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절연 (9/9)

2. 절연

상소의 내용은 이러했다.

「화비의 행동은 우아하나 가진 지식은 모두 겉핥기이고 그 성정이 차갑고 잔인하여 아랫사람을 감싸주지 않고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니 황후의 자격을 논하기 전에 그 마음을 가다듬고 순리에 맞는 몸가짐을 갖춰야 할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틀리지 않은 말에 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인 방현성은 조정 대신들을 돌대가리들이라 폄하했지만, 그래도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인재답게 사람 보는 눈들이 매우 탁월했다.

황자의 이름을 토납하여 토룡에게 고하자마자 황제는 기조를 황후로 올리기 위한 절차를 명령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한입을 모아 화비의 방자한 인품을 들먹이며 반대했다. 토납하고 돌아온 다음 날, 기어코 기조를 등에 업은 황제의 모습을 누가 발설한 모양이었다.

“…황궁 안에서 업혀 다니면 분명 문제가 될 거라 경고했는데.”

기조는 고개를 내저으며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현성이 고자질하듯 들고 온 상소문을 서탁 옆에 잘 말아놓은 뒤, 기조는 하던 일로 눈을 돌렸다.

기조의 앞에 놓인 화선지에는 까만 글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글씨는 아름답고 유려했으나 기조는 영 못마땅한 기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기조는 글을 읽을 수도 있고, 베껴 적을 수도 있었으나 새로운 글을 만들어내는 것엔 완전히 무지했다. 누가 시 한 소절이라도 적어달라 부탁한다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상태로 황후의 자리에 올라도 되는 것일까? 기조는 돌돌 말린 상소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신하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황제의 옆자리에서 보좌할 자격 따위 자신에겐 없을 것이다. 얕은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자신이 빈 수레인 것은 확실하니 요란한 것만은 피하는 게 보기 좋겠지.

* * *

“그래서 이자가 이리 무엄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기조는 눈앞에 엎드려 떠는 궁인을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있겠다고 결심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이 꼴이었다. 감히 자신에게 대드는 자들을 용서한 적이 없건만, 하극상을 저지르는 이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만만하게 보이는 걸까? 기조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황제의 화풀이 인형이라 불렸던 과거는 꽤 길게 그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던 노예가 그들의 상전이 된 게 그렇게나 고까운 것일까?

주기적으로 대드는 아랫것들을 처리하는 건 언제나 큰 고민이었다. 적절한 처벌의 수위를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리는 것 말고 무슨 벌을 줘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황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존재했다. 기조를 무시하는 사람과 무시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기조를 가까이 모시는 이들은 거의 그를 두려워했지만 불행히도 가끔씩 간 큰 자들이 튀어나왔다.

기조가 죄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고민에 빠지자 길어진 침묵에 겁먹은 궁인이 울고불고 애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앵앵거리는 목소리에 귀가 따갑고 짜증이 치솟았다. 저렇게 겁먹어 애원할 거면서 대체 왜 사달이 날 짓을 한단 말인가?

“치워라.”

우는 소리에 머리가 아파 짧게 명하자 순식간에 눈앞에서 죄인이 치워졌다. 눈앞에서 사라진 궁인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기조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련히 알아서 죽이거나, 옥에 가두거나, 궐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이전에 한 번 죄인을 죽여야 하냐고 물었을 때 궁인들이 기겁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어련히 죄상에 어울리는 처벌을 하겠지 싶었다.

“너무 심려치 마소서. 화비 마마.”

“안으로 어서 드시지요. 날이 쌀쌀합니다.”

기조는 건성으로 끄덕이며 안채로 들어갔다. 황후의 전각이나 다름없는 기조의 궁은 시중드는 이와 호위하는 이로 잔뜩 붐볐다. 황궁에 안주인이라 할만한 이가 기조 하나뿐이었으므로 궁인들은 대부분 성심을 다해 그를 모셨다. 하지만 그 많은 궁인들이 기조 한 명만을 모실 수는 없기에 많은 이들이 빈 궁을 지키며 청소를 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황제의 화풀이로 인해 시퍼런 멍을 온몸에 달고 다녔던 접객소의 노예가 상전이 되자 많은 이들이 혼란스러워했다. 황제의 동생이 황위에 오르고 천한 성노가 신황제의 유일한 비가 되었다.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태어난 아이가 누구의 씨인지 의심스러워하는 이가 태반이기도 했다.

황궁의 기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자격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조는 너그러이 이해하려 애썼다. 기실 상전이 된 그 자신도 무척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선황이 황궁을 뒤로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넘게 흘렀다. 각종 절기를 지낼 때마다 천하가 현성의 색과 기조(基調)로 물들어 갔다. 황제의 침전 또한 일부 개축되어 바뀌었으나 기조는 도무지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주기적으로 구타당했던 기억 때문에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날이 갈수록 폭력의 후유증이 뼈저리게 와 닿았다. 당장의 아픔은 그저 고통일 뿐이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바뀌는 것들은 영혼을 갉아먹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기조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궁인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마마. 무언가 걱정이 있으신지요? 안색이 좋지 않사옵니다.”

