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바보 (1/6)

1. 바보

기다란 각목이 두 동강 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검은 그림자는 두꺼운 팔뚝을 드러내며 주먹을 내리꽂았다. 맞은 남자가 휘청이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자, 잘못…. 잘못, 헉, 아윽!”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커다란 발이 남자를 짓밟았다. 바닥에 구른 남자 위로 검은 그림자가 올라타 다시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리칠 때마다 피가 튀어 긴 흔적을 남겼다. 건율은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렸다.

“야.”

그림자의 주인이 말을 짓씹듯 뱉었다. 대학가 근처의 좁은 골목. 검은 그림자는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기절한 남자의 뺨을 쳤다. 한참을 얻어맞은 남자는 의식을 잃어 말이 없다.

이제는 피떡이 되어 알아볼 수 없는 남자는 관현악과 신입생 이정우. 2학기가 시작한 날부터 말을 걸어온 이정우는 약 30분 전, 술자리에서 건율의 옆자리에 앉아 술을 시원스레 들이켰다.

그는 국제 대회에서 상을 타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율의 팬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건율이 귀찮은 티를 내도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온 녀석은 21살이었다.

“안 일어나냐?”

그림자는 등이 넓고 덩치가 산만 했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이정우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억센 타격음에 손끝이 저려 왔다. 그는 몇 번을 더 내리치다가, 완전히 기절한 이정우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곤 쪼그려 앉아 이정우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문득, 건율은 술에 취한 이정우가 제 손목을 쥐며 장난을 친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림자가 이정우의 손에 코를 묻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옆모습이 묘하게 낯익다고 생각할 때였다.

우드득, 뼈가 서로 부딪쳐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뒷모습의 남자는 이정우의 손가락을 안쪽으로 말아 쥐게 하고, 조용히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와드득, 몇 번의 괴음 끝에 이정우가 꿈틀거리며 눈을 번쩍 떴다.

“아, 아윽, 흑, 아… 아악!”

남자가 내려놓은 이정우의 손은 완전히 뒤로 꺾여 손가락 하나하나가 괴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히 제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이었다. 지켜보던 건율은 숨이 턱 막혔다.

저 손으로 악기를 만질 수는 있을까? 재활 이후,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 일상엔 지장이 없을지 몰라도 연주는 하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건율은 나서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경찰에 신고라도 할걸, 그랬다면 이정우의 손이 망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얽혀 눈앞이 흐리멍덩하다. 벽을 등진 채로 마른세수를 했다.

흐느끼던 이정우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비틀었다. 견갑골이 비죽 튀어나올 만큼 몸을 꺾다가 파르르 경련하며 늘어졌다. 정신을 잃을 듯한 고통에 다시 기절했는지, 사방이 고요했다. 건율은 숨을 참아 가며 골목길로 조심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넓은 등이 휙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 건율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을 짚어 건물 옆으로 기어가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어둑한 밤 중에도 한 번에 알아볼 만큼 또렷한 이목구비, 커다란 덩치와 뱀처럼 날카로운 눈. 아는 얼굴이었다. 건율은 쪼그려앉아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목끝까지 치고 올라온 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듯 눈앞이 핑글 돌았다.

“…아.”

남자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골목길을 나오는 걸음이 느긋했다.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보았는지는 몰라도 분명,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아챘을 것이다.

건율은 재빨리 구석으로 기어갔다. 주택 사이 아주 작은 틈새를 발견하자 마자 숨이 가쁘게 올랐다. 그곳으로 몸을 밀어넣는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발치에 있던 빈 깡통 하나가 걸렸다. 툭, 하고.

깡! 툭, 타닥, 투두드득.

오르막길 거리로 깡통이 데굴데굴 굴렀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 것이 느껴졌다. 뛰어야 할까? 아니, 잡힐 것이다. 차라리 그의 착각이라고, 잘못 본 것이고 깡통은 그저 바람 때문에 구른 것이라고, 숨는 것이 나을 것이다. 건율은 울 듯한 얼굴로 기어 주택 사이로 몸을 숨겼다.

머릿속에는 이미 남자에게 잡혀 두 손이 꺾이고 부러지는 자신이 떠올랐다. 건율은 입을 틀어막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안까지 들어오지만 않으면, 남자는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냥 나와…. 귀찮게 하지 말고.”

결국, 남자가 뒤를 돌아 오르막길을 올라온다. 주택 사이, 건율이 있던 골목을 살피던 그가 혀를 찼다.

여기까지 올까? …여기까지, 오겠지?

탁, 남자가 골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묵직한 발소리가 한 번, 두 번…….

“학생, 여서 뭐 혀. 집에 안 가고?”

그때, 굵은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건율은 숨을 참고서 빨간 벽돌을 노려보았다. 남자가 작게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 들렸다. 건율은 틈새로 슬쩍 바깥을 보고는 다시 몸을 숨겼다. 학교 경비원이었다. 경비원이 남자의 어깨에 손을 짚고 있었다.

“고양이가 있는 것 같아서요. 날이 쌀쌀해지니까 자주 보이네요.”

“고양이? 아이고, 이놈들 또 쓰레기 뒤질라고! 하이고, 그거 때문에 후문까지 여 사는 사람들이 내보고 난린데.”

“그러게요. 잡아다 팰 수도 없고, 골치 아프죠.”

웃음기를 머금은 남자의 말에 경비원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뭐, 잡아다 패? 뭐시여, 거, 학생 무섭게시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여…. 쟈들도 살라고 그른 거…. 학생이나 집 들어가 봐. 부모님 걱정하신다.”

“농담이에요, 걱정 마세요.”

“그, 뭐…. 긍까. 저번에 뉴스도 났잖아. 이 주변에서 사람 하나 잡은 거. 언능 가, 언능.”

“네, 선생님도 고생하세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인사를 끝으로 두 남자가 양쪽으로 갈라섰다. 경비는 다시 오르막길로, 남자는 내리막길로.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끌어안고 있던 두 무릎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건율은 멍한 얼굴로 쿵쿵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토할 거 같았다. 골목길 특유의 씁쓸하고 케케묵은 냄새가 바람과 섞여 코를 찔렀다.

건율은 그 상태로 30분이나 더 앉아 있었다. 혹시나, 혹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몸을 일으키자 다리가 지릿지릿 저려 왔다. 조심스레 주변을 훑던 건율은 침을 삼키고 정우가 있던 옆 골목길로 들어갔다.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늦었지만 신고할 생각으로 핸드폰을 찾는데, 쓰러져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

조금 전 일이 꿈은 아니라는 듯, 양쪽 벽에 빨간 피가 길게 튀어 있다. 바닥에 고여 있어야 할 핏물은 누군가 닦아 낸 것처럼 흐린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숨어 있던 30분 동안 주변은 고요했다. 그사이 이정우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지이잉.

그때,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건율은 긴장감에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뱉어 내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다. 끊어 버릴까 잠시 고민하던 건율은 벽 한쪽에 등을 기대며 주르륵 주저앉았다.

조금 전 일이 현실인지, 꿈인지.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 그 무엇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건율은 몇 년간 기다려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숨을 뱉었다.

잘게 떨리던 엄지가 초록색 버튼을 꾹 눌렀다.

“여, 보세-.”

- 자기야…. 하아, 하….

건율은 핏물로 얼룩진 골목에 앉은 채로 얼어붙었다. 애써 가라앉았던 심박수가 미친 듯이 올랐다.

[하아, 하…. 흐윽, 읏……. 큭, 하아, 자기야…. 말해 봐.]

목소리는 변조돼 있었다. 낮고 짙은 남성의 목소리. 목 안쪽에서 울리는 듯한 꽉 찬 발성. 아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건율은 건너편의 남자가 어떤 놈인지 알고 있었다.

“누, 누구….”

- 씹, 아……. 허억, 헉…. 흐…아…! 하아……. 허억…….

건율이 저도 모르게 말을 뱉는 순간, 남자가 조금 더 큰 소리로 신음을 뱉었다. 살결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보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씨발……. 자기야, 하아…. 흐, 너무 좋아.

팔 갗에 소름이 돋았다. 건율은 마른 입술을 훑고,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다, 당신 신고할 거예요. 증거… 다 모아 뒀으니까, 그만, 그만하세요.”

- 흐, 씨발, 또 꼴리게…. 아, 하아, 후…. 어떡할 거야, 또 섰는데?

전화를 끊어야 하는데, 도저히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 러지 마세요. 여기서…… 그만, 그만하면… 신고 안, 할 테니까.”

-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귀여운 얼굴로, 흐, 그러고 있어.

“끊, 겠습-.”

- 허억, 흐, 지금, 도……. 벌벌 떠는 게…. 하아, 박아 달라고 조르는 거야, 응?

굳어 있던 손이 그제야 움직였다. 건율은 새파랗게 물든 얼굴로 핸드폰에서 뺨을 떼고, 전화를 끊었다. 손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때,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문자였다.

[단추 두 개 풀었더라, 오늘. 교복 생각나서 좋았어.]

덜컹,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그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음에도 가슴이 크게 뛰었다. 건율은 전원 버튼을 세게 눌렀다. 핸드폰의 전원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건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교복 상의 단추, 항상 두 개씩 풀고 다녔던 것은 중학교 때부터 있던 습관이었다.

* * *

스토킹이 시작된 건 아마도 2학기가 시작되던 날부터였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가 줄기차게 온 날이 그날이었으니까.

그에게선 언제 찍었는지 모를 제 사진이 수없이 많았다. 몇 번이나 차단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다른 번호로 연락해 왔다.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사진부터 집을 드나드는 것까지, 남자로 추정되는 스토커는 끈질겼다.

2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나 된 지금까지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고 있었다. 그는 점차 과감해졌다. 며칠 전, 건율에게 전화해 자위하는 소리까지 들려주었다. 그날 일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 전화뿐만 아니라 두 눈과 귀로 지켜본 일 때문이었다.

새까만 도로로 여러 대의 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건율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부터 이정우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니, 그건 당연했고 연락이 되질 않았다. 주고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며칠 전까지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 오던 메신저 어플은 탈퇴하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었을까.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에이, 씨…….”

사고 외에도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찜찜한 생각이 머리를 감돌았다. 건율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뱉었다. 역시 신고했어야 했는데. 왜 그거 하나를 못 해서…….

아니다, 지금은 우선 제 일만 해도 바빴다. 성적도 신경 써야 했고, 스토커 문제도 있었다. 

건율은 조금 더 빠르게 도로 옆 작은 틈으로 걸었다. 시내에서 꽤 먼 학교는 상당히 구석진 곳에 있었다. 그 탓일까, 이 동네는 한 정거장만 건너뛰어도 다리 하나를 건너야 했다. 커다란 트럭부터 승용차까지, 차가 지나가며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건율은 왼편은 산, 오른편은 도로인 곳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겼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사고가 날 수 있는 좁은 거리는 온통 흙바닥이었다. 축축한 흙냄새 너머로 주유소 하나가 덩그러니 보였다.

이제 반 왔다. 버스에서 졸다 늦게 내린 벌은 상당히 가혹했다. 건율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주유소에는 검은 세단 하나가 주유를 하고 있었고,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건율 선배?”

주유소에 가까워졌을 때쯤, 차에 올라타던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렌즈를 끼지 않은 탓에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성큼 다가왔다. 점점 크기를 더해 가는 형태가 익숙하다고 느껴짐과 동시에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왜 여기 계세요?”

최무정이 활짝 웃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와 다르게 건율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웃기는커녕 두려움에 손끝이 벌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최무정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 순간 건율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최무정. 피아노과에 어울리지 않게 큰 덩치와 사납게 생긴 녀석은 그날 골목에서 이정우를 부수어 놓았던 녀석이었다.

최무정이 그날 경비원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고양이’는 아마 훔쳐보던 자신을 뜻했을 것이다. 누군가 저를 보고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게 건율인 건 알고 있을까. ……몰라야 했다. 그러니, 건율도 모르는 티를 내야 했다.

“…안녕.”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위험한데. 여기.”

“집, 가는 길이야.”

건율은 남몰래 조교에게 찾아가 이정우에 대해 물었다. 조교는 이정우가 전날 교통 사고를 당해 크게 부상을 입었고, 휴학을 했으나 손가락이 완전히 으스러져 퇴학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즉시 신고하지 못한 제 탓이었다. 건율은 시선을 돌리며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릴까요?”

“아니, 아냐. 괜찮아.”

“가까우니까 데려다드릴게요. 괜찮아요.”

“지, 진짜 괜찮아. 너 저쪽으로… 가던 길이잖아.”

뒤쪽을 가리키자 최무정이 시원스레 입가를 끌어 올려 웃는다. 건율은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마른 입술을 축였다. 피하고 싶었다. 주먹을 내리꽂는 소리,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들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아니에요. 저 그냥 드라이브하고 있었어요.”

“그, 럼 드라이브… 계속하지…. 왜.”

너무 거절했을까? 눈치를 챘을까? 고개를 숙인 채로 목덜미를 쓸자 녀석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집 갈 때도 됐죠. 태워다 드릴게요. 금방이니까.”

토할 거 같아.

건율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날 깡통이 구르던 소리를 허투루 들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건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최무정이 열어 준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버지의 값싼 중고차와는 크게 달랐다. 등받이는 포근한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앞 좌석에는 여러 버튼이 나열돼 있다. 차 안에서는 그를 닮은 시원한 향기가 났다.

곧 차가 출발했다.

“선배, 제 이름 알아요?”

“…어? 너, 너?”

“네, 제 이름이요. 모르시죠?”

녀석의 소문은 학교를 매일 떠돌아다닌다. 알고 싶지 않아도 여러 번 들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건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대화를 한 것 자체는 처음이었다.

“최무정.”

부드럽게 차를 돌린 녀석이 툭, 말을 뱉었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저요, 최무정이에요.”

“아…….”

“무정이요, 무정이. 이름만 부르면 좀 웃기지 않아요?”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건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고장 난 가로등 사이사이 두어 개가 시야를 간신히 비춰 주었다. 휭, 휭. 바람 소리가 거칠었다.

“집 가는데 왜 학교 반대 방향에서 오신 거예요?”

“그… 버스에서 졸았거든.”

“피곤하셨구나.”

“조금.”

차 안은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팔 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고요한 차 내부는 어쩐지 서슬 퍼런 기운이 흘렀다. 빨리 도착했으면. 집까지 데려다줄 필요도 없으니, 대충 시내에서 내려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건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차는 금세 학교를 지나쳐 시내로 들어섰다. 건율은 편의점 하나가 보이자마자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기서 내려…. 아.”

최무정의 차가 자연스레 방향을 틀어 오른쪽 골목으로 향했다. 건율의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저도 모르게 움칠거리자 최무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쪽에 원룸이 많던데, 여기 아니에요?”

“…맞아.”

“다행이네요. 어느 쪽으로 가면 돼요?”

“여기서 그냥 내려 줘. 금방이야.”

안전벨트를 풀었으나 최무정은 듣지도 않고 더욱 안쪽으로 들어섰다. 건율은 느리게 직진하는 차에 안절부절못하다가 손잡이를 쥐었다. 최무정이 제집을 알게 된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녀석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날 이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이건우의 행방까지도.

“저기, 그, 내려 줘. 이 근처야.”

“저 빌라요?”

“으, 응.”

최무정이 여러 빌라 중 한곳을 콕 집어 물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자신인 걸 알아낸 건 아닐까, 그래서 제가 사는 집을 알아냈을까? 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제가 멀쩡할 수 있을까?

건율은 애써 우연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사이 매끄럽게 빌라 앞에 정차시킨 최무정이 상체를 돌렸다. 건율은 급한 마음에 문고리를 당기다,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 걸 보곤 손짓을 멈췄다.

“저기, 문이 안 열려….”

“아, 그거 여기서만 열 수 있어요.”

최무정이 핸들 왼편을 툭툭 쳤다. 순간 가로등에 비친 놈의 얼굴이 섬뜩했다. 녀석의 말대로 고정된 잠금장치는 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건율은 그럼 열어 달라는 얼굴로 최무정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녀석이 턱을 괸 채로 물었다.

“열어 드려요?”

“어, ……응.”

“네, 열어 드릴게요.”

그제야 최무정이 손을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장치가 달칵 소리를 내며 풀렸다. 건율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문을 열어 젖혔다.

이대로 납치되는 건 아니었구나.

차에서 내려서자 긴장이 풀렸다. 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좁고 습한 자취방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문을 닫으려는데 최무정이 여전히 핸들에 팔꿈치를 댄 채로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쪽 위험하니까 일찍 다니시고요.”

“아, 응. 고마워…. 데려다줘서.”

건율은 떨떠름한 얼굴로 애써 웃었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최무정이 말을 걸었다.

“선배.”

“응?”

문틈을 다시 벌리자 최무정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받아 든 건율은 제 핸드폰인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바닥에 떨어트리셨던 데요.”

“아, 진짜? 몰랐네.”

“의외로 덜렁거리시네요.”

“조금… 그런가 봐.”

건율은 어색하게 웃고는 눈을 빙글 돌렸다가, 다시 최무정을 쳐다보았다.

“조심히 들어가.”

“네, 선배도요.”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멎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문을 닫자 곧 차가 천천히 후진했다. 건율은 철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주저앉을 듯해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버텼다.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 쾅, 소리 나도록 손잡이를 세게 당겼다. 현관문이 고장이 나 세게 닫지 않으면 문이 열리곤 했던 탓이다.

난방이 꺼진 원룸은 서늘하고 고요했다. 꼭 조금 전까지 있던 차 안처럼.

건율은 엄지와 중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눈가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다. 강의 하나가 끝날 때마다 피로가 눈덩이처럼 부풀었다.

그 사건 이후로 계속 악몽을 꾸었다. 양손이 으스러지며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꿈.

건율의 하루엔 변함이 없었다. 늘 그렇듯 공부에 집중하고, 강의가 끝나면 연습실에 가거나 레슨과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냈다. 신경 쓰지 말자, 하며 스스로를 도닥였으나 뜬눈으로 며칠을 새우다 보니 반쯤 미쳐 가고 있었다.

건율은 저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을 보아서, 혹은 두려움에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니다. 이정우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날 도와주지 못한 것, 하다못해 경찰에 신고라도 할 것을 그저 숨어 있던 자신이 한심했다.

* * *

“어젠 조심히 들어가셨어요?”

커다란 덩치가 책상을 덜컹이며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 뒤로 녀석의 친구들이 ‘뭐야, 너 거기 앉게?’ 하며 불만을 표했다.

“어차피 홀수잖아, 뒤에 앉아.”

“앞자리 싫은데.”

건율은 맨 책상을 손으로 살살 쓸며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옆에 앉아도 된다고 말 안 했는데.”

그 말에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여러 쌍의 눈동자가 건율에게로 향했다.

“아, 여기 자리 있어요?”

“…아니, 없어.”

“그럼 혼자 앉고 싶으세요?”

최무정은 다르다. 차갑게 내뱉은 건율의 말에도 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여우처럼 올라간 눈꼬리가 유연하게 휘어졌다.

“…앉아도 돼.”

차마 그 얼굴에 대놓고 꺼지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옆자리를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의사도 묻지 않았음을 따졌을 뿐이다. 건율은 두꺼운 전공 서적을 펼치고, 필기구를 꺼내 들었다.

최무정이 이 강의를 들었었나?

아무리 이름도 몰랐던 놈이라지만 존재감이 강한 최무정을 잊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건율은 말없이 펜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죄송해요, 제가 묻지도 않고 앉아서.”

그때, 녀석이 불쑥 다가와 말을 걸었다. 건율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니, 아냐.”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제법 사람 좋아 보였다. 건율은 시선을 전공 책으로 돌렸다. 그에겐 별것 아닌 한마디겠지만 건율에겐 성가신 관심이었다. 게다가 녀석을 볼 때마다 그날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선배, 혹시 오늘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왜.”

“할 말 있는데.”

혹시 그 일에 관련된 걸까. 건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오늘 말고… 다음에.”

“아아, 네. 급한 일은 아니니까 다음에 시간 되실 때 말씀해 주세요.”

“…….”

그대로 대화는 끊겼다. 최무정은 뒷자리 친구들에게 몸을 돌리고, 건율은 뻣뻣하게 앉아 전공 책을 노려보았다. 그냥 빨리 이야기하고 끝내는 게 나았을까?

강의는 늘 그렇듯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재밌었다. 건율은 피아노에 관련된 이야기에만 눈을 빛내다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면 축 처져서 멍하니 교수의 말을 받아 적었다. 공부는 딱 질색이었지만 평생 등지고 살았기에 이렇게라도 해야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건율은 연습실로 향해야 하는 몸을 돌려 조교를 찾아갔다.

“이정우? 1학년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연락처… 글쎄요, 바뀌었다는 말은 없었는데.”

건율은 무심한 얼굴로 조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교는 마우스를 잡고 몇 번 클릭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010-xxxx-xxxx 이건데, 이게 바뀌기 전 번호라는 거죠?”

“네. 그건 전 번호예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었다. 찾아가서 위로를 할 성격도 못되고, 사과하러 갔다간 사람 분통이나 터트리고 올 것이다. 근데 왜 자신은 이러고 있을까. 이유는 건율도 몰랐다.

“…그, 하아…. 며칠 전에 전화 온 거요. 그때 온 번호는 이거였어요? 아닐 텐데.”

“학생 번호를 저장하지는 않아서요. 그리고 뭐, 저희가 반드시 연락처를 갖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고…. 개인 정보는 알려드릴 수도 없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당당히 주소를 캐낼 방법은 없다. 흥신소라면 모를까. 건율은 잠시 고민하다 조교실 내 의자에 앉았다. 조교가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건율은 망설이다 재차 물었다.

“혹시 주소가 바뀌었나요?”

“음……. 일단 최근에 정우 학생이 뭘 바꾸겠다고 연락 온 적은 없어요. 퇴학 생각 있다고, 어머니께서 전화 주신 게 다예요.”

커다란 돌이 얹힌 듯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제 일이 아니라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건율은 잠시 턱을 긁다가 이정우가 수원역에서 무서운 곳을 봤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쪽은 부모님이 못 가게 해서 몰랐는데, 지나가는데 여기저기서 저를 불러 댔다고 했다.

“아직 수원역 근처에 살까요? 지금은 병원이겠죠…. 근데, 교통사고가 크게 났대요?”

“아, 네. 정신은 차렸는데 움직이기도 힘들다고 하시더라구요. 어머니가.”

“손이 그렇게 됐으면 악기 연주하기 힘들 텐데…. 재활한다고 해도 공백기도 있고…. 병원은 괜찮은 데로 갔대요?”

혀를 차며 말하자 조교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의자에 몸을 묻고는 씁쓸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근처 큰 병원 가서 정밀 검사도 하고, 재활도 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작은 데에선 할 만한 수술이 아니라서….”

“잘 나아서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여튼, 감사합니다. 가 볼게요.”

“아, 네. 들어가 보세요.”

건율은 조교실을 나오자마자 수원역 부근 병원을 검색했다. 부모님이 못 가게 했다, 라는 건 그 주변에 본가가 있다는 뜻이다. 조교의 말대로 가장 큰 병원으로 찾아보자면….

이주대학병원. 며칠 되지 않았으니 아직 입원 중일 것이다. 하지만 수술을 위해 더 큰 병원, 즉 서울로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미 갔을 지도모르고.

건율은 정문으로 뛰다시피 하며 이주대학병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검색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얼굴이라도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 * *

[오늘은 연습 안 하고 어디 가?]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건율은 도착한 메시지를 익숙하게 캡쳐 한 뒤 삭제했다. 그가 보내 온 문자는 모두 캡쳐 해 모아두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조금 널널해지면 경찰서에 자료를 넘길 생각이었다. 아마 문자만으로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지난 전화가 녹음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건율이 쓰는 핸드폰은 전화 녹음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녹음이 되는 어플을 깔아 두었으나 부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이정우 환자 병문안 왔는데, 몇 호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20살이에요. 남자애고요.”

“가족분이세요?”

건율은 잠시 움찔,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이에요.”

거짓말을 하는 건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가족이 아니라면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조마조마하며 기다리자 다행히 간호사는 크게 의심하지 않고 모니터를 뒤적이다 건율에게 호수를 알려 주었다.

건율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벽에 붙은 거울에 초조한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던 건율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6층에 도착한 건율은 이곳저곳을 살피다 611호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놀랍게도 1인실이었다. 문에는 이정우, 한 명의 이름만이 꽂혀 있었고 더 꽂을 곳도 없어 보였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가 조금 든, 무게 있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머, 정우… 친구니?”

아마 문을 두드린 게 간호사나 의사라 생각했는지, 이정우의 어머니는 조금 놀란 얼굴로 건율을 반겼다. 건율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우 학교 선배입니다.”

“그래요? 정우가 아무도 안 올 거라고 했는데…. 아, 정우야, 깼니?”

커튼 안쪽으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침대의 각도가 올라가며 자연스럽게 상체가 올라갔다.

“…누구예요?”

“너네 학교 선배시라는데.”

“…그, 저 이건율이라고 합니다.”

“이건율 선배라고 하시는데?”

이정우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작게 한숨을 쉬는 듯도 했다. 어머니는 커튼 안쪽으로 들어가 정우와 무어라 이야기하는 듯하셨다. 건율은 이정우가 거절할까 싶어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손에 쥐여 주셨다.

“내가 나가 있을게요. 정우랑 이야기해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지.”

그제야 건율은 병문안을 오면서 아무것도 사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조심스레 커튼 안으로 들어서자 이정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건율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가, 그가 가리키는 의자로 가 앉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

“올 때 누구랑 오셨어요?”

“혼자 왔어.”

이정우는 불안해 보였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양손은 깁스가 되어 있었다. 다리 한쪽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개의 링거가 마리오네트처럼 늘어져 있었다.

“누가 따라오진 않았어요?”

“…왜? 나 혼자 왔는데.”

“아니!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눈에 띄게 이정우의 동공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퍽 안쓰러웠다. 저라도 그런 일을 당하면 불안해서 한 시도 편안히 있지 못할 터였다. 이건우는 정말 혼자 왔냐고 두 번을 더 묻고 나서야 안심하는 듯 보였다.

“고소…했어?”

“네?”

“너, 이렇게 한 사람….”

그때 분명 이정우는 취하긴 했어도 제정신이었다. 자신을 때린 게 누구인지 정도는 알 것이다. 건율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이정우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 교통사고예요. 상대방이 치료비도 대 줬어요. 1인실도 들어오고요….”

끝까지 교통사고라고 할 생각일까. 누가 봐도 폭력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대답을 재촉하듯 눈살을 찌푸리자 이정우가 입술은 안쪽으로 말았다. 살짝 벌어졌다 닫히기를 몇 번, 이정우는 답답함에 터져 나오는 한숨을 뱉었다. 긴장된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결국, 이정우가 시선을 들어 건율에게 눈을 맞췄다.

“저…… 괜찮아요, 선배. 교통사고로 안 보이는 거 알아요.”

“알면, 말을……!”

“그리고 앞으로 저 찾아오지 마세요. 여기까지 와 주신 건 감사해요.”

“뭐?”

“선배는 특히… 안 돼요. 오지 마세요.”

그때 삑, 하고 벨 소리가 들렸다. 그 즉시 문 앞에 서 계셨던 어머니가 병실 내로 들어오셨다.

“엄마, 나 좀만 잘래.”

“그래,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응.”

이건우는 말할 때마다 발음이 쉭쉭 새었다. 입술 사이가 드러날 때마다 이가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는 것도 보았다. 건율은 그대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쫓겨나다시피 그곳을 나와야 했다. 시간을 할애해 온 보람 없이, 5분도 채 대화하지 못하고 병원을 나섰다.

이건우는 진심으로 오지 말라는 듯, 저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폭행을 가한 사람이 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를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 번호…….”

다시 번호를 받아 내려던 것을 깜빡했다. 건율은 잠시 멈춰 서서 병원을 돌아보았다가, 몸을 돌렸다. 물어봤어도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왜 저만은 가선 안 된다고 하는 걸까.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치료비 좀 받았다고 마음이 풀릴 리가 없을 텐데.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둑한 골목길 사이 커다란 덩치의 최무정이 주먹을 내리꽂을 때마다 피가 튀었던 것을. 섬뜩한 눈매는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응징한다는 듯, 묵묵한 얼굴로 이정우의 손을 쥐고 부러트렸다.

발로 밟거나 도구를 쓰지도 않고, 그 주먹을 감싸고 쥔 것만으로 손가락이 아작이 났다. 소름이 쫙 돋아났다. 건율은 이정우에게 그 옆에서 보고 있었다고, 신고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제 건율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이정우의 태도가 그러했다.

건율은 시간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며 집으로 향했다. 다시 학교로 가 연습하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혹시 몰라 가방에 전공 서적을 가져온 것이 다행이었다. 남는 짧은 시간이라도 공부해야 할 듯싶었다.

집까지는 출발할 때보다 두 배는 더 걸렸다. 퇴근 시간이 애매하게 걸렸다. 건율은 터덜터덜 현관문을 열고 제 집 앞으로 들어섰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미친 새끼는 지겹지도 않나.”

보란 듯이 현관문 앞에 고이 놓고 간 하얀 편지지는 우습게도 핑크색 꽃 스티커로 봉해져 있었다. 건율은 우표도 붙어 있지 않은 하얀 편지지를 북북 찢다가 다시 고스란히 모양을 맞춰 집어넣었다. 이것도 증거로 작용할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열어 보았다. 그러나 편지 봉투 안에는 언제 찍었는지 모를 건율의 사진과 역겨운 이야기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2학기 이후 생긴 변화이니 같은 학과 녀석일까 싶기도 했지만, 그전까지는 군대에 있었으니 그렇다고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중학생 때 이야기를 아는 건 아마, 뒷조사라도 해서 사진을 구했나 보지.

