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ntry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으나 좋아했다. 말하자면 술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파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고, 떠들썩하고,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를.
파티에서 분위기에 떠밀려 술을 몇 모금 홀짝이기는 하지만, 단언컨대 그가 나서서 술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가 음주에 얼마나 약한가에 대해 말하자면 술에 취해 당시 사귀던 여자애의 파티 날 그녀의 방 러그에 얼굴을 박고 잠들었던 전적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닉 클레이튼이 마신 건 마가리타 두 잔이었다. 고작 마가리타 두 잔! 그 이후로 그는 술을 한 잔 이상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금 그가 느끼는 두통은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숙취였다. 토할 것 같아. 누가 이른 아침부터 메신저를 보내는 거야…. 그로서는 쉴 틈 없이 울려 대는 핸드폰에 시선을 줄 겨를도 없었다.
홈커밍 파티에서 술은 원칙적으로 금지였지만,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 아닌가. 클로이의 집에서 벌어졌던 전날 밤의 홈커밍 2차전은 말 그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들의 파티였다.
-클레이튼! 오늘도 빼는 건 아니지?
시니어가 된 기념이라며 컵에 한가득 채워 주는 술을 보며 그는 당연히 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작년이라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쉬운 척을 하며 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올 여름 생일날 성년이 되었다. 무엇보다 술을 빼는 저를 찌질이 취급이라도 하려는 양 몰아가는 이 분위기에 뺄 수도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굳이 제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커너가 왜 이렇게 자신을 취하게 하지 못해 안달인지는 알고 있었다.
설명하자면 긴데.
우선, 커너는 최근 클로이에게 네 번째 차였다. 이미 전교에 파다한 소식이기에 비밀에 부칠 일은 아니니 밝힌다.
클로이 우즈는 전학 오자마자 일약 스타가 되었을 정도로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 홈커밍에 누구와 같이 갈 거냐며 제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여기 앉아도 돼, 닉?
-당연하지. 저리 비켜, 라이언.
다음 날 클로이가 점심시간에 자신의 테이블에 와 앉았을 때, 그녀의 호감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분명해졌다. 닉 클레이튼은 테이블 아래로 발을 뻗어 맞은편에 앉은 라이언의 다리를 툭툭 찼다. 눈치껏 꺼지라는 신호였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으니 커너 재거가 자신을 치워 버리려고 이를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닉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방긋 웃으며 곧장 컵에 든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코를 찌르는 위스키 냄새가 역겹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어젯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집까지 어떻게 기어들어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제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익숙한 거실 카펫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안도감이 한차례 그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니키.”
“…….”
“완전히 나가떨어졌네.”
그가 다시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니키.’ 하며 애칭을 불러 오는 목소리는 같은 십 대 후반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었다. 적당히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
그건, 꿈에서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 나지막한 음성의 주인은 지금쯤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받고 있을 테니 이건 아마 환청 비슷한 것이리라. 하필 환청마저. 이런 젠장, 앞으로는 술을 입에 대나 봐라.
닉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카펫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차에 다가온 남자가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곧 남자의 장신만큼이나 큼지막한 손이 닉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닉을 번쩍 들어 소파 위로 앉혔다.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있던 닉은 순식간에 눈을 찌르는 샹들리에의 불빛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조명 아래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진한 녹빛 눈동자도.
“니콜라스 클레이튼.”
갑작스럽게 들려온 풀 네임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평소의 웃음기가 가신 목소리에도 닉은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샹들리에의 빛이 유독 눈부셔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꾸 없이 다시 눈을 감으려는 순간 남자가 손을 들어 닉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정신 차려.”
소파 위로 올려 주던 퍽 다정한 태도는 거짓이었다는 듯 자비 없이 매서운 손길이었다. 홱 돌아간 고개 그대로 입을 벙긋거리던 닉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바로 했다.
정신이 확 들었다. 그래, 이 얼굴이 환상일 리 없지.
깊게 들어간 아이홀 탓에 그림자가 진 눈가는 평소보다 어두웠고, 대리석을 깎아 내린 듯하다는 평을 받는 반듯한 선의 이목구비는 여전히 남자다운 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렁이는 녹색 눈동자와 시야를 가득 채우는 짙은 흑발은 지긋지긋할 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망할, 이렇게까지 세게 때릴 건 없잖아.”
“얼마나 마신 거야?”
“위스키… 한 컵? 음… 두 컵?”
하. 기억이 안 난다는 듯 눈을 굴리는 닉을 보며 남자가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차라리 에탄올을 목구멍에 쏟아붓지 그랬어.”
“말 참 예쁘게 하네, 왕자님.”
비꼬는 게 역력한 말투에 닉도 혀를 차며 맞받아쳤다. 에탄올이 뭔지는 몰라도 좋은 건 아니겠지. 손을 들어 화끈한 뺨을 식히고 있는 동안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메시지 보냈잖아.”
“안 읽었어.”
“…….”
닉의 당당한 대꾸에 상대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에 한가득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닉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웩. 닉이 그 얼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여자애들이 곧잘 왕자님의 미소니 뭐니 하는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 보스턴으로 전학 왔어, 니키. 졸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 거야.”
“…이곳이 어딘데?”
“네 옆방.”
“말도 안 돼!”
이어지는 숙취로 인해 머리통을 부여잡은 채 닉이 기겁했다. 자신의 적나라한 반응에 상대는 더 즐겁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닉의 얼굴로 올라온 길쭉한 손가락이 그의 뺨을 툭툭 건드린다. 붉게 부어오른 뺨 위로 다가온 손길을 닉이 곧장 거칠게 쳐 냈다.
지랄하고 있네. 날카롭게 노려보는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정작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좆 까.”
“말 참 예쁘게 하네, 멍청아.”
제기랄, 다니엘 레널드. 할리우드의 왕자님은 욕을 처먹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여유롭게 웃었다. 닉은 방금 들은 말들로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했지만, 잘될 리 없었다.
당연했다, 머리를 쓰는 것은 그의 주 분야가 아니었으므로. 분명한 건 단 하나였다.
다니엘 레널드가 돌아왔다.
앞으로의 일상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라는 불길한 예감이 닉 클레이튼을 엄습했다.
***
불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다니엘 레널드와 관련된 것이라면 특히나 더 그랬다.
「맙소사! 다니엘 레널드가 우리 학교로 전학 온다는 게 사실이야?」
「닉!!! 다니엘이 귀환했어?」
「다니엘이 돌아왔다며! 파티해야지!」
다니엘, 다니엘, 다니엘. 아침부터 끊이지 않고 날아오던 메시지들의 목적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보스턴에 어젯밤 막 도착한 다니엘 레널드가 클로이의 파티에서 뻗어 버린 자신을 손수 데리러 오면서, 파티에 있던 이들에게 눈도장을 꽝꽝 찍어 버린 탓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스크린에서 비치는 ‘왕자님’의 모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를 번쩍 집어 들고서는 수영장에 내던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물을 먹고 얼빠진 얼굴로 풀 밖으로 나온 제게 레널드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신 차렸어? 그럼 이제 씻어.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사이코패스. 아니, 가식적인 웃음도 곧잘 짓는 걸 보면 소시오패스, 뭐 그런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닉은 이를 빠드득 갈면서도 그를 쉬이 무시할 수 없었다. 아침에 정신 차리자마자 다니엘이 한 일이 엠마 클레이튼, 즉 자신의 모친으로부터 온 연락을 읽어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업 운영으로 바쁜 엠마의 유일한 걱정은 하나뿐인 아들이 집에서 파티를 벌이다 수영장에 빠져 익사한 채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것 정도였고, 다니엘 레널드는 어려서부터 엠마의 신뢰를 듬뿍 받는 모범생이었다. 검지로 제 뺨을 누르며 감시 역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레널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미친 소시오패스는 제 앞에서만 본성을 드러냈고, 주먹다짐을 한다면 이번에도 혼나는 건 오직 자신이 될 것이다. 여태껏 늘 그래 왔듯이. 그래서 닉은 제게로 뻗어진 커다란 손바닥 위로 얌전히 차 키를 떨어트릴 수밖에는 없었다.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형 캐딜락과 다니엘 레널드는 형편없는 자신의 기분과는 별개로 화보처럼 잘 어울렸다. 자신이 생각하던 완벽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는 왕자님에게서 시선을 뗀 닉이 학교로 향하는 내내 창밖에 얼굴을 내민 채 뚱한 얼굴을 했다. 레널드와 같은 공간에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주먹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갈 것 같았으니까.