“아니다. 졸려서 그렇지.”

“폐하께서는 오늘 좀 늦으신다 하옵니다.”

“그래? 그럼 먼저 자는 게 좋겠구나.”

“예. 마마. 탕파를 준비하겠나이다.”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나는 궁인을 기조는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마마라는 호칭은 벌써 일 년을 넘게 들었는데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궁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마마라고 부를 때마다, 기조는 의뢰 때문에 화비의 가면을 뒤집어쓴 살수의 기분을 느꼈다. 끊이지 않는 호사를 누리고 있노라면 그 느낌은 더 강해졌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이 잠입이 끝나는 게 아닐까?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에 가슴이 섬뜩해진 일도 제법 있었다.

“익숙해져야 할 텐데.”

이 화려하고 장엄한 궁에 정을 붙이고 살아가야 할 터인데, 아무래도 이곳이 자신의 집처럼 여겨지질 않았다. 기조는 단청을 먹인 붉은 기둥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황궁이라는 장소는 집이라기보다 일을 하기 위해 온 장소 같아서, 언젠가는 훌쩍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면 모두 기뻐하겠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목이 바짝 말라왔다. 기조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직을 서고 있던 궁인들이 구름처럼 우르르 기조를 따라붙었다. 자색 비단 포에 감싸인 아이를 부드럽게 어르고 있던 유모는 갑작스런 상전의 등장에 조심스런 몸짓으로 예를 표했다.

“화비 마마를 뵙습니다.”

“아이는?”

“지금 막 배를 채우셨습니다. 어머. 마마님을 알아보고 웃으시네요.”

“으음….”

하얗고 통통한 뺨을 가진 아이가 새까만 눈을 반짝 빛내며 기조를 쳐다보았다. 손가락 하나도 다 쥐지 못할 정도로 작고 보드라운 손이 버둥거리는 모습에 기조는 아찔한 기분으로 아이를 받아 들었다. 통통하고 귀여운 몸이 기조의 품에 맞춘 듯이 안겨들었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아이의 손이 기조의 얼굴을 찌르며 이리저리 만지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기조는 따끈한 체온을 품에 안은 채 행복한 한숨을 느릿하니 내뱉었다.

“황족은 몇 살부터 글을 배우지?”

“보통 세 살 정도부터 공부를 시작하십니다.”

“세 살? 아직 조그말 때가 아니냐.”

“예. 하지만 황족이시니까요. 보통 귀족가의 아이들도 그쯤부터 공부를 시작합니다.”

유모는 걱정스러워하는 기조가 이해는 가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후가 감싸는 바람에 아이의 공부가 늦어져선 안 될 일이었다. 화비는 황족과 귀족의 교육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터이니 유모인 자신이라도 이런 것들을 잘 챙겨야 했다.

“이 년 뒤인가.”

“그렇게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시는 것은 아니옵고, 쉬운 글자부터 조금씩 눈에 익히실 것입니다.”

기조는 착잡한 기분으로 달덩이처럼 웃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낳을 때는 고통이 극심하여 현성을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품에 한 번 안자마자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핏덩이 같던 것이 이제는 제법 기어다니며 말썽도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지만 이 작은 것의 어깨 위에 황제의 책무를 올려야 한다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까르륵하는 아기의 웃음소리는 무해(無害)하기만 했다. 주먹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고사리 같은 손이 결국에는 붓과 칼을 휘두르며 권력을 움켜쥐게 될 것이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나중이 되면 이 아이가 자신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을까? 현성만 보아도 모후를 그다지 존경하거나 사랑하지는 않는 듯했다. 사가와 본인의 권력을 위해 자식들을 장기말로 사용하던 여자였으니 정이 안 갈 만도 했으나, 모후를 향한 현성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어쩌지. 그때까지 공부라도 해야 하나?”

아이가 뭔가를 물어봤을 때 대답할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기조는 아이를 유모에게 건네주며 공부할 결심을 굳혔다. 독학하는 것은 효율이 좋지 않으니 황제에게 사람을 몇 명 부탁하는 게 좋을 듯했다.

* * *

“글공부? 그건 관두는 게 좋지 않을까.”

기조는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현성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공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을 몇 명 불러줄 수 있겠냐는 부탁에 현성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까?”

“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예법을 몰라 행동거지가 이상한 것도 아닌데 뭐하러 공부를 더 하지? 내명부에 속한 자는 관직에 진출할 수 없다.”

기조는 조금 삐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니. 삐졌다.

완전히 삐져버린 기조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꼭 관직에 오르자고 공부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겉치레뿐인데, 황자가 장성한 뒤 경멸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겉치레뿐…이라.”

현성은 살짝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기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 많은 황족들 중 하필 율목친왕의 대역을 맡을 건 뭐냐 싶었다. 황족들도 세세하게 따지지 않는 고릿적 예법들을 알고라도 있는 것은 율목친왕뿐이었다.

