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레바퀴
최유헌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보냈다.
중고로 구입한 교복은 크고 허름했다. 어머니는 건율이 더 클 것이니, 미리 큰 교복을 사야 한다고 했다. 건율은 어린 마음에 그게 부끄러워 어머니가 조금 미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 자체도 힘겨웠던 건율에게 교복과 점퍼 따위로 서열을 나누는 학교는 낯선 땅과도 같았다.
그 안에서도 끼리끼리 논다고 하던가. 건율은 옷으로 판단하지 않는 친구들과도 섞이기 힘겨웠다. 몇 명은 건율을 챙겨 보려 했으나 하교 후 곧바로 피아노 학원에 가 있는 그와 계속 함께하기에는 힘겨웠다.
건율은 대부분 사내놈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시간조차 없었다. 술, 담배, 이성, 성적인 것들.
그런 것에 관심을 갖기에는 가진 시간과 돈이 부족했다. 건율은 피아노에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했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할 줄 아는 것은 건반을 두드리는 것뿐이었으니 건율에게 피아노는 전부와도 같았다. 삶의 전부도, 욕망의 전부도 아닌 건율 자체의 전부.
그때 건율에게 다가와 준 것이 최유헌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그가 제게 말을 거는 것이 이상하고, 부담스러웠다. 친구들과 내기를 한 건 아닐까, 아니면 호기심에 다가오는 것일까.
그래서 건율은 최유헌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가와도 피했고, 모진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분 나쁜 티 하나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었다. 전날 감기에 걸려 조퇴를 한 탓에 종례 시간에 빠졌었다. 그 탓에 건율은 개교기념일인 것을 듣지 못하고 등교를 하고 말았다.
텅 빈 학교에 허망해하고 있을 때, 최유헌이 정문 계단으로 뛰어왔다. 우산도 없이 젖은 채로 뛰어오던 최유헌이 놀란 얼굴로 건율을 보고 물었었다.
‘조퇴해? 어디 아파?’
도대체 왜 비를 맞으면서 왔는지, 학교가 빈 것을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리 물었다. 건율은 최유헌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개교기념일이래.’
‘어? 어어? 진짜? 뭐야, 진짜야?’
‘친구들한테 안 들었어?’
‘어……. 애들이 하는 말은 대충 흘려들어서 몰랐지.’
친구가 그리 많은데 모든 말을 흘려듣는다고? 귀가 있는 한 그러기는 쉽지 않을 텐데.
건율은 진짜 바본가 봐, 하고 생각했다. 저도 멍청하지만 얘는 진짜 뇌를 빼놓고 사는 게 아닐까라는 나쁜 마음도 가졌다.
‘암튼, 가. 학교에 아무도 없어. 문도 닫혀 있고…….’
‘아…. 개허무하네. 야, 나 우산 좀 같이 쓰자.’
‘……너 완전 젖었잖아.’
‘머리만, 머리만 넣게 해 주라. 나 대머리 되면 책임질 거야?’
지가 우산 안 가져온 거면서.
건율은 속으로 툴툴대면서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댓 발 나왔는지 최유헌이 낄낄 웃으며 건율의 입술을 콱 잡아 살짝 흔들었다.
‘장난이지, 뭘 그렇게 삐지고 그래?’
‘안 삐졌어.’
‘알겠어, 알겠어. 암튼 나 우산 좀 씌워 줘.’
하도 들러붙는 바람에 건율은 하는 수 없이 우산을 씌워 주었다. 최유헌은 그때도 키가 커서, 우산대를 놈에게 넘겨야 했었다.
머리만 넣겠다던 놈은 다 젖은 몸을 건율의 어깨에 닿도록 달라붙었다. 우산이 작은 탓도 있었다. 건율은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야, 근데 너 아침 먹고 왔어?’
‘아니……. 왜.’
‘나 배고픈데 떡볶이 먹자. 내가 사 줄게.’
‘너, 젖었는데…….’
‘단골집이라서 괜찮아. 여기 앞에 할머니랑 짱 친해.’
진짜 이상한 애다. 저한테 툴툴거리고, 이렇게 짜증도 내는데 자꾸 친한 척을 하는 게 이상했다.
건율은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최유헌이 워낙 맛깔나게 떡볶이에 튀김, 순대를 묘사하며 보챘다. 그에 입맛이 돌았다.
그게 최유헌과의 시작이었다. 최유헌은 친구가 참 많았다. 그렇다고 그가 학창 시절을 불량하게 보냈다는 뜻은 아니다. 전교권 성적의 학생이었고, 선생님들께도 예쁨을 받았다. 덩치만 보면 매일 싸울 거 같은 아이였는데 그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유헌은 가끔 동생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 주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건 최무정의 이야기였다. 하나뿐인 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 바쁘다거나, 끄떡하면 학교에서 싸우고 온다거나, 그것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둘은 많이 다른 형제였을 것이다.
‘율아, 괜찮아?’
그도 그럴 것이 최유헌은 오히려 건율이 싸움에 휩쓸리면 도와주곤 했다. 서건율은 싸움에 소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만, 성격이 날카로워 제게 들어오는 시비를 그대로 흘려보내질 못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랬다.
‘얘를 왜 때려? 애초에 시비를 털지 마.’
‘서건율 그 새끼가…! 하……. 시발, 최유헌 저 새끼랑 붙어먹기라도 하냐?’
‘말조심해.’
‘아, 나라도 대 주면 하겠다. 어?’
감수성이 예민해질 그 나이대 남자아이들은 누가 건드리면 터질 듯한 풍선과 같았다. 감정적이었으며, 미래보다는 현재를 보는 녀석들이 많았다.
그렇게 싸움이 날 때마다 최유헌이 도와주었다. 건율의 몸에 상처가 사라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최유헌은 아이들에게 ‘건드리면 안 되는 애’로 기억된 듯했다. 최유헌에게 화를 내다가도 그가 무어라 한마디 하면 물러섰었다. 당시 건율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집이 잘살았다거나, 공부를 잘해 특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래서 아이들이 피했던 듯하다.
‘내 동생 있잖아. 그, 맨날 싸움만 한다는 애.’
‘응? 응.’
‘철들었나 봐. 요즘 싸우지도 않고……. 공부도 하고 그래.’
‘그래? 잘됐다.’
언젠가, 최유헌의 단 하나뿐인 고민이 해결되었었다. 저에게만 해 주는 고민 이야기가 사라지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건율은 최유헌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으로 만족했다.
언제부터 최유헌을 좋아했는지는 또렷하지 않았다. 저에게 특별히 다정했기 때문일까? 이유 없이 베풀어 주고, 챙겨 주는 모습이 좋았던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봄비에 젖어 가듯 그의 존재를 느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비에 흠뻑 젖은 채였다.
최유헌을 좋아한다는 걸 완벽히 깨달았을 때는, 수학여행에서였다. 건율은 그와 같은 방을 썼고, 바로 옆자리에 이부자리를 폈다.
건율은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고개만 돌리면 잠에 든 최유헌의 얼굴이 보여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누군가 제 얼굴을 볼까 봐, 그래서 들킬까 봐 이불에 얼굴을 묻고 힐끔거렸다. 그가 푹 잠이 들었을 때 이불 아래로 몰래 손을 잡아 보기도 했다. 최유헌의 손은 따뜻했다. 제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 건율은 최유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최유헌은 그걸 알고 있는 듯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그는 늘 한결같았다. 건율을 챙겨 주었고, 힘들어할 때는 함께해 주었다.
누군가는 그런 둘을 보고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할 만한 더러운 농담이나, 건율이 최유헌의 따까리라는 소문이었다.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건율은 늘 저를 생각해 보는 최유헌이 고마웠고, 최유헌이 부탁하는 것이면 뭐든 했으니까.
* * *
건율은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내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엎어져서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배터리가 10%도 남지 않은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두 형제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건율은 둘 모두에게 연락할 자신이 없어서 핸드폰을 구석에 밀어 두었다.
악몽을 꾸었다. 최무정은 최유헌을 피떡이 되도록 때렸고, 어느새 그 공간은 골목이 되어 있었다. 늦은 밤, 고요한 골목 가운데서 두들겨 맞던 최유헌은 건율 자신이 되어 있었다. 건율은 그걸 멀리서 지켜보았다.
최무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건율의 손을 쥐었다. 손가락을 모두 아작 냈다. 널브러진 자신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호텔 장면으로, 또 골목으로 돌아가기를 수십 번, 잠에서 깼다.
늘 정신없이 살아오던 건율에게 근래의 하루들은 하나같이 이상했다. 최무정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느라 공부도, 연습도 하지 못했다. 레슨에선 교수님께 타박도 들었고 시험은 망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잘한다고 믿은 것도 못 하게 생겼다. 몹시 막막했다.
건율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헐떡이듯 쉬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숨을 쉬는 느낌이 들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지만 그 지점을 안다고 뭐가 달라질까?
건율은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5년 전에는 최유헌이, 그리고 지금은 최무정이 옆에서 자리를 채워 주었다. 저는 혼자서 아무 것도 못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최무정은 다정한 사람이길 바랐다. 억지로 범할 때도, 제 맘대로 할 때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최무정이 최유헌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습은 골목길의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니 자신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도와줄 거라 믿은 사람들이 저를 절벽에 밀어내고 있었다.
“헉……. 허억, 흡……. 하아, 하…….”
건율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가다듬었다. 죽을 만큼 숨이 막히는데, 죽지는 않았다. 멍하니 자취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낡고 작은 월세 방이 오늘따라 초라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건율은 침을 삼키고, 인상을 찌푸렸다. 눈가에 눈물이 울컥 고였다.
“……흐으, 흑……. 흑, 흐으…….”
힘든 일은 많았다. 지금까지, 한두 번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건율은 죽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나, 지금은…….
“죽고 싶어.”
오늘은 달랐다. 건율은 제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는 짐이 되었고, 이제 학교는 휴학이든 자퇴든 해야 할지도 모른다. 4년만 버티자고 생각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평생 피아노를 쳐 왔지만, 앞으로도 건반을 만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건율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지 말 걸 그랬다. 머리가 나빠 공부도 못 하고, 할 줄 아는 건 피아노밖에 없으면서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죽어라 미친 듯이 연습해야만 타고난 애들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아예 천재로 태어나지. 돈도 환경도, 또 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서 무엇 하겠는가.
건율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최무정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다. 제 스토커라는 남자에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제가 뛰쳐나온 뒤로 최무정이 최유헌에게 맞진 않았나 걱정되는 것이었다. 우스운 감정이었다.
똑똑.
그 생각을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건율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하지 않자, 현관문 너머의 누군가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문을 두드렸다.
쿵! 쿵!
건율은 그럼에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온몸에 기력이 없었다. 이대로 가루가 되었으면 싶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최무정은 장례식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대로 저 할 일 하고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
쾅! 쾅! 쾅!
두드림이 점차 거세진다. 건율은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주저 없이 도어락을 풀자, 곧장 문이 열렸다.
“선배.”
최무정의 꼴이 엉망이다. 아무래도 건율이 걱정했던 것처럼 맞은 모양이다. 최유헌이 더 심각한 걸 알면서도, 건율은 손을 뻗어 최무정의 뺨을 툭 건드렸다. 벌겋게 부은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치길 바란 건 아닌데, 다친 걸 보니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선배는 나 좋아하죠?”
“무정아.”
“나 좋아한다면서요.”
“왜…… 나 알면서 모르는 척했어? 왜, 나…… 스토킹 했어?”
“형이 다시 좋아졌어요? 선배가 최유헌 전화 기다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
“너는 도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현관문 문턱을 중심으로 두 사람은 말을 뱉었다. 최무정은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고, 건율도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형은…. 형은, 항상 선배 옆에 있었잖아요.”
“무정아, 내 말 좀.”
“근데 그렇게 선배를 떠나 놓고, 다시 와서 선배 옆에 있겠다는 건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그게…….”
피곤했다. 건율은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 쓸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을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난 선배 좋아해요. 너무너무 좋아해요. 진짜로요.”
“…….”
“선배도, 나…… 좋아하죠? 그러니까 나랑 사귀고, 같이 자고, 있어 주고 그랬잖아요.”
“무정아, 제발.”
“나랑 섹스 하는 것도 좋아하잖아. 나 좋아하잖아요.”
“내 얘기 좀 들어 봐, 무정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더라? 무정이에 대한 의심이 생기면서…… 최유헌을 만나서? 아니다, 모르겠다. 최유헌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옛정, 그리고 미련뿐이었다. 그에게 갖고 있는 과거의 환상, 잔흔이 저를 덮어 둔 것이다.
최무정을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최유헌은 과거였고, 최무정은 현재였다. 그리고 이 관계는 처음부터 비틀어져 있었다.
“나 좋아서 사귄 거잖아요…….”
최무정이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지금은 그를 안아 줄 수 없었다. 그가 좋아서 사귄 게 아니니까. 최무정은 건율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의 문제도 건율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 비틀어진 관계를 풀어야 했다.
그러나 건율은 지쳐 있었다.
“무정아.”
“…….”
최무정이 울고 있었다. 퍽 어울리진 않았다. 덩치는 산만 해서,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으니까.
건율은 한처럼 가슴에 맺혀있던 말을 손에 쥐었다. 그럼에도 망설여져 입술이 벌어지질 않았다. 어쩌면 최무정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될까 봐.
“선배, 왜요……. 뭐가요.”
답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물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건율은 지금, 비가 오는 건 아닐까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최무정 너머의 좁은 하늘은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맑은 햇살이 반짝반짝 빛났다. 꼭 윤슬처럼 바람이 느긋하게 흘렀다.
비 좀 와 주지.
“나…….”
최무정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무정은 제게 왜 이럴까. 왜 하필 제게, 안 그래도 너무 바쁘고 힘든 제게……. 왜.
“너랑 사귄 적 없어. 모르겠, 어? 우리가 언제…… 고백하고, 사귀었어.”
“……네?”
“일단… 가 줘. 나 지금 너무 피곤해.”
최무정이 고개를 들었다. 새까맸다. 현관 등이 꺼져서인지, 그의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서인진 알 수 없었다. 다만 흘렸던 눈물 자국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최무정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건율을 내려다보았다. 최무정은 키도, 덩치도 큰 데다 생긴 것도 덤덤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크게 느껴지질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고, 작은 아이였다.
“그니까, 가 줘.”
말을 뱉을 때마다 가시를 토해 내는 기분이다. 심장 아래에서 튀어나온 덩어리가, 가시가 되어 입 안을 모조리 찌르고 튀어 나갔다.
건율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처음으로 그를 밀어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가, 무정아.”
건율은 딱딱하게 굳은, 그리고 초점을 잃은 눈의 무정을 밀어내야 했다. 그는 힘없이 밀려났다. 이전과는 다르게 건율의 작은 손짓에도 툭, 하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힌다. 건율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서 울었다. 왜 우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지금 행동이 잘한 짓인지도 모르겠고, 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후회스러웠다. 최무정을 만난 모든 시간이. 그를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평소와 같았을 것이다.
‘총각, 여기서 뭐 해요?’
문 너머로 집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율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다 현관 쪽을 힐끔거렸다.
‘어제, 그… 새벽부터 있지 않았어요? 여기 사는 사람 아니면 나가요. 요즘 안 그래도 흉흉한데 이런 데 있지 말고.’
‘……려요.’
‘뭐라구?’
‘기다려요, 사람.’
잠시간 말이 없었다. 건율은 익숙한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 여기 102호 학생?’
‘네.’
‘학생 안에 있을 텐디 문 두드려 봐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슬리퍼 소리가 몇 번 지익, 지익 들렸다가 사라진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짧게 숨을 뱉었다. 눈앞이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건율은 도어락으로 손을 뻗었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털며, 짐을 챙겼다. 가방에 악보와 전공 서적, 노트를 집어넣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몇 번 훑으며 물기를 털어 냈다. 방바닥이 찼다. 건율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머리를 적당히 말리고 짐도 다 챙겼다. 건율은 현관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8시였다. 일찍 가서 연습실을 빌릴 생각이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문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 아는 것이다. 최무정.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젯밤 그대로 집에 간 줄 알았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 있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하…….”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건율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손끝이 저려 온다. 건율은 저를 응시하는 최무정을 피해 몸을 틀었다.
“선배, 좋은 아침이에요.”
“…….”
“오늘 수업 가시죠? 일찍 출발하시네요. 연습실 쓰러 가실 거죠?”
손목이 잡혔다. 건율은 팔을 비틀어 빼냈다. 최무정은 손에 힘을 들이지 않으면서, 건율이 밀어낼 때마다 다시금 손을 뻗었다. 잡고 잡히는 싸움이 몇 번 반복되자, 건율은 먼저 포기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선배가 어제 그랬잖아요. ‘지금은’ 힘들다고. 오늘은 괜찮으니까 말해 주세요.”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당장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건율은 잡힌 손목을 한 번 내려다보고, 최무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뭘?”
“어제 물었잖아요. 나 안 좋아하면….”
“잠깐. 여기 집 앞이잖아. 다른 데 가서 얘기해.”
최무정은 불만인 눈치였으나 건율에게 따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지금 그가 따져서 좋은 건 없었다. 건율은 최무정을 다시 보면 무너질 줄 알았다. 다시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고, 제 삶을 또 잃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최무정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좀 미친 새끼였다.
둘은 최무정이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 이동했다. 물론 건율은 그 차를 탈 생각이 없었다.
“타요, 선배.”
“여기서 얘기해.”
“차에서 얘기해요. 누가 우리 얘기 듣는 게 싫어서 온 거 아니에요?”
최무정이 뒤쪽을 눈짓했다. 건율은 뒤를 돌았다가, 집주인 아들이 설렁설렁 편의점을 가는 걸 보았다. 결국, 건율은 최무정의 차에 탔다.
“춥죠? 히터 좀 틀까요?”
“됐어. 금방 내릴 거니까.”
“추운 거 알아요. 담요도 덮어요.”
무릎 위로 보송보송한 담요가 놓였다. 최무정은 히터를 틀고, 차 문을 모두 잠갔다. 건율은 무어라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이리저리 휩쓸렸을 뿐이었다. 자신만 중심을 잘 지키면, 괜찮았다.
“나 너 안 좋아해.”
“……네.”
시무룩한 대답에 건율이 놈을 힐끔거렸다. 최무정은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싫어. 너 보는 거, 싫어.”
“그렇게 싫어요? 왜요?”
이유를 물으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건율은 시선을 피했다. 단지 문고리를 잡고 나갈 준비를 했다.
“최유헌한테 마음이 갔어요? 다시 좋아졌어요?”
“…뭐?”
“그 새끼랑 한 번 하니까 좋았어요? 그 새끼가 이제 와서 사귀자고 말하기라도 했어요? 그게 아니면 갑자기 선배가 이럴 리가 없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건율은 허탈한 마음에 숨을 세차게 뱉었다.
“하……. 유헌이가 왜 나와?”
“그게 아니면 뭔데요. 선배가 나한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껏 정면을 보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돌리고, 팔을 뻗어 성큼 다가왔다.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최무정이 가까이 갈수록 건율이 뒤로 몸을 물리자, 최무정은 비뚤어진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가 한 번은, 봐줬잖아. 선배가 최유헌 만난 다음 날 갑자기…… 강의실에서, 나 두고 도망쳤잖아.”
최무정은 문고리를 쥔 손목을 억세게 쥐었다. 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을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 윽……! 아, 파!”
“그러다 지금 또 최유헌이랑 떡 치고 씨발.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야.”
잡힌 손목이, 그리고 숨통이 쥐어짜지는 것만 같다. 애써 참아 온 것이 무색하게 무너질 듯했다. 건율은 시선을 피하며 주먹을 쥐었다.
“이거… 놔. 아프다고 했잖아.”
“내 질문에나 답해요.”
“…네가, 네가 이러는 게 싫어. 네 멋대로 하는 게 싫다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낮은 저음이 진동하듯 귓가로 파고들었다. 건율은 터질 듯이 뛰어 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까지 주먹에 힘을 주었다.
“선배는 이제 내 거잖아요. 근데 왜 딴 새끼랑…!”
“야, 최무정!”
고함을 치는 최무정이 지긋지긋해서, 건율은 저도 모르게 화를 냈다. 시선은 여전히 아래로 고정돼 있었고, 놈에게 몸이 짓눌려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최무정의 손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손목이 시뻘겠다.
“내가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내가 왜 네 거야?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생각해.”
“씨발, 지금 이기적으로 구는 게 누군데요? 바람피워 놓고 나 버리려는 게 누군데?”
“애초에 너랑 사귄 적 없다고 어제 말했잖아. 왜… 왜, 내 말을 듣질 않아!”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최무정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건율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손목을 억세게 쥐고 가파른 중턱을 오른 것처럼 숨을 내뱉었다.
“그래, 나 유헌이 좋아해. 이렇게 말하면 빠져 줄 거야? 꺼져 줄 거냐고. 지긋지긋하니까 제발, 그만 좀 해. 너랑 나랑 사귄 거, 다 너 혼자 미쳐서 지랄한 거잖아. 섹스도 맨날, 싫다는데 억지로 했잖아. 너랑 하는 거 역겨워. 너 같은 미친 새끼랑 누가 섹스 하고 싶겠냐고.”
물이 가득 찬 풍선에 구멍이 난 것처럼, 졸졸 새던 물은 이내 펑 하고 터졌다. 건율은 최무정에게 억지로 당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해 달라고 했다. 싫다고 빌었는데, 놈은 건율이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어느 순간 사귀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처럼, 최무정의 환상 속 서건율은 건율이 아니었다.
“너도 날 좋아하는 거 아니야. 대체 왜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스토커 짓을 했는지 몰라도 너 그냥, 혼자 한 거야. 지금까지 다!”
울분에 찬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건율은 모두 뱉어 낸 뒤, 숨을 몰아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잡히지 않은 손목으로 차 문고리를 잡아당겼다가, 잠긴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건율.”
“…윽!”
“그래서, 형이 좋다고?”