신이 있다면 이럴 순 없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닉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해 기억하고 있는 철학자를 문득 떠올렸다. 니체였나 나체였나. 아무튼 신은 죽었다. 신이 살아 있다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돼서… 앞으로 잘 부탁해.”
교실 앞에 서서 자신의 소개를 마친 다니엘이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멈춘 곳은 바로 닉이 앉은 자리였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닉이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반 아이들은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모두 흥분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보스턴에서 가장 저명한 고등학교이니만큼 다들 웬만한 수준의 이들에게는 면역이 되어 있었지만, 상대는 다니엘 레널드였다.
그 다니엘 레널드. 그의 부친은 NFL에서 몇 번이나 MVP를 거머쥐었던 전설적인 풋볼 선수인 제이콥 레널드였고, 모친은 미혼 시절 ‘스타스트럭’ 시리즈의 히로인 역할을 맡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오브리 레널드였다.
아직도 많은 사랑과 인지도를 지닌 할리우드 스타의 부모 아래 유일한 자식인 다니엘 레널드. 그는 굳이 말하자면 부모의 장점만을 고스란히 가지고 태어난 듯한 남자였다.
화보 표지를 몇 번이나 장식한 외모야 말할 것도 없다. 모친의 연기력을 물려받았는지 단독 주연으로 찍었던 다니엘의 데뷔작은 전 세계에 수출되었고, 부친의 재능마저 물려받아 모든 운동에 능통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쫓아다니는 파파라치에게 단 한 번도 먹잇감을 내어 준 적이 없을 만큼 사생활과 인간성 또한 훌륭하기로 유명했다. 재수 없을 만큼 완벽한 남자. 다니엘 레널드는 할리우드의 ‘왕자님’이라고 불렸다.
그러니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닉 클레이튼의 ‘왕자님’이라는 호칭은 한껏 비꼼을 담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훌륭한 인간성? 웃기고 있네. 그는 다니엘에 의해서 계단을 굴러 머리에 일곱 바늘을 꿰맨 역사가 있었다.
“미쳤어.”
닉의 앞에 앉은 여자애가 발을 구르며 잔뜩 상기된 목소리를 흘렸다.
“진짜 다니엘 브라이언이잖아…!”
다니엘 브라이언. 그건 레널드가 보스턴으로 오기 바로 직전에 맡았던 배역의 이름이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처음부터 다니엘을 염두에 두고 구상했다나 뭐라나.
닉은 정말로, 진심으로, 맹세컨대 레널드의 연기 이력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을뿐더러 스크린에서조차 저 재수 없는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미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며 ‘다니엘 브라이언’을 보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애석하게도 다니엘 브라이언은 그 한 해를 장식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히트한 넷플릭스 자체 제작 하이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광고에서든 SNS에서든 지치지도 않고 흘러나오는 영화의 예고편에서 다니엘 브라이언은 누가 봐도 반할 만한 쿼터백에 우등생이었고, 학교의 명실상부한 ‘왕자님’이었다. 비록 현실의 다니엘 레널드는 고등 교육을 홈스쿨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니엘에게 학교를 소개시켜 줄 사람은…….”
“저요!”
“손 치워, 리암. 저요!”
“저!”
아마 다니엘 레널드가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그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바 선생님은 눈에 불을 켜고 열정적으로 구는 학생들을 보며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다 이내 홀로 따분한 얼굴인 닉에게로 안착했다.
닉은 되살아난 불길한 예감이 다시 한번 삐죽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최선을 다해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마주하는 그의 노력을 알아차린 에바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닉. 해 줄 거지?”
“싫어요.”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낸 네 에세이 성적이 궁금하지 않니?”
이럴 수가, 이건 협박이었다! 권력의… 어쩌고저쩌고. 아무튼, 닉은 낙제만 피하자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고는 있지만 사실 자신의 에세이 실력이 낙제도 간당간당한 수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원스럽게 뻗은 닉의 미간이 와작 일그러졌다.
“……할게요.”
짓씹듯 튀어나온 고분고분한 대답에 선생님의 미소도,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레널드의 미소도 한층 진해졌다. 원하던 사냥감을 얻었을 때처럼 만족스러워하는 미소에 닉은 괜스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졌다.
곧 시작된 아이들의 레널드를 향한 질문 폭격에 수업은 아주 멀리, 저 멀리 사라졌다. 마음에 드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어쩜. 스크린이랑 똑같아. 어릴 때도 왕자님 같았지만, 지금은 진짜로…….”
닉의 옆에 앉아 있던 제니퍼가 단단히 홀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 주면 기절할 것 같다느니, 짙고 검은 머리칼 사이로 제 손가락을 집어넣고 헤집고 싶다느니 하며 가볍게 시작한 망상은 이내 법적인 처벌이 가능한 수준으로 치솟았다.
쌍둥이 자매인 제시카 못지않게 더러운 머릿속이었다.
“어련하시겠어.”
불퉁하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다니엘을 보던 자세 그대로 시선만 옮긴 제니퍼가 키들거리며 웃었다.
“질투하는 거야?”
“내가? 설마? 절대 아니야.”
그런 면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닉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녀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중등부부터 줄곧 함께했던 탓에 닉과 다니엘이 함께 학교를 다니던 시절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가 손을 들었다. 위로하듯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을 닉이 짜증스럽게 쳐 냈다.
“다니엘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네가 학교에서 최고였어.”
“…레널드가 돌아온 후에는?”
“몰라서 묻는 거야, 닉?”
“여전히 가장 멋지다고 말해 줘, 제니.”
“저런. 아직 술이 덜 깼나 보네.”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 코끝을 찡긋거렸고, 닉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물었다.
레널드가 캘리포니아에서 보스턴까지 날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아역 배우로 활약하던 그는 이전에도 갑자기 보스턴으로 전학 왔던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지냈던 중등부의 기억은 닉으로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유쾌하지 않은 이유에는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만 꼽자면….
반의 여학생들 모두가 다니엘 레널드를 좋아했었다는 것이 있겠다. 그 콧대 높던 헤일리 웨스콧마저 책상 끄트머리에 ‘헤일리 레널드’를 끄적이는 걸 직접 목격했었으니까.
“망할. 왜 온 거야.”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이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 닉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왜? 너랑 다니엘은 전부터 친구였잖아.”
“친구?”
코웃음을 흘린 채 제니를 향해 몸을 숙이던 닉의 상체가 대뜸 뒤로 확 넘어갔다. 닉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자신의 의자를 뒤로 젖힌 것은 다름 아닌 레널드였다. 앞에서 흥분한 반 아이들의 질문 공세가 벌써 끝이 난 건지, 자신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레널드를 보며 닉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녕, 해밀턴.”
그러거나 말거나 닉과 제니 사이로 상체를 기울인 다니엘이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방금까지 그를 두고 음담패설을 지껄이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제니는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 안녕. …나를 기억해?”
“당연하지. 혹시 괜찮다면 자리 바꿔 줄 수 있을까?”
조부모가 영국인인 터라 영국인 특유의 악센트가 섞인 말투였음에도 레널드의 말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젠틀한 어조로 눈웃음 짓는 왕자님의 부탁에 그녀는 기꺼이 넘어갔다.
“제니퍼 해밀턴.”
“누구세요?”
책을 들고 바로 뒤 책상으로 이동한 제니는 닉의 시선을 피하며 거울을 들어 머리를 매만졌다. 닉이 제 옆자리에 앉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다니엘의 행로에 삐죽 발을 내밀었으나.
“윽!”
당연하다는 듯 짓밟힌 발등의 고통에 닉이 침음을 삼켰다. 자리에 앉으며 다니엘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 왜 거기에 발을 놨어 니키.”
“개자식아….”
“밟아 달라는 줄 알았잖아.”
