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arming up
닉은 자신의 물음에 레널드가 수치스러워하든, 맹렬히 부정하든 제법 웃긴 반응을 보여 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레널드는 그저 낮게 숨을 고르며 말없이,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용하지만 요란스러운 시선에 닉이 눈살을 찌푸릴 때 즈음,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천천히 흘러나온 말이 닉의 몸을 옭아맸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녹색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닉이 멈칫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이 새끼 맛이 갔는데? 나 지금 다니엘 레널드의 이상한 스위치를 켠 거 같은데…?
“네가 책임이라도 져 줄 거야, 니키?”
뒤이어 흘러나온 물음은 다소 애절했다. 그러나 닉은 고개를 기울이며 비웃을 뿐이었다.
“그걸 내가 왜 책임져? 알아서 해결해, 또 아무나 붙잡고 키스하지 말고.”
그 말에 다니엘이 딱딱하게 굳었다. 닉은 늘 그렇듯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 그건 다니엘을 자극하는 수준을 넘어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너 그거 기억하고 있어?”
“그걸 기억 못 하는 게 말이 되냐?”
그건 그러니까, 닉이 품고 있는 ‘왜 다니엘 레널드는 내게 이렇게 좆같이 굴까?’라는 의문의 유력한 가설 중 하나였다. 4번째 가정. 두 사람이 중등부를 졸업하던 날 밤, 할아버지 집에서 몰래 스카치 한 병을 훔쳤을 때였다.
***
스카치 한 병을 들고 숨이 차게 뛰어 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난생처음으로 술이라는 것을 먹어 보았다. 아니, 닉은 입술만 축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시기도 전에 훅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향에 머리가 아찔했으니까.
다니엘 레널드는 어른들로부터 혼날 짓은 ‘대놓고’ 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닉 클레이튼이 하는 모든 혼날 만한 짓에 동참했다. 그는 덤덤하게 위스키가 든 머그잔을 기울였고, 꿀꺽 움직이는 목울대를 따라 적지 않은 한 모금이 넘어갔다.
닉은 그런 다니엘을 따라 컵을 기울였으나, 차마 목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레널드보다 훨씬 적은 양을 삼켰는데도 말이다. 고작 그 몇 방울이 목을 새까맣게 태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망할, 아프잖아! 어른들은 대체 이딴 걸 왜 먹는 거야? 닉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울어, 니키?”
그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닉의 귓가에 박혀 들었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살짝 상기된 얼굴로 키득거리고 있는 다니엘의 모습이 들어왔다.
“웃기지 마, 내가 왜 울어?”
“그래, 안 울었다고 쳐.”
“안 울었다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 안 울었다고!”
흥분한 나머지 높아진 언성에 거친 숨소리가 뒤섞였다. 다니엘은 그런 닉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겠으니까 그만 마시자. 들키면 외출 금지로 끝나진 않을 것 같으니까.”
어른스럽게 자신을 달래려고 드는 것이 빤히 보였다. 레널드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자기도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져서 헤실헤실하는 주제에, 멀쩡한 어른인 척. 그렇게 갑갑하게 굴어 봤자 자신과 동갑이었는데도 말이다.
“레널드, 가식은 집어던져. 누가 본다고 그래?”
빈정거리듯 던진 가벼운 말에 다니엘의 분위기도 한결 가벼워졌다.
“너는 좀 주변을 의식해, 멍청아.”
물론, 말투는 여전히 재수 없었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닉이 그에게 휙 주먹을 휘둘렀고 다니엘은 여유롭게 피했다. 얄미워서 한 대 쳐 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못 본 것도 아닐 텐데 다니엘은 여전히 싱긋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약 올리는 게 즐거워서 더 실실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니엘 레널드는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닉의 손에 그를 이길 수 있을 만한 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는 너는? 헤일리랑 사귀면서도 키스 한 번 안 했다며?”
“그게 왜.”
“하하, 멍청이! 나는 했어, 제시랑.”
“……뭐?”
“입맞춤 이상을.”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다니엘은 들고 있는 컵을 손에서 놓쳤다. 다행히 바닥에 러그가 깔려 있었고, 그가 따라 준 술을 전부 마셨기 때문에 빈 컵이 바닥만 몇 번 구르고 끝났다.
닉은 그 광경을 보며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컵이 떨어진 소리가 제법 크게 났는데도, 다니엘은 제가 컵을 떨어트렸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듯 굳어 있을 뿐이었다.
“야, 야.”
“키스를…?”
오랫동안 말이 없던 다니엘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배신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자신이 먼저 첫 키스를 한 것에 어마어마한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닉이 통쾌하게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꾹 삼키며 설핏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왜?”
“왜라니.”
“왜 제시카 해밀턴이랑, 왜… 어떻게?”
“집이 빈다고 제시가 불러서.”
“닥쳐. 듣고 싶지 않아.”
“뭐야?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다니엘을 닉은 마주 노려보았다. 또 왜 심사가 뒤틀린 건지 모르겠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 다니엘 레널드는 맨날 기분이 날씨처럼 오락가락했다.
몇 분간 지속되던 눈싸움은 다니엘이 고개를 떨굼으로써 끝났다. 비스듬히 시선을 내린 채 가만히 있는 그가 의아해, 닉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충격이 컸던 것 같다. 혹시 우나? 닉은 고개를 기울여 다니엘의 얼굴을 살피고자 기웃거렸다.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어, 레널드?”
그건 그 둘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신호였다. 서로에게 지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서투르게 건네는 위로 혹은 화해. 선을 넘는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해도 장난을 걸듯 저런 물음을 툭 던지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화를 풀어야 했다.
당연히 매번 바로 푸는 것은 아니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도 다니엘 레널드도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주먹을 날리지는 않아도 서로 간의 거친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닉은 레널드가 거슬렸고, 그건 아무래도 레널드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멍청한 건 너지, 니키.”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다니엘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흐릿한 미소의 잔상을 눈으로 좇던 닉은 제 앞으로 성큼 다가온 다니엘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물리려고 했다.
그러나 닉이 뒤로 몸을 빼는 것보다, 다니엘이 다가온 것이 더 빨랐다. 입술에 닿은 말캉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알코올 향이 뒤섞인 더운 숨이 훅 파고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입맞춤에 당황해 굳어 있던 닉이 이내 맞서듯 혀로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리고 당황한 다니엘이 반사적으로 입을 벌린 순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혀를 얽었다.
“흐, 읍…….”
그런 닉의 행동에 멈칫한 다니엘은 결국 뒷걸음질 치듯 입술을 떼어 냈다.
다니엘 레널드는… 처음이었다. 그걸 다니엘 본인도 알고 닉 클레이튼도 알았다. 다니엘에게 있어 혀가 엉키는 입맞춤 같은 건,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종류의 것이었다. 얼굴이고 목이고 잔뜩 얼룩덜룩 붉어진 다니엘이 뒤늦게 손을 들어 입가를 막았다.
한발 늦게 올라오는 취기에 다니엘 못지않게 얼굴이 붉어진 닉이 그를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내가 이겼어.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 동정은 내 상대가 안 된다고.”
“……너!”
그리고 그게 그날 밤 닉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게 다니엘이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에 제법 타당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술에 취해 자기 욕구 하나 이기지 못해서 같은 남자인 자신에게 입을 맞댄 찌질이 멍청이 불쌍한 동정 레널드의 잘못이 백 퍼센트였지만, 그래도 첫 키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건…….