어려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실 율목친왕도 그 고릿적 예법들을 따져가며 지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대역으로 왔던 기조에겐 꼭 지키라고 어깃장을 부린 모양이었다. 기조는 마음만 먹으면 완벽한 겉모습을 보여주었고 보는 이들의 얼굴을 완전히 질리게 했다. 그와 같은 예법을 겉보기에나 좋다고 폄하할 수 있는 건 기조뿐일 것이다.

“황자가 그대를 무시하면 짐이 매우 혼내주겠다.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할 필요는 없어.”

“폐하. 비빈을 더 들이실 건가요?”

갑작스런 날벼락에 현성이 펄쩍 뛰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가 노예 출신이고 배운 것이 없기에 내명부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으니, 안살림을 할만한 자를 더 들이시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해괴한 소리는 조정에서 듣는 것만으로 족하니!”

“그런 게 아니고서야 왜 그렇게 제가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십니까?”

“애초에 내명부의 기강이 엉망이라는 네 말이 이상하다!”

현재 내명부의 기강은 매우 좋았다.

기조가 율목친왕의 대역을 맡기 위해 익혔던 예의범절은 어지간한 황족보다 더 철저해서 걸어다니는 교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억나지 않는 절차가 있을 땐 의례궤범을 찾아보는 것보다 기조에게 묻는 것이 더 빨랐다. 그가 어쩌다 사람들 앞에 나설 때마다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그의 빈틈을 노렸으나 반대로 지적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황족과 조정 대신들이 한자리에 앉을 때의 자리 배치는 다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술이 돌 때의 순번에 관한 것이나 별자리, 계절에 따른 세세한 변형에 대해서도 예법에 박식한 자라면 어떻게든 맞춰낸다. 하지만 그렇게 술잔을 받았을 때의 손 모양이 제각기 달라야 하며, 몇 모금을 마셔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다는 것에 이르면 예부의 가장 깐깐한 관원조차 고개를 내젓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조에게 망신을 주려던 예부의 관원 두 명이 도리어 개망신을 당한 것이 작년 겨울. 설욕하고자 덤볐던 두 명이 아예 사직서를 내게 된 것이 올해 신년이었다. 그 뒤부터는 기조가 밥을 먹다가 춤을 춰도 뭔가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함부로 지적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화비의 교양 없음을 지탄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막상 기조를 눈앞에서 본 자들은 그 절도 있는 움직임에 압도되어 입이 굳었다. 물 흐르듯 막힘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식한 천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음인치고는 큰 키와 골격이 드러나는 마른 몸도 형제를 꼬여낸 요부라기보단 형제싸움에 휘말린 피해자 같은 인상을 주어 득이 되었다.

화전민 출신의 노예인데 행동거지가 완벽하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기이하고 무서운 일이었기에 기조를 모시는 궁인들은 점점 두려움에 지배되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깍듯하게 움직이고 사생활에선 하염없이 허술해지는 모습 또한 측근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화비가 노예일 때부터 그를 돌봐줬던 의관이 단칼에 죽었다는 것은 궁인들 사이에서 큰 비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궁의 분위기는 지극히 평온했다.

“한 달에 한 번은 무례하게 구는 이들이 나와 소란이 일어납니다. 경빈이나 희빈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 아닌지요?”

“정말로 엉망이었다면 그런 놈들이 너무 많아 처벌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조의 앞에 끌려 나와 쫓겨난 궁인은 기조에 대한 비방문을 적어 담벼락에 붙이려다 붙잡힌 자였다. 망을 봐주는 이조차 없어 들킨 것이니 호응하는 이가 많았다면 애초에 걸리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이는 기조에 대한 다른 궁인들의 충성심이 높다는 걸 뜻했다.

본래 옥좌에 욕심을 보이지 않던 친왕이 갑작스레 친형의 제위를 위협하여 물려받게 된 것은 선황의 성노였던 기조를 손에 넣기 위해서란 말이 있었다. 단 하나뿐인 황자의 모친이자 황제와 결착하고 각인한 화비를 찍어 내릴 수 있는 건 현재 어디에도 없었다. 비방문이라는 것도 쫓겨난 선황의 어리석은 후궁 중 하나가 사주했을 게 뻔한지라 뒤를 캘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대는 잘 하고 있다.”

현성은 삐지고 우울한 기조를 품으로 보듬어 안았다. 달콤한 향기가 체온에 녹아 흐르듯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현성은 몽롱한 기분이 되어 기조의 목덜미를 살짝 이로 긁었다.

“너무 잘 하지 않아도 돼.”

시궁창 같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조를 만나고 난 뒤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시궁창과 다른 곳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조정에서 전쟁 같은 신경전을 벌이고 돌아왔을 때 기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성은 살아갈 힘을 얻었다.

기조가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현성의 마주 끌어안았다. 기조는 옷 속으로 파고드는 현성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대는 난폭한 게 매력이다.”

“…난폭하다뇨?”

“예전에도 그랬지. 지형을 살펴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산을 깎으며 쏟아지는 격류 같았다. 그런 주제에 자신은 거칠지 않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잔잔한 표정을 지었지. 모르면 되었다.”

질렸다는 듯 혀를 차는 현성의 모습에 기조는 기가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 기조가 아는 이들 중 가장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 바로 현성이었다. 그런 이에게 난폭하다는 소리를 듣자 억울함에 화가 치밀었다.

