“네가 먼저 마셔 봐.”
“아, 아무것도 안 탔어!”
“못 믿겠으니까 빨리 마셔 보라고.”
샌드위치 하나를 단 몇 입 만에 해치운 닉이 손등으로 슥슥 입술을 털어 내며 웨슬리를 노려보았다. 그 탓에 웨슬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한 번도 연 적 없는 생수병을 열어 꼴깍꼴깍 입 안으로 들이부어야 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도 10분이 넘도록 웨슬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닉이 느릿하게 손을 내밀었다. 물을 달라는 손짓에 웨슬리가 허겁지겁 그의 손안으로 물병을 쥐여 주었다.
그러나 닉 클레이튼의 요구는 단순히 식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야.”
“응…?”
“나 언제 풀어 줄 건데?”
“…….”
그 질문에는 계속해서 입을 꾹 다무는 노아 웨슬리를 이젠 답답하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한숨을 내쉬지도 않았고, 짜증을 내지도 않으며 닉은 덤덤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 위에 튜빙 밴드 좀 걸어 줘.”
“뭐?”
“곧 경기가 있어서 이대로 몸 굳으면 안 된단 말이야.”
닉이 손목을 묶은 줄이 걸린 천장의 철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튜빙 밴드는 스트레칭 코드로도 불리는데, 쉽게 말해 고무 밴드였다. 수영이 아닌 지상 운동을 할 때 자주 하는 것으로, 코드를 잡아당김으로써 근육을 발달시키고 재활하는 목적의 운동이었다.
풀어 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지하실에 수영장이 있을 리도 없으니 차선책으로나마 튜빙 밴드가 필요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물이 좋았지만, 단순히 물속에 들어가는 것만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수영이라는 종목에 깊이 빠져 있었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물길을 가로지르는 수영은 그의 호승심과 딱 들어맞는 운동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신장이 긴 것을 빼고는 신체적으로 수영하기에 타고난 몸은 아니었다. 그런 닉이 고교 수영 챔피언이 된 데에는 훈련까지도 즐기는 노력파의 기질 덕이 컸다.
보통 출전하는 주 종목은 400미터지만, 그는 1500미터까지도 출전하는 장거리 수영 선수였다. 훈련을 쉬고 있는 것에 조바심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닉이 노아를 바라보며 삐죽 입을 내밀었다.
“너 나 사랑한다며. 빨리.”
노아 웨슬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마다 질색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닉은 쉽게 사랑을 들먹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을 들먹이며 원하는 바를 말할 때면 노아 웨슬리는 꼼짝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달려 나가 튜빙 밴드를 사 온 웨슬리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닉의 앞에 섰다. 철봉에 줄을 매달기 위해서는 닉이 앉아 있는 침대를 밟고 올라서야 했으므로, 웨슬리는 주저하던 끝에 침대 위로 발을 올렸다.
“니, 니키, 가운데에… 걸면 돼?”
“응.”
닉은 제 옆에서 철봉에 밴드를 걸고 있는 웨슬리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정도 거리라면 간단히 그의 목을 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를까? 얼마나 힘을 줘야 목뼈를 꺾지 않고 의식을 잃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꺾어도 정당… 정당 행동? 아무튼. 정당한 일 아닌가?
잠시 법정에 서서 무죄를 주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던 닉이 욕설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 그는 밴드를 고정시키기 위해 낑낑거리는 웨슬리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내렸다.
“어.”
“왜, 왜…?”
“아니야, 계속해. 내가 잡아 줄게.”
닉이 상체를 들어 노아 웨슬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갑작스레 자신을 껴안아 오는 손길에 웨슬리가 천장을 뚫고 나갈 듯 크게 움찔했다. 그가 꼼지락대며 밴드를 묶던 손도 멈춘 채 굳어 파르르 떨기만 하는 동안, 닉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목을 조르던 것을 포기한 닉의 눈에 들어왔던 건 웨슬리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핸드폰이었다. 제길! 검은 핸드폰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흘려 웨슬리의 신경을 끌 정도였다.
자신의 핸드폰은 웨슬리가 가져간 건지 눈을 떴을 때부터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웨슬리의 핸드폰은 닉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기회였다.
“니키, 다, 다 됐…… 흡!”
“잘했어, 노아.”
닉이 노아의 허리 옆 부분을 손으로 꽉 잡았다. 반사적으로 웨슬리가 튀어 오를 것처럼 떠는 사이 그의 손은 빠르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완전히 빼냈다.
자신의 뒷주머니로 핸드폰을 옮겨 꽂는 데에 성공한 닉이 씩 웃었다. 허리에 걸려 있던 손이 느릿느릿하게 살갗을 스치며 아래로 떨어졌다. 웨슬리의 입에서 아쉬움인지 흥분감인지 모를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굿 보이. 선선히 흘러나온 칭찬에 웨슬리가 빨개진 얼굴로 후들후들 떨며 침대를 내려왔다. 엉거주춤 선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웨슬리를 보며 닉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런데 있잖아.”
