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납
황궁의 외진 곳에 위치한 사당은 놀랄 정도로 축축했다.
열 평 정도나 될까 싶은 작은 사당은 늪의 중앙에 솟아 있었다. 나무가 뿌리내릴 만한 토질이 아님에도 하얀 버드나무 세 그루가 사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길고 하얀 잎들이 마치 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답게 흔들렸다. 초봄에 불과한데도 늪지 주변은 떨어진 버드나무 잎으로 빼곡했다.
늪 위를 가로지른 검은 징검돌을 건너면 곧바로 사당에 들어설 수 있었다. 사당의 붉은 기둥과 벽 전체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비가 와도 그 물방울들은 흘러내리지 않았고 땡볕이 내리쫴도 말라붙지 않았다.
황궁의 장엄한 화려함과 비교해볼 때 사당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에는 포석조차 놓지 않아 맨땅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늪지에 지어진 사당이니 그 바닥 또한 늪이었으나 마른 땅을 걷는 듯했다.
제단과 명패 대신 사당 안에는 얕은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커다란 솥을 하나 올리면 딱 맞을 듯한 크기의 둥근 구덩이였다.
“토룡과 계약을 맺은 자리다.”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소맷자락에서 명패를 꺼냈다. 사당 밖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명패였다. 손바닥을 절반 정도 가릴 정도의 크기에 두께는 손가락보다 조금 얇았다. 단단하고 윤기가 있어 나무껍질이라기보단 상아나 옥을 합쳐놓은 듯 반들거렸다. 명패에는 이제 돌을 지난 황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황제는 무심한 손길로 명패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탁. 하는 소리가 습기 찬 사당 안을 울렸다. 누군가가 손을 뻗어 명패를 잡아채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물이 차오르듯 자주색의 지렁이들이 구덩이에 차올랐다. 얕은 구덩이에 가득 차오른 지렁이들은 수천 마리 같기도, 그저 길고 긴 한 마리 같기도 했다.
지렁이는 우아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구덩이를 가득 채웠다. 나무가 뿌리를 뻗어 대지를 파고들 듯 길고 부드러운 것들이 몰려들어 황자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저들 무리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구덩이를 가득 채웠던 토룡들은 차올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흩어졌다. 그 역시 빠르지만 우아하도록 느리고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팔다리 없는 벌레들이 몰려있는 것이니 역겹고 기이할 법도 하건만, 사특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새까맣게 비어버린 구덩이를 바라보던 황제가 그의 기조의 팔을 부드럽게 감쌌다.
“끝났다.”
“이건….”
“토룡들이 명패를 뱉어내지 않고 가지고 갔으니 잘된 것이다.”
“그렇습니까.”
땅에 고하는 것이 끝났으니 이제 하늘에 고하기만 하면 된다고 황제는 말해주었다.
향도 피우지 않고 특이한 예를 취하지도 않았다. 단지 이름이 쓰인 하얀 나무껍질을 던져 넣었을 뿐인데 구덩이에 무언가가 들어찼다. 아이가 백일이 되었으니 이름을 땅에 묻어 황족의 격을 부여하겠노라 하는 말에 그렇습니까, 대꾸한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기조는 이곳에 황제와 함께 와 있었다.
텅 비어버린 구덩이를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는 기조를 끌어안고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방 가의 기원을 설명해주었다.
“본디 세상은 아주 차가운 것이라 했다. 얼음 같은 불꽃이 타오르고 모든 것을 얼리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지. 인간과 요괴 모두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이 흐르던 중, 불길로 이루어진 한 마리의 토룡이 나타나 얼어붙은 땅을 파헤쳤다.”
