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Daniel Leonard Side (4/10)

외전 1. Daniel Leonard Side

니콜라스 클레이튼과 처음 만난 것은 여덟 살이 되던 여름이었다.

그해 여름을 되짚을 때면 눈앞에는 햇빛을 받아 수면의 물결이 일렁이며 빛나는 광경이 펼쳐지곤 했다. 할아버지인 맥의 저택은 말리부 해변이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클레이튼은 늘 풀이 아니면 바다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니, 얌전하게 굴 수 있지? 네가 가진 이름에 해가 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알았니?”

맥의 저택에 가기 전,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손바닥과 엄하게 내려다보는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고분고분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그제야 내게 향했던 걱정의 눈초리가 거두어졌다.

여름 방학 동안 할아버지 댁에 가게 된 것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머리를 쓴 결과였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엄격하게 구는 부모님으로부터도, 집 밖으로 발을 떼기만 해도 따라붙는 파파라치로부터도.

맥의 저택 또한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어도 그의 집으로 간다면. 그렇다면 숨 막히게 이어지던 일상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떨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게 바로 니콜라스 클레이튼이었다.

“인사하렴, 니키. 여기는 내 손자인 다니엘 레널드야. 너와 동갑이란다.”

클레이튼이라면 익숙했다. 클레이튼 씨는 할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였고, 따라서 부모님들끼리의 왕래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알았으니까. 그러나 정작 니콜라스 클레이튼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더운지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다 맥의 소개를 듣고 자신을 발견하자 멍청한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해변을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가 휘어질 때마다 철썩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그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먼저 인사해 왔다.

“안녕, 다니엘!”

“…안녕, 클레이튼.”

마지못해 화답하며 그를 따라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클레이튼을 만난 것이 기쁜 건 아니었다. 기쁘지 않더라도 굳이 솔직하게 굴 필요는 없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필요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당위성 또한 없었다. 솔직함보단 타인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함을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대니도 이번 여름 방학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했단다. 둘이 잘 지낼 수 있겠지?”

할아버지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말했으므로 얌전히 대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클레이튼이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클레이튼?”

그는 아버지의 사냥에 따라나설 때면 봤던 소동물처럼 잽싸게 사라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풀장에 가까워질수록 허물처럼 벗어 던진 옷가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집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들이켰다. 신발, 셔츠, 바지까지 잔디밭 위를 구르는 옷을 따라가자 널찍한 풀장이 나왔다.

“…클레이튼?”

수영장의 맨 밑바닥에 클레이튼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은 아마 공포에 가까울 것이다. 죽은 건가? 그런데 익사한 사람은 물에 떠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물속에 있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한 의문들은 곧 클레이튼이 죽은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부 압도당하고 말았다.

만약, 클레이튼이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그가 죽을 때 함께 있었던 내게는 어떤 꼬리표가 붙게 될 것인가. 뒷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당장 풀장의 끄트머리에 바짝 엎드려 수면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클레이튼!”

옷을 젖게 만들기는 싫었으나 그를 꺼내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꼭 그를 자신이 구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깊은 곳에서 아른거리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파하!”

머리부터 밖으로 나온 클레이튼이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내며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나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왜 불러, 다니엘?”

클레이튼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네가, 물에 빠진 줄 알았…….’ 더듬거리며 대꾸하던 나는 이내 스스로가 얼마나 당황해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결과적으로 클레이튼은 물에 빠져 죽기 일보 직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괜한 걱정을 하느라 애꿎은 바짓단만 적신 꼴이 됐다. 옷차림이 흐트러졌다는 것에서 오는 불쾌감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때 클레이튼의 손가락이 수영장 주변에 내려앉은 후덥지근한 공기를 가로지르고 다가와 볼을 찔렀다.

“다니엘? 다니엘 레널드?”

“아, 응.”

“너도 들어와!”

클레이튼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건넸다. 나는 물기 어린 파란 눈동자가 햇빛을 따라 넘실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싫어. 옷이 젖잖아.’ 하고 대꾸했다.

“그럼 옷을 벗고 들어와.”

“속옷만 입고 풀에 들어가라고?”

뭐가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클레이튼을 보며 결국에는 빈정거림에 가까운 물음을 꺼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속옷만 덜렁 걸친 나신으로 풀에 뛰어들었다. 젖은 어깨를 잠시간 바라보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꼴로 수영장에서 물장난을 치는 게 걸리면 어머니는 단호한 목소리로 훈계하실 게 분명했다. 그러나 풀에 팔을 걸친 채 다리를 휘적거리고 있는 클레이튼은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였다.