“제가 난폭한 강물이면, 폐하께선 겉모습에 속아 휩쓸린 불쌍한 피해자입니까?”

“그야 그렇지. 누가 널 무공의 고수라 생각하겠느냐? 설령 고수라 해도 그렇게 아무나 내던지는 줄 아느냐? 상대의 신분과 나이를 보지 않고 움직이니 난폭하달 수밖에.”

십 년도 전의 일로 투덜대는 현성의 뒤끝에 기조는 말 그대로 경악했다. 생각해보면 선황도 참 뒤끝이 긴 사람이었다. 씨 도둑질은 못 한다고 현성까지 이런 걸 보니 아마 두 사람의 부황도 아주 뒤끝이 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지금 제가 단순하다고 돌려 욕을 하시는 건가요?”

날카롭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현성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피부를 탐욕스럽게 매만지던 손이 옷 속에서 그대로 굳었다. 기조는 안쪽으로 파고든 현성의 손을 대뜸 내치며 몸을 일으켰다. 향긋하고 따스하던 것이 갑자기 북풍한설처럼 차갑고 매서워졌다. 현성은 사기라도 당한 듯한 기분으로 기조를 쳐다보았다.

“기조?”

“난폭하다니. 제가 폐하를 연무장 바닥에 내던진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계신 겁니까?”

“뭐? 아니,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폐하께서 진지하게 상대해달라 하셔서 내던졌을 뿐인데 설마 지금까지 앙심을 품고 계실 줄이야. 다른 이에게 망신당하지 마시라고 일부러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 때렸는데.”

세상 억울하다는 듯 일그러진 기조의 목소리에 현성은 가슴 밑을 슬쩍 어루만졌다. 어릴 적의 자신이 좀 귀찮을 정도로 기조에게 달라붙어 대련을 졸라대기는 했다. 하지만 대뜸 명치를 주먹으로 치기에 귀찮아서 패 죽이려는 줄 알았더니 나름 생각해 준 것이었다는 말에 감회가 치솟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명치만 있는 것도 아니고, 팔, 다리, 등, 어깨, 막말로 보이는 곳보다 안 보이는 곳이 더 많은데 하필 명치를 골라 쳤다고?”

“팔다리를 쳤다가 잘못해서 부러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옷자락이 언제 밀려 올라갈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니 최대한 가운데를 때려 엎어야지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게 죽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듭니다. 알 만큼 아시는 분께서 왜 이러십니까?”

“보통 죽이려고 치는 부위잖아!”

“어느 정도로 쳐야 죽는지 가장 잘 아는 게 접니다! 제가 그 정도도 조절 못 할까 봐서요?!”

현성은 울분이 치솟아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기조가 음인으로 발현하지만 않았어도 연무장에서 손속을 나눌 터인데, 이제는 영영 그른 일이 되고 말았다. 발현하기 전에 승부를 뒤집지 못했으니 평생 이 울분을 곱씹게 되었다.

“…이제 와 대련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환장하겠군.”

지금의 기조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건 자신의 형이 기조에게 저지른 짓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낼 터였다. 아무리 기조의 기술이 좋아도 절대적인 힘의 차이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성의 울컥한 목소리에 기조가 샐쭉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제가 음인으로 발현하지만 않았어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려 드렸을 터인데요.”

“뭐, 뭐? 허…! 허어!”

“마상에서의 전투라면 제가 지겠지만 평지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지신이 있습니다.”

“그게 대체 누가 할 소린데?! 짐이 십 년 동안 놀고먹은 줄 아느냐? 네가 화전을 일구는 동안 짐은 전쟁터에서 자라야 했다.”

애틋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친왕이 누군가에게 진 것은 기조가 유일했다. 반면 기조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다. 음인으로 발현하면서 힘과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자들을 모조리 도륙 내어 묻어버린 것이다.

“아주 아쉬우시겠어요? 제가 양인으로 발현했으면 아주 대등한 싸움이 되었을 터인데.”

팔짱을 낀 기조가 차가운 눈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십여 년 전 기조가 현성을 이길 때마다 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불쾌한 가정을 떠올린 현성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양인으로 발현한 기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만 짜증이 났다.

“그거야 붙어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지. …아마 짐이 이겼을 것이다.”

기조의 차가운 눈동자에 비웃음이 더해졌다. 참으로 가당찮다는 표정이 사람의 배알을 꼬이게 했다.

“기억을 되찾은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군.”

“그렇습니까? 전 아주 좋은데요.”

기억을 되찾기 전의 기조는 한 떨기 들꽃처럼 가련하고 외로웠는데, 지금은 바위에 박혀 자라는 풍란(風蘭)이 연상되었다. 아름답고 향기롭긴 마찬가지였으나 절벽에 피어난 풍란을 손에 넣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기억을 찾지 못했다면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갑작스런 기습에 현성은 숨이 끊어지는 듯한 기분으로 기조를 쳐다보았다. 기조는 오래전 그러했듯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떠나 그에게로 영영 돌아갔겠죠.”

기조의 말을 들은 현성이 코웃음 쳤다.