그 토룡은 몸이 아주 뜨거웠기에 차가운 땅을 기꺼운 마음으로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가 지나간 곳의 얼음은 녹아 강이 되었고 땅은 부드러워져 생명을 틔었다. 운이 좋아 육신이 녹은 이들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차가운 세상을 돌아다니던 토룡은 어느 날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의 몸 위에 얼음과 먼지들이 다시 쌓이고, 그것이 녹아 대지가 될 만큼 깊고 깊은 잠이었다. 깨어난 생명들이 따뜻한 토룡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가 삶을 누릴 정도로 오랜 잠이었다.
잠든 토룡이 가끔씩 몸을 뒤척일 때마다 재앙이 일어났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치솟았다. 기껏 쌓아 올린 문명이 한순간에 무너져 사라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토룡이 완전히 깨어나 움직일까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의 몸 위를 떠날 수 없었다. 토룡 밖의 세상은 여전히 차고 단단하여 그 어떤 것도 얼려버리는 탓이었다.
토룡은 꿈을 꾸었다.
그의 꿈은 어둡고 축축했다. 앞을 가로막는 단단한 것들을 부수어 부드럽게 만들고, 향기 좋고 서늘한 곳에 똬리 트는 꿈이 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 밝은 것이 파고들었다.
토룡은 자신의 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한 꿈을 꾸었다. 하염없이 작은 것들이 저들끼리 어울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껍게 느껴졌다. 그렇게 꿈을 보느라 생각보다 더 긴 잠을 자게 된 토룡은 문득 쓸쓸함을 느꼈다.
저 작은 미물들도 짝이 있는데 자신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암컷과 수컷으로도 나뉘어 있지 않았다. 짝을 지은 작은 미물들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더 작은 미물들의 모습이 심히 부럽게 느껴졌다. 토룡의 몸이 슬픔으로 들썩거렸다.
“세상이 요동치고 땅은 뒤틀려 시뻘건 용암을 토해내었다. 제대로 녹지 않은 삿된 것들이 틈을 타 땅 위로 기어올랐다. 토룡이 애틋하고 아름답다 생각했던 것들이 모조리 먼지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때 방 씨가 토룡에게 말을 걸었다.”
“…꿈속에서 말입니까?”
“땅에 구덩이를 파고 외쳤지. 신화와 같은 것이니 곧이곧대로 생각할 순 없지만.”
기조는 무릎까지나 찰까 싶은 얕은 구덩이를 불신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황제는 이해한다는 듯 잘게 웃으며 기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대의 몸 중 일부를 사람의 형태로 빚어 올리면 내가 당신의 짝이 되겠소. 그 말을 들은 토룡은 자신의 일부를 사람으로 만들어도 암수의 구분이 없으니 너와는 짝을 이룰 수 없다 답했다. 방 씨는 그 말에 별거 아니라는 듯 그럼 나도 그리 되겠소, 하였다.”
음양을 흐트러뜨려 암컷의 몸에 양의 기운이 깃들고 수컷의 몸에 음의 기운이 깃들게 하니 두 가지의 성질이 한 몸에 갖추어졌다. 방 씨는 약조대로 토룡의 분신과 짝을 맺고 자식을 생산하였다. 그 자식들은 토룡과 달라 각자의 성별을 갖고 있었으나 음양의 기운이 혼탁하여 음인과 양인으로 뒤섞여 발현하였다.
“이름을 토납하는 것은 여기 당신의 핏줄들이 있으니 뒤척이지 말라 하는 것이다.”
계속 꿈을 꾸라고. 이것은 좋은 꿈이 맞으니 슬퍼하지 말고 계속 꾸라고. 깨어나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니 애틋하고 가련하게 여겨달라고.
그리하여 황족을 해치는 죄만은 황제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 배 속에 잠시 머물렀던 그것들은 이름도 없었는데요.”
“글쎄. 꿈은 이어져 있으니……. 어쩌면 태몽을 보았을지도.”
기조의 얼굴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토룡은 지렁이를 뜻함이지만 실은 지렁이의 성질이 토룡을 닮았기 때문에 그리 부르게 된 것이었다. 토룡의 크기는 천하를 지탱할 만치 크고 그 빛은 자주색의 불길이었다. 비늘도 깃도 없는 맨몸이 움직일 때면 불길이 흘러가는 듯하였다. 가끔 가늘고 고운 섬모가 돋아나는데 토룡의 뜨거운 기운이 튀어나와 허공을 물들이는 것이었다.