그럴 리가 있겠냐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 이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들이 레널드와 함께했던 중등부 시절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그만큼 타인에게 무척이나 친절했다. 그리고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그런 레널드의 원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가증스러운지에 대해 말하려면 하룻밤을 꼬박 새워야 할 테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다니엘 레널드는 그의 그런 본 성정을 저한테만 내보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과 레널드가 걷잡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은 전적으로 다니엘 레널드의 잘못에서 기인한다고 닉은 확신했다.
***
때는 바야흐로 니콜라스 클레이튼이 물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갓 배우고, 아직 다니엘 레널드가 스크린에 데뷔하기 전의 여름날이었다.
닉은 처음으로 물속에 들어가 수영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주를 대표해 수영 대회에 참가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수영을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었으며, 발로 물을 차 내고 손으로 물을 밀어내며 앞으로 몇 미터 나아간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물길을 헤집으며 닉은 물속이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8살의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그게 모든 사람이 느끼는 안락함인 줄로만 알았다.
***
“인사하렴, 니키. 여기는 내 손자인 다니엘 레널드야. 너와 동갑이란다.”
“안녕, 다니엘!”
“…안녕, 클레이튼.”
닉의 할아버지와 맥 레널드는 MIT 동기로서, 꾸준히 교류를 이어 오고 있는 절친한 친우였다. 그 인연은 그대로, 손자인 닉과 다니엘에게로 이어졌다.
맥 레널드의 저택에는 널찍한 풀장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닉은 캘리포니아에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 곧장 날아갔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단정하고 어른스럽게 웃고 있는 8살의 다니엘 레널드였다.
“대니도 이번 여름 방학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했단다. 둘이 잘 지낼 수 있겠지?”
다니엘이 대답하기도 전에 닉이 한 박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맥 레널드의 저택은 뒤편으로 울창한 야자나무가 늘어져 있었으며, 앞으로는 해안이 보이는 정원으로 꾸며져 아주 근사했다. 저택의 밖으로 나서면 무려 바다도 있었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그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귀중한 여름을 만끽하고 싶었다.
신이 난 채 달려 나가는 8살 남자애를 막을 사람은 저택에 없었다.
“클레이튼?”
뒤에서 조금 얼빠진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닉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풀장으로 달려갔다. 신고 있던 신발과 셔츠를 가볍게 벗어 던진 그가 풀에 뛰어들어 물속 깊이 가라앉았을 때였다.
“……튼? 클……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수면 위로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림자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입에서 뽀글거리며 작은 거품이 피어올랐다. 나를 찾으러 온 건가?
깊이 가라앉아 있던 닉이 금세 몸을 돌려 풀장 바닥을 박차고 올라왔다.
“왜 불러, 다니엘.”
풀의 끄트머리에 쪼그리고 앉아 물속을 들여다보던 다니엘은 흠칫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네가, 물에 빠진 줄, 알았…….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말을 잇던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이내 닉이 순식간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탓에 젖은 바지 밑단을 난감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잘 차려입은 도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닉은 조금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샌님같이 굴기는.
“다니엘? 다니엘 레널드?”
“아, 응.”
“너도 들어와!”
“…싫어. 옷이 젖잖아.”
“그럼 옷 벗고 들어와.”
“속옷만 입고 풀에 들어가라고?”
다니엘 레널드는 들으면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치를 보며 주저하는 얼굴에 닉은 아무 생각 없이 다니엘의 팔을 덥석 잡았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8살의 닉 클레이튼은 정말로,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니엘의 팔을 잡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팔이 잡힌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중심을 잃고 수면으로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었다.
풍덩!
전혀 예상치 못하고 물에 빠진 다니엘이 급하게 손을 뻗어 풀장의 벽을 잡았다. 그는 수영하는 법은 몰랐으나 천부적으로 몸을 손쉽게 움직이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양손으로 벽을 잡자마자 팔에 힘을 줘 단숨에 풀장에서 빠져나온 다니엘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다니엘이 주저앉은 곳에 물 자국을 남겼다. 다니엘 레널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옷을 입고 막무가내로 물속에 들어간 적이 없었고, 그런 정돈되지 못한 꼴로 다른 사람을 맞이한 적도 없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내지 못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다니엘의 시야에 여유롭게 물길을 가르며 제게로 다가오는 닉이 들어왔다. 닉은 물에 젖은 채 조용히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을 보며 풀에서 나왔다.
“왜 나갔어, 다니…… 악!”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가던 닉은 얼굴로 날아온 주먹을 맞고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
뒤로 넘어진 자세 그대로 닉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나머지 주먹으로 얻어맞은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땅을 짚은 손을 들어 뒤늦게 뺨을 감쌌다.
맞았다.
주먹으로, 맞았다.
다니엘 레널드에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황당함만이 닉의 머리를 지배했다. 황당한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하.”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던 다니엘 레널드가 이내 얼굴에 환한 미소를 걸쳤다. 그것도, 무척이나 재미있는 만화라도 본 듯이. 그는 일전의 어른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양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겨울에 잠깐 햇살을 받은 상록수 잎처럼 고요히 반짝이던 녹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의 부모를 포함해 다니엘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모두가 놀랐을 법한, 처음 꺼내 보인 진심 어린 미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알 바는 아니었다. 저를 때려 놓고 내려다보며 웃는 다니엘의 태도에 울컥한 닉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꾹 말아 쥔 주먹을 내지르며 다니엘에게로 달려들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짓이야! 닉, 대니!”
우연히 정원으로 나온 맥이 그 둘을 발견하기까지, 둘은 꼬인 실뭉치처럼 완전히 엉켜 서로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닉이 다니엘의 몸에 올라타 그에게로 주먹을 내지르면 다니엘은 다리로 그를 걷어차고 다시 우위를 점했다. 반대로 다니엘이 올라타면 닉은 혼신의 힘을 다해 팔을 뻗어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을 한 움큼 잡고 힘껏 뜯어냈다.
다니엘은 맥을 발견하자마자 돌이라도 된 듯 우뚝 멈춰 섰기 때문에, 닉은 마지막 한 대를 다니엘에게 꽂아 넣을 수 있었다.
“당장 멈춰!”
갓 학교에 입학한 남자애 둘이서 이렇게까지 험하게 싸우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맥이 고함쳤다.
얼굴부터 옷, 다리까지 그 어디 하나 멀끔한 구석 없는 꼴로 닉은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맥의 앞에 섰다. 마찬가지로 엉망인 꼴이었으나 다니엘은 닉과 달리 무척이나 침울하고 조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은 닉의 예상 범위를 완전히 빗나갔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사과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지, 대니.”
“미안해, 니키.”
그는 아주, 굉장히, 몹시 미안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닉에게 손을 내밀어 왔다. 닉은 상상도 못 한 전개에 휙 다니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접어 웃은 그는 자신의 손을 잡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양팔을 뻗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너와 친구로 지내고 싶어.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
“뭐, 뭐?”
당황해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나머지 닉은 다니엘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 닉의 귓가로 조그마한 속삭임이 내려앉았다. 평생 절대 잊지 못할 목소리가.
“네가 졌어, 멍청이.”
“……!”
그것이 닉 클레이튼이 경험한 첫 번째 패배였다.
***
그 이후로도 닉이 가진 다니엘 레널드와의 기억은 단 하나도 유쾌하지 않았다. 그가 레널드에게 순수한 호기심이나 호감을 느꼈던 건 오직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한 3분 남짓한 시간에 그쳤다.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면 못된 성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지만, 주변에 누군가 다가오면 거짓말이었다는 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이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면 어른들은 감히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
젠장, 악마 같은 다니엘 레널드. 함께 벌인 사고에 저 혼자 혼나야만 했던 순간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착하고 반듯한 다니엘을 꾀어서 장난을 저지른다고 생각했지만…….
“여기 자리 있어?”
“……어, 어, 아니! 앉아!”
다니엘은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근데 그걸 왜! 나만 알고 있는 거냐고!
“없어.”
“하하, 장난도.”
“장난 같아?”
다니엘 레널드가 있는 것만으로도 학교 카페테리아는 고급 레스토랑처럼 변했다. 단순히 다니엘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잠시도 조용하지 못하던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것이다.
주변에서는 전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건대, 메신저로 흥분해 떠들거나 혹은 SNS에 다니엘 레널드 목격담을 퍼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열띤 분위기를 모르는 것이 아닐 텐데도 다니엘은 전혀 모르는 얼굴로 금세 비워진 자리에 착석했다.
