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탄생(2)
집으로 오자마자 신발을 벗기도 전에, 최무정이 건율의 팔을 붙잡았다. 차를 타고 그의 집에 가는 동안, 한마디도 못 하게 했던 최무정은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그래서 건율은 묻는 건 나중으로 미뤘다. 많이 피로한가 싶었다.
하지만 최무정은 피곤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엎드려요.”
“응?”
“선배 바닥에 내던지기 싫으니까, 선배가 알아서 엎드리라고요.”
건율은 쪼그려 앉아 신발을 벗다가, 몹시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다리가 후들거려 최무정에게 부축을 받으며 왔었다. 근데 최무정은 부족한 모양이었다.
“앗!”
“어서.”
망설이는 사이 최무정이 건율을 툭, 쳤다. 그 바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건율은 더듬더듬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발목이 잡혀 그대로 엎어졌다. 곧이어 뒤에서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건율은 아래가 쓰라리다고,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깜빡이지도 않고 저를 내려다보는 최무정의 표정에 가슴 중앙부가 선뜩했다.
“선배, 형 좋아했죠?”
“…어? 무슨, 무슨 소리야.”
“아직도 좋아해요?”
헐렁한 바지를 그대로 내린 최무정이 질척하게 젖은 속옷을 보고 작게 웃었다. 흰 속옷인 탓에 젖은 부분만 색이 짙어져 몹시 음탕했다. 마치 좆을 기다렸다는 듯 젖은 모양새에 그의 눈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한테 뒤 대 주면서, 좋아하는 건 형이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 아!”
짝, 소리가 들릴 만큼 최무정이 둔부를 세게 후려쳤다. 동그랗고 하얀 엉덩이에 빨간 자국이 났다.
“나랑 사귀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어요?”
축축해진 속옷을 벗기자 붉은빛으로 물든 구멍이 뻐끔거리며 정액을 뱉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박아 대도 여전히 작게 수축된 구멍은 꼭 최무정을 거부하는 듯했다. 최무정은 이를 악물고 곧바로 뒤에서 성기를 꽂아 넣었다. 엎드린 몸을 단번에 들어 올려 단번에 좆을 쑤셔 넣자 건율이 숨을 들이켰다.
“흐, 허억…!”
“그럼 안 되죠…. 나 진짜 속상해요, 선배.”
“아, 흐윽, 흡, 무, 무정아, 아, 흐윽, 아파….”
“좋다고 질질 싸면서 무슨 소리예요. 그게?”
좁은 구멍이 버겁게 성기를 물고 있었다. 건율은 다리가 바닥에 닿질 않아 허우적대며 벽을 짚었다. 완전히 몸을 들어 올려, 건율의 허리를 잡은 최무정이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건율의 몸을 앞으로 뺐다가, 뒤로 한 번에 끌어당겼다. 질퍽한 안쪽에 좆이 가득 차 들어오자, 또 다시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흐, 아아…. 나, 나, 그만, 하고, 흑, 싶은, …아!”
“선배 좆도 섰잖아요. 씨발, 어차피 쓰지도 않을 좆인데 잘라 버릴까?”
“하, 하지, 마아, 흑, 끅, 아! 읏, 아!”
상상도 하지 못한 행위에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최무정은 성인 남성 평균은 되는 건율의 몸을 멋대로 앞뒤로 흔들어 댔다. 꼭 도구가 된 기분이었다.
“앗, 아윽, 흣! 아! 읏!”
“싫다면서…. 씨발, 선배. 나랑은 떡만 치고 싶어요? 뭐, 먹고 버리는 그런 거예요?”
건율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벽을 애써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최무정이 시작한 관계였다. 반대면 몰라도, 제가 최무정을…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무정은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 진심으로 억울하고, 서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좋아한다면서.”
“흑, 앗, 아!”
“근데 왜, 씨발, 형을…!”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때마다 내벽에 가해지는 충격이 얼얼했다. 큼지막하고 두툼한 귀두가 부딪치는 곳이 쓰라렸다. 건율은 발가락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최무정의 손에 의해 멋대로 흔들렸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허공에 들린 몸 탓에 성기는 더욱 깊게 들어와 내벽을 찧어 댔고, 건율은 저도 모르게 성기에서 쿠퍼액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때, 건율의 카디건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최무정이 움직임을 멈췄다.
“누구예요, 그거.”
“흐, 흐으…. 아, 흡….”
팔다리를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좆만 꽂힌 건율은 꼼짝도 못했다. 핸드폰을 꺼낼 힘조차 없었다.
최무정은 건율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작게 웃었다.
[유헌이]
참으로 다정하게도 저장해 두었다.
“받아요.”
최무정은 친절히 초록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건율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최무정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 여보세요? 율아?
“……으, 응. 유헌, 아….”
- 많이 아파? 어떡하냐, 내가 아까 뭐라 해서 미안해.
그때, 허공에 떠 있던 건율을 최무정이 벽에 밀어붙이며 강하게 찔러 박았다.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고환이 아래에 문질러지며 내벽을 꾹꾹 짓이겼다. 건율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덜덜 떨었다.
“아, 안, 아, 냐……. 흐윽! 흣…….”
건율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건율은 몽글몽글 고인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최무정은 악의적이게도, 건율의 왼쪽 손 떼어 놓으며 뒤로 팔을 꺾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퍽, 퍽 소리가 거칠게 들리도록 속살을 엉망으로 휘젓기 시작했다.
- 야, 너 괜찮아?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흑, 아니……. 윽, 괜, 찮, 흑……. 유, 헌아…. 윽!”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최무정이 작게 욕을 읊조리며 민감한 부분을 위아래로 거칠게 긁어 올렸다. 여린 살갗이 수없이 마찰당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건율은 깊은 곳까지 치달은 느낌에 끅끅대며 울음을 참았다. 짓이기던 아랫입술이 찢어져 싸한 냄새가 났다.
- 어, 어…. 건율아, 끊을까? 또 토할 거 같아?
“으, 흐윽, 응, 다, 다음, 에……. 끅, 다, 시…….”
뒤에서 뻗어 온 손이 핸드폰을 가져가 버렸다. 건율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최무정이 전화를 끊고, 바닥에 내던졌다. 그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건율의 허리를 부러지도록 쥐고는 다시 한번 억세게 추삽질을 해 댔다.
“아, 아윽! 흑, 아! 아, 흐으, 흑!”
“건, 율아, 건율아…….”
“하으, 흑, 앗! 아윽, 흐, 흐윽, 응, 아!”
“씨발, 너, 형한테 대 주다… 걸리면-.”
“아, 안 그럴, 게에, 아, 흐윽, 아, 안 해애……. 아! 아윽, 흑!”
깊은 한숨이 귓가를 스쳤다.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했다. 최무정은 건율의 몸을 거칠게 꿰뚫으며 박차를 가했다. 건율을 뒤에서 끌어안고, 말랑한 육벽을 짓이기며 무자비하게 긁어 올렸다. 그러자 두툼한 귀두 끝이 조금 더 부풀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건율은 바르르 떨며 사정 당하는 것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 번도 만지지 않았음에도, 그가 안쪽을 강하게 채워 나가는 것에 저 또한 사정하고 말았다. 뜨거운 속살이 꿰차고 들어온 좆을 꽉 물며 씨물을 모두 받아 냈다.