“짐이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온 그 아침이 오기 전까지 기조는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배신감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친왕과 함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는 그를 사랑하도록 길들어 있었습니다. 살수였을 때 저와 비슷한 자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면 헤어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수많은 살수행 중에서도 그 일은 특히나 기억에 남아 있었다.

* * *

자신의 배우자를 죽여달라는 의뢰는 제법 흔한 의뢰였지만 돈이 안 됐다. 바람이 나서 거추장스러운 배우자를 치워버리고 싶을 뿐인 의뢰인은 살수를 고용하는데 큰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부금액을 들은 의뢰인들은 살수를 고용하는 대신 스스로 배우자를 처리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날 암살단을 찾아온 여자는 조금 달랐다. 의뢰비를 듣자마자 여자는 돈을 꺼내 내밀었다. 오랫동안 저축한 것인지 여러 종류의 돈이 섞여 있는 주머니였다.

“딸아이의 지참금입니다.”

분홍빛의 옷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였다. 늦둥이를 본 게 아니라면 슬슬 혼인할 나이의 자식들이 있을 법한 연배였다.

“열흘 전에 죽었는데 상복도 입지 못하게 하더군요. 칙칙한 색 따위 보고 싶지 않다나? 자기가 죽여놓고선 딸아이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었다는 듯이 구니 어쩌겠어요? 이렇게 딸아이 돈으로 곁에 보내 줘야지.”

쇠가 갈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른 몸이 들썩일 때마다 옷자락 사이로 시커먼 멍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옷소매를 계속 잡아당겼다.

“사랑하기 때문에 훈육도 엄하게 하는 거라고 남편이 말했어요. 딸아이가 함께 도망치자 그랬는데 괜찮을 거라고…. 제가 괜찮을 거라고 그러는 바람에.”

“남편이 딸을 죽인 게 확실하다면 관아에 고해도 될 터인데?”

“판결을 내리는 자가 남편의 친척입니다. 딸아이는 사고로 죽은 것이니 더 볼 것도 없다며 시신을 화장터로 보내버렸어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판관이 친척이면 뒤처리가 귀찮으니 사고사로 꾸며야겠군.”

접수를 맡은 자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주판을 튕겼다.

“성격이 좀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잘해줄 땐 정말로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데….”

딸이 죽었는데 그 어미에게 상복도 입지 못하게 하는 아비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돈을 받아 무게를 재던 접수원이 의례적으로 물었다.

“그럼 고통스럽지 않게 죽이길 원하시오?”

“아니요.”

의뢰인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으로 저울 위의 지참금을 바라보았다. 동전 짤랑거리는 소리가 방울처럼 계속 울렸다.

“…저는 그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살하길 원합니다.”

장기간의 고문은 힘들다는 설명과 함께 추가금이 요구되었다. 여자는 곧바로 자신의 패물을 벗어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원한의 무게나 다름없는 그 저울의 눈금은 곧바로 장부에 기입 되었다.

일주일 뒤, 피부가 모조리 타버린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 * *

“돈을 아낌없이 쓰는 건 대부분 원한에 찬 인간입니다.”

가족을 잃고 복수를 하려는 사람. 바람 난 배우자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떠는 이. 부당한 일을 당하여 누명을 쓴 자.

“자신을 학대하는 배우자를 죽여달란 의뢰는 거의 들어오지 않습니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거나 광란에 빠져 살인을 저지르지요. 대부분은 운이 없는 어느 날, 맞아 죽습니다.”

기조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감쌌다.

“저도 그렇게 됐을 겁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황제의 침전에서 살아 나가지 못하는 날이 곧 오리란 걸 알고 있었죠.”

황제에게 얻어맞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폭력은 강도를 더해갔다. 기조가 계속 살아있는 것을 보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한 황제가 자제력을 점점 잃은 것이다.

“죽여줄까?”

현성이 기조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달콤한 목소리가 짙은 살의에 젖어 흐르는 것이 아름다웠다. 친형제를 죽여주겠다 말하는 목소리가 음악처럼 감미로웠다. 기조는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처음에는 짝사랑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첫날밤부터 심한 꼴을 당했지만 어차피 자신의 목숨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그의 손에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가 아닌가? 그가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것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다만.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착각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그의 화풀이 인형이면 되었다. 질척한 마음이 미련처럼 바뀌도록 놔두지 말고 진즉에 끊었어야 했다.

“불에 태우는 것은 사고사로 위장하기도 좋고 고통스럽기도 하지요. 마침 딸도 죽은 상황에 부인도 한편이니 쉬운 일이었습니다. 남자의 껍질을 태우기 위해 작업실로 끌고 왔을 때 부부가 대면했지요.”

겁에 질려 덜덜 떨던 남자가 부인을 보자마자 눈빛을 바꾸었다. 비 맞은 개처럼 초라하던 남자였는데 갑자기 구름을 찢어발기는 용이라도 된 것처럼 노호성을 내질렀다.