닉이 짜증 난다는 얼굴로 제 맞은편에 앉은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저번 주, 아니, 3일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맞은편은 클로이의 자리였다.
망할. 들고 있던 감자튀김을 대충 접시에 내던지며 닉은 식사를 마쳤다. 때마침 이쪽에 시선을 주며 카페테리아를 빠져나가는 듯한 클로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니키, 점심 먹고 갈 거야?”
“어딜?”
포크를 내려놓던 닉이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스쿨 투어. 네가 시켜 주기로 했잖아.”
뭐라는 거야.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닉이 가볍게 실소했다.
다니엘 레널드는, 비유하자면 뉴욕 스파크스가 올해는 꼭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거라는 듯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닉은 스파크스의 팬이었고 이번에는 꼭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지 올해로 6년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필요가 있겠다.
쉽게 말해 다니엘 레널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왜? 라이언에게 부탁하든지. 저쪽이 우리 학교 풋볼 팀 쿼터백이니까.”
“…내가?”
옆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얼떨떨하게 들고 있던 포크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알지, 라이언? 이쪽은 무려 제이콥 레널드의 아들이라고. 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쿼터백.”
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라이언의 표정이 부스스하게 붉어졌다. 이런,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또한 제이콥 레널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는 로스앤젤레스 울프스의 쿼터백이었다. 제이콥이 은퇴를 철회하고 뉴욕 스파크스에 들어와 뛰지 않는 이상 닉에게는 다니엘 레널드의 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니엘 레널드는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경험으로 보자면 사고 치기 일보 직전의 표정이었으므로, 닉은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너 풋볼 좋아하잖아, 레널드. 잘됐네. 나는 바빠서 이만 가 볼게!”
닉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다니엘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막 카페테리아를 빠져나가고 있는 클로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빠르게 입구로 다가가는 그의 뒷모습을 다니엘 또한 놓치지 않았다. 주변에서 그에게 물어 오는 호기심 어린 질문들에 성실하게 답해 주면서도 시선은 한곳에 고정한 채였다.
그러니까, 클로이를 따라잡은 닉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보폭에 맞춰 카페테리아를 빠져나갈 때까지 말이다.
***
망할 다니엘 레널드는 대체 뭐가 문제일까? 어째서 인생에 끊이질 않는 고난과 역경이 되어 주는 걸까? 닉 클레이튼은 머리를 쓰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휴업 중이던 뉴런을 작동시켰다.
1번 가정. 십여 년 전에 자신이 물에 빠트린 것 때문에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다.
레널드는 그 사건 이후로 자신을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왔다.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2번 가정. 중등부 시절 헤일리 웨스콧이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도 들이댄 것이 레널드의 기분을 잡치게 했다.
이것도 어느 정도 가능성 있었다. 레널드와는 이상하게 취향이 겹쳤고, 그건 분명히 짜증 나는 일이었으므로 그 역시 기분이 더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자신이었다. 게다가 웨스콧은 결국 레널드와 사귀었으니 이건 보류.
3번 가정. 다니엘 레널드와 말다툼을 하다가 그가 아끼는 블루레이 디스크를 창밖으로 던져 버렸던 일 때문에.
레널드는 즉각적으로 보복하는 편이었고 그는 자신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대신 계단에서 떠민 전적이 있었다. 물론 일부러 계단으로 민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난 레널드를 피해 달아나다가 자신을 잡으려고 쫓아온 그의 손에 제 스스로 들이대 밀쳐진 것에 가까웠다.
단이 고작 세 개뿐인 계단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밀리는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떨어져 이마를 꿰맸었다. 그때 닉 클레이튼은 인생 최초로 죽음의 공포를 깨우쳤다.
그리고 더불어, 다니엘 레널드가 우는 걸 처음 보게 된 날이었다. 레널드는 무려, 창백해진 얼굴로 쉴 새 없이 울었었다! 그 다니엘 레널드가!
-미안해. 미안해, 니키.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아직 안 죽었어, 이 새끼야….
만약 그가 자신의 연기력을 가감 없이 발휘했던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미안한 게 진심이었다면. 레널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직접 사인을 해 보내 준 블루레이 디스크의 사망 사건을 아직도 담아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니 이것도 일단 보류.
4번 가정. 중등부를 졸업하던 밤, 레널드와 함께 할아버지의 집에서 몰래 스카치 한 병을 훔쳤을 때……,
아, 이건 묻어 두는 것이 좋겠다.
하여간에 다니엘 레널드와의 악연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떠올려 보자면 그건 ‘처음부터’일 것이다. 닉 클레이튼은 에세이 작성에 영 재능이 없었지만, 레널드와 있었던 일들만 나열해도 대학 지원 에세이 분량을 꽉 채울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레널드가 왜 이렇게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해 안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닉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니엘이 풋볼 코치한테서 팀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대.”
“음, 그렇구나.”
“원래 풋볼 실력이 뛰어난가 봐. 다니엘이 풋볼 팀에 들어가면 다음 주에 있는 홈경기에도 출전하려나?”
“글쎄.”
…지상 운동은 제외하자. 다니엘 레널드는 재수 없게도 모든 지상 운동을 잘했다. 그건 타고났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자신 또한 몸을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레널드는 자신보다 0.001초 정도 빨랐다.
“내가 너무 레널드 얘기만 했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꼬는 클로이를 향해 닉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음. 아니야. 네가 말하는 걸 듣는 건 언제나 즐거워, 클로이.”
그게 다니엘 레널드에 관해 얘기하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체육 수업을 위해 체육관에 모인 참이었다. 클로이는 닉이 자신의 옆 벤치에 앉자마자 다니엘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그건 하필이면 닉이 가장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화제였다.
빌어먹을 다니엘 레널드.
닉 클레이튼은 늘 자신이 꽤나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고 실제로도 그러한 평을 받아 왔다.
약간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칼은 햇빛을 받을 때면 금발같이 보였으며, 그린 듯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파란 눈동자는 여름의 투명한 바다를 연상시켰다. 닉은 단순히 키만 큰 것도 아니었다. 꾸준히 해 온 수영으로 몸매도 단단히 각이 잡혀 있었다. 무엇보다 닉 클레이튼에게는 사랑받아 온 자 특유의 여유로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닉에게 호감 어린 시선을 던져 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주목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기실 조금쯤은 즐기는 구석도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 레널드가 제게로 올 때면 상황은 달라졌다.
“다들 집중! 이번 수업 시간에는 농구를 하려고 한다.”
농구공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들어온 체육 선생이 유쾌하게 외쳤다. 그가 꺼내 든 카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농구였다.
보스턴 스쿨의 체육 선생은 학교의 농구 팀 코치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매주 수업 중 한 번을 꼭 농구 게임으로 대체했다. 자율 참가였기 때문에 코트로 나오지 않은 채 벤치에 남아 있는 인원은 반절이 훨씬 넘었다. 닉 클레이튼도 농구를 할 때면 벤치에 앉아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는 부류였다.
농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다. 어차피 학교가 끝나면 수영 훈련이 닉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많게는 세 번까지도 교내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했다. 이미 운동량은 차고 넘쳤던 것이다.
따라서 닉에게 농구 팀 코치가 수업 시간에서마저 농구 팀을 굴리기 위해 여는 연습 게임에 굳이 참여할 이유는 없었다. 갑자기 레널드가 그 연습 게임에 참여하겠다고 나서고, 인원이 부족하니 자신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니키, 같이 하자.”
레널드는 입가 옆으로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닉에게로 다가왔다. 클로이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닉이 그 목소리에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네가 들어오면 딱 10명이야.”
개소리! 닉 클레이튼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욕설을 꾸역꾸역 삼켰다.
체육 선생의 수업을 빙자한 농구 연습에는 늘 정규 팀보다 적은 인원들이 참여했다. 각 팀에 셋씩 들어가면 많이 참여한 것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닉은 옆에 있는 클로이를 의식해 최대한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미안한데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야. 너나 많이 하지 그래, 레널드.”
“…그래?”
닉의 대답에 가볍게 대꾸한 다니엘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코트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농구 팀 선수들에게 외쳤다.
“클레이튼도 하기로 했어. 너희 팀에 넣어 줘, 재거.”
“잠시만! 야, 내가 언제?”
