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Take your marks
길지 않은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닉 클레이튼이 파티 다음 날 일찍 일어나는 일은 전무후무했다. 그러나 자고로 다니엘 레널드란 닉의 일상에 늘 새로운 발자국을 찍어 내는 인물이었다.
“니키.”
“…….”
“일어나.”
침대에 파묻혀 잠들어 있던 닉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일 것이 분명한데도 상대는 전혀 잠기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그 음성의 주인은 지금쯤 캘리포니아에 있어야 했다. 토요일에 떠나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기로 했으니, 아무리 일러 봤자 아직 비행기도 타기 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아마 환청일 것이다.
닉은 숙취로 인한 환청을 떨쳐 내기 위해 침대보에 잔뜩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런 차에 다가온 남자가 닉에게로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던 닉의 몸이 곧장 천장을 보고 바로 눕게 되었다.
눈을 찌르는 조명의 빛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는 닉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조명보다도 밝은 이채를 띠고 있는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명을 등지고 있어 그림자 진 얼굴이 왜 이렇게까지 뚜렷하게 보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짙은 이목구비가 아침부터 쓸데없이 잘생겼다. 닉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스러움에 침음을 삼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평소와 다르게 풀 네임을 부르는 웃음기 없는 목소리에 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데자뷔였다. 어디선가 이미 경험해 본 듯한 광경에 닉이 쭈뼛 굳은 몸으로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정해진 극본처럼 얼굴 위로 올라오는 손을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탁-.
“……좋은 아침.”
다니엘이 돌아왔다. 예상보다 이르기는 했지만, 얼마 전처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이가 빠득 갈릴 뿐이다. 닉이 팔을 들어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댔다.
“퍽도 좋은 아침이다, 미친 소시오패스 새끼야. 너는 그 손버릇 좀 고쳐.”
“네가 정신을 못 차리니까 깨워 주려고 한 거잖아.”
“누가 깨워 달래?”
다니엘이 소름 끼치게 다정한 손길로 이마 위로 흐트러져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닉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그의 손길을 쳐 냈다.
“그럼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 니키.”
“제길. 일요일이잖아!”
늦잠 좀 자게 내버려 둬. 닉이 짓씹듯 거친 음성을 토해 냈다.
“하지만 오늘은 같이 근력 운동 하기로 했잖아.”
연이은 잠투정에 다니엘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갔다. 닉은 그 말에 뒤늦게 다니엘과 했던 일요일 운동 약속을 떠올릴 수 있었다. 떠올리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닉은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오늘 하루 운동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는 혼자서 잘만 갈 새끼가 왜 이렇게 귀찮게 굴지?
“못 해. 머리도 아프다고.”
투정처럼 흘러나온 목소리에 다니엘이 금방 삐딱한 대꾸를 꺼냈다.
“너는 정말 한결같아. 아니, 보면 볼수록 학습 능력이 없는 것 같아. 금붕어도 너보단 똑똑하겠지. 말해 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은 왜 자꾸 마시는 거야?”
“내가 마신 거 아니거든? 난 거기 술이 있는지 몰랐어!”
망할 다니엘 레널드.
파티에 갔다가 4시가 넘어 귀가했고, 막바지에 다다라 제시가 준 음료에는 술까지 섞여 있던 모양인지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컨디션인 자신에게 운동을 가자고 깨우다니. 닉 클레이튼은 그런 다니엘이 오늘따라 더 귀찮게 느껴졌다.
“제발 더 자게 해 줘.”
“……니키.”
다니엘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에 미련이 남은 것을 보니 끝까지 자신을 깨우는 걸 포기하진 않은 듯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다니엘의 무게감을 느끼며 닉이 휙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더듬더듬 다니엘의 허리춤을 타고 올라갔다. 다니엘의 상체를 꽉 끌어안고서는 힘을 주어 아래로 끌어당겼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을 법한데도, 다니엘은 잠시 멈칫했을 뿐 순순히 닉이 끌어당기는 대로 몸을 침대에 눕혔다.
“자, 이제 눈을 감아 다니엘.”
“대니.”
“…그래 대니. 닥치고 눈 감아.”
닉이 험악한 말투로 다니엘에게 으르렁거렸다.
다니엘은 가소롭다는 듯 작게 코웃음 쳤다. 나지막한 조소에 그의 허리춤을 끌어안은 닉이 팔에 꾹 힘을 주었다. 제 말대로 순순히 따르라는 명령이 함축된 몸짓이었다.
더 빈정거릴 줄 알았던 다니엘은 생각보다 얌전히 안겨 있었다. 숨을 쉬는 건지 마는 건지 옆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방 안은 다시금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아늑한 침묵 속에서 닉은 비로소 다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얼핏 머리 위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그 숨이 점차 아래로 내려와 뺨을 간질이고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 위로도 와 닿았지만, 그때는 이미 닉 클레이튼이 깊은 잠에 든 이후였다.
***
해가 뜰 때 잠들었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둑하게 해가 진 이후였다.
언제부터였지. 닉은 다니엘이 마치 베개인 양 그의 위로 엎어져 자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는 얼떨떨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평소에는 잠버릇이 없는 편인데, 왜 하필 오늘따라 다니엘 레널드의 몸 위로 기어올라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상체를 압박하던 무게가 사라져서인지 다니엘 또한 금방 잠에서 깨어났다.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이 느릿하게 눈을 뜨는 레널드를 보며 닉이 어색하게 얼굴을 쓸었다.
머리가 조금 뜬 것 빼면 다니엘의 모습은 방금 자다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끔했다. 재수 없지만, 왕자님이라는 별명이 괜히 나온 건 아닌 듯했다.
“몇 시지….”
괜스레 시선을 돌린 닉이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핸드폰을 찾았다. 손을 뻗어 침대 가장자리로 밀려간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켜자, 이미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제길. 시간을 보자마자 뒤늦게 허기가 졌다. 푹 잔 덕에 숙취는 말끔히 사라져 있었지만, 배고픔은 지울 수 없었다. 닉의 울적한 얼굴을 보며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아차린 다니엘이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저녁 해 줄게.”
“집에 먹을 거 있어?”
“낮에 하우스키퍼가 왔다 간 것 같던데.”
“진작 말하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니엘을 바라보던 닉이 이어진 말에 환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먼저 방을 빠져나가는 다니엘의 뒤를 따라나서며 그가 하품을 했다.
“아. 곧 경기 시작하겠다. 오늘 어떤 팀 시합이지?”
“LAW와 NYS.”
“…그럼 소파에서 먹자. 경기 보면서 먹게.”
닉이 눈을 굴리며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때는 꼭 식탁에 앉아 예의 바른 몸짓으로 식기를 들었다. 그러나 둘만 있을 때는 예외였다. 닉은 중등부 시절, 다니엘과 함께 TV 앞에 앉아 저녁을 대충 먹으며 풋볼 경기를 보던 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레널드도 마찬가지였는지 대꾸는 없었으나 제법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걷으며 주방으로 들어간 레널드가 달그락거리며 저녁을 차리는 동안 닉은 소파에 껑충 뛰어 앉아 TV를 켰다. 채널에서는 평소 보지 않는 토크 쇼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니키, 받아.”
지루한 토크 쇼가 끝나고 경기 시작 전 광고들이 잇따라 흘러나올 때 즈음, 레널드가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동그란 플레이트 위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닉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냄새 좋잖아. 너 요리할 줄 알았어?”
“그냥 하다 보니까… 하게 된 거야. 얼른 먹어 봐.”
닉이 그에게서 포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따끈한 라자냐와 샐러드를 한 번에 포크로 찍어 크게 한 입 물었다. 맙소사.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맛있었다. 허기진 배를 금방 달래 주는 포만감에 닉의 입가에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그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니엘도 천천히 포크를 들었다.
“시작한다.”
“오늘은 뭘 걸래, 니키?”
일요일은 NFL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오늘은 닉이 응원하는 팀인 뉴욕 스파크스NYS와 다니엘이 응원하는 팀인 로스앤젤레스 울프스LAW의 게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니엘과 함께 경기를 본 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뉴욕 스파크스가 이겼던 날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악독한 다니엘 레널드는 경기를 볼 때마다 어떤 팀이 이기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내기라는 말 앞에서 닉은 도망칠 수 없었다.
“…뭘 원하는데?”
그렇게 닉은 다니엘과의 내기에서 진 대가로 그를 업고 등교한 적도 있었고, 얼굴에 그가 그린 낙서를 한 채 파티에 간 적도 있었으며, 수영 대회에서 다니엘이 골라 준 형광 분홍색 수영 팬츠를 입고 출전한 적도 있었다.
닉은 다니엘이 이번에는 무슨 요구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번에도 상상했던 것 이상의 좆같은 것을 들고 올 거라는 것이었다.
“빚.”
다니엘은 세심하게 조각된 얼굴에 상아처럼 매끄러운 미소를 걸었다.
“내가 이기면 오늘 이전의 빚을 갚아, 니키.”
빠르지도, 그렇다고 아주 느리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닉의 목을 틀어쥐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그러니까 다니엘 레널드와 선을 넘기 전이었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개소리하지 말라며 빈정거렸을 것이다. 닉 클레이튼은 분명 육체적 욕구에 쉽게 무너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잃고 아무나와 침대를 구르고 다니지는 않았으므로.
따라서 이건 어디까지나 다니엘 레널드의 잘못이었다. 그가 자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시험해 온다면 닉으로서는 할 수 있는 대응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이기면?”
“그런 건 가정해 본 적 없는데.”
닉의 호승심 어린 물음에 다니엘이 산뜻한 웃음을 걸고 대꾸했다. 열받네. 닉이 그를 노려보며 접시를 들지 않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명치에 가볍게 꽂아 넣었다.