“으…응.”
“아래 급해 보이는데.”
“윽…….”
“남자 새끼가 내 앞에서 자위하는 꼴은 보고 싶진 않으니까 다른 곳에서 빼고 오지 그래.”
그 짓궂은 목소리에 웨슬리가 안 그래도 빨개진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며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곧 생리 현상을 이겨 내지 못하고 몸을 돌려 부랴부랴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 장치들이 모두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닉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 냈다. 그러나 곧 뒷주머니에서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든 그의 입에서는 신경질적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길, 비밀번호.”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하고 머리는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왜 비밀번호가 있을 거란 생각을 가장 먼저 하지 못했지? 눈앞의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미처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다. 이래서야 가지고 있어도 쓸 수 없다. 노아 웨슬리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비밀번호를 추리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1, 2, 3, 4…. 맥락 없이 번호를 눌러 대던 닉이 이를 갈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짜증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런 숫자나 눌러 보던 그는 이내 핸드폰을 내렸다. 화면에는 1분간 핸드폰이 비활성화된다는 알림이 또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멍하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던 닉의 귓가에 문에 설치된 락이 하나씩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침대보 아래에 핸드폰을 숨긴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웨슬리는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보고 있는 투명한 벽안과 마주하고 주춤했다.
“노아.”
닉이 태연하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근데 혹시 덤벨은 없어?”
질문의 형태를 띠고는 있었으나 실상 요구에 가까웠다. 없다고 고개를 내젓던 웨슬리가 자신을 가만히 주시하는 시선에서 그건 물음이 아닌 명령이었음을 깨달았다.
“사, 사 올게….”
“응.”
몸을 돌려 지하실을 빠져나가는 웨슬리를 지켜보던 닉이 불현듯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있잖아. 너 생일이 언제야?”
“내, 내 생일?”
웨슬리는 뜻밖의 질문에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12월… 6일.”
“겨울이네.”
그가 별다른 감흥 없이 툭 내뱉었다. 어떤 다른 말이 이어질까 기대하며 기다리던 웨슬리에게로 닉이 뭐 하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러 안 가?”
노아 웨슬리는 그 물음에 후다닥 몸을 돌렸다. 쾅! 지하실의 문이 다시 한번 닫혔다.
***
노아 웨슬리는 지하실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통하는 천장의 문을 붙잡았다. 힘을 줘 밀어내자 열리는 문틈으로 오후의 눈부신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가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덤벨….”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막막함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조금 당황한 채였다. 강제적인 방법으로 끌고 오기는 했지만, 그는 니콜라스 클레이튼으로부터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니키를 배려해 그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모두 구비해 두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니키와 더 오래 함께하며, 그와의 거리도 보다 더 좁힐 수 있지 않았을까? 준비한다고 했는데 허술했던 모양이다. 닉의 길쭉한 손가락이 잡았던 허리춤을 다시금 만지작거리며 웨슬리가 빨개진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부모님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풋볼 팀에 들어가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앞에 서면 긴장해 말부터 더듬고 마는 소심한 성격 탓에 시니어가 된 지금까지 부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왔다. 그날은 부원들로부터 제시카 해밀턴의 파티에 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던 날이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으나 나가지 않으면 또 어떤 괴롭힘이 쏟아질지 몰랐다. 그는 억지로 나간 파티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에 니콜라스 클레이튼을 만났다.
“후….”
자신 대신 다이빙대에 올라 유려하고 능숙한 동작으로 점프하던 클레이튼의 모습을 떠올린 웨슬리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자리했다. 클레이튼은 자신을 동정하지도, 방관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비참한 꼴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에게 구원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그전까지 그는 자신의 세계에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던 부류였다. 그런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자신을 괴롭히지도, 동정하지도, 우습게 여기지도 않았다. 주변 사람들을 대하듯 무심하지만 다정한 태도도 곧잘 보여 주었다. 닉의 그러한 태도가 마치 자신의 세계에 들여보내 주는 것 같아서 노아 웨슬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다니엘 레널드만 없었더라면.
웨슬리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기는 다시 금세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상점가로 나가서 혹 누군가의 눈에 띌까 겁이 났으나, 웨슬리에게는 닉이 내린 지령이 있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차를 운전했다. 주말이어서인지 마트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차들이 빼곡히 서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웨슬리는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핸들 위로 이마를 박았다.
빵-!
커다란 클랙슨 소리가 고막을 쨀 듯 울렸다.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토할 것만 같았다. 끔찍한 기분이었지만, 돌아가면 지하실에서 자신을 기다릴 닉을 생각하니 흥분감을 참을 수 없었다.