최무정은 그대로 건율을 앞으로 돌려 안아 올렸다. 건율은 또 다른 자극에 숨을 들이켰다가, 벌벌 떨며 두 다리와 팔로 최무정에게 달라붙었다.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커다란 몸에 매달린 채로 벌벌 떨고 있자 최무정이 건율을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눈앞이 자극으로 어질어질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걸음이 조금은 지쳐 있었다.
* * *
아릿한 흰 연기 너머로 익숙한 기억이 떠올랐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독 저를 뚫어져라 보던 두 살 아래의 중학생 남자애.
‘안녕.’
‘…….’
최유헌과 달리 그 애는 낯을 가리는지, 아니면 말을 하기 싫은 건지 가만히 서서 건율의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하도 눈을 깜빡이질 않아서 머쓱했었는데, 최유헌은 그런 제 동생을 무시하고 2층으로 가자고 재촉하기 바빴었다.
그렇게 잠깐의 기억으로 잊었었다. 짝사랑 상대의 집에 갈 때마다 먼저 도착해 저를 마주 보던 아이는 지금도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건율에게 아주 작은 존재였다.
“……하아.”
몸을 뒤척이던 건율이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맡에서 햇빛이 쨍하니 비췄다. 건율은 시선을 올려 최무정을 힐끔거렸다. 색색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평온했다.
이런 얼굴도 하는구나.
최무정은 포근한 러그에 둘러싸여 잠든 표범과도 같았다. 그때 저를 빤히 보던 중학생 아이는 저보다 한 뼘 넘게 작았는데, 그새 훌쩍 큰 모양이다. 그 아이가 정말 최무정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많이.
“으음…….”
때마침 최무정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건율은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가 최무정이 바로 몸을 일으키는 소리에 아차 싶었다. 괜히 눈을 감았다. 지금 뜨는 것도 조금 민망하고, 자는 척을 하자니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눈을 감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어릴 때 저를 보던 것 그대로 시선이 날카로웠다. 이불이 조용히 흘러내리며 사락, 소리를 내었다.
툭툭, 뺨을 치는 손가락에 건율은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유난히 거친 손끝이 뺨을 이리저리 문지르고 장난을 쳤다. 익숙한 손짓에 건율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일부러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자 잠시 고요해졌다. 그러더니 곧 큼지막한 손이 뺨 양쪽을 엄지와 중지로 쥐어 제 쪽으로 휙 돌려 당겼다.
“…으, 웁!”
동시에 입 안으로 혀가 깊게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뜨자, 최무정이 여우처럼 웃고 있었다. 휘어지며 접힌 눈매나, 긴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밝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으응…….”
최무정은 부드럽게 안쪽을 살피며 건율의 몸 위로 올라탔다. 커다란 덩치를 잔뜩 굽혀 건율의 입술을 삼킬 듯이 움직였다. 최무정의 입술이 벌어지고, 좁아지면서 내벽이 부드럽게 빨렸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고 최무정의 어깨를 꾹꾹 밀어냈다. 적당히 힘을 준 탓인지 최무정은 아무런 압력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무시했다.
두 입이 끈적하게 붙었다 떨어지며 쪼옥, 쪽 하고 귀여운 소리가 났다. 건율은 얼굴이 빨개질 만큼 숨을 참다가, 최무정이 혀를 감아왔을 때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으, 윽!”
“하아, 하아, 흐, 하아! 아, 아침부터…. 하아, 적당히, 해…….”
“너무 세게 때리는 거 아니에요, 선배?”ㅈ
“밀어내도 안, 비켰잖아.”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씩씩대도 최무정은 기분 좋은 얼굴을 씰룩대고 있었다. 건율을 후딱 침대에서 나오려다가 악 소리를 내 버렸다. 말도 못 하게 아팠다.
…거기가.
“괜찮아요?”
“……아니, 너무 아파.”
“약 발라 줄게요. 어제 무리해서 그래. 시험은 보러 갈 수 있어요?”
시험 얘기에 귀가 뜨였다. 건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빡이다가, 엉금엉금 기어 테이블 위 핸드폰을 집었다.
오전 10시. 시험까진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약, 약은 됐고 나 학교 갈래.”
“안 바르면 아플 텐데.”
“나 시험, 시험 봐야지.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러다가 진짜 시험을 망치면?
머리가 새하얗게 굳었다. 건율은 최무정을 올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어제는 순간 최유헌을 보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뛰쳐나왔는데, 막상 시험이 닥치니 어지러웠다.
최유헌을 떠올리자 줄줄이 소시지처럼 어제의 기억들이 기어 나왔다. 잊고 있던 것까지 모두, 뽑혀 나왔다. 최무정이 저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학교…. 차 태워 줘.”
지금 이렇게 된 건 모두, 최무정의 스토킹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걸.
그와 저는 사귀는 게 아니라…. 아니라? 아니면? 그럼?
“선배?”
무언의 낌새를 눈치챈 최무정의 낯이 굳었다. 건율은 멍하니 주저앉은 채로 솟아나는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 속이 메스껍게 꿀렁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찼다. 심장이 쿵, 쿵 뛰어 댔다.
“선배, 왜 그래요?”
최무정이 어깨를 잡아 왔다. 건율은 최무정을 쳐다보지 않고 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최유헌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한 건, 문자가 두 통 와 있었다.
“아냐……. 나 우선, 우선 학교 갈게.”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건율은 입술을 꾹 닫은 채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기 전에 씻고 자서, 그대로 옷만 챙겨 입었다. 최무정은 익숙하게 사 뒀던 새 옷을 꺼내 줬지만, 건율은 받지 않고 꿋꿋하게 어제 입은 옷을 다시 입었다.
최무정은 건율을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가 알아챌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평소처럼 다정하게, 그를 부축했다. 그것조차 거절하려는 걸 몇 번이고 다시 잡았다.
건율은 과부하에 걸린 컴퓨터처럼 버벅거렸다. 오늘 볼 시험이 뭐였는지,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모두 잊은 듯이 머릿속이 새하얬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최무정은 건율에게 강압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건 최무정의 본능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굴면 안 됐다. 적어도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건율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절뚝이며 앞서 나갔다. 최무정은 말리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건 아니었다. 건율은 지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우선 당장 닥친 시험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늘 그랬듯 잘하고 올 터지만, 어제 시험처럼, 교수도 만족한 듯 웃어도 자책하며 불안해할 것이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은 도전하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더라도 건율은 제게서 벗어날 시도를 하는 것이 두려울 터다. 해 봤자 잠깐 시간을 버는 정도일 것이다.
어둑한 지하 주차장, 최무정은 멀대처럼 서서 건율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린 날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최무정의 생각대로 건율은 눈앞의 일에 급급했다. 악보를 꺼내 몇 번 더 확인하고, 시험 시간 1분 전에 급히 도착했다.