“윽.”
“엄살 부리긴. 빨리 내가 이기면 뭘 들어줄 건지 생각해, 멍청아.”
“멍청이는 너고.”
다니엘이 이미 깨끗이 비운 접시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흐음, 그의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닉이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TV 화면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다니엘이 녹색 눈동자를 굴려 닉과 시선을 맞췄다. 자신을 뚜렷이 응시하는 눈을 보며 닉은 왜인지 모르게 움찔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네가 이기면…….”
“이기면?”
“박을 수 있게 해 줄게.”
“뭐?”
닉의 입에서 멍청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턱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그는 그저 멀거니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황당함이 가득 담긴 시선이 다니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르륵 훑었다.
계속 집에 있던 탓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이마를 덮은 단정한 검은 머리칼, 그 아래로 보이는 짙은 눈썹, 깊게 파인 아이홀과 그 아래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매. 긴 속눈썹과 얇은 쌍꺼풀이 예쁘장하게 보일 법도 하건만, 눈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 탓에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뚝 곧게 선 콧대를 따라 내려오면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가 보였고, 단단한 턱선 밑 굵직한 목에는 누가 봐도 남성임을 숨길 수 없는 울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꽈배기 모양이 굵직하게 들어간 베이지색 니트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팍을 하나도 숨기지 못했다.
빌어먹을. 꼴리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지금 누구한테 박으라고?
“그럼 이기든 지든 둘 다 벌칙 아니야? 나는 별로 너한테 박고 싶지 않은데?”
“박히는 게 더 좋으면, 네가 이겼을 때 박….”
“입 닥쳐!”
닉이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어 다니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에 꾹 입을 틀어막힌 다니엘은 잠시 눈이 커지나 싶더니 곧장 또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능청스러운 미소에 닉이 씨근덕거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넌 진짜 단단히 미친놈이야. 당연히 내가 너한테 박고 싶어 할 거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음…….”
입을 틀어막고 있는 탓에 다니엘의 음성이 손바닥을 간지럽혀 왔다. 그 기묘한 감각에 닉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손바닥이 입 위에서 떨어지자, 다니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평소처럼 입 안에 박아도 돼.”
“……야.”
“박히는 것보단 박는 게 쉽지 않겠어, 니키?”
미친놈이 지껄이는 미친 소리에 닉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는 걸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괜찮아. 원래 처음이 어려운 거니까.”
“씨발…. 그래, 해. 하자고.”
어느 쪽에 걸든 유쾌하지 않은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닉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TV로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과의 제정신 아닌 대화를 하는 동안 경기 시작 전 예식은 모두 마쳤는지 뉴욕 스파크스가 리시브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런 정신 나간 새끼들. 닉이 초조한 낯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뉴욕 스파크스의 공격력은……. 하아, 비록 제가 응원하는 팀이기는 했지만, 쓰레기였다. 그래도 수비 진영에 제법 괜찮은 신인들이 들어온 거로 아는데, 공격권을 먼저 잡는 것을 보면 멍청한 꼰대들이 고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제길!
경기는 그의 예상대로 1쿼터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닉이 잘근잘근 씹던 입술을 움직였다.
“대니.”
다니엘 또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했다.
“왜?”
“너 나중에 프로로 뛸 생각이지?”
그 물음에 잠시간 대답이 없던 다니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그 묵직한 대답을 닉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만약 프로로 뛰게 된다면, 뉴욕 스파크스로 와.”
“…양심이 없네.”
다니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 LAW 가면 너희 아버지 후광으로 들어온 거라는 소리 들을걸? 열기구라고.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스파크스로 와.”
“멍청아, 열기구가 아니고 낙하산이야.”
긴 한숨과 함께 다니엘이 닉의 말을 가볍게 정정해 주었다.
물론 닉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인 제이콥 레널드는 로스앤젤레스 울프스의 전설적인 쿼터백이었을 뿐 아니라 풋볼계에서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니 비단 LAW가 아니더라도, 다니엘이 프로 데뷔를 한다면 사사건건 제이콥과 실력으로 비교를 당할 것이 분명했다.
다니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니엘이 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리고 풋볼을 시작하기 전부터. 원치 않았음에도 제게 들이미는 그 높다란 기준이 숨통을 조였던 때도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 물속으로 빠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그리고 니키, 프로로 데뷔할 때 나는 전성기의 아버지보다 더 뛰어날 테니까 상관없어.”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화면을 바라보던 닉이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은 여전히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을 건 채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새끼 정신 나간 거 아니야? 닉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표정을 낱낱이 살폈다. 정작 폭탄을 투척한 장본인은 태연했고, 언뜻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닉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삐거덕대며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너 진짜 아저씨 뛰어넘을 수 있어?”
“모르지.”
“꼭 스파크스로 와.”
간절함이 엿보이는 제안이었다. 닉 클레이튼은 그를 회유하며 다니엘의 팔목을 단단히 잡아 왔다. 다니엘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그의 손가락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나지막하게 실소를 흘렸다. 잡힌 손에 시선을 주고 있던 다니엘이 호흡하듯 닉을 불렀다.
“알지, 니키?”
그리고 저를 붙잡은 손아귀에서 손쉽게 팔을 빼낸 그가 반대로 닉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입가로 가져가 뼈가 도드라진 손목 안쪽에 입술을 눌렀다.
“야, 너…….”
“네 여기 내 거잖아.”
입술이 닿아 있는 손목이 불이라도 닿은 양 화끈거렸다. 분명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닉이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었다.
이전에 한창 아시아권의 액션 영화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허구한 날 내기에 신체를 걸어 대는 험악한 배우들을 보며 언젠가 내기에 손목을 걸었던 적이 있었지. 이어지는 기억에 닉이 눈을 찡그렸다.
사이코인 다니엘이 정말 손목을 자르려고 들까 봐 내기에서 지자마자 있는 힘껏 주먹으로 뺨을 후려갈기고 도망쳤던 게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설마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 어. 근데 너 경기 안 봐? 집중해.”
“보고 있어.”
“보고 있긴 뭘 보고 있어, 나만 보고 있으면서.”
그때의 보복을 하려 들까 지레 겁먹은 닉 클레이튼이 무던한 척 말을 돌렸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때 맞은 것을 되돌려 주기 위해 제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생각도, 그 일을 다시금 꺼내어 빈정거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저 제 손목을 꾹 잡은 채로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 무슨 저따위 패스를 해!”
“그러게, 심하네.”
“너 왜 스파크스 욕해. 죽는다, 진짜.”
번번이 전진에 실패한 스파크스는 결국 4번째 다운이 끝난 지점에서 울프스와 공수 교대를 했다. 그 꼴을 보며 분노를 표출하는 닉의 옆에서 다니엘이 느긋한 말투로 동조했다. 닉은 당연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욕한 적 없어, 정확히는 못한다고 했지.”
“진짜 열받게 할래?”
“팝콘 튀겨 올게.”
닉이 주먹을 쥔 손을 파르르 떨자 다니엘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알기로 다니엘 레널드는 풋볼에 반쯤 미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왜 이렇게 오늘따라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닉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그가 들고 온 볼에 손을 넣어 팝콘을 한 움큼 잡았다.
“다 흘리잖아.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집지 그래.”
입에 전부 쑤셔 넣지도 못할 양을 잡은 닉의 주먹을 열심히 편 다니엘이 거기의 반을 도로 가져갔다. 닉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니엘이 가져다주는 대로 얌전히 팝콘을 주워 먹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곧 반도 채 먹지 못하고 그는 누워 있던 몸을 바로 세워야만 했다.
“미친 거 아니야?”
닉의 입에서 황당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후반전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킥오프부터 대차게 말아먹는 스파크스의 모습에 환장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은 닉이 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비록 그는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는 성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뉴욕 스파크스의 팬이라면 자고로 기도문 하나쯤은 거뜬히 외워야 하는 법이었다.
그나마 믿을 만한 것은 수비진이었는데, 전반전에서 공격이 속수무책으로 뚫리는 것을 본 수비진도 슬슬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래도 프로인가? 그 연봉을 받으면서 프로 활동을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닉은 자신이 킥을 해도 저것보단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뉴욕에 인재가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다니. 경기를 보는 내내 뜨거운 물이라도 삼킨 듯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닉이 다니엘 레널드를 어떻게 하면 스파크스로 영입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경기 종료를 7초 앞두고 울프스의 터치다운이 이루어졌다.
삑-
닉이 참지 못하고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그리고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콜라를 입에 콸콸 들이부었다.
“니키.”
“전반전을 킥으로 시작했으면 이겼을 수도 있어.”
다니엘 레널드는 그에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평소라면 ‘뉴욕 스파크스를 응원하는 걸 보면 네 지능이 보여.’ 따위의 속을 긁는 말을 꺼냈을 텐데, 그는 그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얼굴로 가만히 저를 응시할 뿐이었다.
째깍, 째깍. 정적이 흐르는 잠잠한 공간에는 시계의 초침만이 제 숨소리를 흘렸다.
“닉 클레이튼.”
다니엘이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금세 어둑해진 하늘처럼 고요하게 둘 사이에 내려와 있던 침묵이 깨졌다. 닉은 애써 모른 체하고 있던 시선을 느릿느릿하게 다니엘에게로 옮겼다. 녹색 눈동자 위로 이미 몇 번이나 마주했던 욕망이 선명히 떠올라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해.”
닉은 반쯤 잠긴 자신의 목소리가 왜인지 어지럽게 들렸다. 마치,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
연신 뺨을 스치는 머리칼이 간지러워 움찔하기 무섭게, 닉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덜미로 파고든 입술이 쪽, 쪽 살결을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이를 세워 물어 온 탓이다. 살갗을 잘근거리는 잇새로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대니.”