노아 웨슬리의 납치극은 지극히 충동적이었으나, 계획은 그렇게까지 허술하게 짜이지 않았다. 일주일이 넘게 닉 클레이튼을 따라다닌 결과 그가 살고 있는 곳부터 시작해 그의 생활 패턴까지 외울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니엘 레널드가 닉 클레이튼과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레널드와 닉이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였다.
훈련을 마치고 귀가할 때였다. 다니엘 레널드는 차에서 내리는 닉의 뺨을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이내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닉이 짜증스럽게 주먹으로 어깨를 밀쳐도, 다니엘 레널드는 그저 소리 죽여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닉 클레이튼을 내려다보던 그 시선!
노아 웨슬리는 닉으로부터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그 시선에 녹아든 짙은 감정을 알아차렸다. 끔찍했다! 그게 누구든 닉 클레이튼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도무지 참을 수 없어졌다.
노아 웨슬리는 둘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끔찍한 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휘적휘적 집 안으로 들어가는 닉을 뒤쫓는 다니엘 레널드가 그의 곁에 있기에 단 한 점의 모자람도 없어 보였던 것이다.
-니키, 이어서 하지 않을래?
-그동안 연습은 좀 했어?
-너…….
자신을 노려보는 레널드를 향해 나른하게 웃는 닉 클레이튼. 다니엘 레널드의 짧은 한숨, 닉의 어깨에 걸쳐지는 팔, 집 안으로 함께 들어가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순식간에 가슴께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러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쿵쾅쿵쾅, 거친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이 기분은 뭐지?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감각이 노아 웨슬리를 감쌌다. 열패감은 익숙했고, 모멸감은 늘 그를 쫓아다녔는데도 여태껏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열등감이 휘몰아쳤다. 그는 그때, 어떻게든 다니엘 레널드가 모르는 곳에 닉 클레이튼을 숨겨 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니키도 어쩌면, 어쩌면… 자신을.
타이밍은 다니엘 레널드가 경기를 위해 다른 학교로 떠난 금요일뿐이었다. 노아 웨슬리는 상상만 하던 욕망을 현실에 구현했다.
“니키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지하실에 단 CCTV를 통해 그를 지켜보기 위해 핸드폰을 찾던 웨슬리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
어디 있지?
“분명, 주,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는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웨슬리가 핸들을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없다.
핸드폰이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 뒷주머니에 넣어 놨었는데….
웨슬리의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졌다. 푸르죽죽한 그의 낯은 마치 죽은 사람을 마주한 이의 것과 같았다. 핸드폰이 없다면, 떨어트렸다는 소리인데 뒷주머니 깊숙이 넣어 놓은 핸드폰을 떨어트릴 일은 드물었다.
만약 있다면, 화장실을 갔을 때와.
“니, 니, 니키.”
얼굴이 파리해지다 못해 이가 맞부딪히며 딱, 딱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노아 웨슬리는 급하게 핸들을 틀어 다시 지하실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닉이 가지고 있다면 낭패였다. 노아 웨슬리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오직 닉 클레이튼이 탈출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가능성뿐이었다. 지하실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 닉이 없다면? 안 돼……. 덜덜 떨리는 입술을 짓씹은 웨슬리가 액셀 위로 올린 발에 꽉 힘을 주었다.
겨우 손에 넣었는데.
이제야 겨우 그 다정한 미소를 나만이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시야가 뿌옇게 물들며 일직선의 도로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아 웨슬리는 눈에 힘을 주며 더더욱 빠르게 차를 몰 뿐이었다. 주거 단지를 지나, 근교로 나가다 보면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은 집이 보였다.
그 앞에 차를 세운 웨슬리가 다급히 뛰어내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바짝 땅에 엎드렸다. 풀이 무성히 자란 땅을 더듬거리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풀 사이에는 문의 손잡이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는 지하실에는 분명히.
“헉, 헉.”
분명히….
“니, 니키, 제발, 제발….”
분명히 닉 클레이튼이 있을 것이다.
끼이익-
문을 밀어 올린 웨슬리가 아래로 펼쳐진 계단을 허겁지겁 밟았다. 잘그락, 잘그락 잠금장치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손이 마비라도 된 듯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 잠금장치까지 모두 풀어낸 웨슬리가 문고리를 쥐고 그대로 밀었다.
벌컥,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니…키.”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도 닉 클레이튼은 선명하게 눈에 박혀 들어왔다. 안도와 초조함이 섞인 웨슬리의 목소리가 닉에게 닿았다. 웨슬리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며 핸드폰의 행방을 찾고 있을 때였다.
“덤벨은?”