그래. 다니엘 레널드가 수치스러워하며 두고두고 이불을 걷어차게 될 만한 사건이기는 했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부끄러워서 자살할지도 모르는 레널드를 위해 닉은 굳이 그 일을 꺼내어 놀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럴 틈도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다시 연기 활동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으니까.
***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어.”
“나의 배려였지.”
“그게…….”
닉이 퍽 멋들어진 웃음을 입에 걸고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다니엘은 자신의 배려에 감동은커녕 한층 더 원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배려야, 니키 클레이튼.”
“아니 또 뭐가 문제인데?”
“너는 나랑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렇지 않아?”
닉은 진심으로 황당해졌다. 분명 그날 밤 먼저 입을 맞추는 미친 짓을 한 건 본인이면서, 레널드는 되레 순결한 첫 키스를 뺏긴 양 굴고 있었다.
“너도 아무렇지 않게 굴었잖아?”
“그건.”
레널드가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하…. 그의 입에서 길게 내뱉어진 숨이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건, 제길, 네가 술 먹고 기억 못 하는 줄 알았으니까.”
다니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욕설에 닉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니엘 레널드는 욕이라는 것을 입에 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끔 과격한 어조를 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처럼 화났다고 해서 욕설을 입에 담는 그런 언어 습관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따라서 그에게서 거의 처음 들어 본 욕설에 잠시 얼어 있던 닉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하면 뭐가 달라져?”
“…….”
“나한테 키스한 거 기억하면 쪽팔려 죽으려 들까 봐 모르는 척해 줘도 난리야.”
다니엘이 얼굴을 굳혔다. 비록 커다란 손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닉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건데?”
그 물음에 둘 사이에는 짧은 침묵만이 맴돌았다. 답답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다니엘을 보며 닉이 목덜미를 쓸었다.
“레널드.”
“…….”
“왜 그랬는데?”
그 성의 없는 재촉에 다니엘의 입에서 아주 뒤늦게야 짤막한 단어가 꺼내졌다.
“그냥.”
“그냥? 그으냥? 이 개자식이?”
“그냥… 너를 보면 참을 수 없게 돼.”
그 말은 마치 한숨을 토해 내는 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닉이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건 그 나름의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널드가 보스턴으로 돌아온 후에 보여 주는 태도는 익숙했지만, 그가 내비치는 감정은 하나같이 낯설었으니까. 다니엘 레널드는 이토록 감정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자신을 보며 약한 목소리를 내뱉는 사람도 아니었다.
누군가 다니엘 레널드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채 나타난 것 같았다. 하는 행동거지가 본인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재수 없지만 않았다면, 진심으로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뭘 못 참는데?”
“…….”
“…성욕을?”
닉이 설핏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는 드물게도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닉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도 성욕에 쉽게 무너지기는 하지만, 다니엘 레널드마저 그럴 줄이야. 아니 따지고 보면 레널드는 저보다 심했다. 적어도 자신은 성욕 하나 못 참아서 아무나 잡고 입술을 비벼 대지는 않으니까.
레널드가 할리우드에 있는 동안 스캔들이 몇 번 터졌으니 아직도 동정은 아니겠지만, 그가 성욕에 약한 편인 것은 확실한 듯했다. 다니엘 레널드와 자기 사이의 공통점을 찾은 것에 기뻐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닉은 문득 알 수 없어졌다.
“성욕…….”
다니엘은 아주 생소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느릿하게 입 안에서 단어를 굴렸다. 그의 입술 새로 새어 나온 단어의 발음이 유독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닉은 괜스레 더 가벼운 어조로 말을 뱉었다.
“뭐, 성욕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잖아. 그게 나를 향한 것만 아니면 문제없지.”
“…….”
“망할. 아니지?”
분위기를 환기해 보고자 아무렇게나 내뱉은 물음에 레널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정적에 닉의 눈살이 서서히 찡그려졌다. 침묵의 무게는 아무래도 긍정 쪽에 실려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살피듯 바라보던 다니엘 레널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고민하는 듯 보였고, 한편으로는 답답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레널드는 뒤늦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가….”
“멍청한 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둘 다인 거야? 니키 클레이튼, 너를 보면 참을 수 없다고 했잖아. 다른 사람 말고.”
“아냐, 말하지 마.”
“네가 그렇게 질색하면 더 하고 싶은 거 알아?”
“알고 싶지 않으니까 닥쳐, 이 새끼야!”
“싫어, 멍청아.”
닉이 거칠게 팔을 빼내 마주 잡고 있던 다니엘의 손을 뿌리쳤다. 다니엘은 잠시 내쳐진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눈을 접어 웃었다.
“겁먹었어?”
“아니! 절대!”
언성을 높이긴 했지만, 닉 클레이튼은 사실 조금 무서웠다.
이 새끼는 날 괴롭히면서 재밌어하는 줄 알았더니 성적으로도 괴롭히고 싶었나? 혹시 새로 구상한 괴롭힘 방법인가? 일리 있었다. 닉이 오스스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돌았어? 할리우드에서 대가리에 총이라도 맞은 거야? 미친놈아, 그럼 병원을 가야지 왜…!”
왜 애꿎은 나를 괴롭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닉은 정말 알 수 없어졌다.
이게 다니엘 레널드라고? 툭하면 시비를 걸고, 제가 관심을 두고 여자들에게 다가가는 족족 선수를 치고, 타인 앞에서는 자신을 챙겨 주는 척 뒤로는 못살게 구는 그 다니엘 레널드라고?
“야, 나를 보고… 서?”
“꽤나 노골적이네.”
“아니지?”
닉은 다니엘이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렇다고 말한다면, 조금, 많이 끔찍할 것 같았으니까.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단순했으며 자기애도 꽤 높은 편이었다. 자신한테 호감을 갖는 것은 여자든 남자든 성별을 떠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여태 여자만 좋아했고, 남자로부터 구애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다든지 역겹다든지 하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같은 성별에게도 먹히다니 제법 자랑할 만한 일 아닌가?
그게 빌어먹을 다니엘 레널드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
“한번 해 볼래?”
다니엘이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왜 말이 안 돼?”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올해 생일이 지났고, 이제 성인이야.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뭐가 문제야, 니키?”
“지금 성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발끈해 목소리를 높였던 닉 클레이튼이 멈칫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구는 다니엘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말이 안 되냐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닉은 이걸 구태여 설명하는 것조차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은 이미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레널드를 향해 제멋대로 나불대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여자가 좋아…. 남자랑은 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할 일도 없을 거야.”
“나도 남자랑 해 본 적 없어.”
“근데 나랑은 왜.”
“왠지… 너랑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닉은 그 터무니없는 소리에 쉬이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적당히 어처구니가 없어야 대꾸를 하지, 이건 진짜 너무했다.
띠리링-
그때, 스포츠 클럽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평소에는 훈련이 끝나는 게 아쉬워 종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닉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경쾌한 소리가 구세주의 음성처럼 들렸다.
살았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런 닉을 따라 다니엘도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몸을 돌려 도망치려는 닉의 발을 묶은 것은 다니엘의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왜? 자신 없어?”
“야.”
그가 얼굴 가득 억울함을 가득 안고 순식간에 뒤돌아섰다. 레널드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왜 지금 그딴 말을 해? 지금이 그런 말을 할 타이밍이야? 짙은 녹색 눈동자를 지그시 노려보며 열심히 외쳤으나,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은 말은 레널드에게 닿지 않았다. 평소의 재수 없는 낯을 다시금 뒤집어쓴 다니엘 레널드가 유유자적 웃고 있었다.