때마침, 이라고 해야 할까. 창밖에서 툭, 툭 하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차 앞 유리 위로 동그란 빗물이 말갛게 맺혀 길게 흘러내렸다. 건율은 다시금 조여 오는 손목의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최무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건율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꺾었다.
“헉, 흐윽…. 이거, 놔….”
“선배, 난 늘 선배 생각하는 거 알잖아. 다 선배를 위한 말인 것도 알잖아. 근데 왜 내가 선배랑 억지로 했다고 생각해요. 선배도 좋다면서요.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딴 놈이랑 들러붙고 내가 싫다고? 씨발, 그냥 존나 발정 난 거 아니고?”
“아으, 흐, 뭐… 뭐 하는, 거야… 하, 하지 마!”
“선배가 너무 힘들어해서 난, 참아 준 건데. 아예 그냥 선배 구멍에 좆 끼우고 다니고 싶은 거 내가 참고, 산 건데.”
차 시트 위로 몸이 짓눌린다. 최무정은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붙잡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건율은 벌벌 떨면서 차 문고리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덜컹덜컹, 무의미한 소음이 건율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점차 느릿해진다.
“그래, 이럴 리가 없지. 선배가… 지금 이러는 거. 다 최유헌이 시킨 거죠? 응? 최유헌이 뭐라고 협박했어요? 내가 그보다 더하면 나하고 있어 줄 거예요? 선배 손가락, 다 부러트린다고 협박이라도 했어? 그럼 나는 팔다리를 아작 내 줄 수 있어요. 선배, 내가 더 선배 사랑하는 거 알잖아요.”
건율의 낯이 시퍼렇게 물들어 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최무정이라면 진심이었고, 진심으로 그렇게 할 생각이 있는 듯 보였다. 그는 건율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놈의 커다란 어깨가,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다시 말해 봐요. 아까 했던 말, 진심이면 다시 해 보라구요.”
하체가 모두 드러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찬 기운에 피부가 오소소 돋아났다. 최무정은 벌게진 눈으로, 숨을 몰아쉬며 건율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건율은 그제야 자신이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말할 자신이 없다. 손목이, 손가락이 모두 으스러질 것만 같아서 두렵다. 차 안은 다시금 골목길이 되어 어둑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눈을 감자, 제 가슴에 뺨을 대고 웃음을 터트리는 최무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전희도 없었다. 최무정은 짐승처럼 건율의 탐하고자 했다. 건율은 주먹을 쥔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씹…….”
뻑뻑하게 마른 구멍에 억지로 쑤셔 넣으려니 들어가질 않는지, 최무정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보조석 서랍을 뒤적여 로션을 꺼냈다. 하얀 크림이 커다란 손 위에 왈칵 쏟아졌다. 건율은 거대한 돌에 짓눌려 죽어 가는 사람처럼 늘어졌다.
저보다 20cm는 큰 녀석을 이길 자신도 없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바보 같았다. 왜 차에 올라탔을까? 왜 대화를 하자는 말에 곧이곧대로 따라왔을까. 멍청했다. 하긴 이러니 최무정에게 끌려다닌 것이겠지.
“흐…….”
차가운 로션이 아래에 닿았다. 최무정은 아무렇게나 구멍에 로션을 문질러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마구잡이로 욱여넣어 안을 휘젓는다. 아무런 감정 없는 움직임에 괜히 서러움이 밀려 올라왔다.
이것이 그간 그와의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제가 고개를 끄덕였어도 원치 않았던 섹스였고, 지금은 묻지만 않았을 뿐, 하기 싫은 건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지금이 더 서러웠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최무정의 말을 듣지 않아서, 제가 나빠서….
“아, 아윽! 으, 흐윽…. 악!”
“씨, 발…. 힘 좀, 빼요.”
“흑, 흐윽, 윽, 아, 아파…. 아파!”
“아다처럼 굴지 말고.”
입구에 단단한 것이 닿자마자 거칠게 내벽을 가르며 들어섰다.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에게 처음, 사진이 가득한 방에서 당했던 때보다 더욱더 아팠다. 투득, 하고 아래가 찢어져 피가 엉덩이 골 사이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끅, 흐으, 끅, 끅, 흡, 흐윽….”
“하아, 하……. 시발, 형이랑 구멍 동서 됐네. 좆같게.”
“안, 했…. 끅, 흑! 악! 아윽, 아!”
이런 타이밍에, 자꾸만 최유헌과 잤다고 생각하는 게 억울했다. 건율은 꾹꾹 눌러 참은 목소리로 벌벌 떨었다.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든 최무정의 무게가 무겁다. 놈은 간격을 좁혀 건율을 오롯하게 내려다보았다.
“안 잤다고?”
“흐윽, 아, 안 했…어, 안 했다고…….”
눈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건율은 처절하게 울었다. 지금껏 최무정과의 관계에서 서럽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더욱 그러했다. 건율은 밸도 없이 사과를 뱉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미아…. 미안, 해…. 안 했, 어…. 흑, 아파, 아프니까…. 그만, 그만…. 아윽!”
“하…….”
최무정이 차가운 눈으로 건율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간 말이 없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폭력적인 행위였다.
섹스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건율은 울며 그만해 달라고 빌다시피 했지만, 최무정은 건율을 짓누르며 계속해서 허리짓을 했다. 좁은 구멍 사이로 성기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속살을 파헤쳤다. 성기가 내부로 들어올 때마다 온몸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억지로 느껴지던 쾌감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흐으, 흑, 아, 아윽! 으, 흡, 악!”
“좀 닥쳐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핏줄이 잔뜩 불거져 성난 좆이 음부를 드나들며 마찰을 일으켰다. 아래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찢어진 부위도 너무 아프고, 최무정의 말도 너무 아팠다. 매몰차고 무신경한 눈빛이 닿을 때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차 안을 건율의 외마디 비명과 살과 살이 부딪치는 음탕한 소리가 가득 메웠다. 건율은 입술을 말아 물고 소리를 참았다. 굵직한 귀두가 안쪽 어딘가를 건드릴 때마다, 원치 않게도 제 성기가 단단해지는 것이 수치스럽고 역겨웠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싫다, 이런 건 너무 싫었다.
억눌린 목소리로 신음을 흘릴 때마다 최무정은 더욱 강하게 찍어 눌렀다. 묵직한 성기가 내부를 가득 채웠다. 건율은 힘없이 흔들거리는 제 다리를 보았다. 소리 없이 흐른 눈물이 셔츠 자락을 축축하게 적셨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옥같이 길던 행위가 끝이 났는지, 최무정이 성기를 깊게 묻고 열기를 띤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로션과 피, 그리고 쿠퍼액으로 축축해진 아래가 눅진하게 풀어져 성기를 물었다. 그는 건율의 허리를 붙잡고 그대로 자신의 씨를 뿌렸다.
“…후… 선배….”
최무정이 눈을 감으며 건율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건율은 우느라 빨갛게 물든 눈으로 최무정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성기를 묻은 녀석은 싼 직후에도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부에 왈칵 흘러내린 정액이, 무거운 성기가, 그리고 이제 와 저를 안아 주는 최무정이 너무나 미웠다.
건율은 고개를 떨궜다. 조수석 바닥으로 떨군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 새까맸다.
“…선배, 많이 아팠어요? 미안해요. 너무 화나서… 그랬어요. 안 한 거 진짜죠? 다행이에요, 정말로.”
가슴께에 닿은 입술이 움직이는 게 선명하다. 건율은 다정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조수석 구석에 떨어진 커터칼을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바닥에 놓인 검푸른 커터 칼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가 나질 않았다. 건율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다행이다…….”
툭, 툭, 툭. 커터 칼의 심이 조금씩 위로 솟았다. 끝이 날카롭게 서려 있었다. 건율은 선택해야 했다. 지금껏 악바리처럼 지켜 온 자신의 삶과, 최무정이란 인간을 두려워하며 휘둘리게 될 앞으로의 삶 중에서.
우습게도 최무정에게 반항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가 잘못한 건 없다고, 모두 제가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난 거라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질문을 강요한 제가 잘못이라고.
“…선배?”
고개를 든 녀석이 의아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순순히 받아들이던 건율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 저리 가.”
건율은 울음을 참아 가며 두 손으로 커터 칼을 쥐었다. 손과 팔이 눈에 띄게 경련하고 있었다. 둘 사이 정적이 감돌았다.
“선배, 위험하니까 내려놔요. 손 다쳐요.”
“저리, 가라고… 했어.”
최무정은 말없이 건율의 아래에서 성기를 빼내며 바지춤을 정리했다. 건율은 흘러내린 바지를 올릴 생각도 못 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커터 칼을 최무정에게 들이밀었다.
“이, 이번엔 내가 싫다고…. 싫다고 했잖아. 아프다고…. 하지 말, 라고 했잖아.”
“…….”
“왜 자꾸, 너는… 내 말을, 안, 안 들어. 네가 나… 빠. 내 잘못이, 아니, 야.”
고통이 응어리져 눈물로 새어 나왔다. 건율은 벌벌 떨면서도 최무정의 얼굴에 커터 칼을 들이밀었다. 놈은 그럼에도 뒤로 물러서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못… 찌를 거 같아?”
“찔러요.”
“뭐?”
“찌르라고요.”
최무정은 마치 건율이 찌를 수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반쯤 뜬 두 눈이 저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건율은 생각했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듯했다.
그때, 최무정이 손을 뻗었다. 건율이 놀라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뺨을 가득 적신 눈물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건율은 도리어 제가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손으로 커터 칼을 휘둘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 아니라, 위협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손끝에 이상한 감각이 닿았다. 커터 칼의 끝이 살아 있는 살결을 스치는, 끔찍한 느낌.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따뜻한 손이 뺨에 닿았다. 굵은 손가락이 뺨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 냈다.
“왜 이렇게 울어요. 많이 아팠어요?”
“…너, 너….”
“왜 우는 거예요? 차에서 하는 건 싫었어요? 아니면 많이 안 풀어 줘서 그래요?”
최무정은 영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돌처럼 단단하게 보였던 최무정의 뺨에서 피가 흘렀다. 제법 길게 찢어졌는데, 놈은 건율의 뺨을 쓸어내리며 걱정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가 나한테… 이렇게 할 정도로 최유헌이 좋아요?”
“…흡… 끅, 소, 손 치워.”
“내가 뭘 더 해 주면 돼요?”
“꺼, 꺼져. 다신, 다시는 찾아오지 마.”
눈물은 소나기처럼,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다. 닦는 것이 소용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달칵, 하고 락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최무정은 건조한 얼굴로 건율을 쳐다보았다.
“학교… 데려다주면 싫어요?”
건율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엉거주춤 바지를 올려 입었다. 한 손은 여전히 커터 칼로 최무정을 겨눈 채였다. 놈의 뺨에서 피가 너무 많이 흘렀다. 살짝 스친 것이 아니었다. 꽤나 깊게 상처가 났는데, 그게 자꾸 눈에 밟히는데… 정작 본인은 건율에게 묻기만 했다.
미친 새끼, 미쳐도 한참 미쳐 버린 새끼. 또라이 새끼…….
건율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러다 최무정이 부축이라도 할까 무서워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억세게 쥐었던 커터 칼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최무정의 얼굴은 온통 피로 범벅돼 있었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어떤 의미로 무서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건율은 제 숨을 달래며 걷기 시작했다.
열린 보조석 문 너머로, 최무정이 저를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한순간에 뒤바뀐 태도가 이상하고, 괴이하다. 조금 전까지 화를 내며 저를 억지로 범하던 녀석이 버려진 짐승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손끝에 살 끝을 그은 감각이 남아 있다. 건율은 계속해서 울었다. 최무정이 저를 볼 수 없을 때까지, 벽에 몸을 기댄 채로 걸음을 옮겼다.
* * *
강의가 끝난 뒤 건율은 최유헌이 보내 준 주소로 향했다. 병원 주소였다.
511호.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머릿속이 새하얬다. 아침 연습은 당연히 집중할 수 없었고, 강의 시간 내내 아래의 통증과 최무정에 대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최무정은 오늘 모든 강의에 오지 않았다. 오전 강의에 오지 않은 걸 봤을 때는 안도했고, 오후 강의에도 오지 않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빠지면 성적이 안 좋을 텐데…… 같은, 우스운 생각도.
‘선배, 최무정 오늘 왜 안 왔어요?’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집에 가려는 찰나, 최무정과 같이 다니던 무리가 다가왔었다. 그들의 물음에 건율은 조금 당황했다.
‘왜 나한테 그걸…….’
‘요즘 선배랑 다니지 않았어요? 야, 선배도 모르시나 보다.’
‘아……. 응, 모르겠다.’
‘네, 감사해요, 선배.’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같이 다녔었나? 건율은 어쩐지 조금 민망해졌다. 그리고 마저 짐을 챙기는데 최무정의 친구들이 이리저리 떠들다가 ‘아!’ 하고는 건율에게 다시 다가왔다.
‘선배, 중간고사 끝난 김에 과 모임 있는데 오실래요?’
‘과 모임?’
‘네, 내일이요.’
내일이면 금요일이었다. 건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내일 말해 줘도 될까?’ 하고 물었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모임은 매번 빠지곤 했다. 신입생 환영회처럼 교수님들이 참여하시는 게 아니라면 더욱더 그랬다. 그럼에도 잠시 고민한 건, 최무정은 그 자리에 올 것 같아서였다.
“저…… 죄송한데, 511호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아, 왼쪽으로 쭉 가셔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엘리베이터 나와요. 오른쪽 거 타고 오셨어요?”
“네…….”
“좀 헷갈리죠, 병원이. 병동이 따로 나뉘어 있어서……. 암튼 저쪽으로 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그, 짝수 층 엘리베이터 말고 홀수 층이라 써 있는 걸로 타셔야 해요.”
“네. 감사합니다.”
건율은 친절한 간호사에게 고개를 몇 번이고 꾸벅였다. 얼굴에 길치라고 써 있기라도 한가.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걸 어떻게 알았지?
간호사 말대로 왼쪽으로 쭉 가다 보니 엘리베이터 표지판이 보였다. 건율은 홀수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춥다.
가을이 시작되었을 즈음에 최무정을 만났는데, 벌써 겨울이 오나 보다. 그때는 어땠더라. 마냥 놈이 무서워 피해 다녔는데……. 그때 그 1학년, 이제는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녀석이 골목길에서 맞는 장면은 아직도 지워지질 않는다.
어제 꿈에서도 나왔다. 골목길에서 최유헌이 최무정에게 흠씬 두드려 맞았다. 그리고 유헌이는 팔다리가 꺾여 기괴한 꼴로 고개를 들었었다.
‘건율아, 율아. ……왜 나 버리고 갔어?’
땡.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건율은 움칠거리며 고개를 들었다가, 한숨을 쉬며 그 안에 올라탔다. 작은 엘리베이터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네모난 칸 안엔 팽팽한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산책 나온 환자거나,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건율은 고개를 돌려 거울을 흘겨보았다. 퇴색되었다. 시간이 지나 누렇게 변질된 병풍처럼, 죽은 얼굴이다. 건율이 피아노를 선택한 건, 이런 제 얼굴을 보기 싫어서였다.
피아노를 치지 않는 자신은 늘 죽어 있곤 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짓눌려 햇빛을 먹지 못한 채로 시들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음이 연결되어 음률이 될 때마다, 그 곡조에 저를 맡기고 하나가 될 때마다… 건율은 다른 삶을 사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래, 음악이 지닌 그 삶을 말이다.
- 5층입니다.
“잠시만요, 내릴게요.”
건율은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왔다. 511호는 복도 끝에 있었다. 문 앞까지 왔는데도 망설여졌다. 그날, 그 호텔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최무정이 유헌을 때리는 데도 건율은 가만히 있었다. 말리지도 못하고 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도망갔다. 꼭 골목길에서처럼.
죄책감이 수선스럽게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건율은 문에 붙어 있는 ‘최유헌’이란 이름을 쳐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자.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누….”
“왔어?”
최유헌이었다. 이곳저곳 상처가 난 얼굴이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최유헌은 건율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끼이익, 문고리가 돌아갔다.
“들어와. 1인실이라…… 나밖에 없어.”
“응…….”
막상 마주하니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최유헌은 좋아했던 사람이었지만, 그 이전에 제게 다가와 준 친구이기도 했다.
“뭘 그러고 있어? 여기 앉아.”
최유헌이 침대 옆 의자를 두드렸다. 그는 자연스레 제 침대에 앉으며 눈을 접어 웃었다.
“나 괜찮아. 네 탓도 아니고.”
“……안 괜찮잖아. 내 탓이잖아…….”
“하하, 뭐… 말리는 시늉도 안 한 건 조금 상처였어, 율아.”
인과응보다. 제가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었다. 건율은 짓누르는 죄책감에 말을 잇질 못했다. 최무정과 저와의 일이니 유헌이를 끼게 해선 안 됐는데. 무심코 학창 시절의 버릇이 나와 버렸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최유헌을 찾는 나쁜 습관.
“그래도 네가 안 다쳐서 다행이야.”
“…….”
“진심이야, 표정 풀어. 응?”
“……미안. 나 때문에…….”
“그렇게 미안하면 나 수발 좀 들어 주라, 율아. 나 한국에 친구 너밖에 없어.”
최유헌이 손을 붙잡아 왔다. 늘 거칠던 손바닥이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굴곡져 있었다. 외국에서 고생했나? 집에 돈도 많고, 똑똑하니까 잘 지냈을 줄 알았는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건율은 최유헌의 손을 외면하지 못하고 맞잡았다.
“해 줄 거지?”
“응, 매일 병원으로 올게.”
“여기서 자면 안 돼? 침대 하나 더 들여 달라고 할게.”
“……어, 음…. 학교 가야 하는데…….”
“그래?”
최유헌이 눈을 맞댔다. 조금 전까지 아이처럼 조르던 표정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는 최무정과는 달랐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던 동생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나 팔 다쳐서 왼손으로 밥 먹어야 하는데, 율아.”
“오, 오른팔 다쳤어?”
“응. 간병인도 없고……. 너 늦게 오면 나 아침은 어떻게 먹을까?”
건율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눈을 내리깔고, 빠르게 깜빡이며 궁색한 변명을 떠올렸다. 이번 시험을 망쳐서, 성적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할까? 이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하지만 유헌이는 나 때문에 이렇게 다쳤는데. 고작 성적 때문에 친구를 밀어내는 건.
“…됐어. 아침 안 먹으면 돼.”
“유, 헌아.”
“아니면 빵으로 때우지, 뭐. 의사가 밀가루는 먹지 말랬는데.”
“잠깐…. 생각, 생각한 거야. 괜찮을지…….”
황급히 더듬거리며 손을 잡자, 유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래서, 괜찮아?”
“……으응. 여기서 학교 가면 되니까.”
“그럼 나 점심은?”
“…….”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학교를 모두 빠질 수는 없었다. 근데 유헌이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건율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헌이 양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소리 없이 웃었다.
“괜찮아, 율아. 점심에만 간병인을 구해 볼게.”
“……미안해.”
“어쩔 수 없지. 성적이 중요하잖아, 너.”
“으, 응. 이번에 시험도…… 망쳐서.”
“어쩌다가?”
“그냥.”
최유헌은 잔뜩 주눅 든 건율을 제 옆으로 끌어와 앉혔다. 창가에서 주홍빛 햇빛이 건율의 한쪽 뺨을 붉혔다. 유헌이 고개를 기울여 빤히 보고 있는데도 건율은 눈치채지 못하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벌써 따먹혔겠지? 그렇게 구는 걸 보면, 분명 몇 번이고 해 댔겠지.
건율은 얼굴이 작고, 창백하며 몸은 여물지 않은 열매처럼 소년과 같았다. 부드럽게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처음 이 녀석이 제게 볼을 붉혔을 땐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역겹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별건 아니었지만, 유헌은 친구들과의 내기가 끝났을 때도 건율을 계속 데리고 다녔다.
유헌의 친구들은 예쁘장한 얼굴에 경계심이 짙은 건율을 건드려 보고 싶어 했고, 최유헌은 기고만장하게 제가 골려 주겠다고 말했었다.
한데 서건율은 의외로 초반의 경계심만 짙을 뿐, 벽이 무너진 후로는 꽤 유순한 편이었다. 물론, 자신에게만.
‘유헌아, 나…… 이번에 성적 조금 올랐어.’
‘뭐? 진짜? 공부 지지리도 못하던 게 어떻게 올랐대?’
‘저번에 네가 알려 줬잖아. 그거 덕분이야.’
헤벌쭉 웃는 얼굴이 점점 재밌다고 느껴졌었다. 사랑에 빠진 얼굴이 너무 티가 나서, 제 나름대로 숨기려는 노력이 어쩌면 귀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제게만 벽을 허물고 아이처럼 구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었다. 제 부모에게도 어른스러운 척, 괜찮은 체하며 뻣뻣하게 굴다가도 저만 보면 속내를 털어놓았으니까.
그것은 저만이 느낄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자만했던 걸지도 모른다. 최유헌은 저에게만 반응하고, 저에게만 눈길을 보내오는 건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유학을 가는 날에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에 웃음이 났다. 저에게 고백이라도 할 생각인지, 우물쭈물 거리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5년 내내 제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서, 굳이 녀석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받지도 않았고.
한데 그 열매가 여물어 가는 사이, 최무정이 익지도 않은 것을 따 갔다.
“건율아.”
“…….”
“율아?”
“…아! 어? 미안. 잠깐 생각…했어.”
“응, 율아.”
건율은 잔뜩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유헌이 저를 부른 모양이다.
진한 노을빛이 병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제 앞에 앉은 최유헌의 낯도 불그스름하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건율은 눈을 맞추려다, 다시 시선을 내리고 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작은 턱을 커다란 손이 움켜쥐어 당겼다.
“아……! 유, 유헌아?”
“율아, 있잖아.”
“으, 으응…….”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건율은 어깨를 움츠리고 침을 삼켰다.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봐봐.”
“……응.”