웨슬리의 불안함과는 전혀 동떨어진 물음이었다. 고개를 기울인 닉 클레이튼이 지금까지와 같이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안 사 온 거야?”
“미, 미안.”
“날 사랑한다더니.”
그가 짧게 혀를 찼다. 그에 웨슬리는 움찔 몸을 떨었으나, 이전처럼 허겁지겁 지하실을 빠져나가 닉이 원하는 물건을 가져다주려 하지는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보면 닉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 듯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핸드폰이 있을 만한 곳은 이곳뿐이었다.
웨슬리가 천천히 닉에게로 다가섰다.
“사랑하는 건 정, 정말이야, 니키. 사 오지 못해서 미안해.”
“어… 그래.”
닉이 떨떠름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올곧게 웨슬리를 향해 있었다. 그건 탐색하기보다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시선이었다. 평소라면 그 시선을 눈치채고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부터 침대, 그리고 닉 클레이튼까지 정신없이 훑는 웨슬리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
아뿔싸. 내려오면서 문을 닫아 두지 않았었나? 웨슬리가 헛숨을 들이켜며 커다래진 눈으로 뒤를 돌았다.
***
닉 클레이튼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정확히 노아 웨슬리가 지하실을 나선 지 2분 뒤의 일이었다.
닉은 웨슬리가 지하실을 나서고 문이 완전히 잠기자마자 다시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1분이 지나 비활성 상태가 풀린 핸드폰을 붙잡고 그는 조금 전 들었던 그의 생일을 눌렀다.
“아, 제길!”
그러나 비밀번호는 노아의 생일도 아니었다.
짧은 욕설을 짓씹듯 내뱉은 닉 클레이튼이 핸드폰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금빛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마음은 초조했지만, 손가락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 남지 않은 기회를 또 놓칠 수는 없었다. 노아 웨슬리가 완전히 바보가 아닌 이상 핸드폰이 없어졌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닉이 손가락을 움직여 핸드폰의 양옆에 툭 튀어나온 버튼을 꾹 눌렀다. SOS. 긴급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빨간 버튼이 화면에 반짝이며 떠올랐다.
“하.”
그러나 닉 클레이튼은 그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경찰이 개입되어 이번 일에 대한 수사라도 진행된다면 곤란했으니까. 단순히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자며 섣부르게 행동하기엔, 닉 클레이튼은 가진 것이 많았다.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느릿하게 다시금 비밀번호를 풀어 보고자 화면을 노려보고 있던 때,
지이잉-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운 전화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아 번호가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나열된 숫자들은 어딘가 낯익은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닉 클레이튼은 선택해야 했다. 전화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걸려 온 전화를 받았을 때 만약 노아 웨슬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기회일지, 이 전화를 받는 것이 또 다른 기회가 될지 지금에서는 알 수 없었다. 망설임 끝에 닉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
그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노아 웨슬리?]
“하…….”
이윽고 닉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은 깊은 안도를 담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음성이었다. 낮고 부드럽지만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은 무게감 있는 목소리. 그러나 묘하게 평소보다 까칠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네가 니키랑 같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잠깐, 잠시만, 대화할 수 있을까?]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가 제법 절박했다.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간절하게 부르는 사람이었나. 그것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닉은 꽉 주먹을 쥐었다.
그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몸에 바짝 들어갔던 긴장이 녹아내렸던 탓이다. 닉이 입을 열었다. 주먹을 꾹 쥐었다 펴며 내뱉는 그의 말에는 숨소리가 가득 섞여 있었다.
“늦었잖아, 대니.”
닉 클레이튼은 그 순간 자신이 그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꼬리를 따라 들려오는 다니엘의 얕은 한숨 소리, 발소리, 갑작스레 들이차는 바스락거리는 소음들. 숨죽인 채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닉은 자신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다친 곳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전보다 한층 잠겨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잠시 입을 달싹거리던 닉이 왜인지 모르게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없, 어.”
[하아…….]
한 차례 긴 한숨이 토해졌다. 다니엘 레널드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무거운 숨소리가 발끝에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닉은 곧 상념을 떨쳐 냈다.
중요한 건 다니엘 레널드가 노아 웨슬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내뱉은 말에 의하면 자신이 자의든 타의든 노아 웨슬리에게 붙잡혀 있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닉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사이, 다니엘이 한발 먼저 물었다.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
“모르겠는데. 아마… 지하인 것 같아.”
[웨슬리와 함께 있어?]
“아니. 지금 뭘 사러 나갔어. 근데 핸드폰이 없어진 거 알면 바로 돌아올걸.”
[전화 끊지 마. 찾아낼 테니까.]