얼토당토않은 말에 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니엘은 어느새 친해진 건지 모르겠는 커너 재거에게 곧 가겠다며 손짓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닉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다니엘의 흐트러짐 없던 머리칼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귓가를 간지럽혔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에 닉이 흠칫하며 얼굴을 굳혔다.
“지는 게 걱정이라면 봐줄게, 니키.”
그리고 곧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휘둘릴 생각은 없었으나 닉은 레널드가 거는 싸움에 늘 보기 좋게 말려들었다. 어쩔 수 없다. 클레이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로서는 걸어오는 승부를 포기할 수 없었고, 그게 뭐든 간에 다니엘에게 지는 건 더더욱 싫었으니까.
그는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지역 결선 대회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가 자격을 얻었다. 쟁한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었던 데에는, 수영 실력뿐만 아니라 태생적인 승부욕 또한 한몫하고 있으리라.
제기랄.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이 물러서지 못하는 지점을 지독할 정도로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봐준답시고 빌빌대면 뒤질 줄 알아.”
닉이 주먹을 들어 다니엘의 어깨를 묵직하게 밀쳐 냈다. 퍽 소리가 났음에도 다니엘은 말없이 웃으며 코트로 향하는 닉의 뒤를 쫓았다.
***
깜박한 게 있다면, 레널드가 자신과 농구 포지션이 같다는 것이었다. 다니엘 레널드와 자신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안 맞는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취향이 같았으니까.
반절이 갈라진 코트 위에서 다니엘을 마주 보고 선 닉이 한숨을 삼켰다.
“레널드.”
“왜?”
왜? 왜라니, 자신이 할 말이었다. 저마다 정해진 루틴으로 스트레칭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닉도 대충 몸을 풀며 물었다.
“왜 왔어?”
“이렇게까지 빨리 물어 줄 줄은 몰랐네.”
다니엘이 어깨를 펴며 생긋 웃었다. …비꼬는 건가? 닉이 빠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잖아. 보스턴이 더 면학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아서.”
“웃기시네.”
의식하기도 전에 닉에게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거짓말쟁이. 자신은 이미 여태까지의 수영 성적만으로도 스탠퍼드의 합격증을 따 놓은 상태였고, 그건 레널드라고 다르지 않았다.
“말해 봐.”
“말했잖아. 머리가 안 좋아서 까먹은 거야?”
“나는 보스턴으로 온 이유를 물었고, 그에 대한 답변은 못 들었는데. 헛소리라면 들었지만.”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니까.”
“어디든 네가 입학 원서를 내기만 하면 받아 줄 텐데 무슨 헛소리야? 맥은 전화할 때마다 네가 캘리포니아에서 어떤 활약을 하고 있는지 말해. 그러니까, 네가 보스턴에 올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니키, 너 내 생각보다 똑똑했구나.”
다니엘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젠장. 이건 비꼬는 게 확실했다.
“몸 다 풀었지? 정렬!”
그때, 체육 선생으로부터 우렁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에 제멋대로 퍼져 있던 학생들이 꼿꼿하게 몸을 폈다. 어쩔 수 없이 닉은 다니엘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경기가 끝나면 솔직하게 말해.”
“솔직하게?”
“솔직하게.”
평소보다도 한층 진지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다니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긴다면.”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였다.
삐이익!
경기를 알리는 농구 코치의 휘슬 소리가 코트에 내려앉았다. 골 근처에 서 있던 레널드가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이쪽 코트로 빠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농구 팀 에이스 센터인 커너 재거의 말이 옳았다. 시작하자마자 레널드를 필두로 속공을 펼칠 거라는 전술은 예측 그대로였다.
레널드는 공을 가지고 뛰는 가드 옆으로 안정적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그것 또한 커너가 예측한 그대로였다. 닉 클레이튼은 원래라면 순순히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순순히 시합 전 코트 위의 사령관이 말한 동선 그대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
공을 가지고 골대로 향하던 가드의 공을 스틸한 닉이 바로 몸을 돌렸다. 상대편 코트에 커너가 있기는 했으나, 바로 앞에 레널드 또한 있었다.
빌어먹을.
커너에게 패스하려고 했던 닉이 잠시 망설이며 발을 뗐다. 커너에게로 공을 패스한다면 레널드에게 인터셉트 당할 위험이 컸다. 더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클레이튼!”
탕!
“제길!”
닉이 던진 중거리 슛이 링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레널드는 기다렸다는 듯 튕겨 나온 공을 다시 잡았다.
레널드가 잡은 수비 리바운드로 인해 경기의 흐름은 그의 팀이 유리하게 흘러갔다. 다니엘 레널드는 절대 기회를 놓치는 타입이 아니었고, 닉은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발을 옮길 수밖에는 없었다.
“클레이튼, 넌 머리 쓰는 건 안 맞아. 그냥 공을 따라 움직이기만 해. 네가 제일 빠르니까, 다른 애들한테 어시스트하라고 할게.”
“닥치고 너도 뛰어, 커너.”
닉은 굳이 따지자면 운동을 잘하는 편에 속했고, 농구 코트 위에서도 자신이 가진 센스를 탁월하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평소에 농구공만 잡고 있는 이들보다 슈팅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탕!
“하…….”
세 번째 리바운드였다. 닉이 짧은 한숨과 함께 땀에 의해 끝이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 냈다. 백보드를 맞은 공이 바스켓 안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야속하게도 튕겨져 나온 공은 다시 한번 레널드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번이나 재거 팀의 공격권을 탈환해 간 그 손으로.
공격권이 넘어간 것을 보자마자 곧장 몸을 돌린 닉이 빠르게 반대편 코트로 향했다.
레널드의 팀에는 학교 농구 팀의 사령탑인 포인트 가드가 있었다. 그런데도 코트 위의 모든 흐름이 이상하게도 레널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포인트 가드가 꾸준히 레널드에게만 공을 운반했고, 다른 이들은 모두 레널드를 어시스트하는 스크린플레이를 펼쳤던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세워진 전술을 커너도 알아차렸는지 금방 포인트 가드를 막아섰다. 패스 경로가 막힌 레널드를 향해 닉이 빠르게 다가갔다.
‘잡았다!’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드를 뚫고 나가려는 듯 보이던 다니엘은 니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점프도 없이 팔을 뻗었다.
삐익!
장거리였으나, 가벼운 원 핸드 슛으로 다니엘 레널드는 점수를 가져갔다. 계획에 없던 전략이었는지 상대편 포인트 가드도 얼떨떨하게 레널드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화려한 득점의 주인공은…….
“슬슬 봐줄까? 표정이 안쓰러워, 니키.”
“좆 까.”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빛 눈동자에는 즐거운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닉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짜증스럽게 뒤돌아섰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니엘에게 크게 한 방 먹여 줘야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나 점수 차는 분명했다. 15 대 38. 닉이 속한 커너 팀이 15점을 가져갔다.
슛을 몇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닉 클레이튼은 10점을 득점했다. 그리고 그가 실패한 슛은 전부 다니엘이 수비 리바운드에 성공해 득점으로 이어 갔다.
똥이라도 씹은 얼굴로 물을 마시는 커너의 옆에 선 닉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타월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는 레널드의 앞으로 다가가는 클로이를 발견한 탓이다.
제 앞으로 다가와 인사하는 클로이에게 레널드는 기꺼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주었다. 그건 닉에게는 10점 만점의 1점짜리 미소였고, 클로이에게는 10점 만점의 100점짜리 미소였다.
“수고했어, 클레이튼.”
“……어. 너도.”
커너 재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닉을 툭 쳤다. 그에 닉도 대충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구 팀은 풋볼 팀만큼이나 주전 경쟁이 심하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농구 팀 코치를 맡고 있는 체육 선생이 완전히 반해 버린 듯한 눈으로 레널드를 보고 있는데, 걱정도 안 되는 건가? 하긴, 커너는 레널드와 완전히 다른 포지션을 맡고 있으니 안일하게 굴 만도 했다.
풋볼 팀 코치도 레널드를 침 발라 뒀다고 하던데. 다니엘 레널드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러브콜에 보스턴 고등학교 농구 팀도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 명백해졌다.
“짜증 나게.”