시선을 맞추자 눈가를 누그러뜨린 최유헌이 보였다. 제가 좋아하던 얼굴이다. 상냥하고 친절하며, 부드러운 미소. 적당한 크기에 늑대처럼 거칠게 올라간 눈꼬리와 짙은 눈썹, 곧고 높은 콧대 아래로 부드럽게 올라간 입술.
건율은 마른 입술을 훑었다.
유헌이가 왜, 이러지?
“나 유학 갈 때, 너 나한테 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던 거 기억나?”
기억난다. 여러 번 곱씹었으니까.
“아……니.”
건율은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그가 그때를 기억할 줄도 몰랐고, 이야기를 꺼낼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던 탓이다. 건율은 벌렁거리는 심장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싶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난 기억나. 내가 기다리던 말을 네가 할 거 같았거든.”
차마 뱉지 못한 고백은 울렁대며 목구멍 너머로 삼켜졌다. 최유헌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서, 이기적으로 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용기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다. 제 감정을 갈무리하듯 그렇게 가슴 안에서 죽여 나갔다.
건율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던 참이었다. 최유헌이 손에 힘을 줘 턱을 다시 한번 당겼다. 입술 위로 미적지근하고, 말랑한 감촉이 닿았다.
“나도 너 좋아해.”
어리고 풋풋한 새싹과 같은 키스였다. 맞댄 채로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는 탓에 입술이 간질간질했다. 유난히도 돋우어진 최유헌의 양 뺨이 낯설었다. 노을의 색인지, 그의 낯이 붉어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건율은 수백 개의 나뭇잎 사이로 흐드러진 햇빛처럼 눈을 잘게 떨었다. 흩어진 생각이 한데 모이질 않았다.
“너도 나 좋아했잖아.”
머리가 함박같이 부풀어 터질 듯했다. 건율은 길게 드리워진 제 그림자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숨소리가 들릴 만큼 몸을 가까이 한 최유헌이 속삭였다.
“빨리 돌아오고 싶었어. 네 연락을 받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받을 수 없었어.”
“……아.”
“그날 네가…… 말, 하면.”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엇갈린 것이 감정인지, 시간인지, 그와 자신인지. 혹은 자신이 엇갈렸다 생각하는 것인지, 엇갈린 것이 맞는 것인지. 엇갈렸다면 자신은 지금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손끝이 초조하게 말려 들어갔다. 관절 마디마디가 저릿저릿하다. 건율은 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오는 커다란 손을 차마 밀어내지는 못했다.
“말하면……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어.”
“…….”
“둘이 같이 가서, 예쁜 곳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었어.”
노을은 지는데, 최유헌 너는 햇살같이 웃는다.
“변하지 않았지?”
“…….”
“나랑 사귀자. 최무정한테서 지켜 줄게.”
마음을 동강동강 잘라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에는 최유헌 너를 좋아했던 마음을 잘라 내고, 지금은 너 외의 것을 잘라 내는 것이다. 정말 너도 나를 좋아했던 걸까. 사실이라면, 네가 나를 이렇게 볼 적에 알아챘더라면 좋았을까.
“율아?”
최유헌이 답을 재촉하듯 건율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건율은 입술을 앙다문 채로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감정을 떠나, 지금의 상황만 본다면 당장 도와달라고 매달려도 모자랐다. 지푸라기가 아니라, 황금 동아줄이 내려온 것을 붙들기는커녕…….
“나…… 사귀, 는 사람 있는 거 알잖아.”
그 과정이 진실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건율에겐 최무정이 있었다. 둘의 문제였으며 최유헌이 더 이상 끼어들어선 안 되었다.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견딜 수 없이 긴장되었다.
“최무정?”
끝내 최유헌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건율은 입술을 뜯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1인 침대에 비좁게 붙어 앉은 것이 이제야 신경이 쓰였다. 건율은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최유헌의 눈치를 봤다.
“최무정……. 그게 나랑 사귀는 데 문제가 돼?”
“응?”
“나 없는 사이에 마음이 변했어, 건율아?”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하고 다정했는데, 그의 손아귀에 잡힌 어깨가 으스러질 듯 아팠다. 놀란 건율이 어깨를 움츠리자, 서슬 퍼런 시선이 느껴졌다.
“건율아, 나 봐봐. 시선 피하지 말고.”
“…….”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연한 색의 갈색 눈동자가 반쯤 감겨 있었다. 건율을 내려다보느라 그러했다. 눈꼬리는 평소보다 더 사납게 올라가 있고, 미간은 사나운 심기를 표현하듯 일그러져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뭘…….”
“다시.”
“……사, 귀는 사람 있어서 안 돼.”
목소리가 바보같이 떨렸다. 한심하고 멍청하게 보였으리라. 건율은 몇 번째인지 모를 마른침을 삼켰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불안함이 작은 불씨처럼 타닥타닥, 무언가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때, 최유헌이 건율의 멱살을 쥐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자 왼쪽 뺨에 무지하게 큰 손바닥이 닿았다. 짝, 하고 허공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멍멍하게 울렸다.
“아……!”
“나랑 사귀기 싫어?”
“……유, 헌아?”
또다시 커다란 손이 움직였다.
철썩.
연거푸 두 대를 얻어맞은 뺨이 새빨갛게 물들어 부었다. 건율은 화끈거리는 제 뺨을 만졌다가, 최유헌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최유헌은 다시 눈을 휘어 웃었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니지, 건율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설움을 삼켜 냈다. 단 두 대로 입안이 터져 비릿한 맛이 났다. 최유헌이 저를 때렸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난 그간 네 생각하면서 버텼는데……. 이러면 안 되지.”
팔을 쥐어 온 손이 억세다. 푸른 핏줄이 불거진 투박한 팔뚝은 금방이라도 건율을 내리칠 듯했다.
“나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
“너 때문에 남잘 좋아하게 되고, 너 때문에 유학 가서도 계속 집중을 못 했어. 그리고 당장 널 보러 왔는데…… 너 대신 얻어맞기까지 했잖아. 안 그래?”
최유헌이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팔 갗에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화끈거리는 뺨이 너무 아팠다.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경련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제 맘대로 되질 않았다. 최유헌이 한숨을 내쉬며 제 앞머리를 뒤로 넘기자, 건율은 퍼뜩 놀라며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커다란 손이, 또 저를 때릴 것만 같았다.
그는 건율이 바들바들 떨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은 낯으로 목을 이리저리 기울여 우드득, 소리를 냈다. 아래서 보이는 최유헌은 거대한 괴물처럼, 무서웠다. 까만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너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너는…… 나 없다고, 내 동생이랑 붙어먹고.”
“유, 유, 헌아. 그게….”
“내가 없어졌다고 잊었어? 어떻게 그래? 나 돌아올 거라고 말했잖아. ……하, 게다가 지금, 애인? 애인이라고 했나……. 최무정한테서 도망쳤으면서 마음이 또 약해졌어?”
“…….”
“너, 지금 최무정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 몰라? 정신 차려, 율아. 널 항상 도와주던 게 누군데 걔한테 붙겠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냥, 그냥…… 시간이 흐른 만큼 건율도 최유헌에게 기대지 않고, 그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최무정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을 뿐이다.
최유헌이 몸을 일으켜, 건율의 무릎 위에 앉았다. 건율은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를 좋아했다고? ……그럴 리가.
“어제도 내 말 안 듣더니.”
“…….”
“오늘도 그러네. 율아, 정신 못 차려? 네 앞에 있는 게 누군지 몰라?”
조금 전처럼, 최유헌이 성큼 다가왔다. 이마를 맞대고 눈을 부릅뜨고서 건율을 내려다보았다. 오만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깊은 눈동자가 빛을 받지 않아 온통 시커멓게 보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최무정 때문에 거절하겠다는 거 진심이야?”
“유헌아……. 그게, 그니까…. 이건, 아직 모르겠어. 무정이랑, 무정이랑은 얘기를 해야 하는 건데……. 네가 끼어들 필요는….”
“끼어든다고, 내가?”
풋, 웃음을 흘린 최유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흘러내린 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채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녀석이 건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건율 너, 되게 비싸게 구네.”
“그런 말이, 아니라….”
“너, 최무정이 무섭냐?”
입이 꾹 다물렸다. 최유헌은 제 아래 짓눌려 눈만 껌뻑이는 건율을 내려다보며 이어서 물었다.
“나는 만만하고?”
“그게…….”
“고작 최무정 때문에 거절하겠다고, 그니까… 무서워서?”
작게 중얼거리는 음성이 음산하다. 낮게 내려앉아 삭막할 만큼 감정 없이 뱉어지는 목소리는 건율에게 닿는 것이 아니었다.
최유헌은 건율의 양손을 침대 위로 얹어 두고, 그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손목을 가볍게 쥐고 침대 시트로 내리누르는 무게가 상당했다. 건율은 눈을 조금만 떠도 최유헌이 보여서, 자꾸만 어지럼증이 일었다. 이대로 기절하면 좋으련만, 그럴 기색은 없었다.
“아……. 건율아.”
건율은 여전히 홧홧한 제 뺨이 신경 쓰였다. 점점 부어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왼쪽 뺨이 부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최유헌에게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장난으로라도 제게 손찌검 한 번 하지 않았었다.
“나, 안 그래도 어제 네가 나 무시해서 놀랐단 말야.”
저를 끌어안은 몸이 뜨겁고 두툼하다. 조곤조곤 뱉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속상한 듯 축 늘어진 목소리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래, 저 또한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오늘도 이러니까…… 되게 서운하고, 섭섭하다. 난 네가 하도 좋아한다는 티를 내길래, 유학도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고.”
제 마음을 최유헌이 모를 줄 알았다. 건율은 저를 꽉 끌어안고 중얼거리는 최유헌을 쳐다보았다. 내리깐 눈두덩이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건율은 그제야 제가 잘못했구나 싶었다.
“……내, 가 오해하게…….”
“설마 내 동생이랑 붙어먹을 줄도 몰랐고.”
최유헌이 칭얼거리듯 목덜미에 뺨을 비벼 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 잘못은 맞는데, 이상하게 최유헌의 말에 모두 동의하기 힘들었다. 한데 최유헌의 말에 반박할 자신도 없었다. 건율은 그렇게 바보같이 가만히 있었다.
그때, 최유헌이 건율의 양 손목을 틀어쥐었다.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윽……!”
그대로 몸 위로 무게가 실어 왔다. 벽에 머리가 부닥쳤다.
“율아.”
“왜, 왜 불러…?”
“어차피 오늘 자고 가기로 했잖아, 그치?”
내려다보는 눈빛이 묘하게 낯설었다. 건율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안 잘래. 집에 갈래. 놔, 놔줘.”
건율이 애처럼 졸라대는 것 같아서, 최유헌은 픽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짐승 발바닥처럼 크고 거친 손바닥이 느릿하게 건율의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렸다.
“히익! 하, 하지 마! 뭐 하는 거야……!”
“싫어? 싫어, 율아? 싫어?”
연이은 질문에 건율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혼란스럽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되질 않았다. 꼭 어려운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싫, 어…….”
눈을 꼭 감고 답했다. 건율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 아래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안 본 사이에 진짜……. 하,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겠다. 너.”
“뭘……. 아!”
힘껏 발버둥을 치다, 다시 뺨을 맞았다. 몸이 경직됐다.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최유헌에게 왜…… 혼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정도로 아파?”
“왜, 왜…….”
“섭섭하게 하니까 그렇잖아. 그리고, 이제 차근차근 가르쳐 봤자 최무정 때문에 힘들 테고……. 방법이 많진 않거든.”
“무슨 말, 끅! 하는지 모르, 끅! 겠…어.”
망연히 듣던 건율이 딸꾹질을 시작하자 최유헌이 빙글 웃었다. 무엇이 기폭제가 되어 그를 건드렸을까. 늘 친절하던 최유헌이 제게 왜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최무정과의 일에서도 그랬듯, 이번에도 제 잘못일지도 몰랐다.
“율아.”
“끅! 왜…. 끅!”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내려다보는 눈빛은 여전히 교만하고 매서웠다. 건율은 입 안쪽 살을 씹으며 최유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훑더니, 건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내 말 듣자, 응? 나랑 사귀자, 율아.”
“난…!”
“그러고 싶어 했잖아, 네가.”
가느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동그란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최유헌은 건율의 머리에서 뺨, 어깨에서 다시 손목으로 천천히 손을 옮겼다. 그는 곧고 긴 손가락에 깍지를 껴 오며 목숨 줄을 쥔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러곤 대답을 재촉하듯 이마를 맞대 왔다.
“어서…… 응, 해야지.”
건율은 경직된 채로 꼼짝을 못했다. 낯이 새파랗게 물들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데도 최유헌은 대답을 재촉하듯 내려다보기만 했다. 팽팽한 침묵이 목을 죄여 왔다. 평소의 서건율이었다면, 이렇게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대체로 이성적이며 생각이 많고, 결정을 하기 전 충분한 시간을 원했다.
최무정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밀어내고 밀어내다가, 최무정의 존재가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움직였다. 물론 건율은 자신이 최무정에게 되레 당할 줄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의 건율은 평소답지 않았고, 최무정과 최유헌을 만날 때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고개를 저었다.
“싫어.”
최유헌은 다시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맞춰 왔다. 아니, 그는 듣지 못했다는 것 같았다. 건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싫…. 흑!”
그러나 입을 벌리자마자, 커다란 손바닥이 거침없이 머리채를 잡아 짓눌렀다. 다정하게 끌어안던 품이 떨어지고, 최유헌이 몸을 일으켰다.
“아, 아윽! 으, 유, 헌…. 아!”
그대로 단단한 침대에 머리가 처박혔다. 팔을 휘둘러 최유헌의 손을 쳐 내려 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최유헌은 건율의 반항에 손아귀 힘을 더욱 실었다.
“으, 흐읍, 흑, 읍!”
건율은 힘껏 발버둥 치며 베개에 묻은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다. 최유헌은 말없이 한숨을 쉬고, 건율의 허리춤에 올라타 무릎으로 섰다. 꿈틀거리는 몸이 몹시 가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 꼭 날개를 퍼덕이는 새를 잡은 듯했다. 제게서 한 차례 도망쳐, 다른 주인에게 들러붙은 새. 최유헌은 반대 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건율아.”
“으으, 읍, 흐윽……. 하아! 하아, 흐, 유, 헌아…….”
새빨개진 목덜미를 들어 올리자 건율이 숨을 급히 들이켜며 경련했다. 최유헌은 작은 머리통을 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머리통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방법도 없다고 했잖아.”
“나, 숨……. 흐윽, 헉, 허억…….”
“방법이 많지 않아서 마음도 급해.”
“아! 흐으, 아윽!”
분홍빛으로 물든 뺨이 어울렸다. 생각해 보면, 5년 전 건율의 뺨도 이렇게 붉었었다. 최유헌은 숨을 몰아쉬는 건율의 몸을 뒤집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가가 살짝 젖어 있었다.
“그, 그만…….”
“아파?”
“응, 아, 아파.”
또 때리려는 줄 알고 움츠러든 게 귀여웠다. 장난이라 하면 바보같이 헤벌쭉 웃을 것만 같았다. 최유헌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끌어 올리며 건율의 한쪽 뺨을 아프지 않게 토닥였다.
“그렇게 아팠어?”
“으, 응.”
건율은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최유헌은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건율의 셔츠를 윗단을 잡아 단추를 툭툭 풀었다. 튀어나온 쇄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판판하게 마른 몸과 파랗게 보일 만큼 하얀 살갗, 갈비뼈가 보이는 허리와 뱃가죽까지 드러났다. 최유헌은 제 두꺼운 허벅지 사이에 낀 메마른 허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유, 헌아.”
“닥치고 있어.”
“……흐, 으…….”
셔츠를 양옆으로 벗겨 낼 때마다 누군가의 자국이 보였다. 최유헌의 눈동자가 기묘한 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말없이 건율의 몸을 매만지고 눈으로 훑었다.
빨간 자국을 엄지로 꾸욱 누르며 문지를 때마다 건율이 발발 떨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묘한 충족감이 들었다. 최유헌은 눈을 맞대고, 손바닥을 펴 허리를 꾹꾹 누르며 한 번 더 쓸어내렸다.
지문 하나하나에 건율이 지닌 온기와 색감과 매끄러운 살결이 새겨졌다. 제 손바닥에 닿아 오는 따뜻하게 숨을 쉬는 생명체가, 경련하는 것이 몹시도 기분이 좋았다. 가슴속에 무언가 빠듯하게 차올랐다.
“야, 건율아.”
“응, 으응, 왜, 왜?”
말을 걸자 가슴이 살짝 솟으며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꽤 긴 침묵이 끝나자 벌벌 떨던 것도 조금 줄어들었다. 최유헌은 건율의 몸에 새겨진 키스 마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내 동생이냐?”
“…….”
색색대며 생기를 띄고 있던 숨이 아주 잠시 멎었다. 그게 맘에 들지 않아 건율에게로 시선을 올리자, 건방지게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찰싹, 아프지 않게 뺨을 쳤다. 그러나 건율은 앞선 타격과 같은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5년이란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 그 사이에, 최무정이 끼어든 게 문제였다. 설마하니 서건율이 최무정에게 마음을 열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녀석을 다시 제 것으로 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천천히 꼬드기든, 압박하든, 이미 최무정에게 물들어 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과격한 방법을 써야 했다. 하지만 최유헌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 방법이.
“야, 묻잖아.”
“마, 맞아……. 미안.”
“두 번 묻게 하지 마.”
건율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유헌은 피식 웃고는 건율의 허리에서 비켜나며 바지를 벗겼다. 최근 살이 빠지기라도 했는지 허리춤이 꽤 남아 헐렁했다.
“유…!”
“묻기 전엔 닥쳐.”
“……끅, …으.”
건율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자 좀 더 노골적인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말랑한 허벅지 위로 집착처럼 덕지덕지 남은 흔적은 키스마크인지 멍인지 헷갈릴 만큼 선명했다. 유학을 다녀온 사이 최무정이 제 것에 신나게 흠집을 내놓은 걸 보니 웃음이 픽픽 새어 나왔다. 제까짓 게 뭐라고.
“여기로 했냐?”
동그란 엉덩이를 툭 치자 건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참았다. 수치를 참는 듯했다. 최유헌은 말없이 아래를 보다 제 것이 부풀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최유헌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남성에게 성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성 취향이 다른 친구들도 보았고 저에게 대쉬하는 이들도 만났으나 흥미도 일지 않았다. 오히려 역했다고 하는 게 맞았다.
최유헌은 과거 서건율이 저를 좋아하는 티를 낼 때도 사귀고 싶다거나, 떡을 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도 남성과의 관계는 역겹다고 느껴졌는데, 기묘하게도 지금은 서건율을 내려다보면서 발기하고 있었다.
“흐으, 흑……. 끅, 흡.”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을 스스로 조절하지도 못한 채 우는 얼굴에 동한다. 남자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데. 다른 곳에 비해 묘하게 살집이 있는 허벅지, 그 위에 새겨진 ‘남의 것’이라는 증거가 왜 이리 제 심장을 뛰게 할까.
“…싫, 싫어. 유헌, 아.”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건율이 갑자기 경련하며 도망치려 굴었다. 최유헌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왜 이래?”
“나 이거, 이거 싫어. 하지 마.”
급기야는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최유헌은 건율을 쳐다보며 허리띠를 풀어 내렸다. 때려도 가만히 있던 녀석이 이제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최유헌은 건율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다 넘어진 것을 보며 지퍼를 내렸다. 지이익, 소리가 노골적이었다.
“귀찮게 하지 마.”
“아윽, 악!”
머리채를 잡아 침대 위로 끌어 올리자 건율이 비명을 질렀다.
“소리 죽여.”
그에 최유헌이 한마디 하자 곧바로 입을 닫는다. 미리 언질을 해 두긴 했으나 소리가 너무 크면, 귀찮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이곳은 최유헌의 지인이 운영하는 병원이었고, 평범한 병실은 없는 칸이었으니 어느 정도 입은 닫아 주겠지만 소동은 벌이지 않는 편이 좋다. 최유헌은 아무도 들어올 일 없는 문 쪽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건율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깨를 움츠리며 더욱 발버둥 쳤다.
“씨발, 진짜.”
천천히 할 생각이었는데.
최유헌은 욕을 뇌까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잔뜩 발기한 성기가 묵직하게 건율의 뺨을 건드렸다. 그러자 건율이 머리채가 잡힌 채로 끅끅대며 울기 시작했다.
서럽다. 건율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이해가 되고 되지 않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제가 그리워했던 친구가 변한 게 무서웠고,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다정하던 최유헌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최유헌은 건율의 머리채를 쥔 채로 퉁퉁 부어오른 건율의 뺨에서, 발간 입술 사이로 귀두를 미끄러트렸다. 건율은 입을 앙다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입, 벌려.”
발버둥도 잠시, 최유헌이 커다란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건율은 지레 겁을 먹고 입술을 벌렸다. 작은 틈이 드러나자마자 굵은 기둥이 음부를 쑤시듯 그 사이로 쑤욱 하고 깊게 들어왔다.
건율이 알던 최유헌은 누군가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정하고 섬세하며, 베풀기를 좋아하는 데다 이렇게 억지로, 폭력을 가하며 제 성욕을 채우려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
“흐, 우윽!”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은 누구일까. 제가 이리 울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물건을 쑤셔 넣으며 쾌락을 요구하는 남자가 정말, 그 최유헌일까?
귀두만 머금고 있던 입술이 갑작스레 앞으로 당겨졌다. 두피가 욱신거릴 만큼 머리채가 잡혀, 최유헌의 다리 사이에 고개가 처박혔다. 건율은 핏줄이 돋은 두툼한 성기를 목구멍까지 삼켜야 했다.
잔뜩 성이 난 물건은 핏줄이 심장 박동 수에 맞춰 요동치는 것이 느껴질 만큼 단단하게 발기해 있었다. 입술 양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픈데, 최유헌은 건율이 제 것을 반도 삼키지 못한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 더욱 쑤셔 넣으려 굴었다.
“끄, 후으, 응……!”
“존나 못하네.”
“컥, 후윽, 커헉!”