‘이 개 같은 년! 딸은 네년이 죽인 것이다! 네가 도망치려고 해서 그년이 대신 죽은 거다! 몇 번이고 말했잖아! 떠나려고 하면 다 죽여버릴 거라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았지?! 네가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부인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이번엔 비루먹는 개처럼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랑하오, 부인! 제발 이러지 마시게!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감히 떠나려고 할 수가 있어? 딸이 죽은 건 너 때문이야!! 네년을 내게서 빼앗으려 해서! 악귀가 되어서라도 따라다닐 것이다!’

‘유화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그랬어. 넌 그냥 손쉽게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할 뿐이야.’

부인의 목소리는 메마르고 차분했다.

‘똑똑한 아이인데 네가 걔를 죽였지. 그래. 네 말대로 나도 책임이 있어. 그래서 지금 그 책임을 지려고 하는 거야. 넌 부모도 아니야.’

‘유화 그 개 같은 딸년이 뭘 안다고!’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하는 이를 그렇게 때리지 않는다고 울었어. 도망치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고 애원했지.’

남자의 몸 위로 기름이 부어졌다. 죽음의 공포에 발광하는 남자의 모습에선 그 어떤 인간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유화의 말들을 유언으로 만들었어. 이게 그 아이의 유언이야. 이게 그 아이의 유언이라고! 아버지가 우릴 죽이기 전에 도망치자는 게 그 아이의 마지막 말이 되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어?!’

불타오르는 남자 앞에서 그녀는 눈물을 땅에 뿌렸다.

“껍데기만 태운 몸을 의뢰인의 집으로 옮기고 부엌에 기름과 물을 부어 사건을 위장했지요. 남자는 살아 있었지만 뜨거운 연기로 폐와 목이 상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친척이라던 판관은 딸이 죽었을 때처럼 이 또한 사고라고 재빠르게 덮더군요. 이상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부인이 죽인 것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지요.”

기억을 되찾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남자와 황제의 뭐가 다른가? 본 적도 없는 유화라는 아이가 내게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그를 부정할 때 죄책감을 느끼겠지만, 그를 벗어나기 위해선 매몰차게 굴어야 했다.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어도 뻔뻔하게 무시하며 전부 상대 탓으로 몰아붙여야 했다.

악당이 되겠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대의 마음에 가책을 심어 조종하려는 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자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제가 역겨운가요?”

“갑자기 무슨 소리지?”

“저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정에 죽여야 할 자가 산더미인데 네가 이리 폐업을 하였으니 내가 누굴 믿고 일을 맡기겠느냐?”

기조의 얼굴이 멍청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방현성은 단순하고 난폭한 자신의 짝을 조심스레 품 안으로 보듬어 안았다. 울음이 차올라 떨리는 어깨가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사랑한다. 기조.”

“……폐하.”

“네가 손쉽게 힘을 과시할만한 상대가 필요해서 내 명치를 친 거라 해도,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좋은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때리는 자는 없다는 얘기가 특히나 감동적이군.”

“…폐하. 잠깐.”

“사랑한다.”

“…….”

“사랑해.”

“…….”

뒤끝이 너무 긴 것 아니냐는 기조의 항의를 현성이 입술째 집어삼켰다. 바둥거리는 팔을 잡고 침상으로 밀어붙이자 균형을 잃은 몸이 침상 위로 쓰러졌다.

비단 구겨지는 소리에 살이 비벼지는 소리가 섞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음란해졌다. 방금 전까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 기조는 혼란스러운 흐름에 맥없이 휘둘렸다.

현성과 함께 한 첫 희락기에서 기조가 임신했기 때문에 두 번째 희락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성의 손버릇이 심히 점잖은 편은 아니었기에 임신 중에도, 후에도 종종 잠자리를 가졌으나 오늘은 왠지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희락기는 아니었으나 체향도 평소보다 짙게 흘러나왔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은 몸의 균형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도 했다. 희락기가 아니어도 아이는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겁이 확 치밀었다.

“자, 잠깐만요. 잠깐.”

“옷이 너무 겹겹이야.”

연검이 감겨 있는 혁대가 먼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만한 위치로 날려버린 듯 보이는 건 착각일 것이다. 은실로 수를 놓은 자주색 포가 벗겨져 침대 옆에 구겨졌다. 부드러운 산토끼 털로 안감을 댄 조끼가 팔꿈치 부근에 걸려서 흔들거렸다.

가슴의 깃을 들추고 여밈을 푸는 현성의 손끝이 거침없었다. 누워서 자신의 어깨를 밀쳐내는 사람을 제압하고 이렇게까지 쉽게 옷을 벗길 수 있다니 상당한 재주였다.

“아. 읏!”

가슴의 맨살이 드러나자마자 단단한 손끝이 유두를 잡아 비볐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오갔다. 길게 늘어지는 은선을 현성이 혀끝으로 핥았다. 거친 숨을 내쉬며 흐드러진 기조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현성의 얼굴에 비뚤어진 웃음이 걸렸다.

“예전에 꿈 얘기를 해 줬을 때, 아이가 분명 세 명이었지?”

“희, 희락기도 아니고. 싫습니다.”