건율은 진정되지 않는 가슴께 부근을 쓸어내리며 연주에 들어갔다. 늘 그렇듯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만든 악보는 누가 보더라도 혼란스러웠다. 건율은 수없이 연습했던 음률을 떠올리며 교수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연주에 들어갔다.
끈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의 이야기를 담은 곡이었다. 낮은 음에서 플랫 음으로 시작한 곡은 아주 조금씩 속도를 늘려 나갔다. 스스로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마리오네트는 절뚝이며 인형 줄에 몸을 맡겼다.
어린아이들은 인형극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그를 지휘하는 인형사는 제 손안에 든 인형을 내려다보며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인형은 한 아이의 품에 안긴 곰 인형을 보게 되었다.
건율의 손가락이 다시금 느려졌다. 비틀린 듯 삐그덕 삐그덕, 빠르게 움직이던 몸이 바닥으로 축 늘어진다. 똑, 똑. 물방울이 그의 몸에서 흘러내렸다.
가볍게 튕기는 높은 음의 스타카토가 느리게, 또 느리게 떨어지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은 소년의 품에 안긴 곰 인형을 보고 자아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건율은 격정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인형사의 줄을 하나둘 끊어 내는 소리를 연출했다. 이탈된 음은 괴이하게 찢어지고, 또 찢어졌다.
자유가 된 인형은 이제 인형사에게서 도망칠 일만 남았다. 자그마한 극장에 선 인형은 있는 힘껏 도약한다. 거대한 파도 소리와 함께, 인형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곡이 끝을 맺었다.
강당에 줄지어 앉은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맨 앞에 앉은 교수는 말없이 평가지를 채워 나갔다. 건율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최무정이 보였다. 그는 건율과 눈을 맞춘 채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건율은 인형이 뛰쳐나가듯 몸을 돌려 무대에서 내려왔다.
모든 학생의 연주가 끝난 뒤, 건율은 다가오는 최무정을 보고 급히 강당을 벗어났다. 핸드폰을 뒤적여 최유헌, 친구의 번호를 내려다보았다. 건율은 몹시 피로했다. 온몸이 무겁고 머릿속은 사나운 사자가 어지럽힌 것처럼 엉망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최무정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아…!”
건율은 저도 모르게 작게 비명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최무정은 뛰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흔들림 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건율은 재빨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올라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베이터가 움직일 때쯤 건율이 또 뒤를 살폈다. 최무정이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건율은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 도망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건율은 끊어 낸 끈을 달고 뛰는 인형처럼 뛰다가 몇 번을 휘청거렸다. 최무정의 것이 들어왔던 아랫배를 짓누르며, 힘을 줘 뛰었다. 도망가야 했다.
복도에서, 그가 물었던 말에 긍정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사귀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건율은 긍정의 답을 뱉었다. 그때는 우선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 천천히 멀어지면 될 거라 생각했다. 잔꾀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잔꾀를 부리다 제가 넘어가고 말았다. 건율은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흑, 하고 숨을 삼키며 뛰었다.
왜 이렇게 됐지? 왜, 최무정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을까. 분명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중간고사만 끝내면 멀어질 수 있도록, 밀어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시험 전날까지 원치 않은 성관계를 하며 성적에 흠을 주는 건 건율답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 한눈팔아선 안 된다.
건율은 1층에 도착하자마자 활짝 열린 건물 입구를 보며 달렸다. 그때 띵, 하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최무정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가라앉을 만큼 매서운 눈매였다.
“선배, 어디 가요.”
고저 없는 질문에 건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뛰었다. 몇 걸음 차이밖에 안 나는 거리가 너무 무서웠다. 심장이 콱 조여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에 느꼈던 것처럼 숨이 차기 시작했다.
“선배!”
죽을 것 같아서, 이러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걸음이 느려졌다. 뛰어야 했는데 숨이 막혔다. 어지럽고, 토할 것만 같았다. 건율은 결국 최무정에게 팔을 잡힌 채로 주저앉았다. 주변 학생들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딜 가냐고 묻잖아.”
“…….”
“서건율.”
묵직한 목소리에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이상했다. 최무정에게 막상 붙잡히고 나니, 그에게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이성은 도망치라고 하고 있는데, 본성은 그의 말에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파요, 선배?”
최무정이 건율에게 맞춰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하얗게 질린 뺨에 천천히 생기가 돌았다. 최무정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제 차에서 쉬실래요?”
“…무, 정아. 나…….”
“가서 쉬어요. 가는 길에 물 하나 사 가고.”
“나, 나 오늘은.”
“선배 오늘 연주 좋았어요. 교수님도 점수 잘 주실 거 같던데요.”
억지로 끌어 올려진 몸을, 최무정은 질질 끌었다. 건율도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도망치던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평온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괜찮죠?”
“……응.”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그랬다. 숨을 쉬기 힘들 때마다, 최무정이 오면 가라앉았다. 그가 옆에 있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몸이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선 안 되는데, 한 달 사이에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괜히 그의 말에 긍정했을까. 아니라고 딱 잘라 냈어야 했는데, 제가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건율은 차분해진 머릿속으로 생각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지금 관계는 이상했다. 바뀌어야 했다. 최유헌을 만난 날에 느꼈던 괴리감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무정아, 잠, 깐만 팔 좀….”
“왜요?”
“전화, 전화 왔어.”
건율은 제 팔을 빼앗듯 최무정에게서 벗어났다. 다정한 얼굴을 한 최무정의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았다. 건율은 최유헌의 이름에 마음이 급해졌다.
“스피커로 해요, 전화.”
“어, 어? 왜?”
“내가 선배 연인이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순순히 고개가 끄덕여지다가, 건율은 화들짝 놀라 저었다.
“그냥, 그냥 유헌이 전화야. 숨길 것도 없고…. 그냥 전화… 좀 받고 올게.”
최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율이 그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최무정은 멀찍이서 건율을 쳐다보았다. 최무정은 건율이 스스로 들려주지 않은 것이 퍽 섭섭했으나, 봐주기로 했다. 지금은 그럴 시기였으니까.
“여보세요.”
- 야, 너 괜찮아?
커다란 목소리에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츠렸다. 건율은 주차장 앞에 서 있는 최무정을 힐끔거리다 다시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응, 괜찮아. 어제는 미안.”
- 병원은 갔어?
“아…. 그냥 급체한 것 같더라고. 술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 그래도 병원은 가야지.
“응, 갈게.”
- 웃기네. 너 그러고 안 갈 거 다 알아. 너 오늘 시험 다 끝났지? 지금 바로 집으로 와라. 병원 끌고 가게.
작게 웃음을 흘리자 최유헌이 ‘웃어?’ 하며 툴툴거렸다. 어릴 때부터 건율을 봐 온 최유헌은 그에 대해 잘 알았다. 병원이든 뭐든, 남이 하라는 것에 매번 고개를 끄덕여 놓고 하지 않는 것은 건율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건율은 몇 걸음 더 걸었다. 지금 병원에 데려가겠다는 말은, 가깝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게 속삭였다.