몇 번 밀어 넣던 최유헌은 참지 않고 건율의 머리채를 위아래로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최대한 밀어 넣었다가, 다시 빼기를 반복하며 추삽질을 해 댔다. 커다란 성기가 목젖을 찔러 올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건율은 두 손으로 최유헌의 허벅지를 짚고 버텼다.
원치 않은 움직임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최유헌은 최무정보다 더 가차가 없었다. 제멋대로 하다가도 건율의 안위를 살펴 주던 최무정과는 달랐다. 그는 꼭 건율의 입을 다 찢어 놓고 싶은 사람처럼 움직였다.
“좆 빠는 법 안 배웠어?”
최유헌은 성 도구를 다루는 것처럼 건율의 머리채를 잡고 앞뒤로 거칠게 움직였다. 성기가 몹시 크고 두꺼워 끝까지 밀어 넣는 것은 힘겨웠지만, 볼이 통통해지도록 물건을 욱여넣고 입 안 내벽을 범했다. 그러다 건율이 숨을 쉬지 못해 빨간 뺨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자 젖어 반질거리는 성기를 뽑아냈다.
“허으, 흐, 컥, 커억!”
이제 끝인가 싶어 캑캑대며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최유헌이 건율의 몸을 번쩍 들어 침대에 내던졌다. 놀라기도 전에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건율은 잡혔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훌쩍훌쩍 울었다. 관자놀이가 쿡쿡 쑤시고 눈앞이 흐릿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자 최유헌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서늘하게 굳은 눈동자에 심장이 철컥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씹질만 배웠어?”
건율은 두려움에 마구 도리질을 쳤다. 뺨 위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지만, 그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 순간, 큼지막한 손이 허벅지를 벌리고 좁은 구멍에 무언가 닿았다.
“아, 안, 안 돼, 흐, 아!”
최유헌은 눈을 맞댄 채로 귀두로 음문을 열어젖혔다. 풀어 주지 않아 상당히 비좁은 곳을 욱여넣던 최유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아아…!”
“아, 존나 좁네. 씨, 발…….”
결국, 최유헌은 제 성기를 다시 빼냈다. 그리고 건율의 구멍에 침을 뱉었다.
“네가 풀어.”
건율은 꺽꺽거리며 숨을 힘겹게 뱉었다. 아래가 이미 찢어져 피가 엉덩이까지 흐르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야, 네가 풀라고. 더러우니까.”
그제야 최무정이 다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비참하고, 역겹다. 오늘 아침, 강제로 범한 것에 화를 내며 최무정을 밀어냈던 게 생각났다. 최무정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무정만큼 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씨발, 이게 진짜.”
침대에 매달려 울기만 하고 있자, 최유헌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엉엉 울던 건율이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미, 흐윽, 미안, 미안해.”
“답답한 새끼.”
5년 전에도 그랬다. 건율은 소심하지 않은 듯 하면서도 의외로 고민이 많고 답답하게 구는 놈이었다. 제 할 말은 다 하는데, 남 눈치를 보거나 상황에 휩쓸려 제 속을 썩이곤 했다.
최유헌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건율의 위로 몸을 겹쳤다. 단단하고 마른 몸은 조금 전 느꼈던 것처럼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살갗 자체가 보송보송해서는 5년 전 녀석을 범하는 듯한 착각도 일었다.
하긴, 바뀐 건 하나도 없어서 고등학생이라 해도 믿겠는데.
“아, 흐으, 유……헌아…!”
이상하게,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더럽다 느끼는 것이 정상이건만, 그래서 서건율에게 거친 말을 뱉었음에도 말과 달리 몸은 역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게 더 불쾌했다. 최유헌은 동그란 둔부 사이 구멍을 쑤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뻑뻑하고 말라 있는 게 짜증이 났다. 거부하는 표정은 마음에 드는데, 온몸으로 밀어내는 걸 보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최유헌은 주변을 둘러보다 화장대에 놓인 로션을 발견했다.
“그대로 있어. 움직이면 처맞을 줄 알아.”
건율은 응응, 하고 대답하며 훌쩍거렸다. 최무정 외에는 누구도 닿지 않았던 곳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조금도 풀지 않고 쑤시고 들어오던 통증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건율은 최유헌이 잠시 화장대로 걸어간 틈을 타 눈을 빙글 돌렸다. 문까지는 멀지 않았다. 그래서, 최유헌의 말에도 불구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침대 아래로 몸을 옮겼다.
최유헌은 화장대에서 로션을 제 손 위로 쭉 짜내고 있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본다면, 강제적 행위가 아닌 합의하의 섹스라 생각할 정도로 그는 평온했다.
뒤가 찢어져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너무 아팠다. 그래도 소리를 내지 않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살금살금 움직이던 건율은 화장대 바로 옆을 지나가며 숨을 죽였다.
화장대 부근에 문고리가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었고, 상의는 거의 찢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손목에 걸쳐져 있었다. 하의는 설명할 것도 없었다. 피가 흐르고, 모조리 벗겨져 가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건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으며 문고리를 쥐었다.
“……어?”
분명, 안쪽에서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열리질 않았다. 꼭 바깥에서 잠긴 것처럼. 건율은 다시 한번 문고리를 확인했다. 안쪽에서 잠기는 구조가 맞았다.
그런데, 왜…….
“…악!”
숨죽여 문고리를 급히 살피는데, 갑작스레 머리채가 잡혔다. 안 그래도 욱신거리던 머리가 징징징, 울려 대기 시작했다. 고통도 느껴지질 않았다.
“헉, 컥!”
최유헌이 발로 배를 걷어찼다.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의 고통이었다. 몸이 축 늘어지자 놈은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줘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뭘 잘했다고 울고 지랄이야……. 응? 내가, 가만히 있으랬잖아.”
“유, 유헌아…. 내가, 내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
“아니긴, 씨발.”
최유헌은 그 상태로 건율을 바닥에 눕히고, 두 다리를 양옆으로 벌렸다. 훤한 빛 아래 살갗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양 볼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건율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가, 발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가 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최유헌은 제 손바닥에 질퍽한 로션을 잔뜩 짜고, 그대로 건율의 뒤에 덕지덕지 발랐다. 차가운 액체가 울컥 대며 내벽으로 스미기 시작했다. 어떠한 배려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저 쑤시기 위해, 입구를 넓히는 행위는 최무정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똑같이 뒤를 쑤시고, 벌린다. 똑같이 건율이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건율은 최무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상했다, 너무나… 이상했다.
건율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으, 흐으……윽.”
“팔 내려.”
“싫, 싫어.”
“더 맞고 싶어?”
“흐… 아니….”
건율이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리자, 최유헌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마치 ‘그래, 네까짓 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차라리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몸을 돌리고 있었더라면 속 시원히 울기라도 할 텐데 최유헌은 건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아래를 손가락 세 개로 마구 쑤셔 넣었다. 이미 한 번 찢어진 입구가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건율의 음부는 젤을 흡수하듯 금세 메말랐다. 그럴 때마다 최유헌은 로션을 구멍에 대고 밀어 넣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아래가 음탕하게 찔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너, 소리 죽여.”
아래가 쿵쿵, 떨리는 게 느껴졌다. 최유헌은 최무정처럼 안달을 내거나, 건율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질 않았다. 곧바로 입구에 닿은 귀두가 밀고 들어와 내벽을 한계까지 벌리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뻐근해지도록 성기가 가득 채워 왔다. 형제는 형제라고, 최유헌의 것 또한 일반적인 크기는 아니었다.
“허, 흐으, 흑! 끅……. 하, 허억!”
꾹꾹 들어올 때마다 숨이 막혔다. 머리가 핑글 도는 느낌도 들었고, 골반이 한계까지 벌어져 허리가 아렸다. 단단하고 차가운 바닥에 쓸리는 등도 너무 아팠다.
최유헌은 위에서 숨을 죽이고 건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침을 삼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를 참는 건율을 뚫어져라 살폈다. 그 눈빛이 너무, 무섭고 부담스러워서 건율은 벌벌 떨기만 했다. 그리고 꽉 찼다고 생각했을 때, 최유헌이 한숨을 쉬었다.
“다 안 들어가네.”
“……다….”
그럴 리가 없는데. 건율은 입을 벌렸다가 잽싸게 닫았다. 말하지 말랬는데, 자꾸만 말이 튀어 나갔다.
5년 전, 최유헌과 저는 어땠던가. 그가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기 싫은 일이어도 최유헌이 하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따르곤 했다. 그가 저를 위해 하는 말이라 생각했으니까, 그가 멀어지라고 한 친구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고 기다리라고 하면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하아….”
“아, 흐윽!”
잠시 멈췄던 최유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딱한 바닥을 두 손으로 지탱하던 건율이 숨을 들이켰다. 커다란 성기가 아래를 강하게 짓쳐 올렸다. 눈앞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아, 아, 흐으…!”
목 끝까지 성기가 차고 올라온 듯했다. 건율이 숨을 급하게 몰아쉬자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최유헌은 건율이 그러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허리를 거세게 움직였다. 핏줄이 울긋불긋하게 솟은 성기가 내벽을 거칠게 긁었다. 단번에 깊은 곳까지 치달은 성기에 눈물이 또 왈칵 흘렀다. 건율은 손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쥐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 흐으, 흡, 윽, 악!”
최무정과는 다르다. 아니, 다른 게 당연한데 불구하고 자꾸만 그가 떠올랐다. 커다란 귀두가 내벽을 퍽퍽 찌르고 올라올 때마다 까무러칠 것만 같은 통증과 쾌락이 일었다. 그가 배려하여 약한 곳을 찌르는 것도 아닌데 불구하고, 건율은 스스로 아래를 적시고 있었다.
로션과 애액이 뒤섞여 아래쪽에선 끈적한 소리가 났다. 최유헌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아래가 울컥대며 가득 찼던 로션을 토해 냈다. 성기와 구멍 사이의 작은 틈으로 질질 흐르는 애액에 수치심이 느껴졌다.
“흐으, 흐윽…. 흑, 끅….”
건율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소리를 참으려 했다. 그러나 최유헌은 그런 노력을 묵살하듯 허리를 강하게 돌리며 안쪽을 마구잡이로 쑤셔 대기 시작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속살과 단단한 성기가 비벼지며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잘 참네.”
최유헌은 건율의 허리를 붙잡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강하게 짓쳐 올렸다. 내벽은 점차 뭉근하게 풀어졌고, 오히려 성기를 원하는 듯 달라붙었다. 건율은 본능적으로 최유헌의 어깨를 밀어내고, 허리를 비틀었다. 쾌락이 너무 지나쳐 고통에 가까웠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될 것만 같았다.
“흐…. 아윽! 아!”
그 순간, 최유헌이 건율의 양 손목을 잡아채고 거칠게 좆질을 해 댔다. 쿠퍼액과 애액으로 젖은 내벽이 끈적하게 달라붙을 때마다 그는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훔쳤다. 최무정이 먼저 따먹은 몸은, 생각보다 아직 남자를 몰랐고 생각보다 음탕했다.
풀리기 전까지는 고통을 호소하던 작은 몸이, 입구를 드나들기 시작하자 잔뜩 조이며 교성을 내질렀다. 아프다고 울면서도 아래로는 잔뜩 발기한 채로 최유헌의 좆을 물고 놔주질 않았다. 어찌나 벌름거리며 성기를 씹어대는지, 최유헌은 제 아래에 있는 게 5년 전의 친구였는지, 창부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골반을 잡고 바닥을 향해 강하게 허리짓을 하자 건율이 발간 눈가를 가리며 발끝을 잔뜩 오므렸다. 말캉한 내벽 속, 볼록하니 튀어나온 곳을 뭉근하게 짓누르자 건율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발버둥을 멈췄다.
최유헌은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개처럼 흘레붙으며 저보다 한참 작은 나신을 씹어 먹을 듯이 찍어 눌렀다.
마치 인간이 아니게 된 것 같다. 그의 성욕을 풀어 주는 도구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최유헌은 제 좆을 오물오물 씹어 대는 아래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입은 동정처럼 좆물도 못 빨더니, 아랫구멍은 좆을 맛있게 집어삼켰다.
“아으, 흐윽!”
“하…. 시발, 좀 닥치라니까….”
최유헌은 건율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눈을 깜빡이기는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건율은 눈물 때문에 앞에 흐릿해서,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뜨기 바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려고 할 때마다 속살을 망가트릴 기세로 처박아 오는 움직임에 다시금 혼미해졌다.
성기가 꽂힌 구멍에서는 쿠퍼액과 애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강하게 처박을 때는 꼭 아래로 물을 싸지르는 것처럼 새어 나왔다.
“흐아, 흐, 흑…. 유, 헌아아….”
최유헌이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잊고, 건율은 최유헌의 어깨를 쥐고 매달렸다. 계속해서 도망가려고 굴던 조금 전과 달리 아이처럼 매달리며 우는 꼴이 보기 좋았는지, 최유헌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씹질에 소질 있네.”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 최유헌이 툭툭 건드리며 움직임을 느긋하게 했다. 깊게 밀어 넣었다가 허리를 빼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말랑한 내벽이 강하게 제 것을 수축하는 걸 즐겼다. 눈을 감고 얕게 쳐올리다가 다시금 성기를 뒤로 빼다가, 단번에 뚫고 들어왔다.
“아, 아아, 흑! 흐, 흐읏!”
최유헌은 건율의 양다리를 제 어깨에 올리고, 힘껏 쳐올리기 시작했다. 살갗이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가 민감하게 귀를 자극했다. 건율은 붙잡힌 손목을 빼내, 제 입을 가렸다. 빠르게 쳐올리는 탓에 신음이 튀어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흑, 끅, 흐읏, 읍, 으읏……!”
“하아……. 그래, 그렇게 줄여야지. 안 그러면 너 병원에서 씹질 한 새끼라고 얼굴 팔릴걸.”
너도, 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건율은 울먹이다 눈을 질끈 감고 사정없이 연한 살점을 헤집어 올리는 물건에 꿰뚫렸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자 최유헌이 웃으며 비꽜다.
“좆도, 잘 씹네……. 율아, 최무정이랑 얼마나 했냐?”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에 불현듯 배에 힘이 들어갔다.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또 최무정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놀라서 한 행동이었다. 최유헌은 단박에 눈치를 채곤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픽, 흘렸다. 묘한 비웃음이 담긴 얼굴이었다.
“최무정 얘기 꺼내는 게 좋은가 보지?”
“아, 아니…. 흑! 앗, 아니, 아니야…… 아!”
내벽이 움칠거리자 최유헌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더욱 깊은 곳까지 좆을 밀어 넣었다. 놈의 고환이 느껴질 만큼, 최유헌은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묵직한 것을 욱여넣었다. 느릿하게 움직였음에도 내벽은 어느 곳이든 닿자마자 기묘하고 오싹한 기분에 쾌락을 느끼며 꿈틀거렸다.
건율은 입을 벌려 가쁜 숨을 뱉었다.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최무정……. 최무정은 어떻게 하는데?”
“하, 하지…. 하지, 마……. 흐, 아……!”
“율아, 너……. 남친 생각하면서, 남친 형이랑 떡 치는 데도 이렇게 꼴려? 응?”
“흐으……. 응, 아! 읏……!”
최유헌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구 쑤셔 박는 것이 아니라, 건율이 쾌락에 젖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입을 가리다 떨어진 두 손에 다시 깍지를 끼고, 천천히 뒤로 꺾었다.
“유, 유헌아……. 제, 흐윽, 발, 하지……. 아! 하지, 마아…. 흑, 아!”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혹여나 최유헌이 나쁜 마음을 먹고 저지를까 봐 건율이 정신없이 매달렸다. 최유헌은 그럴 때마다 느릿하게 박은 좆을 빼내고, 다시 한 번에 밀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건율이 손가락이 아닌 최유헌을 쳐다보았다.
“내가 네 손가락을 왜 부러트려, 안 해.”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최유헌은 점막을 파헤치듯 속살을 긁어 올렸다. 뜨겁게 달궈진 안쪽이 찔꺽거리며 애액을 토해 냈다. 좆을 길게 빼내자, 투명한 액체가 달라붙어 벌건 점막이 살짝 보였다.
“소, 손……. 끅, 손, 놔줘, 유, 헌아……. 제발…….”
“나 못 믿어?”
“무서워, 서 그래……. 흑, 아! 앗, 아윽, 흐읍……!”
팔다리도 아니고, 고작 손가락에 벌벌 떠는 게 귀여워 웃음이 났다. 이런 재미가 있는 줄 알았다면 유학 갈 때도 데리고 갔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긴 했다마는 놓고 가진 않았을 텐데.
“흐으……! 흑, 으응, 아, 아으……. 흐……. 아!”
꺾었던 손을 올바르게 돌리고, 다시 마주 보며 거칠게 추삽질을 해 대자 건율이 그제야 풀어진 얼굴로 신음을 뱉었다. 병실 밖으로 소리가 퍼지진 않겠지만, 귀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그럼에도 최유헌은 무어라 하지 않고 건율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틈 없이 빠듯하게 조여 오는 내벽을 강하게 짓이겼다.
익숙하고도 낯선 친구의 신음 소리, 하얀 천장과 딱딱하고 거친 바닥. 모든 상황이 꿈만 같았다. 그리도 좋아했던, 사랑했던 친구와의 관계가 이렇게 일그러질 줄 알았던가. 너무나 소중해서 고백도 하지 않았던 사람과 배를 맞대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았는가,
최유헌은 절정에 뜨거운 숨을 뱉으며 성기를 깊게 파묻었다. 좆을 꾸역꾸역 삼킨 구멍이 움찔거리며 불편함을 표했다. 최유헌은 가장 깊은 곳에 귀두를 밀어 넣은 채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 아으, 흐….”
최유헌이 후련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허리를 뒤로 빼자, 굵직한 성기가 빠져나오며 희멀건 정액을 울컥 흘려보냈다. 기분 나쁜 액체가 아래에 싸질러지는 것이 선명했다.
건율은 더 비참해졌다. 어질어질하던 시야가 한순간에 까맣게 물들었다.
* * *
팔다리에 묵직한 돌멩이가 매달려 있는 듯, 온몸이 무거웠다. 건율은 새까만 동공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공포의 끝에는 비참함이 있었다. 끝이 나고 나서야 이런저런 현실적인 고민들이 떠올랐다. 이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아무도 저를 도와주러 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이 나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한 분노가. 그들이 제 소리를 들은 것에 대해서는 수치심이 일었다. 어쩌면 주변 병실이 모두 비었던 건 아닐까. 아니, 이곳은 병실이 맞는 걸까.
건율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일반적인 병실과는 많이 달랐다. 병원 침대라고 하기엔 시트가 푹신하고 이불이 부드러웠으며, 흔한 환자 이름도 써 붙어 있지 않았다. 더불어 비정상적으로 넓었다. 아무리 1인실이라고 하더라도, 이전에 보았던 곳과는 달랐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흔히 들릴 법한 환자들의 대화 소리나, 발소리조차.
건율은 눈동자를 돌려 최유헌이 병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쳐다보았다. 팔을 쓰지도 못할 만큼 맞았다면서, 그는 행위 내내 건율을 속박하고 두 팔로 저를 짓이겼었다. 최유헌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건율은 바닥에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깼냐?”
최유헌은 제가 기절하고도 몇 번을 더 한 모양이다. 기절하기 전의 것보다 상당한 양의 정액이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내부는 담배 냄새로 지독했고, 바닥은 여전히 시리도록 차가웠다.
건율은 바닥에 엉망으로 늘어진 옷가지를 집어 입었다. 아래가 불쾌한 애액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무정과의 관계에서는 늘 깨고 나면 몸이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유헌과 최무정은 달랐다.
“내 말 씹냐?”
최유헌이 대답을 재촉했다. 건율은 가라앉은 눈으로 최유헌을 쳐다보았다. 볼은 퉁퉁 부어 뜨거웠고, 다리는 후들거려 서는 것조차 힘겨웠다. 무사한 것은 손가락뿐이었다. 건율은 그게 참 다행이라 여기며, 내일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 여기가… 어디야?”
“그게 지금 궁금해?”
작게 웃음을 흘린 최유헌이 짙은 연기를 뿜어낸 뒤 고개를 젖혔다. 나른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녀석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병실은 아니지, 확실히.”
“그럼….”
“지인이 준비한 곳이야. 나 같은 사람이 호텔에 드나들기엔 주변 시선이 있어서 말이지.”
이런 행위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란 뜻이었다. 건율은 공허한 눈으로 최유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래, 속았구나. 유헌이는 아픈 게 아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깊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라 치부하기엔 최유헌의 정액이 자꾸만 울컥대며 흘러나왔지만, 그것조차 모른 체했다.
건율은 힘없는 몸을 일으켜 바닥을 뒹구는 제 가방을 챙겼다. 최무정이 조심하라고 할 때, 만나지 말라고 할 때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나 자신에게 어떤 선택권이 있었을까. 어릴 적부터 친했던, 아니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진 친구를 피할 수 있었을까.
그때, 최유헌이 말을 툭, 뱉었다.
“휴학해.”
“…….”
“아니, 그냥 퇴학하든가.”
“…….”
휴학, 퇴학.
최근 건율의 머릿속에서 자주 떠오르던 단어였다. 최무정을 만난 이후 연주에 집중할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직, 이상하게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성적 장학금은 못 받아도 다른 곳에서 충당할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선뜻 휴학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막 복학한 것도 그랬고, 그대로 도망쳤다가 최무정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것 같아서였다.
건율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가방을 어깨에 메자, 최유헌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의 손에 제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어딜 쳐 가려고 해?”
“……학, 교 가야….”
“지랄하지 말고, 앉아.”
“…….”
최유헌은 불편하다던 오른팔로 건율의 핸드폰을 쥐고 이리저리 조작을 했다. 건율은 터덜터덜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최유헌과 건율의 사이에 창문의 그림자가 져, 선이 곧게 그어졌다. 건율은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짝사랑했던 친구, 저를 챙겨 주던 친구, 저를 때린 사람, 저를 억지로 범한 사람. 최유헌을 그리 정의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조금 전 저를 때리고, 강간한 사람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도 모자랄 상황에 순순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
우습다. 조금 전까지 저를 강제로 범한 남자의 옆에 앉아 대화를 하는 자신이 너무나 우스웠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러지 않았겠지.