알겠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수화기 너머가 분주해졌다. 컴퓨터 자판인지 뭔지를 타닥거리며 두드리는 소리도 들려왔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지 작지만 드문드문하게 타인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닉 클레이튼은 그 소리를 들으며 마냥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실, 닉은 다니엘이 자신을 찾아내고 나면 빈정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건 굳이 상상력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쉽게 납치까지 당하다니, 너 진짜 걸어 다니는 물고기 아니야? 하며 비아냥거리는 나른한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레널드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이 보여 주듯이 말이다.
닉과 다니엘의 사이에는 평소에는 곧잘 흘러나오던 농담이나 시비조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둘은 서로의 숨소리에 의지한 채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들을 찾고 있었다.
그때였다. 겨우 안도하고 있던 그의 귓가에 계단을 내려오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야, 대니. 노아가 돌아왔어.”
[전화. 끊지 마.]
잘그락거리며 잠금장치가 하나둘씩 풀리고 있었다. 잇새로 튀어나온 그의 목소리는 퍽 차분하게 들려서, 닉은 괜스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들킬 수도…….”
굳게 잠겨 있는 철문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닉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렸다. 침대보 안으로 밀어 넣어 숨긴 타이밍에, 벌컥 문이 열렸다.
“니…키.”
땀에 흠뻑 젖은 노아 웨슬리가 문에 몸을 지탱하듯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나 초조함 따위가 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가 묘하게 자신이 다니엘을 부르던 것과 닮아 있어, 닉은 어쩐지 짜증스러워졌다.
그러나 그것을 고스란히 표출하지는 않았다. 지하실과 자신을 샅샅이 훑는 시선이 찾고 있는 것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핸드폰.
고스란히 읽히는 노아 웨슬리의 행동을 지켜보던 닉이 짐짓 태연하게 입을 뗐다.
“덤벨은?”
그 물음에 노아 웨슬리가 몸을 움찔 떨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알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허둥지둥 뛰어온 모양이었다.
닉의 눈이 시큰둥하게 가라앉았다.
“안 사 온 거야?”
“미, 미안.”
쯧. 짧게 혀 차는 소리가 지하실 가득 울렸다.
“날 사랑한다더니.”
중얼거리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깊은 힐난이 섞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감흥 없는 어조에도 어쩔 줄 몰라 하던 노아 웨슬리였으나, 이번은 예외였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다시 달려 나가는 대신,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건 정, 정말이야, 니키. 사 오지 못해서 미안해.”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닉이 조용히 손을 움직여 핸드폰을 몸의 뒤로 숨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아 웨슬리가 무슨 말을 하든 하나도 귀에 닿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머릿속을 집어삼키고 있었으므로.
“어… 그래.”
핸드폰이 그의 시야에서 완벽히 벗어났는지 고개를 내려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의 눈에 띌 만한 짓을 하는 대신 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아 웨슬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밀빛 시선이 닉과 바닥과 침대보 사이사이를 오가며 초조하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점점이 주근깨가 박힌 웨슬리의 파리한 살갗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로 젖은 얼굴을 보면서도 닉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제길. 황당하게도 자신은 다니엘 레널드를 믿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내겠다고 말하던 그를. 정말로 찾아낼 것이 분명한 다니엘 레널드를.
웨슬리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지하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핸드폰을 찾는 데에 열중하던 노아 웨슬리도, 닉도 동시에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머리칼이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왔다. 닉은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레, 레널드…?”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가 지하실에 찾아온 불청객의 이름을 담았다. 딱딱 이가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늘 단정한 차림을 유지하던 그답지 않게 다소 흐트러진 꼴이었다. 그러나 하나도 의식하지 못한 듯 다니엘은 웨슬리를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다 이내 지하실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척까지 다가온 그를 웨슬리가 떨리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다니엘은 마치 웨슬리가 인간이 아닌 장애물이라도 된다는 듯 손을 뻗어 옆으로 밀쳐 낼 뿐이었다.
“윽!”
그 무자비한 손길에 저항 한 번 못 하고 떠밀린 웨슬리가 바닥을 짚으며 넘어졌다. 작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서 낑낑거리는 웨슬리에게 시선을 주는 것은 다니엘이 아닌 닉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할 일이 정해져 있는 로봇처럼 그대로 주머니에서 휴대용 나이프를 꺼내 닉의 팔을 묶고 있는 줄을 끊어 냈다.
줄이 끊어지면서, 내내 묶여 있던 탓에 줄 모양 그대로 붉은 자국이 남은 손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닉 클레이튼은 손이 풀리자마자 묶인 다리도 풀기 위해 곧바로 허리를 숙였으나, 여태껏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하던 다니엘 레널드는 갑작스럽게 굳어 있었다.
“……씨발.”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본 듯한 태도였다. 평소 그라면 쓰지 않을 거친 욕설에 닉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왜?”
“다친 곳 없다고 했잖아, 니키.”