“진짜 골 때리네.”
닉 또한 어이없단 얼굴로 얕은 실소를 흘렸다.
다니엘 레널드도 미친 게 분명하지만, 저 말에 오기가 드는 자신도 미친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같잖은 수작질이라는 걸 알면서도 닉 클레이튼은 도저히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제길, 좆같은 다니엘 레널드.
“그래, 한번 해 보자.”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방법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
“헉… 읍, 레널드. 문 닫아야…….”
다니엘에게 잡아먹힐 듯 안겨 방 안으로 들어온 닉이 고개를 돌렸다. 맞닿아 있던 입술이 잠깐 떨어진 그 찰나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린 다니엘이 빠르게 속삭였다.
코앞에서 말하는 탓에 뜨거운 숨결이 닉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차피 아무도 안 와. 알잖아. 고개 돌리지 마.”
“정신 나간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는데…!”
“제발, 니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간절하게 들려오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닉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다니엘이 팔에 힘을 실어 닉을 밀어 넘어뜨렸다.
풀썩, 침대 위로 눕혀진 닉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잠시 눈을 껌벅였다. 시야를 채우던 하얀 천장을 가르고 레널드의 널찍한 어깨가 파고들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다니엘 레널드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 길게 한숨을 내쉬느라 벌어진 닉의 입술로 다시 한번 레널드의 입술이 맞닿았다. 무슨 사냥감이라도 물은 듯 갈증 난 짐승 새끼처럼 혀를 얽어 온다. 그런 급박한 몸짓과는 다르게 볼을 간질이는 레널드의 머리칼은 부드러웠다.
아……. 제기랄, 모르겠다.
닉이 손을 뻗어 레널드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이를 세워 레널드의 입술을 물었다.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다니엘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닉의 혀가 여유롭게 상대의 입 안을 침범했다.
닉 클레이튼은 본능에 충실한 만큼 본능적인 순간에 손쉽게 주도권을 가져갔다. 원래도 본능에 충실한 면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더더욱 능숙하게 쾌락을 좇았다. 성욕에는 져도, 다니엘 레널드에게는 질 수 없었으므로.
“윽.”
이윽고 닉이 팔을 뻗어 다니엘의 어깨를 밀어냈다. 강한 힘에 순식간에 떠밀린 다니엘이 옆으로 쓰러졌다. 뭐 하는 거냐는 듯 눈살을 찡그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니엘 위로 올라탄 그가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단숨에 우위를 선점했다.
그리고 그 순간 허벅지를 찌르는 묵직한 감각을 느꼈다. 웃고 있던 닉의 얼굴이 와르르 일그러졌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로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얼굴까지 피어올랐던 열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닉은 불현듯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섰어?”
“…….”
“진짜로?”
그의 입에서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눕혀진 채 그를 올려다보던 다니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집에 돌아오면서부터 이어진 끈질긴 키스에 닉도 흐트러진 꼴이긴 했으나 그의 바지 안은 아직 멀쩡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레널드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니엘 레널드가 침대를 짚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 반동 탓에 닉은 다니엘의 무릎에 앉은 것 같은 어정쩡한 자세로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어느새 다시 코앞까지 다가온 다니엘이 닉을 꽉 붙잡았다. 다소 잠긴 듯한 목소리가 그의 목을 긁으며 튀어나왔다.
“나를 앞에 두고 그런 얼굴 하지 마.”
“야, 레널드.”
“어떤 레널드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숨결 섞인 목소리가 닉의 가슴께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다니엘은 고개를 숙여 닉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움찔거리는 몸짓을 여실히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개를 들기는커녕 보채듯 비비적거렸다.
“나를 말하는 거라면, 대니라고 불러 줘.”
그 말에 닉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티셔츠 안으로 파고든 손이 곧게 뻗은 척추뼈를 빠르게 타고 올라온 탓이었다. 차가운 손길이 근육이 섬세하게 짜인 닉의 매끈한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 닉이 짧은 신음을 삼켰다. 그의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제 와서 도망치는 법은 없어, 니키.”
어둡게 가라앉은 다니엘의 진득한 시선이 닉을 샅샅이 살폈다. 후회하는 듯한 기색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왜인지 다소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그가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윽고 닉 클레이튼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약한 고갯짓에도 다니엘은 한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니엘 레널드의 기다란 손가락이 닉의 턱 밑을 쓸었다. 찬찬히 날렵한 턱선을 타고 올라가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닉이 짧은 탄식을 간신히 삼켰다.
손가락이 닉의 속눈썹 위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눈가를 살살 쓸었다. 반사적으로 감은 눈가 위로 말캉거리는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게 입술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쪽, 쪽. 입술이 살갗에 닿는 소리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 새도 없이 레널드는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위로도 꾹 도장을 찍듯 입술을 내리눌렀다. 이윽고 키득거리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뺨 위로 내려앉았다.
그 웃음기 섞인 호흡에 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솟았다가 다시 내려왔다.
“저기, 레널드.”
“대니.”
“…다니엘.”
쪽.
“야.”
쪽, 쪽.
“대니.”
“응.”
개도 아니고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들 생각인지 레널드가 쉴 새 없이 얼굴에 입술을 눌렀다. 레널드는 자신이 기어코 대니, 라는 웃기지도 않은 애칭을 입에 담고 나서야 잠시 멈추고 눈을 맞췄다.
녹색 눈동자 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지독히도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무슨 말이야?”
“우리가 데이트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낯간지럽게 굴지 않아도 되지 않냐고.”
“…….”
“너는 지금… 급해 보이는데.”
닉이 주저하던 말을 꺼냈다. 슬쩍 아래를 눈짓하자 다니엘도 따라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바지 위로 발기한 성기의 형태가 뚜렷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누가 봐도 급한 쪽은 다니엘이었는데도, 그는 아무 말 없이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불규칙한 호흡이었다. 닉이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니엘 레널드가 이윽고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곧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명백한 불쾌감이었다. 마치, 분노와 같은 오래된 감정. 가만히 들여다보아도 닉은 그의 얼굴에 그려진 감정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왜 화났지?
“그럼?”
그의 입에서 짓씹듯 거친 물음이 튀어나왔다.
“과정은 전부 생략한 채 내 욕구만 배설하길 바라는 거야?”
닉은 다니엘이 어느 지점에서 화가 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네가 하는 섹스야, 니콜라스 클레이튼?”
“야.”
“아니면, 나랑만 그러는 건가?”
물음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었으나 이미 답은 후자라고 생각을 굳힌 듯했다. 그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뭐라고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다니엘은 팔을 내려 닉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신을 일으키는 강한 힘에 떠밀려 닉은 삽시에 발을 땅에 디뎠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다니엘 또한 망설이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 묘한 시선의 높이 차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던 닉을 붙잡은 다니엘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니키.”
지이익. 바지 지퍼가 다니엘의 손에 걸려 아래로 내려가고, 그대로 끌려 내려간 바지가 발밑으로 추락하는 광경을 닉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처음도 아닌데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 상대가 남자여서인지, 다니엘 레널드여서인지 모르겠다. 다니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가라앉은 얼굴로 닉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불룩 튀어나온 팬티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헉.”
그가 급히 숨을 들이쉬는 동안 다니엘은 본격적으로 팬티 위로 혀를 굴렸다.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감각에 닉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다니엘은 눈을 굴려 닉을 올려다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허벅지를 쓸며 올라간 커다란 손이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윽……!”