유두 끝을 할짝거리는 혀의 질척한 감촉에 허리가 뒤로 휙 휘었다. 유륜 전체를 힘주어 빨다가 유두 끝을 손끝으로 비비며 집요하게 괴롭혔다. 부풀어오른 젖꼭지가 바르르 떨리며 흰 액체에 젖었다.

“잘 안 빨려.”

현성의 불만스런 표정에 기조의 이성이 끊겼다.

“추, 추잡스럽게 무슨 짓입니까?!”

“남자 음인은 젖이 금세 끊긴다고 해서 누릴 수 있을 때 누리고 싶었거늘.”

연검이 아니라 그냥 혁대라도 있었다면 자신의 가슴에 붙어있는 이 추접스런 남자를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현성은 무릎을 세워 들이 찍으려는 기조의 허벅지를 옆구리에 붙이며 비실비실 웃었다.

“다른 곳에서는 다 나가떨어져도 침대 위에서만은 안 되지.”

“아, 아앗!”

“게다가 그대도 느끼잖아? 기분 좋지?”

출산의 여파에서 이제야 겨우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찰나였다. 가슴에서 쥐어짠 모유가 빨리자 가슴 전체가 저릿저릿 울려댔다. 아이가 빨 때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는데 현성이 손을 대자 지독히도 음란한 행동이 되었다.

“아. 이, 이상…!”

“달아.”

향긋한 것을 몇 방울 빨아먹었을 뿐인데 입안이 향긋한 달콤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현성은 몽롱한 표정으로 홀린 듯 기조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폐, 폐하. 하지 마세요. 폐하.”

가슴 안쪽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기조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런 목소리로 폐하라고 부르면 꼭 형을 찾는 것 같아. 현성이라고 불러봐.”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대도 내가 형이라고 하면 기분이 이상할 것 아니야?”

얼토당토않은 비유에 기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현성은 뭔가를 깨달은 듯 입을 딱 다물었다.

“이거 의외로, 꽤.”

“…폐하?”

불안감에 일렁이는 기조의 두 뺨을 잡고 현성이 정성스레 입맞춤했다. 정중할 정도로 부드러운 입맞춤에 당황하는 기조에게 현성이 악마 같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기조 형.”

“무…!”

충격으로 입을 벌린 기조의 얼굴에 현성이 만족스레 미소지었다.

“기조 형. 다리 좀 벌려봐, 형.”

기조의 얼굴이 경악으로 새파래졌다. 이윽고 터질 듯이 붉어지는 기조의 얼굴을 현성이 그야말로 배부른 짐승처럼 바라보았다.

“어서. 형이 다리를 벌려주지 않으면 가슴으로 갈 때까지 빨아버릴 테니까.”

“무, 무슨. 지금 무슨 말을….”

“기조 형.”

기조는 정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꿈을 꾸고 있거나 굉장히 아파서 고열이라도 올라 헛것을 듣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위에 올라타서는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현성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형, 형, 불러대는 것에 그야말로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기조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꽉 감아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지만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입술 벌려 봐. 형. 응? 기조 형. 들리지 않는다면 계속 형이라고 부를 거니까.”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고 해서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분명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민망함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형.”

친왕이 매우 은근한 목소리로 기조를 불러댔다.

“기조 형.”

“으으.”

기조는 기억을 찾고 나서도 한동안 현성이 불편했다. 기억을 찾기 전에는 변덕스러운 상전이었고 기억을 찾은 후에는 그 어린애와 잠자리를 가졌구나 싶어 마음이 켕겼기 때문이었다. 몸도 커다랗게 자라고 인상도 많이 바뀌었지만, 가끔 어릴 때의 모습이 현성의 얼굴에 나타날 때면 양심이 매우 찔렸다.

하지만 이제 아이까지 낳고 나니 좀 만만한 것도 사실이라 적당히 부부 같은 모습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하룻밤 정사라도 나누고 나면 대체 어디가 애인가 싶어 성질이 나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며 한껏 상념에 젖어 있는 와중, 이런 자신의 나이를 드러내자 죄책감과 민망함으로 정신이 어지러웠다.

“하지 마! 하지, 하지 마십시오!”

“형이 좋아. 아주 오래전부터 좋았어. 그러니까 동생이 잘 볼 수 있도록 다리 좀 더 벌려주시지요.”

막상 현성이 어린애일 때에는 자신을 호위병, 네놈, 너 이 자식 등으로 불렀다. 슬프게도 기조는 형, 형, 거리는 현성의 목소리에 매우 동하고 말았다. 이러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잔뜩 빨린 가슴은 간지러웠고 아랫배는 저릿하여 애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형. 구멍이 축축합니다. 역시 어린 게 좋으신 거지요?”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제발.”

“그래, 그럼. 박는다, 형.”

현성도 한계였다.

“아! 아앗!”

커다란 성기가 아랫도리로 밀고 들어갔다. 흥분으로 흐물거리는 내벽을 벌리며 끝도 없이 들어오는 커다란 살덩이에 기조의 허리가 바르르 떨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탓인지 흉흉한 성기의 생김새가 더욱 선명히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기조의 눈꼬리에 현성이 상냥히 입 맞추었다.