닉의 입에서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뜨거운 건지, 그 입술이 닿은 뺨이 뜨거운 건지 닉은 이제 분간할 수 없어졌다.
다니엘은 말하라는 듯 눈을 맞춘 채로도 연신 뺨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닉 클레이튼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야.”
날카로운 말을 뱉어 내지 않고는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왜?”
“왜냐니, 내가 할 말이야.”
당장에라도 씹어 먹을 듯 몸 위로 올라탄 주제에 유리그릇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는 뭐란 말인가. 왜 그게 그렇게 싫은 건지 닉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니엘 레널드는 그저 늘 그러하듯 다른 사람이 원하는 자신을 꾸며 내며, 신중하게 구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문제 될 만한 건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침대에서 그가 자신을 타인한테 해 온 것처럼 대한다고 하니까 자존심이 상한 건가?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왜 자꾸 간 보듯이 깔짝거리는데? 재미없어, 너.”
닉이 불만을 삼키며 지루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에 다니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불쾌감이 어린 눈빛이 어둡게 일렁였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여 주는 감정은 불쾌감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얼마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레널드가 실소를 삼키며 되물었다.
“재미, 없어?”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 순간에서조차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을 관찰하듯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닉은 그 시선에 또 울컥 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척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 얕은 긍정에 다니엘이 전보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눈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 탓에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 보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미동이 없던 다니엘은 곧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다소 초조한 목소리가 닉에게로 꽂혀 들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잖아.”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
자기가 먼저 꼬셔 놓고 뭘 망설이는 건지. 닉이 고개를 기울였다.
“너 왜 이렇게 숙맥처럼 굴어?”
“…….”
동정도 아니고. 닉의 입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온 말에 다니엘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언제부터 내 허락을 받고 멋대로 굴었다고.”
닉은 그가 타인의 앞에서 흠 하나 없는 도련님처럼 구는 모습을 보며 줄곧 피곤하게도 산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고 다니엘 레널드의 실제 인성이 쓸 만하다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못돼 먹은 인성은 어느 정도 숨길 필요가 있었다.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닉은 제 앞에서만 제멋대로 구는 다니엘 레널드가 짜증 났지만. 쾌락에 휩쓸려도 괜찮은 순간에마저 이성적으로 굴려고 하는 건 더더욱 짜증 났다.
“그래도 날 싫어하지 않을 거야, 니키?”
“나는 원래 너 싫어하거든?”
닉이 투덜대며 다니엘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을 맞은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나는 너를 배려한 거였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너는 분명 못 버티고 도망치려고 할 테니까.”
“뭐?”
“아니면 엉엉 울든지.”
너는 분명 못 버티고 도망치려고 할 테니까, 아니면 엉엉 울든지……. 다니엘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여전히 나긋한 음성이었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불안함은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닉이 가지고 있던 어떠한 두려움과 거리낌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의도하고 던진 말이었다면 단순히 화를 내고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 진심 어린 표정이 오히려 닉의 등을 떠밀었다.
“그니까 왜…….”
닉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지껄였다.
“왜 답지 않게 내 눈치를 보고 배려하냐고.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왜, 섹스하려고 하니까 내가 닉 클레이튼이 아니라 너랑 잤던 여자들처럼 보여?”
“…뭐?”
“자꾸 내 눈치를 보면서 나한테 맞춰 주려고 하잖아, 건들면 깨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닉이 성마르게 웃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봐, 다니엘 레널드. 나도 너 하나쯤은 거뜬히 눕힐 수 있어.”
다니엘 레널드는 할 말이 많은 듯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쉬이 입을 떼지 않았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침묵이 또 닉 클레이튼의 성질을 건드렸다.
다니엘은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으면서 지저분한 지라시를 흘린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스캔들 한 번 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로맨스 영화를 찍으며 상대역이었던 배우와 스캔들이 나기도 했고, 심지어는 그 타마라와도 스캔들이 났었다.
굳이 기사를 찾아보지 않아도 다니엘의 스캔들은 학교에 가기만 해도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닉은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시큰둥했지만, 그의 스캔들만큼은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엘 레널드였으니까.
다니엘은 여자애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그 정중한 태도가 왜인지 가끔은 그를 이성에 관심이 없어 보이게끔 했다. 그는 주변의 다른 남자애들처럼 시시콜콜 여자 얘기를 늘어놓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보수적으로 느껴질 만큼 얌전한 편이었다. 마치 그가 침대에서 제게 하듯 말이다.
닉은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고 상상해 본 적도 없던 다니엘 레널드의 침대에서의 버릇이 몹시 고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자신의 신장은 6피트가 넘었으며, 몸을 쓰는 일에서는 남들한테 뒤지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어, 닉 클레이튼.”
“그럼 평소처럼 네 좆대로 굴어.”
날 선 어조였으나 닉의 눈은 다니엘을 곧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한 점의 불순한 감정이나 거리낌이 섞여 있지 않았다. 자신을 저렇게 주시하는 푸른 눈동자만이, 오직 저것만이.
“아프면 때려. 아니면 못 멈출 거 같으니까.”
다니엘이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게끔 했다.
“하. 섹스 한 번 하는데 무슨…. 너는 말이 너무 많아.”
투덜대는 입 위로 입술을 내리누른 다니엘이 팔을 뻗어 닉의 파자마를 잡고 팬티까지 모조리 끌어 내렸다. 닉은 허리를 들어 줄 새도 없이 단숨에 벗기는 힘에 아래로 쭉 끌려갔다. 소파에 겨우 등을 걸친 닉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런 닉을 보면서도 다니엘은 멈칫하지 않았다. 젠장. 다니엘 레널드가 단어를 거칠게 짓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쾌락의 맛을 아는 주제에 자신의 아래에서 어리둥절해하는 닉 클레이튼을 보자 절로 애가 탔다.
“니키.”
검은 파자마 상의 하나만 걸친 채 흐트러진 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닉의 모습은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왜.”
“물고 있어.”
얇은 천으로 된 파자마는 단추를 풀 필요조차 없었다. 그대로 걷어 올린 다니엘이 닉의 입에 옷을 물렸다. 닉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입에 파자마를 물었다. 그러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건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닉에게로 상체를 접은 다니엘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젖꼭지를 핥았다. 혀가 살살 젖꼭지를 건드리자, 당연하다는 듯 입에서는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지지 못하고 입에 문 천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이미 한쪽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주제에 손을 들어 다른 쪽 가슴을 쥐었다. 유륜을 주무르는 손가락 사이로 이미 꼿꼿이 서 있던 돌기가 연신 스쳤다. 닉의 입에 물려진 천이 금방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열심히 가슴을 물고 빨던 다니엘이 고개를 들어 아래로 향했다. 이미 반쯤 발기한 성기를 내려다보며 다니엘이 천천히 손을 옮겼다. 기다란 손가락이 기둥을 말아 쥐고, 이미 민감해진 표피를 쓸어 올리자 닉의 허리가 흔들렸다.
입이 자꾸만 벌어지려고 하는 탓에 닉은 천을 문 턱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그 순간, 다니엘이 느릿하게 기둥을 어루만지던 손에 힘을 주어 빠르게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흡……!”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찌르르 흐르는 강렬한 전율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그러나 침도, 신음도 모두 입 안을 틀어막은 천에 의해 먹혀 들 뿐이었다.
금세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쥔 채 다니엘이 눈을 들어 닉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흐리멍덩해진 눈빛에는 진득한 쾌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벌게진 눈가를 보며 다니엘은 만족스러운 듯 나긋하게 웃었다.
귀두 끝에서 서서히 투명한 쿠퍼액이 새어 나와 손을 적시고 있었다. 탁, 탁, 손에 쥔 살덩이를 비비며 쓸어 올리는 소리가 이전보다 거칠어졌다. 다니엘은 이제 어떻게 해야 눈앞의 상대가 좋아하는지, 자지러지며 결국 참지 못하고 사정하는지 익숙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엉덩이는 들썩이는 반면,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경직된 듯 뻣뻣해지자 다니엘이 기다렸다는 듯 기둥을 쓸어 올리던 손으로 귀두를 감쌌다. 손바닥 안에서 집요하게 굴려지던 뜨거운 살덩이가 이윽고 울컥울컥 희뿌연 정액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젖은 채로 뭉쳐진 천을 뱉어 낸 닉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미 한 번 사정한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방금까지 제 성기를 쥐고 흔들던 커다란 손이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정액으로 범벅된 손가락이 굳게 닫혀 있는 구멍 주변을 문질렀다. 마치 묻어 있는 정액을 펴 바르듯 엉덩이 골 주변과 구멍 입구를 비비며 맴돌던 손가락은 예고도 없이 입구를 찌르고 들어왔다.
“헉……!”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생경한 감각에 닉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든 다니엘이 벌어진 그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며 혀를 섞었다. 입 안으로 침범해 온 혀를 반사적으로 빨아 대던 닉이 다시금 느껴진 이물감에 움찔하며 굳었다.
다니엘은 혀를 섞으면서도 착실하게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있었다. 한 개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쭉 빼내나 싶더니 이번에는 두 개를 넣어 왔다. 한 번도 무언가를 찔러 넣어 본 적 없던 구멍에 파고드는 손가락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이를 악물고 싶었으나, 여린 점막을 핥으며 입을 맞추는 다니엘의 행동에 그럴 수도 없어졌다.
손가락이 세 개째 들어왔을 때 닉은 결국 손을 들어 다니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밀어내듯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봐도 다니엘은 밀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착실하게 구멍을 넓혀 가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술이 떨어진 사이 닉이 참았던 신음을 흘렸다.
“흐, 윽. 야, 그거 기분, 나빠. 차라리 빨리, 넣어.”
“…이대로는 안 들어가.”