닉이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다니엘 레널드는… 이런 제기랄. 제 고환을 손에 쥐고 부드럽게 주무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음부가 옷감에 쓸려 발끝까지 찌릿한 자극을 전달했다. 아래로 열감이 몰리는 화끈한 감각에 닉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성기가 단단해지며 젖은 팬티 위로도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쭙, 쭙, 소리를 내며 귀두를 입에 머금고 빨아 대던 다니엘이 그대로 팬티의 밴드를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 반동으로 퉁, 튀어나온 성기가 다니엘의 매끄러운 왼뺨을 쳤다. 반사적으로 왼쪽 눈을 설핏 찡그렸던 그는 발기한 물건을 보며 쌕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비스듬했던 고개를 바로 하곤 입을 벌렸다.
“헉! 대, 읏, 대니…!”
허공에서 좆질하듯 흔들리던 성기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기를 입에 문 다니엘이 느릿하게 혀를 움직여 기둥을 쓸었다. 타인의 입 안이 이렇게 뜨거운 것이었나, 닉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심스럽게 눈만 들어 닉을 살피던 다니엘이 곧 성기를 빨며 고개를 뺐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며 목 깊숙한 곳까지 삼켰다.
반복되는 피스톤질에 닉의 숨소리가 씨근덕대기 시작했다. 헉, 헉, 씨발……. 저속한 욕설이 흥분한 숨소리에 섞여 거칠게 튀어나왔다.
본능적으로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닉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목구멍을 찌를 정도로 입 안 깊숙이 집어넣는 행위가 고통스러울 법도 하건만 다니엘은 멈추지 않고 머리를 움직였다.
찌르르한 자극으로 뻐근해진 허리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곧 사정할 때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다니엘의 고갯짓도 한층 빨라졌다. 쭉, 쯉, 쮸읍, 살덩어리가 빨리는 외설적인 소리조차 귓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때, 다니엘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닉이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팔에 힘을 주고 그를 떼어 냈다.
“…아.”
다니엘 레널드의 젖은 입에서 건조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닉의 허리를 꽉 쥐고 있던 손을 떼고 더듬더듬 눈가로 가져갔다. 눈 위로 튄 희뿌연 정액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대충 손가락으로 닦은 다니엘 레널드가,
“미…친 새끼야.”
그대로 입가로 가져가 핥아 올렸다. 손끝에 묻어 있던 흰 정액이 남김없이 선홍빛 혀를 타고 입 안으로 사라졌다.
“뱉어!”
“이미 삼켰는데.”
“너 미쳤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걸 왜 처먹어, 제길!”
이 미친 새끼는 대꾸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평소 음험하다고만 생각했던 녹색 눈동자가 야살스럽게 휘어지는 눈매 속으로 반쯤 사라졌다. 그게 재수 없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여자애들이 다니엘을 두고 상상해 대는 그의 야한 얼굴이 눈앞에 들이밀어져 있었다.
“궁금해서.”
그들은 다니엘 레널드가 다리 사이를 빨아 주는 상상은 했겠지만, 그가 입에 문 게 같은 남자의 좆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성욕으로 가득 찼던 머리에 현실감이 조금씩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작 레널드는 현실감 없는 얼굴로 마냥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기분 좋았지, 니키?”
“…….”
아! 맙소사, 지금 레널드와 뭘 한 거지? 자괴감은 쉬이 야릇한 감정을 동반했다. 닉은 왜인지 후끈해지는 얼굴을 모르는 척하며 애써 가볍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뭐를?”
“너…….”
닉이 턱을 들어 아래를 가리키는 고갯짓을 했다. 다니엘은 굳이 시선을 내리지 않고도 그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겠다는 듯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넣게 해 줄 거야?”
“미쳤어?”
“그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터질 것 같은 아래와는 달리 다니엘 레널드의 말투는 덤덤했다.
어떻게… 신경을 끄냐. 그런 말을 뱉으려던 것을 꾹 참았다. 신경을 끄지 않는다면? 그 말마따나 다리를 벌려 주기라도 할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차라리 다니엘 레널드의 좆을 빨아 주고 말지.
잠시만. 레널드도 했으니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가 했으니 자신도 해야 공평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레널드가 몸을 일으키며 발목에 걸려 있던 속옷과 바지를 다시 끌어 올려 입혀 주었다. 무슨 아기를 다루는 것 같은 손길에 울컥 화를 낼 뻔했으나, 꾸역꾸역 삼킨 닉이 그를 불렀다.
“레널드.”
“…….”
“그… 하. 그래, 대니. 해 줄게.”
그 말에 다니엘이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멈칫하며 굳었다. 그는 휙 몸을 돌려 방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닉에게 고정시켰다.
“뭐를.”
묵묵히 닉의 얼굴 곳곳을 살피던 다니엘이 짧은 물음을 꺼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입으로 해 준다고.”
“하.”
되돌아온 것은 예상하던 반응이 아닌 평소와 같은 비웃음이었다. 방금까지 만족스럽게 걸려 있던 미소는 어디 갔는지, 레널드가 싸늘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웃기지 마. 너는 꼭 그렇게 감당 못 할 일을 벌여, 멍청하게.”
펠라를 하는 내내 눈을 굴리며 제 얼굴을 기민하게 살피고 역한 맛이 날 게 분명한 정액도 능숙하게 할짝거리던 좀 전의 다니엘 레널드는 온데간데없었다.
“뭐?”
“나는 네가 내 걸 입에 물고 나면 도중에 멈출 자신 없어. 그런데 너는 내일도 수영 훈련이 있잖아.”
“…….”
“감당할 수 있어?”
그의 입에서 조곤조곤히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닉이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묘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으나, 반박하지 않은 닉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물었다.
쉬이 대답을 돌려주지 못한 것은,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입으로 사정까지 간 주제에 그 이상을 도전할 용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닉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아는 듯, 차분하던 얼굴에 슬쩍 조소를 머금었다. 저벅저벅 긴 다리를 움직여 문 앞에 선 그가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내가 봐줬어. 네가 오늘 못 한 건 다음에 해. 이건 빚이야, 니키.”
쾅!
커다란 문이 신경질적으로 닫혔다. 레널드의 모습이 문틈으로 사라지고서도, 닉은 한동안 얼어붙은 듯이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레널드와 벌였던 사고 중 단연코 가장 최악이라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
그 이후로도 이어진 니콜라스 클레이튼의 고난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무척, 매우, 욕망에 순종적인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니엘 레널드는 이상하게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읏, 아…….”
밀쳐지듯 로커에 등을 기댄 닉이 돌진해 오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며칠 사이 하도 물고 빤 탓인지 레널드는 자신을 깨무는 닉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멈칫하지도 않고 도리어 고른 치열 사이로 혀를 집어넣으며 진득하게 얽어맸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라커 룸 안에 축축한 살갗이 맞닿는 소리가 울렸다.
방금까지 물 안에 있다 나와서 닉은 아직 수영 팬츠만 입은 차림이었다. 고스란히 드러난 맨몸을 쓸어 올린 커다란 손이 가슴께에 튀어나와 있는 돌기를 힘주어 쥐었다.
윽. 닉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낮게 새 나왔다. 그에 반해 다니엘은 낮게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평소와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혼자만 여유롭게 보이는 그 목소리가 짜증이 날 정도로 얄미웠다.
“하하, 이렇게 만져 주는 걸 좋아하잖아.”
“입… 다물어….”
뇌가 녹아 버린 것 같다. 닉 클레이튼은 자신의 머릿속이 여름날의 초콜릿처럼 녹아 버렸으리라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레널드와의 키스만으로 이렇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리 없으니까.