건율은 피곤한 눈두덩을 부비며 가방을 바닥에 던졌다. 그래도 저 혼자 사는 원룸인 것이 다행이다. 본가에서 살았다면 어머니는 하루하루 불안해하셨을 것이다. 건율이 창창한 20대 남성이었기에 버틸 수 있다. 건율은 놈을 찾아내기만 하면 흠씬 두들겨 패 줄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든 편지를 검은 봉투에 쑤셔 넣었다. 그 안은 이미 편지로 가득 차 있었다.

좁은 집은 거실 전등 하나를 킨 것만으로 사방이 환하게 물들었다. 건율은 징,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하며 가볍게 걸친 재킷을 벗어 던졌다. 가방에서 전공 서적을 꺼내 정리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섰다. 수도세도 아까워 빠르게 씻고 나온 건율은 크게 하품을 뱉으며 좌석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전공 서적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몹시 하기 싫다. 아니, 존나 하기 싫었다. 하지만 등록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학자금 대출도 부담스러운 마당에 장학금은 건율에게 마치 빛과 소금처럼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내일도 아침부터 나가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건율은 시간을 확인하고 12시까지 공부할 생각으로 전공 서적을 펼쳤다. 크게 하품하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직 겨울이 온 것도 아닌데 외풍 탓인지 방 안이 몹시 차가웠다.

펜을 꺼내 들고 자세를 바로 한 건율은 우울한 얼굴로 전공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그 옆에 둔 핸드폰이 징, 울렸다.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건율 씨]

[편지 찢지 마세요. 마음이 아파요ㅜㅜ]

[오늘은 집에서 공부하시네요 후배 병문안도 가고 좋은 선배네]

[적당히 공부하고 얼른 자요]

[좋은 꿈 꿔요. 오늘 입은 까만 코트 진짜 예뻤어요.]

모든 메시지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 * *

곧 시험이었다.

개강한 지 얼마나 됐다고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교수를 향해 학생들이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과 특성상 강의실 내 학생이 적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시험 보기 싫은 놈들은 자퇴하도록. 강의 끝.”

교수의 차가운 일갈에 여기저기서 한숨을 뱉었다. 건율은 시험 범위를 체크하며 피곤에 내려앉은 눈가를 비볐다. 오늘도 옆자리엔 최무정이 앉아 있었다. 왜 자꾸 옆자리를 고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율은 말을 걸어오지 않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물론 녀석이 저를 볼 때마다 불안함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날 잠깐 눈을 마주친 것 빼고는 들킨 게 없는데도 불안했다. 거리의 가로등이 역광으로 들어와 얼굴을 보지 못했을 텐데, 그러니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건율은 녀석을 피하고 싶었다.

교수가 전공 서적을 챙겨 강의실을 나가자마자, 동시에 학생들도 우르르 일어나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꼭 천둥소리 같았다.

“선배.”

“……어?”

멍하니 짐을 챙기던 건율이 느닷없는 부름에 놀라 고개를 들자 최무정이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는 듯 손짓을 하며 턱을 괴었다.

“이 과목 너무 어렵지 않아요?”

“어……. 뭐, 재미없지.”

전공 강의라 듣고는 있지만, 교수법은 영 재미없다. 건율은 넣다 만 전공 서적 끄트머리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손가락에 눌린 흔적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저 이 과목 이해가 안 되는데, 뭐 좀 여쭤봐도 돼요?”

“나…한테?”

“네. 선배 군대 가시기 전에 과탑이었다고 들었거든요.”

난감함에 미간이 살풋 일그러지자 최무정이 손을 저었다.

“부담되시면 어쩔 수 없구요. 제가 사실 성적이 많이 낮아서, 걱정이거든요.”

“어, 얼마나 낮은데……?”

“저도 이번 학기에 복학했는데, 그전까지 아슬아슬하게 3점대였어요.”

겨우 3점대를 넘었다며 한숨을 쉬는 얼굴이 간절해 보였다. 일주일간 옆자리에 앉았던 최무정은 강의 시간에 제법 집중을 했고, 꼼꼼히 메모하고 있었다. 간혹 보았던 정리 노트는 언제 다 했나 싶을 정도로 꼼꼼했다. 만약 그렇게 열심히 하고도 아슬아슬하게 3점대였다면 당연히 걱정될 것이다.

그러나 건율은 최무정의 부탁을 몹시 거절하고 싶었다. 녀석과 조금이라도 얽히는 것이 껄끄러웠다.

“다른 애들이 더 잘 알 텐데…. 나 바빠서.”

“그래요?”

반문한 녀석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며 건율을 빤히 보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건율은 짐을 마저 정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럼 저번에 잠깐 할 말 있다고 한 거요, 그거 시간 내주실 수 있어요?”

드디어 왔구나.

거기 있던 게 선배였어요,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거짓말이 티가 나면 어떡할까. 사실은 이미 눈치챈 건데 떠보는 거라면….

“으응. 할 말이 길어?”

“글쎄요. 선배 하는 거 봐서요.”

떠보는 듯한 말과 달리 빙긋 웃은 녀석의 양 뺨이 발그레했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가 매끈하다. 최무정은 뱀같이 찢어진 눈을 잔뜩 휘고는 짐 정리를 했다.

“저희 카페 가서 얘기해요.”

“…그래.”

카페까지 가는 동안 최무정은 노골적으로 건율을 쳐다보았다. 건율은 속으로 진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안 그래도 스토커 문제로 골치 아픈데, 무서운 후배에게 엮이고 싶지 않아 머리가 복잡했다.

온갖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카페에 도착했을 땐,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최무정이 지갑을 들고 카운터로 가며 물었다.

“뭐 드실 거예요?”

“나…. 음, 글쎄….”

건율은 평소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딸기 라떼에 시선이 갔지만, 후배에게 얻어먹는 모양이 됐으니 비싼 걸 고르기 좀 그랬다. 하지만 커피는 마시지 못해서 편안한 차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최무정이 먼저 물었다.

“딸기 라떼 드실래요? 저도 그거 마시려고요.”

“어? 어…. 좋아.”

“네.”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최무정은 촉이 굉장히 좋은 편인 듯했다. 이전에 집에 데려다줄 때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건율은 주문을 끝낸 최무정을 따라 창가에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하려는 얘기가 뭐야?”

“음? 뭘 그렇게 급하게…. 음료 나오고 천천히 얘기해요.”

“그래….”

건율은 딱히 소심하거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무정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런 모습을 봤는데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건율이 잘게 경련하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최무정은 조금 전 들었던 교수법 전공 서적을 꺼내더니 접어 두었던 페이지를 펼쳤다.

“저 이 부분만 설명해 주시면 안 돼요?”

“여기?”

“네.”

분명 안 한다고 했는데, 최무정은 유순하게 그 말을 무시했다. 건율은 상체를 들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조금 어려운 부분이긴 했으나 이해만 하면 나머지는 쉬운 문제였다.

하나만 알려 달라는 걸 거절하는 것도 이상해서, 건율은 상체를 들어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갔다. 시선을 내려 최무정이 가리킨 페이지를 쭉 훑어보았다. 교수법은 건율에겐 크게 어렵지 않았고, 이전에도 팀플을 했던 적이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듯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설명하자 최무정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얌전히 들었다. 사실 그런 모습만 보지 않았더라면 최무정은 건율에게 그저 밝고 예의도 바른 후배 중 하나였을 터였다.

“어, 이거-.”

“아, 다 됐나 봐요. 제가 가져올게요.”

동그란 기계가 진동하자마자 최무정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날의 기억에 어쩌면, 조금 오류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여기요.”

“고마워. 어…. 내 거 생크림 추가했어?”

“네. 선배 생크림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건율이 생크림에 환장할 만큼 좋아하긴 했다. 남들은 딸기 라떼에 웬 생크림이냐, 묻곤 했지만 꿋꿋하게 먹을 만큼 좋아했다. 혹시 전에 이렇게 마시는 걸 본 걸까? 건율은 최무정을 힐끔거리며 잔을 받아 들었다. 상큼한 딸기와 우유가 섞인 딸기 라떼 위에 생크림이 모양 좋게 올라와 있었다.

“선배, 진짜 잘 가르쳐 주시네요. 다 이해했어요.”

“아냐, 네가 잘 알아들은 거 같아.”

“선배가 계속 알려 주시면 좋겠어요. 교수님보다 훨씬 나은데.”

작게 투정 부리듯 덧붙인 말에 건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최무정은 전공 책을 다시 제 가방에 정돈해 넣고, 딸기 라떼에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건율의 것에도 꽂아 주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아녜요. 선배가 시간 내주신 건데.”

건율은 딸기 라떼를 쪽, 빨아 마시고 생크림을 빨대 끝으로 살살 떠 먹었다. 얼마 만에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 식비도 모자라 딸기 라떼는커녕 카페에 온 것도 간만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이번에도 성급했을까 싶어 눈치를 보자 최무정이 턱을 괴었다. 빨대로 딸기 라떼를 휘휘 젓던 녀석에게로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건율은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녀석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별 건 아니고….”

“으응.”

“저희 월요일에 술 마셨잖아요. 3학년 다 같이.”

역시 그날의 이야기일까. 건율은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우, 알죠? 1학년이요. 선배 엄청 좋아하는 애.”

“아, 응. 알지.”

모른 척 묻자 최무정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건율은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하며 발끝을 잔뜩 오므렸다.

“그 친구 다친 거……. 그날이잖아요.”

차라리 봤다고 시인할까? 내가 봤다,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

건율은 속으로 참을 인을 그리며 최무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감정이 표정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그래……?”

“네. 그날 일이에요. ……교통사고 아니에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건율은 당황한 티를 숨기며 빨대로 생크림을 휘휘 돌렸다. 혀로 빨대에 묻은 생크림을 핥자 최무정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 봤어요.”

“……뭘?”

“누가 걔 때리고 가는 거요.”

아직도 최무정이 뼈를 부러트리는 모습이 선명했다. 건율은 최무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떴다.

“깜짝 놀라서……. 제가 바로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범인 얼굴은 자세히 못 봤는데 저랑 키나 덩치가 비슷하더라고요.”

“으응.”

“이런 얘기 해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어디 털어놓을 곳도 없고.”

최무정의 표정이 퍽 울적하다. 이게 연기라면 녀석은 지금 당장 배우로 데뷔해도 좋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건율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최무정을 쳐다보았다.

어두웠지만 분명, 최무정이 맞았는데.

녀석은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건율은 최무정의 눈치를 보다가 딸기 라떼를 마셨다. 녀석이 무슨 의도로 저렇게 말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필, 그 자리에 있던 저에게 이걸 털어놓는 이유는 뭘까. 말할 사람이 왜 하필 저일까.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이인데.

“걱정 돼요. 완치 후에 일상생활이나, 재활 가능성이랑……. 왜 그 사람 고소 안 하고 교통사고로 처리된 건지도 모르겠고…….”

천연덕스럽다. 저게 진짜 연기라면 진짜 미친 새끼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애를 패 놓고 저렇게 말할 리가 없었다. 건율은 상당히 식겁했으나 애써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얼마나 다쳤는지 난 잘 모르겠어서……. 재활하면 괜찮지 않을까? 좀, 텀이 있긴 해도 아직 어리니까.”

“그렇겠죠? 하긴, 이제 스물이니까.”

“으응.”

딸기 라떼를 마시는 와중인데도 목이 탔다. 건율은 이쯤에서 저도 봤다고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최무정의 말이 사실인지, 혹시 모를 변명으로 제 입을 막는 건지 모르겠어서 확신이 서질 않았다.

건율은 더 말을 잇지 않고 빨대를 쪽쪽 빨며 눈을 굴렸다. 더 할 말이 없으니 가고 싶은데,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음료는 최무정이 사지 않았던가.

어쨌든 건율은 이렇게 해결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건우에 대한 죄책감과 최무정의 일에 끼어드는 건 다른 문제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이런 문제가 아니어도 건율의 일상은 충분히 피곤했다.

“다음에 병문안 가야겠어요. 아, ……선배는 다녀오셨죠?”

“응? 응. 아, 맞다. 나 이제 연습하러 가야 되는데.”

“같이 가실래요? 저도 이 시간에 예약해 둬서요.”

“그래? 그러자.”

아주 잠깐, 자연스럽게 제 자취방으로 방향을 틀던 때처럼 기시감이 들었다. 건율은 눈을 꼭 감았다 뜨며 한숨을 깊게 뱉었다. 요즘 스토커인지, 미친놈인지 그놈 때문에 예민해졌다. 예약 시간이야 얼마든지 겹칠 수 있는 거니까.

“그럼, 가요.”

“응.”

최무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대화하지 않았던 탓인지 그의 잔도, 제 잔도 반 이상 차 있었다. 건율은 제 것까지 들고 가 테이크아웃 잔으로 받아 오는 최무정의 뒤에 섰다. 그리고 잠시 핸드폰을 켰다가, 강의 전에 도착했던 메시지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오늘도 예뻐요]

[왜 그렇게 두리번거려요?]

[불안한 일 있어요? 어제 병원에서 본 친구… 아직 못 올 텐데.]

건율은 소름이 돋아난 팔을 슥슥 쓸어내렸다. 그냥 하는 소리겠지. 병원에 가는 건 어찌 저찌 알았다 쳐도, 이정우를 직접 봤을 리는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고백을 하면 거절이라도 할 텐데. 누군지도 모르는 놈 때문에 감정을 소모할 시간은 없다.

건율은 욱신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최무정에게 잔을 받았다. 둘은 시험 기간이라 가득 차 있는 연습실 여러 개를 지나, 각자 예약했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최무정은 바로 옆방이었다.

“얼마나 연습하실 거예요?”

“왜?”

“그냥요.”

건율의 스케쥴은 대체로 일정한 편이었다. 강의가 끝난 시간부터 6시까지 연습실에 박혀 있다가 도서관으로 갔다. 그러나 시험 2주 전인 오늘부터의 계획은 달랐다. 제 일정을 곧이곧대로 얘기하기 싫은 건율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할 만큼 하려고.”

“그래요? 저는 6시까지 하려고요. 연습 힘내세요.”

“아, 응.”

1, 2학년 때에는 필기 과목이 많았지만 3학년이 된 지금은 실습 과목이 더 많았다. 뭣보다 4학년에는 졸업 무대를 준비해야 하니 연습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니 오늘부터 2주간은 8시까지 연습하고, 도서관에서 3시간 동안 공부할 생각이었다.

최무정과 시간이 겹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건율은 연습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피아노 한 대가 떡하니 놓인 연습실은 하얗고 좁았다.

[건율 씨, 오늘은 뭐 칠 거예요?]

창가에 핸드폰을 내려놓다 도착한 문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예 모든 문자 수신을 거부할 방법은 없을까? 기다리는 전화만 아니었다면 아예 핸드폰을 없애도 좋을 텐데.

건율은 한 달이나 이어진 문자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훔쳐보는 누군가가 있는데 마음이 편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핸드폰 알람을 무음으로 변경한 뒤 피아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악보집은 필요치 않았다. 건반에 손을 올리자마자 손가락이 자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게,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처럼 내려온 음절은 이내 작은 싸락눈같이 가볍게 흐트러졌다.

가을 초입을 여는 비는 아주 가녀리게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시야를 모두 가로막아 안개처럼 세상을 가득 채웠다. 점차 재즈의 스윙처럼 음악이 통통 튀기 시작했다.

비 틈으로 무지개색 우산이 빙글빙글 돌고, 가림막에 닿아 튕기는 빗물이 이곳저곳으로 마구 쏘아 다녔다. 바닥으로 떨어질 운명이던 그들의 삶이 지나가던 차 위로, 사람들의 어깨 위로, 저 멀리 아파트 화단으로.

[마음에 들어요, 이 곡.]

연주에 빠지는 것은 1분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건율은 건반에 손을 올리는 순간 빠져들곤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메시지는 계속해서 쌓였다. 건율은 목이 마른 것도, 숨이 벅차 오는 것도 잊고 입가를 올려 연주했다.

[꼭 건율 씨 같아요]

[나 쌀 거 같은데 어떡하지….]

* * *

연습을 끝내고 나왔을 땐 최무정의 연습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전공 서적 두 권이 든 가방은 몹시 무거웠다.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 11시까지, 건율은 공부에 매진했다. 시험이 2주 정도 남았음에도 도서관은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

공부를 끝내고 도서관을 나서던 건율은 핸드폰이 징, 울리는 걸 무시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하지만 진동은 문자처럼 짧게 그치지 않았다. 즉, 전화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건율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저도 모르게 뺨이 상기되었다. 건율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전화일 수 있다는 상상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건율은 기대에 찬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입대 기간까지 더하면 벌써 5년 만에 온 전화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건율은 안으로 들어서며 저려 오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제발, 제발…….

“여보세-.”

- 헉, 허억…… 하, 흐윽…….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던 손이 멈췄다. 건율은 뻣뻣하게 선 채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기다린 목소리가 아니다. 기다린 사람도 아니었다.

- 흐윽, 하아, 하……. 읏, 허억……. 건율아….

익숙하다. 최무정이 이정우를 무작위로 짓이긴 후, 그때 받았던 전화였다. 변조된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낮았다. 짐승이 울듯 상대방은 목을 긁는 소리를 뱉었다.

- 하아, 하…… 씨발.

등줄기에 전기가 타고 흐르듯 소름이 돋았다. 건율은 재빨리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 아니….”

화면만 꺼진 핸드폰에서는 상대의 신음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건율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급하게 녹음 어플을 찾았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아 어떤 것을 눌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아, 씹……. 헉, 허억……. 큭……! 하, 하아…….

물건을 쓸어내리던 손이 잠시 멈췄다. 쾅, 하고 남자가 무언가를 내리쳤다. 건율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어플을 종료하고, 초록색 상단 바를 눌렀다.

- 씨발, 진짜…. 하, 건율아……. 너 박히는 거 좋아하지. 뒷구멍에-

남자가 말을 다 잇기 전에, 건율은 아랫입술을 꾹 짓누르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침묵이 찾아왔다. 건율은 휘청이다 엘리베이터 구석에 어깨를 부딪치곤 주저앉았다. 층을 누르지 않은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꼼짝을 하질 않았다.

그러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덜컹이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건율은 경련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몇 번을 쓸어내렸다. 기대했던 전화가 아닐까 하며 설렜던 만큼, 마음은 처참하게 바닥으로 처박혔다.

-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눈앞이 흐릿하다. 건율은 고개를 들었다가, 놀란 듯 동공이 커진 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건율은 휘청이며 내려섰다. 눈앞이 핑글 돌았다. 등 뒤로 시선이 느껴지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코앞까지 훅 다가왔다.

“어, 야, 뭐야?”

“저기, 저기요!”

앞으로 쏠린 상체가 바닥에 추락하기 직전, 엘리베이터를 오르던 한 남자가 급히 건율을 부축했다. 새하얗게 질린 뺨이나 또렷하지 못한 두 눈동자, 게다가 다리는 완전히 풀려 늘어졌다.

“헉, 허억, 헉…….”

“저기요? 왜,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대답을 하지 못하자 남자가 건율의 팔을 어깨에 둘러멨다. 뒤에 선 여자 둘이 다가와 건율의 상태를 살폈다.

“119 불러드릴까요? 괜찮으세요?”

마른 입술을 떨던 건율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놓아주셔도……. 욱……!”

“토할 거 같으세요?”

그 말에 끄덕이자 남자가 서둘러 건율의 허리를 붙잡고 가까운 화장실로 이끌었다. 건율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다가, 남자가 변기 칸을 열어 주고 나서야 가느다란 팔을 뻗었다.

“으, 흐윽! 컥……. 허억! 흐으……. 흑, 허억, 헉…….”

막상 게워 내지는 못하고, 토기만 쏠렸다. 눈동자의 흰자가 벌게지도록 목에 힘을 주었음에도 나오는 것은 희멀건 것, 그리고 위액뿐이었다. 이럴 때도 온종일 먹은 것이 우유 하나뿐인 게 비참했다. 건율은 몇 번 더 헛구역질을 하다가 등을 두드려 주는 남자에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세요?”

“……그냥, 흐, 속이 좀 안 좋아서.”

“보건실까지 데려다드릴까요? 아, 잠시만요.”

경쾌한 벨 소리에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건율은 힘없는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세면대로 가 입을 헹궜다. 머리가 징징 울렸다. 약 한 달 반, 스토킹을 당하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장학금도 받아야 했고, 실기에서 교수들의 눈에 들어야 했다. 어머니께서 매달 보내 주시는 적은 돈으로는 월세밖에 낼 수 없었기에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경찰에 신고해 봤자 남자가 남자에게 스토킹 당해 신고한다는, 묘한 비웃음을 당할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경찰에 신고하고, 주기적으로 증거를 모아 수사를 요청하게 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이 자리까지 온 시간과 계획. 그리고 혹시 모를 어머니의 건강까지. 그 모든 걸 버리고 고작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 그게… 아, 들으셨어요? ……네, 네. 보건실만 데려다드리고 갈게요. 네, ……네, 네. 감사합니다.”

남자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다가와 어깨를 흔드는 손짓에 건율이 고개를 들었다.

“뭐 잘못 드신 거 있어요? 아, 일단…… 팔 이리 주세요.”

그는 익숙하게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뻗어 건율을 부축했다. 축 늘어진 몸을 안다시피 하고는 입술을 닦아 주고,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다.

건율은 남자에게 안겨서 보건실을 가는 내내, 숨을 쉴 수 없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 때까지 내쉬질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받아 본 전화였는데, 그때는 더 긴 통화를 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당황스럽지는 않았었다.

옆의 남자는 스토커도, 최무정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율은 저를 부축한 남자가 괜히 두려웠다. 그 공포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저 성별이 남성이라는 것만으로, 자신을 쫓아다니고 문자를 보내던 스토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거의 도착했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건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자신이 이해 가지 않았고, 더불어 그 감정은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숨 쉬는 거 힘드세요? 보건실 가는 건 괜찮아요? 사람 많은 시간은 아닌데, 침대마다 커튼이 있어서 답답하실 수도 있어요.”

“괜, 찮…아요.”

보건실 문은 불투명한 시트지가 붙어 있었다. 남자는 그 앞에 서서 건율을 좀 더 살피다가 손에 힘을 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문을 열었다.

그때, 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게 귓가에 바싹 붙을 만큼 가까워졌을 땐 건율은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미 눈으로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건율은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슨…….”

“선배, 괜찮으세요?”

남자가 황당한 듯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갑작스레 등장한 것은 최무정이었다. 우습게도 그는 또 한 번 건율을 도와주러 온 셈이다. 최무정은 건율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를 살짝 갈았다. 뿌득, 소리에 남자가 움찔거린다.

“……최무정?”

“보건실 말고 병원으로 가요, 선배.”

“저기…… 아는 분이세요?”

건율은 작게 헐떡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대신 최무정이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아, 음……. 네, 뭐……. 그,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지셔서, 저는 그냥.”

“압니다. 가세요.”

차가운 대답에 남자가 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훑었다. 건율은 눈동자만 굴려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정갈한 갈색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학교 카페 직원이구나.

“네, 그, 몸 조심하시구요. 바빠도 챙겨 드시고….”

남자는 오지랖이 넓었다. 건율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잠시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점차 숨이 고르게 돌아왔다. 이상하게 그 무서운 최무정의 품 안에서 안정되기 시작했다. 쿵쿵 뛰던 심장 소리도, 누군가 귀에 대고 와악, 하고 소리를 지른 듯 욱신거리던 두통도.

한참 주춤거리던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오던 곳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러던 사이 최무정이 건율의 무릎 아래로 손을 받치고 안아 올렸다.

“뭐…… 하는 거야?”

건율이 놀라 두 팔로 최무정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상체만 조금 떨어졌을 뿐 밀려나지는 않았다.

“야, 너…… 이거 놔.”

“선배, 병원 가요.”

“왜, 왜 이래.”

고개를 든 건율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직 완전히 안정되진 않아 숨을 골라야 했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친 최무정의 얼굴이 뇌리에 새겨졌다. 건율은 눈을 깜빡이며 다시 걱정스레 일그러진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세요?”

제가 고개를 들기 전까지 지었을, 최무정의 표정은 크게 만개한 꽃과도 같았다. 양 입꼬리를 올리고 해사하게 웃으며 양 볼을 붉힌 모습은 꼭 환상에 젖은 듯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고 아래로 늘어진 눈썹, 반쯤 접힌 눈매가 유려했다.

착각이었을까, 또 착각인 걸까. 안정적으로 저를 안아 든 품이 뱀의 비늘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최무정은 건율이 기억하던 얼굴과 달리 저를 살피며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선배?”

“너…… 이러는 거 불편해. 이거 내려놔.”

“몸 괜찮아요? 아까보단 나아지긴 한 것 같은데…….”

“내려놓으라니까.”

“병원 안 가도 돼요? 정말로?”

친절한 미친 새끼. 필요에 따라 귀를 먹기라도 하는지, 최무정은 건율의 말을 싹 무시하고 허리와 다리를 억세게 쥐고서 물었다. 말로 해서는 알아듣지 못할 것 같다. 건율은 어깨를 힘껏 비틀며 최무정을 밀어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요, 떨어져요, 그러다.”

놈은 꼼짝도 하지 않고 조곤조곤 속삭여 왔다. 팔 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결국, 건율은 팔꿈치로 최무정의 명치를 가차 없이 찍어 눌렀다.

“아윽!”

“…….”

“서, 선배?”

녀석은 꽤 놀랐는지 한순간 팔에 힘이 빠졌다. 건율은 그 틈을 타 힘껏 최무정을 밀어내며 바닥에 착지했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발바닥이 따끔따끔하다. 건율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꾹 다물린 입술은 아직 창백하고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적당히 해.”

“뭘…….”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협박을 할 거면 협박을 하든가. 아니면 친한 척을 하지 마. 왜 애매하게 굴어?”

“아니, 전 그냥…… 선배가 아프신 거 같아서-.”

“필요 없어. 진짜 귀찮으니까 작작 해.”

최무정은 놀란 듯 제 명치에 손을 얹고는 멍하니 건율을 쳐다보았다. 좆 됐다. 또 성질을 참지 못했다. 이대로 암매장이라도 당할까? 그럼 지금까지 한 푼 한 푼 아껴 오며 거지같이 살아온 게 너무 아까울 텐데…….

“선배.”

“……왜.”

“저, 협박 같은 거 안 해요……. 그냥 선배가 걱정된 건데…….”

최무정이 씁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건율은 벽을 짚은 채로 숨을 크게 마시고, 뱉었다. 녀석이 끌어안았던 허리와 다리, 가슴에 맞대어진 어깨와 팔뚝이 화끈거렸다. 

건율은 아랫입술을 세게 짓눌렀다. 최무정의 태도 때문에, 그날 그곳에 있던 게 녀석이 확실했는지 녀석이 아니었는지 혼란스러웠다. 옆모습을 한 번,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두 번. 마지막으로 경비와 대화하는 옆모습까지 세 번. 잘못 본 것이라고 하기엔 횟수가 많았고, 확실하다고 하기엔 건율이 침착하지 못했으며 사방은 컴컴했다.

“…모르겠고, 가.”

“……죄송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전, 정말-.”

“알겠으니까 가라고.”

놈의 가슴이 닿았던 왼팔 살갗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아팠다. 건율은 팔을 쓸어내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네가 안 그러든, 그러든 상관없어.”

“그럼,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거죠?”

“….”

건율이 차가운 눈으로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최무정은 굳이 그날 이후부터 제 옆자리에 앉아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복학한 뒤 한 달 반이나 지나면서 인사 한번 하지 않았었다. 인원수가 적은 과임에도 불구하고 최무정과 눈 한 번 마주친 적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마냥 믿기엔 어려웠다. 그럼에도 건율은, 저 일그러진 얼굴과 간절한 눈동자에 속이 울렁거렸다.

“앞으로…….”

최무정이 정말 그곳에 있었든, 없었든.

“아는 척하지 마. 너처럼 사람 동정하듯 구는 사람 질색이니까.”

최무정의 호의가 협박이 아니었다면, 동정 그 외의 것일 리는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건율은 누군가가 제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 싫었다. 피아노가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그랬다. 예민한 살갗에 날카로운 칼날이 스친 것처럼 금세 아픔을 느끼곤 했다.

언젠간 끊길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에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시간이 생채기를 남길 것이다. 건율은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사람에게.

그 말을 끝으로 최무정을 지나쳐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은 어두컴컴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변조된 낮고 굵은 목소리와 최무정의 낯선 온기가 교차했다.

마른세수를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속이 복잡했다. 더 이상 게워 낼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몸 안에 들어찬 모든 것을 토해 내고 싶었다. 며칠간 보고, 겪고, 들었던 것부터 죄책감과 의심이 얼룩진 괴이한 감정까지.

* * *

건율은 시린 손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아파트 두 단지를 돌고 오자 주위가 어두컴컴했다. 17층부터 1층까지 내려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얼마 남지 않은 전단지를 세어 보니 주변 빌라 두어 군데만 들르면 동이 날 것 같았다.

강의 시간, 연습 시간, 공부 시간을 모두 제외한 남는 시간은 얼마 없었다. 그 짤막한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시켜 줄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대체로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적어도 6시간 이상 가능한 사람을 뽑았다. 다행히 과 특성을 이용해 레슨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전단지 아르바이트였다.