“있잖아, 유헌아.”
- 어.
“집 말고 학교로… 와 줄 수 있어?”
최무정이 있는 한 건율은 자유롭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어도, 본능이 최무정을 따랐다. 그건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인형사의 손에 끌려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최유헌이 필요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 어. 지금 가면 되냐?
“얼마나 걸려?”
- 빠르면 5분, 늦으면 10분.
때마침 근처였던 걸까. 건율의 안색이 밝게 개었다.
“알겠어. 오면 전화해 줘.”
- 어.
낌새를 눈치챘는지, 최유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건율은 전화를 끊으며 살짝 달아오른 뺨을 비볐다. 어제는 그렇게 됐지만, 오늘은 오래 보고, 대화하고 싶었다. 편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친구였다. 친구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건율은 전화를 끊고도 최무정에게 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는 척, 딴짓을 하고 있으니 뒤쪽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선배, 전화 끝났어요?”
“아, 아, 응. 끝났어.”
“그럼 안 오고 뭐 해요.”
어깨를 안아 끌어당긴 최무정이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건율은 차에 올라탔다가, 그대로 출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무정의 손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은 뜨거웠다.
“무정아, 나 이제 괜찮은데…. 카페 갈까?”
“카페…는 왜요?”
“어…. 데이트?”
건율은 어설프게 웃었다. 최무정은 잡힌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 건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눈치채지 못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차에 타기 싫다는 것으로 오해해 줬으면 좋겠다.
“아…. 데이트?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그러나 최무정은 야속하게도 건율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절도 승낙도 아닌 애매한 질문에 둘 사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커피도 마시고 싶고… 해서.”
“아하…….”
주차장 입구는 햇빛이 쨍하게 들어와 쌀쌀한 바람이 불었는데도 따뜻했다. 건율은 최무정을 힐끔거리며 잡은 손을 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가 잡아 놓고도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래요, 그럼.”
최무정이 흔쾌히 승낙을 뱉었다. 건율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검은 낯빛에 빛이 들어섰다. 최무정은 입꼬리를 매만지며 건율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네, 선배가 가고 싶어 하는데…… 제가 싫다고 하겠어요?”
건율은 그 말에 가슴 한 쪽이 따끔거렸다. 최무정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원해서 시작한 관계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겼지만, 마찬가지였다.
“표정이 왜 그래요.”
“아냐.”
“뭐…… 어서 가요.”
죄책감도 이겨 내야 했다. 미안하지만 그만두어야…….
“아.”
그 관계의 시작을 허락한 건 자신이다. 애초에 제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인데, 왜 그를 탓하고,
“어…….”
아니다. 허락이 아니라 동참, 이 더 맞는…….
“선배, 집에 갈까요?”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 휘어진 눈매를 보자 머리가 찡하니 아려 왔다. 건율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면서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을 한 걸 알면 싫어할 텐데. 그럼 저렇게 날 안 볼 텐데…….
“아니, 카페… 가자.”
“그래요, 그럼.”
최무정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리고 건율의 손을 꽉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껴 두껍고 단단한 매듭이 되었다. 건율은 최무정이 움직이는 대로 걷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페 안 가?”
“갈 건데?”
“근데 왜 차로…….”
“아, 저번에 맛있는 카페 발견했거든요. 이왕이면 좋은 데로 가려고.”
일순 머리가 하얘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무엇 때문인지 사리 분별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카페 때문이었나, 거짓말 때문이었나, 시험? 아니, 시험 전에…… 무정이가 이상하다는 생각? 도망친 거?
“아!”
그때, 팔뚝에 전기라도 통한 듯 찌릿, 통증이 일었다. 정신을 차리자 최무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당긴 것이었다.
“왜 자꾸 딴생각해요?”
“미안, 미안해.”
“선배는 맨날 이러네……. 난 안중에도 없죠? 맨날 나만 선배 생각하고, 챙겨 주면 뭐 해요. 선배는 나랑 같이 있는 것도 싫은 거 같은데.”
마음이 읽힌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최유헌과 도망칠 생각을 했다. 아니, 잠깐이라도 그와 멀어지고 싶어서 그랬다.
“나랑 만나면 나한테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아니에요? 나 좋다면서, 딴 남자한테 시선 팔리고, 이러다가 아주 몸도 돌리겠어요.”
“아니야……. 그런 적, 없어.”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시선이 매섭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토할 것 같았다. 건율은 질끈 눈을 감았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지금 이상하니까, 이거…….
“일단 타요, 차.”
최무정이 손을 놓았다. 건율은 운전석에 올라타는 그를 보다가, 다리를 움직였다. 이대로 도망치면 된다고, 누군가 머릿속에서 외치는 듯도 했으나 건율은 그러지 못했다. 조금 전 최무정이 화를 내고, 모욕적인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머리가 맑게 개는 것도 같았다. 이 관계는 이상했다. 최무정이 제게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건율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차 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와 동시에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선배…….”
최무정은 건율의 어깨에 뺨을 대고 그를 끌어안았다. 울먹이는 듯도 했다. 건율은 숨을 들이켰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선배가 아침부터 이상하니까……. 너무 불안해서요. 난 선배 없으면 못 사는데, 선배는 나 떠나려고 하는 거 같아서.”
파도가 거칠고 바람이 짓궂은 날, 작은 배를 탄다면 이런 느낌일까. 멀미를 하듯 가슴 안쪽이 메스껍게 울렁거렸다.
“나 미워하지 마요, 선배. 선배가 나 받아 줬잖아요…….”
어깨가 조금 축축했다. 최무정이 우는 거 같았다. 건율은 그걸 상상도 한 적이 없어서 몸이 굳었다. 저보다 두 배는 큰 이 남자가 울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늘 그랬다. 최무정이 무섭고, 힘도 세고, 멋대로라는 이유로 그가 저보다 어린 동생이라는 걸 잊었다. 최무정은 그저 조금 서툰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건율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저보다 높은 머리를 쓸어내려 주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징징, 하고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어 댔다.
“아, 미안.”
“받지 마요.”
“어……. 음.”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전화를 방해했다. 큼지막한 손이 건율의 허리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전화는 최유헌의 것이 분명했다. 제가 연락했으니까, 도와주러 오기로 했으니까.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옳은지, 누가 제게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선택은 늘 그래 왔듯 홀로 하는 것이다.
“받지 마요, 선배. 나한테 신경 써 주세요.”
건율은 최무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손에 힘이 빠졌다. 전화를 받는 것도, 최무정을 안아 주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무기력하다. 건율은 무정의 품에 안겨 멍하니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최무정이 건율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대신 꺼내 주었다. 그가 빨간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었다.
“선배가 힘든 건 내가 해 줄게요.”
저를 꽉 끌어안은 품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건율은 뜀박질을 한 사람처럼 점차 숨을 빠르게 뱉었다. 차 안에 건율의 빠른 숨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그니까, 선배.”