다니엘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집중하는 듯 굳어진 얼굴로 손가락을 움직이던 그가 작게 욕설을 짓씹었다. 원치 않은 이물감에 식은땀을 흘리던 닉이 끝내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읏… 대니, 빨리… 제발.”
물기가 섞인 칭얼거림에 다니엘이 멈칫하며 닉을 올려다보았다. 선이 곧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알 수 없는 물기로 얼룩져 있었다. 그 꼴을 한 채 가까스로 신음만 토해 내던 닉이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그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옷깃을 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다니엘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험악한 단어들을 삼키며 다니엘이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지이익, 지퍼를 내리자 얇은 천 쪼가리로는 가릴 수 없이 발기한 기둥의 형태가 보였다.
제 성기를 그러쥔 채 다니엘이 한 손으로 닉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이미 쿠퍼액으로 젖어 있는 귀두가 아직 비좁게 다물린 구멍 입구에 닿았다.
“아, 맞아.”
도무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입구를 둥글게 문대던 다니엘이 뒤늦게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손을 빼낸 그의 손끝에 걸려 있는 것은 닉으로서도 익숙한 정사각형의 포장지였다.
콘돔 포장지 끄트머리를 물고 찢어 낸 다니엘이 다급하게 손을 움직여 성기에 끼워 넣었다. 콘돔 고무에 미끈한 젤이 묻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안으로 쉽게 파고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니엘 또한 한계였다.
“힘, 빼 봐, 니키.”
“어떻게, 아.”
상체를 숙이며 다니엘이 닉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쪽, 길게 귀를 빠는 그의 행동에 닉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힘을 뺐다.
“응, 잘했어.”
다니엘이 혀로 귓바퀴를 둥글게 핥았다. 그때였다.
“윽!”
살덩이라기엔 지나치게 딱딱한 성기가 억지로 다물린 구멍을 열고 들어왔다. 고작 성기의 끄트머리가 들어왔을 뿐인데도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닉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가쁘게 토해 내는 뜨거운 숨이 손바닥에 와 닿았으나, 거기에 쏠릴 정신은 없었다.
겨우 손가락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북함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망할, 이걸 안에 넣을 생각을 했다니 미쳤던 게 틀림없다. 지금이라도 다니엘을 밀어내고 했던 말들을 전부 물리고 싶었다.
그 와중에도 빡빡한 구멍을 비집고 성기가 천천히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 이… 씨발.”
닉의 입에서 저속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삽입에 집중하던 다니엘이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들었다.
“아파?”
“장…난해? 몸이, 두 갈래로 찢, 찢어지고 있는 거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닉이 벌써 쉬어 버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꾸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형편없이 간결했다.
“참아.”
“씨, 발 새끼야, 어떻게 참는 건데!”
“나는 너랑 첫 키스한 이후로 쭉 참아 왔어, 니키. 그러니까 오늘은 네가 참아.”
그 말에 멈칫한 닉이 욕설을 삼키며 덜덜 떨리는 다리를 다니엘의 허리에 걸었다. 좆같은 다니엘 레널드. 제길, 좆이 이렇게 클 줄 알았다면 그렇게 호기롭게 오기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닉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물기가 어려 희뿌연 시야 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녹색 눈동자는 선명하게 보였다.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그렇다면 당장 빼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닉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한 팔로 소파의 등받이를 짚고 있던 다니엘이 다른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사정했던 닉의 성기를 다시 그러쥐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살갗을 문지르는 건 쾌감보단 고통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기는 다니엘의 손바닥 안에서 다시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쓰라린 건지, 기분 좋은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짜릿함이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다니엘의 좆은 완전히는 아니어도 깊숙이 들어왔다. 콘돔의 고무링 부분이 입구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
그제야 낮게 한숨을 내쉰 다니엘이 느릿하게 허리를 들었다. 동시에 쑤욱 빠져나가는 성기에 닉 또한 얕은 숨을 토해 내며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뺐다.
“악!”
그대로 빠져나가는 줄 알았던 성기는 곧 단번에 안으로 파고들었다. 방금까지 들어와 있었는데도 여전히 뻑뻑한 내부가 인정사정없이 침입한 성기를 꽉 물었다.
젖어 있던 닉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뺨을 적시는 물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가 허겁지겁 다니엘의 팔을 잡았다.
“아! 너무… 하윽, 아, 대니!”
“…제발 힘 풀어, 니키.”
다니엘이 닉의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탓에 움찔움찔 흔들리는 허리를 팔로 끌어안고 단단히 고정시킨 다니엘이 다시 끝까지 삽입했다.
내벽을 긁어내듯 거칠게 안을 찔러 대는 성기 탓에 닉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입술을 잔뜩 짓이기며 눈물을 쏟아 냈다.
“야.”
다니엘의 허리를 감싼 다리가 흥분감 때문인지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을 받아들여서인지 주체하지 못하고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 대니!”
“응, 니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를 세워 입술을 꽉 물고 있던 다니엘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입….”
왜인지 짜증이 난 것 같았지만, 상기되어 붉어진 채 축축하게 젖은 얼굴은 마냥 야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다니엘이 잠시 허리 짓을 멈춘 채 입을 달싹거리는 닉을 바라보았다.
“입술, 물지 마….”
“……왜?”
“소리 참는, 거잖아. 참지 말라고….”
다니엘은 그 생뚱맞은 말에 눈을 껌벅였다. 왜? 그러한 의아함이 혼탁한 녹색 눈동자 위로 고스란히 떠올랐다. 혹시 자신만 신음을 흘려 대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 순간에서조차 니콜라스 클레이튼다웠다.
“내가… 듣고 싶으니까.”
그러나 그는 다니엘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대답을 꺼냈다.
“그러니까 참지, 마.”
제 신음을 듣고 싶다는 말에 왜 발정 난 개새끼처럼 흥분하게 되는지 다니엘은 알 수 없었다. 상대가 닉 클레이튼이라면 다니엘에게는 늘 그런 이상한 일들이 당연해졌다.
“니키, 너는….”
얼굴로 피가 쏠리고 눈가에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니엘이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리며 닉에게로 몸을 숙여 바싹 그를 끌어안았다.
“너는, 씨발. 네가 나를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모를 거야.”
다니엘이 닉에게 몸을 붙이며 다시금 빠르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넌 진짜, 아무것도 몰라.”
퍽, 퍽, 찍어 누르듯 박아 올리는 성기에 내벽이 완전히 달라붙었다. 다니엘이 뒤로 허리를 뺄 때마다 구멍 입구의 선홍빛 속살이 밖으로 비죽 튀어나왔다가 삽입과 함께 다시 안으로 빨려 들어가길 반복했다.
“내가, 이 순간을, 후, 얼마나 상상해 왔는지….”
퍽, 퍽, 퍽. 사정감이 깊어질수록 허리 짓은 더 빨라지고 격해졌다. 다니엘이 참아 왔던 숨을 토해 내듯 몸을 무너뜨리며 사정했다.
배 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이물감에 닉은 헐떡이는 채로 안도했다. 그러나 끝난 줄만 알았던 닉은 다니엘이 다시금 성기를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기 시작하자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이제, 그, 만, 대니.”
“한 번만….”
한 번만 더. 응? 니키, 제발. 애원하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사정없이 성기를 박아 넣는 허리 짓은 과격했다. 갈증을 지우지 못하겠는지 삽입하면서도 다니엘은 입술이고 목이고 젖꼭지고 핥고, 쭙쭙 빨았으며, 이를 세워 긁어내기까지 했다.
아파, 젠장. 닉 클레이튼이 입술을 짓씹으며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박히면서 울고 그럼에도 붙잡을 게 상대밖에 없다는 듯 매달리는 그 난잡한 행위가 얼마나 더 이어졌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이 짓이 끝나고 나면 그의 목을 졸라 버리겠다는 결심도 했던 것 같다. 다니엘이 네 번째로 ‘한 번만’을 읊조렸던 것을 마지막으로, 닉은 지쳐 까무룩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은 할 겨를도 없이.
***
“클레이튼, 아침 훈련도 빠지더니 정말 몸이 안 좋은 거야?”
비척비척 복도를 거니는 닉을 향해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한숨을 삼키며 캐비닛에서 짐을 꺼내던 닉이 저를 부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는 다음 수업 준비로 분주한 학생들과 끼리끼리 모여 대화를 하는 학생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자신을 불러 온 아주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보스턴 스쿨의 수영 코치인 션이었다.
7살 남짓해 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닉의 얼굴이 와그작 찌푸려졌다.
“코치, 소아 성애자였어요?”
“…보통 딸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냐?”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닉을 보며 션이 허탈하게 물었다. 닉은 그 대답에도 쉬이 납득하지 못하고 이어 물었다.
“딸이 있다고요? 결혼했었어요?”
당신이? 뒷말은 내뱉지 않았지만, 그가 꾸역꾸역 삼킨 뒷말을 알 것만 같아 션이 애써 욕설을 삼켰다. 그리고 곧 두툼한 손을 들어 여자아이의 눈을 가린 채 닉을 향해 험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죽고 싶어?’
그 입 모양을 보면서도 닉은 깊은 숙고 없이 곧장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요.”
“오늘 트레이닝은 전부 하이폭식으로 갈 거야.”
“왜……. 아, 망할. 잘못했어요.”
닉이 자동적으로 눈썹을 모으며 애처로운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벌 앞에서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쉽게 비굴한 표정을 꾸몄다.
벌이라고는 해도 션은 유능한 코치였다. 비록 험상궂게 생긴 외관과 더러운 성질로 수영부 욕받이 1위를 담당하고는 있었지만, 일부러 선수를 괴롭히기 위해 과도한 훈련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의 까칠한 태도와는 별개로 일에 대한 사명감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수영부의 대부분이 뒤에서 투덜대기는 해도 군말 없이 그를 따르는 이유였다.