아파트를 나와 거리를 걷자 언제부터 신었는지 모를 작은 신발 때문에 발가락이 욱신거렸다. 슬쩍 살펴보자 신발 밑창도 모두 닳아 있었다. 새로 사야 할 것 같았다. 빌라 두 군데에 들러 남은 전단지를 전부 붙이고 오자 힘이 쭉 빠졌다. 끝났다는 생각에 팔다리가 저릿저릿했다. 물론 일이 끝났다고 할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토요일인 만큼 남은 시간을 모두 시험 준비에 쏟아야 했다.

“다했어요?”

“네, 두 단지 돌고 왔어요.”

“그래, 수고했어요. 내일도 올 거죠?”

“네.”

전단지를 가득 넣었던, 그리고 이젠 텅 빈 쇼핑백을 건네주자 남자가 잔뜩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서건율 씨 맞죠?”

“네.”

“들어가요.”

“네, 수고하세요.”

작은 사무실을 나오자 찬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고개를 든 건율의 양 뺨이 붉었다.

언제 날이 이렇게 추워졌지. 여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가을이 도착한 건지 한참 지난 듯했다. 쌀쌀한 공기에 어깨를 웅크린 건율은 제 뺨을 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전부터 내내 다리를 움직였더니 어디든 들어가 앉고 싶었다.

본래라면 바로 학교로 향했겠지만, 건율은 병원으로 향했다. 낡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선 상가에서는 습한 냄새가 났다. 에어컨을 옅게 튼 듯, 복도가 으슬으슬했다.

건율은 간호사에게 제 이름을 말하고 잠시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 서건율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이고 진료실로 들어가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의사는 건율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침대에 눕혀 배의 이곳저곳을 누르며 ‘아파요?’ 하고 물었다. 건율은 한 부위가 쓰라리도록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고 ‘네.’ 하고 대답했다.

건율은 간단한 검사를 받고 의자에 앉았다. 며칠 전의 일 이후로 자꾸만 배가 쓰렸다.

“식사량이 어느 정도 됩니까? 어제 드셨던 저녁 말씀해 보세요.”

“저녁……. 어제저녁은 그냥, 집에 있는 반찬이랑 쌀밥이요.”

“한 공기?”

“아뇨, 반 정도….”

“배부르게 드시는 거 맞아요? 이 나이대 남성분들은 더 드셔야 하는데……. 쓰리다고 하셨죠? 식사량은 적은데, 위산이 과하게 분비되는 거 같습니다. 쓰리다 보니 얹히고, 맞죠?”

생각해 보니 어제 그 조금을 먹다가 배가 아파 수저를 내려놓았었다. 건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위산 분비를 억제해 주는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3일간 드시고 식사량을 늘리세요.”

“아, 네.”

“단백질 위주로 드시고, 찬 음식, 음료, 커피는 자제하세요.”

건율은 처방전을 받아 나왔다. 약국에 들러 약도 받아 들고 학교로 가는 길에 작은 편의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삼각 김밥 하나와 따뜻한 초코 음료를 샀다. 세일 하는 것으로 샀더니 조합이 좋지 않았다. 전주 비빔밥 삼각 김밥과 초코 우유라니. 건율의 낯이 어둑해졌다.

한참을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작은 주택가와 가까운 산에 지어졌고, 정문은 도로에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동네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기엔 돈이 아까웠고.

정문으로 들어서는 데 핸드폰이 울렸다. 건율은 앞선 두 전화 탓에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긴장 탓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행히도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 점차 혈색을 되찾았다.

“어, 엄마.”

- 아들, 이번 주에도 안 오니?

“음……. 네. 시험 기간이에요.”

- 벌써? 고생하네, 우리 아들.

걱정하는 얼굴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건율은 도서관 건물로 향하는 언덕을 끙끙대며 올랐다. 하도 아파트를 오르내린 탓에 허벅지는 퉁퉁 붓고, 무릎은 욱신거렸다.

- 밥은 잘 먹고? 용돈은 안 부족하니?

“네, 괜찮아요.”

용돈이 부족하지 않을 리가 없다. 월세를 제외하고 남는 것이 고작 10만 원이니, 한 달의 식비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건율은 부모님께서 그것조차 힘드실 것을 알기에 말하지 않았다. 제가 남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 그래, 그럼 다행이다. ……이번 학기도 장학금 받니?

“아직 시험이 시작도 안 했는걸요. 다 끝나야 알아요, 엄마.”

어머니가 망설이며 뱉은 말에 건율은 담담하게 답했다. 애초에 바로 일을 시작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4년 전액 장학금을 받는다는 전제로 지원을 허락받아 입학한 대학이었다. 그리고 내신 점수가 부족해 전액이 아닌 한 학기 장학금의 이야기에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을 테니, 다니게 해 달라고 했었다.

욕심인 걸 알고 있었다. 당장 일해도 모자랄 판에 대학이라니, 그것도 돈 많은 놈들이나 한다는 음악으로.

내신 점수가 낮아 기대도 하지 않던 부모님은 건율의 합격 소식에 반쯤 기뻐하시고, 반쯤 걱정하셨다. 그래서 건율은 고등학교 내내 하기 싫어서 내팽개쳤던 공부를 이제야 하고 있었다.

이제 3학년 2학기. 두 번만 더 받으면 된다. 딱 두 번만 더 받아 내면 무사히 졸업이었다.

- 그래? 아이고, 엄마가 못 배워 가지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모를 수도 있지.”

- 그래, 우리 아들 효자다. 엄마가 너무 시간 잡았지? 어여 공부하렴.

“네, 시험 끝나고 한 번 뵈러 갈게요.”

- 그래.

말뿐인 약속인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건율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피곤함에 따끔거리는 눈을 부볐다.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건율은 문득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날것처럼 생생한 공포는 이렇게 이유 없이, 뜬금없이 떠오르곤 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고, 남자는 잔혹한 얼굴로 주먹을 가격했다. 그걸 신고도 하지 못하고 지켜본 자신도 있었다. 건율은 괴로운 얼굴로 숨을 뱉었다. 그러나 고개를 한 번 털고 나자 늘 그랬듯 무심한 낯이 되었다. 그까짓 일로 트라우마가 되기엔 건율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한다.

건율은 도서관 앞에 서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무거운 가방을 추스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을 공부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 텅텅 빈 연습실로 가 몇 시간이고 연습에 매진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나온 건율은 바싹 마른 오징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군대에 다녀오면서 체력이 늘어 그전보단 한 시간이나 더 연습할 수 있었다. 건율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학교를 나왔다. 언덕길을 내려가며 껌뻑껌뻑 눈을 감았다 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정거장 의자에 앉은 건율은 버스가 오기까지 8분이나 남아 있는 걸 보고 눈을 감았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눈을 감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모든 버스는 운행을 종료한 뒤였다.

“……아.”

얼마나 오래 잤을까. 11시쯤 나왔으니, 두세 시간은 잔 셈이었다.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앞머리를 뒤로 넘기자 속에서 열불이 일었다.

“아, 진짜……. 씨.”

이전에도 버스에서 조느라 내리지 못했던 일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건율은 주먹을 쥐었다가, 짜증을 낼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기 위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묵직한 가방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걸었다. 한참을 걸어갈 생각에 서러운 마음도 들었다.

왜 졸았지? 피곤해서? 왜 피곤하지? 돈이 없어서. 남들은 잘만 다니는 학교를 저는 이렇게 힘들게 다녀야 할까? 졸업 후에 잘 될 거라는 보장도 없으면서, 꾸역꾸역 피아노를 쳐야 할까? 만약 제가 피아노를 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어머니에게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해 달라고 하지 말걸. 아니, 친구를 따라 한 번 갔던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만져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 자신을 이루는 그 모든 감정과 욕심이 태어나지도 않았더라면.

세상은 제게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모졌고, 저는 다른 이들보다 더 고집스러웠다. 그 고집이 뭐라고, 제 인생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있었다. 부모님 속이 썩어 나가는 걸 알면서.

“…씨발.”

꾹꾹 참던 욕설이 튀어나왔다. 건율은 결국 주저앉았다. 의지와 다르게 고인 눈물을 팔뚝에 눌러 닦았다. 늦은 새벽, 어두운 동네엔 도로를 달리는 차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거리는 꼭 저승과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제가 죽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스토킹부터, 연락이 오지 않는 그 아이와 자꾸만 저를 두렵게 만드는 최무정의 존재까지.

건율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죽어 버리면, 그렇다면 이렇게 힘들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님도 걱정 하나를 내려놓지 않을까. 피아노에 고집하며 대단하지도 않는 실력으로 꾸역꾸역 버티는 아들을… 부모님은 짐으로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아주 가끔 울컥할 때가 있었다. 이럴 때면 하루하루를 버티던 모든 힘이 무너져 내렸다. 기울어진 건율을 받쳐 주던 가느다란 막대가 부러지듯, 건율은 애초에 살아 있지 않았던 무생물처럼 스러졌다.

“……죽고 싶어…….”

이대로 먼지처럼 흩어져 버리면 좋을 텐데. 애초에 서건율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제가 사라져도 부모님이 슬프지 않았으면, 그리고….

몇 년째 전화하지 않는 그 애가 제 몫까지 두 배로 행복했으면 좋을 텐데.

“선배!”

캄캄한 거리 한가운데 익숙하고 낯선 얼굴이 보였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축축해진 뺨을 비볐다. 제일 꼴 보기 싫은 놈한테, 이런 모습을 들킨 게 수치스러워 목덜미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너, 또.”

“이거 입어요, 어서. 날이 추운데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잠…! 아!”

부리나케 달려온 녀석이 억지로 옷을 입히고, 건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밀어내는 가는 손을 제 어깨에 두르고, 허벅지 아래를 단단하게 받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 하지 말라니까!”

“선배 몸이 너무 차가워요. 빨리 들어가요. 이러다가 큰일 나요.”

“너 내가 아는 척하지 말라고 안 했어? 놔.”

“일단 집까지만 데려다드릴게요. 그러고 나서 아는 척 안 할게요.”

아무리 밀어내도 최무정은 꼼짝을 하질 않았다. 결국 포기한 건 건율이었다. 더 이상 걸을 힘이 없는 탓도 있었다. 최무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믿을 만한 놈이 아닌데, 무서운 놈인데.

“오늘 많이 힘들었어요?”

“…….”

“알겠어요, 말 안 시킬게요.”

오지랖도 넓다. 미친 새끼, 친절한 척 굴다가도 남 말은 귓등으로 넘겨 버리고. 동정이 아닌 진심 어린 걱정으로 다정을 베풀면서도……. 끔찍하게 사람을 두들겨 패는 놈.

최무정의 등은 크고 넓어서, 업혀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침대에 몸을 맡긴 것 같았다. 어깨에 걸쳐진 녀석의 재킷에서 최무정의 냄새가 났다. 묵직하고 따뜻한 향기였다.

얘는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서, 왜 내가 힘들 때 자꾸 나타나서.

“……너 때문에 짜증 나.”

“저요? 왜요?”

“몰라. 네가 어떤 새끼인지 모르겠어.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저번에 그렇게 말했는데도, 내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진짜 착각이라면? 정말 녀석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다면? 하필 그곳에, 최무정과 똑 닮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건율은 자꾸만 최무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합리화를 하고 싶었다.

“선배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사실 고마우신 거 다 알아요.”

“아니야.”

“선배가 그렇게 말해도 전 다르게 들을래요.”

“넌 귀를 왜 달고 살아?”

지가 뭘 안다고.

건율은 최무정의 등에 얼굴을 푹 묻었다. 차가운 거리를 메우던 네모난 차들이 멎어 들고 있었다. 쏟아지던 거부감과 불쾌한 감각들이 하나둘 스러져갔다. 건율은 자꾸만 최무정에게 익숙해지고, 제가 본 것을 거부하는 게 싫어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꼭 그 애 같았다. 그 애도 최무정처럼 남 일을 제 일처럼 여겼다. 건율이 힘들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 도와주곤 했었다. …최유헌은, 건율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고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지 몰랐다. 유학을 갈 때도, 5년째 연락을 하지 않는 지금도 너무나 보고 싶었으니까. 지금 최무정의 등이 그의 등이길 바라고 있으니까. 

하필 성도 같네. 건율은 작게 웃었다가 급히 갈무리했다.

인도를 따라 걷는 걸음은 조심스럽고, 급했다. 최무정이 덩치도 크고 힘도 세다지만 성인 남성을 엎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녀석은 힘든 티 하나 내지 않았다.

“…근데 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

“학교에 놓고 온 게 있어서요.”

“네가 무슨, 공포 게임 주인공이야? 내일 오면 될 거 아냐.”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최무정이 푸스스, 웃었다. 그러곤 여전히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당장 하려는 게 없으면 못 참거든요.”

“너 좀… 특이하다.”

“선배보단 평범한 거 같은데.”

“뭐?”

“농담이에요, 농담.”

건율은 작게 ‘야.’ 하고 딴지를 걸었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힘을 풀며 녀석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건율은 왜 제가 잡담을 하고 있지,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취방까지의 길은 멀었다. 긴 침묵 가운데 최무정이 말을 걸었고, 건율은 저도 모르게 풀어진 마음으로 답했다.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건율은 최무정을 힐끔거리다 눈을 질끈 감고 녀석의 어깨에 눈가를 부볐다.

모르겠다. 원래 나쁜 놈들은 다 이렇게, 아닌 척하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달라질까? 이중인격인 거 아냐?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어.”

“다행이다.”

얘는 언제부터 내 이름을 알았을까. 건율은 주유소에서 만나기 전까지 최무정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피아노과 특성상 인원도 적고, 하도 눈에 띄어 얼굴 정도는 알았지만 그게 다였다.

이름이 불릴 일이 많지 않은 건율에 대해 최무정은 어떻게, 언제부터 알고 기억했을까. 얼굴을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을.

“너 근데.”

“네?”

“……아니다.”

“뭔데요?”

건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학교에서 이름 불릴 일이야 간혹 가다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걸 몇 번 듣다가 외울 수도 있으니까. 특별히 이름을 잘 외우는 사람들도 있지 않던가. 건율은 됐어, 하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후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한참을 가다 보니 이전에 최무정이 차를 태워 주며 꺾었던 골목까지 도착했다.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되기도 하고, 이제 몸도 괜찮은 것 같아서 건율은 최무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 여기서 내려 줘.”

“여기서요? 한참 들어가야 하는데.”

“…너 방금 세 정거장은 걸었잖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집까지 데려다드릴게요.”

방금은 한참 들어가야 한다고 해 놓고.

“아냐, 괜찮으니까 내려 줘.”

“그럼 데려다만 드릴게요.”

“그 고집은 어디서 배워 왔어?”

툭 하니 튀어나온 말에 최무정이 웃어서, 그의 등이 잘게 떨렸다. 건율은 이제야 후배의 등에 업혀 온 게 부끄러워서 어서 내려 달라고 보챘다. 며칠 전만 해도 화를 내며 밀어냈던 녀석이 성큼 가깝게 느껴졌다. 그건 이상하고 멍청한 감정이었다.

최무정은 오른편 가게 앞으로 가 시멘트 턱 위에 건율을 내려 주었다.

“괜찮냐?”

“뭐가요?”

“안 힘드냐고.”

“괜찮아요.”

미친놈. 그날 일을 훔쳐본 게 건율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이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될 텐데. 일종의 다정한 협박 같은 걸까? 자신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건율은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제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무정의 속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몇 번이나 도와준 건 고마웠지만, 그의 의의를 알 수 없어 조금 의심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업혀 온 것이 무색하게, 내리고 나자 조금 민망했다. 건율은 최무정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 앞서 나갔다. 그러자 녀석이 투덜대지도 않고 옆으로 후딱 달려왔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양쪽에 즐비한 빌라의 창문들도 한두 집을 제외하면 전등이 꺼져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정면으로 휙, 하고 불어왔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너 안 추워?”

“네, 저 몸에 열이 많아서 괜찮아요.”

“…그래.”

넉살 좋게 웃는 얼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따뜻한 품에서 나왔더니 공기가 더 으슬으슬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건율은 눈을 세모나게 뜨고 말했다. 최무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나 도와주는 거 그만, 하라고. ……세 번째야.”

“아, 그거야… 선배니까.”

“내가 말도 걸지 말라고 한 거 잊었어? 그니까 받아 주는 것도 오늘까지야.”

“하하….”

차라리 한 대 치기라도 해라. 건율은 맘에도 없는 말을 속으로 뱉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조금 걷다 보니 빌라가 보였다. 건율은 대문 앞에 서서 고개를 돌렸다. 멀뚱멀뚱 서 있던 최무정이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고맙다. 도와줘서.”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세요, 추운데.”

“그래,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네.”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는데, 최무정이 선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건율이 눈을 두 번 깜빡이고 말했다.

“안 가?”

“선배 들어가는 거 보구요.”

“나 코앞이야. 너나 먼저 가.”

“코앞이니까, 보고 들어갈게요.”

“…알겠어.”

미치겠네. 알다가도 모를 새끼. 친절하고 무서운 미친놈.

건율은 작게 투덜거리며 철문을 열고 반 층 아래의 제집 앞으로 갔다. 키패드를 누르려는데, 손잡이에 검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또 그 새낀가. 순간 다시 짜증이 치밀었다가, 가라앉았다. 건율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키패드를 치고, 검은 봉투를 빼냈다.

“그건 뭐예요?”

“어? 어…. 요즘 자꾸 집 앞에 쓰레길 두고 가는 사람이 있어.”

“쓰레기요?”

“신경 쓰지 마. 나 이제 들어간다.”

“……네.”

손을 대충 휘적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부스럭거리는 봉투 소리가 컸다. 봉투를 현관 바닥에 툭 던져 놓고 안으로 들어가며 난방을 켰다. 아직 그럴 날씨는 아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까, 쟤 학교에 두고 온 게 있다고 했는데. 학교로 가는 방향 아니었나? 설마 지금 다시 학교로 가진 않겠지?

조금 찝찝했지만 건율은 고개를 휙휙 저으며 옷을 벗으려다가 멈칫했다. 최무정의 재킷을 돌려주지 못한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어깨 위를 감싼 재킷이 묵직했다. 다음에 보면 진짜, 정말로 인사도 받아 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잠시 재킷을 노려보던 건율은 꽤 비싼 브랜드라는 걸 알아채곤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옷걸이에 재킷을 걸어 두고, 잠옷을 찾아 꺼냈다. 바로 잠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속옷도 챙겨 욕실로 가는데 눈에 검은 봉투가 걸렸다. 그대로 버릴 생각이었는데 무엇이 들었나 궁금증이 일었다.

“보기만….”

보기만 하자. 그냥 뭐가 있는지…. 그리고 어차피 증거니까, 갖고 있어야 하니까.

슬쩍 다가가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시선을 던진 건율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쪼그려 앉아 하나하나 꺼내 보던 건율은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상표명이 써 있지 않은 플라스틱 통에 죽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붙은 메모지에는 손으로 꾹꾹 눌러 쓴 듯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속상하게 아프지 마. 매일 내가 해 줄 테니까 이상한 것도 그만 먹고. 따뜻하게 데워 먹어. 차게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걱정되니까 밤늦게 다니지 말고.]

그놈의 것이다. 분명했다.

병원에 간 건 어떻게 알았을까? 제가 무엇을 먹었는지, 의사가 한 말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 문자가 도착했다. 마치 건율이 봉투를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맛있게 먹어. 내 사랑.]

[꼭꼭 씹어 먹고… 밖에 둔 지 좀 돼서 차가워. 데워 먹어. 알겠지?]

[우리 이쁜 건율이, 아프지 마.]

[그리고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몸 만지게 좀 하지 말고.]

* * *

새벽 6시. 눈을 뜬 건율은 퀭한 얼굴로 베개에 뺨을 묻었다. 어제 그 난리를 쳤으니 몸이 아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온몸에 열기가 쌓여 홧홧했다. 꼭 심장에 불을 품은 것 같았다.

“아….”

목소리는 완전 맛이 가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자 머리도 지끈거렸다. 건율은 휘청이며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오늘도 아르바이트에 가야 했다.

“추워….”

분명 더울 만큼 난방을 올려 뒀는데 집 안은 얼음장처럼 찼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일요일 아르바이트는 8시까지였으니 조금은 더 자도 괜찮았지만,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감싼 건율은 화장실로 걸어가 칫솔을 손에 쥐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살갗이 따끔따끔 아려 왔다.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려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건율은 아르바이트 사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몸이 안 좋으니 조금 늦게 가도 괜찮냐는 내용이었다.

적당히 씻고 나온 건율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꼬르륵, 배에서 빈곤의 소리가 났다. 건율은 손으로 배를 쥐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에 먹을 거라곤 라면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쌀이 다 떨어졌다.

저절로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현관 앞에 둔 검은 봉투. 음식물쓰레기 봉투도 하나밖에 남지 않아 버리지도 못한 것이 찬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지만 건율은 꾹 참았다. 굶어 죽더라도 저건 먹고 싶지 않았다. 건율은 마른세수를 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가자. 조금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건율은 데자뷰를 느꼈다. 창에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몸은 아직도 아팠다. 으슬으슬 떨리는 어깨에 이불을 두르고 핸드폰을 켜자 문자가 몇 통 쌓여 있었다.

[사장님: 몇 시요.] 8:40

[사장님: 오늘 안 오면 어제 급여 못 드려요] 9:00

[사장님: 언제 오세요 서건율 씨] 11:21

[사장님: 전화도 안 받으시네요 이런 식으로 빠지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13:11

[사장님: 그간 성실하셨으니까 봐드릴게요 다음 주엔 오세요 이번 주 급여는 없습니다] 13:12

부재중 전화 한 통.

건율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핸드폰을 내던졌다. 벌써 3시. 본래라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가방에 무거운 전공 책을 들고서 아파트를 돌든,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 주든 뭐라도 하고 있을 시간.

“아, 씨…. 몰라.”

어제처럼 나자빠질 생각은 없었다. 건율은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하고는 이불 속에 쏙 들어가 몸을 감싸 안았다. 창밖을 보니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닌 듯했는데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방바닥도 얼음장처럼 찬 걸 보니 아무래도 난방이 고장 난 듯싶었다. 

저번에 전기장판이라도 살걸.

후회하던 건율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샀다면 며칠을 더 굶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걸 사질 않아서 어제 아르바이트 급여도 날아가게 생겼다. 용돈이 들어오기까진 1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꼬르르륵, 배에서 천둥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건율은 코를 훌쩍이며 현관을 힐끔거렸다.

누가 만든 건지 알고 먹어, 저걸…. 아니지, 전화로 그 지랄을 하는 새낀데 어떻게 먹어. 하지만 저거 버리는 것도 돈인데…. 설마 안에 뭘 탔을까? 사랑한다면서 그런 걸 탔, 아니야. 그게 왜 사랑이야.

건율은 결국 주린 배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실컷 자서 그런지 잠은 더 오지 않았다. 그냥 배만 고팠다. 먹고 죽을까, 하며 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징징,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다. 건율은 저번의 일을 떠올렸으나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반대편에서 아무 말이 없다. 국제전화라서, 끊기는 걸지도 모른다. 

건율은 급히 몸을 일으켜 앉아 목을 가다듬었다.

“큼, 여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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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여성의 기계음에 건율은 무심한 얼굴로 빨간 버튼을 눌러 종료시켰다. 자주 있던 일이기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냥, 쥐고 있던 희망의 끈이 더 가늘어졌을 뿐이다.

건율은 더 자기 위해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갔다. 그때, 또 전화가 왔다. 팔만 내밀어 핸드폰을 이불 안으로 들이자 역시나 또 모르는 번호다. 바로 끊어 버릴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가 들어도 심기가 더럽게 느껴질 만큼, 건율은 퉁명스레 답했다. 그런데 상상도 못 한 목소리가 들렸다.

- 선배, 저예요. 무정이.

“……뭐야, 너?”

- 어제 몸이 안 좋아 보이셔서, 오늘은 괜찮나 하구요….

건율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번호요? 과대한테 물었어요.

“번호 지워. 이거 예의 아닌 거 몰라?”

- 아, 알겠어요…. 지울 테니까 말씀해 주세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냥 그래.”

- 선배 목소리가 안 좋은데……. 아프신 거 아니에요?

“심한 건 아니야.”

- 아프신 건 맞고요?

“별로 안 아파.”

- 그니까 아프긴 하다는 거죠?

건율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건율은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뚱한 얼굴로 답했다.

“어.”

- 알겠어요.

“끊는다.”

- 네엡. 좀만 기다리세-.

바로 전화를 끊느라 최무정의 목소리가 끊겼다. 건율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쳐다보았다.

“……다시 걸 필요는 없겠지.”

건율은 이불 안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숨을 푹 내뱉었다. 열기가 찬 뜨거운 바람이 잇새로 새어 나갔다. 이불이 얇아 체온으로는 데워지지 않았다. 건율은 다시 꾸물꾸물 일어나 옷장 구석에서 두툼한 겨울 이불을 꺼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전공 서적을 정리해 둔 노트도 꺼내 이불 옆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이불에 돌돌 몸을 감싸고 엎드렸다. 색색, 뜨거운 숨을 내뱉는 소리가 거칠었다. 

“아휴……. 하기 싫어.”

몸이 아프니 더 서럽고 하기 싫었다. 그래도 계속 피아노를 치려면 해야 했다. 건율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노트를 줄줄 읽었다. 지금까지 한 끼도 먹질 않았더니 배도 고팠다. 해 먹을 건 라면뿐인데, 끓여 먹을 기운도 없었다. 건율은 한숨만 푹푹 쉬며 핸드폰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3만 5천원. 병원 가지 말 걸 그랬나. 편의점에서 빵이라도 사 올까….

그렇게 고민하던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며 몸을 일으키자 온몸이 쑤셔 왔다. 월세 분명 냈는데, 안 낸 게 있던가?

“선배, 저 무정이에요!”

해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무정이었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문 사이로 답했다.

“재킷 가지러 왔어?”

“네? 아! 그거 안 받아 갔구나…. 아, 여튼 그거 아니구요, 문 열어 주세요!”

“뭔데….”

어차피 줘야 할 재킷이었으니, 건율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눈앞의 광경에 흠칫 놀랐다. 최무정은 지금까지 봐 온 모습 중…. 가장 멋있게 꾸미고 왔다. 데이트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기다려, 가져올게.”

“선배, 얼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어어.”

건율이 대충 대답하며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가지고 나왔다. 근데 최무정은 이미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띠리링, 현관문이 닫혔다.

“난방 고장 났어요? 너무 추운데….”

“어…. 이거 가지고 가.”

“아니, 저 이거 드리려구요.”

“뭔데….”

열이 펄펄 끓는 몸에는 최무정과 싸울 힘이 없었다. 건율은 최무정이 내미는 도시락통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프신 것 같아서, 죽 좀 쒀 왔어요. 저 요리 잘하거든요.”

“…왜….”

“전복죽은 싫어하실 거 같아서 불고기 죽이에요. 식기 전에 드세요.”

“아니, 이걸 왜.”

“일단 선배, 이불에 들어가 계세요.”

건율은 조금의 저항도 못 하고 떠밀리듯 이부자리 위에 앉혀졌다. 최무정은 입고 온 코트와 제 재킷을 책상에 걸쳐 두고, 이불로 건율을 돌돌 싸맸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무려 5단으로 된 도시락을 펼쳤다.

“여기 두 단까지 죽이고, 위에 여기는… 소시지랑 시금치랑 진미채구요. 여긴 계란말이랑 불고기, 볶음 김치고 맨 위에는 과일이에요.”

“어어….”

“자, 아…. 하세요.”

눈가가 아른아른하니, 정신이 몽롱했다. 뜨거운 열기, 무거운 사지와 고픈 배는 건율을 혼미하게 했다. 건율은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최무정의 행동에 순순히 입을 벌렸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최무정의 이목구비만 간신히 비췄다.

“아….”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건율은 침을 꼴딱 삼키며 입을 벌렸다. 반쯤 감긴 눈으로 세 수저 정도 퍼 주는 걸 먹다가, 건율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내, 내가 먹을게.”

“자, 아….”

아니야, 라고 말하는 순간 수저가 또 입에 쏙 들어왔다. 불고기를 잘게 다져 쑨 죽은 부드럽고 담백했다. 한참 주린 배는 입으로 들어오는 죽에 환장이라도 한듯 요동쳤다. 건율은 또 세 수저 얻어먹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왜요? 맛없어요?”

“으으움, ……아니, 그게 아니라.”

“물 드릴까요?”

어디서 났는지 보온병까지 등장했다. 건율은 벙 찐 얼굴로 보온병 뚜껑에 졸졸 담기는 연갈색 빛깔의 액체를 보다가 최무정의 손으로 받아마셨다.

“옳지, 옳지…. 한 번 더?”

“어….”

“천천히 삼켜요, 네, 그렇게… 잘 마셨어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건율을 두고, 최무정은 계란말이도 콕 찍어 먹여 주었다. 건율은 미묘한 표정으로 받아먹었다. 이상한데, 분명 밀어내야 하는데 제정신이 아니다. 힘도 없고 말싸움할 기운도 없다. 건율의 머릿속에는 온갖 의문만이 떠돌았다.

얘 진짜 왜 이러지?

“자, 아….”

한 통 가득 찬 죽을 모두 먹었을 땐, 배가 불렀다. 건율이 입맛을 다시자 최무정은 또 보리차를 따라 입가에 대 주었다. 

“조금만 벽에 기대고 계세요. 드시고 바로 누우면 안 돼요.”