최무정이 건율을 품에서 떨어트려 놓고, 뺨 양쪽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건율은 허공을 응시했다. 긴장으로 빳빳해진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랑 있어요, 알겠죠? 힘든 건 말만 해요.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커스터드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면서, 뱀처럼 혀를 간사하게 놀리면서 입을 맞추고자 했다. 건율은 숨을 목 안쪽으로 삼켰다.
안 되는데, 도망쳐야 하는데.
“야!”
쿵! 누군가 차 문을 크게 내리쳤다. 이번엔 최무정도 무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제 뒤를 쳐다봤다. 참 주인공 같게 도착했다. 최무정은 욕을 내뱉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무, 무정아. 유헌이야!”
“……어쩌다 들렸나 보네요?”
“어, 어, 응. 우연이네.”
어설프게 웃음을 뱉었지만 최무정의 표정은 펴질 기색이 없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 너희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최무정!”
차 안이 잘 보이지 않는지, 바깥에 선 최유헌이 문을 두들기며 난리를 쳤다. 운전대를 쥔 최무정의 팔에 퍼런 핏줄이 솟아 있었다.
“열어 줘요?”
“응?”
“열어, 줄까요? 묻는 거예요, 선배한테.”
최무정이 한 어절마다 힘을 줘 짓씹듯 말을 뱉는다. 그는 애써 웃고 있었다. 늘 표정을 잘 숨기던 그답지 않다고 건율은 생각했다. 미소 너머로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유헌이…잖아.”
“열어 주라고?”
“……응.”
건율이 힘겹게 대답을 뱉었다. 건율은 최유헌이 도착한 이후로 다시 눈을 똑바로 뜰 수 있었다. 꼭 현실의 감각이 되돌아온 것처럼, 다시 한번 머릿속이 개었다.
물론 눈과 귀를 가렸던 먹구름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요. 선배가, 열어요.”
건율은 대답도 하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잠금장치는 풀려 있었다. 문이 열리자, 운전석을 두드리던 최유헌이 ‘시발!’ 하고 욕을 뱉으며 반대편으로 뛰어왔다.
“율아!”
“어, …응. 유헌아.”
최유헌은 건율을 차 밖으로 당겼다가 ‘아’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차 안쪽에 제 동생이 앉아서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나 얘 데려간다.”
“왜.”
“둘이 데이트 좀 하려고 그런다, 왜.”
홧홧한 열기가 목덜미를 감쌌다. 최유헌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건율은 제 팔뚝을 붙잡은 최유헌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침을 삼켰다.
역시 아직 잊지 못한 걸까. 아니면, 과거의 감정에 젖어 있던가.
“선배 나랑 놀기로 했는데?”
“넌 내일 놀아.”
“내가 왜.”
“너야 맨날 볼 거 아니야. 내가 하루 데려가는 것도 안 돼?”
건율은 차 문 중간 즈음에 걸터앉아서 두 형제를 번갈아 봤다.
“안 돼.”
“왜. 네가 뭔데?”
최유헌의 말에 최무정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펴졌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 나 선배랑-.”
쿵! 건율이 으아, 하며 주저앉았다. 최무정이 꺼내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말리려다 차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두 형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저를 보는 게 느껴졌다.
건율은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이 후다닥 차에서 뛰어내렸다.
“선배?”
“나, 나 오늘은 유헌이랑 갈게. 내일 봐!”
마음이 급했다. 최유헌의 귀에 그런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혹여 그가 동성 간의 관계에 혐오라도 느낄까 봐, 혹여 자신이 진심으로 최무정을 좋아한다고 생각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팽팽하게 감돌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건율은 벙 찐 얼굴의 최무정을 무시하며 차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자신이 감히 최무정을 무시하고 나온 것이 신기하면서도, 최유헌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가자, 빨리.”
“야, 너 머리…….”
“너 차 뭐야, 저거야?”
가장 번쩍거리는 걸 가리키니, 최유헌은 얼떨떨하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끄덕였다. 건율은 그 차로 최유헌을 이끌었다. 최무정이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돌아볼 용기는 나질 않았다.
머릿속에서 삐이, 삐이 하고 빨간 경고등이 번쩍거렸다. 최무정이 무시무시하게 화내겠지만, 건율은 최유헌이 자신과 최무정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야, 저 새끼 쫓아오는데.”
“……아.”
최유헌의 차 안에서는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 그가 없는 동안 시간이 흘렀음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향은 짙고 무거웠다. 건율이 기억하는 최유헌은 맑은 비누 냄새가 나던 소년이었다.
“율아.”
“어.”
“설명해 줄 거지?”
“……응.”
건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모두 말할 자신도 없었고, 그걸 최유헌이 믿지도 않을 듯했다.
“조금은 알 것 같은 게.”
“응?”
“최무정 새끼, 어릴 때부터 이상한 애였어.”
뒤를 힐끔거리자 최무정의 차가 바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건율은 이제 이 정도는 두렵지 않았다. 착잡할 뿐이었다.
“무정이가…… 왜?”
“아, 이거 말하면 애들이 비웃는데……. 저 새끼는 진짜거든? 부모님이나 남들 앞에서 깍듯이 대하다가 나한테만 좆같이 굴었어.”
평범한 형제간의 불평불만으로 들렸으나, 건율은 말없이 최유헌을 응시했다.
“가족 욕하는 거 아니고, 들어 봐. 쟤 진짜 어릴 때부터…….”
“부터?”
“사이코 같았어. 아니, 소시오패스? 그건가? 몰라, 암튼 이상했어.”
잠시 신호에 걸렸다. 최유헌은 익숙하게 차를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대에서 손을 떼어 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건율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율아.”
“응.”
“일단 쟤 못 들어올 곳으로 갈까?”
“어디?”
운전대를 잡은 팔이 길고 굵었다. 최유헌은 고등학생 때도 키가 크고 덩치가 꽤 있었지만, 그간 운동이라도 했는지 어깨가 꽤나 단단하게 각이 잡혀 있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최유헌은 최무정과 비슷했다. 체격도, 이목구비도.
“호텔. 괜찮지?”
“어? 어어. 나, 남자끼리 뭐……. 괜찮고 말게 어디 있어.”
“그치.”
최유헌은 정면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볍고 시원시원한 미소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늘 그랬다. 최유헌을 볼 때면 제가 감히 그를 봐도 될까 겁이 났고, 웃는 걸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감정 때문에 늘 최유헌에게 미안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최유헌은 항상 건율을 먼저 챙겨 주었다. 여럿의 친구를 밀어내고 건율과 함께 다닐 정도로 잘해 주었다. 건율이 따돌림을 당할 때도, 피아노를 관두려 했을 때도 그의 옆에는 최유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너무나 간절한 순간에 그가 나타나 주었다.
“유헌아.”
“어?”
최유헌이 차창에 팔을 댄 채로 대답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수 나뭇잎 사이로 찢긴 햇빛이 최유헌의 뺨 위에서 울렁거렸다.
문득, 최유헌이 유학을 떠나기 전에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나무 아래서 부서지는 햇빛을 맞았던 것 같다.
“아냐, 그냥 불렀어.”
“뭐야……. 뭔데?”
“아니, 고맙다고.”
“갑자기, 참나….”