제가 멍청하고, 모자라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 속이 답답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목이 막힌 것처럼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했다.
건율이 시선을 제 핸드폰으로 옮겼다. 화면은 처음 보는 것이 띄워져 있었다.
“와, 최무정 이 미친 새끼.”
때마침 최유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어떤 어플을 켜 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건율은 익숙하지 않은 창이라, 최유헌이 조금 전에 깔았나 싶었다.
“너 핸드폰에 위치 추적 어플 깔린 거 알고 있었냐?”
“……무슨….”
“그 새끼가 깔아 둔 거 같은데, 참. 너 같은 거 뭐가 그리 꼴린다고……. 하긴, 최무정 이 새끼도 진짜, 어릴 때부터 지랄이었지.”
고작 위치 추적 어플에 놀라진 않았다. 건율은 감정 없는 밋밋한 눈으로 최유헌을 쳐다보았다. 위치 추적 어플보다 더 귀에 들어온 건, 어릴 때라는 키워드였다.
그 말을 듣자 건율은 조금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 최무정은 어땠을까.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의 최무정은 어떤 아이였을까.
“왜 그렇게 쳐다……. 아, 너 최무정 얘기 듣고 싶냐?”
눈을 살짝 들어 최유헌을 쳐다봤다. 궁금했다. 최유헌에게 물을 것은 아니었음에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알아챘는지 최유헌이 피식, 잇새로 웃음을 흘렸다.
“그 새끼 그냥 병신이었어. 어릴 때부터 대가리가 좀 돌아서, 친구도 없었고.”
“…….”
“병원도 다녔어. 미친 새끼 같아서. 뭐……. 피아노 배우겠다고 할 때부터 마음대로 하라고 방치하긴 했지만.”
어떤 애였을까. 그때 최무정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아이였을까. 아니면 비슷했을까. 피아노는 왜 배우려고 했을까. 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외롭진 않았을까.
적어도 건율보다는 나은 아이였을 것이다. 지금처럼 바보같이, 저를 강간한 친구와 앉아서 대화를 하는 병신은 아닐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최무정이 보고 싶었다. 그가 끔찍이도 싫다고 발버둥 치던 것이 무색하게, 건율은 최무정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이 감정도 이상한 것일까? 저를 스토 킹하던 사람이 보고 싶어지는 제가, 이상한 걸까?
오늘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밤새 저를 문 앞에서 기다렸는데, 화를 내고 심한 말을 했다. 갑자기 이유도 말하지 않고 밀어낸 건 저였는데, 최무정이 차 안에서 저를 범했다는 이유로 상처를 냈다. 저를 진정으로 생각해 주고 좋아하는 건 최무정뿐인데, 그보다 더한 사람은 없는데, 최무정의 사과에도 밀어냈으니 그가 화내며 저를 받아 주지 않겠다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최무정 보고 싶어?”
말없이 눈을 마주치자 최유헌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끄트머리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대충 짓이겨 끄고는 병신 새끼, 하고 욕을 했다. 건율도 그 말에 동의했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이 휘둘리는 걸까. 조금 전만 해도, 더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었으면서 왜 숨을 죽였을까.
최유헌의 날카롭고 오만한 눈동자가 건율에게 닿았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어 닥칠 통증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말했지. 나 유학 가서, 미친 새끼한테 걸렸다고.”
그러나 예상과 달리 최유헌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퀴퀴하고 지독한 냄새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건율은 고개를 숙인 채로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짓씹었다.
“아니, 애초에 유학 갈 생각도 없었어. 귀찮게 내가 왜 그런 데를 가? 안 가도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는데.”
뭉게뭉게 짙은 담배 연기가 공기를 탁하게 했다.
“내가 지금 너 구해 주는 거야, 건율아. 최무정 그 새끼 단단히 돌은 새끼라고.”
“…….”
“유학도, 스토커 새끼도 다 최무정 짓이야. 내가 조사 안 해 봤을 거 같아? 잡아 족치려고 돈을 안 썼을 거 같냐고.”
건율은 최유헌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우습지도 않았다. 방치하다시피 키운 자식이, 무슨 수로 형을 유학 보낸단 말인가. 게다가 최유헌이 외국에 있을 때 최무정은 한국에 있었다. 스토킹은 무슨. 그리 무시하던 동생이 제법 괜찮은 대학에 합격하니 배알이 꼴린 모양이었다.
무의식중에 곱지 않은 시선이 나갔는지 최유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하, 하고 한숨을 뱉었다.
“그 새끼가 너랑 나, 떨어트리려고 유학 보낸 거 맞다니까?”
“피해망상이야.”
“말 곱게 안 한다? 표정 그따위로 할래?”
“…….”
“예쁘다, 예쁘다 해 주니까 아주….”
애초에 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최무정은 뭘 원해서 제 형을 유학 보낼까? 오히려 억지로라도 외국에 보내 준 동생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윽!”
단번에 멱살이 잡혔다. 창가로 밀어붙여진 몸이 휘청거렸다. 조금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긴장으로 각이 잡혔다. 건율은 선반에 몸을 지탱했다.
“야, 서건율.”
건율은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었다. 동그란 눈을 힘껏 치켜세우고 미간에 힘을 줬다. 최유헌은 눈썹 한쪽을 들며 삐뚜름하게 내려다보았다. 뺨은 퉁퉁 부어서 앳된 얼굴로 주먹을 쥔 서건율이 우습지도 않았다.
“한 대 치겠다?”
“…….”
“대답해, 사람 기분 좆같게 만들지 말고.”
최유헌이 말을 씹듯이 뱉었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을까, 최유헌은. 자신이 알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생판 다른 사람이 됐을까. 사실은 최유헌이 아닌 건 아닐까? 마치 드라마처럼, 영화처럼 그의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간 건 아닐까.
“아…!”
“대답, 하라고.”
연거푸 두 대를 얻어맞았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건율은 고개를 바짝 들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처럼 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유헌이 손을 다시 들었을 때, 건율은 결국 입을 열었다.
“알겠…어.”
“내가 존나 만만하지? 그니까 이따위로 사람 무시하는 거 아냐.”
“아니, 아니야.”
한 번 터진 입은 구멍 난 자루처럼 사과를 술술 뱉어 냈다. 건율은 고개를 저으며 사과했다. 맞기 싫어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몸이 움츠러들었다.
“사람이 씨발,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미안……해.”
“내가 너 좋아서 이러는 거 같아? 뻐팅기면 오냐 오냐 해 줄 줄 알았어?”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건율은 발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최유헌이 거짓 고백을 했을 때도 진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랑을 받는 느낌이 아니었으니까.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최유헌의 고백에 행복해했을까? 거짓된 말임을 알면서도 기뻤을까. 건율은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빨던 최유헌이, 건율의 멱살을 끌어 올렸다. 억지로 턱이 들려졌다. 최유헌은 가만히 건율을 살펴보다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을 건율의 쇄골에 짓이겼다.
“아……! 아으, 흐, 아!”
“닥쳐.”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건율은 차가운 유리창까지 내몰려져서, 벌벌 떨며 잇새로 비명을 흘려보냈다. 팔팔 끓는 기름에 온몸이 내던져진 듯했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목이 턱 막힌 듯 꺽꺽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자, 최유헌이 불이 꺼진 꽁초를 바닥에 툭 던졌다.
“그러게 왜 말을 쳐 안 들어.”
“…….”
히끅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손으로 쇄골 부근을 붙잡고 덜덜 떨자 최유헌이 무릎을 벌린 채로 쪼그려 앉는 게 느껴졌다.
“그래, 넌 우는 게 어울리네.”
건율은 입술 안쪽 여린 점막을 힘껏 물어뜯으며 신음을 참아 냈다.
너무해, 너무해. 최유헌 너무해, 우리 친구잖아.
그렇게 따지고 싶었는데 차마, 이제 와 원망하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건율은 훌쩍대며 시선을 피했다. 최유헌은 그렇게 조금 더 건율의 우는 꼴을 지켜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터벅터벅, 병실을 나가는 소리가 그렇게 차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연기할 생각도 없는지, 절뚝이지도 않고 올곧게 걸어 나갔다. 건율은 그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늘어진 솜이불처럼 몸이 무거웠다.
“흑… 흐으, 흑……. 아파…….”
건율은 널찍한 1인실에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창가 주변에는 억지로 벗겨진 옷과 가방이 흐트러져 있었다. 눈가를 꾹꾹 눌러 눈물을 닦았다. 어찌나 울었는지 살갗이 따끔거렸다.
건율은 쇄골 쪽을 조심스럽게 만졌다가, 너무 아파서 또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뺨은 얻어맞아 욱신거리고 온몸은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손목에는 최유헌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쇄골에는 흉이 져 있을 것이다.
삶은 본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그 한 줄로 정리하기에 지금 상황은 너무나 엉망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두 형제가 건율이 인생을 손에 쥐고 빈 캔을 우그러뜨리듯 억세게 비틀고 있었다.
“아파, 흑, 무정, 무정아……. 아파…….”
건율은 상황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그리 다짐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감정의 착각일까. 건율은 최무정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인 최무정이 당장 제 옆에 있었으면 했다.
한참을 울다가 정신을 차린 건율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병실 문고리를 당겼다. 당연하다는 듯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없는 힘을 끌어 억지로 비틀어 보아도 꽁꽁 잠겨 있었다. 손이 시뻘겋게 물들고 나서야 건율은 손을 떼어 냈다.
의자에도 침대에도 최유헌의 향취가 남아 있었다. 건율은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그냥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섰다.
아프다. 어쩐지 열도 나는 것 같고, 최유헌이 드나들던 곳은 몹시 쓰라렸다. 최무정이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아프지 않게, 제가 느낄 수 있게 도와주고 몸도 깨끗하게 씻어 주었을 텐데.
건율은 고개를 돌려 화장대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거울 안, 수어 대를 맞아 뺨이 부어오른 청년이 서 있었다. 볼품없어 보일 만큼 마르고,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목에 벌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목이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기절한 사이 최유헌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꼴이 되었을까.
쇄골 근처에는 동그랗고 시뻘건 상처가 나 있었다. 일반적인 상처로 보이지 않았다. 건율은 초점이 나간 눈으로 거울을 쳐다보았다. 제 옆에 최무정이 서 있다고 상상도 했다. 핸드폰도 없고, 나갈 길도 없었다. 지하실처럼 막막한 곳이 아닌 병원 안의 병실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율은 머뭇거리며 주변을 힐끔거렸다.
“나가야, 흑, 되는데…….”
무정이한테 가서 사과해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보조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건율은 절뚝이며 침대 옆 의자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최유헌에게 더 맞아도, 그게 나을 것 같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문고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조용한 공간에 갑작스레 울리기 시작한 타격음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건율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의자를 휘둘렀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이유 없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 우울감이 밀려들 때가. 두어 달 전, 버스를 놓친 밤 길거리에서 한번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평소와 지금이 다른 건 절망감으로 문을 내리치고 있다는 것뿐이다.
“저, 저기, 그만하세요!”
그제야 누군가가 달려와 바깥에서 소리를 쳤다. 건율은 묵묵히 문고리를 망가트릴 기세로 내리쳤다. 그러자 문 건너편 간호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이러다 고장 나면 문이 아예 안 열려요, 열어 드릴 테니 그만하세요!”
문고리를 아예 뜯어내면 되지 않을까. 의자를 내리치는 힘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때,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아래로 내리찍던 의자를 누군가 손으로 받쳤다.
“죄송해요, 제 동생이 좀… 아파서. 오늘은 집에 데려갈게요.”
무정이가 아니네. 그가 이곳에 올 이유는 없었지만, 최유헌이라는 사실이 왜 이리 심술 날까.
건율은 손에 쥔 의자를 놓지 않았다.
그래, 최무정은 제가 거절했다. 최유헌이 좋다고, 꺼져 달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가 안 오는 건 당연했다. 너무나 당연한 건데, 길들여지기라도 했는지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좋아한다면서, 도와주지. 하루도 안 빠지고 스토킹을 그렇게 했으면,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것도 알아야 하잖아. 저를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게 어째서 이리도 서럽게 느껴질까.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누군가의 눈길이 이제는 느껴지질 않았다. 모든 원인은 저였다.
건율은 의자를 빼앗는 대로 빼앗기고, 부축하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최유헌이 간호사들과 무어라 대화를 하고, 자신을 끌고 나가는 게 느껴졌다.
정신을 놓고 있던 사이 둘은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건율은 최무정이 보고 있다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최유헌이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 강제로 태워진 차 안은 선뜩할 만큼 추웠다. 건율은 조수석 앉아 흐리멍덩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이래서야 짐승과 다를 게 무언가.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도살자 앞에서는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미친 사람처럼 의자를 휘둘렀으니, 어디 가서 비열하고 용기 없는 사람이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미쳤냐?”
“아니…….”
“그럼, 씨발 왜 지랄이야?”
차 안으로 길거리의 네온사인이 연하게 들어왔다. 건율은 눈을 내리깔았다. 가야 하는데, 최무정한테. 너무 심한 말을 한 거 같으니까 사과해야 하는데.
“자꾸 딴생각할래?”
최유헌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상체가 전부 휘청일 정도로 상당한 힘이었다. 건율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대답.”
“으, 으응.”
“아……. 진짜. 야, 거기가 어딘지 아냐?”
“병원…… 아니야?”
“씨발,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험상궂은 말투와 얼굴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건율은 절절 기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
“쪽팔려서 다신 못 가겠다, 저긴.”
“…….”
“대답하라고.”
“미안해.”
사과를 들어도 후련하지 않은지, 최유헌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시동을 걸었다. 건율은 그가 팔을 들어 머리를 넘길 때도, 크게 놀라 숨을 참았다.
최유헌의 행동 하나하나를 그의 개라도 된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건율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몸을 쑤셨다. 곧 시동을 건 차 안에서 적당히 미적지근한 히터가 나왔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건율은 매번 저를 태워다 주었던 최무정의 차가 타고 싶었다.
최유헌은 한참 말없이 운전했다. 불쾌함이 자욱하게 깔린 얼굴로 밤 12시가 되도록 달렸다. 건율과 최유헌이 병원에서 나온 시간이 11시였으니, 대략 한 시간은 달린 셈이다. 건율은 차 안에서 몇 번을 졸았다. 우습게도 경계심이 낮춰진 건지, 피로한 몸과 히터 덕분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꾸만 잠이 쏟아졌고, 건율은 정신을 차리려 노력을 했다.
어느덧 화려한 빛으로 치장된 건물이 가까워졌다. 최유헌은 건물 앞에 미끄러지듯 차를 세우고, 먼저 내려섰다. 덩치가 큰 남자들이 차 근처로 다가와 문도 열어 주었다. 건율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렸다.
“다른 데 보지 말고, 나 잘 보고 따라와.”
최유헌이 제 소매를 붙잡게 했다. 건율은 그 끝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눈을 가늘게 뜨면 꼭 물속에 있는 것처럼 시야가 흐리다. 천장에 걸린 반짝이는 조명들이 서로 부딪치고 반사되어 희미한 광을 뿜었다.
건율은 고개를 숙인 채로 그것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꿈꿔 보기는커녕, 이런 곳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내부는 꼭 호텔과 비슷했는데,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과 대리석으로 이뤄진 상앗빛 벽과 몇 개의 보석이 달려 있는지 모를 샹들리에들이 그러했다.
“처음 와 보냐?”
“으응.”
최유헌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게 했다. 건율은 얻어맞은 제 꼴이 부끄러운데, 최유헌은 숨기지 못하게 했다. 5년 전에도, 또 병원에서의 일 이후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던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쪽으로 들어서자 단아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반겼다. 건율은 난감한 얼굴로 마주 인사하다가 최유헌이 끌어당겨서 그만두었다.
최유헌은 직원에게 열쇠 하나를 받고, 곧장 직진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처럼 빠르게 걷다가 건율이 절뚝이는 걸 보고 속도를 늦춰 주기도 했다. 그걸 보자 괜히 5년 전, 저에게 보폭을 맞춰 주던 최유헌이 생각나 건율은 괜히 심란해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아 금세 지워졌다. 건율은 바보 천치처럼 작은 미동도 없이 빠르게 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감탄했다.
“최무정이 이런 데 안 데려오디?”
“어? 으응……. 집, 집에 자주 갔으니까.”
“집에서 떡 쳤다고?”
“……그게, 그….”
지도 병실에서 한 주제에.
건율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꿍쳐 두었다.
이어 최유헌은 커다란 룸에 들어가 건율에게 씻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건율은 아주 조심스럽게 최유헌이 건네준 옷과 속옷을 받아 들었다. 언제 준비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욕실은 건율의 집보다도 컸다. 넓은 곳에서 발가벗으려니 괜히 민망했다. 건율은 낯선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처음으로 해 보는 관계 후 뒤처리는 낯설고 기분 나빴다. 최무정이 제가 자던 사이 이런 걸 했을 거라 생각하니 상당히 복잡 미묘해졌다.
건율은 남자랑 호텔에 온 주제에 다른 남자를 생각하느라 조금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빨리도 나오네.”
순간 울컥해서 ‘네가 뒤에….’라고 뱉을 뻔했다. 건율은 주먹을 쥐고 머리를 수건으로 훌훌 털었다. 차에서 조금 잔 덕분인지 아래의 통증이 조금 덜했다.
아직 잠에서 안 깬 건 아닐까? 건율은 혼자 생각하고 푼수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최유헌이 기묘한 얼굴로 건율을 훑어봤다.
“미쳤냐?”
건율은 그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유는 저도 알 수 없었다.
“아니이.”
미쳤을 리가!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데. 건율은 헤헤, 하고 웃으며 몽롱한 얼굴로 제 뺨을 문질렀다. 이상하다, 기분이 좋다.
그리고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말렸다. 씻고 나니 몸이 노곤노곤해 자고 싶었다. 어쩌다 강간범이랑 같은 침대를 쓰게 됐지만, 그가 이곳에서 못 나가게 할 것 같지만, 한국에 사는 데다 학교에 다니는 입장이니 언젠간 최무정을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건율은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학교 생각이 나자 건율은 내일 학교에 갈 생각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내일은 교수님과 일대일 레슨이 있는 날이니까, 컨디션을 챙겨야 했다. 그러니 최무정을 보면 좋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연습실로 가자. 내일은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니까 오늘 자기 전에 당일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전단지 아르바이트는 잘렸으니, 새로운 곳을 알아봐야 하긴 했다.
건율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닦아 내며 생각했다.
“다 했냐?”
“응.”
강간범이 물어 왔다. 건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건율을 위아래로 짧게 훑어보더니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다정한 목소리에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섬세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는 걸 보니 강간범이라는 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친구였던 건 아닐까?
잠시 흐려졌던 이목구비가 또렷해졌다. 아, 친구였다. 5년 전 최유헌이다.
“내려가자.”
“어딜?”
“술 한잔하게.”
“나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건율의 말에 최유헌이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곤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듯, 골똘히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가 질문했다.
“내가 학교 가지 말라고 말 안 했던가?”
“왜? 나 빠지면 안 되는데.”
“왜.”
“장학금 받아야 하잖아.”
“장학금?”
“대학 다니는 대신 성적 장학금 받기로 약속한 거, 말 안 했어?”
몸이 뻐근한 걸 보니 연습을 과하게 한 모양이다. 피아노 의자는 대체로 등받이가 없어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연주해야 했다. 생각해 보면 최무정은 덩치도 산만 하면서 작은 의자에 앉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사이즈가 다른 의자를 쓰려나? 하지만 연습실 의자까지 바꿔가며 하기엔…….
“이 새끼가 이젠 별…… 지랄을 다 하네. 됐고 따라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최유헌이 답지 않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목을 잡아당겼다. 건율은 꽤 크게 놀랐지만, 오늘 힘든 일이 있었구나 싶어 순순히 따라가 주었다. 학생 때도 욕 한 번을 하지 않았는데, 어른이 되니 그러기 쉽지 않은가 보다.
건율은 내일 학교에 갈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씻을 때 옷을 벗으며 어딘가 두었겠거니, 하고는 내일 첫 강의가 몇 시였는지 머리를 굴렸다.
오전 11시라는 걸 떠올렸을 때는, 최유헌과 함께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뒤였다. 건율은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시는 건가 싶어 제 옷을 한 번 살폈다. 다행히 꼬질꼬질하지 않았다. 딱 들어맞는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는 꼭 연주회 복장과도 비슷했다. 정장을 살 돈이 없던 건율은 20살이 넘어서도 이렇게 입곤 했어서, 갖춰 입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최유헌은 차를 타지 않고, 비상구 쪽으로 들어섰다. 안쪽에는 직원용 엘리베이터실이 있었고, 건율은 친구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안 아프냐?”
“뭐가?”
“거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최유헌이 슬쩍 턱짓을 하며 물었다. 건율은 제 허리 부근을 가리키기에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겸연쩍게 끄덕였다.
“괜찮아.”
최유헌은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건율을 훑어보았다. 씻고 난 후로 상태가 이상해진 듯싶었다. 본래 이랬던가?
“너, 뭔가 이상한데.”
“뭐가? 나 안 이상한데?”
미친 사람 보는 듯한 시선에 기분이 조금 상했다.
“미친 거 아니야? 아니면 아까 머리라도 다쳤어?”
건율은 제 친구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친구의 입이 험했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건율은 오히려 최유헌이 이상했다.
“여기선 아까처럼 안 봐줘. 버릇 못 고치는 개새끼 소문낼 생각 없거든.”
버릇? 개새끼?
건율은 제게 무슨 버릇이 있었는지 생각해 봤다. 그랬다가 버릇을 못 고치는 건 제가 아니라 ‘개’의 이야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한데 최유헌은 개를 키우지 않았다. 저도 마찬가지였다. 뜻을 알 수 없어 물어보고 싶었는데 최유헌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지하 4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건율은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러다가 제 뺨에 손이 스치고 말았다. 뺨은 누군가가 세게 후려친 것처럼 퉁퉁 부어, 스치기만 해도 따끔거렸다.