입 다물라는 말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레널드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리고 몸을 숙여 손으로 쥐지 않은 다른 쪽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헉.”
찌릿한 전율에 다리에 힘이 풀린 닉이 급하게 다니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쪽, 쪽, 입술도 아닌 가슴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젖꼭지가 빨리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 여유를 보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사납게까지 느껴질 만큼 거친 숨을 토해 내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팔에 힘을 주어 다니엘을 밀어냈다. 젠장, 이건 정말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학교에서 이런 짓을 한 적은 없었는데…….
“작작 해!”
방금까지 좆 빠지게 훈련을 하고 나와서 좆을 세우고 있다. 말도 안 돼.
닉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에 힘을 주어 다니엘을 주시했다. 노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몸에 고개를 비비적대는 다니엘의 모습은 닉 클레이튼을 열받게 만들기 충분했다.
큭큭, 숨소리처럼 미약한 웃음소리가 맨 살결에 닿았다. 다니엘은 닉의 몸에 턱을 댄 채 생글대는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말? 아래는 말이랑 다른 거 같은데.”
뻔뻔한 자식!
닉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가까스로 삼키며 물었다.
“누구 때문인데? 너도 젖꼭지 내놔. 내가 쪽쪽 빨면서 만질 테니까 서나 안 서나 한번 보자.”
“나 때문에 섰다는 거야?”
“그럼 변태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가 혼자 이러겠어?”
“…너는 정말 멍청이야, 니키.”
“뭐 이 새끼야? 야, 왜 웃는데. 어? 왜 웃냐고!”
제법 힘을 실어 어깨를 흔들며 타박해도 다니엘 레널드는 미친놈처럼 실실거릴 뿐이었다. 이제는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다니엘 레널드가 익숙할 지경이었다. 며칠 전부터, 넘지 말아야 했던 선을 넘은 이후부터 레널드는 둘만 남겨졌을 때 어딘가 풀어진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여태껏 그렇지 않아도 레널드는 제 앞에서만 유독 도련님 같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애교였다는 듯 지금은 그냥 미친놈 같았다. 닉은 한숨과 함께 그를 노려보던 눈가의 힘을 풀었다.
할 말이 딱히 없었다. 당연히 문제의 원인은 레널드에게 있으나, 그가 입을 맞춰 올 때마다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도 있기는 했으니까. ……그런 키스를 하는데 제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닉은 아주 조금 억울해졌다.
“방탕해.”
잇새로 짓씹듯 튀어나온 말에 레널드가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빛이 담긴 녹색 눈동자가 가만히 닉을 향했다.
“누가?”
“지금 여기에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네가?”
“너 말하는 거잖아, 멍청아!”
모르는 척하는 얼굴이 수준급이었다. 끝까지 잡아떼려는 모양인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에 닉이 울컥해 외쳤다. 그런 닉을 보면서도 레널드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네 과거를 돌아봐, 니키. 방탕이란 건 그런 걸 말하는 거야.”
그러나 이어진 말을 뱉고 나서는 얼굴에 떠올랐던 특유의 여유로운 빛이 사라져 있었다.
다니엘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더니 곧 삐뚜름해졌다. 그 극적인 표정 변화가 마치 무대 위에 선 희극 배우의 연기처럼 보여, 닉이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좆같아졌어.”
생각해 보니 이 자식은 배우가 맞았다. 기분 좋게 웃던 얼굴이 금세 차갑게 식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니엘 레널드의 이중성에 대해 얘기하려면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남들 앞에서 좆같다는 등의 격 없는 말투를 쓰지 않았다. 그의 가족을 포함해서.
그러니까… 레널드의 이런 저질스러운 태도는 아마 제 앞에서만 드러내는 것일 테다. 그는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과 닉,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 사이에 괴리가 컸다. 닉 클레이튼은 분명 그가 타인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이 연기일 거라고 확신했다. 이런 이중성을 숨기고 다니다니, 타고난 배우가 아닐 수 없었다.
“왜 또.”
닉이 그런 다니엘을 가볍게 비웃었다.
“게임 이겨 놓고 와서 기분 안 좋아질 일이 뭐가 있어?”
말 그대로였다.
오늘 치러졌던 이번 학기의 첫 번째 경기를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소식이 수영장에만 있던 닉에게까지 들려왔다. 몰랐다고 하더라도, 수영장 안으로 들어온 레널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치챘을 것이다.
다니엘 레널드는 전학 오자마자 풋볼 팀의 쿼터백 자리를 꿰찼다. 풋볼 팀 훈련 첫날부터 와이드 리시버에게 3번이나 터치다운으로 이어지는 패스를 했던 것이다. 비록 득점은 못 했지만, 레널드로부터 손에 착착 감기는 패스를 받았다며 흥분해 뛰어 들어온 러닝백이 한참 열변을 토했던 걸 생각하면 활약상이 대단했던 게 분명했다.
그렇게 며칠 내내 늦게까지 훈련에 참여했던 레널드는 오늘, 금요일에 시작된 홈타운 게임에 당당히 선발되었다. 물론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그 경기 과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학교 풋볼 경기를 굳이 구경 나가지 않았을뿐더러, 오늘은 특히나 밀린 훈련을 지독히 해치운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물속에 있는 거야, 니키?
경기가 끝나고 바로 달려온 듯 땀에 젖은 머리칼을 하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서는 레널드를 보았을 때, 닉은 그가 만족스러운 경기를 했음을 깨달았다.
레널드는 고등부부터 홈스쿨링을 했지만, 그러면서도 촬영 일정이 없을 때는 꾸준히 풋볼 훈련을 해 왔다고 했다. 녹슨 적 없던 실력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왔을 것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긴, 제이콥 레널드의 아들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데 전학 와 처음 치르는 데뷔전에서 호락호락했을 리 없다. 다니엘 레널드는 원래 자기 자신에게 가장 철저하고 엄격한 사람이었으니까.
“배고프니까 집에나 가자. 피자 먹고 싶어.”
“…지금 전화해 놓을까?”
자연스럽게 돌려지는 화제에 다니엘도 딱딱했던 입가의 힘을 풀며 핸드폰을 들었다. 닉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다니엘의 팔 안에서 휙 빠져나와 샤워실로 향했다. 전화하는 중에도 그의 시선이 내내 자신의 뒤를 집요하게 좇는 것이 느껴졌다. 흠…….
닉은 뭔가가 걸리적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뻐근한 어깨를 풀어 주며 문을 닫았다.
***
금요일, 닉 클레이튼은 제이콥으로부터 주말을 함께 보내자는 연락을 받았다.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 티켓과 함께.
닉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 주말을 캘리포니아로 날아가는 데에 쓰고 싶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레널드는 그럴 수 없었다.
“다녀올게.”
“돌아오지 않아도 돼.”
“그렇게 가지 말라고 졸라도 소용없어.”
“너 혹시 귓구멍이 막혔냐?”
터무니없는 소리에 닉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헛웃음을 흘렸다. 느릿느릿 집을 나서던 다니엘은 갑자기 현관 앞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니키.”
그러고는 다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닉을 불러 왔다.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다니엘의 모습은 왜인지 현실감이 없어서, 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예쁘게도 차려입었네. 비딱하게 서 있는 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다니엘이 그 속마음을 들었다면 억울해할 수도 있겠다. 사실 평범하게 검은 니트에 단정한 면바지를 입은 게 다였으니까. 닉은 속으로 했던 생각이 머쓱해 괜스레 손을 들어 목을 쓸었다.