뻐근한 목을 풀던 닉이 친구들과 함께 다시 교실로 발길을 돌렸다. 전학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레널드는 이미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됐다. 그것만으로도 거슬리는데, 다니엘 레널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굳이 제 시야에 들어와 얼쩡거리기를 반복했다.
같이 농구를 한 팀원들의 애정 어린 주먹질에 몸을 피하던 그가 불현듯 닉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순간, 눈썹 뼈 아래로 움푹 파여 그늘져 있던 레널드의 눈가에 환한 빛이 드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다니엘 레널드는 자신을 약 올리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었다. 만족스럽게 휘어지는 눈가가 평소보다 더 반짝였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가 생각하고 있는 말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네가 졌어, 멍청아.’
귓가에 웃음기 섞인 레널드의 속닥거림이 내려앉았다. 닉은 거칠게 머리를 흔들어 환청을 떨쳐 냈다.
다음은 음악 시간이라면서 제니가 가장 먼저 신나 달려 나갔고, 그 뒷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던 라이언이 그녀를 뒤쫓았다. 주니어 시절과 다름없이 철없게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친구들의 뒤를 닉도 천천히 따라갔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다니엘 레널드는 뒤로한 채로.
체육관과 본관이 연결된 서쪽 계단은 쉬는 시간인 탓에 많이들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닉은 제게 말 걸어오는 이들에게 경쾌한 미소로 대꾸해 주었다. 그러다 핸드폰에 쌓인 알람들을 확인하고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참이었다.
“그에게 보기 좋게 털리던걸, 콜린.”
계단을 중간쯤 오른 닉이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약간 허스키하지만 부드럽게 파고드는 목소리.
“제시.”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니의 쌍둥이 자매인 제시카 해밀턴이었다. 그녀는 계단 난간에 기대곤 길게 굽이치는 고동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싱그럽게 웃었다.
“대니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시무룩해져 있을까 봐.”
“…내가 언제 시무룩했다고 그래.”
“몰라서 묻는 거야?”
눈을 휘둥그레 뜬 제시는 이내 길쭉하고 얇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7학년 때, 헤일리가 대니와 데이트를 할 때도 그랬고, 또….”
“제시!”
닉이 비명을 지르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올라 다급하게 자신을 붙잡는 닉을 보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던 제시가 눈웃음을 쳤다.
하여간에 다니엘 레널드나 제시카 해밀턴이나 사람을 놀리는 데에는 타고난 이들이었다. 비슷한 점이 많은 데에 반해 비록 둘은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동족 혐오, 뭐 그런 건가? 닉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제시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너에 대해서라면 많은 걸 알고 있지.”
“제발 잊어 주면 안 될까?”
응? 제시. 닉은 어딘가 장난스러운 듯, 혹은 난처한 듯 찡그린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콜린.”
제시는 손을 들어 닉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손길이었다. 뿌리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왔다.
“너는 날 잊지 못할 거잖아.”
아프지 않게 세워진 손가락이 목덜미를 긁어내렸다. 목이 간질거리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던 닉이 헛웃음을 흘렸다.
(로.벨)“…손 치워.”
“나는 네가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위로해 주려고 그러는 건데.”
그놈의 위로. 거칠게 짓씹어진 단어가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오늘 하루 종일 몇 명에게서 안쓰럽다는 말을 듣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필이면 그다지 안쓰럽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다.
“필요 없어.”
“그럼 필요해지면 연락해.”
“안 할 거니까 기대도 하지 마.”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고.”
제시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와는 다르게 눈을 내리깔며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타인이, 특히나 여자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로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닉이 졌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알겠어, 미안해.”
“연락할 거지?”
“응. 언젠가는.”
중얼거리듯 흘러나온 뒷말을 듣지 못한 게 아닐 텐데도 제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굿 보이. 달싹거리던 붉은 입술이 곧 닉의 입술에 와 닿았다.
그는 불현듯 입술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하던 생각들을 전부 내던졌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꺾은 닉이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
등이 잡혔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끌어당기는 거센 힘에 의해 몸이 뒤로 빠르게 기울었다. 문제가 있다면 닉은 계단의 거의 꼭대기에 서 있었고, 아래로 못해도 족히 스무 개는 넘을 계단이 남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망할!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다급히 손을 뻗어 난간을 붙잡았다. 그러나 한번 몸이 기울어진 이상 다시 중심을 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딜 뻔한 찰나에 등을 단단히 받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런 빌어먹을.”
“말이 심하잖아, 니콜라스 클레이튼.”
“심해? 지금 내가 심한 거야? 이 사이코 새끼야,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어?”
“죽이다니. 잡아 줬는데.”
다니엘 레널드는 웃는 낯이었으나 웃음기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친절히 대꾸했다.
닉의 등을 받치고 있던 다니엘은 이내 팔에 힘을 주어 그를 계단 위로 올려 주었다. 제시는 방금 벌어진 일에 다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니엘과 함께 온 모양인지 계단 아래층에 서 있던 클로이도 한껏 경악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닉 클레이튼은…….
“그래. 나도 너 죽기 전까지 패고 911 불러 줄게, 개자식아.”
계단을 오르자마자 몸을 돌려 다니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닉의 주먹은 다니엘의 뺨에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시원하게 들려온 타격 음에 복도는 반대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레널드는 왼발을 땅에 단단히 박고 흔들리는 상체를 세웠다. 이내 손등으로 붉은 뺨을 쓰다듬던 그가 조용히 닉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헉.”
둘이 처음 만났던 여름날 이후, 두 번째로 시작된 육탄전이었다.
***
“상황을 설명해 주겠니?”
그 목소리에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을 앞에 두고 눈치를 보던 닉이 고개를 들었다. 교장실에 들어와 앉은 지 족히 10분이 지난 후였다.
보스턴 스쿨의 교장인 해리엇은 매우 유능한 동시에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매사추세츠에서 가장 높은 명문대 진학률을 가진 학교의 행정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클레이튼은 그런 해리엇의 특별 리스트에서도 최상위권에 오른 인물이었다. 망나니 같은 성적과는 달리 수영 실력만큼은 그가 뛰어난 유망주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주니어 시절부터 미국 전역에서 상을 받아 왔던 닉은 당당히 그녀의 리스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니엘 레널드.
그 또한 해리엇의 특별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따끈따끈한 유명 인사였다. 제이콥과 오브리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친 후광인데, 다니엘은 풋볼과 연기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냈다. 게다가 그는 자잘한 스캔들을 빼고는 결코 단 한 번도 추문에 엮인 적이 없었다. 떠오르는 아역 배우에서 할리우드의 왕자 다니엘 레널드가 되기까지, 파파라치에게 찍힌 사진들도 모두 반듯하고 정석적인 왕자님 그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고가 어떻게 벌어진 일이든 간에, 그녀로서는 최대한 원만히 해결하고 싶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시던 코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너희 둘이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분명 전학 오기 전 했던 상담에서는 니콜라스가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니, 다니엘?”
가장 친한 친구?
해리엇을 주시하고 있던 닉의 고개가 바로 옆에 앉은 다니엘에게로 휙 돌아갔다. 제게로 향하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다니엘은 평소와 같은 정돈된 얼굴로 앞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닉은 그런 다니엘의 옆모습을 잠시간 노려보았다.
역시 교장 선생님이 무슨 오해를 한 게 분명하다. 다니엘 레널드가 자신을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을 리가 없으니까.
“제가 실수했어요.”
레널드는 지금껏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실수? 고의로 당겼잖아, 새끼야.”
“…네, 고의로 당겼어요.”
늘 그랬듯이 가엾은 척을 하며 빠져나갈 줄 알았던 레널드는 자신의 말에 순순히 긍정했다. 그 고분고분한 태도에 놀란 건 오히려 닉이었다.
“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에는 순수한 호기심만이 담겨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 그를 다니엘은 슬쩍 눈짓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해리엇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한 싸움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거 알고 있지? 본래라면 부모님을 불러야 하겠지만.”
그 말에 다니엘도, 닉도 모두 움찔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부모님들 모두 당장 오실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학교에서 벌을 주고 끝내기로 했단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둘은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벌을 받는다는데 안심하는 학생들을 보며 해리엇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두 사람은 방금 치고받고 싸운 사이라기에는 묘하게 차분하고 익숙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따라오렴.”