“이건 다친 게 아니고…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거 푸는 거나 도와줘.”
차갑게 식은 다니엘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가 제 발을 들어 보였다. 철컹! 그러나 발목이 묶인 탓에 발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중간에서 멈추었다.
꽉 묶인 벨트를 풀어내며 욕설을 삼키는 동안 얼어 있던 다니엘도 몸을 숙여 그의 다른 쪽 발목을 쥐었다. 닉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그러나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니엘 레널드는 묵묵히 발목을 묶은 가죽 체인을 끊는 것에 집중했다. 닉은 그 어깨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입고 있는 검은 티셔츠가 땀 때문인지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달려온 건가? 닉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한쪽 발을 묶은 가죽을 거의 찢어 버리다시피 푼 닉은 아래에서 들려온 뜬금없는 말에 멈칫했다. 다니엘 레널드의 사과는 왜인지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이 찾아 줘서 고맙다고 인사해도 모자랄 상황이었으니까. 설핏 커졌던 닉의 눈이 다시 가느스름해졌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뇌가 멈춘 사람처럼 버벅거리던 그는 뒤늦게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흘렸다.
-늦었잖아, 대니.
다니엘의 전화를 받고 안도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지껄였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생뚱맞은 사과는 제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그 묵묵한 사과에 쉬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구태여 답을 듣고자 한 말은 아니었던 듯,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있던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한 빛을 띤 채 일렁였고, 오직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는 닉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됐으니까, 나와 봐.”
닉은 묶인 발목을 풀어내고도 여전히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다니엘의 어깨를 잡았다. 다니엘은 어깨를 잡은 손에 많은 힘을 주지 않아도 순순히 밀려났다. 닉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뻐근한 신체를 빠른 동작으로 스트레칭했다.
이내 그의 푸른 시선은 아직도 멀거니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노아 웨슬리에게로 향했다. 왼팔을 들어 반대쪽 어깨를 잡은 닉이 오른팔을 한 바퀴 크게 빙 돌렸다.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이 납치를 당한 것에 대한 회포를 풀고 싶다면, 그래, 어울려 줄 수 있었다. 구하러 와 준 것이 고마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닉 클레이튼에게는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 대상은…….
“노아.”
닉은 쓰러져 있는 노아 웨슬리에게로 다가가 상체를 숙였다. 팔을 뻗어 웨슬리의 멱살을 틀어잡은 그가 이내 손쉽게 웨슬리를 들어 올리며 주먹을 뻗었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다.
퍽! 살갗이 맞부딪히는 타격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둔탁한 소리가 지하실 안 가득 울렸다. 닉 클레이튼이 빠득, 이를 갈았다.
주먹은 왼뺨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다. 노아 웨슬리의 몸이 크게 흔들렸으나,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닉의 손 탓에 뒤로 나자빠지지는 않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웨슬리는 파르르 떨며 고개를 바로 하려고 했으나, 이어진 주먹질에 결국 정신을 잃었다. 한 대 더 때려 줄 생각이었으나 닉 클레이튼은 결국 팔을 뻗지 못했다.
입가가 터져 피가 내비친 노아 웨슬리의 꼴이 마냥 불쌍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서도 흐, 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웨슬리를 내려다보던 그가 복잡한 얼굴로 몸을 틀었다.
뒤에는 자신을 말없이 주시하는 다니엘이 있었다. 눈이 마주친 다니엘은 왜 도중에 멈추냐는 듯한 낯으로 무표정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그를 바라보던 닉이 무의식중에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다니엘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뭔가를 하기에 앞서 걱정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러했다.
시합을 나가기 직전에도, 사고 친 것을 들켰을 때도, 심지어는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제 마음을 표현할 때도 깊이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집에서 크게 혼나지 않고 자란 덕도 있겠지만, 아마 천성에 가까울 것이다.
처음 나갔던 시합에서 2등을 한 이후로, 닉 클레이튼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주 종목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건 그가 가장 빠르게 골 지점에 손이 닿기 전까진 멈추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벌어진 일에 고민하기보다는 행동부터 하고 봤다.
그 단순한 성격을 보며 다니엘 레널드는 그의 삶이 얼마나 순탄할지에 대해 여러 차례 감탄한 전적이 있었다. 따라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닉 클레이튼의 얼굴은 적어도 자신이 보기에는, 처음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경찰에게 연락했어?”
“……?”
잠시 뜸 들이다 나온 물음에 다니엘이 가진 의아함은 한층 짙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했으나 그는 우선 자신의 의문은 접어 두었다. 그리고 닉 클레이튼이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을 꺼냈다.
“당연하지. 납치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어서 단순히 실종으로 치부되기는 했지만….”