차가운 것을 녹이고 단단한 것을 부수어 부드럽게 만든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변화가 생겨나고 생명이 피어났으나 그는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지금 움직임을 멈추고 깊은 잠에 빠진 것 또한 그의 마음이 내키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토룡이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만물은 뒤집혀 얼음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작은 미물의 태몽에도 신경 쓰는 자이니 분명 책임감 있고 자비로운 성격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를 믿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천하를 좋은 꿈처럼 만들자고 황제가 기조에게 속삭였다. 기조는 자신이 꾸었던 좋은 꿈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악몽이 되었지만 지금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이와의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건 제법 행복과 닮아있었다.
* * *
사당으로 향하는 길은 협소하여 삿된 마음을 품은 자들이 매복하기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극양인의 기운을 타고난 황제가 패검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덤빌 정도로 무모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검이라는 것은 무겁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황궁 안에서 황제가 검을 차고 다닌다는 것은 사람들을 믿지 못한다는 신뢰와 연관되는 것이기에 저어되는 일이었다. 황위에 오른 방현성은 개소리라 일축했다.
선황제가 물러간 외궁은 오가는 길이 험했으나 경관이 좋고 풍족한 곳에 위치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방어하기에 좋은 천혜의 요새였다. 비축한 식량도 많아 몇 년이고 문을 닫아건 채 버틸 수도 있었다. 데리고 간 비빈들 중엔 고관대작의 딸들이 섞여 있었으므로 제법 괜찮은 인질이기도 했다.
“선위한 주제에 마치 역도에게 쫓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굴지 않느냐. 평소에도 이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사였다면 좋았을 것을.”
“…선황께선 현명하고 좋은 통치자라고 모두가 떠받들지 않았습니까?”
“그는 좋은 모범생이지.”
현성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끄덕이는 것도 내젓는 것도 아닌 모습이 참으로 미심쩍었다.
“형님께선 예를 잘 알고 해야 할 일들에 통달했지만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모친의 수렴청정과 귀족들의 방해 때문에 천하를 직시하지 못한 탓이다.”
선황제는 각 절기에 해야 할 일을 빠뜨리지 않았고 보수해야 할 것을 미루지 않았다. 일을 게을리하거나 건성으로 처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축조하거나 법을 바꾸고 시행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기에 방국은 낡은 체제 속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폐단은 점점 깊어져 악습이 되어갔다. 황제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변경일수록 그 피해가 심각해 사람들의 생계가 위협받았다. 그러다가 결국엔 타국의 침략까지 허용하게 된 것이다.
“형님께서 상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것은 산적으로 분한 암살단을 소탕한 일 하나뿐이다. 친정을 나선다 하기에 잠깐 기대했으나 결국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
“그 암살단은….”
“그래.”
현성은 뒷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길을 걸었다. 하얀 돌들이 발에 밟히며 자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기조는 우울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선황이 없애버린 그 암살단은 기조가 속해있던 마을이었다.
때는 가을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화려한 경치가 흔들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풍경이 장관이었다. 사당으로 향하는 늪지의 길이 끝나자 화려하게 물든 단풍길이 나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버티지 못한 단풍잎들이 바닥으로 춤을 추듯 떨어졌다.
친왕은 유혈 없이 옥좌에 올랐으나 정국은 어지러웠다. 사가로 돌아가거나 출가하지 않은 비빈들이 여전히 선황의 옆에 있었고 선황은 그들을 이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천하에 드리워진 재앙이 아직 그치지 않았음에도 귀족들은 강건한 극양인의 황제보다는 혼인으로 엮인 선황제를 더 그리워했다.