입꼬리가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건율은 씁쓸하게 웃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백미러에는 아직도 최무정의 차가 보였다.
차라리 뛰어갈 때 잡지. 전화라도 해서 어디 가냐고 묻지. 왜 자길 피하냐고 물어보지.
대놓고 묻지는 못하면서, 포기도 못 하는 게 미련했다. 건율은 보이지 않는 최무정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형아 간다고 울지 말고, 어?’
‘……안 울어.’
‘벌써 섭섭해 죽을라카는데?’
유난히 해가 환한 겨울이었다. 목도리를 돌돌 둘러싼 최유헌은 양 뺨이 발갰다. 건율은 최유헌에게 주겠다고 사 온 목도리를 가방에서 꺼내지 못했다.
‘유헌아.’
‘어, 왜.’
‘…….’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말하고 싶었다. 이게 끝일 수도 있으니 이뤄지는 건 바라지조차 않고, 그냥 얘기하고 싶었다. 좋아했었고,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면 후련할 것 같았다.
‘아니야.’
‘뭐야, 불렀으면 말해.’
‘별거 아냐. 생각해 보니까.’
‘그게 뭔데?’
‘……그냥, 그간 고마웠다고. 가서 잘 지내라고.’
아무 말이나 입 밖으로 내던지자 최유헌은 꽤나 기쁜 표정을 지었었다. 그리고 건율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야, 나 잠깐 유학 가는 거야. 다시 올 거야, 이놈아.’
‘아, 아파!’
‘참나.’
헛웃음을 터트리면서도 웃는 걸 봤을 때, 건율은 제 마음을 얘기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하나 후련해지자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끔찍한 기억을 새길 뻔했다. 그간 함께 지낸 시간들이 그에게 더러운 기억으로 전락하는 것보다 제가 참는 게 나았다.
“아, 저 새끼 진짜 끈질기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최유헌은 이전과 같이 웃고 있었다. 그에게 서건율은 그저 아끼는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건율은 그걸 감사히 여겨야 했다.
“근데 뭘 알 거 같다는 거야?”
“뭐, 걔 저러는 거 가끔 봤어.”
“저러는 거?”
“들어가서 얘기하자.”
직진하던 차가 갑작스럽게 왼쪽으로 휙, 틀었다.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최유헌은 핸들을 돌려 있는 줄도 몰랐던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뒤편에서 타이어가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건율은 뒤를 돌았다가, 새까만 최무정의 차가 멈춘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앞으로 쌩, 하고 오토바이가 재빠르게 가로질렀다. 창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들어가자.”
“어……. 응. 무정이, 는?”
“걔 따돌리려고 온 거잖아.”
“아.”
아차, 하고 흘러나온 신음에 최유헌이 ‘바보’ 하고 말했다.
최유헌은 바로 1층에 차를 대고, 건율이 내림과 동시에 건율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를 호텔 입구로 밀어 넣었다.
“빨리 가자니까.”
“미안.”
저도 모르게 우물쭈물 서 있던 건율은 최유헌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최유헌은 빠르게 체크인을 끝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건율도 그 뒤를 따랐다. 둘은 5층에 내렸고, 최유헌은 성큼성큼 걸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 이쯤 했으니 안 오겠지?”
“으응.”
최무정이 그간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에서 멈출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건율은 여전히 울리지 않는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어, 여기 러브호텔이네.”
테이블 앞 의자에 털썩, 앉자 최유헌이 낄낄 웃으며 탁자 안을 뒤적였다. 여러 개의 콘돔부터 싸구려 성인 용품이 서로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놓고 와.”
“너 아직 여자랑 안 해 봤지?”
“……어.”
“이야, 그러다가 마법 쓰겠다.”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찬 젤을 든 녀석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왔다. 건율도 조금 익숙한 물건이었다. 최무정이 쓰곤 했던 거.
근데 여자랑은 안 해 봤지만, 남자랑은 했으니까…… 마법사는 아닌 걸까?
“남자들끼리도 하는 거 알어?”
“어……. 뭐, 그렇겠지.”
“나 유학 갔을 때 그런 애들 엄청 많았거든.”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최유헌이 젤을 만지작거렸다. 건율은 현관 쪽을 힐끔거렸다. 언제 최무정이 문을 두드릴까 싶어서였다. 무섭거나 지겨운 건 아니고, 묘하게 기다려졌다.
“근데 나 남자랑은 안 되더라고.”
“그래…?”
“어. 아무리 예뻐도 좀……. 아, 너랑은 할 수도 있겠다.”
농담처럼 뱉어진 말에 건율의 얼굴이 삽시간에 뻘겋게 물들었다. 건율은 뻐끔뻐끔 입을 여닫다가 숨을 짧게 뱉었다. 최무정은 머릿속에서 확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뭐, 뭐래.”
“진짠데? 넌 좋으니까 할 수도 있는데.”
“됐……. 됐어. 아까 하던 얘기… 해.”
최유헌은 간혹 건율을 난감하게 하는 걸 즐겼다. 고등학교 때도 둘이 사귀냐는 말을 들으면 ‘몰랐냐?’ 하고 너스레를 떨며 건율의 뺨에 뽀뽀를 하기도 했다. 건율은 그때가 생각나서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게 장난인 줄 아네.”
“하던 말이나 하라니까.”
“뭐…….”
눈을 가늘게 뜬 최유헌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젤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어 놓는 바람에 젤이 울컥대며 테이블 위로 흘러나왔다.
“최무정 얘기?”
“으응. 가끔 저런다는 게, 무슨 말이야?”
건율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옆의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며 시선을 피했다. 최유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뭐, 좀 빡치거나……. 필요한 거 같으면 죽어라 뜯어먹거든.”
“필요?”
“너한테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간 그랬어. 사람 피 말리는 데 재주가 있어.”
건율은 흘러나오는 젤을 내려다보다가 티슈를 뽑았다. 최유헌의 시선이 건율의 손으로 향했다. 하얗고 긴 손가락 끝이 단단히 굴곡져 있다.
“너 쟤랑 무슨 일 있었어? ……제대하고 두 달쯤 됐지? 최무정이랑 몇 달째야?”
순간 대답할 뻔했다. 그것도 이상한 방향으로.
몇 달째 사귀는 건지는 저도 모른다고, 아마 한 달 된 것 같다고.
대답이 느려지자 최유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건율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제 입술을 훑었다. 건율이 젤 통을 들어 올리자, 그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왈칵 흘러내렸다.
“아….”
투명한 젤이 희멀건 손바닥에서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유헌은 자연스럽게 티슈를 뽑아 건네며 물었다.
“걔 언제부터 봤어? 제대하기 전부터 친했어?”
“아……. 아니. 그땐 있는지도 몰랐어.”
“이번에 친해진 거야?”
“으응.”
친해졌다는 말엔 어폐가 있지만, 따로 설명할 길은 없었기에 건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유헌은 잠시 생각하는 듯 탁자를 마저 닦았다.
“근데 나, 네 동생인지 몰랐어.”
“모를 만하지, 옛날이랑 완전 달라졌으니까.”