그가 말을 잇다 말고 시선을 내리며 축 늘어진 노아 웨슬리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웨슬리는 닉의 손에 매달린 채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제 여기 생겼잖아. 증거.”
다니엘 레널드는 닉 클레이튼을 찾기 위해 제법 여러 사람을 이 일에 끌어들였다. 그중 가장 합법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그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어 줄 변호사가 있었다.
노아 웨슬리를 이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그가 알아서 잘 처리해 올 것이다. 그는 매번 일을 크게 키우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준 유능한 사람이었다.
“안 돼.”
다니엘은 노아 웨슬리가 저지른 짓을 쉽게 넘길 생각 따위 없었다.
“노아 웨슬리가 물에 약을 탔어.”
닉 클레이튼이 새로운 변수를 던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무슨 약?”
“그건 모르겠어. 그러니까, 안 돼.”
두서없이 잘린 말이었으나 다니엘은 닉이 하는 말에 내포된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
노아 웨슬리가 그에게 약을 먹였고, 닉 클레이튼은 그 약의 정체를 모르며, 다음 달에는 수영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대회는 다니엘이 알기로 내년에 열릴 올림픽의 출전권이 걸려 있었다. 문제가 없는 한 그는 앞으로도 수영을 계속할 생각일 것이다.
다니엘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수영을 하지 않는 닉 클레이튼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약이라고…….”
잠시 굳어 있던 다니엘이 노아 웨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닉 클레이튼의 불안감을 잠재워 줄 이는 정작 정신을 잃은 채였다.
만약 자신이 당한 것이었다면, 다니엘 레널드는 이번 일을 아주 조용히 넘어갔을 것이다. 아주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노아 웨슬리를 처리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물론, 노아 웨슬리를 이대로 풀어 줘야겠다는 자비로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던 닉이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 레널드는 비웃음인지, 실소인지 모를 재수 없는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닉은 오히려 그 평소와 같은 미소에 안도를 느꼈다.
이어진 말에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너답지 않게 머리 쓰려고 하지 마. 어차피 좋은 수는 떠올리지도 못할 테니까.”
“야, 이… 개자식아.”
“한결같이 늘지 않는 네 어휘력도 감탄스러워.”
“너는 진짜 대체 뭐가 문제야?”
닉이 웨슬리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을 털듯이 놨다. 그가 주먹을 꾹 쥔 채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하여튼, 저 새끼는 예뻐해 줄래야 도무지 예뻐할 수가 없다. 다니엘 레널드는 그러한 시선을 받고서도 묵묵히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 뿐이었다.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야.”
정말로 걱정할 만한 건 전혀 없다는 듯 평이한 목소리를 흘리며.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는 닉에게로 시선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동시에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듯 손가락을 움직이던 그는 이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 듯한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스토킹 신고를 하려고 하는데요.”
부드러운 목소리는 스토킹을 당하는 이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담담한 면이 있었다. 물론 그건 당연했다. 스토킹을 당한 것은 다니엘 본인이 아닌 닉 클레이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스토킹을 당한 장본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내용과 말투를 보니 경찰인 것 같은데…. 닉 클레이튼은 자신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노아 웨슬리와 다니엘 레널드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눈물진 얼굴에는 핏자국도 얼룩처럼 묻어 있었고, 빨갛게 부은 뺨은 누가 봐도 그가 피해자처럼 보이게끔 했다. 아 젠장! 닉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노아 웨슬리는 하필이면 영양실조에 걸린 미어캣 같은 모습으로 기절해 있었다.
“내가 납치범 같은데?”
닉이 다소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전화를 마친 다니엘이 그 중얼거림을 듣곤 픽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밖으로 나가면 내 차가 있어. 키도 꽂혀 있을 테니까 먼저 집으로 가, 니키.”
“그게 무슨….”
“일을 조용히 해결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다면 너는 위험 요소야. 집에 가 있어.”
닉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다니엘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다니엘만 두고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닉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고스란히 파악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집에 돌아가서 풀 속에서 헤엄치고 있으면 돼.”
다니엘 레널드는 닉 클레이튼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지점에서 닉이 흔들리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줄지와 같은 것 말이다.
“수영, 하고 싶잖아. 그렇지? 닉 클레이튼.”
그건 단순히 지금 당장 수영을 하고 싶냐는 물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문제없이 수영을 계속하고 싶다면 순순히 제 말을 들으라는 것에 가까웠다.
그 강압적인 말은 닉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계속 수영을 하고 싶었으니까. 다니엘을 어두운 지하실에 남겨 두고 오는 것이 찝찝했으나, 그는 말없이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에는 이미 주홍색의 노을이 깔려 있었고, 아주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 같은 햇빛은 눈부시기 그지없었다.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지상을 밟은 닉이 익숙한 캐딜락에 몸을 실었다.