“그리워하는 것은 괜찮지만, 일을 않는 것은 곤란하지. 천하가 어지러운 것이 비단 천재지변 때문만은 아님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머리들이 잔뜩이다, 즉시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게 하고 싶어도 대체할 인간이 많지 않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천재지변 때문이 아닌가? 기조는 의문에 싸여 현성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그 기억 속에 있는 거라곤 사람 죽이는 방법과 잠입을 위해 배운 잡기들뿐이었다. 정치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조용히 입을 다문 기조의 모습에 현성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바뀌는데 법은 바뀌지를 않는다. 문제가 없을 수 없지. 형님께선 법도에 따라 부서진 것을 수리하고 절기에 따른 의무를 꾸준히 하였으니 유능하단 말을 듣는 것이다. 그조차 하지 않은 황제들이 과거 잔뜩 있었으니까. 전쟁이 어째서 벌어졌겠는가? 방국 밖의 세계는 변화하고 있다. 기후도 예전과 똑같지 않아. 기술이 발전하여 작물의 생산량이 바뀌고 새로운 도구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몇백 년이나 전의 법을 그들에게 강요하니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동쪽의 전쟁은 조공의 내용과 거래품목의 차이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작물의 생산량이 늘어남에도 새로운 보를 짓지 않고 보수만을 계속했다. 무기의 모양이 바뀌었는데도 성벽의 모양을 바꾸지 않았다. 험악한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방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나태하고 오만하게 보였을지 생각하면 머리가 다 아파 왔다.
방국 밖의 무기를 개량하여 생산하고 성벽의 모습을 새로이 바꾸어 축조함으로써 당시 친왕이었던 현성은 동쪽의 세력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황제가 다스리는 옥토에 편입되길 원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자주성을 놓고 편입되기엔 방국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너무나 낡아 있었다.
기조는 법에 묶여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그런 일에 대해선 잘 몰랐다. 화전을 일굴 때 새로이 보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말에 의문을 느낀 적은 있으나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나라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비참함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기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가 된 현성은 결코 그를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았으나 이러한 기분은 제법 자주 찾아왔다. 현성이 조정에서 논의 중인 사안을 입에 올리거나 천하의 큰 그림을 말할 때마다 그랬다.
마음에 꼭 맞는 미인이 침울해지자 현성의 얼굴 또한 어두워졌다.
“왜 그러지? 몸이 안 좋은가?”
“아니요. 말씀하신 게 잘 이해되지 않아서요.”
“예를 들자면, 네 연검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애용하는 병장기의 이름이 나오자 기조의 고개가 살짝 위로 향했다.
“제 연검이요?”
“그래. 네 연검. 본래 채찍처럼 유연한 칼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연검에 대한 법도 존재하지 않지. 시중에서 사사로이 만들 수 없도록 정해진 병장기 중에 연검은 없어. 존재하지 않는 무기이니 황궁에서도 그에 대한 몸수색을 하지 않는다. 그런 물건이 비단 연검뿐이겠는가? 군에서 사용하도록 정해진 무기들은 파훼(破毁)법이 다 나와 이제 쓸모가 없을 지경이다. 방 씨가 지배하는 땅이라는 이점이 없었다면 진즉 나라가 멸망했을 거야.”
기조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자신의 허리띠를 만지작거렸다. 현성은 기조가 계속 연검을 차고 다녔으면 했다. 모란이 새겨진 아름다운 옥대 사이로 애용하던 은색의 검이 칭칭 감겨 있는 것이 기조의 손끝에 느껴졌다.
“내궁에 속한 이가 패검해선 안 될 터인데요.”
“패검이라니? 그건 그냥 채찍처럼 생긴 쇠 장신구다. 이상한 놈이 덤비거든 허리띠를 벗어 좀 때려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
현성이 단호한 어조로 모른 척하며 기조를 끌어안았다. 음인 치고는 작은 키도 아닌데 휘청하며 몸이 기울어졌다.
“걷기 힘듭니다, 폐하.”