닉이 그 말에 벌떡 일어섰다. 다니엘도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교장실을 나서는 해리엇의 뒤를 닉과 다니엘이 따랐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은 탓에 복도는 고요했다. 또각또각, 해리엇의 구두 소리와 두 명의 저벅거림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시니어 클래스가 몰려 있는 복도에 다다른 해리엇은 두 개의 의자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둘을 향해 뒤를 돌았다.
“너희는 지금부터, 스포츠 클럽이 모두 끝날 때까지 이 의자에 앉아 있을 거란다.”
보스턴 스쿨은 스포츠 클럽이 잘 갖춰진 학교였다. 최신식 설비의 미식축구장도 있었고 테니스 코트도 마련되어 있었으며, 농구 팀이 주로 사용하는 체육관, 수영 특기생들이 독식하는 수영장과 학교 야구 팀이 쓰는 야구장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체육 특기생들은 방과 후에도 학교에 남아 훈련을 계속했다. 닉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오늘 방과 후에 수영 훈련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스포츠 클럽이 끝날 때까지 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만….”
“학교에서 내리는 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부모님께 맡기는 방법도 있지.”
“얼른 벌 받고 싶어요, 선생님.”
엄격한 수영 코치의 얼굴이 잠깐 눈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수영 코치인 션이 아니라 엠마 클레이튼이었으니까.
닉이 못 참겠다는 듯 서둘러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그리고 다니엘을 향해 얼른 앉지 않고 뭐 하냐며 눈짓했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의자에 앉은 학생들을 향해 해리엇이 퍽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손을 내밀어, 니콜라스.”
“네?”
“다니엘. 니콜라스의 손을 잡으렴.”
“네?”
닉이 앵무새처럼 ‘네?’를 반복하는 동안, 지금껏 가만히 있던 다니엘이 손을 뻗었다. 이윽고 자신의 손을 감싼 온기에 닉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래, 그 상태로 있는 거란다. 선생님들께 감시를 부탁드렸으니, 손을 놓거나 혹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해리엇은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멀뚱히 앉은 두 사고뭉치를 뒤로한 채,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아 해리엇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때였다.
“뭐 하자는 거야, 레널드.”
“음?”
“곧 수업 끝나.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손 놔.”
바로 손을 뿌리치려던 닉이 되레 제 손을 꽉 쥐어 오는 힘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손에 힘을 주고 흔들어 털어 내고자 해 보았으나, 레널드는 제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려 줄 뿐 손에 준 힘은 풀지 않았다.
뭐지?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닉이 고개를 기울여 다니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비스듬히 바닥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진녹빛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정말 쓸데없이 섬세하게 빚어진 얼굴이다.
“야.”
“쉬이. 우리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거야, 니키.”
“나는 네가 진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시선을 내리깐 채 조곤조곤히 화제를 돌리던 다니엘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닉 클레이튼은 턱을 괸 채로 비스듬히 다니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해 봐. 너 나 싫어하잖아. 근데 왜 보스턴에 온 거야? 왜 나랑 같이 사는 건데?”
그는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 입가를 늘어뜨렸다. 시비를 걸거나 레널드의 속을 긁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정말 순전한 궁금증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닉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 묘한 침묵에 닉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즈음, 다니엘이 그를 불렀다.
“니키.”
다니엘은 아주 손쉽게, 다시금 닉의 시선을 제게 단단히 묶어 두었다. 그건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익숙한 행위였다.
“너는 내가 왜 보스턴으로 돌아온 거라고 생각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닉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모르니까 몇 번이나 물어본 걸 텐데 웬 되물음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즉답하는 닉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
잠시 고민하는 듯 입가를 매만지던 다니엘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보스턴을 떠나고부터 왜 메시지에 답 안 했어?”
“뭐?”
엉뚱한 물음이었다. 그는 닉이 던진 질문에는 끼워 맞춰지지 않는 오답을 던졌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이 닉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다니엘은 다른 사소한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닉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매번 보냈잖아.”
“그게 뭔…….”
다니엘 레널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뜬금없는 그의 말은 그저 자신을 곤란에 빠트리려는 함정 같기도 했고, 어쩌면… 진짜 어쩌면, 레널드의 진심 같기도 했다.
닉을 평소에 잘 쓰지 않던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레널드는 자신의 경기가 있는 날마다 메시지를 남겨 두고는 했다. 고작 세 단어였지만.
「잘했어, 니키.」
답을 원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레널드의 간결하다 못해 무관심해 보이는 문자를 보며 이게 무슨 수작인가 고민한 적도 있었다.
결국, 답은 한 번도 보내지 않았지만.
“왜 보냈던 건데?”
“너한테, 문자를 왜 보냈냐고? 하.”
늘 여유롭고 단정하던 다니엘 레널드의 낯이 와그작 무너졌다. 그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삐딱한 미소를 입에 걸고 물었다.
“머리는 장식용이야, 니콜라스 클레이튼?”
“아, 제길. 또 시작이네.”
“너도 지성체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하지 그래. 지능이 어류 수준이 아니라면. 참, 너는 물고기에 가까웠지.”
레널드의 빈정거림에 다시 돌아 버릴 것 같아진 닉이 주먹을 꽉 쥐었다. 더 나불대면 자신의 주먹도 자제력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깊게 심호흡을 할 때였다.
따르르릉! 마치 경보음처럼 들리는 종이 복도 가득 울려 퍼졌다. 동시에 닉의 푸른 눈동자에 일말의 공포감이 깃들었다. 종소리는 수업이 시작할 때나 마칠 때 울렸다. 따라서 그 종소리가 지금 들려온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 학교 끝나고…… 어?”
“니콜라스?”
닉 클레이튼은 문득 죽고 싶어졌다.
이 꼴을 보이느니 죽는 게 나았다.
그는 다니엘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제게로 쏟아지는 수십 개의 눈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뭐 해, 니키?”
그런 니키의 머리 위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떨어졌다. 자신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킬킬거리며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들을 피해 닉은 손에 더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모두가 교실에서 빠져나오는 하교 시간이었고, 보스턴 스쿨에서 가장 유명 인사인 두 명이 복도에 앉아 손을 맞잡고 있었다.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하하하! 이게 뭐야, 닉! 진짜 최고다! 하하하, 넌 정말 시니어의 수치야.”
늘 정신머리 하나를 빼놓고 다니는 제니가 유독 또렷한 눈으로 깔깔거렸다. 그녀의 폭소에 안 그래도 미칠 것 같던 닉은 당장에라도 정신을 놓고 싶어졌다.
그러나 슬쩍 손가락 틈새로 올려다본 다니엘 레널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카메라를 켠 채 제 이름을 부르는 이에게 살랑살랑 손까지 흔들어 주고 있었다!
“뭐 해?”
“팬 서비스.”
“너 미쳤어?”
“응. 조금?”
닉이 이어진 다니엘의 말에 멈칫했다. 그는 앞을 보며 옅게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묘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다니엘 레널드는 평소보다 조금 더 경직되어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쳐진 강박적인 미소를 보니 문득 속이 답답해졌다. 닉은 그가 언제 이런 웃음을 짓는지 알았다.
스크린을 통해 보는 다니엘 레널드는 늘 이렇게 웃었다. 낯선 사람들의 앞에 섰을 때도 그랬고, 부모님의 앞에서도 그랬으며, 중등부 시절 2주 내내 그를 따라다니던 파파라치와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닉 클레이튼은 다니엘 레널드가 불편한 옷을 멋들어지게 입고 있는 꼴이 항상 우스웠다. 겉으로는 훌륭하게 어울리지만, 속은 답답하게 몸을 조여 영 불편하기만 한 옷을 입고 있는 게. 객관적으로 봐도 다니엘 레널드는 단정한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게 꼬인 성격이었으며, 거칠기까지 했다. 닉은 레널드에게 폭력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첫 만남 때도 그러했고 중등부 시절 그를 스토킹하던 파파라치에게도 그러했다.
***
파파라치를 앞에 두고도 잠시 망설이던 끝에 부드럽게 웃는 다니엘 레널드의 얼굴을 보며 닉은 질릴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닉은 체육관 뒤편을 낙서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스프레이 페인트를 꺼내, 그대로 파파라치를 향해 힘차게 분사했다. 원래 닉 클레이튼은 뒷일 같은 걸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 놀랄 만한 일은 이후에 일어났다.