아….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뭘 고민하고 있는 거지? 설핏 조소하는 사이 덥석 팔이 잡힌 것은 삽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팔이 잡혔음을 깨닫고 힘을 주어 뿌리치기도 전에 앞으로 끌어당겨지는 강한 힘에 의해 몸이 쏠렸다. 고꾸라지는 와중 시야에 들어온 수면의 푸른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풍덩!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그나마 다행인 건 물에 빠지는 도중 급하게 뻗은 팔에 풀장의 벽이 잡혔다는 것이다. 이윽고 양손으로 벽을 붙잡은 나는 힘을 줘 풀장에서 빠져나왔다. 지상을 밟자마자 엎드린 자세로 약한 기침과 함께 먹은 물을 뱉어 냈다.

젖은 옷에서 떨어져 나온 물이 바닥을 적시는 것을 보며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런 꼴을 남이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나는 거센 감정에 휩싸여 클레이튼을 찾았다. 그는 자신이 한 짓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물길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며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왜 나갔어, 다니…… 악!”

그리고 풀장에서 나와 내게 다가온 클레이튼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휘둘렀다. 그건 매번 억눌러 왔던 분노가 최초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뺨을 맞은 클레이튼은 뒤로 넘어진 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아직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뒤늦게 자신이 맞은 뺨을 감싸 쥐며 입을 벌리는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밀려온 것은 처음으로 남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주저앉아서 날 멍청하게 올려다보는 클레이튼을 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쾌함이 솟아올랐다. 해방감에 가까운 감정이 속을 시원하게 식히는 것만 같았다.

“하하.”

흘러나오는 웃음을 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클레이튼을 보며 미소 짓자, 멍하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억울함과 화로 얼룩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내게로 달려들었다.

웃느라 잠시 방심한 사이 다가온 주먹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다. 그에 따라 클레이튼은 몸을 내던져 나를 넘어트렸고 내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두르려는 그를 떨치기 위해 나 또한 다시 주먹을 쥐어야 했다.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느라 정신없이 얽혀 있던 사이 우리를 발견한 할아버지가 달려왔다. 시야에 그가 들어오자마자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이런, 정신이 나갔던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거지?

“맙소사. 이게 무슨 짓이야! 닉, 대니!”

그를 보고 반사적으로 멈췄던 내 복부로 클레이튼의 마지막 일격이 파고들었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클레이튼과 내게 엄한 고함 소리가 내리꽂혔다.

“당장 멈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옷의 매무새를 내려다보다 얼굴에 침울한 기색을 내걸었다.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는 듯한 아이의 울적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그가 다가오자 조심스럽게 용서를 구했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사과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지, 대니.”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클레이튼, 아니 니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며 몹시 미안한 목소리로 사과를 전했다.

“미안해, 니키.”

닉 클레이튼은 사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질겁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할아버지를 흘긋 살피더니 머뭇거리며 나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아, 이럴 수가, 얼마나 멍청하고 순진한지.

내 손을 맞잡는 닉 클레이튼을 향한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양팔을 뻗어 잔디밭을 굴러다니느라 흙이 묻은 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니키의 어깨가 움찔하더니 딱딱하게 굳어 가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너와 친구로 지내고 싶어.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

“뭐, 뭐?”

어설픈 닉 클레이튼은 결국 덜미를 잡혔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터치다운. 귓가에 흥분한 심판이 부르는 거친 휘슬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그라운드 위에서 공을 쥐었던 나는 늘 또래의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엔드 존으로 향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수비진을 속수무책으로 함락시키는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가 졌어, 멍청아.”

나의 승리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줄 믿고 있던 것만이 나의 유일한 패착이리라.