삐용- 삐용-
차에 시동을 걸고 브레이크를 풀 때 즈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묵묵히 차를 몰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금 당장 물속에 잠겨 들고 싶었다.
***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단순한 것이 좋았다. (로.벨)머리 아프게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딱 질색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에는 닉을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다니엘 레널드를 제외하고는.
“닉! 글쎄, 다니엘을 스토킹했다는 사람이… 노아 웨슬리래.”
카페테리아에 앉아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노려보던 닉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
바로 옆에 앉아 속삭이는 제니에게 그가 시들하게 대꾸했다.
정정해 줄 수 있는 사실이 몇 개 있었으나, 구태여 정정하겠다고 입을 열어 봤자 쉬이 믿어 주진 않을 것이다. 단순히 제니뿐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이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속보! 다니엘 레널드, 스토킹에 납치 협박…」
속보가 터진 것은 일요일 밤이었다. 아 참,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은 납치당하고 꼬박 하루를 잠들어 있었다. 깨어나서도 하룻밤을 보냈으니, 다니엘 레널드에게 구출된 것은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뉴스는 그날 밤에 올라왔다.
수요일, 단순히 지라시를 싣는다기에는 제법 구독자가 많은 주간지에도 제법 그럴듯한 얘기가 자세하게 실렸다. 이미 편집까지 대부분 끝이 났을 주간지의 코너 하나를 독점한 다니엘 레널드의 영향력에 놀랄 틈은 없었다. 그 황당한 뉴스는 다니엘이 직접 뿌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닉 클레이튼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노아 웨슬리라니까?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날 리가. 그보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는 왜 들어 있는지 모를 주머니 속 사탕을 꺼냈다. 그리고 껍질을 까 제니의 손에 막대를 쥐여 준 후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노아 웨슬리의 재판 결과는 벌써 나왔다. 2년간 다니엘 레널드에게 접근 금지 명령.
이미 판결이 나왔음에도 웨슬리와 다니엘은 그 사건이 있던 후로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웨슬리야 그렇다 쳐도 다니엘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마주치기 쉽지 않았고 몇 번 늦은 밤에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바쁜 듯해 말을 걸기 쉽지 않았다.
학교는 오지 않으면서 다니엘은 꼬박꼬박 아침에 자신을 태워다 주었다. 학교가 끝날 때 즈음에는 데리러 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면서는 비밀스럽게 했던 약물 검사에서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희소식까지 들려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네가 이렇게 나설 필요 없었던 건데.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잖아.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멍청한 건 너고, 니키.
다니엘 레널드는 평소처럼 웃었다. ‘너는 이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그저 하던 대로 올림픽 티켓을 따 와.’ 하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한없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 클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도 도무지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네가 평범한 수영 특기생이었다면 모를까, 니키, 너는 주목을 끌 수밖에 없다는 거 잊지 마. 엠마가 보스턴으로 날아오는 걸 원하는 건 아니지?
그러나 그가 엄마를 들먹일 때면 닉은 꾹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너는 왜 주목을 끌고 있는 건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말이다
젠장.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의 약점이 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다니엘의 약점이 뭔지는 알았다. 그는 시선에 예민했다. 매스컴에서 자신에 대해 떠드는 것에 민감했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명성에 조금의 흠이라도 생기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가 만들어 낸 왕자님 같은 이미지는 분명 그를 구속하고 있었음에도, 다니엘은 그러한 이미지를 연기해 내는 데에 쉬이 수긍했다.
그런 다니엘 레널드였기에 닉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일도 아닌데 스스로의 민감한 부분까지 감수하며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나? 닉은 정말이지, 다니엘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아등바등하는 게 이제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결국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제니, 이거 답 뭐야?”
“그 부분은 저번 시간에 이미 한 거야, 닉.”
닉이 제니의 앞으로 교과서를 밀며 물었다.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닉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좀 알려 줘, 이번에도 숙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방과 후에 남게 될지도 몰라….”
“다니엘에게 물어보지? 겸사겸사 언제쯤 학교에 다시 나오는지도 물어봐 주면 좋고.”
“…….”
“다니엘이 나오지 않으니까 학교가 유독 어두침침한 것 같아. 보스턴 스쿨의 태양이 져 버린 것처럼 말이야.”
다니엘. 며칠째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이름이자 지겨울 정도로 곱씹었던 이름이 다시금 튀어나왔다. 잠시 멈칫했던 닉은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반박할 줄 알았던 그가 말없이 몸을 일으키자 제니는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좋아. 아무래도 직접 물어봐야겠어. 제길,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그가 책을 가방 안에 쓸어 담았다.
…멍청이 선언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뒤에서 조용히 읊조리는 제니의 말이 들려왔으나, 닉은 서둘러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꼬리가 잘린 고민만이 그가 떠난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