최무정은 건율의 몸을 벽에 기대게끔 했다. 건율은 순순히 앉아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최무정은 이제 도시락을 정리해 냉장고에 넣고, 보리차는 책상에 올려 두었다. 건율이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최무정은 설거지도 하고, 어지럽혀진 곳곳을 청소했다.

그리고 현관 옆에 놓인 검은 봉투를 열어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모두 버렸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최무정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얼마 뒤, 최무정은 청소를 끝내고 주머니에서 감기약을 꺼내 왔다. 건율은 녀석이 시키는 대로 적당히 따뜻한 보리차에 감기약을 삼켰다. 열 때문인지 꿈 같기도 했고, 간만에 부른 배가 신기해 현실 같기도 했다.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질 않아 그날 본 건 진짜 최무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선배, 이제 누워 계셔도 돼요.”

건율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이불을 펼쳐 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앉아 있는 동안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은 아까보다 따뜻했다. 배도 부르고, 따뜻하니 졸음이 몰려왔다. 검은 그림자가 건율의 상체에 겹쳐졌다.

커다란 손이 뜨거운 이마를 몇 번 쓸어 넘겼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그대로 잠에 빠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입술에 닿은 것 같기도 했다. 몽롱해진 정신은 건율을 꿈으로 끌어당겼다.

나 분명, 쟤한테 말도 걸지 말라고… 화 냈는데…….

건율은 과방 소파에 늘어져 노트를 휙휙 넘겼다.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혹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과방은 비어 있었다. 낡은 냄새가 나는 소파는 스프링이 망가져 아래로 푹 꺼졌다.

* * *

어제 쉬긴 했으나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뜬 건율은 최무정이 집에 들렀던 기억이 꿈이라 판단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정리된 집 안과 냉장고 안 도시락을 보고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말도 시키지 말라고 화도 내고, 또 밤길에 만나 도와준 녀석은 건율의 모진 말에도 한결같았다. 아무리 공격해도 흠도 나지 않는 다이아몬드 같았다. 건율은 남은 죽 한 통을 모조리 비우고, 반찬은 따로 담아 도시락을 비웠다.

건율은 온수도 제대로 나오질 않아서 찬물로 설거지를 하고, 5단 도시락과 보온병을 챙겼다. 가방을 챙겨 학교까지 오는 걸음을 평소보다 느릿했다. 건율은 도서관에 가려다, 과방으로 향했다. 오전 시간대엔 대체로 과 방이 비어 있는 편이니, 홀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건율은 문까지 잠그고 소파에 늘어졌다.

“하기 싫다…. 진짜, 공부하기 싫다….”

건율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보통 영화 속 저처럼 없는 집 애들은 개천에서 용 나듯 열심히 살던데, 건율은 참 공부하기가 싫었다. 하려고 들여다봐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고, 암기력도 처참했다.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그런 건율이 꽤나 이름 있는 음대에 합격한 건 오로지 실기 성적 덕분이었다. 아마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통과했을 것이다. 내신 점수는 부끄러울 만큼 엉망이었으니까.

담당 교수도 건율 같은 경우는 자주 없다면서 장학금을 계속 타고 싶다면 학점에 신경 쓸 것을 조언했었다. 좋게 말하면 피아노에 그만큼 노력도 들였고, 재능도 있다는 뜻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피아노 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말이 되겠다.

즉, 그가 1학년 1학기 이후에 받은 장학금들은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어? 야, 문 잠겼는데?”

“누구 있나 봐. 열쇠 거기 없었던 거 맞지?”

“어. 조교님이 누가 가져갔다고 하셨는데.”

“비켜 봐.”

건율은 낯선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미열이 남아 낯이 발그레했다. 건율은 누워 있느라 눌린 머리카락을 훌훌 털어 버리고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곧 철컥철컥, 하고 뭔가 작고 미미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여자애가 푸하하, 하고 웃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야, 나 잘 따지 않냐?”

“와, 씹……. 너 뭐 하고 살았어, 도대체.”

“이 누나가 집 좀 털…. 어?”

문이 열리는 순간, 분위기가 서늘하게 냉각되었다. 건율은 가방을 쥔 채로 그들을 올려다보았고 두 학생은 놀란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딱히 화를 낸 것도 아닌데 두 학우는 크게 질책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그, 서, 선배님…….”

건율은 더듬거리는 여학생과 남학생을 무시하고 가방 안으로 노트를 쑤셔 넣었다. 연습실에서 공부할까. 집은 추워서 싫은데.

“저어……. 제가 그, 따, 딴 게 아니고요…….”

“야아, 뭐 하는 거야!”

“왜!”

“아이, 씨. 그, ……아, 서건율 선배님, 저희 잠깐! 아주 자암깐, 들른 거니까 편히 계세요!”

건율은 안달이 난 두 후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학번은 다르지만 같은 학년인 후배들은 복학생의 눈치를 보느라 침을 꼴깍꼴깍 삼켜 댔다. 후배들이 지나치게 제 눈치를 살피는 이유에는 건율의 학번 학생들이 군기를 잡기로 말이 많았던 탓이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후배나 선배들을 조금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건율은 표정 없는 얼굴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탁, 탁, 철컥, 드르륵, 스윽.

한마디의 말 없이, 과방에 늘어놓은 물건을 가방에 정리했다. 침묵이 깔린 과방에 기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건율은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대로 과방 입구까지 걸어갔다. 두 후배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대로 나가려던 건율은 순간, 갑자기 왼편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것에 이마를 박았다.

“……윽!”

가방이 지나치게 무거웠던 탓일까. 상체가 뒤로 기울어지며 무게가 바닥으로 쏠렸다.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팔을 뻗자, 부딪쳤던 커다란 돌덩어리가 건율의 몸을 받침과 동시에 확 잡아끌었다.

“……허….”

“선배, 괜찮으세요? 뭘 그리 급하게 나오세요?”

그대로 허리 아래를 받쳐 제 품으로 끌어당긴 것은 최무정이었다.

“가방이 엄청 무겁-.”

“너… 또.”

“아, 하하……. 뭐, 같은 과인데요.”

많은 것이 생략된 말을 최무정은 잽싸게 알아들었다. 녀석은 수줍게 웃으며 건율의 허리에서 날개뼈까지 슥 쓸어 올렸다.

“……흐앗!”

“응?”

순간 이상한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최무정은 순진한 눈망울로 깜빡거렸다. 손을 치우다 스친 모양이었다.

“뭐… 하는 거야. 간, 간지럽잖아.”

건율은 확 달아오른 뺨을 숨기며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커다란 손이 날개뼈 부근을 스치는 동시에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니까 꼭, 고등학생 때 사내놈들이 이상한 잡지를 들이댔을 때처럼…….

“헉…….”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건율이 고개를 휙 돌렸다. 잠시 잊고 있던 두 학생이 최무정과 친근하게 얘기하는 건율이 의아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순간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건율은 제가 왜 민망해하는지도 모르고 뒤로 물러나며 마른 입술을 훑었다. 녀석에게 주려고 가져온 쇼핑백이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보다, 선배.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

“아직 열 좀 있으신 거 같은데, 제가 드린 약 드셨어요? 지금은 어디 가세요? 강의 시간 아직 좀 남았잖아요. 과방에서 공부하시던 거 아니에요?”

최무정이 활짝 웃으며 떠들어 댔다. 건율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

“어제, 그거.”

“아, 감사합니다.”

“…….”

고마운 건 건율인데, 인사는 최무정이 했다. 건율은 최무정이 받아 들자마자 몸을 휙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두 후배가 ‘조심히 가세요! 선배님!’ 하고 크게 인사했다. 거북했지만 굳이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귀찮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데 최무정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쫄래쫄래 따라와서는 재차 물었다. 약은 먹었냐, 어디 가냐, 과방에서 공부 중이었냐 등등. 꼭 주인 뒤만 따르는 리트리버 같았다.

“…야, 너야말로 과방 온 거 아니었어? 애들 기다릴 텐데 가 봐.”

“네? 아뇨, 딱히. 굳이 안 가도 돼요.”

“그럼 가던 길 가.”

“저 그럼 따라가도 돼요?”

“가던 길 가라니까.”

“선배한테 가던 길이라서요.”

띠링,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건율은 뒤로 물러나며 ‘올라가세요.’라 말했다. 안에 탄 사람들이 닫힘 버튼을 누르자, 곧 문이 닫혔다. 최무정 고집은 건율이 꺾을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크게 화를 냈음에도 좋다고 꼬리를 쳐 대질 않는가.

건율은 벽에 등을 대고 팔짱을 꼈다. 발그레한 얼굴로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최무정에게 눈을 맞추자, 녀석이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할 말 있으면 해.”

“어, 할 말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바보야?”

“선배는 이제 제 얼굴만 봐도 보이시나 봐요.”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최무정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퍽 예쁜 얼굴을 갖고 있었다. 꼭 몸 좋고 섬세하게 생긴 외국 모델 같았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그게…. 큼, 저 이번 실기 고사요.”

건율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하며 불안한 생각을 애써 짓눌렀다. 피아노과는 합주도 하지 않고, 실기 고사는 대부분 홀로 시험을 치렀다. 다른 이와 연주하는 건 교수님이 이곳저곳 불러 대거나, 반주법 강의 때나 하는 정도였다. 가끔 파트너와 앙상블을 하기도 하지만 공부하기 바쁜 건율에게 파트너는 없었다.

게다가 실기 고사의 경우는 특히 홀로 진행했는데, 이번 실기 고사는 색다른 방식을 도전하겠다던 교수가 앙상블도 가능하다는 말을 흘렸었다. 그리고 최무정은 아니나 다를까.

“저 이번에 포 핸즈나…… 투 피아노 하고 싶은데.”

“싫어.”

건율에게 앙상블을 제안했다.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같이하자는 거 아니야? 싫어.”

묻지도 말 걸 그랬다. 건율은 짜증 섞인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이번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올라탈 생각이었다.

“저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돼요?”

“내가 왜.”

“전 선배 세 번이나 도와드렸는데.”

“…….”

주유소에서 한 번, 저번 주 토요일 밤길에서 두 번, 마지막으로 일요일에 정성 들인 도시락으로 세 번.

모두 거절 끝에 억지로 받은 도움이었으나 도와준 건 사실이다. 건율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으나, 이기주의는 아니었다. 돕지도 말고 피해 주지도 말자. 하지만 받은 건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했다. 그게 지금 제 속을 썩이고 있는 최무정이라 해도.

“내가 도와달라고 한 거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축 내려간 눈썹과 접힌 속눈썹이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건율은 다시 한번 그날을 떠올렸으나, 이미 건율에게 지금의 최무정과 그날 밤 폭력배는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놈이 맞다, 그렇게 머리로 생각을 되뇌어도 몸은 따르질 못했다.

쟤 진짜, 이상한 애 맞는데….

띠링,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번엔 텅 비어 있었다. 건율은 안에 올라타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5층 버튼을 꾹 누르면서 녀석을 노려보았다.

“……생각해 볼게.”

“진짜요?”

“……어.”

시무룩했던 얼굴이 확 피어났다. 건율은 이번이 마지막, 이라고 되새겼다. 그러나 이미 몸은 최무정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도움을 받았다 한들 칼같이 내쳤어야 옳다. 그래야 더 최무정과 엮일 일이 없었을 텐데.

건율은 싱글벙글 엘리베이터로 들어오려는 녀석을 꾹 밀어내며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뭘 타. 너 친구들한테 가.”

“너무, 너무 좋아서요!”

“아직 된다고 안 했어.”

“우선 선배, 이거 드세요. 이따 봬요!”

가운데에 끼어 있던 최무정이 쏙 빠져나가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건율은 얼떨떨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손이 쥐여 준 것은 둥글었다.

맥반석 계란에서 최무정과 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어이없어.”

시험이 코앞인데, 교수들은 ‘조금만 줄게’ 하며 과제를 잔뜩 쌓아 주었다. 그 조금만이 쌓이고 쌓이면 산이 되는 걸 그들은 알고 있을까.

건율은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켜 가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강의는 바로 합창이었다. 도대체 피아노과에서 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3년째 다니는 학교인데도 이해를 못 하겠다.

“선배, 파트너 정하셨어요?”

짐을 가방에 쑤셔 넣는데, 옆에 앉아 있던 최무정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정했겠냐? 강의가 방금 끝났는데?

“아니.”

“그럼 저희랑 하실래요? 저희 다섯이어서, 홀수거든요. 딱 선배만 들어오시면 될 거 같은데.”

뒷자리 친구들과 상의 되지 않은 일인 듯, 녀석들은 ‘어어?’ 하며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러다 건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설프게 웃었다.

“아니. 그냥 남는 사람이랑 하려고.”

“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최무정이 턱을 괴더니 퍽 사랑스럽게 웃었다.

“다들 짝지은 거 같은데, 저랑 해요.”

“…….”

이미 짝을 지은 학생들이 과대에게 구성 인원을 보고하고 있었다. 건율은 고집스럽게 서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사냥감을 찾는 미어캣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서. 그러나 최무정의 말처럼 혼자 있는 학생은 없다.

결국, 건율은 가방을 등에 메고 구석 자리에 앉은 과대에게 걸어갔다. 종이에 낙서를 하던 과대가 퉁명스런 건율의 얼굴에 조금 긴장했다.

“서건율…인데.”

“아, 네. 이번에 복학하신 선배님이시죠?”

“나 이거, 과제. 같이할 사람 없거든. 사람 안 남으면 혼자 할게. 교수님께 전해 드려 줘.”

“아…. 네에. 근데 저희 짝수라서 남을 거예요.”

“그럼 남는 사람 말해 줘.”

“넵, 알겠습니다.”

이번에 복학한 것은 건율보다 어린 녀석들이다. 그중 최무정도 포함돼 있었다. 건율처럼 늦게 군대를 다녀오는 경우는 적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과대는 건율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봐야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것 외엔 다를 것 없는 학생인데. 건율은 조금 입술을 삐쭉 내밀고 강의실을 후딱 빠져나왔다. 최무정이 저를 부르는 듯도 했지만 안 들리는 척, 들었어도 대놓고 무시하는 티를 내며 연습실 건물로 도망갔다.

그리고 예약해 둔 연습실에 들어갔을 때, 과 단톡방에서 과대가 건율을 불렀다.

[과대 : @서건율 선배님! 합창 강의 최무정 학생과 진행하시면 됩니다! 번호는 제가 갠톡으로 연락처 보내드릴게요!

       아, 그리고 서양 음악사랑 화성학 자료 올려드립니다~ 다들 확인하세요~ 

       첨부 파일1

       첨부 파일2]

피아노를 두드리던 손이 뚝, 멈췄다. 건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진짜. 최무정 이 새끼가 스토커인 거 아니야? 얘 실기 고사 해 주지 말아 버려?

건율은 분명 제 친구랑 해도 되는 녀석이 굳이, 정말 굳이! 남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피로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아예 모르는 사람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연습실 구석에 가방을 던졌다.

그래, 어차피 졸업까지 1년하고 반이다. 이번 것까지만 같이하고… 그 후로는 다시 부딪치지 않으면 된다. 이를 악문 건율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저절로 연주가 거칠어졌다.

* * *

“그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시 쳐 봐.”

“네에…….”

건율은 학생의 뒤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꾸만 박자를 틀려 연주가 꼬였다. 1시간 동안 다섯 페이지를 겨우 나갔다.

“연습은 하고 있니?”

“……조, 조금.”

“바빠서 안 하는 거야? 아니면, 하기 싫은 거야.”

집 안 내부, 연주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건율은 연습실을 빠르게 예약하지 않으면 손도 댈 수 없는 것을 10살 즈음의 아이가 소유하고 있었다.

“……재미없어서요.”

“그럼 다른 곡 칠까?”

“아, 아뇨. 엄마가 이 곡 연습 중인 거 알아요. 그래서 이거 다 해야 돼요.”

푹 한숨을 내쉬자 아이가 눈치를 봤다. 건율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메트로놈 어플을 틀었다.

“그럼 일단 이 부분 넘어가고, 가능한 부분만 쳐 보자. 안 되는 곳은 체크 해 줄 테니까 따로 연습해 보고. 할 수 있지?”

“네에.”

“그래도 하기 싫으면 선생님이 어머니께 말씀드릴게. 지혁이한테 어울리는 곡으로 바꿔서 연습 중이라고, 선생님이 그렇게 정했다고 할게.”

“……네.”

레슨은 총 두 시간. 10살배기 어린아이에게 두 시간이란 시간은 가혹했다. 30분 즈음이 지나면 아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집중력 바닥을 드러냈다. 건율은 그때마다 곡과 얽힌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자신이 피아노 치던 시절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포장해 얘기했다.

레슨이 끝나고 나온 건율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일주일에 단 한 번인 데다 레슨비가 꽤 두둑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40분 거리를 올 일은 없었을 터다.

늦은 저녁 술 냄새로 지독한 지하철, 그리고 만원 버스를 갈아탄 건율이 겨우 동네 정류장에 도착했다. 건율은 과제와 팀플, 그리고 실기 고사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오는 내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피로로 꾸벅꾸벅 졸며 빌라의 정문을 열었는데, 오늘도 검은 봉투가 걸려 있었다.

“……맥반석 계란, 닭가슴살 핫바? 그리고… 샐러드네.”

오늘도 작은 쪽지가 들어 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 다녀온 날부터 스토커에게서 문자가 오질 않았다. 또다시 전화를 걸어올까 걱정했던 것이 우스울 만큼,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건율은 봉투를 챙겨 집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봉투는 싱크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악재가 겹쳐 꼼짝 못 하고 물로 배를 채울 신세였다. 그런 때에 녀석의 이런 내조는 나쁘지 않았다. 불쾌하고 역겨운 건 여전하지만, 배고픈 사람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자존심이 상하거나, 놈의 동정심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길 가다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운 것처럼 아주 작은 반가움이 일었다.

건율은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현관문을 닫고, 걸쇠를 내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철컥.

묵직한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건율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문고리가 서서히 돌아가고, 문이 벌컥 열렸다. 굳어 있는 사이 순식간에 뒤에서 무언가가 건율을 덮쳐 거칠게 짓눌렀다.

“아……!”

부드러운 천이 눈앞을 덮자마자 순식간에 질끈 묶였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릴 만큼의 압박이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어깨와 골반, 이마가 찡하니 울려 왔다. 컴컴한 시야에 놀라 손끝을 안으로 말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 흐읍, 아…….”

몸을 일으킬 사이도 없이 문이 닫혔다. 바람과 함께 거세게 닫히는 소리, 그리고 단번에 어둑해진 방 안에 드리워진 새까만 그림자와 숨소리. 누군가가 건율의 등 위에 앉아 헐떡였다. 남자였다. 그는 흥분한 듯 숨을 몰아쉬며 건율의 두 팔을 뒤로 꺾어 단단하고 거친 끈으로 여러 번 감아 묶었다.

“아으, 누구, 누구세요……!”

“…….”

“하, 하지 마세요. 도, 돈이라면……. 있는 거, 있는 거 다 드릴, 윽……!”

두피가 욱신거릴 만큼 머리채가 억세게 붙잡혔다. 고개가 뒤로 꺾이며 늑골과 척추가 우득, 하고 비명을 질렀다. 건율은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입술에 피가 나도록 물어뜯으며 비명을 삼켰다. 가는 손가락을 말아 쥐는 것이 최선이었다.

칼, 부엌칼이 어디에 있더라? 아니, 너무 멀어. 그거 말고 뭔가…. 뭔가.

기회를 노려 놈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손이 묶인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건율은 어깨를 움츠리고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물어야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꼴사납게 벌벌 떨렸다.

“왜, 왜 그러세요. 원하시는 게, ……흡!”

그러나 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건율의 넉넉한 바지춤을 잡아 내렸다. 큼지막한 손이 둔부와 치골을 쓸어내리며 브리프를 더듬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탓일까, 찬 공기가 닿은 살갗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남자가 두꺼운 손을 속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 흐윽-!”

갑작스레 덮쳐 온 해일을 맞은 것처럼, 건율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남자의 손이 크고 거칠며, 등 뒤에서 불규칙적으로 호흡을 하는 이의 압박하는 무게가 상당하다는 것밖에 몰랐다. 몸이 눈에 띄게 경련했다. 두려움과 공포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건율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참았다.

브리프 안으로 들어온 손은 마른 몸에 비해 살집이 있는 둔부 한쪽을 움켜쥐고 거세게 주물럭거렸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를 만큼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다 손가락이 은근하게 어느 한 곳을 쿡쿡 건드려 왔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나 감으나 보이지 않는 것은 같았다.

도망칠 수도, 밀어낼 수도 없다. 이 상황의 지휘권은 누군지도 모를 사내에게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건율의 브리프를 끌어 내렸다. 찬 기운이 살갗에 닿자 건율의 몸이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남자는 마치 침착하라는 듯, 다정한 손짓으로 건율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튀어나온 견갑골과 갈비뼈, 치골까지 꾹꾹 누르며 흘러 내려오는 손길이 끈적했다. 눈가가 물기에 젖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이상한 신음이 훅, 하고 튀어 나갔다.

“흐읏, 응…. 하으, 싫, 읍…….”

건율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어 가며 신음을 참았다. 사내는 건율의 소리에 흥분한 듯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목뼈를 혀로 핥고, 입을 벌려 그 주변을 짓씹었다. 그는 안쪽으로 잔뜩 굽은 건율의 어깨를 매만지고 반대손으로는 동그란 둔부 사이의 골을 꾹꾹 눌렀다.

철컥, 지이익.

바지 버클이 내려가는 선명한 소리가 고요한 공기 위로 덮였다. 건율은 욕지거리를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매끈한 살갗 위에 둔탁한 것이 놓였다. 미끌미끌하고 둥근 끝이 골 사이를 파고들 것처럼 요추 부근부터 동그란 엉덩이 사이의 골 안쪽까지 천천히 선을 그렸다.

싫어….

발끝이 잔뜩 오므라들었다. 끈덕진 시선이 피부 표면 하나하나를 핥듯이 움직이고, 음험한 손짓이 골 사이를 벌렸다. 남자의 귀두 끝에서 축축한 쿠퍼액이 아래를 질척하게 적셨다.

“당신, 그…… 그 사람이죠.”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랬듯 욕을 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잔뜩 움츠러든 몸은 굳어 있고, 심장은 쿵쿵 가슴을 내리치며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굴었다. 그리고,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기이한 쾌감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투박한 손바닥은 그걸 알고 있다는 듯 건율의 뼈 마디마디를 매만지며 무게를 더욱 실어 왔다.

남자의 손끝엔 굳은살이 가득했다. 손끝으로 일을 하는 사람처럼, 굴곡 있는 손가락은 건율의 말에도 거침없이 몸을 더듬어 갔다.

“……흐… 당, 신, 그 사람, 맞냐고…….”

쿠퍼액으로 젖은 구멍에 귀두가 맞닿았다. 묵직한 감각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힘껏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남자들끼리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끔찍할 만큼 고통스럽다고 했다. 건율은 곧 들이닥칠 아픔에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러나 남자는 감각을 즐기듯 미끌거리는 귀두부터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온 기둥을 건율의 엉덩이에 비벼 대기만 했다. 그저 건율의 매끄러운 피부를 탐하듯, 상의도 벗겨 내팽개치고 동글동글한 어깨부터 유독 마른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하얀 피부에 진득한 울혈이 남을 때까지 견갑골 부근을 혀로 핥아 올리고, 살갗을 잘근잘근 씹었다. 점점 시야가 흐려져 갔다. 남자는 익숙하게 손을 앞으로 해 건율의 물건을 건드렸다.

귀두 끝, 조그마한 요도 구멍을 짓이기고 꾹꾹 눌러 올 때마다 머리가 징징 울렸다. 남자의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랫배에 심장이라도 들어찬 것처럼 그 부위가 쿵쿵 울려 왔다. 남자는 반쯤 선 건율의 기둥을 한 손에 쥐고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흐으, 하, 하으……. 흑, 앗, 으흑…. 싫, 싫어…….”

귀두부터 뿌리까지 빠르게 쓸어내리던 손은 곧이어 경련하는 허벅지를 벌려 구멍을 건드렸다. 남자의 쿠퍼액으로 축축해진 뒤는 쉽게 입구를 벌렸다. 그러나 입구만 벌어질 뿐, 선홍빛의 내벽은 잔뜩 조여들어 있었다.

“아, 하지, ……하지, 마, 마세요…….”

검은 천이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건율은 결국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제집 바닥에 뺨을 비볐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 그리고 난생처음 느껴 보는 쾌락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남자는 삽입하진 않았으나 건율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와 휘저어 놓았다.

그는 건율의 애절한 조름에도 신경 쓰지 않고, 벌어진 허벅지의 살집을 잡아 양옆으로 더욱 젖히고 잔뜩 힘을 줘 조그마해진 입구를 건드렸다.

“흐, 아윽…!”

건율이 짧은 비명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굵직한 손가락이 뻑뻑한 아래를 억지로 쑤시고 들어왔다. 쿠퍼액으로 젖었다 한들 단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던 아래는 거부감에 움찔거렸다.

손가락 한 마디를 겨우 삼킨 내벽이 경련을 하며 움찔거렸다. 한계까지 다리가 벌어지는 바람에 골반이 찢어질 듯 욱신거렸다. 남자는 잘 벌어지지 않는 뒤가 불만이었는지 다시금 제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며 끈적한 액체로 구멍 위를 적셨다.

“아, 아읍, 흐……. 싫, 그, 마안……. 읏!”

그와 동시에 굵은 손가락이 더욱 깊게 내벽을 파고들었다. 잔뜩 좁혀져 있던 구멍은 남자에 의해 개척되듯 벌어지고, 붉은 속살은 침입자를 꾸물꾸물 삼키며 짓씹었다. 반쯤 섰던 건율의 성기가 고통에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한 마디쯤 손가락이 들어가고 난 뒤부터는 더욱 거침없이 안쪽을 쑤셔 댔다. 질척한 쿠퍼액과 내부에서 흘러나온 미색의 액체가 섞여 쿨쩍쿨쩍,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건율의 뒤에 자리를 잡은 남자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며 헐떡였다. 사내의 고환이 살갗에 부딪쳐 왔다.

“흐윽, 아, 파…. 아, 아윽!”

그 순간, 굴곡진 손가락이 어느 한곳을 강하게 짓쳐 올렸다. 일순 허벅지가 경련하며 건율의 뺨이 벌겋게 물들었다. 입술을 물어뜯은 보람도 없이 턱이 힘없이 벌어지며 신음이 튀어 나갔다.

“흐윽! 흐, 아응, 아……!”

잠시 정적이 머물렀다. 건율은 제 것이 다시금 발기해 바닥에 비벼지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이며 쾌락을 좇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눈치챈 듯 제 것을 빠르게 흔들어 대며 방금 전 그 부위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쑤셔 댔다. 손가락 하나를 끝까지 삼킨 조그마한 엉덩이 사이에 나머지 네 손가락을 움직여 둔부의 살집을 밀어냈다. 그러자 발그스름한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자,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중간중간 제 귀두를 건율의 구멍에 가져다 대고 씨물을 싸지를 것처럼 굴었다. 건율은 정신없이 찔러 대는 손가락에 신음을 참지 못하고 아래를 조였다. 매끈한 속살이 눅눅하게 젖어 들고, 그가 반복적으로 한곳을 찔러 올 때마다 찔퍽찔퍽, 음탕한 소리가 났다.

“흐, 아읏, ……아! 읍, 응……!”

“허억, 흡……. 흐……. 아…….”

변조 없는 신음 소리는 첼로처럼 낮고 부드러웠다.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 기억해야 했다. 분명, 학교와 관련이 있는 자니까……. 기억을 하고-.

“흐응! 읏, 아, 시, 싫……. 하지, 마아……. 아!”

그러나 남자의 손가락이 자비 없이 내벽을 긁어내릴 때마다 건율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는 한 부위만을 집요하게 괴롭히며 건율이 원치 않았음에도 그의 것을 발기시켰다. 쿠퍼액으로 바닥이 질척해졌다.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동시에 구멍을 조일 때마다 남자가 더욱 세게 손가락을 쑤셔 댔다.

이제는 안쪽에서 질척한 즙이 흘러나왔다. 뒤로 묶인 팔은 아무리 비틀고, 주먹을 쥐어도 꼼짝을 하질 않았다. 남자는 건율의 마르고 탄탄한 몸을 눈으로 훑어 내리며 손가락을 단번에 뽑아냈다.

“흐악……! 흐윽, 흐……!”

그러곤 수려하게 곡선으로 떨어지는 허리 위로 몸을 겹쳐 왔다. 단단하고 올록볼록한 뱃가죽이 느껴졌다. 그는 건율보다 훨씬 크고, 두툼했다. 묵직한 팔이 어깨를 끌어안고, 젖은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남자는 건율의 허벅지 안쪽으로 거친 기둥을 밀어 넣었다. 동시에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좁은 구멍이 축축하게 젖어, 마치 재촉하듯 벌름거렸다. 남자는 건율의 둔부를 한 손으로 거칠게 쥐었다가 놓으며 목덜미 부근의 연약한 살결을 짓씹었다. 동시에 말랑한 허벅지 사이에 추삽질을 해 댔다.

끌어당겨진 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속이 답답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가득 찬 열기로 인해 시야가 흐릿해졌다. 매끄러운 허벅지 사이로 드나드는 굵고 단단한 성기,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도 남는 커다란 덩치와 낮은 신음 소리. 제정신이 아닌 건율에게 그 모든 것은 섬세하게 각인되지 못했다.