***

그 이후로도 닉 클레이튼은 여름이 되면 말리부의 바다에서 뛰어놀곤 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올 때면 당연하다는 듯 할아버지의 저택에 머물렀고, 여름에만 오는 손님을 나는 한 해 내내 기다렸다. 그는 비록 나를 볼 때마다 짜증 난다는 얼굴을 했지만, 결코 무시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중학교 입학을 앞둔 여름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닉 클레이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홈스쿨링을 권하는 부모님께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니키를 처음 만났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하나의 드라마와 두 개의 영화를 찍으면서 스크린 데뷔를 공고히 한 이후였다. 앞으로도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고자 한다면 홈스쿨링을 택해야 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늘 그래 왔듯이 부모님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대신 예정에 없던 보스턴행을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예정에 없던 여정이었을까? 나는 니키 클레이튼에게 주먹을 내질렀던 그 여름 날 이후로도 종종 그가 나를 멍청하게 올려다보던 얼굴을 떠올리고는 했다. 따라서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충동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으리라.

중학교에서 다시 만난 클레이튼이 나를 보며 기겁하던 얼굴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보스턴으로 오기 전 당시 내는 곡마다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던 보이 밴드가 출연한 시트콤을 함께 찍었다. 그 덕에 보스턴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도 나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고, 또래에게 호감을 사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모든 것이 쉬운 가운데 오직 니키만이 예외였다.

“오늘은 끝나고 과학 숙제하기로 한 거 잊진 않았겠지.”

“넌 내가 매일 잊어버리기만 하는 줄 알아?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서…… 어, 헤일리!”

내가 닉 클레이튼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가 헤일리 웨스콧을 바라보는 시선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 전까지 클레이튼은 내게 있어 지극히 필요에 의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기보다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에 익숙한 내게 클레이튼은 한결같이 가식 떨지 말라며 비웃어 왔기 때문이다. 그 비웃음에 똑같이 화답하다 보면 결국 싸움으로 번질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 클레이튼은 금세 잊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는 단순하리만큼 솔직하고 장난스럽고, 가벼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만큼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는 내게 무심한 시선을 보내왔다. 따라서 그가 헤일리 웨스콧을 부르며 얼굴 위로 그린 어떠한 다정함, 그 애정을 발견했을 때 나는 혼자 동떨어져 사막의 모래 위로 추락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니키, 웨스콧을 좋아해?”

“……뭐?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돌이킬 수 없는 짓이라는 건 알았지만, 몸은 치졸한 마음을 따라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닉 클레이튼을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고자 하는 건 단지 그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으면 했다. 살기 위해 먹듯이, 숨을 쉬기 위해 클레이튼을 이용하는 것에 그쳤으면 했다.

불행하게도 살면서 처음 가져 본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번 머릿속에 파고든 의문은 끊임없이 답과 근거를 찾는 방향으로 움직이게끔 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헤일리 웨스콧에게 처음으로 먼저 다가갔다. 그녀와 둘이 있는 것을 발견한 클레이튼은 그날 하루 종일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먼저 말을 걸어도 듣는 척 마는 척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방과 후에는 늘 그렇듯 수영장에 있었다.

수면에 생긴 파동 위로 햇살이 올라타 빛을 내고 있었다. 수영장은 뛰어난 연출가가 보석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였고, 클레이튼은 그중에서도 가장 공들인 작품이었다. 가끔 그를 보고 있자면 나를 위해 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졌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그저 자신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졌다는 사실에 목이 말라 왔다.

“레널드, 헤일리가 네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는 게 정말이야?”

한참을 말없이 헤엄치던 그가 물에서 고개를 빼내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입에서 나온 말에 목이 메어 잠시간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풀장에 팔을 걸치곤 나를 올려다보는 닉 클레이튼의 눈매가 설핏 찌푸려질 때 즈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짤막하게 흘러나온 긍정에 그는 ‘그렇구나.’ 하고 한숨에 가까운 대답을 꺼냈다. 니키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골 지점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발길질에 따라 수면 위로 물이 첨벙거리며 튀어 올랐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닉 클레이튼은 곧잘 다른 여자애에게 관심을 돌렸다는 것이다. 불행인 점도 똑같았다. 니키는 곧잘 다른 여자애에게 관심을 보였다. 빌어먹게도.

“레널드! 이 개자식…….”

그가 관심을 보인 세 번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날,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책을 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에 그는 더 열이 받은 듯 씩씩거렸지만, 사실 그건 내게 보내는 조소에 가까웠다.

너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너는 자꾸 나를 우스워지게 만들어.

“니키, 이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

“캐넌이 나를 선택한 걸 어떡하겠어.”

“망할, 너 진짜 짜증 나!”

여섯 살 어린애일 때도 해 본 적 없던 질투가 그와 연관되는 순간 빈번하게 솟구쳤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닉 클레이튼을 왜 좋아하는 걸까.