그런 션의 평가에 따르면 재능적인 측면에서든 지능적인 측면에서든, 타고나기를 물고기로 태어난 닉은 투덜거림조차 없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서는 다소 뺀질거리는 면이 있긴 하나 물에서 하는 훈련쯤이야 아무리 힘들어도 가뿐하다는 듯 해내는 닉이었다.
그런 저 또한 오늘은 무리였다. 닉이 욕설을 집어삼켰다. 빌어먹을. 이건… 이건 전부, 다니엘 레널드 때문이다.
“정말 어디 아픈 거야?”
닉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아무리 그라도 밤새 박혀서 하반신을 움직이기 힘들단 말을 코치 앞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지? 수업 끝나자마자 튀어 와.”
션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난처한 얼굴만 하고 있는 닉 옆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션의 두꺼운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안겨 있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이는 수줍음이 많은 모양인지 션의 어깨 위로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닉이 자신을 흘깃거리는 여자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코치가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귀여운 여자애를 안고 사라졌다. 하지만 충격적인 사건이 지나가고 나서도, 닉은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모든 건 어젯밤의 여파였다고 할 수 있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체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박아 댄 다니엘 레널드로 인한 여파.
완벽히 다니엘만의 잘못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닉 또한 자신이 그를 부채질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명할 말은 있었다.
처음 해 본 남자와의 관계는 전혀 그가 상상하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닉은 섹스할 때의 쾌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다니엘과도 그러한 섹스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제길…….”
그런데 박히면서 느꼈던 감각은 고통뿐이었다. 호기롭게 그를 받아들였던 것과는 다르게, 닉은 중간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고 참아야만 했다. 참았던 것에는 질 수 없다는 마음 또한 있었지만, 무엇보다…….
-니키, 하, 니키….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차마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이 컸다. 물기 어린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혼탁해진 시선에는 흥분감과 함께 집요할 정도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개자식.
그런 시선을 흘리면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다신 안 할 것이다. 다신! 닉이 빠드득 이를 갈며 캐비닛에 몸을 기대어 섰다.
자기 잘못을 아는지 다니엘은 이전과는 달리 아침에 자신을 조심스럽게 깨워 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씻겨 주겠다며 욕실로 따라오는 바람에 닉은 질색하며 그에게 주먹질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내가 환자인 줄 알아?
-너는 지금 환자야, 니키.
-그렇다면 너는 의사가 아니고 내 입원 사유야, 대니.
-…….
그랬는데도 아침까지 먹여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더 말하기도 질린 닉은 다니엘의 멱살을 잡고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결과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후로 유난을 떠는 것이 다소 줄어들었으니까.
어쨌거나 다니엘은 직접 운전해서 학교까지 자신을 데려다주고 난 후 풋볼 팀의 아침 훈련에 합류했다. 닉 또한 아침 훈련이 예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과감히 땡땡이를 쳤다. 어차피 아침 훈련은 풋볼 팀이나 육상 팀이나 모두 똑같이 트랙에서 달리는 유산소 운동이 대부분이었고… 이런 컨디션으로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녕, 닉.”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그런 닉의 옆으로 캐비닛을 쓰려는지 라이언이 다가왔다. 별로 좋지 않은 안색을 보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물음에 라이언은 대꾸 없이 조용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라이언은 힘없이 웃었다. 그 모습이 시무룩한 곰 같았다. 평소에도 조용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기죽은 얼굴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지? 닉이 의아해하고 있는 동안 라이언은 복도 끝을 보더니 한숨을 삼키며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친해진 건지 풋볼 팀 선수들 사이에 둘러싸여 걸어오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다니엘 레널드였다.
“다니엘, 이번 주 경기에서도 네가 선발일 거야. 확실해.”
“맞아. 저번 주 게임에서도 대활약을 했으니까.”
보폭을 맞추어 양옆에서 걷는 풋볼 팀 선수들을 향해 다니엘은 친절하게 웃어 주고 있었다. 풋볼 팀 선수들은 연신, 네가 쿼터백을 맡으면 경기가 한결 수월해진다느니 하는 아부 섞인 칭찬들을 건네고 있었다.
풋볼 팀 녀석들은 그런 살가운 아부 따위는 못 하는 줄만 알았는데. 대체 풋볼 팀을 어떻게 녹인 거야?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닉이 혀를 찼다. 의문은 들었으나 의심은 없었다. 원래 다니엘 레널드는 다른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드는 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으니까.
먼저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코너에서 나온 클로이가 다니엘의 옆에 붙어 자연스럽게 함께 걸었다.
“멋졌어, 다니엘. 이번 경기도 보러 가도 돼?”
그 모습을 발견한 닉이 손을 들어 목뒤를 쓸었다. 클로이의 관심이 다니엘에게로 옮겨 간 것은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적나라한 태도를 직접 확인하니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누구에게나 열린 풋볼 경기를 마치 제가 주관이라도 하는 양 다니엘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와 주면 기쁠 거야.’ 하고 그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클로이가 숨기지 못하고 입가에 환한 미소를 거는 게 눈에 들어와 박혔다.
와… 재수 없어….
다니엘 레널드의 가식적인 태도에 또 소름이 돋았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왜 저 가증스러운 모습은 영 익숙해지질 않는지 닉 또한 의문이었다. 그 누구도 저렇게 왕자님처럼 웃고 있는 다니엘이 어젯밤 얼마나 발정 난 망나니처럼 굴었는지 모를 것이다.
“저, 저…….”
비뚜름한 시선으로 다니엘을 보던 닉이 자신의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밀짚 같은 머리와 왜소한 체격, 반면에 저와 엇비슷한 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먼저 말을 걸어오고서도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갈색 시선.
이름이 뭐였더라? 파티에서 만난 적 있는 익숙한 얼굴인데. 머리를 굴려 봤으나 이름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닉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눈앞의 상대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나는 노, 노아 웨슬리야. 해밀턴의 파티에서 만났는데….”
“아, 노아 웨슬리. 맞아.”
그 대수롭지 않은 대꾸가 뭐가 그리 기쁜지 웨슬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는 산만하게 꼼지락대면서도 시선만은 끈질기게 닉을 좇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문득 손을 들어 뺨을 만지작대던 닉이 웨슬리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멈칫했다.
자신을 향한 호의 어린 시선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동경하듯이 바라보는 눈동자는 언제 받아도 내심 그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닉은 웨슬리의 시선에서 그러한 동경과 존경심 비스름한 기색을 읽어 냈다.
“마, 말 걸어서 미안, 클레이튼! 귀, 귀찮았지.”
“어… 조금? 그리고 그냥 이름으로 불러. 내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지?”
“니콜라스 클레이튼…….”
“잘 알고 있네. 닉이라고 부르면 돼.”
어쩔 줄 몰라 하며 말끝을 흐리는 웨슬리의 어깨에 그가 가볍게 팔을 걸쳤다. 자신을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대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내심 으쓱하기도 해서 닉은 퍽 살가운 투로 물었다.
“근데 너 풋볼 팀 아니었나? 연습하고 온 거야?”
그 질문에 노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분명 풋볼 팀이었던 것 같은데, 쉬이 긍정하지 않는 모습에 닉도 더는 묻지 않았다. 노아 웨슬리의 사정은 그만의 것이었으니까.
그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노아 웨슬리의 입에서 나올 말을 친절히 기다리던 닉이 이쪽을 향해 오는 듯한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조금 급해 보이는 듯한 분위기의 다니엘이 벌써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노아 웨슬리…?”
닉의 옆에 서 있던 인물이 누구인지 그제야 발견한 듯 다니엘이 다소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닉과 웨슬리를 번갈아 보던 것도 잠시, 그는 이내 타인에게 습관처럼 보여 주는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둘이 같이 있을 줄은 몰랐네.”
웨슬리를 반가워하는 듯한 기색에 닉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이 새끼가 이러는 건 분명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어, 다, 다니엘 레널드….”
노아 웨슬리는 예상하지 못한 이의 등장에 두드러지게 위축된 태도를 보였다. 어깨를 움찔 떨며 아래로 시선을 내리는 모습을 발견한 닉이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너도 풋볼 팀이니까 알겠네.”
“응. 나야 당연히 알지. 근데 너는… 어떻게 알고 있어? 제법 친해 보이는데.”
나긋하게 말을 잇는 그의 시선이 웨슬리의 어깨에 걸쳐진 닉의 팔에 꽂혀 있었다. 웃는 낯으로 말해 봤자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하나도 숨기질 못한다. 그 시선의 행방을 눈치챈 닉이 한숨을 흘리며 어깨에서 팔을 내렸다.
“너는 모르는 게 있어.”
“…….”
“아무튼, 즐거웠어, 노아. 또 보자.”
때마침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는 듯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니엘을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야 어깨 내놔, 걷기 힘드니깐.”
다니엘은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웃음기 가신 얼굴이었으나 순순히 제 어깨를 내놓았다. 닉 클레이튼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몸에 힘을 푼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런 닉에게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의식할 정신은 없었다.
“너 정말 짜증 나, 니키.”
“젠장… 또 시작이야.”
여느 때처럼 다니엘이 그의 신경을 긁어 온 탓이다. 닉이 손을 들어 다니엘의 옆구리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
당연하게도 다니엘 레널드가 신경을 거스르는 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짜증 나지만 당연했다. 고분고분하거나 하루라도 눈엣가시처럼 굴지 않으면 그건 다니엘 레널드가 아니라 다니엘 모양의 가면을 뒤집어쓴 외계인일 것이다.
“니키, 거기서 왜 그 식을 구하는 거야? 머리가 있으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닥쳐, 레널드.”