“흐, 흐으…….”

그는 헛숨을 들이켜며 본격적으로 건율의 치골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거세게 쑤셔 넣고, 귀두가 허벅지에 살짝 걸칠 만큼 빼내고 또다시 박아 대기를 반복했다. 바닥에 늘어진 얇은 몸뚱어리를 내려다보다, 마른 허리와 늑골 부근을 거칠게 들어 올려 짐승처럼 흘레붙었다. 살갗이 벗겨질 만큼 울룩불룩 튀어나온 핏줄이 말랑한 허벅지를 세차게 긁었다.

그러자 남자의 굵직한 성기가 건율의 물건을 건드렸다. 급기야 사내는 깊게 박아 넣고 두 개의 것을 한 번에 쥐어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으, 흐읏, 으……. 아, 아! 마, 만지지, 마, 하지……. 흐윽!”

눈앞이 번쩍거렸다. 늘어져 있던 건율이 놀라 어깨를 마구 비틀었다. 허벅지 사이로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쓰라렸다. 상체를 뒤로 휘다 남자의 배에 등이 달라붙었다. 땀으로 끈적해진 두 몸이 달라붙는 순간 사내가 작은 침음을 흘렸다.

툭, 투둑.

묵직한 액체가 바닥에 고였다. 그게 정액이라는 것 정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행위는 끝이 났다. 남자는 울컥울컥 쏟아지는 정액을 건율의 다리 사이에 싸지르고 느린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두르고 있던 팔을 빼냈다. 억지로 들어 올려 졌던 상체가 힘없이 무너졌다.

여전히 두 팔은 뒤로 꺾여 있고, 성기는 반쯤 발기해 맑은 액체를 질질 흘렸다. 건율은 어릴 적 한 번의 몽정을 제외하면 쾌락의 경험이 전무했다. 이토록 강렬한 쾌락은 건율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남자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등 뒤를 덮쳤던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였다. 묶여 있던 팔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러나 건율은 남자를 잡아채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저항 없이 몸을 늘어트렸다. 문자나 쪽지를 통해 만난 상대를 직접 본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가 준 쾌락을 받아들인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한데 뭉쳐 역겹고 괴이한 감정을 만들어 냈다.

철컥, 문이 닫힌다. 건율은 버려진 인형처럼 서늘한 바닥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숨을 몰아쉴 시간도 없던 그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휴식 시간이 찾아온 셈이었다.

그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핸드폰이 징, 울렸다.

[최무정: 선배!

        저희 합창 강의 같이하게 된 거 아시죠!

        무슨 곡 하고 싶으세요? 전 다 좋아요

        아 근데 생각실기 고사요오

해 보시기로 한 건요?

                포 핸즈도 좋고 투 피아노도 좋아요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한 번에 여러 개의 톡이 쌓였다. 오후 23시 11분. 안 읽은 메시지 5개.

건율은 텅 빈 눈으로 몸을 추슬러 앉았다. 제 다리 사이에 진득하게 남은 정액이 주룩 흘러내렸다. 사내가 좁은 구멍을 들쑤시던 감각이 선연했다.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편지에서 문자, 전화… 그리고 이젠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건율에게는 신고할 시간도, 그를 상대해 줄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에게 큰 두려움과 무기력함을 안겨 주었다.

지금껏 모은 자료들을 가지고 신고하면, 될까? 잡힐까? 아니, 애초에 사내가 사내를 스토킹하고 추행하는 것이 받아들여질까? …제 입으로 그걸 말할 수 있을까.

같잖은 자존심이었다. 건율은 무릎까지 흘러내린 바지를 벗고, 휘청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한 평도 되지 않을 듯한 좁고 허름한 화장실은 욕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반쯤 벗겨진 상의도 벗어 던지고, 구석으로 가 샤워기를 들어 올렸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서서 찬물로 바닥을 닦았다. 움직일 때마다 잔뜩 쓸린 허벅지 사이가 따끔거렸다. 건율은 입술을 꾹 닫고 킁, 하고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 두꺼운 손이 이곳저곳을 매만졌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괜찮아. 조금만 더 일찍 집에 오자. 공부는 집에서 하고, 연습만 하고 오자. 혹시 모르니 연락이 오는 것 모두 캡쳐 하고, 녀석이 준 것들을 다 모아 놓자. 증거를 가져가도 경찰들이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쏴아아, 여전히 찬물이 바닥을 적셨다. 건율은 변기 옆 휴지까지 물이 튀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서서 울음을 꾹 참아 냈다.

* * *

건율은 커다란 강당 중앙에 앉아 펜을 꽉 쥐었다.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가 연주하고, 학생들이 감평 하는 연주법 시간은 늘 그랬듯 좋아하지 않는 시간이다.

건율은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제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이곳저곳 쑤셔 오는 몸 때문에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내려다보던 최무정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건율은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다가, 뺨이 뚫어질 듯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겨우 정신이 들었다.

“너… 그만 쳐다봐.”

“네? 저요?”

“너 아니면 누가 있어.”

슬쩍 노려봐 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건율은 한숨을 내쉬며 무대 위 여학생의 연주에 집중하려 했다가, 더 가까이 다가온 시선에 이를 악물고 경고했다.

“그만 좀….”

“선배가 답장을 안 해 주셨잖아요… 네?”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언제까지 생각해요…. 실기 고사 곧인데.”

시기상 연습을 시작해야 할 시간은 이미 놓쳤다. 건율은 펜을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제의 일로 인해 모든 것이 싫증 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최무정도, 공부도, 피아노도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오늘 저녁. 연락할게. 됐어?”

“허, 네에! 좋아요!”

최무정이 활짝 웃으며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녀석이 아차, 했을 땐 이미 앞자리의 교수님이 무서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 뒤였다. 건율은 무심한 얼굴로 연주에 집중하는 척 시선을 돌렸고, 결국 교수님이 최무정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끝나고 남게 생겼네, 꼴 좋다.

모든 강의가 끝나고, 건율은 곧장 연습실로 향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단 1분의 휴식도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었다. 건율은 예약해 둔 연습실에서 미친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고 연습했다. 거의 10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새벽 3시. 집에 가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아니, 집에 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예 밤을 새고 해가 뜬 후 집으로 가는 게 나았다. 어차피 내일은 공강이었으니 아침부터 잠을 자도 시간은 남았다.

건율은 전공 서적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 핸드폰 화면에 쌓인 톡을 보고 아차 싶었다. 연락하기로 했던 저녁 시간이 지난 탓이었다. 이제는 차단도 하지 않아 잔뜩 쌓인 문자창은 무시하고, 최무정에게 톡을 보냈다.

[할게. 대신 곡은 내가 고를 거야.]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지금, 건율은 일을 늘리기로 했다. 홀로 실기 고사를 준비하는 것보다 파트너가 생기면 신경 쓸 부분이 더 많았으니까. 그리고 녀석에게서 1초도 되지 않아 곧바로 답장이 왔다.

[최무정: 네!! 너무 좋아요!!]

친구도 많은 녀석이 굳이 왜, 자신과 하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제가 복학 전 과탑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건율은 한숨을 쉬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투 피아노로 옆에서 곁들여 주는 식으로 보조만 해 줄 생각이었다. 시간도 적고, 제 곡을 연습할 시간도 따로 있어야 하니 익숙한 곡을 골라야 했다.

건율은 잠시 고민하다 적당한 곡을 고르고, 전공 서적을 펼쳐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험 기간에는 새벽까지 학교 내 독서실 문이 열려 있지만, 그곳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을 가면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제 일 이후로 생긴 습관이니 그 일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러다 대인기피증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건율은 나쁜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리고 책에 고개를 처박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어제의 일이 자꾸만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고, 몸을 더듬던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만 보고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생각을 떨쳐 내기는 쉽지 않았다.

1년 계약을 했지만 월세방이니 건율은 새로 이사 갈 집도 구해야 했다. 그놈이 거기까지 쫓아올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피하고자 노력한 ‘증거’가 필요했다.

건율은 복잡한 머리 탓에 공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기를 몇 번 반복하다,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짐을 쌌다. 연습실을 나서니 낯선 얼굴이 타이밍 좋게 등장했다.

“어, 선배. 밤 새우셨어요?”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몇 주간,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최무정은 이제 건율에게 그저 귀찮은 후배가 되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열쇠를 맡기고 뒤를 돌자 후딱 달려온 녀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연습실을 예약하고, 키를 받았다.

“어제부터 이 시간까지 연습하신 거예요?”

“…애들 다 그래. 시험 기간인데.”

“그래도요! 선배 안 그래도 잘 치시는데, 멋있어요.”

빈말인 걸 알면서도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건율은 머쓱한 얼굴로 ‘그래’ 하며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러나 최무정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저희 곡은 뭐로 할까요? 실기 고사요. 아, 그리고 합창 강의도 정해야 하는데.”

“실기 고사는 생상스 거. 투 피아노 편곡 괜찮아.”

“포 핸즈는 안 하시구요?”

“너…… 좁을 거 같아.”

피아노 의자가 아무리 길다지만 최무정과 앉으면 분명 제 자리가 부족할 것이다. 건율은 커다란 돌덩이 같은 놈을 힐끔거리며 연습실 앞 커다란 로비 중앙 테이블로 가 앉았다.

“좁을 거 같다뇨. 피아노 의자가 얼마나 긴데.”

“네 덩치 생각은 안 해?”

“선배가 제 무릎에 앉아서 하면-!”

“미쳤지, 너.”

건율의 서늘한 눈빛에 최무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건율은 핸드폰을 꺼내 ‘죽음의 무도’를 검색했다. 이전에 유명 피겨 선수가 등장 곡으로 사용해 대중적으로도 익숙한 음악이었다.

곡을 들려주고자 하는데, 최무정이 등 뒤에서 꼭 안아 오며 화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나친 접촉에 건율이 움찔거리자 최무정이 작게 웃었다.

“뭘 놀라고 그러세요.”

“나 달라붙는 거 싫다.”

“이 정도면 뭐어.”

“떨어져.”

곧바로 최무정의 입술이 댓 발 나왔다. 건율은 작게 실소를 흘리며 어제 본 사이트를 찾았다. 잠시 떨어져 있던 최무정이 옆자리에 앉더니 슬쩍 말을 걸었다.

“선배, 친해지면 좀 거칠어지는 편이에요?”

“…뭔 말이야.”

“아니이, 저희 친해진 거 같아서요. 방금 선배 웃었잖아요.”

최무정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발그레한 양 뺨을 손으로 부비며 웃었다. 건율은 잠시 최무정을 올려다보다가 말았다. 내가 웃었었나.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데.

……그 아이와 지낼 때는 매일 이렇게 지냈었는데. 스킨십에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고 잘 지냈었다. 건율은 자꾸만 그 아이와 겹쳐 보이는 최무정 때문에 속이 쓰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미련이 남았던 걸까.

건율은 옆에서 조잘대는 최무정의 말을 시원스레 무시하고 한 블로그에 올라온 한 장짜리 악보를 보여 주었다.

“이거 악보 찾아봐.”

“……선배 너무 차가워……. 알겠어요.”

“맞추는 건 3일 전부터 할 거니까 알아서 익혀 와.”

“3일 전이요?”

“난 완곡했어. 네 호흡에 맞춰 줄 테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

고작 3일. 두 명의 연주자가 맞추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건율은 나름 넉넉하게 잡은 시간이었지만, 대체로 포 핸즈나 투 피아노처럼 호흡을 맞추는 곡은 3일로는 상당히 부족했다. 그래서인지 최무정이 시무룩한 얼굴로 건율의 팔뚝에 매달려 왔다.

“그래두…… 같이 맞춰요.”

“너 나랑 하고 싶다며.”

“……같이 연습하고 싶은데.”

“나랑 하고 싶으면 그건 감수해. 그리고 난 너랑 안 해도 상관없거든? 또! 이거 말고, 합창 과제도 해야 하잖아.”

마지막 말에 최무정의 얼굴이 다시금 환해졌다. 과제가 하나 더 있다는 게 뭐가 그리 기쁜지.

“네, 그쵸, 그쵸!”

“나 간다.”

“아, 잠만요. 선배, 드릴 거 있어요.”

일으키던 몸을 멈추자 녀석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깨끗한 사각 통에 들어 있는 건 샌드위치였다. 누가 봐도 직접 만든 거였다.

“드세요.”

“…그래, …고맙다.”

건율은 잠시 거절의 말을 떠올렸다가 받았다. 거절하면 또 받아 달라고 무어라 몇 마디를 더 할 것이고, 밤을 새운 데다 머리가 복잡한 건율은 받네, 안 받네 하며 싸우기 귀찮았다. 군말하지 않자 최무정이 통 위에 딸기 우유도 올려 주었다.

“목 막히니까 이것두요!”

“네 거 아냐?”

“제 건 따로 있어요!”

건율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챙겼다. 내려다보자 딸기 우유 아래에 정갈한 삼각 모양의 샌드위치가 두 개 들어가 있었다. 곽에 딱 맞는 크기로 자른 샌드위치는 나름 정성이 가득 들어가 보였다.

“그리고 선배, 아침 안 드시잖아요. 점심도 자주 거르시구요. 건강도 안 좋으신데 챙겨 드셔야죠. 아, 우유는 아직 차가우니까 미지근해지면 드세요, 알았죠?”

“…어어…. 응.”

내 아침을 왜 네가 챙겨? 도대체 왜 챙겨 주는 건데? 내가 안 먹는 거랑 너랑 뭔 상관…인데?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막상 뱉지는 못했다. 건율은 연습 들어가겠다며 손을 흔드는 녀석을 쳐다보다 걸음을 돌렸다.

* * *

둘은 각자의 파트를 완벽하게 불렀다. 따로 연습해 온 것이 티가 났다. 건율은 악보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러자 최무정이 빙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뭐…. 연습 잘해 왔다 싶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평온한 낯에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건율은 바닥을 노려보며 눈을 재차 깜빡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낯으로 사람이 망가질 때까지 두들겨 팼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선배?”

“어?”

“멍 때리시길래요. 한 번 더 불러 볼까요?”

“으응.”

최무정은 성악도 제법 잘했다. 건율은 적당히 음과 박자만 맞추어 불렀는데, 최무정은 꼭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 같았다. 선택한 곡이 잔잔하고, 적당히 힘을 빼고 부르는 곡이라 다행이었다. 건율은 총 8장에 달하는 노래를 끝내고 다시 악보를 내려놓았다.

팀플이라고 몇 번 더 만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단 두 번임에도 둘은 계속 연습해 온 사람들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 호흡 타이밍부터 강약 조절까지 맞춘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과제였는데, 생각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듯했다.

최무정과 팀이 됐다고 짜증을 냈던 것이 머쓱할 만큼 녀석은 괜찮은 팀원이었다. 성악 과제와 실기 고사 연습을 위해 투 피아노 연습실을 미리 빌려 둔 것만 봐도 그랬다. 이 부근에 투 피아노 연습실은 많지 않았고, 값도 꽤 나갔다.

건율은 악보를 접어 가방에 밀어 넣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곡은 쳐 봤어?”

“네. 해 봤어요.”

“완곡?”

“네.”

건율이 선택하고 보내 준 곡은 C.Saint-Saents의 Polonaise op.77이었다. 곡을 정하고 보내 준 것이 이틀 전이니, 완곡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아니, 짧은 정도가 아니었다. 완곡하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쉬운 곡이면 짧게 1주에서 길면 몇 개월까지 가기도 하니까. 곡의 길이는 약 10분 가량이었다. 그 길이를 이틀 안에 완곡을 했다는 게 가능한가.

“알던 곡이야?”

“네.”

“아…. 전에 쳐 봤어?”

“음……. 많이 들었어요.”

이 곡은 건율이 고등학생 때, 전국콩쿠르에 나가서 쳤던 것 중 하나였다. 그때 완곡한다고 꽤 시간을 들였던 지라 조금 자존심이 상한 건율은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틀만에 완곡했다고?”

“완벽하진 않아요.”

“아무튼 완곡했다는 거잖아.”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건율은 구겨진 자존심을 애써 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많이 들었길래 이틀만에 완곡을 했다는 건지 들어 봐야겠다.

“그럼 우선 들어 볼게.”

“네.”

최무정은 순순히 악보를 꺼내 들었다. 10분이 넘는 곡을 연주하기 직전인데도 녀석은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꼭 눈 감고도 칠 수 있을 것처럼. 건율은 최무정의 뒤로 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허리, 군살 하나 없는 몸을 감싸는 연하늘색 셔츠 너머로 우락부락한 근육들이 눈에 훤히 보였다.

피아노에 앉는 모습이 상상되질 않았는데, 막상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악보를 정돈하는 걸 보니 제법 태가 났다. 그러다 건율은 스스로 한 생각에 놀라 한숨을 짧고 강하게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 사람 팬 놈이잖아, 정 주지 말자. 진짜 이번까지만 도와주고, 다 끝내자.

스스로에게 강한 첨언을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최무정이 몸을 돌려 저를 보고 있었다.

“칠까요?”

“어, 어…. 쳐 봐.”

“네에, 선배님.”

애교 섞인 목소리에 건율은 또 난감한 한숨을 뱉었다. 최무정과 가까워진 이후로 한숨이 늘어난 것 같았다.

곧이어 최무정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녀석의 연주는 반주법 수업에서 몇 번 들었다. 무난하고, 나쁘지 않았다. 개성이 없어 아쉬움은 남아도 지적할 부분은 없는 완벽한 연주. 깔끔하다는 것이 그의 연주에 대한 인상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건율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최무정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긴장감 있게, 조금은 빠른 템포로 시작된 곡은 녀석의 스타일대로 깔끔했다. 음율은 비극에서 웅장함으로 점차 힘을 얻어 갔다. 완곡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박자 하나 틀리지 않았다.

고조되기 직전, 폭풍의 눈처럼 고요해졌다가 다시금 힘을 얻어 가는 연주에 최무정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탄탄한 근육이 팔을 고정하듯 흔들림 없었고, 녀석은 연주하는 내내 팔 외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잔잔할 때도, 거칠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커튼이 걷어지고, 화려한 보석들이 하늘에서 눈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10분 동안, 건율은 굳은 얼굴로 최무정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강하고 화려한 막이 내리며 연주가 끝을 맺었다. 투 피아노 곡을 홀로 연주하는 데도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건율에게 익숙했던 탓이리라.

“어때요?”

최무정은 몸을 아예 건율 쪽으로 돌려 앉아서는 양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건율은 잠시 고민했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넘어가는 게 나을까.

연주는 좋았다. 곡의 특성을 모두 살렸고, 틀린 것 하나 없이 완곡을 해냈으니까. 그러나 조금 전 성악 연습을 했을 때처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느낌. 아무리 호흡이 좋은 파트너여도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선배?”

새삼스럽게 최무정은 이정우를 왜 때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밝고, 사회성 있던 이정우가 녀석에게 맞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던 건 아닐까? 최무정의 연주에 대해 무어라 말을 했다거나…….

피아노 치는 놈들이 가장 예민하게 구는 게 자신의 연주에 관한 것이다.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아, 어어. 이틀만에 했다고 하기엔…. 너무 잘해서, 놀라서.”

“밤 새워서 연습했어요. 선배랑 같이…. 선배랑 저랑 처음 연주하는 거니까요.”

“그… 너. 그런 말 좀 하지 마. 누가 들으면 내가 후배 잡는 줄 알겠다.”

“진심인걸요? 누가 뭐라 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가서 꼭, 다시 정정할 테니까요.”

“그런 게 좀, 그래.”

건율은 눈을 피하며 애써 말을 이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을 참아 내기 위함이었다. 어쩐지 최무정과 눈이 마주치면 술술 말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반대편 피아노에 앉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자꾸만 치솟았다. 스토커 때문에 예민해진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최무정의 연주는 누가 보더라도 제 연주와 똑 닮아 있었다. 한 음 한 음, 건반을 누르는 힘의 차이나 호흡, 표현까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최무정이 들었다는 게 제 콩쿠르였을까. 검색하면 우수수 연주 영상이 쏟아질 텐데, 굳이 고등학생의 연주를 줄기차게 들었을까?

……어째서?

최무정의 연주는 움직임과 호흡, 손끝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까지 건율의 것과 같았다. 건율은 주먹을 쥐며 말을 삼켰다.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대답을 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같은 곡이어도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 없다. 그건 건율뿐만 아니라 모든 연주자가 동의할 터다. 목이 간질거린다. 입가까지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건율은 간신히 삼켰다.

지금 이걸 지적해서 뭘 하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아니, 그가 긍정이라도 하면 또 어쩔 셈인가. 아무런 계획도, 원하는 바도 없었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모르는 일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맞춰 보자.”

“네! 아, 그리고 선배.”

“어…. 왜?”

“끝나고 파스타 먹으러 가요. 예약해 뒀어요.”

이미 예약해 뒀다는 말에 건율은 거절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싱글 웃은 최무정의 얼굴이 다시 피아노에 가려졌다.

건율은 어둑한 낯으로 건반을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 * *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상대의 말 하나하나에 의심하고, 또 그런 자신에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건율은 감정에 많은 힘을 소모해 축 처진 채로 파스타집을 나왔다.

녀석이 예약한 곳은 꽤 비싼 곳이었고, 계산까지 하는 최무정을 보며 건율은 속이 더더욱 복잡해졌다. 저에게 잘해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정우 일의 입막음을 위한 연장일까. 아니, 그럴 바엔 이정우와 똑같이 만드는 편이 녀석에겐 편할 터였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응? 갑자기 왜?”

“또 멍 때리셔서요. 선배, 요즘 자주 멍해지시네요. 생각할 게 많아요?”

건율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 네 탓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본래 서건율의 성격은 참지 않고 말하는 쪽에 속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남에게 피해가 크지 않는 한 모두 토해 냈고, 후회도 하지 않았다. 결국 혼자 남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무정과 있을 때는 그럴 수 없었다. 보건실 앞에서 딱 한 번, 피로와 짜증에 참지 못한 적을 빼면 말이다.

“그냥……. 이번 학기 끝나면 4학년이니까. 졸업 연주회 준비도 해야 되고.”

“아아. 그렇네.”

“너도 준비해야 하잖아.”

“뭐, 아직이니까요. 그때 가서 하면 되겠죠.”

건율은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며 가방을 고쳐 멨다. 전공 서적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 여기서 집까지 1시간가량 걸리니, 가는 길에 정리 노트라도 보고 있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럼 난 가 볼게.”

“음? 어딜요?”

“…집?”

“카페 갔다가 가요. 제가 괜찮은 데 찾아 뒀어요.”

“나 공부해야 되는데….”

“카페 가서 하면 되죠. 갈 때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카페에서 하는 게 집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터였다. 그럼에도 건율이 고민하자 최무정이 고개를 기울이며 건율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참 적절하게도 녀석이 팔걸이로 쓰기 좋은 키 차이였다.

“가서 같이해요. 네?”

“어……. 그럴, 까?”

“네. 딸기 타르트도 있고, 스콘도 팔아요. 아, 슈크림 빵도 있고요.”

딸기, 슈크림. 건율은 귀를 쫑긋거리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최무정은 자연스럽게 건율을 이끌었다. 얼마 걷지 않아 넓은 거리가 보였고, 양옆으로 카페와 옷가게, 디저트 가게 등이 보였다.

“여기서 3분만 걸어가면 돼요.”

“…응.”

“근데요, 선배.”

“응?”

거리는 화려했다. 양옆의 가게들뿐만이 아니라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친구들과 웃으며 재잘거리는 사람들, 옷을 제 몸에 대 보며 마음에 든 듯 환한 얼굴을 하는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화려하게 빛났다.

“저번에 선배가 쓰레기라고 한 거요. 검은 봉투…. 저 그거 궁금한데, 그게 왜 쓰레기예요?”

최무정은 건율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건율은 고개를 기울여 올려다봤다가, 놀라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깐 사이 그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최무정은 그 어둑한 골목길, 섬뜩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봉투 말하는 거야?”

“선배 집 앞에 있던 거요. 직접 만든 죽인데.”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흘렀다. 이상했다.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다음 날 아픈 저를 위해 방을 치워 주면서 보았던 걸까. 내가 언제 쓰레기라고 말했었지?

건율은 눈을 수 차례 깜빡이다가 아, 하고는 침을 삼켰다. …이전에 집에 데려다주면서 물었었지. 그래, 아마도…….

“……그게.”

“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모르는 사람이 그냥 두고 간다고? 스토커 이야기를 하기엔 부끄러웠다. 다 큰 성인이, 그것도 사내가 되어서 스토커한테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쪽팔렸다.

한참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최무정이 건율의 팔을 잡아끌었다.

“카페 들어가서 얘기할래요? 여기서는 할 얘기 아닌 거 같은데…. 맞아요?”

가슴이 올라가는 게 보일 만큼, 건율은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기 앞에, 카페 보이죠? 저기예요.”

“……응.”

“금방 가요.”

최무정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 저에게 이유 없이 다가와, 선의를 베푸는 데도?

하지만 그간 그가 보여 준 행동들은 실존했다. 최무정은 저를 몇 번이나 도와주었다. 심지어는 업어서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아플 땐 죽을 쒀 와 간호를 해 줬고, 과제 또한 먼저 연습실을 예약하는 둥 모자란 것이 없었다. 좋은 후배였다. 그 밤, 골목길의 진실만 제외한다면, 건율은 최무정을 진심으로 좋은 후배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몇 번이고 떠올린 그 날의 기억은 자주 열어 본 사진첩처럼 퇴색되었다. 이제는 최무정의 얼굴이 맞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땐 확실하게 그를 가리킬 수 있었는데, 지금 누가 묻는다면 건율은 ‘아닐 것 같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들어와요. 2층으로 먼저 올라가 계세요.”

“어? 어…….”

“금방 올라갈게요.”

핑크빛으로 가득한 카페는 여성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건율은 1층에 가득 찬 손님들을 보며, 2층에 자리가 있을까 걱정됐다. 그러나 걱정은 쓸모없는 짓이었다.

“…뭐, 아니…….”

당황한 마음에 튀어 나가려던 욕설을 꾹 참았다. 건율은 눈을 깜빡거리며 2층에 세워진 팻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최무정 손님 예약석-

지금 이게, 그니까 여기 써 있는 이름이 제가 아는 최무정이 맞을까? 팻말 뒤로 넓은 2층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고, 바닥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건율은 들어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서, 한참 동안 최무정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툭, 하고 커다란 손이 어깨를 끌어당겼다.

“어……!”

힘을 빼고 있던 상체가 단번에 흔들리며 뒤로 휙, 허리가 꺾였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뒤에서 덮쳐 오던 무게, 크고 굵은 남성의 팔과 손.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건율은 멍한 눈으로 팔을 마구 휘저었다. 

“선배?”

지나친 발버둥에 최무정이 놀란 목소리로 불러 왔다. 그제야 건율은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 깨달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건율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뒤를 돌았다. 최무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율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제 허리를 끌어안은 두툼한 팔을 밀어내며 어색한 낯으로 똑바로 허리를 세웠다. 최무정은 밀려났다가 다시 건율의 허리를 감쌌다.

“다리 아프게…… 왜 서 계세요.”

“너…… 이거, 뭐야?”

팻말을 가리키자 최무정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건율은 인상을 쓰고 말을 씹듯이 뱉었다.

“예약, 했냐고.”

“음, 네. 왜요?”

“그…… 2층, 여기 전부? 그게, 돼?”

최무정은 안 될 게 뭐 있냐는 듯,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감싼 손은 여전하다. 그는 정중앙의 가장 화려한 자리로 건율을 이끌었다. 누가 봐도 예약자를 위해 준비한 듯, 연한 핑크색 레이스가 감싸진 테이블 위에는 장미 생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말간 주홍빛의 장미꽃은 방금 꺾은 것처럼 진한 향기가 났다.

지금 이게, 무슨…… 드라마 같은 연출인 거지? 황당함에 목이 다 메었다.

“원래… 이래?”

“저요? 음…. 선배한테만요.”

“…….”

오글거리는 말에 건율은 진저리를 치듯 눈살을 팍 찌푸렸다. 원래 최무정이 그런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강도가 심했다.

“푸핫, 장난이에요, 장난. 선배 지금 너무 정색하신 거 아니에요?”

“알면 좀 하지 마…. 징그럽게, 남자끼리.”

“뭐 어때요. 내가 그만큼 선배 좋아한다는 건데, 뭐.”

아르바이트생은 분명 연인이 올 줄 알았겠지. 그러나 도착한 예약 손님은 두 남자다. 건율은 그들이 자신들을 게이로 생각했을 거라고, 98% 장담할 수 있었다.

“앉아요. 주문은 제가 했어요.”

“어어….”

이렇게 얻어먹기만 해도 되나, 싶은데 맘대로 예약한 건 최무정이니 굳이 돈을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건율은 인색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먼저 사주는 놈을 거절할 만큼 관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까 했던 얘기 계속해 줄 수 있어요?”

건율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공부하자고 온 거잖아.”

“선배, 나 아직 못 믿겠어요? 아직 불편한가?”

“본 지 얼마 됐다고…….”

“난 선배 오래 봤는데.”

눈을 맞추자 최무정이 싱글싱글 웃었다. 장난일 게 뻔한 말에 건율은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럼, 나 뭐 좀 물어도 돼?”

“뭔데요?”

“음…….”

여러 질문이 퐁퐁 비눗방울처럼 떠올랐다가 펑펑 터졌다. 건율은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반대편에 앉은 녀석 뒤로, 주홍빛 황혼이 곱게도 들어왔다.

“내 생각엔… 너랑 나랑, 이렇게 카페까지 올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전에?”