왜 다쳤지? 맞은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뿌옇다. 생각을 하려고 하면 눈앞이 희멀겋게 변해서는, 삐이이 하고 이명이 들렸다. 뇌 속에 동그란 쇠구슬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머리도 돌았다. 아무렴 어떠냐 싶어 고개를 드는데, 째질 듯한 소음이 귀를 강타했다. 건율은 번뜩이는 조명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겨우 떴다. 최유헌이 손목을 잡아 거세게 당기고 있었다.
“빨리 와.”
쏟아지는 여러 사람의 말소리에 귀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은은한 조명이 캄캄한 공간을 비추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샹들리에가 반짝거렸다.
“A룸에 계십니다.”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라운지 바는 생각보다 넓었다. 넓은 테이블에 화려하게 꾸민 남녀가 둘러앉아 있었고, 안쪽에는 문이 줄지어 있었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꽤 높았고, 사람도 무척이나 많았다. 건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들을 구경하다, 최유헌의 재촉에 급히 걸음을 빨리했다.
몹시 캄캄했으나 앞을 헤맬 정도는 아니었다. 둘은 곧 안쪽 깊은 곳에 있는 룸으로 안내받았다. 독특하게도 잔잔한 음악이 아닌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라기보다는 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진짜 클럽처럼 춤을 추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좋은 시간 되세요.”
직원이 문을 열자, 안쪽에서 지독할 만큼 진한 술 냄새가 났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최유헌은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힐끗 보니, 다른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야, 유헌아!”
“와……. 이 새끼, 이게 얼마만이야?”
“한국 오자마자 여자라도 생겼냐? 퍼뜩 안 오고 왜 이렇게 늦게 와, 새꺄.”
다들 최유헌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건율은 쭈뼛거리며 최유헌의 뒤에 서서 룸 안쪽을 훑어보았다. 반갑게 인사해 오는 사람은 세 명의 남자였지만, 그 외에도 더 있었다. 그중 두 명은 여자였고, 한 명은 남자였다. 인사를 하지 않는 세 명의 분위기가 묘했다.
“바빠서. 잘 지냈냐?”
“뭐, 외국 연놈들 맛은 어떠냐?”
“이 새끼 후장 안 먹는 거 알잖아.”
“야, 거기 사내새끼들이 얼마나 예쁜데. 함 해 봤을 수도 있지.”
노골적인 대화에 귀가 멍멍해졌다. 건율은 최유헌을 따라 옆자리에 앉았다. 둘이 맛있는 걸 먹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서 속상하다. 왜 모르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야 할까. 이럴 거면 나는 놓고, 혼자 오지.
“거기선 안 해 봤고, 술이나 따라 봐.”
“네네, 최유헌 님 말씀이신데요.”
“센 걸로 드려라, 이번에 새로 나온 것도 같이.”
“신나게 하고 들어왔을 텐데?”
눈치를 보니 세 친구들 옆에 앉은 사람들도 저처럼 눈치만 보고 있었다. 건율은 두 손을 마주 잡고 꼼지락거렸다.
거구의 남자가 최유헌의 잔에 술을 왈칵 부었다. 그러곤 작은 봉투를 열어 잔 위에 살살 털었다. 핑크빛에 가까운 고운 가루였다. 건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얘 거도 하나 줘.”
“응? 누구?”
최유헌은 제 잔을 받자마자 건율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러자 거구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건율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눈살을 찌푸리고 위아래로 훑어보는데, 분위기가 무척 매서웠다.
“얘?”
“어. 줘.”
하지만 건율은 잘못한 게 하나 없었다. 늘 저를 챙겨 주던 최유헌이나, 애인인 최무정에게는 달랐지만, 그는 본래, 마냥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똑바로 눈을 맞춰 쳐다보자 거구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이더니 건율 앞에 놓여 있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최유헌의 잔에 했던 것처럼 핑크색 가루를 뿌렸다. 앞선 것보다 많은 양이었다.
“마셔, 율아.”
“…어…. 나, 빈속이라 이따 마실래.”
“지금 마셔, 안주 시켜 줄 테니까.”
이미 테이블엔 음식이 담긴 접시가 여러 개 놓여 있었지만 건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 남긴 걸 먹고 싶지 않기도 했고, 굳이 사 준다는 데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간만에 보는 친구가 술을 권하는데 누가 거절할까.
건율은 거구가 준 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핑크색 가루는 액체 안으로 들어가니 반짝반짝하니 빛을 냈다. 연한 주홍빛 술에 스며들어 가는 선홍빛이 몹시 예뻤다.
“천천히 마셔도 돼.”
“응.”
술을 자주 마시진 않아 주량은 몰랐지만, 취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건 알았다. 건율은 꽤 독해 보이는 술을 홀짝거렸다. 입술만 적실 정도로 입을 대자, 최유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빤히 쳐다보았다.
“말 잘 듣네. 좀 더 마셔.”
“으응.”
꼭 어린 동생을 대하는 듯한 말투다. 건율은 잠시 자존심이 상해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좋아했던 친구인 만큼 봐주기로 했다.
몇 번 마셔 봤던 소주나 맥주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목이 뜨겁게 달아오를 만큼 독하기도 했고, 끝 맛이 달달해 구미를 당겼다. 아마 최유헌이 더 마시라고 하지 않았어도, 계속해서 마셨을 것이다.
1cm나 줄어들었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직원이 들어왔다. 최유헌은 직원에게 메뉴판을 밀어내며 툭툭 말을 던졌다.
“이거랑 이거.”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군말 없이 주문을 받고 나갔다. 주문 확인할 때 뭘 시켰는지 들으려 했던 건율은 조금 섭섭했다. 근데 또 친구들과의 대화를 시작한 최유헌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입술만 축였다.
그러다 건율은 속이 쓰려 잔을 내려놓았다. 푹신하고 길쭉한 의자에 등을 대며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머리가 핑 돌더니 눈앞이 흐리멍덩해졌다.
“조심해.”
“……어, 어어…….”
“벌써 취했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최유헌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율은 반 이상 비워진 최유헌의 잔을 보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쟤는 저만큼 마셨는데 왜 안 취하지, 하는 억울함이었다.
“서건율? 건율아?”
“이름이 서건율이야? 몇 살이야, 걔.”
“20살? 설마 고딩은 아니지?”
“동갑이야.”
여러 개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뒤엉켰다. 몸이 완전히 옆으로 쏠리자, 최유헌이 팔을 잡아 주었다. 건율은 파르르 떨리는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눈을 크게 뜨고 바닥을 노려보아도 정신이 들질 않았다.
이상하다. 아무리 센 술이라고 해도, 고작 이만큼 마시고 취할 리가 없다. 그것도 이렇게 빨리…….
“정신 차려, 콘치즈 먹어야지.”
“으……. 이거, 술에…… 뭐, 탔, 어?”
“안 탔어, 취한 거야.”
“흐으으…….”
어느 순간 최유헌의 얼굴이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최유헌의 어깨에 손을 얹자, 제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건율은 홧홧하게 뺨을 붉히며 물러나려다가 허리를 잡혔다.
“넘어간다, 뒤로.”
“나, 나……. 놔줘. 많이, 흐, 많이 취한 거 같……아.”
“싫은데.”
최유헌의 말에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건율은 고개를 돌렸다가, 한 여자랑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잠깐 보았던 표정은, 안쓰러운 것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왠지 모를 수치심이 들었다. 건율은 아이 취급 당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최유헌을 밀어내려 했다.
“내려 줘…….”
“싫다니까? 내 말 안 들려?”
“드, 들려……. 으, 어지러, 워…….”
누군가 룸 안으로 들어왔다. 접시와 테이블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참 났다. 건율은 할딱이며 온몸으로 최유헌을 밀어냈다. 어쩐지 그와 닿는 살갗이 자꾸만 간지럽고 뜨거운 듯했다.
“너 좋아하는 거 왔다. 먹을래?”
“으, 흐으……. 하아, 흑…….”
입을 닫으면 열기가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가슴 안쪽에 누군가 불을 붙인 것처럼 타오르는 감각이 들기도 했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상했다. 술에 취한 정도가 아니었다. 살짝 어지럽거나, 메스꺼운 것과는 달랐다. 팔다리에 힘이 쭉 빠져 반항이 쉽지 않았고, 피부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작은 스침에도 소름이 돋았다.
건율은 최유헌에게 양쪽 손목이 잡힌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최유헌은 건율의 손을 내려 주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추켜올렸다.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대자 어지럼증이 조금 덜했다.
“자, 아.”
최유헌이 턱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졌고, 건율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눈을 떴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입술 사이로 들어온 것은 주겠다던 콘 치즈도 아니고, 기다리던 다른 안주도 아니었다. 뜨거운 숨을 단번에 삼킨 것은 최유헌이었다.
“으, 후읍, 응……!”
“최유헌 급하냐?”
“쟤, 처음해 보나 본데? 약빨 존나 잘 드는 거 보니까.”
5년 전, 최유헌을 좋아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건율은 사귀는 사람이 있었고, 최유헌은 과거의 사랑일 뿐이었다. 아주 조금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흐으, 흡, 으읏, 으!”
심장 박동이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야가 모두 시뻘겋게 변했다. 금방이라도 심장을 토해 낼 것만 같았다. 주변의 시선이나, 저를 향한 음담패설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건율은 최유헌의 어깨를 짚어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 손목은 금세 붙잡혀, 최유헌의 손아귀에 덥석 감싸진 채로 몸이 딸려 올라갔다. 최유헌은 깊게 혀를 밀어 넣으며 건율의 상의를 위로 끌어올렸다. 물컹하고 뜨뜻미지근한 살덩이가. 그리고 큼지막한 손이 속살을 마구 헤집으며 파고들어 왔다.
“응, 으읏, 읍…. 흑….”
건율은 어깨를 비틀고, 턱에 힘도 주었지만 온통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목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받친 최유헌이 건율을 집어 삼킬 기세로 입술을 짓이기고, 혀를 빨았다.
눈을 질끈 감고 앓는 소리를 내며 온 힘을 다해도 최유헌은 밀려나지 않았다. 그가 강하게 잡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양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꼭 힘줄이 끊어진 듯했다. 악몽과 비슷했다.
“흡, 하아! 하아, 하아……. 헉, 하아…….”
호흡이 부족해 죽겠다, 싶은 순간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목에 힘이 없어 고개가 앞으로 쏠렸다. 건율은 최유헌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할딱였다.
“마음에 들었나 보네, 새끼.”
“한국 오고 연락 늦은 거 걔 때문은 아니지, 너?”
최유헌이 왜 이러는 것일까. 본래 입맞춤이랑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것으로 아는데, 왜 최유헌이 저에게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5년 전부터 지켜봐 온 제 친구는 단 한 번도 사랑이 담긴 눈을 하지 않았다. 제가 몰랐다고 하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이었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자 했다. 그러나 커다란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왔을 때는 다시 화들짝 놀라며 밀어내기 급급했다.
“하지, 마……. 뭐 하는, 흐, 거야……. 유헌, 유헌아, 하지…. 읏, 아, 싫……. 싫, 어.”
“안 봐준댔지, 서건율.”
몸이 뒤로 휙 밀려났다. 그 어지럽던 테이블이 언제 정리됐는지, 건율이 그 위에 눕혀졌다. 차가운 대리석 테이블에 소름이 확 돋았다. 시리도록 찬 얼음과도 같았다.
“으……!”
허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두툼한 손이 동글동글한 무릎을 잡아 단번에 양옆으로 제쳤다. 건율은 파르르 떨며 천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새까만 눈동자에 조명이 무감각하게 비춰 반짝거렸다. 벌어진 입술과 얼이 나간 듯한 표정에도 최유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른 몸을 턱, 잡아 돌렸다.
입고 있던 후드 티가 위로 완전히 말려 올라갔다. 건율은 이제 테이블에 뺨을 댄 채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러다 지켜보던 거구의 남자가 저를 샅샅이 훑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수치심이 열기가 되어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건율은 벌벌 떨어 가며 팔을 뒤로 뻗었다.
“유, 유헌아……. 하, 하지 마, 이러지, 흑, 흐으, 이러지 마……. 윽!”
최유헌은 드러난 등허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동그랗고 탄탄한 둔부 사이로 끈적한 액체를 들이부었다. 구멍이 놀라 수축하자, 최유헌은 힘을 빼라는 듯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두어 번 내리쳤다.
피부가 평소보다 배로 예민한 탓인지, 거칠고 커다란 손의 감각이 선명하게 새겨지는 듯했다. 굴곡진 손바닥, 긴 손가락과 흥분된 숨소리. 최유헌은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반쯤 발기한 건율의 성기를 손끝으로 툭툭 쳐올렸다.
“좋아 죽으면서, 아닌 척할 거야?”
“이, 흐윽, 이건…. 앗, 아!”
귀두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 흘렀다. 건율은 도리질 치며 발끝으로 테이블 바닥을 밀어냈다. 최유헌은 구멍에 손가락을 깊게 찔러 넣고, 대충 쑤셔 풀었다. 한 번 했던 덕분에 구멍은 아직 눅진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곤 건율의 몸을 다시 잡아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건율은 골 사이에 닿는 커다란 물건에 헛숨을 들이켰다.
“유헌, 유헌아, 왜… 왜 이러는, 거야…. 흐, 흑…. 나, 나, 네가 왜, 이러는지…. 아, 흑…!”
생경한 감각이 묘하게 익숙했다. 건율은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마저도 손에 힘이 없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와중에도 최유헌은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며 건율의 골에 쿠퍼액을 질질 흘렸다.
“우리, 흐, 우리 친구…인데, 왜, 흑, 아, 으으, 흑, 싫, 싫어…. 거기, 싫어어…!”
여린 점막 사이로 거칠게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긁어내렸다. 건율은 도대체 제 친구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감각이 익숙한 저도 싫었고, 최유헌이 익숙한 듯 극점 주위를 살살 굴려 오는 게 낯설었다. 꼭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 외에 무언가가 더 있는 듯했다.
“닥쳐, 좀.”
무표정하던 최유헌이 실실 웃으며 상체를 갑작스레 숙였다. 가까워진 얼굴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자, 찔꺽이며 아래를 뒤적이던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나 깊은 곳을 꾹꾹 짓누르기 시작했다.
“흐, 아!”
놀라 허리를 들썩이자 지켜보던 남자들이 웃었다.
“어디서 또 이런 새낄 데려왔냐.”
“최유헌이 데려오는 애들 보면 존나 박고 싶게 생겼다니까.”
한참을 찔꺽이던 최유헌이 손가락을 빼냈다. 그제야 한숨 돌리며 고개를 들자, 아까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최유헌의 친구들은 각자 데려온 사람을 희롱하거나, 성행위에 몰입하고 있었다. 건율은 그중 몇몇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몹시 익숙한 듯했다.
“하아…. 건율아, 앞으로 돌아봐.”
“유, 유헌아. 나 이거, 이거 하기 싫어.”
“왜 또 지랄이야, 아깐 잘만 했잖아.”
건율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나 그 짧은 움직임에도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럼증이 일었다. 건율이 비틀거리자, 최유헌이 허리를 잡아 앞으로 고정시켰다. 그는 이쪽을 힐끔거리는 제 친구들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행위였고, 녀석들과도 비슷한 사이였으나 오늘은 왜 이리 불쾌하게 느껴지는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최유헌은 자리를 뜨는 대신 건율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건율이 저를 맞대고 보도록 한 뒤 천천히 구멍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으, 흐윽, 윽, 아! 아, 아파아…. 아파, 흐, 끄윽, 싫, 싫어….”
“질질 싸면서?”
“아냐, 싫어, 싫, 흐윽, 아! 으…. 하지, 하지 마…. 유헌, 아, 하지 마….”
서건율의 상태가 묘하게 이상했다. 굳이 때를 잡는다면 그가 병실의 문고리를 망가트리려 했을 때부터였다. 최유헌은 좁은 내벽이 꿈틀대며 제 것에 달라붙어 오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성기를 다 삼키지도 못했는데, 뒷구멍의 주름이 모두 펴져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보였다.
“아… 아, 아! 아파, 흑, 흐읏, 응! 아, 앗, 아!”
최유헌은 인상을 찌푸리고 허리를 치켜올려 끝까지 처박았다. 깊은 곳으로 쑤셔 박힌 좆에 건율이 꺽꺽대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하얀 목덜미와 쇄골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가만 보고 있던 최유헌이 쇄골에 선명하게 남은 제 흔적을 발견했다. 살갗이 뜯겨 새빨갛게 드러난 속살이 보기 흉할 법 한데도, 나쁘지 않았다.
“건율아.”
“으, 흐윽! 아, …거, 거기는, 흑, 왜, 흐, 아, 아파아……!”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자 건율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벌어진 음부가 뻐끔거리며 제 아래를 뚫은 성기를 물었다가 풀었다가 반복했다. 최유헌은 속살이 강하게 수축하며 떨려 오는 것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건율의 허리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가, 겁에 질린 얼굴을 보며 강하게 짓쳐 올렸다.
“아, 아윽! 하으으…. 흑, 아…!”
몸을 완전히 들어 올릴 때마다, 어깨를 잡고 매달려 오는 게 퍽 귀엽다. 넋이 나가 울고만 있는 눈이나, 좆을 끝까지 빼내면 쿠퍼액을 질질 싸 대는 뒷구멍이나 야하기 그지없었다. 최무정은 저항하지 못하는 몸을 잡고 위아래로 억세게 흔들어 박았다. 깊게 쑤셔 박을 때마다 살과 살이 부딪쳐 철퍽이는 소리가 선명했다.
“흐으으…. 흑, 끄윽, 흑, 으응, 읏, 아, 아으, 흑…….”
건율은 이제 최유헌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할딱이기 바빴다. 최유헌은 건율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고 아래에서 위로 무자비하게 쳐올리며 더운 숨을 뱉었다. 마치 짐승의 행위처럼, 최유헌은 정신없이 박아 대기 바빴다. 내벽이 요동치며 좆을 조여 오면 기둥에 혈관이 빳빳하게 솟아 속살에 선명하게 닿아 왔다.
최유헌은 살짝 볼록하게 나오는 건율의 배를 보다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압박감에 건율이 끅끅대며 매달려 왔다. 어찌나 야하게 느껴 대는지, 주변 놈들의 시선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최유헌은 잠시 고민하다 건율을 끌어안은 채로 제가 벗어 둔 코트를 앞으로 걸쳤다. 그러자 건율의 머리털도 보이지 않았다.
“야, 나 올라간다.”
“뭐? 야, 말이 다르잖…!”
“왜. 니들도 얘 따먹고 싶어?”
최유헌은 건율의 엉덩이 아래에 손을 받쳤다. 한참 파트너를 희롱하던 남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최유헌의 친구는 대체로 아버지의 사업과 이어진 녀석들이었다. 서로 이득을 보는 관계였으나, 그중 최유헌의 콩고물을 먹으려 붙는 놈들이 많았다. 놈들은 시선을 휙 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건율은 코트가 어깨에 닿는 것조차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입술을 안쪽으로 세게 물었다.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애액이 흐르는 것 같았다. 둔부로 천천히 굴러가던 물이 어디로 떨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한계까지 치달은 쾌감은 거의 고통에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울 듯했다. 건율은 최유헌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울음을 참았다. 성기가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올 때마다 건율은 이상한 생각을 했다.
왜 내가 또 강간범이랑 있지, 근데 왜 유헌이가 있을까. 아까는 유헌이를 강간범으로 잘못 봤는데, 왜 이번엔 반대가 됐을까.
기이한 생각들이 엉망으로 얽혀 들어왔다. 꼭, 무방비 상태에서 거대한 해일에 휩쓸리는 것처럼 건율은 제대로 된 생각을 정립하지 못했다.
건율이 아는 최유헌은 이런 사람이 아니니까, 아까 저를 강제로 범하던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는 길은 유헌이와 함께였다.
근데 왜 지금은 또 사람이 바뀌었을까? 눈이 이상해진 걸까? 하지만 이 정도로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 뇌의 문제가 아닐까? 그럼 피아노는 제대로 칠 수 있을까? 그건 안 되는데. 제게 남은 것은 피아노뿐인데. 그게 없으면 최무정도 저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을 텐데.
파고드는 좆은 익숙했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며 박아 대는 움직임이나, 거센 숨소리조차 낯설지 않았다. 건율은 그제야 강간범과 최유헌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래,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니구나. 유헌이가 나쁜 사람이 된 거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유헌이에게 힘든 일이 많았을까? 아니면 제가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그에게 이런 걸 허락해 준 것은 아닐까? 제 탓일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의 최유헌은 늘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째서 그가 제게 그런 짓을 했는지, 그 앞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떠오르지 않았다. 건율은 5년 전 최유헌과 지금의 최유헌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제가 이상해져서, 이런 착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최무정이 너무, 너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죽을 만큼. 지금 본다면 꽉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최무정이 싫어해도 이젠 제가 그의 스토커가 될 자신도 있었다.
앞으로 학교는 어떻게 될지, 성적은 어떻게 될지, 제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감정에 휩쓸렸으니까. 흘러간 시간에 두려워하는 것보다, 당장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건율은 누군가는 멍청하고, 부끄러운 감정이라 욕해도 들을 자신 있었다.
그때, 코트 안쪽에 봉지 하나가 보였다. 핑크색 가루가 꽉 차 있었다. 건율은 그걸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제가 먹은 것이 약이었구나, 했다. 마약은 한국에서도 꽤 구하기 쉬웠지만 건율은 모르던 사실이다. 건율은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다시 최무정을 떠올렸다. 여기에 더 있다간 약에 중독이 될 만큼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건율은, 최유헌이 자리를 옮기고자 일어났을 때 힘껏 몸을 비틀었다.