“……레널드라니.”
또 하필이면 그가 바로 옆자리인 바람에 모든 수업 시간에 다니엘의 참견 아닌 참견을 들어야만 했다. 이런,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어. 닉이 책상 아래로 다니엘의 발을 꽉 밟았지만, 다니엘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턱을 괸 채 싱긋 웃으며 눈을 맞출 뿐이었다.
이 새끼는 정말이지 중간이 없다.
아침에는 귀찮을 정도로 챙겨 주더니 갑자기 또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또 꼬인 심사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닉이 허, 하고 실소를 흘리며 다니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끈질기게 얼굴로 달라붙는 다니엘의 시선은 수업 시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안녕, 하디.”
“어? 어, 안녕.”
아침에 자신 때문에 라이언이 시름시름 앓았던 것을 모르는지, 다니엘은 뻔뻔하게 웃으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카페테리아에 그가 와 줬으면 하고 바라는 수많은 테이블을 놔두고, 굳이, 꽉 찬 이쪽 테이블로 와 웃으며 라이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라이언의 얼떨떨한 반응에 잠시 테이블 위로 눈빛 교환이 오갔다. 아비게일이 제니에게 눈짓했고, 제니는 닉에게 무슨 일이냐며 눈짓했으며, 닉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라이언에게 인사하며 다가왔던 다니엘은 이내 시선을 돌려 아비게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사르르 눈을 접어 웃는 미소를 받은 아비게일이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옆에 앉아도 돼, 페이즈?”
그 물음에 잠시 눈을 커다랗게 떴던 아비게일이 곧바로 손을 뻗어 라이언을 떠밀었다. 가녀린 팔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거구인 라이언을 퍽퍽 밀어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당연하지!”
졸지에 옆으로 밀려난 라이언은 황당함이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니엘 레널드는 그 일련의 사건이 자신과는 일절 관계가 없다는 듯 가지런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와, 여우 새끼.
로스트 치킨이 찍힌 포크를 허공에 든 채 닉이 자신의 앞에 착석하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포크를 들어 음식을 찍으면서도 옆에서 묻는 아비게일의 질문에 선선히 웃으며 답해 주고 있었다. 이제는 그가 제법 친근해진 탓인지, 막 전학 왔을 때처럼 할리우드나 그의 커리어에 관한 질문은 줄어들었다.
대신에 그 공백은 그의 신변에 대한 질문들로 메워졌다. ‘다니엘, 프로필에 적힌 키 진짜야?’ 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 물음은 곧 그의 이상형에 이르렀다. 바로 앞에 앉아 놓고 제게 질문을 던져 오는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주던 다니엘이 힐긋 닉을 바라보았다.
“이상형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거짓말이지, 어떻게 이상형이 없을 수가 있어!”
“굳이 말하자면.”
다니엘은 고민하는 듯 흠, 하고 시선을 끌었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다니엘 레널드의 대답이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한참을 뜸 들이던 그는 그들이 원할 만한 답 대신 엉뚱한 조건을 늘어놓았다.
“눈치가 없는데 귀여운 사람.”
“그게 뭐야?”
아비게일이 눈을 깜박였다.
웃기시네! 이상형이 눈치가 없는데 귀여운 사람이라고? 말도 안 돼. 닉은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연예인이랍시고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따위 대답을 잘도 꺼내 놓고 자신을 보고 웃는 꼴을 보니 도무지 빈정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징글징글하지만, 다니엘 레널드와 알고 지낸 지 자그마치 10년이었다!
“내숭 부리지 마. 너 나랑 취향 완전 똑같잖아.”
다니엘은 닉이 처음으로 좋아했던 여자애와도, 그다음으로 좋아했던 여자애와도, 그 다음다음으로 좋아했던 여자애와도 모두 데이트를 했다. 다니엘 레널드와 이상형이 같다는 건 저주였다.
그 탓에 사춘기를 겪으면서 분노 조절이 다소 어려웠던 닉은 기어코 다니엘에게 주먹을 날렸던 적도 있었다. 처음 몇 번만 맞아 주다가 곧장 화난 얼굴로 일어나 반격한 다니엘에 의해 뒤엉켜 바닥을 구르며 엉망진창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너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이미지 관리를 방해받은 것이 짜증 난 모양인지 다니엘이 서늘하게 웃었다. 말을 말자. 닉이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퍼먹었다. 맞는 말을 해도 으르렁거리니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을 꺼낸 것부터가 실수였는지, 다니엘은 버튼이라도 눌린 사람처럼 이후로도 살살 웃으며 성질을 긁어 왔다. 다니엘 레널드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골수 서부 사람인 주제에 그 누구보다 뉴요커의 자질을 타고났다. 좆같은 성질머리가 특히 그러했다.
“하아!”
수업도 끝나고, 스포츠 클럽도 전부 종료된 시점이었다. 수영부의 단체 훈련이 끝난 다음에도 혼자 남아 개인 훈련을 이어 가던 닉이 수면 밖으로 머리를 빼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물속에 있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 편이었지만, 다니엘 레널드를 떠올리니 화가 치밀어 10번 이후부터는 세는 것도 까먹은 채 트랙을 왕복했다. 팔을 걸친 채 상체를 빼내어 숨을 몰아쉬던 닉의 시야에 눈에 익은 인영이 들어왔다.
노아 웨슬리였다. 그는 보통 관람석으로 사용되는 계단의 맨 첫 번째 칸에 걸터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
“아, 닉! 혹시 내, 내가 훈련에 방해됐어?”
수경을 벗어 낸 닉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주시하자, 노아 웨슬리가 허둥지둥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해랄 것까지 있나…. 네가 있다는 것도 지금 봤는데.”
닉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팔에 비스듬히 턱을 괴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방도 내려놓고, 옆에는 책도 몇 개 놓여 있었다.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을 보니 꽤 오래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풋볼 팀도 연습하고 있을 시간인데.”
“아마 아, 아직 하고 있을 거야….”
“너는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나, 나는…….”
노아 웨슬리는 주저하면서도 뭔가를 말하려는 듯 더듬거렸다.
뭐 하는 거지?
그의 태도가 답답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닉은 자신의 팬에게 너그러운 편이었다. 웨슬리는 방황하는 시선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동경의 빛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닉은 자신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한 채로 허둥거리는 웨슬리를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나는 계, 계속 벤치라…. 앞으로도 선발은, 못 될 거 같아서 공, 공부만 하고 있어.”
“오.”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짧지만 웃음기 어린 음성에 웨슬리가 움찔하며 닉을 바라보았다.
“공부 잘하겠다.”
대수롭지 않게 이어진 말에 굳어 있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안도감이 퍼졌다. 대단한 칭찬이라도 받은 양 웨슬리가 상기된 얼굴로 조그맣게 뒷말을 이었다.
“GPA는…… 3.9 정도.”
“3.9?”
덤덤하게 그의 말에 호응해 주던 닉이 멈칫했다. 보통 C를 받고 가끔은 더러 F도 받는 자신의 성적표가 떠올랐던 탓이다.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4.0에 가까운 성적에는 감히 비벼 볼 수도 없으리라는 건 계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고로 닉이 고등학교에서 받은 최고의 성적은 A-였다. 과목은 스페인어였는데 그렇다고 그가 스페인어를 썩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할 줄 아는 것은 인사와 대답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그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당시 스페인어 교사였던 나탈리아의 감성을 공격했다.
‘선생님의 눈은 정말 아름다워요.’ 따위의 한 줄을 달달 외워 가 회화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낸 것이다.
다음 학기에 나탈리아가 육아 휴직을 하게 되면서 그 점수는 닉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그건 그가 가진 유일하게 자랑할 만한 성적이었다.
와……. 닉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가 물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 모습에 노아가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마른 타월을 들고 달려와 내밀었다.
닉은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노아를 보며 슬쩍 눈썹을 들었다. 그는 이내 어떠한 주저함도 질문도 없이 그것을 받아 들며 웃었다.
“너 진짜 공부 잘하네?”
그 순수한 칭찬에 노아 웨슬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곧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이윽고 수줍어하는 듯한 미소까지 입에 걸쳤다. 쑥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이 웃겨 닉이 그를 보며 킬킬 웃었다.
친근한 분위기에 마음이 놓인 건지, 노아가 큰 다짐이라도 한 양 슬그머니 입을 떼었다.
“너만 괜찮다면 공, 공부 가르쳐 줄까?”
“뭐?”
키득거리던 닉이 대뜸 튀어나온 질문에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지금 나한테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한 건가? 맙소사. 쟤한테는 내가 공부를 할 것처럼 보이나? 되지도 않는 소리에 잠깐 뇌가 멈춘 닉이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 인물이 있었다.
젠장맞을 다니엘 레널드였다. 아무래도 그가 오늘 수업 시간 내내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것이 무척 거슬렸던 모양이다.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는 말을 듣자 다니엘이 왜인지 불현듯 떠올랐다.
“흠….”
닉은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고민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물론, 다니엘로부터 멍청하단 시선을 받는 건 늘 불유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하고 싶진 않았다. 당연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면, 물속에서 하루의 반나절을 지내는 대신 진작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닉 클레이튼은 미국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수영 선수가 되는 길을 택했다. 역시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노아를 부르려는 순간, 한발 먼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였다.
“……노아 웨슬리?”
닉은 고개만 틀어 수영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다 멈춰 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있으면 안 될 자리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노아 웨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거슬린 건지 모르겠으나, 다니엘 레널드는 타고난 배우였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그가 닉의 앞까지 다가오며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힐끗 닉을 내려다보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찰나였다. 노아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다정스레 물었다.
“둘이 같이 있었네? 무슨 얘기해?”