그러한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불에라도 덴 듯이 화들짝 그 의문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문을 품는 것이 어쩌면 신성 모독과도 같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건네주는 말을 교리로 삼게 되기까지,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한 이후 포기해야 했던 것 중 하나를 꼽자면, 닉 클레이튼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너를 좋아해.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가 다른 여자애에게 호감을 가질 때마다 번번이 훼방을 놓는 치졸하고 터무니없고 머저리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니키는 정말 지겹지도 않게 타인을 쉽게 좋아하고는 했다. 그런 그의 주변 사람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이라면 제시카 해밀턴을 뽑을 수 있겠다. 닉 클레이튼이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하는 것처럼, 그녀도 타인에게 스킨십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제시카 해밀턴을 완벽히 싫어하게끔 만들어 준 계기는 중등부의 졸업 시즌에 일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밤, 나와 닉은 그의 할아버지인 클레이튼 씨의 저택에 숨어들어 몰래 스카치 한 병을 훔쳐 나와 곧장 우리 집으로 내달렸다. 요란스럽게 발을 구르며 계단을 올라 방 안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했던 머그잔을 꺼냈다.

이 멍청한 계획을 꾸몄던 니키는 몹시 흥미로운 얼굴로 위스키 병을 기울여 머그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컵에 반쯤 담긴 술이 조명을 받아 출렁거렸다. 내가 먼저 컵을 입에 가져다 대자 그제야 니키도 잔을 기울였다.

고작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을까 싶은 짧은 찰나였다. 멈칫한 그는 기울였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가에 슬쩍 고이는 투명한 물기를 보며 나도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컵을 바닥에 내려 두었다.

그건 단지 호기롭게 할아버지의 위스키를 훔쳐 오자는 계략을 꺼냈던 주제에 한 모금에 눈물을 보이는 그가 지나치게…….

“울어, 니키?”

지나치게 귀여웠기 때문에 웃지 않고는 못 배긴 것뿐이었다. 니키 클레이튼은 나의 물음에 발끈하며 고개를 들었다.

“웃기지 마, 내가 왜 울어?”

“그래, 안 울었다고 쳐.”

“안 울었다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 안 울었다고!”

귀여워. 화를 내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맙소사, 멍청한 니키 클레이튼. 그리고 더 멍청한 나.

그를 보며 실없이 웃고 있는 나를 깨닫자 익숙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기가 찬 나머지 맥이 풀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를 말리기 위해 짐짓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알겠으니까 그만 마시자. 들키면 외출 금지로 끝나진 않을 것 같으니까.”

“레널드, 가식은 집어던져. 누가 본다고 그래?”

돌아온 대답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을 들킨 모양이다. 닉 클레이튼은 정말이지 어떤 부분에서는 놀랄 정도로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너는 좀 주변을 의식해, 멍청아.”

그 외의 부분에서는 전무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듯한 모습이 니키 클레이튼을 늘 여유로워 보이게끔 했다. 비아냥거리거나 그의 성질을 긁어내는 행동을 할 때면 곧이곧대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아무 생각 없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게로 내질러지는 주먹을 휙 피하자 짜증 난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던 그는 이내 입가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내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쩐지 불길했다.

“그러는 너는? 헤일리랑 사귀면서도 키스 한 번 안 했다며?”

“그게 왜.”

“하하, 멍청이! 나는 했어, 제시랑.”

“……뭐?”

제길.

“입맞춤 이상을.”

짓궂게 웃는 닉 클레이튼의 얼굴을 보면서도 도무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뢰밭에 뚝 떨어진 듯 귓가에 요란한 굉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방금 들은 말을 정리해 보고자 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진 지 오래였다.

키스를? 제시카 해밀턴과?

빌어먹게도 불길한 예감은 늘 비껴 나가는 일이 없었다.

“왜?”

왜 하필 제시카 해밀턴과. 그러한 의문이 맴돌았으나 나는 사실 그 물음의 답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니키와 함께 클레이튼 씨에게서 어른들 몰래 술을 훔친 것처럼, 그들에게는 같은 수준의 불장난이었을 것이다.

“닥쳐. 듣고 싶지 않아.”