“현성이라고 부르면 그만둘 테니까. 응?”

형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현성이라고 부르는 게 더 기조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걸 알고 요구하는 것인지 모르고 요구하는 것인지 몰라도 아주 흉악한 요구였다. 아랫배를 가득 채우며 밀려 들어온 뜨거운 성기가 길을 내듯 느긋하게 기조의 내벽을 가르고 닫았다.

탐욕스레 벌름거리는 내벽이 갈급하게 현성의 성기를 씹어댔다.

“아! 아으! 흑!”

“동생의 좆 맛이 좋습니까 형님? 완전. 장난 아냐.”

“혀, 현성! 현성아. 그만해. 그, 그만하세요! 아, 아으.”

“…….”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기조가 정신없이 현성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자극이 너무 과도하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현성이 시키는 대로 이름을 불렀더니 왠지 몸 안의 물건이 더 커지는 것에 위기감이 치솟았다.

“아! 아아!”

어딘가 한군데가 끊어진 것 같은 얼굴을 한 현성이 허리를 박아댔다. 느긋하니 움직이며 약을 올리던 성기가 내벽을 콱콱 찍어대며 느끼는 곳을 죄다 긁어내렸다. 시야가 번쩍거리며 짤막하게 끊어졌다. 현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허리를 치대자 기조는 감히 꼼짝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숨만 턱턱 내쉬었다.

커다란 성기는 뜨겁고 거칠었다. 부드러운 표피에 쌓여 있는데도 마치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처럼 단단한 성기가 내벽을 짓이기고 두드렸다. 숨이 모자라 헐떡이는 입가로 침이 주륵 흘러내렸다. 현성은 성기가 하나인 게 억울하다는 듯 긴 손가락으로 기조의 벌어진 입안을 헤집었다.

“흐으으으-!”

평소보다 빠르게 찾아온 절정에 기조의 허리가 뒤로 휘었다. 하지만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절정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현성은 짐승처럼 울며 뒤틀리는 기조의 몸에 쉬지 않고 성기를 박아 넣었다. 어떻게든 다리를 오므리려는 시도는 현성의 몸통에 막혀 좌절되었다. 잔뜩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흉흉한 성기가 처박혔다.

“아! 제발, 그만…! 아아!”

쾌감을 이기지 못한 기조가 침상의 이불을 잡아 뜯으며 버둥거렸다.

“아직 한 번도 못 갔어. 참아봐. 큭.”

뒤로 한껏 젖혀진 목이 바르작대며 이불을 쓸었다. 벌써 세 번째 절정인데도 내벽을 쑤시는 움직임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타는듯한 충격에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쉬지 않고 계속되는 절정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현성은 기조의 늘씬한 다리를 개구리처럼 잡아 벌리고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계속 쳐댔다.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거리는 기조의 내벽이 박혀 들어오는 성기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엇박자로 꿈틀댔다.

허리를 쳐댈 때마다 애액이 철벅거렸다. 손도 대지 않은 기조의 성기가 정액을 줄줄 흘렸다. 장난기가 솟아 한 손으로 기조의 성기를 움켜쥐자 흐느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아, 최고야. 기조 형.”

늘씬하고 잘 짜여진 기조의 몸이 땀과 정액을 잔뜩 머금고 꿈틀거렸다. 현성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성기를 머금은 하얀 몸을 감상했다. 그도 슬슬 끝이 오고 있었다. 희락기가 아닌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길고 격렬한 정사였다.

몸 안쪽에 잔뜩 싸버릴 생각으로 엉덩이를 잡아 올리는 순간, 기조의 유두에서 흰 액체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땀에 젖은 피부 위를 흐르며 점점 흰색을 잃어가는 모유의 흐름이 현성의 시선을 완벽하게 강탈했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현성은 곤란한 기분이 되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기조가 정말로 화낼 것이다. 실은 지금도 좀 위험했다. 형수라고 놀리는 재미를 잃어 허전하던 와중에 형이라고 부르는 재미를 알아버려 좀 심하게 해버리고 말았다.

현성은 아쉬움에 혀를 차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래도 각방만은 면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찰나, 달콤한 우유 냄새에 이성이 끊어졌다.

* * *

능력 좋은 연하의 남편은 과거 복잡한 아내가 진심으로 후려치는 주먹에 아침을 맞이했다.

하룻밤 새 초췌해진 기조의 얼굴에 억울함 가득한 눈물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나쁜 놈이라고 욕하며 가슴을 후려치는 연상의 비(妃)는 주먹이 제법 아팠다.

힘 조절엔 자신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현성의 명치를 치는 기조의 팔이 간밤의 혹사로 덜덜 떨렸다. 현성은 도망치려다 말고 기조의 시퍼렇게 멍든 가슴과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만든 것이라지만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난 더 맞아야겠다.’

때리는 건 사랑이 아니라지만 지금 안 맞고 도망쳤다간 절연을 당할 것 같았다. 기조가 담장 너머로 도망치면 찾아서 데려올 자신이 별로 없었다. 현성은 긴 한숨을 몰래 삼키며 사랑하는 이의 주먹에 명치를 내주었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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