신경 끄라며 대충 대꾸하려는 참이었다. 아주 오래 알았던 친구라도 되는 양 친근한 다니엘의 목소리에 홀리기라도 한 건지 노아가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니, 닉한테… 공부… 가르쳐 줄까 해서 물어봤어.”
말을 꺼낸 것은 본인이면서 노아는 흠칫하며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그것도 모자라 갑자기 얼굴까지 빨개지며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콧잔등에 박힌 주근깨 탓에 그 얼굴이 마치 잘 익은 딸기 같아 닉이 픽 웃음을 흘렸다.
“너 얼굴 빨개졌다.”
콧잔등을 가리키고자 노아의 얼굴 근처로 손을 뻗은 닉의 손이 허공에서 붙잡혔다. 잠시 표정을 흐리던 다니엘은 그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비딱하던 그의 입가에는 다시금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돼, 웨슬리?”
“뭐, 뭐…?”
뜻밖의 물음에 당황한 사람은 노아뿐만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닉이 그 엉뚱한 소리에 기분을 숨기지 않고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속셈이지? 다니엘 레널드가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하다니. 헛소리거나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할리우드의 왕자님이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별명을 갖게 된 데에는, 그가 겉보기만큼은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외모부터 성격, 연기, 운동 실력, 거기에 두뇌까지.
이미 SAT와 ACT 둘 다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다는 소식을 귀가 닳도록 들었던 닉으로서는 꿍꿍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닉은 감춰진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채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안 돼?”
다니엘은 아랑곳 않고 노아 웨슬리를 보며 의뭉스레 웃을 뿐이었다.
웨슬리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물먹은 솜뭉치처럼 점점 무게를 더해 갔다. 안 그래도 영양실조 걸린 미어캣 같은 몰골의 웨슬리는 시시각각 초췌해지고 있었다. 그 불쌍한 꼴에 동정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닉 클레이튼은 노아와 다니엘을 번갈아 보다 한숨을 삼켰다.
“말은 고마운데, 거절할게.”
정적을 뚫고 흘러나온 말에 다니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닉을 바라보았다. 노아는 파르르 몸을 떨며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닉은 노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볼을 긁적거렸다.
“왜, 왜?”
그가 다급하게 이유를 물어 왔다. 닉이 가볍게 대꾸했다.
“괜히 네 시간만 뺏게 될걸. 어차피 난 공부에 별로 관심도 없고.”
“하지만….”
웨슬리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거리다가 곧 다물었다. 체념이 익숙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를 가만 내려다보던 닉이 이내 몸을 돌려 다니엘의 다리를 툭 찼다.
“그러니까 너도 터무니없는 소리 그만해.”
“터무니없는 소리라니.”
단지 공부를 배우고 싶다는 것뿐인데. 다니엘은 목소리에 웃음기를 숨기지 못한 채 대꾸했다. 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옅은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웨슬리에게 말했다.
“아쉽네, 웨슬리. 함께 공부한다면 즐거웠을 텐데.”
“어?”
“그렇지만 나와 둘이서만 공부하는 건 네가 불편하겠지.”
다니엘은 정말 아쉽다는 듯 끝까지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닉이 그 얼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웨슬리는 뒤늦게 손을 들어 손을 내저었다.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은 건지 다급하게 손을 휘젓는 순진한 모습이 퍽 안쓰럽기까지 했다.
안타깝긴 해도 자신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닉은 거기서 웨슬리를 다독이는 대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연습 끝나서 온 거야?”
“응, 집에 가자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이내 다시 웨슬리를 힐긋 바라보았다.
“웨슬리, 너도 집에 가지? 태워 줄까?”
“뭐?”
물음은 웨슬리에게로 향했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닉이 놀라서 커진 눈으로 다니엘을 주시하고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다니엘이 제 것에 얼마나 강박적으로 구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의 차에 타인을 태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다니엘은 파트너와 동행해야 하는 파티에는 곧잘 리무진을 부르곤 했다. 그게 단지 제 차에 태우고 싶지 않아서임을 닉은 알았다.
그런 다니엘이 선뜻 웨슬리를 향해 차에 태워 주겠다고 말한 것은 의외였다. 의외를 넘어, 쉽사리 믿기 힘든 말이었다.
“아, 아니, 나는 괜찮…아….”
“그래. 그렇다면 잘 가.”
몸을 움츠리며 소심하게 내뱉은 웨슬리의 거절에 다니엘이 생긋 웃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닉이 그럼 그렇지, 하며 나지막이 실소를 흘렸다.
조심히 가라며 조곤조곤 배웅하는 말은 강요 하나 없었으나,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늦게 온 것은 다니엘이었다. 웨슬리가 가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마치 웨슬리를 이곳에서 내보낼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그 다정한 목소리에 웨슬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그럼 다음에 보자.’ 하고 다니엘이 말했다. 웨슬리는 그의 말에 어설프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속에서 멀뚱히 서 있던 닉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너 정말 싫어, 니키.”
웨슬리가 사라지자마자 또 시작이었다. 다니엘을 바라보는 닉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나도 네가 싫다고 말했을 텐데.”
“정말 짜증 나….”
“누가 할 소리를. 내가 더 짜증 나거든?”
“아무에게나 흘리고 다니고.”
“내가 뭘 흘리고 다녀, 이 새끼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웃던 게 누군데 제게 흘리고 다닌다니 뭐니 하는 건지. 울컥한 닉이 주먹을 휘둘렀으나, 다니엘은 예상했다는 듯 여상히 바로 잡아챘다. 그러고선 성큼 걸음을 떼 그에게로 몸을 밀착시켰다.
풀의 끄트머리에 선 닉이 코앞까지 다가와 선 다니엘을 뭐냐는 듯 노려보았다. 엇비슷한 눈높이인데도 이상하게 다니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길쭉한 속눈썹이 아래로 드리워져 녹안을 가렸다.
다니엘은 삐딱하게 닉을 내려다보았고, 닉도 질 수 없다는 듯 노려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아예 밀어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한 발짝만 뒷걸음질을 쳐도 물에 빠질 지경이라 비키라는 눈짓을 보내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니키.”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자신을 불러 왔다.
“왜.”
퉁명스러운 되물음과 함께 열렸던 입술이 틀어막혔다. 다니엘 레널드가 닉의 허리를 꽉 붙잡은 채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입 안을 비집고 들어온 살덩이가 닉의 혀와 순식간에 엉켜들었다. 고개를 숙이며 잡아먹을 듯 파고드는 다니엘의 무게에도 닉은 호락호락하게 몸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입을 맞춰 오는 것에 쉬이 당황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닉이 서 있는 곳은 풀장의 끄트머리였다.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오른발을 뒤로 뺀 순간, 디딜 곳을 찾지 못한 그의 몸이 기우뚱 흔들렸다.
“윽.”
닉이 다급하게 양팔을 뻗어 다니엘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처럼 집요한 키스를 퍼붓던 다니엘도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했다. 그리고 풀장으로 기우는 닉의 몸을 잡아 주었다.
의도치 않게 서로의 몸을 빈틈없이 껴안게 된 상태로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빛을 등진 탓에 어두워진 상태로도 닉의 푸른 눈동자는 변함없이 빛을 품고 일렁였다.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정도 모를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입을 맞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갈증이.
다니엘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하아. 다니엘은 안도가 섞인 긴 한숨을 내쉬는 닉을 바라보다 후, 하고 그를 따라 숨을 내쉬었다.
매달리듯 어깨를 두른 팔이 겸연쩍었는지 닉은 금방 팔을 내렸다.
“니키.”
약간의 신경질적인 시선이 곧게 다니엘을 향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SAT 공부라면, 내가 도와줄게.”
“사양해도 되지?”
“그럴 리가.”
다니엘이 빙긋 웃으며 허리를 감은 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살살 맨살결 위를 만지작대는 손길에 닉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야… 여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 이러다가 누가 들어와서 보면, 읏.”
허리를 쓸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수영 팬츠 하나만 입은 엉덩이를 꽉 쥐었다. 닉이 하던 말을 잇지 못하고 짧게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진짜. 다시 팔을 들어 올린 닉이 다니엘의 어깨 뒤로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팔에 힘을 줘 그를 옆으로 밀쳐 내듯 떼어 냈다.
“넌 진짜 네 멋대로야.”
마치 던지는 것과도 같은 거리낌 없는 냉정한 손길에 다니엘이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네가 그래도 된다고 해 줬잖아.”
“그건……!”
그 뻔뻔스럽기까지 한 목소리에서 닉은 왜인지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 으르렁거리던 표정이 순식간에 맥을 잃고 풀어졌다.
“그건 섹스할 때고. 그리고 앞으로 너랑은 안 해.”
다니엘이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굳었다.
“…왜?”
말을 고르는 듯 한동안 침묵하던 끝에 꺼내 든 물음이 고작 그거였다. 허. 닉이 짧게 실소했다.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을 멍청이 취급하는 주제에 자기도 순진할 만큼 멍청한 구석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몰라서 물어?”
닉 클레이튼은 방금의 격렬한 키스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진 타월을 주워 들었다. 다니엘은 그 일련의 동작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도 못하는 게 있었어, 왕자님.”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다니엘의 눈을 바라보며 이죽댔다.
“조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테크닉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하니까.”
닉은 주저 없이 샤워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뇌 회전이 빠른 레널드는 평소와 달리 바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듯 침묵했다. 잠시의 정적이 끝나고, 곧 자신의 뒤를 따르는 신경질적인 발소리에 닉은 당장에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꾹 삼켰다.
다니엘 레널드에게 한 방 먹인 감각은 그 어떤 것에 비견해도 지지 않을 만큼 짜릿했다.
***
지역 결선은 끝났지만, 수영 대회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둔 수영 대회에는 내년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티켓이 걸려 있었다.