너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니키 클레이튼은 늘 내게 사막을 헤매다 만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고, 동시에 그것이 사실은 신기루였음을 지치지도 않고 알려 주는 존재였다.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자, 푸른 눈동자 또한 나를 사납게 마주 보아 왔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뭐야?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실소와 함께 대꾸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상한 건 나였다. 안에서 역겹게 울렁이는 감각이 분노인지, 자괴감인지, 배신감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걸 니키에게 느낀다는 게 옳지 않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네가 이 모든 감정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나에게 다정하게 굴지 말았어야지. 완전한 외면도 완전한 애정도 주지 않는 그 어설픈 호의가 오히려 애태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왜. 도대체 왜 하필이면 너야, 클레이튼.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어, 레널드?”

고개를 들자 애매하게 올라간 니키 클레이튼의 입술이 들어왔다.

끈질기게 괴롭혀 오던 의문들은 그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번번이 무의미해졌다. 나는 이따금 그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멍청한 건 너지, 니키.”

내가 자신을 보면서 하는 수만 가지의 더러운 생각들을 어떻게 눈치채지 못할 수 있는 건지.

그의 말과 행동은 계획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태도는 어쩌면 전염되는 형질을 띄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건 니키 클레이튼의 방식이었으니, 그의 입술을 향해 돌진한 것도 분명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입술을 가져다 대자 잠시 멈칫한 듯하던 그는 곧 예상하지 못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내 아랫입술을 물은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던 대응에 나는 반사적으로 탄식을 흘렸고, 그 틈으로 니키 클레이튼은….

혀를 넣었다. 그건 분명히 혀였다. 침범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몸짓으로 살덩이는 입 안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입맞춤에 맞서듯 혀를 얽어 오는 니키 클레이튼의 행동에 오래 놀라 있을 수는 없었다,

아래로 쏠리는 열기를 감지하자마자 나는 뒷걸음질 치듯 그를 떼어 낼 수밖에는 없었다.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마찬가지로 취기가 올라 평소보다 붉은 얼굴로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내가 이겼어.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 동정은 내 상대가 안 된다고.”

“……너!”

킥킥거리며 자신을 비웃던 그는 이내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는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하고 울컥했지만, 이미 정신을 놓은 사람의 멱살을 잡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스륵 잠이 들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의 상체를 낚아챈 나는 그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머리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탓에 결이 좋은 밀빛 머리칼이 이마 위로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감은 눈매를 나도 모르게 매만지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죄를 짓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여전히 진정할 줄 모르는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지이익, 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 안으로 손을 넣자 평소보다 즉각적인 쾌락에 몸을 움찔 떨 수밖에는 없었다. 죄책감을 동반한 쾌락은 자극적이었다.

“윽…….”

입에서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집어삼키며 손을 움직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머리가 마비된 것처럼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탁, 탁, 발기한 기둥을 문지르며 정신없이 헐떡였다. 아마 그가 눈을 뜬다면 이런 나를 발견하고 혐오스러운 얼굴로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러한 공포는 오히려 찌릿한 전율만 가증시킬 뿐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 며칠 전, 그의 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닉 클레이튼의 자는 얼굴을 보며 수음했다.

***

캘리포니아로 돌아간 이후 세 편의 영화를 찍었다. 분량이 크지 않은 조연을 빼고 나면 하나는 천재 수학자가 남몰래 좋아했던 제자이자 조수의 역할이었고, 다른 건 하이틴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코미디였다.

그중 로맨스코미디 영화가 상상한 것 이상의 히트를 쳤다. 따라서 영화가 개봉된 무렵에는 별수 없이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추고 다녀야 할 일이 많았다.

“오늘 시간 있어요? 테리의 저택에서 근사한 파티가 열리는데.”

그럴 때면 이렇게 에둘러 말하는 제안부터 시작해 더러는 노골적인 섹스어필도 쏟아졌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택지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토크 쇼 도중 주어진 쉬는 시간에, 팔을 붙잡아 오는 셀린 허드슨을 향해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안타깝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그녀의 손끝을 힘을 주지 않고 쥐어 팔에서 떼어 냈다. 그러자 허드슨의 얼굴이 설핏 굳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는 아직 미성년이에요, 허드슨.”

이어진 말에 그녀는 내가 웃기지도 않는 변명을 꺼낸다는 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곧 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적나라하게 훑어 내렸다. 미성년이라는 변명은 소용없다는 듯 그녀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타마라와 연애설이 난 건 봤는데. 오늘 밤 파티에는 그녀가 오지 않을 거예요.”