잠시 방심했을까, 최유헌이 놀라 ‘어’ 하고 소리를 냈다. 건율은 온 힘으로 주먹을 쥐고 최유헌의 어깨를 내리쳤다. 여전히 어지럽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큰 타격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건율은 곧바로 테이블에 손을 뻗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자 엉덩이와 어깨에 핏줄이 터질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이 퍽, 하고 와 닿았다. 건율은 간신히 팔에 힘을 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야, 서건율.”
최유헌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건율은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시야를 애써 떨쳐 냈다.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기었다. 문까지의 거리가 야속할 만큼 멀었다. 그러나 문만 열면, 최무정이 있을 것 같았다.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건율은 열기가 띤 얼굴로 온 힘을 다해 기었다.
그 꼴을 내려다보던 최유헌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쳤다. 건율은 꼭 이불을 뒤집어쓴 개처럼 코트를 등에 매달고 바닥을 낑낑대며 기었다. 아래로는 쿠퍼액과 정액을 질질 흘려, 투명하고 끈적한 것이 길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주 조금, 귀엽다는 감정이 들었으나 그건 곧바로 사라졌다. 최유헌은 건율의 배를 걷어찼다.
“이 새끼가 진짜…!”
작은 몸에 데굴데굴 굴러갔다. 건율이 소리도 못 내고 바닥에 처박혀서 벌벌 떨었다. 고개를 든 건율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은 퉁퉁 부어 보기 흉했다. 바지가 질질 끌림에도 건율은 벽에 몸을 기대며 있는 힘껏 기어갔다.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모습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무언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은 듯했다. 이내 정전되어 새까매져 버린 생각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아, 흐윽!”
최유헌은 무아지경으로 건율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건율이 그래도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이젠 헛웃음을 터트렸다.
결코 약한 약이 아니었다. 약을 꽤 자주 했던 저도 초반엔 정신을 잃을 뻔했으니까. 처음 해 보는 건율은 아마 온몸의 힘줄이 빠진 것과 같은 기분일 터다. 나른하다거나,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 분명함에도 일어나는 것이 기가 찼다.
그만큼, 그렇게나 제가 싫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억지로 범했으니 당연한 것임에도 짜증이 치밀었다. 저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제 의지를 모두 버리고 제 말을 모두 따를 만큼 좋아했다. 싫어하는 일을 시켜도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 완강하게 거절한 적도 없었다.
아니, 유학에 간 뒤에도 제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이게 다 최무정 때문이었다. 그 새끼한테 뒤를 대 주고 나서….
“…아!”
최유헌이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건율의 오른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제야 기계처럼 움직이던 건율이 벌벌 떨며 최유헌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경직된 어깨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해야 하는가.
“소, 손… 손, 놔 줘.”
“구멍이나 대 주는 새끼가, 씨발, 주제도 모르고….”
이곳엔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말없이 건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건율은 부들부들 떨며 도리질을 쳤다.
“유헌, 아, 너… 이런, 이런 사람 아니잖아. 하지 마…. 왜, 왜 이러는 거야?”
“…하.”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대화하면 풀릴지도 모른다. 건율은 필사적으로 최유헌을 올려다보았다. 꽉 붙잡힌 손이 힘없이 그에게 붙들려 있었다.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몸도 이곳저곳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코피까지 흘렀다. 건율은 팔뚝으로 코피를 눌러 닦았다. 하얀 살결에 진한 혈흔이 남았다.
“혀를 뽑아 버려야 닥칠 거야, 응?”
“그, 그러지 마.”
“그럼 말을 잘 들었어야지……. 율아, 너 이거 뭔지 알아?”
최유헌이 붙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에 건율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깍지가 껴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건율은 코앞까지 다가온 두려움에 끅끅대며 설움을 참았다.
“하지 마…. 나, 나… 그러면, 흑, 안 되는 거 알잖아.”
“근데 네가 자꾸 빡 치게 하잖아.”
“잘못, 잘못했어. 나 근데, 근데 네가 너무 무서워. 지금…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땀에 젖은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최유헌은 건율을 서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친구들은 흥미롭다는 듯 술을 홀짝이며 쳐다보고 있었고, 그들의 파트너는 고개를 돌리거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힐끔거렸다.
그러자 최유헌이 건율의 몸을 세워 테이블에 처박았다. 머리가 지잉 울렸다. 그가 다시금 허리를 짓이기듯 눌러 오며 엉덩이를 위로 들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건율은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힘껏 움직였다. 그래 봤자 크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약 기운에 더욱더 잠식되는 듯했다.
쾅!
그때, 문이 부서질 듯한 굉음을 냈다. 여유롭던 남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최유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건율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건율아, 다 네 탓이야. 네가 가만히만 있었어도.”
“아, 아, ….흐, 아! 아윽! 시, 싫, 싫어, 하, 하지…. 아악!”
한 손으로 허리를 들어 올리던 최유헌이 여전히 깍지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관절 하나하나에 억센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건율의 손가락은 마른 가지처럼 그의 움직임에 뒤로 휘어졌다.
“아, 아파, 아파! 하지, 하지 마아…. 싫, 어어…. 흑, 흐으…악! 아윽, 흑, 끅…. 악!”
비명이 커질수록, 뒤쪽의 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건율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테이블에 눌려 꺾이는 제 손가락이, 괴상한 모양으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악력으로 할 수 있는 짓이었나, 제가 사랑했던 최유헌이 이리도 잔인한 사람이었나.
5년 전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무도 없는 점심시간의 음악실, 커다란 피아노에 앉은 건율이 최유헌에게 곡을 선물했던 날이었다. 사심이 담긴 곡이었으나 건율은 친구를 위한 곡이라 설명했다. 꽤 오랜 시간 다듬고 다듬어 만든 곡이었다.
최유헌은 건율이 피아노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연주하는 모습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었다.
‘건율이 너라면, 갈 수 있어. 음대도 갈 수 있고, 너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을 거야.’
다정한 목소리가 약한 설탕 조각처럼 부수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거짓이었던 걸까. 저를 응원해 주고, 좋아해 주던 친구의 모습은 모두 가짜였을까. 어째서? 최유헌은 어째서 제게 거짓된 모습을 보여 주었는가?
“아악!”
제가 그만큼 큰 잘못을 했을까. 비어버린 기억을 다시 떠올리면 알 수 있을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최유헌이 이리도 화를 낼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손가락뼈가 우득, 끔찍한 소리를 뱉었다. 잿빛으로 변해 가는 낯에 지켜보던 친구들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말리기는커녕 부서질 듯한 문을 힐끔거리며 약 봉투를 숨기기 바빴다.
“빌빌 기던 새끼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다른 새끼한테…!”
최유헌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외치던 순간이었다. 우지끈,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건율은 제 뒤에서 커다란 무게가 사라짐을 느꼈다. 동시에 무너져 내려 바닥에 쓰러졌다.
방 안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직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건율은 쓰러진 채로 할딱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하구나. 최무정이 보이는 걸 보니까.
그간 몇 번 화난 모습을 봤으나, 지금의 최무정만큼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게는 늘 웃음을 띠던 최무정이 무아지경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지난번엔 그저 장난이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최유헌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때마다 피가 튀었다.
살벌한 타격음에도 건율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최무정이다. 환상이어도 좋다. 진짜 최무정이 아니어도, 지금 이 상황이 모두 제 착각이고 환상이어도 좋다. 꿈이어도 좋았다.
“컥! 허윽, 헉! 아윽! 아악!”
호텔에서의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의 최유헌은 어떻게든 덤벼 보려 굴었다. 그러나 자꾸만 최무정에게 얻어맞아 꼼짝을 못 했다.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었는데도, 최무정은 멈추지 않았다. 엎어진 최유헌을 두들겨 패다가,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곤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피아노를 두드리던 예쁘고 큰 손이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무정, 아….”
건율은 흐릿해지는 시야로 최무정을 불렀다. 접시가 깨지고, 사람들의 비명과 직원들의 말소리가 뒤섞여 당연히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불러 보고 싶었다. 이게 환상이어도 지금 제 앞에 나타나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였다.
“선배.”
그러나 최무정은 늘 그렇듯, 건율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는 단번에 최유헌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우당탕, 최유헌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엉망으로 짓이겨진 얼굴에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는 119를 불러야 한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그랬다간 약을 들킬 거라며 말렸다.
“선배, 선배. 무서웠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화나서… 미안해요.”
“무정아….”
“네, 선배. 나 여기 있어요.”
“흑, 흐으….”
“…건율아, 서건율.”
최무정이 건율을 와락 끌어안았다. 뜨뜻한 품에 들어가고 나서야 건율은 이게 꿈이 아니구나 싶었다. 안도감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동시에, 제가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준 것이 고마웠다.
“나, 나아, 어떡해…. 무정아, 나 손가락, 흐, 흐윽, 아파, 너무 아파아…. 어떡해, 나, 이제 어떡, 끅! 해애…….”
그제야 최무정이 건율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비틀어진 모양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주 잠시,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건율을 들어 올렸다. 제 옷으로 몸을 감싸고, 룸 밖으로 나왔다. 건율은 절 안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다.
룸을 나가자마자, 바깥에 서 있던 세 명의 남녀가 우르르 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최무정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최무정은 아무 말 없이 술집을 나왔다.
최무정은 건율을 뒷좌석에 눕히고 몸을 일으켰다. 건율은 떨어지는 온기가 아쉬워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그러자 최무정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여, 옆에… 있어.”
“병원 빨리 가야 해요. 안 그러면 손가락, 더 힘들어질 거예요.”
건율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낫는다고 해도 재활을 해야 할 테고, 그 시간을 동안 건율은 당연히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뒤처지는 것은 당연했다. 즉, 자신은 이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는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무정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저처럼 못난 사람을 최무정에게 떠넘기듯 안겨 줄 순 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또 서러워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
최무정은 잠시 고민하다 조수석 의자를 뒤로 완전히 젖히고, 건율을 그쪽으로 옮겼다. 저는 운전석에 앉아서는 급히 차 키를 꼽았다.
“이러려고 나 떠났어요?”
“아니, 흑, 아니야.”
“난, 아침에 그런 게 미안해서…. 선배가, 형한테 가는 거 참은 건데.”
“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픈데 사과까지 하려니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 건율은 울먹거리며 울음을 목구멍 뒤로 애써 삼켰다. 혼나는 게 당연한 건데, 왜 제가 서럽다고 우는지. 참 못났다는 생각을 했다. 이젠 스스로도 제 눈물이 지겨웠다. 건율은 입술을 물어뜯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흡, 끄윽…. 흐으, 흑, 흐윽, 흐으으…. 무정아아…….”
“뭘 잘했다고 울어요.”
“모, 몰라, 몰라. 끅, 흐윽….”
최무정의 얼굴엔 건율이 남긴 상처가 선명하게 나 있었다. 뺨 한쪽에 길게 새겨진 상처는 빨갛게 부어 금방이라도 곪을 듯했다. 왜 약을 안 발랐지. 왜 밴드도 안 붙였지. 얼굴에 흉 지면 어쩌려고.
나쁜 짓은 하지 말걸. 당연히 삐칠 수 있는 일인데, 최무정이 삐쳤다고 저도 화를 내서는 안 됐는데. 좀만 조심할 걸, 그럼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았을 텐데.
“무서웠죠.”
“…….”
“늦게 와서 미안해요. 난… 선배가, 형만 좋아하니까.”
차는 도로를 달렸다. 건율은 조수석에 길게 쪼그린 채로 손을 늘어트렸다. 안 아픈 곳이 없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최무정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기억도 못 하고…. 계속 나 싫어하는 거 같아서. 나는 선배가 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니까 너무, 잘못한 거 같아서.”
“아니…. 아니야.”
“난 진짜로 우리가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근데 나만 좋아했다니까…. 난 그냥,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럼, 제가 호텔에 들어갈 때도 지켜보고 있었을까. 지하에 내려갔을 때도….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미안해요, 근처에 있었는데.”
“나도, 미안…. 미안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건율은 팍 새어 버린 제 목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곧 도착해요, 병원. 선배 손 이상 없게 해 줄게요.”
“…….”
“기억 안 나죠, 선배. 선배가 우리 집에서 피아노 쳤던 거.”
뜬금없는 말에 건율이 지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최무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 곡, 선배가 자주 쳤어요. 우리 집에 오면… 많이 쳤어요. 선배가 형한테 준 곡 빼고요.”
“…아.”
조금 기억이 났다. 최유헌의 집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있었는데, 건율이 피아노 학원을 다닌다고 말한 후로 생긴 것이었다. 건율은 타이밍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최유헌이 쳐도 좋다고 할 때마다 좋아하는 곡을 쳤다.
pianotales의 La valse라는 곡이었다.
“선배가 우리 집, 안 왔잖아요. 그니까… 형이 유학 간 후로.”
La valse. 왈츠라는 뜻을 지닌 곡이었다. 따뜻하고, 한없이 다정한 음률의.
“그때부터 매일 들었어요. 그거 듣고 있으면, 선배가 그 방에 있는 것 같아서.”
최무정이 핸들을 돌렸다. 커다란 병원 입구로 차가 들어섰다.
“그니까 난…… 선배가 너무 좋지만, 선배가 내가 싫으면… 그렇게 버틸 수 있어요. 선배 눈에 안 띄게, 선배 옆에 있으면 돼요.”
차가 멈춰 섰다. 건율은 그제야 눈앞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최무정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았다. 두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물을 가득 담은 유리구슬과도 같아 보였다. 곧 깨지진 않을까, 저러다 우는 건 아닐까. 아슬아슬한 마음에 손을 뻗고 싶었다.
“좀 자 둬요.”
* * *
건율이 그렇게 사라진 후, 최무정은 멍한 얼굴로 차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누구에게도 상처 준 적 없던 건율이 제게 남긴 상처가 화끈거려서, 손으로 피를 닦아 냈었다. 그걸 무슨 기분이라고 할까, 반 정도는 좋았고 반 정도는 안절부절못했다. 건율에게 제가 특별한 상대가 된 것만 같았고, 또 건율이 저 때문에 망가진 것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순 없었다. 계속해서 서건율의 흔적을 쫓고, 그를 지켜보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상처를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서건율의 흔적이 제게 남은 것 같아서 흥분이 되다가도, 저를 밀쳐 내고 절뚝이며 도망가던 여린 등이 떠오르기도 했다.
갖기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다. 최무정은 진심으로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간혹 제가 강압적으로 하긴 했어도 사랑하니까 참아 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착각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얼얼했다.
최무정은 제 형을 죽일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청부 살인까지 알아봤지만, 꽤 잘 나가는 집의 아들인지라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직접 할 생각도 있었지만 세상엔 비밀이란 건 없는 법이다. 언젠간 건율이 그걸 알게 되어, 제게 실망하는 건 싫었다.
피아노과에 오게 된 것은 아버지와의 거래에서였다. 어릴 적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아버지는, 사업에 있어 최무정의 성격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어느 순간부터 당신의 사업을 배우게끔 하셨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일을 중시하는 것을 아버지는 퍽 맘에 들어 하셨다. 그래서 회사를 잇는 조건으로 피아노과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최유헌을 유학 보냈다. 그를 멀리 치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건율의 옆에 최유헌이 있는 게 보기 싫었던 탓이다.
제 손을 더럽힐 생각은 없어서 사람을 붙여 두었다. 건율의 마음을 알면서도 가지고 논 최유헌이 고통스럽길 바랐으니까. 그때는 최유헌을 죽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때였다. 언론도, 부모님도 최유헌을 주목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치울 시간이 필요했다.
최무정은 건율이 제 뺨을 긁으며 도망쳤을 때, 적어도 선배가 최유헌의 옆에 있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건율이 슬프지 않았으면 했지만, 이기적인 마음은 그걸 편히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최유헌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그가 약을 하는 걸 알았을 땐 증거를 모아 아는 기자에게 모조리 넘겼다. 확실한 증거를 잡게 해 주겠다는 말도 전했다. 그게 오늘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선배.”
건율은 색색대며 잠이 든 건율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붕대에 감싸진 손을 쥐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부러트릴 생각이었는데. 선배가,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이 모든 걸 포기했을 때… 다시 다가가 제게 기대게 하려고, 그리 생각했는데.
곧고 예쁜 손가락이 피아노를 두드리지 않고, 제 손만 맞잡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거라면, 부러트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선배는 잠시 슬퍼하겠지만 제가 보듬어 주면 될 터였다.
최무정은 고개를 기울여 건율의 베개에 제 머리를 기댔다. 말랑말랑한 뺨이 생기 없이 허옜다.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건데.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진작, 선배가 저를 이토록 싫어하는 걸 알았더라면 그에게 어떠한 것도 주지 않고 저만 보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겠지. 지금은… 제게 기대고 있으니까.
건율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연약한 생명이 저로 인해 숨을 쉬는 것이 보고 싶다. 제가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해 죽었으면 좋겠다. 손가락이 아닌 다리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 시작된 감정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최무정은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더 낭만적이니까. 세상에 단둘이 남아도 행복한 것이 낭만일 테니까.
이번에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도록 서서히 다가가야지. 내가 없으면 숨도 못 쉬는 사람으로 만들어야지. 급하게 다가가지 않고, 천천히… 빗물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다 마모되어 가는 돌처럼, 서건율에게 내 흔적을 남겨야지.
최유헌은 기자들에게 먹이로 던져 줬으니, 한국에선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될 터다. 돈만 있으면 다 막는다는 한국이지만, 인터넷에 한 번 퍼지는 순간 막을 수 없는 것도 한국이었다.
바로 하루 전, 아버지 회사명과 함께 몇몇 신문사들이 터트렸으니 한참 난리가 났으리라. 마약이라면 신명 나게 물어뜯으려 하질 않는가. 날고 기는 연예인도 한순간에 추락하곤 하니까.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명예를 더럽힌 아들을 다시는 받아 주시지 않을 테고.
물론 그것으로 만족하진 않는다. 최무정은 콧노래를 흘리며 건율의 손가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곧고, 굴곡이 예쁜 것이 바이올린 줄과도 같다.
단단한 듯 얼마든지 잘라 낼 수 있을 듯한. 관절 하나하나, 힘줄 하나하나… 모두 제가 끊어 낼 것이다. 그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제 품에서 떨어트리지 않고. 오로지 제 손으로, 스스로 제 품에 들어오게끔.
* * *
얄팍한 속눈썹에 강한 빛이 찌르듯이 쏟아졌다. 건율은 알을 막 깨트리고 눈을 뜬 어린 새처럼 낑낑대며 눈을 떴다. 조명이 너무 눈부셔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러자 누가 그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어둑해졌다.
“선배, 깼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움이 먼저 앞섰다. 건율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최무정을 보고 눈을 휘어 웃었다.
“응, 깼…어.”
확 쉰 목소리에 건율이 잠깐 놀랐다가, 이어 대답했다. 최무정이 더 가까이 다가와 건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최무정의 손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 몰랐다. 건율은 주인의 손에 뺨을 비벼 대는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한숨을 폭 내뱉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었지만, 그리 답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최무정이 허리를 잡아 도와주었다.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병원 옮겼을 거예요.”
“왜?”
“이틀이나 안 깨서.”
새삼스레 자신이 많이 아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율은 최무정의 어깨에 뺨을 대고 부비적거렸다.
마지막 기억은 차 안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걸 보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다 병원에 오게 됐는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악의에 찬 최유헌의 얼굴이, 그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건율은 조금 머뭇거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오른쪽 손에 감각이 없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없었다. 이질감이 든다. 무척이나 이상했다, 그건.
“무정아.”
“네, 선배.”
“나, …손가락은, 뭐래?”
이틀이나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의사도 무어라 말을 했을 터다. 묻기 두려웠으나 건율은 용기를 냈다. 팔뚝에 힘을 줘 들어 올리자 손목이 홧홧하게 뜨거워지며 욱신거렸다.
“윽…!”
“조심, 조심해요.”
“나, 나, 손…….”
불안감이 엄습했다. 눈물이 왈칵 고이자 최무정이 건율을 품에 안아 주고 토닥였다.
“괜찮아요, 좀 오래 걸리겠지만 돌아올 거래요.”
숨이 턱, 막혔다. 망각하고 있던 과호흡이 다시 시작된 것처럼 목구멍이 틀어 막혔다. 몸이 잘게 경련하기 시작하자 최무정이 품에서 건율을 살짝 떨어트렸다. 아니나 다를까 건율이 제어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안, 안 돼. 나… 나 학교, 가야 하는데, 나, 손가락…. 안 돼, 안, 흐윽, 안 돼. 무정아, 나… 흐, 안 돼….”
안 그래도 하얗게 질렸던 피부가 더욱 창백해졌다. 건율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꼭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 울어서 최무정은 다시 그를 안아 주었다.
손가락은 중지와 약지에 조금 금이 갔을 뿐, 빠르게 회복될 것이다. 평소 많이 쓰던 근육인 만큼 의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돌아올 것이라 했다. 그러나 최무정은 곧이곧대로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파, 아파…. 나, 안 돼, 흐윽, 끅…. 흑, 흐으, 흐어엉…. 끅! 흐으으….”
비참한 울음소리가 병실을 가득 메웠다. 최무정은 건율의 머리를 끌어안고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몸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다 나아도, 계속해서 겁을 주며 피아노를 건드리지도 못할 생각을 하니 충족감이 안쪽에서부터 빠듯하게 올라왔다.
최무정도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건율이 최유헌에게 한눈팔지만 않았어도, 평소와 같은 하루를 영위할 수 있었으리라. 결단코 서건율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 모든 건 건율의 잘못이다.
“쉬…. 괜찮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나, 나… 할 줄 아는 거 없어. 흐으, 끅, 이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단 말이야…….”
“다 낫고 나서 해도 돼요.”
“아냐아…. 안 돼, 안 돼애…. 흐으, 흐에엥….”
눈물에 잔뜩 젖은 얼굴이 절망감에 가득 차 있었다. 높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처럼 희망이라곤 한 조각도 없는 얼굴이다. 최무정은 붉어진 눈시울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동그랗고 예쁜 눈동자가 빛을 잃어 허망하다.