닉 클레이튼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니어였다. 바로 프로로 전향하든 대학 진학을 준비하든 그는 이번 대회에서 좋은 기록을 내야만 했다.
대회를 앞둔 그의 하루는 쳇바퀴 위를 도는 것처럼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학교로 가 다른 스포츠 클럽 선수들과 함께 러닝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교내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다가 제일 늦게 점심을 먹었으며, 끝난 다음에는 코치가 주는 대로 훈련 내용을 소화했다.
그걸 매일같이 해내는 것만 해도 고된 일이기는 했으나… 다행히도 닉은 인류보다는 어류에 가까운 종이었다. 늘 그렇듯 남아서 추가적인 훈련을 계속하던 닉이 매번 앉는 자리에 앉아 있는 노아를 발견하고 수경을 벗었다.
“안녕.”
담담한 인사에 노아가 파르르 떨었다. 그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이제는 익숙해져서, 닉은 별다른 반응 없이 제 할 말을 꺼냈다.
“노아 웨슬리. 너 혹시 수영에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어? 아, 그… 훈련에 방, 방해돼?”
“그런 건 아니고. 일주일 내내 수영장으로 오길래.”
전에는 있었는 줄도 몰랐던 노아 웨슬리는 요즘따라 유독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는 짓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는 곳마다 빼놓지 않고 웨슬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소하게는 이동 수업부터 시작해 파티, 그리고 방과 후에는 수영장까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노아 웨슬리가 서 있었다. 그런데 막상 눈이 마주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돌린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도 없었다. 굳이 알은체하지 않고 고개를 바로 하면 금방 다시 끈질기게 바라봐 오는 것이 웃기기도 했고, 왜인지 모르게 머쓱하기도 했다.
스토킹하는 것도 아니고…. 닉은 자신이 했던 생각이 우스워 픽 입가를 허물어트리며 웃었다. 그에 노아 웨슬리가 들고 있던 펜을 뚝 떨어트리며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미, 미안….”
“수영하고 싶으면 해도 돼. 어차피 나는 이쪽 트랙만 쓰니까.”
닉이 뻐근한 눈 주변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아니다. 이제 슬슬 가야겠어.”
조금 더 연습할까 싶었지만,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이번 금요일은 풋볼 팀이 다른 학교로 원정 경기를 가는 날이었다. 다니엘이 없다는 뜻이었다.
다니엘 레널드는 귀찮았지만, 그래도 편리한 점은 있었다. 훈련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가면 막 훈련을 마치고 씻고 나온 듯한 다니엘이 차 안에서 그 와중에도 대본인지 책인지를 읽으며 자신을 기다렸던 것이다.
「널 기다리고 있어.」
다니엘은 꼬박꼬박 그런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문자를 남겨 두지 않아도 그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딴 곳으로 새지 말고 곧장 오라는 말이 아닐까 하고 닉은 짐작했다.
어쨌건, 다니엘이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나 운전을 도맡은 날은 닉이 직접 차를 몰지 않은 날과 일치했다. 매일같이 남이 운전해 주는 차에 타 편히 하교하던 게 벌써 몸에 밴 모양이다. 고작 하루 직접 운전해서 돌아가는 것뿐인데 이상하게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니키, 저기, 너만 괜찮다면… 내가 데려다줄까?”
닉이 물 밖으로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던 노아 웨슬리가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 같은 말을 꺼냈다. 닉이 묘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 레널드의 차로 가면 되는데.”
“그는 지금 없잖아.”
대수롭지 않은 말에 평소와는 다른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음성에 언뜻 스쳐 지나간 불쾌감은 그냥 제 기분 탓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노아 웨슬리가 표정을 알 수 없도록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날 니키라고 불렀지?
할아버지나 다니엘만이 자신을 니키라고 불러 왔다. 그 탓에 노아의 입에서 나오는 애칭이 조금 낯설었다. 그러나 닉 클레이튼은 이내 잠시 떠오른 의문을 머리에서 지워 냈다.
“아, 아니, 늘… 레널드가 데려다주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경기에 나가서 없으니까….”
노아가 평소와 같은 어리바리한 얼굴로 더듬더듬 변명을 꺼냈던 것이다. 닉은 이어지는 그의 말들에 왜인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제 뒤를 졸졸 쫓는 노아 웨슬리를 떠올리던 닉이 무례한 생각들을 접어 두었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노아가 저를 하루 종일 쫓아다닌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변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레널드와 함께 하교하는 모습을 봤다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비록 경기에 나가진 않지만, 그 또한 같은 풋볼 팀이니 다니엘의 부재도 당연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닉이 가볍게 납득했다.
“운전할 수 있어?”
“으, 응…!”
노아 웨슬리는 운전할 수 있냐는 질문에 기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다주고 싶다는 바람이 가득 들어찬 얼굴에 닉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뭘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아무튼, 씻고 나올게.”
“기다릴게!”
드물게도 흥분한 듯한 노아로부터 몸을 돌렸다.
샤워는 금방이었다. 아직 채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거칠게 털어 내며 밖으로 나오자, 차를 끌고 나온 웨슬리가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 앞에 서서 소심하게 손을 들어 보이는 모습에 닉도 대충 손을 흔들어 주며 가까이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연 닉이 차에 올라탔다. 다급하게 운전석에 올라탄 노아가 앉아서 핸드폰을 보는 닉에게로 물이 든 생수병을 내밀었다.
“모, 목마를까 봐.”
“어. 고맙다.”
닉은 그 병을 받아 들며 손가락만 이용해 병을 열었다. 병뚜껑은 생각보다 쉽게 돌아갔다. 병 안에 든 물이 꼴깍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웨슬리는 닉이 병을 다시 완전히 닫고 나서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
훈련이 오늘따라 특히 고된 것도 아니었는데,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길목을 빠져나가 도로를 달리던 닉은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하품했다.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익숙했다. 이다음에 옆으로 꺾어야 하는데…. 그걸 말하기도 전에 차는 정확히 그 방향으로 꺾였다. 또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위화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닉이 운전대를 잡은 웨슬리를 바라본 순간, 예상치 못한 질문이 귓가에 박혀 들었다.
“니키, 저, 너는… 레널드와 사, 사귀는 거야?”
운전대를 잡은 채 앞에만 시선을 고정한 웨슬리가 덜덜 떨며 물었다. 닉의 머릿속이 금방 새하얗게 물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게 무슨 좆같은 소리야.”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거친 말투에 웨슬리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떨렸다. 그걸 발견한 닉이 아차 하며 눈을 굴렸다. 지금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웨슬리였다. 안 그래도 발발 떠는 놈한테 다그쳐 봤자 천국으로 가는 급행열차에 탄 꼴이 될 것이다.
젠장. 번거롭더라도 직접 운전해서 갈걸. 그는 늦은 후회를 삼키며 혀를 찼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
“…네, 네가 레널드와 키스하는 걸 봤어.”
“언제?”
닉이 인상을 썼다.
“됐어, 대답 안 해도 돼.”
언제 말하는 건지 궁금하긴 했으나, 듣고 싶진 않았다. 근 일주일간 학교에서 다니엘 레널드와 못해도 다섯 번은 입을 맞췄을 것이다. 언제를 말하는 건지를 곧바로 짐작하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아, 다니엘 레널드 이 개자식!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발정 나는 레널드 때문에 게이로 오해받게 생겼다. 닉이 억울한 표정으로 웨슬리를 불렀다.
“웨슬리, 일단 나는 여자가 좋거든?”
“거, 거짓말!”
그를 달래고자 부드럽게 흘린 물음이 단박에 부정당했다. 졸린 눈을 벅벅 비빈 닉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뭐가 거짓말이야, 이 새끼야.”
“하지만 다니엘 레널드와 키, 키스했잖아….”
“야, 그건…!”
억울함을 담아 항변하려던 닉의 입이 다물렸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복잡한 머릿속으로 무거운 물음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다니엘 레널드와 키스하는 거지? 키스뿐일까, 섹스까지 했다.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꼬인 거지….
일반적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할 법한 경험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과도한 의문이 파도처럼 닉을 덮쳐 왔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나? 닉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졌다. 스스로를 게이라고 칭하기에 자신은 지금껏 여자와 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면 모를까.
한참을 고민하며 입을 다물고 있던 닉이 불쑥 고개를 들고 웨슬리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게.”
게이는 아닌데 다니엘 레널드와 하는 것은 괜찮다고? 그건 어딘가 이상했다. 다니엘 레널드도 결국 남자였으니까.
닉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닉이 졸음기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여자도 좋아하는 게이였나 봐.”
“보, 보통은 그걸 바, 바이라고 불러, 니키….”
“나 그럼 바이야?”
“그걸… 나,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그의 물음에 웨슬리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의 성 지향성이 뭔지 남한테 떠먹여 달라는 듯했던 것이다. 정작 그런 물음을 던졌던 닉은 이미 웨슬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창틀에 걸친 팔 위로 그의 머리가 점차 내려앉고 있었다.
이상한데…. 점멸하는 시야 너머 일렁이는 풍경을 바라보던 닉이 미간을 찡그렸다. 한 번도 물에 빠져 본 적 없었으나, 만약 몸을 가눌 수 없이 물속으로 잠겨 든다면 이러한 감각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의지로 뿌리칠 수 없는 잠기운이 무겁게 그를 내리눌렀다.
“…다음 블록에서 우회전해야 해, 노아.”
“알, 알고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만약 멀쩡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닉은 어느새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낯설어졌음을 알아차릴 수도 없어졌다.
쿵, 힘없이 떨어진 머리가 창문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뜨지 못한 채 깊은 수마에 잠겨 들었다. 닉 클레이튼이 잠에 빠져든 사이, 그를 태운 차는 예정된 도착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