연애설이 난 상대가 오지 않는 파티이니 안심하고 자신과 어울리자는 발칙한 제안에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내가 타마라와 스캔들이 난 걸 봤다고 말했다. 못 본 사람이 있다는 게 더 믿기지 않는 일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가십은 미국 전역에 1초면 퍼졌고, 타마라는 가십 만들기가 특기였으니.

그녀를 비롯한 스캔들에 적극적인 반박 없이 미적지근한 태도로 넘긴 것은 에블린이 주장한 것처럼 단순한 이미지 메이킹 때문이 아니었다. 먼저 첫 경험을 했다며 내게 한껏 승자의 웃음을 지어 보이던 니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게 승자의 위치에 있을 테지만, 그걸 구태여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는 자고 싶지 않다는 것도, 기실 그를 제외하고서는 그다지 아무도 내 성욕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것도.

“가족 모임이 있어요.”

곤란한 낯으로 웃으며 조곤하게 말하자 그녀는 아쉽지만 수긍한 듯 보였다. 그녀만이 아니라, 대부분 부모님을 들먹거리면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부모님의 이름을 써먹는 건 이럴 때뿐이었지만, 제법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할리우드에서 제이콥 레널드와 오브리 레널드의 이름은 썩 가치가 높았다. 어린 자식에게 이름을 더럽힐 짓은 하지 말라며 수년을 세뇌하듯 가르쳐 왔을 정도의 가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니키 클레이튼은 이럴 때면 ‘가식은 집어치워.’ 하며 코웃음을 치고는 했다. 몸통을 묶고 죄여 오던 쇠사슬을 풀어 헤치는 듯한 그의 말을 들으면 원래의 규칙들은 하등 무의미한 것들이 되고는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니키를 붙잡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저택으로 갈까? 아니면 호텔로?”

“호텔로 가 주세요.”

토크 쇼가 끝나고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라타며 에블린에게 답했다.

“뒤에 파파라치가 붙은 것 같은데. 아, 마일스 저 개자식.”

사이드 미러로 뒤에 바짝 따라붙은 차를 확인한 그녀가 짧게 욕설을 짓씹었다.

마일스라면 나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터트린 전적이 몇 번 있는 이였다. 평소라면 그 이름에 금방 기분이 저조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파파라치보단 피로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토크 쇼는 늦은 시간 실시간으로 방영되었기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도 관리자에게 붙잡혀 있다 보니 벌써 하늘은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약은?”

“아직 남아 있어요.”

수면제가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밤들도 생겼다. 불면증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할리우드로 돌아와 다시 연기 활동을 재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사실 수면제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러려면 2천 마일이 넘는 거리를 넘어서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아.

클레이튼. 네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궁금해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면 너는 아마도 비웃고 말겠지.

“다니엘, 너도 그런 음악을 좋아했나?”

핸드폰에서 새어 나온 노래를 들은 에블린이 불현듯 물어 왔다.

“좋아한다기보다는, 글쎄요….”

그와 함께했던 여름에 들었던 노래였다.

니키 클레이튼의 취향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었다. 어떨 때는 깜짝 놀랄 만큼 웅장한 클래식을 듣기도 했고, 가사의 반이 슬랭 용어로 점철된 힙합을 듣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여름 유행곡을 지겨울 만큼 돌려 듣기도 했다.

말을 얼버무리며 핸드폰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메시지 어플을 열어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 낮에 보낸 메시지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늘 그렇듯이.

「잘했어, 니키.」

짧은 메시지를 보내는 데 얼마나 무수한 고민과 기다림이 있었는지를 클레이튼이 듣는다면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웃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원래 지긋지긋할 정도로 단순하고, 웃음이 헤프고, 그렇게 아무에게나 곁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실은 그에게 직접 말하고 싶었다. 경기가 시작되는 총성이 울리면 가장 빠르게 물에 뛰어들어, 가장 빠르게 골에 다다르는 니키 클레이튼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자신보다는 덜 눈부신 메달을 목에 걸고 내려오는 그에게 꽃을 내밀어 축하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악의 없고 구김 없는 얼굴로 웃어 주리라.

“에블린.”

창밖을 내다보는 채로 그녀를 불렀다.

“저 보스턴으로 가야겠어요.”

그 말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

“가능한 최대한 빨리요.”