“으응. 그냥, 잘 모르던 사이였는데, 네가 왜 나한테 잘해 주는지 모르겠어. 그냥, 성격이야? 다른 애들한테도 다 이렇게 해?”

차라리 성격이라고 하면 좋겠다. 맘에 안 들면 이정우처럼 큰일이 나더라도, 무난한 사이에서는 누구든 다 퍼 주는 그런, 극단적인 성격인 게 낫다. 그럼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듯했다.

건율은 질문을 뱉고 괜히 민망해졌다. 가방을 뒤적여 전공 서적과 노트, 필통을 꺼내고도 손끝으로 책을 툭툭 치고만 있었다.

“아……. 음.”

최무정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눈동자를 빙글 돌렸다. 천진난만한 기색이다. 그러다 곧장 건율의 눈을 맞추며 방글방글 웃었다.

“다른 사람들한텐 이렇게 안 해요.”

“…그래? 그럼 왜, 내가… 너한테 뭐 해 준 것도 없는데…….”

“그거! 그거요.”

“어?”

“선배, 거울 자주 안 보죠? 당황할 때 자기가 귀여운 거 모르겠다, 그쵸?”

건율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지?

“처음엔 자꾸 버스 못 내리고, 놓치고… 그런 게 좀… 음, 챙겨 주고 싶었다고 하면 맞을 거 같아요. 저 동생들 많거든요. 선배같이 좀 어벙벙 한 애들.”

“야, 너-!”

“애들마다 다르긴 한데, 도와준다는데 선배처럼 피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피한 건 알았고? 알았는데 안 놔준 거고?

건율은 솔직하다 못해 대범하기 짝이 없는 후배의 말에 뒷골이 쑤셨다. 그니까 결국, 멍청해 보여서 챙겨 주다가 친해진 거 같다는 거 아니야? 자꾸 피하니까 더 괴롭히고 싶었던, 뭐, 그런 거?

“너…… 변태지.”

“네? 네!”

“진짜?”

“네. 저 취향 진짜 이상한데, 어떻게 아셨어요?”

마냥 신난 천진난만한 얼굴에 건율은 이성적인 생각을 접었다. 그날 제가 본 게 최무정이 맞다고 해도, 이미 여러 번 저를 도와주고, 정을 준 녀석을 내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럴 자신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때마침 아르바이트생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전공 서적을 슬쩍 보더니 눈썹을 까딱이며 테이블에 음료 두 잔과 디저트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다행히 게이라는 오해는 피한 듯 싶었다.

“선배, 슈크림 라떼 드셔 보세요. 카페인 없는 걸로 시켰어요.”

“슈크림 라떼?”

“네, 네. 어서요.”

몇 번 들어 보긴 했지만 건율의 단골집에 비하면 너무 비싸, 손도 대지 못했던 메뉴였다. 건율의 단골집인 ‘자판기 커피’는 고작해야 300원이었는데, 카페에서 파는 슈크림 라떼는 10배도 넘었다.

조심스럽게 크림을 수저로 뜬 건율은 수저를 앙, 하고 단번에 물었다. 슈크림과 생크림을 적절히 섞어 부드럽고 달콤한 데다, 생크림 특유의 느끼할 수 있는 끝맛이 말끔했다.

건율의 눈동자가 동그래지자 최무정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걸 바라보았다. 테이블에는 딸기 타르트, 청포도 타르트, 초코 스콘과 치즈 스콘, 여러 종류의 쿠키 세트, 그리고 겹겹이 쌓아 올린 크레이프 케이크 조각이 맛별로 놓였다.

“이거… 맛있다.”

“그쵸? 이것도 드셔 보세요.”

“어어.”

건율은 최무정이 내민 딸기 타르트를 받았다가, 사라진 아르바이트생과 테이블을 가득 채운 디저트를 발견했다. 더 놀랄 것도 없는데 또 놀랐다. 건율은 이 아까운 걸 잔뜩 시킨 최무정을 ‘돈 펑펑 쓰는 도련님’이라 생각하면서 타르트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시럽에 싸인 딸기는 상큼한 즙이 터지며 입 안을 가득 채웠고, 모두 알맞게 익어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자, 선배. 이제 제가 물어도 되죠?”

“읍, 크흡, 컥!”

“여기, 물.”

갑작스런 질문에 목이 막혔다. 어깨를 움츠리며 기침을 하는데, 입가에 물 컵이 와 닿았다. 건율은 한 손에는 타르트, 한 손은 테이블 시트를 붙잡고 고개를 뒤로 넘겼다. 물잔이 천천히, 건율의 목을 적셨다.

“하아…. 야, 뭐 그렇게 막, 묻고 그래…….”

“말 못 해 줘요?”

“아니, 뭐, 별건 아닌데…….”

길게 뻗은 팔은 이제 물컵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건율의 입가를 말끔히 닦아 주었다. 건율은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해 의자를 고쳐 앉았다. 그러다, 팔꿈치가 케이크를 툭, 건드렸다. 꽤 강하게 밀려난 케이크가 옆으로 떨어지기 직전, 최무정이 접시를 받아 냈다.

“진짜 칠칠치 못하시네요.”

“…그게 좋다며, 변태야.”

“네에.”

건율은 새삼스레 아기 새처럼 물을 받아먹은 사실에 뺨을 붉혔다. 자꾸 이러니까 두 살이나 어린애한테 바보 취급을 받는 거 아냐, 멍청아.

사실상 욕에 가까운 최무정의 말을 건율은 좋게 받아들였다. 거짓보다는 괴상한 진실이 나았으니까. 그리고 자신도 그에 진실로 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왜요?”

디저트를 양옆으로 치우며 제 노트를 꺼낸 최무정이 눈을 깜빡였다. 또다시 묻지 않는 걸 보면, 건율이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건율은 더 믿음이 갔다. 자신에게서 뭔가를 캐내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순전히 궁금했구나 싶었다.

“나 스토킹 당해.”

“…네?”

“그 쓰레기, 스토커가 준 거야. …모르는 사람이야.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건율은 최대한 무뚝뚝하게, 감정 없이 사실을 전했다. 노트를 펼치고,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좀 됐어. 두 달 정도.”

카페 2층은 꽤나 넓어서, 단번에 조용해진 분위기에 건율의 침착한 목소리가 얹어졌다. 건율은 목이 떨려 오는 걸 느끼고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한 슈크림 향이 섞인 라떼는 제법 맛이 좋았다.

그때, 최무정이 슥, 크레이프 케이크를 밀어 주었다. 내려다보니 녀석이 멋쩍게 웃었다.

“드시면서 하세요.”

“아…. 응.”

포크가 콕, 찍히고 부드럽게 케이크를 조각낸다. 최무정은 그걸 건율의 입가에 대었고, 건율은 잔말 없이 받아먹었다. 긴장을 풀어 주는 듯한 태도에 바싹 마르던 목이, 그리고 저도 모르게 뛰어 대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처음엔 문자만 왔어. 집 앞에 편지를 두기도 했는데…. 프린트된 거더라.”

그냥, 잘못 온 문자인 줄 알았다. 편지도 우연이겠거니 하고 지나쳤었다.

“근데 갈수록, 내 얘기를 하는데…….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나한테 보낸 게 맞구나 생각했었어.”

그래도 그때까진 참을 만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두려움은 평소에도 늘 지니던 것과 같았다. 조금 더 심하고, 제 상상처럼 집요한 문자일 뿐이었다.

“최근엔 전화도 왔어. 두 번… 왔었어. 목소리는 변조돼서 누군지 모르겠는데, 변조한 걸 보면 내가 알 만한 사람이구나 싶었어. 딱히 짐작 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시기를 생각해 보면 학교 내에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

이제 막 복학한 저를 누가 알고, 무슨 이유로 스토킹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지만, 가깝지는 않은 사람. 그 정도가 건율이 추측할 수 있는 전부였다.

“찾아오기도 했는데 얼굴은 못 봤어. 좀, 덩치가 컸던 것만 알아.”

“찾아왔어요?”

“으응. 집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피하고 싶고, 무서웠던 녀석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상황이 신기했다. 건율은 쓰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의 낯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후로 문자는 자주 안 오는데……. 집 앞에 먹을 걸 두고 가기 시작했어. 네가 일요일에 온 날, 그게 처음으로 온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먹겠어. 그래서 쓰레기라고 한 거야.”

건율은 핸드폰을 켜 문자 창을 띄웠다. 아까 연습 도중, 화장실에 들렀을 때 왔던 문자였다. 그걸 내밀자 최무정의 낯이 어둑하다.

[보고 싶다 건율아]

[만지고 싶어]

[네가 피아노 칠 때마다 꼴려서 죽을 거 같아]

오늘 온 문자의 수위가 좀 선을 넘긴 했다. 건율은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꽤 심각해진 최무정의 얼굴에 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렇게 된 거야, 그냥.”

“…….”

최무정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탁자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율은 핸드폰을 가방에 밀어 넣다가 문득 최무정이 왜 그걸 궁금해했을까, 싶었다. 

검은 봉투를 본 건 이미 일주일이 넘었다. 게다가 별것 아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 왜 지금 와서 물었을까. 지금까지 그걸 곱씹어 왔다면, 그 이유는 왜일까.

건율은 애써 웃으며 최무정의 눈을 맞췄다. 깊게만 엮이지 말자, 생각했던 후배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그저 적당히 친한 사이로 지낼 생각이었으니까. 어차피 뭐, 퍼트리든 말든 상관은 없다.

건율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때, 말없이 가만히 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응?”

“쓰레기라고 하셔서, 진짜 쓰레긴 줄 알았는데 그날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정성이 꽤 담긴 듯했는데 왜 선배가 쓰레기라고 했을까…. 싶어서, 나쁜 사람한테 꼬인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최무정은 묻지 않아도 건율이 궁금한 점을 짚어 이야기했다. 마치 건율의 불안을 알고 있고, 그를 배려하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당분간 집에 들어가실 땐 저랑 가요.”

“어…. 안 그래도 돼.”

“직접 찾아왔다면서요?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래요?”

“나도, 뭐, 남자잖아. 다음에 오면 바로 후려 칠라고 현관문 앞에 칼도 숨겨 놨어.”

“그걸로 위협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거 같은데요, 선배.”

맞는 말이었다. 건율은 코를 찡그리며 노트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안 해 줘도 돼. 나, 증거 다 모아 뒀고 중간고사 끝나면 고소할 거야.”

“그럼 그때까지만 데려다드릴게요. 어차피 저 차도 있고, 가는 길이에요.”

“너랑 나랑 시간이 맨날 같겠어?”

“곧 시험인데, 뭐. 맨날 연습실에 처박혀 계실 거 아니에요? 저도 연습해야 되고…. 아무튼 데려다드릴게요. 선배가 위험하시다니까.”

얘는 왜 이렇게 맞는 말을 잘하는 거야.

건율은 눈을 흘기다 조그맣게 알겠어, 하고는 책을 꺼냈다. 공부하다 만 페이지를 펼치고 펜을 꺼내 드는데 최무정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뭘 그렇게 봐?”

“맨날 옆에서 보긴 했는데…. 선배 진짜 열심히 하신다, 싶어서요.”

“열심히 해야지, 뭐. 군대 다녀와서 머리 굳었잖아.”

“선배, 군대에선 어떠셨어요?”

군대 얘기에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건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신 가기 싫다.”

“왜요?”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서.”

어차피 사회로 나가면 거기서 거기인 놈들이, 병장 달았다고 으스대는 꼴이나 안 보이는 곳에서 신병을 패는 게 얼마나 꼴사나웠던지 모른다. 그나마 건율은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큰 괴롭힘은 당하지 않았지만, 추행 아닌 추행도 당했었다.

탄원서를 넣는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다. 군대는 상당히 폐쇄적인 곳이었고, 그만큼 숨기는 것이 많았다. 그때 건율보다 일찍 들어와 병장이었던 한 놈이 떠올랐다. 좀 높은 직급의 공무원 아들이라고 소문이 난 녀석은 병장이 되기 전부터 제멋대로 굴었다고 했다.

사람 하나 안 죽인 게 다행이지.

“공부나 해. 너 자꾸 말 건다?”

“알겠어요…. 그래두 선배랑 첫 데이트니까 설레서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했지요.”

눈에 힘을 줘 노려봤으나 녀석은 조금도 반성의 기미가 없다. 하긴 한참 키 작고 마른 녀석이 협박하는 게 무섭게 느껴질 리가 있겠는가.

건율은 길게 드리워진 주홍빛 햇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공책을 맨 뒷장으로 넘겼다. 무지의 빈 장에 재빠르게 오선을 긋고 떠오른 멜로디를 길게 그렸다. 정리는 집에 가서 할 생각으로 적당히 그려 넣은 뒤 다시 공책을 앞으로 넘겼다.

그러다 최무정과 눈이 마주쳤다. 말 걸지 말라는 얼굴로 노려보자 최무정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노트로 시선을 깔았다.

* * *

공부를 끝내고, 연습실을 오래 예약했다는 말에 놀라 다시 돌아갔다. 건율과 최무정은 각자 자리에 앉아 과제용 작곡 연주를 연습하다가 밤 11시가 되어서야 끝을 냈다. 물론 최무정은 벌써 끝난 듯 가자는 눈치를 줬지만 건율은 꿋꿋하게 연습실 시간을 모두 채웠다.

최무정은 약속한 대로 건율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이젠 묻지도 않고 빌라 코앞까지 세운 녀석은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뚝, 뚝 하고 연골이 부딪치는 소리가 매섭게도 났다.

“선배, 맨날 이렇게 살아요?”

“뭐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연습하냐구요. 시험 기간 전에도 늦게 가셨잖아요, 집.”

매일 강의를 복습한 덕에 지금은 복습과 새로 나간 진도를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녀석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복습 따위 하지 않아도 술술 외우는 똑똑한 놈이기라도 한 걸까.

그러다 제 입으로 학점 얘기를 한 게 떠올랐다. 머리가 나쁜 거 같지는 않은데, 왜 학점이 그 정도에서 그쳤는지는 참 모를 일이었다.

“난 이렇게 해야 외워져.”

“피곤하겠다. 사람이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해야지.”

“그럴 시간이 어딨어. 아르바이트도 해야 되고, 레슨도 가야 돼.”

“그러고 보니 선배, 술자리 엄청 안 나오신다면서요? 지금도 뭐…. 저번에 딱 한 번 오셨고.”

그날은 이정우가 ‘딱 하루만요.’ 하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갔었다. 자연스레 골목길의 일이 떠올랐다. 건율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너, 이정우……. 맞은 거 봤다고 했지.”

“네. 왜요?”

“가해자 안 잡혔대? 주변에 CCTV 많기도 하고, 너도 증인이니까 금방 찾았을 거 같은데.”

질문이기도 했지만 건율은 살짝 떠보듯 눈을 흘겼다. 그날 제가 본 사람이 최무정이 맞는지 이젠 도저히 모르겠다. 사람을 가차 없이 폭행하고, 손을 으스러트린 놈이 제 앞의 놈과 매치 될 리가 없었다.

물론 어린 녀석들끼리 주먹다짐은 할 수 있지만, 그날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방적인 폭행이었고, 악질적으로 악기를 하는 놈의 손을 완전히 망가트리지 않았던가.

최무정은 그런 짓을 할 녀석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렸으면 말렸지, 주먹을 쓸 것 같진 않았다. 사람 속내를 다 알 수는 없다지만 건율이 본 최무정은 그랬다. 밀어내도 도와주고, 먼저 상대를 배려하지 않았던가.

“…뭐, 글쎄요. 저는 잘 몰라요.”

“그래? …정우한테 연락해 보고 싶은데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된다.”

“잡혔겠죠. 다음에 같이 병문안 가실래요?”

“그럴까? 시험 끝나고 가 볼까.”

“아니면 선배 고소하러 가실 때, 저 증인이었으니까 정우 일 물어봐도 될 거 같은데?”

“머리 좋네.”

최무정은 대답하는 내내 조금도 요동하질 않았다. 후배에 대한 적절한 걱정, 오히려 저를 안심시켜주는 태도는 도저히 가해자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게 연기라면 최무정은 피아노과가 아니라 지금 배우로 활동해야 된다.

녀석은 룸미러를 기울여 머리를 정돈하더니 건율에게로 몸을 돌렸다.

“선배, 근데요.”

“뭐.”

“애인 몇 번 사겨 보셨어요? 남자도 포함.”

“…어? 남자?”

“네, 저 편견 없어요. 진짜, 완전. 그리고 막, 옛날 일에 의미 안 둬요.”

뜬금없는 질문에 건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뒤로 꺾은 고개를 바로 하고, 욱신거리는 어깨를 살살 돌리면서도 일그러진 눈으로 녀석을 훑었다.

옛날 일에 지가 의미를 왜 둬. 애인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왜.”

“그냐앙. 궁금해서요.”

“……딱 한 번 있었어. 고등학교 때.”

“고등학생 때요? 누구?”

“말하면 알아? 그냥 친구였어. 그러다가 사겼어.”

“왜 헤어졌어요?”

“그만 좀 물어. 남 헤어진 거 들어서 뭐 하게.”

“궁금해도 되는 사이 아니었어요?”

최무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과장했다. 건율은 허리를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온 최무정의 뺨을 꾹 밀어냈다.

“아니야, 간다.”

“너무하시네.”

투덜거리면서도 최무정은 잠긴 문을 열어 주었다. 건율은 차 문을 크게 열고, 아래에 둔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멨다. 어두운 빌라 골목에 가로등 하나가 흐릿하게 그를 비췄다.

“…고맙다.”

“고마워하시는 거 아니까 안 해도 돼요. 몇 주는 더 데려다드릴 건데?”

“넌 좀, 사람이 말하면 그냥 들어.”

“제가 뭘요.”

“또, 또 딴지 거네. 나 진짜 간다.”

“네. 들어가실 때까지 볼 테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문을 닫자, 조수석 창이 아래로 내려갔다. 건율은 현관문을 열면서 뒤를 슬쩍 보았다. 녀석은 정말 건율이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몇 달간 건율을 긴장시키던 모든 불안이 가라앉았다. 그는 간만에 기분 좋게 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 * *

며칠째 최무정이 집에 데려다준 덕일까, 불안의 강도는 점점 약해져만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커의 문자가 끊긴 건 아니었다.

[요즘 사는 게 즐거운가 봐]

[우리 자기 얼굴이 폈네]

[나도 좋아]

[아, 오늘 레슨 있는 거 있잖아]

[취소야]

건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출발하기까지 20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카페 앞 벤치가 하나 보였다. 흡연 구역과 가까워 찝찝하긴 했지만, 딱히 시간을 보낼 곳이 없었다.

그곳에 앉아 정리 노트를 꺼내 드는데,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꼭 높은 곳에 올라간 것처럼 고막이 틀어막힌 듯 답답했다. 오른손으로 귀를 퍽퍽, 쳐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이곳저곳에서 떠들던 소음이 멀어졌다. 눈앞이 흐릿해져서, 건율은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점점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지더니, 갑작스레 심장이 멎은 것처럼 목이 막혔다.

이게…… 무슨, 왜 또…….

“야, 미친, 저 사람 왜 저래?”

“엉? ……뭐야, 뭐 119 불러야 되는 거 아냐?”

“그랬다가 별거 아니면 어쩌려고.”

“그냥 몸이 좀 안 좋은가?”

“뭐……. 야,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숨구멍이 바늘구멍이 된 것처럼 호흡이 제대로 들어오고, 뱉어지질 못했다. 가까운 흡연 구역에서 사내 녀석들이 여자 이야기를 하며 크게 웃어 재꼈다. 단 한 번도 거슬린 적 없던 소음이, 망가진 티비처럼 지지직거리며 귓구멍을 쑤셔 댔다.

지독하고 매캐한 연기가 숨을 삼킬 때마다 머릿속까지 점령해 왔다. 동시에 심장이 쿵, 쿵, 쿵. 세게 뜀박질을 했다. 건율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이거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연극처럼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건율은 뛰어 대는 심장이 너무 아파서, 입술을 질끈 물며 입에 대어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가 시릴 만큼 찬, 탄산수였다.

“업혀요, 어서.”

순식간에 건율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납치당하듯 업혀졌다. 남자는 건율을 업고서 뜀박질을 했다. 최무정은 아니었다. 알고 있는 냄새와 품이 아니었으니까. 건율은 그에 불편함을 느끼며 등을 밀어냈다.

“조금만 참아 봐요.”

남자가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건율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쉬기에 바빴다. 그리고 어딘가에 눕혀졌다. 밝고, 청량하도록 시원한 공간이었다.

“쌤, 봉투 줘요.”

“어어, 어.”

입가에 무언가 대어졌다. 거칠고 까끌한 종이봉투였다.

“숨 크게 들이마시고, 뱉어요.”

가슴이 부풀어 오르도록 크게 들이마시자, 남자가 하나, 둘, 셋. 하고는 ‘됐어요, 뱉어요.’ 한다. 건율은 그의 부름에 맞춰 숨을 삼키고 뱉었다. 그럼에도 부족했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고 끅끅거렸다. 숨을 들이켜는 것 자체가 되질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와중에도, 건율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팔을 쥐었다.

“며, 끅 씨, 예요…….”

“네? ……아, 아. 지금 4시… 23분이요.”

출발할 시간이었다. 아니, 3분이나 늦었다. 분명 벤치에 앉은 것이 4시였는데 그 잠깐 동안 20분이 지났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냥, 아주 조금…….

“흐윽, 헉, 허억……!”

건율이 구르듯이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남자가 내팽개쳐 둔 가방을 등에 멨다. 다른 건 몰라도 레슨만큼은 반드시 가야 했다. 가장 돈이 되는 일이기도 했고, 무뚝뚝한 건율을 받아 주는 마지막 한 곳이었으니까.

“어디, 어딜 가시게요? 약속 있어요? 좀 늦는다고 하고, 잠깐만, 좀……!”

남자가 말렸다. 그에게서 커피 냄새가 났다. 건율은 비틀거리다 벽에 몸을 부딪쳤다. 온통 반투명한 사각의 방은 상담실이었다. 그 순간, 상담실의 문이 열리고 구원자처럼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최무정. 반가움과 동시에 가슴이 또 한 번 울렁거렸다.

“선배, 괜찮아요. 앉아요, 숨 쉬어요.”

“나, 나……. 레슨, 흐, 흐읍, 레, 스-.”

우악스럽게 어깨가 잡혔다. 커피 냄새의 남자와 상담 선생은 건율의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건율은 최무정에게 매달리다시피 그를 붙잡고 한참 숨을 헐떡였다.

이상하다, 최무정이 왜 여기에 왔지. 어떻게 알고, 여기로 왔을까…….

“윽!”

최무정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건율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아파할 틈도 없이 뒤통수 아래로 커다란 손이 들어오고, 고개가 받쳐지자 최무정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거친 입술이 닿고, 숨이 목구멍으로 들이밀어졌다.

최무정은 숨을 뱉고, 다시 흡입해 건율의 입술에서 호흡을 앗아 갔다. 그리고 입을 떼고, 다시 숨을 욱여넣다가 빼앗아 가기를 반복했다. 손발이 뻣뻣하게 굳었다. 벽에 밀어붙여져 욱신거리던 등허리의 통증마저 잊혀졌다.

건율의 눈동자가 몽롱함에 젖어 들었다. 억지로 숨을 삼키도록 도울 때마다 부딪치는 입술이 어딘지 다정했다. 최무정은 건율의 어깨에 힘이 빠지자 천천히 말캉한 입술을 벌려 입 안의 점막을 은근히 훑어 올렸다.

최무정은 그렇게 몇 번이고 끈질기게 숨을 밀어 넣고 빼앗기를 반복했다. 인공호흡이라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끝끝내 투명한 실이 늘어지도록 맞물린 입술을 떼어 낸 최무정이 작게 물었다.

“괜찮죠? 이제.”

“……응.”

“나 잘하죠.”

다리에 힘이 풀려 똑바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최무정은 건율의 허리를 받치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넘겼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했냐고 묻는 것이 인공호흡인지, 도를 넘은 키스인지 건율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손끝이 저려 왔다.

“선배, 레슨 취소됐어요.”

멍하니 최무정을 쳐다보자 그가 건율의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가리켰다. 학생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아이가 몸이 아파 레슨을 할 수 없다며, 출발했다면 미안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니까 마음 졸이지 말고, 괜찮아요. 내가 선배 끼니 챙겨 주잖아. 하도 안 먹으니까.”

“……응.”

“보건실 가서 조금만 잘래요? 집에 데려가고 싶은데, 싫다고 할 거잖아요.”

“으응.”

“그럼 보건실에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공부해요.”

“응.”

건율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제정신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최무정이어서였다. 그가 이곳에 찾아온 것이 이상하다고 느꼈음에도, 동시에 안도감이 가슴을 빠듯하게 채워 왔다.

“저…… 괜찮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때,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건율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둘만 있는 줄 알았던 곳에, 낯선 이가 둘이나 더 있었다. 카페 유니폼을 입은 남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율을 힐끔거렸다.

“과호흡……인 것 같아요. 병원 가 보세요.”

“…네.”

“공황으로 오는 거니까…. 스트레스, 조심하시고, 또…… 가끔 카페 오세요. 비싼 건 못 드려도 시원한 커피는 드릴 수 있으니까, 숨이 좀 그럴 때 마시면 괜찮거든요. 그니까-.”

“선배, 가요. 가서 쉬어야지. 응?”

“아, 으응. 아……. 저, 감사합니다.”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무정이 건율의 팔을 잡아당겼다. 건율은 그에 따르면서도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조금 낯이 익었다. 이전에도 도와준 그 사람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저번에도… 감사해요.”

“아, 기억…하시는구나. 저는 조한영이에요. 27살.”

“네, 전… 서건율, 이요. 나이는- 아!”

간단히 통성명을 하는 와중에 최무정이 다시 한번 손목을 세차게 당겨 제 품으로 끌었다. 그러곤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워낙 큰 탓에 건율의 눈에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간 고개의 뺨이 굳어 있었다.

“수고하세요.”

그러곤 문을 세차게 밀어냈다. 건율은 조금 당황하며 최무정의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으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의 사이 문은 닫히고 불투명한 시트지로 인해 안쪽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가요, 선배. 몸도 안 좋은 사람을 세워 두면 어떡해요, 저 사람은. 어서 가서 좀 쉬어요.”

“아니, 그래도.”

“선배가 이렇게 아프니까, 내가 자꾸 걱정되잖아요.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건율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두 번이나 이유 없이 도와준 남자에게, 두 번이나 최무정에 의해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한 게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최무정은 고집스레 건율을 보건실로 이끌었다. 점심시간이 한창 지난 보건실은 고요했다. 자리를 지키는 보건 선생이 무슨 일로 왔냐는 듯 둘을 보았고, 최무정은 창백한 낯의 건율을 눈짓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건율은 최무정이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가 침대에 누웠다. 학식 티켓이 남는다며 최무정이 억지로 먹인 점심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영혼이 빠져나간 기분이 이럴까. 건율은 침대에 누워 반쯤 뜬 눈으로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안 가?”

“선배 자는 거 보고요.”

“필요 없다고 해도 안 갈 거지.”

“네. 선배 몸이 약한 걸 어떡해요.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또 챙겨 줘야지.”

이상한 일이다. 군대까지 다녀올 정도로 튼튼하던 자신이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도 희미했다. 건율은 시험 공부와, 각종 악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주에 교수님과 약속한 곡을 아직, 다 못 끝냈는데.

“눈 감아요.”

“감았는데…….”

“머리 굴리는 거 알아요, 자요.”

“…….”

딱히 할 말이 없던 건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쉬어야 공부도 하고, 연습도 하죠. 그 상태론 아무것도 못 해요.”

얄밉고 옳은 말.

최무정은 정말 괜찮은 놈 같았다.

* * *

이젠 정말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딱 3일 뒤부터 시험이 하나둘 시작되는 탓에 학교 내부의 독서실이나 도서실은 가득 차서 자리를 잡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연습실은 당일 예약제라서, 일찍만 오면 그랜드 피아노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곳을 잡을 수 있었다.

오전부터 강의 시간까지 내리 연주를 한 건율은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선배, 아.”

“어…!”

연습실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최무정이 입 안에 과일을 쏙 집어넣었다. 생긴 건 청포도 같은데, 훨씬 달고 상큼했다. 포도 특유의 떨떠름한 끝맛이 나지 않았다.

“맛있어요?”

“우응.”

“아.”

건율은 생각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다가, 또 아차 싶어 얼굴을 붉혔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내가 먹을래.”

“그래요, 여기요.”

녀석이 준 통에는 여러 과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설마 이걸 다 먹으라는 건가, 싶어 힐끔거리자 최무정이 핸드폰을 보며 딴짓을 했다.

“선배 전공 실기 시간이다. 어서 가요.”

“어? 어어. 그래서 나온 건데……. 이거 가져가.”

“선배가 드신다면서요?”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오늘 점심도 안 먹는다고 고집부리셨잖아요. 그 정돈 드셔야죠.”

“……아니, 그……. 야.”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왔다. 꼭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최무정은 건율을 밀어 엘리베이터에 태우고는,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표정일 때는 섬뜩할 정도로 무섭게 생긴 녀석이, 웃기만 하면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건율은 한숨을 푹 쉬며 가득 찬 과일 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딸기를 하나 집으며 세모난 눈으로 씹었다.

며칠 전, 최무정과 함께 정말로 이정우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아니, 다녀올 뻔했다. 가서 알 수 있던 건 이정우가 병원을 옮겼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결국 둘은 이정우의 발끝도 보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번호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건율은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었다.