아닌가? 상대는 다니엘 레널드였다. 제 어디가 그렇게 예뻐 보이냐며 대단한 건수라도 잡은 양 자신을 놀리려 들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자기가 잘난 것도 몹시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이 두꺼운 건지 그런 뻔뻔한 말을 곧잘 하곤 했었다.
대체 남들 앞에서는 어떻게 그런 겸손한 도련님 흉내를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하는 거지? 닉이 짧게 혀를 찼다.
“왜 부르고 말이 없어. 할 말 없으면 빨리 가, 레널드.”
“……넌.”
다니엘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한 발짝 그에게로 다가섰다. 닉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흠칫하며 몸을 바로 했다. 그는 다니엘의 앞에서 긴장하는 듯한 자신을 문득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로서는 그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다니엘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지레 겁먹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대니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너는 진짜 기억력이 나쁜 거 같아. 뇌를 아예 쓰지 않는 거야?”
“죽을래?”
닉이 다니엘의 발등을 툭 차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10년 동안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 없는데 왜 이제 와서 그렇게 부르라고 지랄이야.”
“나는 너를 계속 닉이라고 부르고 있잖아. 불공평하지 않아?”
“그럼 너도 날 클레이튼이라고 불러.”
“싫어.”
그럼 뭐 어떡하라고? 닉은 그런 심정을 가득 담아 눈을 부라렸다. 비행기에 올라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현관 앞에서 미적거리고 있는 다니엘 레널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널드는 부모님 말씀이라면 절대 거스르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라는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것보단 서둘러 비행기를 타러 가는 게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겨우 이런 애칭으로 부르니 마니 하는 일이 제게 가장 중요하다는 듯 닉을 고집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있잖아, 니키. 지금 한번 할래?”
“너 정말 발정 났어? 이러다 비행기 놓쳐, 멍청아!”
“하지만 너는 내가 네 걸 입에 물어야만 고분고분하게 내 이름을 부르잖아.”
“야!”
이 새끼가 미쳤나. 닉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얼굴로 발을 들어 다니엘의 등을 퍽퍽 찼다.
“아파.”
몸을 슬쩍 빼서 진짜로 맞지도 않은 주제에 다니엘은 능청스럽게 맞은 시늉을 했다. 긴 다리를 뻗어 성큼 발길을 옮긴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닉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어쩌면 다니엘 레널드의 시간은 남들보다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건지도 모른다. 닉 클레이튼은 그 지긋한 시선에 문득 몇 년 전의 장면을 떠올렸다.
중등부를 졸업하고, 다니엘 레널드가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 전날 밤. 보스턴은 추웠고, 소복소복 먼지처럼 흩뿌려지는 눈을 보며 다니엘은 뜬금없이 눈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멍청아, 그럼 비행기 못 뜨잖아.
닉은 그런 다니엘을 가감 없이 비웃어 주었다.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왜 그렇게 우스웠는지 모를 일이다. 양쪽 뺨에 보조개가 피어날 정도로 환하게 웃는 자신을 다니엘은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었다.
그다음 날 비행기는 문제없이 이륙했고, 늘 그렇듯 아침에 약한 닉은 늦잠을 자느라 공항 배웅에 따라나서지 못했다. 물론 늦잠을 자지 않았더라도 굳이 그를 배웅하러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다니엘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와 마주한 적은 없었다. 스크린이나 SNS에서야 몇 번이고 마주치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실물이 아니었으니까 예외로 쳐야 할 것이다. 그가 보스턴에 있는 닉의 눈에 쉴 틈 없이 띄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할리우드에서 쉬지 않고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잘했어, 니키.」
그런 주제에 꼬박꼬박 메시지를 보내왔다. 경기가 있을 때면 매번 잊지 않고 도착하는 메시지를 보면서도 닉은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다니엘이 보스턴에서 살 때야 허구한 날 같이 다녔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자연스레 잊고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런데 왜 다니엘 레널드는 그렇지 않다는 듯 변함없는 걸까. 닉은 왜 그가 이렇게, 자신을 영영 지워 내지 않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다니엘이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와 처음 만난 이후로, 닉 클레이튼은 거의 매일 다니엘의 이상 행동의 이유를 파악하고자 애써 왔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알기 어려울 만큼 정말 이상했다.
레널드는 오래된 DVD도, 색이 바랜 책들도, 몇 번이고 꺼내 봐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대본들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는 성격이었다. 타인을 대할 때는 아무런 미련 없이 굴면서도, 제 것에는 광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없으면 엉망진창으로 지내는 거 아니야, 니키?”
“개소리할 거면 빨리 꺼져.”
어쩌면.
자신은 다니엘 레널드가 조심히 모아 두는 소장품 중 하나로 취급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이점이 있다면, 제 소장품은 무척이나 소중히 다루면서 자신한테는 걸핏하면 지랄맞은 성질머리를 고스란히 내보인다는 것 정도일까.
“왈왈.”
다니엘 레널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짧게 짖었다.
“미친 새끼.”
“하하하!”
정말 정신이 나간 거 아냐? 신나게 웃음을 터트리는 다니엘을 보며 닉 클레이튼이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다니엘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열받게 하는 데에 타고난 사람이었다. 예외는 오직 침대 위에서뿐이었다. 어디서 배워 온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침대에서 제 욕구는 꾹꾹 눌러 참으면서 상대만 끈질기게 살폈다.
“파티에 가도, 다른 사람이랑 자지 마.”
지금처럼 제멋대로 구는 일은 일절 없었다. 다니엘은 명령 같은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뭔 상관이야.”
“잘 거야?”
한순간 훅 낮아진 온도에 닉이 저도 모르게 주춤 허리를 폈다. 입꼬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으나, 얼굴 위에 떠올랐던 다정한 빛은 순식간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 어디서 배워 온 버릇이기는.
닉은 다니엘의 급격한 표정 변화를 보며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을 가볍게 접었다. 이제 와서 새롭게 느끼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그건 다니엘 레널드의 아주 오래된 버릇이었다.
레널드는 원래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고, 타인이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며 살아왔다. 제게만 그러지 않았으므로 침대에서 보여 주는 그 조심스러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까칠하게 본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짜증스러워했으면서, 침대에서는 남들 대하듯 저를 다룬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 소시오패스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닉은 자신이 얼마나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았다. 알면서도 계속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네가 하는 섹스야, 니콜라스 클레이튼?
며칠 전 다니엘이 짓씹었던 말이 그의 입 안에서 다시금 굴러다녔다.
-아니면, 나랑만 그러는 건가?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던 불쾌감을, 닉은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졌다. 그러는 너는. 누구와도 그런 섹스를 하는 모양이지? 목구멍까지 차오른 불만 섞인 질문들을 꾹꾹 눌러 삼켰다.
“안 자. 안 잔다고. 됐어?”
그 탓에 입에서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니엘은 그것조차 기껍다는 양 기꺼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믿을게.”
아무것도 담보로 내놓지 않은 말 한 마디가 뭐 그리 믿음직스러운지 다니엘은 기분 좋은 목소리를 흘렸다. 닉 클레이튼은 그게 정말이지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니엘 레널드도, 그리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순순히 꺼내 주는 자신도.
“이제 좀 가.”
닉은 툭 그 말을 던지곤 몸을 돌렸다. 다니엘 레널드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차고에서 미리 꺼내 놓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와 문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던 닉이 무거운 눈꺼풀을 두어 번 껌벅였다.