그 순간 그의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도 끔찍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로 한 것은 불가피하고도 필연적인 결정이었다.

***

다시 만난 클레이튼은 이전과 같았지만, 다른 면도 분명히 존재했다.

“다니엘 레널드. 섹스하고 싶어? 나랑?”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순식간에 이루어진 터치였다. 가장 빠르게 물길을 가로질러 와 벽면을 짚은 니키 클레이튼은 승자의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클레이튼 본인이 출전을 신청하지 않았던 경기라는 점에서 당황스러운 기색이 드러났지만 말이다.

어릴 때는 그와의 싸움을 두고 그라운드 위에서 벌어지는 풋볼 경기에 비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그와 자신의 주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있었다. 그라운드 위에서라면 그에게 호락호락 터치다운을 내어 주지 않을 테지만, 니키 클레이튼은 물속에서 초 단위를 다투는 경주를 펼치는 사람이었다.

그와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물속에 끌려들어 갈 수밖에는 없었다. 그건 마치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정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물속에서라면, 결과는 정해진 대로 나의 완패였다.

자신이 향하고자 하는 길에 망설임이 없는 그의 성격은 물속에 있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물을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니키의 움직임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대부분 그가 첫 번째 턴을 돌고 날 때쯤엔 이미 다른 선수들과 눈에 띄는 격차를 벌린 뒤였고, 그런 니키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치열한 접점에서도 그의 승리를 예견하곤 했다.

닉 클레이튼이 쾌락에 무척이나 약한 편이라는 점이 내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와의 섹스가 좋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결코 할 수 없지만,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자기기만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쾌락에 졌을 뿐이었다.

그는 내게 유일하게 성적인 충동을 끓어오르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의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늘 그래 왔듯이.

“좋아해.”

“…….”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먼저 지쳐 잠이 든 그를 끌어안은 채 꾹 눌러 담기만 했던 말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밤새도록 말해도 지닌 감정의 크기에 비하면 언어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갈증을 해소시키지는 못한 채 감정만 더더욱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던 것이다.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의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니키 클레이튼에게 이 감정을 드러내고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는 이기심 또한 있었다. 아마 그가 들으면 발끈해 주먹을 쥐고 자신을 노려보리라.

멍청한 니키 클레이튼, 그리고 더 멍청한 나. 비록 그는 멍청하고, 단순하고, 아무에게나 쉽게 흘리고 다니기는 하지만, 클레이튼은 그런 눈치 없는 부분이 귀여웠다. 가증스러운 구석도 분명히 있었지만 말이다.

-너도 못하는 게 있었어, 왕자님. 조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테크닉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하니까.

그의 이죽거림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될 때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니키 클레이튼은 처음부터 잘했는지, 제시카 해밀턴에게 찾아가 따져 묻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벌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게 저번 주의 일이었다. 나는 신이 난 부원들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보스턴에 있는 다른 학교와의 게임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다른 학교의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하게 된 것이 불만스러웠다. 니키를 혼자 집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뒤에서 함성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으나 돌아보지 않고 차를 몰았다.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었다.

이겼다는 승리의 기쁨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받지 않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핸들을 잡은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벌써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왔을 테니 아마 이 시간까지 물속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닐 테고.

핸들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핸들을 딱, 딱 두드리고 있었다. 그 무의식적인 행동을 뒤늦게 발견하고 입가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하.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초조해지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제길.”

니키 클레이튼은 아마 모를 것이다. 앞에서는 잘난 척하는 주제에 사실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머저리라는 사실을.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리는 대신 잠시 가만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런 한심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비아냥거리며 장난을 걸면 니키 클레이튼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웃어 줄 것이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집 안은 어두웠다. 불도 전부 끄고 있다니, 자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연락을 받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갔다. 안으로 들어서며 유난히 인기척이 적은 집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이내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니키 클레이튼이 돌아왔다면 집 앞에 세워진 차가 하나 더 있어야 했다. 그러나 들어오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 않았나.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 그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짧게 노크했으나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을 때.

“니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음. 낮은 침음이 목을 긁으며 튀어 나갔다.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다시 니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여전히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뭐지?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으나, 그의 곁에 없을 때 느끼는 불안함은 익숙했다.

참을 수 있었다. 그가 곧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하룻밤을 꼬박 새워 기다려도, 니키 클레이튼은 돌아오지 않았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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