“업어줄까?”
기조가 짜증 어린 얼굴로 현성을 쳐다보았다. 현성은 그 차가운 시선에 괜히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기조가 가끔씩 이렇게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움찔거렸다. 공포인가? 이제 그가 칼을 들고 덤벼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차가운 연무장에 고꾸라졌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안 그래도 형제를 동시에 꾀어낸 요부란 얘길 듣고 있는데 황제의 등에 업힌다니요.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지금보다 더 시끄러워질 순 없을 것이다. 이미 최고로 시끄럽다.”
문란한 음인 하나를 두고 형제가 다투었으며 그 탓에 옥좌의 주인이 바뀌었다 말하는 이가 많았다. 기조가 품은 아이가 황족의 씨이기는 하나 그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소문엔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현성은 기조 때문에 황제가 바뀌었다는 말만은 딱히 틀린 것도 아니지만 아이 아버지를 알 수 없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고 속으로 구시렁댔다.
옥좌에 오른 현성은 그 모든 항소와 소문들에 일침을 가했다. 즉위하자마자 기조를 화비에 봉하고 자신의 침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거주하도록 했다. 사계절의 꽃이 나부끼고 신선한 공기가 냇물처럼 흐르는 깨끗한 궁이 기조에게 주어졌다.
기조는 수월궁이라 이름 붙은, 다소 과분하고 부끄러운 이름의 현판을 흘끔 쳐다보았다.
수령 높은 단풍나무가 긴 가지를 우아하게 뻗은 가운데 커다란 못이 수련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찬바람에 시들어가는 수련의 꽃잎 사이로 커다란 물고기들이 비늘을 뽐내며 헤엄쳤다. 초가을이지만 홧홧하게 지펴진 화로 근처로 새빨간 불씨가 떠다니다 하얗게 식어 사라졌다.
기조는 현성에게 파묻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순식간에 품이 비어버리자 현성이 섭섭한 얼굴로 기조를 바라보았다.
“다 왔군.”
“네. 다 왔습니다. 바래다주어 감사합니다, 폐하.”
“쉬었다 가라고는 해주지 않는 것인가?”
“황자의 이름을 토납하였으니 할 일이 있으실 텐데요.”
매정한 말을 들은 현성이 부당함을 토로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까륵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잘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유모의 품에 안긴 채 꺄악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색의 비단 강보에 싸여 있는 아이의 이름은 방윤혁. 오늘 땅에 묻은 이름의 주인이었다. 기조는 자신을 향해 손을 버둥거리며 웃는 아이의 모습에 순간 꿈을 꾸는가 싶어 혼미해졌다. 비틀거리는 기조의 몸을 단단하고 따뜻한 팔이 끌어당겼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다정한 웃음과 간지러운 숨소리에 기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꿈에서 깨어 차가운 현실로 내쳐질 것 같았다. 이처럼 행복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 이제 눈을 뜨면 진눈깨비와 같은 것들이 다시금 그의 옷을 적실 것이다.
“기조?”
기조는 다정한 목소리에 용기 내어 두 눈을 떠보았다. 고통스런 아침 대신 달콤하고 상냥한 것들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드랍고 여린 아이의 손가락이 겁에 질린 기조의 얼굴을 쿡쿡 찔렀다.
기조는 팔을 뻗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등에는 단단하고 퉁명스런 남자가, 앞에는 말랑하고 즐거운 아이가 안겨있었다. 비틀려 어긋나던 그 모든 꿈들보다 행복한 시간이 그의 눈앞에 현실로 펼쳐져 있었다.
“……쉬었다 가세요.”
기조는 너그럽고 행복한 기분이 되어 현성을 향해 속삭였다. 단단하고 퉁명스럽던 남자는 순식간에 화색을 띠고 기조와 아이를 한꺼번에 안아 들었다.
기조는 한숨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현성의 품에 몸을 기댔다. 부끄럽고 한심하고 행복하기 그지없었다.