“어, 어? 으악!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다니엘 레널드가 그의 손에서 카메라를 뺏어 들고는, 힘껏 내던진 것이다.
레널드는 중등부 시절부터 이미 골격이 거의 완성된 훌륭한 쿼터백이었다. 얼마나 힘을 주어 내던졌는지 멀찍이 날아간 카메라는 지면에 콰직, 하고 찍히듯 부딪혔다가 곧바로 바닥을 굴렀다.
카메라가 부서지며 떨어져 나온 부품들이 도로 위로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스프레이를 들고 신나게 쏘던 닉도, 머리 꼭대기부터 무릎 끝까지 파란색 스프레이로 도색된 파파라치도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미세한 차이로 더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은 닉 클레이튼이었다. 속 시원하다는 듯 눈을 휘며 웃고 있는 다니엘의 어깨를 붙잡은 그는 그대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달리면서도 쿡쿡 기분 좋게 웃던 그 얼굴을 닉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웃음과 지금의 웃음은, 확연히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제 손을 꽉 쥔 채 앞을 보고 있는 레널드의 미소는 파파라치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종류였다. 억지로 자연스러움을 흉내 낸 미소.
“그래, 네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건 잘 알겠어.”
“…….”
“근데 그럼 나 손 좀 놔주면 안 돼? 너랑 멀리 떨어지고 싶은데, 레널드.”
닉이 다니엘을 향해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다니엘은 대꾸 없이 마주 잡은 손에 더 꽉 힘을 줄 뿐이었다.
“야, 아파, 힘 좀 풀어.”
“그럼 입 좀 다물고 있어. 네가 멍청한 소리를 할 때면 머리가 아파.”
여전히 웃는 낯인 다니엘은 닉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 좆같은 성격.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 숨을 들이켰다.
아직 학교를 떠나지 않은 학생들로 인산인해인 복도를 제시 해밀턴이 가로질러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닉은 맞잡은 손에 순간적으로 한 번 더 힘이 들어간 것을 눈치챘다. 적당히 좀 하라고 말하려는 찰나, 둘 사이에 고개를 들이민 제시가 방긋 웃었다.
“토요일 밤에 우리 집에서 파티할 거야. 올 거지?”
‘파티’라는 말에 닉은 순식간에 손에서 느껴지던 아릿한 압박감을 잊었다.
“너도 와?”
당장 고개를 끄덕이려던 닉이 멈칫하곤 물었다. 파티의 주최자에게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특유의 천진한 어조가 아니었다면, 상대에 따라서는 무례하게도 들릴 법했다.
듣는 사람이 제니였다면 맞고 싶은 거냐며 으름장을 놓고 실제로 주먹으로 명치 부근을 쳤을 것이다. 제시는 그러는 대신 그 장난기 섞인 물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있으면 좋겠어?”
“아니.”
“콜린, 한 번의 기회를 더 줄게. 다시 대답해 봐.”
“갈게. 토요일에 봐.”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지만, 봐주겠다는 듯 제시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닉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인사한 제시가 이내 다니엘에게도 가까이 갔다. 뺨을 맞대는 인사를 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제시는 레널드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레널드의 입가에 강박처럼 걸려 있던 웃음은 한층 온도가 낮아졌다.
“아무튼. 돌아온 걸 환영해, 대니. 너도 토요일에 꼭 왔으면 좋겠네. 무척 재밌을 거야.”
“…고마워, 해밀턴. 다니엘이라고 불러 줘.”
“제시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대니.”
천적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둘의 모습에 닉이 얌전히 질린 얼굴을 했다.
제시는 보통 모든 이들을 애칭으로 불렀고, 레널드는 보통 다른 이들을 성으로 불렀다. 성격은 똑 닮아서 사소한 부분은 전부 달랐다. 그래서 이렇게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겉만 봤을 때 둘은 꽤 어울리는 한 쌍이었지만 말이다.
그녀가 떠나가고 나자, 비로소 복도는 전과 비교해 한결 한산해졌다. 그제야 닉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갈 거야?”
다니엘로부터 뜬금없는 물음이 들려왔다. 닉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였다.
“장난해? 도망쳤다가 해리엇 선생님이 엠마한테 연락하면 난 끝장이야.”
“지금 말고, 토요일 파티에.”
“당연히…….”
그는 곧장 대답하다 말고 눈을 굴리며 다니엘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다니엘 레널드야 원래 이상한 놈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특히나 이상했다.
“당연히 가야지.”
닉 클레이튼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 말에 레널드는 다시 또 말이 없어졌다. 안 그러던 이가 조용하게 구니 영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원래도 속을 알기는 어려운 타입이기는 했다. 그러나 레널드는 이렇게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려 들거나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격도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이전보다 더 훌쩍 커서 돌아온 레널드는…….
“너 진짜 이상해, 다니엘 레널드.”
“…이상해?”
“몰라서 물어? LA에서 잘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보스턴으로 오질 않나, 오자마자 시비를 걸고. 아, 이건 원래 그랬지만.”
“네가 메시지에 답을 안 하니까 그렇잖아.”
다니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게 무슨 말인지 닉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메시지에 답을 안 해서 보스턴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고작 메시지에 답을 안 한다는 이유만으로 왔을 리가 없다. 자신들이 무슨 장거리 연애를 하는 커플도 아니고. 연락에 답을 안 했다고 비행기를 타도 빠르면 반나절, 늦으면 하루를 꼴딱 가야 도착하는 거리를 날아왔다고?
“왜?”
닉이 고개를 기울였다.
“심심했어? 아니면 스트레스 풀 곳이 필요했어? 네가 대놓고 성질부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해리엇 선생님께도 내가 제일 친한 친구라는 거짓말을 했던 거야?”
다니엘은 날아드는 질문에 꾹 입을 다물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녹안이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닉의 얼굴을 담았다.
“계단에서는 왜 갑자기 잡아당긴 건데? 도대체 어느 부분이 네 성질머리를 건드린 거냐고.”
그 물음에 다니엘은 긴 한숨을 토하듯 느릿하게 대꾸했다.
“네가 키스하고 있었잖아.”
“그게 무슨 상관…, 잠시만. 겨우 키스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그랬다는 거야? 죽을 뻔했잖아, 망할 자식아!”
“제시카 해밀턴이랑 키스했으니까. 그리고 잡아 줬잖아.”
“아, 제길! 그래서 계단에서 밀어 놓고 다시 잡아 준 게 잘했다고?”
닉이 으르렁거리듯 몰아붙였다.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 하자, 떨리는 녹안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닉은 그제야 어떤 위화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그 목소리는 낮고, 아주 나지막했다.
“내가 너를 죽일 리 없잖아.”
“…….”
“그런데, 가끔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레널드의 입가에는 늘 습관처럼 걸고 있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단정하게 넘겼던 짙은 머리칼은 눈앞으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시선도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매번 반듯하던 자세도 흐트러져 있었다.
닉은 다니엘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작 다니엘은 자신이 평소와 달리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말이다.
지금 환장할 것 같은 사람이 누군데. 닉은 그 꼴을 보며 입을 열어 투덜거렸다.
“너 진짜 짜증 나, 알아?”
“마찬가지야.”
“……뭐?”
다니엘이 노려보듯 닉을 주시했다.
“짜증 나게 하지 마, 니키. 해밀턴이랑 붙어 있지도 마.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런 계획이었다면 대성공이야.”
다니엘이 신경질적으로 뱉은 말에 닉이 설핏 찡그린 얼굴로 상대를 주시했다. 늘 비꼬거나 가식을 떨던 레널드가 이 정도로 자제하지 못하는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왜…….”
왜냐고 물어보려던 닉 클레이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날 때부터 훌륭한 연기자였던 다니엘 레널드와 달리 그는 욕구를 숨겨 본 적 없는 일차원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다른 건 몰라도, 그는 성적인 욕망을 읽는 데에는 도가 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시선을 곧잘 받아 왔으니까.
그러니 가까이서 마주한 그 불길이 이는 듯 화끈한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허, 닉 클레이튼의 입가에 가벼운 실소가 걸렸다.
“다니엘 레널드. 섹스하고 싶어? 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