최무정은 시험이 끝나면 경찰서로 같이 가자고 했다. 가해자는 분명 잡혔을 테니까, 피해자 상태도 물어볼 수 있지 않냐고 건율을 꼬드겼다. 녀석의 얼굴이 워낙에 태연한 데다 정말로 병문안에, 경찰서까지 가자는 말에 건율은 그날의 기억을 잊기로 했다. 그날 본 건 최무정이 아니라고. 독특한 녀석이었기에 기억은 했지만, 그전까지 잘 알지 못하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제대로 얼굴을 맞이한 적이 없으니 틀릴 가능성이 크긴 했다.

그래서 건율은 실은 저도 가해자를 살짝 보았다고 이야기했고, 최무정은 잘 숨어 있었다고, 신고라도 했다가 큰일 났으면 슬펐을 거라고 말했다. 칭찬받을 일이 아닌데, 오히려 죄책감을 갖고 있는데. 최무정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건율은 그 말에 조금 편해져서,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최무정은 그렇게 건율의 삶에 스며들고 있었다. 건율은 그걸 인지했음에도 대처할 방법을 몰랐다. 

“음……. 집중을 못 하네.”

“아, 죄송해요. 잠깐…….”

“지금 말고, 아니, 지금도 포함해서 요즘 말이야.”

연주를 모두 들은 교수님이 턱을 괴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틀린 거 없고, 호흡도 좋아. 근데 그게 좀 기계 같다, 요즘.”

“……죄송해요.”

“졸업할 때가 되어 가니 이래저래 복잡한 건 알지만, 건율이 너 장학금 받아야 하잖아.”

담당 교수인 만큼 그는 건율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휴학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그 휴학이 어쩌면 퇴학이 될 수 있다는 것까지.

“요즘 고민 있어?”

“아뇨, 아뇨. 없어요. 그냥 걱정되는 게 하나 있어서…….”

“무슨 일인데?”

“……정우요.”

과 특성상 학생은 적었고, 다른 학년이라 할지라도 서로 이름까지 알 수 있었다. 건율은 착잡한 얼굴로 뺨을 쓸었다.

“조금 알던 사이라서…….”

“그래, 뭐. 그럴 수 있겠다. …쯧, 그래도 너 할 일은 해야지. 걱정한다고 하루 만에 나을 수도 없잖아.”

“그죠…….”

“그나저나 요즘 무정이랑 자주 다니던데, 보기 좋다?”

갑작스레 나온 최무정의 이야기에 건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교수가 껄껄 웃었다.

“아주 착 붙어 다니는데 소문이 안 나겠어? 건율이 너, 1학년 때부터 어울릴 만하면 멀어지고. 또 친해질 만하면 싸우고. 그랬잖아.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니니까 보기 좋다고.”

그 정도로 붙어 다녔나? 건율은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해 봤자 강의실 옆자리 앉는 것, 점심을 같이하는 것, 집에 같이…….

생각해 보니 하루 종일 붙어 다니긴 했다.

“얼마 안 가요.”

“그러지 말고. 무정이 애가 싹싹하고 열심히 하고, 또 집안도 좋던데 잘 지내.”

“집안은 왜요….”

“콩고물 떨어지나 봐야지 않겠냐?”

“…….”

눈을 세모나게 뜨자 교수가 장난이라는 듯 웃으며 건율의 어깨를 팡팡 쳤다. 최무정이 돈이 많은 거야, 당연히 알던 사실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차를 몰고 다니고, 딱 봐도 명품 브랜드인 옷과 가방임을 제가 모를까.

“여하튼, 둘이 좋은 에너지 받으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생각도 좀 정리하고, 제대해서 감이 안 잡히는 건 이해하지만 좀 노력해 보자?”

“네.”

“그래, 수고했다. 가 봐.”

“네, 감사합니다.”

몇 번의 연주와 피드백을 받고 나자 숙제가 잔뜩 쌓인 듯하다. 게다가 마지막에 얹어진 말 때문에 건율의 가슴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최무정이 좋은 녀석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건율을 떠나지 않은 친구는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 녀석과 또 다른 친구들이 그랬듯 최무정도 언젠가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고, 핸드폰이 울렸다. 건율은 최무정, 이라 적힌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언제 저장했더라? 과대가 연락처를 보내 주긴 했는데, 메신저 프로필을 받았을 뿐 연락처를 저장한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전에 최무정이 멋대로 저장했다가 삭제하라고 했던 것도 같은데…….

“여보세요.”

-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방금 끝나서.”

- 에이……. 제 전화 받기 싫었던 건 아니구요?

“왜 전화했는데?”

- 말 돌리시네!

건너편 녀석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눈앞에 선명히도 그려졌다. 건율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웃고 있을 최무정에게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니거든. 너 근데 내 번호 언제 저장했어? 내가 멋대로 받은 거 삭제하라고 하지 않았어?”

- 응? 저번에 선배가 주셨잖아요.

“그랬나?”

- 네. 근데 그 질문하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연락 주고받은 지 꽤 됐는데에.

건율은 뚱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짝다리로 벽에 기댔다.

“알겠어, 그래서 왜 전화했는지 용건이나 말해.”

- 늘 생각하지만 선배는 너무 차가워…….

“다 받아 주고 있는데 대체 뭐가?”

- 좀만 더 따뜻하게 말해 줘요.

지금 내가 여자 친구랑 대화하는 거야, 뭐야.

“전화 끊는다.”

- 아, 아이! 진짜……! 선배 연습실 가실 거면 같이 가자구요. 그러려구 전화했어요!

“안 그래도 가는 길이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건율은 안에 사람이 꽤 있는 걸 보곤 한숨을 쉬었다.

“전화 끊는다. 엘리베이터에 사람 많아.”

- 잠깐, 그, 톡 봐요!

“어.”

문이 닫힙니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도 끊겼다. 건율은 핸드폰을 켜 녀석이 보낸 걸 봤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최무정: 선배~~><

        저 오늘 어때요?

        (사진)         ]

누군가 찍어 준 사진 속 최무정은 깜찍하게도 브이를 하고 서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인데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귀여워서.

* * *

오후 11시. 연습을 끝낸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시간 내내 연주했음에도 전혀 나아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건율은 핸드폰을 들어 다시 한번 문자를 확인했다.

[자기야]

[나 오늘은 못 참을 거 같아]

[자기가 무서워해서 참고 싶었어ㅠㅠ 정말로]

[자기 때문이야 건율아, 네가 너무 야해서]

[당장 뒤에 좆 박아서 싸고 싶어 질질 흘려 대는 구멍에 대고 하루 종일 처박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빌 때까지 개처럼 뒤에서 할 거야]

띵, 하고 머리가 울린다. 건율은 눈을 깜빡이며 평소보다 강하고, 지저분한 문자 내용을 몇 번이고 읽었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연주 내내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서, 몇 번이나 창을 열고 호흡을 했는지 모른다.

저 문자 내용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가 뒤에서 덮쳐 와 다리 사이로 흉측한 것을 비벼 댄 것이 생각나서 연습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었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고 마른세수를 했다.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었다.

괜찮아, 최무정이 데려다주잖아. 계속 지켜봐 주니까 저번 같은 일은 없을 거야.

녀석이 그간 데려다준 건 생각보다 건율을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떨려 오던 손끝이 곧 힘을 되찾고 숨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건율은 짐을 챙기며 최무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 가?]

[최무정 : 저 금방 나가요!]

잠시 기다리자 녀석이 나왔다. 아까 사진에서 본 대로, 녀석은 한껏 꾸민 듯 보였다. 깔끔한 셔츠에 까만 카디건. 무난하지만 값이 꽤 나가 보이는 착장이다.

건율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이려 해도 심장은 여전히 크게 뛰었다.

“선배, 저 오늘 술 약속 있어서 집까지는 못 데려다드리는데 괜찮죠?”

“……왜?”

“오늘만요.”

“시험 기간인데 술…… 마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하루만 참아요. 저 없다고 슬퍼하지 마시구.”

순간 빙글빙글 돌던 회로가 멈춘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완전히 백지로 변해 버린 머리 때문에 건율은 벙 찐 눈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최무정이 옆에서 떠들 때에도 그랬다.

“선배, 안 타요?”

“아, 어…….”

왜 하필, 오늘…….

“어디로 가는데…….”

“선배 집이랑 반대 방향이에요. 그래서 근처에만 데려다드리고 가려고요.”

최무정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친구들과 톡을 주고받는 듯했다. 건율은 안달이 나서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씹었다.

“간만에 마시는 거라서 꼭 가야 돼요. 선배 챙겨 드린다고 애들 약속 계속 미뤄 왔단 말이에요.”

“아……. 응, 미안.”

“제가 얼마나 원망을 들었는지 선밴 몰라요, 진짜.”

아무리 시험 기간이라 해도, 매일같이 데려다주는 건 힘들긴 했겠지. 친구들도 다 밀어내고 거의 자신과만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 최무정이 오늘 하루만 놀러 가겠다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건율은 그 문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걸 보여 주면서 부탁할까? ……아니야, 그간 도와줬는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지도 모르지. 오늘 온 문자라고 오늘, 바로 올 거란 보장도 없으니까.

“왜요, 선배? 싫어요?”

“……아니.”

“그런 표정 하시면 저 속상한데.”

“아니, 아냐. 괜찮아, 술… 마시러 가.”

“가지 말라 해도 갈 거예요.”

그간 최무정이 저에게 쓴 시간이 많긴 했다. 챙겨 주고, 바래다주면서.

건율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무정아.”

“네?”

최무정의 표정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역시 문자 내역을 보여 주며 부탁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나…… 나도 술 마시러 가면 안 돼?”

살짝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건율은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몸을 움츠려 마른 어깨가 더욱 돋보였다. 최무정은 건율을 내려다보며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나 친구들이랑 마시는 건데……. 끼시려고요?”

“그, 어…. 나, 난 다른 테이블에 있을 테니까.”

“집은 대리 불러서 갈 건데. 그래도 같이 가고 싶어요?”

건율은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훑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건율은 최무정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러곤 바보처럼 울먹거렸다.

“……오늘만, 재워 줘.”

* * *

기묘한 상황이었다.

건율은 정말로 다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무정의 친구들이 단박에 건율을 알아보곤, 합석하자고 난리여서 피할 수 없었다. 꺼려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들은 건율을 반겼다.

술자리는 새벽 1시가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최무정의 친구들은 새빨개진 얼굴로 웃고 떠드느라 바빴다. 술이 다 떨어지면 또 시키고, 또 시켰다. 건율은 술도, 안주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혹여나 저에게 내라고 할까 두려워서였다.

“아, 웃겨. 미친 새끼들 진짜아….”

“너 취해찌? 대박 완전 취해찌?”

“아니거등? 나 두 병은 더어 마신다!”

“꼴았네에, 꼴아따이잉…….”

건율은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를 물컵에 물을 채웠다. 할 말도 없고, 섞이기도 힘들었다. 배는 고픈데 안주에 손도 댈 수 없어서 아주 조금 서럽기도 했다. 그저 최무정을 힐끔거리며 언제 갈지 눈치를 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아, 나 담배 좀 피고 올게.”

“야아, 혼자 가냥? 가취 가아….”

“너 많이 취했어. 앉아 있어.”

“너무해애…….”

남자애들이 우르르 따라가려다가 최무정이 칼같이 자르자 털썩 주저앉았다. 건율은 침을 삼켰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1시 30분이 넘었다. 확인하지 않은 문자는 스토커 새끼일 것이 분명했다. 건율은 손을 쥐었다 피며 드디어 갈 수 있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최무정은 담배를 피우고 온 뒤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앉아 있던 녀석들도 하나둘, 저도 일어나겠다며 소란을 피웠다. 건율은 최무정에게서 나는 지독한 냄새에 눈을 깜빡였다. 의아했다. 제 앞에서 최무정은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지 않았고, 냄새도 난 적이 없었으니까.

눈이 마주쳤으나 최무정은 말을 걸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최무정은 건율에게 단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늘 그랬듯 ‘왜요?’ 하고 물을 것만 같았는데 최무정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친구들과의 자리에 제가 따라온 게 불편한 듯싶었다. 건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꼭 맞잡은 채로 한숨을 길게 뱉었다.

“가자, 가자.”

“너 택시? 같이 타자. 중간에 나 내려 줭.”

“오케이이.”

아이들이 다 일어나고, 한 명이 도맡아 계산을 하고 나서야 건율은 몸을 일으켰다. 술병과 안주로 어지럽혀진 테이블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건율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노는 최무정에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한 듯했다.

하나둘 짝을 지어 택시를 타고 술집을 떠났다. 건율은 최무정을 따라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대리 기사는 미리 와 있었고, 최무정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뒷자리에 착석했다.

“음….”

대리 기사는 말없이 최무정의 집까지 운전했다. 건율의 집에서 더 멀어지는 방향이었다. 그제야 건율은 최무정이 저를 많이 배려했구나 싶었다. 자신을 데려다주고 집까지 오는 길이 꽤 힘들었겠구나 싶어 미안해졌다.

힐끔거리자 녀석은 창가에 머리를 대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아픈 듯싶었다. 꽤 마셨음에도 취한 것 같지 않아서 신기했다. 건율은 딱 한 번, 맥주 한 잔을 먹고 새빨개진 후로 술은 한 번도 마시지 않았었다.

그리고 최무정의 집에 도착했을 때, 건율은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옷이나 가방, 핸드폰 등을 봤을 때도 잘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업 건물이라 해도 믿을 만큼 높은 아파트는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아파트 입구에는 높은 철창이 미관을 해치지 않고 가로막고 있었고, 널따란 공원과 놀이터가 마련돼 있었다.

여러 개의 단지가 줄 지어 서 있는 걸 보자, 건율은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저런 집에서 한 번만 살아 보고 싶다.’

그래서 건율이, 언젠간 그렇게 해 주겠다고 말했었다. 어머니는 그때 웃었지만,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 기억에 입 안이 씁쓸해졌다.

차는 미끄러지듯 커다란 아파트로 들어섰다. 혼자 자취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파트 단지는 크고 넓었다. 게다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듯 건물도 깨끗했다. 경비는 일반 아파트와 다르게 덩치가 크고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운전자의 얼굴이 낯설다는 걸 알고는 최무정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연예인이라도 사는 듯 철저한 곳이었다. 경비는 차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들여보냈다.

차에서 내린 최무정은 5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기사가 놀라며 ‘2만원이에요.’라 했으나 최무정은 ‘팁입니다’ 하고 돌아섰다.

저 팁, 나 주면 좋겠다.

건율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건율은 최무정을 따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1018호. 건율은 최무정이 지문 인식으로 문을 여는 것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까지도 최무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건율이 말을 걸었다.

“머리… 아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건율은 눈을 깜빡이며 현관에서 머뭇거렸다.

“뭐 해요, 안 들어오고?”

“아, 으응.”

그제야 건율은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들어섰다.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넓은 공간에 건율은 눈을 감을 새도 없었다. 

현관 너머로 커다란 거실이 한 눈에 들어오고,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벽 한 면을 차지하는 TV와 고급스러운 통 가죽의 소파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보드라워 보이는 무늬 없는 카펫이 깔려 있고, 유리로 이뤄진 듯 투명한 탁상이 그 위에 놓여 있었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거실 한쪽 벽은 전면이 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밖은 넉넉한 크기의 베란다 위로 가리는 건물 없이 널찍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4명 가족이 살아도 넓은 집인데, 최무정은 혼자 살고 있었다. 녀석은 안방으로 들어서다가 아, 하고는 몸을 돌려 건율을 쳐다보았다.

“선배, 씻으세요.”

“어? 아, 아니야. 너부터 씻어.”

“욕실 두 개예. 안방 욕실 쓰세요.”

욕실이 두 개……. 신기했다. 왜 집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을까? 건율의 원룸 화장실은 좁아서, 샤워만 해도 문틈으로 물이 샜다. 그래서 매번 씻은 뒤 흘러내린 바닥을 닦아야 했다.

“나 옷… 빌려줄 수 있어?”

“아, 네.”

최무정의 태도가 취해서인지, 아니면 기분이 나빠서인지 알 수 없었다. 딱딱한 모습에 건율은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해서 녀석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최무정은 옷장에서 하얀 셔츠 하나를 꺼내 툭, 내밀었다. 건율은 눈을 깜빡이다가 ‘바지는?’ 하고 물었다.

“선배한테 제 바지 안 맞을 거 같은데요. 그거 기니까 그거만 입으세요.”

“아……. 이것만?”

“그럼, 나가서 사 와요? 이 시간에 옷가게 열린 데가 있겠어요?”

건율은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욕실로 건율을 떠밀었다. 건율은 편의점에서 속옷이라도 사 올걸, 하는 생각을 하며 떠밀리듯 들어섰다.

욕실은 크고 호화로웠다. 안방에 딸린 욕실이라더니, 건율의 본가에도 없는 큰 욕조가 있었다. 욕조 한편에는 샤워 용품 여러 개가 새것처럼 반듯하게 진열돼 있었다. 비싼 호텔에 오면 이런 기분일까?

건율은 습관대로 빠르게 씻었다. 처음 보는 용품들이 많아 조금 헤매긴 했으나 샴푸와 바디 워시만 찾아서 쓰고, 다시 예쁘게 각을 맞춰 진열했다.

최무정이 준 셔츠 한 장만 걸치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속옷도 입지 않아서인지 아래가 허했다. 알몸으로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셔츠가 꽤 컸다. 최무정이 입던 것인지 옷에선 녀석의 냄새가 났다. 덩치가 큰 놈답게 셔츠는 허벅지 반까지 내려와 있고, 소매는 손등을 완전히 덮고도 남았다. 건율은 소매를 세네 번을 접어 올리려다가, 주름이라도 질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건율은 결국 하얀 수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꽤 큼지막해 허리에 두르고도 남았다. 한 바퀴 둘러 어찌 저찌 잘 고정시켰으나 아슬아슬했다.

그래도 뭐, 잠깐만 버티면 될 테니 괜찮지 않을까.

욕실을 나오자 생각 외로 따뜻했다. 씻고 나오면 항상 추위에 벌벌 떨던 건율은 온기가 가득한 안방을 슬쩍 둘러보았다. 침대는 세 명이 누워도 될 만큼 컸고, 정면에는 벽걸이 티비가 있었다. 게다가 신기한 점은 건율이 안방에 들어섰을 때 자동으로 전등이 켜진 것이었다.

건율은 주춤거리다 거실로 나가 소파 끄트머리에 얌전히 앉았다. 소파에 놓인 제 가방이 허름해 왠지 부끄러웠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최무정이 하체만 수건으로 가린 채로 나왔다. 건율은 움찔, 놀랐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오늘따라, 아니, 아까 술자리로 이동하면서부터 최무정을 평소처럼 대하기 힘들었다. 웃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문 최무정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골목길에서 봤던 그 남자가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빨리 나오셨네요. 머리는 안 말리셨어요?”

“어, 아, …으응.”

가까이 다가온 최무정이 건율의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러뜨렸다. 물기가 가시고 살짝 젖은 머리카락은 조금 찼다.

“손님방 있으니까, 거기서 주무세요.”

“응, 어디야?”

“저기.”

최무정이 어떤 방을 가리켰다. 건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장실이 어디인지도 알려 주고, 다른 방은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다. 건율은 고개만 계속 흔들었다. 그러자 최무정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건율의 옆자리에 앉았다. 소파가 꽤 길고 넓었는데도 굳이 딱 붙는다.

“영화 한 편 보실래요?”

“…안 피곤해?”

“내일 공강이잖아요. 좀 늦게 자도 되니까.”

“으응.”

건율은 방으로 들어가 공부를 마저 할 생각이었으나 분위기 잡는 최무정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거절할걸, 싶으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건율은 수건으로 돌돌 감싼 다리를 좁히고, 셔츠가 구겨지지 않도록 몇 번을 고쳐 앉았다.

“뭐 보실래요.”

“너 보고 싶은 거…. 난 다 좋아.”

“그래요?”

최무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리모컨을 들고, 한 손으론 건율의 허리를 감쌌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건율이 화들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최무정의 손을 세차게 쳐 냈다.

“아…….”

손을 쳐 내는 소리가 공기를 째지며 크게 울렸다. 잠깐 닿았던 뜨뜻한 사람의 체온에 허리가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제야 건율은 실수했다 싶어 제 손을 감쌌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며 고개를 들자 최무정이 눈썹 한쪽을 비뚜름하게 들어 올리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미, 미안. 놀라서…….”

최무정이 다시 표정을 풀며 허리를 감싸 왔다. 자연스러운 태도에 건율은 어쩔 줄 몰랐다. 왜, 이러는 거지? 진득하게 달라붙는 게 부담스럽고, 이상했다. 최무정은 감싼 한 손으로 갈비뼈부터 엉덩이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건율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나 간지러….”

“음, 이 영화 어때요?”

“괜, 찮은데 나 간지러워, 무정아.”

익숙하게 건율의 말을 무시한 최무정이 갈비뼈를 더듬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손이 건율의 허벅지 위에 놓였다. 커다란 손은 건율의 허벅지를 가리고도 남았다. 저도 모르게 다리를 모은 건율은 최무정을 힐끔거렸다.

“너 혹시, 취했어?”

“네.”

똑 부러진 대답에 탄식이 나왔다. 취한 모습이 이렇게 반듯할 수 있는 게 충격이다. 건율은 또다시 물어야 했다. 혹시 저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나 누군지 알아?”

“건율 선배요.”

취하면 스킨십이 느는 편인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만지는 건 그냥 술버릇이 아닌 것 같은데…….

건율은 울상을 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 당장 최무정이 기분 나쁘다며 쫓아내면 갈 곳이 없다.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갈 돈도 없었고, 지금까지 도와준 녀석에게 짜증을 내기도 미안했다.

커다란 손은 아무렇지 않게 수건을 들춰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번엔 정말, 너무 놀라 건율이 펄쩍 몸을 일으키자 무정이 다시 허리를 감아 억지로 앉혔다. 건율이 남성 평균은 되는 몸임에도 그는 아주 가볍게 한 손으로 제압했다.

“뭐 하는 거야!”

“추워서요.”

“이거 놔……. 아익, 진짜!”

고분고분하던 건율이 이리저리 펄떡이든 말든, 최무정은 수건 아래로 건율의 허벅지를 콱 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움직여 안쪽, 말랑거리는 허벅지를 더듬었다. 건율은 결국 최무정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아 들어 올렸다.

“뭐예요.”

간지러우니 하지 마, 라고 화를 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최무정이 선수를 쳤다. 따질 생각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녀석은 리모컨을 든 채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장난질 같은 게 아니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골목길, 그날 보았던 옆모습과 똑같았다. 그간 부정해 온 것이 우습게도 그랬다.

“뭐냐고, 물었잖아요?”

입술이 바싹 말랐다.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건율은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간지럽다고 했잖아.”

조심스럽게 답하자 최무정이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형 허벅지도 못 만져요?”

건율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최무정을 올려다보았다. 내내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녀석은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 무서웠다. 이정우를 때린 게 녀석이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녀석이 제 손을 잡아 부술 것만 같았다.

“너 많이 취했어. 나 이런 거 싫어해.”

“이런 거?”

“만지는 거 싫어.”

“싫어?”

“…어, 싫어. 나 영화 안 보고 그냥 들어갈래.”

천천히 고개를 돌린 최무정은 눈을 내리깔아 건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은 같았는데, 눈동자가 서늘하고도 뜨거웠다. 차가운데, 무섭도록 불타는…… 꼭 드라이아이스 같았다.

“들어갈래?”

“어, 어. 들어가서 잘래.”

“잘래?”

“…너 왜 자꾸 말끝…을 따라해?”

최무정의 어법이 이상하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건율은 몸을 뒤로 물리며 물었다. 그러자 최무정은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팔로 건율을 가두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건율의 두 다리를 제 다리 사이에 끼워 고정시켰다.

“뭐, 하는 거야?”

“있잖아요, 선배.”

“으, 응.”

술에 취하면 본 모습이 나온다 했다. 어쩌면 이게 최무정의 진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자 어깨가 바싹 굳었다. 골목길에서 제가 본 건 역시 최무정이었던 걸까? 멀리서, 흐릿하게 봐서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결국 녀석이 맞았던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얽혀 들었다.

“선배가 재워 달라고 했잖아요?”

“…어, 오늘만…. 어, 어쩔 수 없잖아.”

“누가 애인한테 그냥 재워 달라고 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건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최무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머릿속에 어떤 것도 입력되지 못했다. 애인? 그냥 재워 달라고…?

마치 글자 하나를 오래토록 보고 있다가, 알던 글자도 이상하게 인식이 되지 않는 것처럼 최무정의 말도 그랬다. 문장을 듣긴 했으나 어절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가 무슨 뜻을 갖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건율의 눈가가 일그러지자 최무정이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자칫하면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같이 자요. 선배가 먼저 유혹했잖아.”

“너 진짜 이상해. 내가 언제 유, 유혹했어? 그런 적 없어.”

“다 알면서…….”

최무정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건율이 어깨를 붙잡았다. 살집 없이 뼈가 그대로 느껴지는 둥근 어깨부터, 견갑골까지 느긋하게 손을 흘러내렸다. 그 감각이 몹시 불쾌했다.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최무정의 탓일까, 어설프게 걸쳤던 수건이 풀려 허벅지 한쪽이 훤히 드러났다. 최무정은 묵직한 무게로 짓누르며 건율의 위를 차지했다. 답답함에 건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전에 카페 앞에서 겪었던 과호흡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너 지금 취해서 이상한 거 같아. 나 서건율이야. 너랑 과제하는 과 선배.”

“알아요, 서건율 선배. 내가 좋아하는 선배요.”

“그게 아니라, 너도 나도 남자라고. 이런, 이런 사이가 아니고.”

“이런 사이?”

“마, 만지지 말라니까.”

반대편 손이 건율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평소 같으면 그저 친밀감의 스킨십이라 볼 수 있던 것이, 묘하게 음탕한 손짓으로 느껴졌다. 건율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어떻게 녀석을 어르고 달래야 할 지 몰랐다.

“너 지금 이상해. 아침에 일어나면 후회할 거야.”

“후회해요?”

“그니까, 좀…. 으!”

결국, 건율은 눈을 꼭 감고 최무정의 손을 세차게 밀어내며 도망쳤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최무정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구르듯 바닥 카펫에 엎어졌다. 그 순간 등 뒤에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목덜미가 시려울 정도로 최무정의 눈빛이 느껴졌다. 건율은 그에게 뒤를 보이며 엉금엉금 기어 도망쳤다.

“선배, 튕기는 거 귀엽네요.”

최무정이 실소를 터트렸다. 건율은 그 상태로 고개를 돌려 최무정을 올려다 보았다. 흰 셔츠 하나를 입고,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둔부를 보인 채로 올려다보는 건율은 자극적이다 못해 음탕해 보였다. 최무정의 눈에는 그랬다. 검붉은 카펫 위를 질질 기어가며 하얀 살결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셔츠에 웃음이 나왔다.

바닥에 흘러내린 수건, 접지 못한 소매가 흘러내려 손등을 다 가리고, 제 셔츠 한 장만 입은 건율이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동그란 엉덩이가 아주 살짝 보였다.

“선배, 이런 취향이구나…. 내가 다 알아도, 성 취향은 몰라서 궁금했거든요.”

“무슨, 무슨 소리야.”

“나 선배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알아요. 선배가 좋아하는 음식, 디저트, 음악, 자주 입는 옷….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지도.”

“너, 너, 많이 취한 거 같은데 빨리 들어가서 자.”

“내가 왜 모르겠어요. 선배를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건율은 혼란스러웠다. 최무정은 셔츠 자락 틈새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지금 그의 상태가 평상시와 같지 않고, 분명 그는 이 일을 내일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제가 도망쳐야 했음에도 몸이 굳어 다리가 벌벌 떨렸다.

건율은 셔츠 밑단을 당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건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가까이 갔다간 최무정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손님방이라던 곳으로 도망칠까? …어디였더라? 오른쪽? 저기가 화장실이었나? 아니지, 화장실은 부엌 옆인데…. 어느 방, 어느 방이었더라.

건율이 다급히 시선을 굴리는 동안 최무정은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햇살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어도 녀석이 웃으면 멀리서도 보일 만큼 해맑은 미소였다. 어떠한 음심도, 악의도 없는 순수한 얼굴.

“난 선배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도와주고 싶었거든요.”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 …너 지금 이상해.”

“근데 선배가… 자꾸, 딴 사람 보니까 힘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냥, 선배 행복한 게 좋으니까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건율은 한쪽 무릎을 꿇고 뛸 준비를 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푹 젖은 최무정은 건율의 움직임에도 회상하듯 입꼬리를 올리고 서 있었다.

“나한테 기회가 올 줄 몰랐어요. 그래도 선배가 무서워 할까 봐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그걸 본 거야, 선배가.”

“뭘, 뭘.”

“나 무섭다고 도망갈까 봐 어쩔 수 없었는데…. 이렇게 선배랑 이어질 줄 몰랐어요.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게 될 줄 몰랐어요, 진짜로.”

미친 새끼,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진짜.

건율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두려움에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보같이 울고 싶진 않았다.

그때 건율이 주먹을 쥐었다. 최무정이 몸을 돌려 소파 옆, 진열대로 걸어가는 순간이었다. 건율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후들후들 떨려 오는 허벅지를 붙잡고 눈에 보이는 아무 방이나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잠갔다.