무언가를 채우려면, 비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이 눈에 저를 담으면 되었다. 최무정은 건율의 뺨에 입을 몇 번이고 맞췄다. 그때, 테이블에 두었던 건율의 핸드폰이 징징 울리기 시작했다. 최유헌이 빼앗아 제 가방에 숨겨 둔 핸드폰이었다.
“전화 왔어요, 선배.”
“모, 몰라…. 몰라, 흑, 끄윽…. 아…. 흐으읍….”
모든 것을 잃었다. 머리도 나쁘고, 할 줄 아는 거라곤 피아노밖에 없던 인생이다. 이거 하나에만 매달리며 살아온 시간이 10년을 넘었다.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득불 우기며 음대까지 갔다. 매 학기 장학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피아노를 붙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그토록 매달려 온 피아노를 보내 줄 때가 된 것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절망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제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 손가락이 다 나을 때까지 휴학을 할 순 없다. 그 시간 동안 일이라도 해서 제가 까먹은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님이에요, 선배.”
최무정의 말에 건율이 고개를 들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천천히 핸드폰으로 향했다. 최무정의 손 위에 놓인 제 핸드폰은 평소보다 많이 작아 보였다.
“…어, 흑, 어떡, 어떡하지….”
“받아요. 이틀 내내 전화하셨어요.”
자주 전화하시지 않는 분께서 왜 지금, 전화하셨을까. 건율은 잘게 경련하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이로 짓이겼다. 그리고 멀쩡한 왼손으로 핸드폰을 받아, 수락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
- 건율아! 하이고, 건율아….
“어, 엄마.”
수화기 너머 엄마가 흐느꼈다. 건율은 힘껏 울음을 삼켰다.
- 입원, 입원했다며…. 아이고, 내 자식…. 내 아들….
가슴이 묵직해졌다. 커다란 짐 위에, 하나의 짐이 더 올라앉은 듯했다. 건율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병원비는 제가 냈어요. 걱정 마세요.”
그제야 조금 짐이 덜어졌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새끼…. 어떡하니, 응? 많이 다쳤어? 지금은 괜찮고?
“…으응, 엄마. 나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요. 그냥 피곤해서, …많이 잔 거래요. 벼, 병원비도 괜찮아요.”
병원비 얘기에 엄마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가, 숨을 삼켰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주는 용돈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황에 병원비까지 얹힐 생각을 하니,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 엄마가 병원비를 걱정했겠니, 아가. 진짜 괜찮지? 응?
말과는 달리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였다. 이게 현실이다. 건율은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고여 있던 눈물이 매가리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응, 괜찮아요. 친한 후배가 옆에 있어서…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 무정이 말이니? 너 자는 동안 전화 받았어. …그나저나 다행이다, 다행이야, 우리 아들.
“네, 진짜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온몸은 만신창이인데,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혹했다. 건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엄마가 지금 얼굴을 볼 수는 없겠지만, 웃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식당 아주머니인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 그래, 그래. 다행이다. 율아, 근데 엄마가….
“알아요, 제 걱정하지 마세요.”
- …그래, 미안해. 엄마가 찾아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머뭇거리자 또 째지는 소리가 들렸다. 꽤 바쁜 시간인 듯했다. 건율은 서둘러 전화를 마무리했다.
“엄마, 저 피곤해서… 자야 할 거 같아요. 다음에 또 전화해요.”
- 그래, 알겠다. 푹 쉬고…. 한 번 집에 와.
“네.”
전화가 끊겼다. 건율은 눈물이 메마른 뺨을 손으로 슥 훑었다. 그리고 퀭한 얼굴로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붕대에 칭칭 감긴 손은 조금만 움직여도 악 소리가 날 만큼 아팠다.
“학교에도 말해 뒀어요. 성적은 걱정하지 마요. 아니면 한 학기만 휴학해요.”
“…고마워.”
건율은 힘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제게 심한 말을 하고, 얼굴에 상처까지 남긴 사람을 도와주러 오는 사람이 또 있을까. 게다가 일어날 때까지 함께 있어 주고, 병원비까지 내주었다.
건율은 그간 자신이 최무정을 피하고, 그를 나쁜 사람 취급한 것이 미안했다. 쓰레기는 저였다. 할 줄 아는 것 하나도 없는 주제에,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이런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뺨에 긴 상처가 난 최무정이 보였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모두 제가 나빴다. 다 제 잘못이었다. 돈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데다 성격도 더러운 서건율이 나쁘다.
“고마워. …미안. 내가, 상처 주고….”
“아니에요. 내가… 잘못했잖아요. 선배가 싫다는데 제가 계속 강요했잖아요. 싫다고 할 때 내가 그만뒀어야 했는데….”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바보같이 착한 사람. 최무정은 제가 다 피해를 입어 놓고, 저를 위해 헌신해 놓고도 미안해하고 있었다. 이걸 언제 다 갚을 수 있을까. 이 미안한 감정을, 그리고 이제 와 네가 좋아졌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최무정이 머뭇거리며 건율의 왼손을 잡았다. 듬직한 손을 무척이나 따뜻했다. 눈을 맞추자,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선배 일어나는 거 봤으니까 이제 됐어요. 일어났을 때, 내가 있으면… 선배가 너무 싫어할 거 같았는데, 근데도 내가 기다릴 수 없어서 있었어요. 병원비는 안 돌려주셔도 돼요. 그냥, 내가 선배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니까, 받아 주세요.”
“…무, 정아.”
“제가 잘못했어요. 저, 다시는 선배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그간 정말 죄송했어요.”
그리고 그는 손을 뻗어 건율의 뺨을 쓸어내렸다. 건반을 부드럽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연주하듯 움직였다. 뺨에서 턱으로, 턱에서 쇄골로. 붉은 상처를 매만지는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지켜볼게요. 선배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형은 걱정 마세요, 다시는 선배한테 다가오지 못할 거예요.”
쿵, 뺨을 쓸어내리던 손이 심장 위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너무, 너무 아팠다. 건율은 멍하니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급히 손을 붙잡았지만 최무정은 건율의 손을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달이 났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손끝이 욱신욱신 저렸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최무정은 저를 놓은 적이 없다. 항상 그가 먼저 다가왔고, 건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거칠 때가 있었다지만 그건 모두 제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무정은 가장 먼저 건율을 생각해 주었고, 건율을 위해 움직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저를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항상 먼저 잡는 건 최무정이었다. 건율은 밀어내고, 또 밀어내다가 그의 호의를 받곤 했다. 그랬던 최무정이 이제는 저를 밀어낸다는 건… 그만큼 상처를 받았다는 뜻이리라.
모든 걸 잃었는데, 사람마저 잃게 생겼다. 또다시 건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는 나올 눈물도 없는데, 지겹도록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아프면 죽지는 않을까, 숨이 막히는데 왜 죽지를 않을까. 죽을 만큼 힘든 데 죽지는 않는 게 왜 이렇게 무서울까.
“안녕히 계세요, 선배.”
최무정이 몸을 일으켜 병실 문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에 여러 장면이 겹쳤다. 어쩌면 최무정이 최유헌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게 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말렸던 것인데…. 내가, 내가 싫다고.
“악!”
건율은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키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이제 보니 왼쪽 발목에 깁스가 되어 있었다. 건율은 울먹이며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마저도 손목이 욱신거렸다. 서러움에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꾹 참았다. 제가 또 우는 걸 보면, 최무정이 지겨워할지도 몰랐다.
“선배?”
아니나 다를까, 최무정은 저에게 그렇게나 상처를 받고도 비명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굳은 얼굴로 성큼 다가온 녀석이 건율을 살피다 발목을 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선배, 발목… 심하게 삐어서, 일주일간은 잘 못 걸으실 거예요. 괜찮으세요?”
“무정, 무정아.”
“다시 침대로 가요.”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켜 주는데, 그것이 그리 다정할 수 없었다. 건율은 제가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최무정에게 매달리는 건, 나쁜 짓이 아닐까. 이대로 최무정을 보내 주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이 아닐까.
“무정아….”
“네?”
고개를 들자 최무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건율은 또 울컥해서는 입술 안쪽을 이로 짓이겼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안쪽 살이 터져 피가 새어나올 듯했다.
“왜요?”
“나, 나….”
목구멍에 맺힌, 떠나지 말라는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최무정은 잠시 건율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볍게 물었다.
“병원 앞에 공원 있던데, 한 바퀴 도실래요?”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건율은 제가 칭얼거리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무정은 병원에서 대여했다는 휠체어를 가져와 건율을 앉히고, 병원을 나섰다. 병실에서 엘리베이터로, 엘리베이터에서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율은 벌벌 떨리는 왼손으로 오른손 위를 겹쳤다. 붕대에 칭칭 감긴 제 손이 너무나 한심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몇몇 환자들과 의사들, 환자들의 가족들이 보였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손을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이리 비참한 줄 몰랐다. 어쩌면 하늘이 못된 저를 훈육하는 걸지도 몰랐다.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라고, 다가온 사람에게 나쁘게 굴지 말라고 혼을 내는 것 같았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사과뿐일까. 최무정을 붙잡을 수는 없을까. 가지 말라고, 제 곁에 있어 달라고…. 이제 네가 좋아졌다고 하면 이기적인 걸까. 공원을 들어서서 한 생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너, 가 있어 줘서… 좋아.”
힘겹게 말을 꺼냈다. 평소 같으면 뱉지도 못할 말이었다. 건율은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최무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을의 공원은 녹빛이 아닌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최무정을 처음 만났을 때는 여름이 끝나 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금방이라도 겨울이 올 것 같았다. 쌀쌀한 바람에 어깨를 떨자 최무정이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제 옷을 벗어 건율의 다리 위에 덮어 주었다. 이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최무정이 옷을 빌려주었었다. 건율은 물끄러미 그 옷을 내려다보았다.
“무정아.”
“네.”
서늘한 목소리에 잔뜩 기가 죽었다. 다정한 사람을 저렇게 만든 건 서건율 자신이다. 왜 상처를 주었을까, 왜. 때마침 칼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최무정이 다시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나… 한 번만….”
“…….”
“다시 기회 주면 안… 될까?”
늘 먼저 다가온 건 너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용기를 내야 할 때였다. 진작 이랬으면 좋았을걸. 이기적인 인간. 이제 와서…. 다 망가진 후에야 살려 달라고 붙잡는 꼴이라니. 누가 제 모습을 본다면 못돼 처먹었다고 욕을 들이부을 것이다.
“무슨 기회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에 용기가 났다. 건율은 제가 해선 안 될 말을 하는 걸 알면서도, 욕심이 났다.
“내가…. 내가, 이제 잘할게. 미안해, 내가, 내가… 멍청해서, 너한테 그랬, 그랬어.”
쉬어 버린 목소리가 참 볼품없다. 이왕이면 멋있는 옷을 입고, 근사한 곳에서 얘기하면 좋았을 텐데. 최무정은 제게 늘 그랬는데.
천천히 움직이던 휠체어가 병원 뒤편으로 향했다. 주변은 나무가 울창하게 세워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사람은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았다. 뒤쪽 벽에는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바람 소리와 최무정의 숨소리만이 귀에 새겨지듯 고스란히 박혔다.
“뭘 잘해요, 나한테?”
아직도 최무정은 제 뒤에 서 있었다. 건율은 왼손으로 제 팔을 쓸어내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건율은 단 한 번도 사겨 본 적 없는 숙맥이었고, 친구조차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머뭇거리던 건율이 겨우 말을 뱉었다.
“나, 네가…. 네가, 좋, 아.”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표정도 보이질 않으니 불안감이 더욱 커져 갔다.
“네, 네가 싫으면…. 내가 이제, 싫, 으면 어쩔 수 없…. 없, 흑, 겠지만…. 내가…. 내가 그간 나빴…어. 내가, 그니까, 무정아, 내가….”
천천히 굴러가던 휠체어의 바퀴가 우뚝 멈춰 섰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단단한 손가락에 의해 들려졌다. 최무정은 그렁그렁하게 젖은 건율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죄책감에 절여진 얼굴에 웃음이 비집고 나올 듯했다. 최무정은 입꼬리에 힘을 줘 웃음을 참았다.
제 그림자에 갇힌 서건율은 곧 죽을 초식동물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대로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조금 더 괴롭히면… 부서질까.
“나 선배 안 싫어하는데.”
“…….”
“왜 그런 생각을 해요?”
팔 받침대에 두 손을 올려 두고 몸을 숙였다. 벽에 밀어 놓은 탓에 휠체어는 뒤로 밀려 나질 않았다. 최무정은 천천히 건율을 훑어보았다. 붕대에 감싸진 손과 발목. 퉁퉁 부은 뺨과 새빨간 눈두덩이는 예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무정의 눈에는 그리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 그럼 나랑… 계속, 사, 사귀어 줄 수 있어?”
늘 저를 피하던 다람쥐가 드디어 제 손 위에 올라와 먹이를 갈망하는 듯했다. 사람을 피해 도망만 다니던 숲 다람쥐.
최무정은 눈을 휘며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발갛게 물든 얼굴에 누가 참을 수 있을까. 입 안쪽은 뺨이 부어 평소보다 더 좁을 것이고, 필사적인 다람쥐는 어떻게든 입을 크게 열어 제 물건을 삼키려 들 것이다.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참을 생각은 없었다. 최무정은 올망올망한 건율의 눈에 눈을 맞추고 활짝, 꽃처럼 만개하며 웃었다.
“정말요? 정말 나 좋아해요?”
못 미더운 얼굴을 보자 마음이 급해졌다. 건율은 안달 난 얼굴로 그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조, 좋아해. 진짜 좋아해.”
“나밖에 없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 볼 거 아니에요? 이번에도 그랬으니, 다음에 그러지 않을 거란 법은 없잖아요.”
조목조목 따져 오는 말에 건율의 낯이 사색이 되었다. 힘껏 도리질을 치며 건율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몸을 늘어뜨렸다.
“너, 너밖에 없어. 나, 나 엄청 후회했어. 계속 네가 보고 싶었어. 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바보 같았어.”
눈물 고인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최무정은 입가를 올리며 건율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무정아….”
최무정은 고의적으로 건율의 오른손을 잡아 제 아래로 가져다 댔다. 잔뜩 발기한 물건에 건율이 어깨를 떨며 놀랐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해 줄 수 있어요?”
“여기, 여기서…?”
“좋아한다면서… 싫어요?”
실망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 들자, 건율이 힘차게 도리질을 쳤다. 그리곤 청승맞게 울먹이며 최무정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바깥이라는 걸 잊은 사람처럼 다급하게 버클을 내렸다. 움직이지 못하는 오른손으로는 최무정의 허벅지를 붙잡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새빨간 혓바닥이 입술을 훑고 지나가자 더욱 구미가 당겼다. 이곳에서 끝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건율이 그러겠다고 말하길 바랐다.
“어서요, 선배. 나… 급해요.”
“응, 으응, 자, 잠깐, 잠깐만.”
건율은 비굴하게 빌며 한 손으로 최무정의 바지를 내리려 끙끙거렸다. 그러자 최무정이 건율의 손을 치우고, 그의 머리를 제 중심으로 당겼다.
“입으로 해 봐요.”
한마디의 반항도 하지 않고, 건율은 그 말대로 했다. 이를 드러내 지퍼를 내리고 낑낑대며 브리프를 아래로 당겼다. 얼마나 크게 발기했는지 땡땡하게 부어서는 조금만 내렸음에도 좆이 퉁, 하고 튀어나왔다.
귀두가 얼굴을 치자 건율이 발개진 얼굴로 허겁지겁 성기를 입에 품었다. 최무정의 예상대로 평소보다 입 안이 좁았다. 안 그래도 작은 입으로 어떻게든 성기를 삼키려는 모습이 가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최무정은 끙끙대는 건율의 머리를 잡아 깊게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허리를 세게 움직여 단번에 깊게 처박자, 건율이 컥컥대며 눈물이 그렁했다. 휠체어가 벽에 부딪혀 탁, 탁 하는 소리를 냈다.
붕대가 감긴 가련한 손이 허벅지를 짚다 살짝 꺾였는지, 건율이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해 최무정의 좆을 빨고자 했다.
“혀, 내밀어요. 사탕 빨듯이… 훑어요.”
들어가지도 않는 걸 꾸역꾸역 먹으려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최무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른한 한숨을 뱉었다.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으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구는 꼴이 볼썽사납다. 그럼에도 건율은 가련하게 달라붙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 좀 더, 움직여 봐요.”
눈시울이 빨개질 만큼 목구멍까지 밀어 넣고는, 끙끙 앓아 댄다. 건율은 입 안 가득 채워진 성기를 어떻게든 혀로 훑고자 했다. 최무정은 헐렁한 병원복 사이로 벌겋게 지져진 쇄골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병원에 온 날, 반창고를 붙였던 걸 부러 뜯어낸 흔적이 선명했다. 쇄골의 상처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상처가 그대로 남아야 건율이 계속해서 제게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지금으로도 충분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느긋해지기 마련이니까.
최무정은 음모가 닿도록 제 성기를 삼킨 건율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벽에 밀어붙이며 허리를 세차게 밀어 올렸다. 건율이 컥컥대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는 이제 미안해하거나, 거짓된 사과를 뱉지 않았다.
“후……. 선배.”
“으응, 윽, 컥, 헉…!”
사색이 되어서도 제 것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 사랑스럽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그리고 그의 생명을 움켜쥔 손이 망가져 절망에 찬 낯이 꽤 마음에 들었다.
건율의 움직임은 서툴기 그지없었지만 힘겨워하면서도 성기를 오물오물 삼켜 대는 게 아래를 자극했다. 최무정은 잔뜩 부푼 성기를 힘차게 밀어 넣었다가 다시 끝까지 빼내며 추삽질을 했다.
“흐, 컥! 응, 으읏! 흡!”
세상에 단둘이 남은 것처럼 고요하다. 최무정은 건율의 머리채를 잡아 다리 사이로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선배, 뇌는요……. 부정적인 말을 인식하지 못한대요.”
“우읏! 응, 흐윽, 읏, 으응…!”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난 그런 말을 자주 들었거든요. 누구 좋아할 생각하지 말라고. 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언제였더라, 아주 어릴 적 문제아로 찍힌 적이 있었다. 부모님은 처음엔 최무정을 보듬어 주었으나 갈수록 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 내지 못했다. 부모는 돈 많은 집답게 즉시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시켰다. 그리고, 그때 만난 의사 선생이 어린 무정에게 그리 말했다. 사랑할 줄 모르면, 사랑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 말은 부모도 입이 닳도록 말했다. 그리고 최무정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애착은 무엇인지. 좋아한다는 감정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끼던 물건도 망가지면 감정 없이 내쳤고, 애착을 주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최유헌이 그랬거든. 선배 데려온 날……. 선배한테 말도 걸지 말라고, 쳐다도 보지 말라고.”
“흐윽! 윽, 허억!”
잠시 성기가 뱉어진 틈을 타 건율이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삼켰다. 최무정은 다시 부드러운 속살로 좆을 거세게 밀어 박았다. 말캉한 속살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따뜻했다.
“난 그러니까 더 하고 싶더라고. 하지 말라니까 죽어도 하고 싶더라고요.”
아마 시작은, 제 형을 쳐다보며 수줍게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 신기해서, 저도 그것을 손에 쥐어 보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최유헌 또한 그에게 감정이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최무정은 형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3년이 되도록 한 사람만 올곧게 쳐다보는 서건율이 신기하고, 예뻐 보였다.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는 짐승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선배를 사랑하게 만들었어요.”
낭만이란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감성적으로 움직이는 것.
최무정은 어느새 눈물에 푹 젖은 못난 얼굴을 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마찰로 인해 뜨거워진 입천장이 거칠게 긁히도록 허리를 뒤로 빼냈다. 작고 통통한 입술에 귀두를 살짝 걸치곤, 그대로 사정했다. 희멀건 액체가 건율의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니까 이제 선배가 내 현실이 아니면 돼요.”
건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알아듣질 못했다. 그저 목이 아프고, 눈두덩이와 뺨으로 쏟아진 정액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뿐이다. 아프지 않은 왼손으로 눈 위로 쏟아진 정액을 닦아 내자 최무정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죽은 인형과도 같았다. 최무정은 건율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선배가 선택한 거예요, 알죠?”
건율은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야 했으니까.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보자, 최무정은 황홀에 젖어 든 낯을 하고 있었다. 꼭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른했다.
최무정은 바지춤을 정리하곤 제 입술을 혀로 훑었다. 발간 혀가 음란하게만 보였다. 그는 건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더운 숨을 뱉었다. 최무정의 뒤를 빼곡하게 채운 나무들이 술렁이며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낙엽이 먼지처럼 하나둘 떨어져 흙바닥 위로 쌓여 갔다. 건율은 초점이 흐트러진 눈으로 힘없는 두 팔로 최무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누군가 본다면, 하는 두려움은 진작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실과 돈, 미래와 피아노, 살아가야 할 나날들… 모든 것이 환상처럼 흐트러졌다.
호흡이 턱 막힐 때, 그가 제 옆에 있으면 다시금 편안해지곤 했다. 건율은 이제 편해지고 싶었고, 그것은 곧 죽음과도 같았다. 어쩌면 최무정이 올 때마다 편해진 것이 아니라 건율이 죽음을 맞이한 걸지도 모른다.
죽을 만큼 숨이 막히지만, 죽는 것은 아니었다. 건율은 몇 번이고 죽었고, 살인자는 최무정이었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 돌이킬 수도 없다. 잠시도 곁눈질을 해서는 안 되었다. 삶이 무너져 내린다 하더라도, 현실이 망가진다 해도, 제 손에 남는 것이 신기루일 뿐이더라도.
건율은 최무정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다.
나는 최무정을 사랑한다.
나는 최무정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해야 했다. 사랑한다.
아득히 먼, 어딘가에서 건율이 죽었다. 최무정은 죽은 건율을 만족스럽게 보았다. 팔을 풀어내자 건율이 휠체어에 축 늘어져 입술을 벌린다. 마찰로 인해 새빨개진 입술 사이로 희멀건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낭만결핍 FIN
공금.갠소.본문수정有.AngKemTo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