“무정이는 나 아는 거 같던데, 왜 말 안 했을까?”
“글쎄. 그나저나 이게 진짜 우연이면 신기하네.”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마지막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건율도 그 말에 공감했지만, 우연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가 이상해서 대답을 미뤘다. 건율은 최유헌의 눈치를 보며 젤을 닦아 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예 물로 씻고 와야 할 듯싶다.
“나 손 좀 씻고 올게.”
“응.”
화장실로 향하는 길에도 건율은 현관을 힐끔거렸다. 잠잠해서 더 이상했다. 기묘한 불안감이 겉돌았다. 건율은 화장실에 들어서서 손을 뽀득뽀득 닦았다. 세정제로 손을 열심히 비비고, 거품을 내서 찬물로 닦아 내자 그제야 기분 나쁜 끈적함이 사라졌다.
“율아, 너 학교 언제까지 다녀?”
“나? 음……. 내년 말까지 다녀야 돼.”
“기네.”
물기를 털며 나오자 최유헌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표정 그대로, 건율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아랫입술을 뜯었다. 최유헌의 안 좋은 버릇 중 하나였다.
“유헌아, 입술.”
“아? 아, 어어.”
5년 전의 습관에 괜스레 반가웠다. 건율은 다시 반대편에 앉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근데…… 아, 나 이쪽으로 옮길까.”
“응? 뭐가?”
“아니, 졸업하고 온 건데……. 아버지 회사 다녀야 하거든. 여기서 좀 먼 거 알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최유헌이 해 준 이야기가 있어 대충은 알았다. 최유헌의 집안은 부담스러울 만큼 대단했다. 사람을 급으로 나누어선 안 되지만, 건율은 그가 급으로 따지면 저보다 한참 위에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너 걔랑 둘이 두기는 좀…… 불안한데.”
“아, 이제 못 오겠구나….”
“음……. 일단은, 내가 최무정이랑 얘기 좀 해 볼게.”
최유헌의 말에 건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 아냐. 괜찮아. 우리 일인데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우리?”
“어, 그니까… 무정이랑 나, 둘 사이 일이니까.”
탁탁, 최유헌이 탁자를 두드렸다. 찌푸려진 미간 아래, 저를 훑어보는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건율은 침을 삼키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네가 힘들어질 필요는 없다는…… 건데.”
“왜? 나 네 친군데.”
“그건 그렇지만.”
“너무하네……. 불편해?”
건율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옛날에 너, 내가 다 도와주고 그랬잖아. 이젠 다 컸다 이거야?”
“그, 그땐 고마웠어…….”
“내가 도와주는 거 네가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그치?”
그의 말대로 최유헌은 항상 건율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옆에서 도와주고, 대신 나서 주었다. 건율은 그럴 때마다 든든했지만 한편으로는 무기력하기도 했다.
그래서 최유헌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싫어서…라니. 아니야. 내 생각해서 도와주는 거 알아, 고맙고….”
“아휴…….”
우물쭈물 답하자 최유헌이 크게 한숨을 뱉으며 건율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한숨 속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스물넷이나 됐는데, 아직도 애같이 굴면 어떡해?”
“미안.”
“형님 안 본 5년 동안 바뀐 게 없네, 없어. 으이구.”
이번엔 양손으로 건율의 뺨을 쥐고는 양옆으로 쭉쭉 잡아당겼다. 건율은 울상으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 말랑말랑한 뺨이 찹쌀떡처럼 늘어나며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내가 그랬지. 나 다시 오니까 기다리라고.”
“으응.”
“근데 뭐야, 형아 말 안 듣고, 툴툴거리고? 반항아가 다 됐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겨우 손이 떨어졌다. 건율은 얼얼한 볼을 손등으로 툭툭 치며 턱에 힘을 줬다. 최유헌이 저를 너무 어린애 취급해서 조금 기분이 상했다. 자연스레 입술이 툭 튀어나오자 최유헌이 큭큭 웃음을 흘렸다.
“나도 유학 가기 싫었어. 요 말랑이 두고 가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랑이 아니거든.”
“아니야? 몰랐는데.”
가벼운 장난에 건율은 몰래 한시름을 놨다. 잠깐 싸해졌던 분위기는 꼭 최무정의 것과 닮아 있었다. 그래도, 최유헌이 이 일을 아는 건 싫었다. 제 친구가 동생과 붙어먹었다는 걸 알면 분명 실망할 터였다. 건율은 양손을 마주 잡고 꼼지락거렸다. 손가락이 길고 곧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건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건율은 움찔, 놀랐다가 화면 속 이름을 보고 슬쩍 최유헌의 눈치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최유헌은 내놓으라는 듯 손바닥을 펼쳤다.
“무정인데.”
“줘 봐, 그니까.”
“나한테 할 말 있는 거니까 내가 받, 을게.”
또 잠깐 최유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세 돌아왔지만, 그 잠깐이 너무 이상했다. 최유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저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늘 웃던 친구였고, 항상 도와주기는 했으나 건율이 싫어하면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었다. 분명, 5년 전까지는 그랬다. 어쩌면 지금은 제 동생이 관련된 일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스피커로 해, 그럼.”
“아, 으응…….”
이건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강경한 태도에 건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최무정의 전화를 받으며 스피커로 전환했다.
- 선배.
“무정아, 나 지금… 유헌이랑 같이 있어.”
- 그거 몰라서 전화한 거 아닌데.
역시 화난 목소리였다. 건율은 마른 입술을 훑었다.
“놓고 가서 화났어?”
- 아뇨. 언제 나오나 싶어서 전화했어요.
“……호텔?”
- 떡 치는 중은 아닌 것 같고…… 그죠?
머릿속에 하얀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물감이 순식간에 퍼져 온통 새하얘졌다. 살갗이 오소소 솟았다. 건율은 입을 벌린 채로 답을 못 했다. 지레 찔린 탓이다. 호텔이라서 친 장난이라고, 그렇게 넘어가면 될 일인데 입이 차마 벌어지질 않았다.
- 아, 설마 벌써 끝난 거예요? 최유헌이 그렇게 빨리 쌌어요?
“…그, 아니,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왜 화내요. 진짜예요?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최유헌도, 호텔 밖에서 전화하는 최무정도 무서워서 가슴이 벌벌 떨렸다. 건율은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하는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서 숨을 참았다.
- 당장 나와요. 다른 새끼랑 떡 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 안 했!”
“야, 최무정.”
다급히 대답하려는데 최유헌이 핸드폰을 빼앗았다. 건율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인 채로 숨만 몰아쉬었다. 유헌이는 눈치가 빠르니까,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누구라도 알아차릴 맥락이었다.
건율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최유헌이 저를 경멸하듯 볼까 봐,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할까 봐 심장이 멎기 직전 박차를 가하듯 세차게 뛰었다.
“건율이랑 오늘 안 나갈 거야.”
- …….
“네 말대로 떡, 존나 치고 갈 거니까.”
스피커 특유의 작은 소음이 끊겼다. 건율은 하얗게 질린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건율은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겨우 받았다.
“건율아.”