건율의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방 안의 빨간 조명 탓이었다. 게다가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건율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침이 되면 괜찮을 거다. 필름이 끊겼든, 끊기지 않았든, 녀석은 평소대로 돌아올 것이다. 술버릇이 원래 그렇다고, 자신이 잠깐 미쳤다고 사과를 하거나….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이왕이면 후자를 바랐다. 실기 고사를 위해 적어도 두어 번은 더 만나야 했고, 또 그게 끝난다 해도 모든 강의가 겹쳐있으니 그를 피할 곳은 없었다. 건율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틀어쥐고 주저앉았다.

“아…. 선배,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거예요?”

문밖으로 탄식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아직도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건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에 매달렸다. 문을 가구로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당장의 상황이 무서워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이정우의 손을 쥐고, 우드득 소리가 나도록 세게 짓눌러 뼈를 아작 내던 장면이. 건율은 패닉에 최무정과 이정우에게 폭력을 가하던 가해자를 한데 뭉쳐 놓았다. 그러다가도 다른 범인이 있다고, 며칠 동안 설득당했던 것이 몇 번이고 떠올라 혼란만 가중시켰다.

건율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돈 한 푼 없는 집에서 음대에 진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거듭했던가. 내신 성적이 부족해 실기에만 몰두했었다. 그러니 손만은, 손만은 안 된다. 차라리 다리가 부러지는 게 나았다. 평생 휠체어를 탄다 해도 피아노는 칠 수 있을 테니까.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건율은 문고리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

“나 오늘 선배가… 재워 달래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아요?”

덜컥, 덜컥. 최무정이 다른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 쿵, 쿵. 너무 뛰어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선배를 위해 예전부터 많이 준비해 놓긴 했거든요. 그래도 첫날밤이니까…. 천천히, 예쁘게 다뤄 주려고, 술자리 내내 집중을 못 했다구요. …내가 차에서도 얼마나 떨렸는지 알아요? 난 선배가 먼저 그럴 줄 몰랐거든요. 손부터 잡고, 하나하나… 하려고 했어요. 근데 선배가 먼저 재워 달라고 해서, 선배가 생각보다 빠르게 나가는 걸 좋아한다는 거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더 이상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문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임 없이 정적으로, 최무정은 문 너머의 건율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은 하고 싶다고… 그랬지만요. 정말 그렇게 해 줄 줄은 몰랐어요.”

건율은 간절히 빌었다. 녀석이 이 방문의 열쇠를 잃어버리기라도 해서, 못 들어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짤랑이는 열쇠 꾸러미 소리가 선명하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왜 날 피해요. 부끄러워서요?”

쾅!

문이 크게 흔들리며 폭발하듯 굉음이 터졌다. 건율은 벌벌 떨면서 귀를 틀어막았다. 문짝이 부서지진 않았나 싶어 힐끔거렸으나 문은 단단했다. 정작 장본인은 문을 손끝으로 몇 번이고 두드리더니…. 최무정이 한숨을 흘리며 다시 잠잠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해해 볼게요. 선배가 쑥스러움이 많은 거라고.”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진짜 뇌가 돌아 버렸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그래서 술만 처마시면 앞뒤 자르고 지 꼴리는 대로 움직이는 걸까?

건율은 확신했다. 최무정이 하는 말은 죄다 개소리고, 그냥 꼴려서 그런 거라고. 밥 먹듯이 원 나잇을 하는 놈들이 있지 않은가. 최무정을 따먹으려 하는 여자들은 아마 줄을 설 것이다.

“나 사실 선배가 도망가서 조금 화났는데. 근데, 그래도 쑥스러운 거라고 생각하니까 좀 귀엽고 그런 거 같아요.”

또라이 새끼.

살면서 욕설이라곤 힘들 때만, 아주 가끔 뱉기만 했던 건율은 오늘 평생치를 다 읊조리고 있었다. 건율은 입술을 꾹 다물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끝이 바보같이 벌벌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도망쳐야 하지.

“그니까 이번 것도 내가 참을게요. 선배 잘못이지만요.”

그리고 철컥,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에 건율의 뺨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 인생을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건율은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바닥을 짚었다.

“선배가 열어요.”

기회를 주듯 다정한 목소리에 손이 움찔거렸다. 어떻게 하는 게 더 나은 길인지, 알 수 없었다. 팔다리가 지나치게 경련해 온몸이 저려 왔다.

“선배가 열면, 용서해 줄게요.”

숨어야 해. 숨으면, 들키면? 그러면, ……아니야, 숨어야 해.

건율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잠시라도 시간을 걸기 위해 문을 다시 잠그고, 급히 몸을 돌려 어디든 몸을 숨기려는 순간.

“허, 흐……. 헉.”

숨이 턱하고 막혔다. 피처럼 새빨간 조명이 직선으로 얼굴에 쏟아졌다.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아려 왔다.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캄캄한 방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부에는 수많은 사진이 있었다. 개수를 세어 보기도 힘들 만큼, 많은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고 기다란 줄에는 현상을 끝낸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건율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익숙한 얼굴이 머릿속에 하나둘 들어왔다. 벌어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기이했다. 사진 속에는 전부 제가 있었는데, 꼭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등줄기에 날카로운 칼바람이 이는 듯했다. 건율은 문에서 떨어진 줄도 모르고 휘청거리며 손을 뻗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끝을 다시 한번 스치며 너머에 수많은 서건율이 최무정의 방에 박제되어 있음을 알렸다.

“어, 지금 봤어요? 어때요?”

문 너머, 웃음기 담긴 목소리엔 희미한 환희가 곁들어 있었다. 잠겨 있지도 않았던 방은 마치 보여 주고 싶었던 듯, 바깥쪽에 위치해 있었다. 건율의 기억에는 그랬다.

“깜짝 선물.”

결국, 최무정은 스스로 문을 열어, 나긋나긋하게 다가가 건율을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온몸을 꽉 끌어안는 무게가 익숙했다. 짤랑, 열쇠 더미가 가볍게 흔들린다.

건율은 눈꺼풀을 잘게 떨며 기다란 줄에 촘촘히 걸려 있는 사진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익숙한 것도, 낯선 것도 있었다. 모두 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네모난 컷 안의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제 옆모습이 저랬던가. 뒷모습은, 공부를 하는 모습은, 자는 것은…… 저러했던가. 

언제부터 찍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군복을 입은 사진, 교복을 입은 사진까지 커다랗게 인화된 것도 있었다.

“술자리에 가는 순간부터, 내내 미치는 줄 알았어요. 너무 설레서 울 거 같은데, 근데, 근데 그거 말고 또… 집에 올 때까지 선배가 나 건드릴까 봐, 그럼 나 못 참을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새빨간 조명이 사진을 비췄다. 학교에서, 연습실에서, 병원에서, 집에서, 길거리에서. 건율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상의 모습들이 그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 이곳저곳에 수없이 붙어있는 사진들은 깨끗하고 투명한 필름지에 한 번 둘러져 있었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끌어안으며 건율을 뒤로 넘어트렸다. 건율은 힘없이 쓰러져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여기, 제 작업실이에요. 현상하는 곳인데 선배 사진만, 선배만 하는 곳이요. ……아! 제가 선배 말고는 안 찍긴 해요.”

최무정이 잔뜩 기대감이 찬 음성으로 건율의 뺨에 입을 맞췄다. 촉, 촉, 촉.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고 말랑한 볼 살을 혀로 핥았다. 뭉근한 살덩어리가 천천히 귓가에 닿았다.

최무정은 건율의 귓가를 잘근잘근 씹고, 핥으며 건율을 맛보기라도 하듯 침을 삼켰다. 그 사이 건율은 그저 하염없이 네모난 것들을 보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방에, 네모나고 각진 사진들과 수없이 많은 자신이 있었다.

방의 중앙에는 커다란 그랜드피아노가 웅장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붉은 조명이 둘을 비췄다. 최무정의 한쪽 뺨에는 음험한 그림자가 졌다. 노랗고 파란, 맑은 사진 위로 어둡고 붉은빛이 내리쬔다. 마치 죽기 직전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건율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다양한 색으로 얼룩진 그림 위에 하얀 페인트를 부어 버린 것처럼.

왜 최무정의 집에 이런 게 있는지, 최무정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뇌의 신경조직이 모두 분쇄되어 버린 것처럼 건율은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미안해요, 내가 아까는 너무 쌀쌀맞았죠.”

최무정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숨을 크게 몰아쉬며 건율의 셔츠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빼꼼 튀어나온 쇄골 부근에 입술을 대고 깊게 건율의 향을 들이마셨다. 고귀한 향초를 만지는 것처럼, 닿을 때마다 화상에 입은 듯 뜨거운 손이 팔 갗을 간질였다.

“너무 긴장돼서……. 선배 얼굴 보면, 참지 못할까 봐…….”

작은 죄책감, 혹은 책임감이 서린 목소리가 뒤로 넘어간다. 건율은 년도 별로 정리된 커다란 앨범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두툼하고 큰 저 앨범에도 자신이 있을까.

어디를 보아도, 서건율이 있었다. 건율이 모르는 서건율이었다.

“아까도…… 너무, 막, 그럴까 봐 영화 보자고 한 건데.”

최무정은 달콤하게 속삭이며 건율을 끌어안았다. 빠르고 크게 뛰는 그의 심장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흉흉하게 부풀어 오른 아래의 것과 달리 녀석은 연인을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한 것처럼 말갛게 웃었다.

“근데 선배가 그런 꼴로 앉아 있으니까 손이 가잖아요. ……난 분명 참고 싶었는데, 너무 예민하게 굴고.”

그는 건율을 겨냥하듯 눈을 힐긋거렸다. 건율은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최무정이 톡, 건드리며 작게 웃었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각종 도구들이 늘어져 있고, 날카로운 칼 하나가 반듯하게 연필꽂이에 꽂혀 있었다. 테이블 옆에는 깊고 큰 사각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계속 거슬리게 하던 시큼한 화학품 냄새가 그곳에서 나는 듯했다.

직접 현상한 사진 한 장에서 때마침 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그 소리는 잔잔하고 파괴적이었다.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듯한 소음이 일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뒤에서 덮쳐 왔던 낯선 남자의 감촉이, 골목길에서 이정우의 손에 코를 묻던 모습이, 그리고 어둑한 밤길 을씨년스레 찾아온 최무정의 도움이.

갈기갈기 찢어진 사진이 꿰맞춰지듯 하나의 그림을 어설프게 완성해 나갔다. 건율은 그게 맞는지 틀린지 알 방법이 없었다. 잘못 맞춰 괴상해진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최무정이에요. 형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이질적이다. 이것이 꿈이 아닌가 싶을 만치, 현실성 없는 배경과 상황이 한 번에 건율을 들이닥쳤다. 그래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자신을 그토록 끔찍한 고통에 밀어 넣은 사람이, 눈앞의 최무정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건율은 잘게 경련하는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장소만 다를 뿐이다. 골목길과 녀석의 집. 최무정은 이정우에게 하듯 제 손도 으스러트릴까? 한 손에 쥐고, 싸구려 캔을 구기듯 망가트릴까?

소름이 확 돋았다. 손이 망가진 서건율.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서건율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버텨 온 시간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건율은 새파래진 얼굴로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공포, 혹은 불안. 건율은 폭풍이 치는 절벽에 올라선 것만 같았다. 바람의 숨결 한 번에 절벽 아래로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함이었다.

“형, 건율 형. 내가 얼마나 형을, 선배를, 사랑하는지 모를 거예요.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몰라요. 난 선배 없으면 죽을 거예요. 얼마나 오래, 내가 사랑했는데…….”

흩뿌려지는 음성이 유리 조각처럼 잘게 부수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조각들이 온몸에 파고든 것처럼 살갗이 아려 왔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그거 모르죠. 선배 여기에 점 있는 거.”

널브러진 어깨 아래로, 두꺼운 손이 어딘가를 쿡 찔러 왔다. 팔뚝 아래쪽 은밀히 숨어 있는 작은 점 위로 최무정이 입을 맞췄다.

“아마 아무도 모르겠죠.”

큼지막한 손이 매끄럽게 흘러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툭, 툭, 툭. 벌어지는 셔츠 안쪽으로 백지장처럼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시체처럼 허옇고 마른 몸을 단단한 손가락이 더듬었다.

“제 손에 불이 붙는 것 같아요.”

초점을 잃은 최무정의 얼굴이 옅은 환희에 차 있다. 보름을 갓 지난 달빛과도 같았다. 건율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축 늘어진 채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결국, 골목의 남자는 최무정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놈은 제 사진을 찍고, 수없이 문자와 전화를 하고 결국엔 집에 들이닥쳐 추행을 일삼은 사람이었다. 스토커에게, 스토커로부터 지켜 달라 했으니 얼마나 우스웠을까.

“내가 처음 만지죠, 이거.”

쇄골부터 가슴 중앙, 그리고 배꼽까지 천천히 손가락을 그은 최무정이 발갛게 물든 뺨을 올리며 물었다. 그는 잠시 아, 하고는 ‘첫날밤은 침대에서 하려고 했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첫사랑, 첫 관계를 갖는 순진한 소년처럼 최무정이 대답을 독촉했다.

“네? 말해 줘요. 내가 처음이죠, 선배.”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건율은 두어 번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은 있었으나 모두 짧은 관계였고, 입을 맞춰 본 것이 다였다. 그 후로는 군대에 갔으니 최무정의 말이 맞았다.

“왜 대답을 안 해 줘…….”

최무정이 작게 투덜거렸다. 건율은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말이 옳다는 것만 알았다.

“먼저 꼬셔 놓구, 참으려고 했는데도 자꾸 유혹해 놓구.”

최무정은 툴툴거리며 병풍처럼 늘어진 하얀 셔츠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허벅지까지 닿았던 최무정의 셔츠 탓에 건율은 제 몸에서 녀석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최무정의 집에 와, 그와 같은 향의 샴푸와 옷을 걸친 건율은 제가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저 또한 최무정의 공간 안에서 그의 계획 안에 있던 것이다.

환청처럼 최무정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벌어진 셔츠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섰다. 그제야 머릿속에 가늘고 날카로운 빛이 새어 들어왔다. 지금, 이게 무슨.

건율은 급히 손으로 최무정의 어깨를 꾹, 밀어냈다.

“…자, 잠깐만.”

“응? 왜요?”

“……너, 네가….”

아주 작은 찬바람이 일었음에도, 금이 간 유리는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 건율은 몸을 움츠리며 급히 셔츠를 당겨 몸을 가렸다.

“제가?”

“너…… 스토커가, 너야?”

얼빠진 질문에 최무정이 건율의 위에 앉은 채로 눈을 깜빡, 깜빡 했다. 그러곤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가를 꾹 누르며 양 입술에 힘을 주었다.

“스토커요?”

그는 미처 추스르지 못한 셔츠 안쪽을 힐끔거리며 내내 미소를 감추질 못했다. 꼭 귀여운 동물을 보듯, 두 손을 쥐었다 피더니 결국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알면서 왜 물어요.”

“맞, 다는 거지?”

“그럼 이 사진들은 어디서 났겠어요. 왜 머리 안 좋은 거 티내고 그래.”

최무정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건율은 다시 좁혀진 간격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내내 자신을 다독이기 바빴다. 괜찮아, 나쁜 애는 아니야, 괜찮아. 아프다고 챙겨 주고, 과제도 먼저 나서서 하고,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했잖아. 나한테 그러지 않을 거야. 조금만, 맞춰 주면….

“이정우.”

“…….”

문득 최무정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최무정은 눈이 동그래진 건율의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눈을 맞췄다.

“걔, 그렇게 된 거 선배 때문이에요.”

건율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선배가 자꾸 받아 줬잖아요. ……맞아, 그리고 손은 왜 잡아요? 걔 꼬시는 중이었어요?”

“무, 슨… 말이야.”

“자꾸 거슬리게 들러붙는데 그걸 왜 가만히 둬서……. 시발, 사내새끼라 말도 쳐 안 듣는데.”

문득 이정우의 손에 고개를 묻고 몇 초간 가만히 있던 남자, 아니, 최무정이 떠올랐다. 감흥 없이 이정우를 두들겨 패던 최무정이 그 순간만큼은 감정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으스러뜨렸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랬다고, 건율은 생각했다.

“이제 더 물을 거 없죠?”

“아니, 아니.”

“그럼 뭐가 또 궁금해요?”

최무정은 눈썹 한쪽을 비뚜름하게 올리며 건율이 싸매고 있던 셔츠를 아래로 내렸다. 순식간에 둥글고 각진 어깨가 드러났다. 뼈밖에 없는 듯한 마른 어깨의 끝이 과일처럼 불그스름했다. 건율은 흰 어깨를 잔뜩 굽히고 목을 움츠린 채 최무정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최무정이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왜 긴장해요?”

“무, 무정아. 이러지 말고, 너 술 깨고…. 내일,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오늘은 안 돼요. 선배 부탁이면 다 들어주고 싶지만, 오늘은 아닌데.”

건율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양 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 상황에서 도망칠 방법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시로 번호를 바꿔 연락하고, 집까지 쫓아오던 스토커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눈앞의 무서운 후배를 피하는 것도 그랬다.

뜸을 들이자 최무정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한 손으로 옴폭 파인 건율의 배를 짓눌러 바닥으로 밀쳤다. 다시 일어나려는 움직임은 단번에 제압되었다. 맨다리가 녀석의 허리를 스침과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최무정은 눈을 휘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조금 아픈 거 좋아해요?”

“아니, 아니야.”

“나 급한데, 자꾸 이러잖아.”

순식간에 양팔이 붙잡혔다. 건율은 무슨 상황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힘껏 반항했다. 하나 그럴수록 최무정은 거칠게 건율의 사지를 제압했다.

“윽!”

“아파요?”

셔츠의 양 소매를 뒤로 꺾은 녀석이 그 끝을 억세게 묶었다. 어떻게 묶었는지 발버둥을 칠수록 손목이 죄여 왔다. 식은땀이 났다. 건율은 호흡을 빠르게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최무정은 건율의 엉덩이 아래에 자리를 잡고, 마른 발목을 쥐어 양옆으로 벌렸다. 심히 적나라한 자세였다. 그는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며 건율의 나신을 천천히 훑었다. 가늘게 뜬 눈은 뱀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단출하게 입은 채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던 건율은 성의 ‘ㅅ’자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눈을 내리깔고 연주에 집중할 때는 손만 대면 깨지는 유리병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스러움의 집합체와도 같았다. 한없이 깨끗하고, 고결한 성체. 최무정은 저처럼 더러운 것이 손댈 이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무엇도 그를 더럽힐 수 없다 느꼈다.

최무정은 건율을 보며 가슴이 빠듯해 숨을 빠르게 뱉어야 했다.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 금욕적이며 성스러워 보이던 피아노 단상 위의 남자가 제 아래에서 연약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매끄러운 살갗을 드러내고, 다리를 벌려 모든 것을 제게 보이고 있었다.

그 감각은 끝도 없이 격양되었고, 건율의 싫다는 말도 들리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아니, 그의 말이 들리지 않기 시작한 건 아마 꽤 되었을지도 모른다.

“건율 형, 형…. 건율 형.”

“하, 하지 마. 하지 마…!”

“아…….”

건율은 힘껏 발버둥을 쳤다. 이를 악물고 다리를 휘두르기도 하고, 배를 거칠게 밀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최무정은 밀려났다가도 다시 돌아와 멍한 얼굴로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최무정의 미소는 탐욕스러웠다. 욕심에 눈이 멀어 인간의 이성을 잃은 짐승의 눈이었다.

“싫, 싫어! 하지 마, 하지 마!”

최무정은 밀려나지 않고 건율의 허리 아랫단을 잡아 제게로 당겼다. 그러곤 심장께에 뺨을 대고 박동 소리를 들었다. 살아 있는 서건율이다. 서건율이 살아 있는 채로 제 손안에 있었다. 흰 살결을 모두 드러내고 제게 다리를 벌리러 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음란하게 뒤를 내보이며 이제는 저와 하나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최무정은 건율을 찾는 사이 어깨에 걸쳤던 목욕 가운을 뒤로 젖혔다. 짙은 색으로 물든 피부는 구리처럼 어둑했다. 단단하고 거칠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쇳덩어리.

“흑!”

짐승처럼 커다란 손이 복숭아뼈를 잡고, 입을 벌려 과일을 삼키듯 깨물었다. 그리고 억지로 벌어져 훤히 드러난 성기와 구멍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건율은 두려움에 저절로 입이 벌었다. 사지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고, 저를 강제로 취하려 드는 놈이 꺼낸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크기였다.

순간 섬뜩함에 소름이 돋았다. 뇌세포가 모두 망가져 멈춘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최무정의 성기는 괴물의 것처럼 크고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고, 곧게 위로 뻗다 그 끝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이거… 여기까지 들어가겠죠.”

최무정은 터질 듯한 성기를 건율의 배에 올려놓았다. 위로 살짝 휜 곧고 굵은 물건은 조금 과장해서 생수통만 했다. 귀두가 툭툭, 배꼽 위를 칠 때마다 끈적한 쿠퍼액이 길게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축, 츄웁, 가느다란 실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끄, 흐읍, 하, 하지 마, 싫, 싫어…….”

불안함을 넘어선 공포와 두려움이 건율을 질식시켰다. 건율은 흐느끼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싫어, 시, 싫어. 무, 무정아. 하지, 하지 마.”

“시발, 빨리 넣고 싶은데….”

최무정은 성내듯 이를 갈며 제 것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핏줄이 잔뜩 불거진 성기는 색이 짙고 묵직했다. 터질 듯이 발기한 것이 자꾸만 꺼떡거렸다.

“아…. 씨발.”

곧이어 희고 끈적한 액체가 위로 솟은 귀두 끝에서 흘러내렸다. 울컥대며 건율의 배 위로 쏟아진 정액은 미적지근하고 불쾌했다. 최무정은 제 정액을 손으로 쓸어, 건율의 사타구니에 쏟아 문질렀다. 그는 한계까지 벌어진 하얀 허벅지가 경련하는 것도 무시하고 정액을 바른 구멍에 검지를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다.

“으, 흐윽! 아, 아파!”

“어, 아파요?”

“아파, 싫어. 그만…. 그만해.”

“천천히 풀어 줄게요. 좀만 참아요, 응?”

몸을 비비적대며 다리를 좁히려 들자 최무정이 가볍게 건율의 엉덩이를 때렸다. 찰싹, 적나라한 소리에 건율의 얼굴이 또 울듯이 일그러졌다. 억지로 하는 주제에, 다정하게 구는 게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제가 알던 최무정의 얼굴이어서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술렁거렸다. 배신감도 분노도 아니었다. 무슨 감정인지 건율 또한 알지 못했다.

“흐, 아!”

입구만 간질이던 검지가 갑자기 구멍 안쪽으로 깊게 쳐들어왔다. 건율이 놀라 턱을 뒤로 젖히고, 팔다리를 간헐적으로 바들바들 떨어 댔다. 고작 검지 하나에 아랫배가 꽉 찬 듯 숨이 막혔다. 최무정은 놀란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손가락을 빼냈다.

“아, 흐윽, 아파, 아파! 싫, 하지… 말라, 고… 흑, 끅……!”

건율이 엉엉 울기 시작하자 그는 난감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실 것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흘러내린 정액을 입구로 쑤셔 넣었다.

“흐으, 흑, 아!”

가는 허리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래서야 성기를 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무정은 건율의 아래에 다시 검지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아, 프다, 고...!”

최무정은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집중하며 천천히 추삽질을 했다.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내부에 검지를 밀어 넣고, 손가락을 굽혀 뜨뜻하고 말랑한 속살을 벌렸다. 그러자 발간 내부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에 찰싹 달라붙은 붉은 내벽에 흰 정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점차 호흡이 거칠어졌다. 최무정은 그것을 보다 또 참지 못하고 제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신음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건율의 구멍에 귀두를 부비며 금세 절정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건율의 회음부와 구멍 위로 씨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 많이 아파요?”

“으, 흐으…. 끅, 씨, 흐으, 개새, 끼야……. 아흐!”

 “근데, 근데 여기는 막 달라붙고, 꾸물꾸물 하는데…… 야하게.”

건율은 입술을 마구잡이로 짓씹으며 도리질을 쳤다. 손가락을 밀어내려 힘을 줘도 최무정은 사정없이 내벽을 긁으며 이곳저곳을 쑤셔 댔다. 안쪽을 파헤치듯 연한 살갗을 강하게 헤집었다.

“아, 흑!”

천천히 해 주겠다는 말과 달리 녀석은 검지 하나로 몇 번을 쑤셔 대다가 손가락을 빼냈다. 몇 번이나 최무정의 정액과 쿠퍼액이 아래를 적셨으나 그로도 모자란 지 아래가 뻑뻑했다.

“건율 형.”

큼지막한 손이 벌어지며 건율의 가슴을 어거지로 움켜쥐었다. 살집이라곤 느껴지지도 않는 마른 몸을, 쥐어짜듯이 

거친 호흡과 함께 둥근 귀두가 아래에 닿았다. 어떤 쾌감도 느낄 수 없는, 퍽퍽하게 메마른 관계임에도 최무정은 잔뜩 숨을 몰아쉬었다.

“형, 형은 나 기억 안 나죠?”

건율은 말없이 최무정을 노려보았다. 그 짧은 사이 몇 번이고 눈물을 참고, 흘렸는지 눈가가 새빨갰다. 더 이상 최무정의 개소리를 귀에 담고 싶지 않았다. 저런 얼굴로 최무정은 저에게 끝없이 문자를 보내고, 더러운 말을 속삭이며 추행했다.

최무정은 흉측한 것을 천천히 밀어 비좁은 구멍을 억지로 열었다. 투둑, 하고 아래가 단번에 찢어졌다. 얼마 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난, 다 기억, …하는데.”

번들거리는 귀두는 음탕하게 젖은 구멍을 몇 번이고 문지르더니, 소리도 없이 한 번에 뚫고 들어왔다. 커다란 것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안쪽이 단숨에 수축하며 성기를 조여 왔다. 건율의 허리가 꺾이며 고개가 완전히 젖혀졌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너무, 너무 아파서 꺽꺽 성대가 마찰하며 짧은 숨소리만을 뱉었다.

“아, 너무…… 좁아요.”

몸 안에 거대한 괴물이 들어선 것만 같았다. 뻑뻑한 장벽을 열어 밀어 넣은 최무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제 입술을 짓이겼다. 뿌리까지 처박지도 못했는데 좁은 내벽이 움찔거리며 좆을 짓눌렀다.

“끄, 흐윽, 컥……. 흐, 흐흑, 헉, 아, 아으, 흑…….”

좁은 내벽을 억지로 뚫는 바람에 최무정의 것이 반도 들어가지 못했다. 건율은 꺽꺽거리며 어깨를 마구 비틀었다. 밀고 들어오는 굵직한 살덩어리에 숨이 막혔다. 묵직한 선단이 속살을 비집고 억지로 욱여 들어오는 감각에 배 안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두 다리는 넓게 벌어진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랫배에 진득한 압박감이 서렸다.

최무정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뒤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좆 기둥 탓에 아래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끄, 흐윽, 꺽……. 허윽, 흐, 헉…….”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어 앞이 보이질 않았다. 건율은 천장까지 꼼꼼히 붙어 있는 제 사진들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최무정, 스토커.

“흐으, 흑, 아, 아, 아! 아윽, 윽, 하으…….”

정말 이 둘이 같은 사람이었던가. 늘 제게 친절했던 최무정이, 어떠한 의사도 묻지 않고 막무가내로 굴던 스토커였다는 건 인지하고자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최무정에게 폭력과 같은 짓을 당하면서도 건율은 꿈이길 바라고 있었다. 건율은 멍청하고, 쓸데없는 병신, 바보였다.

최무정은 뱃가죽에 드러난 제 성기를 손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반밖에 넣지 못한 성기는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곧 터질 것 같았고, 퍼런 핏줄은 쿵쿵 박동을 해 대며 피와 정액, 쿠퍼액으로 질척이는 음부를 자극했다.

“아, 아으, 윽, 악! 아, 아파…. 흑, 아!”

홧홧할 정도의 뜨거운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버둥거리며 살려 달라고, 그만해 달라고 빌었지만 최무정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아니, 아예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짐승 같은 소리를 내었다.

“좋아요? 난, 너무 조이는데…. 형, 너무 좁아서.”

“흐, 아아, 아, 흐, 끅, 살려, 줘…….”

“아직 반도 안 들어갔는데, 쌀 거 같아요.”

건율은 꺽꺽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몸을 뒤로 물릴 때마다 최무정이 건율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럴 때마다 밀고 들어오는 굵직한 덩어리에 안쪽이 더부룩했다. 자꾸 움직이는 건율이 불편했는지, 최무정이 건율의 두 발목을 거칠게 잡아 제 어깨에 올렸다.

“죄송해요, 맘대로 잡아서…. 근데 형이 너무 움직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자연스레 엉덩이가 위로 들려 허리 아래가 허전했다. 최무정은 건율의 둔부를 붙잡고 제 성기에 맞춰 착실하게 밀어 넣었다. 건율이 엉엉 울다 탈진하고 말았을 때가 되어서야 최무정은 한숨을 내쉬며 턱을 들어 올렸다.

둔부 아래로 최무정의 고환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맨 다리를 넓게 벌리고 남성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제 모습은 끔찍하고, 추악해 보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허벅지가 벌벌 경련해댔다. 건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형, 따뜻해서 좋아요. 형도…… 내가 들어가서 좋죠…….”

답변을 필요치 않는 물음이 허공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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