아 피곤해. 그는 요즘 따라 레널드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원래도 레널드는 골칫거리긴 했지만, 요즈음은 그는 유독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한번 선을 넘은 이후부터 그러했다.
“물에 들어가야겠다.”
닉은 가볍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을 뱉자마자 바로 상의를 휙 벗으며 수영장으로 향하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보스턴의 가을은 제법 쌀쌀한 편이었지만, 그런 건 그에게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티는 저녁부터니, 몇 시간은 혼자 여유롭게 물속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쓸데없는 생각도 들지 않겠지.
쉽게, 쉽게. 그게 바로 닉 클레이튼의 인생의 목표였다. 그는 늘 단순한 게 좋았다. 수영장, 헤엄, 아무런 의도가 담기지 않은 웃음, 파티, 그러한 것들을 좋아했다.
집의 정원에 마련된 수영장 앞에 선 그가 스트레칭을 하며 입가에 시원스러운 미소를 걸었다.
다니엘의 등장으로 깨진 원래의 일상을 다시 이어 붙일 시간이었다.
***
“닉!”
정원 한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싶더니, 익숙한 이름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라이언은 방금까지만 해도 제 앞에서 깔깔 웃으며 떠들던 제니가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제니퍼 해밀턴은 치어리딩부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쌍둥이 자매인 제시카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하고서도 그녀와는 전혀 다른 상쾌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풋볼 팀의 주장이자, 다니엘이 들어오기 전까지 주전 쿼터백이었던 라이언으로서는 그녀와 마주칠 일이 많았다. 짧지 않은 시간 내내 제니는 쾌활하게 웃으며 곁을 내어 줄지언정 그 이상의 공간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닉 클레이튼의 앞에 서서 제니는 제 손으로는 다 잡히지 않는 그의 팔을 힘껏 그러쥐었다. 그녀의 흰 얼굴에 한 아름 진솔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보며 한숨을 삼킨 라이언이 인파를 뚫고 제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되어 닉의 주변에 선 그에게 제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묶은 거 예쁘네.”
“알거든? 그보다, 왜 이렇게 늦었어? 지각이야.”
제 팔을 잡은 채 추궁하는 제니를 향해 닉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 이제는 파티에서도 출석 체크 하기 시작한 거야?”
“바보 아냐? 너만 하는 거야, 닉. 너는 매일 늦으니까.”
너무해. 닉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내가 매일 늦은 건 아니잖아. 그렇지, 라이언?’ 돌연히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질문에 어정쩡히 웃는 낯으로 서 있던 라이언이 움찔하며 눈을 굴렸다.
제니가 눈에 힘을 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편을 들라는 의도가 명확한 눈빛에 라이언은 짧은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매번 늦기는 하지.”
그 말에 제니는 들었냐는 듯 턱을 치켜들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닉은 반듯한 이목구비를 일그러뜨리며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다시금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모습을 바라보며 라이언은 들고 있던 컵을 입에 가져갔다.
그 이후로도 많은 이들이 닉에게 다가와 말을 걸곤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제니와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 일은 없었다. 그 둘을 보고 있자면 라이언은 제니의 마음을 얻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닉인 것처럼 느껴졌다.
비록 둘은 늘 한결같이 서로를 친구라고 말하고는 했지만 말이다. 라이언이 난처한 기색을 숨기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여간에 닉 클레이튼은 이성과 친구를 할 때면 절대 교제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써야 한다. 그래야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한결 수월하게 느껴질 테니까.
“아, 조명!”
푸르렀던 하늘에 차츰 어둠이 깔렸다. 그러자 수영장을 둘러싸고 알알이 걸려 있던 조명에 빛이 피어올랐다. 반짝거리는 색색의 조명들로 한층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신이 난 주변에서는 한층 더 상기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닉! 여기 봐.”
손수 파티를 꾸민 제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핸드폰을 높이 쳐들고 인스타에 업로드할 영상을 여럿 찍더니, 이내 닉의 앞으로도 들이밀었다. 그는 익숙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앞으로 뺐다. 그리고 가만히 뭐 하고 있냐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닉의 눈짓에 주변에 모여 서 있던 이들이 거리낌 없이 화면 안으로 얼굴을 쭉 내밀었다. 라이언도 어정쩡하게 상체를 기울여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바글바글 모여 찍은 영상을 SNS에 업로드한 제니가 즐거워하며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닉도 피식피식 따라 웃음을 흘렸다.
그때, 그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곳에서 시끌시끌한 기색이 퍼졌다. 제니를 필두로, 닉의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수영장 반대편의 인파에게로 향했다. 닉은 가장 마지막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웨슬리, 뜸 들이면 재미없어!”
“겁쟁이처럼 굴지 마!”
소란스러운 곳을 바라본 라이언의 눈에 같은 풋볼 팀 멤버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떠밀려 다이빙대로 주춤주춤 걸어가는 창백한 낯의 노아 웨슬리까지. 그들은 훈련할 때야 허물없이 지내지만, 그 외에는 그다지 교류가 없는 부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언은 2학년 때부터 꾸준히 선발 멤버였으니까. 러닝백으로 들어왔음에도 왜소한 체구 탓에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노아 웨슬리 사이에 접점이 있을 리 없었다. 같은 풋볼 팀 멤버들로부터 웨슬리가 은근한 괴롭힘을 당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파티에서까지 짓궂게 굴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웨슬리는 왜 굳이 파티에 온 거지? 껄끄러운 취급을 받을 걸 알면서도 나온 웨슬리를 이해할 수 없어 라이언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무 짓궂잖아.”
옆에서 제니의 못마땅한 음성이 들려왔다. 라이언이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동조의 목소리에 힘을 얻은 듯 제니가 힘껏 눈살을 찌푸렸다. 다이빙대는 성인 남성의 키보다 훌쩍 높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서면 저도 모르게 주춤할 수밖에 없는 높이였던 것이다.
모친이 다이빙 선수였던 탓에 수영장에 떡하니 다이빙대가 생기긴 했지만, 제니조차도 살면서 한 번도 그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다이빙대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붙잡은 노아 웨슬리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내버려 둬. 장난인데.”
파티의 호스트, 제시카 해밀턴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제니를 말리며 닉의 어깨를 잡았다. 가만히 웨슬리 쪽을 지켜보던 닉이 흘긋 시선을 내려 제시에게 인사했다. 안녕. 그 짧은 인사에 제시가 붉은 입술을 휘며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지, 콜린?”
“응.”
닉은 그녀가 건네주는 컵을 받아 홀짝이며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은 닉의 반응에 그와 제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니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지만, 닉이 쉬이 제시카의 말에 수긍하자 더 나설 생각은 접은 것 같았다.
“빨리 뛰어, 웨슬리!”
그러던 와중 노아 웨슬리가 결국 다이빙대 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곧장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파티에 와 따로 흩어져 즐기던 이들이 전부 흥미롭다는 얼굴로 웨슬리가 다이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휘이익- 어디선가 망설이는 웨슬리의 등을 떠밀듯 경쾌한 휘파람을 불었다. 호응을 이끄는 휘파람 소리에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웨슬리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런 열광 속에서도 웨슬리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라이언은 그가 절대로 뛰어내리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방과 후 훈련을 하면서 러닝백인 주제에 태클이 걸려 올 것 같으면 창백해져 우뚝 멈춰 서던 웨슬리를 본 적 있었다. 끝내 다이빙대를 엉금엉금 기어 내려올 것이 분명하다.