“……응.”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농담인 것 같다고, 그냥……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야 했는데 입이 벌어지질 않았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턱을 잡아 위로 휙, 들어 올리는 움직임에 눈을 떴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최유헌이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우리.”
“으응.”
오랜 친구는 조금 가벼운 얼굴이었다. 어딘지 평소와 다른 건 분명했지만,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5년 전을 생각해 보면 그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건율은 어깨에 힘을 빼며 최유헌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뭐 시켜 먹을까? 배고프지 않아?”
방긋 눈을 휜 녀석이 턱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곤 건율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쓰다듬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순식간에 바뀌는 표정과 분위기, 목소리가 이상했다. 못 본 새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건율은 벙 찐 얼굴로 최유헌을 보다가 재차 물어 오는 말에 몸을 추슬렀다.
“넌 뭐 먹고 싶은데?”
“나? 뭐 먹고 싶냐고?”
최유헌이 눈을 맞춰 왔다. 건율은 전원이 꺼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으응, 하고 대답했다.
“너……랑 같은 거.”
“아무거나 다?”
“응.”
가느다란 눈동자가 건율을 위아래로 샅샅이 훑었다. 뱀처럼 스며드는 시선이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최무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건율은 속으로 최유헌에게 사과했다.
그렇게 음식을 주문하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쿵! 하는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건율이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최무정이다. 분명, 최무정이었다.
“……유헌아, 무정이, 무정이 왔나 봐.”
“됐어, 그냥 둬. 문을 부수기야 하겠어?”
연이어 쾅! 하고 묵직한 소리에 현관문이 덜컹거렸다.
“으…헉!”
갑작스러운 파열음에 방 안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우지끈, 무언가 부러지며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건율의 낯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유, 유헌아.”
“내 뒤에 있어.”
“으응…….”
심각성을 눈치챈 최유헌이 몸을 일으키며 건율을 제 뒤로 보냈다. 손끝이 미친 듯이 저리고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선배.”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최무정의 손에서 새빨간 소화기가 바닥을 뒹굴었다. 열린 문틈으로 도어락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왜 나…… 자꾸 걱정하게 만드는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건율을 탓하듯 늘어진다. 최무정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꼭 마지막 기회처럼 보였다.
“이리 와요.”
“야, 최무정.”
“선배? 이리 와요. 집에 가요.”
“야!”
최무정은 제 형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그 뒤에 숨은 건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환한 형광등이 켜진 현관. 그는 꼭 심판을 내리는 신처럼 오만한 흑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건율을 내려다보았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최유헌을 제치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길이 막혔다.
“율아, 너…… 안쪽 방에 가 있어.”
“어, 어?”
“들어가 있으라고.”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친구의 성난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건율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멍하다. 눈앞이 뭉그러졌다. 화질이 나쁜 영상을 보는 것처럼, 형제의 모습이 아스라이 흐트러졌다.
“율아, 내 말 안 들려? 아니면, 듣기 싫어?”
“선배. 이쪽으로 와요, 빨리.”
혼란스럽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건율은 턱 막혀 오는 심장 부근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그리고 최유헌이 건율의 손목을 잡아채는 순간, 그가 성큼 다가왔다. 최무정이었다.
“씹…!”
시작은 최무정이었다. 주먹을 휘둘러 제 형의 뺨을 거세게 갈겼다. 최유헌이 뒤로 물러나며 손에 힘을 풀었다. 건율은 잠깐의 사이 벌게진 제 손목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최무정은 망설이지 않고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최유헌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정강이를 걷어차고 바닥에 엎어뜨렸다. 복부에 억세게 가해지는 폭력의 소음에 귀가 얼얼했다.
“최무, 정……. 너!”
“닥, 쳐. 씨발.”
눈을 부릅뜬 채로, 깜빡이지도 않고 최무정은 계속해서 최유헌의 복부를 발로 짓밟았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만 하면 턱을 걷어찼다. 얼마나 맞았는지 최유헌이 숨을 몰아쉬며 악 소리를 뱉었다.
건율은 그 광경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둘을 말려야 한다는 건 알았는데, 팔다리는 그 자리에 묶인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손발이 욱신거릴 만큼 저려 오고, 숨은 막혀 와 눈앞이 흐릿했다.
“……흐윽.”
상체가 휘청 흔들린다. 건율은 테이블을 짚었다. 그러자 최무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틈을 타 최유헌이 몸을 일으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저를 걱정스럽게 보는 최무정의 얼굴과, 푸른 핏줄이 솟은 두꺼운 최유헌의 팔.
그리고 그 짧은 시간, 건율은 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
최유헌의 손목이 잡혔다. 최무정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건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최유헌이 무릎으로 최무정의 복부를 가격했다. 단단한 근육과 뼈가 부딪쳐 살벌한 소리가 났다.
다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최무정은 잠시 휘청였다가, 잡은 손목을 비틀어 제 형을 힘껏 걷어찼다. 그의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온 걸 건율은 들었다. 최무정은 주먹을 내리꽂았다. 이미 여러 대 맞은 최유헌의 상체가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는 최유헌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마구잡이로 내리꽂았다.
건율은 있는 힘껏 몸을 돌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웠다. 호텔 방의 공기가 저를 죄어 오는 것만 같아서 꺽꺽대며 뛰쳐나가야 했다.
멀리서 호텔 직원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건율은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들려오는 잡음이 머릿속을 가득 차지한다. 최무정과 최유헌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섞인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들과 함께한 모든 기억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건율은 몇 번이고 헛발질을 해 넘어졌음에도 다시 일어나 뛰었다. 왜 조금 전에는 움직이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팔다리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마나 내려온 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1층 로비가 보였다. 1층에는 직원 하나 없었다. 건율은 휘청거리며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아, 하아, 흑, 흐윽, 헉, 허억……. 하아, 흡…….
제 숨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먹먹했다. 건율은 계속해서 걸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무작정 걸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니, 레슨 학생의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죄송해요, 몸이 안 좋아서……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건율은 의지 없이 열렸다 닫았다 하는 제 입을 다른 사람 것 보듯 내버려 두었다. 걱정하는 학부모의 목소리도 웅웅 울린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길 한가운데 무릎을 꿇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건율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목이 메었다.
한 중년의 여성이 다가와 건율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부축을 해 주었다. 건율은 그녀를 따라 상가 계단으로 가 앉았다. 중년은 구급차를 불러 주지 않아도 괜찮냐고 여러 번 물었고, 건율은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가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건율은 정신을 차렸다. 최유헌과 최무정의 얼굴이, 그리고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반투명한 창이 열린 것처럼 그 안이 훤히 보였다. 그러나 건율은 지금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제 최무정에게 느꼈던 기이한 감각과, 성난 최유헌의 목소리가 번갈아 건율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건율은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찬 공기가 세차게 건물 안으로 불어왔다.
모르겠어.
눈을 다시 뜨자 시야가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호흡이 벅차게 올라온다. 이 감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 줄 사람은 없었다. 저에게 지금, 무엇이 옳은지 알려 줄 사람도 없었다.
실이 모두 끊어진 인형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