웨슬리가 다시 내려올 것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라이언의 귓가에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
당연한 것 아닌가? 라이언은 닉의 뜬금없는 말에 다소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닉이 지역 수영 대회의 상을 휩쓸어 오곤 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그는 모든 사람이 저처럼 물을 좋아할 거라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저번 여름, 다 함께 바다에 놀러 갔을 때 겁도 없이 서핑을 즐기던 닉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끝부분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파도를 가로지르던 모습이. 그의 머리칼은 여름 볕에 반사되어 언뜻 금발처럼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이언은 아주 묘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닉 클레이튼이 단순히 물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필연적으로 물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럼 재미없잖아.”
그가 들고 있던 컵을 라이언에게로 넘기며 저를 둘러싼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왔다. 얼떨결에 닉이 건넨 컵을 받아 든 라이언이 다이빙대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은 닉이 풋볼 팀을 가르고 다이빙대 아래 섰다.
“웨슬리! 웨슬리! 웨슬리!”
“얼른, 노아 웨슬리!”
그의 이름을 호명하며 재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요란했다. 고개를 든 닉의 눈에 고작 10피트도 안 될 것 같은 높이의 다이빙대 위에서 눈을 꾹 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아 웨슬리가 들어왔다.
닉은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 웨슬리의 얼굴에는 도망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니엘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린 이후부터 닉은 다른 사람들이 물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끔 잊어버리고는 하지만 말이다.
“나와, 노아 웨슬리!”
닉이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처음 불러 보는 이름임에도 닉은 그를 부름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누구…?”
다이빙대 위에 있던 노아가 낯선 목소리가 호명하자 슬쩍 눈을 떴다. 자신을 주시하던 이들 모두 저를 부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적어도 보스턴 스쿨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닉, 니키, 콜린. 여러 애칭으로 불렸으나 노아가 그를 아는 이유는 조회 방송에서 걸핏하면 그의 이름이 들려왔었기 때문이다.
주니어의 니콜라스 클레이튼 군이 이번 매사추세츠 주 지역 결선 대회에도 진출했습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 군이 전국 수영 대회에서 신기록을, 니콜라스 클레이튼 군이 이번에도…….
체육 특기생이 많은 보스턴 스쿨에서도 그는 단연 돋보였다. 수영 성적도 뛰어났고, 외모도 뛰어난데 거기에 성격까지 좋아 인기가 많았던 것이다. 마치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아 웨슬리는 그가 자신과는 영영 엮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내려와.”
그 클레이튼이 지루하다는 양 하품을 삼키며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자신을 구경하기 위해 서 있던 이들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왜 갑자기 그가 나서서 분위기를 망치는 건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노아에게 있어서는 그 부름이 기꺼웠다. 누군가 자신에게 내려오라고 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려 왔으니까. 다이빙대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자신의 모습에 곳곳에서 실망스러운 숨을 토했다.
“뭐 하는 거야, 클레이튼.”
“뭐가?”
“분위기를 망쳤잖아.”
웨슬리가 다이빙하기를 기다리던 풋볼 팀이 닉을 향해 인상을 썼다. 닉은 왜 그렇게 화내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웨슬리는 어차피 못 뛰어내릴 거야.”
확신 어린 목소리가 가볍게 흘러나왔다.
“진짜로 한다고 하더라도, 잔뜩 겁먹어서 뛰어내리는 걸 보는 게 뭐가 재밌는데?”
그 비아냥거림에 사다리를 잡고 있던 노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다이빙대 위에 있을 때는 두려움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모멸감이 몸을 감쌌다. 노아가 빨개진 얼굴로 다이빙대를 내려오자, 닉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재킷을 넘겼다.
“들고 있어.”
“어, 어……?”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 줄 테니까.”
노아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는 바통을 넘겨받듯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노아 웨슬리는 얼떨결에 재킷을 품에 안은 채로 멍하니 다이빙대를 오르는 닉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왜 앞에 나선 건지 의아해하던 이들도 곧 닉의 의도를 깨닫고 다시금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노아 웨슬리 대신 다이빙을 할 생각인 것이다. 보스턴의 수영 대표인 닉 클레이튼의 다이빙을 기다리며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때마침 새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닉이 좋아하는 트랙이었다. 그가 엉망진창으로 멜로디를 읊으며 다이빙대 위에서 짧게 몸을 풀었다.
“닉! 닉 클레이튼!”
그가 곧 뛰어내리려는 듯 다이빙대 위에서 두어 번 낮게 점프했다. 그러자 지켜보는 이들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건 방금 자신을 바라봤던 것처럼 단순히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시선이 아니었다. 노아 웨슬리는 저도 모르게 야트막이 입을 벌렸다.
한순간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는 명백히 닉을 응원하고 있었다. 노아는 눈으로 보면서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제각각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닉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에게 여유롭게 눈을 찡긋거려 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가볍게 점프해 다이빙대 위로 떠올랐다. 그 짧은 새에도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허공에서 턴을 한 닉이 유려하게 몸을 폈다.
첨벙!
길게 뻗은 팔부터 발끝까지 수면 아래로 잠겨 들었다.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입수하는 닉을 향해 열광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정작 허공에서 묘기를 보여 준 장본인은 유유히 물길을 가르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웨슬리.”
풀의 난간을 잡고 팔에 힘을 줘 몸을 단숨에 물속에서 빼낸 닉이 지상을 밟았다. 손을 들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노아를 불렀다. 재킷을 든 채 어벙하게 서 있던 노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앞으로 온 노아에게 닉이 입꼬리를 당겨 씩 웃어 보였다.
“봤어?”
“으, 응….”
“멋지지?”
제 입으로 스스로가 멋지지 않았냐고 묻는 태도가 퍽 자연스러웠다. 당연하다는 듯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웨슬리를 향해 닉이 빙글빙글 웃었다.
물기 묻은 손이 웨슬리의 머리칼 위로 올라왔다.
“읏.”
“물은 하나도 무서워할 것 없어.”
그 축축한 감촉에 어깨를 움츠리기 무섭게 닉이 손아귀에 힘을 주어 노아의 푸석한 금발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부풀어 있던 얇은 머리칼이 물을 머금고 축 늘어져 눈을 찔렀다. 눈가가 따끔했으나, 노아는 깜박일 생각도 못 한 채로 멀거니 닉을 올려다보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예상보다 더 금방 떨어졌다. 닉이 저를 부르며 다가오는 친구들의 목소리에 곧 몸을 돌렸던 것이다.
“타월!”
제니퍼 해밀턴이 제 몸만 한 타월을 들고 와 내밀었다. 닉은 타월을 바로 건네받는 대신 젖어서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잡고 펄럭이며 물기를 털었다.
“아, 닉! 물 튀잖아!”
“하하하. 나 끝내줬지, 제니.”
“너는 늘 입만 다물면 멋지다니까.”
제니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닉에게로 타월을 비볐다. 그제야 닉이 마른 수건을 쥐고 젖은 머리를 털어 냈다.
“콜린. 따라와, 갈아입을 옷 줄 테니까.”
“고마워.”
제시카 해밀턴의 짧은 턱짓에 그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닉은 제 주변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헤프다 싶을 정도로 웃어 주었다. 얼핏 우쭐하는 것 같던 얼굴에 담담한 웃음이 스며드는 순간, 닉의 아쿠아마린색 눈동자가 노아의 내면 아주 깊은 곳에 들어와 박혔다.
라이언은 노아 웨슬리가 아주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서 닉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